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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성경

미디어위원회
2019-10-30

하나님이 모기를 만드신 이유는?

(Why Did God Make Mosquitos?)

by Brian Thomas, PH.D.


      화창한 날에 나는 아내와 저녁 산책을 즐긴다. 불행하게도 모기도 좋은 날씨를 선호하는 것 같다. 그리고 모기들은 나보다 아내의 피가 달콤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다. 아내는 자주 손으로 모기들을 쫓으며, 왜 하나님이 모기를 만드셨는지 묻곤 한다. 나는 안쓰러운 마음에 그녀를 달래며 설명을 해주곤 한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최초의 모기는 피를 빨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입구조도 피를 빨 수 있도록 하여, 황열이나 말라리아와 같은 질병을 전파하도록 만드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창세기 1:31절에서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아내에게 모기에 물리는 것이 심히 좋은 일이냐고 물어본다면,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볼 것이 분명하다. 그것을 심히 좋은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검사를 받아보아야 할 것이다. 모기는 성가시고, 그들이 전파하는 질병은 치명적일 수 있다. 그래서 원래 “매우 좋았던” 곤충을 귀찮은 작은 뱀파이어로 바꾸었던 어떤 일이 일어났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썼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1] 모기는 피조물의 하나이다. 여자들은 출산의 고통을 겪는다. 내 아내는 자연분만으로 5명의 아기를 낳았다. 창세기 3장에 따르면, 출산의 고통은 죄에 대한 형벌이다. 하나님은 하와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2] 바울은 온 세상의 탄식, 수고, 고통을 여자의 해산에 비유하고 있다.

해산의 수고는 고통스럽고 측은하지만, 새로운 생명과 기쁨을 가져오는 것이다. 출산은 여자의 몸 전체를 고통스럽게 하지만, 더 나은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세상에서 순간의 신음은 하나님께서 리메이크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영원한 세상을 소망하게 한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3] 하나님은 완전하게 창조되었던 모기에게 다른 해충, 독물, 기생충...등과 마찬가지로 변형(쇠퇴)을 허락하셨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4] 이 현재의 저주받은 세계는 우리 크리스천들이 궁극적으로 거주할 처소가 아니다. 우리는 하늘에 있는 처소를 위해 일해야 한다.

그러면 모기들은 창세기 3장의 저주로 잘못되기 전까지 어떤 목적을 갖고 있었을까? 우리는 에덴동산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누구도 그것을 알 수 없다. 그러나 많은 모기 종들은 독특한 입 구조를 사용하여, 꽃이나 과일에서 꿀과 과즙을 채취한다. 약 3,500종의 모기 종들 중에서 단지 수백 종만이 사람의 피를 빤다. 아마도 그들 모두는 처음에 꿀을 먹었을 수 있다.

오늘날 모기는 질병을 옮기는 피조물이지만, 먹이사슬에서 중요한 연결 고리가 되고 있다. 모기의 유충은 흐린 물을 여과하고 깨끗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그들의 흔들거리는 몸체는 물고기, 올챙이, 잠자리 등의 먹이가 된다. 새, 박쥐, 거미는 성체 모기를 먹는다. 또한, 과즙을 먹는 모기 종들의 대부분은 식물을 수분시킨다.

그러나 안심하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5] 다음에 성가신 모기가 당신을 물었을 때,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를 기억하고, 새 땅에서는 당신을 무는 모기가 없을 것임을 기억하라. 만약 하나님이 새로운 땅에서도 모기가 있게 하신다면, 그것은 크리스천들에게 주님의 천재성을 상기시켜 줄 것이다. 그때에 즐거운 저녁 산책 중에 만나는 모기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References

1. Romans 8:22.

2. Genesis 3:16.

3. Isaiah 66:22.

4. Romans 8:19.

5. Isaiah 11:9.

6. 2 Peter 3:10.

* Dr. Thomas is Research Associate at the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and earned his Ph.D. in paleobiochemistry from the University of Liverpool. Cite this article: Brian Thomas, Ph.D. 2019. Why Did God Make Mosquitos?. Acts & Facts. 48 (10).


*참조 : 모기는 최근에 어떻게 사람의 피를 빨게 되었는가?

http://creation.kr/Genesis/?idx=1289136&bmode=view

모기의 매우 빠른 변화

http://creation.kr/NaturalSelection/?idx=1290257&bmode=view

1초에 800번 날갯짓을 하는 모기의 비행은 설계를 가리킨다.

http://creation.kr/animals/?idx=1291212&bmode=view

가장 오래된 결핵이라는 주장 : 결핵도 보시기에 심히 좋으셨던 창조의 한 부분인가?

http://creation.kr/BiblicalChronology/?idx=1289276&bmode=view

흑사병 : 살인자의 탄생 : 페스트 균도 하나님이 창조하셨는가?

http://creation.kr/Mutation/?idx=1289820&bmode=view

창조, 타락, 그리고 콜레라

http://creation.kr/Genesis/?idx=1289065&bmode=view

▶ 성경의 모순으로 주장되는 것들 - 흡혈

https://creation.kr/Topic502/?q=YTox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9&bmode=view&idx=6825637&t=board

 

출처 : ICR, 2019. 9. 30.

주소 : https://www.icr.org/article/11542/

번역 : 미디어위원회

미디어위원회
2019-09-16

창세기는 실제 역사라고 히브리어 교수는 확언하고 있다.

: 조나단 사파티가 슈라더 박사를 인터뷰하다.

(Hebrew professor affirms Genesis as real history

Jonathan Sarfati chats with Dr Stephen Schrader)

Jonathan Sarfati 인터뷰 


      스테판 슈라더(Stephen R. Schrader) 박사는 1995년부터 미주리 주 스프링 필드에 있는 침례교 성경 대학원 대학교에서 구약학과 학과장 겸 히브리어 및 구약성경 교수로 재직했다. 이전에 그는 이 주제들을 성경적으로 건전한 다수의 주요 신학교에서 가르쳤었다. 그는 인디애나주 위노나 레이크에 있는 그레이스 신학대학원(Grace Theological Seminary)에서 구약학과 히브리어 전공으로 목회학 및 신학 석사를 취득했다. 그는 누지 풍속(Nuzi Customs)과 족장 이야기에 관한 논문으로, 같은 곳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슈라더 박사는 2008년 41세에 암으로 사망한 첫 아내에게서 세 명의 자녀와 10명의 손주들을 두고 있으며, 지금은 진(Jean)과 결혼하여 앨라배마에 살고 있다.

내가 슈라더 박사를 만난 것은 그분이 기꺼이 우리 교회에서의 대담에 참석해주셨기 때문이다. 그는 적어도 30년 동안 성경적(‘젊은 지구’) 창조론을 글로써 방어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를 물었다. 그는 미국(그의 경우 인디애나주 에반스빌)에 있는 많은 사람들처럼,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갔지만, 결코 복음을 들은 적이 없다고 설명했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절친한 친구가 그에게 성경 구절을 제시해 주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질 수 있는 소망과 준엄한 구절인 요한일서 5:12절이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그것에 대해 슈라더는 1960년에 이렇게 말했다 :

“나는 죄와 불신앙,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로부터 나의 구주가 되셔야하는 필요성을 고백했다. 즉시로 ‘빛이 다가왔고’ 나는 구원받은 이래로 그분을 위해 살고 그분의 말씀을 알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가지게 되었다. 시편 1:2절의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라는 말씀과 같이,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하는 것은 나에게 참으로 복이었다. 또한 마태복음 4:4절에는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구약성경에 대한 연구

슈라더 박사가 성경의 원어를 공부하기 원했을 때, 교회의 목사님은 그레이스 신학대학원에 입학하라고 권유했다. 그곳에서 그는 현대의 성경적 창조론 운동을 시작했던, 헨리 모리스 박사의 유명한 ‘창세기 대홍수(The Genesis Flood, 1961)’ 책의 공동 저자인 존 휘트콤(John C. Whitcomb, Jr.) 박사 밑에서 공부했다. 휘트콤 박사는 최근의 창조(젊은 지구), 타락, 전 지구적 홍수에 관해 철저히 가르쳤다.

이 신학대학원은 고대 근동의 고고학과 언어학을 전문으로 연구하는데, 특히 원전(hapax legomena)에서 단 한 번만 나타나는 단어에 대한 연구를 전문으로 한다. 슈라더 박사는 이렇게 지적한다. “구약성경 39권의 책은 신약성경의 본문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기 때문에, 그것을 습득하는 것이 중요하다.”


히브리인들은 창세기 1~11장을 무엇으로 가르치는가?

슈라더 박사는 히브리인 학자이기 때문에, 나는 창세기의 장르에 대한 그의 생각을 물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

저는 창조 기사가 문학적 표현이 아니라, 진정한 역사적 서술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시적인(poetic) 글들은 대구법(parallelism)을 보여주는 반면에, 창세기는 그것이 역사적 서술로 쓰여졌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는, ‘와우 연결법(waw consecutive)’이라고 불리는 특정한 동사 형태로 가득하다. 흥미로운 점은 창세기 1:1~2:3절에서 불과 34개의 절에서 와우 연결법이 55번이나 나타난다는 것이다. 창세기의 역사 기술에 대한 서언인 창세기 1:1~2:3절에서 이러한 동사 형태를 사용한다는 것은 창세기의 나머지 부분에서 발견되는 서술 자료와 부합하고, 동일하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날(day)’의 의미가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슈라더 박사는 먼저 성경을 성경과 비교한다 :

이 패턴은 출애굽기 20:11절에서 하나님의 증언에서도 드러난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더 나아가 그는 창세기 1장은 그것 없이도 충분히 분명하다고 지적한다 :

창세기 1:1-2:3절에서 욤(Yôm, day)은 숫자로 수식되어 있으므로, 각각의 날은 문자적인 날이 되어야 한다. 모세가 “한 날(day one)”(5절), “둘째 날(second day)”(8절) 등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구약에서 욤이라는 단어가 숫자 수식어와 함께 등장할 때는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

그리고 첫째~여섯째 날이 끝나고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구절이 등장하여 각각의 연속 된 날들을 서로 연결시켜주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6일 간의 창조 사역을 끝내시고, 일곱 번째 날에 쉬셨을 때, 7일의 끝에는 그것이 반복되지 않는다. 그것은 인류에게 하나의 패턴을 설정해준다.

그러나 창세기 2:4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in the day)”에서는 어떠한가? 슈라더 박사는 또 다른 구문론적 구조인 날에(beyôm or “in the day”)는, 창조의 전체 주간을 요약하는 형식으로 나타내는 ‘때에(when)’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창세기 1장에서 사용됐던 욤은 단수명사로 사용됐을 때는, 항상 보통의 문자적인 날을 가리킨다.”


창세기 1~11장이 중요한 이유는?

회의론자들은 종종 창조, 타락, 노아 홍수, 바벨에서의 언어 혼돈에 대한 창세기 1~11장의 내용을 조롱한다. 그리고 교회 내부의 일부 사람들은 이 내용들은 부수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창세기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중요하다. 슈라더 박사는 다음과 같이 상술한다 :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은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주권자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문자적으로 연속적인 24시간의 6일 동안에 이 세계를 창조하셨다고 말씀한다. 그리고 그 말씀은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된다고 요한은 밝히고 있다.(요한복음 1:1~3) 그때 어떤 인간도 존재하지 않았다(참조, 욥기 38:4).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그분의 기록된 말씀을 이 세상을 창조할 때 그분의 경이로움과 관련하여 받아들여야만 한다. 인간은 진화된 존재가 아니라, 창조주간 여섯째 날에 하나님에 의해서 초자연적으로 직접 창조되었다.

창세기는 진화론의 개념을 반박하고, 지구는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창조물이며, 사람은 수백만 년의 진화의 결과가 아니라고 말한다. 창세기는 또한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지으신 그 모든 것들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한다. 역사적으로 이 시점까지 육체적 죽음도 영적 죽음도 없었다.

그런데 사람의 죄가 없는 상태를 파괴하려는 사탄의 유혹이 있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그것을 먹었다. 창세기 3:8~19절에는 하나님이 아담(3:9~12)과 하와(3:13)에게 심문하고, 하와(3:14~15)와 아담(3:17~19)에게 판결을 내리기 전에, 먼저 사탄(3:14~15)을 판결하는 문자적인 판결이 나온다.

사실,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5:21~22,45절에서 말한 것처럼 죽음과 고통의 근원이었다. 성경과 수억 수천만 년을 연결시키려는 모든 타협적 견해들은 아담의 범죄 이전에 사람과 동물들의 죽음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창세기 6~9장에서 하나님은 전 지구적 대홍수로 온 세상을 멸망시키셨다. 그러므로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주장하듯이(베드로후서 3:4~7), 만물이 (“창조의 시작부터”) 항상 동일하지 않다. 만물은 창세기 8:21~22절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노아 홍수가 끝난 이후에만 동일하다.

슈라더 박사는 하나님께서 심판을 선언하셨을 때조차도, 구속자를 약속하셨다는 것을 지적한다.

창세기 3:15절에서 하나님은 여자인 하와의 후손에서 예수 그리스도, 즉 메시야에 대한 약속을 주셨는데, 그분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사탄을 멸망시키실 것이었다.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대조가 고린도전서 15:45~49절에 나와 있는데, 이는 그 기원을 “땅에” 두는 것과 “하늘에” 두는 것의 대조를 말한다.

그에 앞서 바울은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육체적으로 죽으시기 위해 오셨고, 죽음에서 육체적으로 일어나신 모든 이유는, 우리의 조상 아담이 범죄하여 세상에 육체적인 죽음을 가져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고린도전서 15:21~22). 오래된 연대를 믿는 사람들의 관점은 아담의 죄가 있기 전에, 인간과 동물의 육체적인 죽음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죽음이 죄와 관련이 없다면, 예수님의 죽음이 어떻게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할 수 있겠는가?


Related Articles

Further Reading


References and notes

1. Archer, G.L., Survey of Old Testament Introduction, p. 176, Revised Paperback Edn, Moody Press, Chicago, 1985. 

2. Selman, M.J., The Social Environment of the Patriarchs, Tyndale Bulletin 27:114–136, 1976; Comparative Customs and the Patriarchal Age, in: Millard, A.R. and Wiseman, D.J., Essays on the Patriarchal Narratives, pp. 93–138, IVP, Leicester, 1980. 

*JONATHAN SARFATI, B.Sc.(Hons.), Ph.D., F.M.

Dr Sarfati’s Ph.D. in physical chemistry is from Victoria University, Wellington, NZ. He is the author of some of the world’s best-known creation books. A former NZ chess champion, he works for Creation Ministries International (in Australia 1996–2010, thereafter in Atlanta, USA). For more: creation.com/sarfati.


출처 : Creation Magazine Vol. 39(2017), No. 4 pp. 38-40

주소 : https://creation.com/schrader-hebrew-professor

번역 : 이종헌

미디어위원회
2019-08-14

창세기에 간격이 있는가? 

: 간격이론(Gap Theory)이란 무엇인가? 

(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Russell Grigg 


      창세기 1장의 1절과 2절 사이에 수십억 년의 ‘간격(공백, gap)‘이 존재하는가? 그래서 진화론적 지질학자들이 주장하듯이 거기에 기독교인들이 장구한 시대를 편리하게 삽입할 수 있는가? [1, 2]


실제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1. 모세는 무엇을 전달하려 했는가?

창세기 1장에 대한 가장 분명하고 직접적인 해석은, 그것이 초지혜자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어떤 신비적인 메시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모세(혹은 그의 선조들)에게 계시하신 것들을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모세가 문자적이고 역사적으로 기록한 것(a literal historic account)으로, 이는 다른 확실한 반증이 없다면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만약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1절과 2절 사이에 수십억 년의 간격이 있어서, 그 기간 동안에 사탄, 죄, 심판, 형벌, 재창조(부록의 ‘간격이론‘을 보라) 등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이해시키려 했다면, 그에 관련된 사항들 중에 최소한 일부라도 하나님이 저자에게 알려주셨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뿐만 아니라, 성경의 다른 어떤 곳에서도 그것들을 발견할 수 없다. [3]

사실상, 정통파 유대인들과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항상 창세기 1장을 문자적인 역사(literal history)로 읽어왔다. 유신진화론적 지질학자(theistic evolutionist geologist)인 데이비스 영(Davis Young) 교수는 다음과 같이 인정했다.

”창세기 1장을 엄격히 문자적으로 해석하려는 것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종종 있기는 했지만, 18세기까지 기독교계에서 거의 대부분의 보편적인 견해는 지구의 나이가 수천 년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지구에 대한 현대 과학적 탐구가 이루어지고 나서야, 이런 관점이 교회 내에서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4]

 

2. 성경의 다른 부분들은 간격이론(Gap theory)에 대한 조종을 울리고 있다.

• 창세기 1:31은 이렇게 말씀한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very good)” (이 심히 좋았더라의 히브리 단어 ‘meod tov’ 는 완전하고, 어떠한 종류의 악도 전혀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것은 칼빈(Calvin)과 많은 다른 주석가들이 지적해왔던 것이다).


만약 사탄이 이미 반역을 해버렸다면, 이것은 정확한 표현이 될 수 없다! 또한 만약, 아담 이전에 인간종족들을 모두 멸망시키고 동물계 전체의 멸종을 일으킨 ‘루시퍼-홍수‘들이 있어서, 질병, 폭력, 죽음, 부패의 흔적을 가진 수십억의 화석들이 만들어졌다면,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그러한 화석들이 묻혀 있는 땅 위를 걷고 있었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을까? [5] (그들의 기념비적인 구약 주석에 의하면, Keil과 Delitzsch는 창세기 1:31절의 ‘심히 좋았더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모든 것은 그 종류대로 완벽했다..... 하나님의 창조에서 어떠한 악의 존재도 절대적으로 배제된다. 그것은 6일 창조를 부정하고 족쇄를 채우려는 반하나님적 악한 가설을 기각하고 있는 것이다.”)

 • 창세기 6-9장은 전 지구적 홍수를 묘사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노아의 방주에 타지 않았던, 코로 호흡하는 모든 육상동물들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간격이론가들은 화석이 ‘루시퍼의 홍수‘로 인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노아의 홍수는 실질적으로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거나, 아니면 단지 지역적인 홍수라고 결론을 내리려 한다. 분명히 화석의 원천에 대한 보다 나은 설명은, 성경이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은 가상적인 홍수보다, 성경에서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노아 홍수에 있다!


• 출애굽기 20:11은 이렇게 말씀한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 이것은 창세기 이외의 곳에서 창조의 시간 틀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결정적인 구절이다. 이 구절은 하나님이 6일 안에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고 단언적으로 말씀하고 있다. 간격은 전혀 허용되지 않고 있다. [6]


• 로마서 5:12은 이렇게 말씀한다. ”이러므로 한 사람(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아담은 여섯째 날에 창조되었는데, 고전적인 간격이론은 첫째 날 이전의 간격 동안에 죽음이 있었다고 말한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그렇지 않다! 이 구절은 아담의 죄 때문에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다고 평범하게 말한다. 이 구절을 인간의 죽음만으로 제한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오히려, 로마서 8:20에서는 모든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아담이 죄를 저지르기 이전에는 (증거 없이 주장된 ‘루시퍼의 홍수‘에서 죽은 화석과 같이) 세상에 죽음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간격이론가들은 로마서 5:12과 창세기 3:3이 영적인 죽음만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아담은 육체적으로 죽어가기 시작했고(히브리어: ‘장차 죽는 죽음‘, 즉, 죽음의 과정이 시작되었다. 창세기 3:19은 창세기 5:5에서 완성되었다.), 또한 영적으로 죽었다.[7]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하여 육체적인 죽음과 영적인 죽음을 모두 겪으셨다(마태복음 27:46). 또한 고린도전서 15:21-22을 보라.


간격을 찬성하는 것으로 주장되는 성경적 증거들

간격이론가들은 소수의 히브리 단어들에 대한 수정론자의 번역(revisionist translations)에 심하게 의존하고 있다.

1. 히브리 단어 빠라(bara, '무로부터 창조하다‘)와 아싸(assa, '만들다‘). 창세기 1:1은 빠라를 사용하고 출애굽기 20:11은 아싸를 사용한다. 간격이론가들은, 빠라아싸를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출애굽기 20:11은 멸망한 세상의 재창조와 재형성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답: 창세기 1장에서 히브리 단어 빠라가 세 번 사용되었는데, 그때마다 완전히 새로운 실체 - 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의 창조를 나타낸다.
창세기 1:1에서 빠라는 하늘과 땅의 창조에 대해 사용되었다.
창세기 1:21에서 빠라는 최초의 정신을 가진 동물(또는 네페쉬) 생명의 창조에 대해 사용되었다.
창세기 1:27에서 빠라는 최초의 사람, 즉,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든 인간 생명의 창조에 대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창세기 1:26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아싸]”, 반면에 바로 다음 구절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빠라]”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빠라아싸를 둘 다 사용하여 같은 사건을 설명하고 있으므로, 그 동사들은 분명히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더군다나, 창세기 2:4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아싸] 때에 천지의 창조된 [빠라] 대략이 이러하니라”. 여기서 빠라아싸가 동의어를 의미하는 병행구로 함께 사용되었다. 이것은 또 다시 모세가 그 단어들을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했음을 나타낸다.

간혹 아싸는 간격이론가들의 반하는 주장에도 (예로 느헤미야 9:6) 불구하고, 무에서부터(ex nihilo, out of nothing)의 창조를 의미할 때 사용된다. 하나님은 홀로 주님이시다. 하나님은 하늘과 가장 높은 하늘까지 만드셨고(아싸), 그리고 별들의 주인이시며, 땅과 그 위에 모든 것들을 만드셨으며, 바다와 그 안에 모든 것들을 만드셨다. 하나님은 모두에게 생명을 주셨고, 하늘의 하늘들이 경배하고 있는 것이다.  


2. ”'와우(waw)’는 히브리어 문자의 이름인데 접속사로 사용된다. 그것은, '그리고(and)', '그러나(but)', '이제(now)', '그리고 나서(then)' 등의 의미로 사용되며, 와우가 포함된 형태와 문맥에 따라 기타 몇 가지 다른 의미로도 사용된다.” [8]  이것은 창세기 1:2절의 앞부분에 있는데, KJV에서는 ”그리고(and, 와우) 땅은 형체가 없고 비어있었다”로 번역되었다.

간격이론가들은 이 번역을 간격이론을 지지하는데 이용한다. 그러나 원전을 가장 직설적으로 읽으면, 창세기 1장 1절은 주어 + 동사의 주절로 되어 있고, 2절은 3개의 종속절로 되어 있다. "이것은 히브리어 문법학자인 게세니우스(Gesenius)가 '와우 설명(wawexplicativum)' 혹은 설명적인 와우 라고 이름 붙인 것으로서, 영어의 '즉(to wit)'에 비견된다." [9] 그러한 와우 접속사는 비동사(non-verb)에 의해서 뒤따라지는 와우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히브리어에서 쉽게 말해진다. 그것은 삽입어구적 문장(parenthetic statement)을 소개하고 있다. 즉, 그것은 이를테면 이전 명사에 관한 서술적 어구임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독자들에게 다음 어구를 괄호에 놓도록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연속적인 시간이 흘러 뒤따르는 어떤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이것은 와우 연결(waw consecutive)이라고 불리는 다른 히브리어 구조에 의해서 암시될 수 있는데, 여기서 와우는 동사에 의해서 뒤따라진다. (와우 연결은 사실 창조의 다른 날들 이전에 사용되었다. Creation at the academy (Dr Doug Kelly interview을 보라). 따라서 2절을 보다 낫게 번역하면, ”그런데 땅은(Now the earth) …”이 될 것이며, 의역을 하면, ”그런데 땅에 대해서 말하자면…”으로 할 수 있다. [10] 그것은 창세기의 저자가 (하나님의 지시 하에) 그러한 결합적인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의도적으로 두 구절 사이에 중단이 없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3. 창세기 1:2의 ‘was‘(히, '하야')를 간격이론가들은 ‘became‘으로 번역하여, ”그리고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게 되었다(became [or had become])”로 쓰고 있다. 간격이론가 쿠스탄스(A. C. Custance)는 그의 책 ‘혼돈하고 공허하며 (Without Form and Void)’‘에서 거의 5분의 4를 13개의 부록을 포함하여 이 번역, 특히 과거완료 시제인 ‘되었다(had become)’를 옹호하는 데 할애했다. 그러나 저명한 문법학자들과, 사전편찬자 및 언어학자들은 거의 한결같이 ‘되었다(became)’나 ‘되어왔었다(had become)’로 번역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11] 스트롱의 색인(Strong’s Concordance)에 하야(haya,)의 의미 중 하나로 ‘되었다(became)‘가 있는 것 때문에, 창세기 1:2절의 특별한 문장을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의 기본적인 주석 오류이다. 동사 하야가 접속사 와우와 결합되는 것은 단순하게 문법적으로도 불가능하다. 구약성서의 나머지 부분들에서 ’Waw + 명사 + haya‘ 는 항상 ‘was’ or ‘came’으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결코 ‘became’은 아니었다.


4. 창세기 1:2에서 히브리어 단어 토후보후는 ‘혼돈하고(형체가 없고)‘와 ‘공허하며(비어 있는)‘으로 번역되었는데, 간격이론가들은 이것이 지어져가는 과정 중에 있는 무엇인가가 아니라, 심판에 의한 멸망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12] 그러나 토후는 성경에서 여러 번 나타나는데, 그것은 도덕적으로 중립의 상태에 대해 사용하며, 무언가 덜 끝나서 혼란스러운 것을 나타내지만, 그것이 반드시 악은 아니다! [13] 수세기 동안 히브리어 학자들과 교회에서는 창세기 1:2절이 천사의 타락에 의해 야기된 악의 상태나 심판의 장면이 아니라, 아직 개발되지 않은 원형의 우주 상태를 설명하는 것이라는 관점을 취해왔다. 모세가 말한 평범하고도 단순한 의미는 첫째 날에 물로 덮인 큰 덩어리가 있었는데, 그 상태는 마른 땅이 없었으며(토후 = ‘아직 형성되지 않은‘), 아직 거주자가 없었다(보후 = ‘아직 채워지지 않은‘)는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간격이론을 가르치기 위해서 예레미아 4:23절의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들을 우러른즉 거기 빛이 없으며”을 오용하고 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는 심판의 결과를 묘사하는 ‘tohu va bohu’ 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쿠스탄스(Arthur Custance)와 같은 선도적인 간격이론가들은 '혼돈하고 공허하며(tohu va bohu, without form and void)‘라는 어구가 ”심판에 의해 황폐하게 되었다(laid waste by a judgment)"를 의미하고 있음이 틀림없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이 사실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것은 오류이다. 히브리어 단어에서 tohu VA bohu 자체가 그것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없다. 그들이 ‘황폐하게 되었다(laid waste)’와 관련짓는 유일한 이유는 그 단어가 발견된 문장에 기인한 것이다. 그 단어는 단순히 ”unformed and unfilled"를 의미한다. 이 언급은 창조되는 것, 또는 창조된 것이 제거되는 것에 기인될 수 없다. 예레미아 4장의 문장은 창조가 아니라, 예루살렘에 대한 바벨론의 약탈에 관한 예언이다. 사실, 예레미아 4:23절은 심판이 너무도 중하여, 마지막 상태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시기 이전의 공허했던 것처럼 될 것이라는, 창세기 1:2절에 대한 하나의 문학적 암시로서 알려져 있다. 예레미아 4:23은 하나의 심판으로서 창세기 1:2절을 해석하는 데에 사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의 암시는 오직 일방향이기 때문에, 그것은 완전히 앞뒤가 뒤바뀌게 되는 것이다.


유사한 예를 들어보자. 컴퓨터에서 ‘아래 한글’을 열면, 문서창은 ‘공백(blank)’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내가 어떤 문서를 불러냈다가 전체 문서를 ‘삭제(delete)’ 하였다면, 문서창 역시 공백으로 될 것이다. 그래서 공백은 어떠한 글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문서는 내가 전혀 글을 타자치지 않아서 없고, 다른 문서는 있던 글을 삭제하여 없게 되었다면, 당신은 공백(blank) 이라는 단어 자체로부터 문서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쿠스탄스와 같은 유형의 해석에 의하면, ‘공백’은 모든 글들이 삭제되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된 스크린의 모습이라고 결론질 수 있다. 그래서 ‘공백’이라는 단어는 아무 것도 없었던 상태가 아니라, 모든 문서들을 삭제해버린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5. 창세기 1:28의 KJV 번역인 영어 단어 ‘replenish(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replenish) 땅을 정복하라)’는 간격이론가들이 주장하듯이 간격이론을 지지하지 않는다. 언어학자인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611년 판에 번역되어 있는 'replenish”는 '채우다(fill)”와 동의어이며, 접두사 ”re-”는 ”다시”가 아니라 ”완전히”를 의미한다.”[14] 동일한 히브리 단어 마레(male)가 창세기 1:22에서 사용되었는데, 거기서는 ‘바다를 채우

라(fill)‘로 번역되어 있다. 따라서 이것을 28절에서는 다르게 번역할 필요가 없다. (What does replenish the earth mean?을 보라)


6. 흑암. ‘하나님은 빛(God is light)’ 이시 때문에(요한일서 1:5), 그리고 성경에서 ‘흑암(darkness)‘은 때때로 사악한 자에 대한 심판(출애굽기 10:21, 이사야 13:10, 요엘 2:31, 마태복음 27:45, 등)에 대한 은유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일부(전부는 아님) 간격이론가들은 창세기 1:2절이 악의 상태를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논리상의 실수이다. ”상징은 상징화된 것에 의해 혼동되었으며, 급기야는 바로 그 상징 자체가 지금은 악으로 간주되고 있다!” [15]

아직 빛이 창조되지 않았기 때문에 땅은 흑암일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고 하신 창세기 1:3절 말씀은 사실상 그 자체로도 간격이론을 충분히 반박할 수 있다. 새로운 간격이론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태초에‘ (창세기 1:1) 태양과 달과 별들이 모두 창조되었다면, 주장되는 1절과 2절 사이의 간격 이후에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실(3절) 필요가 왜 있었겠는가?


기타 문제들

1. 매우 많은 동물 화석들이 오늘날 살아있는 동물들의 모습과 사실상 동일하다. 전통적인 간격이론가들은 오늘날의 동물들이 과거에 존재했던 동물들의 직접적인 후손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왜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동일한 모습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

2. 간격이론가들은 마가복음 10:6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간과했다. ”창조 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But 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God made them male and female)”. 주님 자신은 분명히 창세기 1:1과 아담과 하와의 창조 사이에 어떤 의미 있는 간격을 염두에 두지 않으셨다.

3. 젊은 지구를 가리키는 수많은 우수한 과학적 증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16]  (See Q&A: Young world evidence)

4. 간격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전체 개념은 ”뒤바뀌어진” 사고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성경을 기준으로 하여 사람의 견해를 살펴보려는 것이 아니라, 인본주의적인 진화론적 견해를 기준하여 성경을 해석하려고 하는 시도의 산물인 것이다.



결론

비록 간격이론이 그 선전자들에 의해 잘 정립되어 있기는 하지만, 언어학적, 성경적, 이론적, 또는 실제적 어떤 자료에 근거해서도 인증된 바 없다. 아담이 죄를 짓기 이전에 죽음이 있었다는 것을 옹호하는 것은 아담의 죄(Adam’s sin)로 인하여 죽음(death)이 들어왔다는 성경의 기록과 위배된다. 바로 그 아담의 죄 때문에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상에서 죽으셨으며, 부활하시는 일이 필요했던 것이다.

 


References and notes

1. Proposed by Thomas Chalmers (1780–1847), founder of the Free Church of Scotland, the idea of a gap was ‘canonized’ for some Christians when C.I. Scofield included it in the footnotes of the Scofield Reference Bible in 1909.
2. The most academic presentation of the gap theory is to be found in Without Form and Void by Arthur C. Custance, Doorway Publications, Brookfield, Canada, 1970.
3. The two Bible passages that are usually invoked about the ‘fall’ of Satan are Isaiah 14:12–15 and Ezekiel 28:13–17. Both of these passages are in the context of prophecies about earthly kings (of Babylon and Tyre), and no explicit reference is made to Satan. However, even if these verses are so taken, there is no indication that any of the events described took place before Genesis 1:2.
4. Davis A. Young, Christianity and the Age of the Earth, Zondervan, Michigan, p. 25, 1982.
5. In other words, if Isaiah 14:12–15 and Ezekiel 28:13–17 do refer to the ‘fall’ of Satan (which certainly is not proven), this more consistently fits after Day Six of Creation Week, and not between verses 1 and 2 of Genesis 1. For further discussion, see my article, Who was the serpent?, Creation 13(4):36–38.
6. For further discussion see Weston W. Fields, Unformed and Unfilled, Burgener Enterprises, Collinsville, Illinois, p. 58, 1976.
7. In the Bible, spiritual death has the meaning of separation from God rather than of annihilation.
8. F. Brown, S.R. Driver, and C.A. Briggs, A Hebrew and English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Oxford, pp. 251–255, 1968, cited from Ref. 6, p. 81.
9. Kautzsch and Cowley, Gesenius’ Hebrew Grammar, p. 484, section 154a, footnote 1, cited from Ref. 6, p. 82.
10. For a more detailed explanation, see Ref. 6, pp. 81–86.
11. For a more detailed explanation see Ref. 6, pp. 87–112.
12. Ref. 2, p. 168.
13. Ref. 6, p. 129, which summarizes Fields’ arguments on pp. 113–130. Gappists sometimes claim that the two words are only used together (tohu wa bohu) in other parts of the Bible where judgment is in view; however, there is nothing in the context of Genesis, (which there is in these other references) which would independently suggest judgment.
14. Charles Taylor, The First 100 Words, The Good Book Co., Gosford, New South Wales, Australia, p. 74, 1996.
15. Ref. 6, p. 132.
16. See John D. Morris, The Young Earth, Master Books, Colorado Springs, 1994; as well as Dr. Russell Humphreys’ summary, Evidence for a young world, Creation 13(3):28–31, also available as a reprint from the UK, USA, NZ and Australian bookstores.

 


부록 1 : 간격이론(Gap Theory)이란 무엇인가?

간격이론은 일부 기독교 신학자들이 창세기를 우주가 대단히 오래 되었다는 통속적인 오래된 연대 개념과 맞추기 위한 타협적 시도이다. 간격이론가들은 문자적인 창세기를 믿지만, 지구에 대해 (막연히) 대단히 오래된 시대를 수용한다. 이런 견해와 일치시키기 위하여 그들은 창세기 1장의 1절과 2절 사이에 장구한 지질학적 시대를 끼워 넣는다. 하지만 그들은 진화론을 반대한다.

결정적인 반-간격(anti-gap) 이론 책인 '혼돈하지 않고 충만하지 않은(Unformed and Unfilled)'의 저자 웨스턴 필드(Weston W. Fields)에 따르면,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간격이론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고 하였다 :

 ”시기를 알 수 없는 아주 먼 과거에 하나님은 완전한 하늘과 완전한 땅을 창조하셨다. 사탄은 혼이 없는 인종이 살고 있는 땅의 통치자였다. 광물질로 이루어진 에덴동산에 살고 있던 사탄은(에스겔 28장) 마침내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여(이사야 14장) 반란을 일으켰다. 사탄의 타락으로 인하여 우주에 죄가 들어왔으며, 지구에는 홍수의 형태로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왔고 (1:2의 물이 그것을 나타낸다), 그로 인하여 태양으로부터 빛과 열이 차단됨으로써 전 지구적인 빙하시대가 왔다. 오늘날 지구에서 보는 식물, 동물, 사람들의 모든 화석들은 이 '루시퍼의 홍수'에서 비롯된 것이며, 오늘날 지구상에 살고 있는 식물, 동물, 사람들과 어떠한 유전적인 관계도 지니고 있지 않다 …” (참고문헌 6, p.7).

오늘날의 생물들은 6일 동안의 재창조(recreation)에 의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멸망도 없었고(no ruin), 복구도 없었다(no reconstruction)는 새로운 형태의 간격이론이 등장했음을 주목하라. 이 이론의 제안자들은 단지 장구한 시간의 간격만을 가정하며, 오래된 우주, 오래된 지구, 또는 둘 다를 이야기 한다.


부록 2 : 천사를 어디에 끼워 넣어야 하는가?

출애굽기 20:11은 하나님이 천지의 모든 만물을 6일 동안에 만드셨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천사들과, 원래는 선하게 혹은 거룩하게 창조된 모든 존재들이 포함되어야만 한다 (골로새서 1:16, 유다서 1:6절).

욥기 38:4, 7에서는 하나님이 땅의 기초를 놓을 때, 즉 창조의 첫째 날(창세기 1:1)에 땅을 창조하셨고, 아직 그분이 빛을 창조하시기 이전에 천사들(‘하나님의 아들들‘)이 있었다고 제시한다. 천사들은 영적인 존재로서, 인간처럼 망막이 있는 눈을 가진 것이 아니므로, 아마도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어둠 속에서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존재들이 언제 반역하여 사탄과 그의 악마 추종자들이 떠났는가의 문제가 등장한다 (베드로후서 2:4, 유다서 1:6절). 이 반역사건은 창조의 마지막 6일에 하나님이 모든 것을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고 선언하시기 이전에는 분명히 불가능하다 (창세기 1:31). 어떤 간격이론가들은 창조의 6일 이후와 창세기 3장의 사건 이전에는 이런 반역이 일어날 만한 시간이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얼마나 긴 시간이었는가?

우리는 창조의 6일(혹은 제 7일?) 이후에 하와의 유혹이 일어나기까지(창세기 3장) 얼마의 시간이 걸렸는지 모른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가인이 죄성을 가지고 태어났으므로, 그의 부모가 타락한 이후에 그를 임신했어야 했기 때문에, 그것은 하와가 임신하게 되기(창세기 4:1) 이전이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창조의 6일과 (인간의) 타락 사이에 일주일밖에 없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것은 충분한 시간인가? 다음을 생각하자:

1. 천사들은 영적인 영역/차원에 산다. 우리는 이것이 우리 자신의 공간/물질/시간의 연속체와 어떻게 연관되는지 모른다. 아인슈타인 이후로, 우리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으며, 예를 들면 중력 같은 것에 영향을 받으므로, 영적인 차원에서 시간은 (시간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우리가 아는 차원에서의 시간과 같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2. 위의 사항이 적용되지 않더라도, 한 주일의 시간도 충분할 시간일 수 있다. 그러나 창세기 1:2 이전에 간격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시간은 충분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인간적인 수준의 사고를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초인간적인 지능을 가진(전지하지는 않지만) 천사들은 분명히 사람들과 유사한 한계로 제한받지 않을 것이다.

3. 심지어 우리 사람들의 경우를 생각해 보더라도, 어떤 상황에 접근하여 만족할만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데 하루 혹은 한 시간으로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사람들을 선동하여 반역에 참가하게 하는데, 왜 꼭 오랜 시간이 필요한가? 평범한 시민들이 주먹질하고 폭도로 변하는 것은 수 시간 혹은 하루나 이틀의 선동만으로 충분하다. 참고로, 예수님의 재판에서 예루살렘의 군중들을 보라. 뒤이어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죄를 지은 천사들이 쫓겨나는 것도 그 이후의 매우 짧은 시간 내에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 몇 분 이내도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사들이 반역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창세기 1장의 1절과 2절 사이에 ‘간격‘이 있어야 함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그러한 관념은 창조의 6일 마지막에 모든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신 것과 상충된다.

 

*참조 : The gap theory—an idea with holes?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1294/

Morning has broken … but when?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386/

Unbinding the rules (critique of John Sailhamer’s sophistic version of the gap theory)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1659/

What about the ‘gap’ and ‘ruin-reconstruction’ theories?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cabook/chapter3.pdf

‘Soft’ gap sophistry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553/

God of the Gaps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4/n1/god-of-gaps

The meaning of yôm in Genesis 1:1–2:4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1_2/j21_2_52-55.pdf

Days 1–4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1_3/j21_3_69-76.pdf

The Genesis 5 and 11 fluidity question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754

The days of creation: A semantic approach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100/

Who Begat Whom? : Closing the Gap in Genesis Genealogies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1/n2/who-begat-whom

Gap theory revisited
http://creation.com/gap-theory-revisited

Creation compromises—Gap Theory
http://creation.com/creation-compromises#gap


번역 - 이종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19/i2/beginning.asp 

출처 - Creation 19(2):35–38, March 1997.

미디어위원회
2019-08-14

창세기 1장의 날들은 얼마의 시간이었는가? 

: 하나님은 그 단어들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이해하기를 의도하셨는가? 

(How long were the days of Genesis 1 ?)

Russell Grigg 


     창조주간의 날(days)들은 그 길이가 24시간(24 hours) 동안이었는가? 아니면 오랜 기간(long periods)들이었는가? 이 글은 창세기 저자가 사용했던 ‘시간(time)’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단어들을 검토해봄으로써, 그가 선택하여 사용했던 구체적인 단어들을 통해 어떤 의미를 전달하려고 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1]  
 

욤(yôm)의 의미

모세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창세기 1장의 창조에 대한 설명을 편집했을 때, '날(day)'을 가리키는 단어로 ‘욤(yôm)’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를 사용했다. 그는 수를 나타내는 단어들(‘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등)과, ‘저녁과 아침(evening and morning)’이라는 단어들을 욤과 결합시켰고, 그가 욤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했을 때 욤의 의미를 하루 밤/낮의 주기(one night/day cycle)인 것으로 주의 깊게 정의하였다.(창 1:5). 그 이후부터 전 성경에 일관하여 이런 식으로 사용된 욤은 항상 정상적인 24시간으로 된 날과 관련되어 있다.[2, 3] 그래서 하나님이 욤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사용하셨을 때는, 그분은 창조의 각 날들은 24시간의 하루였음을 전달하려고 의도하셨다는 것이 외견상으로 명백하다.

이제 만약 하나님께서 24시간보다 훨씬 오랜 기간을 전달하시기를 원하셨다면, 어떤 다른 단어들을 사용하실 수 있으셨을지를 생각해 보자.


‘시간‘을 나타내는 몇몇 히브리어 단어들

오랜 기간을 나타내는 몇몇 히브리어 단어들이 있다.[4] 먼저 퀘뎀(qedem) 이라는 단어는 주로 ‘고대(ancient)’를 의미하며 간혹 ‘오래된(of old)’으로 번역된다. 오람(olam)이라는 단어는 ‘끝없는(everlasting)’이나 ‘영원(eternity)’을 의미하고, ‘영속하는(perpetual)'이나 ’오래된(of old)‘ 또는 ’영원히(for ever)‘로 번역된다. 타미드(tamid)라는 단어는 ‘계속해서(continually)’ 또는 ‘영원히(for ever)’를 뜻한다. 아드(ad)라는 단어는 ‘무한한 시간(unlimited time)’ 또는 ‘영원히(for ever)’를 의미한다. 오렉(orek)이라는 단어는 욤(yôm)과 함께 사용될 때는 ‘날들의 길이(length of days)’라고 번역된다. 솨나(shanah)라는 단어는 ‘일 년(a year)’ 또는 ‘시간의 회전(a revolution of time)’(계절의 변화로부터)을 의미한다. 넷사흐(netsach) 라는 단어는 ‘영원히(for ever)’를 의미한다. 에트(eth)라는 단어는 보다 짧은 기간(시간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용어)을 나타내며, 모에드(moed)라는 단어는 ‘계절(seasons)’이나 축제‘(festivals)’를 의미한다. 이들 중 일부가 사용될 수 있었을지를 생각해 보자.

 

1. 창조가 수십억 년 전에 일어났던 사건이었다면

만약 하나님께서 창조 사건이 수십억 년 전인 오래 전 과거에 발생했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원하셨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이 있으셨다. 즉 야밈(yamim, yôm의 복수)이라는 단어를 홀로 또는 ‘저녁과 아침’과 함께 쓸 수 있으셨다. 그러면 그것은 저녁과 아침으로 된 ‘날들(days’)을 의미했다. 이것은 가장 간단한 방법이었을 것이고, 그래서 많은 날들을, 더 나아가 장구한 시대를 나타낼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다.

퀘뎀(qedem) 이라는 단어를 단독으로, 또는 ‘날들’과 함께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고대의 날들을 의미하였을 것이다. 오람(olam) 이라는 단어를 ’날들’과 함께 썼다면, 그것은 오래된 날들을 의미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장구한 시간 전에 창조 사건이 있었음을 전하려고 하셨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것을 말해주실 수 있는 최소한 3가지의 문장 구성법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 중 어떤 것도 택하여 사용하시지 않으셨다.
 

2. 창조가 수십억 년 전부터 계속 진행되고 있는 사건이었다면

만약 하나님께서 먼 과거에 창조를 시작하셨으나, 어떤 종류의 유신론적 진화가 일어나도록 하여 이후로 계속 진행되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원하셨다면, 그분은 그것을 말씀하실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이 있으셨다 :

도르(dor)를 단독으로, 혹은 ‘날들’, '낮들과 밤들', '저녁과 아침' 등과 함께 사용하여 표현하실 수 있었고, 그것은 여러 세대들에 걸친 날들과 밤들이었음을 의미할 수 있었다. 만약 이것이 그런 의미였다면, 진화론에서 주장하는 영겁(aeons)을 가리키는 최고의 단어였을 것이다. 또한 오람(olam) 을 전치사 레(le)와 함께, 그리고 '날들' 또는 '저녁과 아침'을 더하여 사용하였다면, 이것은 ‘영구적(perpetual)’인 것을 의미할 수 있었다. 또 다른 구조로 레 오람 바에드(le olam va-ed) 는 ‘시대를 나아가며’를 의미하며, 출 15:18절에서는 ‘영원무궁 하시도다’로 번역되었다.

타미드(tamid) 를 ‘낮들과 밤들’ 또는 ‘저녁과 아침’과 함께 사용했다면, 그것은 ”그리고 그 날들은 계속되었다”를 의미할 수 있었다. 아드(ad)를 단독으로 또는 오람(olam)과 함께 사용했다면, 그것은 ”그리고 그것은 영원히 계속되었다”를 의미할 수 있었다. 또한 솨나(shanah)는 특별히 복수 형태로 사용되면, ‘한 오랜 시간(a long time)’에 대해 비유적으로 사용될 수 있었다. 

욥 라브(yôm rab)는 문자적으로 ‘한 긴 날(a long day)’을 의미한다. (참조. 수 24:7에서는 ‘긴 계절, 또는 NASB에서는 ’긴 시간‘). 이런 구조는 만일 하나님이 ’날들‘이 오랜 기간이었다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기를 의도하셨다면, 그분에 의해서 잘 사용될 수 있었다. 그래서 창조과정이 오래 걸렸다는 것을 우리가 믿기를 원하셨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이것을 말해 주기 위해 사용할 수 있었던 몇 개의 적절한 단어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 중 어느 것도 사용하기를 선택하지 않으셨다.


3. 애매모호한 시간이었다면

만약 하나님이 창조과정이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에 대해 아무런 실제적 시사를 하지 않으시면서, 창조가 그냥 과거에 일어났다고만 말씀하시고 싶으셨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방법들이 있었다. 욤(yôm)을 '빛과 어두움(light and darkness)'과 결합시켜 나타내었다면, 그것은 빛과 어둠의 하루였음을 의미하였을 것이다. 빛과 어두움은 구약성경의 다른 곳에서 상징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모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저녁과 아침'과 함께, 특히 그 앞에 숫자들과 함께 쓰여진 욤(yôm)은 결코 애매모호할 수 없다.

예레미야 33:20절 및 스가랴 14:7절에서와 같이 '밤과 낮(day and night)'과 결합되어진 eth (time)는 모호할 수도 있었다. ‘빛과 어두움(light and darkness)'가 결합된 에트(eth)도(하나의 이론적 구조) 마찬가지다. 만약 이들 중 어떤 형식이 사용되었다면, 창조 ‘날들’의 길이는 많은 논란을 벌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들 중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으셨다.


저자의 의도

다음의 고찰은 하나님이 우리가 무엇을 이해하기를 의도하셨는지를 보여준다 :

1. 성경 어느 부분의 의미는 저자의 의도가 무엇이었는가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한다. 창세기의 경우 저자의 의도는 분명히 역사적인 설명을 기록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울 사도가 창세기를 대했던 방법에 의해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과 바울은 창세기를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로서 인용하셨고, 상징적인 신화나 비유로 생각하지 않으셨다.[5, 6]. 분명히 저자의 의도는 우화적인 시나, 환상, 또는 신화를 전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창세기에서 창조에 대해 말씀하셨던 것은 그와 같은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사실 모세는 창조의 날들과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앞에서의 ‘오랜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들(아래에서 괄호 안에 히브리 원어 발음 표시) 중 일부를 사용했다. 예를 들면 창세기 1:14절에서 모세는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사시(for seasons, 모에드 moed)와...”라고 기록했고, 창세기 6:3절에는 ”나의 신이 영원히(오람 olam)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창세기 9:12절에는 ”영세까지(도르 오람, 도르;까지 오람;영원, olam dor)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민수기 24:20절에는 ”종말은(아하리트, 아드, ad) 멸망에 이르리로다”, 신명기 30:20절에는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오레크 욤, 오레크;길이 욤;시간,생애, yôm orek)시니”, 신명기 32:7에는 ”옛날(욤 오람, yôm olam)을 기억하라”.... 등과 같이 기록했다.

왜 하나님은 다른 것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단어들을 사용하셨으면서도, 창조의 날들과 관련해서는 그러한 단어들 중 어떤 것도 사용하지 않으셨을까? 분명히 창조의 날들은 정상적인 지구의 자전에 의한 하루로 간주되도록 하셨던 것이 하나님의 의도셨다. 그리고 어떠한 장구한 기간이 추론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셨다.

옥스퍼드 대학의 히브리어 교수인 제임스 바(James Barr) 교수는 창세기 1장에서 사용된 단어들은 ”우리가 현재 경험하는 24시간으로 된 하루와 똑같은 연속적인 6일”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에 동의하고, 유수한 대학의 히브리어 교수들 중 어느 누구도 그와 같은 해석과 다르게 말하는 사람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7]

2. 아이들은 창세기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른 해석들이 생겨나는 유일한 이유는 사람들이 진화론/무신론 등과 같은 성경밖의 개념들과 조화시키기 위해 성경을 해석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3.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메시지이다. 따라서 성경 말씀은 현실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권위를 가지고 있다. 만일 누군가 성경에서 현실적인 부분을 제거하더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진리를 전해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경우에 독자들은 저자가 의도했던 대로 성경을 이해했는지 결코 확신할 수 없다. 더구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우리의 현실적 영역 밖에 있다면, 그때는 성경에 있는 단어들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는 그 단어들이 우리의 이해 범위를 넘어 전혀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 예를 들어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이와 같은 잣대를 적용한다면, 아마도 부활이라는 단어는 예수가 육체적으로는 다시 살아나지 못했으나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방법으로는 다시 살아나셨음을 의미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단어 게임이 성경에 적용될 때, 성경은 그 권위를 상실하고, 우리는 현실 세계에서 신본주의적 관점을 잃게 되며, 기독교는 삶을 바꾸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8] 


4. 만약 '날들(days)'이 보통의 날들이 아니었다면, 그때는 하나님은 수천 년 동안 그의 백성들을 심각하게 오도해온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수억 수천만 년의 오래된 연대와 진화론에 성경을 조화시키려는 시도가 있기 전까지, 주석가들은 보편적으로 창세기를 말씀하고 있는 그대로 기록된 그대로 이해했다.


결론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모세의 ‘펜’을 통해서, 창조의 ‘날들’은 글자 그대로 지구 자전에 의한 24시간의 하루들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기 위해 그의 방법을 사용하셨다. 이렇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숫자들’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단어들과 결합된 욤(yôm) 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를 사용하셨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것이 수십억년 전의 창조였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원하셨다면, 그때는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던 여러 좋은 방법들이 있었다. 만약 유신진화론자들의 주장과 같은 의도를 가지셨다면,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몇 가지의 구도가 있었다. 만약 시간 요소가 애매모호한 의미를 가지도록 말씀하셨다면, 히브리어로 그것을 그렇게 말하는 방법들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문자적인 태양일(24시간 하루) 이외의 다른 의미를 전달할 어떠한 구도도 선택하지 않으셨다.

사용된 히브리어 단어로부터 가능한 유일한 의미는 창조의 '날들'은 24시간으로 된 날들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세기 1장에서 말씀하셨던 것보다 더 명확하게 이런 의미를 전달할 수는 없어 보인다. 하나님이 이와 같은 의미로 말씀하셨다는 것은, 같은 단어인 ’날들‘이 일관적으로 사용된 출애굽기 20:9-11, 31:16-18절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 20:9-11).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 하라 여호와께서 시내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 (출 31:16-18).


References and notes

1. The author is indebted to James Stambaugh, 'The Days of Creation: A Semantic Approach', Creation Ex Nihilo Technical Journal, 5(1):70–78, 1991, for much of the material in this article, and to linguist Dr Charles Taylor of Gosford, NSW, Australia for his advice and help regarding the Hebrew. When we say 'days of 24 hours duration' we merely indicate that they were ordinary earth-rotation days, not that they were necessarily precisely 24 hours in length (the earth's rotation rate is gradually slowing down).
2. M. Saebo, in his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Old Testament 6:22, says that yôm is: 'the fundamental word for the division of time according to the fixed natural alternation of day and night, on which are based all the other units of time (as well as the calendar).' Cited from Ref. 1, p. 72.
3. For a further discussion of the meaning of yôm, see Charles Taylor, The first 100 words, The Good Book Co, Gosford, NSW, Australia, 1996, p. 21.
4. [4] The Hebrew words, anglicized spellings, and biblical references are cited from Young's Analytical Concordance to the Bible.
5. See Mark 10:6; 13:19, for example.
6. See Romans 5:12; 1 Corinthians 15:21–22, 45; 2 Corinthians 4:6; 1 Timothy 2:13–4:1.
7. Source: letter from Prof. James Barr to David C.C. Watson, dated 23 April 1984. Note that Prof. Barr does not say that he believes that Genesis is historically true; he is just telling us what, in the unanimous opinion of the world's leading Hebrew-language professors (including himself), the Hebrew words used were intended to convey.
8. Adapted from Ref. 1, p. 76.

 

*참조 : The meaning of yôm in Genesis 1:1–2:4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1_2/j21_2_52-55.pdf

Days 1–4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1_3/j21_3_69-76.pdf

Good approach misapplied to get ‘analogical days’ : A review of Genesis 1–4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1_2/j21_2_35-39.pdf

On literary theorists’ approach to Genesis 1: Part 1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1_2/j21_2_71-76.pdf

On literary theorists’ approach to Genesis 1: Part 2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1_3/j21_3_93-101.pdf

The days of creation: A semantic approach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100/

Did Jesus Say He Created in Six Literal Days?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nab/did-jesus-say-he-created-in-six-days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19/i1/days.asp 

출처 - Creation 19(1):23–25, December 1996.

미디어위원회
2019-08-14

유태인들에 대한 유전자 분석은 창세기를 확증한다.

(Genetics Analysis of Jews Confirms Genesis)

by Brian Thomas, Ph.D.


      일단의 유전학자 팀은 최근 107 개의 서로 다른 인종 집단에 속하는 6529 명의 사람들의 유전체(genomes)를 분석하였다.[1]. 그들은 다양한 인종 집단들에서 아프리카인 조상의 유전적 흔적을 발견했으며, 고대 아프리카인과 비아프리카인과의 혼합 시기를 추정하였다. 그들의 유태인 집단에 대한 분석결과는 문자 그대로의 창세기 역사를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다량의 유전 데이터들에 대한 집중적인 통계 분석에도 불구하고, 연구자들은 그들의 결과를 실제적인 연대와 부합시키기 위해 전통적인 역사적 자료에 의존하였다. 그 같은 방식에 따라서 저자들이 ‘놀라운 발견’으로 정의한 것은 성경 기록에 근거할 때 완전히 예상되던 결과였다.

하버드 의대 연구자들이 이끌고 있는 연구팀은 개인들 간의 DNA 염기서열 차이를 비교했고, 그 데이터를 가지고 몇 가지 집중된 분석을 실시하였다. 예로서, ‘3 집단 테스트(3 Population Test)’로 불리는 알고리즘으로 3개의 집단을 동시에 비교했는데, 그것은 그들 중 하나가 다른 두 개의 조상인지 아닌지를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

온라인 저널 PLoS Genetics(2011. 4. 21) 지에 발표된 그 연구 결과에 의하면, 북부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인들과 유전적으로 혼합되었다는 실제적 증거가 없었다. 이것은 그들의 지리적 거리를 생각할 때 상식적으로 맞는 것이다. 그러나 남부 유럽인들은 55 세대 전에 아프리카인과 어느 정도 혼합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55 세대 전은 1세대를 29년으로 가정하고 일정한 돌연변이율을 가정했을 때 약 1,600년 전에 해당하는 시기이다.[2]

그러나 저자들의 모든 창의력과 수고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결과를 실제 역사에 고정(부합)시키기 위해서 기록된 역사적 자료(근거)를 필요로 했다. 그들 자신도 이러한 결과를 ”역사적인 관점에서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적고 있었다[1]. 따라서 그들은 AD ”5세기 초까지 로마가 북아프리카를 점령하고 있었고, 실제로 무덤의 비문들과 문학적 참고문헌들은 무역 관계가 그 시대 이후까지도 계속되었음”을[1] 제시하고 있었다.

소위 ‘분자시계’(molecular clock) 데이터들은 가능한 이차적인 역사적 자료로 항상 보정되는데, 연대와 관련된 이들의 분석 결과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러한 이유로 분자시계가 처음 도입되었을 때에는 전도유망한 것이었으나, 곧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되었고, 그리고 매우 자주 화석에 진화론적 ‘연대’(dates)를 부여하는 데에 관련되어왔다.[3]

또한 PLoS 연구에서 8개 유태인 집단들 모두는 3~5%의 아프리카인 DNA 염기패턴을 가지고 있음을 그 유전 분석은 발견하였다. 이것은 ‘놀라운 사실’ 인데, 왜냐하면 세속적 역사 기록에서 각 유태인 집단들은 수백 년 동안 서로 격리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인의 DNA는 심지어 AD 1100년 이후 북유럽에 거주했던 사람들인 ‘아슈케나지 유태인(Ashkenazi Jews)’의 현대 후손에서도 발견되었다.

그 연구의 저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이러한 관측에 대한 한 조심스런 설명은, 많은 유태인 그룹들이 (BC 6~8세기에 일어났던 유태인들의 디아스포라 시작 이전에) 아프리카인과 섞인 한 공통 조상으로부터 후손되었다는 역사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1] 

그러나 다른 결과들과는 달리, 저자들은 관련 가능성이 있는 사건을 분명히 담고 있는 한 역사적 기록(성경)과는 연관시키지 않았다.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그 역사적 기록이 세속적 기록이 아닌 성경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중요한 역사적 연구의 주제로서 성경은 금기(taboo)시 되어있기 때문에 무시되었던 것일까?

성경 창세기 기록(창 41:45)에 의하면, 야곱(이스라엘)의 열두 아들 중 한 사람인 요셉은 이집트 출신의 아프리카인(아스낫)과 결혼했다.[4] 민수기 1장은 (요셉의 아들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 후손을 포함한 요셉의 후손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둘을 합치면 다른 지파보다 후손이 많았다.[5] 민수기의 다른 곳에서 요셉의 후손들이 상속한 토지 면적은 다른 지파들보다 더 컸다. 이러한 기록들은 모두 요셉의 아내인 아프리카인의 DNA가 계속된 세대를 통하여 확장되었음을 보여준다. 후에 친척과 후손들도 또한 아프리카인들과 결혼했을 수 있다.

실제로 요셉 이후 몇 세대를 지나서 모세는 아프리카인 여성과 결혼했다. 민수기 12:1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모세가 구스 여자(Ethiopian woman)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PLoS의 연구가 사하라사막 이남 아프리카인들과의 DNA 유사성을 특별히 찾고 있었지만, 성경에 어떤 유태인과 아프리카인이 결혼했었다는 사실이 명확히 상술되어 있다는 사실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인들도 또한 유태인들과 결혼했을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모든 아프리카인들을 나일강 지역에 거주한다면 이집트인으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인을 포함하여 이집트 남쪽으로부터 왔다면 에티오피아인으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대략 BC 1706년 경 유대인들이 이집트에 내려갔을 때부터 BC 721년 아시리아에 의해서 멸망될 때까지[6] 계속해서 그리고 그 이후에도 역시 아프리카인과 상호 결혼을 했을 것이다. 이러한 연대 범위와 맥을 같이하여, 그 유전적 연구는 유태인 조상들과 아프리카인들이 ”1,600~3,400년 전 사이”의 넓은 기간 동안 혼합되었음을 가리키고 있었다[1].

유전자 분석은 기껏해야 하나의 단서를 제공할 수 있지만, 고대의 역사적 기록은 더욱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다. 이러한 유태인 유전자 분석은, 유대 민족의 역사에 대해 구약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주의 말씀들이 참되시니이다...”(삼하 7:28) 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References

1. Moorjani, P. et al. 2011. The History of African Gene Flow into Southern Europeans, Levantines, and Jews. PLoS Genetics. 7 (4): e1001373.
2. More specifically, the team measured single nucleotide polymorphisms, which may be the result of random mutation or non-random cellular DNA alterations.
3. See, for example, Thomas, B. New Study Contradicts Flower Fossil Dates. ICR News. Posted on icr.org April 9, 2010, accessed May 25, 2011. And Thomas, B. Frozen Penguin DNA Casts Doubt on DNA-Based Dates. ICR News. Posted on icr.org November 25, 2009, accessed May 25, 2011.
4. Genesis 41:45.
5. Because these sons of Joseph were each blessed with 'tribe' status on par with their uncles, their populations were counted separately. According to Numbers 1, Ephraim and Manasseh totaled 72,700 people at the time of the exodus from Egypt, and the next largest tribe was Zebulon, at 57,400. Also, each one inherited a separate land area within what is today known as Israel.
6. Dates based on Ussher's Chronology, a charted summary of which can be found at creation.com


번역 - 문흥규

링크 - http://www.icr.org/article/6188/ 

출처 - ICR News, 2011. 6. 2.

미디어위원회
2019-03-20

중생대 파충류 화석에서 암이 발견되었다. 

(Triassic Tumor Raises Creation Questions)

by Brian Thomas, Ph.D.


       독일 벨버그(Velberg) 근처에서 발굴된 2억4천만 년 전으로 주장되는 트라이아스기(Triassic) 석회암 지층의 파충류 화석에서, 희귀한 악성 골종양(bone cancer, 골암)이 발견되었다. 이 발견은 질병의 근원과, 궁극적으로 생명의 기원에 관한 문제를 재조명하고 있었다.

독일 연구자들은 JAMA Oncology 지에 화석 생물의 대퇴골(femur)에 대한 미세 컴퓨터 단층촬영(micro-computed tomography, micro-CT) 스캔을 발표했다.[1] 그것은 내부의 확대된 부분을 보여주었고, 희귀한 골암인 골막골육종(periosteal osteosarcoma)의 특징적인 뼈의 이상 형태가 확인될 수 있었다. 이 발견을 보도하고 있는 PhysOrg(2019. 2. 8) 지에 따르면, 이 질병은 매년 약 850명의 미국 시민에서 발병되고 있지만, 화석에서는 낮은 비율로 발생한다는 것이다.[2]

2억4천만 년이라는 이 화석에 부여된 세속적 연대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아담과 하와가 존재하기 수억 년 전에 암(cancer)이 있었다고 결론 내려야할 것이다. 그러나 이 오래된 암은 창세기 1:31절의 말씀인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는 구절에 반하는 것이다. 골암으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은 이 질병이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특히 그것이 심히 좋을 리는 만무하다. 암을 심히 좋았더라고 말하는 신이 있다면, 신뢰할 수 없는 신으로 보인다.[3]

하나님이 병든 세상을 만드셨을까? 또는 생물의 창조 시에 어떻게든 질병도 사용하셨는가? 성경에 의하면, 그렇지 않다. 성경 창세기는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하기 이전인, 원래의 창조됐던 세계는 심히 좋았다고 기록하고 있다.[4] 사실, 예수님이 주셨던 ”크고 소중한 약속들” 중 하나는, 모든 피조물을 완전히 회복시키시겠다는 약속이다.[5]

이러한 딜레마를 풀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이 파충류 화석에 부여된 장구한 진화론적 추정 연대를 다시 살펴보는 것이다. 즉 트라이아스기 지층과 다른 지층들의 퇴적시기를 아담의 범죄 이후인 노아 홍수 시기로 보는 것이다. 사실 대홍수는 수많은 화석들의 형성과 매우 적합하다. 대격변이었던 전 지구적 홍수는 역암, 사암, 셰일, 석회암 등으로 분류되어, 대륙 넓이의 두텁게 쌓여있는 퇴적지층들과, 그 안에 들어있는 수 조개의 화석들을 잘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오늘날에는 일어나지 않는다.

화석에서 암의 발견이 희귀한 것은 홍수의 시기와 적합하다. PhysOrg 지의 보도에 따르면, ”암은 화석기록에서 거의 볼 수 없기 때문에, 일부 현장 발굴자들은 암이 수억 년 전부터 생물들에 퍼져 있었는지, 심지어 발생했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왔었다”고 지적했다.[2]

과거에 암 발생률이 낮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돌연변이는 암을 유발한다. 창세기 3장에 기술된 피조물에 대한 저주 이후에 돌연변이 발생률이 상승한 것처럼 보인다. 다른 연구들은 최근 몇 년 동안 암 발생률이 증가한 것을 보여주었다.[6] 이 돌연변이 시계를 거꾸로 감는다면, 홍수 이전에는 암 발생률이 낮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석에서 암의 희귀성은 성경에 기초한 예측과 일치하는 것이다.

질병은 드물었지만, 여전히 발병하고 있었다. 중생대 트라이아스기에서 암 화석의 발견은 장구한 연대를 믿고 있는 크리스천들에게는 하나의 딜레마가 되고 있는 것이다. 수십억 년의 진화론적 시간 틀에 동의하는 크리스천들은 암은 나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암을 보시고도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다고 믿어야 한다. 반면에, 이 화석 파충류의 암이 아담의 저주 이후에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크리스천들은 수억 수천만 년 전이라는 진화론적 시간 틀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References
1. Haridy, Y. et al. Triassic Cancer—Osteosarcoma in a 240-Million-Year-Old Stem-Turtle. JAMA Oncology. Published online before print February 7, 2019, accessed February 8, 2019.
2. Yirka, B. Bone cancer found in 240-million-year-old stem-turtle fossil. PhysOrg. Posted on phys.org February 8, 2019, accessed February 8, 2019.
3. The God of the Bible uses evils including cancer to bring about greater good, but the bad is still bad. See Thomas, B. 2017. Cancer Research Confirms the Curse. Acts & Facts. 46 (6): 15.
4. 2 Peter 1:4.
5. Isaiah 65:17.
6. See Thomas, B. Rising Animal Cancers Point to a Dying WorldCreation Science Update. Posted on ICR.org July 21, 2009, accessed February 8, 2019.


*관련기사 : '공룡도 암에 시달렸다'…공룡 화석서 골육종 흔적 첫 확인 (2020. 8. 4. 연합뉴스)

https://www.yna.co.kr/view/AKR20200804111100009?input=1195m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s://www.icr.org/article/11245/

출처 - ICR, 2019. 3. 5.

미디어위원회
2018-12-26

왜 하나님은 괴물 같은 공룡을 만드셨나요? 

(Why Would God Make Monsters?)

by Brian Thomas, Ph.D.


        달라스 지역에서 있었던 공룡 강의를 마친 후에, 어떤 부인이 아들이 물어봤던 질문을 나에게 전해주었다. 그녀는 그 대답을 알지 못했다. ”만약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시고, 창세기의 창조가 사실이라면, 왜 하나님은 괴물 같은 공룡을 만드셨나요? 티라노사우르스 공룡의 이빨을 보세요.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면 왜 그런 괴물을 만드셨을까요?”


그 질문은 결함을 갖고 있다. 즉 그 질문은 하나님이 이 괴물을 만드셨다는, 단 하나의 옵션만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러한 괴물을 만들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다른 말로 하면, 그 질문은 논리적 오류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 가지 옵션을 빠뜨렸다.

하나님께서 괴물을 만들지 않으셨다면(이 경우에 괴물 같은 공룡), 그렇다면 그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창세기 첫 장에는 하나님이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분명히 공룡들을 창조하셨다.[1] 분명히 공룡들은 지구상의 짐승들 사이에 있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공룡들을 만드셨지만, 괴물로 만드시지는 않았던 것인가?

태초에 티라노사우루스 공룡은 그들의 이빨을 과일이나 식물을 먹는 데에 사용했을 것이다.

같은 장에서 하나님은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괴물들을 만들지 않으셨다. 창세기 1:30절에 의하면, 원래의 동물은 식물을 먹었고, 서로 잡아먹지 않았다고 말씀한다.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태초에 티라노사우루스 공룡은 그들의 이빨을 과일이나 단단한 식물을 먹는 데에 사용했을 것이다.

따라서 소년의 질문에서 제외됐던 옵션은, 하나님이 공룡을 원래에는 보시기에 좋게 만들었지만, 창조가 끝난 후에 그 공룡을 괴물로 만든 무엇인가가 있었다는 것이다. 괴물(monster)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어떤 사람들은 거대한 몸체에 커다란 이빨과 같은 신체적 모습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악한 행동이 없다면, 커다란 생물은 커다란 이빨을 갖고 있는 친근한 자이언트가 될 수 있다. 오늘날에도 어떤 동물은 크고 날카로운 이빨을 사용하여 식물을 먹는다. 팬더곰(Panda bears)은 대나무를 먹지만, 당신은 그들의 이빨을 보았는가? 한 연구에 따르면, 조사된 18종의 악어들 중 13종이 34종의 식물들로부터 과일을 섭취하는 것으로 나타났다.[3] 괴물로 만드는 것은 신체적 모습이 아니다. 괴물로 만드는 것은 포악한 행동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태초에는 잘 행동하도록 동물들을 창조하셨지만, 그들의 모습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이 곧 포악해졌다.

성경은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의 죄 때문에 창조물을 저주하셨다고 말씀한다.[4] 하나님이 홍수를 이 땅에 보내셨을 때에, 그 당시의 사람과 동물들은 모두 괴물처럼 행동했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극단적인 포악함과 부패를 참지 않으셨다. 전 지구적 홍수는 공룡들을 포함하여 수십억 마리의 생물들을 파묻어 버렸다. 하나님은 괴물을 만드시지 않았다. 인류의 죄가 그렇게 만들었던 것이다.

공룡에 대한 질문에 도움이 되는 참된 역사에 대한 말씀은 또한 죄인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진실된 생명의 말씀인 것이다.

어떤 면에서 우리 각자는 내부에 괴물을 갖고 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 괴물을 만드신 것이 아니다. 우리 내부의 괴물은 하나님께 반역하며, 그 죄로 인해 우리를 죽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고 말씀한다. 공룡에 대한 질문에 도움이 되는 참된 역사에 대한 말씀은 또한 죄인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진실된 생명의 말씀이 되고 있는 것이다.


References
1. Genesis 1:25.
2. Genesis 1:31.
3. Platt, S. G. et al. 2013. Frugivory and seed dispersal by crocodilians: an overlooked form of saurochory? Journal of Zoology. 291 (2): 87-99.
4. Genesis 3; Romans 8:20.
5. Romans 5:8.

* Mr. Thomas is Science Writer at the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and earned his M.S. in biotechnology from Stephen F. Austin State University. Cite this article: Brian Thomas, M.S. 2018. Why Would God Make Monsters?. Acts & Facts. 47 (12).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s://www.icr.org/article/10987

출처 - ICR, 2018. 11. 30.

미디어위원회
2018-04-30

하나님은 정말 태양보다 식물을 먼저 창조하셨나? 

(Did God Really Create Plants Before the Sun?)

Scot Chadwick 


요약

하나님께서는 태양을 창조하시기 전인 창조주간 제 3일에 식물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이미 첫 번째 날에 광원을 만들어 태양이 수행할 많은 역할을 하게 하셨다. 본 글은 창조주간에 일어난 일들의 순서, 하나님이 첫째 날에 창조하신 빛의 본질, 창조주간의 길이, 하나님이 한 주간 내내 식물의 필요를 어떻게 제공하셨는지를 탐구해 보았다.


서론

성경은 하나님께서 생명체인 식물을 창조하신 후에, 태양을 창조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진화론에 의하면, 태양이 존재한 후에 식물이 출현한다. 창세기 1~2 장을 읽으면, 진화론에서 제안하는 시간 틀과 양립할 수 없는 연대기가 산출된다. 오랜 지구 연대 창조론자들은 창조주간의 하루는 장구한 지질시대를 나타낸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식물들은 어떻게 태양 없이 오랜 세월 동안 생존할 수 있었을까? 창세기 1장의 창조 과정에 대한 설명을 읽을 때, 적어도 두 가지를 중요하게 다루어야 한다. 그것은 사건의 순서와 날들(days)의 길이이다.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창조주간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창조주간의 첫째 날에, 하나님은 초기의 일시적인 광원을 창조하셨다 :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세기 1:3-5)

창조주간의 셋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온갖 종류의 식물들을 만드셔서 땅을 덮으셨다 :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창세기 1:11-13).

창조주간의 넷째 날에 하나님은 태양, 달, 별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셨다 :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창세기 1:14-19).

이 역사적 기록에서, 우리는 태양과 구별되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초기 빛은 태양과는 다르며, 어떻게 그 날이 하루 24시간의 규칙적인 날이 되었는지, 그리고 식물들이 이러한 조건 하에서 어떻게 번성했는지에 대해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창조물들을 위한 현명한 준비를 해놓으셨고, 만물은 쉼을 얻으며, 기뻐할 것이다.


첫째 날에 창조된 빛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첫째 날에 창조한 빛에 관한 여러 가지를 알 수 있다 (창세기 1:3~5). 첫째, 그것은 일종의 창조된 빛이었다. 즉, 광원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 빛은 다음 순간에도 존재했다. 빛이신 하나님처럼(요한일서 1:5), 그 빛은 영원한 빛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빛과 함께 계셨고(다니엘 2:22),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셨다.(디모데전서 6:16). 첫째 날의 빛은 하나님 자신과는 별개의 것처럼 보인다.

둘째, 뚜렷하게 낮과 밤 시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 빛은 어떤 위치가 있어서, 방향성을 갖고 있어야만 한다. (확산광이나 주변광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빛은 지구에 대해 고정되어 있어야했다.[1]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일이 연속적으로 일어났으므로, 지구는 한 쪽은 빛에 노출되고, 반대쪽은 어둠에 있도록 하면서, 첫째 날부터 축을 중심으로 회전을 했음에 틀림없다.

셋째, 그 빛은 또한 액체 상태의 물이 존재하도록 허용하면서, 지구를 따뜻하게 하는 적절한 열을 제공했다. 하나님께서는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을 나누셨고(창세기 1:7), 지표에 있는 물을 바다로 모으셨다.(9~10절). 이 빛 또는 다른 열원에서 나온 열은 넷째 날에 태양이 창조되기 전까지, 식물, 나무 및 기타 식생에 필요했다.

넷째, 이 초기의 일시적인 빛은 분명히 4일째의 태양으로 대체되었다.[2] 우리는 이 일시적인 물리적 실체들이 있었다가 제거됐던 몇몇 사례들을 알고 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때에 나타났던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하나님의 일시적인 준비물이었다.(출애굽기 13:21-22, 40:34-38). 광야 길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주신 만나라는 하나님의 선물도 있었다.(출애굽기 16:4,31,35). 그리고 동방박사들을 아기 예수에게로 인도했던 별도 있었다.(마태복음 2:1~10). 더욱이 태양과 달 그 자체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필요하지 않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요한계시록 21:23; 참조, 이사야 60:19, 요한계시록 22:5).

 

창조주간의 6일은 얼마의 기간이었을까?

창세기 1-2 장에서 '하루(day)'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 '저녁(evening)'과 '아침(morning)'과 연결되어 쓰인 '첫째 날(The first day)' (이하 ~째 날)은 지구의 완전한 자전, 즉 24시간의 하루(a calendar day, 달력일)를 가리킨다.(창세기 1:5).

• '밤(night)'과 대조되는 '낮(day)'은 하루에서 빛이 밝게 있었던 동안을 의미한다.(1:5, 14, 16, 18).

•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라는 구절(2:4)은 창조주간 전체가 이 문장에 요약되었음을 나타낸다.[3]

본문은 창조주간의 날(days)들이 평범한 날들이었음을 나타낸다. 이 날들은 불확실한 오랜 시간이 아니라, 규칙적인 24시간의 하루였다. 이러한 추정은 하나님께서 첫 번째 빛을 창조하신 창조의 첫째 날부터 적용된다. 그래서 셋째 날에 만드신 식물은 첫째 날부터 이미 빛이 비추었기 때문에, 태양 빛이 나타나기까지 불확실한 기간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왜 하나님은 태양을 4일째에 되어서야 만드셨을까?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기록해놓으셨지만, 하나님이 왜 이러한 순서를 따랐는지,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4] 우리는 태양이 첫째 날에 창조되지 않은 두 가지 가능한 이유를 추측해볼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은 생명체가 태양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그분에게서 오는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주면서, 생명체의 초자연적 기원을 강조하시기를 원하셨을 것이다. 확실히 하나님의 계획에서, 태양은 지구상의 생명체가 지속되기 위해서 중요하다. 그러나 지구상의 생명체는 태양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존 칼빈(John Calvin)은 창세기 1장의 본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주님께서는 창조의 순서에 따라, 태양과 달이 없이도, 우리에게 보내주실 수 있는 빛을 손에 들고 계셨음을 말씀해주고 있다”.[5] 이것은 물론, 태양(및 다른 별들)이 먼저 존재했고,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의 탄생에 기여했다는 진화론적 주장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태양을 신(神)으로 여겨 생명의 창시자로 태양을 경배하는 인류의 성향을 허물기를 원하셨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그의 백성들에게 '다른 신들을 섬겨 그것에 절하거나 일월성신에게 절하는 것'(신명기 17:3, 참조, 4:19, 시편 121:5~6)을 금지시키셨다. 안타깝게도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바벨론에게 넘기시던 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지어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여호와의 성전을 등지고 낯을 동쪽으로 향하여 동쪽 태양에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겔 8:16, 참조, 예레미야 8:2). 비슷한 경우로, 사람들은 모세가 하나님의 치료를 위한 도구로 만들었던 놋뱀을 숭배하고 있었다.(열왕기하 18:4, 민수 21:9 참조). 구원받지 못한 인류는 역사를 통해 이러한 행태를 보여주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로마서 1:25)


식물의 생존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제 태양이 창조되기 이전의 식물 문제로 돌아가서, 식물은 생존을 위해서 분명히 빛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분의 창조물에 제공했던 몇 가지 다른 필요한 요소들이 있었다.

빛 : 하나님께서는 광합성 과정을 통해 가시광선으로부터 에너지를 만드는 식물을 창조하셨다. 식물 세포의 엽록소는 주로 청색 및 적색 파장의 가시광선을 흡수하며, 주로 녹색 파장을 반사한다. 엽록소를 사용하여 이산화탄소와 물을 당(수소, 탄소 및 산소 원자로 만들어진)으로 변형시킨다.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께서 이미 태양과는 별개의 광원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래서 셋째 날에 창조된 식물들은 그들에게 필요한 빛을 갖고 있었다.

적절한 온도 : 대부분의 식물은 적절한 지표면과 적절한 대기 온도를 필요로 한다. 태양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일정한 거리가 주어지면, 이 온도는 주로 지구의 자전과 기울기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 지구의 정확한 회전으로 인해, 낮에 생성된 열은 밤의 냉기로 식혀져서, 온화한 온도가 제공된다. 또한 지구의 자전축의 기울기는 계절이 생겨나도록 하는 효과(tempering effect)를 만들어, 계절적 성장과 휴면하는 시기를 허용한다.

대기 : 하나님께서는 둘째 날에 대기를 창조하셨고, 그리하여 나중에 창조하신 식물의 생명을 보호하게 하셨다. 대기는 살아있는 세포를 손상시키는 자외선과 다른 우주 광선으로부터 식물을 보호한다. 또한 대기는 질소와 이산화탄소를 포함하여, 식물이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몇 가지 요소들을 제공한다.

물 : 식물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물이 필요하다.(창 2:5-6). 식물은 물을 광합성의 한 구성 요소로서, 그리고 식물의 다른 부분에 영양분을 운반하는 매개체로 사용한다. 또한 식물은 물을 사용하여 태양열로부터 식물을 식히고, 식물의 구조를 채워, 모양을 갖게 하며, 지지 역할을 할 수 있게 해준다. 세상의 첫 주간에 지표수와 대기 중의 수증기는 생물들이 살아가기 적합한 서식지를 형성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기여했다.

: 하나님은 둘째 날에 물과 땅을 나누셔서, 수생식물과 육상식물 모두에게 적합한 서식지를 창조하셨다. 땅은 식물의 뿌리 시스템을 위한 안정된 위치를 제공하며, 식물은 물과 바람과 같은 침식 요인으로부터 토양을 보호함으로써 혜택을 돌려준다. 땅은 또한 식물의 뿌리에 의해 수집되는 물과 질소와 같은, 식물이 필요로 하는 많은 영양소들을 보유하고 있다.

수분 매개 생물 : 식물은 다양한 방법으로 번식할 수 있지만, 대부분은 수분(pollination)을 통해 씨앗을 맺는다. 곤충과 새 같은 일반적인 수분 매개자는 필요한 식물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5일째에 만들어졌다. 진화론적 시나리오에 의하면, 곤충들이 비행할 수 있는 능력을 진화시킨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비-현화식물(침엽수와 같은 나자식물)이 현화식물보다 먼저 진화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수천만 년 후에 꽃가루를 생산하는 현화식물(피자식물)이 진화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창세기의 창조 순서와 진화론의 진화 순서가 서로 다른 또 하나의 사례이다.


결론

창세기에 기록된 창조 기사는 우리에게 우주의 첫 번째 사건에 대한 유일한 목격자의 증언을 제공하고 있다. 이 본문을 읽으면, 하나님이 지구상의 생물들을 위해 자신의 창조를 어떻게 지혜롭게 이루셨는지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분의 창조 과정은 인간이 만들어낸 진화론 또는 오래된 지구 연대 이론들과 매우 상반됨을 볼 수 있다. 그분은 식물들이 계속적으로 번성할 수 있도록 하셨으며, 그의 권능으로 모든 생명체들을 붙들고 계신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로마서 11:36)

반역적이고 죄 많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마련해주신 분도 동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각 사람은 자신의 죄 때문에 죽음의 형벌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죄인들을 대신해 죽게 하셨다. 성경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삶의 유일한 소망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용서와 영생을 얻는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고린도후서 4:6).


번역 - 문흥규

링크 - https://answersingenesis.org/days-of-creation/did-god-really-create-plants-before-sun/ 

출처 - AiG, 2017. 9. 22.

미디어위원회
2017-10-09

창세기와 21세기의 대화

임용철 


창세기와 현재의 대화, 가능할까?

창세기[1]가 ”신화인가, 아니면 역사적 사실인가”의 문제는 창조과학회의 존립과 직결되는 핵심 가치 중 하나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는 학회존립의 문제를 넘어서, 기독교의 존립을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이런 이유로 창립 이래 지금까지 창세기의 역사성을 수호하고 전파하는데 본 학회는 최선의 힘과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앞으로도 변함없이 지속될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노력과 수고에도 불구하고, 국내 주류 신학계와 교계에서는 이 사안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나 관심이 점점 부족해지고 있다. 오히려 유신진화론을 필두로 골격가설, 날-시대 이론, 다중격변론 등 창세기의 기록을 왜곡하는 이론들을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잘못된 분위기가 점차 확산되고 있다. 이런 상황을 우려함으로, 필자는 창조과학회의 일원으로써, 이런 분위기를 전환하는데 미력하나마 보탬이 되고자 펜을 들게 되었다.

사실 창세기의 기록이 기독교 내에서조차 역사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창세기가 분명 실제 했던 인류의 역사이며, 그 중요성을 인식시키는데 있어서, 어떤 접근방식이 보다 효과적일까에 대해 고민하여 보았다. 그 결과 다음 두 가지 과정을 알아보는 것이 중요함을 발견하게 되었다.

첫 번째는 일반 역사가들이 어떻게 역사를 정의하는 가를 고찰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하면 인류에게 일어난 무수한 사건들 가운데, 어떤 사건이 역사로 남고 어떤 것은 사라지며, 또한 역사와 신화를 구분 짓는 기준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두 번째 과정은 역사가들이 내린 역사의 정의에 비추어, 지금까지 창조과학회에서 창세기가 역사임을 주장해온 근거에 대해 고찰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창세기의 역사성에 대해 피력해온 기존의 방식을 그대로 고수하는 것이 효과적일지, 아니면 새로운 접근방식을 취해야 할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 먼저 일반 역사가들이 역사의 정의에 대해 어떠한 견해를 갖고 있는지 살펴보자.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이다.

일반적으로 역사란 '객관적으로 확인된 사실들을 시대순으로 정리해 놓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역사가들 사이에서 불후의 명저로 평가받는 『역사란 무엇인가』[2]를 저술한 E. H. Carr에 따르면, 이 정의는 매우 불완전한 것이다.

Carr(카)는 그의 책에서 역사에 대한 두 가지 이론을 언급한다. 첫 번째는 ”역사란 사실을 객관적으로 편찬하는 것이라는 해석보다는, 사실이 무조건 우월하다고 간주하는 역사이론”이다. 다른 하나는 ”역사란 해석과정을 통해 역사의 사실들을 확정하고 지배하는 역사가의 정신에 의한 주관적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Carr에 의하면, 이 두 이론 가운데 어느 하나의 주장만이 옳다고 말할 수 없고, 역사가의 주관적 산물인 ‘해석’과 그의 해석에 따라 선택된 ‘역사적 사실’의 필연적인 상호작용이 역사라는 것이다. 그의 책 1장 말미에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이 기록되어 있다.

”역사란 역사가(historian)와 그의 사실들(his facts)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과정,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3]

여기서 Carr가 역사란 ‘역사가와 역사적 사실들’이라 하지 않고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 가운데 무엇을 기록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주체가 바로 역사가이며, 특정 사건을 선택하게 된 데에는 그것을 바라보는 역사가의 해석이 필연적으로 개입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역사란 단순한 사실들의 기록을 시대순으로 나열한 것이 아니라,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이다.

역사에 대한 Carr의 주장을 ‘성경’에 적용해 보자. 성경은 진정한 역사가이신 하나님께서 만물의 탄생부터 인류가 걸어온 모든 역사적 사건(사실)들 가운데, 오직 성경의 기록 목적에 부합한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들이 하나님의 주관적(절대적) 해석에 의해 선택되어 기록된 것이다.[4] 또한, 하나님은 역사의 기록자이신 동시에, 인류역사에 끊임없이 개입(Carr의 말에 따르면 상호작용)하시고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주관자이시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창세기가 역사로 인식되기 위한 첫걸음은 그것을 기록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는 창조과학회가 지속적으로 강조해온 것이기도 하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다음으로, Carr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한다.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자 역사가인 Croce(크로체, Benedetto Croce) 역시 '모든 역사는 현대사(혹은 당대사, contemporary history)”라고 했다.[5[ 이것이 말하는 의미에 대해 Carr의 부연 설명을 들어보자.

”역사에서 배운다는 것은 결코 단순한 일방적인 과정이 아니다. 과거에 비추어 현재를 배운다는 것은 또한 현재에 비추어 과거를 배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의 기능은 과거와 현재의 상호관계를 통해 그 두 가지 모두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진전시키는 데에 있다.”[6]

위의 설명을 좀 더 쉽게 풀어보면, 역사는 마치 ‘현재’와 ‘과거’라고 하는 낯선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대화로 비유할 수 있다. 이 둘 사이의 대화를 통해 서로에 대해 몰랐던 점을 배우게 되며, 대화가 잘 통하고 그 내용이 깊어질수록, 두 사람이 서로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또한, 두 사람 간에 이루어지는 대화의 기능과 두 시대 사이에 일어나는 역사의 기능은 같다고도 할 수 있다. 여기서 Carr가 제시한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간단명료한 정의를 창세기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견해들에 대입해 보자. 그러면 그 둘 사이의 관계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먼저, 창세기를 신화나 설화로 보는 견해는, 마치 대화가 전혀 통하지 않는 두 사람의 관계와 같이 현재와 창세기 사이의 대화는 전혀 불가능하다고 보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주된 이유는 현재의 주류과학인 진화론적 해석과 주장만을 사실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은 현재를 통해 창세기를 더 깊이 이해한다거나, 혹은 현재를 사는 사람들이 창세기로부터 무언가 배울 수 있다는 생각이 아닌 것이다.

반면, 유신진화론 및 오랜 연대를 주장하는 이론들은 현재와 창세기 사이의 대화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창세기를 신화로 취급하는 입장보다 그나마 낫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입장 역시 Carr의 견해에 따르면, 창세기를 역사로 대하는 올바른 태도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유신진화론의 주장이 창세기 1장의 창조를 진화론적 해석을 가미한 현대 과학이론으로 설명하려는 ‘사실성’에 강조를 둔 시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역사란 ‘사실’과 역사가의 ‘해석’ 사이의 상호작용이다. 그러므로 예상할 수 있듯이 이 이론이 창세기를 대하는 태도에서 유신진화론이 문제를 야기시키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유신진화론은 현재의 진화론적 지식을 바탕으로 창세기를 해석하려고만 하는 일방적인 시도를 한다. 결국, 창세기로부터 무엇을 배운다는 태도를 취하지 않으므로, 쌍방간의 대화가 아닌 일방적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도 역시 창세기를 역사로 보는 입장이 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인의 합리적 선택이 될 수 없다.

 

창세기가 역사인 이유 : 창조과학회의 입장

이제 점검할 사항은 지금까지 창세기가 역사임을 주장해온 창조과학회의 접근방식을 고찰하는 것이다. 이는 그 접근방식을 앞서 소개한 역사에 대한 정의와 비교하는 것이다. 필자는 본 학회가 지금까지 창세기가 역사임을 주장하는 데 사용된 내용을 살펴보고 종합한 결과, 그 내용들을 크게 두 개의 범주로 나눌 수 있었다.

하나는, 창세기의 역사성을 성경 안에서 찾는 것이었다. 성경은 기록자와 기록된 시대를 초월하여 놀라우리만큼 일관성과 통일성을 갖는 특징을 지닌다. 창세기의 기록은 다른 책들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거나 수정되어야 할 필요성을 전혀 지니지 않는다. 더욱이 창세기의 사건들이 실제 일어난 것임을 강력히 지지하는 말씀들을 성경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창세기가 역사임을 주장하는 두 번째 범주는, 다양한 학문적 자료들을 통해 진화론의 비과학성을 드러내고, 현재까지 알려진 과학적 발견들이 오히려 창세기에 기록된 그대로의 창조를 지지한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정리하자면, 창조과학회는 ‘성경 그 자체와 과학에 입혀진 진화론적 해석의 제거’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창세기가 역사라는 점을 강변해 왔다.[7]

하지만, 이러한 접근방식 역시 창세기가 역사임을 강조한다기보다는 창세기의 ‘사실성’을 강조한 것이다. 앞에서 역사란 ‘사실들을 시대순으로 나열한 것이 아니다’는 Carr의 견해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접근방식 또한 창세기가 온전한 역사의 지위를 얻도록 하는 데에는 한계를 지닌다. 따라서 창세기의 ‘사실성’을 강조하는 접근방식을 계속 유지한다면[8] 앞에서 지적한 유신진화론이 갖는 것과 비슷한 유형의 문제가[9] 발생할 수 있다. 또한, 창세기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여러 이론들의 주장을 압도하거나 허물기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창세기가 진정한 역사의 지위를 회복하려면, 이 기록이 사실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이것을 기록한 기록자의 해석과 그 의도를 파악하여 창세기와 현재 사이에 대화를 시도하여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두 시대 모두에 대한 깊은 이해를 진전시킬 수 있어야 한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은 지금도 창세기를 통해 대화하려는 누군가를 찾고 계시며, 이러한 대화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창세기는 적어도 그러한 시도를 하는 그 사람에게 역사가 될 것이다. 결국,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가로, 이 문제에 대해 모두가 공감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길뿐이다. 그러므로 이 일은 섣불리 시도하기 어렵고 두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렇다고 대화를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은 창세기를 역사라고 믿는 한 성도로서 직무유기라는 죄책감에 용기를 내어 대화를 시도해 본다.


창세기와 현재 사이의 대화-창세기에 비추어 현재를 배우다.

서로 알지 못하는 낯선 두 사람 사이에 대화를 시작하기 위한 좋은 방법이 무엇일까? 아마도 상대방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관심사가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것이 그 시작일 수 있다. 만약 두 사람의 관심사가 같거나 유사하다면, 대화가 더욱 깊어지고 둘의 관계도 깊어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창세기와 현재 사이에 대화를 시도하기 위해 먼저 창세기(여기서는 1장)가 중요하게 여기는 관심사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가장 오래된 역사의 기록을 담고 있는 창세기 1장에는 시공간 속에 처음 등장하는 하나님 나라의 형성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1장에 기록된 내용 중에는 ‘하나님’이 32차례, 다음으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가 7차례 등장한다. 이 사실로 미루어 창세기 1장을 기록한 역사가의 주요 관심사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며 그 모든 과정과 결과물이 ‘좋았다(Good)’라는 것이다. 이 두 단어 중에 필자가 현재와의 대화를 시도하고자 하는 단어는 하나님에 비해 그동안 큰 관심을 받지 못했던 ‘좋았다(Good)’[10]이다. 먼저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 Good이었을까 하는 점이다. 물론 일차적으로 그날 지으신 결과물 자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만일 결과물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굳이 날을 나누어 순차적으로 창조하실 필요 없이 단숨에 모든 것을 만드셨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Good이 포함하고 있는 내용이 ‘하루’라는 정해진 시간과, 그 시간 안에 피조물이 만들어지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완성된 결과물 모두를 포함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11] 이렇게 피조물이 만들어지는 데 필요한 하루라는 시간, 만들어지는 과정, 그리고 결과물이 모두 합쳐진 것을 표현한 단어가 Good이라고 할 때,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아직 시공간 속에서 창조되지 않아 어떤 것이 없는 상태의 ‘하루’[12] 역시 Good이라는 점이다. 사실 창조의 6일 과정 대부분은 피조물 중 무언가가 빠져있는 부재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하루라는 시간과 그 안에 이루어진 모든 것들에 대해 Good이라고 말씀하셨다. 반대로, 창조의 6일 동안 하루하루 지나면서 전날의 부재 상태가 하나씩 채워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전날보다 ‘더 좋았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여전히 Good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사실은 창세기 1장에 등장하고 있는 Good의 정의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Good의 정의가 매우 다르다는 점을 알려주고 있다. 이에 필자는 창세기 1장에 기록된 Good에 대해 지금까지의 내용과 이 장의 또 다른 핵심어인 ‘하나님’으로부터, Good이라는 단어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려보았다. Good이란 ‘하나님의 뜻하신 바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 내에 하나님의 열심과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과정과 그 결과물’이다.[13]

개인적으로, 창세기 1장의 내용을 근거로 내린 Good에 대한 정의가 창세기와 현재 대화의 물꼬를 트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현재를 살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다음과 같은 하루를 살라고 강력하게 요구하고 계신 것 같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목적하신 바가 하나님의 정해진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열심과 능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모든 과정과 그 결과’가 실현되는 삶을 말한다. 이 하루가 21세기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하루’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한 마디 덧붙이자면, Good의 정의에 대한 내용을 정리하면서 필자의 머릿속에 계속해서 떠올랐던 말씀 빌립보서 4장 13절의 말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바울의 고백이 갖는 의미에 대해 독자 여러분도 묵상하여 보길 권한다.


현재에 비추어 창세기를 배우다.

앞서 창세기 1장에 비추어 현재를 바라보고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면, 이제 현재를 통해 창세기를 더 깊이 이해해보도록 하자. 대화의 시작은 역시 21세기 현재를 대표하는 단어가 무엇인지 찾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필자가 생각하는 이 단어에 대해 힌트를 드리면, Good이 하나님 나라의 시작과 함께 등장했듯이, 세상 나라의 시작이 되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 시점부터 지금까지 세상 나라14)를 대표해온 단어로, 세상 나라의 부흥을 이끈 주역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창세기 3장에서 뱀이 하와를 유혹할 때 Good의 정반대 개념으로 등장한 ‘악(Evil)’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마치 뱀이 허물을 벗고 새로운 껍질로 갈아입듯, Evil의 사전적 의미와 발음이 완전히 바뀐 그런 단어이다. 아마 이 단어가 제시되는 순간, 독자 여러분 가운데 의아해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이가 있을 수도 있다. 이 단어의 정체는 아이러니하게도 ‘더 좋은(Better)’이다. 이제 왜 Better가 현재의 세상(나라)을 대표하는 단어이며, Evil과 같은 뜻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Better를 통해 어떻게 창세기를 더 깊이 알 수 있는지에 대해 나누고자 한다.

먼저, 필자가 현재를 대표하는 단어로 Better를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독자가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은 개인과 기업, 그리고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생존경쟁이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이러한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Better가 되는 길 밖에 없다고 가르치고 있으며, Better가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신자와 불신자를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것이 현실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 자신, 그리고 가족의 삶에서 가장 염려스러운 부분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기 바란다. 아마도 자녀들은 상급학교 진학과 취업일 것이다. 부모세대는 자신이 속한 직장이나 조직에서 쫓겨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더욱 심각한 문제는 오늘 Better가 되었다고 내일 Better가 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현대인들을 불안과 두려움으로 몰아넣는 가장 큰 요인이 되고 있다. 사실 우리 사회의 크고 작은 문제들 대부분은 Better가 되기 위해 벌이는 경쟁 때문에 생긴 부작용이다. 이런 이유에서 Better는 현재를 대표하며, 생존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인 동시에, 겉보기에는 ‘더 좋은’의 뜻이 있지만, 그 본질은 인간의 삶을 피폐함과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Evil이다.

이제 현시대를 대표하는 Better라는 단어를 통해 창세기의 한 사건을 더 깊이 이해해보도록 하자. 창세기 3장에는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난 후(Good의 상태가 깨어진 후), 그들에게 일어난 여러 변화가 기록되어 있다. 제일 처음 나타난 변화는 자신들이 벌거벗었으며, 그 상태가 부끄러운 것임을 알게 된 것이었다(7절). 그리고 불안과 두려움(8절, 10절)이 엄습했으며, 서로에 대한 원망과 책임의 전가(12절, 13절)로 관계가 깨어졌고, 해산의 고통(16절)과 수고함(17절), 그리고 낙원이었던 에덴동산으로부터의 쫓겨남(23절)과 죽음(19절)이었다. 이러한 변화들과 현재 Better가 되기 위해 벌이는 치열한 경쟁으로 생긴 개인과 사회 문제들을 한번 떠올려 보자. 놀랄 만큼 흡사하지 않은가? 이 세상에 아담과 하와에게 일어난 이 변화의 내용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사는 사람이 존재할까? 솔직히 말하면, 이 변화 중 절반 이상이 필자의 삶에서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이처럼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불순종의 결과와 21세기 경쟁사회에서 Better를 추구하는 삶의 모습이 다를 바 없다는 점에서, 오늘날 Better의 정체는 창세기 3장에 등장하는 Evil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창세기의 Evil이 곧 현시대의 Better인 것이다. 이 관점으로 창세기 3장을 재해석하면,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의 본질은 결국 하나님을 경쟁상대로 본 것이며, 그 열매를 먹는 순간, 그들 자신을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올려놓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날 경쟁사회에서 나타나는 불안과 고통 등, 앞에서 나열한 문제점들이 그들에게 찾아온 것이다.

끝으로, Better에 대한 정의를 내려 봄으로써 지금까지의 주장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이 단어의 정의를 내리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Good의 정의에서 ‘하나님’ 대신 ‘내’가 들어가면 된다. Better란 ‘내가 목적한 바가[15] 내가 정한 시간 내에 나의 열심과 능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모든 과정과 그 결과’이다. 그러므로 Better의 또 다른 표현은 ‘내가 보기에 좋은 것’이다. 현재를 대표하는 단어 Better를 통해 창세기 3장의 범죄 사건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와 Good과 Better의 관계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는 기회가 되길 소망한다.


글을 마무리하며

역사를 공부한 전공자도 아니고, 신학을 전공한 전문가도 아닌, 평신도로 글을 쓰다 보니, 역사에 대한 짧은 지식과 인용에 의존해 창세기를 역사로 바라보고자 하는 필자의 시도에 여러 실수와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심지어 누군가는 Carr가 말한 ‘현재와 과거의 대화’는 이런 방식의 접근이 아니라는 철퇴를 내릴지도 모른다.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실망하지 않는 이유는, 이 글을 써 내려 가는 내내 필자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을 만나 대화하고 온듯한 느낌을 받았으며, 필자 스스로가 21세기를 사는 범죄한 아담임을 직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대를 사는 성도의 목적이 경쟁에서 이겨 내가 보기에 좋은 하루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 1장에서 시작된 그 하루처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하루를 사는 것임을 깊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미주
1. 여기서의 창세기는 주로 논란이 되는 1장부터 11장까지를 지칭함.
2.『역사란 무엇인가』 Edward Hallett Carr, 까치.
3. 같은 책, 46쪽.
4. 참고로 E. H. Carr는 기독교의 하나님은 물론 초월자의 존재나 그의 역사개입은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다. (같은 책, 71쪽과 105쪽 참고)
5. 같은 책, 34쪽.
6. 같은 책, 96쪽.
7. 이 주장은 학회 전체의 입장이 아닌, 필자 개인의 소견임을 독자 여러분께 밝힌다.
8. 기존의 시도에 오류가 있다거나 잘못이 있어서 변화를 주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님을 밝혀둔다.
9. 창세기에 비추어 현재를 배운다거나 두 시대 모두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진전시키기 어렵다는 점.
10. 글의 의미를 전달하는데 있어 ‘좋았다’라는 표현 보다는 ‘Good’이 효과적이라는 판단에 Good을 사용하고자 한다. 이후 언급될 ‘Better’와 ‘Evil’ 등의 단어도 같은 이유에서 영문으로 표기하였다.
11. 이미 이러한 주장이 있었다면 필자의 무지를 용서해주길 바란다.
12. 예를 들어, 첫째 날에는 동물이나 식물, 해와 달과 별은 아직 지어지지 않았다.
13. 이 내용 역시 학계에 이미 알려진 사실이라면, 필자의 무지를 용서해주길 바란다.
14. 여기서의 세상 나라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분의 통치 대신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지배 아래 있는 모든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15. 예를 들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


출처 - 창조188호

미디어위원회
2017-10-02

창세기의 역사성에 관하여 제기되어 왔던 문제들

김홍석 


    창세기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주장들이 있다. 견해가 다른 이들의 주장의 근거를 파악하고, 그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는 일이다.


I. 서론

창세기의 ‘역사성’이란 어떤 의미일까? 창세기의 ‘역사성’이란 창세기의 기록이 사실 그대로의 기록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창세기의 역사성을 의심하는 근저에는 크게 세 가지 논의가 있다.

첫 번째는 창세기 1~11장에 나타나는 내용이 신화적이며 근동의 설화들과 유사하므로, 이 내용은 고대 근동의 설화들로부터 차용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두 번째는 창세기 기록이 성경 자체 내에서 모순점이 발견된다는 주장이다. 세 번째는 인간이성주의와 과학의 발전에 따라 새로운 지식으로 알게 되는 사실들과 창세기의 기록이 모순된다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II. 창세기 1~11장과 고대 근동의 설화들

먼저 창세기 1~11장의 내용과 고대 근동의 유사한 설화들에 대하여 살펴보자.[1] 창세기 1~9장은 아트라하시스 서사시와 수메르 홍수설화에서 창조로부터 대홍수에 이르기까지의 세계사의 윤곽을 서술하고 있다는 면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길가메시 서사시와 창세기 6~9장의 홍수에 관한 내용은 매우 유사하다. 하지만 이것은 창세기의 기자가 길가메시 서사시를 듣거나 읽은 적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전승들은 고대 근동에서 그 시대 지식의 일부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창세기나 근동의 설화들이나 모두 다음의 내용을 지닌다. 우선 눈에 보이지 않는 초자연적인 세계가 존재하며, 어떤 한 하나님 또는 여러 신이 존재하며, 그들은 인격적이며 생각하고 말하고 사람들과 교통할 수 있으며, 실제로 인간사를 통제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이 물질 이상의 영적인 존재라는 인식에서도 공통의 인식을 보인다. 아트라하시스는 사람이 진흙의 혼합과 죽은 신의 살과 피로 만들어졌다고 하며, 애굽의 문헌들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빛과 어둠, 땅과 바다 사이를 분리하는 행위로서의 창조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창조 개념은 고대 근동의 신학에서 모두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 주제의 유사성을 넘어 이면 즉 그 내용 면에 있어서, 신과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인식은 너무나 다르다. 메소포타미아의 ”에리두 창세기”는 존재에 관하여 시종 긍정적이며 낭만적으로 인식한다. 그것은 점점 더 진보한다고 본다. 사물들은 점점 더 좋아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성경에 따르면, 사물들은 하나님 말씀에 의하여 창조되던 당시에 완전한 것이었으나, 사람의 죄악으로 인해 점점 나빠져서 급기야 노아의 방주에 태워진 생물들 외에는 모두 물 심판을 받아 죽음을 맞이할 정도로 점점 더 나빠졌다. 이는 수메르 설화의 취지와 다르다. 창세기는 메소포타미아의 인본주의적인 낙관주의를 단호히 부인한다. 창세기에서 인류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존재이다.

바벨론사람들과 가나안사람들은 신들이 여자들과 성적인 결합을 맺는 것은 풍요의 의식으로서 제의적 매음과 결혼 의식을 행하여 토양의 비옥함과 국가번영을 촉진시킨다고 믿었다. 하지만 창세기 6:1~8은 그런 관습들을 절대적인 공포로 여긴다. 오히려 그런 관습들은 노아홍수라는 하나님의 물 심판을 초래한 행위들이다.

메소포타미아 설화들은 홍수가 사람들의 소란과 땅의 과잉 인구에 화가 난 신들에 의하여 보내졌다고 말한다. 바벨론의 노아는 우연히도 홍수를 지지하지 않는 신을 경배했기 때문에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일단 홍수가 시작되자 그것은 신들의 통제를 벗어났으며, 신들은 홍수에 의해 공포에 사로잡혔다. 마지막에 가장 강력한 신인 엔릴이 희생제사에 나타나서 ‘노아’가 아직 생존해 있음에 놀란다. 홍수 후에 메소포타미아의 신들은 인구증가를 억제할 대책을 찾는다는 것이다. 이 설화와는 대조적으로, 창세기는 신과 인간에 대하여 너무나 다른 내용으로 서술되어있다.

고대 근동의 다신론에 비하여 창세기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강조한다. 특히 해, 달, 별들은 고대 근동의 신관에서 숭배의 대상이었지만, 창세기에서 그것들은 단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신 피조물들이며,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운행되는 것들이다. 고대 근동의 신화에 의하면, 신들은 자신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게 하려고 사람을 창조하였다. 반면 창세기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 창세기 1~11장은 다신론에서의 주장과는 반대로 하나님의 유일하심, 정의, 전능하심, 사람을 돌보심을 강조한다. 메소포타미아가 사람의 지혜에 집착하고 있는 반면에, 창세기는 사람의 죄를 고발한다.

창세기를 전체적으로 조망해 본다면, 창세기 1~11장은 족장과 그들의 소명에 대한 근거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창세기 12장부터 이어지는 족장들의 기사는 우리가 창세기 1~11장을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좀 더 부연하면, 창세기 3~11장은 사람에게 왜 구원이 필요한지를 설명하며, 창세기 1~2장은 세계의 원래 상태를 알려주는 동시에 족장들의 약속이 완전히 성취되면 궁극적으로 회복되어야 할 구속이라는 목표를 보여준다. 이러한 내용이 어떻게 고대 근동의 설화들과 비교될 수 있겠는가? 모든 인류가 노아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주제들과 사건들에 대하여 비록 왜곡되긴 했지만, 공동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창세로부터 홍수까지의 주제와 일부 피상적 내용에 있어서 유사성은 오히려 창세기의 내용에 대하여 그 사실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III. 창세기 자체의 내용이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내용

다음으로, 창세기 기록들 가운데 성경 자체 내에서 모순된다는 이유로 창세기의 역사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제시해온 주장들을 분석하여보자. 다만, 시간에 대한 문제는 지면 관계상, 그리고 주제 자체가 다른 여러 주제에 비하여 살펴볼 내용이 너무 많으므로 차후에 별도로 다루려 한다.[2]

첫째, 창세기 1:14~18과 연관된 내용을 살펴보자. 이 구절들의 이해에 있어서 궁창이 오늘날의 대기권이라면, 궁창에는 별들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창세기는 사실 그대로를 기록한 역사성을 가진 기록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본문은[3] 그저 막연한 하늘이라고 하지 않고, 하늘의 궁창이라는 장소를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욱 의미가 있다. 이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별빛들도 하늘의 궁창에 와 닿아있는 상태에서 이 세계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아담에게 태아기, 유아기와 같은 어린 시절이 없이 갑자기 성인으로 존재하기 시작한 것과 같이, 이 우주의 천체들도 성숙하고 그 빛들이 넷째 날에 이미 지구의 땅을 비추는 상태에서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둘째, 창세기 1장에서 식물과 사람의 창조순서가 창세기 2장에서는 바뀌어서 나타난다는 주장이 있다. 이를 통해 각각 다른 문서들의 조합이라는 문서설의 근거로 삼기도 한다. 또 서로 모순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창세기의 역사성을 부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창세기 2:5에서 들의 초목과 밭의 채소가 의미하는 바는 그저 식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노동력이 투여되어 경작되는 농작물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 앞에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또한 ”땅을 갈 사람이 없었으므로”라고 농작물의 부재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사람이 먹을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농사, 경작을 시작하게 되는 것은 선악과사건 이후이다. 그러므로 처음 사람을 지으실 때는 선악과사건 이전으로, 땅에 식물들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지만, 반면 농작물이라는 것은 존재할 필요조차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어지는 내용은 왜 이렇게 농사를 힘들게 지어야만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선악과사건이 등장한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의 순서와 창세기 2장의 순서는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셋째, 선악과 사건 이전에 아담과 하와 그리고 동물들은 식물들을 먹고 살았기 때문에, 죽게 된 식물들도 있었을 것이므로, 그것이 선악과 사건으로 인하여 죽음이 시작되었다는 기록과 모순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이 의미하는 생명은 사람과 동물들에게 있는 것이다. 식물들에는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다. 식물들은 살아있는 것들(히. ‘네페쉬 하야’)이 아니라, 그저 환경과 음식의 역할을 하는 배경적 존재들로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식물들은 죽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식물의 경우 성경이 의미하는 생명과 죽음의 의미와 배치되지 않는다. 따라서 선악과사건 이전에는 죽음이 없었다는 것과 식물을 먹었다는 것은 모순되지 않는다. 또 한편으로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직접적인 대상은 사람이었다.

넷째, 창세기 3:14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뱀에게 흙을 먹고 살도록 지시하셨다. 그러나 뱀은 흙을 먹고 살지 않는다. 이런 근거로 창세기의 기록을 역사적인 기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창세기 9:3에서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먹을거리의 질서가 변경되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또한, 노아방주에 태워졌던 정확한 수의 동물들을 생각해보자. 방주에서 육식하는 동물들이 있었다면, 그 정확한 수의 동물들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었겠는가? 이러한 정황에 따르면, 노아홍수 이전까지 사람들과 동물들은 육식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뱀의 경우 노아홍수 이전까지 흙을 먹고 살다가, 노아홍수 이후에 먹을거리의 질서가 변경되면서 사람과 동물들의 육식이 허용되고, 이때 뱀도 먹는 것이 달라졌을 가능성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천년왕국으로 회복된 모습을 보여주는 이사야 65:25을 주목하자.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라는 구절은 동물들의 육식이 사라지고,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게 된다는 점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다섯째, 가인이 아벨을 살해하였을 당시까지 성경에는 아담, 하와, 가인, 아벨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가인은 누구를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인가? 그러므로 창세기의 기록은 역사적인 기록이라기보다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골격가설적인 서술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에 대해 창세기의 족보기록을 살펴보자. 아담은 130세에 셋을 낳은 후에 800년 더 살면서 자녀들을 낳았고 셋은 105세에 에노스를 낳고 이후 807년 동안 자녀들을 낳았지만 그 이름들은 알려지지 않았다. 가인과 아벨이 태어난 후에 살인 사건이 있기까지는 창세기 4:3에서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서술을 통하여, 그들이 장성했으며, 셋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는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자(창 4:25). 이러한 기록과 창세기 1:28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축복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아담과 셋뿐만 아니라, 가인과 아벨도 많은 자녀를 낳았을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셋이 태어난 것이 아담 130세였으니까 가인의 살인사건은 아담 129세에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만약 가인이 장남이라면 성년으로 창조된 아담은 가인을 낳을 때 나이가 1살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3살에 아벨을 낳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아벨이 죽임을 당할 당시 나이는 126세 정도였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아벨에게는 이미 많은 자녀들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아마 가인이 가장 두려워했던 대상은 아벨의 아들들이었을 것이다. 또한, 가인은 살인자로서 죄책감을 느끼고 있으므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늘어날 사람들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공동체의 질서는 살인자를 방관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인은 아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여섯째, 창세기 6:1~4의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한 기사를 역사적인 기록으로 보기가 어렵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천사와 기적과 하늘의 일들과 땅의 일들의 연대성은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 전체가 보여주는 바이다. 창세기 6:2의 하나님의 아들들(히. ‘베네 하엘로힘’)은 욥기 1:6과 2:1, 38:7에 동일한 단어로 등장하는데 이는 분명히 천상의 존재들을 의미한다.[4] 유다서 6~7절은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도시들도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처럼 동일한 행동으로 음란하며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혔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벧후 2:2~7의 내용도 호색하는 것에 대한 경고로서, 호색한 소돔과 고모라 성의 심판과 범죄한 천사들에 대한 심판을 대등하게 불경건의 예시로 들고 있다. 천사가 육신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창세기 18:1~8에서 천사가 나타나 아브라함이 대접한 젖과 우유와 송아지요리를 먹었음이나, 이에 유사한 모습이 창세기 19:3-15에서도 언급됨으로부터도 확인될 수 있다. 그리고 창세기 32:24-30에서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다가 허벅지 관절이 어긋났음 또한 주목해야 한다.

일곱째, 네피림(창 6:4)은 노아홍수 때 모두 사라졌어야 함에도, 민수기 13:33에서 네피림의 후손이 등장하기 때문에[5], 창세기는 역사적인 기록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네피림이라는 히브리 단어는 ”거인, 장부, 약한 자를 못살게 구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네필’이라는 일반명사의 남성복수형이다. 그러므로 민수기 13:33의 네피림 때문에 창세기의 역사성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여덟째, 창세기 7:2~3에서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방주에 실어서 보존하도록 하셨다. 그런데 창세기 7:15에서는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육체가 둘씩 방주에 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방주에 들어간 동물들의 수에 대한 기록으로부터 창세기는 역사적으로 정확한 기록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 실제로 히브리 성서에서 히브리어 원어를 살펴보면 ”정결한 짐승은 ‘일곱 일곱 수 암’, 부정한 짐승은 ‘둘 수 암’, 공중의 새는 ‘일곱 일곱 수 암’”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7쌍씩, 1쌍씩, 7쌍씩 방주에 태워졌다는 것을 정확히 알 수 있다. 반면에 창세기 7:14~15절은 노아가 그들을 선별해서 실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방주로 보내셨고, 노아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창세기 7:16에서 문을 닫으신 것도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동물들은 노아에 의해 선별되어 실려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노아는 심지어 다 들어왔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노아는 모든 동물들이 둘씩 짝을 지어서 방주로 들어감과 그것들이 암수였다는 것을 서술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창세기 7:15은 어떤 동물들이 모두 얼마나 들어갔는지가 아니라, 방주에 타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7쌍씩 들어간 동물들이나, 1쌍씩 들어간 동물들이나 방주에 타는 모습은 모두 둘씩 암수가 짝을 지어서 탔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내에서 방주에 탄 동물들의 수에 대하여 아무런 모순도 없다.

 

IV. 인류 지성과의 마찰

과학의 발전에 따라 새로운 지식으로 알게 되는 사실들과 창세기의 기록이 모순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진화론을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임으로써, 창세기의 기록을 역사적 사실성을 가진 기록으로 보지 않고, 교훈을 담고 있다는 골격가설로 이해하면서 생겨난 문제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생물들이 진화하도록 창조하셨다는 유신진화론에 의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사실 유신진화론은 진화론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를 글자 그대로의 역사적인, 피조된 개인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은 유인원에서 발전되어,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개발시키게 되었고,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생기는 바로 그 순간의 원인(ape-man)이 바로 아담부터라고 주장한다.

진화론에 따른 생물진화의 순서나 생물진화에 필요한 시간은 창세기 1장의 하루의 시간과 조화될 수 없다. 유신진화론은 창세기의 기록이 진화론과 다르므로, 창세기를 골격가설로 이해한다. 그렇게 되면 아담의 창조(창 2:7), 하와의 창조(창 2:22),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창1:26~27; 5:1~2), 또한 다른 동물들을 다스리도록 창조되었다는 사실과 선악과사건, 원죄로 인한 죽음의 시작 등 창조에 관련된 창세기의 기록들을 모두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진화론은 증명된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 진화가설(evolutionary theory)이라는 이 시대의 하나의 주장이다. 생물들이 변함없이 처음 모습을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생물 화석들의 증거를 비롯하여, 환경에 따라 작은 변화들이 일어나는 것이 달라진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이미 유전자 속에 그 적응능력이 존재하고 있다가 발현된 것이라는 내용과, 종에서 다른 종으로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는 많은 증거들은 진화론을 반박한다. 창세기에는 17번의 ‘민’이라는 히브리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각기 종류대로”라고 번역되었다. 이 단어는 창세기 1장에서 창조 시에 10번 사용되었으며, 나머지 7번은 생물들을 보존하기 위해 ”각기 종류대로” 방주에 태워졌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러한 선별된 기록이 의미하는 것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V. 결론

창세기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주장들이 있다. 견해가 다른 이들의 주장의 근거를 파악하고, 그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는 일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지금까지 알려진 창세기의 역사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주장들을 분석하여 보았다. 그 결과, 필자는 창세기의 역사성을 부인할 만한 어떤 단서도 찾지 못하였다.

 

   
미주
1. Gordon J. Wenham, WBC 주석 「창세기 (상)」, 박영호 역(서울: 도서출판 솔로몬, 2006), 64-73
2. 김홍석, '창세기의 창조, 아담, 셈 톨레도트에 나타난 시간 연구”, 학위논문(2014)
3.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히브리어 ‘마오르’를 '광명체”로 번역하였으나, 이전의 개역성경은 "광명”으로 오히려 잘 번역되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거의 모든 영어역본들도 'lights'로 번역하고 있음.
4. ‘Gordon J. Wenham, WBC 주석 「창세기 (상)」, 박영호 역(서울: 도서출판 솔로몬, 2006), 290-293 참조.
5. 민 13:33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출처 - 창조 1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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