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그는 몇 살이었을까?
(How old was Cain when he killed Abel?)
Robert Carter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 4:8)
세상에서 최초의 살인에 관한 이야기는 슬픈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에 관하여 많은 의문을 일으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에 관한 질문들 중 일부는 대답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성경의 문맥을 잘 이해하면 전혀 다루기 힘든 것도 아니다.
최근에 나에게 새로웠던 질문은 기독교인 작가와 토론하던 중에 생긴 것으로, 가인과 그의 동생 셋은 각각 몇 살에 결혼 했느냐는 것이다. 그는 그들이 결혼을 하려면 셋의 여동생들이 태어나서 자랄 때까지 오랜 세월을 기다렸어야 했다는 생각을 넌지시 비추었다. 그가 말하는 문맥으로 보면, 그의 생각에는 그때까지 그들이 결혼할 여성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성경에 아담과 하와의 세 번째 자녀로 언급된 셋은 아담이 백삼십 세에 태어났으므로(창 5:3), 가인은 오랫동안 기다렸어야 했다는 것인데, 맞을까?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 5:3~4).
사실상, 가인과 셋이 나이가 들었을 때는 결혼하기 위해 전혀 기다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가인이 첫 번째 출생인 것은 맞지만(창 4:1), 성경은 그의 누이들이 언제 태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고, 셋이 세 번째 자녀라거나 혹은 세 번째 아들이라고 하는 언급이 없다. 우리는 아담이 130세 되었을 때 셋이 태어났다는 것과, 다른 형제 아벨이 죽은 이후에 태어났다는 것만 알 뿐이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창 4:8)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창 4:25)
셋이 세 번째 언급된 아들이라고 해서 그것이 태어난 순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을 생각해 보라 : 하와에게 있어서 130년 이라는 세월은 단지 세 명의 자녀만 낳았다고 보기에는 매우 긴 시간이다! 그것은 43년마다 한 자녀씩 낳았다는 말이다. 아담과 하와가 생육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것으로 볼 때(창 1:28), 가인은 아마도 매우 일찍, 즉 창조주간 이후 1년 내지 2년 안에 태어났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이후에 아벨이 태어났지만, 그가 반드시 가인 바로 다음일 필요는 없다. 아벨의 이름이 가인 다음으로 나오지만, 그것은 그가 이야기의 전개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벨이 두 번째 자녀라고 할지라도, 셋이 세 번째 자녀는 아닐 것이다.
셋이라는 이름은 그의 어머니가 예언적으로 붙여준 이름이므로(그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그가 지명했다”와 비슷하게 들린다. - 이상 저자주, 역주 - '셋”의 뜻은 ‘대신 누움’ 혹은 ‘갚음’이다.), 그는 아벨이 죽은 이후에 태어난 첫 번째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 말의 의미는 아벨과 셋 사이에 다른 아들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셋이 노아의 가계에 들어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가계에 들어있는 나머지 사람들도 반드시 첫 번째 태어난 자녀라고 볼 필요는 없다. 사실상 그럴 확률은 매우 작다. 아들이나 딸이 태어날 확률이 같다면, 아홉 세대 동안 첫 번째 아기가 아들로만 태어날 확률은 0.2% 이하이다. 여기에는 또 언급된 아들이 아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을 것으로 가정하고 있는데, 본문에는 그런 언급이 되어 있지 않다. 사실상 그들이 모두 가장 나이가 많은 아들들이라면, 9세대 동안 각각의 아버지가 첫 번째 아들을 낳은 나이의 평균은 117세이다! 이를 통해 볼 때 창세기는 단순히 노아의 가계에 대한 기록일 뿐, 각 가정의 다른 자녀들에 대한 언급은 없다고 보는 것이 더 맞다. 가장 나이 많은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성경에서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가 마리아의 첫 태생이라는 그것만이 확실한 사실이다. 예수님의 생물학적 가계에 있는 거의 모든 중요한 사람들, 예를 들어, 셋, 셈, 아브라함, 이삭, 야곱, 유다 및 다윗 등은 장남이 아니었다. 장남이 아닌 다른 중요한 인물로 누구보다 요셉과 솔로몬을 들 수 있다.
문맥으로 보아, 가인이 자기 동생을 죽였을 때 그의 나이가 130살이 되어가는 것으로 보인다. 그 130년의 시간대 어디에선가, 그리고 셋의 출생 시기에 매우 근접하여, 지구상에 기록된 첫 번째 살인이 일어났다.
”그가 다른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으며”라는 공식이 마치 딸들은 항상 첫 번째로 아들이 태어난 이후에 나온 것으로 들리는데, 나는 가인이 결혼할 나이가 되었으며 (아마도 이미 결혼했을 수도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다), 이미 여동생들이 있었고, 또한 이미 성경에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다른 형제들도 있었을 것이고,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는 가인의 나이는 이미 120살이 넘었을 것으로 주장하고 싶다. 이것은 추리에 의한 사실이지만, 셋이 태어난 이후에 여동생들이 태어났고, 그 여동생들이 자랄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인이 결혼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더 가능성이 많다. 그가 조카나 조카의 딸이 나이가 들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고 보는 것은 더 안 좋은 경우이다. 심지어 현대에 있어서 사람들의 생식 가능성을 보더라도(많이 낳을 때 평균 3~5년마다 한 명의 자녀를 낳는다면) 창세기 시대에 언급되어 있는 생물학적 가계는 태어난 모든 자녀들 중에서 선택된 사람일 뿐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오래된 질문인 ”가인은 어디서 아내를 얻었을까?”에 대한 답은 이런 식의 추론이 가능하다 : 가인은 자기의 누이와 결혼했으며, 그가 아벨을 죽이기 전에 이미 결혼했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가인이 쫓겨나자마자 그녀의 존재가 언급되기 때문이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창 4:16~17).
어떻든, 하나님은 그로부터 2,500년 후인 모세시대 까지는 가까운 친족끼리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하지 않으셨다(레 18:10). 성경에 언급된 중요한 예 몇 가지를 생각해 보자 : 노아의 손자, 손녀들은 그들끼리 결혼했음이 분명하다(그들 모두는 사촌 혹은 형제 자매였다). 아브라함은 그의 이복누이인 사라와 결혼했다(창 20:12).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사촌보다 가까운 리브가와 결혼했다. 그리고 야곱은 사촌보다 훨씬 가까운 레아와 라헬과 결혼했다. 그처럼 초기에는 가까운 친족과 결혼을 금하는 법이 없었다.
또 하나의 오랜 논쟁은 아담과 하와가 최초의 사람이 아니며, 성경은 그 당시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짐을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창 4:13~14).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시절에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고 주장할 필요가 없다! 먼저, 그 본문은 처음의 창조로부터 약 130년이 지난 때의 일이다. 그리고 가인이 두려워한 것은 죽임당한 희생자의 살아있는 친척들로부터의 보복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그 수십 년 사이에 태어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문맥을 통해 볼 때, 족보의 자료와 창세기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사건들의 순서를 고려해 보면, 이 모든 사건들이 모두 사실이 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존재하는 것이다.
번역 - 이종헌
링크 - http://creation.com/cain-chronology
출처 - Creation ex nihilo, Vol. 36(2014), No. 2, pp. 16-17.
창세기의 낙타는 성경의 오류인가?
(Genesis Camels : Biblical Error?)
Jake Hebert
최근 텔아비브 대학의 고고학자들은 이스라엘-요르단 국경을 따라 나있는 아라바 계곡(Aravah Valley)에 있는 고대 구리 제련 캠프에서 낙타 뼈(camel bones)들을 발굴했고, 이들에 대한 방사성탄소(radiocarbon) 연대측정을 실시했다. 저자들은 실시된 방사성탄소 분석에 주로 기초하여, 남부 레반트(southern Levant, 이스라엘, 요르단, 레바논 남부를 포함하는 중동지역) 지역에서 가축화된 낙타의 최초 출현은 BC 900년 경이었다고 결론지었다.[1, 2] 그러나 성경 기록에 의하면, 길들여진 낙타는 아브라함의 시대인 BC 2100년 경에도 있었음을 가리킨다.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창세기 12:16). (또한 창세기 24장을 보라). 그렇다면 성경은 잘못됐는가?
언론 매체들은 레반트의 역사에서 가축화된 낙타를 너무 일찍 언급한 성경은 시대착오적이었다고 서둘러 주장했다. 뉴욕 타임즈(New York Times. 2014. 2. 10)의 기사는 창세기에 낙타가 기록되어 있는 것은 ”창세기가 오랜 세월 후에 구전되던 이야기가 편집되어 쓰여졌음을 가리키는 증거이며, 성경은 항상 신뢰할 수 없으며, 입증된 역사가 아니다”라는 대담한 주장까지 하고 있었다.[3]
이들 낙타 뼈들에 대한 방사성탄소 연대측정이 정확했다 할지라도, 연구자들의 주장은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그들은 증거의 부재가 부재의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연구자들은 아브라함 시대에 남부 레반트에서 가축화된 낙타의 고고학적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 시대에 그 지역에 낙타가 존재하지 않음을 입증했다고 가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성경 비판가들이 늘상 사용하는 잘못된 주장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그들은 한때 성경이 히타이트족(Hittite people)에 대해서 언급했을 때, 성경의 오류라고 주장했었다. 왜냐하면 히타이트족이 존재했다는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비판가들이 틀렸음이 확인되었다.[4]
낙타가 족장들의 시대 동안에 이스라엘 땅에 극히 드물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낙타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 시대 이전인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에 길들여진 낙타가 존재했다는 증거들이 있다.[5] 더군다나 가축화된 낙타가 그려져 있는 (세속적 고고학자들도 아브라함 시대 이전으로 연대를 평가하고 있는) 이집트 유물이 발견됐었다. 거기에는 도자기로 만들어진 낙타의 머리, 테라코타 태블릿(terra cotta tablet), 낙타 모델, 암각화, 낙타털로 만든 밧줄...등이 포함된다.[5] 창세기에서 낙타는 아브람이 이집트에 있는 동안 바로가 선물로 주었을 때,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다.(창 12:16) 그래서, 가축화된 낙타가 아브라함 시대 이전부터 이집트에 있었다면, 그리고 이집트의 왕이 선물로 아브라함에게 주었다면, 아브라함의 낙타가 이삭과 야곱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존재했을 것이라는 것이 시대착오적인 것인가? 어떻게 이것이 명백한 시대착오가 될 수 있는가?
100여 년 이상 동안, 성경 비판가들은 많은 보수적인 신학자들이 철저하게 믿고 있던 주장들을 사용하여, 성경에는 시대착오적인 낙타가 등장한다고 비판해왔다.[5, 6] 그러나 성경의 오류를 찾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이들 최근의 비난자들은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으면서, 다른 고고학적 데이터들을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언론 매체들의 과대 선전에도 불구하고, 창세기에 기록된 낙타는 성경의 오류가 아니다.
References
1. Sapir-Hen, L. and E. Ben-Yosef. 2013. The Introduction of Domestic Camels to the Southern Levant: Evidence from the Aravah Valley. Friends of the Institute of Archaeology of Tel Aviv University. 40: 277-285.
2. Finding Israel’s First Camels. American Friends of Tel Aviv University. Posted on aftau.org February 3, 2014, accessed February 13, 2014.
3. Finding Israel's first camels: Archaeologists pinpoint the date when domesticated camels arrived in Israel. ScienceDaily, February 3, 2014.
4. Wilson, C. A. 1977. Rocks, Relics and Biblical Reliability. Grand Rapids, MI: Zondervan, 41.
5. Lyons, E. Camels and the Composition of Genesis. Apologetics Press. Posted on apologeticspress.org 2002, accessed February 14, 2014.
6. Caesar, S. 2006. The Wealth and Power of the Biblical Patriarchs. Bible and Spade. 19 (4).
* Dr. Hebert is Research Associate at the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and received his Ph.D. in physics from the University of Texas at Dallas.
*참조 : Did Abraham have camels?
Camels and the Composition of Genesis
https://apologeticspress.org/camels-and-the-composition-of-genesis-858/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article/8008/
출처 - ICR News, 2014. 2. 24.
아담의 갈비뼈로부터 창조된 하와
(Eve created from Adam's rib)
Russel Grigg
하나님은 왜 하와(Eve)를 아담의 갈비뼈(Adam's rib)로부터 만드셨을까? 결국, 하나님이 원하셨다면, 그분은 하와를 땅의 흙으로부터 쉽게 만들 수 있으셨다. 실제로, 하나님은 아담을 이런 방식(땅의 흙)으로 만드셨으며(창 2:7), 뿐만 아니라 '들의 모든 짐승' 및 '하늘의 모든 새'도 그런 방식으로 만드셨다(창 2:19). 그런데 왜 하나님은 하와를 다르게 만드셨을까? 아마도 그분은 아담과 하와의 역할에 관한 것뿐 아니라, '마지막 아담'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고전 15:45)의 역할에 관해서도 우리에게 알려주시길 원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좋지 않다”는 말의 첫 번째 언급
하나님이 하와를 창조하시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 창조 이야기에 있어서, 독자들은 이 문장이 귀에 거슬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이전까지, 인류의 타락 이전에는 그랬으리라고 우리가 예상할 수 있듯이, 하나님은 그분의 창조물들을 돌아보실 때마다 '좋았더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첫 번째의 '좋지 않은' 일로써, 해결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위한 돕는 배필'로서 하와를 창조하셨다(창 2:18하). ‘돕는 배필’(히브리어 에쩨르)이라는 용어는 역할이나 신분이 낮은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기능에 관한 것이다. 그녀는 그의 상대편 혹은 그의 보족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이 용어는 시편 33:20, 121:1~2에서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돕는다고 할 때 하나님께 사용되었다. 사실상 이 단어는 하나님이 도우셨다는 성경 이름 아짜리아의 어근이 된다. 하와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셨을 때 아담이 이렇게 말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창 2:23).
'한 몸'의 중요성
그러나 하와를 만들 때 꼭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었어야 했을까? 여기에 대해 캘빈은 이렇게 주석을 달았다: ”만약에 두 성(sex)이 서로 다른 원천으로부터 나왔다면, 그 둘은 서로 모욕을 했거나, 시기했거나 혹은 투쟁을 야기했을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아담의 몸 일부를 취한 이유는 그 자신의 한 부분을 보다 큰 자비심으로 끌어안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갈비뼈 중의 하나를 잃었지만, 그 대신에 훨씬 더 가치 있는 보상이 그에게 주어졌다. 그는 신실한 인생의 동반자를 얻은 것이다. 왜냐하면, 이전에 그는 불완전했었는데, 이제 그의 아내 안에서 완전하게 된 그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다.”
하와 역시 아담과 관계를 맺고 있어야 했다 - 만약에 그녀가 흙으로부터 창조되었다면, 전적으로 독립적인 창조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담의 한 부분으로부터 만들어졌기 때문에, 독특한 방법으로 아담의 후손이 되었다.
하와가 아담의 후손인 것은 그녀의 구원 가능성을 위해서도 중대한 것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오실 메시야를 '친족-구속자'(사 59:20), 즉 그가 구속할 사람들과 혈연으로 연결된 사람이라고 썼다. 히브리서 2:11~18절은 예수님이 어떻게 해서 천사(혹은 성질상 외계인으로 가정되는 존재)를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사람의 형상을 입으셨는지를 설명해 준다. 예수님은 문자 그대로 우리의 친척이 되기 위해, 이 하나의 인간 가족의 한 부분이 되시기 위해 아담의 계보 안으로 들어오셨다(눅 3:23~38). 모든 사람들이 아담의 후손이 아니라면, 이 필수적인 친족-구속자 개념은 토대가 무너진다. 아니면 역으로 말해서, 오늘날 아담의 후손이 아닌 사람들이 있어서 아담을 통해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그들은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다. 두 가지 상황 모두 성경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책임
최초로 창조된 인간으로서 아담은 인류의 연합적(혹은 책임 있는) 머리였고, 지금도 그렇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을 향한 자기의 태도가 인간 역사의 과정을 결정한 사람이었다. 연대기적으로 아담 이후에 창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담으로부터 창조된 하와는 비록 그녀가 아담이 금지된 과일을 먹기 조금 전에 그것을 먹었지만(창 3:6), 성경에서 볼 때 하와에게는 이런 책임이 주어지지 않았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는 명령을 준 사람은 아담이었으며(창 2:16~17), 아담은 하와가 그 과일을 먹었을 때 그녀와 함께 있었다(창 3:6). 그러나 명백하게, 그는 그녀가 그 경고를 흘려버리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창 3:1~3). 죄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대항하여 그분과 무관하게 살려는 욕망이다. 신약에서는 하와가 (뱀에게) 속은 것이지,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라고 확언한다(딤전 2:14). 따라서 아담은 고의적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하기로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즉 마음속으로 이미 저질렀던 죄가 공공연하게 드러난 것이다(마 15:19).
신약성경은 고린도전서 15:21~22절에서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한데 대해 아담에게 책임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아담이 인류의 머리였던 것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가 구속받은 인류의 머리가 되신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롬 5:12-21, 엡 1:22-23; 5:23).
그리스도 중심의 결혼에서 남편과 아내의 역할
결혼이라는 것이 하나님에 의해 설립된 한 가지 이유는 예수님이 교회를 사랑하신 것이 어떤 모습인지를 우리가 그려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일부일처 결혼은, 두 남자 혹은 두 여자 혹은 기타 다른 조합 사이의 ‘결혼’이 보여줄 수 없는 방식으로 이 목적을 잘 보여준다. 사실상, 예수님이 결혼에 대해 가르치실 때(마 19:3~6, 막 10:5~9), 예수님은 창조 기사를 실제의 역사로써 인용하셨다(창 1:27, 2:24).
더욱이 성경은 결혼 안에서 남편과 아내의 특별한 역할을 정하고 있다. 이에 대한 가장 긴 구절은 에베소서 5:22~33절이다. 남편들에게는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25~27절),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28~30절), 그리고 이것이 다른 모든 의무보다 앞선다(31~33절)고 말한다. 아내들에게는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22절)고 말한다. 이것은 갈라디아서 3:28절에서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는 바울의 주장과 모순되지 않는다.
다음을 주목하라: 결혼을 하면 우리는 마치 (은유적으로 말해서) 우리에게 부모가 없었던 것처럼 우리의 부모를 떠나야 한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에게 (문자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부모가 실제로 없었기 때문이다.
결혼에 있어서 우리는 최소한 이상적으로는 마치 (은유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한 몸’인 것처럼 서로에게 밀착해야 한다. 왜냐하면 (문자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하와가 실제로 아담의 몸에서 취해졌기 때문이다.
상처를 통해 나온 신부
하나님이 아담의 옆구리에서 하와를 만드셨을 때, 창세기 2:21~23절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셨다고 말한다. 그래서 아담의 신부가 될 하와는 (문자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아담의 옆구리에 있는 상처를 통하여 태어났다.
마지막 아담이신(고전 15:45)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죽었을 때 옆구리를 창에 찔린 것은 예언을 성취시키신 것이다(요 19:34, 36~37; 슥 12:10). 이것은 그분의 죽으심 직후에 일어난 일이며, 그 죽음은 첫 번째 아담의 죄 때문에 필수적인 것이었다. 죄에 대한 희생으로, 하나님의 어린 양의 옆구리에 있는 그 상처로부터 흘러내린 것은 보배로운 피로서(벧전 1:19), 그것을 통하여 믿는 자들이 죄로부터 깨끗하게 된다. 이들 믿는 자들은 예수님의 신부가 될 교회의 구성원이 된다. 따라서 은유적으로 말해서, 예수님의 신부가 될 교회는 그분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린 상처에서 ‘태어난다.’
하늘에서 신랑 신부의 연합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죽음과 악의 멸망 이후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의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다(계 19:6~9). 복음이란 비록 첫 번째 남편인 ‘아담 안에서’ 우리 모두가 죄를 지었지만, ‘마지막 아담’이시며, 교회의 신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우리가 모두 구속 받는다는 것이며, 또한 그분을 통하여 우리가 '죄들의 용서함'을 받고, '의의 선물을 값없이' 받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다는 것이다(골 1:14; 롬 5:17; 요일 3:14).
번역 - 이종헌
링크 - http://www.creationmagazine.com/creation/2013vol35iss4?pg=42#pg42
출처 - Creation ex nihilo, Vol. 35(2013), No. 4, pp. 42-44.
하나님은 왜 악어의 무시무시한 이빨을 창조하셨는가?
(Why Did God Create Such Terrible Teeth?)
by Brian Thomas, Ph.D.
악어의 이빨들로 가득한 입은 사람들에게 공포를 유발한다. 가끔씩 이 거대한 이빨들에 의해 사람의 사지가 절단되곤 했다.[1] 악어의 뒤엉켜 보이는 이빨들과 좋지 않은 평판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이 파충류를 거리낌 없이 육식동물로 분류하고 있다.[2] 하나님은 다른 동물들을 잡아먹을 목적의 이빨들을 가진 이러한 동물과 다른 유사한 생물들을 왜 창조하셨을까?
그렇다면, 성경의 기록처럼 하나님은 사랑이 풍성하시고 인자하신 분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새로운 연구는 이들 무시무시한 이빨들에 대한 오래된 창조론적 설명을 확인해주고 있었다.
2009년에 이러한 이슈에 대해서 댄 크리스웰(Dan Criswell)은 Acts & Facts 지에 글을 썼다. ”고기를 찢는 데에 사용되는 많은 육식동물의 이빨들은 또한 식물 재료들을 절단하는 데에도 사용될 수 있다.”[3] 그는 대중의 생각과는 다르게, 어떤 이빨 구조는 육식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육식은 창조주가 만드신 이빨 때문이 아니라, 죄로 인해 저주받은 동물의 행동에 기인한 것이다.
창세기 1:30절은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그러므로 성경에 따르면, 원래 창조된 악어는 식물들을 먹었다. 물론 사람을 통해 죄가 이 땅에 들어왔을 때, 모든 것들이 저주를 받았고 변해버렸다.
이제, 연구자들은 악어들이 정기적으로 식물을 먹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동물학 저널(Journal of Zoology)에 보고한, 미국 과학자들은 플로리다의 에버글레이즈 국립공원에 있는 악어들의 식습성에 대해서 연구했다.[4] 게재된 연구의 리뷰는 새롭게 관측된 발견들을 추가하고 있었는데, 악어 18종들 중 13종은 34개 과의 다른 식물들의 열매를 먹고 있었다는 것이다.
악어는 종종 육질과(fleshy fruit)를 먹는다. 일부 과일들은 먹이 동물을 는 동안 발견하여 먹게 된다.
그러나 연구 저자들에 따르면, 자주 많은 양으로 먹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4]
예를 들어 New Scientist 지에 따르면, ”지난 해 동남아시아에서 근무하는 한 연구자는 야생의 샴악어(Siamese crocodile)가 수박(watermelon)을 깨뜨려 먹는 것을 보았다고 보고했다.”[5]
이빨은 고기를 먹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식물을 먹기 위해 있었다. 하지만 이 일시적인 끔찍한 지구에서, 원래는 좋은 행동을 가지고 있던 이 동물들은 저주로 인해 하나님이 주신 이빨들을 사용하여 공포스러운 피의 살육을 저지르며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악어가 과일을 선호하는 것은 인류의 범죄 이전에 에덴동산의 상태를 반영하고 있을 수 있다.
References
1.For example, The [Charleston] Post and Courier reported in 2007 how snorkeler Bill Hedden lost his left arm to a 12-foot alligator in South Carolina. 'Man's Arm Salvaged from Alligator's Belly,' September 17.
2.Obligate carnivores are supposed to eat only meat.
3.Criswell, D. 2009. Predation Did Not Come from Evolution. Acts & Facts. 38 (3): 9.
4.Platt, S.G. et al. 2013. Frugivory and seed dispersal by crocodilians: an overlooked form of saurochory? Journal of Zoology. Published online before print, Jul 16, 2013.
5.Barras, C. Crocodiles may need their fruity five-a-day. New Scientist. Posted on newscientist.com on July 30, 2013, accessed July 31, 2013.
*참조 : 성경의 모순으로 주장되는 것들 - 송곳니
성경의 모순으로 주장되는 것들 - 흡혈
성경의 모순으로 주장되는 것들 - 생물 독
성경의 모순으로 주장되는 것들 - 병원균과 질병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article/7665/
출처 - ICR News, 2013. 8. 9.
뱀 (사탄)
(The Serpent)
뱀이 하와를 유혹한 사건의 기록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그것은 순전히 상징적인 것인가? 그리고 뱀은 누구 혹은 무엇이었나? 언젠가 나는 어느 교회 지도자와 함께 창조에 대해 토론을 하고 있을 때, 그는 내가 인류의 타락 이전에 걷기도 하고 말하기도 하는 뱀이 실제로 있었다고 믿는지를 빈정거리는 투로 물었다. 물론, 성경 기록에 따르면 말하는 뱀(serpent, snake)이 딱 하나 있었다. 그러나 에덴동산의 기록은 매우 비범한 것이어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것을 단순히 상징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 강력한 이유로 인하여, 창세기 1~11장을 실제 역사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신약에서 창세기 앞부분의 사건과 등장인물을 참고할 때는 이들이 실제 역사가 아닌 다른 것을 나타낸다는 암시가 전혀 없으며, 여기에는 하와의 유혹도 포함된다(고후 11:3; 딤전 2:13-14). 또한 우리는 인류 역사의 태동기에는 비범한 일이 많이 일어났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상과 그리고 시간 자체를 창조하신 직후이다. 더욱이,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타락한 세상뿐이다. 따라서 인류의 타락 이전에는 사물이 어떠했는지 상상하기가 힘들다.
에덴동산의 이야기는 역사적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대한 일부 기억을 지니고 있으며, 그들에게 있는 기억을 바벨 사건으로 인한 분산 이후에 후손들에게 전했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물론 그 기억은 노아의 대홍수에 관한 기억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왜곡되고 변질되었을 것이다.) 사실상 수메르인과 그리스인 같은 많은 고대인들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및 뱀이 하와를 유혹한 것을 포함하는 에덴동산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1986년 중국의 광한(Guanghan) 근처에서 놀라운 발견이 이루어짐으로써 하나의 예가 드러났다. (세속적인 계산으로) 약 2,700에서 4,700년 전에 삼성퇴(Sanxingdui) 사람들이 만든 많은 세공품이 발굴되었다. 세공품 중의 하나는 실제 크기의 청동으로 만든 과일나무였는데 높이가 약 4m였다. 그 나무에는 청동으로 만든 뱀과 사람의 손이 붙어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상세함은 이 세공품이 하와가 사탄에게 유혹받는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으며, 그 뱀과 과일은 죽음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심지어 뱀은 발을 가지고 있었다.
뱀
성경을 믿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와를 속인 것이 사탄이라고 말하는데, 그는 뱀을 점유하여 뱀을 통하여 말했었다. 발람의 당나귀 사건(민 22:22-35)은 이런 것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다른 가능성은 사탄이 실제의 동물을 통하여 말한 것이 아니라, 뱀의 모습으로 하와에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런 가능성을 논박하는 신학적 논의 중에는 납득할 만한 것이 없다. 예를 들어, ‘외계인의 침입(Alien Intrusion)’이라는 책에서 게리 베이츠(Gary Bates)가 사람을 현혹시키는 현현의 경험을 묘사한 것을 보면 그것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짐작케 해 준다.
성경의 창세기 18:1-19:29절에서처럼 천사들은 가끔 육체의 모습을 지니고 사람들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마귀가 육체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많은 기사들이 있다. 초과학을 연구하는 (비기독교인) 존 킬(John Keel)은 이렇게 썼다:
”문헌에 따르면, 사탄과 그의 마귀들은 거의 모든 형태로 그들 자신을 나타낼 수 있으며 육체적으로 천사에서부터 새빨갛게 달아오른 눈을 가진 무서운 괴물의 모습까지 모든 것을 모방할 수 있다. 이들 이야기에서는, UFO와 근사한 승무원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듯이, 이상한 물체와 실체가 체현되기도 했다가 사라지고도 하면서 벽을 통과하여 걷기도 하고, 다른 초자연적인 위업을 수행하기도 한다. 귀신학은 단지 또 다른 정신 나간 학문이 아니다 ... 그 주제와 관련하여 수천 권의 책이 쓰였고, 그들 중 많은 저자가 교육받은 목사, 과학자 및 학자들이었으며, 마귀에 관련된 사건을 잘 기록한 수많은 경우를 연구자들로부터 쉽게 얻을 수 있다.”
창세기 3:1절은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라고 말한다. 이 설명은 확실히 사탄에게 적용되는 것으로, 다른 어떤 살아있는 파충류에게 적용하기가 힘들다. 또한 하와를 유혹하는 뱀에 대해서도 그렇게 적용하기가 힘들 뿐 아니라, 15절에서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메시아에 관한 예언에 등장하는 뱀에 대해서도 그렇다. 그러나 14절에서의 저주는 사탄이 하와를 속일 때 이용했던 파충류에게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은유적인 견지에서는 그것이 사탄에게도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을 가장 잘 해석하는 것은 성경 자체이므로, 요한계시록 12:9절은 창세기의 이 부분을 이해하는 것을 도와준다 :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계 12:9)
또한 요한계시록 20:2절과 요한복음 8:44절을 보라. 사탄을 ”옛 뱀 곧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불렀음을 주목하라. 나는 창세기 3장에서 ‘뱀’은 기본적으로 사탄 자신을 나타낸다고 본다. 그 동물을 통하여 그가 말했거나, 혹은 그가 하와에게 나타났을 때 그 모습으로 가장했으므로, 사탄에 대해 그것이 적절한 명칭이다.
하나님이 뱀에게 저주를 선언하셨을 때(14절) 동물로서의 뱀이 이 저주에 포함되는 것은, 그들 자신이 악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탄에 대한 저주의 표시와 상징이기 때문이며, 이는 인류가 영원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하와의 유혹에 관한 창세기 기사는 문자적으로 역사적 현실이며, 상징주의가 섞여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전 지구적인 홍수를 결코 다시 보내지 않으리라는 그분의 약속에 대한 상징 혹은 영원히 기억할 것으로 무지개를 말씀하셨다. 무지개는 상징이다. 그러나 노아에게 무지개가 나타난 것은 실제의 사건이었으며, 따라서 대홍수에 대한 기사는 실제의 역사이다.
뱀이 사탄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뱀 역시 죄와 죄의 저주를 상징하게 되었다. 이것은 민수기 21:4-9절에 기록된 사건과, 요한복음 3:14-15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에서 드러난다. 모세가 막대에 달아 올린 놋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셨다는(고린도후서 5:21) 사실을 상징한다. 그것은 그분이 우리를 죄의 형벌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치르신 희생이 얼마나 거대한지를 드러낸다. 그분 자신이 나무에 달려 그분 자신의 몸에 우리의 죄를 지니셨다(베드로전서 2:24).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셨다.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라디아서 3:13).
뱀에게 내리신 저주의 내용은 그 생물이 전에는 다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땅을 미끄러져 다니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것을 고려하면 (아마도 창세기에 나오는 종류인) 비단뱀(python)과 구렁이(boa)가 한 쌍의 며느리발톱(spur)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진화론자들은 이것들이 뒷다리가 남은 흔적이라고 믿는다. 사탄이 ‘사용했던’ 뱀의 종류는 비단뱀과 구렁이의 조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다리를 잃는 것을 유전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다리를 얻는 것은 자연주의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본문에서 사람들이 얻는 인상은 뱀의 이동에 있어서의 변화는 갑작스런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돌연변이의 누적으로 인한 점진적인 변화라기보다 초자연적인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어떤 경우이든, 비단뱀과 구렁이의 며느리발톱이 재생적인 걸쇠(reproductive clasper)로 기능하는 것은, 그것들이 흔적기관이 아니라 이런 기능으로 설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조 : 며느리발톱, 진화론자들을 어리석게 보이도록 만
드는 것)
부수적인 논점이 아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한 것을 포함하여) 에덴동산이 실제의 역사인가, 아니면 상징적인 신화인가 하는 문제는 부수적인 논점이 아니다. 복음은 다음을 포함하여 역사적인 사실에 뿌리를 두고 있다:
* 하나님의 원래의 창조는 죄가 유입되어 망치기 전까지는 진정으로 ”매우 좋았다.”
* 아담과 하와는 실제의 사람이었으며, 오늘날 모든 사람들의 조상이다.
* 인류의 타락은 실제로 일어났다(그와 함께 영적 그리고 육체적 죽음이 들어왔다).
* 예수 그리스도의 실질적 죽음과 몸의 부활.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5장, 특히 21, 22, 45-47절을 보라. 여기에 있는 메시지가 힘이 있고 권위가 있는 이유는 그것들이 굳건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으며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상징주의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종종 실제의 역사 이내에서 사용한다(예를 들면 유월절 사건). 우리가 역사를 무시하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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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about the snake in the Garden of Eden?
출처 : Creation ex nihilo, Vol. 35(2013), No. 3, pp. 34-37
하나님의 형상
*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창조주간에 하신 일을 내용상으로 분류한다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창세기 2장 3절에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라고 기록된 바와 같이, 첫째는 창조하신 일(create)이고 둘째는 만드신 일(make)입니다. 창조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무(無)에서 유(有)를 존재하게 하신 것인데, 이와 같은 의미의 진정한 창조(히브리어 bara)는 창세기 1장에 3가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 이외의 다른 일들은 이미 창조하신 것을 가지고 다른 것들을 만드신 것입니다.
첫 번째로 창조하신 것은 우주의 기본적 요소인 시간, 공간, 물질이고(창 1:1), 두 번째는 물고기 새와 같은 동물들을(창 1:21), 그리고 세 번째로는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창 1:27).
여기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할 중요한 내용은 식물에 대해서는 창조라는 표현이 사용되지 않았지만, 동물에 대해서는 창조하셨다는 표현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식물은 신진대사와 증식을 할 수 있도록 설계된 매우 복잡한 구조를 가진 화합물의 집합체에 해당되는데, 동물에서 볼 수 있는 '혼(soul)'이 없습니다. 따라서 식물을 만드실 때는 1:1에서 이미 창조하신 물질을 이용해서 식물을 만드셨고, 동물의 경우에는 물질이외에 이해, 감각, 감정들을 주관하는 요소인 '혼'을 창조하셔서 만드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중요한 내용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신의 '형상(image)'을 따라 '창조'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7).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성경에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유추해 볼 수 있는 근거가 하나 있습니다. 동물에 이어서 인간을 지으실 때에도 '창조'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앞서 만드신 동물에는 없는 요소들을 창조하셔서 인간에게 부여하시고,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을 닮은 존재로 지으신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인간은 하나님을 닮은 점이 많습니다. 우리는 동물과는 달리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영적인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인간은 하나님처럼 무한하고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사랑, 정의, 양심, 등 하나님께서 가지신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동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이성, 창의력, 언어, 지능, 등의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생물을 식물과 동물로 구분하고, 인간은 가장 진화된 동물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볼 때, 생물은 식물과 동물, 그리고 인간으로 구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인간은 아메바로부터 진화된 동물(animal)이 아니라, 처음부터 동물과는 구별하여 특별히 창조된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진화론을 주장하면서 굳이 원숭이와 사촌지간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일까요? 우리를 위해 만물을 지으시고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는데, 왜 저절로 우연히 태어난 존재라고 고아를 자처하는 것입니까? 이처럼 인간 스스로 자신을 동물로 비하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능력을 주시고 고귀한 존재로 창조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멸시하는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동물만도 못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뉴스시간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인간을 고등동물이라고 가르치는 학교교육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무릇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의 사람됨도 그러하니...(For as he thinks in his heart, so is he.)” (잠 23:7, 새번역, NKJV)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5661
참고 :
인간의 창조
* 하나님은 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까?
* 인간의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먹기 위해 사는지, 살기위해 먹는지 모르겠다”고 푸념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사실상 바쁘고 힘든 경제생활을 이어가자면,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이 내 삶의 전부인가?”하는 회의가 일어나곤 합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삶의 목적을 상실한 채로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동물처럼 단지 생존을 위해 살아간다면 너무나 슬픈 일입니다. 목적 없이 살아가는 인생과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생은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바른 삶의 목적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면 인간의 삶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이 의문에 대한 답은 인간이 어떻게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만약 인간이 학교에서 진화론을 통해서 가르치는 것처럼, 자연현상만으로 저절로 이 땅에 생겨났다면, 근본적으로 우리의 삶은 목적이 없는 것입니다. 목적 없이 우연히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저절로 태어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신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사 64:8)
어떤 물건의 존재 목적을 알아보려면, 그것을 만든 사람의 의도를 알아보아야 하는 것처럼, 인간의 삶의 목적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 여쭈어 보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을 다음과 같이 알려 주셨습니다.
첫째, 하나님 대신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청지기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 인간을 창조하신 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신 것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하신 지구와 생물들을 다스리는 임무를 인간에게 부여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일을 하는 청지기(steward)인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청지기라니 얼마나 고귀한 존재입니까? 우리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진화론이 암시하는 것처럼 아무런 목적도 없이 우연히 저절로 생겨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청지기의 직분을 통해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선, 이 세상의 모든 물질과 시간은 내 것이 아니고, 그것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소유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권한은 없고, 단지 살아가는 동안 그것을 관리하고 사용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주신 물질, 자원들을 이기적인 목적으로 남용하거나 오염시켜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잘 관리 보존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여행을 하는 순례자에 비유되곤 합니다. 우리가 여행을 할 때, 호텔에 있는 물건들은 우리를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이고 사용할 수는 있으나 떠날 때는 모두 두고 떠나야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물질과 수명을 누리다가 빈손으로 떠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것도 아니고 영원히 소유할 수도 없는 물질의 노예가 되어 동분서주하다가 허망한 삶을 마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둘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서 43장 7절에서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라고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은 하나님 중심이어야 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 되어야하며 물질과 시간도 그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되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나름대로 고상한 삶의 목적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자부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대기업의 경영을 꿈꾸며 사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스포츠맨으로서 좋은 기록을 남기기 위해 사는 분, 예술가로서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는 작품을 만들려는 목적을 가진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목적들은 궁극적인 삶의 목적이 아니라, 일시적이거나 그보다 더 높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중간 목적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대기업을 운영 하거나, 좋은 기록과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을 이루어 드리고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이것을 알게 되면,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성취했는가?”보다 ”어떻게 살아왔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큰 부자가 되려는 목적을 가지고 부동산 투기를 해서 대회사를 일구게 되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사람을 보고 삶의 목적을 이루었다고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만약 재물을 모으는 과정에서 가난한 자들을 어렵게 만들거나, 부당한 이득을 취하였다면 그는 결코 진정한 삶의 목적을 이룬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물질을 그런 식으로 관리하라고 맡기시지도 않으셨고, 이웃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리가 없습니다.
비록 재물을 많이 모으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사업을 하는 과정과 그것을 통해 얻은 물질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오히려 목적에 맞는 바른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삶의 목적을 바르게 깨닫는 것은 삶의 방향을 바꾸고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도록 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생존경쟁을 통해서 약자는 도태되고, 강자가 살아남는 것이 더 발전하도록 한다는 진화론을 가르치면, 우리 자녀들은 어떤 삶의 목적을 갖게 될까요? 우리 사회의 지도층에 부도덕과 부정이 끊이지 않는 까닭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으로 성취한 결과만을 중시하는 사고가 만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 서적)
Millard J. Erickson, Christian Theology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96), 487.
Werner Gitt, Questions: I have Always Wanted to Ask (Germany: Ebner Ulm, 1998), 93-96.
G. I. Williamson (최덕성 역), 소교리 문답 강해 (서울: 개혁주의 신행협회, 1999), 13-16.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5660
참고 : 5283|3123|2751|2753|2755|2757|5250|5161|4914|4227
하나님은 왜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셨습니까?
박창성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어떤 나무입니까?
창조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사실로 믿으려 해도 잘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온 인류가 고통과 죄악가운데 살게 된 원인이 되었기 때문에 원죄(原罪)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일부러 선악과를 만드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따먹게 하고, 벌을 주셨느냐하는 약간 불평 섞인 의문을 가지신 분들이 많습니다.
선악과를 만드신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성품과 인간의 창조에 대해서 바른 견해를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성품 중에서 중요한 것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사랑입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8)
하나님은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곧 사랑이신 분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흔히 우리가 바라듯이 즐겁게 해주는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거룩하고, 정의로우며, 완전해야 합니다. 사랑은 혼자서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대상이 있어야 하고, 그 대상은 바위나 물과 같은 것이 아닌 생물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서로 교제하며 사랑을 나눌 수 있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자발적이라야 합니다. 인간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라야지, 억지로 하거나 자동적으로 하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은 무조건 순종하도록 인간을 만드실 수도 있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조종하는 대로 움직이는 로봇이나 인형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의 말씀에 순종할 것인가, 순종하지 않을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순종하지 않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길을 선택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 두시고, 그들이 창조주의 뜻을 따르는지, 아니면 그들 자신의 뜻대로 행하는지를 시험하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회사에서 선발한 직원에게 엄격한 수습 기간을 거치게 하고 평가한 다음에, 정식 직원으로 채용할 것인가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2:9, 16-17)
이 성경구절에 나오는 생명나무와 선악(善惡)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그 열매 자체에 어떤 신비한 물질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것을 먹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명을 갖게 하고 선악을 알 수 있도록 했을 것이라는 견해와, 실제로 존재하기는 했지만 그 자체가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단지 순종하는지 안하는지를 구별하는 상징으로 사용되었다는 견해입니다. 어느 경우라 할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은 순종에 대한 보상으로 생명을 주시고, 불순종에 대한 결과로서는 선악을 알게 하실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들을 창조하시고 사랑해 주셔서 필요한 것들을 모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믿고, 그의 말씀에 자유롭게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랬더라면, 선악과 대신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에덴동산의 낙원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안타깝게도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금지된 선악과를 따먹는 불순종의 길로 들어서고야 말았습니다 (창 3:1-7). 그 결과로 인간은 낙원에서 쫓겨나 하나님과 분리되고, 저주를 받아 고통가운데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죄를 저지르면, 이처럼 악(惡)을 경험하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원래 모든 피조물은 ”보시기에 매우 좋은” (창 1:31) 완전한 상태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인해서 결과적으로 선과 악을 모두 경험하고 그 차이를 알게 되었습니다.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따르면 생명이 있고, 순종하지 않으면 육체적인 죽음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영적 죽음을 초래한다는 뼈아픈 경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두 개의 창조신화?
박창성
창세기 1장과 2장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창조신화가 아닙니까?
사람들이 성경을 대하는데 있어서,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신뢰하고 의심 없이 따르려는데 비해서, 다른 사람들은 비판적인 태도로 대합니다. 일부 비판적인 사람들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부활마저도 제자들이 예수님을 신성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신화라고 말하면서, 성경에서 신화적인 요소들을 제거하고 믿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와 같은 주장을 하게 된 동기는 창세기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들은 다음과 같이 창세기 안에 서로 상충되는 내용이 있다면서 창세기 1장(1:1-2:3)과 2장(2:4-25)은 중동지방에 퍼져있던 서로 다른 두 개의 창조 신화를 합해서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서로 다르다.
실제로 하나님의 이름이 히브리어로 창세기 1:1에서 2:3까지는 '하나님(Elohim)”, 창세기 2장 4절에서 25절까지는 '여호와 하나님(Yahweh Elohim)”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이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서로 다른 신화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탓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품과 본질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해서 엘로힘(Elohim), 여호와(Yahweh) 뿐만 아니라, 아도나이(Adonai), 엘로이(El-roi), 엘샤다이(El-shaddai), 등 여러 가지 이름을 사용하셨습니다. 엘로힘은 '엘(El, 하나님)'의 복수 형태로서 ”장엄하신 하나님(majestic God)”을 나타내며, 창조, 심판, 구원과 같은 전 세계적인 사건과 함께 사용되었습니다. 반면에,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거나, 인간에게 가까이 오셔서 사랑과 관심을 베푸실 때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이외에 아도나이는 '나의 주님”(창 15:2), 엘로이는”'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창 16:13), 엘샤다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창 17:1)이라는 뜻으로, 우리는 이 이름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다른 이름을 사용했기 때문에 두 개의 다른 신화라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창조의 순서가 다르다.
창세기 1장에서는 식물, 동물, 사람의 순서로 창조되었는데, 2장에서는 사람, 식물, 동물의 순서로 다르게 창조되었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 역시 성경의 진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데서 오는 오해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had planted)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grow) 하시니...” (창 2:7-9)
이 구절들을 잘못 읽으면, 사람의 창조가 먼저 기록되고, 식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중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사람이 식물보다 먼저 창조되었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8, 9절에서 사용된 단어를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식물을 심고(had planted) 자라게 하신(grow) 것이지, 그 때 창조(create)하셨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신 후, 인간보다 먼저 창조되어 존재하고 있던 식물을 에덴동산에 심고 자라게 하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had formed)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창 2:19)
2장 19절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들짐승과 새를 지으시고, 먼저 존재한 아담에게로 보내신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문장의 앞 뒤 문맥을 조심해서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이 시기에 들짐승들과 새를 지으셨다는 것을 알리려는 것이 아니라, 아담이 하는 일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름을 짓게 하시기 위해서 이미 만들어 놓으신 동물들을 데려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으시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를 영어로 번역할 때는, 동물을 지으신 사건이 다른 사건보다 먼저 일어났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기 위해 대과거 시제(had formed)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NIV).
결과적으로 창세기 1장과 2장은 창조순서에 있어서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창세기 1장은 6일 동안의 창조를 진행된 순서대로 요약한 것이지만, 2장은 피조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여섯째 날에 창조된 인간에 초점을 맞추어 더욱 자세히 서술한 것이기 때문에, 다시 창조된 순서대로 기록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창세기 1장과 2장이 서로 다른 두 개의 신화를 토대로 기록한 것이라는 주장은, 성경에 대한 의심이 많은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일 뿐입니다.
참고 문헌
Henry M. Morris, The Defender's Study Bible: Defending the Faith from a Literal Creationist Viewpoint (Grand Rapids, MI: World Publishing, Inc., 1995), 10.
John Calvin, 칼빈 성경주석 (서울: 성서원, 1999), 46-47.
John D. Morris, The Names Of God, http://www.icr.org/article/21253/
Henry M. Morris, Created And Made, http://www.icr.org/article/19407/
Bodie Hodge, What Is God’s Name in the Old Testament?,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12/04/17/contradictions-names-of-god
*참조 : 창세기 1장은 바벨론의 신화를 재편집했는가?
https://creation.kr/Genesis/?idx=3863816&bmode=view
성경의 내용들이 신화인가? : 오늘날 주요 신학대학에서 골격가설이 가르쳐지고 있다.
https://creation.kr/BiblenHistory/?idx=1288958&bmode=view
모세는 창세기를 정말로 썼는가? : 성경을 훼손하고 있는 사기적인 문서가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3,000년을 있었는가?
(Jonah was in the fish... 3,000 years?)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 1:5)
”God called the light Day, and the darkness He called Night. So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Genesis 1:5)
이 구절을 정직하고 솔직하게 읽는다면, 창조주간의 첫째 날은 일반적 길이의 하루였다.[1] 창조주간의 날들은 어두움과 밝음이 되풀이되는 저녁과 아침으로 구성되어 있다. 최초 3일 동안의 빛의 근원이 태양이 아니라는 것을 제외하곤(태양은 넷째 날에 만들어졌다), 그 날들은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하루와 차이가 없었다.
창세기 1장의 날(days)들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창조 시점에 대한 성경의 다른 구절들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출애굽기 20:9-11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6일 동안은 일하고 하루는 안식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창조 주간에 이와 같이 하셨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출애굽기 31:17절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마가복음 10:6절에서 예수님은 ”창조 때로부터(from the beginning of creation)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바울은 로마서 1:20절에서 ”창세로부터(since the creation of the world)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구절들은 사람의 창조 이전에 수십억 년이 있었다는 것이 허구임을 가리키고 있다. 만약 수십억 년의 연대가 맞는다면, 예수님과 바울은 잘못 말씀한 것이 된다.
(진화론에 의한 영향으로) 하나님이 수십억 년에 걸쳐서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믿고 있는 크리스천들은 창세기 1장의 날들의 길이에 대한 부자연스러운 변칙적인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1] 이러한 시도는 궁극적으로 성경에 모순들과 신학적 딜레마들이 생겨나도록 만든다. 아담의 범죄 함으로 악한 것들이 이 세상에 들어왔기 때문에, 이러한 시도는 하나님이 수억 년에 걸친 동물들의 죽음, 질병, 폭력, 약육강식, 멸종 등을 허락하셨고, 허리케인, 토네이도, 쓰나미, 지진 등과 같은 자연적인 재해도 허락하셨으며, 이러한 모든 것들을 보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고 말씀하시는 분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 1장에서 ‘날(day)’로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 단어로 ‘욤(yom)’이다. 창세기 1장에서 욤은 수사로 수식되고 있으며, 밤(night)이라는 단어 및 '저녁과 아침(evening and morning)”이라는 단어와 연결되어서 사용되고 있다. 창세기 1장 외의 다른 곳에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사용된 욤은 언제나 정상적 길이의 하루를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의 '날'들은 문자 그대로 24시간의 하루를 의미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창세기 1장의 '욤'은 세 가지 요소, 즉 수사, 밤이라는 단어, 저녁과 아침이라는 단어와 함께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문맥을 무시하고 성경의 특정 구절을 인용하여 이것을 반대한다. ”베드로후서 3:8절은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창조의 날들은 오랜 기간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성을 7일 동안 행진했다는 구절에서, 또는 요나가 3일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다는 구절에서 어느 누구도 그 날들이 하루를 의미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은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어떤 크리스천들은 창세기 1장의 명백한 의미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는 것인가? 그것은 그들이 수십억 년의 지구 나이를 믿는 현대 과학자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끊임없이 변하는 사람의 의견을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말씀 보다 더 권위(authority)를 두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정말로 권위의 문제이다. 늘 변해왔고, 오류에 빠지기 쉬우며, 그곳에 없었고, 모든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견해에 그 권위를 둘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에 그 권위를 둘 것인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결코 거짓말을 하실 분이 아니시다. 성경의 그 분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 우리는 오류투성이의 인간의 이론보다, 과거에 대한 그 분의 설명을 신뢰해야만 한다. 그분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믿음을 허락하신 주님을 찬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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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tnotes
1. Some say that Hosea 6:2 is an exception to this because of the figurative language. However, the Hebrew idiomatic expression used, 'After two days ... in the third day,” meaning 'in a short time,” makes sense only if 'day” is understood in its normal sense.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get-answers/features/jonah-in-fish-days?
출처 - Answers Magaz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