하나님은 왜 악어의 무시무시한 이빨을 창조하셨는가?
(Why Did God Create Such Terrible Teeth?)
by Brian Thomas, Ph.D.
악어의 이빨들로 가득한 입은 사람들에게 공포를 유발한다. 가끔씩 이 거대한 이빨들에 의해 사람의 사지가 절단되곤 했다.[1] 악어의 뒤엉켜 보이는 이빨들과 좋지 않은 평판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이 파충류를 거리낌 없이 육식동물로 분류하고 있다.[2] 하나님은 다른 동물들을 잡아먹을 목적의 이빨들을 가진 이러한 동물과 다른 유사한 생물들을 왜 창조하셨을까?
그렇다면, 성경의 기록처럼 하나님은 사랑이 풍성하시고 인자하신 분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새로운 연구는 이들 무시무시한 이빨들에 대한 오래된 창조론적 설명을 확인해주고 있었다.
2009년에 이러한 이슈에 대해서 댄 크리스웰(Dan Criswell)은 Acts & Facts 지에 글을 썼다. ”고기를 찢는 데에 사용되는 많은 육식동물의 이빨들은 또한 식물 재료들을 절단하는 데에도 사용될 수 있다.”[3] 그는 대중의 생각과는 다르게, 어떤 이빨 구조는 육식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육식은 창조주가 만드신 이빨 때문이 아니라, 죄로 인해 저주받은 동물의 행동에 기인한 것이다.
창세기 1:30절은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그러므로 성경에 따르면, 원래 창조된 악어는 식물들을 먹었다. 물론 사람을 통해 죄가 이 땅에 들어왔을 때, 모든 것들이 저주를 받았고 변해버렸다.
이제, 연구자들은 악어들이 정기적으로 식물을 먹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동물학 저널(Journal of Zoology)에 보고한, 미국 과학자들은 플로리다의 에버글레이즈 국립공원에 있는 악어들의 식습성에 대해서 연구했다.[4] 게재된 연구의 리뷰는 새롭게 관측된 발견들을 추가하고 있었는데, 악어 18종들 중 13종은 34개 과의 다른 식물들의 열매를 먹고 있었다는 것이다.
악어는 종종 육질과(fleshy fruit)를 먹는다. 일부 과일들은 먹이 동물을 는 동안 발견하여 먹게 된다.
그러나 연구 저자들에 따르면, 자주 많은 양으로 먹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4]
예를 들어 New Scientist 지에 따르면, ”지난 해 동남아시아에서 근무하는 한 연구자는 야생의 샴악어(Siamese crocodile)가 수박(watermelon)을 깨뜨려 먹는 것을 보았다고 보고했다.”[5]
이빨은 고기를 먹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식물을 먹기 위해 있었다. 하지만 이 일시적인 끔찍한 지구에서, 원래는 좋은 행동을 가지고 있던 이 동물들은 저주로 인해 하나님이 주신 이빨들을 사용하여 공포스러운 피의 살육을 저지르며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악어가 과일을 선호하는 것은 인류의 범죄 이전에 에덴동산의 상태를 반영하고 있을 수 있다.
References
1.For example, The [Charleston] Post and Courier reported in 2007 how snorkeler Bill Hedden lost his left arm to a 12-foot alligator in South Carolina. 'Man's Arm Salvaged from Alligator's Belly,' September 17.
2.Obligate carnivores are supposed to eat only meat.
3.Criswell, D. 2009. Predation Did Not Come from Evolution. Acts & Facts. 38 (3): 9.
4.Platt, S.G. et al. 2013. Frugivory and seed dispersal by crocodilians: an overlooked form of saurochory? Journal of Zoology. Published online before print, Jul 16, 2013.
5.Barras, C. Crocodiles may need their fruity five-a-day. New Scientist. Posted on newscientist.com on July 30, 2013, accessed July 31, 2013.
*참조 : 성경의 모순으로 주장되는 것들 - 송곳니
성경의 모순으로 주장되는 것들 - 흡혈
성경의 모순으로 주장되는 것들 - 생물 독
성경의 모순으로 주장되는 것들 - 병원균과 질병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article/7665/
출처 - ICR News, 2013. 8. 9.
뱀 (사탄)
(The Serpent)
뱀이 하와를 유혹한 사건의 기록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그것은 순전히 상징적인 것인가? 그리고 뱀은 누구 혹은 무엇이었나? 언젠가 나는 어느 교회 지도자와 함께 창조에 대해 토론을 하고 있을 때, 그는 내가 인류의 타락 이전에 걷기도 하고 말하기도 하는 뱀이 실제로 있었다고 믿는지를 빈정거리는 투로 물었다. 물론, 성경 기록에 따르면 말하는 뱀(serpent, snake)이 딱 하나 있었다. 그러나 에덴동산의 기록은 매우 비범한 것이어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것을 단순히 상징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 강력한 이유로 인하여, 창세기 1~11장을 실제 역사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신약에서 창세기 앞부분의 사건과 등장인물을 참고할 때는 이들이 실제 역사가 아닌 다른 것을 나타낸다는 암시가 전혀 없으며, 여기에는 하와의 유혹도 포함된다(고후 11:3; 딤전 2:13-14). 또한 우리는 인류 역사의 태동기에는 비범한 일이 많이 일어났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상과 그리고 시간 자체를 창조하신 직후이다. 더욱이,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타락한 세상뿐이다. 따라서 인류의 타락 이전에는 사물이 어떠했는지 상상하기가 힘들다.
에덴동산의 이야기는 역사적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대한 일부 기억을 지니고 있으며, 그들에게 있는 기억을 바벨 사건으로 인한 분산 이후에 후손들에게 전했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물론 그 기억은 노아의 대홍수에 관한 기억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왜곡되고 변질되었을 것이다.) 사실상 수메르인과 그리스인 같은 많은 고대인들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및 뱀이 하와를 유혹한 것을 포함하는 에덴동산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1986년 중국의 광한(Guanghan) 근처에서 놀라운 발견이 이루어짐으로써 하나의 예가 드러났다. (세속적인 계산으로) 약 2,700에서 4,700년 전에 삼성퇴(Sanxingdui) 사람들이 만든 많은 세공품이 발굴되었다. 세공품 중의 하나는 실제 크기의 청동으로 만든 과일나무였는데 높이가 약 4m였다. 그 나무에는 청동으로 만든 뱀과 사람의 손이 붙어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상세함은 이 세공품이 하와가 사탄에게 유혹받는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으며, 그 뱀과 과일은 죽음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심지어 뱀은 발을 가지고 있었다.
뱀
성경을 믿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와를 속인 것이 사탄이라고 말하는데, 그는 뱀을 점유하여 뱀을 통하여 말했었다. 발람의 당나귀 사건(민 22:22-35)은 이런 것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다른 가능성은 사탄이 실제의 동물을 통하여 말한 것이 아니라, 뱀의 모습으로 하와에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런 가능성을 논박하는 신학적 논의 중에는 납득할 만한 것이 없다. 예를 들어, ‘외계인의 침입(Alien Intrusion)’이라는 책에서 게리 베이츠(Gary Bates)가 사람을 현혹시키는 현현의 경험을 묘사한 것을 보면 그것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짐작케 해 준다.
성경의 창세기 18:1-19:29절에서처럼 천사들은 가끔 육체의 모습을 지니고 사람들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마귀가 육체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많은 기사들이 있다. 초과학을 연구하는 (비기독교인) 존 킬(John Keel)은 이렇게 썼다:
”문헌에 따르면, 사탄과 그의 마귀들은 거의 모든 형태로 그들 자신을 나타낼 수 있으며 육체적으로 천사에서부터 새빨갛게 달아오른 눈을 가진 무서운 괴물의 모습까지 모든 것을 모방할 수 있다. 이들 이야기에서는, UFO와 근사한 승무원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듯이, 이상한 물체와 실체가 체현되기도 했다가 사라지고도 하면서 벽을 통과하여 걷기도 하고, 다른 초자연적인 위업을 수행하기도 한다. 귀신학은 단지 또 다른 정신 나간 학문이 아니다 ... 그 주제와 관련하여 수천 권의 책이 쓰였고, 그들 중 많은 저자가 교육받은 목사, 과학자 및 학자들이었으며, 마귀에 관련된 사건을 잘 기록한 수많은 경우를 연구자들로부터 쉽게 얻을 수 있다.”
창세기 3:1절은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라고 말한다. 이 설명은 확실히 사탄에게 적용되는 것으로, 다른 어떤 살아있는 파충류에게 적용하기가 힘들다. 또한 하와를 유혹하는 뱀에 대해서도 그렇게 적용하기가 힘들 뿐 아니라, 15절에서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메시아에 관한 예언에 등장하는 뱀에 대해서도 그렇다. 그러나 14절에서의 저주는 사탄이 하와를 속일 때 이용했던 파충류에게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은유적인 견지에서는 그것이 사탄에게도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을 가장 잘 해석하는 것은 성경 자체이므로, 요한계시록 12:9절은 창세기의 이 부분을 이해하는 것을 도와준다 :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계 12:9)
또한 요한계시록 20:2절과 요한복음 8:44절을 보라. 사탄을 ”옛 뱀 곧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불렀음을 주목하라. 나는 창세기 3장에서 ‘뱀’은 기본적으로 사탄 자신을 나타낸다고 본다. 그 동물을 통하여 그가 말했거나, 혹은 그가 하와에게 나타났을 때 그 모습으로 가장했으므로, 사탄에 대해 그것이 적절한 명칭이다.
하나님이 뱀에게 저주를 선언하셨을 때(14절) 동물로서의 뱀이 이 저주에 포함되는 것은, 그들 자신이 악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탄에 대한 저주의 표시와 상징이기 때문이며, 이는 인류가 영원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하와의 유혹에 관한 창세기 기사는 문자적으로 역사적 현실이며, 상징주의가 섞여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전 지구적인 홍수를 결코 다시 보내지 않으리라는 그분의 약속에 대한 상징 혹은 영원히 기억할 것으로 무지개를 말씀하셨다. 무지개는 상징이다. 그러나 노아에게 무지개가 나타난 것은 실제의 사건이었으며, 따라서 대홍수에 대한 기사는 실제의 역사이다.
뱀이 사탄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뱀 역시 죄와 죄의 저주를 상징하게 되었다. 이것은 민수기 21:4-9절에 기록된 사건과, 요한복음 3:14-15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에서 드러난다. 모세가 막대에 달아 올린 놋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셨다는(고린도후서 5:21) 사실을 상징한다. 그것은 그분이 우리를 죄의 형벌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치르신 희생이 얼마나 거대한지를 드러낸다. 그분 자신이 나무에 달려 그분 자신의 몸에 우리의 죄를 지니셨다(베드로전서 2:24).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셨다.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라디아서 3:13).
뱀에게 내리신 저주의 내용은 그 생물이 전에는 다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땅을 미끄러져 다니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것을 고려하면 (아마도 창세기에 나오는 종류인) 비단뱀(python)과 구렁이(boa)가 한 쌍의 며느리발톱(spur)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진화론자들은 이것들이 뒷다리가 남은 흔적이라고 믿는다. 사탄이 ‘사용했던’ 뱀의 종류는 비단뱀과 구렁이의 조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다리를 잃는 것을 유전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다리를 얻는 것은 자연주의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본문에서 사람들이 얻는 인상은 뱀의 이동에 있어서의 변화는 갑작스런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돌연변이의 누적으로 인한 점진적인 변화라기보다 초자연적인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어떤 경우이든, 비단뱀과 구렁이의 며느리발톱이 재생적인 걸쇠(reproductive clasper)로 기능하는 것은, 그것들이 흔적기관이 아니라 이런 기능으로 설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조 : 며느리발톱, 진화론자들을 어리석게 보이도록 만
드는 것)
부수적인 논점이 아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한 것을 포함하여) 에덴동산이 실제의 역사인가, 아니면 상징적인 신화인가 하는 문제는 부수적인 논점이 아니다. 복음은 다음을 포함하여 역사적인 사실에 뿌리를 두고 있다:
* 하나님의 원래의 창조는 죄가 유입되어 망치기 전까지는 진정으로 ”매우 좋았다.”
* 아담과 하와는 실제의 사람이었으며, 오늘날 모든 사람들의 조상이다.
* 인류의 타락은 실제로 일어났다(그와 함께 영적 그리고 육체적 죽음이 들어왔다).
* 예수 그리스도의 실질적 죽음과 몸의 부활.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5장, 특히 21, 22, 45-47절을 보라. 여기에 있는 메시지가 힘이 있고 권위가 있는 이유는 그것들이 굳건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으며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상징주의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종종 실제의 역사 이내에서 사용한다(예를 들면 유월절 사건). 우리가 역사를 무시하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것이다.
Related Articles
What about the snake in the Garden of Eden?
출처 : Creation ex nihilo, Vol. 35(2013), No. 3, pp. 34-37
하나님의 형상
*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창조주간에 하신 일을 내용상으로 분류한다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창세기 2장 3절에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라고 기록된 바와 같이, 첫째는 창조하신 일(create)이고 둘째는 만드신 일(make)입니다. 창조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무(無)에서 유(有)를 존재하게 하신 것인데, 이와 같은 의미의 진정한 창조(히브리어 bara)는 창세기 1장에 3가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 이외의 다른 일들은 이미 창조하신 것을 가지고 다른 것들을 만드신 것입니다.
첫 번째로 창조하신 것은 우주의 기본적 요소인 시간, 공간, 물질이고(창 1:1), 두 번째는 물고기 새와 같은 동물들을(창 1:21), 그리고 세 번째로는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창 1:27).
여기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할 중요한 내용은 식물에 대해서는 창조라는 표현이 사용되지 않았지만, 동물에 대해서는 창조하셨다는 표현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식물은 신진대사와 증식을 할 수 있도록 설계된 매우 복잡한 구조를 가진 화합물의 집합체에 해당되는데, 동물에서 볼 수 있는 '혼(soul)'이 없습니다. 따라서 식물을 만드실 때는 1:1에서 이미 창조하신 물질을 이용해서 식물을 만드셨고, 동물의 경우에는 물질이외에 이해, 감각, 감정들을 주관하는 요소인 '혼'을 창조하셔서 만드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중요한 내용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신의 '형상(image)'을 따라 '창조'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7).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성경에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유추해 볼 수 있는 근거가 하나 있습니다. 동물에 이어서 인간을 지으실 때에도 '창조'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앞서 만드신 동물에는 없는 요소들을 창조하셔서 인간에게 부여하시고,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을 닮은 존재로 지으신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인간은 하나님을 닮은 점이 많습니다. 우리는 동물과는 달리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영적인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인간은 하나님처럼 무한하고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사랑, 정의, 양심, 등 하나님께서 가지신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동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이성, 창의력, 언어, 지능, 등의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생물을 식물과 동물로 구분하고, 인간은 가장 진화된 동물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볼 때, 생물은 식물과 동물, 그리고 인간으로 구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인간은 아메바로부터 진화된 동물(animal)이 아니라, 처음부터 동물과는 구별하여 특별히 창조된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진화론을 주장하면서 굳이 원숭이와 사촌지간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일까요? 우리를 위해 만물을 지으시고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는데, 왜 저절로 우연히 태어난 존재라고 고아를 자처하는 것입니까? 이처럼 인간 스스로 자신을 동물로 비하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능력을 주시고 고귀한 존재로 창조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멸시하는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동물만도 못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뉴스시간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인간을 고등동물이라고 가르치는 학교교육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무릇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의 사람됨도 그러하니...(For as he thinks in his heart, so is he.)” (잠 23:7, 새번역, NKJV)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5661
참고 :
인간의 창조
* 하나님은 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까?
* 인간의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먹기 위해 사는지, 살기위해 먹는지 모르겠다”고 푸념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사실상 바쁘고 힘든 경제생활을 이어가자면,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이 내 삶의 전부인가?”하는 회의가 일어나곤 합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삶의 목적을 상실한 채로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동물처럼 단지 생존을 위해 살아간다면 너무나 슬픈 일입니다. 목적 없이 살아가는 인생과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생은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바른 삶의 목적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면 인간의 삶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이 의문에 대한 답은 인간이 어떻게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만약 인간이 학교에서 진화론을 통해서 가르치는 것처럼, 자연현상만으로 저절로 이 땅에 생겨났다면, 근본적으로 우리의 삶은 목적이 없는 것입니다. 목적 없이 우연히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저절로 태어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신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사 64:8)
어떤 물건의 존재 목적을 알아보려면, 그것을 만든 사람의 의도를 알아보아야 하는 것처럼, 인간의 삶의 목적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 여쭈어 보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을 다음과 같이 알려 주셨습니다.
첫째, 하나님 대신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청지기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 인간을 창조하신 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신 것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하신 지구와 생물들을 다스리는 임무를 인간에게 부여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일을 하는 청지기(steward)인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청지기라니 얼마나 고귀한 존재입니까? 우리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진화론이 암시하는 것처럼 아무런 목적도 없이 우연히 저절로 생겨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청지기의 직분을 통해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선, 이 세상의 모든 물질과 시간은 내 것이 아니고, 그것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소유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권한은 없고, 단지 살아가는 동안 그것을 관리하고 사용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주신 물질, 자원들을 이기적인 목적으로 남용하거나 오염시켜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잘 관리 보존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여행을 하는 순례자에 비유되곤 합니다. 우리가 여행을 할 때, 호텔에 있는 물건들은 우리를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이고 사용할 수는 있으나 떠날 때는 모두 두고 떠나야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물질과 수명을 누리다가 빈손으로 떠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것도 아니고 영원히 소유할 수도 없는 물질의 노예가 되어 동분서주하다가 허망한 삶을 마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둘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서 43장 7절에서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라고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은 하나님 중심이어야 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 되어야하며 물질과 시간도 그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되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나름대로 고상한 삶의 목적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자부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대기업의 경영을 꿈꾸며 사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스포츠맨으로서 좋은 기록을 남기기 위해 사는 분, 예술가로서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는 작품을 만들려는 목적을 가진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목적들은 궁극적인 삶의 목적이 아니라, 일시적이거나 그보다 더 높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중간 목적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대기업을 운영 하거나, 좋은 기록과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을 이루어 드리고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이것을 알게 되면,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성취했는가?”보다 ”어떻게 살아왔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큰 부자가 되려는 목적을 가지고 부동산 투기를 해서 대회사를 일구게 되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사람을 보고 삶의 목적을 이루었다고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만약 재물을 모으는 과정에서 가난한 자들을 어렵게 만들거나, 부당한 이득을 취하였다면 그는 결코 진정한 삶의 목적을 이룬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물질을 그런 식으로 관리하라고 맡기시지도 않으셨고, 이웃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리가 없습니다.
비록 재물을 많이 모으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사업을 하는 과정과 그것을 통해 얻은 물질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오히려 목적에 맞는 바른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삶의 목적을 바르게 깨닫는 것은 삶의 방향을 바꾸고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도록 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생존경쟁을 통해서 약자는 도태되고, 강자가 살아남는 것이 더 발전하도록 한다는 진화론을 가르치면, 우리 자녀들은 어떤 삶의 목적을 갖게 될까요? 우리 사회의 지도층에 부도덕과 부정이 끊이지 않는 까닭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으로 성취한 결과만을 중시하는 사고가 만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 서적)
Millard J. Erickson, Christian Theology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96), 487.
Werner Gitt, Questions: I have Always Wanted to Ask (Germany: Ebner Ulm, 1998), 93-96.
G. I. Williamson (최덕성 역), 소교리 문답 강해 (서울: 개혁주의 신행협회, 1999), 13-16.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5660
참고 : 5283|3123|2751|2753|2755|2757|5250|5161|4914|4227
하나님은 왜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셨습니까?
박창성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어떤 나무입니까?
창조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사실로 믿으려 해도 잘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온 인류가 고통과 죄악가운데 살게 된 원인이 되었기 때문에 원죄(原罪)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일부러 선악과를 만드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따먹게 하고, 벌을 주셨느냐하는 약간 불평 섞인 의문을 가지신 분들이 많습니다.
선악과를 만드신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성품과 인간의 창조에 대해서 바른 견해를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성품 중에서 중요한 것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사랑입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8)
하나님은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곧 사랑이신 분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흔히 우리가 바라듯이 즐겁게 해주는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거룩하고, 정의로우며, 완전해야 합니다. 사랑은 혼자서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대상이 있어야 하고, 그 대상은 바위나 물과 같은 것이 아닌 생물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서로 교제하며 사랑을 나눌 수 있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자발적이라야 합니다. 인간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라야지, 억지로 하거나 자동적으로 하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은 무조건 순종하도록 인간을 만드실 수도 있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조종하는 대로 움직이는 로봇이나 인형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의 말씀에 순종할 것인가, 순종하지 않을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순종하지 않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길을 선택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 두시고, 그들이 창조주의 뜻을 따르는지, 아니면 그들 자신의 뜻대로 행하는지를 시험하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회사에서 선발한 직원에게 엄격한 수습 기간을 거치게 하고 평가한 다음에, 정식 직원으로 채용할 것인가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2:9, 16-17)
이 성경구절에 나오는 생명나무와 선악(善惡)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그 열매 자체에 어떤 신비한 물질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것을 먹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명을 갖게 하고 선악을 알 수 있도록 했을 것이라는 견해와, 실제로 존재하기는 했지만 그 자체가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단지 순종하는지 안하는지를 구별하는 상징으로 사용되었다는 견해입니다. 어느 경우라 할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은 순종에 대한 보상으로 생명을 주시고, 불순종에 대한 결과로서는 선악을 알게 하실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들을 창조하시고 사랑해 주셔서 필요한 것들을 모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믿고, 그의 말씀에 자유롭게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랬더라면, 선악과 대신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에덴동산의 낙원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안타깝게도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금지된 선악과를 따먹는 불순종의 길로 들어서고야 말았습니다 (창 3:1-7). 그 결과로 인간은 낙원에서 쫓겨나 하나님과 분리되고, 저주를 받아 고통가운데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죄를 저지르면, 이처럼 악(惡)을 경험하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원래 모든 피조물은 ”보시기에 매우 좋은” (창 1:31) 완전한 상태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인해서 결과적으로 선과 악을 모두 경험하고 그 차이를 알게 되었습니다.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따르면 생명이 있고, 순종하지 않으면 육체적인 죽음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영적 죽음을 초래한다는 뼈아픈 경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두 개의 창조신화?
박창성
창세기 1장과 2장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창조신화가 아닙니까?
사람들이 성경을 대하는데 있어서,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신뢰하고 의심 없이 따르려는데 비해서, 다른 사람들은 비판적인 태도로 대합니다. 일부 비판적인 사람들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부활마저도 제자들이 예수님을 신성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신화라고 말하면서, 성경에서 신화적인 요소들을 제거하고 믿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와 같은 주장을 하게 된 동기는 창세기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들은 다음과 같이 창세기 안에 서로 상충되는 내용이 있다면서 창세기 1장(1:1-2:3)과 2장(2:4-25)은 중동지방에 퍼져있던 서로 다른 두 개의 창조 신화를 합해서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서로 다르다.
실제로 하나님의 이름이 히브리어로 창세기 1:1에서 2:3까지는 '하나님(Elohim)”, 창세기 2장 4절에서 25절까지는 '여호와 하나님(Yahweh Elohim)”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이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서로 다른 신화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탓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품과 본질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해서 엘로힘(Elohim), 여호와(Yahweh) 뿐만 아니라, 아도나이(Adonai), 엘로이(El-roi), 엘샤다이(El-shaddai), 등 여러 가지 이름을 사용하셨습니다. 엘로힘은 '엘(El, 하나님)'의 복수 형태로서 ”장엄하신 하나님(majestic God)”을 나타내며, 창조, 심판, 구원과 같은 전 세계적인 사건과 함께 사용되었습니다. 반면에,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거나, 인간에게 가까이 오셔서 사랑과 관심을 베푸실 때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이외에 아도나이는 '나의 주님”(창 15:2), 엘로이는”'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창 16:13), 엘샤다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창 17:1)이라는 뜻으로, 우리는 이 이름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다른 이름을 사용했기 때문에 두 개의 다른 신화라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창조의 순서가 다르다.
창세기 1장에서는 식물, 동물, 사람의 순서로 창조되었는데, 2장에서는 사람, 식물, 동물의 순서로 다르게 창조되었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 역시 성경의 진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데서 오는 오해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had planted)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grow) 하시니...” (창 2:7-9)
이 구절들을 잘못 읽으면, 사람의 창조가 먼저 기록되고, 식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중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사람이 식물보다 먼저 창조되었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8, 9절에서 사용된 단어를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식물을 심고(had planted) 자라게 하신(grow) 것이지, 그 때 창조(create)하셨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신 후, 인간보다 먼저 창조되어 존재하고 있던 식물을 에덴동산에 심고 자라게 하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had formed)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창 2:19)
2장 19절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들짐승과 새를 지으시고, 먼저 존재한 아담에게로 보내신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문장의 앞 뒤 문맥을 조심해서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이 시기에 들짐승들과 새를 지으셨다는 것을 알리려는 것이 아니라, 아담이 하는 일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름을 짓게 하시기 위해서 이미 만들어 놓으신 동물들을 데려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으시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를 영어로 번역할 때는, 동물을 지으신 사건이 다른 사건보다 먼저 일어났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기 위해 대과거 시제(had formed)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NIV).
결과적으로 창세기 1장과 2장은 창조순서에 있어서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창세기 1장은 6일 동안의 창조를 진행된 순서대로 요약한 것이지만, 2장은 피조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여섯째 날에 창조된 인간에 초점을 맞추어 더욱 자세히 서술한 것이기 때문에, 다시 창조된 순서대로 기록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창세기 1장과 2장이 서로 다른 두 개의 신화를 토대로 기록한 것이라는 주장은, 성경에 대한 의심이 많은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일 뿐입니다.
참고 문헌
Henry M. Morris, The Defender's Study Bible: Defending the Faith from a Literal Creationist Viewpoint (Grand Rapids, MI: World Publishing, Inc., 1995), 10.
John Calvin, 칼빈 성경주석 (서울: 성서원, 1999), 46-47.
John D. Morris, The Names Of God, http://www.icr.org/article/21253/
Henry M. Morris, Created And Made, http://www.icr.org/article/19407/
Bodie Hodge, What Is God’s Name in the Old Testament?,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12/04/17/contradictions-names-of-god
*참조 : 창세기 1장은 바벨론의 신화를 재편집했는가?
https://creation.kr/Genesis/?idx=3863816&bmode=view
성경의 내용들이 신화인가? : 오늘날 주요 신학대학에서 골격가설이 가르쳐지고 있다.
https://creation.kr/BiblenHistory/?idx=1288958&bmode=view
모세는 창세기를 정말로 썼는가? : 성경을 훼손하고 있는 사기적인 문서가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3,000년을 있었는가?
(Jonah was in the fish... 3,000 years?)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 1:5)
”God called the light Day, and the darkness He called Night. So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Genesis 1:5)
이 구절을 정직하고 솔직하게 읽는다면, 창조주간의 첫째 날은 일반적 길이의 하루였다.[1] 창조주간의 날들은 어두움과 밝음이 되풀이되는 저녁과 아침으로 구성되어 있다. 최초 3일 동안의 빛의 근원이 태양이 아니라는 것을 제외하곤(태양은 넷째 날에 만들어졌다), 그 날들은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하루와 차이가 없었다.
창세기 1장의 날(days)들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창조 시점에 대한 성경의 다른 구절들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출애굽기 20:9-11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6일 동안은 일하고 하루는 안식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창조 주간에 이와 같이 하셨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출애굽기 31:17절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마가복음 10:6절에서 예수님은 ”창조 때로부터(from the beginning of creation)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바울은 로마서 1:20절에서 ”창세로부터(since the creation of the world)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구절들은 사람의 창조 이전에 수십억 년이 있었다는 것이 허구임을 가리키고 있다. 만약 수십억 년의 연대가 맞는다면, 예수님과 바울은 잘못 말씀한 것이 된다.
(진화론에 의한 영향으로) 하나님이 수십억 년에 걸쳐서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믿고 있는 크리스천들은 창세기 1장의 날들의 길이에 대한 부자연스러운 변칙적인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1] 이러한 시도는 궁극적으로 성경에 모순들과 신학적 딜레마들이 생겨나도록 만든다. 아담의 범죄 함으로 악한 것들이 이 세상에 들어왔기 때문에, 이러한 시도는 하나님이 수억 년에 걸친 동물들의 죽음, 질병, 폭력, 약육강식, 멸종 등을 허락하셨고, 허리케인, 토네이도, 쓰나미, 지진 등과 같은 자연적인 재해도 허락하셨으며, 이러한 모든 것들을 보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고 말씀하시는 분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 1장에서 ‘날(day)’로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 단어로 ‘욤(yom)’이다. 창세기 1장에서 욤은 수사로 수식되고 있으며, 밤(night)이라는 단어 및 '저녁과 아침(evening and morning)”이라는 단어와 연결되어서 사용되고 있다. 창세기 1장 외의 다른 곳에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사용된 욤은 언제나 정상적 길이의 하루를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의 '날'들은 문자 그대로 24시간의 하루를 의미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창세기 1장의 '욤'은 세 가지 요소, 즉 수사, 밤이라는 단어, 저녁과 아침이라는 단어와 함께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문맥을 무시하고 성경의 특정 구절을 인용하여 이것을 반대한다. ”베드로후서 3:8절은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창조의 날들은 오랜 기간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성을 7일 동안 행진했다는 구절에서, 또는 요나가 3일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다는 구절에서 어느 누구도 그 날들이 하루를 의미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은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어떤 크리스천들은 창세기 1장의 명백한 의미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는 것인가? 그것은 그들이 수십억 년의 지구 나이를 믿는 현대 과학자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끊임없이 변하는 사람의 의견을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말씀 보다 더 권위(authority)를 두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정말로 권위의 문제이다. 늘 변해왔고, 오류에 빠지기 쉬우며, 그곳에 없었고, 모든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견해에 그 권위를 둘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에 그 권위를 둘 것인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결코 거짓말을 하실 분이 아니시다. 성경의 그 분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 우리는 오류투성이의 인간의 이론보다, 과거에 대한 그 분의 설명을 신뢰해야만 한다. 그분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믿음을 허락하신 주님을 찬양하자!
Get Answers about Creation and Jonah
Could God Really Have Created Everything in Six Days?
Jonah—3,000 years in the whale? (radio program)
Footnotes
1. Some say that Hosea 6:2 is an exception to this because of the figurative language. However, the Hebrew idiomatic expression used, 'After two days ... in the third day,” meaning 'in a short time,” makes sense only if 'day” is understood in its normal sense.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get-answers/features/jonah-in-fish-days?
출처 - Answers Magazine
사해 침전물 코어는 창세기를 확증한다.
(Dead Sea Sediment Core Confirms Genesis)
by Brian Thomas, Ph.D.
염해(Salt Sea)라 불리는 이스라엘의 사해(Dead Sea)는 해수면 보다 300m나 낮다. 사해는 성경에 기록된 어떤 고대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이다. 일부 과학자들은 그 호수는 너무 염분이 많아서 마른 적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극단적인 염분 농도는 모든 물의 증발을 막아주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 때문이다. 이제 사해 깊은 곳을 굴착하여 얻은 퇴적물 코어는 그들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Science (2011. 12. 7) 지는 사해심부 굴착프로젝트(Dead Sea Deep Drilling Project)에서 235m 깊이에서 채취한 코어 시료는 그 지역 대부분이 말랐던 시기에 ‘해변 퇴적층 같은’ 자갈층(layer of pebbles)을 나타냈다고 보도했다.[1]
성경 기록에 의하면 BC 2000 경에 오늘날의 사해는 아마도 근처의 타락한 소돔성 사람들이 농경지로 사용하던 평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창세기 14장에 최초로 그 계곡의 이름이 등장한다. 아브라함(아브람으로 불리던)의 시기 동안에 그곳은 싯딤 골짜기(the vale of Siddim)로 불렸었다. ”이들이 다 싯딤 골짜기 곧 지금의 염해에 모였더라”(창 14:3). 따라서 그 지역은 골짜기, 또는 계곡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 이후 4백여 년이 지나 창세기가 모세에 의해 편집되어 쓰여질 시기에는 염해라는 이름이 다시 생겨나 있었다.
‘생생하게 다가오는 성경(The Bible Comes Alive)’이라는 책에서 고고학자인 클리포드 윌슨(Clifford Wilson)은 ”곧 지금의 염해에”라는 구절은 아마도 후에 편집 시 추가되었을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었다 :
”유대 사람들이 기록된 말씀을 존중했고, 그것을 변경시키는 것을 이례적인 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적절한 편집 노트를 단순히 추가했다. 이 경우에 싯딤 골짜기는 염해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3]
연구자들은 많은 폭풍들과 소금과 진흙의 계절적 퇴적층 아래 층에 대한 굴착 코어에서 염해의 존재 이전에, 즉 소돔과 고모라(Sodom and Gomorrah)의 파괴 이전에 한 시기를 나타낼 수 있는 자갈들을 발견했던 것이다. 사해가 한때 마른 육지였다는 것을 입증한 이러한 연구는 성경이 진실된 역사적 기록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입증하고 있다.
References
1.Gramling, C. Dead Sea Dried Up in Past. Science. Posted on news.sciencemag.org December 7, 2011, accessed December 16, 2011.
2.Genesis 14:2-3.
3.Wilson, C.1997. The Bible Comes Alive. Green Forest, AR: New Leaf Press, 93.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article/dead-sea-sediment-core-confirms-genesis/
출처 - ICR News, 2012. 1. 4.
가인의 아내
박창성
아담의 첫째 아들 가인은 어디서 아내를 구했습니까?
아담의 후손들 이외에도 다른 부족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성경에 이름이 기록된 아담의 제1세대 자손은 맏아들 가인과 그리고 그의 남자 동생들인 아벨과 셋 뿐이기 때문에 이들이 누구와 결혼하였는가에 대해 의문이 생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문제로 인해서 성경의 창세기를 역사적 사실로 믿지 않는 분들이 많을 뿐만 아니라, 무신론자들은 이것을 근거로 하여 아담과 하와를 모든 인류의 조상으로 기록한 성경을 공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 안에는 이 문제에 대한 충분한 해답이 들어 있습니다. 이 3명의 아들 이외에도 다른 아들과 딸들이 있었음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5장 3-5절에는 ”아담이 일백 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 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담이 모두 몇 명의 자녀를 두었는지 성경에는 적혀져 있지 않지만, 아담이 930세까지 살았다는 점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세기 1:28)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생각해보면 많은 자녀들을 낳았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 역사학자인 요세푸스(Josephus)는 그가 쓴 책에서, 오래 전부터 유대인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말에 따르면, 아담의 자손은 33명의 아들과 23명의 딸들이 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아담이 셋을 낳기 전 130년 동안에도 아들, 딸들을 많이 낳았을 것입니다. 특별히 셋의 이름만이 나타나 있는 것은 그의 후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에는 가인의 결혼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없지만, 가인의 아내는 그의 여동생들 중의 한 명이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서 아담과 하와의 혈통을 이어받은 후손들 이외에 다른 부족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1) 모세의 율법(레위기 18-20)에 근친결혼이 금지되어 있는데 어떻게 오빠와 동생이 결혼할 수 있습니까? 처음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신 후, 한 남자가 한 여자와 결혼하라고 하셨을 때는 근친결혼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그의 이복 여동생과 결혼한 사례(창세기 20:12)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근친결혼을 금지하신 것은 모세 때부터입니다. 오늘날에도 오누이간의 결혼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근친결혼일수록 유전병에 걸리거나 정상적이지 못한 자손을 낳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는 완전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죄를 지었고, 하나님께서 벌로서 이 땅에 내리신 저주로 말미암아 오늘날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유전자에는 돌연변이로 인한 많은 결함들이 포함된 것입니다. 사람들의 유전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각각 물려받기 때문에 2개씩 짝을 이루고 있는데, 이중에서 어느 하나가 결함이 있는 유전자라고 할지라도 좋은 유전자가 결함이 있는 유전자보다 강해서 결함이 겉으로 나타나지 않으나, 친족들 중에는 결함이 있는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근친결혼을 할 경우, 결함이 있는 유전자끼리만 만나서 정상적이지 못한 자손을 얻을 확률이 높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을 비롯한 처음 세대들은 아직 결함이 있는 유전자가 문제를 일으킬 정도로 많이 누적되지 않은 상태였고 사람들의 수가 아직 많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근친결혼을 허락하셨으나, 그후 오랜 세월이 지나서 사람들 몸에 결함이 있는 유전자가 점점 많아지고 사람들의 수가 충분히 늘어나게 되자,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근친결혼을 금지하는 율법을 주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2) 창세기 4장 14절에서 가인이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보고 죽일까봐 겁을 낸 것은 아담의 후손이 아닌 사람들이 많이 살고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가인을 죽이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벨과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전혀 낯선 사람들이라면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다른 종족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아담이 130세 때 셋을 낳았는데 하와가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창세기 4:25)고 생각한 것으로 보아, 셋이 태어나기 얼마 전에 아벨이 죽었다고 가정한다면, 가인의 출생과 아벨의 죽음 사이에는 100년 이상의 시간적 간격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사이에 아담의 후손들이 충분히 많이 퍼져있었을 것입니다.
흔히, ”가인이 아내를 어디서 구했겠느냐, 아담과 하와 이외에 혈통이 다른 부족들이 먼저 있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이 유인원에서 진화하였다고 믿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담과 하와가 우리의 조상이라고 기록한 성경을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아담과 하와가 모든 인류의 조상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만한 이유는 없습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아담을 ”첫 사람”(고린도전서 15:45)라고 하였고, 하와는 ”모든 산 자의 어미”(창세기 3:20)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최초의 인간 (창 2:4~7) <창세기 강해 8>
창세기 1장 1절에서부터 2장 3절까지의 말씀의 주제는 ‘창조’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로 시작해서 창조를 모두 마치시고 제 칠일에 안식했다는 것으로 끝납니다. 진정한 안식은 새로운 창조를 만들어냅니다. 하나님의 창조에는 부족함이나 불균형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인간에게 죄를 짓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창조질서의 회복은 안식을 통해서만 할 수 있습니다. 안식은 회복을 의미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거룩한 주일을 통하여 창조의 세계로 나아가고 무너진 건강과 사업과 가정의 회복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일을 복 주셨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통해 회복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중심인 책입니다. 그런데 2장 4절부터 지금까지 설명하고 있던 창조와 다른 각도에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창세기 1장부터 설명되던 커다란 창조의 파노라마 중에서 한 점에 스포트라이트가 비추어진 것과 같습니다. 그 스포트라이트는 은하계도 아니고 빛도 아닌 사람에게 비추어지고 있습니다. 1장은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2장은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주창조의 모든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우주와 역사와 인생의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관심을 갖는 대상은 사람입니다. 물건이나 환경이 아니라 사람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2장 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1장과 2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천지창조는 조금 다릅니다. 혹 갈등의 요인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갈등의 문제가 아니라 초점의 문제입니다. 2장에서는 인간에게 초점을 맞추어 새롭게 창조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1장 1절부터 2장 3절까지는 장엄하고 능력 있고 위대하신 ‘하나님’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을 ‘엘로힘’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2장 4절부터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단어로 바꾸어집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의 하나님,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하나님’으로 표현이 달라진 것입니다.
5절과 6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1장에서 천지창조에 대한 설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여기에 또 다시 이런 설명이 나왔을까요? 이것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한 사업가가 공장에 기계 설비를 할 때 여러 가지 기계가 많이 설치됩니다. 그러나 설치되었다고 해서 바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설계사가 원하는 대로 모두 설치가 된 후에 가동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기계 사이에는 유기적인 관계가 있기 때문에 한 두 개의 기계가 가동된다고 모두 가동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닮은 인간
하나님께서 1장에서 7일 동안 완벽한 창조를 하셨고 이제 운행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운행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바로 이 우주만물을 다스리는 주인공이기 때문에 이 주인공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이 우주는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만들고 하늘에 구름을 만들었지만 아직 비가 내리지 않는 대기상태였습니다.
바위를 만들고 지구에 흙을 만들어서 산천초목을 만들어 놓았지만 거기에 인간이 없기 때문에 경작할 것도, 초목도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분으로 형성된 안개만 이 지구위에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나타나게 되면 그 인간이 모든 우주 만물을 통치하고 다스리는 일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창조는 1장과 달리 6일 동안의 창조를 모두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창조에 초점을 맞추어 인간이 창조되기 이전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1장 2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창조물인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의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관리인으로, 하나님의 창조의 책임자로 만들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는 운행되는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완성되어야만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창조물은 유기적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1장 27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조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동물이나 식물이 아닌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아주 귀하게 생각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처럼 생각해 주십니다. 여러분은 동물과 비교할 수 없는 아주 귀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자살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인간은 배고프면 마땅히 먹을 특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의 관리인으로 살 고귀한 존재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1장 27절에서 두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인간은 동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인간을 동물 취급합니다. 인간을 개나 돼지처럼 죽이고 그 후에도 아무런 갈등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죄의 결과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자식은 부모를 닮았습니다. 누구든지 그 자식을 보면 아버지를 닮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식이 아버지를 닮듯이 인간은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을 보면 하나님을 느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맞아 저 사람은 하나님의 딸이야”라고 얼굴에 쓰여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여러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임에도 인간 같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마귀 같습니다. 무섭고, 분노하고, 복수하고, 죽이는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로 사람 창조
두 번째,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동일한 성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남자는 남자이고 여자는 여자입니다. 생김새나 기능이 남자와 여자가 다른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입니다. 인간은 동성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타락한 이후 남자와 여자의 성을 혼돈 시켰습니다. 마귀는 문화라는 것을 이용해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를 위배하게 합니다. 이것은 무서운 유혹입니다. 요즈음은 ‘유니섹스’의 문화입니다. 남자 옷도 여자가 입고 여자 옷도 남자가 입습니다. 이것이 문화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문화가 발전하다보면 결국 동성연애로 흘러 갈 수 있습니다. 동성연애는 죄의 본질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결과입니다.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지 않게 됩니다.
요즘 젊은 여성들은 남자를 보고 ‘형’이라고 부릅니다. 남자는 ‘오빠’라고 불러야 합니다. 남자는 남자이고 여자는 여자입니다. 남자는 남자가 되어야 하고 여자는 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문화는 이렇게 성을 바꾸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지 않고 짐승같이 살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사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입니다. 1장 27절의 말씀과 연결해서 인간의 본질에 대한 설명은 2장 7절에서 하고 있습니다. 1장에서부터 창조의 대략을 설명한 후 2장에서는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는 아무것도 운행하지 않았으며 온 우주는 인간이 창조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어떻게 구성하셨는지 2장 7절에 나와 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인간의 몸은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흙이란 땅에서 오는 물질입니다. ‘먼지, 티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도예가가 흙으로 본을 떠서 만족하게 만들어지면 불에 넣어서 굽듯이 하나님은 인간을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흙이란 인간의 오장육부와 뼈와 피와 살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건강할 때 인간이 흙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병이 들고 고통을 받으면 심각하게 느껴집니다. 흙으로 된 몸에 우리는 향수도 뿌리고 좋은 옷도 입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인간은 흙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흙에 불어넣어 주셔
욥이 건강할 때는 자신의 육체가 흙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몰랐었지만 고통에 깊이 들어가게 되었을 때 육신이 흙이라는 사실을 묵상합니다. 욥기 14장 19절을 보면 ”하물며 흙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도 눌려죽는 자이거늘”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하루살이에 눌려 죽고 죽으면 티끌로 돌아가는 존재입니다. 욥기 10장 9절을 보면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 보내려 하시나이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죽음이 가까우면 이것이 흙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할 때 모두 다시 새몸을 입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7절을 보면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예수와 우리의 차이점은 우리는 흙에서 왔고 예수님은 하늘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흙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사십시오. 그러나 인간은 흙이지만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존재입니다.
2장 7절을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고 하나님의 생명을 흙에 불어 넣어주심으로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단순히 흙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존재입니다. 인간의 육신은 흙이므로 세상의 통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배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고 피곤하면 자야 합니다. 그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4장 4절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말씀은 인간의 육신은 떡으로 살고 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육신이 세상과 물질을 연결하는 통로라면 생명과 영은 하나님과 연결하는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과 영을 잃어버리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육신은 가지고 있고 물질도 알고 쾌락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영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무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물질에 하나님의 영을 넣어주셔서 하나님이 거할 공간을 만드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또 한 가지 사실은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 졌지만 흙만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이 있지만 영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흙과 하나님의 생기인 성령으로 만들어진 존재를 ‘생령’이라고 부릅니다. 생령이 곧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과 흙으로 만들어진 혼이 ‘사람’입니다. 물질에 하나님의 영이 들어간 것이 생령입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완전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외로움이나 고통이나 불완전이 전혀 없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축복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사탄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타락하고 죄를 받아들임으로 하나님께 반역하게 되면서 인간안에 있던 하나님의 영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인간의 고독과 외로움과 갈등이 시작된 것입니다. 육신은 있지만 인간안에 있던 하나님의 영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남은 것은 인간의 육신입니다. 인간의 자아는 외롭고 고독하고 방황합니다.
하늘의 기쁨 맛보십시오
세상의 모든 소설의 줄거리는 고독한 인간에 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을 상실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상실한 사람은 길을 잃어버린 배와 같습니다. 방향이 없고, 목적도 없이 사는 이유를 모르고 동물처럼 살아갑니다. 단순히 동물처럼 살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동물이 아닌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오면 불안해집니다. 자신의 영이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진정한 회복은 하나님의 영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회복하는 길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것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내 안에 하나님이 들어오시고, 구원이 이루어지고, 능력이 임하며 하늘의 기쁨을 갖게 됩니다. 이제까지는 세상의 기쁨을 갖고 살던 사람이 하늘의 기쁨을 맛보게 되고, 죽음만 경험하던 사람이 부활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은 부활의 영이며 그리스도의 영이며 성령의 영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태초에 창조되었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때 고독과 절망과 좌절과 허무를 경험하고 있던 영혼은 구원을 보게 되고 천국을 보게 되며 절망에서 살아나게 되고 병에서 구원을 받고 모든 사단의 세력에서 놓임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축복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나왔다고 모두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 생명이 없으며 이 아들안에 하나님이 생명을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나님의 영이 내안에 들어오고, 하나님의 영이 회복이 되어야 나의 육신도 살고 자아도 살아나는 것입니다. 육신은 세상의 통로이며 혼은 하나님과의 통로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으며 요한복음에서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이 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니고데모와 같이 ‘거듭나라’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나이가 먹어서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 나오라는 말인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수를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이 회복되라는 것입니다. 인격도 육신도 회복되어 온전해 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육신만도 아니고 영이나 혼만도 아닙니다. 이 세 가지가 온전히 만들어질 때 하나님이 창조하셨을 때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무너졌던 하나님의 영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오늘 예수의 영이 살아 움직이게 하시고 성령께서 역사하여 주심으로 부활의 영이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1998. 4. 온누리신문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5283
참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