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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성경

하용조
2012-01-25

빛의 창조 (창 1:3~5, 14~19) <창세기 강해 3>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고, 우주의 주인이라는 선언으로부터 성경은 시작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시간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피조물인 우리에게 시간은 선물입니다. 그 시간이 영원하면 영생입니다. 물질도, 인간도 시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물질을 만드시고 그 물질을 둘 수 있는 공간도 만드셨습니다. 1천억 개의 별이 마음대로 운행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입니다. 2절에서는 거대한 우주공간에서 우리를 하나의 별로 인도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지구입니다. 이 우주 공간에 천억 개가 넘는 별들이 있지만 오직 지구에만 생명을 주셨습니다.

지구가 달이나 토성과 목성처럼 생명이 없고 그저 하나의 물질로 있었을 때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있었다”고 표현했습니다. 아직은 빛이 없기 때문에 흑암 중에 있고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공허하고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혼돈했습니다. 다른 별들처럼 지구는 하나의 물질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지구에 사람과 생명이 살 수 있는 땅을 만들고 대기권과 물을 주시고 공기 등에 산소의 적당량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인간이 병들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환경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 일을 하신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식물이나 동물을 창조하기 전에 그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먼저 만들어 주셨습니다. 수천억 개의 별 중에 하나의 별에 관심을 가지고 생명을 주었다는 사실은 참으로놀랍고 신비로운 일입니다. 우리는 아직 다른 위성에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듣지 못했습니다. 별이 많은 것은 확인되었지만 생명은 지구에만 있습니다.


창조와 구원의 원리

이 지구상에 수십억의 인류가 있는데 왜 하필 우리는 예수를 믿고 온누리교회에 나오게 되었을까요? 이것은 수많은 별들 중에 한 개의 별에 생명을 주신 것처럼 놀라운 기적입니다.여러분이 예수님을 알게 되고 교회에 나오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축복 중에 축복입니다. 내가 똑똑하고 잘났거나 기득권을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믿게 해 주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성령이 아니고서는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 이미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운행하셨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신이 흑암과 혼돈과 공허 속에 있는 땅에 오셔서 알을 품듯이 운행하시면서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신 것처럼 성령님은 여러분에게 찾아오셔서 예수믿고 축복받은 자녀가 되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창조의 원리와 내가 구원받은 원리는 같습니다. 하나님은 성령님을 미리 보내어 준비하시고역사를 일으켜 주셨습니다. 백년 전에 이 땅에 선교사가 왔지만 그전에 이미 중보기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무당의 후손들인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었고 어둠의 자식으로 소망이 없던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찾아 오셔서 이처럼 엄청난 축복을 주시어 우리가 그분의 이름을 선포하고 그 분의 이름을 노래하고 선전하는 축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제 3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더라” 1절에서는 천지창조의 선언이 있고 2절은 성령님이 오셔서 운행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빛이신 예수

이제 3절에 이르면 창조의 행위가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빛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는 신약의 성경구절 하나가 있는데 요한복음 1장 1절부터 5절까지입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 1장 3절의 중요한 주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여기에서 말씀은 무엇일까요? 14절을 보십시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원래 하나님이셨는데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는데 그 안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광은 하나님의 빛입니다. 하나님은 빛으로 밖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물질이 아니라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임합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에게는 은혜가 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동일하게 임하게 됩니다.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요한복음 1장을 다시 한 번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말씀의 형태로 존재하십니다. 이 생명 안에 빛이 있습니다. 이 빛은 사람들에게 비춰졌습니다.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지만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를 거부하고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런 묵상을 통해 창세기 1장 3절을 보면 그 말씀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씀하신 하나님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나면 말씀을 알게 되고 그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만나게 되면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 안에 들어가게 되고 그 영원 안에 있는 빛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모두 함축되어 포함된 말이 바로 창세기 1장 3절의 ”하나님이 가라사대”입니다. 성부하나님, 성령하나님, 성자하나님을 통하여 이 우주의 창조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두 번째 절에서 배우게 3 되는 사실은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분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입과 동일한 형태를 지니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도 말씀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개념이 없다면 입을 만들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우리의 귀를 만드신 것을 보면 하나님은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눈을 만드신 것을 보면 하나님은 보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육신은 아니시지만 그분은 들으시고 말씀하시고 보시는 분입니다. 여러분의 형편을 보고 여러분의 기도를 듣고 어렵고 힘들 때 격려해주시고 축복해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가슴을 만드신 하나님은 따뜻한 가슴을 가진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개념이나 이론이 아닙니다. 철학이나 신이 아닙니다. 그 분은 나를 사랑하셔서 보고, 듣고 계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알게 되는 새로운 사실은 ‘말씀은 창조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말씀의 능력이 성경에 있습니다. 이 말씀 앞에 서 있는 자마다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의 능력들과 지혜와 영감을 얻을 것입니다. 말씀의 거룩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쓰는 단순한 의사전달이나 대화의 수단의 말이 아닙니다. ‘로고스’인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말씀 안에 거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 안에 있는 사람들은 창조의 능력과 영감들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 1장 3절에 있는 빛에 대해 우리는 자연과학적인 빛에 대해서만 생각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빛은 태양입니다. 태양이 없다면 빛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발전소를 통해서 빛을 만들어 쓰고 있는 전기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되면서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빛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적외선과 자외선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직 우리가 보지 못하는 빛의 종류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창세기 1장 3절에서 말하고 있는 빛이 아닙니다. 하늘의 별과 달과 발광체들은 첫째 날이 아니라 넷째 날에 만드셨습니다. 14절부터 1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에 비취게 하시며 주야를 주관하게 하시며 빛과 어두움을 나뉘게 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어마어마한 우주공간에 전등불 하나 달아놓은 것이 태양입니다. 지구에는 생명을 주시고 태양을 전기불처럼 사용하신 것입니다. 태양에 빛이 있습니다. 빛이 있다는 것은 그림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태양이 비췰때 어떤 물질로 차단하면 차단된 곳에는 그림자가 나타납니다. 태양이 나를 비취면 내 뒤에는 그림자가 생깁니다.

이것이 동양에서 말하는 음양설입니다. 음양이론으로 우주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설명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음이나 양이 아니고 빛과 그림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태양에는 음양의 이론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빛을 막을 자가 없습니다. 태양은 굴속에 들어가면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굴속에도 바다 속에도 우주 끝에도 그 분의 빛은 막을 자가 없습니다. 그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빛입니다.


참으로 오묘한 창조의 원리

따라서 태양의 빛과 창세기 3절에 나오는 빛은 다릅니다. 빛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을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어 어둠에 살고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돌고 지구를 중심으로 달이 돌기 때문에 낮과 밤이 생깁니다. 태양이 비취지 않는 곳을 밤이라고 말하고 태양이 비취는 곳을 낮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서 부터 징조가 생깁니다. 아침에 해가 뜨고 해가 집니다. 사계절이 존재합니다. 자전과 공전이 있기 때문에 24시간과 년 수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류를 위하여 이렇게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후에 인간을 만들어 온 우주만물을 다스리고 살 수 있도록 창조의 중심으로 세우셨습니다.

창조의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입니다. 첫째 날 빛을 만드시고 넷째 날에는 빛을 낼 수 있는 것을 만드셨습니다. 둘째 날 하늘과 바다를 만드시고 다섯째 날에는 하늘에 있는 모든 것과 바다에 있어야 할 모든 것들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셋째 날 땅을 만드시고 여섯째 날에는 땅에서 살 수 있는 모든 동물과 식물을 만드셨습니다. 빛과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그 후에 그 곳을 채우는 것입니다. 참으로 오묘합니다. 그리고 나서 안식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주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일하고 쉬도록 만드셨습니다. 육일 동안에는 세상에서 일하고 제 칠일에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주일날에도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건강과 리듬에 무리가 옵니다. 또 밤에는 자고 낮에는 일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밤에는 일하고 낮에는 잡니다. 세상이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죄는 창조의 원리를 바꾸어 놓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의 생명체를 파괴합니다. 환경오염을 가져옵니다.

우리는 창세기 1장 3절에 나오는 빛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에 대한 해설이 고린도후서 4장 6절에 있습니다.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3절 이전에는 어두움이 있습니다. 그곳을 하나님의 신이 운행했습니다. 어두움에 빛을 비취라고 하시던 하나님이 빛의 영광을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두시고 그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도 주셨습니다. 인간이 경험하는 것은 더럽고 치사한 것 밖에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거룩과 영광의 경험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거룩과 성령과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합니다.

역대하 7장 1절에서 3절을 보면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놓은 후 기도할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단에 있는 모든 번제물을 태운 후에 성소에 영광이 가득했습니다. 영광은 하나님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육이 아니시기 때문에 빛으로 임하십니다. 성전에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제사장이 섬길 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여러분에게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어두움이 물러가고 질병이 떠날 것입니다. 악한 세력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앞에서는 존재할수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영광의 빛에 참예한 자들그 영광의 광채를 실제로 경험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모세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기 위하여 그를 시내산으로 부르셨습니다. 모세는 사십일을 주야로 하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모세는 십계명이 쓰인 돌판을 들고 내려올 때 사람들은 모세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얼굴에 수건을 씌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다릅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기 때문에 빛이 납니다. 요한1서 1장 5절을 보면 하나님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태양빛에는 그림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그림자가 없습니다. 전기불도, 촛불도 끌 수 있지만 하나님의 빛은 끌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빛입니다. 이 빛은 예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에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라고 말했습니다. 이 빛을 본 또 한 사람은 바로사도바울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을 죽이려고 길을 가던 중 다메섹도상에서 한 빛을 만나게 됩니다. 그 빛은 여러분에게도 임할 줄 믿습니다. 주님은 여러분에게 빛으로 오십니다. 어두움의 세력을 몰아내 어두운 생활을 청산하고 습관들을 끊게 해 주시고 빛으로 오셔서 역사하십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서 제자들 앞에서 갑자기 변형되셨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대화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에 대한 모습을 ”예수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그 옷은 빛과 같이 되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빛의 모습은 요한계시록 1장 12절부터 16절에 또 나타나고 있습니다.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 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이런 모습으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분은 머지않아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하여 세상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며 빛이십니다.

저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말한 것이 참으로 좋습니다. 결혼한 남녀가 임신을 해서 해산의 고통을 거치고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 ‘좋았더라’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실 때 바로 이런 마음을 가지신 것입니다. 그런데 자살을 생각하고 절망하고 좌절할 수 있겠습니까? 절망이나 좌절하는 것은 창조에 역행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보고 ‘좋다’고 말하는데 여러분이 ‘난 죽을 꺼야’라고 말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이 어떨까요? 그 시시하고 보잘것없는 일로 위대하신 창조의 하나님의 능력과 신비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자살하려고 했던 마음을 가졌던 분들은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고민을 크게 보이게 하는 것은 사탄의 역사입니다. 여러분의 고민은 십자가 앞에서 보면 결코 크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잊었기 때문에 분하고 억울하고 죽을 것 같은 절망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빛이십니다. 지구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인생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가 인간입니다. 인간보다 더 영광스러운 존재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기뻐하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시고 지구를 만드시고 좋아하셨고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시고 좋아하신 것을 찬양합니다. 영광을 받아주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5278

참고 :

하용조
2012-01-24

성령님께서 운행하시다 (창 1:2) <창세기 강해 2>


       창세기는 감탄사로 시작됩니다. 좋은 것을 보면 우리는 말을 하지 못하고 감탄을 하게 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니...” 이것이 창세기 1장 1절입니다.

성경은 지식이나 정보, 교훈을 위해 쓰인 교과서가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구원을 주기 위해 기록된 책입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감격과 기쁨과 축복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책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1절은 설명이 아니라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따지고 논쟁하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논쟁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경배하면 하나님이 보입니다. 그분은 예배의 대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에게 무릎 꿇고 나아가 기도하며 찬양하며 죄를 고백할 때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믿고 고백할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는 자에게 창세기는 문을 엽니다. 자기를 공개하기 시작합니다.


창조무대에 주인공으로 나타나신 성령하나님

1절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하는 웅장한 선언을 한 후 구체적으로 창조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2절에 나와 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더라”

창세기는 잘못 발을 들여 놓으면 논쟁으로 끝나고 맙니다. ”과학적이다, 아니다, 진화론이다”라고 논쟁을 하게 되면 창세기의 진정한 의도는 어느새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2절을 보면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만드시고 어떻게 형성하셨는가에 대해 말씀하실 것이라는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의 신이 수면위에 운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 아니라 세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즉 성부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인 성자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성령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령하나님이 창조의 무대에 주인공으로 나오고 있는 사실을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 혼자 일하지 않으셨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세분이 함께 일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가리켜 ‘엘로힘’이라는 복수형을 씁니다. 하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사회’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인류에 사회를 주신 것도 하나님이 사회속에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골로새서 1장 17절을 보면 ‘예수님’이 창조의 현장에 계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창세기 자체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골로새서에 오면 바로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셨다고 확실하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창조 전에 계셨던 분이시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조사역에 같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만 동참한 것은 아닙니다. 2절을 보면 성령 하나님도 천지창조사역에 직접 개입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상상력으로 결코 헤아릴 수 없는 우주의 광활함

”땅이 혼돈하고...”  땅은 지구를 의미합니다. 최초의 지구 상태를 세 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혼돈, 공허, 흑암’이라고 했습니다. 보통 천문학자들이 추측하기를 은하계는 1천억 개의 별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1천억 개인지, 1천5백억 개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의 계산법으로는 계산할 수 없고 한계를 지을 수 없을 만큼 무한합니다.

사실 하늘위에 별이 얼마나 있는지는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것은 우리의 머리카락을 세려는 어리석음과 같습니다. 과연 이 우주는 끝이나 한계가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지으신 이 우주만물은 인간의 상상력이 미처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크고 엄청난 것입니다. 제가 안식년 때마다 즐기는 것은 하늘의 별을 보는 것입니다. 시골에 가서 보면 바로 내 머리위에 별이 떨어질 듯이 보입니다. 그 많은 별들은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이 창조의 위대함을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과학의 잣대로는 모두 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과학의 잣대는 하나님의 창조보다 더 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8편에는 이렇게 시편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위에 두셨나이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그렇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감탄사 외에는 없습니다. 창조의 끝에는 감탄사가 있을 뿐입니다. 과학으로나 학문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다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을 시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입술로 설명할 수 없고 마음으로는 창조를 느낄 수 없습니다.

무인우주선을 보내거나 사람이 있는 우주선을 달나라에 보내어 전송되어 온 달 표면 사진에는 아무 생명체도 없었습니다. 화학요소와 물질과 원자와 분자로 구성된 거대한 물체에 불과했습니다. 분화구 같은 것이 있었지만 생명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먼지만 있는 곳이었습니다. 최근에는 좀 더 과학이 발달되어서 탐사선을 화성, 토성, 목성까지 보내서 사진을 찍어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곳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은 빛과 물 같은 요소들이 있어야만 존재합니다. 그런데 지구도 다른 모든 별들처럼 생명이 없었습니다. 물도 빛도 생명도 없는 하나의 물질이었습니다. 분자와 원자로 구성된 일정한 화학요소들, 수소라든지 이런 물질일 뿐이었습니다.

지구의 모습을 세 단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혼돈을 너무 철학적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카오스니 코스모스니 ‘ ’ ‘ ’ 생각하다보면 본래의 뜻이 모두 사라집니다. 그저 혼돈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혼돈이라는 말이 ‘공허’라는 말과 함께 있습니다. 영어로 설명하면 ‘형태가 없다’는 말입니다. 형태가 없기 때문에 질서가 없고 자연 물질 그대로 있는 것뿐입니다. 지구의 최초의 모습은 지금의 달처럼 생명이 없이 물질만 있었습니다.

지구의 모습은 혼돈과 공허였습니다. 어두움만 있었습니다. 이 지구상에 생명체가 있기 전에는 무질서였습니다. 그저 물질일 뿐인 혼돈과 아무 것도 없는 공허한 어두움만이 있었습니다. 달나라를 상상해 보십시오. 밤이 되면 캄캄한 어두움이 달을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지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요즘 컴퓨터를 배우고 있습니다. 디스켓은 구입해서 바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먼저 포맷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입력을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디스켓을 포맷해야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지구도 생명이 없을 때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깔려 있는 하나의 물질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 호흡이 지구를 감싸

흑암과 혼돈과 공허가 있는 달나라와 같은 지구에 ‘하나님의 신’이 찾아왔습니다. 성령님이 찾아와서 지구를 감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은 바로 ‘루하흐’인 바람입니다. 바람이 부는 것입니다. 성령의 기운이 지구를 돌았다는 것입니다. ‘루하흐’는 ‘바람, 숨, 호흡’등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 즉 호흡이 공허하고 흑암이 있고 혼돈이 있는 지구를 돌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신이 운행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움직였다’ 혹은 ‘흔들었다, 진동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운행했다는 말은 물체의 위에서 영향력이나 기운을 내리쏟았다는 말입니다.

이 뜻을 조금 더 원어적으로 이해해보면 암탉이 계란을 품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계란을 그저 품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온도 안에서 굴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님께서 이 지구를 감싸고 하나님의 생명을 집어넣은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창조입니다. 생명이 있어야 생명을 줄 수 있습니다. 찬송가가 생명을 만들어 줄 수 없습니다. 생명은 생명이 있는 분으로부터 옵니다.

고아원에서 자란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부모를 본 일이 없이 외롭게 자랐습니다. 그가 커서 ‘나에게는 부모가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부모를 잃어버렸을 뿐이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부모가 있었습니다. 인간은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돌에서 나오거나 계란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인간에게서 태어납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이지만 마리아의 몸을 빌어서 나왔습니다. 그분이 예수입니다.

여러분, 이 우주에 1천억 개의 별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생명이 있는 별은 지구 밖에 없습니다. 가까운 달이나 다른 별에는 왜 생명이 없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상상하기를 달에는 외계인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미래에는 우주전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요즘 영화들의 주제가 되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어떤 위성에도 생명체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생명은 물이 있어야 존재합니다.

”수면에 운행하다”라는 말과 ”물과 물위를 나눈다는 말”을 기억하십시오. 성경에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수많은 별들 중에 하나님의 생명이 지구라는 별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성령님이 지구 주변을 운행하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입니다.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입니다. 이 생명을 만드신 하나님의 신인 성령님이 땅과 하늘을 만들고 동물과 빛을 만들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셔

창세기에는 논쟁이 없습니다. 믿음뿐입니다. 지구를 하나의 계란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미닭이 계란을 품고 있듯이 성령님이 지구를 품고 생명을 잉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신비스럽고 엄청난 사실입니까? 이것은 마치 생명이 어머니의 태속에서 자라나는 것과 같습니다. 수정된 지 몇 개월 되지 않아서 아이의 심장은 뛰고 오장육부가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뇌가 그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저는 낙태에 대한 것을 열심히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태아는 6개월이 지나면 완전히 사람의 형태가 이루어집니다. 낙태는 살인입니다. 그것은 생명입니다. 산 사람과 똑같습니다. 저는 우리나라 나이법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서양나이는 태어난 후부터 계산 하지만 우리나라는 임신하면서부터 계산합니다. 그 아이가 태속에서 숨 쉬고 자라다가 어느 날 태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입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듯이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신 것입니다. 그러다가 3절에서 빛이 있으라고 할 때 아이가 ‘으앙’하고 태어나듯이 빛이 있게 된 것입니다.


죽은 영혼 살리는 생명의 영

우리는 2절의 말씀에서 더 깊은 진리를 묵상하게 됩니다. 첫째는 성령님의 역사와 능력입니다. 창세기는 과학적으로, 합리적으로 접근하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천지창조는 성령님이 하셨습니다. 성령님이 지구를 품고 생명을 불어넣어주셨기 때문에 우주에 존재하는 어떤 별에도 생명이 없지만 지구에는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성령을 받는 자마다 생명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을 때 성령의 생명의 영이 부활시키셨습니다. 여러분 안에도 생명의 영이 들어가게 되면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게 될 것이며, 죽은 영혼이 다시 거듭나고 부활될 줄 믿습니다. 이분이 성령님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성령님은 바로 그리스도 입니다. 성령님은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성령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며, 죽었던 우리를 살게 하시며, 기쁨이 있게 하시며, 감사와 감격이 넘치는 살아있는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들의 신앙이 미온적인 이유는 성령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에 나타난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가득 차 있던 이 지구에 성령이 임함으로 생명력이 생기고 놀라운 창조의 역사가 생겼던 것처럼 성령님이 여러분 안에 임하시면 생명이 임하고 능력이 임할 줄 믿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이 성령님에 관심이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성령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성령님의 창조의 능력을 현실에서 다시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대부분의 많은 크리스천들은 너무나 비참하게 살고 있습니다. 모두 ‘예수 믿는 것이 다 그렇고 그런거지 별게 있는가?’라며 자기 수준으로 끌어 내립니다. 하나님을 자신과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신 분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나의 영적 정도가 신앙의 전부가 아닙니다. 내가 살고 있는 신앙은 아주 밑바닥일 수 있고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성령과 생명은 따분한 것이 아닙니다. 감사와 감격, 기쁨, 확신입니다. 고난, 위기, 아픔, 어떤 실망과 죽음도 모두 이겨낼 수 있는 성령님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이 오늘 여러분에게도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이 메시지에서 묵상할 수 있는 또 하나는 성령과 말씀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움직일 때 창조의 말씀 나와

이제 성령님께서 모든 것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가라사대’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즉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운행하시고 말씀이 있었습니다.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어도 능력과 기적과 감동이 없는 이유는 성령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운행하시고 ”빛이 있으라”하시면 빛이 생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이 운행함이 없이 말하는 것은 여러분의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신비스러운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령님이 운행하심으로 생명이 들어가고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이 성경을 읽을 때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이 계셔야 합니다. 성령님이 없이 인간의 이성과 경험과 생각, 상식으로 하나님께 접근하한다면 그것은 지식이상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겸손하게 무릎 끓고 성령님을 받아들이고 성령님이 운행하심을 사모하고 성령의 운행하심이 내 영혼을 감싸고 있었을 때 말씀을 듣거나 읽거나 묵상하면 그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우리의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며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통찰하는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때 귀신들이 떠나갑니다.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성령님이 운행하심으로 나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령과 말씀이라는 두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1절부터 3절까지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1절에서는 하나님을 2절에서는 성령님을, 3절에서는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창조입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만들어진 것입니다. 연구한다고 아기가 태어나지 않습니다. 묵상한다고 아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결혼해야 아기가 태어납니다. 똑똑하고 박사 학위가 있다고 혹은 부자라고 아기를 낳는 것이 아니라 결혼을 해야 아기를 낳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진리란 그런 것입니다. 진리는 지식 안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 저는 이 사실을 믿습니다. 성령님이 흑암과 공허와 혼돈 속에 있는 지구를 운행함으로 말미암아 지구에 생명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성령이 움직일 때 말씀이 나온 것입니다. 그 말씀이 능력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말씀과 성령이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창세기의 놀라운 비밀을 깨우쳐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우리에게도 성령님을 부어주시옵소서. 주여, 창조의 신비를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말씀의 능력에 사로잡히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1998. 3. 온누리신문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5277

참고 :

미디어위원회
2012-01-23

창조주 하나님 (창 1:1) <창세기 강해 1>

하용조 


       성경을 펼 때마다 디모데후서 3장 16~17절 말씀인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졌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성경은 인간의 지성과 경험과 상식과 합리성으로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성령을 받은 분만 이 성경을 명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신 책인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령에 충만해 있을 때 그 문이 열립니다. 비밀이 보이고 말씀이 드러납니다.

또한 성경을 공부할 때 기억해야 할 말씀은 마태복음 5장 18절 이하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이해했던지 이해하지 못했던지, 해석이 되던지 되지 않던지 일점일획도 틀림없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이 말씀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전에 다 응답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번 창세기 공부에 마음을 열고 정성과 뜻과 마음을 다하여 집중하시면 창세기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들려주시고 싶은 하나님의 음성들이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창세기는 성경의 첫 번째 책이기 때문에 성경 전체를 여는 열쇠와 같은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면 창세기를 여는 열쇠는 무엇입니까? 바로 1장 1절입니다.

 

 ‘선언’으로 시작하는 창세기

무슨 책이든지 서론이 있고 설명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시작은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단지 선언이 있을 뿐입니다. 놀랍고 신비스럽고 권세 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설명도, 변명도, 논리의 전개도, 설득도 없습니다. 진리에 대한 선포가 있을 뿐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이 놀라운 진리의 선포를 믿고 고백하면 창세기가 전부 열립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믿지 못할 것이 없고 의심할 것도 없습니다. 이 고백이 있다면 기적이 일어나는 일도 간단합니다.

1장 1절의 말씀을 조금 정리해 보겠습니다. 이 말씀에서 ‘태초에’라는 말을 빼고 나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가 됩니다. 이 말씀을 더 줄인다면 ‘천지를’이라는 말을 빼고 ”하나님이 창조하셨느니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좀 더 압축해서 ‘창조’라는 말을 빼면 ‘하나님’ 만이 남습니다. 이 구절의 열쇠는 ‘하나님’입니다. 우주 만물과 사람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우주 만물의 중심과 인생의 중심도 하나님이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만드시고 나를 만드신 것을 믿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선포합니다” 라는 고백으로 창세기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창세기는 논쟁하는 책이 아닙니다. 세미나를 하거나 연구하는 책이 아니라 선포하는 책입니다. 창세기는 특이합니다. 하나님이 우구이시며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의 본질은 무엇이며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는지에 대해서 한마디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선포가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창세기 1장 1절입니다.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

본문의 주어는 ‘나’가 아닌 ‘하나님’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인생의 주인은 ‘나’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인생의 주인이 되면 불행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인생의 주인이 될 때 축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주 만물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요,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면 모든 문제가 안개같이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와 능력과 신묘막측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사탄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 중심의 축을 인간중심으로 바꾼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이 사탄에게 받은 유혹은 ”선악과를 먹으면 네가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인간 최대의 유혹은 신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조금만 권력을 가지고 높은 위치에 있게 되거나 남보다 돈이 많거나 똑똑하다는 말만 들으면 신이 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인간이 신이 되려는 것입니다. 인간이 신이 되려는 유혹은 다른 사람을 종으로 만들려는 지배욕에서 시작됩니다. 많은 사람을 자신의 수하에 두고 싶고 명령하고 통치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되는 것이 신이 되려는 유혹의 첫 발을 내딛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 사상에서 가장 우리를 헛갈리게 하는 것이 휴머니즘입니다. 굉장히 멋있게 느껴지지만 휴머니즘은 바로 인본주의입니다. 인권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인권이 우상이 되면 신권이 없어집니다. 인본주의가 있으면 신본주의가 없어집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중심으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빛은 어두움을 싫어합니다. 불의한 사람은 의로운 사람을 싫어합니다. 정의로운 사람 옆에 있으면 자기의 불의가 비교되고 드러나기 때문에 의로운 사람을 절대로 환영하지 않습니다.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인생에서 하나님을 몰아내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있으면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빛이 왔으되 어두움이 영접지 아니하더라”라고 말합니다. 빛인 예수 그리스도가 왔지만 아무도 환영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캄캄한 어두움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거부하고 심지어 그 존재 자체를 부인하기까지 합니다.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래서 시편 14편 1절에는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며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2편 1절부터 4절을 보면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
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의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도다”라고 사람들은 말한다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계속해서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존귀와 영광받기 합당한 하나님

그렇습니다 . 잠언서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하나님을 거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 안에 들어오셔야 합니다. 그때에야 여러분은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이 인생과 우주만물의 본분입니다. 하나님을 가지고 논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과 세미나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책에 계시거나 도서관에 계신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경배하고 찬양할 때 그분은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은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논쟁하고 따지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십시오. 무릎을 꿇고 그 분의 위대하심과 영원하심과 거룩하심을 찬양하십시오. 그 때 하나님의 거룩과 능력이 여러분에게 나타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여러 곳에서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내게로 가까이 오라 내가 너희에게로 가까이 가리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힘써 알자 여호와께 나아와 경배와 찬양과 존귀와 영광을 돌릴지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 8절을 보면 네 생물이 나타납니다. 여섯 날개가 있는데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합니다. 그들은 밤낮 쉬지 않고 이렇게 찬양합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 이 생물들만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옆에 있던 24 장로들이 보좌에 계신 그분에게 면류관을 던지면서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라고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영광과 찬양과 존귀를 그분에게 돌려드리는 것이 참 예배인 것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에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과 거룩이 나타나며, 치유의 능력이 나타나며, 우리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나타납니다. 뿐만 아니라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허다한 무리들이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흰 옷을 입고 보좌와 어린 양 앞에서 찬양하며 경배하는 놀라운 찬양의 광경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하나님, 이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인생을 만드신 그 하나님을 선포하고 그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 하나님의 영광 앞에 우리가 서 있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이 1장 1절입니다. 이것이 창세기의 시작입니다.

 

성령세례 받아야 창조신비 보여

창세기 1장 1절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시간을 만드신 분이시며 시간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태초에’라는 말에 있습니다. ‘태초에’라는 말은 인간의 시간이 시작된 바로 그 순간이라는 말입니다. 시간이 있다는 말은 공간이 있다는 말입니다. 공간이 없는 시간은 없고 시간이 없는 공간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류의 역사에 시간을 주셨습니다.

시간은 인간의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있을 것을 가리켜 ‘역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한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이지만 하나님 없이 만들어진 역사는 ‘인류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시간이 기준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시간 안에 존재하지 않으시며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있습니다. 인간이해는 곧 시간이해입니다. 시간을 잘 이해할 때 믿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게 칠십 혹은 강건하면 팔십의 생애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잘 써야 합니다. 시간을 잘 쓰지 못하는 사람은 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시간을 사탄에게 준 사람들은 멸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을 하나님을 위해 쓰고 잘 선용한 사람은 축복을 받게 됩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시간을 아끼라는 말은 시간을 구원하라는 말입니다.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시간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영광스러운 시간이요, 축복된 시간이요, 천년같은 시간이 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지루하고 파멸의 시간이 됩니다. 같은 시간이지만 그 시간이 어떻게 쓰이느냐 또는 누가 잡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인생의 생사화복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내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의 주인이 ‘나’라고 한다면 우리는 죽지 않아야 합니다. 시간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의 시간이 하나님의 시간과 접붙여질 때 영원한 시간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 영원한 시간을 가리켜 ‘영생’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영생가운데 거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우리의 시간
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우주 만물과 인생은 하나님이 지었을 뿐만 아니라 그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만물의 주인도, 우리 인생의 주인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소유했습니다. 인간에게는 소유권이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갈등이 있는 이유는 소유권이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내 땅이라고, 내 이름으로 땅문서를 섰기 때문에 자신의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죽을 때 모두 놓고 가야 합니다. 땅문서도, 기업도, 반지도 모두 놓고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소유권이 아니라 위탁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우리에게 빌려주신 것입니다. 끝날 때 잘 돌려주십시오. 어떤 사람은 빌리고 나서 영원히 주지 않으려는 분이 있습니다. 물질도, 시간도, 건강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의 이름을 높여 드리십시오. 그때 하나님은 더 놀라운 축복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창조’라는 뜻은 없는데서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는 것은 있는데서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하면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돈이나 권력, 젊음은 모두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비웃으십니다. 인간의 법칙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발견한 것뿐입니다. 그래서 존귀와 찬양과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문제가 생겼을 때 하나님께로 돌아오십시오. 기계가 고장 났을 때 기계를 만든 사람에게 가져가면 금방 고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 가면 바로 해결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십시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분의 이름을 높여드리십시오. 그 때 여러분을 만드신 하나님은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줄 믿습니다.

 

창조의 두 번째 뜻

창조’라는 말에는 또 하나의 뜻이 있습니다. 창조라는 뜻은 없는데서 있게 할 뿐 아니라 만든 것을 통치하고 다스리시고 관리하고 유지하고 보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마치 부모가 아이를 낳고 나서 부모역할을 다했다고 떠나는 무도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를 낳는 순간 부모의 눈은 반짝이고 아이를 돌보기 시작합니다. 기저귀를 갈아주고, 우유를 먹이고, 병이 나면 걱정하고, 학교에 보냅니다.

창조는 세상에 보냈을 뿐만 아니라 관리하시고 통치하시고 끝까지 지켜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통치하고 다스리십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그분의 통치를 받지 않는다면 도와주고 싶어도 도울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태양을 부인한다고 해서 태양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할 뿐입니다. 태양을 인정하십시오. 지하실에서 나와서 밝은 태양 앞으로 나오십시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 걸어 나오십시오. 하나님께 가슴을 열고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기 시작하십시오. 그때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쏟아질 줄 믿습니다.

창조에 있어서 깊이 생각할 것이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셨지만 그 창조의 과정 중에 성령이 함께 계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성령님을 만나면 창조의 신비를 경험하게 됩니다. 성령세례를 받으십시오. 성령의 인치심을 받으십시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그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능력을 몸으로 느끼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신묘막측한 것을 내 안에서 느끼기 시작합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을 보면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와 함께 섰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우주를 창조하실 때 시간을 만드실 그 때에 예수님이 거기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 천지창조의 원리는 예수님을 영접하셔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계신 그 창조의 하나님, 우주를 만드시고 신묘막측하게 나를 지으신 그 하나님의 오묘한 신비가운데로 우리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십시오. 그 때 이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믿습니다. 나는 이것을 선포합니다. 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드립니다.” 이럴 때 창세기는 열리기 시작합니다. 모든 논쟁과 의심은 사라지고 그 안에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이 이 창세기 안에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창세기의 서론입니다.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

마지막으로 우리가 어렸을 때 했던 질문 하나를 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나 혹은 여러분이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다면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어요?” 혹은 ”하나님은 남자야 여자야?”라는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에 대답은 이렇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만들어졌다면 하나님이 아닐 것입니다. 단지 피조물일 뿐입니다. 창조자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피조물은 만들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가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입니다. 그는 창조자이신 것입니다. 그는 영원 전에 계셨습니다. 영원 후에도 계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남자나 여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 안에는 남자와 여자가 다 있습니다. 그는 부분이 아니라 전부입니다.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그는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죽은 관념이나 철학이 아닙니다. 오늘 여러분이 기도하시면 응답해 주시는 그분이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믿으십시오. 선포하십시오. 이 믿음을 가지고 창세기 여행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여기 머리숙인 당신의 종들에게 이 창세기의 1장 1절의 위대한 선포와 믿음이 있게 축복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1998. 3. 온누리신문

미디어위원회
2012-01-11

창세기 1장의 빛의 존재와 의미

김홍석 


창 1:3-5 (개역개정)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흠정역)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하나님께서 그 빛을 보시니 좋았더라. 하나님께서 어둠에서 빛을 나누시고 하나님께서 빛을 낮이라 부르시며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그 저녁과 아침이 첫째 날이더라”

 

창 1:14-15 (개역개정)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흠정역)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밤에서 낮을 나누도록 하늘의 궁창에 광체들이 있고 또 그것들은 표적들과 계절들과 해(year)들을 나타내라 또 그것들은 하늘의 궁창에서 빛이 되어 땅 위에 빛을 주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Point 1. 창조 6일 가운데 제4일에 태양 등 광체들이 창조되기 전의 빛인 창 1:3-5의 빛, 즉 창조 6일 가운데 첫째 날의 빛은 제4일의 빛과 다른가? 

창조 6일 가운데 제4일에 창조된 태양이 있기 전에 지구를 비추던 빛은 태양 빛이 아니었는데 그렇다면 그 빛은 어디서 왔는가? 이에 대하여는 질문으로 답을 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 ”빛이 왜 존재하는가? 그것은 태양이 있기 때문인가?” 결코 그렇지가 않다. 빛이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지 태양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강조하시고 가르쳐주시기 위하여 태양을 제4일이 되어서야 창조하신 것으로 생각된다. 제3일까지는 태양이 없이 빛이 존재하여 지구를 비추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태양이 지금 위치에서 지구를 비추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태양이 존재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지구는 자전을 통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 역시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지 태양이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제4일에 이르러 하나님께서는 제1일부터 그때까지 빛을 발산하여 지구를 비추었던 것과 동일한 모습으로 동일하게 기능하도록 태양을 만드시고 달을 만드셨다. 그리고 별들도 만드셨다. 태양이 빛을 냄으로써 지구를 비추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비추어 온 것과 동일하게 기능하도록 나중에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태양에게 일러주셨다. 태양은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도록 땅을 비추라(히.오르, 동사)고 소명을 받아 임직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1:3-5의 빛(히.오르, 명사)은 태양 빛은 아니지만 나중에 만들어진 태양이 바로 이 빛을 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그 기능면에 있어서 동일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여기에는 이유가 있는듯하다! 왜 하나님께서는 태양을 지구와 함께 창조하시지 않고 제4일이 되어서야 태양을 만드셨을까?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통하여 무엇을 교훈 받는가? 빛, 지구의 자전이나 공전이나 모든 존재와 현상들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이시며 만유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와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임을 강력하게 시사해주고 계신다고 생각된다.

 

Point 2. 창 1:3-5 빛의 존재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이제 이러한 이해 위에 우리는 헨리 모리스(Henry M. Morris)박사의 ‘빛’에 대한 이해를 좀 더 깊이 있고 친숙하게 살펴볼 수 있게 된다. 헨리 모리스박사는 그의 저서 「The Genesis Record」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빛을 가져왔다! (중략)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요 1:1, 14) ”세상의 빛”(요 8:12)이시며, ”그 분 안에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다”(요일 1:5).  (필자 주 : 헨리 모리스박사의 이러한 표현은 빛이 존재하게 된 것, 빛의 근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 영혼을 밝히고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하는 영적인 빛도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상기시킴으로써 마찬가지로 물리적인 빛이 존재하게 된 근원 또한 태양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되었음을 각성하게 한다. 태양이 있어야 빛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빛이 먼저 존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빛이 나타나자 ”하나님은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다.” 지구에 관한한 어두움은 완전히 제거된 것이 아니라 다만 빛으로부터 분리된 상태였다. 이어서 ”하나님은 빛을 낮(day)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셨다.” 마치 후대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그러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용어 사용에 주의를 기울이셨던 것으로 생각된다! 처음으로 하나님께서는 '낮'(욤)이란 말을 사용하셨으며 그것을 '밤'이라 칭하는 '어두움'과 구별하시기 위해 '빛'으로 정의내리셨다.

낮과 밤을 구분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첫째 날 사역을 마치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필자 주 : 사실 이 첫째 날은 히브리성서의 기록에 따르면 첫째 날이 아니라 하루 one day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하루’라는 시간 단위가 창조되고 정의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다음 날부터 이와 같은 하루하루가 지속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와 동일한 형식의 문구가 6일 간의 역사의 각 결론부에 반복해서 사용되어 있다. 따라서 첫째 날을 포함해서 엿새 동안의 하루하루의 길이는 동일했음이 분명하다.

첫째 날에서 시작해서 그날 이후로 계속 낮과 밤이, 다시 말해서 빛과 어두움의 시간이 반복해서 교체되어 나타났음이 분명하다. 그러한 반복적인 낮과 밤의 교체는 땅이 그 축을 중심으로 돌고 있었으며 태양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땅의 한 면에는 태양에 견줄만한 빛의 근원이 있었음을 분명히 암시해준다.  동시에 그러한 날들의 길이는 정상적인 태양일의 길이일 수밖에 없었음이 분명하다.

창조된 빛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그것은 우선적으로 눈에 보이는 빛을 의미하는데 그 까닭은 어두움과 대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시적인 빛의 파동이 있다는 것은 동시에 필연적으로 전자기 스펙트럼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가시적인 빛 위에는 자외선 및 다른 모든 단파 광선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적외선 및 다른 장파 광선들이 있기 마련이다.(필자 주 : 電磁氣 스펙트럼 electromagnetic spectrum은 전자기파를 파장에 따라 분해하여 배열한 것이다. 일반적인 스펙트럼이 가시광선 영역에 대한 것이라면 전자기 스펙트럼은 보다 넓은 전자기파의 범위에 대한 것이다. 위키백과)

한편 전자기력을 활성화시키자 결과적으로 물질적인 우주의 동력화가 이루어졌다. 우주 내에서 활동하는 모든 유형의 힘과 에너지는 전자기력과 중력 및 핵력으로 구분되는데 이제 이 모든 힘들이 활성화된 것이다.

미디어위원회
2011-04-28

창세기 1장의 하루

김홍석 


     창세기 1장의 ‘날’에 해당하는 단어 히브리어 ‘욤’은 날, 시간, 해, 낮, 생애, 시대, 어제, 오늘, 내일 등의 뜻으로 문맥에 따라서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창세기 사용된 이 단어의 용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창 1:5> ”하나님이 빛(히. 오르)을 낮(히. 욤)이라 부르시고 어둠(히. 호쉐크)을 밤(히. 라예라)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히. 욤)이니라”  

<창 2:4>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히. 욤)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창 2:17> ”…네가 먹는 날(히. 욤)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그러므로 ‘욤’은 문맥 속에서 그 의미를 살펴야 한다. 창세기 1장의 ‘하루’가 특별히 긴 어떤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문자적인 하루를 의미한다는 것을 왜곡하지 않도록 하는 문학적인 장치들이 존재한다. 성경의 최종본문의 모습(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성경, final form)이 왜 이렇게 서술되어 있는가를 깊이 사색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본문에 대한 이러한 탐구로부터 분명히 창세기 1장의 ‘하루’가 문자적으로 실제의 하루를 의미한 것인지 아니면 아닌 다른 어떤 긴 시간을 의미한 것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게 해주는 분명한 문학적 장치들을 발견할 수 있다.

 

1. 본문의 내부적 관계

첫째, 창조 주간의 여섯 번의 하루 앞에는 빠짐없이 각각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바예히 에레브 바예히 보케르)라는 수식어가 분명히 반복적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그 의도하는 바의 하나는, 하루가 다른 긴 기간이 아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길이의 시간 그저 하루라는 것이다.

둘째, 유독 첫째 날에 대한 서술에서만 서수가 아닌 기수를 사용하여(‘리숀’ 대신에 ‘에하드’) 맨 처음의 하루였다고 말한다. 이것은 맨 처음 하루는 아직 다른 날이 존재하기 전이므로 서수가 적절하지 않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하루’라고 하는 시간 단위가 만들어 진 것이다. 즉, 하루가 정의되었다. 그리고 이후로 이 ‘하루’라는 시간 단위가 일정하게 기능하기 시작한 것이다.

셋째, 하나의 열린 문단으로 구성된 넷째 날에 대한 서술인 창 1:14-19 내에  낮(욤), 밤(라예라), 계절(모에드), 날(욤), 해(솨네; 년, 해, year),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째 날이니라”는 시간 단위의 표현들이 공존하도록 서술함으로써 이는 단지 하루임을 의미하며 어떤 다른 시간으로도 해석할 수 없도록 하는 서술적 전략이며 문학적 장치이다.

넷째, 모든 날에 동일한 수식어를 사용한 것은 당연히 의도적인 것이며, 이는 태양이 만들어진 제4일 이후나 이전의 하루가 동일한 하루임을 의미한다. 아울러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해가 있어야 빛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빛이 있으라 하시므로 이미 빛이 존재하게 되었고, 하루라는 시간단위를 이루는 질서가 있게 된 연후에 넷째 날 만들어진 태양과 달 등은 하나님의 의도대로 첫날부터 기능하기 시작된 질서에 맞춰 넷째 날부터 기능하도록 임직을 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태양과 달에 의해 하루가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미 창조된 하루에 맞춰서 태양과 달이 기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2. 정경적 상호관계

첫째, 창세기 5:15~17은 하나의 닫힌 문단(히, 쓰투마)이다. 짧은 한 문단 내에 65세에 자식을 낳은 사실과 895세를 살았다는 사실을 연결시켜 서술하고 있는 것은 그 나이는 기록된 그대로임을 강조하고자 하는 전략적 배치로 보인다. 즉 895세가 믿기지 않아서 10분의 1로 줄이거나, 1개월을 한 살로 해석을 시도해보면 65세에 자식을 낳은 것은 6.5세나 65개월 나이에 자식을 낳게 되는 부조화를 초래하므로 다른 어떤 해석도 불가하도록 장치해 놓은 것이다.  

창세기 5:15~17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둘째, 출애굽기 20:8~11, 31:15-18에서 명하신 7일째 안식일로 지켜야 하는 날은 다른 긴 시간이나 시대가 아니라 실제 ‘우리의 하루’였다. 그러므로 동일 문단 내 서술된 6일 또한 ‘우리의 6일’이다.  

출애굽기 20:8~11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 31:15-18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고 쉬었음이니라 하라…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손가락으로) 쓰신 것이라”

우리의 생각이 어떠하든 간에 성경은 창세기 1장의 '하루'가 실제의 '하루'였다고 분명하게 서술하고 있다.

미디어위원회
2011-04-23

창세기 1:1과 1:2 사이에 긴 시간 간격이 존재할 수 있는가?

김홍석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1. 본문의 내부적 관계

히브리성서 맛소라텍스트는 하루가 끝날 때마다 문단구분 표식(프툭 하)을 두었다. 그러므로 만약 창세기 1:1절과 1:2절 사이에 간격(GAP)이 존재한다면, 창1:1절 뒤에도 문단구분 표식(프툭 하)이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문단구분 표식(프툭 하)이 없다. 즉 간격(GAP)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창1:1절이 창조 주간의 처음 하루에 포함되는 활동으로서 하늘과 땅을 이때 창조하신 것이며 동시에 이는 태초에 있었던 창조 사역의 시작이기 때문에 태초의 창조사역에 대한 선포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혼돈('토후')과 공허('보후')의 시간은 언제인가? 창조주간의 첫 날에 땅을 만드셨는데 그때 그것은 물속에 있었다(창 1:1-2). 둘째 날 그 물의 일부를 궁창 위로 올리신 다음, 셋째 날에 물속에 있던 땅을 끄집어 내셨다(창1:9-10). 바로 그 땅 위에 생명체들을 주셨다. 천지와 만물이 6일 동안 다 이루어져 일곱째 날에는 안식하셨다(창2:1-2). 그 땅 즉 첫 날의 땅이 혼돈('토후')하고 공허('보후')했던 것은 이틀 후에 물 밖으로 나와야 할 땅이 아직도 물속에 있었기 때문에 '토후'했고, 앞으로 식물들과 생명체들로 가득 채워져야 할 땅이 아직은 아무 것도 채워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보후'했던 것이다. 쉬운성경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땅은 지금처럼 짜임새 있는 모습이 아니었고, 생물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습니다.”라고 번역하였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 어찌 무질서하고 혼란스럽고 불안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며 완전하시기 때문에 ”혼돈(토후)하고 공허(보후)하며”라는 의미는 6일 간에 걸쳐 그 지어가시는 중간과정 중에 있는 최초의 날의 땅의 상태에 대한 묘사이며 그 날에는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었던 혼돈과 공허이며 이 또한 하나님의 한시적인 창조물이었다. 창 1:1절과 1:2절 사이에 있었던 혼돈과 공허는 창조와 재창조 간의 긴 시간간격(gap)이 아니다. 

 

2. 정경적 상호관계  

땅의 존재시점은 출 20:11절에서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출 31장17-18절에서 ”이는 …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 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 하라 여호와께서 시내 산 위에서 …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에서 땅은 6일 창조 안에 포함된 피조물이다. 창1:1의 땅이 6일 창조 이전에 이미 존재해왔다고 해석하는 간격이론은 성경에 근거한 해석이 아니라 어떤 사상을 담은 주장이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다. 창세기 1:31절에는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칼 아쉐르 아싸 베힌네 토브 메오드). 하나님께서는 여섯째 날에 지으신 모든 것을 향하여 감탄하시며(힌네, behold, 보라!), 매우(메오드, very) 좋았다(토브, good)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말씀은 수많은 생물들이 죽음과 질병의 고통이 존재해 오고 있었던 후에 하시는 말씀으로 보기는 곤란하다. 또한 성경은 분명히 죽음이 죄의 대가임을 말씀한다. 죽음과 고통은 이후의 '죄의 대가'라고 엄중히 선포하고 있다.  창 2:17절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롬 5:12절에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라고 기록하였다. 따라서 사람이 창조되기 전에 이미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생물들의 죽음이 존재해 왔다고 주장하는 간격이론은 성경적인 주장이 아니다.

 

*참조 : Gap theory revisited
http://creation.com/gap-theory-revisited

Creation compromises—Gap Theory
http://creation.com/creation-compromises#gap

미디어위원회
2011-04-20

초식을 하는 거미와 예상 밖의 초식동물들 

(Unexpectedly Vegetarian Animals : What Does it Mean?)

Bodie Hodge 


      죽음과 고통이 가득한 세상에서, 어떤 생물체들은 난폭한 육식동물(carnivores)로 알려져 있다. 사실 다른 동물을 잡아먹고 사는 약육강식은 오늘날의 세속적 진화론적 사회에서는 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부터였는가?


육식동물의 기원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 1:30)

이처럼 육식은 처음부터 있지 않았다. 태초의 창조 시에 죽음은 없었고, 동물들은 초식동물(vegetarian)로 창조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종종 거미, 맹금류, 고양잇과 동물 등은 식물만 먹고서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오늘날 이들 동물들의 먹이는 오직 육류(또는 곤충)이기 때문에 그러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주장이 사실인가?


거미

최근 ScienceNews 기사에서, 한 거미(spider)는 초식을 하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다. 작고 뛰어오르는 거미인 Bagheera kiplingi 는 주로 초식을 하는 최초로 알려진 거미 종이다.[1]

과거에 과학자들은 어떤 종류의 거미는 거미줄에 꽃가루와 포자를 포획해 먹이로 삼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떤 종류의 거미는 여기저기서 과즙을 먹기도 한다. 그러나 그 거미는 다른 동물을 먹는 것으로 보여지지 않았다. 그것은 중앙아메리카의 아카시아 나무 근처에서 산다. 그리고 나무에 살고 있는 개미를 먹이로 하기보다 나무에서 먹이를 구한다.

그런 거미를 볼 때, 하나님의 원래의 창조는 실로 매우 좋았고 완벽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동물들은 다른 동물들을 먹지 않았고, 사망은 최초 창조 시의 일부가 아니었다. (창 1:30). 그것이 완전하신 생명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예상되는 종류의 창조였다.

그러나 죄(sin)가 이 세상에 들어오고, 사망(death)도 들어왔다.(창세기 3장). 사물들은 더 이상 완벽한 상태를 유지할 수 없었다. 간단히 말하여,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이 되었던 것이다. 모든 피조물들은 죄로 인해 저주받았고 손상되었다. 그것이 우리가 구원자(Savior)를 필요로 하는 이유이다.(롬 5:12~19).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필요한 이유이다. (롬 8:20~21, 계 21:1).

하나님의 완벽한 창조 세계에 죄가 들어온 후, 노아 홍수 이전의 어느 시점부터, 동물들은 다른 동물들을 먹기 시작했다. 노아 홍수 때 퇴적된 암석 지층 속의 동물 화석들의 위 내용물은 동물들이 다른 동물들을 먹어 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거미와 같은 동물은 거미들이 보통은 육식을 함에도 불구하고, 초식을 하면서도 쉽게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이 이러한 능력을 보여주는 유일한 예가 아니다.


사자

두 마리의 사자가 초식을 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마도 초식을 했던 가장 유명한 사자는 몇 년 전에 죽은 ‘리틀 타이크(Little Tyke)’이다. 이 큰 고양잇과 동물은 어느 농장에서 키워졌는데, 생애 동안에 고기를 먹는 것을 거부했다.[2] 이 암사자의 초식은 야생에서 육식동물인 고양잇과 동물들도 고기 없이 초식만으로도 쉽게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또 다른 사자인 리아(Lea)는 처음의 칠년 동안은 초식을 하면서 살았다. 그리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동물보호소로 옮겨졌는데, 그곳에서 이 커다란 고양잇과 동물은 한 달 만에 고기를 먹는 데에 익숙하게 되었다.


독수리

야자민목독수리(Palm-nut vulture, Gypohierax angolensis)는 심지어 쥐도 무서워하지 않을 맹금류이다. 이 독수리의 주된 먹이는 야자수 열매(palm fruits)이다. 때때로 물고기, 썩은 고기, 무척추동물을 먹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독수리의 주된 먹이가 야자수 열매라는 사실은 생존하는 데에 고기가 필요하지 않음을 보여준다.[3]


파쿠

사람들이 피라냐(piranhas, 이빨이 날카로운 남미산 민물고기)를 생각할 때에 순식간에 뼈만 남기고 살을 먹어버리는 무서운 물고기라고 생각한다. 파쿠(Pacu)는 남미에 사는 여러 초식성 물고기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파쿠는 피라냐의 사촌으로 간주되고 있다. 파쿠는 피라냐처럼 같은 세라살무스 아과(subfamily Serrasalminae)에 속하는 물고기이다. 아마도 이 두 마리 물고기는 같은 종류(kind)로 창조되었을 것이다. 사실 파쿠는 피라냐와 종종 닮았기 때문에 헷갈리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보통 그들을 구분할 때 이빨을 가지고 평가하곤 한다 (이것은 약간의 차이이다).[4]

가끔씩 파쿠는 곤충을 먹던지 작은 물고기를 먹는데, 그러나 그들은 채식을 선호한다. 이것은 이러한 물고기는 육식에 제한되지 않으며, 원래는 채식으로 살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론

오늘날 육식동물들이 항상 그렇게 육식을 해왔었다는 개념은 창조 시로 돌아가서 생각해볼 때 재평가될 필요가 있다. 처음에 모든 동물들은 초식성이었다. 죄로 인해 사망과 고통이 이 세계로 들어온 이후에 육식은 생겨났다. 그것은 사람에게도 동물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거미나 고양잇과 동물처럼 육식성으로 보여지는 동물도 고기 없이 쉽게 살아갈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래의 생물계가 어떠했을 지를 어렴풋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또한 이들 육식동물들은 원래 창조되었을 때에는 고기 없이도 쉽게 살아갈 수 있었던 초식동물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Footnotes

[1] Susan Milius, 'Spider Eats Trees, Not Bugs,” ScienceNews, August 30, 2008, p. 13.
[2] James A. Peden, 'Vegetarian Lioness: Little Tyke,”
[3] 'Palm-Nut Vulture,” Kenya Birds.
[4] Donna O’Daniel, Piranhas, the Feared Fish, Answers in Depth 4(1), May 6, 2009.


번역 - 김정화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9/06/02/vegetarian-animals 

출처 - AiG–U.S. 2009. 6. 2.

미디어위원회
2010-11-17

아프리카에 사는 이스라엘 제사장 부족

(The African Priestly Tribe of Israel)

Creation Moments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요한복음 10:16)

유대인에 속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지구상에 여러 그룹이 있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유대식 종교의식들을 실행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증명할 만한 유대인과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렘바(Lemba)라고 불리는 한 부족이 남아프리카 지역에 존재한다. 이들은 반투어를 말한다. 전래에 따르면 먼 옛날에 부바(Buba)라고 하는 지도자에 의해서 유대로부터 아프리카로 왔다고 한다. 이 렘바 부족은 일 주일 중 하루를 거룩하게 지키는 것을 비롯하여 다른 유대의 전통들을 지키고 있다. 이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이것들이 그저 우연의 일치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이들의 유산으로 증명할 수도 있다. 전에 우리는 소위 '코헨(cohen) 유전자”에 관하여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코헨은 제사장을 의미한다. 이 유전적 변이는 Y-염색체에 존재하는데, 일반 사람들에서는 아주 희귀한 것이다. 유대인들 중에서도 약 3-5%만이 이 변이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아론의 자손들에게서는 이 변이가 아주 흔하게 나타나기에, 이 변이는 강력한 레위자손의 증거로 받아들여진다. 

이 유전적 변이가 렘바 부족에게서 흔하게 보여진다. 이는 이 렘바 부족이 유전적으로 유대인일 뿐만아니라, 이들이 고대의 이스라엘의 제사장의 후손임을 보여준다!

렘바 부족이 어떻게 아프리카에 오게되었는지 아무도 알아낼 수 없을 지라도, 우리는 모든 족속이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안다. 우리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족속들의 구세주이심을 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으로부터 너무도 멀리 방황해 떠나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References : Science Frontiers, 1-2/00, p. 1, ”A Far Wandering Tribe?”


번역 - 김계환

링크 - http://www.creationmoments.com/content/african-priestly-tribe-israel 

출처 - Creation Moments 


미디어위원회
2010-02-12

요셉의 원래 무덤의 발견? 

: 성경 기록처럼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에서 살았었다는 증거가 있는가?

(Has Joseph's original tomb been found?)

ChristianAnswers.net


       성경은 야곱(Jacob)과 그의 가족이 아시아로부터 애굽(이집트)으로 이주했을 때, 라암셋(라암세스, 람세스, the land of Rameses)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생업을 얻고 번성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창 47:11, 27). 이스라엘 자손들은 결국 라암셋 성을 건축하는 노예 일꾼들로서 사용되었다.(출 1:11) 그리고 430년 후에 출애굽을 할 때(출 12:40), 그들은 라암셋에서 출발하였다.(출 12:37). 이러한 기록들로부터 우리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서 지내는 동안 라암셋과 그 주변 지역에 살았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사실 라암셋 이라는 이름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이주보다 나중에 생겨났다. 그 이름은 위대한 왕 람세스(람세스 2세, Rameses II)에 의해서 BC 13세기에 나일강 삼각주 동쪽에 지어진 한 도시에 주어진 이름이었다. 이 친근한 이름은 후에 성경 본문을 필사할 때 필사가들에 의해서 소급되어 사용되었다. 라암셋의 위치에 대해 수년 동안 논란이 있어왔지만, 그 논란은 이제 불식되었다. 우리는 라암셋의 위치를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대 장소들의 역사에 대해서도 많은 부분을 알고 있는 것이다. 

1966년 이후로 광범위한 발굴이 카이로의 오스트리아 고고학 연구소(Austrian Archaeological Institute)의 맨프레드 비텍(Manfred Bietak)의 지휘 하에 이루어졌다. (for previous reports, see Shea 1990: 100-103; Wood 1991: 104-106; Aling 1996: 20-21). 비텍 교수는 이집트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살았었다는 물리적 증거를 최초로 발견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고고학은 라암셋의 역사를 밝혀내고 있다.

고대 라암셋은 카이로(Cairo)에서 북동쪽으로 대략 100km 정도 떨어진, 나일강 삼각주 동쪽의 텔 엘-다바(Tell el-Daba)에 위치하고 있었다. 고대에 이곳은 나일강의 지류인 펠루시악(Pelusiac) 강이 흐르고 있어서, 지중해로 나아갈 수 있었다. 또한 그곳은 가나안으로 나가는 육상 경로인 유명한 호러스 로드(Horus Road)에 놓여있었다. 따라서 그곳은 상업적, 군사적으로 요충지였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 (출 1:8)

우리는 그 장소의 역사를 힉소스 이전(pre-Hyksos), 힉소스(Hyksos) 왕조, 힉소스 이후(post-Hyksos)의 세 기간으로 구분할 수 있다. 힉소스는 나일강 삼각주의 북동쪽에 거주했었던 시리아-팔레스틴으로부터 온 셈족 사람(Semitic people)들이었다. 이들은 결국 108년 동안(BC 1663-1555, 15th Dynasty) 이집트 북부를 지배했다.[1] 이스라엘 백성들은 BC 1450년 경에 출애굽을 하였음으로, 야곱과 그의 가족은 (430년 전인) BC 1880년 경에 이집트로 이주하였을 것이다. 이 시기는 힉소스 이전 시기로서, 그 마을의 이름은 ”두 도로의 문(the door of the two roads)”이라는 뜻의 로와티(Rowaty) 였다. (Bietak 1996: 9,19). [2]
   

이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일 수 있을까?

로와티(후에 라암셋이라 이름 붙여진 도시)에 아시아인들이 살았다는 최초의 증거는 12대 왕조(12th Dynasty) 말에 (BC 19세기 중반) 나타난다.[3] 그 시기에 한 시골에 정착한 사람들이 있었음이 발견되었다. 거기에 많은 담장들이 있었지만, 요새화되지는 않았는데, 이것들은 동물들을 키우기 위한 것으로 보여졌다. 살았던 집들은 모래 벽돌(sand bricks)로 지어진 직사각형의 오두막(rectangular huts)들로 구성되어 있었다.(Bietak 1986: 237; 1991b: 32). 그것은 이집트에 이스라엘인들이 살았다는 최초의 구체적인 증거일 가능성이 높다. 정확한 시기에, 정확한 장소에, 정확한 문화가 있었던 것이다.  

최초의 아시아인 정착지인 텔 엘-다바의 모든 주민들이 오두막에 거주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 중 한 명은 작은 저택(small villa)에서 살았는데, 분명 중요한 고위 관리로 보였다. 성경은 요셉이 바로(pharaoh)의 꿈을 해석해준 이후에 총리가 되었다고 말해주고 있다.(창 41:39-45).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로서 일하는 동안 어디에 살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흉년과 관련된 그의 직무를 잘 마친 후에, 아버지와 형제들이 살고 있었던 라암셋으로 내려가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논리적이다.


이 저택이 요셉의 집이었을 수 있을까? [4]

그 저택은 크기가 10×12m 로서, 12×19m 의 울타리 한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 집은 뜰(courtyard) 주변으로 6 개의 방들이 말굽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그 집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집의 평면도가 팔레스타인에 있었던 후기 철기시대(later Iron Age)의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살았던 ‘4개 방의 집(four-room house)’과 동일했다는 것이다.(Holladay 1992a). 이러한 형태의 집은 2개의 옆방과 하나의 뒷방이 중앙 공간 또는 뜰을 중심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5]

근처 저택 옆에는 반원 형태로 정렬된 2개 방으로 된 빈약한 집들이 있었는데, 대략 6×8 m 크기의 것이었다. 만약 그 저택이 요셉의 집이었다면, 주변 오두막들은 요셉의 아버지와 형제의 집들일 수도 있다. 그 정착촌에서 발견된 조각난 도자기(pottery)들의 대략 20%는 팔레스타인의 중기 청동기시대(Palestinian Middle Bronze Age) 형태의 것이었다. 그 저택의 남서쪽 열려진 공간에는 정착민들의 묘지가 있었다. 여기에서 가장 놀라운 증거들이 발견되었다. 


히브리인들의 무덤?

무덤들은 이집트에서 많이 발견되는 진흙 벽돌로 지어져 있었다. 그러나 안의 내용은 철저히 아시아식이었다. 비록 그 무덤들은 철저하게 약탈당했지만, 매장된 남자들의 50%는 아직도 팔레스타인 타입의 무기들을 가지고 있었다. 전형적으로 죽은 남자들은 2 개의 창(javelins), 전투 도끼(battle-axes), 단도(daggers) 등을 갖고 있었다. 무덤 8(Tomb 8)은 세련된 오리부리 도끼와 양각된 청동 벨트를 포함하고 있었다. (Bietak 1996: 14). 그러나 그 무덤들 중 하나는 완전히 독특했고, 이집트에서 일찌기 발견된 그 어떤 무덤과도 같지 않았다.  


요셉의 무덤?

집들이 있는 곳에서 83m 정도 떨어져있는 매장 지역의 남서쪽 끝에는, 한 기념비적 무덤인 무덤 1(Tomb 1)이 있었다. 그것은 주 묘실(main burial chamber)과 한 부속 장례실(chapel annex)을 포함하고 있는, 거의 사각형의 커다란 구조였다. 도굴꾼들이 파놓은 구덩이가 장례실 안에 나있었는데, 발굴자들은 한 아시아인 고관을 조각해 놓은 한 거대한 상(statue)의 조각들을 발견했다. 그것은 실물 크기의 앉아있는 고관 1의 것으로 보였다. 그것은 석회암으로 되어있었고, 탁월한 솜씨의 것으로 보였다. 피부색은 이집트 미술에서 아시아인들의 고유 색깔인 황색이었다. 그리고 버섯 모양의 헤어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이집트 미술에 등장하는 아시아인들에게 전형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외국인을 가리키는 이집트식 상형문자인 내던져진 막대기(throwstick)를 오른쪽 어깨 위에 가지고 있었다. 그 상은 고의적으로 부서져있었고, 얼굴이 박살나 있었다.(Bietak 1996: 20-21).    

데이비드 롤(David Rohl)은 그의 책 '파라오와 왕들: 성경적 탐색(Pharaohs and Kings: A Biblical Quest)‘에서, 이 무덤은 요셉의 무덤(tomb of Joseph)이라고 제안했다(1995: 360-67).[6] 증거들은 이 가설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무덤 1에 묻힌 사람이 그 저택의 소유주였다고 추정할 수 있고, 따라서 요셉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성경은 요셉의 시체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매우 특별하게 기록해 놓고 있다 :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창 50:26)

모세는 출애굽을 할 때, 요셉의 뼈들을 가지고 나왔다. 왜냐하면 요셉이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단단히 맹세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대열을 지어 나올 때에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 (출 13:18,19) (비교, 창 50:25)

묘실 내부에서, 발굴자들은 글씨가 새겨진 석회암 석관(sarcophagus)의 파편들과 약간의 뼈 조각들을 발견했다. 그러나 묘지의 다른 무덤들과 같지 않게 완전한 뼈들이 없었다.(Bietak 1991a: 61). 매장 후에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한 구덩이가 장례실 끝쪽에 파여져 있었고, 묘실 안으로 터널이 나있었다. 그리고 관(석관)은 깨어져 있었고, 이들 ‘무덤 도굴꾼’들에 의해서 죽은 사람의 유골이 강탈당했다.(Rohl 1995: 363). 도굴꾼들에 의해서 무덤에 있던 골동품이나 귀중품들이 없어지는 일은 흔하다. 그러나 죽은 사람의 사체를 가져가는 일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그 상이 부서진 시점에 뼈들이 없어졌는지, 또는 서로 다른 시기에 일어난 것인지는 고고학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추정해 볼 수 있다.   

그 상은 힉소스가 그 지역의 지배권을 갖게 되었던 정치적 혼란기 동안에 부서졌을 것으로 보인다.(Bietak 1996: 21).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출 1:8). 출애굽기에 기록된 새 왕은 BC 1663년 경의 최초의 힉소스 왕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7] 그 시기에 이스라엘 자손들은 과도한 압제 속에 지내게 된다.(출 1:9-11). 아마도 힉소스 왕은 이집트의 지역 세력들을 타도할 때, 그 상을 파괴하였을 것이다. 무덤에 있던 유해도 위험에 처했을 수 있었다. 그래서 신실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 시기에 요셉의 유해를 안전한 곳으로 옮겼을 수도 있다.


힉소스가 지배했었다는 증거

점령의 다음 단계로는 누추한 집들은 정리되고 거대한 궁전(성)들이 건축되는 것이었다. 새로운 정복자들은 아시아인들이기는 했지만, 이전 시대의 사람들과는 달랐다.[9]

궁전은 이집트 형식의 여러 거대한 건물들로 구성되었는데, 여러 층들, 지붕이 있는 현관(porticos), 뜰, 연못, 정원, 묘지 등을 포함했다.(Bietak 1996: 21-30). 이러한 면들은 점령자들이 외국 무역에 종사했던 고위 관료였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이것이 그 지역에 힉소스가 정착하게 되면서 일어났던 초기 단계에 나타났던 것이다.[10] 힉소스 인들의 도래로 야곱의 후손들은 힘든 시기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출 1:8-12a)         

비문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초기의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었는지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다.[11] 그리고 야곱의 12 아들들에 대한 동시대의 참고 자료들도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야곱의 아들들은 요셉을 제외하고 양치는 목동들이었기 때문에, 고대 기록들에서 발견될 것으로는 전혀 예상되지 않는다.[12] 그러나 야곱의 아들들의 이름을 따라 불려졌던 여러 이스라엘 족속들이 존재했었다는 고대 자료들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야곱의 아들들에 대한 간접적인 비문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라암셋에서 발견한 것에 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이다. 이 발견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에서 살았었다면 예측될 수 있는 발견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Notes

[1] The Egyptian word Hyksos means 'foreign rulers.” In common usage, however, the term is used to refer in general to the Asiatics who settled in the eastern Delta of Egypt in the Second Intermediate Period. The dates for Hyksos rule are not known precisely. Those used here are based on the following:

a. Expulsion of the Hyksos in approximately the 15th year of Ahmose (Bietak 1991b: 48)

b. A total of 108 years for the rule of the Hyksos according to the Turin papyrus (Bietak 1991b: 48)

c. The chronology of Wente and Van Siclen for the 18th Dynasty (Wente and Van Siclen 1977: 218). This chronology gives a death date for Tuthmosis III of 1450 BC, which correlates with the Biblical date for the Exodus. According to Scripture, the Pharaoh of the Exodus perished in the Yam Suph (Exodus 14:5-9,18,28; 15:4,7; Psalm 106:9-11; 136:15), therefore, we correlate the date of the Exodus with the death date of the Pharaoh of the Exodus. The chronology of Wente and Van Siclen also incorporates the low date of 1279 BC for the accession of Rameses II accepted by most scholars today.

[2] In the 14th Dynasty, toward the end of the 18th century BC, the name of the town was changed to Avaris, 'the (royal) foundation of the district' (Bietak 1996:40). When the Hyksos later established their capital there, they retained the name Avaris. It was probably the Hyksos rulers who forced the Israelites to build the store cities of Pithom (= Tell el-Maskhuta) and Rameses (= Tell el-Daba = Avaris) (Exodus 1:11). When Rameses II rebuilt the city in the 13th century in the post-Hyksos period, and long after the Israelites had left Egypt, the name was changed to Rameses.

The location of Pithom has also been a matter of some debate. Now, however, it seems quite certain that it should be located at Tell el-Maskhuta at the eastern end of the Wadi Tumilat, 15 km west of Ismailiya. Asiatic remains similar to those found at Tell el-Daba have been found there and attributed to the Hyksos (Holladay 1992b: 588-89; 1997:332-34). According to Holladay, the Hyksos occupation at Tell el-Maskhuta took place ca. 1750-1625 BC. It would have been sometime during this time period, then, that the Israelites built the store city of Pithom.

[3] Area F/I, Str. d/2, and Area A/II, Str H

[4] Str. d/2 at Tell el-Daba

[5] In Palestine, the side rooms were usually delineated by stone columns. With the scarcity of stone in Egypt, this feature would not be expected. Holladay suggests that the ground floor of such a house was primarily utilized for the economic aspects of family life such as the storage of food, tools and supplies, and the housing of animals. The family living space, on the other hand, was most likely on the second floor.

[6] As a result of his nontraditional chronology of ancient Egypt, however, British historian David Rohl dates Tomb 1 to the late 17th century BC (1995: 339), rather than the mid-nineteenth century as determined by the excavators. Since Rohl believes the Sojourn to be only 215 years based on the Septuagint (1995: 329-32), Joseph and Tomb 1 end up being approximately contemporary by his chronology. The present author, however, disagrees with both of these views and holds to conventional Egyptian chronology and a Sojourn of 430 years (Ex 12:40) as recorded in the Masoretic text of the Hebrew Bible. Moreover, Rohl places Joseph and Tomb 1 in Str. d/1, while the present author accepts the excavators' dating of Tomb 1 to Str. d/2, and believes Str. d/2 to be a more compatible context for Joseph and the Israelites.

[7] We are not certain of the name of the first Hyksos king. Redford suggests Salitis/Saites based on literary references (1992: 342), while Ward suggests Khyan based on inscriptional evidence (1984:162-72).

[8] Str. d/1 dating to the early 13th Dynasty (early 18th century BC)

[9] Str. d/2

[10] Str. d/1

[11] Str. d/2

[12] There is a canal connecting the Nile with the Faiyum in the western desert named Bahr Yusuf, the 'canal of Joseph.” Development of the Faiyum is associated with Dynasty 12, the time when Joseph was in Egypt carrying out land reforms (Genesis 41:46-49; Gardiner 1961: 35-36). Whether the name of the canal is ancient or from a relatively modern tradition is not known. Otherwise, the name of Joseph has not turned up in Egypt (see Aling 1996).


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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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F. Aling, 'The Historicity of the Joseph Story,' Bible and Spade 9 (1996), pp. 17-28.

▶ M. Bietak, Avaris and Piramesse: Archaeological Exploration in the Eastern Nile Delta, (London: The British Academy, 1986); 'Der Friedhof in einem Palastgarten aus der Zeit des spten Mittleren Riches und andere Forschungsergebnisse aus dem stlichen Nildelta (Tell el-Daba 1984-1987),' Agypten und Levante 2 (1991a), pp. 47-109; 'Egypt and Canaan During the Middle Bronze Age,' Bulletin of the American Schools of Oriental Research, 281 (1991b), pp. 27-72; Avaris: The Capital of the Hyksos, (London: British Museum Press, 1996).

▶ A. Biran, 'City of the Golden Calf,' Bible and Spade, 5 (1976), pp. 22-27; 'To the God Who is in Dan,' in Temples and High Places in Biblical Times, A. Biran, editor, (Jerusalem: Hebrew Union College, 1981), pp. 14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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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 Fritz and A. Kempinski, Ergebnisse der Ausgrabunden auf der Hiebet el-Msas (Tel Masos) 1972-1975 (Wiesbaden: Otto Harrassowitz,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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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B. Redford, 'Hyksos: History,' in D.N. Freedman, editor, The Anchor Bible Dictionary, Volume 3 (New York: Doubleday, 1992), pp. 341-344.

▶ D.M. Rohl, Pharaohs and Kings: A Biblical Quest (New York: Crown, 1995).

▶ H. Shanks, 'Strata,” Biblical Archaeology Review, 23/2 (1997), p. 8.

▶ W.H. Shea, 'Leaving Egypt,” Archaeology and Biblical Research, 3 (1990), pp. 99-111.

▶ E. Stern, Material Culture of the Land of the Bible in the Persian Period 538-332 B.C. (Warminster: Aris & Phillips, 1982).

▶ W.A. Ward, 'Royal-Name Scarabs,' in Olga Tufnell, Studies on Scarab Seals, Volume 2 (Warminster: Aris & Phillips, 1984), pp. 151-192.

▶ E. Wente and C. Van Siclen III, 'A Chronology of the New Kingdom,' in Studies in Honor of George R. Hughes January 12, 1977, J.H. Johnson and E.F. Wente, editors, Studies in Ancient Oriental Civilization, 39 (Chicago: The Oriental Institute, 1977), pp. 217-261.

▶ B.G. Wood, 'Recent Discoveries and Research on the Conquest,' Archaeology and Biblical Research, 4 (1991), pp. 104-110; 'Mesha, King of Moab,' Bible and Spade, 9 (1996), pp. 55-64.

▶ G.E. Wright, Shechem: The Biography of a Biblical City (London: Gerald Duckworth, 1965).

▶ Author: Dr. Bryant G. Wood of Associates for Biblical Research. Adapted from the ABR article: 'The Sons of Jacob: New Evidence for the Presence of the Israelites in Egypt'


*관련자료 :  Has Joseph’s Tomb Been Found in Egypt?
https://www.levitt.com/essays/joseph

Patterns of Evidence: The Exodus - Full Trailer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2assFIyLInE

Strong evidence for Joseph's Tomb and Palace in Egypt!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lm9ATLhkujY

Joseph was Imhotep of Egypt
http://www.arkdiscovery.com/joseph.htm

JOSPEH was IMHOTEP in EGYPT, 1st after Pharaoh 'cause HE KEPT HIS FAITH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umlyhvVfBIE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christiananswers.net/q-abr/abr-a027.html 

출처 - ChristianAnswers.net

Gary Vaterlaus
2009-10-27

뱀은 창세기의 말씀처럼 흙을 먹는가? 

(Contradictions : Left in the Dust Do snakes really eat dust like Genesis says?)


     어떤 사람들은 창세기 3:14절에 기록된 것처럼 뱀은 흙을 먹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창세기 말씀을 훼손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것이다.

뱀이 하와를 유혹한 후에, 하나님은 뱀을 저주하시면서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창세기 1장에 언급된 뱀(serpent)이 오늘날의 뱀(snake)과 같은 모습이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많은 사람들은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하나의 이유로서 이 구절을 사용한다. 왜냐하면 뱀은 흙을 먹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뱀의 입천장 앞쪽에 있는 화학물질 감지기관인 야콥슨기관(Jacobson’s organ)을 설명하면서 이러한 주장에 대해 응답한다. 야콥슨기관은 뱀이 냄새를 맡는 것을 도와준다. 뱀의 갈라진 혀는 뱀의 주변을 감지하기 위해서 빠르게 내밀어지면서, 간혹 땅을 핥고, 먼지 입자들을 채취해서 입속으로 가져온다. 뱀은 혀를 끌어당겨, 갈라진 혀의 끝을 야콥슨기관의 두 구멍 안으로 삽입한다. 그곳에서 입자들은 분석되어지고 확인되어진다. 뱀의 뇌는 그 냄새를 읽을 수 있고, 혀를 통해 맛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러한 방법으로 뱀은 정말로 흙을 먹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이것이 하나님이 뱀을 저주하셨을 때 염두에 두셨던 것일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창세기 3:14-15절의 본문을 살펴보자 :

”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뱀의 저주는 배로 다니고, 흙을 먹으며,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며,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라.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창세기 3:15절을 원복음(protoevangelium, 최초 복음)으로서 인정하고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사탄을 패배시키실 메시야 예수님의 오심을 예언하셨다. 머리를 상하게 하고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는 말은 위대한 진실을 가리키고 있는 분명히 상징적 언어이다. 그러나 이것이 창세기가 역사적 장르의 기록임을 위반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상징적 언어는 대부분의 문자적 구조틀 내에서 들어있을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은 동물을 저주하신 것인가, 사탄을 저주하신 것인가? 하나님은 그 둘을 함께 저주하신 것으로 나타난다. 성경 여러 곳에서 하나님은 흔히 사람에게 말씀하시며, 사탄에게도 말씀하고 계신다. 여기에 몇 가지 예가 있다 :

1. 에스겔 27-28장에서 여호와의 말씀은 두로(Tyre) 자체에 대해서(겔 27:2), 그리고 두로의 지배자(ruler of Tyre)에 대해서 말씀하셨고(겔 28:2), 28:11절에서는 ‘두로의 왕(King of Tyre)’에 대해서 한탄하시기 시작하신다. 이것은 특별히 두로 왕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존재인 사탄에게 향하고 있는 것이다.

2. 예수님은 마가복음 8:33절에서 베드로를 꾸짖으시면서 그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사탄에게 말씀하셨다.

3. 이사야 14장에서 하나님은 바벨론의 왕에게 말씀하시면서, 어느 부분에서는 그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탄에게 말씀하셨다.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탄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시고 있는 이러한 개념은 흔히 있는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이 뱀에게 말씀하시면서 사탄에게 말씀하고 계신다고 이해하는 것은 무리한 해석이 아니다. 창세기 3:14절은 뱀에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3:15절에서 하나님은 뱀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탄에게 말씀하셨다.

흙을 먹을 것이라는 뱀에게 내려진 저주는 이제 흙 속을 배로 다니는 결과를 가져왔다. 뱀은 들짐승이나 가축 중에 하나와 같았을 것이다.(창 3:1, 14). 그러나 이제 배로 다니고 흙을 먹게 되었다. 더 중요한 것은, 흙을 먹는다는 이러한 묘사는 천하고, 비열하고, 혐오스럽고, 타락한 한 생물체에 대한 상징이다. 미가 7:16-17절에서 하나님은 여러 나라들이 여호와 앞에 두려워 떠는 시기가 올 것에 대해 예언하셨다 :  

”이르되 여러 나라가 보고 자기의 세력을 부끄러워하여
손으로 그 입을 막을 것이요 귀는 막힐 것이며
그들이 뱀처럼 티끌을 핥으며
땅에 기는 벌레처럼 떨며
그 좁은 구멍에서 나와서 두려워하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리이다”

문맥에 대한 적절한 (문학적, 역사적, 신학적) 이해는 하나님께서 뱀을 저주하셨을 때에 의미하셨던 것을 우리가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여기에 어떠한 모순도 없다. 오히려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놀라운 승리를 약속하고 계셨던 것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9/04/06/contradictions-left-in-the-dust

출처 - AiG–U.S. April 6, 2009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4752

참고 : 3170|4247|3396|3336|1904|3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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