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동물원은 사람을 전시하였다.
(Do You Belong in the Zoo?)
David F. Coppedge
런던동물원에서 관람객들은 한쪽 우리에 갇혀서 전시되고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영장류 중의 하나를 전시하기 위해서, 몸의 중요 부위만을 살짝 가린 8명의 백인들이 우리 안에 전시되고 있다고 언론 매체들은 보도했다 (NBC News, CBC News(2005. 8. 26)을 보라). 수영복 위에 무화과 나뭇잎으로 옷을 입은 그들은 서로 놀고, 긁어주며, 단장시켜주고, 관람객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준다. 이러한 전시 의도는 사람은 특별하지 않으며, 단지 동물과 같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영장류 우리에 있는 원숭이나 침팬지와 같지 않게 우리 안에 있던 사람들은 밤에는 집으로 퇴근한다.
이러한 이목을 끄는 행사는 동물원을 결코 방문하지 않았던 관람객들을 끌어 모으기 위한 것이다. 일부 관람객들은 사람들이 옷을 입고 있는 것에 대해 실망한다. 전시가 전해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잘 모르는 어린이들은 머리를 갸우뚱하며 질문하곤 한다. "왜 사람들이 저기에 있어요?” 진화론자들의 개조된 성경이야기에는 침팬지 중의 하나가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한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적어도 이번에는 백인을 전시하였다. (흑인 오타 벵가를 동물원에 전시했던 사건에 대한 Carl Wieland의 글과 아래의 글들을 보라).
*참조 : Ota Benga: The Story of the Pygmy on Display in a Zoo
https://creation.kr/HistoryofEvolution/?idx=1290079&bmode=view
*관련기사 : ‘인간 동물원’ 등장 … 런던동물원, 남.여 8명 4일간 ‘전시’ (2005. 8. 28. 어린이조선일보)
http://kid.chosun.com/site/data/html_dir/2005/08/28/2005082800016.html
런던 동물원에 '사람'도 전시 (2005. 8. 27. 한겨레)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60179.html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crev.info/2005/08/do_you_belong_in_the_zoo/
출처 - CEH, 2005. 8. 29.
제임스 허튼의 전기
: 현대지질학의 주류인 동일과정설의 창시자
(Biography of James Hutton)
제임스 허튼 (James Hutton, 1726-1797).
스코틀랜드의 지질학자였던 제임스 허튼은 1726년 6월 3일 에든버러(Edinburgh)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 도시인 에든버러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니면서, 그는 과학적 질문들에 대해 열정적인 사랑을 가지고 있었던 학생이었다. 그는 법률가(lawyer)로 도제(apprentice, 견습생)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의 고용주는 그에게 취미가 맞는 직업을 선택할 것을 충고하였다. 젊은 도제는 그가 좋아했던 화학 과목과 가장 가까운 의학(medicine)을 선택했다. 그는 에든버러에서 3년 동안 공부를 하고, 파리에서 의학 교육을 마쳤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고, 1749년(23세)에 레이덴(Leiden)에서 의사(doctor of medicine) 자격을 취득했다. 그러나 그의 앞에 진로가 잘 보이지 않자, 그는 의사로서의 직업을 포기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베르윅셔(Berwickshire)에 있는 약간의 유산을 물려받았고, 농업(agriculture)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농사에 필요한 경작 방법을 배우기 위해 노폭(Norfolk)에 갔고, 계속하여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북부를 여행했다. 이 기간 동안에 그는 지구 표면에 관한 공부를 하기 시작하였고, 훗날 그의 정렬을 바쳤던 문제들에 대해서 점차적으로 그의 생각 깊은 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1754년(28세) 여름, 그는 베르윅셔에 자신의 농장을 세우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14 년 동안을 살았고, 농업의 가장 개선된 형태들을 소개했다. 농장이 체계적으로 잘 돌아가게 되면서, 농장의 관리는 더 쉬워졌고, 흥미를 점점 잃어갔으며, 농장은 스스로 돌아가도록 하게 하였다. 그는 에든버러에 돌아와 삶의 휴식을 취하게 된다. 이것은 1768년(42세) 쯤에 일어난 일이다. 그는 결혼하지 않았고, 이 기간부터 그가 죽은 1797년(71세)까지 그의 세 여동생들과 살았다. 그는 취향이 같은 문학적 과학적 친구들과 어울렸고, 연구를 가까이 하게 된다.
그 당시에 지질학(geology)이라는 적절한 의미를 갖는 용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광물학(mineralogy)은 상당한 진보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허튼은 그 당시의 광물학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보다 더 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여러 가지 광물과 암석들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지구의 역사를 어느 정도 명백히 이해해 보고 싶어 했다. 수 년동안 그는 그 주제를 연구하기를 계속했다. 마침내 1785년(59세) 봄에, 그의 견해를 당시 설립되지 얼마 안 된 에든버러 왕립협회에 ”지구의 이론, 또는 지구 육지의 구성, 소멸, 회복에 있어서 관측되는 법칙들에 대한 조사 (Theory of the Earth, or an Investigation of the Laws Observable in the Composition, Dissolution and Restoration of Land upon the Globe.)” 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주목할 만한 논문에서, 지질학은 우주창조설(cosmogony)이 아니라, 지구 물질들에 대한 연구에 한정되어야만 하다고 상술되었다. 지구 도처에 다음과 같은 증거들이 보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지구 표면의 현재 암석들은 더 오래된 암석의 부스러기들로부터 많은 부분들이 형성되었다. 바다 아래에 쌓여져 내려오던 이들 물질들은 엄청난 압력 하에서 단단해지고, 연속적으로 파열되고, 지하 열(subterranean heat)의 팽창적인 힘에 의해서 융기되었다. 이 격동 동안에 광맥들과 용융된 암석 덩어리들은 지층 단층면의 갈라진 틈으로 관입되었다. 융기된 땅들의 모든 부분들은 대기에 노출되자마자 분해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분해는 육지 전체가 닳아 없어져 해양저에 퇴적될 때까지 계속 진행되었으며, 미래의 또 다른 융기가 단단해진 퇴적물들을 새로운 땅으로 다시 또 들어 올릴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허튼의 이러한 광대하고 대담한 개념의 일부는 이탈리아 지질학자들에 의해서 제시되었던 것이었지만, 허튼은 최초로 그들의 상호 관계를 신뢰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그들을 관측에 기초한 반짝이는 조리있는 이론으로 연합해 내었다.
허튼이 직접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단지 땅(earth)만이 아니었다. 그는 대기의 변화에 대해서 오랜 기간 연구를 하였다. 그의 책 ‘지구의 이론 (Theory of the Earth)’에 나타났던 같은 부피의 량이 또한 ‘비의 이론 (Theory of Rain)’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것은 1784년 에든버러에 있는 왕립협회에서 읽혀졌다. 그는 공기가 용액으로 보유할 수 있는 습기의 양은 온도가 증가함으로서 증가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다른 온도를 가진 두 덩어리의 공기가 혼합되었을 때 습기를 가진 부분은 응축되어,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지구의 다른 지역에서의 강우(rainfall)와 기후(climate)에 관련된 이용할 수 있는 자료들을 조사했다. 그리고 강우는 모든 곳에서 한편으로는 습도에 의해서 조절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높은 대기 중에서 다른 공기 흐름들의 혼합을 증진시키는 원인이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의 천부적인 재능과 열정은 그가 30년 동안 에든버러에 거주하면서 발표한 다양한 연구들로부터 알 수 있다. 1792 년에, 그는 ‘자연 철학에 있어서 다른 주제들에 대한 논문(Dissertations on different Subjects in Natural Philosophy)’ 이라는 제목의 4절판으로 된 책을 출판하였다. 거기에서 그는 물질, 유동성(fluidity), 응집(cohesion), 빛, 열, 전기 등의 본질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이 주제들의 일부는 에든버러 왕립협회에서 읽혀진 논문들에서 그에 의해서 더 자세히 설명되었다. 그는 물리학(physics)의 영역 내에서만 자신을 제한하지 않았고, ‘지식의 원리 및 이성의 과정들에 대한 조사 - 감각으로부터 과학과 철학까지 (An Investigation of the Principles of Knowledge, and of the Progress of Reason - from Sense to Science and Philosophy)’ 라는 제목의 세 권의 4절판 책을 출판하면서 대담하게 형이상학(metaphysics)의 영역까지 나아갔다.
그 책에서, 그는 우리에 의해서 인지되고 있는 외부 세계는, 외부로부터 자극에 의해서 영향을 받은 우리 자신의 마음의 창조물이라는 개념을 전개하였다. 즉, 바깥 세계에 대한 우리의 그림과 실제성(reality) 사이에는 유사점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성과 일관성을 가지는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인상(impressions)들은 마치 그들이 정확히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물체들처럼 우리들에게 많은 실제성을 가지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도덕적 행위는 마치 우리의 생각이 완벽하게 그것들을 만드는 원인들과 부합되는 것처럼 똑같이 남아있음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의 말년은 그의 ‘지구의 이론’의 확장과 재출판에 힘을 쏟으며 보냈다. 그것에 대한 2 권의 책이 1795년(69세)에 출판되었다.
그 작업을 완료하는 데에 필요했던 세 번째 책은 그의 손으로 쓴 필사본으로 남겨졌고, 그의 전기 작가인 플레이페어(John Playfair)에게 넘겨졌다. 이 책의 한 부분은 레오나드 호너(Leonard Horner)에 의해서 런던 지질학회(Geological Society of London)로 보내졌고, 1899년에 게이키 경(Sir A. Geikie)의 편집 하에 학회에 의해서 출판되었다. 필사본의 나머지 원고들은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허튼은 경작(husbandry)에 관한 그가 기록했던 많은 글들을 수집하는 분류하는 작업을 하였다. 그는 이것을 ‘농업의 요소들(Elements of Agriculture)’ 이라는 제목 하에 출판하려고 하였다. 그가 거의 이 작업을 마무리할 무렵인 1797년 3월 26일, 치유할 수 없는 질병으로 그의 활동적인 경력은 끝을 맺게 되었다.
그의 책 ‘지구의 이론(Theory of the Earth)’에 의해서, 허튼은 지질학이 발전을 지속하는 한 숭배를 받으며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무겁고 애매한 허튼의 글 형태 때문에, 그의 책들은 그의 생애 동안에는 그가 노력을 기울인 만큼 관심을 끌지 못했다. 허튼에게 다행스러운 것은 그의 과학 친구들 가운데 존 플레이페어(John Playfair)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에든버러 대학의 수학(mathematics) 교수였으며, 허튼의 교리를 전파하고자 하는 열정이 넘쳤던 사람으로 허튼의 주장들이 빛을 발하게 하였다. 허튼이 죽은 후 5년 후에, 그는 ‘허튼의 지구의 이론에 대한 해설(Illustrations of the Huttonian Theory of the Earth)’ 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하였다. 이 책에서 플레이페어는 허튼의 이론을 훌륭하게 요약하였고, 많은 부가적인 해설과 논의들을 첨부하였다. 이 작업은 지질학 저술들에서 공헌도가 높은 고전 중에 하나로서 간주된다. 그 책은 영국 지질학의 발달에 있어서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 1805년에, 플레이페어에 의해서 쓰여진 허튼의 전기는 ‘에든버러 왕립협회 보고서 (Transactions of the Royal Society of Edinburgh)’ (A. Ge.) 제 5권에 실리게 되었다.
*참조 : The man who made the wedge: James Hutton and the overthrow of biblical authority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18_2/j18_2_55-57.pdf
St Hutton’s Hagiography
http://creation.com/st-huttons-hagiography
Darwin, Lyell and Origin of Species
http://creation.com/darwin-and-lyell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gennet.org/facts/hutton.html
출처 - GenNet.org
역사학자가 근본주의 진화론의 몰락을 예언하다.
(Historian Predicts Downfall of Darwinian Fundamentalism)
David F. Coppedge
2005. 6. 20일자 Forbes 지에서, 영국의 역사학자인 폴 존슨(Paul Johnson)은 근본주의적 진화론자들을 공격하면서, 그들의 서거(demise)를 예측하고 있다.
"오늘날 전 세계의 거대한 근본주의자들 그룹 중에서, 다윈주의 신봉자들은 나에게는 가장 못마땅한(most objectionable) 그룹으로 여겨진다. 그들은 기독교나 이슬람교의 근본주의자들처럼 논쟁에 대해 폐쇄적이고, 불쾌한 발언들을 쏟아낸다. 그러나 이들 두 그룹과는 다르게 다윈주의자들은 지적인 존경(intellectual respectability)을 받으며 그것을 즐기고 있다.
다윈주의자들과 그들의 동맹자들은 서양의 과학 체제를 지배하고 있다. 그들은 대학 캠퍼스를 지배하고 있다. 무신론(atheism)이라는 그들의 호전적인 상표는 대부분 대학의 교수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철학적 무신론자들과 자연적인 동맹을 맺게 하였다. 그들은 선도적인 과학 잡지들을 지배하였고, 그들에 대한 비평과 반대 의견들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텔레비전에서 가장 좋은 시간대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진화론이라는 다윈주의자들의 상표는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그 약점들이 계속 드러남으로서 점점 상처투성이가 되어가고 있다. 어느 날 (아마도 곧) 진화론은 처참하게 붕괴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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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주의자들에 반대하는 그의 가치있는 열변에도 불구하고, 존슨은 비판력 없이 빅뱅 이론과 장구한 우주 연대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는 뉴튼을 자연력(impersonal Force)을 가르쳤던 사람으로 잘못 해석하고 있는 선행적(front-loading, 생명체에 필요한 모든 정보가 어느 정도 빅뱅 시에 이미 존재했고 적당한 시기에 기계적으로 스스로 작동되었다는) 설계철학(design philosophy)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사람이 만들어지는 데에 선행적 설계를 가정한 후에, 언어의 기원에 대해서는 신의 간섭을 주장하였다. 이 이상한 생각은 진화론의 몰락에 대한 그의 흥미로운 예언을 반감시키고 있다.
존슨도 또한 상투적인 황색 언론(yellow-journalism) 이외의 근본주의에 대해서는 거의 알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는 근본주의를 폐쇄적이고 불쾌한 발언들을 쏟아내는 것으로 정의했다. 그것은 그레셤 마헨(J. Gresham Machen)과 같은 기독교 학자가 사용하는 단어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근본주의란 기독교 신앙의 훼손 없이 타협될 수 없는 성서적 교리를 지켜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존슨이 오늘날 많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교회 안에 들어와 본다면, 그는 폐쇄된 생각을 가지지 않은, 불쾌한 말을 쏟아내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게 것이다. 그는 AK47 총들로 무장하고, 깃발을 불태우며, 일전불사를 외치는 무슬림 전사들과 같은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반대의견에 대해서 철저한 사전검열을 가하고 있는 진화론자들과 같은 모습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는 겸손하고, 기쁨에 넘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낮선 사람을 환영하면서 다음과 같이 물어보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당신을 위해 어떻게 기도하면 될까요?”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crev.info/2005/06/historian_predicts_downfall_of_darwinian_fundamentalism/
출처 - CEH, 2005. 6. 8
해리포터와 마술, 그리고 창조과학
<해리포터> 보셨습니까? 동명의 베스트 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해리포터>가 2001년 연말에 처음 개봉할 당시 많은 사람들 사이에 큰 화제가 되어 한 두 번쯤은 서로 이런 인사를 주고받곤 했던 적이 있었다. 특히 초등학교나 중학교 학령기의 자녀를 가진 분들이라면 자녀들의 등쌀에 못 이겨 같이 영화를 관람하셨을 분들도 많을 것 같다. 최근에는 그 2편까지 개봉되어 여전히 세계 극장가의 box office를 석권하며 그 위력을 과시하고 있는데, 이미 여러 형태의 대중매체를 통해서 <해리포터>의 내용이나 아이들에 대한 유해성 논란이 많이 보도되어 있으므로, 영화가 좋은지 나쁜지는 각자 독자의 판단에 맡기기로 하고, 대신 필자는 이 자리에서 작품 <해리포터>의 중요한 배경과 소재가 되고 있는 ‘마술’이란 것에 대해서, 특별히 창조과학을 연구하는 한 과학자로서의 견해를 피력해 보고자 한다.
우선, 마술은 과연 사실일까? 각종 오락 시설을 잘 갖춘 웬만한 테마 파크에 가면, 으레껏 마술쇼를 위한 상설 공연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동네나 학교의 크고 작은 축제가 있을 때에도 마술쇼는 인기 프로그램의 하나이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마술쇼는 비록 그 재빠른 마술사의 손놀림에 박수를 보내며 즐거워한다고 할지라도, 모자 속에서 사과를 토끼로 바꾸어 꺼내는 것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단지 눈속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어린 아이들도 잘 알고 있다. 물론 세계적인 일류 마술사 David Copperfield의 마술쇼쯤 되면, 그 trick이 매우 고단수여서 현실과 환영을 분별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수준이 높아지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역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단지 고도로 훈련된 마술사의 눈속임이라는 것을 의심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해리포터>에서 보여 주는 마술의 세계는 눈속임의 경지를 넘어서 어떤 다른 차원의 세계로 사람들을 이끈다. 가로막힌 벽 속으로 사람의 몸이 그대로 통과하는 것이나, 빗자루를 타고 공중을 날라 다니는 것, 물체를 물리적인 접촉 없이도 움직이는 것, 그리고 투명 담요로 덮어 몸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 등은 모두가 자연과학의 법칙을 벗어나는 일 들인데, 이런 일들이 마술이라는 이름으로 다반사로 행해짐으로, 일시적인 눈가림과는 차원이 다른 어떤 세계의 존재를 은연중에 암시 받게 된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이 소설이나 영화적 재미를 위한 가공의 것들이긴 하지만, 마술사 양성을 위한 학교가 등장하고 연구와 훈련을 통해서 마술의 경지를 넓혀간다는 이야기의 기본 전개는 이런 차원의 마술도 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기에 충분하게 만들고 있다. 이에 대한 필자의 견해는, <해리포터>식의 마술도 어느 정도는 가능할 수 있다는 쪽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런 일들은 자연 법칙으로는 불가능하며, 동네 마술쇼에서와 같이 무대 뒤에서 보이지 않게 돕는 제 3자가 있거나, 혹은 감추어진 상자나 물체가 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첫째, 고도로 발달된 과학 지식을 갖추어 자연 법칙을 위배하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자연을 다스려 마술처럼 보이는 현상을 창출해 내는 것이요, 둘째는 어떤 영적 존재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 눈부시게 발달한 과학 기술은 마술이 횡행하던 고대나 혹은 중세시대의 사람들의 눈에는 당연히 마술로 보일 것이 틀림없다. 가령, 현대인들이 remote control 이나 자동음성인식 장치를 통해 직접적인 신체의 접촉이 없이도 전자제품을 작동시키는 것이나, 개인용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아 오르는 것들을 과학을 모르는 옛날 사람들이 본다면, 무어라고 하겠는가? 벽 속으로 사람의 몸이 사라지는 것도 영화에 나오는 물체 전송장치 같은 것을 이용하면 될 일이겠지만, 이것은 아직까지는 언제 실현될지 모르는 과학적 허구이다. 과학의 역사는 학자들의 보는 견해에 따라 그 시작점을 정하는데 차이가 있지만, 소위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으로서의 과학이 시작한 시점을 갈릴레오와 뉴튼 등에 의해 주도되었던 ‘과학혁명’이 일어났던 17세기로 보는데 대부분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일이 그렇듯이 ‘과학혁명’ 이전에 이미 혁명을 위한 지성적 그리고 기술적 토양이 준비되어 가고 있었음을 지적하는 학자들이 늘고 있다. Paolo Rossi 같은 과학 역사학자는 중세에 횡행했던 연금술 같은 작업들이 어떻게 과학적 지식과 기술의 축적으로 전환되어 갔었는지를 그의 저서 <마술에서 과학으로>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과학이 발달하기 오래 전에 소위 마술사들에 의해 행해지던 많은 신비로운 행위들이 이제는 과학적 지식에 의하여 더 이상 마술이 아니거나 혹은 그 신비로움을 상실해 버린 것들이 많다.
당시의 그리고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일부 마술사들은 체계적인 과학 지식도 없이 비록 작게나마 어떻게 자연을 다스리는 효과를 낼 수 있었을까? 물론, 그들에게 체계적인 과학지식이 없음으로 인해 오늘날 우리가 자연의 법칙을 이용하여 얻어내는 유익과는 수준의 격차가 현격히 크지만은, 그들 나름대로의 방법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물론 일부는 타고난 지혜로 말미암아 체계적인 이론은 갖고 있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자연의 이치를 이용할 수 있었을 수도 있지만, 보다 더 근본적인 마술적 힘의 원천은 아마도 영적 존재에 의탁하여 얻어낸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었나 싶다. 앞서 언급한 <해리포터>식의 마술도 사실 정도의 차이는 크게 있지만, 이방 종교의식이나 주술 가운데 영적 존재의 힘을 빌어 지금도 어느 정도 행해지고 있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이런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와 비슷하게 요가에서 행하는 공중부양이나 유리겔러 식의 초능력, 혹은 심령술 등의 배후에도 사실은 뒤에서 보이지 않게 작용하는 영적 존재가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마술이나 무당, 그리고 점성술 등에 대해서 단호하게 사악한 행위로 규정을 짓고 있으며, 이러한 행위의 뒤에는 결국 사탄이 자리하고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아마 이러한 이유 때문에 기독교계에서 특히 <해리포터>에 대한 경계심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결국 마술이라고 하는 것은 그 근본 성격이 사람의 눈을 속인다는 점에서, 에덴 동산에서부터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를 속여왔던 사탄의 작품일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지혜를 주시어 과학이라는 열매를 잉태케 하심으로, 혼돈 속에서 질서를 깨닫게 하시고 그 분이 설계하신 자연의 원리들을 하나씩 발견케 함으로써 마술적 눈속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축복하시었다. 그러나, 이같은 축복은 마술적 현상 뒤에 숨어서 역사 하는 사탄의 존재를 바로 인식하기 위함이기도 하였는데, 과학적 결과에 교만해진 대다수의 인간은 그만 영적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우를 범하고 모든 것을 물질로만 해석하고 이해하려고 하는 진화론적 인본주의 유물사상을 낳게 되었으니, 이 또한 과거 마술이 인간을 우매하게 하던 시대와 마찬가지로 또 다른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상이 되고 말았다. 이런 점에서 창조과학자들은 과학의 본래의 목적을 회복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는 자들이다. 마술과 같은 눈속임에 더 이상 무지한 사람들이 현혹되지 않도록 과학적인 답을 찾는데 노력을 기울일 뿐만 아니라, 그 과학적 발견을 주신 자의 지혜와 솜씨를 찬양하기 즐겨하는 자들이다. 더 나아가 그 마술적 현상 뒤에 숨어 있는 영적 존재를 인정하고 그에 대한 적절한 대응을 성경을 통해 찾기를 마다하지 않는 자들이다. <해리포터>의 상업적 성공을 지켜보면서, 자연의 이치를 밝히 보여주는 과학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기는커녕 여전히 영적으로 공허한 그래서 신비적 마술에 시선을 뺏기는 현대인의 참모습을 보는 듯 하였다면, 그것이 단지 필자만의 기우일까?
출처 - 이브의 배꼽, 아담의 갈비뼈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655
참고 :
오타 벵가의 비극
: 진화론에 의해 동물원에 전시됐던 흑인
김정훈
만약에 우리가 사는 근처의 어느 동물원에서, 진화가 아직 덜된 어떤 사람을 전시한다는 광고가 났다면, 이에 대한 우리들의 반응은 어떻게들 나타날까? 뭐? 동물원에서 사람을 전시해? 그것 참 흥미롭겠군. 진화가 아직 덜 되었다니 무척 재미있을 거야. 혹시 이런 반응은 아닐까?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같은 일이 실제로 미국에서 일어났었다. 1904년 미국의 St. Louis에서는 만국 박람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이곳의 한 쪽에서는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데리고 온 몇 명의 흑인 피그미족들이 진화가 덜 된 이상한 사람들이라는 딱지가 붙은 채로 전시되고 있었다. 그 중에 오타 벵가라는 이름을 가진 23살의 젊은 흑인 청년이 있었는데, 그도 당시 저명한 아프리카 탐험가였던 Samuel Verner라는 사람에 의하여 그의 고향 아프리카 Congo로부터 붙잡혀와 이곳에서 함께 전시되고 있었다. 그 후 St. Louis 만국 박람회가 끝나고 오타 벵가는 New York에 있는 Bronx 동물원에 팔려가게 되었고, 이곳에서 그는 그만, 원숭이 우리 안에 그를 위하여 특별히 마련된 전시실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야 말았다. 이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기 위하여 동물원에 줄을 섰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오타 벵가는 구경꾼들의 야유와 장난에 싫증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처음 미국에 잡혀 왔을 때와는 달리 점차 성질이 사나와져 갔다. 그러나, 이같은 동물원 측의 비인간적인 행위에 반대하는 항의자들이 늘어감에 따라 어쩔수 없이 동물원 측에서는 오타 벵가를 풀어 주게 되었고, 그후 오타 벵가는 Virginia의 Lynchburg에 있는 어느 담배 공장에서 한 동안 일하게 되지만, 그가 동물원에서 받은 상처는 이미 너무나도 깊어 있어서 줄곧 그는 외로움과 우울증,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강한 적대감으로 괴로워 하다가 끝내는 1916년, 자살을 함으로 그의 짧은 인생을 마치고 말았다. 이때 그의 나이가 35 세로, 미국으로 잡혀온지 12 년이 지난 해의 일이었다.
과연 무엇이 오타 벵가를 원숭이 우리 안에 갇히게 하였을까? 그의 피부가 검기 때문에? 그가 피그미 족으로서 체격이 왜소했기 때문에? 아니다. 그것은 당시 사람들이 갖고 있던 잘못된 진화론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셨다고 성경(행 17:26)은 분명히 말하고 있는데도, 원숭이를 우리의 조상으로 가르치는 진화론을 받아들이면 이같은 인종차별 의식을 쉽게 갖을 수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육체의 유전적 다양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이 마치 우등하고 열등한 것이라도 있는 양, 사람들의 신체 어느 일부분을 가지고 서로 놀려대는 일도 쉽게 할 수 있게 된다.
진화론이란 어디 멀리 있는, 나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이론이 아니다. 바로 우리의 행동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이 사회의 보이지 않는 암적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챤들이여, 일어나자!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 아래 아름답게 창조된 피조물인 것을 세상에 외치자. 난쟁이도 꺽다리도, 뚱뚱이도 홀쭉이도, 그리고 검둥이도 흰둥이도 우리 모두가 사랑을 나누어야 할 형제 자매임을 세상이 알 수 있도록, 우리가 먼저 모두에게 사랑에 빚진 자로 살자 (롬 13:8)!
*참조 : Ota Benga: The Story of the Pygmy on Display in a Zoo
Academia and the press as the bad guys : A review of 'Spectacle: The astonishing life of Ota Benga'
https://creation.com/review-spectacle-newkirk
Anti-slavery activist William Wilberforce: Christan hero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1_2/j21_2_121-127.pdf
William Wilberforce : A Leader for Biblical Equality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2/n1/william-wilberforce
출처 - 이브의 배꼽, 아담의 갈비뼈
진화론에 의한 창세기
(Genesis according to Evolution)
Terry Mortenson Ph.D.
만약 수억 년에 걸친 진화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방법이었다면, 하나님은 간단한 단어들로 그것을 쉽게 말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전 세계에 있는 많은(아마도 상당히 많은 수의)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이 우주 대폭발(big bang), 별의 진화 과정들, 그리고 수억 수천만 년에 걸친 점진적인 지질학적 변화 과정들을 통해 오늘날의 세계를 만드셨다고 믿고 있다. 또한 이들 크리스천들 중 일부는 하나님이 수많은 동식물들을 만드시기 위해서 신다윈주의적 진화 과정을 사용하셨다고 믿고 있다. 전자는 '점진적 창조론자(progressive creationists)'라 불리워지고, 후자는 '유신론적 진화론자(theistic evolutionists)'로 불리워진다.
성경이 최초의 기원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을 대하게 될 때, 많은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이 과학시대 이전의 고대 사람들에게 당신의 창조하신 방법을 잘 전달하실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여 왔다. 고대 히브리 인들은 오늘날의 복잡한 천문학, 지질학, 생물학적 이론들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창세기는 단지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쓰여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것은 분명히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점진적 창조론자나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만약 하나님이 정말로 그러한 방법으로 창조하셨다면, 어떻게 말씀하셨을까를 간단한 단어들을 사용해서 표현해 보았다.1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작은 먼지 알갱이들을 팽창시키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빛이 있으라 그러자 그렇게 되었다. 이 먼지 알갱이들로부터 오랜 시간에 걸쳐서 별들을 만드셨고, 해를 만드셨고, 또 오랜 시간 후에 이 땅과 달을 만드셨다. 그때 땅은 매우 뜨겁고 건조했다. 이 땅 어디에도 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천천히 하나님은 바다가 생기게 하셨고, 매우 작은 피조물들을 바다에 만드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그리고 천천히 물고기와 바다의 식물들과 기는 것과 땅에 사는 육축과 짐승과 공중의 새들로 변화하라. 해변의 모래와 같이 무수한 시간이 흐른 후에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그 때에 땅과 하늘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많은 생물들은 무서운 역병으로 희생되었으며, 동물들은 서로를 잡아먹었고, 독이 있는 가시로 죽였다. 많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하나님이 만드셨던 창조물들은 죽어갔고, 땅에 묻혔고, 일부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생물들이 계속 태어났다.”
”또 다시 오랜 시간이 흐른 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닮은 동물을 하나 택하셔서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아담'이라 부르셨다.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은 여자를 만드셨고, 아담은 그녀를 이브2 라고 불렀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그러자 그렇게 되었고, 이 최초의 쌍으로부터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퍼지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세대 후에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주변에 앗시리아인이라고 불려지는 사람들이 살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점점 사악해져 갔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단지 노아만이 의로운 사람임을 발견하였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이 패괴한 자들을 모두 쓸어버리고자 한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동물들을 데리고 내가 네게 보여주는 땅으로 옮겨 가거라. 그곳에서 내가 곧 앗시리아 지역과 그 거민들에게 닥칠 홍수로부터 너를 보호할 것이다. 노아와 그 가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고 그들과 그를 따른 동물들은 살아남았다. 앗시리아 지역에 다른 모든 사람들은 죽었고, 그 지역에 있던 동물들도 죽었다. 새들은 물이 불어나자 그 지역을 멀리 떠났다가 곧 돌아왔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점점 증대되어 점차적으로 다른 종족으로 나뉘어졌고 다른 언어들을 사용하게 되었으며 온 땅으로 퍼져 나갔다. 그들 종족 중 하나에서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의 사람을 하나님이 부르셨다......”
이것은 창세기 1~11장의 기록을 진화론에 근거하여 재구성하여 본 것이다. 만약 지금 실제 성경을 읽는 사람이라면, 그 차이가 분명히 대조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만물을 수십억 년에 걸쳐서 창조하시고, 노아 시대의 홍수가 단지 메소포타미아 지역(오늘날의 이라크)에 있었던 국소적인 홍수였다면, 하나님은 그렇게 잘못 이해될 수 있는 기록을 성경에 남기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반대로 하나님이 만약
1) 온 우주와 만물을 대략 6천년 전쯤에 글자 그대로 6일 만에 창조하셨다면, 그리고
2) 아담이 범죄하여 모든 피조물들이 저주를 받았고 1,600여년 후 노아의 시기에
3) 전 세계는 한 번의 전 지구적인 대격변적 홍수로 심판받았으며, 그 이후
4) 민족들의 형성을 촉진시키시기 위해서 초자연적인 힘으로 바벨탑에서 다른 언어들을 창조하셨다면,
그러면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야만 한다. 만약 하나님이 이와 같은 모든 것들을 정말로 행하셨다면, 창세기에 기록된 것보다 어떻게 더 명확하게 말씀하실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성경에 당신의 말씀을 기록하셨다. 우리들은 성경이 명백히 말씀하고 있는 것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진화론자들(그리고 그들에게 현혹당해 버린 교회 지도자들과 신학자들)에 의해서 근본적으로 다른 것(오래된 지구와 진화론적 재해석)을 말하고 있는 왜곡된 창세기를 믿을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Notes
1. Thanks to Dave Prentice, a New Orleans, USA, high school science, for inspiring this article.
2. Many evolutionists within the church do not even believe in a literal first man or woman, because evolutionary theory says that populations evolve, not individuals. This not only contradicts Genesis, but also the Apostle Paul, who compared the First Adam to the Last Adam (1 Corinthians 15:45).
3. Believers in millions of years of Earth history, whether progressive creationists or theistic evolutionists, are compelled to 'water down' the Flood account into a local event. A global Food would have wiped out any geological rationale for long ages; the fossil record would then be the evidence of massive catastrophic changes, not a succession of ages.
*Terry Mortenson, B.A., M.Div., Ph.D.
Dr Mortenson's Ph.D. in history of geology is from Coventry University (UK). Having qualifications in mathematics and theology, plus 26 years' experience as a missionary with Campus Crusade for Christ, he now works full-time with Answers in Genesis (USA).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26/i4/genesis.asp
출처 - Creation 26(4):50-51, September 2004.
다윈의 불법적인 발명품
(Darwin's Illegitimate Brainchild)
Russell Grigg
<종의 기원>의 원조가 다윈이라는 생각은 재고되어야 한다.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evolution)의 개념은 찰스 다윈에 의해서 창안한 이론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리고 그 자신도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진화의 개념을 자기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child)' 이라고 언급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은 모두가 다 사실과는 엄청난 거리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좋게 평가한다 해도 진화론은 그의 양아들에 지나지 않으며, 최악으로 평가한다면 그의 사생아였던 것이다.
에라스므스 다윈과 제임스 허튼 : 1794.
우리는 최근 판 <Creation>지에서 1895년에 <종의 기원>1에서 찰스 다윈이 주장하고 제시한 개념과 실례들은 거의 모두가 그 보다 65년이나 앞서서 그의 할아버지였던 인본주의자 에라스므스 다윈이 (1789)에서 이미 써먹은 개념이고 실례들이라는 것을 밝힌바 있다.
그런데 스코틀랜드 출신의 지질학자 제임스 허튼(1726-1797)도 일찍이 1794년에 이미 자연선택 이론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새로운 증거가 드러나고 있다. 허튼은 지구의 나이는 광대하여(수천 년이 아니라) 도저히 '측량할 수 없다' 라고 주장했던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은 그가 성경의 대홍수 내용을 거부했기 때문에, 지구 역사의 초기에 대격변은 없었다고 주장하면서 오류를 범했던 것이다.2
.제임스 허튼은 지질학자, 의사, 화학 제조자, 박물학자, 실험 농업가로 기술되고 있다.
카디프 대학(Cardiff University)의 고기후학 교수로 재직 중인 폴 피어슨 (Paul Pearson)은 최근에 스코틀랜드의 국립도서관에서 이전에 출판된 적이 없었던 2,138페이지에 달하는 3 권의 저작물을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1794년 허튼이 저술했던 저작물이었다. 제목이 'An Investigation of the Principles of Knowledge and Progress of Reason, from Sense to Science and Philosophy' 3로 되어 있다. 이 저작물에는 '종자의 변이'(seminal variation)‘4에 대한 허튼의 이론 전체가 담겨져 있었다.
그 저술 내용 중에서 하나의 예를 살펴보자. ”생존을 위해 날쌘 네 발과 예민한 시력 말고는 의지할 만한 장점이 없는 개들 속에 끼어 있는 느림보 개들은 아마도 멸종할 것이다. 그리고 날쌘 개들은 그 종족을 계속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예민한 후각이 생존에 더 필요하다”면, 그 때에는 '그 종족의 자연스러운 경향이 종자의 변이라는 동일한 원칙이 그 짐승의 성질을 변화시키고 날쌘 동작으로 먹이를 잡는 종족들 대신에 후각이 발달한 사냥개 종족을 생산할 것이다.” 라고 말하면서, 이어서 그는 ”동일한 변이의 원칙은 서식처가 숲 속이든 초원이든 상관 없이, 모든 식물의 종에도 반드시 영향을 줄 것이다”5 라고 말했다.
그 밖에 인물들 : 1831 ~ 1858
찰스 다윈보다 여러 해를 앞서서 자연선택의 주제에 관해 기사를 발표했던 저술가들이 제임스 허튼 말고도 여럿이 있었다.
윌리엄 웰즈 (William Wells; 1757-1817)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미국인 의사로서, 1813년에 (사후 1818년에 출판됨)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과 유사한 개념을 기술한 적이 있었다. ”중앙아프리카 지방에 사는 어떤 부족은 다른 부족들보다 그곳 풍토병에 적응하는 능력이 많았을 것이다. 적응능력이 미약한 부족들은 인구 수가 줄어가는 동안, 이 부족은 결국 인구 수가 늘어날 것이다.” 그는 이어서, ”이 원기 왕성한 부족은 검은 피부색을 하고 있을 것이다. 제일 검은 피부를 한 부족이 계속 살아 남아서 마침내 제일 번창할 것이다. 한 부족이 특정 지역에서 기원하여 그 곳에서 번창하는 것이 어찌 그 부족뿐이겠는가” 라고 말하고 있었다.6
패트릭 매튜 (Patrick Matthew; 1790-1874)는 스코틀랜드의 어느 과수원의 주인이었다. 그는 1831년에 출판했던 책 On Naval Timber and Arboriculture의 부록에서 자연선택과 진화론적 변화의 개념을 간단하게 언급한 적이 있었다. 매튜는 자신이 찰스 다윈을 예견해왔었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의 책 제목 위에 ‘자연선택 원리의 발견’ 이라고 써 놓기까지 하였다. 피어슨 교수는 웰즈, 매튜, 그리고 찰스 다윈 등 모두가 에딘버러 시에 있는 대학을 졸업했으며, 그곳은 ‘과학 클럽과 사교 클럽으로 유명한 곳'으로서, 제임스 허튼의 고향이기도 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또, ”찰스는 비글호의 항해에서 관찰된 다양한 종(種)들에 대한 설명을 위해, 반쯤 망각하고 있던 대학시절의 사상이 그의 마음 속에 되살아났을 것이라”3는 흥미로운 암시를 한바 있다.
에드워드 블라이드 (Edward Blyth; 1810-1873)는 아마 다윈에게 가장 큰 사상적 영향력을 끼쳤던 사람일 것이다. 영국의 화학자요 동물학자였던 블라이드는 세 번에 걸쳐 자연선택에 관한 주요한 기사를 썼다. 그 글은 1835년에서 1837년까지의 기간에 출판된 잡지 The Magazine of Natural History에 실렸다.7 찰스 다윈도 그 내용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이 잡지는 당시 선도적인 동물학 잡지 중의 하나로서, 그의 친구였던 헨스로우(Henslow)나 제닌스(Jenyns)의 기사들도 담고 있었다. 그리고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는 블라이드의 기사들이 실렸던 이 잡지들이 보관되어 있는데, 그 잡지에는 블라이드의 기사에 찰스가 직접 손으로 각주를 달아 놓은 사본들도 포함되어 있다.8
찰스 다윈의 '역사적인 소묘' (Charles Darwin's 'Historical Sketch')
1859년에 <종의 기원>을 출판한 후, 찰스는 그보다 앞서 자연선택에 관한 글들을 발표했던 이들 말고도 다른 사람들에게 지고 있던 빚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에 대해, 동시대의 학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었다. 비난의 목소리가 너무도 고조되자, 찰스는 1861년에 <종의 기원>의 제 3판의 출판에 즈음해서 이들 중 일부 학자들의 이름을 언급하는 '역사적인 소묘' ('Historical Sketch')를 부언했다. 그런 다음 그는 계속되는 비난 속에서 세 번에 걸친 후속 출판에 올린 학자들의 이름의 수를 늘리다가, 마침내 제 6판과 최종 판에서 그는 종(種)이 어떻게 기원했으며 변화했는가를 발표한바 있었던 34 명의 학자들의 이름을 언급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그 기사의 세부 내용에 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고, 다만 주제의 본론이 아닌 '역사적인 소묘'라는 장에 한정시켜 언급했을 뿐이다. 달링턴 (Darlington)은 그것을 ”일찌기 기록된 것 중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기술” 이라고 평했다.9
영국의 풍자 작가 사무엘 버틀러 (Samuel Butler)에게 이 혹평은 오히려 약과였다. 1879년, 사무엘은 Evolution Old and New를 출판하였는데, 그 책에서 그는 찰스 다윈이 뷰퐁(Buffon), 라마르크(Lamarck), 그리고 다윈의 할아버지 에라스므스의 진화론을 모독하였다고 비난했다.
표절에 대한 현대의 비난 (Modern Accusations of Plagiarism)
다윈이 다른 사람들의 이론을 도용('표절'로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하였다고 주장하는 현대의 지도자급 진화론자들 중에 한 사람으로서 故 로렌 아이슬리(Loren Eiseley)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죽기 전에 펜실바니아 대학교에서 동물학과의 역사과학 교수로 있으면서, 벤자민 프랭클린을 가르친 적이 있었다. 아이슬리는 10 여년간을 다윈의 사상이라고 일컫는 기원 이론을 추적한바 있었다. 1979년에10 그는 다윈의 저작물들이 담고 있는 주요 개념들 - 생존경쟁, 돌연변이, 자연선택, 그리고 성선택(sexual selection) - 은 ”1835년에 발표된 블라이드의 저작물” 안에 충분히 발표되어 있던 내용들이었다11고 주장하였다. 아이슬리는 또한 ”블라이디즘 (Blythisms)”을 인용하면서, 1836년판 블라이드의 출판물이 발표된 이후, 다윈은 드물게 어떤 단어들을 사용했다는 내용도 인용하였다. (예를 들어 inosculate(접합하다, 결합하다) 라는 단어를 pass into(~로 변화한다)'라는 뜻으로 사용함). 심지어 비슷한 문장 안에서 비슷한 생물체들의 목록을 다윈이 선택한 내용도12 인용했다.
아이슬리의 저작물을 읽은 20세기의 여러 진화론자들도 말할 용기를 얻었던 것 같다. 달링턴은 ”심지어 보통의 지적 완전함과도 타협되지 않는 유연한 전략을 가지고 있다”고 다윈을 비난했다.13 1981년에 호일레 (Hoyle)와 위클라마싱헤(Wickramasinhhe)는 아이슬레의 '용감한' 저항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기술했다.
”다윈은 제 나름으로는 걸신들린 사람처럼 남의 저작물을 탐독했다. 그러나 그는 남한테서 얻은 것을 보답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리고, 증거들로 미루어 짐작컨대 [다윈이] 다른 학자들의 내용들은 고의적으로 누락(생략)시켰다는 결론 말고는 다른 결론이 있을 수 없다. 고의적으로 누락시킨 죄는 심각하다. 그런 까닭에 그 누락은 전문 생물학계에 되돌려지게 되었다.”14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자신이 블라이드와 통신을 교환하고 정보-인디언 가축의 습관, [아시아 야생 당나귀]의 튀기, 그리고 잡종 거위15에 관한-를 얻었다는 언급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이슬리가 토를 달아 한 말과 같이, 다윈은 ”블라이드를 분류(分類)학자의 역할에 한정시켜 놓고, 현장 관찰자 이상의 학자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16 다윈은 왜 자기 이론의 핵심 요소를 가지고 있는 블라이드를 그토록 인정하기를 싫어했을까? 다윈은 왜 자연선택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블라이드의 저작물을 인용하려 하지 않았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그 이유에 대한 대답은 아마도 두 가지 였을 것이다.
1. 블라이드는 기독교도였으며, 또 오늘날 우리가 일컫는 '특별한 창조주의자' 였다. 예컨대, 계절에 따라 변하는 동물의 색 (산토끼의 색은 겨울에 흰색이 되는 것과 같은)에 관한 고찰에서, 블라이드는 이 사실을 ”놀라운 설계의 실례들이다. 그것은 극명하게 그리고 강력하게 전지전능한 위대한 제 1차 원인자의 존재를 증명한다”라고 말했다.17 그리고 그는 ”동물들의 생태는 초인간적인 지혜를 나타내고 있다. 왜냐하면 동물들은 태어날때부터 그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전지전능한 창조주가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다.”18 라고 말했다.
2. 블라이드가 자연선택의 개념을 병들고 늙어 부적자로 된 자들을 생존자들로부터 제거시키는 하나의 메커니즘의 개념으로 간주한 것은 정확하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연선택을 창조된 종류에 대한 보전의 요인으로, 그리고 현상유지를 위한 메커니즘으로 보았던 것이다.19 에드워드 블라이드 (그리고 영국의 신학자 William Paley)와 같은 창조론자들은 자연선택을 속아내는 과정으로 보았다. 다시 말해서, 자연선택은 애초에는 존재하여야만 했던 여러 특성들 가운데서 특정 부분을 선택해내는 과정으로 보았던 것이다.
결론 (Conclusion)
역사는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개념을 찰스 다윈이 발견한 이론으로 치부하는 고정관념에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자연선택 그 자체는 새로운 특성들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추가적인 (유전) 정보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사실과는 별도로, 다윈에게 귀속시켰던 주요 개념들-전부는 아니지만-대부분은 다른 사람들이 출판물을 통해서 이전에 발표된 적이 있었던 것들이었다. 다윈의 머리에서 태어난 이 '아들'이 진정 그의 소생이 아님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아들은 실상 여러 아버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Reference and Notes
1. Grigg, R., Darwinism: it was all in the family, Creation 26(1):16-18, 2003.
2. Hutton's views have been summarized as 'the present is the key to past.' Hutton's misconception is now sometimes referred to as uniformitarianism.
3. Reviewed by Paul Pearson in Nature 425(6959): 665,16 October 2003.
4. Pearson says that Hutton 'used the selection mechanism to explain the origin of varietied the idea of evolution between species as a 'romantic fantasy'
5. Quoted from ref.3.
6. Quoted by Stephen Jay Gould in Gould, S., Natural selection as a creative force, The Structure of Evolution Theory,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Massachusetts, USA, p. 138, 2002.
7. Blyth, E, The Magazine of Natural History Volumes 8, 9 and 10, 1835-1837. Sourced from ref. 8, Appendices.
8. Source: Bradbury, A, Charles Darwin-The truth? Part 7-The missing link. , 30 October 2003.
9. Darlington C.D., The origin of Darwinism, Scientific American 200(5):61, May 1959.
10. Eiseley, L., Darwin and the Mysterious Mr X, E.P. Dutton, New York. 1979, Published Posthumously by the executors of his will; from Eiseley, L., Charles Darwin, Edward Blyth, and the Theory of Natural selection. Proceedings of the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103(1):94-114, February 1959.
11. Ref. 10, p.55.
12. Ref. 10, pp. 59-62
13. Darlington, C, D. Darwin's Place in History, Basil Blackwell, Oxford, p. 60. 1959.
14. Hoyle F. and Wickramasinghe, C., Evolution from Space, Paladin, London pp.175-179, 1981.
15. Darwin, C., The Origin of Species, 6th ed. John Murray, London, 1902, pp.21, 199, and 374 respectively.
16. Ref.10. p. 52.
17. Blyth, E. (1835), ref. 7
18. Blyth, E. (1837), ref. 7
19. Wieland, C., Muddy waters: Clarifying the confusion about natural selection, Creation 23(2):26-29, 2001
* Russell Grigg, M.Sc (Hons.) was an industrial chemist before serving 20 years with Overseas Missionary Fellowship. He is a staff member of Answers in Genesis in Austra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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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명정대, 아니면 공포감? (Fairness or fear?)
.알프레드 러셀 월리스… 탐험가, 지리학자, 인류학자, 생물학자.
알프레드 러셀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 1823-1913)는 말레이 군도에 있는 테마테 (Temate)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 독자적으로 진화 이론을 개발했다. 그 이론은 찰스 다윈의 이론과 거의 동일하였다.1 그는 1858년에 다윈에게 자연선택에 관한 필사본의 사본을 보냈다. 그 글의 제목은 'On the Tendency of Varieties to Depart Indefinitely from the Original Type'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그 글의 내용은 다윈의 진화 이론을 완벽하게 개관하고 있었다.2 찰스 라이엘(Charles Lyell)과 조셉 후커(Joseph Hooker) 같은 다윈의 친구들은 당장에 월리스의 필사본과 출판되지 않은 다윈의 두 편의 초기 이론을 묶어서 1858년 7월 1일에 개최되는 런던의 Linnean Society의 차기 회합에서 발표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 회합은 완곡하게도 '합동 논문 (joint paper)'의 발표회라고 명명됐다. 그러나 이 모든 조치는 월리스의 참석 없이 진행됐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가 알지도 못하는 중에 그리고 그의 허락도 받지 않고 진행됐었다. 사실상 월리스는 뉴기니 해안의 어느 섬에 있었던 것이다. 이 회합을 계기로 찰스 다윈은 서둘러 <종의 기원>을 탈고하고 이듬 해, 1859년 11월 24일에 출판했다. 소위 '합동 논문(joint paper)'은 다윈으로서는 공명정대하지 못한 처사였음은 물론, 차라리 월리스한테서 밀려날 것을 두려워한 공포감에서 저지른 처사였다고 보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블랙맨드(Blackmand)는 ”최초로 완벽한 기원 이론과 자연선택에 의한 분화 이론을 쓴 사람은 다윈이 아니고 월리스다. 그리고 그는 이 이론에 대한 발표의 우선권을 1858년에 강탈당했다.” 3 라고 말하고 있다.
References and notes
1. Wallace had been thinking on the subject as early as 1845, and had published a rather general paper on it in the Annals and Magazine of National History, September 1855, See ref. 2, p.78.
2. Eiseley says, 'It was Darwin's unpublished conception down to the last detail, independently duplicated by a man sitting in a hut at the world's end.' Eiseley, L., Alfred Russel Wallace, Scientific American 200(2): 80, February 1959.
3. Brackman, A., A delicate Arrangement : The Strange Case of Charles Darwin and Russel Wallace, Times Books, New York, p. xi, 1980.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creation.com/charles-darwins-illegitimate-brainchild
출처 - Creation 26(2):39–41, March 2004.
시카고 대학과 노벨상, 그리고 진화론
김정훈
시카고는 바람이 많이 불어 Windy City 라고 불린다. 특히 겨울에는 이 바람으로 인하여 체감온도가 낮아짐으로 시카고의 겨울을 더욱 춥게 느끼게 한다. 시카고 시내에서 약 14.4km 남쪽으로 내려오면 Hyde Park 이라 불리우는 조그마한 동네가 있는데, 이 곳은 동쪽에 위치한 미시간 호수를 제외하곤 삼면이 흑인들이 많은 우범지대로 둘러 싸여 있어 바람이 차가운 겨울이라도 되면 더욱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와 함께, 도데체 교육과 지성과는 거리가 멀 듯 싶어 보이는 곳이다. 그런데, 바로 이 곳에 오랫동안 미국의 교육을 선도하며, 동시에 20세기 인류 지성사에 큰 획을 그은 인재들을 수 없이 배출해낸, 학문과 지성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소유한 이들의 요람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은, 이 곳에 연고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생소한 사실로 받아 들여질지도 모르겠다.
시카고 대학. Hyde Park에 자리 잡은 고딕풍의 이 학교는, 미국에서는 제일 처음으로 학생들이 어려워 따라가기 힘들어 하는 1년 4학기제를 도입하여 현재까지 성공적으로 이끌어 오고 있는데, 지금까지 이 학교의 졸업생 113명이 다른 대학의 총장 내지는 교무처장을 역임했으며, 평균 7명 중 1명의 졸업생은 교육계에 종사할 만큼, 교육에 있어 소위 'teacher of teacher' 로서의 역할을 담당해오고 있다. 또한, 전체 학생 12,000명 정도로 교수대 학생 비율이 1 대 6 밖에 되지 않는 데다가, 그 중에서도 대학원생이 전체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어, 그야말로 연구 중심의 대학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는데, 이 대학과 연고를 맺고 거쳐간 노벨상 수상자만 지금까지 73명-참고로 이 숫자는 Harvard(35), Stanford(22), 그리고 UC Berkeley(16) 3개 대학과 연고를 맺은 노벨상 수상자를 모두 합치거나, 혹은 MIT(47)와 Caltech(26) 2개 대학과 연고를 맺었던 수상자를 합친 숫자와 동일하다-에 달하고 있어 시카고 대학의 학문적 위상을 실감케 해준다.
그 중에 몇 명만 예를 들어 보면, 간섭계를 이용한 빛의 속도 측정으로 미국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가 된 A. A. Michelson을 비롯하여, 맨하탄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의 원자 핵융합 반응을 인류 최초로 성공시킨 E. Fermi, 양자역학의 사상적 전기를 이룬 유명한 불확정성 원리의 W. Heisenberg, 생성론적 세계관에 과학적 기초를 제공한 비평형 열역학의 I. Prigogine, 환경 공해로 인해 온 인류의 관심으로 떠오른 오존층의 생성과 분해과정을 밝혀낸 P. Crutzen, 초파리 돌연변이 연구로 유전학에 크게 기여한 H. J. Muller, DNA의 구조를 밝혀 분자 생물학의 태동과 함께 생물학에 일대 혁명을 가져온 J. D. Watson, 암 치료에 최초로 화학요법을 도입하여 이 분야에 일대 전기를 마련한 C. B. Huggins, 이제는 만인의 관심이 된 콜레스테롤과 지방산의 생합성 기작을 밝혀낸 K. Bloch, 그리고 좌뇌와 우뇌의 기능 분화를 밝혀내어 대뇌 연구에 새로운 장을 연 R. Sperry 등이 있으며, 그외에 일일이 이름을 대기 어려운 22명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가 있는데, 특히 이 분야는 90년대에만 들어 6명 (그 중 4명은 시카고 대학에서만 4년 연속 수상자 배출)의 수상자를 낼 정도로 기염을 토하고 있다.
한편, 시카고 대학은 이와같이 미국내 대학들 중에서도 가장 학구적인 대학으로 소문난 학교이지만, 안타깝게도 동시에 인본주의 진화론의 중요한 업적과 인물들을 가장 많이 배출한 대학이기도 하다. 무기물로부터 유기물의 생성을 거쳐 생물이 진화되어 왔다는 소위 '오파린의 가설'을 바탕으로 한 화학적 진화(chemical evolution)를 실험을 통하여 증명하려 했던 S. Miller를 비롯하여, 연대측정의 필수 도구로 사용되어지는 탄소동위원소 측정법을 고안한 W. Libby, 우주 진화를 설명하는 '빅뱅(Big-Bang) 이론'의 기초를 제공한 E. Hubble, 전파 망원경을 이용한 외계 지성체 탐사를 주동했던 'Cosmos'로 유명한 진화론자 C. Sagan, 생물 공생설을 주장하여 진화론의 새 지평을 연 L. Margulis, 그리고 인류 최초의 조상이라는 화석 'Lucy'로 유명한 진화 인류학자 D. Johanson 등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진화론자들이 바로 이 대학을 거쳐 나왔다. 그 외에도, Darwin의 진화론에 깊이 영향을 받은 인본주의 교육학자 John Dewey도 시카고 대학이 배출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일 것이며, 1973년에 열렸던 세계 인본주의 대회를 유치하여 '하나님은 없다'는 그들의 선언문을 전파하는데 앞장 선 것도 바로 이 대학이었다. 가장 학구적이며 항상 새로운 아이디어를 격려해 옴으로 학문의 우수성은 인정 받았지만, 동시에 진화론의 가장 질 좋은 토양을 제공하는데 앞장 섰던 이 대학에서 하나님을 높여 드릴 수 있는 학문적 연구의 결과나, 혹은 겸손한 신앙과 깊은 학문을 동시에 갖춘 하나님의 사람들이 배출되어져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일일까?
진화론은 그를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과학적 증거가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과학적 사실인양 소개되어져 오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 과학을 통하여 오히려 자연계에 편만한 지적 설계의 증거를 발견하고, 진화론과는 대조적인 소위 '지적설계 이론(Intelligent Design Theory)'을 주장하는 과학자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는데, 이들의 특징은 그들이 갖고 있는 신앙과는 관계 없이 순수 과학적인 입장만을 통해서 지적설계의 증거를 이야기 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대부분이 미국의 유수한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하고 나름대로 단단한 학문적 credit을 갖고 있는 학문적으로도 우수한 이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들 가운데서도 특히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는 몇몇 인물들이 바로 시카고 대학 출신이라는 점이다. 즉, Phillip Johnson (법학박사; UC Berkeley 교수), William Dembski (수학과 철학박사; 과학과 문화의 갱신을 위한 Discovery 연구소 연구원), 그리고 Paul Nelson (철학박사; 'Origin & Design' 편집인) 등이 바로 그들인데, 그들이 과연 얼마나 하나님을 이해하고 신앙적 깊이를 갖추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적어도 한 가지 그들이 자신의 연구와 학문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생물체를 비롯한 우주의 기원을 지적 설계를 통하여 설명하려고 한다는 것은 분명하며, 이같은 사실은 아직까지 진화론적 사고 방식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일반 학계의 분위기와 이들의 출신 학교의 배경을 생각해 볼 때 상당히 고무적이 아닐 수 없다. 시카고의 추운 날씨와도 같이, 오랫동안 하나님을 떠난 차디 찬 인본주의 학문을 성장시켜온 시카고 대학에 이제 그들이 키워온 학문으로 스스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이르기라도 하고 만 것일까?
위대하신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의 학문으로 인하여 증거되었다 안 되었다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지만, 이제 우리들의 학문(신학이 아닌 일반 학문, 그 중에서도 특히 자연 과학)으로도 그 분의 살아계심에 대한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증거가 나오기 시작한다면, 성경 말씀대로 이제 우리들이 핑계할 것은 더 이상 없게 되고 마는게 아니겠는가 (롬 1:20)?
학문과 신앙. 과학과 성경. 이들은 서로 대립되는게 아니라 조화를 이루어야 할 요소이다. 과거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 위에서 시작된 많은 우수한 대학들이 이제 다시금 인본주의의 허구를 깨닫고 하나님을 자신의 학문 속에서 발견하고 그에게로 돌아오게 되는 감격의 날들을 상상해 본다. 가장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그리고 동시에 우수한(?) 진화론자를 키워내는데도 큰 역할을 담당했던 시카고 대학이, 이 일에 앞장설 수 있기를 바란다.
1990년 당시 한국에서 창조과학 강의에 열중이던 필자에게 장학금이 담긴 시카고 대학의 입학 허가서를 받게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며, 그 날의 감격을 이제는 '가장 진화론적 인본주의 교육에 앞장서 온 시카고 대학이 배출한 창조과학자'로서 앞장서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증거하는 일에서 찾는다.
-이브의 배꼽, 아담의 갈비뼈-중에서
다윈주의는 소수의 견해라는 사실에 내쇼날 지오그래픽스는 직면하고 있다.
(National Geographic Faces Fact that Darwinism Is Minority View)
David F. Coppedge
2004년 11월 내쇼날 지오그래픽스(National Geographic)의 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다윈은 틀렸는가? (Was Darwin Wrong?) 19세기 영국 자연주의자의 이론은 사회에 충격을 주었고, 과학 분야에 혁명을 일으켰다. 그것은 얼마나 시대의 시험들을 잘 견뎌왔는가?”
데이비드 쿼먼(David Quammen)이 쓴 메인 기사에서,
”진화론은 수십년 동안 ‘압도적인 증거들’에 의해서 지지되고 있지만, 미국인의 45%는 인간의 기원에 있어서 다윈설은 믿지 않고 있으며 (인간은 하나님 또는 절대자에 의해서 1만년 이내에 창조되었다고 믿고 있음), 37%는 유신론적 진화론(theistic evolution)을 믿고 있다. (단지 12%만이 다른 생물체로부터 진화되었다고 믿고 있음)” 고 지적하고 있다.
쿼먼은 약간의 놀람을 보이며 말하고 있다.
”이 비율은 20 여년 동안 (1982, 1993, 1997, 1999년 4번의 여론조사 결과) 일정하게 유지되어 왔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다는(진화가 아니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 창조론자들은 44% 아래로 내려간 적이 없다 바꾸어 말해, 미국인들의 거의 반(1/2)은 찰스 다윈이 틀렸다고 믿고 있으며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내쇼날 지오그래픽스는 아직 항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스테판 로브그렌(Stefan Lovgren)은 Nationnal Geographic News에서, 사람들이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는 것을 기꺼이 포기한다면, 진화론과 기독교는 공존할 수 있다고 쓰고 있다.
”성경은 틀렸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과학적 증거들은 우주는 137억 년 전에 형성되었으며, 또한 지구는 45억 년 전에 형성되었고 , 최초의 인류는 약 10만 년 전에 출현하였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로브그렌은 주장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진화(evolution)를 하나님이 사용하신 도구(tool)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세계관에 대한 전쟁을 치루고 있는 두 진영이 같이 잘 지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몇몇 과학자들은 제시한다.
미안하다. 유화정책은 실시되지 않을 것이다. 왕은 회개하지 않는 신화제작꾼들과는 협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무조건적 항복(unconditional surrender)을 요구한다.
* 관련기사 : 미국인 91% 신의 존재 믿어 "<뉴스위크> (2007. 4. 1. 기호일보)
http://www.kiho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3123
캐나다인 60% 창조론 수용 (2007. 7. 5. 연합뉴스)
https://www.yna.co.kr/view/AKR20070705098500009
영국인들 절반 이상 진화론 안 믿어 (2009. 2. 2. 쿠키뉴스)
https://m.kukinews.com/newsView/kuk200902020094
미국인 10명 중 7명 '천국 존재한다' 믿어 (2021. 11. 30. 한국일보)
http://m.koreatimes.com/article/20211129/1391309
* 참조 : 1. <1997년 미국인의 창조/진화 의식 조사>
http://www.answersingenesis.org/docs2/4268news4-5-2000.asp
2. <2000년 미국인의 창조/진화 의식 조사>
http://www.answersingenesis.org/docs2/4245news3-15-2000.asp
3. <2002년 미국인의 창조/진화 의식 조사>
http://www.answersingenesis.org/docs2002/0115poll.asp
4. <또 다른 미국인의 창조/진화 의식 조사>
http://www.answersingenesis.org/docs/4225news2-22-2000.asp
5. Teaching Creation and Evolution in Public Schools
http://www.answersingenesis.org/docs/4178.asp
6. America says : "Teach creation in public schools!"
http://www.answersingenesis.org/docs2/4241news3-11-2000.asp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crev.info/2004/10/national_geographic_faces_fact_that_darwinism_is_minority_view/
출처 - CEH, 2004. 10. 18.
다윈의 무덤과 교회
김정훈
어느 나라든지 그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거나 큰 일을 한 사람들을 위하여 국립묘지를 만들어 그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그런가하면, 큰 교회도 자체의 묘지를 갖고 기독교의 분위기에 맞는 묘지를 제공함으로써, 후세의 사람들에게 고인이 가졌던 기독교 정신을 알리고 있다. 영국에 가면, 런던의 국회 의사당 맞은 편에 유명한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사원이 있는데, 이곳에는 국가적으로 공을 세운 사람이나 영국의 왕족, 그리고 교회의 덕을 세운 기독교인들의 무덤이 안치되어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로 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건물 바닥 밑에다가 다윈의 무덤을 안치해 놓았다는 사실이다. 다윈이 누구인가? 바로 교회의 근간을 무너뜨린 진화론을 퍼뜨린 장본인이 아닌가? 그의 이론이야말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도록(롬 1:25) 만드는데 합리화를 시켜주지 않았던가? 인간을 동물적 존재로 격하시키고, 모든 가치를 상대화
시킴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야 할 사람들의 마음 밭을 돌멩이와 가시덤불이 가득한 황폐한 땅으로 만들어, 떨어진 말씀이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변화시킨 이론이 바로 진화론이 아니던가?
이 우주의 모든 것이 그저 우연히 오랜 세월에 걸쳐 생겨났다고 가르침으로써, 창세기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6일 창조를 전면 부정하고, 유신론적 진화론이니 하는 해괴한 이론을 신학교에서조차 가르쳐지도록 공헌을 한 것이 바로 진화론이다. 그러므로, 다윈이야말로 교회의 토대를 무너뜨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인데, 어떻게 교회가 다윈의 무덤을 교회 안에 고이 모실 수가 있다는 말인가?
한편, 같은 영국이 낳은 스코틀란드의 위대한 종교 개혁자였던 John Knox는 죽어서 그가 말년을 보냈던 St. Giles 대성당에 묻히게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현재 그의 무덤이 있던 자리에는 주차장이 들어서 있다고 한다. 유명한 종교 개혁자 캘빈(John Calvin)과 동시대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는 조금도 세상과 타협을 할 줄 몰랐다고 전해지는 John Knox의 무덤은 오늘날 주차장으로 전락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밑바닥부터 변질시키는데 기여를 한 다윈의 무덤은 교회의 중심에 모셨다는 이 기가 막힌 사실에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는 무어라고 말을 하여야 할까? 이같은 사실이, 오늘날 유럽의 많은 교회가 문을 닫고 젊은이들이 교회를 빠져나가게 된 것과도 전혀 무관한 일인 것 같지는 않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는 사사기 21장 25절의 말씀처럼, 우리의 왕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고, 그의 법을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간 결과가 바로 오늘날 우리가 보는 유럽의 모습이 아닐까? 교회여, 깊은 잠에서 깨어나자! 그리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어리석은 자들을 깨우치는 파수꾼의 사명을 게을리 하지 말자 (겔 3:17)! 주인께서 돌아오실 날이 멀지 않음이니......아멘.
(출처 : '이브의 배꼽, 아담의 갈비뼈' 중에서)
*관련기사 : '성경·예수 안 믿어' 다윈 편지 첫 공개 (2015. 9. 12. 조선일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9/12/2015091200286.html
다윈의 편지 공개... '성서도 예수도 믿지 않는다'(2015. 9. 12.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43522
'성경·예수 안 믿는다' 다윈 편지 경매에 나와 (2015. 9. 11. 연합뉴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09/11/0200000000AKR20150911071200091.HTML
출처 - 이브의 배꼽, 아담의 갈비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