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정신론 : 성경과 조화될 수 있는가?
(Process theism : Compatible with the Bible?)
Shaun Doyle
과정신론(process theism) 또는 과정신학(process theology)은 하나님과 이 세계가 상호 관계 속에서 성장하는 '과정 중에(in the process)’ 있다는 생각으로, 둘 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성장하고, 성장하기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은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능력과 지식을 제한하고, 하나님의 독립성과 더불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할 당시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창조하셨다는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를 거부한다. 미국에 거주 중인 에밀리아(Emilia W.)는 이러한 관점에 대한 성경적 답변을 구하는 방법에 대해 질문해왔다.
안녕하세요.
CMI(Creation Ministries International)의 웹사이트에서 과정신학에 관련된 정보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과정신론자인 친구와 하나님과 창조의 관계에 대해 토론하고 있습니다. 그 친구는 성경은 하나님이 무로부터 창조하셨다고 결코 말씀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창조”와 관련된 모든 성경 구절들은 원래 존재하던 물질로부터 모든 것을 “형성”하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저는 CMI의 많은 글들처럼 열역학 제2법칙을 사용하여 우주가 시작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려고 합니다(그렇기에 하나님께서 무로부터 창조하셨습니다). 나는 나의 주장으로 인해 우리의 믿음이 과학에 의존하여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것으로 보일까 두렵습니다. 만약 열역학 제2법칙이 반증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과정적 관점(Process view)을 받아드려야 할까요?
그 친구가 하나님에 대해 믿는다고 하는 말의 대부분은 나에게 무의미하고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친구는 고등교육을 받았기에, 제가 그것을 이해할 만큼 똑똑하지 못한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저는 CMI로부터 과정신론자들에게 어떻게 대답해주어야 하는지 듣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은 CMI의 숀 도일(Shaun Doyle)의 답변이다.
우리 웹사이트에는 과정신론에 대한 몇 가지 간단한 글들이 있다. (검색 창에 "과정신학"을 입력하면 볼 수 있다. 과정신론과 범신론 사이에 많은 중복이 있기 때문에 "범신론"을 검색하는 것도 유용할 수 있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과정신론을 직접적으로 다룬 글은 없다. 나는 이 관점에 대해 몇 가지 의견을 제시할 것이지만, 과정신론은 상당히 광범위한 흐름의 신학적 관점이기 때문에, 이것들 중 일부는 당신의 친구에게 적용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과정신론은 하나님과 창조물이 상호작용하면서, 창조물과 함께 진화하는 '과정 중의' 하나님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하나님도 점점 더 좋아진다고 본다. 이는 하나님 안에서 온갖 종류의 불완전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즉, 대부분의 과정신론자들은 하나님은 전지하지도 전능하지도 않다고 보기에, 전지하지도 전능하지도 않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사랑하시는 분으로 확립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 내에서도 주장하는 범위는 다양하다.
과정신론과 하나님의 독립성
그렇다면 전통적인 성경적 유신론(biblical theism)과 과정신론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무엇인가? 두 가지를 구분하는 한 가지 방법은 다음과 같이 질문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홀로 존재하실 수 있는가? 전통적인 유신론자는 ‘예’라고 말하지만, 과정신론자는 ‘아니오’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는 과정신론자에게 하나님은 하나님 외의 어떤 대상과 진정한 관계를 가지고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
과정 형이상학(process metaphysics)에서, 현실세계의 구조는 사회적이며 필연적이다. 따라서 그것은 사회적 하나님이라는 견해를 추구한다. 즉 하나님은 비신적인 실체(non-divine actualities)와 반드시 관계를 갖고 있을 필요가 있다.[2]
이것은 하나님 외의 무언가가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비신적인 실체도 원인이 되는 존재(causal being)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 존재는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창조하도록 영향을 주는 존재여야 한다. 이것은 과정신론을 구별할 수 있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독립적이라는 생각을, 즉 하나님은 자신 이외의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림 설명 : 과정신론은 많은 면에서 세상과 하나님을 동등하게 여기고, 둘 다 성장하기 위해서 서로를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세상을 필요로 하시지도 않고, 성장하실 필요도 없으시다. 하나님은 이미 완벽하시다. 오히려 그 분은 세상을 무에서부터 창조하셨고, 그의 권능으로 세상을 붙들고 계시므로, 우리는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신성한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전통적인 성경적 유신론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만이 필연적이고 독립적이라면, 모든 것에는 존재하는 이유가 있으며,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만물은 하나님께서 원하셨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것은 그것들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그 분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가리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것들이 존재하지 않기를 원하신다면, 다른 모든 것들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3]
과정신론자들은 이러한 종류의 완전한 의존성을 강압적인(coercive) 것으로 보고 있으며,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손상시킨다. 그들은 살아있지 않은 대상(물체)일지라도 절대적인 ‘자율성’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함과 동시에, 하나님은 그러한 근본적인 특성(절대적인 자율성)을 파괴할 수 없을뿐더러, 무에서부터 그러한 특성이 존재하도록 만들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과정신론의 하나님의 독립성에 대한 거부는 거의 항상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에 대한 거부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순서를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무로부터의 창조에 대한 거부는 과정신론이 하나님의 독립성을 거부하는 근본적인 증상(symptom)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명백하고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독립성을 확언한다. 예로 사도행전 17:24-25절을 들 수 있다 :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이 구절은 두 가지 중요한 방식으로 과정신론을 부정한다. 첫째로, 하나님은 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시사한다.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라는 구절은 하나님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하나님 이외의 존재들로부터 절대로 받으시지 않으시며,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족하시는 분(self-sufficient)이시다. 둘째로, 하나님은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분이시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구분한 것에 주목하라.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만드셨음을 보여주면서, 하나님의 창조 활동이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들 뿐만 아니라, 우주 자체도 지으셨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에 의구심을 갖는다 하더라도, 이 구절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하나님 이외의 존재를 필요로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이것은 과정신론과 치명적으로 모순된다.
또 다른 중요한 구절은 로마서 11:34~36절이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바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서정적 표현의 이사야 40:13절과 욥기 41:11절을 인용하면서, 그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구약에서 하나님을 찬양한 것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로마서 11장은 사도행전 17장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에 대한 동일한 태도를 분명히 보여준다. 하나님과 상호관계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에게도 빚진 것이 없으시다. 오히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만물이 하나님으로 인해 존재하고 유지되는 것이다. 이것은 과정신론이 아니다.
역대상 29:14절에서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은 위에서 언급한 신약의 구절들과 동일한 생각을 반영한다.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동일한 관점이 언급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주시는 분이시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고, 만물을 소유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 세 구절 모두에서, 무로부터의 창조 문제는 정도가 다르지만 명백하게 나타나있다. 요점은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 외에 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정신론은 하나님이 자신 외의 어떤 것과 관련되어야 한다고 말하므로, 과정신론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에 대한 묘사와 모순된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하나님께서 시간을 창조하셨나?(Did God create time?)”와 “하나님은 존재하기 위해 논리에 의존하시는가?(Does God depend on logic to exist?)”을 참조하기 바란다.)
과정신론과 무로부터의 창조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는 어떤가? 만약 당신이 무로부터의 창조를 의미하는 우주의 시작을 주장하고 싶다면, 당신이 직면하게 될 여러 반박들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 상대방은 시작이 없는 우주를 이야기할 수도 있고, 열역학 제2법칙이 그러한 주제에 관련될 수도 있다. 또한 하나님과 창조물 모두 경우에 따라서는 변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만약 시간이 ‘어떤 것의 이전/이후’ 관계라면, 무변화성은 무시간성이다. 또한 만약 하나님과 세상의 근본적인 물질들이 모두 변화 없이 공존했고, 하나님께서 그 물질들을 새로운 형태로 변형시켜 만드신 것이라면, 그것은 과정신론자들에게 무로부터의 창조 없이 절대적인 시작을 확립해주는 길을 제공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주를 정적인 것에서 시간적인 것으로 바꾸는 것은 완전히 정적인 본질을 침해하는 것이다. 과정신론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연법칙을 위반할 수 없다고 말하므로, 이 생각은 과정신론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만약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것을 한번 바꿀 수 있었다고 말한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자연법칙을 다시 바꾸지 않는 것일까? 과정신론자들은 기적을 상정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기적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다.
성경적 이슈에 관해서는, 먼저 성경의 '창조(creation)'라는 단어가 항상 이미 존재했던 물질로부터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주장은 정당성이 없다. 이는 그 단어가 무로부터의 창조와 항상 관련되어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 단어가 갖는 의미의 범위는 일반화하기에는 너무도 광범위하다. 묘사된 창조 활동의 종류는 문맥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히브리어 단어 ‘바라(bara)’(히브리어로 ‘창조하다’를 뜻하는 동사)를 보자. 창세기 1:27절에서, 이 단어는 인간을 창조하는데 세 번 사용되었지만, 이 구절에서 하나님께서 이전에 존재했던 물질을 사용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우리가 창세기 2:7절을 봤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원래 있던 물질을 사용하여 창조하신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시편 51:10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에게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bara) 해달라고 요청했다. 다윗이 물리적 상태의 어떤 것을 요구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물질은 이 구절과 관련이 없다. 또한 창세기 1:1절에서 사용된 바라(bara)라는 단어는 이미 존재했던 물질로 하늘과 땅을 형성하셨는지 우리에게 어떤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하늘과 땅(the heavens and the earth)’이 만들어진 질서의 완전성을 나타내는 일종의 메리즘(merism, 양단법)으로 봤을 때, 이미 존재하는 물질에서 그것이 형성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바라(bara)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피조물들이 이미 존재하는 물질에서 나왔는지 아닌지를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과 관련된 정보는 다른 고려사항들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한다.
또한 창세기 1:1절은 메리즘과는 다르게, 무로부터의 창조를 보여준다는 견고한 주장들이 있다. 예를 들어, 2절은 하나님이 창조 활동을 시작하신 환경이 아니라, 1절에서 묘사되는 하나님의 창조 활동의 결과로 생겨난 환경으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다른 고대 근동지역의 창조 이야기들은 창세기 1:2절에서 보여주는 창조의 초기 상태를 (구분되지 않은 물 덩어리로서) 공통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창세기 1장과 다르게, 다른 고대 근동지역의 창조 이야기들은 "x, y, z가 존재하기 전에"와 같은 설명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모든 것이 유래된, 아직 나누어지지 않은 물 덩어리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성경의 창세기 1:1절은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하고 시작되며, 2절의 나눠지지 않은 물 덩어리의 문자적 소개에 앞서, 하나님께서 세계의 완전성을 창조하시는 것을 보여준다. (자세한 내용은 “고대 근동우주론과 창세기1장(Ancient Near Eastern cosmogonies and Genesis 1)”을 참조하기 바란다.)
게다가 창세기1:1과 명백한 평행구절을 이루고 있는 요한복음 1:1~3절은(요한복음 1:1의 첫 번째 절의 형태는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역의 창세기 1:1과 일치한다) 요한복음 1:3절에서 등장하는 "만물(all things)"이 말씀을 통해 존재하게 되었다는 선포와 함께, 무로부터의 창조를 내포하고 있는 창세기 1:1절을 요한이 이해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조나단 사파티(Jonathan Sarfati) 박사의 저서 “The Genesis Account”을 참고하기 바란다.
골로새서 1:16절은 요한복음 1장의 "만물"이라는 개념을 자세히 설명하여,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라고 강조한다. 이는 천사의 계급을 포함하여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을 창조하셨음을 말한다. 만약 "보이지 않는" 것들도 창조되었다면, 어떻게 이미 존재했던 물질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만들어질 수 있겠는가?
히브리서 11:3절은 이미 존재했던 물질로부터 세상이 형성되었다는 주장에 대한 가장 분명한 답을 주고 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첫째,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라는 구절은 보이는 세계는 보이는 물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따라서 보이는 세계는 어떤 것으로부터 만들어지지 않았음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이것은 보이는 세계가 보이지 않는 물질로 만들어졌다거나, 혹은 이미 존재했던 물질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이 구절은 이러한 부정(보이는 세계가 이미 존재했던 물질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과 어떻게 대조될 수 있을까? 앞의 절은 그 대답을 제공한다.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이 세계가 이전에 존재하던 물질로 만들어졌다는 어떠한 언급도 없다. 이 부정은 하나님의 말씀의 순전한 능력에 의해서 세계가 만들어졌다는 것과 대조된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보이는 세계가 보이지 않는 물질로 만들어졌다는 옵션은 언급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 대조는 무로부터의 창조에 대한 명백한 확언으로 간주된다.
결론
하나님이 관계를 갖고 계심에 틀림없다는 과정신론자들의 말에는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과정신론자들은 하나님께서 신적 존재가 아닌 것과 관계를 갖고 계신다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 삼위일체가 그 해답을 제공한다. 신적 관계의 필요성은 신적 존재들, 즉 성부, 성자, 성령 사이에서 발견된다. 그러므로 창조는 '강압적인' 행위가 아니라, 우리를 신적 연합(삼위일체)과 교류할 수 있게 해주는 주권적인 은혜의 행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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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and notes
1. Panentheism is the idea that the world is in some sense located within God, such that it is a part of God. Process theism is usually panentheistic, but it formally need not be. In fact, it could be argued that panentheism doesn’t preserve God’s necessity for external relations so crucial to process theism, since everything is actually internally located in God in panentheism.
2. Viney, D., Process theism, plato.stanford.edu, 28 June 2014. This necessity is limited to the (mutable) matter of the cosmos, not the current form of the cosmos. Process theists like Alfred North Whitehead imagined the universe having different epochs with different laws of nature.
3. Creatio ex nihilo arises from this and the belief that all contingent things came into being (i.e. they had a beginning). Since nothing comes from nothing, if everything came into being, it had to come into being purely by God’s will apart from any pre-existing matter—i.e. creatio ex nihilo.
*참조 : 유신진화론이 좋은 선택이 될 수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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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이 만연한 이 시대에도 필요한 외침, ‘오직 성경’
http://creation.kr/Faith/?idx=1293853&bmode=view
출처 : CMI, 2016. 6. 11. (GMT+10)
주소 : https://creation.com/process-theism
번역 : 조항윤
창세기 1장은 바벨론의 신화를 재편집했는가?
(Is Genesis 1 Just Reworked Babylonian Myth?)
by Murray Adamthwaite
1902년 1월 13일, 독일의 앗수르학자 프리드리히 델리취(Friedrich Delitzsch, 1850-1922)는 베를린에서 개최된 독일동양학회(German Oriental Society)에서 “바벨과 비벨(Babel und Bibel)”이라는 제목으로 획기적인 강의를 했다. 그는 “창세기의 많은 자료들은 히브리인의 바빌론 유배(流配)기간 동안에, 무명의 히브리 저자들이 바벨론의 신화에서 빌린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렇게 학자들의 전통적 주장은 시작되었고, 오늘날까지 무한히 반복되고 있다. 일례로,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바빌로니아의 ‘에누마 엘리시(Enuma Elish)’에서 기원했다고 주장되고 있다.[1]
그림 1. 에누마 엘리쉬 서판 III.
종종 ‘바빌론 창조 이야기’라는 잘못된 이름으로 불려지는 서사시(敍事詩) 에누마 엘리쉬는 니느웨에 있는 아슈르바니팔 도서관(Great Library of Assurbanipal)에 7개의 서판(書板, tablets, 그림 1~3에서 3개를 보여줌)으로 존재한다. 서판 V(그림 3)는 부분적으로 남아있지만, 다른 서판들은 수년에 걸쳐 여러 곳에서 완전한 형태로 발굴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서사시의 많은 부분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서판 해석에 어려움이 남아있으므로, 우리의 이해는 불완전하다.
이야기의 개요
남신인 민물(지하수)의 신 압수(Apsu)는 여신인 바닷물의 신 티아맛(Ti'amat, 티아마트)과 짝을 이루어, 자연의 다양한 것들을 주관하는 작은 신들(자손들)을 낳았다. 그러나 압수는 자녀들의 소음에 짜증을 내고, 그들을 죽이기로 결심했지만 실패하고, 오히려 지혜의 신 에아(Ea)에 의해 죽는다.(l. 68-69). 그 후 에아는 신 마르둑(Marduk)을 낳았다.(그림 4). 티아맛은 분노에 빠지고, 마르둑과 싸우기 위해 수많은 용들을 낳는다. 그러나 티아맛의 위협에 겁먹지 않은 마르둑은 다른 신들을 큰 연회로 모아, 마르둑을 대표로 티아맛과 전쟁을 한다. 그래서 큰 전쟁이 벌어지고, 마르둑은 티아맛을 죽임으로써 승리를 거둔다. 그는 먼저 티아맛의 두개골을 철퇴로 빠개고, 몸 전체를 쪼개었다. 그는 티아맛 상반신으로 하늘로 만들고, 하반신으로 땅을 만들었다. 이 혼란에서 질서가 나오게 되었으며, 태양, 달, 별이 나타나고, 달력(calendar)이 만들어진다.
그림 2. 에누마 에리쉬 서판 IV.
마지막으로 티아맛의 장군인 킹구(Qingu)가 있다. 마르둑은 에아(Ea)에게 신들을 시중들고 자기들은 쉴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인간을 만들고 싶은 욕심에 대하여 말한다. 마르둑은 이기기(Igigi, 하늘 신)와 아누나키(Anunnaki, 지하 신)에게 말하였고, 이기기는 킹구가 전쟁을 시작하였으므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대답했다. 마르둑은 킹구를 죽이고, 피와 흙을 취해 사람을 만든다. 그런 다음 아누나키는 바빌론(Babylon)과 에사길라(Esagila, 바빌론의 주요 사원 중 하나)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마지막으로, 석판 VII에서는 바빌론의 수호신을 높이기 위해 마르둑의 50개의 이름을 관련시키고 있다 :
오십 개의 별칭을 갖고 있는 위대한 신
그를 50개의 이름을 부르며, 최고의 신으로 만들었다.[3]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그러한 조잡하고 피에 굶주린 이야기에서, 창세기와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말할 필요도 없이, 신들 사이의 갈등이라는 주제는 창세기 1장에는 전혀 없고, 이는 다신론(polytheism)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몇몇 성경 비판가들은 이사야서를 언급한다. 이사야 51:9~10절의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 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와 시편 74:14절의 “리워야단의 머리를 부수시고 그것을 사막에 사는 자에게 음식물로 주셨으며” 구절이 이 근거가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구절들은 아마도 신화적 단어를 사용하여 출애굽의 역사적 사건을 다룬 것이다. (역자 주 : 그러나 용(dragon)과 리워야단(Leviathan)이 익룡이나 공룡이라면 신화적 단어도 아니다. 사람과 공룡이 함께 살았다는 증거들 8 : 유럽의 역사와 예술품에 등장하는 용은 공룡이었다!, 사람과 공룡이 함께 살았다는 증거들 9 :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의 역사, 그림, 예술품에 등장하는 공룡!을 참조하라). 우리 자신의 문화에서도 이런 비슷한 경험을 한다. 달력의 달(month) 이름 중 몇 가지는 로마 신에서 유래한 반면, 대부분의 요일 이름은 북유럽 신에서 유래했다. 그렇다고, 아무도 서양인들이 그 신들이나 각각의 신화를 믿는다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에누마 엘리쉬에 대한 관찰
첫째로, 에누마 엘리쉬는 정치적 문서이며, 바빌론이 아누(Anu)나 에아(Ea) 또는 다른 신과 달리, 저명한 신 마르둑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인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것은 다가오는 새해에도 왕권을 재확인하는 신년 축제인 아키투 축제(Akitu Festival)의 일부 의식(ritual)으로 제정됐다. 창세기 1장에는 그러한 기능이 없으며, 일반적으로 성경 비판가들 또는 세속적 학자들이 주장하는 반대의 주장은 단순한 순환논법일 뿐이다.
신들 사이의 갈등이라는 주제는 창세기 1장에는 전혀 없고, 이는 다신론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둘째로, 그것은 우주의 생성론이기 보다는, 신들의 계보에 관한 문서이다. 즉, 기본 의도는 우주의 기원보다는 신들의 기원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서판 I ~ V의 주요 부분은 신들의 계보와 그들의 치열한 전투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서판 IV(그림 2)의 끝부분에서 일부분만 우주의 창조를 언급하고 있다. “창조” 이야기의 주요 부분은 서판 VI에 있는데, 사람의 기원과 다양한 사원의 설립과 관계되어 있다. 실제로 옥스퍼드 대학의 스테파니 달레이(Stephanie Dalley)는 원본 이야기는 전혀 창조 이야기가 아니고, 나중에 그 부분이 혼합되었다고 주장한다.[4] 이러한 이론은 에누마 엘리쉬의 기본적 불일치를 전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또한 고대 세계의 창조 이야기의 기원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셋째로, 에누마 엘리쉬에서 이 세계와 인간(world and man)은 신성한 물질로부터 나온 것이다. 즉 둘 다 신이 “재료(stuff)”가 되어 생겨난 것이다. 여기에는 창조자 및 피조물의 구별은 없다. 더욱이 마르둑(Marduk)은 진정한 창조자가 아닌 재봉사(fashioner)인 것이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무에서의 창조(Creation ex nihilo)는 바빌론 사람들의 개념을 넘어서는 것처럼 보인다.
그림 3. 에누마 엘리쉬 서판 V.
넷째로, 에누마 엘리쉬는 6일 + 1일의 형식이 없다. 7개의 서판들은 이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그 서판들은 날들(또는 그 문제와 관련하여 오랜 기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런 점에서 다른 많은 자료들과 비교해도, 창세기 1장은 고대 세계에서 매우 독특하다.
마지막으로, 전체적인 요점은 고대 근동에서 “원래 문헌(origins literature)”이라고 부르는 것의 연대에 관한 것이다. 키친(K.A. Kitchen)은 이것이 근동 역사의 후기와는 반대되게, BC 2천 년 초가 명확하다고 주장한다.[6] 그런 다음, 그는 이러한 결론을 내린다.
“간단히 말해, 느부갓네살 시대(BC 6세기)의 바빌론에서 포로 상태인 히브리인들이 창세기 초반부의 내용을 바빌론 신화들에서 '차용(borrowed)'했다는 생각은 애초에 재고할 가치도 없는 생각이다.”
전통적인 BC 2천 년 전이라는 주장되는 연대를 받아들일 수 없지만, 그의 요점은 여전히 유효할 수 있는데, BC 2천 년 초(혹은, 그 이전)의 시기는 창세기가 바빌론 포로 시절인 후대에 쓰여졌다는 주장을 기각하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신화 : 헤시오도스(Hesiod)의 신들의 계보[7] :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 신화와 다른 신화를 알고 있었고, 이를 강하게 공격했다.
이 이야기는 그리스 신들의 기원과 계보, 그리고 다른 모든 신들과 우주에 대한 제우스(Zeus)의 왕권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야기에서 우라노스(Ouranos)와 그의 배우자인 가이아(Gaia)는 신을 낳으려고 시도하지만, 크로노스(Kronos)는 그의 아버지를 공격하고, 그의 피가 땅으로 쏟아져 신들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크로노스가 아버지의 생식기를 바다에 던지면서, 더 많은 신들이 등장한다. 그런 다음 10년 동안 크로노스와 타이탄(Titans)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고, 마침내 제우스는 우주를 지배한다. 우라노스는 가이아와의 사이에서 일련의 자손들을 낳았고, 마침내 탁월한 신 제우스를 낳았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 신화와 다른 신화를 알고 있었고 이를 강하게 공격했다.[8] 그러나 신들 사이의 서로 죽이고 충돌이 있었다는 주제는 이 신화의 특징이다. 그러나 전쟁 주제와는 별개로,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와 헤시오도스(Hesiod) 사이에는 여러 유사한 점들이 나타난다 :
1. 마르둑과 제우스는 공통점이 많으며, 특히 제우스는 우주의 지배자로 등장한다.
2. 크로노스는 킹구와 매우 비슷한 인물로서, 특히 우라노스와의 전투에서, 그리고 우주의 군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 그렇다.
3. 마찬가지로 에누마 엘리쉬의 티아맛과 가이아 사이에는 유사점이 있는데, 가이아는 그녀의 자녀들을 격분시켜 아버지 타이탄에 대항하게 한다.
노르드(북유럽) 신화[9]
또 다른 신화는 추운 북부지방의 기후를 이해할 수 있는 특징을 제외하고는, 에누마 엘리쉬와 놀랍도록 유사하다.
태초에 흐베르겔미르(Hvelgelmer)라 불리는 거대한 샘(fountain)이 있었다. 이 원천에서 나온 물은 결국 얼음으로 얼어붙었지만, 얼음이 녹기 시작했을 때 물방울이 떨어져 위미르(Ymer)가 태어났다. 깊은 잠이 그에게 왔고, 그의 땀방울에서 아들과 딸들이 나왔다. 이들 신들 사이에서 더 많은 신들이 나왔고, 그 중 하나가 오딘(Odin)이었고, 아사 신들(Asa-gods)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이제 위미르와 그의 사악한 아들들은 나머지 가족 신들과 전쟁을 벌였지만, 쓰라린 갈등 끝에 결국 아사 신들 중 첫째인 부레(Bure)가 승리했다. 위미르가 죽었을 때, 다른 신들은 그의 시체를 찢었고 갈았다. 돌에는 피가 묻었고, 빻아진 살점은 땅을 만들었다. 그의 뼈에서 바위와 산들이 만들어졌으며, 얼음처럼 차가운 피는 바닷물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신들은 땅의 형성을 마치고, 위미르의 두개골을 가져와서 하늘을 만들었다. 태양과 별은 텅빈 하늘에 불을 뿜었던, 남쪽의 신 무스펠 하임(Muspel-Heim)에게서 나왔다. 그는 그런 다음 신들은 그들에게 시간과 계절을 표시하도록 명령했고, 이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 신화에서 에누마 엘리쉬와 많은 유사점을 볼 수 있다. 나는 두 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
1. (에누마 엘리쉬에서) 바닷물의 여신 티아맛은 (노르드 신화에서) 물의 샘으로 한 단계 낮은 신인 흐베르겔미르(Hvelgelmer)가 되어있었는데, 이 신은 일련의 다양한 신들의 근원이자 기원이 되고 있다.
2. 위미르 시체로부터의 창조 이야기는 에누마 엘리쉬의 킹구의 운명과 매우 흡사하며, 이론적으로 바빌론 신화에서 북유럽 신화로 “문학적 차용(literary borrowing)”을 가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재고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내 지식으로는 아무도 그러한 의존성을 진지하게 수긍하지 않는다. 모두가 북유럽 신화의 전승은 독자적이라는데 동의하고 있다. 창세기 1장이 북유럽 신화에 의존했다고 믿는 사람은 여전히 매우 적다.
그림 4. 마르둑(Marduk)
결론
고대 신화들에 대한 이 조사는 단지 문화 인류학적 연구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조사는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가 바빌로니아의 ‘에누마 엘리시’에서 기원했는지를 단순한 비교로 알아보기 위함이다.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더 많은 증거들을 고려해야 한다. 어떤 문화이든지 관행적으로 동일하게 이교적이며, 다신론적 신화가 등장한다 - 성적 결합에 의한 출산, 신들 사이의 충돌, 신들의 군집, 땅이 된 물질, 많은 신들 사이에서 한 신의 우월성... 이것은 매우 분명해 보이는 패턴이다.
대조적으로 창세기 1장의 이야기는 태초부터 그곳에 계셨던 유일하신 참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다. 여기에는 명백한 창조자와 피조물의 구별이 있다. 창세기 1장은 신화들로 오염되지 않은, 초월적인 하나님을 드러내는 순전하고 고귀한 어조로 되어있다. 그러므로 이교적 신화는 기본적으로 하나의 장르이지만, 창세기는 매우 다른 부류인 것이다.
이 조사로 내릴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결론은 간단하지만 흔히 범할 수 있는 오류를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즉, B가 A를 닮았다면, B가 A에서 빌려온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된 것처럼, 창세기와 에누마 엘리시는 전혀 유사하지 않다. 따라서… (창세기는 에누마 엘리시에서 빌려온) 그러한 종류의 것이 아니다. 유사성에 대한 몇 가지 그럴듯한 설명이 있을 수 있는데, 문학적 의존성은 그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오류는 종교학과 비교신화학 연구에 만연해 있다. 특히 창세기(일반적인 기독교)와 이교도 문헌과의 문학적 유사점을 찾으려는 과정에서 볼 수 있다. 이제는 이러한 비과학적인 “논리(logic)”를 끝내야 할 때이다!
마지막으로, 달레이가 주장했던 것처럼, 신화들에서 볼 수 있는 창조 이야기는 세대에 걸친 신들의 갈등에 관한 이야기에 상당히 "고착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을 진실된 실제의 창조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떻게 고대의 여러 민족들 사이에서 점점 더 왜곡된 창조 이야기들이 있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줄 수 있으며, 서로 다른 형태로 독립적으로 순환하며, 결국 대홍수 이후 초기에 타락한 다신론적 신화로 연결되었는지를 설명해줄 수 있다. 한편, 성경 창세기는 본래의 순수한 형태의 창조 이야기를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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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1. In recent years, this view has been popularised in evangelical circles in Australia through such as John Dickson, The Genesis of Everything, ISCAST Journal for Christians in Science and Technology v.4, pp.1–18, 2008, and John Dickson, Greg Clark and Simon Smart, God Science: Creation, Darwin And The End Of Faith, (DVD), Centre for Public Christianity, 2010.
2. For a good contemporary English translation see Stephanie Dalley, Myths from Mesopotamia, Oxford, pp.233–77, 1988.
3. Dalley, ref. 2, p.273.
4. S. Dalley, ref. 2, p.230. She further remarks that some Amorite deity, rather than Marduk, may have been the original hero of the epic.
5. Some may object that in Genesis 2:7 Yahweh is a fashioner also, but two important points need to be made here: (i) the “dust of the earth” does not come from a dead god, as in Enuma Elish; (ii) there is no hint in Enuma Elish that Marduk “breathes into man the breath of life”, as in Genesis 2:7.
6. K.A. Kitchen, The Bible in its World, Paternoster, pp.34–35, 1977.
7. See Hugh G. Evelyn-White (tr.), The Theogony of Hesiod, http:// www.sacred-texts.com/cla/hesiod/theogony.htm, accessed 14.3.2013. Return to text.
8. For example, Justin Martyr, Discourse to the Greeks, III; in Ante-Nicene Fathers, Eerdmans, p.272, 1967.
9. See, e.g. D.L. Ashliman, The Norse Creation Myth, http:// www.pitt.edu/~dash/creation.html, accessed 14.3.2013. A search on the Internet will reveal several versions of the Norse myths.
*참조 : 역사와 거짓 역사 : 창세기 1~11장의 기록은 진정한 역사이다.
http://creation.kr/Genesis/?idx=1289105&bmode=view
창세기의 역사성에 관하여 제기되어 왔던 문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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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는 실제 역사라고 히브리어 교수는 확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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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창조 기록의 독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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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기사 : 구약의 창조 기사는 바벨론의 창조 신화를 베꼈는가? (2020. 4. 24. 크리스천투데이)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30908
창세기 1-3장은 진화론자들의 말처럼 신화일 뿐인가? (2020. 4. 15. 크리스천투데이)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30711
출처 : CMI, 2013. 6. 4. (GMT+10)
주소 : https://creation.com/is-genesis-1-just-reworked-babylonian-myth
번역 : 미디어위원회
타락 이전에 동물들의 죽음
: 동물을 잔인하게 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과 상반된다.
(Animal death before the Fall,
Cruelty to animals is contrary to God’s nature)
by Paul Price
성경적 창조론자(biblical creationists)들은 모든 종류의 죽음, 부패, 쇠퇴 등은(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것이 아닌) 궁극적으로 에덴동산에서 아담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라는 전통적인 기독교 견해를 지지한다. 아담의 타락과 저주 이전에, 창조물은 하나님의 원래 뜻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상태에 있었다. 사람들은 이것을 '낙원'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목가적인 상태는 창조물의 모든 영역에 널리 퍼져 있었다. 부패나 죽음이 인류에게 없었던 것처럼, 동물계에도 없었을 것이다.
사실 창세기 1:29~30절을 통해서 타락과 저주 이전에, 모든 동물과 사람에게는 식물만이 먹을거리로 주어졌음을 알 수 있다. 죄가 들어오기 이전에, 동물계에 육식이나 포식(捕食)은 없었을 것이다. 이사야 11:6~7절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앞으로 만드실 새 땅에서는 육식이 없는 지상 낙원을 회복시키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성경 주석가들은 이사야가 타락 이전의 세상을 암시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또한, 장차 올 미래 상태를, 동물들이 서로 물고 찢는 이 세상과는 달리...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로 요약하고 있다.
수정주의 기독교
만약 화석기록에 대한 세속적(오래된 지구)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죽음, 고통, 질병이 인류 이전에 이미 있었다는 것이 된다.
안타깝게도 교회 내의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타협 이론의 영향으로, 이러한 기본적인 성경의 가르침을 잊어버렸다. 왜냐하면 여러 단체나 신학자들이 이러한 세속적이고 비기독교적인 생각과 성경적 관점을 혼합하여 타협해버렸기 때문이다. 이 논쟁에서 한 주요한 쟁점은 동물의 죽음에 대한 것이다. 과연 성경은 인간의 타락 이전에 동물에게 죽음과 고통이 없었다고 가르치는가? 또는 타락의 결과가 단지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임을 가르치는가? 라는 것이다.
만약 화석기록에 대한 진화론적(오래된 지구)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죽음, 고통, 질병이 인류 이전에 이미 있었다는 것이 된다. 화석기록에 나타나있는 고생대 중생대의 생물 화석들은 이러한 결론을 지지하는 강력한 증거라는 것이다. 아담 이전의 동물들의 죽음은 유신진화론(theistic evolutionism)이나 점진적 창조론(progressive creationism)을 주장하는 오래된 지구론자들에게는 하나의 주요한 골칫거리이다. 이러한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세속적인 진화론적 연대(지구 나이 46억 년)와 성경 역사를 조화시키려고 시도한다.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가?
하지만 성경은 사망은 우리의 원수라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고전 15:26).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완벽하지 않은 상태로 세상을 창조하셨을까? 예를 들어 점진적 창조론을 주장하는 휴 로스(Hugh Ross)와 같은 오래된 지구 창조론자들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원래의 창조물을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이 완전하다는 의미보다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그대로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2]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것은 인간의 타락에 의한 저주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동물계에서 의도적으로 죽음, 고통, 질병을 만드신 후, 그 상태를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신 것을 의미한다. 어떤 종류의 신이 그런 일을 하겠는가?
초기 기독교인들의 죽음과 고통에 대한 역사적 이해(동물 영역을 포함하여)는 인류의 타락에 대한 형벌, 즉 저주로 보는 것이었다. 그러한 견해를 수정하여, 동물들은 항상 고통을 겪어왔고, 하나님께서 동물들이 처음부터 고통을 겪도록 하셨다면(점진론적 창조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선하신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며, 악의 문제에도 영향을 미친다. 하나님은 왜 불필요하게 동물에게 고난과 고통을 받도록 만드셨을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고통에 대해 선한(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이유를 가지고 계셨을까?
이에 대해 점진적 창조론자들의 일반적인 대답 중 하나는, 동물이 겪는 고통은 불필요한 것이 아니며, 단순히 하나님의 선한 뜻이 무엇인지 추측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실패하는 것이다. 자유의지(이것이 하나님이 죄를 허락하시고, 이어서 죄가 들어오게 된 이유이다)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그러한 고통을 만드실 수 있었을까? 동물들은 자신들의 나쁜 행동을 도덕적으로 알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범죄 이전에 존재했던 동물들의 생존경쟁과 죽음은, 결국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다는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이 고통과 죽음은 헤아릴 수 없는 시간 동안(진화론적 시간 틀로 수억 수천만 년 동안) 계속되었을 것이다. 전능하신 창조주께서 도덕적 존재인 인간이 있기 이전의 수억 수천만 년 동안, 동물들에게 고통을 겪도록 허락하셨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 이전에, 주변에 이미 질병, 죽음, 고통, 육식 등이 만연해 있었다면, 그들은 어떤 결론을 내렸을까? 자연스럽게 죽음과 질병은 늘 있던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결론짓지 않았겠는가? 이러한 세상에서 어떻게 저주는 나쁜 것이라고 여겨질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은 혼란을 초래하시는 분이신가?
에덴동산은 '안전지대'였는가?
이것에 대한 진정한 성경적 가르침은 모든 죽음과 고통은 인류의 타락에 대한 형벌로 인한 저주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몇몇 점진적 창조론자들은 아담과 하와는 이러한 동물들의 고통에 노출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고통과 죽음은 에덴동산 밖에서 이루어진 일이며, 에덴동산은 위험하고 약육강식의 피 흘리는 바깥 세계와는 구별된 천국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4]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하나님께서 이런 방법으로 만물을 만드셨다는 정당성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다. 아담과 하와가 어떻게든 외부 세계와 접촉하지 않았다면, 수억 수천만 년 동안 지속된 고통과 죽음은 어떤 의미가 있었으며, 사람에게는 어떤 목적이 있었을까? (그리고 에덴동산의 경계 내에서 인구가 얼마나 오랫동안 계속 성장할 수 있었을까?) 이 견해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을 때까지, 지구 행성의 대부분은 쓸모없고 무의미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실제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음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에덴동산은 무섭고 위험한 지구 행성의 한가운데에 있는, 안전하게 보호되는 특정 구역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상상해보라. 무엇이든 하실 수 있고 무한하신 능력을 갖고 계시는 분이, 육체적, 감정적 고통과 불행을 경험할 수 있는 온갖 동물들을 지구상에 창조하셔서, 수억 수천만 년 동안 많은 고통과 죽음들을 경험하게 하면서, 정작 그것들을 돕기 위한 아무 일도 안 하시는 하나님을 상상해보라. 과연 그러한 분이 어떤 신의 속성을 갖고 계시는 것일까? 이러한 신이 성경의 하나님과 매우 닮은 분일까? 우리가 말씀을 통해 하나님에 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통해 유추하자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아닐 것이다.
동물학대법의 성경적 근거
서구의 동물학대법(animal cruelty laws, 동물보호법)의 역사는 개신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이 법은 기독교계에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시도하던 시기에 제정되었다.[5] 미국의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진 최초의 법률 문서 중 하나인 매사추세츠 자유법령(Massachusetts Body of Liberties, 1641)에는 성경이 많이 언급되어 있으며,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
92. 어떤 사람도 사육하기 위해 기르는 일반적인 모든 가축에 대해 무자비하고 잔인한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6]
이 문서는 이 법령을 정당화하기 위한 성경 본문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원칙을 찾을 수 있는 성경의 구절들이 있다 :
"의인은 자기의 가축의 생명을 돌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 (잠언 12:10)
잠언 말씀은 “의인은(의인은 누구나, Whoever is righteous)”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 하나님은 의로우신가? 물론이다! 이 구절은 하나님이 가축의 생명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과는 독립적으로, 요나 4장에서 니느웨 성의 고통을 원하는 요나가 성내는 것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가축도 긍휼히 여기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나 4:11)
사실 여기 하나님의 명백한 말씀에서, 심지어 가축도 자비로 대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수억 수천만 년 동안 동물들의 죽음, 질병 및 고통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이 점이 오래된 지구 연대를 믿는 신학에서 중요한 논제였다. 성경은 분명히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시편 145:9)
이런 것들은 오래된 지구론자들의 주장과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든 생물들에 죽음과 고통을 고의적으로 만드시고, 수억 수천만 년 동안 아무 일도 하시지 않고 방관하셨기 때문이다. 진정한 성경의 가르침은 인간이 타락하여 죄를 짓고, 이로 인한 저주로 모든 죽음과 고통의 원인이 되었음을 알려준다. 아담이 모든 창조물의 대표자였기 때문에, 동물 세계도 함께 영향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삼위일체의 제 2위격이신 자신의 아들을 보내주셔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우리의 죄를 구속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 그분은 또한 창조세계를 회복하시고, 목가적인 원래 모습의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실 것을 약속하셨다.
부패, 사망 및 질병 — 이 모든 것은 저주의 부분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고 적고 있다.(로마서 8:22). 사람이 출산 시에 고통이 증가한 것도 저주의 일부로서, 실제로 창세기 3:16절에서 하나님에 의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바울은 이 개념을 확장하여, 모든 피조물이 저주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죽음과 고통을 창조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자신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에게 좋은 것만 주시고자 하시는 완전하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로 온 것이다.
References and notes
1. I cannot say ‘all’, because technically there is a viewpoint called Young Life Creationism that essentially proposes a roughly biblical perspective of life (going back only around 6000 years), but then attempts to insert billions of years prior to the creation of first life. Handling this view is outside the scope of this article since these individuals would not believe in animal death prior to the Fall. But see ‘Soft’ gap sophistry for problems with this view.
2. See Ch. 6, Sarfati, J., Refuting Compromise, Creation Book Publishers, Powder Springs, 2014; also Was God’s finished creation perfect?.
3. Zuiddam, B., 2nd Century Church Fathers: God will make lions vegetarian again, Creation 36(3):46–47, 2014; Early Church Fathers on creation, death and eschatology, J. Creation 28(1):77–83, 2014.
4. This concept is alluded to by the old earth perspective given at Could thorns have existed outside of Eden, and what about the Framework Hypothesis? though specifically thorns are mentioned.
5. Davis, J., The History of Animal Protection in the United States, oah.org, accessed 2 December 2019.
6. The Massachusetts Body of Liberties (1641), history.hanover.edu/ texts/ masslib. html, accessed 2 December 2019.
*참조 : 오래된 지구의 신 : 점진적 창조론, 간격이론, 날시대이론, 다중격변설...
http://creation.kr/BiblicalChronology/?idx=1289258&bmode=view
위증인 타파하기 : 오래된 지구 창조론자인 휴 로스의 주장에 대한 반론
http://creation.kr/BiblicalChronology/?idx=1289260&bmode=view
점진적 창조론에 대한 성경적 비판
http://creation.kr/BiblicalChronology/?idx=1289270&bmode=view
교회 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은 어떤 창조론을 믿고 있었는가?
http://creation.kr/BiblicalChronology/?idx=1289291&bmode=view
창조과학자와 기독교과학자 : 양승훈 교수의 “두 근본주의의 충돌”을 읽고
http://creation.kr/Faith/?idx=1293784&bmode=view
유신론적 진화론과 창조-진화 논쟁
http://creation.kr/Debate/?idx=1293630&bmode=view
유신진화론의 위험성 1 : 하나님이 진화의 방법을 사용하셨는가?
http://creation.kr/Faith/?idx=1293837&bmode=view
유신진화론의 위험성 2 : 하나님이 진화의 방법을 사용하셨는가?
http://creation.kr/Faith/?idx=1293838&bmode=view
유신진화론이 좋은 선택이 될 수 없는 이유
http://creation.kr/Faith/?idx=1757519&bmode=view
창세기는 말하고 있는 그대로를 의미한다고 칼뱅은 말했다.
http://creation.kr/Genesis/?idx=1289082&bmode=view
아담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유신진화론 :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아담이 없다 하느냐?
http://creation.kr/Genesis/?idx=1289147&bmode=view
화석 생물들은 언제 죽었는가? : 아담 이전의 죽음은 성경을 왜곡하는 것이다.
http://creation.kr/BiblicalChronology/?idx=1289267&bmode=view
식물들은 아담의 범죄 이전에 죽었는가?
http://creation.kr/BiblenScience/?idx=1288867&bmode=view
*관련기사 : '공룡도 암에 시달렸다'…공룡 화석서 골육종 흔적 첫 확인 (2020. 8. 4. 연합뉴스)
https://www.yna.co.kr/view/AKR20200804111100009?input=1195m
출처 : CMI, 2020. 3. 17. (GMT+10)
주소 : https://creation.com/animal-cruelty
번역 : 미디어위원회
창세기 1장의 “궁창 위의 물”에 대한 수증기 캐노피 모델의 분석
(What Is the State of the Water Vapor Canopy Model?)
by Bodie Hodge
수증기 캐노피 모델(water vapor canopy model)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이 모델을 둘러싼 성경적 해석, 그리고 성경적 창조론에서 어떻게 접근해야하는 지를 탐구해보고자 한다.
성경적 창조론자들도 알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면, 한 주제에 대한 의견이 나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비록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을 다해 따르려고 하고, 성경의 권위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사명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하나님의 창조의 다양한 면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는 모델의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어떤 과학적 모델에 대해서 나뉨이 발생할 때, 우리는 보다 철저하게 그 이슈에 뛰어들어, 그 모델이 좋은지 나쁜지, 수정이 필요한지 등을 깊이 조사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나뉘는 것을 뛰어넘어,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신학에 대해 나뉘는 것이 아니라, 한 과학적 모델에 대해 의견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주제에 대해 나뉠 수 있지만, 여전히 그리스도인의 사랑으로 서로 함께 할 수 있으며, 그 모델을 다루면서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잠언 27:17), 복음 안에서 그 이슈를 다루어야한다.
수증기 캐노피(water vapor canopy) 모델에 대한 논쟁도 다르지 않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이고 자매이다. 그리고 이 주제에 대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과, 성경이 말씀하고 있지 않은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딤후 2:15). 이 주제에 대해 최고의 권위는 성경이며, 이 주제에 대한 우리의 과학적 분석은 항상 성경 본문에 대해 종속적인 것이어야 한다.
수증기 캐노피 모델이란 무엇인가?
캐노피(canopy, 덮개) 모델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모두 공통점이 있다.[1] 그것들은 모두 창세기 1:7절의 궁창(expanse, firmament) “위의 물”을 창조 시부터 노아 홍수 때까지 지속됐던, 지구를 둘러싸고 있었던, 어떤 형태의 수성 캐노피로 해석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 1:6–7).
본질적으로 ‘위의 물(waters above)’은 지구 주위에 수증기나, 물(액체), 또는 얼음 캐노피를 형성했던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제안된 모든 모델들 중에서 선도적인 것은 수증기 캐노피(water vapor canopy) 모델이다.[2] 이 캐노피는 유해한 우주방사선이 지구로 들어오는 것을 차단했고, 지표면의 산소 대기압을 높여주었고, 지구의 기후와 온도를 비교적 일정하게 유지시킬 수 있었으며, 노아 홍수 시에 일부 물의 공급원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수증기 캐노피 모델의 간략한 역사
현대의 캐노피 모델들은 1961년 발간된 획기적인 책인, 헨리 모리스 박사와 존 휘트콤 박사의 ‘창세기 홍수(The Genesis Flood)‘ 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3] 이 책은 우리 시대의 사람들을 성경적 권위로 돌아가도록 촉발했다. 그것은 매우 훌륭한 책이며, 우리는 그들의 노력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이 책에서 휘트콤과 모리스는 ’위의 물‘에 대한 ’수증기 캐노피‘ 가능성을 소개하였다.
캐노피 모델은 조셉 딜로우(Joseph Dillow) 박사의 연구 덕분에 인기를 얻게 되었으며[4], 이후 ICR의 래디 바디만(Larry Vardiman) 박사와 같은 많은 창조론자들은 이 과학적 모델의 다양한 측면을 연구해왔다.
연구자들은 고형 캐노피, 물 캐노피, 수증기 캐노피, 두꺼운 캐노피, 얇은 캐노피 등의 가능성 등을 연구해왔다. 각 모델들에서 캐노피는 노아 홍수 때에 붕괴된 것으로 보았다. 연구자들은 그것이 홍수 시에 적어도 일부 물을 제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으며, 노아 홍수가 시작될 때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windows of heaven)’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창 7:11)에서, ‘하늘의 창문들’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현재 상태에서 캐노피 모델은 많이 쇠퇴되었고, 대부분의 연구자들과 변증학자들은 여러 캐노피 모델들을 포기했다. 그들이 포기하게 된 성경적, 과학적 이유를 살펴보자.
성경적 문제
두 가지 이유를 모두 논의하겠지만, 캐노피에 대한 토론에서 발생하는 모든 성경적 어려움은 과학적 고려 사항보다 우선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가르침에서 최고의 권위는 성경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해석은 성경이 아니다.
지구의 수성 캐노피의 필요성은 성경 본문에 직접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성경 구절에 대한 해석이다. 우리의 해석은 영감을 받아 기록된 성경의 본문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일부 사람들은 ‘위의 물’을 지구의 수성 캐노피와 완전히 다른 어떤 것으로 해석했다. 많은 주석가들은 ‘위의 물’을 단순히 구름으로 있는, 대기 중에 있는 물방울(수증기가 아니라)로 보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히 위에 있는 “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 해석을 단순히 구름인 것으로 제한하지 않으며, 아마도 우주에 깊숙이 닿아, ‘셋째 하늘(Third Heaven)’이나 하늘들의 하늘(Heaven of Heavens)까지 뻗어 있던 무언가일 것으로 보았다. 예를 들어, 1700년대의 성경학자였던 존 길(John Gill)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그것의 아랫부분은, 물이 가득한 구름이 있는 대기권의 윗부분이다. 이곳으로부터 비가 땅으로 내려온다. 그것들과 그 아래에 있는 것, 즉 땅에 떨어져 아직 하나로 모이지 않은 것 사이가 나뉘어지고, 그래서 이제 하늘 구름과 바다의 물 사이가 나뉘어진다. 미스터 그레고리(Mr. Gregory)의 의견이지만, 가장 최상의 구(supreme orb) 위에 물의 심연이 여기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 사이의 깊은 곳에...[5]
길(Gill)은 구름이 이들 ‘위의 물’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 물은 또한 우주의 바깥 가장자리에서 하늘들의 하늘(heaven of heavens)까지 확장되어있었다는 데에 동의하고 있다. 1600년대 성경주석가였던 매튜 풀(Matthew Poole)의 해석에서도 이 가능성을 지적한다 :
... 확장 또는 연장되었던, 왜냐하면 그것은 멀리 그리고 넓게, 지구에서 셋째 하늘까지도 확장되어 있었다. 또한 궁창(firmament)이라고 불렸다. 왜냐하면 그것은 적절한 장소에 고정되어, 힘이 없다면, 움직일 수 없는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6]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또한 이 궁창이 하늘들의 하늘(셋째 하늘)까지 확장되어 있다는데 동의하고 있었다 :
그것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은 “궁창이 있어”...나뉘라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확장(expansion, 팽창)으로, 히브리어 단어는 종이가 펴지거나, 커튼이 펼쳐지는 것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지구 위로 보여지는 모든 것, 지구와 세 번째 하늘 사이의 대기를 포함하여, 그것의 낮고, 중간, 더 높은 지역 — 하늘의 천구(celestial globe), 그리고 위의 모든 천체와 빛의 구체들이 있는 곳이다. 왜냐하면 그곳은 하늘의 궁창(firmament of heaven)이라고 불려지고 있으며(창 1:14,15), 새들이 날고 있는 그곳의 낮은 곳도 또한 하늘의 궁창이라고 불려지고 있기 때문이다.(창 1:20).[7]
요점은 지구의 캐노피 모델이 단순히 ~ 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의 해석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해석으로 평가되어야 하고, 성경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존경받는 성경 해석가들은 “위의 물”을 지구의 대기권 상층부에 있는 워터 캐노피(water canopy)라는 해석에 참여하지 않았다.
계절성 별과 별빛, 기타 의미
또 다른 성경적 문제는 창세기 1:14~15절을 읽을 때 발생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8]
별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계절 지도(map seasons)로 사용되도록 의도되었다. 또한 별들은 땅을 비추도록 창조되었다. 별빛은 밝지는 않지만, 오염지역이 아닌 곳에 거주하는 경우, 초승달의 빛도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물 : 캐노피가 액체 상태의 물이었다면, 그리고 안개나 연무와 같은 여러 형태로 있었다면, 이러한 별들을 보지 못하게 된다. 계절을 나타내는 별들을 어떻게 볼 수 있었을까? 그것은 영원히 흐린 날과 같았을 것이다. 안개가 심한 날의 자동차 전조등과 비슷하게, 빛은 흡수되거나 우주로 다시 반사되었을 것이다. 적은 빛이 통과되더라도 계절을 알 수 있도록 별빛은 서로 충분히 구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수증기 캐노피와 같지 않게, 구름은 움직이고 이동한다. 구름이 움직일 때, 그 사이로 계절을 나타내는 별들을 볼 수 있다. 또한 캐노피가 물이라면, 그것은 왜 떨어지지 않았는가?[9]
얼음 : 캐노피가 얼음이었다면, 별을 보는 것이 가능했을 수도 있다. 보는 위치에 따라 별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여전히 계절을 나타내기에 충분할 수 있다. 그러나 얼음은 차갑게 유지될 때, 다른 물 분자가 얼어붙어있는 표면에 코팅되는 경향이 있다.(냉장고 벽에 붙어있는 얼음 덩어리를 생각하라). 대양 표면에서 증발된 물이 접촉면을 만들었을 것이고, 특히 죄로 인해 저주받고 쇠퇴된 세계에서, 이것은 가시성을 방해할 수 있다.
증기 : 우리의 대기권에서 보이지 않는 증기 캐노피가 가장 적합하지만, 여전히 한 문제가 있다. 차가운 증기가 우주 공간에 가까워지면, 물은 응축되고 흐려지기 시작한다. 대기권 상층부에 있는 증기가 따뜻하게 이슬점 이상으로 유지된다 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상태로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많은 “만약”의 상황들이 있을 수는 있다. 간단히 말해서, 이 모델들에서 별들은 지구에 빛을 비추기 위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만약 수증기 캐노피가 있었다면, 수증기와 대기권의 나머지 부분과 상호작용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가스는 혼합되어 평형을 이룬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이 우주를 붙들고 계시는 방식이다.[10] 그것이 증기였다면, 그것이 대기와 구별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느 것이 증기인가?
성경은 ‘위의 물’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것은 온도는 0℃와 100℃ 사이였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증기를 의미했다면, 왜 위의 “물”이라고 말했을까? 왜 구약에서 사용됐던 용어인 ‘증기(hebel, 히벨)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별들은 어디에 만들어졌는가?
캐노피가 실제로 지구 대기권의 일부였다면, 모든 별, 태양, 달 들은 지구 대기권 내에 창조되었을 것이다. 왜 이런가? 창세기 1:14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위의 물”은 훨씬 더 멀리 있을 수 있음을 가리킨다. 오늘날에도 존재한다면 말이다.
태양(큰 광명체)과 달(작은 광명체)을 포함하여, 모든 별들은 “궁창에(in the expanse)” 만들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것들은 분명히 우리의 대기권 내에 있지 않다. 7절의 물은 궁창 위에 있다는 것을 상기하라. 만약 캐노피가 어린 지구의 대기권 바깥쪽에 있었다면, 14절에 의해서, 태양, 달, 별은 대기권 내에 있어야 한다는 모순이 생긴다.
더 나아가, 날개 달린 새(winged creatures)는 궁창에 날고 있었으며(창 1:20. 히브리어를 정확하게 번역한 NKJV에 의거함), 이것은 궁창의 범위를 밝히는데 도움이 된다. 그것은 우주 공간뿐만 아니라, 대기권의 측면을 포함하는 것이다. 성경은 창세기 1:8절에서 궁창을 “하늘(heaven)”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가 모두 포함된다. 아마도 “하늘(sky)”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이것과 비슷하거나, 아마도 최고의 번역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본문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별들이 넓게 펼쳐질 수 있게 하며, 이는 어떤 종류의 위의 물이 대기권에 국한되지 않고, 별들을 넘어서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고린도후서 12:2절은 셋째 하늘이 있음을, 즉 대기권(공기 하늘), 우주(별이 있는 하늘), 하늘들의 하늘(느헤미야 9:6)이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히브리어에서 안, 위, 아래, 등의 전치사들은 본문이 아니라, 문맥에서 결정되기 때문에, 창세기 1장의 14절과 17절의 의미는 모호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전치사들이 상황에 따라 결정되는 것은 사실이므로, 우리는 창세기 1:14절의 적절한 번역에 의존해야 한다. 사실상 모든 번역본에는 태양, 달, 별들은 캐노피 모델이 필요로 하는 궁창 위가 아니라, 궁창에 창조되었다.
몇몇 사람들은 창세기 1장에서 새들이 날고 있는 궁창(창 1:20)과 태양, 달, 별들이 놓인 궁창(창 1:7)을 구별하려고 시도해왔다. 태양, 달, 별들은 두 번째 궁창에서 만들어졌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 본문으로부터 필요한 구별이 아니며, 단지 캐노피가 가정되는 경우에만 필요한 구별이다.
히브리어로부터 새들은 땅 위 하늘의 궁창을 가로질러 날으라고 말한다.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다니는 새를 바라보면, 대기권과 그 너머의 공간, 즉 “하늘”을 정면으로 볼 수 있다. 캐노피 모델의 지지자들은 이 두 궁창을 구별해야 하지만, 이것은 그 견해를 지지하기 위해서만 필요한, 성경의 다른 곳에 설명되어 있지 않은, 임의적인 해석이다.
궁창은 홍수 후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성경으로부터 제기되는 또 다른 문제는, 하늘 위의 물이 노아 홍수 이후에도(사라졌다고 추정되는 시기에도), 언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늘의 하늘도 그를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waters above the heavens) 그를 찬양할지어다” (시편 148:4).
“...그 때에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는 자 곧 한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windows in heaven)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하더라 엘리사가 이르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 (열왕기하 7:2, 또한 7:1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windows of heaven)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라기 3:10).
성경의 저자들은 홍수 이후의 세계에서도 홍수 이후의 다른 측면들을 말하면서 이것을 썼다. 따라서 “위의 물(waters above)”과 “하늘의 창(windows of heaven)”은 홍수 이후에도 여전히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위의 물”은 홍수 시에 소실되어, 오래 전에 사라진 캐노피가 될 수 없어 보인다. 이것은 다음 구절에 의해 보완된다 :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문이 닫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 (창세기 8:2).
창세기 8:2절은 단지 두 근원이 중단되고 억제된 것이지, 사라졌다는 것이 아님을 가리킨다. 위의 구절들은 하늘 창들이 노아 홍수 이후에도 남아 있음을 시사한다. 심지어 “큰 깊음의 샘들”도 멈추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때 이후 남은 갇혀있던 물들이 천천히 새어 나올 수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터져 나오는 방식은 아니었다.[11]
워터 캐노피는 성경적으로 필요한가?
마지막으로 성경적으로 캐노피가 필요한가? 라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것은 1900년대 중반에 개발된 성경적 창조론 모델의 여러 측면을 다루기 위해서, 창세기 1장의 해석에 기초한 가능성 있는 과학적 모델로 승격되었던 것이다. 나는 여전히 그 모델에 매력을 갖고 있는 주님의 형제자매들에게 이것을 가볍게 말하지 않는다. 지난 세기에, 나는 캐노피 모델을 소개받았고, 그것이 매력적인 것을 발견했다. 몇 년 동안, 나는 그것을 신봉했지만, 더 많은 연구를 마친 후에, 다른 많은 창조론자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포기하는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오래 전의 성경 주석가들도 하늘의 창이나,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워터 캐노피 같은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다. 그러한 해석은 그들이 보기에 필요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러한 생각은 최근 100년 이내의 성경적 해석으로 추가된 것이다. 캐노피 모델은 성경적 지구 역사에 대해 회의를 가진 사람들에게 본문의 특정 측면을 설명하기 위해서 개발된 과학적 해석이었다. 그러나 세밀히 살펴볼 때, 그것은 필요하지 않으며, 그것과 관련된 심각한 성경적 문제를 갖고 있다.
과학적 문제
캐노피 모델들은 분명히 극복하기 어려운 성경적 문제들을 갖고 있다. 그리고 연구자들은 종종 캐노피 모델의 과학적 문제점도 지적해왔다. 아래에 몇 가지를 살펴보겠다.
이것은 어떻게든 연구자들이 틀렸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연구는 가치 있는 것이고, 그 모델이 변형 및 유형을 갖고 작동될 수 있는지, 작동될 수 없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유용하고 필요하다. 모델의 개발과 테스트는 과학적 탐구의 중요한 부분이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세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많은 모델들을 계속 사용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모든 일을 고맙게 생각하고, 박수를 보내며, 연구자들은 다른 측면들을 연구하여, 어떤 것을 놓쳤는지를 알아볼 것을 권면한다.
온도
캐노피 없이 지구의 온도가 조절될 수 있었는가?에 답하기 위해, 지구의 기온은 대기와 바다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날에 기후가 조절되는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고려해야 한다. 홍수 이전의 지하에 많은 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엄청난 양의 해양생물들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지표면 또는 근처에 물이 있었다. 화석기록의 거의 95%가 얕은 바다생물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이것을 알 수 있다. 홍수 이전에는 지구 표면의 약 70%가 바다였는가? 그것은 창조론자들도 여전히 논쟁하고 있는 질문이다.
초월적 지혜의 하나님은 사람들이 옷을 입지 않고도, 땅을 충만하게 채울 수 있도록, 이상적 기후(창세기 3:8절과 같은 변화에도 불구하고)의 완벽한 세상을 설계하시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으실 것이다.(창 2:25, 1:28). 홍수 이전의 저주받은 세계에서도, 지구는 온도와 기후가 조절될 수 있는 더 나은 것을 갖추고 있었을 것이다.
반면에 수증기 캐노피는 지구의 온도 조절에 중대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수증기 캐노피는 태양의 적외선을 모두 흡수하고, 뜨거워져서, 아래쪽으로 전도되어 지표면을 가열할 것이다. 따라서 여러 캐노피 모델들은 온실효과로 인한 열문제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 예를 들어, 가장 타당한 모델이 작동하려면, 태양 복사선이 약 25% 감소해야한다.[12] 열 문제는 실제로 이 모델의 가장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키고, 홍수 이전의 환경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되는 대신에, 문제를 발생시킨다.[13]
물의 근원
노아 홍수의 주요한 물의 근원은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짐으로 기인한 것이다.(창 7:11). 이 물은 아마도 간접적으로 "하늘의 창"에 물의 일부를 제공했을 것이다. 대홍수 동안 비로 떨어진 막대한 양의 물을 제공하기 위해서, 대기권 위의 수증기 바다가 필요하지 않다.
예를 들어, 딜로(Dillow)의 수증기 캐노피가 존재했고(강수 물로 12m), 홍수 시에 대부분 강우로 붕괴되었다면, 응축열(latent heat of condensation)은 대기권을 끓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바디만(Vardiman)의 모델(강수 물로 0.6~1.8m)과 같이 별을 볼 수 있을 정도의 캐노피는 40일 밤낮으로 막대한 량의 비를 내리게 한 충분한 수증기가 될 수 없어 보인다. 따라서 수증기 캐노피는 홍수 시의 강우를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긴 수명
일부 사람들은 홍수 이전에는 캐노피로 인해서 지표면 대기압을 높았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 이유는 더 나은 치유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더 긴 수명과, 더 큰 신체 크기를 갖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산소의 증가(그리고 위험한 자유라디칼을 생성하는 산화)는 몇 가지 측면에서는 유익하지만, 대부분 생물학적 시스템에 해를 끼친다. 따라서 항산화제(카탈라제 및 비타민 E, A, C 등을 포함하여)가 생물체 내에서 이러한 자유라디칼(free radicals)을 감소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홍수 전후의 수명(그리고 많은 생물체의 거대한 크기)은 캐노피로 인한 홍수 이전의 산소 수준 보다는, 홍수 이후 인구가 8명으로 줄어들면서, 그리고 바벨탑에 의한 나뉘어짐으로 발생한 유전적 병목(bottlenecks) 현상으로 더 잘 설명된다. 이러한 점은 이미 다른 글들에서 논의했었다.[14]
홍수 이전의 기후
캐노피 모델과 관계없이, 창조론자들은 일반적으로 아담의 타락 이전에는 기후가 완벽했었다는 데에 동의한다. 이것은 공기가 정체되어, 매일 21℃ 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대신 낮과 밤에 온도 변화가 있었다.(창 3:8). 이러한 온도 변동은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매우 타당하다.
아담과 하와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다.(창 1:28). 완벽한 세상에서 죄를 가릴 옷이 필요 없었다. 아담은 옷을 입지 않고도, 땅에 충만해질 수 있었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따라서 온도 변화는 오늘날과 같지 않았을 것이다. 커다란 온도 변화가 있었다면, 아담과 하와는 매우 불행했을 것이다.
타락 이후에도, 이러한 날씨 변화는 최소한의 변화만을 보였을 것이 이치에 맞는다. 그러나 지구를 파괴하고, 대륙들을 재배치했던, 전 지구적 홍수로 인해서, 극단의 온도들은 뚜렷해졌다. 이제 빙상과 홍수로 밀려올라간 높은 산들을 갖게 되었다.(시 104:8). 우리는 이제 극심한 더위와 추위, 물이 없는 사막을 갖게 되었다.
성경적 모델과 격려
AiG(Answers in Genesis)는 과학적 그리고 신학적 모델의 연구와 개발을 장려한다. 그러나 주제와 관련된 모든 성경 구절을 잘 이해하는 것이, 과학적 연구와 모델에 앞서 선행되어야 하며, 모든 결론에 대한 최종 판결자는 성경이야만 한다.
캐노피 모델은 여전히 희망의 빛이 남아있으며, 지지자들은 더 신중한 설명을 위해 연구들을 수행할 것이다. 그러나 한 모델이 수용되기 위해서는, 성경적, 과학적 난관들이 철저하고 확실하게 해결되어야한다. 그래서 우리는 미래의 연구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는 한 과학적 모델이 성경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의 권위로서 방어해야만 하는 것은 성경이다. ‘위의 물’이 아래의 물과 분리되어 있음을 반드시 확인해야하지만, 제한적인 과학적 이해로 성경을 잘못 해석하지 않도록, 캐노피 모델을 느슨하게 유지해야할 것이다.
Footnotes
1. This is not to be confused with canopy ideas that have the edge of water at or near the end of the universe (e.g., white hole cosmology), but instead the models that have a water canopy in the atmosphere, e.g., like those mentioned in J.C. Whitcomb and H.M. Morris, The Genesis Flood (Phillipsburg, NJ: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1961); J.C. Dillow, The Waters Above: Earth’s Pre-Flood Vapor Canopy, Revised Edition (Chicago, IL: Moody Press, 1981); or John C. Whitcomb, The World that Perished (Winona Lake, IN: BMH Books, 2009).
2. This is in large part due to the influence of Joseph Dillow, whose scientific treatise left only the vapor models with any potential. He writes on page 422 of his treatise: “We showed that only a vapor canopy model can satisfactorily meet the requirements of a the necessary support mechanism.” Dillow, The Waters Above: Earth’s Pre-Flood Vapor Canopy.
3. Whitcomb and Morris, The Genesis Flood.
4. Dillow, The Waters Above: Earth’s Pre-Flood Vapor Canopy.
5. John Gill, Exposition of the Bible, Genesis 1:7.
6. Matthew Poole, A Commentary on the Holy Bible, Genesis 1:7.
7. Matthew Henry, A Commentary on the Whole Bible, Genesis 1:7.
8. See also Genesis 1:17.
9. Would one appeal to the supernatural? If so, it defeats the purpose of this scientific model that seeks to explain things in a naturalistic fashion.
10. Again, would one appeal to the supernatural? If so, it defeats the purpose of this scientific model that seeks to explain things in a naturalistic fashion.
11. I would leave open the option that this affected the ocean sea level to a small degree but the main reasons for changing sea level was via the Ice Age.
12. For more on this see “Temperature Profiles for an Optimized Water Vapor Canopy” by Dr. Larry Vardiman, a researcher on this subject for over 25 years at the time of writing that paper; https://icr.org/i/pdf/technical/Temperature-Profiles-for-an-Optimized-Water-Vapor-Canopy.pdf.
13. Another issue is the amount of water vapor in the canopy. Dillow’s 40 feet of precipitable water, the amount collected after all the water condenses, has major heat problems. But Vardiman’s view has modeled canopies with 2 to 6 feet of precipitable water with better temperature results and we look forward to seeing future research.
14. Ken Ham, ed., New Answers Book 2 (Green Forest, AR: Master Books, 2008), p. 159–168; Bodie Hodge, Tower of Babel (Green Forest, AR: Master Books, 2013), p. 205–212.
출처 : AiG, December 18, 2019
주소 : https://answersingenesis.org/environmental-science/state-of-canopy-model/
번역 : 미디어위원회
역사와 거짓 역사
: 창세기 1~11장의 기록은 진정한 역사이다.
(History and pseudo-history)
Robert Gurney
창세기 1-11장은 역사인가? 허구인가? 아니면 시인가? 우화인가? 아니면 풍자인가? ‘거짓 역사(pseudo-history)’란 진실된 역사 기록이 아닌, 단지 역사처럼 보이게 기록된 것을 말한다. 18, 19세기에 동일과정설(균일설, uniformitarianism)과 진화론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모든 개혁주의자들과 그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창세기 1-11장의 기록을 문자 그대로 역사로 보았다. 그러나 그때로부터 성경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이 장들을 진화론적 긴 연대론과 조화시켜보려고 시도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간격(gap)’ 이론가들과 날-시대(day-age)’ 이론가들은 역사 시대 이전에 수억 수천만 년이 흘렀다는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성경의 역사성을 지키려는(결과적으로 실패한) 시도들을 했다. 그러나 다른 이들, 예를 들면 ‘골격가설’ 이론가들은 그런 시도조차 무시하고, 이 성경 장들을 비유나 상징으로만 여겨버렸다.[1]
창조 이야기는 상징인가?
골격가설에 의한 문학적 접근은 최근 복음주의적 신학교에서 아주 인기가 높다. 이들은 창세기 1-11장들은 역사가 아니지만, 여전히 중요한 신학적 교훈을 준다고 주장한다. 몇몇 학교에서는 성경의 기록이 역사처럼 보인다고 인정하기도 하지만, 시나 풍자, 우화로 묘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뭐라고 부르건 그들은 성경을 비유적 이야기로, 단지 특정한 사실을 상징화한 것이라고 믿는다. 예를 들어 그들이 이 장들이 창조의 날들을 묘사한다고 인정하고 있지만, 하루의 시간이 24시간이라고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상징적인 날들로 믿고 있다.
골격가설의 믿음이 잘못된 이유는 많다.[2, 3] 예를 들어 히브리어의 문법적 구조는 이어지는 서술적 산문이지, 시가 아니다. 그리고 창세기의 나머지 부분들과 다른 신, 구약의 성경들을 포함해서 문맥적으로 봐도 창세기 1-11장은 사실적 역사를 묘사하고 있다.[4] 따라서 창세기를 이야기식 산문을 포함하여 우화나 풍자 같은 비역사적 문학으로 보는 모든 해석들은 모두 자격미달이 된다.
그리고 중요하게 고려해야할 한 가지는 창세기 메시지가 전하는 임팩트(impact)이다. 실제 역사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힘과 권위를 가지지만, 허구는 힘도 권위도 없다.
진짜 예언과 거짓 예언
역사와 허구의 차이는 그것이 전하는 예언의 참됨을 보면 알 수 있다. 창세기 1-11장과 성경적 예언은 깊은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둘 다 역사성과 하나님의 전지성(그분의 지식은 끝이 없고, 사람의 한계를 훨씬 넘어선다)과 밝혀진 사실성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 전 과거의 역사와 미래의 역사까지도(예언의 시간과 관련해서) 알고 계시는 그분의 지식과도 관련이 있다. 예언처럼 보이도록 기록된 ‘거짓 예언‘은 사실 ’예언된‘ 사건 이후에 기록된 것이다.
진짜 예언은 힘 있고 권위 있는 메시지를 전하며, 성경은 거기에 큰 중요성을 더한다. 정확하게 미래를 예언할 때, 하나님은 자신이 참 신이고, 자신의 말씀들은 신뢰될 수 있다는 증거를 제공한다.
하나님은 시간 밖에 거하시며, 유일하게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아시는 분이시다. 이 사실은 이사야서(41:21–24; 44:6–7; 46:9–10; 48:3–5)와 민수기(18:21-22), 그리고 예수님(요한복음 14:29)에 의해 반복되어 강조되었다.[5] 이에 반해 거짓 예언은 아무 것도 증거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건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써, 참된 예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어떠한 확실한 증거도 제시할 수 없으며, 그 메시지의 참됨도 증거할 수 없다.[6]
진실된 역사와 거짓된 역사
하나님은 미래뿐만이 아니라 과거도 알고 계신다. 이것은 창조와 관련해서 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 때 계셨지만, 인간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진짜 예언의 힘과 권위를 보아왔다. 그렇다면 성경의 역사는 힘과 권위를 가지는가?
기독교는 역사적 종교이다. 그 가르침과 배경은 역사에 바탕을 두고 있다. 단순한 윤리적 교훈의 집합이 아니다.
기독교는 역사적 종교다. 그 가르침과 배경은 역사에 바탕을 두고 있다. 단순한 윤리적 교훈의 집합이 아니다. 성경은 역사 속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록하고 있다. 이 역사적인 실제 사건을 반복해서 가리키며, 그 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보여준다. 이 역사적인 실제 사건은 창조, 타락, 홍수, 바벨탑 사건, 아브라함을 부르심, 이집트에서 탈출 등등 많은 이스라엘의 역사속 사건들을 말하며, 물론 예수님의 탄생과, 일생, 죽음과 부활도 포함한다.
만약 부활 사건이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하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무엇을 증거할 수 있을 것인가?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사건이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은 이야기라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왜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이루시는, 그리고 그분의 능력과 구원을 이루시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써 이런 여러 사건들을 반복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
거짓 예언처럼 거짓 역사도 증거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메시지는 힘이 없고 권위도 가질 수 없다. 왜냐면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실의 알맹이가 없는 미사여구에 불과할 뿐이다. 창조 사건의 교훈이 중요성과 힘을 가지려면, 오직 하나님께서 성경의 기록대로 창조하셨을 때만 가능하다.
만약 창세기 1-11장의 기록이 단순한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전하는 메시지는 힘이 없을 뿐만 아니라 거짓 메시지가 된다. 예를 들어 메시지의 핵심적인 부분은 원래의 창조는 보시기에 심히 좋아다는(완벽했다는) 것이다. 그러던 것이 사람의 불순종으로 타락하면서부터 훼손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훼손의 결과 사람의 죽음도 시작되었다 (창세기 2:15-17, 3:17-19, 고린도전서 15:20-22, 26). 그러나 만약 창세기의 이야기가 단순한 상징이고, ‘수억 수천만 년의 시간’이 진실이라면, 타락 이전에도 죽음, 질병, 폭력, 고통, 버려짐 등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이것은 명백하게 창세기가 전하는 메시지와 (그리고 고린도전서의 메시지와도) 상반된다.
창세기 1-11장은 그 자체로 진실된 역사이며, 다른 성경들과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창세기 기록이 힘과 권위를 가지는 것은 비역사적인 어떤 다른 절충안이 아닌 역사적 기록으로 인정받을 때뿐이다.
Related articles
Is Genesis poetry / figurative, a theological argument (polemic) and thus not history?
An Understanding of Genesis 2:5
Further reading
Is God Science reading Genesis 1 ‘properly’?
References
1. See, for example, Blocher, H., In the Beginning, IVP, Leicester, UK, 1984.
2. Batten, D. and Sarfati, J., 15 Reasons to Take Genesis as History, CMI, Brisbane, Australia, 2006.
3. Sarfati, J., Refuting Compromise, Master Books, Green Forest, USA, 2004, pp, 94–101.
4. Sarfati, J., Genesis: Bible authors believed it to be history: The important thing is that God created, isn’t it? Creation 28(2):21–23, 2006; creation.com/gen-hist.
5. A false prediction is an acid test of a false prophet (Deuteronomy 18:20–22).
6. The book of Daniel, for example, contains some truly amazing predictive prophecies. However, liberal scholars, followed by some professing evangelicals, prefer to believe that most of these prophecies are pseudo-predictions. See Gurney, R., biblicalstudies.org.uk/book_god-in-control_gurney.html, pp. 1–10. This is a revised internet edition, 2006, of Walter, H., God in Control, Worthing, UK, 1980.
7. Cosner, L., The Resurrection and Genesis, Creation 32(2):48–50, 2010.
번역 - 박창민
링크 - http://creation.com/pseudo-history
출처 - Creation 32(3):36–37, June 2010.
전 지구적 홍수를 가리키는 성경적, 과학적 증거들과
전 세계의 홍수 설화, 그리고 에누마 엘리쉬
(A firehose of evidence pointing to the worldwide flood)
by Bob Enyart
전 지구적 홍수에 대한 성경적 증거
▶ 예수님, 베드로, 히브리서의 저자는 모두 노아의 홍수를 언급하고 있으며, 베드로서는 홍수로 인해 “8명”만이 살아남았음을 말하고 있다.
▶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베드로후서 2:5)
▶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베드로전서 3:20)
▶ (찰스 라이엘과 찰스 다윈의 동일과정설에 앞서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씀했다.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베드로후서 3:4-6)
▶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히브리서 11:7)
▶ 예수님 자신도 홍수 이전의 세상을 말씀하고 계셨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마태복음 24:38-39).
▶ 누가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누가복음 17:27)
▶ 예수께서는 창세기의 역사성과 그 기초가 중요함을 확인하는 맥락에서 성경 창세기의 첫 7장을 각각 언급하셨다.
▶ 신약 성경의 모든 저자들은 창세기 첫 11장 중에서 적어도 하나를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창세기의 역사성과 그 기초를 확인해주는 맥락에서 중요하다.
▶ 창세기는 8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빠져죽었고, 홍수가 산꼭대기를 덮었던, 전 지구적 홍수를 기술하고 있다. 이 홍수가 지역적 홍수였다면, 모든 종류의 육상동물들과 새들을 한 쌍씩을 구하기 위한 거대한 방주를 지을 필요가 없었다.
▶ 모세는 창세기 6~9장을 통해 “모든(all)"이라는 단어를 여러 번 사용하였다.(all the mountains, all flesh died, all living things...). 그리고 홍수로 천하의 높은 산이 다 잠겼으며, 엄청난 강도로 일어났음을 여러 번 강조하고 있다.
▶ 하나님께서는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셨다.(창 9:11) 만약 노아의 홍수가 지역적 홍수였다면,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지 않는 분이 된다.
▶ 하나님은 완벽한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래서 홍수는 아담의 타락만으로는 설명하기에 어려웠던 유성, 소행성, 혜성, 지구의 방사능, 지진, 화산과 같은 것들을 설명할 수 있다.
.홍수 후 인류의 수명 감소를 보여주는 그래프. (photo credit Walt Brown)
▶ 900년에 달했던 인류의 수명은 홍수 이후에 갑자기 감소했다. 이 감소율은 무작위적이 아닌, 지수 함수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과학적 증거
▶ 노아 방주는 아라랏 산에 머물렀다.(창 8:4) Science 지가 보도한 바와 같이, “농업의 요람은 비옥한 초승달의 작은 지역(오늘날 터키 남동부/시리아 북부)”이다.
*참조 : 창세기 홍수의 지질학적 증거들
http://creation.kr/HotIssues/?idx=1288416&bmode=view
▶ 인류학자들이 기록한 전 세계의 수백 개의 문화들에는 고대 홍수에 대한 전설들을 갖고 있는데, 그들의 500여 홍수 이야기들은 창세기 홍수와 유사한 점들을 갖고 있다.
• 신은 홍수를 통해 사람을 심판하신다.
• 경고를 하고 있다.
• 어떤 종류의 배를 만든다. (또는 다른 탈출 수단을 찾는다)
• 매우 강력한 홍수가 일어났다.
• 땅의 드러났는지를 알기 위해서, 새나 다른 정찰 생물을 내보낸다.
•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
• 일부는 동물들도 구원을 받는다.
• 그런 다음 배는 산이나 다른 장소에 도달한다.
• 희생 제물을 바치고, 땅을 다시 채우는 것으로 끝난다.
*참조 : 세계 곳곳의 홍수 전설들
http://creation.kr/EvidenceofFlood/?idx=1288396&bmode=view
▶ 펑크와 와그날(Funk and Wagnall)의 1950년대 민속학 사전(Dictionary of Folklore)에서 제시했던, 전 세계의 설화 목록에서 고대 홍수가 없는 것으로 강조됐던 예외는 신뢰할 수 없어 보인다. 거기에는 홍수 설화가 없는 예외로 "이집트와 일본..."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CMI 글이 보고한 1988년 전 세계 신화와 전설의 백과사전(1988 Encyclopedia of World Mythology and Legend)에 의하면, 이집트에도 홍수 설화가 있었다. 이집트의 신인 템(Tem)은 “전 지구를 뒤덮었고, 템의 배에 탄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인류를 파괴했던 고대의 홍수를 일으켰다”고 기록되어있다.
▶ 창세기 10장의 민족들의 표는 세계 연대기에서 유일한 것으로, 주요 민족 그룹과 심지어 일부 국가의 기원이 노아의 가족에서 유래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참조 : 노아의 16명의 손자 : 고대의 지명과 민족들의 이름 속에 남아있다.
http://creation.kr/EvidenceofFlood/?idx=1288381&bmode=view
바빌로니아의 에누마 엘리쉬는 창세기를 지지한다.
조슈아 마크(Joshua Mark)가 고대사 백과사전(Ancient History Encyclopedia)에서 말했던 것처럼, 성경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는 학자들을 거꾸로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들은 바빌론의 창조 서사시인 에누마 엘리 쉬(Enuma Elish)가 창세기의 창조 기록의 원천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창세기를 불신시키는 일을 시도했다.
창세기 기록을 불신시키기 위해서, 성경 비판가들은 성경의 기록과 일치하는 다른 어떤 것을 제시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이 세속적 학자들이 행했던 일이다. 창세기가 진실이라면, 노아의 후손들은 전 지구적 홍수 이후 몇 세기까지 창조, 타락, 홍수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그들은 우상 숭배를 하며 하나님을 떠났고,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자신들의 창조 신화로 왜곡시켜버렸다.
신화적인 바빌로니아의 기록은 이 세계의 진실된 역사에 대한 사회적 기억이 점차 희미해짐에 따라 파생된 기록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세속적 학자들은 그들이 조소하는 원시 히브리인들의 우상은 빼고, 우상숭배의 핵심 기록을 도용했다. 이 사건을 통해 많은 주류학자들은 창세기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성경과 일치하는 방대한 증거들이 있음에도 그것을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에누마 엘리쉬의 근원 자료는 사실 모세의 신성한 영감을 통해 기록된 창세기의 창조와 홍수였다. RSR의 조사를 보라. (예를 들어 고대사 백과사전을 보라). 많은 비판 글들은 이러한 사실을 반박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심지어 그들은 그것을 확인하지도 않았다. 세속 학자들은 깊은 편견으로 인해, 창세기와 일치하는 발견들을 오히려 창세기를 신뢰할 수 없는 증거라고 왜곡시켜 버렸던 것이다.
*참조 : 고고학은 성경을 지지하는가? 1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57&bmode=view
[Originally published as part of RSR’s List of Evidence for the Global Flood]
출처 : Genesis Apologetics, 2019. 10. 3.
주소 : https://thecreationclub.com/a-firehose-of-evidence-pointing-to-the-worldwide-flood/
에덴동산은 어디에 있었나?
(Where was Eden?)
Lita Cosner and Robert Carter
“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 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티그리스, 히브리어: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히브리어: 프라트)더라”(창세기 2:10~14)
창세기 2장을 읽으면 마치 그것이 실제의 지리(geography)를 묘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늘날의 지구상에는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오늘날의 지형이 노아 시대의 전 지구적 홍수에 의해 완전히 재구성되었다면, 정확히 예상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에덴이 메소포타미아 어딘가에 있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들이 옳을 수 있을까?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창세기는 에덴이 현실 세계에 있었음을 가리킨다.
이 성경 구절을 취급하는 데에 여러 방법이 있다. 슬프게도 일부 성경주석가들은 창세기는 지구상에서의 위치를 알리려고 의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도상에서 에덴을 찾으려는 노력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창세기 2장에서 주어진 세부 사항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성전이나 다른 영적인 의미를 유추한다.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에덴의 위치를 찾으려는 시도는 북극에서 산타의 작업장을 찾으려는 시도와 같다는 것이다.
한편 많은 사람들은 에덴은 중동 지역에 있었고, 특히 메소포타미아의 남부 지역에, 어쩌면 고대 우르(Ur)나 수메르(Sumer) 근처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성경의 역사적 구절에서 ‘지구상이 아닌’ 지리를 제시했던 곳은 어디에도 없으며, 실제 지리적 설명 이외의 것을 나타내는 본문은 없다고 단언한다. 데렉 키드너(Derek Kidner)는 이렇게 주석한다 : “상당한 분량을 할애한 창세기 2장 10~14절은 그것이 우화적이거나 신화적인 장소가 아니라, 실제의 장소였음을 가리키고 있다.” 가능한 다른 위치들이 제안되었지만, 그것도 오늘날의 지리적 단서를 가지고 에덴을 ‘찾으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이 견해도 역시 오류가 있다.
이것을 생각하라 - 노아의 홍수는 전 지구적이었으며, 고도로 파괴적이었다. 막대한 양의 퇴적물이 전 대륙에 퇴적되었고, 후퇴기에 대륙에서 물이 빠져 나가는 동안 막대한 양의 침식이 일어났다. 또한 대륙판들이 이동했고, 산들은 융기되었고, 깊은 대양 분지들이 만들어졌다. 왜 현대의 지형에서 노아 홍수 이전의 지형을 발견할 것을 기대하는가?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모습의 고전 판화.
에덴동산은 오늘날의 지구상에서 찾을 수 없다.
위의 고찰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오늘날 지구상의 어떤 곳도 창세기가 제공하는 지리적 단서와 일치하지 않는다. 에덴으로 제안된 모든 위치에는 하나의 원천에서 유래하는 네 개의 강이 있어야 한다. 오늘날 하나의 호수 또는 샘에서 두 개의 강이 유래하는 사례가 한두 개가 있다. (예로 미국 옐로스톤 국립공원에 있는 이사호(Isa Lake)를 들 수 있다. 그 호수는 대륙이 나누어지는 곳에 위치하여, 한쪽 방향으로는 루이스(Lewis) 강을 형성하여 태평양 쪽으로 흐르고, 다른 방향으로는 파이어홀(Firehole) 강을 형성하여 멕시코만 쪽으로 흘러간다). 이것은 오늘날의 지형이 침식에 의해 형성됐기 때문에 그런 것이며, 침식으로 인한 지형이 하나의 원천에서 여러 개의 강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초기에는 그러한 시스템이 존재했다 할지라도, 어떤 배수 구역의 가장 낮은, 또는 가장 빠르게 침식되는 유출부가 강의 흐름을 지배하게 되고, 결국 강은 그쪽으로 흐르게 된다.
일반적인 견해와는 달리 창세기 2장의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은 오늘날 시리아와 이라크를 통과하여 흐르는 현대의 강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강들은 같은 원천을 공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날 그 두 강은 페르시아만에 도착하기 직전에 합쳐지지만, 역사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플리니(AD 23~79)는 알렉산더 대왕(356~323 BC) 시대에는 그 두 강이 하나의 호수로 흘러들어갔다고 주장했다. 덧붙여 말하자면, 메소포타미아의 저지대 지역은 대홍수 직후 대부분 물속에 있었을 것이고, 심지어 역사시대에서 조차도 해안선은 현저하게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퇴적물이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어귀에서 페르시아만으로 내보내짐에 따라 해안의 퇴적물은 끊임없이 추가되고 있다).
이름이 동일한 것은 어찌 된 일인가?
대홍수 이전과 이후의 세계 모두에서 랜드마크에 사용되는 이름들이 몇 개 있다. 예를 들어, 창세기 2장은 힛데겔 강이 앗수르의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다고 말한다. 다니엘 10:4절에서는 현대의 티그리스 강을 가리키는 데에 히브리 단어 힛데겔이 사용되었다. 노아 홍수 이후의 고대 도시 앗수르(Asshur, 여러 다른 이름을 가진 앗시리아 제국의 수도)는 티그리스/힛데겔의 서쪽 제방 상에 있었다.(그러므로 강은 그 동쪽에 있다). 따라서 대홍수 이전과 이후의 힛데겔 강은 앗수르라고 불리는 장소와 관련이 있다. 대홍수 이전과 이후 둘 다에 있어서 어떤 강과 어떤 지역이 약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에덴이 그 근처 어딘가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가? 육지 표면에 미친 대홍수의 영향을 무시하더라도, 더 많은 확인이 없는 한, 그럴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가진 전부이다. 에덴이 그 지역에 있었다면, 단지 한 두 가지가 아닌, 모든 지리적 세부 사항들이 일치해야만 한다.
창세기 2장의 유프라테스 강과 현대의 유프라테스 강에서 사용된 히브리 단어 프라트(P'rath)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약속된 땅의 동쪽 경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창세기 15:18). 그러나 창세기 2장에는 다른 지리적 자료 없이 그것이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이상하다. 왜냐하면 유프라테스 강은 오늘날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강이며, 역사적 성경적 서술(예를 들어 창세기 15:18, 창세기 31:21, 신명기 11:24, 여호수아 24:2, 사무엘하 8:3)에서 비중이 큰 강이었기 때문이다.
하윌라(Havilah)와 구스(Cush)는 대홍수 이전과 이후 둘 다에 언급되고 있는 지명이다. 이들 중복된 지명을 해석하는 데에는 다음의 세 가지 선택사항이 있다 :
1) 대홍수 이전과 대홍수 이후의 지역이 동일했기 때문이라는 견해이다. 루터, 칼빈, 기타 성경적 창조론자들이 이 견해를 가지고 있었지만, 현재의 지질학적 지식에 비추어 볼 때, 오늘날 실현 가능한 선택사항은 아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중동지역 지표면 밑에는 대홍수 동안에 퇴적된 평균적으로 수 킬로미터의 퇴적암이 쌓여 있다. 대홍수 이전과 대홍수 이후의 랜드마크를 동일시하는 것은 전 지구적 대홍수 동안의 파괴적인 지질학적 영향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견해이다.
2) 대홍수 이후의 장소가 대홍수 이전 장소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는 견해이다. 이것은 가장 일반적인 성경적 창조론자들의 설명이다. 이것이 힛데겔과 프라트와 같은 일부 랜드마크의 경우에 해당할 수 있을지 모른다. 예를 들어 대홍수 이후의 사람들이 홍수 이후의 장소를 홍수 이전의 지명으로 명명한 것이다. 그러나 재사용된 지명들 중 일부는 여러 장소에서 중복되어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지명을 재사용했다는 것은 완전한 설명이 될 수 없어 보인다.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또 다른 설명은 다음과 같다:
3) 대홍수 이전과 이후의 지명들은 어떤 인기 있고 특별했던 사람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는 견해이다. 창세기의 초기 장들에는 몇 개의 반복된 이름들이 들어 있다. 예를 들어, 에녹과 라멕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아담의 첫 아들인 가인의 후손 중에 있지만(창세기 4:17-18), 다른 에녹과 라멕이 아담의 세 번째 아들인 셋의 후손 중에도 있으며, 노아의 조상들 중에서 이들이 언급되고 있다(창세기 5:18-30). 이 기간 동안 등장하는 이름들의 수가 적다는 것을 고려할 때, 이것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사람들의 이름이 그러한 규모로 재사용될 수 있었다면, 분명히 일반적인 이름을 지명으로 재사용할 수 있었다고 상상하는 것은 그리 지나친 것이 아니다. 그래서 홍수 후에 하윌라(‘모래가 많은 장소’라는 뜻으로 번역될 수 있는)라고 불리는 장소는(창세기 25:18) 하윌라라는 이름을 가졌던 몇몇 대홍수 이후의 사람들(구스의 둘째 아들, 또는 욕단의 12번째 아들, 창세기 10:7, 29) 중 하나의 이름을 따서 명명됐을 수도 있다. 그리고 하윌라는 불리는 대홍수 이전의 장소(창세기 2:11)를 따서 이름을 붙였거나,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대홍수 이전 사람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을 수도 있었다.
창세기는 역사다!
결국 우리는 창세기에 등장하는 강들이 비록 현대의 강과 같은 이름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같은 강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두 세트의 이름 사이에 지리적 연관성을 기대할 이유는 없다. 이름들은 자주 재사용되고 있고, 대홍수가 지형을 대대적으로 변화시켰으므로, 대홍수 이전과 대홍수 이후의 지리 사이에 상관관계는 없어 보인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파고들 필요가 있다. 성경을 공부할 때, 우리는 그것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를 분별하기 위해서, 전체 본문을 주의 깊게 조사해야 한다. 세속주의자들과 타협주의 기독교 학자들(예를 들면 창세기 홍수가 지역적 홍수였다고 주장하며, 오래된 지구 연대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은 혼란을 야기했다. 그러나 에덴의 위치에 대한 창세기 기록은 우화나 신화이며, 우발적으로 관련 있어 보인다는 주장을 따라갈 필요는 없다. 그것은 우리가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는 주장인 것이다.
References and notes
1. This article is adapted from a much more in-depth technical study available at creation.com/eden-1 and creation.com/eden-2.
2. Kidner, D., Genesis, Tyndale Old Testament Commentaries, IVP Academic, Downers Grove, IL, p. 67, 2008.
3. Pliny, Natural History VI:XX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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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동산의 한 모델?
창세기 2장에서 가능한 모든 지리적 단서들을 뽑아내면, 에덴에 대한 대략적인 모델에 도달할 수 있다. 에덴에서 나오는 하나의 강이 4개의 강으로 나뉘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에덴이 주변 지역보다 더 높아야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훨씬 높았을 것이다. 이것에 대한 어원학적 증거가 있다. ‘비손(Pishon)’은 ‘거품이 나는(bubbling)’을 의미하고 ‘기혼(Gihon)’은 ‘터져 나옴(bursting forth)’을 의미한다.[1] 네 개의 모든 강들이 동일한 원천을 공유하기 때문에, 이것은 에덴 밖에서 흘러들어온 강을 묘사할 수는 없다. 그 묘사는 강들이 나누어져서 제각각의 길로 흘러나가는 강을 설명하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강들은 상당히 빠르게 흘렀으며, 이는 고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것을 나타낼 수 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언어 속에서 발견되는 단서는 흥미롭다.
에스겔 28장에는 동산 에덴에 대한 묘사가 나오는데, 그것을 ‘하나님의 산’이라고 여러 번 언급하고 있다. 또한 산의 위치는 지켜질 필요가 있었던 에덴으로의 길은 단지 한 입구만 있었다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창 3:24). 다른 모든 경로들은 지형의 급경사 때문에 통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에덴을 산과 연관 짓는 성경 이외의 또 다른 증거가 있다. 예를 들면, 일부 학자들은 가장 오래된 형태의 상형문자인 중국의 한자에 창조, 타락, 노아 홍수에 관한 창세기 내용이 반영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다음과 같은 일련의 기호를 생각해보라:
가장 오래된 중국어 글자에서 ‘정원’을 의미하는 여러 상형문자 중 이것은 그 안에 현저하게 눈에 띄는 산을 갖고 있다. (출처: Nelson, E.R., Broadberry, R.E., “창세기와 공자가 풀 수 없었던 미스터리(Genesis and the Mystery Confucius Couldn’t Solve)”, Concordia Publishing House, 1994.)
또한,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에서부터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중남미의 피라미드에 이르기까지, 초기 종교 건축물은 ‘산과 같은’ 모양을 갖고 있다. 신들이 높은 산과 관련되었다는 생각은 고대 문화에서 거의 보편적인데, 산은 거룩한 곳으로 간주되었고, 고대의 사람들은 예배 장소로써 인공 산을 건설하기까지 했다.
다음과 같은 지리적 요소를 갖고 있는 곳이 에덴일 가능성이 높다. 1)‘에덴’이라고 불리는 넓은 지역에 있는 정원, 2)상대적으로 높은 고도를 갖는 강의 원천(그것이 산일 수도 있지만 반드시 산은 아니어도 됨), 3)창세기 2~4장에서 전반적으로 암시하는 것에 근거한 가정으로서, 동쪽으로 진행(발달)하는 지형.
그러나 명백한 것은 이런 대략적 요소를 갖고 있는 에덴의 위치에 대한 오늘날의 후보지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평탄한 충적평야(alluvial plain)인 저지대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자격이 될 수 없어 보인다.
References and notes
1. Hughes, J.R., An examination of ‘Eden’s geography erodes flood geology’ CRSQ 34(3):154–161, 1997. See also creation.com/confucius-myst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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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A COSNER
Lita has a B.A. in Biblical Studies from Oklahoma Wesleyan University and an M.A. in New Testament from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 She is the full-time Information Officer for CMI-USA. For more: creation.com/cosner.
*ROBERT CARTER, B.S., Ph.D.
is a senior speaker/scientist for CMI-USA in Atlanta, Georgia. He has a Ph.D. in coral reef ecology with a speciality in genetics, and is currently researching human genetics and other issues related to biblical creation. For more: creation.com/carter.
*참조 : 노아 홍수 이전의 지명들이 이후에도 나타나는 것은 홍수가 전 지구적 파괴를 일으키지 않았음을 가리키는가?
https://creation.kr/Genesis/?idx=1289092&bmode=view
노아의 16명의 손자 : 고대의 지명과 민족들의 이름 속에 남아있다.
https://creation.kr/EvidenceofFlood/?idx=1288381&bmode=view
번역 : 이종헌
출처: Creation Magazine Vol. 41(2019), No. 2 pp. 36-39.
하나님이 모기를 만드신 이유는?
(Why Did God Make Mosquitos?)
by Brian Thomas, PH.D.
화창한 날에 나는 아내와 저녁 산책을 즐긴다. 불행하게도 모기도 좋은 날씨를 선호하는 것 같다. 그리고 모기들은 나보다 아내의 피가 달콤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다. 아내는 자주 손으로 모기들을 쫓으며, 왜 하나님이 모기를 만드셨는지 묻곤 한다. 나는 안쓰러운 마음에 그녀를 달래며 설명을 해주곤 한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최초의 모기는 피를 빨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입구조도 피를 빨 수 있도록 하여, 황열이나 말라리아와 같은 질병을 전파하도록 만드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창세기 1:31절에서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아내에게 모기에 물리는 것이 심히 좋은 일이냐고 물어본다면,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볼 것이 분명하다. 그것을 심히 좋은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검사를 받아보아야 할 것이다. 모기는 성가시고, 그들이 전파하는 질병은 치명적일 수 있다. 그래서 원래 “매우 좋았던” 곤충을 귀찮은 작은 뱀파이어로 바꾸었던 어떤 일이 일어났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썼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1] 모기는 피조물의 하나이다. 여자들은 출산의 고통을 겪는다. 내 아내는 자연분만으로 5명의 아기를 낳았다. 창세기 3장에 따르면, 출산의 고통은 죄에 대한 형벌이다. 하나님은 하와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2] 바울은 온 세상의 탄식, 수고, 고통을 여자의 해산에 비유하고 있다.
해산의 수고는 고통스럽고 측은하지만, 새로운 생명과 기쁨을 가져오는 것이다. 출산은 여자의 몸 전체를 고통스럽게 하지만, 더 나은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세상에서 순간의 신음은 하나님께서 리메이크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영원한 세상을 소망하게 한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3] 하나님은 완전하게 창조되었던 모기에게 다른 해충, 독물, 기생충...등과 마찬가지로 변형(쇠퇴)을 허락하셨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4] 이 현재의 저주받은 세계는 우리 크리스천들이 궁극적으로 거주할 처소가 아니다. 우리는 하늘에 있는 처소를 위해 일해야 한다.
그러면 모기들은 창세기 3장의 저주로 잘못되기 전까지 어떤 목적을 갖고 있었을까? 우리는 에덴동산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누구도 그것을 알 수 없다. 그러나 많은 모기 종들은 독특한 입 구조를 사용하여, 꽃이나 과일에서 꿀과 과즙을 채취한다. 약 3,500종의 모기 종들 중에서 단지 수백 종만이 사람의 피를 빤다. 아마도 그들 모두는 처음에 꿀을 먹었을 수 있다.
오늘날 모기는 질병을 옮기는 피조물이지만, 먹이사슬에서 중요한 연결 고리가 되고 있다. 모기의 유충은 흐린 물을 여과하고 깨끗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그들의 흔들거리는 몸체는 물고기, 올챙이, 잠자리 등의 먹이가 된다. 새, 박쥐, 거미는 성체 모기를 먹는다. 또한, 과즙을 먹는 모기 종들의 대부분은 식물을 수분시킨다.
그러나 안심하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5] 다음에 성가신 모기가 당신을 물었을 때,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를 기억하고, 새 땅에서는 당신을 무는 모기가 없을 것임을 기억하라. 만약 하나님이 새로운 땅에서도 모기가 있게 하신다면, 그것은 크리스천들에게 주님의 천재성을 상기시켜 줄 것이다. 그때에 즐거운 저녁 산책 중에 만나는 모기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References
1. Romans 8:22.
2. Genesis 3:16.
3. Isaiah 66:22.
4. Romans 8:19.
5. Isaiah 11:9.
6. 2 Peter 3:10.
* Dr. Thomas is Research Associate at the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and earned his Ph.D. in paleobiochemistry from the University of Liverpool. Cite this article: Brian Thomas, Ph.D. 2019. Why Did God Make Mosquitos?. Acts & Facts. 48 (10).
*참조 : 모기는 최근에 어떻게 사람의 피를 빨게 되었는가?
http://creation.kr/Genesis/?idx=1289136&bmode=view
모기의 매우 빠른 변화
http://creation.kr/NaturalSelection/?idx=1290257&bmode=view
1초에 800번 날갯짓을 하는 모기의 비행은 설계를 가리킨다.
http://creation.kr/animals/?idx=1291212&bmode=view
가장 오래된 결핵이라는 주장 : 결핵도 보시기에 심히 좋으셨던 창조의 한 부분인가?
http://creation.kr/BiblicalChronology/?idx=1289276&bmode=view
흑사병 : 살인자의 탄생 : 페스트 균도 하나님이 창조하셨는가?
http://creation.kr/Mutation/?idx=1289820&bmode=view
창조, 타락, 그리고 콜레라
http://creation.kr/Genesis/?idx=1289065&bmode=view
▶ 성경의 모순으로 주장되는 것들 - 흡혈
출처 : ICR, 2019. 9. 30.
주소 : https://www.icr.org/article/11542/
번역 : 미디어위원회
창세기는 실제 역사라고 히브리어 교수는 확언하고 있다.
: 조나단 사파티가 슈라더 박사를 인터뷰하다.
(Hebrew professor affirms Genesis as real history
Jonathan Sarfati chats with Dr Stephen Schrader)
Jonathan Sarfati 인터뷰
스테판 슈라더(Stephen R. Schrader) 박사는 1995년부터 미주리 주 스프링 필드에 있는 침례교 성경 대학원 대학교에서 구약학과 학과장 겸 히브리어 및 구약성경 교수로 재직했다. 이전에 그는 이 주제들을 성경적으로 건전한 다수의 주요 신학교에서 가르쳤었다. 그는 인디애나주 위노나 레이크에 있는 그레이스 신학대학원(Grace Theological Seminary)에서 구약학과 히브리어 전공으로 목회학 및 신학 석사를 취득했다. 그는 누지 풍속(Nuzi Customs)과 족장 이야기에 관한 논문으로, 같은 곳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슈라더 박사는 2008년 41세에 암으로 사망한 첫 아내에게서 세 명의 자녀와 10명의 손주들을 두고 있으며, 지금은 진(Jean)과 결혼하여 앨라배마에 살고 있다.
내가 슈라더 박사를 만난 것은 그분이 기꺼이 우리 교회에서의 대담에 참석해주셨기 때문이다. 그는 적어도 30년 동안 성경적(‘젊은 지구’) 창조론을 글로써 방어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를 물었다. 그는 미국(그의 경우 인디애나주 에반스빌)에 있는 많은 사람들처럼,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갔지만, 결코 복음을 들은 적이 없다고 설명했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절친한 친구가 그에게 성경 구절을 제시해 주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질 수 있는 소망과 준엄한 구절인 요한일서 5:12절이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그것에 대해 슈라더는 1960년에 이렇게 말했다 :
“나는 죄와 불신앙,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로부터 나의 구주가 되셔야하는 필요성을 고백했다. 즉시로 ‘빛이 다가왔고’ 나는 구원받은 이래로 그분을 위해 살고 그분의 말씀을 알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가지게 되었다. 시편 1:2절의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라는 말씀과 같이,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하는 것은 나에게 참으로 복이었다. 또한 마태복음 4:4절에는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구약성경에 대한 연구
슈라더 박사가 성경의 원어를 공부하기 원했을 때, 교회의 목사님은 그레이스 신학대학원에 입학하라고 권유했다. 그곳에서 그는 현대의 성경적 창조론 운동을 시작했던, 헨리 모리스 박사의 유명한 ‘창세기 대홍수(The Genesis Flood, 1961)’ 책의 공동 저자인 존 휘트콤(John C. Whitcomb, Jr.) 박사 밑에서 공부했다. 휘트콤 박사는 최근의 창조(젊은 지구), 타락, 전 지구적 홍수에 관해 철저히 가르쳤다.
이 신학대학원은 고대 근동의 고고학과 언어학을 전문으로 연구하는데, 특히 원전(hapax legomena)에서 단 한 번만 나타나는 단어에 대한 연구를 전문으로 한다. 슈라더 박사는 이렇게 지적한다. “구약성경 39권의 책은 신약성경의 본문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기 때문에, 그것을 습득하는 것이 중요하다.”
히브리인들은 창세기 1~11장을 무엇으로 가르치는가?
슈라더 박사는 히브리인 학자이기 때문에, 나는 창세기의 장르에 대한 그의 생각을 물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
저는 창조 기사가 문학적 표현이 아니라, 진정한 역사적 서술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시적인(poetic) 글들은 대구법(parallelism)을 보여주는 반면에, 창세기는 그것이 역사적 서술로 쓰여졌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는, ‘와우 연결법(waw consecutive)’이라고 불리는 특정한 동사 형태로 가득하다. 흥미로운 점은 창세기 1:1~2:3절에서 불과 34개의 절에서 와우 연결법이 55번이나 나타난다는 것이다. 창세기의 역사 기술에 대한 서언인 창세기 1:1~2:3절에서 이러한 동사 형태를 사용한다는 것은 창세기의 나머지 부분에서 발견되는 서술 자료와 부합하고, 동일하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날(day)’의 의미가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슈라더 박사는 먼저 성경을 성경과 비교한다 :
이 패턴은 출애굽기 20:11절에서 하나님의 증언에서도 드러난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더 나아가 그는 창세기 1장은 그것 없이도 충분히 분명하다고 지적한다 :
창세기 1:1-2:3절에서 욤(Yôm, day)은 숫자로 수식되어 있으므로, 각각의 날은 문자적인 날이 되어야 한다. 모세가 “한 날(day one)”(5절), “둘째 날(second day)”(8절) 등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구약에서 욤이라는 단어가 숫자 수식어와 함께 등장할 때는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
그리고 첫째~여섯째 날이 끝나고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구절이 등장하여 각각의 연속 된 날들을 서로 연결시켜주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6일 간의 창조 사역을 끝내시고, 일곱 번째 날에 쉬셨을 때, 7일의 끝에는 그것이 반복되지 않는다. 그것은 인류에게 하나의 패턴을 설정해준다.
그러나 창세기 2:4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in the day)”에서는 어떠한가? 슈라더 박사는 또 다른 구문론적 구조인 날에(beyôm or “in the day”)는, 창조의 전체 주간을 요약하는 형식으로 나타내는 ‘때에(when)’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창세기 1장에서 사용됐던 욤은 단수명사로 사용됐을 때는, 항상 보통의 문자적인 날을 가리킨다.”
창세기 1~11장이 중요한 이유는?
회의론자들은 종종 창조, 타락, 노아 홍수, 바벨에서의 언어 혼돈에 대한 창세기 1~11장의 내용을 조롱한다. 그리고 교회 내부의 일부 사람들은 이 내용들은 부수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창세기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중요하다. 슈라더 박사는 다음과 같이 상술한다 :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은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주권자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문자적으로 연속적인 24시간의 6일 동안에 이 세계를 창조하셨다고 말씀한다. 그리고 그 말씀은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된다고 요한은 밝히고 있다.(요한복음 1:1~3) 그때 어떤 인간도 존재하지 않았다(참조, 욥기 38:4).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그분의 기록된 말씀을 이 세상을 창조할 때 그분의 경이로움과 관련하여 받아들여야만 한다. 인간은 진화된 존재가 아니라, 창조주간 여섯째 날에 하나님에 의해서 초자연적으로 직접 창조되었다.
창세기는 진화론의 개념을 반박하고, 지구는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창조물이며, 사람은 수백만 년의 진화의 결과가 아니라고 말한다. 창세기는 또한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지으신 그 모든 것들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한다. 역사적으로 이 시점까지 육체적 죽음도 영적 죽음도 없었다.
그런데 사람의 죄가 없는 상태를 파괴하려는 사탄의 유혹이 있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그것을 먹었다. 창세기 3:8~19절에는 하나님이 아담(3:9~12)과 하와(3:13)에게 심문하고, 하와(3:14~15)와 아담(3:17~19)에게 판결을 내리기 전에, 먼저 사탄(3:14~15)을 판결하는 문자적인 판결이 나온다.
사실,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5:21~22,45절에서 말한 것처럼 죽음과 고통의 근원이었다. 성경과 수억 수천만 년을 연결시키려는 모든 타협적 견해들은 아담의 범죄 이전에 사람과 동물들의 죽음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창세기 6~9장에서 하나님은 전 지구적 대홍수로 온 세상을 멸망시키셨다. 그러므로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주장하듯이(베드로후서 3:4~7), 만물이 (“창조의 시작부터”) 항상 동일하지 않다. 만물은 창세기 8:21~22절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노아 홍수가 끝난 이후에만 동일하다.
슈라더 박사는 하나님께서 심판을 선언하셨을 때조차도, 구속자를 약속하셨다는 것을 지적한다.
창세기 3:15절에서 하나님은 여자인 하와의 후손에서 예수 그리스도, 즉 메시야에 대한 약속을 주셨는데, 그분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사탄을 멸망시키실 것이었다.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대조가 고린도전서 15:45~49절에 나와 있는데, 이는 그 기원을 “땅에” 두는 것과 “하늘에” 두는 것의 대조를 말한다.
그에 앞서 바울은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육체적으로 죽으시기 위해 오셨고, 죽음에서 육체적으로 일어나신 모든 이유는, 우리의 조상 아담이 범죄하여 세상에 육체적인 죽음을 가져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고린도전서 15:21~22). 오래된 연대를 믿는 사람들의 관점은 아담의 죄가 있기 전에, 인간과 동물의 육체적인 죽음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죽음이 죄와 관련이 없다면, 예수님의 죽음이 어떻게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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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and notes
1. Archer, G.L., Survey of Old Testament Introduction, p. 176, Revised Paperback Edn, Moody Press, Chicago, 1985.
2. Selman, M.J., The Social Environment of the Patriarchs, Tyndale Bulletin 27:114–136, 1976; Comparative Customs and the Patriarchal Age, in: Millard, A.R. and Wiseman, D.J., Essays on the Patriarchal Narratives, pp. 93–138, IVP, Leicester, 1980.
*JONATHAN SARFATI, B.Sc.(Hons.), Ph.D., F.M.
Dr Sarfati’s Ph.D. in physical chemistry is from Victoria University, Wellington, NZ. He is the author of some of the world’s best-known creation books. A former NZ chess champion, he works for Creation Ministries International (in Australia 1996–2010, thereafter in Atlanta, USA). For more: creation.com/sarfati.
출처 : Creation Magazine Vol. 39(2017), No. 4 pp. 38-40
주소 : https://creation.com/schrader-hebrew-professor
번역 : 이종헌
창세기에 간격이 있는가?
: 간격이론(Gap Theory)이란 무엇인가?
(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Russell Grigg
창세기 1장의 1절과 2절 사이에 수십억 년의 ‘간격(공백, gap)‘이 존재하는가? 그래서 진화론적 지질학자들이 주장하듯이 거기에 기독교인들이 장구한 시대를 편리하게 삽입할 수 있는가? [1, 2]
실제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1. 모세는 무엇을 전달하려 했는가?
창세기 1장에 대한 가장 분명하고 직접적인 해석은, 그것이 초지혜자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어떤 신비적인 메시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모세(혹은 그의 선조들)에게 계시하신 것들을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모세가 문자적이고 역사적으로 기록한 것(a literal historic account)으로, 이는 다른 확실한 반증이 없다면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만약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1절과 2절 사이에 수십억 년의 간격이 있어서, 그 기간 동안에 사탄, 죄, 심판, 형벌, 재창조(부록의 ‘간격이론‘을 보라) 등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이해시키려 했다면, 그에 관련된 사항들 중에 최소한 일부라도 하나님이 저자에게 알려주셨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뿐만 아니라, 성경의 다른 어떤 곳에서도 그것들을 발견할 수 없다. [3]
사실상, 정통파 유대인들과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항상 창세기 1장을 문자적인 역사(literal history)로 읽어왔다. 유신진화론적 지질학자(theistic evolutionist geologist)인 데이비스 영(Davis Young) 교수는 다음과 같이 인정했다.
”창세기 1장을 엄격히 문자적으로 해석하려는 것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종종 있기는 했지만, 18세기까지 기독교계에서 거의 대부분의 보편적인 견해는 지구의 나이가 수천 년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지구에 대한 현대 과학적 탐구가 이루어지고 나서야, 이런 관점이 교회 내에서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4]
2. 성경의 다른 부분들은 간격이론(Gap theory)에 대한 조종을 울리고 있다.
• 창세기 1:31은 이렇게 말씀한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very good)” (이 심히 좋았더라의 히브리 단어 ‘meod tov’ 는 완전하고, 어떠한 종류의 악도 전혀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것은 칼빈(Calvin)과 많은 다른 주석가들이 지적해왔던 것이다).
만약 사탄이 이미 반역을 해버렸다면, 이것은 정확한 표현이 될 수 없다! 또한 만약, 아담 이전에 인간종족들을 모두 멸망시키고 동물계 전체의 멸종을 일으킨 ‘루시퍼-홍수‘들이 있어서, 질병, 폭력, 죽음, 부패의 흔적을 가진 수십억의 화석들이 만들어졌다면,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그러한 화석들이 묻혀 있는 땅 위를 걷고 있었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을까? [5] (그들의 기념비적인 구약 주석에 의하면, Keil과 Delitzsch는 창세기 1:31절의 ‘심히 좋았더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모든 것은 그 종류대로 완벽했다..... 하나님의 창조에서 어떠한 악의 존재도 절대적으로 배제된다. 그것은 6일 창조를 부정하고 족쇄를 채우려는 반하나님적 악한 가설을 기각하고 있는 것이다.”)
• 창세기 6-9장은 전 지구적 홍수를 묘사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노아의 방주에 타지 않았던, 코로 호흡하는 모든 육상동물들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간격이론가들은 화석이 ‘루시퍼의 홍수‘로 인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노아의 홍수는 실질적으로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거나, 아니면 단지 지역적인 홍수라고 결론을 내리려 한다. 분명히 화석의 원천에 대한 보다 나은 설명은, 성경이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은 가상적인 홍수보다, 성경에서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노아 홍수에 있다!
• 출애굽기 20:11은 이렇게 말씀한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 이것은 창세기 이외의 곳에서 창조의 시간 틀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결정적인 구절이다. 이 구절은 하나님이 6일 안에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고 단언적으로 말씀하고 있다. 간격은 전혀 허용되지 않고 있다. [6]
• 로마서 5:12은 이렇게 말씀한다. ”이러므로 한 사람(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아담은 여섯째 날에 창조되었는데, 고전적인 간격이론은 첫째 날 이전의 간격 동안에 죽음이 있었다고 말한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그렇지 않다! 이 구절은 아담의 죄 때문에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다고 평범하게 말한다. 이 구절을 인간의 죽음만으로 제한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오히려, 로마서 8:20에서는 모든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아담이 죄를 저지르기 이전에는 (증거 없이 주장된 ‘루시퍼의 홍수‘에서 죽은 화석과 같이) 세상에 죽음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간격이론가들은 로마서 5:12과 창세기 3:3이 영적인 죽음만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아담은 육체적으로 죽어가기 시작했고(히브리어: ‘장차 죽는 죽음‘, 즉, 죽음의 과정이 시작되었다. 창세기 3:19은 창세기 5:5에서 완성되었다.), 또한 영적으로 죽었다.[7]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하여 육체적인 죽음과 영적인 죽음을 모두 겪으셨다(마태복음 27:46). 또한 고린도전서 15:21-22을 보라.
간격을 찬성하는 것으로 주장되는 성경적 증거들
간격이론가들은 소수의 히브리 단어들에 대한 수정론자의 번역(revisionist translations)에 심하게 의존하고 있다.
1. 히브리 단어 빠라(bara, '무로부터 창조하다‘)와 아싸(assa, '만들다‘). 창세기 1:1은 빠라를 사용하고 출애굽기 20:11은 아싸를 사용한다. 간격이론가들은, 빠라와 아싸를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출애굽기 20:11은 멸망한 세상의 재창조와 재형성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답: 창세기 1장에서 히브리 단어 빠라가 세 번 사용되었는데, 그때마다 완전히 새로운 실체 - 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의 창조를 나타낸다.
창세기 1:1에서 빠라는 하늘과 땅의 창조에 대해 사용되었다.
창세기 1:21에서 빠라는 최초의 정신을 가진 동물(또는 네페쉬) 생명의 창조에 대해 사용되었다.
창세기 1:27에서 빠라는 최초의 사람, 즉,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든 인간 생명의 창조에 대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창세기 1:26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아싸]”, 반면에 바로 다음 구절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빠라]”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빠라와 아싸를 둘 다 사용하여 같은 사건을 설명하고 있으므로, 그 동사들은 분명히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더군다나, 창세기 2:4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아싸] 때에 천지의 창조된 [빠라] 대략이 이러하니라”. 여기서 빠라와 아싸가 동의어를 의미하는 병행구로 함께 사용되었다. 이것은 또 다시 모세가 그 단어들을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했음을 나타낸다.
간혹 아싸는 간격이론가들의 반하는 주장에도 (예로 느헤미야 9:6) 불구하고, 무에서부터(ex nihilo, out of nothing)의 창조를 의미할 때 사용된다. 하나님은 홀로 주님이시다. 하나님은 하늘과 가장 높은 하늘까지 만드셨고(아싸), 그리고 별들의 주인이시며, 땅과 그 위에 모든 것들을 만드셨으며, 바다와 그 안에 모든 것들을 만드셨다. 하나님은 모두에게 생명을 주셨고, 하늘의 하늘들이 경배하고 있는 것이다.
2. ”'와우(waw)’는 히브리어 문자의 이름인데 접속사로 사용된다. 그것은, '그리고(and)', '그러나(but)', '이제(now)', '그리고 나서(then)' 등의 의미로 사용되며, 와우가 포함된 형태와 문맥에 따라 기타 몇 가지 다른 의미로도 사용된다.” [8] 이것은 창세기 1:2절의 앞부분에 있는데, KJV에서는 ”그리고(and, 와우) 땅은 형체가 없고 비어있었다”로 번역되었다.
간격이론가들은 이 번역을 간격이론을 지지하는데 이용한다. 그러나 원전을 가장 직설적으로 읽으면, 창세기 1장 1절은 주어 + 동사의 주절로 되어 있고, 2절은 3개의 종속절로 되어 있다. "이것은 히브리어 문법학자인 게세니우스(Gesenius)가 '와우 설명(wawexplicativum)' 혹은 설명적인 와우 라고 이름 붙인 것으로서, 영어의 '즉(to wit)'에 비견된다." [9] 그러한 와우 접속사는 비동사(non-verb)에 의해서 뒤따라지는 와우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히브리어에서 쉽게 말해진다. 그것은 삽입어구적 문장(parenthetic statement)을 소개하고 있다. 즉, 그것은 이를테면 이전 명사에 관한 서술적 어구임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독자들에게 다음 어구를 괄호에 놓도록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연속적인 시간이 흘러 뒤따르는 어떤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이것은 와우 연결(waw consecutive)이라고 불리는 다른 히브리어 구조에 의해서 암시될 수 있는데, 여기서 와우는 동사에 의해서 뒤따라진다. (와우 연결은 사실 창조의 다른 날들 이전에 사용되었다. Creation at the academy (Dr Doug Kelly interview을 보라). 따라서 2절을 보다 낫게 번역하면, ”그런데 땅은(Now the earth) …”이 될 것이며, 의역을 하면, ”그런데 땅에 대해서 말하자면…”으로 할 수 있다. [10] 그것은 창세기의 저자가 (하나님의 지시 하에) 그러한 결합적인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의도적으로 두 구절 사이에 중단이 없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3. 창세기 1:2의 ‘was‘(히, '하야')를 간격이론가들은 ‘became‘으로 번역하여, ”그리고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게 되었다(became [or had become])”로 쓰고 있다. 간격이론가 쿠스탄스(A. C. Custance)는 그의 책 ‘혼돈하고 공허하며 (Without Form and Void)’‘에서 거의 5분의 4를 13개의 부록을 포함하여 이 번역, 특히 과거완료 시제인 ‘되었다(had become)’를 옹호하는 데 할애했다. 그러나 저명한 문법학자들과, 사전편찬자 및 언어학자들은 거의 한결같이 ‘되었다(became)’나 ‘되어왔었다(had become)’로 번역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11] 스트롱의 색인(Strong’s Concordance)에 하야(haya,)의 의미 중 하나로 ‘되었다(became)‘가 있는 것 때문에, 창세기 1:2절의 특별한 문장을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의 기본적인 주석 오류이다. 동사 하야가 접속사 와우와 결합되는 것은 단순하게 문법적으로도 불가능하다. 구약성서의 나머지 부분들에서 ’Waw + 명사 + haya‘ 는 항상 ‘was’ or ‘came’으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결코 ‘became’은 아니었다.
4. 창세기 1:2에서 히브리어 단어 토후와 보후는 ‘혼돈하고(형체가 없고)‘와 ‘공허하며(비어 있는)‘으로 번역되었는데, 간격이론가들은 이것이 지어져가는 과정 중에 있는 무엇인가가 아니라, 심판에 의한 멸망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12] 그러나 토후는 성경에서 여러 번 나타나는데, 그것은 도덕적으로 중립의 상태에 대해 사용하며, 무언가 덜 끝나서 혼란스러운 것을 나타내지만, 그것이 반드시 악은 아니다! [13] 수세기 동안 히브리어 학자들과 교회에서는 창세기 1:2절이 천사의 타락에 의해 야기된 악의 상태나 심판의 장면이 아니라, 아직 개발되지 않은 원형의 우주 상태를 설명하는 것이라는 관점을 취해왔다. 모세가 말한 평범하고도 단순한 의미는 첫째 날에 물로 덮인 큰 덩어리가 있었는데, 그 상태는 마른 땅이 없었으며(토후 = ‘아직 형성되지 않은‘), 아직 거주자가 없었다(보후 = ‘아직 채워지지 않은‘)는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간격이론을 가르치기 위해서 예레미아 4:23절의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들을 우러른즉 거기 빛이 없으며”을 오용하고 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는 심판의 결과를 묘사하는 ‘tohu va bohu’ 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쿠스탄스(Arthur Custance)와 같은 선도적인 간격이론가들은 '혼돈하고 공허하며(tohu va bohu, without form and void)‘라는 어구가 ”심판에 의해 황폐하게 되었다(laid waste by a judgment)"를 의미하고 있음이 틀림없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이 사실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것은 오류이다. 히브리어 단어에서 tohu VA bohu 자체가 그것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없다. 그들이 ‘황폐하게 되었다(laid waste)’와 관련짓는 유일한 이유는 그 단어가 발견된 문장에 기인한 것이다. 그 단어는 단순히 ”unformed and unfilled"를 의미한다. 이 언급은 창조되는 것, 또는 창조된 것이 제거되는 것에 기인될 수 없다. 예레미아 4장의 문장은 창조가 아니라, 예루살렘에 대한 바벨론의 약탈에 관한 예언이다. 사실, 예레미아 4:23절은 심판이 너무도 중하여, 마지막 상태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시기 이전의 공허했던 것처럼 될 것이라는, 창세기 1:2절에 대한 하나의 문학적 암시로서 알려져 있다. 예레미아 4:23은 하나의 심판으로서 창세기 1:2절을 해석하는 데에 사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의 암시는 오직 일방향이기 때문에, 그것은 완전히 앞뒤가 뒤바뀌게 되는 것이다.
유사한 예를 들어보자. 컴퓨터에서 ‘아래 한글’을 열면, 문서창은 ‘공백(blank)’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내가 어떤 문서를 불러냈다가 전체 문서를 ‘삭제(delete)’ 하였다면, 문서창 역시 공백으로 될 것이다. 그래서 공백은 어떠한 글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문서는 내가 전혀 글을 타자치지 않아서 없고, 다른 문서는 있던 글을 삭제하여 없게 되었다면, 당신은 공백(blank) 이라는 단어 자체로부터 문서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쿠스탄스와 같은 유형의 해석에 의하면, ‘공백’은 모든 글들이 삭제되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된 스크린의 모습이라고 결론질 수 있다. 그래서 ‘공백’이라는 단어는 아무 것도 없었던 상태가 아니라, 모든 문서들을 삭제해버린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5. 창세기 1:28의 KJV 번역인 영어 단어 ‘replenish(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replenish) 땅을 정복하라)’는 간격이론가들이 주장하듯이 간격이론을 지지하지 않는다. 언어학자인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611년 판에 번역되어 있는 'replenish”는 '채우다(fill)”와 동의어이며, 접두사 ”re-”는 ”다시”가 아니라 ”완전히”를 의미한다.”[14] 동일한 히브리 단어 마레(male)가 창세기 1:22에서 사용되었는데, 거기서는 ‘바다를 채우
라(fill)‘로 번역되어 있다. 따라서 이것을 28절에서는 다르게 번역할 필요가 없다. (What does replenish the earth mean?을 보라)
6. 흑암. ‘하나님은 빛(God is light)’ 이시 때문에(요한일서 1:5), 그리고 성경에서 ‘흑암(darkness)‘은 때때로 사악한 자에 대한 심판(출애굽기 10:21, 이사야 13:10, 요엘 2:31, 마태복음 27:45, 등)에 대한 은유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일부(전부는 아님) 간격이론가들은 창세기 1:2절이 악의 상태를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논리상의 실수이다. ”상징은 상징화된 것에 의해 혼동되었으며, 급기야는 바로 그 상징 자체가 지금은 악으로 간주되고 있다!” [15]
아직 빛이 창조되지 않았기 때문에 땅은 흑암일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고 하신 창세기 1:3절 말씀은 사실상 그 자체로도 간격이론을 충분히 반박할 수 있다. 새로운 간격이론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태초에‘ (창세기 1:1) 태양과 달과 별들이 모두 창조되었다면, 주장되는 1절과 2절 사이의 간격 이후에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실(3절) 필요가 왜 있었겠는가?
기타 문제들
1. 매우 많은 동물 화석들이 오늘날 살아있는 동물들의 모습과 사실상 동일하다. 전통적인 간격이론가들은 오늘날의 동물들이 과거에 존재했던 동물들의 직접적인 후손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왜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동일한 모습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
2. 간격이론가들은 마가복음 10:6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간과했다. ”창조 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But 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God made them male and female)”. 주님 자신은 분명히 창세기 1:1과 아담과 하와의 창조 사이에 어떤 의미 있는 간격을 염두에 두지 않으셨다.
3. 젊은 지구를 가리키는 수많은 우수한 과학적 증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16] (See Q&A: Young world evidence)
4. 간격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전체 개념은 ”뒤바뀌어진” 사고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성경을 기준으로 하여 사람의 견해를 살펴보려는 것이 아니라, 인본주의적인 진화론적 견해를 기준하여 성경을 해석하려고 하는 시도의 산물인 것이다.
결론
비록 간격이론이 그 선전자들에 의해 잘 정립되어 있기는 하지만, 언어학적, 성경적, 이론적, 또는 실제적 어떤 자료에 근거해서도 인증된 바 없다. 아담이 죄를 짓기 이전에 죽음이 있었다는 것을 옹호하는 것은 아담의 죄(Adam’s sin)로 인하여 죽음(death)이 들어왔다는 성경의 기록과 위배된다. 바로 그 아담의 죄 때문에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상에서 죽으셨으며, 부활하시는 일이 필요했던 것이다.
References and notes
1. Proposed by Thomas Chalmers (1780–1847), founder of the Free Church of Scotland, the idea of a gap was ‘canonized’ for some Christians when C.I. Scofield included it in the footnotes of the Scofield Reference Bible in 1909.
2. The most academic presentation of the gap theory is to be found in Without Form and Void by Arthur C. Custance, Doorway Publications, Brookfield, Canada, 1970.
3. The two Bible passages that are usually invoked about the ‘fall’ of Satan are Isaiah 14:12–15 and Ezekiel 28:13–17. Both of these passages are in the context of prophecies about earthly kings (of Babylon and Tyre), and no explicit reference is made to Satan. However, even if these verses are so taken, there is no indication that any of the events described took place before Genesis 1:2.
4. Davis A. Young, Christianity and the Age of the Earth, Zondervan, Michigan, p. 25, 1982.
5. In other words, if Isaiah 14:12–15 and Ezekiel 28:13–17 do refer to the ‘fall’ of Satan (which certainly is not proven), this more consistently fits after Day Six of Creation Week, and not between verses 1 and 2 of Genesis 1. For further discussion, see my article, Who was the serpent?, Creation 13(4):36–38.
6. For further discussion see Weston W. Fields, Unformed and Unfilled, Burgener Enterprises, Collinsville, Illinois, p. 58, 1976.
7. In the Bible, spiritual death has the meaning of separation from God rather than of annihilation.
8. F. Brown, S.R. Driver, and C.A. Briggs, A Hebrew and English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Oxford, pp. 251–255, 1968, cited from Ref. 6, p. 81.
9. Kautzsch and Cowley, Gesenius’ Hebrew Grammar, p. 484, section 154a, footnote 1, cited from Ref. 6, p. 82.
10. For a more detailed explanation, see Ref. 6, pp. 81–86.
11. For a more detailed explanation see Ref. 6, pp. 87–112.
12. Ref. 2, p. 168.
13. Ref. 6, p. 129, which summarizes Fields’ arguments on pp. 113–130. Gappists sometimes claim that the two words are only used together (tohu wa bohu) in other parts of the Bible where judgment is in view; however, there is nothing in the context of Genesis, (which there is in these other references) which would independently suggest judgment.
14. Charles Taylor, The First 100 Words, The Good Book Co., Gosford, New South Wales, Australia, p. 74, 1996.
15. Ref. 6, p. 132.
16. See John D. Morris, The Young Earth, Master Books, Colorado Springs, 1994; as well as Dr. Russell Humphreys’ summary, Evidence for a young world, Creation 13(3):28–31, also available as a reprint from the UK, USA, NZ and Australian bookstores.
부록 1 : 간격이론(Gap Theory)이란 무엇인가?
간격이론은 일부 기독교 신학자들이 창세기를 우주가 대단히 오래 되었다는 통속적인 오래된 연대 개념과 맞추기 위한 타협적 시도이다. 간격이론가들은 문자적인 창세기를 믿지만, 지구에 대해 (막연히) 대단히 오래된 시대를 수용한다. 이런 견해와 일치시키기 위하여 그들은 창세기 1장의 1절과 2절 사이에 장구한 지질학적 시대를 끼워 넣는다. 하지만 그들은 진화론을 반대한다.
결정적인 반-간격(anti-gap) 이론 책인 '혼돈하지 않고 충만하지 않은(Unformed and Unfilled)'의 저자 웨스턴 필드(Weston W. Fields)에 따르면,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간격이론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고 하였다 :
”시기를 알 수 없는 아주 먼 과거에 하나님은 완전한 하늘과 완전한 땅을 창조하셨다. 사탄은 혼이 없는 인종이 살고 있는 땅의 통치자였다. 광물질로 이루어진 에덴동산에 살고 있던 사탄은(에스겔 28장) 마침내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여(이사야 14장) 반란을 일으켰다. 사탄의 타락으로 인하여 우주에 죄가 들어왔으며, 지구에는 홍수의 형태로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왔고 (1:2의 물이 그것을 나타낸다), 그로 인하여 태양으로부터 빛과 열이 차단됨으로써 전 지구적인 빙하시대가 왔다. 오늘날 지구에서 보는 식물, 동물, 사람들의 모든 화석들은 이 '루시퍼의 홍수'에서 비롯된 것이며, 오늘날 지구상에 살고 있는 식물, 동물, 사람들과 어떠한 유전적인 관계도 지니고 있지 않다 …” (참고문헌 6, p.7).
오늘날의 생물들은 6일 동안의 재창조(recreation)에 의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멸망도 없었고(no ruin), 복구도 없었다(no reconstruction)는 새로운 형태의 간격이론이 등장했음을 주목하라. 이 이론의 제안자들은 단지 장구한 시간의 간격만을 가정하며, 오래된 우주, 오래된 지구, 또는 둘 다를 이야기 한다.
부록 2 : 천사를 어디에 끼워 넣어야 하는가?
출애굽기 20:11은 하나님이 천지의 모든 만물을 6일 동안에 만드셨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천사들과, 원래는 선하게 혹은 거룩하게 창조된 모든 존재들이 포함되어야만 한다 (골로새서 1:16, 유다서 1:6절).
욥기 38:4, 7에서는 하나님이 땅의 기초를 놓을 때, 즉 창조의 첫째 날(창세기 1:1)에 땅을 창조하셨고, 아직 그분이 빛을 창조하시기 이전에 천사들(‘하나님의 아들들‘)이 있었다고 제시한다. 천사들은 영적인 존재로서, 인간처럼 망막이 있는 눈을 가진 것이 아니므로, 아마도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어둠 속에서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존재들이 언제 반역하여 사탄과 그의 악마 추종자들이 떠났는가의 문제가 등장한다 (베드로후서 2:4, 유다서 1:6절). 이 반역사건은 창조의 마지막 6일에 하나님이 모든 것을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고 선언하시기 이전에는 분명히 불가능하다 (창세기 1:31). 어떤 간격이론가들은 창조의 6일 이후와 창세기 3장의 사건 이전에는 이런 반역이 일어날 만한 시간이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얼마나 긴 시간이었는가?
우리는 창조의 6일(혹은 제 7일?) 이후에 하와의 유혹이 일어나기까지(창세기 3장) 얼마의 시간이 걸렸는지 모른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가인이 죄성을 가지고 태어났으므로, 그의 부모가 타락한 이후에 그를 임신했어야 했기 때문에, 그것은 하와가 임신하게 되기(창세기 4:1) 이전이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창조의 6일과 (인간의) 타락 사이에 일주일밖에 없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것은 충분한 시간인가? 다음을 생각하자:
1. 천사들은 영적인 영역/차원에 산다. 우리는 이것이 우리 자신의 공간/물질/시간의 연속체와 어떻게 연관되는지 모른다. 아인슈타인 이후로, 우리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으며, 예를 들면 중력 같은 것에 영향을 받으므로, 영적인 차원에서 시간은 (시간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우리가 아는 차원에서의 시간과 같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2. 위의 사항이 적용되지 않더라도, 한 주일의 시간도 충분할 시간일 수 있다. 그러나 창세기 1:2 이전에 간격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시간은 충분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인간적인 수준의 사고를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초인간적인 지능을 가진(전지하지는 않지만) 천사들은 분명히 사람들과 유사한 한계로 제한받지 않을 것이다.
3. 심지어 우리 사람들의 경우를 생각해 보더라도, 어떤 상황에 접근하여 만족할만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데 하루 혹은 한 시간으로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사람들을 선동하여 반역에 참가하게 하는데, 왜 꼭 오랜 시간이 필요한가? 평범한 시민들이 주먹질하고 폭도로 변하는 것은 수 시간 혹은 하루나 이틀의 선동만으로 충분하다. 참고로, 예수님의 재판에서 예루살렘의 군중들을 보라. 뒤이어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죄를 지은 천사들이 쫓겨나는 것도 그 이후의 매우 짧은 시간 내에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 몇 분 이내도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사들이 반역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창세기 1장의 1절과 2절 사이에 ‘간격‘이 있어야 함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그러한 관념은 창조의 6일 마지막에 모든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신 것과 상충된다.
*참조 : The gap theory—an idea with holes?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1294/
Morning has broken … but when?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386/
Unbinding the rules (critique of John Sailhamer’s sophistic version of the gap theory)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1659/
What about the ‘gap’ and ‘ruin-reconstruction’ theories?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cabook/chapter3.pdf
‘Soft’ gap sophistry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553/
God of the Gaps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4/n1/god-of-gaps
The meaning of yôm in Genesis 1:1–2:4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1_2/j21_2_52-55.pdf
Days 1–4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1_3/j21_3_69-76.pdf
The Genesis 5 and 11 fluidity question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754
The days of creation: A semantic approach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100/
Who Begat Whom? : Closing the Gap in Genesis Genealogies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1/n2/who-begat-whom
Gap theory revisited
http://creation.com/gap-theory-revisited
Creation compromises—Gap Theory
http://creation.com/creation-compromises#gap
번역 - 이종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19/i2/beginning.asp
출처 - Creation 19(2):35–38, March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