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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위원회
2005-12-17

진화론은 반(反)종교적 신념이고, 종교 그 자체이다 - 3. 

: 진화론은 동시에 종교 그 자체이다.

유종호 


3. 그러나 진화론은 동시에 종교 그 자체이다.

창조론과 진화론을 비교해 본다면, 우리는 창조론은 그 핵심에 있어서, 그리고 논리와 이성의 기초 위에서, 진정 과학적이라는 사실을 바로 말할 수 있다. 반면에 진화론은 창조론보다 훨씬 큰 믿음을 요구하기 때문에, 창조론보다도 더욱 더 종교적이다. 과학은 관찰, 반복적인 실험으로 입증되는 유한의 지식에 기초한다. 그러므로 과학은 사실이라고 단지 신뢰해 버리는 어떤 것이 아니다. 과거에 발생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진화는 입증될 수도, 실험될 수도 없다. 그냥 그것은 신뢰할 수만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믿음의 문제, 즉 창조론자들이 정반대라고 생각하는 그러한 믿음이다. 기독교인들은 신앙으로 창조의 사실을 믿는다. 진화론자들은 신앙으로 진화론의 사상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기독교의 믿음은 수시로 변하는 인간들의 견해에 기초하지 않고, 영원하고 불변하신 창조자의 말씀의 진리에 근거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과 종교가 최상의 존재에 대한 믿음과 숭배와 관련지어서만 생각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 자신의 지식과 지혜, 자신의 기술과 능력에 신뢰와 믿음을 둔다. 그래서 자신과 타인을 숭배한다. 마치 그들이 신(神)이기라도 한 것처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음악가, 운동선수,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을 숭배하는가? 고대인들이 자신, 선조와 생명 없는 우상들을 숭배함으로써 우상적 종교를 열렬히 실천하지 않았는가! 진화론자들의 믿음과 종교도 그와 다르지 않다. 종교에 관하여 진화론자들은 창조론자들과 다르고 서로가 정반대의 입장에 서있다. 교회와 국가에 보내는 편지라는 잡지에서 조지 허셔가 1987년 9월에 다음과 같이 썼다.

“창조론이 종교라고 여겨진다면, 진화론은 정반대의 입장에 서있는 종교이다.”

진화에 대한 모든 사상은 가설에 대한 믿음과 신뢰이다. 『진화의 교리』p.160에서 L. T. 무어는 다음과 같이 썼다. 즉;

“고생물학을 점점 더 연구하면 할수록, 진화론은 믿음에만 기초하고 있다는 것은 더욱 명백해진다. 종교의 거대한 신비에 직면할 때 반드시 갖추어야할 필요가 있는 비슷한 종류의 믿음이다.”

진화가 실험될 수 없고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진화론자들의 견해와 주장만을 기초로 해서 믿음으로 수용되어야 한다. 스웨덴 룬드 대학의 식물학연구소장인 N. 헤리버트-닐슨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40년 이상동안 수행되어온 실험으로 진화를 증명하려는 나의 시도는 완전히 실패했다....  진화론은 순전히 믿음에 의존하고 있을 뿐이다.” 

폴 에르리히와 L. C. 버치는 『진화론 역사와 인구생물학, 1967』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진화론은.... 경험적 학문 밖에 존재한다.... 어느 누구도 그것을 시험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할 수 없다. 진화론은 우리 대부분이 연습해야 할 일부분으로서 받아들여야할 진화적 교리가 되었다.”

그렇다. 교회의 교리문답식 수업에서 아이들이 성경을 배우듯이, 공립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진화론을 배운다. 진화론은 관찰과 실험으로 증명될 수 없기 때문에 신앙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우주의 기원은 믿음과 신앙의 문제이고, 기원에 관한 다른 진화론적 사상들도 믿음과 신앙의 문제이다. 진화론자들의 수중에서 이러한 사상들은 교리가 되었고 과학적 법칙으로는 증명되지 않았다.

진화론은 과학적 기반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진 후에도, 어떤 진화론자들은 계속해서 “나는 여전히 진화를 믿는다” 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신앙은 과학이 아닌 믿음의 문제이다. 그래서 많은 진화론적 사상들과 소위 “이론”들은 지난 일백 수십 년 동안에 중도에 낙오하게 되어, 전체 사상은 지금까지 의심받게 되었고 거부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 특히 지식인들의 정신을 지배하는 그 힘이 얼마나 강한가를 생각할 때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기독교보다 더 강한 종교적인 열정으로 거기에 매달린다. 그렇다. 그들은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 없을지라도 여러 번 믿음과 신앙에 매달린다.

진화론의 우화가 아무리 믿을 수 없다 해도, 진화론자들은 생명체가 단세포에서 고도로 진화된 인간으로 발전한 것처럼 믿고 있다. 우주의 기원에 관한 진화론의 우화, 그 속에 담긴 모든 우화 - 무기물질에서 단세포가 발전했다든가, 세포들이 어류로 바뀌는 이야기, 어류가 바다동물로, 바다동물이 육지동물로, 파충류로, 다시 포유류로, 그리고 원숭이로, 결국 인간으로 변한 이야기 - 이 모든 이야기를 믿으려면 놀라운 신앙과 믿음을 필요로 한다. 모든 생명이 단세포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모든 것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믿는 것보다 큰 믿음이 요구된다. 성경을 믿는 자의 믿음과 신앙은 진화론자의 믿음과 비교된다. 적어도 성경을 믿는 자는 생명의 기원이 비물질적인 어떤 원인임을 알고 있다. 과학은 모든 결과의 원인을 요구한다(인과율의 법칙). 진화론자들은 자신들이 믿는 것에 대한 원인조차도 갖고 있지 않다.

진화론은 확립되고 증명된 과학적 법칙과는 상반되기 때문에 진화론자의 믿음은 더욱 강해야만 한다. 영국의 진화론적 생물학자인 L. 해리슨 교수는 다윈의 1971년 판 『종의 기원』의 서문 p.x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즉,

“진화의 사실은 생물학의 뼈대(척추)이고, 따라서 생물학은 증명되지 않은 이론 위에 세워진 학문이라는 특별한 입장에 놓여있다. 그것은 믿음인가 과학인가? 진화론의 믿음은 특별한 창조의 믿음과 평행하다. 둘 다 신자들이 사실이라고 서로 알고 있는 개념이다. 그러나 둘 다 현재까지 증명될 수 없었다.”

진화론자들에게는 미래의 심판 날에 자신이 책임질 수 있고 결산해야할 절대자 하나님이 없다. 진화론자들에게 인간은 자신을 제외한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는 우월한 존재이고, 스스로의 운명을 조절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의 진화와 호모 사피엔스의 출현에 대한 이야기에서 라이프 자연도서관(1964)은 p.172에서 진화론들의 믿음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오늘날에 있어서만 인간은 세계를 재구성하고 가혹하지만 안정적인 물리적 선택의 행위를 새로운 문화적 진화와 유산으로 대신할 때 스스로 미래를 조절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 영원과 시대와 연대의 절정이 놓여 있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기영광과 자기 신격화에 빠져 하나님 없이 미래를 조절하려하고 있다. 그것이 우리 어린이들이 공립학교 교과서에서 교사들에 의해 가르쳐지는 진화론 신조로 주입되고 있는 종교적 신앙이다.

1981년 『진화 : 화석은 No 라고 말한다.』p.26 에서 듀안 기쉬는 다음과 같이 매우 정확하게 요약하여 말했다. 즉,

“그들은 이러한 진화론을 인본주의 철학과 결합시켰고 전체를 “과학”이라는 용어로 옷을 입혔다. “과학”으로 변장한 그의 신조로서 진화론적 철학을 담고 있는 산물, 즉 무신론적 종교는 미국의 공립학교와 대학에서 가르쳐지고 있다. 그것은 비공식적으로 국가가 공인한 우리의 종교가 되었다.“

『다윈의 재시도』p.126-129에서 노만 맥베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윈니즘은 종교 그 자체가 되었다.... 나는 진화론자들 사이에 종교적 태도의 특성으로 보이는 5가지의 징후들을 모아 보았다 :

1) 나(진화론)와 함께 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나의 적
2) 겁쟁이(진화론에 확신이 없는)들에 대한 비난
3) 전도(진화론 전파)의 열정
4) 완전한 (진화론에 대한) 믿음
5) 천년왕국설 (과학만능설)

3번에서 그들은 모든 고등학교에서 전액 세금으로 진화를 가르쳐야한다고 생각하고, 5번에서 그들은 인간이 미래를 통제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진화론자들은 지상천국이라는 종교적 개념을 가지고 있다. 진화론자들은 과학이라고 부르는 거짓된 자기들의 진화론 사상을 숭배한다. 이러한 과학만능에 대한 그들의 신앙은 종교의 형태가 되었고, 그것은 곧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상에서 인류 복지를 위해 추진하는 물질적 진보에 대한 믿음이다.

창조자가 없고,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 없이 스스로 진화해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경지에 올랐다는 진화론자들의 신앙은 창조자를 믿는 기독교인들의 신앙만큼이나 종교적이다. 무신론의 반(反)종교적 행태는 유신론과 마찬가지로 종교적이다. 기원에 대해 설명할 때, 가정이나 교회학교에서 종교적으로 자녀를 교육시키는 기독교인 부모들과는 정반대의 입장에서, 진화론자들은 우리의 자녀들에게 반종교적인 종교적 믿음과 신앙과 교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진화론은 그 자체가 종교라고 볼 수 있는 우화이며, 동시에 기독교 및 다른 종교와는 정반대의 입장에 서있다. 에드윈 콘크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진화론이라는 종교는 다음 세상보다는 이 세상을 취급한다.”

여러 진화론자들도 진화론이 종교로 간주된다는 진술을 해왔다. 메이나드 메트카프(Maynard Metcalfe)는 1925년 원숭이 재판 기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인간의 영혼 속에서 자라나는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진화론적인 방식을 인식하지 않고서는 자각될 수 없다.”

그에게 진화와 하나님은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의 경우처럼 나란히 함께한다. 그래서 유신론적 진화론과 무신론적 진화론은 둘 다 종교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진화론으로 간주된다. 이 책의 말미 11번째에 있는 “진화론은 왜 과학이 아닌가?”를 참조하라.


출처 - 앨버트 시퍼트의 [진화론의 비과학성 : 그 32가지 이유들] 번역


미디어위원회
2005-12-16

진화론은 반(反)종교적 신념이고, 종교 그 자체이다 - 2

 : 진화론은 반종교적 철학이다.

유종호 


2. 진화론은 반(反)종교적 철학이다.

만약 진화론의 우화가 단지 추측이고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하다면, 아이들에게나 성인들에게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반종교적이고, 동시에 그 자체가 종교이다. 더욱이 상황을 기만적이고 위험하게 만드는 요소는, 진화론자들이 진화론을 과학적 사실이라고 포장을 하고 변장을 시켜서 그것에 대한 믿음을 조장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진화론은 하나님을 불필요한 존재로, 심지어 존재하지 않는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알프레드 레윈켈은 『창조의 경이』p.140에서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썼다.

“진화론자들은 진화라고 불리는 막연하고 몰개성적이고 비존재적인 힘을 신격화하고 있다. 이러한 힘은 인과의 법칙을 완전히 무시하고, 우연의 원칙에 따라 작용한다. 그것은 지지할 만한 이성이나 경험과 같은 것을 담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힘을 “무(nothing)”라는 “어떤 것으로부터 모든 경이로운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자로서 간주하는 것이다. 가장 어두운 이단들의 터무니없는 신화와 비교해서도 새로운 형태의 우상숭배는 더욱 비합리적이고 부조리하다.”

E. H. 앤드류는 『진화는 과학적인가?』p.3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화론을 있는 그대로 과학적 학문이 아닌, 철학이며, 때로는 종교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할 때, 진화론은 하나님 신앙을 불필요하게 만든 당초의 목표를 달성했다. 만약 인간이 동물계와 함께 진화라는 맹목적인 과정에서 비롯된 산물이라면, 하나님은 존재하시지 않거나, 가장 좋게 말해도 우리 자신의 사회의식에서 제작된 인위적 산물일 것이다.”

미네소타 주의 성 베드로에서 있었던 노벨회담ⅩⅧ(1982.10.5-6)에서 진화론 연설가들이 취한 반종교적인 태도는 분명했다. 성경공회의 이사진인 버논 할리는 멘카토 『프리 프레스』에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 연사들은 최고위 과학자들로 분류되어 있는 종교적인 창조론자들에게 경멸적인 표현과 적개심을 서슴없이 드러냈다. 여러 수필가들은 창조론자들의 입장을 반지성적이고, 비과학적이라고 신랄하게 비난했다.... 이러한 논평들은 실로 비난적이었으나, 회의는 공격당한 사람들에 대한 답변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아이들이 종교적인 신앙 때문에, 그리고 진화론의 수십억 년의 시간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얼마나 자주 선생님들에게 꾸지람을 들었는가?

헨리 모리스와 듀안 기쉬가 쓴 『창조를 위한 전쟁』p.9에서 진화론자들의 토론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큐이트(Kuijt) 박사가 준비한 진술의 나머지 부분은 성경과 기독교, 그리고 기독교인들에 대항하는 정말 통렬한 비난이 아니었는가! 어떤 기독교인들에게도 발언의 기회를 주지 않은 채, 그는 자신의 무신론적인 간증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는 진화론을 지지해줄 과학적 논쟁을 제시하지 않았으며, 기쉬 박사가 제시한 과학적 증거를 반박하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그의 발표는 진화론은 창조론 만큼이나 종교적이라는 기쉬 박사의 주장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모리스와 기쉬 박사는 미국과 캐나다의 대학에 있는 진화론자들과의 수많은 토론에서, 똑같은 진화론자들의 태도와 그들의 과학적 증거의 부재를 만나게 되었다. 『행위와 사실, 1985. 12』p.4에 보면;

“패터슨 박사는 자신의 과학적 자료를 주로 미세한 변이에 대한 증거들만을 제시한 채, 성경과 기독교신학, 그리고 창조론자들에 대한 반복적인 공격으로 일관했다. 과학보다는 종교에 대해 계속 강조함으로서, 결국 중재자의 동정을 유발하였다.”

만일 하나님 신앙(유신론)이 종교적인 믿음, 교리, 그리고 가르침에 불과하다면, 하나님을 거부하고 부인하는 무신론도 그러하다. 진화론과 무신론은 나란히 손잡고 진행한다. 진화론이 공립학교에서 교육되고 있어 학생들이 그것에 세뇌되어지고 있기 때문에, 진화론과 무신론은 미국의 헌법과는 반대로 이러한 학교에서의 종교가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점점 더 심각해질 것이다.

진화론자들은 매우 영리하다. 방어하는 최선의 방법은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진화론자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종교적이거나 반종교적 암시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함으로써 공격적인 태도를 취한다. 나일스 엘드리지는 『사기사건, 1982』 p.145-6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러나 만약 진화론이 개인의 특별한 윤리 기반으로 작용한다면, 창조론자들이 주장하듯이 그러한 특성이 진화론을 종교로 만드는가? 확실히 아니다. 이것은 1981년에 캘리포니아에서 넬 세그레이브가 “Scopes II' 에서 주장했던 것이지만, 세그레이브에게 진화론이 종교인 것만큼이나 창조론은 과학이 아니다. 만약 당신이 종교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세속적 인본주의”라는 일반적인 종교적 양상이다. 그러나 어떠한 실험적인 과학자들도 그들의 연구에서 초자연적인 것을 유도하지 않는다. 반면에 종교적 가치가 있는 모든 이름은 초자연적인 개념을 포용하고 있다. '

종교적인 것과 반종교적인 것은 단순히 사람이 “초자연적이라는 감을 불러 일으켜야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믿음과 윤리와 행동의 체계를 의미하고 포괄한다. 웹스터 사전은 다음과 같이 종교를 정의한다.

“믿음, 실천, 그리고 윤리적 가치 등등의 어떤 시스템, ‘인본주의가 그의 종교다’에서와 같이 그런 시스템과 유사하고, 그것을 암시하며, 그것과 비슷한 시스템”

진화론자들은 창조를 거부하고 창조자의 존재를 부인하는 믿음의 시스템을 확실히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인류가 신을 필요로 하지 않고 신이 없이도 스스로 돌볼 수 있다고 믿는 점에서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가치체계를 가지고 있다.

종교적이기 위하여 초자연적인 요소를 언급할 필요는 없다. 비록 진화론이 초자연적 개념을 포용하지는 않을 지라도, 진화론자들은 신의 부존재라는 종교적인 개념을 가르치고 있고, 동시에 창조의 종교적인 믿음을 반대하는 종교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종교를 반대하는 반종교적 사상을 발전시키고 있다.

엘드리지는 p.146에서 다음과 같이 계속한다.

“요즘 생물학자들이 우리가 지상에 출현한 방식에 대한 설명으로서 진화론을 대신할 수 있는 대안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 진화론적 생물학에 “종교”라는 이름표를 붙일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진화론적 생물학자들이 진화의 대안을 찾을 수 없지만, 성경에 나타난 대안은 반대한다는) 단순한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진화론적 생물학은 반종교적인 신앙이거나 신조이다. 그러한 사실이 진화를 반종교로 만드는 것이다.

나일스 엘드리지는 반종교적이고, 반(反)초월적인 가르침을 무시함으로써, 진화론이 갖고 있는 종교적인 측면을 부인하려고 한다.

창조자, 또는 창조의 능력이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간에 모든 물질을 설명할 수 있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근거가 될 수 있을 지라도, 진화론은 더 높고 비물질적이며 초자연적인 창조적 원인 또는 존재를 포용할 수 없는 것이다.

엘드리지는 말하기를 “그러나 실천적인 과학자들은 자신의 저서에서 초월적인 요소를 기원하지 않는다.” 그렇다. 참 과학자들도 그러하지 않다는 것은 맞다. 그러나 진화론자들은 기원과 관련하여 진화론적 우화를 통해 초자연적인 요소를 기원한다. 그들의 종교에 있어서 초자연적인 요소는 물질이 갖고 있는 자연의 법칙을 역행하면서 자연을 초자연적으로 이끄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기를 비록 진정한 과학이 생명은 오직 생명에서만 비롯된다고 언급했는데도 불구하고, 지구상의 생명체는 결국 무생물에서 발전했다는 것이다. 진화론자들은 무생물에 대한 초월적인 요소를 주장했으며, 그것은 결국 그들의 종교적 신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용적인 과학자들이 자신의 작품에서 초자연적인 요소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는 진술은 진화론자들이 과학자라고 믿도록 유도함으로써, 사람들을 착각에 빠트리려는 영악하고 기만적인 시도이다.

진화론자들은 신의 부재와 창조의 불가능성을 통해, 반창조론적이고, 반종교적인 동시에, 종교적인 사상을 조장하고 있다. 그들은 우주가 무에서 나올 수 없거나, 열역학 제1 법칙에 따라 스스로 창조될 수 없음을 안다. 그런데 그들은 우주를 만들 수 있는 비물질적 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종교적으로 그들은 신의 부재와 신에 대항하는 무신론자들이다. 나폴레옹은 정확하게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 것이 성경에 들어 있지 않다면 이상한 것이다.” 

그렇다. 진화론자들은 어떻게 창세기 12장 이하의 역사와 조화를 이루고, 창세기 1장에서 11장까지의 내용을 무시하며 대항하는 선사(先史)의 내용을 전할 수 있겠는가? 많은 책을 쓴 진화론 우화 작가인 아이작 애쉬모브는 이러한 진화론자들의 어리석음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정서적으로 나는 무신론자이다. 나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입증할만한 증거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나는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주 심각하게 의심하면서 나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다.” 


출처 - 앨버트 시퍼트의 [진화론의 비과학성 : 그 32가지 이유들] 번역

미디어위원회
2005-12-15

진화론은 반(反)종교적 신념이고, 종교 그 자체이다 - 1

 : 진화론은 추측이고, 꾸며낸 이야기이며, 허구이다.

유종호 


1. 진화론은 추측이고, 꾸며낸 이야기이며, 허구이다.

첫째로 우리는 진화가 단순한 추측이며, 우화이고, 허구라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적어도 진화론자인 아이작 애쉬모브의 많은 저술들을 “과학의 허구”라고 칭하는 것에 대해 신뢰해야 한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글은 “진화의 허구”라고 불려져야 한다. 진정한 과학은 결코 허구가 아니다. 사람들이 진화론자들에게 가설과 이론에 관하여 질문한다면, 그들은 “과학적 추측”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과학에 있어서 추측은 거짓일 지도 모른다. 과학자는 가설을 설정할 때 추측할 수 있지만, 그런 추측이 과학적 이론으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

단순한 추측의 좋은 예는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달에 관한 생각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폴로 11호가 돌아오기 전에는 많은 종류의 추측들이 만연해 있었다. 어떤 이는 우주선원들이 달 표면의 먼지 속에 깊이 가라앉을 수도 있다고 믿었다. 또 다른 빗나간 추측은 달 먼지에 달 세균이 가득하여 독이 있거나, 위험요소나 역병(疫病) 등이 있다고 믿었다.

『붕괴하고 있는 우주, 1977』p90에서 아이작 애쉬모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27년에 벨기에의 천문학자인 조오지 르메트르(George Lemaitre: 1894-1966)가 시사하기를.... 수십억 년 전에 우주의 물질은 모두 한 곳에 원시 원자라고 부르는 구조를 형성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우주의 알(egg)이라고 불렀다. 얼마나 오랫동안 우주의 알이 존재했는지, 그리고 그 알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하여 르메트르는 감히 추정하려하지 않았으나, 어느 순간에 그것은 확실히 폭발되었다.”

르메트르는 원시 원자의 구조와 그것이 존재한 기간을 추측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진화 이론들이 단순히 추측하는 것과 똑같이 그것이 존재했다고 단정적으로 추측했다. 이러한 사실은 루스 무어의『우리가 사는 지구, 1956』p.292에 잘 진술되어 있다.

“그러나 지구, 달, 그리고 태양과 행성들이 원시의 먼지구름에서 진화했다는 결론에 일치점이 모아진다. 그러나 이 지점을 넘어서는 불확실성과 불가해성과 모순점은 끝도 없다.”

p.400에서 루스 무어는 동료 진화론자들이 납에 관련하여 행한 추측과 지구의 연령에 관하여 내린 결론적인 추측을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아더 홈스는 지구가 시작했을 때 Pb207을 포함하지 않았을 것으로 가정하였으며, 따라서 현재의 지각에 존재하는 Pb207은 모두 U235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납이 형성되기 위해 걸린 시간을 계산해서 그는 지구의 연령이 33억년이라는 계산을 해냈다.”

그러한 거짓 가정과 추측으로 지구 연령이 수십억 년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믿는다』p.17에서 야곱 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물질과 우주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그것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과학은 이러한 질문에 아무런 대답이 없다.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우리는 믿거나 추측을 해야 하는데 추측도 믿음도 과학은 아니다. 우리가 그러한 질문에 답하려는 순간 우리는 과학의 범주에서 철학적 사변으로, 그리고 믿음의 범주로 넘어간다.... 진정한 과학자는 사실들을 취급해야한다.”

그렇다. 입증할 수 있고, 증명할 수 있고, 거짓임을 밝힐 수 있는 사실들 말이다.

진화론자들이 뉴스 매체를 통해서 과학으로 넘어가려고 노력한 모든 것들은 추측이었고, 단순한 우화일 뿐이다. 좋은 예는 <라이프의 자연 도서관, 1964> p.111에 나와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만약 생명이 스스로 자기복제를 해서 경이로운 용량을 가진 분자들로서 시작을 해서, 나중에 단세포로 발전하고, 소수의 연질 세포집단으로 변했다면, 그것은 최소한의 흔적도 남길 가능성이 없다. 그러나 20억 년 전에 지구 어디에선가 생명은 발원했다.... (p.112로 이어진다). 아래턱뼈는 어류 전체에 두루 퍼져있다.... 더구나 이러한 초기 턱뼈의 물고기들은 놀라우리만큼 성공적으로 다른 후손으로 대치되었다. 수영을 잘하기 위해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을 통해 더 좋은 지느러미가 생겼고, 급기야 물 밖으로 나오게 됐다. 하천이 여름 가뭄으로 메마른 후, 그들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연못에서 살았다는 것은 그럴 듯한 추측이다. 물고기가 메마른 연못에서 더 물이 많은 다른 연못으로 뛰었겠는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오랜 시간동안 물 밖에 있을 수 있었던 그러한 물고기들은 생존했을 것이고, 대기에서 호흡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후손으로 남게 되었다.”

이 우화는 p.113으로 계속 이어진다.

“익티오스테가(ichtyostega, 물고기와 양서류의 중간 생물로 주장됨)는 물고기 꼬리에 폐와 잘 발달된 다리, 그리고 발을 가지고 있었다. 허파와 걷는 발로 이러한 물 밖의 물고기는 그들에게 널려있던 아주 새로운 음식을 먹었다. 그들은 냇가를 따라 기어 다닐 수 있게 되었고, 떼 지어 다니는 곤충들을 낚아 챌 수 있었다. 땅은 그들 앞에 무한대로 열려 있었다. 왜냐하면 어떤 다른 척추동물도 그것과 경쟁하기 위해 그곳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그렇게 일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곤충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그에 대한 설명은 계속 이어진다.

“충분한 시간 속에서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으로 인하여 기적이 일어났다. 어떤 양서류들은 알을 발전시켰다.... 물에서와는 달리 새롭게 발견된 자유로움으로 파충류들은 지구를 차지하고 파충류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시간이 계속 흐름에 따라.... 어떤 파충류는 완전한 조상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물로 돌아갔다. 되돌아간 파충류들은 허파로 호흡을 했고, 반면에 그들의 발은 물갈퀴와 지느러미로 바뀌었다. 어떤 파충류는 놀랍게도 마치 현대의 고래나 거북이처럼 보였다.”

얼마나 환상적인가. 이러한 이야기에서 진화론자들은 우리한테 역진화, 즉 육지동물이 다시 물에서 사는 고래가 되었다고 설명한다. 훨씬 더 놀랍게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떤 다른 파충류들은 대기 속으로 모험 여행을 했다.”

『우리 지구의 이야기, 1956』p.24에서 리처드 캐링턴은 다른 진화 이야기의 좋은 예를 제공한다.

“지구에 대기가 없었던 시기에.... 그러나 점차.... 구름이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은 저절로 발생했다고 추정된다. 구름은 어디서 온 것인가? 비는 어디서 온 것인가? 그들이 주장하는 소위 수십억 년 동안 달에도 대기가 없었지만 구름과 비가 지금까지 내리지 않았다. p.73에서 그는 말하기를;

“우리는 합리적으로 가정할 수 있다. (p.75의) 이러한 추측은 (p.121의) 우리의 생각에 도움을 준다. 우리가 단지 추측할 수 있는 (p.198의) 이야기의 목적을 위하여 도움을 준다.”

p.203과 p.204에서 그는 진화론자들이 전적으로 감안이설로 판명된 필트다운인의 연령에 대하여 틀린 추측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진화론의 이야기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목이 길어진 기린의 이야기이다. 기린이 높은 나뭇가지의 잎사귀를 따먹기 위해 목을 뻗침에 따라서 목뼈가 점점 길어진다는 내용이다. 그것은 아주 영리한 우화이지만 원시인들조차도 이와 같은 우화를 개발했다. 그러나 발견된 모든 기린의 화석을 살펴보면, 기린이 진화했으리라고 추정된 모든 기간 중에 짧은 목을 가진 기린을 찾아 볼 수 없다.

이솝우화를 읽고 있는 어린이들과 진화론의 환상적인 이야기를 읽고 있는 성인들 사이의 차이점은, 어린이들은 이솝우화가 사실이 아니고 우화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성인들은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출처 - 앨버트 시퍼트의 [진화론의 비과학성 : 그 32가지 이유들] 번역

Headlines
2005-11-22

가톨릭 천문학자가 교황에 대해 흥분하다 

: 그리고 다른 지적설계(Intelligent Design) 전투들 

(Catholic Astronomer Takes On the Pope, and Other ID Battles)


      교황 베네딕트 16세가 지적설계를 지지하자(11/10/2005), 그의 궁정의 한 천문학자가 그것을 즉각적으로 거부했다. 바티칸 천문관측소(Vatican Observatory)의 예수회 임원(Jesuit director)인 조지 코인(George Coyne) 신부는 NCSE의 각본을 읽는 듯한 발언을 하였다. ”지적설계론은 과학인 척하지만 과학이 아니다.... 만약 당신이 학교에서 지적설계가 가르쳐지기 원한다면, 과학 시간이 아니라 종교나 문화역사 시간에 가르쳐져야만 할 것이다...”

LiveScience는 지적설계를 반대하는 글들이 계속되기를 기대하며 이 이야기를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었다. 코인은 계속해서 주장했다. 신앙인은 지배자 하나님(dictator God) 또는 뉴턴식 ‘시계장치 우주(clockwork universe)’를 창조하신 설계자 하나님(designer God)의 개념을 포기하여야만 한다. 대신에, 그의 최종 목적을 이루기 위해 진화(evolution)를 사용하는 ‘격려하는 부모(encouraging parent)’ 로서의 하나님, 즉 허락, 참여, 사랑은 하시나, 간섭은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개념을 받아들여야 한다. Evolution News 는 이 이야기를 싣고 있는 뉴스 매체들이 교황보다 더 가톨릭적인 것처럼 표현하고 있다. 브루스 채프맨( Bruce Chapman)은 코인의 견해가 공식적인 바티칸의 입장을 나타낸다고 주장하는 것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설명하였다.

다윈적 진화론과 지적설계론 사이의 싸움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여기에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논란들을 소개한다 :


생명과학의 변호 : BioScience 저널은 지적설계를 공격하는 두 개의 기사와 한 논설, 그리고 과학 교실에서 그것을 패배시키기 위한 전략적인 방법들을 게재하였다. (기사들 중의 하나에 대해서는 11/01/2005을 보라). 

코넬 학생들 대 그들의 총장 : Cornell Sun 지의 선임 편집자는 대학 캠퍼스에서 이루어진 지적설계 토론에 대한 보도에서, 총장의 반-지적설계 발언에 대하여 지적설계를 찬성하는 교수들과 반대하는 교수들의 명단을 발표함으로서 반응했다. 자오웨이 탕(Xiaowei Cathy Tang)은 그것은 단지 학생들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 일부 교수들도 대학과 국가는 일부 진화론에 대한 유효한 도전으로서 지적설계를 바라보도록 주장하였다.

진화론 보수주의자들 : CEH 독자들은 유명한 보수적 컬럼니스트인 조지 윌(George Will)과 찰스 크라우탐머(Charles Krauthammer)의 글에 대해서 워싱턴 포스트 지에서 반-지적설계 글들을 썼다. 크라우탐머는 ”깨끗하게 되도록 하자. 지적설계론은 신학으로서는 흥미로울 수 있지만, 과학으로서는 아니다. 그것은 사기이다.” 그는 지적설계를 ”진화론을 하나님의 적으로 만들기 위한 터무니없는 짓”이라고 불렀다. 그는 또한 캔자스 교육위원회가 그것을 만들었을지라도, ”연체동물이나 쥐, 뉴턴이나, 아인슈타인을 우리들에게 주기위해서 태초에 유연하고 창조성이 풍부한 하나의 이중 나선구조 물질을 그리는 것이 더 우아하고, 더 간단하고, 더 뛰어나고, 더 경제적이며, 더 창조적이고, 정말로 더 신성하다”고 하면서 능글맞은 웃음으로 끝을 내고 있다. EvolutionNews에서 조나단 위트(Jonathan Witt)는 크라우탐머는 허수아미(straw man)를 녹다운시켰다고 주장하였다. 

누구의 허풍? : 테네시 주의 톰 보흐(Tom Bohs)는 Jackson Sun 지에서 맹렬한 반-지적설계 논설을 썼다. 그러나 그의 장황한 조롱, 과대포장 전략, 인신공격 등은 일부 독자들에게는 역효과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 ”만약 당신이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다면, 나는 당신을 위해 진화된 이론 하나를 추천하겠다. 그것은 지적설계론 이다. 이것은 사이비 과학이다. 일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사회를 속이려 시도하고 있는 중이며, 공립학교의 생물 시간에 그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구매 권유에 넘어가지 말라. 그것은 과학이 아니다.”

인디애나의 여론 조사 : 메리 슈나이더(Mary Beth Schneider)는 Indianapolis Star 지에서 지적설계에 관한 수위를 시험하고 있는 GOP 주 의원에 관하여 썼다. ”우리는 이것이 사람들에게 핵무기 버튼 인지를 알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입니다.” 인디애나 의회 다수당 리더이며, 이 이슈에 대한 조사에 포함됐던 36명의 공화당 입법자 중의 1명인 빌 프렌드(Bill Friend)는 말했다.

아이오와 대학의 ID 반대 : The Tribune 지는 지적설계론을 반대하는 성명서에 서명을 한 150명 이상의 아이오와 대학(University of Iowa) 교수들에 대해서 보도하고 있다.  

내일 태양은 떠오를 것이다 : 말레이시아(Malaysia) 신문에서, 스테판 탄(Stefan Tan) 박사는 진화론은 죽어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다음의 말로 끝내고 있다. ”우주가 우연히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믿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대진화는 그것을 거부하는 증거들의 압도적인 증가로 인해 관 속에 들어가 못 박히게 될 날이 멀지 않았음을 나는 믿고 있다. 일부 사람들은 태양이 떠오르기까지 온 밤을 기다리는 것을 좋아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인가?”

기자들이여, 바로 전하라 : 캔자스 과학 기준에 관한 반복적인 언론의 잘못된 보도에 실망하면서, Evolution News는 50 개 모든 주들의 과학 기준에서 과학에 대한 정의를 목록화했다. 뉴욕 타임즈와 다른 신문들은 캔자스가 어떤 현상들에 대한 ‘자연주의적 설명(natural explanations)‘을 강탈함으로서 과학의 정의를 위험하게 변화시켰다고 주장했었다 : LiveScience에서 케르탄(Ker Than)은 과학 안으로 ‘초자연적 설명(supernatural explanations)’들을 가지고 들어왔다고 캔자스를 비난하였다. 투표 이전에, 기록은 캔자스가 과학의 정의 안에 방법적 자연주의(methodological naturalism)를 깊숙이 가지고 있었던 유일한 주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새로운 정의는 다른 40개 주의 정의와 가깝다. 반면에 9개 주는 과학의 정의를 명기하고 있지 않았다.


  

누가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있는지, 누가 정직하고 정확하게 보도하려고 애쓰고 있는지, 누가 반복적인 험담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진정한 싸움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윈당원들이 일상적인 진흙탕 싸움과 권위적인 행동들에 의지하고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 즉, 그들은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티칸 천문학자의 발언 이후에 그 싸움이 어떻게 전개될지 기다리고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코인 신부는 자기가 말했던 것에 대한 모순을 알지 못했다. 가톨릭 신앙의 특성들은 창조, 타락, 동정녀 탄생, 부활 등 인류에게 일어났던 사건들에서 하나님이 실제적으로 간섭하고 계셨음을 포함하고 있다. 진화론자들은 지시되지 않고, 방향성이 없으며, 목적이 없는 진화를 원하고 있다. 정신분열증(schizophrenia)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것이 가톨릭과 화해될 수 있다는 것인가?

코인 신부는 그의 신앙(faith)보다 그의 과학적인 평판(scientific reputation)에 더 가치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교황 베네딕트 16세보다 교황 찰스 다윈에게 더 충성하고 있는 것처럼(02/13/2004) 보인다. 교황과 신부의 다른 시각에 대한 언론 보도는 대립을 강요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중요한가? 진화론자들은 그들의 벌거벗은 유물주의(materialism)을 방어하기 위해, 종교적 유명인사로부터 지지 발언을 절망적으로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참조 기사 :

1. 바티칸 학자, '지적설계론은 과학 아니다' (2005. 11. 21. 연합뉴스)

2. 바티칸發 ‘지적설계론’ 논란 재연 (2005. 11. 21. 국민일보)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creationsafaris.com/crev200511.htm 

출처 - CEH, 2005.11. 19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986

참고 : 2969

Headlines
2005-11-14

교황은 지적설계를 지지하였다.

(Pope Affirms Intelligent Design)


      진화론 찬성자들이 진화론에 대한 가톨릭의 입장을 반대하는 한 주교(bishop)를 이용하고 있었을 때 (일부 역사적 배경과 함께 쓰여진 영국 Times Online의 글을 보라), 교황(Pope)은 신자들이 지적설계(intelligent design)를 기꺼이 받아들일 것을 기대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하였다. Discovery Institute는 교황 베네딕트 16세(Pope Benedict  XVI)가 무신론(atheism)과 방향성 없는 진화론(directionless evolution)을 공격함에 있어서 '지적 프로젝트(intelligent project)” 라는 단어를 사용했음을 기뻐하였다. Evolution News는 교황의 발언이 최초에 보고 되었던 것보다 강경해졌다는 이야기를 곧 바로 보도하였다. 그 단어는 '지적 계획(intelligent plan)”으로 번역되었어야만 했다. 그리고 무신론과 방향성 없는 물질주의(materialism)에 반대하고 있는 직접적인 발언도 포함하고 있었다.



물론 교황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주문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의 발언은 아직도 유신론적 진화론(theistic evolution)을 허락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발언은 일반적으로 진화론에 대해 부드러운 종교적 반대를 희망했던 진화론자들에게는 하나의 타격일 것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교황이 수억 명의 가톨릭 신자들의 충성(allegiance)을 명령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진화론은 "하나의 가설 이상(more than a hypothesis)” 이라는 애매한 발언을 왜곡하여 왔었다. 교황 베네딕트 16세의 더욱 분명한 발언은 무신론과 위장된 진화론에 대한 반대와 더 많은 논쟁을 일으킬 것이 확실하다. 진화론에 대한 진화론자들의 해석에 있어서 키(key)는 진화론은 원인이 없고(uncaused), 지시됨이 없으며(unguided), 방향성이 없다는(directionless) 것이다. 교황은 이러한 믿음을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지적설계와 유사한 '지적 계획” 이라는 단어를 실제 사용하였다. 라즈카노(Sr. Lazcano)는 이것에 대해 무엇이라 할까? (11/04/2005의 이야기를 보라)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creationsafaris.com/crev200511.htm 

출처 - CEH, 2005.11. 10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969

참고 :

미디어위원회
2005-10-31

현대 진화론의 역사 - 4 

: 여러 모양의 진화론자들

유종호 


7. 잘못을 시인한 진화론자들

비록 다윈과 그의 동료인 월리스가 진화를 마음에 품고 진취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을지라도, 그들은 생명의 기원을 설명할 수 없었고, 그 문제는 그들에게 미해결 과제로 남아있었다. 다윈은 태초의 어디에선가 창조주가 계셨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말했다.

"창조주께서 여러 가지의 힘을 가지고 첫 형상에게 최초로 숨을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한 방식에는 웅장함이 있다.”

만약 생명이 창조되어야만 했었다면, 왜 그 밖의 다른 것들은 창조될 수 없었겠는가? 다윈은 여기서 우연히 자신의 전 진화론이 잘못된 것임을 시인했던 것이다.

알프레드 월리스는 생명이 식물의 세계에서 동물의 세계로 진화한다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은 물질과 그것의 법칙과 힘에 의한 설명의 가능성을 완전히 초월하고 있다.”

다시 한번 원조 진화론자가 자신의 이론이 근거가 없으며 빗나간 것임을 시인했다.

다윈의 사상을 확산하려 애를 썼던 ‘다윈의 불독” 토머스 헉슬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반적 단어의 의미에서 창조는 있을 법한 일이다. 나는 이러한 우주가 이전의 어떤 기간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존재 이전의 어떤 분의 의지에 상응하게 6일 간에 걸쳐 출현하게 되었다라고 쉽게 생각하게 되었다.” (레오나드 헉스리 저, 토마스 헉스리의 생애와 편지들 p429).

물고기 연구에 최우선적이었던 에롤 화이트는 말했다.

"나는 법정에서 유기적 진화를 입증할 방법이 없다고 자주 생각했다.” 


8. 토론하기를 거부하는 진화론자들

미국과 전 세계에 걸쳐 수많은 대학에서 1972년 10월부터 16년 동안 창조과학회의 헨리 모리스와 듀안 기쉬 등 창조론자들과 여러 제목들로 기원과 관련된 교수 및 박사 등 진화론자들 사이에 토론이 진행되어왔다. 헨리 모리스 박사는 『현대 창조론의 역사』p.263-265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러나 최초의 공식적인 조직을 갖춘 창조과학회(ICR)에 관하여 캔자스 주 미주리 대학의 교수인 로봇 갠틸과 내가 1972년 10월에 토론했다. 나는 다른 모임 때문에 캔자스에 가 있었고, 어쨌든 그 지역에 머무르게 되었음으로 크리스천 모임에 소속된 어떤 학생이 나에게 대학 캠퍼스에서 토론할 용의가 있는지를 물어왔다. 나는 다른 대중연설 혹은 토론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마지못해 동의했다. 나는 진화론의 전문가가 토론에서 무슨 새로운 증거와 논쟁을 전개할는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나의 두려움은 괜한 걱정이었다. 갠틸 박사의 경우도 그 문제에 취약했고 거의 관련이 없는 상태였다. 그는 단지 나의 논지에 답하는 정도로 미약했다. 나는 그가 더 잘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지만, 그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준비가 거의 되어있지 않았다. 여하튼 학생신문에 따르면 창조론의 확실한 승리였고, 그 말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곧 기쉬 박사와 나는 다른 대학 캠퍼스에서 비슷한 토론에 참가해 달라는 또 다른 초대장들을 받고 있었다..... 대학신문과 사회단체신문에서조차도 창조론자들의 승리에 동의하는 것 같았다. 최초의 4사람의 토론은 오클라호마 대학에서 1973년 1월에 있었다. 진화론자 2명은 지질학자인 데이비드 키츠와 생물학자인 허버트 프링스였다. 2명 모두 훌륭한 과학자였으며, 그 분야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다시 청중과 신문들은 토론에서 창조론의 승리가 확실했다고 보도하였다..... 나는 신속하게 이 상황에서 두려울 것이 없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러한 토론의 재미를 알 수 없었다.... 나는 여전히 그러한 토론을 피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36번 정도의 토론에 참가했다.”

"기쉬 박사는 토론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그는 엄청난 지식의 소유자이며 기억력이 대단하다. 그는 열정적인 토론자이다. 그는 지금까지 100번 이상의 토론에 참가했다. 우리는 항상 진화가 과거에 발생한 적이 없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화석을 이용하는 등의 과학적 논리에 집착하는 편이다.... 그러나 진화론자들은 그러한 과학적 논리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들은 성경을 공격하고, 창조론자들이 종교적 동기를 가지고 있으며, 사람들은 종교적일 수 있고, 아직도 진화를 믿고 있다고 주장하며, 창조론은 과학적이지도 않고, 우리의 인격 또는 자격을 공격한다.”

"그러나 그들이 할 수 없었던 한 가지는 진화에 대한 과학적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대진화의 진짜 과학적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창조론자들이 토론에서 항상 승리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토론을 잘하기 때문이 아니라, 창조가 진리이고, 진화가 거짓이며, 진정한 과학이 이 점을 뒷받침해 주기 때문이다.”

‘Macro’는 거대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대진화(macroevolution)'는 한 동식물 종이 또 다른 종으로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물고기가 지상의 동물로 변하는 것이나, 고양이가 개로 변하는 것을 의미한다.

『진화라는 고통의 바다』p.121 에서 헨리 모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본인과 창조론의 많은 동료들은 대학 캠퍼스에서 저명한 진화론자들과 많은 공식적인 토론에 참가했었다. 진화론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엔트로피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다룰 수 없었다. 그들의 상대방이 토론에서 그것을 주요 문제로 다룰 때조차도 그들 대부분 그것을 무시한다.”

이 책에서 내가 쓴 열역학 제2법칙 부분을 참고하라.

듀안 기쉬 박사는 1975년 2월에 예정된 토론자로의 참가를 취소하고, 학생들이 토론하도록 후원하는 방식으로 뉴올리언스 대학에서 스케줄을 잡았다. 학생들은 뉴올리언스의 여러 대학에서 진화와 생물학이라는 주제의 공식적인 강의에서조차도 진화론을 옹호할 수 있는 생물학자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기쉬 박사는 1974년 10월과 11월에 캐나다의 서해안에서 동해안에 걸쳐 있는 13개의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온타리오, 킹스턴에 위치한 퀸 대학에서 어떤 교수에게 기쉬와의 토론이 권장되었으나, 그는 기쉬의 저작물들이 부정직하고 심지어 극악무도한 기반 위에 서있다는 이유를 들어 토론을 거절했다. 그러나 기쉬는 거기서 강의를 했고 지속적인 찬사를 받았다. 토론하기를 거절했던 교수도 그 자리에 있었으나, 다른 사람들은 질문을 하는 데도 기쉬에게 도전하지 않았고,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1985년과 1986년에는 토론을 거절하는 일이 규칙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조지아 대학에서 1986년 2월 6일에 학생들은 진화론 교수들에게 기쉬와 토론하도록 청했다. 부탁받은 교수들이 모두 거절했다. 결국 고생물학의 박사학위를 취득한 콜럼버스 대학의 조교수인 슈위머 박사는 처음에 우주의 기원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겠다고 말했으나 토론하기로 동의했다. 그는 화석이 진화의 직접적인 증거라고 피력했다. 그러나 기쉬는 화석에 있어서 연결고리의 결여를 지적했다. 진화론의 전도사와 옹호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에 대한 과학적 기반의 결여를 드러냈다. 1987년 11월 9일에 헨리 모리스와 휴스턴 대학의 교수 사이의 토론이 과학적 창조론을 원치 않았던 학교직원으로 인해 취소되었다. 일상적으로 진화론자들은 자신의 이론을 발표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모리스 박사는 자신의 책 『창조와 현대 크리스천』p.102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화론자들은 진화와 창조에 관한 과학적 토론에 참석하기를 두려워한다. N.A.S(Nation Academy of Sciences)의 모임에서 한 사람을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창조론자들과의 토론을 피해야한다는 사실에 동의했다.”

이것은 모리스 박사가 1981년 11월 6일자 『과학』에서 인용한 것이다. 『사기재판, 1982』 p.17-18에서 닐 엘드리지는 이 모든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창조론자들은 미국 전역의 대학 캠퍼스를 방문하고 생물학자들, 지질학자들, 그리고 인류학자들과 토론을 하면서 돌아다녔다. 창조론자들이 항상 승리한다. 청중들은 개종한 사람들과 신앙이 깊은 사람들로 채워졌다. 최근까지 과학자들은 전혀 준비 없이 토론에 임해왔다. 그들은 폭 넓은 과학적 주제에 대한 직접적인 맹공에 의해 곧 패배한다. 어떠한 과학자도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지질학, 인류학의 상관관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오늘날 창조론자들은 지적이고 교양이 높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뛰어난 토론자들로서 자신의 임무를 완수해왔다. 그들은 항상 상대방들보다는 학식 있어 보였다. 그러나 창조론자들의 입장을 면밀히 조사해 보면 분명한 것처럼 그들의 주장은 실제 지적인 내용이 결여되어 있다. 창조론자들은 투명한 논리나 증명이 아닌 이상한 무대 출현 때문에 승리한다. 이러한 토론은 진화에 대한 진지한 사색이기 보다도 쇼에 불과하다.”

이러한 마지막 진술은 과학적 증거도 없이 창조론자들을 무작정 공격하는 진화론자들에 의한 것이다. 진화론에 입각한 모든 토론자들이 다른 과학에 해박한 것만이 아닌 이러한 주장은 매우 약점이 있다. 토론에 있어서 특정한 분야에 학식이 있는 다른 진화론자들은 진화에 대한 과학적 증거를 제공해 줄 수 없다.

1987년 3월 판『행위와 진실』이라는 팜플릿을 보면 미국의 집요한 3명의 진화론자들이 토론을 거부했다. 그들은 코넬 대학의 칼 세이건, 미국의 인문학회장인 아이삭 애쉬모프, 그리고 하버드 대학의 스티븐 굴드였다.

3월 23일 밤에 국회의사당이 예약되었고 기쉬 박사는 즉시 참석하기로 동의했다. 그 후에 진화론을 대표할 세이건 박사를 나오게 하려는 라헤이(LaHaye) 박사와 다른 사람들의 노력이 시작되었다. 진화론에 대한 그의 헌신과 창조론을 비과학적으로 비난하기 때문에, 이것은 진화론의 과학적인 타당성을 증명할 수 있는 이상적인 포럼이 될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그렇지 않았다. 그의 진화론적 세계관을 옹호하려던 수 주일의 시간이 흐른 후에 칼 세이건은 "아니, 참석하지 않겠다.” 라고 통보하였다. 다음으로 유명한 진화론적 과학자는 아이삭 애쉬모프이다.... 그는 세이건보다 더욱 신랄한 반창조론자였다. 그러므로 그는 기쉬 박사와 토론하도록 초대되었으나 세이건의 경우와 마찬가지 이유로 참석하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스티븐 굴드 박사 역시 미래의 토론에 초대를 받았으나, 그 역시 거절할 의사를 표시했다.

<결국은 어린 세상> p.12에서 폴 액커만은 이러한 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과학적인 창조론자들이 열정적으로 활동한 지난 10년의 세월을 보내며 대부분의 진화론 교수들은 창조론 교수들과 토론하기를 꺼린다. 대부분의 진화론자들은 그런 토론에서 자신의 부족한 학식과 이론의 취약성으로 인해 공식적으로 수치심을 느끼게 되었다.”


9. 조급한 진화론자들

그러나 앞 장에서 언급된 점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자들은 매우 조급하여, 창조론자들을 무식하고 비과학적이라고 조롱하려고 한다. 진화론자들은 창조론자들을 비판할 때 공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우스꽝스러운 말을 한다. 사기재판에서 닐 엘드리지는 창조론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의 글들은 과학적인 세련된 용어를 사용하기 보다는 미경험자들을 납득시키기 위하여 아주 단순한 용어로 쓰인다. 더욱이 창조론자들은 나약하고 감상적이다. 그들은 과학자들을 인용할 때 단순한 철자 상의 에러를 범한다.”

고대의 라틴어와 그리스어의 파생어를 포함한 단어들을 쓴다고 해서 글이 과학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영어의 보편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어떨까? 식물(plants)과 동물(animals) 대신에 flora와 fauna와 같은 용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논문이 세련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창조론자들과 토론을 할 때 그들은 이론에 대한 과학적 증거를 왜 탐구하지 않는가? 그러나 p.130에서 엘드리지는 쓸데없는 말만 한다.

"창조론자들은 형편없는 학자들이다 라고 이전에 나는 말했다.”

로봇 솔로몬이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쓴 기사가 「LA 타임스」(1984년 1월호)에 실렸다.

"태초에..... 진화-지성과 맞서 싸우는 무지의 전쟁”

진화 이야기는 명백히 과학적 지성에 근거하지 않는다.

알프레드 레윈켈은 『창조의 경이, 1974』p.31에서 이러한 태도를 다음과 같이 잘 요약했다. 

"한편 그들의 입증된바 없는 이론(진화론)은 절대적 진리로서 지식인과 문맹자들 모두에게 받아들여지게 될 것이고, 중세 암흑시대의 편협한 신앙과 버금가는 광적인 옹졸함으로 방어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진화를 절대적인 도그마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꿈꾸는 바보로 여겨지거나 단지 계몽반대주의자로서 무시당할 것이다. 그런 사람은 이러한 이론과 반대되는 시각을 표현하는 원고에 후원자를 찾지 못할 것이다. 만약 발행된다 해도 그 책은 고등학교 혹은 대학의 교재로 추천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가 대학의 과학부서에 자리를 확보하는 일 역시 어려울 것이다. 현대적 우상숭배에 동참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이단자이고 그런 취급을 받을 것이다.”

진화론자들은 창조론적인 시각에 매우 인색한 반응을 보인다. 헨리 모리스는 <진화라는 문제의 바다> p.81 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진화의 타당성에 관하여 과학적 질문이 제기될 때마다 진화론자들이 신랄하게 분노의 반응을 보이는 것은 왜일까? 진화에 대한 ‘종교적인’ 열정이 있는 것인가?”

1981년 초 새크라멘토 진화론 재판에서 창조과학회의 터너 변호사는 진화론자들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들은 오만하고 거만한 사람들이다.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미국의 헌법을 수정해야할 정도로 위험한 사람들이다.”

워포드 대학의 화학 교수인 스콧 모로우는 로버트 겐트리가 쓴 『창조의 신비』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창조라는 주제에 관하여 기독교인이 쓴 책을 받았을 때, 불가지론자들인 진화론자들이 세운 지침을 이해한 사람은 빨리 대충 읽어보고, 그 책을 가까운 쓰레기통에 말없이 던져버릴 것이다. 결국 돌이 아닌 두뇌를 소유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고 있다: 1)과학과 종교는 혼합될 수 없다. 2)진정한 과학자는 창조론자일 수 없다. 3)창조론자들은 과학자가 될 수 없고 과학적일 수도 없다. 4)더구나 근본주의적 창조론자들은 더욱 그러하다.... 앞의 계명들은.....애쉬모브(Asimov)와 세이건(Sagan)을 뜻하는 ‘A&S 독트린’으로 간주될 수 있다.”

로버트 겐트리는 그 책 p95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우리가 취해야 할 두 번째 입장은 예절과 겸손이다. 나는 가장 비과학적이고 잔인한 방식으로 종교적 생각을 경멸하고 공격하는 과학과 인문 수업이 끝난 후에 교실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근본주의적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는 학생들이 불쾌한 고양이처럼 취급당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이러한 종류의 취급이 과거에 갈릴레오를 다루었던 고위 성직자들의 태도보다 나을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만약 당신의 자녀가 근본주의적 기독교인들을 조롱하기 위해 체계적으로 조직된 공립학교에 다니도록 강요된다면, 비인격적인 사회문제에 대해 외치는 대신에 이곳을 먼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진보냐? 퇴보냐? 어느 편인가?』에서 힐버트 시글러는 그의 책 마지막 두 문장에서 다음과 같이 진화론에 대해 말했다.

"진화론은 다른 환경 아래서 많은 진화론적 과학 교수들을 배출했다. 그들의 학생들은 모든 주제에 의문을 제기하는 마음으로 접근하고 있고, 많은 과학자들은 상식을 벗어난 이러한 이론에 의문을 품고 있는 학생들을 귀찮게 여기고 있다. 우리의 희망은 의문을 품고 질문하는 지적인 정직함을 소유한 오늘과 내일의 젊은이들에게 있다.”


출처 - 앨버트 시퍼트의 [진화론의 비과학성 : 그 32가지 이유들] 번역

미디어위원회
2005-10-29

현대 진화론의 역사 - 3 

: 진화론을 반대한 훌륭한 과학자들

유종호 


6. 진화론을 반대한 훌륭한 과학자들

다윈의 시대 이전까지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창조와 대홍수에 관한 성경의 설명을 믿었다. 케플러, 뉴턴, 패러데이, 갈릴레오, 브루스터, 린네, 파스퇴르, 캘빈 등의 진정한 과학의 아버지들은 창조론을 믿었다. 그러나 오늘날 창조와 창조주를 믿는 과학자들은 진화론자들에 의해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여기서 진화를 반대했던 훌륭한 과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보자.

루돌프 버초(Rudolph Virchow: 1821-1902) 교수는 프러시아의 유명한 해부학자이며, 인류학자였고, 인체 병리학의 아버지이다. 그는 생리학의 권위자였으며, 훌륭한 화학자로 간주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화론, Wm Dallmann, 1975, p73). 

”그것은 전적으로 넌센스다. 인간이 원숭이 혹은 다른 동물의 후손이라는 것은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 이러한 이론이 발표된 이후로 모든 진정한 과학적 지식은 반대 방향으로 초점이 맞추어졌다. [비엔나에서 있었던 인류학자들의 모임에서 그는 말했다] 동물에서 인간으로의 변화를 찾으려는 시도는 완전히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중간 고리가 발견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루이스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1895)는 화학, 의학, 세균학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과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자연발생적인 진화 사상을 공공연히 반박했다. 그는 창조론에 대하여 열정적이고 공개적으로 옹호했다.

자신의 동식물의 분류 체계가 오늘날에도 사용되어지는 스웨덴의 분류학자인 카를로스 린네(1707-1778)는 진화론을 강력히 반대한 인물이었다. 배런 큐비에(1729-1832)는 비교 해부학과 고생물학의 창시자였다. 그는 사적인 논쟁이나 공적인 논쟁에서 진화론자들을 이겼고, 창조론에 대한 강력한 옹호자였다.

지사학에 몰두했던 루이스 아가시스는 말하기를

”진화론을 받아들인 자는 누구나 과학자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케임브리지 대학 생물학 교수인 윌리엄 베트슨 박사는 1921년 12월 과학의 진보에 대한 연설을 할 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다윈이 멘델의 법칙에 관하여 지금 입증된 사실을 알았다면, 다윈은 자신의 책을 출판하지 않았을 것이다.”

식물학자인 윌리엄 카루더스 박사는 말하기를 (Dallmann, p56),

”모든 증거가 진화론과 반대되는 마당에 진화론을 찬성할 자는 없다.”

하버드의 찰스 엘리엇 학장은 말하기를 (Dallmann, p23),

”진화란 가설일 뿐 과학이 아니다”

대영 박물관의 에드리쥐 박사는 (Dallmann, p24)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이토록 거대한 박물관에도 종의 돌연변이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 진화론자들의 말의 90%가 관찰과 사실에 근거하지 아니한 터무니없는 엉터리다. 사람들은 어떤 이론을 채택하고 그것을 지지하기 위하여 사실에 집착한다.”

에르랑겐 대학의 동물학자인 플라이쉬만 교수는 처음에 다윈론을 믿었으나, 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Dallmann, p26).

”다윈론에는 자연의 영역에서 납득할만한 단 한 가지 사실도 담겨있지 않다. 그것은 과학적 연구의 결과가 아니라 상상의 산물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열역학 제2법칙의 발견자인 동시에 유명한 물리학자인 로드 켈빈과 같은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여야한다. 그는 1903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Dallmann, p42).

”우리는 과학으로 인해서 물리력, 동력, 혹은 전기력 보다는 다른 영향력, 즉 직접적인 힘을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신뢰하지 않을 수 없다.”

빅토리아 연구소의 월간지 123호 p.267에서 그는 무신론적인 사상이란 너무도 터무니없어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하버드 대학의 로웰 학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Dallmann, p46).

”성운설은 근본적인 실수에 기반을 두고 있다.'

클러크 맥스웰 교수는 (1879년에 사망) 다음과 같이 말했다 (Dallmann, p48).

”나는 한계 내에 있는 모든 이론을 조사했고 모든 사람은 그것을 역사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시카고의 물리학자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로버트 밀리칸 박사는 말하기를 (Dallmann, p50),

”안타까운 일은 우리가 진화를 증명하려고 노력하는 과학자들과 함께 한다는 점이다. 어느 과학자도 진화론을 증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시험할 수도 증명할 수도 없는 허구이기 때문이다).”

유명한 지질학자인 R. I. 머치슨 경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Dallmann, p52),

”나는 살아있는 사람에게서처럼 지질상의 연령에도 많은 특성이 있음을 안다. 나는 우리의 지질상의 기록에는 다윈론을 지지해 줄 만한 하나의 증거도 없음을 두려움 없이 말할 수 있다.”

독일 킬 대학의 식물학자인 J. 라인케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Dallmann, p60).

”확고한 존엄성을 가지고 과학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표현은 인간의 기원을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존 러스킨은 진화를 경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Dallmann, p63).

”나는 진화에 동조할 논리적 주장을 아직 들어본 적이 없으며, 그동안 경멸 이하의 많은 내용을 들었고 읽어왔다.”

오버린 대학의 탁월한 지질학자인 조지 라이트는

”진화란 10분의 1은 형편없는 과학이고, 10의 9는 빗나간 철학이다.”

이제 우리는 죽기 직전까지 무신론자였다가 임종 직전에 마침내 하나님을 확실히 믿었던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멘카토 프리 프레스, MN 11-26-86에서 인용).

”나는 우주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공식적인 수학법칙과 제 원리들에 의해 결합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오로지 어떤 지혜자만이 우주를 결합시킬 수 있다. 인격 이외의 어느 곳에 그 지혜자가 계신단 말인가?”

1968년 1월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109 페이지에 어떤 필자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아인슈타인이 언젠가 나에게 말하기를 '아이디어는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들은 아인슈타인이 존경의 마음으로 대문자 'G'로 시작된 단어(God)를 발음한 것을 들을 수 있다.”

소련의 독재자인 스탈린의 딸 스베트라나 알리루예바는 1967년 미국에 왔을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이 없이는 존재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나는 어느 누구의 도움이나 설교도 듣지 않고 스스로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1982년에 사망한 소련의 권력 서열 제2인자인 알렉산더 코시긴은 종교에 몰입하였는데, 심장마비를 겪은 후에 하나님과 종교의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이전의 수상이던 흐루시쵸프가 사망한 후에 비슷한 이야기가 돌았다. 흐루시쵸프는 자신이 전적으로 무신론자가 아닌 듯이 정치생활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여러 차례의 언급을 했다. 이러한 모든 사람들이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지에 대한 것은 확실하지는 않다.

오늘날 과학적 연구와 발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수천 명의 과학자들은 진화론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창조를 믿고 있다. 수천의 대학생들도 교수의 진화론 강의를 거부하고 지적 설계자와 창조론의 견해를 고수하고 있다. 또한 많은 과학자들도 기원에 대한 연구와 논란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원의 문제는 실험에 의해 과학적으로 시험되고 입증될 수 없고 진화의 문제점을 무시해 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헨리 모리스와 듀안 기쉬 등 두 사람은 한 때는 진화론자였던 현대 과학자들이다. 헨리 모리스는 『놀라운 행성 지구의 탄생』p.iv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때는 진화론자였으나 최근에 창조를 신뢰하게 된 수백 아마도 수천의 과학자들이 있다. 나도 과거에 대학에서 진화론을 수용했었기에 그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 때부터 진화-창조에 관한 과학도서들과 성경을 읽어 본 결과, 문자 그대로의 기록인 성경의 내용에 모든 기원에 대한 과학적이고 만족스러운 설명이 들어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많은 다른 과학자들도 나와 비슷한 간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창조과학회의 헨리 모리스 박사와 그의 동역자인 듀안 기쉬는 미국의 유명한 대학에서 진화론을 강의하는 교수와 맞서서 논쟁을 벌였다. 여러 차례의 논쟁에서 진화론의 입장을 취한 어떤 사람도 그들을 논박할 수 없었다. 오늘날 이러한 현상과 관련된 많은 일들이 더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진화론을 거부하는 일련의 과학자들도 있다. 예를 들어서 영국의 천문학자인 프레드 호일과 그의 동료인 챈드라 위크래머싱은 무신론적 진화론을 포기하고, 이제 우주와 생명의 기원이 초월적인 설계자와 창조주의 결과물이라고 믿게 되었다. 비록 그들이 기독교인이 되지도 않았고 성경의 창조의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할지라도, 그들의 시각은 철저히 과학적 증거와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다. 프레드 호일은 우주의 기원론에 대한 창시자이며 오랜 세월 동안 솔직한 무신론자였다. 오늘날 그들은 진화론에 매달린 과거의 동료들로부터 따돌림과 조소를 감내하고 있다.

그 다음에 『진화: 위기의 이론』의 저자인 마이클 댄턴 박사가 있다. 그는 창조론자라고 주장하지는 않으나 "진화론자들은 환상의 날개에 매달리는 반면에 창조론자들은 실제 과학적 증거에 접근해있다.”라고 말한다.

과학적으로 입증된 바 없는 기원의 문제에 연루되기를 원치 않는 많은 과학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고등학교 교사들도 진화라는 주제를 무시한다. 변호사인 노만 맥베스는 다윈론을 철저히 연구했다. 그의 결론은 그것이 입증된 바 없으며 과학적 사실에 정반대된다는 것이다. 변호사의 날카로운 논리를 사용해서 그는 다윈론에 제시된 모든 증거가 무가치한 것임을 연구하고 입증했다. 이러한 진화에 대한 그의 논지 이외에도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재 시도된 다윈』p.146에 나온 다음과 같은 말이다. 즉,

”진화론자들이 고등학교 교사들을 대상으로 연설을 할 때, 그들은 교사들이 전혀 질문이 없고 대답도 원치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심슨은 말하기를 '나의 진화라는 주제에 관하여 핵심적인 몇몇 교사들은 진화라는 말을 믿지 않고 그러한 주제가 언급되면 자동적으로 그들의 마음을 닫는다.”

고등학교와 대학교에는 잘 속아 넘어가는 어린이와 청소년 앞에서 근거 없는 이론을 펼치고 싶어 하는 교사와 교수들이 항상 있게 마련이다. 꽤 학식 있어 보이려고 노력하면서 그들은 진화론을 마음에 품을 때 성급하고 이론적이 된다. 나는 내 손자의 경험을 포함해서 이러 경우를 여러 번 들은 적이 있다. 많은 아이들이 진화론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공립학교에서 사용되는 많은 교과서에서 교묘히 끼워진 진화론 내용이 아이들에게 전해진다. 시민의 세금으로 지탱하는 학교에서 진화론을 배운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하나님과 구세주에게서 멀어지는가?

그렇다. 얼마나 많은 신학자들이 진화론을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로 착각하여 그들의 본분을 이탈했는가? 그들은 창조와 진화의 설명을 조화시키려고 애를 썼고, 그것을 유신론적 진화론이라고 부르면서 사자를 양으로 왜곡하려했다. 그래서 진화가 하나님이 창조한 방식이라고 설명하는 신학자의 이야기를 진화론자들이 들을 때, 진화론자는 초자연적이고 신비한 성경을 포기한 신학자를 보고 비웃을 것이다. 그는 그런 식으로 성경의 하나님을 포기했다. 기독교적인 진화라는 말은 모순이다. 기독교와 진화론 사이에는 완전한 적대관계 외는 아무 것도 없고 있을 수도 없다. 그것은 우리를 다시금 창세기 6:1절에 있는 대로 하나님의 자손과 인간의 자손으로 되돌려 놓고 있다.


출처 - 앨버트 시퍼트의 [진화론의 비과학성 : 그 32가지 이유들] 번역

미디어위원회
2005-10-28

현대 진화론의 역사 - 2 

: 20세기의 진화론자들

유종호 


5. 20세기의 진화론자들

20세기에 접어들어 가장 주목할 만한 진화론자들은 리키 집안사람들이다. 부모인 루이스 리키와 메리 리키, 그리고 아들인 리처드 리키가 그들이다. 루이스는 1926년에 화석 탐사와 연구를 시작했다. 1960년대 중반 경에 루이스와 메리는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인간의 화석, 즉 그들이 호미니드(hominid)라 부르는 화석을 발견했다. 과학적 증거는 없었지만, 그러한 화석의 연령이 2백만 년 정도라고 루이스는 믿었다. 그는 영국 여행을 끝낸 직후에 사망했다.

메리와 리처드 리키가 쓴 진화의 이야기는 『내셔널 지오그래픽』, 『리더스 다이제스트』, 『패밀리 위클리』, 신문과 텔레비전 그리고 라디오에서 지금도 다뤄지고 있다. 그들은 아프리카, 케냐의 투르카나 호수 근처에 있는 퇴적암을 지금도 뒤지고 있다. 화산에서 터져 나온 잔해들과 노아 시대에 홍수로 인한 퇴적물에서 많은 화석들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리더스 다이제스트(1978년 2월호)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사로 그 곳에서 발견된 화석에 관한 진화론 편을 발행했다. 

”제목 : 인류의 뿌리 찾기. 거의 4백만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단서들이 인간의 가계도(家系圖)가 될 만한 놀라운 증거를 드러내고 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p.71을 보면 다음과 같다. 즉,

”2백만 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는 부서진 두개골 조각들이 케냐의 투르카나 호수의 퇴적층에서 발굴되었다. 그것은 케냐의 국립박물관에서 분류된 후에 ‘1470’의 번호 꼬리표를 달았다. 두개골 1470이 정리되었을 때 놀라울 정도의 현대적 머리모양이 나타났다.”

사실 그 두개골의 모양은 오늘날의 지성인의 두개골과 흡사하다. 그러나 두개골에 대한 예술가의 해설에 따르면 최초의 인간은 절반 정도 원숭이를 닮았다는 것이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p.72를 보면

”1975년에 메리 리키는 탄자니아의 레톨릴에서 375만 년 전으로 추정되는 인간의 턱뼈와 이빨 화석들을 발굴했다.”

여기서 수백만 년의 세월이 얼마나 가볍게 다루어졌는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미니애폴리스 트리뷴』(1976년 3월 9일)에서 행해진 다음과 같은 설명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인류학자인 도날드 요한슨과 리처드 리키는 인간의 선조라 할 수 있는 새로 발굴된 두개골에 관하여 월요일 워싱턴에서 회의를 했다. 이러한 일련의 발굴로 인해서 진화론자들은 375만 년 전의 인간이,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해부학적으로 현대인과 더 흡사했다고 믿게 되었다.”

그들의 주장에 반대되는 3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수백만 년의 세월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바 없는 추정에 근거한 연대측정방식에서 나온 계산이다. 왜냐하면 창조되었을 때 성숙한 채였다는 이유와 표면적인 연령만을 보고 추정하기 때문이다. 둘째, 만약 인간이 구조적으로나 해부학적으로 375만 년 전에 존재하였다면, 왜 인간은 1만 년 전에 와서야 농업을 이용하고 집과 도시를 건설하는가? 낙뢰 등으로 수천 번의 자연적 화재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불의 사용을 배우기까지 수백만 년의 세월이 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셋째, 그들은 퇴적암을 잘못 분석했다. 퇴적암은 매우 진한 흙탕물이 급격히 가라앉아 된 것이다. 

리더스 다이제스트(1978년 2월)의 p.73을 보면 1800년에서 1829 년까지 라마르크의 옛 이론(기린의 목이 긴 이유는 높은 데에 있는 나뭇잎을 먹으려고 자꾸 목을 위로 뻗쳐 올렸기 때문이라는 옛 우화)을 다시 고쳐 말하고 있다. 즉, 리더스 다이제스트는 원숭이 같은 인류의 허구적인 선조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라마피데쿠스의 후손들은 숲을 떠나 평야와 개간지를 찾아갔다. 그들은 평지에서도 멀리 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네 다리 보다는 두 다리로 서게 되었고, 그에 따라 그들은 양손을 다른 용도로 쓸 수 있었다.”

1978 년에도 진화론자들은 의심을 받았던 150년 전의 옛 이론에 매달리고 있었다. 진화론 우화를 만들기 위한 짓이 그럴 듯하다.

맨카토 자유언론(1984. 10. 19)에서는 리처드 리키가 제공한 케냐 나이로비의 이야기를 다시 실었다. 즉,

”과학자들은 160만 년 전에 죽은, 덩치 큰 12살 소년으로 보이는 화석을 보고 초기의 인간은 과학자들의 생각보다 훨씬 몸집이 크다고 말한다.... 그 소년은 아마도 180cm 이상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라고 리키는 말했다. 과학자들은 초기의 인간은 오늘날 우리보다 작다고 생각했다. 이 소년의 화석은 직립 원인이 현대인만큼 키가 크다는 이전의 추측을 확인해 준다.... 리키는 그 소년의 죽음에 대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늪 근처에 있었다. 그의 몸이 빨리 묻혀져서 상대적으로 본래의 몸을 그대로 보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틀림없이 그는 노아 시대에 홍수로 인해 진흙더미에 신속히 매장되었을 것이다. 또한 키 큰 소년은 대홍수 이전에 커다란 인간이 존재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메리 리키는 진화론의 시각에서 360만 년 전에 생존했던 현대인과 같은 인간의 발자국의 이야기를 실었다. 패밀리 위클리(1981. 9. 13)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즉,

”발자국의 흔적이 탄자니아의 올두바이 협곡으로부터 25마일 남부에 있는 화산근처 숲이 우거진 라에톨리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화산재가 비와 섞이고 태양에 의해 건조해졌을 때 발자국을 시멘트처럼 굳게 하는 화학성분이 생겼다. 비 온 후에 여러 동물들이 화산재에 발자국을 남기었다. 수많은 발자국들이 오늘날에도 뚜렷이 나타난다. 그러한 발자국들 중에는 세 원시인의 발자국이 있었다.... 그들은 오늘날의 우리들처럼 직립보행을 했다.”

미니애폴리스 트리뷴(1979년 3월 22)에 따르면

”발자국 전문가인 북 루이지애나 대학의 인류학자 루이스 로빈스 박사는 발자국의 의미에 대한 브리핑에서 모양과 기능적인 측면에서 현대인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했다.” 

왜 그들이 대홍수 이전에 생존했던 사람들이 아니어야 했는가? 메리 리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그들의 발자국은 현대인처럼 세련된 걸음을 걸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에, 아마도 과학자들은 직립보행의 시초를 알기 위해서는 그 시대보다 수백만 년을 더 소급하여 살펴보아야 한다는 점을 나타내고 있다.”

진화론자들이 자신들의 우화를 만들기 위해 수백만 년의 세월을 얼마나 쉽게 설정했는지를 보라! 나는 그들이 자기들의 가정과 가설을 세우기 위해 스스로 과학자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들은 어떠한 과학적 증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오늘날 간단하게 할 수 있는 것을 수백만 년의 세월이 걸려야 하는 지 알 수 없다.

1978년 3월 22일자 LA 타임스에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즉,

”그것은 마치 그녀가 왼쪽에서 무엇인가를 보고 들은 것 같았다. 아마도 위협이었던 것 같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몸을 돌렸을 것이고 그리고 계속 움직였던 것 같다고 메리 리키는 말했다.”

비록 우화의 드라마가 설정되었다 할지라도 실제 사실은 더 감상적이고 공포스러웠을 것이다. 대홍수 때에 발생했던 화산 폭발과 홍수가 그녀를 압도했기 때문에 그는 공포에 사로잡혀서 몸을 돌렸을 수 있었을 것이다.

진화론자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인류를 고도로 발달됐던 이집트인과 바빌론인과 그들의 선조들 그리고 리키와 그 일당들이 발굴하고 있는 홍수 때 익사해서 퇴적암으로 덮여있는 더 문명된 사람들에게로 추적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원숭이에게로 추적해 가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찾는 원숭이들(Australopithecus)은 다른 동물들과 함께 홍수로 죽은 원숭이들이고, 그들이 찾는 인간들은 대홍수에 익사하여 묻힌 인간들이다.

진화론자들이 진화의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그렇게 악하고 광범위하게 설명하는지를 보려면 1978년 2월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끝부분에

'인류의 뿌리를 찾아서'에 나와 있는 진화론자들의 전형적인 실수들이 다음과 같이 밝혀지게 되었다.

1. 150만 년 전에서 20만 년 전 사이에 인간 혹은 호모 에렉투스는 ”불의 사용을 배웠다.”  - 인간은 확실히 번개로 인한 화재에서 즉시로 무언가를 배웠을 것이다.

2. "25만 년 전에서 10만 년 전 사이에 네안데르탈인들이 무리들로부터 진화했다. 그들의 두뇌는 우리의 두뇌만큼 충분히 컸다. 어떤 경우에는 더 크기까지 했다.”  - 소위 이 네안데르탈인들은 창 6:4에 나오는 거인일 수 있다.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3. ”진화론적인 드라마에서 마지막 주인공은 우리 자신의 종, 즉 기원전 4만 년 전에 어디에선가 출현했던 호모 사피엔스였다.” - 여기서 다시 진화론자들은 이집트인들, 바빌로니아인들, 그리고 어디에선가 갑자기 튀어나온 다른 인종들과 리키의 집안사람들이 지금도 세계 전역에서 발굴하고 있는 진흙 속에 익사하여 매장된 사람들이 고도로 발달된 선조들임을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4. ”다른 전문가들은....을 믿는다.” - 나는 사람들이 마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하여 모든 해답을 알고 있는 전문가처럼 언급되어질 때 몸서리가 처진다. 인간의 많은 분야에서 소위 전문가의 조언에 의해 오도된 수십억의 사람들이 있다. 주식의 조언자들, 그 밖의 많은 금융전문가들의 조언을 듣고 월 스트리트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수십, 수백만 달러를 손해 보았던가? 시 118:81)에 얼마나 진실하게 적혀있는가? ”인간 자신을 믿지 말고 주님을 믿는 것이 더 났다”고 전문가의 충고에 귀를 기울일 때는 걸러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진화론 전문가들의 충고를 들을 때는 걸러내야 할 채가 필요할 정도이다. 의학 논문과 다른 과학 분야의 논문 사이에는 엄격한 차이의 세계가 있다. 그리고 경제 전문가와 진화론 전문가 사이에도 엄격한 차이가 있다. 소위 경제 전문가의 조언에 따른 손실은 금전만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소위 진화론 전문가의 조언에 따른 손실은 창조주와 구원자에게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리고 영원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 전역에 걸쳐, 특히 대학들을 보면 1967년에 콜롬비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하버드 대학의 스티븐 굴드와 같은 많은 현대 진화론자들이 있다. 칼 세이건과 아이삭 아시모프는 진화론으로 많은 소란을 일으켰다. 만약 현대의 다른 진화론자들을 언급하려면 이 책의 지면이 훨씬 많이 요구될 것이다. 그러나 이 점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출처 - 앨버트 시퍼트의 [진화론의 비과학성 : 그 32가지 이유들] 번역


미디어위원회
2005-10-27

현대 진화론의 역사 - 1 

: 초기의 진화론과 찰스 다윈

유종호 


1. 초기의 진화론

진화론 사상은 다음의 성경 말씀에서 보는바와 같이 사람의 아들들이 창조주를 거부하고 반역한 이래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6:1-5)

그 후 수세기에 걸쳐서 인간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진화론을 발전시킨 여러 가지 경우가 있어왔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아낙시만더(Anaximanders)는 BC 600 년경에 인간은 원래 물고기와 유사했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BC 400 년경 중국의 츄안체(Chuantze)는 생물 종들은 변이의 과정을 통해서 발전되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AD 1589년경에 프랑스인인 버나드 팔어시(Bernard Palissy)는 이교도들 사이에서 진화론 사상을 펼치다가 바스티유 감옥에서 죽었다.

비록 스웨덴의 카를로스 린네(Carolus Linnaeus: 1707-1778)는 진화론자가 아니고 진화론을 반대했지만, 그는 생물학자들이 종에 따라 동·식물을 분류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하여 진화론자들에게 이론적 바탕을 제공해 주었다. 그는 동식물을 분류하여 라틴 명칭을 부여하는 시스템을 발전시켰다. 그러한 명칭은 종, 속,  과, 목, 강, 문 계 등으로 부여되었다.

대략 1750년 이후에 진화론을 끌어낸 근대의 인물은 프랑스 자연주의학자인 콩트 부퐁(1707-1788)과 찰스 다윈의 할아버지이고 영국의 의사인 에라스무스 다윈이다. 그들은 1700년 후반부에 글을 써서 짐을 실을 때 무릎을 꿇음으로써 후천적으로 무릎이 두꺼워진 낙타의 경우처럼 후천적 특성을 다루었다. 부퐁은 그 당시에 계속해서 진화론을 연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두 사람을 추종한 인물은 프랑스의 생물학자인 동시에 식물학자인 장 라마르크(Jean Lamarck: 1744-1788)이다. 그는 동식물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하여 자신의 모양을 변형시키고 이것이 후대에도 이어진다고 추론했다. 그는 빗나간 진화론을 마음에 품었다. 예를 들어 기린의 목은 나무의 잎사귀를 먹으려고 위쪽으로 목을 늘리다가 길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기린의 목이 될 때까지 후천적으로 점점 길어졌다고 그는 주장했다. 이러한 생각은 그 당시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의 과학자들도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독일의 생물학자인 아우구스트 바이스만(1834-1914)은 꼬리 없는 쥐를 만들기 위하여 수십 세대에 걸쳐 쥐의 꼬리를 자르고 교배를 시켜 봤다. 그는 라마르크의 이론에 근거가 없음을 증명했다. 그러나 찰스 다윈을 라마르크의 사상에 관하여 ”내가 내린 결론은 그의 결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던 것이다.

라마르크 직후, 영국의 지질학자인 찰스 라이엘(Charles Lyell, 1797-1875)은 현대지질학을 발전시켰다. 그는 3권으로 된 『지질학의 원리』라는 책을 썼다. 그 책에서 그는 기존의 지질학에 관한 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그는 오늘날 여전히 발생하고 있는 지질작용들에 의해서 시대에 따라 천천히 그리고 점진적으로 지구가 변해가고 있음을 나타내려고 노력했다. (천천히 그리고 점진적이라는 말은 진화론자들의 핵심 단어다). 이런 일로 라이엘은 찰스 다윈과 진화론에 또 하나의 빗나간 기반을 제공했다. 찰스 다윈은 ”나의 사상과 저술의 절반정도는 라이엘 경의 두뇌에서 비롯되었다”라고 고백하였다. 라이엘의 작업은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서 진화가 가능함을 드러내기 위해 필요로 했던 엄청난 시간을 제공해 주었다. 그때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구상에서 발생해온 지질학에서의 변화란 갑작스럽고 전 지구적인 격변과 융기작용에 기인한다고 믿고 있었다.

알프레드 월리스(Alfred Wallace, 1823-1913)는 찰스 다윈보다 14살 정도 젊었지만, 월리스는 다윈이 진화론을 설명함에 있어 취했던 것과 같은 생각을 발전시켰다.


2. 찰스 다윈

어떤 사람보다도 진화론을 신봉했던 영국의 자연주의 학자인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은 우리가 주목해 볼 만한 인물이다. 진화론이 다윈의 시대에 그토록 쉽게 파고든 이유는 당시의 영국에서 과학이 유행했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산업화가 진전됨에 따라 진정한 과학으로부터의 도움을 점점 더 많이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850년대는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격변의 시기였다. 그 시대는 칼 마르크스의 시대였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유럽 일대를 뒤덮고 있었다. 자유주의와 합리주의가 많은 기독교의 여러 교파에 파고들던 시기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의 움직임은 진화론이 번성하기에 알맞은 토양이었다.

합리주의와 유물론, 그리고 자연과 과학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일체를 거부하는 시대적 풍조로 인해서, 당시의 많은 지성인들은 성경과 초자연적인 것에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다. 고대의 이교도 철학자들처럼 그들은 우주의 기원에 대하여 이성에 호소하는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당시의 철학적이고 정신적인 분위기는 다윈과 같은 진화론자들이 귀를 기울이고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1859년에 다윈은 『종의 기원』을 발표했다. 그것을 계기로 그는 오늘날 다윈론으로 알려진 진화론의 지도자가 되었다. 1832년에 다윈은 세계여행 중에 종의 기원에 대한 해답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남미 해안 밖 갈라파고스군도 무인도에 갔을 때 흙과 기후가 비슷해도 섬마다 독특한 동물과 식물이 있음을 알았다. 이것을 보고 그가 내린 2가지 결론은 1) 동물이나 식물에 있어서 정확히 동일할 수 없을 만큼 변이가 존재한다는 점 2) 생물체는 지구의 공간과 식량이 부족할 정도로 번식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는 다른 종뿐만 아니라 같은 종끼리도 먹이를 얻기 위해 경쟁하는 것을 보았다. 그가 내린 결론은 우수한 종자가 약한 종자를 밀어내는 가운데 자연에는 지속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투쟁으로 인해 약한 동·식물은 결국 사라지고 우월한 존재가 살아남게 된다. 이러한 일이 계속해서 벌어지면서 사소한 차이가 점차적으로 거대한 차이로 변해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점차 자연선택에 의해 지구상의 존재는 고차원적인 단계로 진화하고 단순한 존재(단세포)에서 복잡한 존재로 진화한다. 결국 상위의 동물은 가장 하위의 동물로부터 진화했고 모든 인간이 그런 동물에서 진화했다는 것이다. 적자생존의 개념은 자연선택의 개념에서 발전되었다.

그 동안 다윈의 생각이 전 세계에 미친 영향력은 과소평가될 수 없다. 그의 진화론은 오늘날 모든 분야로 확대되었다. 천문학자들은 빅뱅으로 시작한 우주의 기원과 지구의 진화를 설명하면서 우주의 진화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다. 역사가들과 인류학자들은 선사시대의 인간에 대하여 사색하기 시작했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을 고도로 발전된 동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물리적 환경을 변화시켜서 인간의 도덕적 질병을 치료하려고 노력했다. 심지어 신학자들조차도 성경의 가르침과 소위 과학적 진화론을 합치할 수 없어 그것을 신뢰함으로써 진화론에 굴복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성경을 단지 고도로 발달된 종교적 이상을 표현한 책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나는 가장 보수적인 교단에서 훈련받은 신학박사들이 성경을 신화에 불과하다느니 인간 타락의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위스콘신 대학의 오토 박사는 정확히 40년 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만약 누구든지 진화론을 받아들이면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과 하나님 안에서 진화론과 믿음을 조화시키는 것은 투명한 논리적 사고에 어떤 결함을 보인다고 확신하게 될 것이다.”


3. 다윈은 어디에서 잘못되었는가?

다윈은 그의 책 『종의 기원』의 제목에도 불구하고 결코 종의 기원을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종 안에 변이를 말했을 뿐이다. 그것은 창조를 신뢰하는 사람들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자연선택은 적자생존을 설명할 수 있지만 적자의 출현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다윈은 스스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반적으로 생각해 볼 때 지구상에는 관찰할 수 있는 2-3백만의 생물의 종들이 있다. 그러나 노련한 관찰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종의 변화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오늘날 흔히들 말한다.”

진화란 새롭고 다른 종류의 생물뿐만 아니라, 눈, 뇌, 귀, 심장, 신경계, 폐, 위, 그리고 많은 다른 기관들을 생산함을 의미한다. 다윈이나 어떤 다른 진화론자들도 이러한 신체기관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으며, 이 모든 기관들이 즉시로 기능을 하는 신체로 갑작스럽게 발달할 수 있었는지 지금까지 설명할 수 없다.

다윈의 진화론은 과학적 사실이 아닌 가정, 추측, 상상 및 사색에 근거한 것이다. 다윈의 책 Ⅳ장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사용하였다. 즉,  ”만약....가령 가정한다면....인것 같다. 그러므로 아마도....우리가 가정해 본다면....만약 다음과 같이 가정된다면....였을지도 모른다....아마도....가령....가정할 수 있다....그럴 수도 있다... ” 등등

이러한 표현은 과학자가 표현하는 방식이 아니다. 과학자는 입증되고 실험된 사실을 근거로 일한다.


4. 과학자들이 거부하는 다윈론

1890년경에 조지 미바트(George Mivart)는 다윈의 이론을 세밀히 검토한 『종의 내력』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썼다. 그는 다윈의 이론을 모든 부분에서 입증된 바 없으며, 자연의 사실과는 위배되는 것으로 치부해버렸다. 그는 다윈의 가설을 ‘유치한 가설(puerile hypothesis)’이라 불렀다.

디오 그래브너(Theo Graebner) 박사는 자신의 책 『하나님과 우주-무신론의 비판적 분석, 1932』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1880년대에는 다윈의 영향력은 절정에 이르렀고, 기술적 연구에 대한 철저한 통제를 실시했다. 90년대에 비로소 의심과 반대의 목소리가 소심한 표현으로 들려오더니 이러한 반응은 점차 부풀어 올라 다윈 이론의 타도를 겨냥하면서 거대한 합창으로 자리 잡았다. 20세기 첫 10년 동안은 분명히 다윈론의 시대라고 표기될 정도가 되었다.”

프랑스의 『과학 대백과사전』(Dictionaire Encylopedique des sciences)을 보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즉,

”다윈론은 증거도 없이 단지 개연성에 불과한 것을 시적으로 모아놓은 허구이다.”

다윈과 연관지어 우리는 토마스 헉슬리(Thomas Huxley: 1825-1895)를 언급해야만 한다. 그는 다윈의 책이 나오기 전부터 이미 진화론자였다. 그러나 다윈의 책으로 인해서 그는 자신의 신념을 뒷받침 해줄 근거를 찾게 되었다. 그는 열성적인 다윈 신봉자가 되었다. 그는 다윈의 진화론을 확산시키기 위해서 전심전력을 다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그는 "다윈의 불독(Darwin's bulldog)”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그는 또한 창조에 관한 성경의 설명, 기독교, 그리스도의 부활, 그리고 그밖의 성경의 다른 내용들을 거부하고 반대론을 강의했다.

다윈과 헉슬리가 활발하게 활동하는 동안에 오스트리아의 수도승이며 식물학자인 그레고르 멘델(1822-1884)은 다윈론에 관하여 심각한 의문을 일으키는 과학적 증거를 제시했다. 멘델은 수차례의 과학적 실험을 통해서 창조자가 식물과 동물의 종에 설정해준 한계를 벗어나서는 변이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증명했다.

”개인이 받은 유전인자를 제외하고는 어떤 다른 인자도 자손에게 전달해 줄 수 없다는 것은 지금 생물학에서는 단순한 법칙에 불과하다. 생명체는 자신이 물려받지 않은 어떤 유전자도 후손에게 물려 줄 수 없다” (『유전과 환경』 p.99)

이러한 사실이 환경의 변화에 따라 진화한다는 다윈의 이론에 자물쇠를 채웠다. 그러나 멘델이 이룩한 업적의 중요성은 다윈의 이론이 발표된 지 50년 후에야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 시대에 진화의 원인에 관하여 깊이 사색했던 또 다른 인물은 네덜란드 식물학자인 휴고 드 브리스(1848-1935)이다. 그는 달맞이꽃을 가지고 실험했다. 실험 도중에 그는 새로운 종의 식물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새로운 종은 갑자기 자발적으로 단계를 건너뛰며 발생했고 후손을 건너뛰었다”고 말했다. 그의 이론은 돌연변이 이론(mutation theory)으로 불렸다. 이러한 이론은 짧은 기간 동안 진화론자들 사이에서 큰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가정된 새 종이 동일한 종 안에 다른 변종일 뿐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그의 이론은 허망한 종국을 맞이하였다. 하버드 대학의 제프리 교수는 「과학」(Science, 1914. 4. 3) 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드 브리스의 돌연변이 이론은 이제 폐기된 가설들이 머무는 망각의 구렁으로 추방되어야 한다.”  


출처 - 앨버트 시퍼트의 [진화론의 비과학성 : 그 32가지 이유들] 번역

미디어위원회
2005-10-01

다윈은 자기의 주장을 철회하였는가?

(Did Darwin recant?)

Russell M. Grigg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은 1882년 4월 19일에 73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가 불신자로 죽었다는 것을 슬퍼했던 일부 사람들에 의해서, 다윈이 죽음 직전에 침상에서 기독교로 전향(death-bed conversion)했고 진화론을 포기하였다는 여러 뒷이야기들이 몇 년 동안 떠돌아 다녔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그가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1882년 5월경부터 설교들에 포함되기 시작하였다.[1] 이러한 이야기들은 1881년 가을에 다운 하우스(Down House)[2]를 방문하여 병상의 다윈을 만났었다고 주장하는 호프 부인(Lady Hope)의 말에 의해서 기인되었다.

그녀가 도착했을 때 다윈은 히브리서를 읽고 있는 중이었고, 그녀가 창세기의 창조에 대해서 언급했을 때 그는 괴로워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윈은 그녀에게 다음 날 다시 와줄 수 있느냐고 물었고, 여름 집의 정원에서 열리는 하인, 소작인, 이웃들 30여명이 모이는 모임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주장했다. 이 이야기는 처음 미국 침례교도 저널인 Watchman Examiner (1915년) [3]에 521 개의 단어로 된 기사로서 인쇄되어 나타났고, 그때 이후로 많은 책들, 잡지들, 소책자들에서 재인쇄 되었다.

이 이야기에 있어서 주요한 문제점은 다윈의 가족들에 의해서 그러한 사실들이 모두 부인되었다는 것이다. 프란시스 다윈(Francis Darwin)은 1887년 2월 8일 토마스 헉슬리(Thomas Huxley)에게 편지를 썼는데, 찰스 다윈이 죽기 직전 침상에서 진화론을 철회했다는 보고는 "잘못되었으며 어떠한 근거도 없다”[4] 라고 하였다. 그리고 1917년에도 프란시스는 "아버지가 그의 회의론적(agnostic) 관점을 바꾸었다고 믿을만한 어떠한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5] 라고 단언했다.

찰스 다윈의 딸 헨리에타(Henrietta, Litchfield)는 1922년 2월 23일 영국의 복음 주간지인 The Christian 의 p.12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아버지의 임종 시에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호프 부인은 아버지의 마지막 또는 어떠한 투병 기간 동안에도 있지 않았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심지어 그녀를 보지도 못했으며, 그래서 어떤 경우에서든지 아버지의 사상과 믿음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주지 못했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또는 그 이전에도 그의 과학적 견해를 조금이라도 결코 철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한 모든 이야기들은 어떠한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6]

일부 사람들은 심지어 어떠한 호프 부인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결론 내리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만 하는가?

다윈의 전기 작가이며, 영국 오픈 대학(The Open University)의 과학사 강사인 제임스 무어(James Moore) 박사는 20여년 동안 3개 대륙에 걸쳐서 자료들을 조사하였다. 그는 그가 ‘다윈의 전설(Darwin legend)’[7] 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조사하여 218 페이지의 책을 발간하였다.

그는 호프 부인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1842년 Elizabeth Reid Cotton에서 태어났고, 1877년에 은퇴한 홀아비인 제임스 호프(James Hope) 제독과 결혼했다. 그녀는 복음 전도(tent evangelism) 팀에 몰두했으며, 1880년 대에 켄트(Kent, 다윈의 집이 있던 곳)에서 나이든 사람들과 아픈 사람들을 방문하곤 했었다. 그녀는 1922년에 호주 시드니에서 암으로 죽었고, 그곳에서 그녀의 무덤을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8] 무어는 프란시스와 헨리에타가 거의 확실히 없었던 기간인 1881년 9월 28일(수요일)과 10월 2일(일요일) 사이에 아마도 호프 부인이 찰스 다윈을 방문했을 것이라고 결론 내리고 있다. 그러나 그때 다윈의 부인 엠마(Emma)는 아마도 있었다는 것이다.[9] 그는 호프 부인을 묘사하면서 감동적인 장면과 대화를 유도할 수 있는, 그리고 감상적인 영성(sentimental spirituality)을 가지고 그것들을 과장하여 이야기할 수 있는 숙련된 이야기꾼(a skilled raconteur)으로서 기술하고 있다. 그는 그녀의 출판된 이야기가 시기와 장소에 관해서 일부 신뢰할만한 세부사항들을 포함하고 있었으나, 실제와 틀린 사실들도 있었음을 또한 지적했다. 즉, 찰스 다윈은 죽기 전에 6개월 동안 병상에 누워있지 않았으며, 그의 여름 집은 30여명의 사람들을 수용하기에는 너무 작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찰스 다윈이 진화론을 포기하거나, 기독교를 받아들였다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단지 그가 젊었을 때 발표했던 이론들의 운명에 대해서 관심을 표현하였고, 종교적 모임에 소수의 사람들이 참석하는 것을 찬성했다는 것이다. 주장되는 다윈의 철회/전향(recantation/conversion)은 다른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읽거나, 스스로 만들어서 가지게 된 장식(embellishments)이라는 것이다. 무어는 그러한 행위를 "거룩한 위조(holy fabrication)" 라고 부르고 있다!

다윈의 아내였던 엠마는 결혼 생활 대부분의 기간 동안 다윈의 견해가 가지는 반종교적인 본질(irreligious nature) 때문에 굉장히 고통을 받았었다는 것을 주목해야만 한다. 만약에 그러한 일이 진정으로 발생했다면, 그녀는 다윈의 전향에 대한 이야기들을 확증하기 위한 강한 동기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다윈은 자기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오늘날 호프 부인의 이야기가 간혹 소책자에 출판되어 선의의 사람들에 의해서 배포되고 있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References

1. James Moore, The Darwin Legend, Baker Books, Grand Rapids, Michigan, 1994, pp. 113-14.
2. Down House retained the spelling of the old name of Darwin's village, which was changed to Downe in the mid-nineteenth century to avoid confusion with County Down in Northern Ireland. Source: Ref. 1, p. 176.
3. Watchman Examiner, Boston, 19 August 1915, p. 1071. Source: Ref. 1 , pp. 92-93 and 190.
4. Ref. 1, pp. 117, 144.
5. ibid, p. 145.
6. ibid, p. 146.
7. ibid.
8. After the death of Admiral Hope in 1881, Lady Hope married T.A. Denny, a 'pork philanthropist', in 1893, but preferred to retain her former name and title (Ref. 1, pp. 85; 89-90).
9. Ref. 1, p. 167.
10. ibid, p. 94.

 

*관련기사 : '성경·예수 안 믿어' 다윈 편지 첫 공개 (2015. 9. 12. 조선일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9/12/2015091200286.html

다윈의 편지 공개... '성서도 예수도 믿지 않는다'(2015. 9. 12.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43522

'성경·예수 안 믿는다' 다윈 편지 경매에 나와 (2015. 9. 11. 연합뉴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09/11/0200000000AKR20150911071200091.HTML


* 참조 : Did Darwin Renounce Evolution on His Deathbed? 

https://www.icr.org/article/2834/

Charles Darwin Questions and Answers
http://www.answersingenesis.org/home/area/faq/darwin.asp


번역 - 미디어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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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Creation 18(1):36–37, December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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