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자들의 Out of Africa 이론
1987년 1월 7일자 학술지 Nature(volume 325)에 진화론 연구의 경향을 바꾸는 기폭제가 될 수 있는 논문(by Wilson, Cann and Stoneking)이 게재되었습니다. 저자인 버클리대학(U. C. Berkeley)의 생화학과 교수인 윌슨(Allan C. Wilson)은 이 논문에서 지금으로부터 10만년 내지 20만년 전에 (균일론에 근거하여 백 만년 정도에 2~4%정도의 미토콘드리아 DNA변이가 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계산된 수치)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 지방에 존재했던 한 여성이 현생인류의 공통의 조상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세계 곳곳의 여성 147 명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하여 이들의 염기 서열(nucleotide sequence)의 변이를 추적하여 계통도를 만들어 본 것입니다. 미토콘드리아 DNA는 핵 안에 있는 DNA처럼 부모의 DNA가 서로 합쳐진 것이 아니라, 모계에서 모계로만 승계되는 것으로서, 모든 세대에 걸쳐 여성에게만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토콘드리아 DNA는 돌연변이에 의해서만 그 변화가 가능합니다. 그 연구의 결과 현인류의 모든 여성은 아프리카의 한 여자로부터 흘러나온 것이 밝혀졌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의 주장은 수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지만, 10년 후인 1997년 10월 다른 연구팀(Stanford U, U of Arizona, U of Pennsylvania)에서 유사한 방법으로, 남성의 세포핵 내의 DNA에 포함되어 있는 Y염색체 서열을 분석하여 발표한 남성 계통 흐름도에 의해서 다시 지지되었습니다. 그들의 독립적인 결과도 현존 남성의 공통의 조상은 10만년 내지 20만년 전에 에티오피아 지방에 존재했던 한 남성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연구 발표를 종합하여 현생 인류는 지금으로부터 10만년 내지 20만년 전에 에티오피아 지방에 존재했던 한 남성과 한 여성의 자손이며, 아프리카로부터 세계 각지로 흩어졌다는 'Out of Africa 이론'이 성립되었습니다.
이는 인류의 진화는 지구상의 어느 특정 지방에서 일어나지 않았고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는 진화론의 기본 믿음과 충돌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또한 인류의 탄생 연대를 기존에 널리 받아들여지던 화석의 동위원소 측정법이 아닌 DNA 상에 남겨진 돌연변이율로부터 계산(분자시계, molecular clock)한 것이라는 점에서 진화론자들로부터도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은 최근 연구의 결과들은 한 남자와 한 여자를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모든 인류가 그로부터 유래했다는 창조론과 맞물리는 점이 있어서 기독교계로부터도 주목을 받았었습니다. 다른 한편, 성경의 문자적 해석에 충실한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인물들의 계보 연구에 의해 추정된 '세계 역사 6000년 + alpha' 의 연대 계산과 큰 차이를 보인다는 점에서 역시 그 연구의 결과(특히 연대추정)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한편 진화론자들도 그 연구 결과가 창조의 가능성을 제공한다고 믿기보다는, 그 이브와 아담을 제외하고는 같은 진화과정을 걷고 있던 다른 인류의 조상들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모두 멸종되거나 자손을 남기지 못했다고 나름대로 상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잠깐 왜 'Out of Africa 이론'의 연대계산에 문제가 있는지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분자시계의 창시자는 UC 버클리 대학의 사리치(Sarich) 박사인데 먼저 그가 어떻게 분자시계를 보정(calibration)했는지를 들여다보면 이 방법에는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과연 현인류의 DNA 염기서열을 관찰할 때, 어느 것이 변이한 것이고 어느 것이 변이하지 않은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첫 인류의 DNA 구조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하지만, 진화론자들은 인류가 침팬지로부터 진화했다는 가정 하에 침팬지를 준거점(original reference)으로 사용합니다.
더욱이 사리치 박사는, 진화론에서 화석의 빈도와 연대가 잘 알려진 몇 종의 돌연변이를 관찰하고, 그 화석의 연대와 비교하여 DNA의 기준변화율을 책정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 변화율을 침팬지와 사람에 적용하여 침팬지로부터 사람의 진화는 약 5백-7백 만년 정도라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위의 'Out of Africa' 연구팀들이 사용한 분자시계는 이 사리치 박사의 화석에 의한 보정법과 그 변화율 계산에 근거한 것입니다. 지금 분자생물학자들은 화석의 연구는 이제 진부한 것이고 첨단과학인 분자생물학으로 대치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그 첨단 분자생물학의 변화율 보정이 기존의 화석과 진화론의 연대 계산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순환논리(circular reasoning)의 전형이라 볼 수 있습니다.
최근의 다른 진화론자들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그 분자시계의 보정도 경우에 따라 엄청난 변화를 보이며 신뢰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고 발표된 적도 있습니다. 또한 'Out of Africa' 연구팀들은 이미 인류화석학의 패러다임이 인류가 아프리카로부터 진화했다는 것임을 알고 편파적 실험자료처리로 아프리카 기원(Africa origin)의 결론에 도달한 것이라고 비평받고 있습니다.
아무튼 앞으로 이러한 연구의 방향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궁금합니다. 크리스챤 과학자들의 냉철한 지성이 필요한 시대 입니다.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339
참고 :
찰스 다윈은 정신이상자였는가?
: 그의 정신 건강에 대한 연구
(Was Charles Darwin Psychotic? : A Study of His Mental Health)
Jerry Bergman, Ph.D.
서론
다윈이 평생 지니고 있었던 많은 심각한 질병들은 1세기 이상 동안 많은 연구와 조사가 이루어졌던 주제였다. 다윈은 단지 6살이었던 1825년부터 건강상의 문제가 시작되어, 28살 무렵에는 무기력할 정도로 쇠약해졌다고 말했다 (Barloon & Noyes, 1997, p.138). 호란 (Horan, 1979, p.ix)은 다윈이 ”아파서 40년 동안 켄트(Kent)에 있는 그의 집에 적막하게 틀어박혀” 있었다고 단정했다. 진화론 학자인 미카엘 루즈(Michael Ruse) 조차도 "다윈은 30살 때부터 병약자(invalid)였던 사람이었다”고 단정했다 (2003, p.1523). 그리고 다윈의 병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에서, 의사였던 조지 피커링(George Pickering)은 다윈은 30대에 ‘병약한 은둔자’가 되었다고 결론을 지었다 (1974, p.34). UCLA 대학의 의학부 교수인 로버트 파스나우(Robert Pasnau) 박사(1990, p.123)는 다윈이 또한 비글호 여행을 하는 5년 동안의 전 기간을 시종일관 "거의 계속해서 아픈 채로 있었다.”고 기록했다.
수십 개의 학술 기사와 적어도 3권의 책이 다윈의 질병(Darwin's illness) 문제에 관해 저술되었다. 현재의 결론은 다윈이 광장공포증(agoraphobia, 강박신경증의 한 증상. 사람들이 밀집한 장소에 혼자서 나갈 때, 갑자기 식은땀이 흐르고, 현기증이 나며,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심장이 크게 뛰는 등의 불안 발작이 일어나는 증상)을 포함한 몇 가지 심각하고 무기력한 정신이상증으로 고통 받았다는 것이다. 광장(공간)공포증은 집과 같이 심리적으로 안전한 환경이 아닐 때 공황발작(panic attacks, or actual panic attacks)의 두려움으로 특징지어진다. 광장공포증 환자 사이에서 흔하듯이, 다윈도 또한 추가적으로 많은 공포증(군중 속에 있거나, 홀로 있거나, 혹은 부인을 동반하지 않은 채 집을 나설 때)들을 나타냈다 (Kaplan & Sadock, 1990 pp.958-959).
광장공포증은 다윈이 또한 겪었던 만성적 질병인 이인증(depersonalization, 자신이 자신의 신체 밖에 있다거나, 분리되어 있다고 느끼는 증상)과 자주 관련된다 (Barloon & Noyes, 1997, p.138). 바룬(Barloon)과 노이즈(Noyes)는 다윈의 정신 상태에 관한 연구에서, 다윈이 불안 장애(anxiety disorders)로 고생했으며, 그것은 너무도 심각하여서, 그가 집을 떠나 동료나 다른 친구들을 만나는 능력을 제한했으며, 그의 활동을 위축시켰다고 결론내렸다. 이러한 진단이 아마 그의 매우 격리된 은둔자적 생활양식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1997, p.138). 그것은 또한 1991년에 데스몬드(Desmond)와 무어(Moore)가 저술한 다윈의 전기(biography of Darwin)의 제목이 "다윈: 고통 받았던 진화론자의 삶 (Darwin: The Life of a Tormented Evolutionist)” 으로 붙여진 것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된다.
다른 정신적, 의학적 문제
콜프(Colp, 1977, p.97)는 "다윈의 대부분의 일상생활은 다양한 정도의 통증(pain)으로 인해 고문대(rack) 위에서 살아가는 삶”이었다고 결론지었다. 때때로 그 고통은 너무나 심해서 다윈은 그 고통을 ‘참혹한 엄청난 고통’이라고 불렀다. 다윈의 많은 정신적 증상, 또는 정신적 영향을 받은 육체적 증상에는 심각한 우울증(severe depression), 불면증(insomnia), 히스테리성 울부짖음(hysterical crying), 죽어가는 느낌(dying sensation), 떨림(shaking), 기절 발작(fainting spell), 근육 경련(muscle twitches), 호흡 곤란(shortness of breath), 진전(trembling), 메스꺼움(nausea), 구토(vomitting), 심각한 불안증(severe anxiety), 이인증(depersonalization), 눈앞에 점이 보이며(seeing spots), 환상과 환시(treading on air and vision), 그리고 다른 시각적 환영(visual hallucination) 등이 포함되고 있다 (Barloon & Noyes, 1997, p.139; Picover, 1998, p.290; Colp, 1977, p.97; Bean, 1978, p.573). 신체 증상으로는 두통, 심장의 심계항진(cardiac palpitation), 귀울림(아마도 이명, tinnitus), 통증이 있는 헛배부름(painful flatulence), 위장 전도(gastric upset) 등이 있었다 - 모두 다 대개 정신적 원인을 가진다 (Pasnau, 1990). 콜프는 "이러한 증상 뒤에는 항상 불안증과 우울증이라는 핵이 있었다.”라고 언급했다 (1977, p.97). 어떤 이들은 다윈의 정신적 문제의 일부는 그의 떠나지 않는 격렬한 공포(fear)에 기인하였다고 추정하고 있다. 즉, ‘위험한 환상’에 자신의 삶을 바쳤다는 끊임없는 가책적인 두려움에 의한 것이었다 (Desmond & Moore, 1991, p.477). 이러한 두려움은 그의 이론이 틀렸다는 것과 사실상 거룩한 창조자가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또한 다윈의 행동도 그가 정신병을 앓고 있었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비록 그의 아내와 딸들에게 헌신적이었지만, 그는 심지어 그의 딸들이 완전히 성장한 후에도 "그들을 어린아이처럼 다뤘다" (Picover, 1998, p.289). 다른 사람들에게 말한 일부 다윈의 말은 그의 정신적 안정성에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예를 들면, 1875년, 그는 동료 과학자인 로버트 후커(Robert Hooker)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자네는 나의 책에 대해서 물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자살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뿐이라네. 나는 그 책이 잘 쓰여졌다고 생각했으나, 다시 써야할 필요성을 너무나 많이 발견하네....나는 책을 출판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바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네.” (Colp, 1977, p.228 에서 인용).
콜프는 다윈의 아들 레오나드(Leonard)가 그의 아버지의 병이 심지어 자녀들에 대한 감정도 방해했다고 쓰고 있었다. 예를 들면, 레오나드는 한때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젊은 청년으로 나는 잔디밭을 서성이고 있는 아버지께로 다가갔다. 그러나 그는... 마치 어떤 대화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외면했다. 그때 갑자기 그가 더 이상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내 마음에 일어났다" (Colp, 1977, p.100에서 인용).
다윈의 정신적 문제는 너무나 심각한 것으로 간주되어, 피코버(Picover, 1998, p.289)는 "이상한 지도자... 별난 과학자, 그리고 미친 사람"이라고 부르는 역사적 인물 모음집에 다윈을 포함시켰다. 다윈이 몇몇 심각한 무기력한 질병들로 고통당했다는 것은 언급되지 않았고, 단지 그것들을 초래한 원인에 관해서만 토의되었다.(Pasnau, 1990, p.121).
다윈의 병에 대한 다른 가능성 있는 원인
다윈의 아내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그의 정신적 질환이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반박하고자 하는 그의 삶의 목표에 대한 죄책감으로부터 유래했다고 주장했다 (Bean, 1978, p.574; p.28; Pasnau, 1990, p.126). 대부분의 정신분석 연구에서, 그의 문제들은 압제적인 아버지를 향한 억제된 분노와 자신의 이론으로 "하늘의 아버지를 살해한" 결과였다고 주장했다 (Pasnau, 1990, p.122).
다윈의 정신적, 신체적 이상의 원인에 대한 진단에는 기생충 감염(샤가스 병, Chaga's disease, 남미에서 흔한 곤충에 의해 원인됨), 비소 중독(arsenic poisoning), 그리고 어쩌면 내이이상(inner ear disorder)도 포함된다 (Picover, 1998, p.290; Pasnau, 1990). 그러나 이 모든 원인들은 대개 반박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정신병(psychosis, 심각하고 무기력하게 하는 정신질환)에 가까운 전형적이고 본태성인(essential) 정신적 장애(mental disturbance)를 가졌다고 결론짓고 있다. 그러한 진단에도 불구하고, 다윈의 건강상태는 종종 한 번에 수개월 동안 분명히 무기력해졌고, 그의 생애의 대부분을, 특히 그의 전성기 동안에 병약한 상태로 지내게 되었다.
아놀드 소스비(Arnold Sorsby)는 다윈이 또한 강박 관념(obsessive-compulsive)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고 주장했으며, 다음과 같은 증거들을 제시했다.
"만약 샤가스 병이 다윈의 증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무엇이 일으켰는가? 나의 개인적 진단에 따르면, 강박관념의 특징과 정신 신체적 발현(psychosomatic manifestations)을 가진 불안 상태일 수 있다. 불안(anxiety)은 분명히 그의 많은 신체적 문제들을 촉진했고, 강박관념을 갖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다윈은 모든 것을 ‘바로 그대로(just so)’ 가지려고 하는 강박관념적 특징을 나타냈다. 그는 많은 강박관념적 하이포콘드리아증 환자(hypochondriacs, 신병기우증, 자기 건강에 지나치게 신경을 써서 정상적인 감각이나 약간의 신체 이상을 심각한 질환으로 생각하는 일종의 정신장애)들처럼 그의 건강과 증상에 대해 꼼꼼하게 기록했다. 모든 것은 제자리에 있어야만 했고, 심지어 자신이 목욕할 때 사용했던 스펀지를 위한 특별한 서랍장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건강 일지도 썼다. 밤낮으로 몸이 얼마나 좋았는지에 따라서 점수를 매겼고, 매 주말에는 점수를 더했다. 어떤 밤이 매우 좋았다거나 그럭저럭 좋았다거나 하는 정도를 정하는 데 있어서 빈번하게 마음이 바뀐 증거도 있다(1974, p.228).
건강상태에 대한 다윈 자신의 말
건강 문제와 병에 대한 일기 외에도(Colp, 1977, p.136), 그는 그의 건강 문제를 편지와 자서전에서 자주 논했다. 건강상태에 대한 다윈 자신의 기술은 다음과 같다. "나는 매우 조용히... 살도록 강요당한다. 그리고 거의 아무도 만날 수 없으며, 심지어 나의 가족들과도 오래 말할 수 없다.” (Bowlby, 1990, p.240 인용). 한 번은 다윈이 린네 학회(Linnean Society)에서 단지 ‘몇 분’ 동안 말하곤, "24시간을 토했다"고 불평했다 (Darwin, 1994, pp.98-99). 또 다른 때에, 다윈은 "손님들로 가득 찬 집"에 있었고, 세례식을 위해 교구 교회를 방문한 후에, 그의 건강은 "원점으로 돌아가" 좋았던 건강은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졌으며, (구토를 포함한) 병이 다시 시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Desmond & Moore, 1991, p.456). 이러한 사건들에서 묘사되어 있는 것처럼, 그의 갑작스러운 병세는 그의 무력감이 심리적인 근원이었음을 보여준다.
다윈의 또 다른 면은 그의 가학적 충동(sadistic impulses)들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자서전에 적혀있는 다음과 같은 그의 말이 생생한 예를 보여준다.
"학교생활 후반부에, 나는 사격을 열렬히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새를 사격할 때 보다 더 거룩한 대의명분를 가지고 열정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처음으로 도요새를 죽였을 때를 얼마나 잘 기억하고 있는지. 나는 너무나 흥분해서 손이 떨려 총을 다시 장전하는 것이 무척 어려웠다. 이 경험은 오래도록 지속되었고, 나는 매우 뛰어난 사격수가 되었다” (1958, p.44).
그가 처음으로 새를 죽인 것이 그를 흥분으로 떨리게 했을 만큼 살생을 너무나 좋아했다는 사실은 다윈의 새디즘적 경향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새 죽이기에 대한 그의 열정은 잘 알려져 있다. 어떤 사람은 살생에 대한 이러한 ‘열정’이 부분적으로 자연선택이라는 그의 무자비한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 이론의 이빨과 발톱이 되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결론
다윈은 분명히 매우 괴로운 사람이었고, 그의 성인기의 대부분을, 특히 전성기 때, 심각한 정서적 문제로 고생을 했던 사람이었다. 그의 정신적, 그리고 많은 신체적 문제들의 정확한 원인이 무엇인지는 많이 토의되었으나, 결코 확실하게 알려질 수 없을 지도 모른다. 다윈이 그의 정신적, 신체적 문제들에 대해 광범위하게 기록을 남겼기 때문에, 그의 삶에서 이러한 부분에 대한 합리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많은 자료들을 가지고 있다. 그의 정신적 신체적 문제들에 대한 원인 진단으로는, 다양한 쇠약증세를 포함한 정신적 노이로제와 더불어 광장공포증(agoraphobia)이 아마도 가장 정확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작가들은 다윈이 현재 많은 과학자들과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우상화되어 있기 때문에, 이 주제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을 피하고 있다. 비록 일찍이 살았던 가장 위대한 과학자는 아니더라도,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과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 종종 기록되어지는 다윈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알려진 소수의 과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한 인간으로서의 다윈과 그의 동기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의 정신적 건강상태와 그것이 그의 연구와 결론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가 고려되어야만 한다.
References
Barloon, Thomas and Russell Noyes, Jr. 1997. 'Charles Darwin and Panic Disorder.' JAMA 277(2):138-141.
Barlow, Nora, ed. 1958. The Autobiography of Charles Darwin 1809-1882. NY: Norton.
Bean, W. B. 1978. 'The Illness of Charles Darwin.' The American Journal of Medicine65(4):572-574.
Bowlby, John. 1990. Charles Darwin: A New Life. NY: Norton.
Colp, Ralph Jr. 1977. To Be an Invalid: The Illness of Charles Darwin. Chicago, IL: University of Chicago.
Darwin, Charles. 1994. The Correspondence of Charles Darwin. Cambridge, England: Cambridge University. Vol. 9.
Desmond, Adrian and James Moore. 1991. Darwin: The Life of a Tormented Evolutionist. NY: Warner Books.
Grigg, Russell. 1995. 'Darwin's Mystery Illness.' Creation Ex Nihilo 17(4):28-30.
Horan, Patricia G. 1979. Foreword to The Origin of Species. NY: Gramercy Books.
Kaplan, Harold I. and Benjamin J. Sadock, ed. 1990. Comprehensive Textbook of Psychiatry/V. Volume 1 Fifth Edition. NY: Williams and Wilkins.
Pasnau, R. O. 1990. 'Darwin's Illness: A Biopsychosocial Perspective.' Psychosomatics31(2):121-128.
Pickering, George. 1974. Creative Malady. NY: Oxford University Press.
Picover, Clifford A. 1998. Strange Brains and Genius: The Secret Lives of Eccentric Scientists and Madmen. NY: Quill William Morrow.
Ruse, Michael. 2003. 'Is Evolution a Secular Religion?' Science 299:1523-1524.
Sorsby, Arnold, ed. 1974. Tenements of Clay. NY: Charles Scribner's Sons.
* Dr. Bergman is on the Biology faculty at Northwest State College in Ohio.
1. 사냥과 살생에 대한 다윈의 열정
http://creation.kr/HistoryofEvolution/?idx=1290078&bmode=view
2. 다윈의 이상한 질병
http://creation.kr/HistoryofEvolution/?idx=1289995&bmode=view
3. 다윈의 전 세계 항해
http://creation.kr/HistoryofEvolution/?idx=1289996&bmode=view
4. 다윈 사상, 모든 게 그 집안 내력이다
http://creation.kr/HistoryofEvolution/?idx=1290044&bmode=view
5. 다윈의 불법적인 발명품
http://creation.kr/HistoryofEvolution/?idx=1290045&bmode=view
6. 비글호의 항해 - 창조주를 위한 봉사
http://creation.kr/HistoryofEvolution/?idx=1290029&bmode=view
7. 다윈의 무덤과 교회
http://creation.kr/HistoryofEvolution/?idx=1290073&bmode=view
번역 - 한국창조과학회 대구지부
링크 - http://www.icr.org/pubs/imp/imp-367.htm
출처 - ICR, Impact No. 367 January 2004.
다윈의 전 세계 항해
(Darwin,s Voyage Around The World)
Creation-Evolution Encyclopedia
다윈의 비글호 항해는 그에게 진화의 위대한 발견들을 가져다준 원천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831~1836년까지 5년 간의 여행에서 그는 진화의 어떠한 증거도 결코 찾지 못했다. 여기에 무엇이 일어났는지가 있다. 이것은 과학 대 진화이다. 창조-진화 백과사전은 창조과학의 사실들로 당신에게 알려줄 것이다.
중요 : 이 장을 읽은 후에, 다윈의 이상한 질병을 읽기 바란다. 다윈의 46년 간 지속된 병의 원인이 마침내 밝혀졌다.
내용 : 다윈의 전 세계 항해
찰스 다윈의 5년 간 비글호 여행은 그의 진화론의 근간이 되었다고 널리 말하여지고 있다. 자 그렇다면, 그가 5년 동안 발견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근간으로 제공되는 것은 무엇이었는지를 알아보자. 잠시동안 다윈이 항해한 세계로 우리도 같이 여행을 떠나보자.
1. 베르데 곶 섬(Cape Verde Islands)
1831년 12월 31일 (실제 생일이라고 후에 다윈은 말했다.) 국왕폐하의 배 비글호(His Majesty's Ship (H.M.S) Beagle)는 영국에서 남아메리카를 향해 항해를 시작했다. 베르데 곶 섬에 1832년 1월 16일에 멈췄을 때, 다윈은 마을을 보았고, 배가 공급품을 위해 정박할 동안, 짧은 시간에 가까운 언덕 몇 군데를 재빨리 걸었다. 찰스 다윈은 젊었고, 튼튼했다. 비록 배여행으로 멀미가 있었지만, 그는 강했고, 육지에서 동안 모든 종류의 배낭여행도 잘 이겨낼 수 있었다.
2. 티에라 델 푸에고(Tierra Del Fuego)
티에라 델 푸에고에서 1832년 12월과 1833년 1월에 다윈은 24살이었고, 타른 산(Mount Tarn)이라 불리는 황폐한 산을 올랐다. 그것은 매우 힘든 등반이었으나, 바위와 눈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거기 있는 동안 다윈과 승무원들은 그들의 집인 푸에강스(Fuegans)로 3번 돌아갔고, 그는 티에라 델 푸에고의 바람만 거세게 부는 황량한 땅들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곳에 진화의 증거는 없었다.
3. 리오데자네이로(Rio De Janeiro)
비글호는 1832년 브라질, 우루과이 그리고 아르헨티나의 해안을 따라 9개월 동안 관측을 했다. 티에라 델 푸에고의 답사후, 1833년에는 똑같은 일을 하며 7개월을 보냈다. 그것은 영국정부가 배를 바다로 보낸 이유로서, 남아메리카와 다른 지역의 해안을 조사하여, 런던의 영국해군본부 지도를 수정, 추가하기 위한 것이었다.
배가 남아메리카 해안을 관측하는 동안, 젊은 다윈은 해변에서 시간을 보냈다. 1832년 4월 4일에 배는 리오데자네이로에 도착했다. 10주 동안, 피츠로이(Fitz Roy, 비글호의 선장)가 비글호에서 브라질 해안의 영국 해도를 업데이트 하는 동안, 다윈은 리오데자네이로에 보타포고 만(Botafogo Bay)의 오두막집에서 살았다. 그 집에 있는 동안 다윈은 진흙으로 집을 만들고, 그런 다음 반쯤 죽은 거미와 모충으로 가득채워 넣는 벌(mud-dauber wasps)에 대해 연구했다. 진화의 증거는 없었다. 그는 또한 벌과 거미와의 싸움을 보았다. 다윈은 후에 그것이 '생존투쟁'의 이해를 도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또한 진화의 증거는 없었다. 다윈은 밤에 들었던 유쾌히 짹짹 우는 귀뚜라미와 개구리에 관해 썼다. 그는 가까운 시골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4. 몬테비데오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Montevideo To Buenos Aires)
배는 1832년 7월에 몬테비데오를 향해 떠났고, 다윈은 해안을 탐험하며 거의 6개월을 보냈다. 배는 1833년에 다시 몬테비데오로 되돌아왔고, 다윈은 더 많은 시간을 해안에서 보냈다.
그러나 그의 일기장과 기록들은 그가 어떠한 진화의 증거들도 보지 못했음을 암시하지 있었다. 그는 거기에서 화석뼈를 발견했다. 이것은 그를 흥분시켰으나, 그가 본 어떤 것도 진화의 증거는 아니었다. 1833년 8월 11~17일에 그는 말을 타고 여행을 했다. 그는 바히아 블란카 북쪽의 리오데자네이로 입구에서부터 수백 마일을 여행했고,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400마일을 지나갔다. 달 아래에서 잠을 잤고, 가우초들이 발견한 사냥감은 무엇이든지 먹었다. 그의 일기장은 그가 강했고, 젊은 남자였고, 여행을 잘 할 수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1833년 9월 27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다른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파라나 강을 끼고 서북방향의 산타푸로 험난한 길을 여행했다. 그런 다음 그는 배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강하류를 따라 10월 2일에 도착했다. 11월 14일부터 28일에 그는 화석뼈와 말의 이빨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은 아르헨티나에 말이 최근까지도 없었기 때문에, 그를 더욱더 흥분시켰다. 그러나 전에도 말했듯이 이것도 진화의 증거는 아니었다.
5. 산타쿠르즈 강(Santa Cruz River)
1834년 1월에 그는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데세아도(Deseado)로부터 다시 티에라 델 푸에고로 갔고, 남아메리카의 남쪽 끝의 가까이까지 내려간 다음, 포크랜드(Falkland) 섬에 상륙했으며, 다시 해안을 돌았다. 4월 18일부터 5월 8일까지 다윈은 배에서 산타크루즈(Santa Cruz) 강 탐사를 도왔다.
6. 밸파래소(Valparaiso)
5월에 배는 마젤란해협을 따라 남쪽으로 향했다. 1834년 6월 11일에 비글호는 태평양으로 들어섰다. 7월의 마지막날에 밸파소래 북쪽 1200마일 쯤에서 겨울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거기 있는 동안 다윈은 마을을 산책했고, 가까운 정글도 들어갔다. 그는 진화의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7. 칠레 해안가와 다도해(Chiloe Coast And Archipelago)
1월에 배는 남쪽으로 돌아왔고, 칠로(Chiloe) 섬의 해안가와 다른 칠로 다도해의 많은 섬들을 조사하면서 3개월을 보냈다. 다윈은 그가 본 빙하에 큰 감명을 받았다. 거대한 얼음은 전쟁때 대포가 터지는 소리를 내면서, 거대한 파도를 모든 방향으로 내보내면서 쪼개졌다. 1835년 2월에 칠로의 해안가 발디비아(Valdivia)에서 다윈은 지진을 느꼈다. 더 많은 흥분! 그는 그의 나이에 영국 원주민이 경험한 것보다 2배는 많은 경험을 했으나, 어떤 자료도 진화를 암시하는 것은 없었다.
8. 컨셉시온(Concepcion)
컨셉시온에 도착한 후에 200마일 북쪽으로 더가다가, 그는 같은 지진의 격렬한 영향을 느꼈다. 가까운 섬에서 선장 피츠로이는 홍합껍질이 바다 수면보다 10피트 위로 떠오른 상태에서 형성된 것을 보았다. 무엇인가 융기시킨 원인은 지진이었다. 이것은 젊은 다윈에게 정말 새로운 것이었고, 그는 주의 깊게 그의 일기장에 그것에 관해 기록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진화의 증거는 없었다.
9. 산티에고에서 멘도자(Santiago To Mendoza)
1835년 3월에 그는 산티에고에 있었고, 잠시동안이나마 흔들리는 배위를 떠날 수 있어서 기뻤다. 다른 배낭여행을 준비하면서, 그는 산티아고(Santiago)로부터, 칠레, Portillo Pass를 경유하여, 아르헨티나의 멘도자(Mendoza)까지 안데스산맥을 넘었다. 그는 우스팔라타(Uspallata)에서 되돌아왔다. 이 배낭여행은 3월 18일에서 4월10까지 이어졌다. 안데스를 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젊은 남자에게 그것을 행하는데 육체적 어려움은 없었다. 칠레인 안내인과 10마리의 노새가 24일 동안 대륙을 지나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들은 여행동안 들판에서 먹고 잤다. 안데스에서 그는 바다조개화석을 4200m 고지에서도 발견했고, 안데스의 아르헨티나 지역에서는 화석화되어 돌같이 된 나무들을 발견했다. 둘 다 과거에 어떤 시간에 거대한 산이 융기한 증거였으나, 다시 한번 그것은 진화의 증거를 제공하진 못했다. 해안으로 돌아와서 다윈은 4월 23일 그의 조개화석과 화석화된 나무를 배에 전달하기위해 비글호를 탔다. 그리고 그는 급히 해안가로 되돌아왔고, 많은 시간을 배에서 떨어져서 보내어, 배로 인한 멀미 등을 겪지 않음을 감사히 생각했다.
10. 밸파래소에서 코피아포(Valparaiso To Copiapo)
또다른 배낭여행으로서, 그는 4월 27일 밸파래소에서 코피아포까지 북쪽지역을 여행했다. 다윈은 배낭여행을 철저히 즐겼고, 길을 따라가며 밖에서 캠프하는 것도 좋아했다. 해안으로 가는 도중에 그는 아쿠에로스산 아래 은광산으로 여행을 했다. 다윈은 광부들이 200파운드는 더 나가 보이는 짐을 어깨에 지고, 수직으로 걸린 사다리를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6월 22일에 그는 다시 배를 탓다. 그러나 여행 중에 어떠한 진화의 증거도 찾을 수 없었다. 만약 그가 찾았다면, 그의 노트와 후에 항해에 관해 내용들을 기술했던 그의 책에서 나타나 있어야만 했다
11. 리마(Lima)
1835년 7월에 그는 다시 비글호에 올랐고, 그 배는 북쪽인 칼로, 리마항구로 향했고, 그들은 6주를 머물렀다. 젊은 다윈은 또 다른 탐사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혁명이 일어나서,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배에서 보냈다. 그런 다음 배는 닻을 올리고, 태평양을 향해 출발했다. 다윈은 그가 본 것들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가졌고, 그는 많은 코멘트를 일기장에 썼으나, 그 중에 진화의 증거들은 아무 것도 없었다.
12. 갈라파고스(Galapagos)
에콰도르 서쪽의 약 600마일 부근에서, 그들은 갈라파고스에 도착했고, 거기서 5주를 보냈다. 젊은 다윈이 선원 몇몇과 산책하는 동안 선장은 섬을 측량했다. 거기에서 많은 이상한 생물들이 있었으나, 진화의 증거는 아니었다. 그는 또한 핀치새의 아종들을 보았고, 몇 마리를 수집했고, 그의 노트에 기록했다. 영국에 도착했을 때, 그의 친구인 존 굴드(John Gould)는 그것이 진화의 증거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이곳에서 마침내 진화의 증거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에서 토의한 것과 같이, 그것은 진화의 증거가 아니었다. 그 핀치새들은 하와이의 벌새들이 모두 아종인 것처럼, 한 종으로부터 변화된 아종들이었다. 다윈이 알지 못했던 것은 DNA coding에 있어서 한계점이 있다는 것이었다.
모든 변화들은 오직 DNA 코드안에 저장된 것들 중에서만 이루어졌던 것이다. 오직 그 코드의 변화에 의해서만 종이 변화될 수 있었기 때문에, 진화는 일어날 수 없었다. 갈라파고스 섬은 오랜 시간 그곳에 있었으나, 핀치새는 핀치새였고, 그들중 아무것도 뭔가 새로운 것으로 변하지 않았다.
13. 타이티(Tahiti)
1835년 10월20일부터 11월 15일까지 25일 동안 순풍에 의해 비글호는 갈라파고스에서 타이티로 진행했다. 마타바이(Matavai) 만에 도착했을때, 그는 산호 군락을 보았고, 두 명의 타이티인과 동행하며 여행을 하였다. Tia-aura 계곡(지금은 Tauaura)을 걸으면서 그들은 우둘투둘한 산골짜기고 들어갔다. 그가 보았던 다른 어떤 곳보다 훨씬 더 장엄한 곳이었다. 이틀이 걸렸고, 그 여행은 위험한 바위를 오르고, 암층을 오르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일기장 내용중 산호초, 협곡, 가파른 벼랑 등 어떤 것에서도 진화의 증거를 찾아볼 수 없었다. 강도 높은 11일간의 여행이었고,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14. 코로라레카(Kororareka)
1835년 12월 21일에 뉴질랜드만의 코로라레카(지금은 Russell)에 도착해서, 다윈은 거친 불모지대를 탐사하였고, 마오리족이 살아가는 방법을 보았다. 다시 항해를 하여 배는 14일 후에 시드니 항구에 닻을 내렸다. 다윈은 Bathurst로 그를 데려다줄 안내인을 고용하였고, 12일간의 행진을 시작했다. 오지에 있는 동안 다윈은 Wallaroo에서 캥거루를 사냥했다. 그러나 그가 들개를 찾고 있었으나, 한 마리도 보지 못했다. 그는 원주민들이 땅을 경작하는 능력에 놀랐고, 30야드 떨어진 작은 목표물에 창을 던져 맞추는 것에 놀랐다. 그들은 상당히 지능이 높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15. 타스마니아(Tasmania)
1836년 1월에 배는 타스마니아로 항해했고, 지칠 줄 모르는 다윈은 가시덤불이 많은 곳을 통과하여 웰링톤 산을 올랐다. 2월 17일에 그들은 오스트레일리아 남서쪽에 있는 King George 해협을 지났다. 1500마일의 여행이었고, 다윈은 많은 시간 뱃멀미로 고생했다. 배는 우연히 Aborigines 원주민들의 연례 축제를 벌이는 시간에 도착하여, 그들의 축제를 볼 수 있었다.
16. 집으로의 여행
다윈의 긴 여행의 마지막 구간이었다. 그는 이미 지나간 시간들을 회상하며 여러 달을 보냈다. 인도양을 가로지르고, 희망봉을 돌아, 태평양으로 들어가고, Ascension 섬으로, 그리고 남아메리카의 해안의 마지막 측량까지, 그런 다음 Cape Verde 섬 위로 진행하여, 1836년 10월 2일에는 그가 떠났던 영국의 Falmouth로 향해가고 있었다.
비록 그가 진화가 어떻게 발생했을 것인가에 대해 상상의 꿈을 꾸면서 그의 나머지 생애를 보냈다 하더라도, 그는 결코 어떤 확실한 사실도 제공받지 못했다. 다윈은 그의 여행이 그에게 가르쳐준 수업을 배웠어야만 했다. 그는 세계를 여행했지만 어떠한 진화의 증거도 찾지도 못했다. 왜냐하면 당신도 알다시피 진화는 한 종이 다른 종으로 바뀌는 것이기 때문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www.sdadefend.com/pathlights/ce_encyclopedia/Encyclopedia/20hist05.htm
출처 - Creation-Evolution Encyclopedia
진화론의 역사 3 (1950 ~ 현재)
(History of Evolutionary Theory 3)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서 진화론은 완전히 실마리가 풀렸다. 모든 면에서 어떠한 간단한 증거도 발견되지 않음이 명백해졌다. 그러나 진화론자들은 아직도 그들의 이론이 과학적 사실이라고 공공연히 나팔을 불고 있다. 이것은 part 3 에서 결론이 내려졌다. 진화론은 신화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했다. 수많은 증거들이 그것을 가리키고 있다. 산처럼 많은 증거들을 그들은 설명할 수 없다. 이것은 과학 대 진화이다. (* 표를 한 사람들은 비창조론자들이다).
1950년부터 현재까지
*줄리안 헉슬리(Julian Huxley, 1887∼1975)는 20세기 중반무렵에 진화론의 선두주자였다. 다윈의 파트너로서 ”다윈의 불독”이라 불리던 토마스 헉슬리(Thomas Huxley)의 손자로서, 줄리안 헉슬리는 진화론을 고수하며 심혈을 기울인 노력으로 미국에서 중요한 위치까지 올라갔다.
*임마누엘 벨리코브스키(Immanuel Velikovsky)는 진화론의 세력에 반대를 표명하는 또 한명의 반란자였다. 그는 저서에서 달과 지구가 과거에 충돌하였으며, 그 결과 대격변이 지구상에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사실이 아니었지만, 그의 책은 사람들에게 지구역사 초기에 대홍수와 같은 대격변이 일어났음을 말해주는 충분한 증거들을 더 가까이서 볼 수 있게 해주었다.
다윈설의 100주년 기념(Darwinian centennial celebration). 다윈의 종의 기원 100주년을 기념하여, 1959년 11월 시카고 대학에서 일주일동안 모임이 열린 적이 있었다. 토마스 헉슬리(Thomas Huxley)의 손자인 줄리안 헉슬리(Julian Huxley)는 하나님에 대한 총체적인 거부에 초점을 맞춘 글들을 남겼다.
생물과학 커리큘럼 연구(Biological sciences curriculum study). 동일한 시기에 BSCS 가 미국 생물과학자 위원회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그 목적은 학교교육을 통해 생물학 자체 뿐 아니라, 유기진화, 성교육, 인구조절 등을 함께 가르치겠다는 것과, 교과서에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겠다는 것이었다.
프랑스에서의 반항. 1960년대초, 프랑스의 과학자들 다수가 진화론에 반대하여 일어섰고, 진화론은 사실들을 설명할 수 없는 희망이 없고 불가능한 이론임을 선언했다.
어린이 책들. 새로운 유아책들이 발간되기 시작했다. 하나는 '놀라운 알(The wonderful egg)'이라는 제목으로 엄마 공룡이 알을 낳았는데, 어린 새로 부화되었고, 이 새가 세계 최초로의 새가 되었다는 것이다. (짝(mate)은 어떻게 생겨났는지 언급이 없다)
DNA. 1950년대 DNA의 발견은 진화론의 기초를 흔들어놓았다. DNA 코드에 대한 진실은 종이 변하여 진화할 수 없다는 화석의 증거들을 지지하기 때문이었다.
Creation Research Society (CRS). 1963년에 설립된 창조론자들의 이 조직체는 정기간행물을 만들고 진화론에 대한 토픽들을 토론하는 모임이었다.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ICR). George M. Price가 20세기 전반기에 걸쳐 수행해온 일들을 ICR이 이어서 맡았다. 1963년에 설립되었고, 70여권의 책과, 대학과 세계 여러곳에서 이루어진 200여편의 창조론대 진화론의 논박자료 등을 정리하였다.
기독교인들의 타협이 깊어짐. 1941에 창조론자들의 조직이 결성되면서, American Science Affiliation(미국 과학 동맹)은, 진화론과 타협을 하고싶어하는 자유주의 크리스찬들을 받아들였다. 이와 유사한 타협들이 Inter-Varsity Christian Fellowship, 많은 기독교인들의 모임, 학교, 교회 등에서 이루어졌다. 그 가르침은 일반적으로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의 변형이었다. 창조후 식물, 동물, 유인원이 등장하기까지 수억 수천만년의 시간이 경과하였고, 최근에 아담과 이브가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담과 이브의 범죄전까지, 죄와 죽음이 없었다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롬5:12), 이런 자유주의 신학은 아담의 창조이전에 죄와 죽음이 수억 수천만년을 지속되어 왔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유전학, 생물학, 화석들이 종을 뛰어넘는 변화의 가능성은 없음을 강력히 나타내고 있었지만, 이러한 타협의 자세는 그것들을 완전히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크리스찬들에 의한 진화론의 사실적 수용이었다.
다른 종류의 타협들은 하나님이 빅뱅의 방법으로 창조를 시작하셨다는 것이었다. 빅뱅후 행성과 별들이 진화되어 태어났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형태로 거의 모든 분야에서 진화론의 가르침이 허락되었던 것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는 10년 넘게 진화론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로 있었다.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하버드 대학의 고생물학자(화석 전문가들)들은 Goldschmidt가 주장한 '희망적 괴물(hopeful monsters) 이론'을 받아들였고, Gould는 이것을 자신의 이론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는 50,000년마다 단지 한 번 정도 진화가 일어난다고 선언하였다. 물고기가 알을 낳은후, 부드러운 털로 덮인 생물체가 갑자기 부화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것은 50,000년 마다 일어나는 '대량적 돌연변이(massive mutational changes)'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는 이것을 '단속평형(punctuated equilibrium)'이라 불렀다). 이것은 물고기 알에서 나온 새로운 동물은 번식을 위해 자기 짝(mate)을 만날려면 50,000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이론이었다. 그러나 다음에 태어난 새로운 종은 자기와는 전혀 다른 개구리나 벌레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돌연변이는 전혀 이로운 방향으로 일어나지 않고, 항상 약해지거나, 기형적이거나, 치명적인 방향으로 일어난다. 굴드의 수백 수천만년의 시간은 아무런 가치있는 것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논점(issue)이었다. 왜냐하면 Gould가 그의 방향으로 많은 진화론자들을 몰아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정상적인 진화론으로는 어떠한 것도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서로간에 깨달았던 것이었다. (이 주제에 대해 더 알기를 원한다면 'Mutation'을 보시오.)
*스티븐 스탠리(Steven Stanley)는 고생물학의 또 다른 선두주자로서 희망적인 괴물이론을 받아들인 인물이다. 그는 이것을 'quantum speciation'이라 명명하였는데, 개체가 결점을 수정해 나가기 위해 작은 변화들을 덧붙여 나간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을 뿐이었다.
Stanley는 50,000년마다 알에서 깨고 나오는 백만개의 긍정적 돌연변이 개체 대신에, 동시에 수마일 안에 떨어져 있는 서로 다른 알들이 몇 개가 각각 새로운 종으로 부화하여 나온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각각의 새로운 괴물들은 이상하게도 똑같은 종의 똑같은 형으로 태어난다는 것이었다. 이것 모두는 우연히 발생하며, 번식이 일어나는 것도 우연히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러한 일이 발생한다는 생각하는 것은, 내일 오후에 돌이 달에서부터 날아와 한 시간 뒤에 당신의 머리를 때릴 것이라고 예언하는 것과 비슷한 소리이다.
특별한 모임들. 진화론자들에 의한 진화론 전체에 대한 공격은 1960년대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주 중요한 과학적 모임이었던 Wistar Institute는 1966년 필라델피아에서 소집되었다. 과학자들은 자기들 분야에서 진화가 일어날 수 없다는 이유들을 제시하였고, 토론하기 시작했다. 수학자들은 진화가 수학적으로 불가능함을 설명하는 식이었다. (이것에 대한 정보를 더 얻고 싶으면 Wistar Destroys Evolution을 참조할 것.)
당신은 아직까지 진화론이 모든 곳에서 가르쳐지는지를 궁금히 여겨야할 것이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1) 먼저 진화론이 틀린다면 유일한 선택은 창조론인데, 많은 이들은 이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들은 폐기되어야할 이론은 없애버리지 못하고 남겨두는 것이다. (2) 조직적인 진화론적 세력, 과학 기초분야 조정자들, 교육위원회, 학교 인정기관, 기타 모든 세력들이 그들의 소중한 이론을 철저하게 붙들고 있는 것이다.
진화론의 대안적 선택은 그들에게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기에, 그들은 이 이론만이 그들의 가진 전부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었다.
추가 모임이 1969년, 1980년, 1981년, 그리고 1984년에 열렸다. 진화론은 단지 비난을 더 받을 뿐이었고, 그들에게서 더 이상 나올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진화론은 여전히 가장 최상의 이론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포자설(Panspermia, 외계생명체 유입설). 이것은 다른 이상한 이론과 마찬가지로 독특한 이론으로서, DNA의 구조를 발견한 *프랜시스 크릭(Francis Crick)에 의해 고안된 이론이다. 크릭에 따르면 다른 행성의 외계인들이 그들의 행성에 있는 생명체들을 퍼트리기 위해, 로켓으로 실어서 쏘았는데 우리의 지구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을 그는 '지시된 포자(directed panspermia)'라 불렀다. 진화의 성공적인 방법을 찾기위한 피나는 노력들은 이러한 엉뚱한 생각까지 낳게 되었던 것이다. (더 알기 위해서는 'Panspermia'를 보시오)
포자이론의 변형들도 있다('cosmozia' 라고도 불림). 다른 행성에서 떨어져 나온 암석에 생명체들이 묻어와 전해졌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생명체들은 우주의 거의 절대온도에 가까운 극저온의 온도에서 알 수 없는 기간동안 견뎌야하며, 공기가 없는 환경에서도, 그리고 유성으로되어 대기권을 통과할 때 엄청난 고열의 불꽃속에서도, 땅위의 지면에 부딪치는 충격속에서도 살아남아 지구에 전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생명체로부터 오늘날 존재하는 동물과 식물들로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소송. 진화론의 성공가도에는 위협적인 소송들이 같이 있어왔다. ACLU는 진화론에 대한 가르침과 그밖의 것들을 독점적으로 시행하기 위해 미정부를 협박했다. 미국의 각 주정부들도 하나씩 이러한 공격에 무너지고 말았다.
진화론은 모든 것이 무(無)에서부터 나왔다고 가르치고 있다. 또한 이것은 도마뱀이 어느날 알을 낳았는데 새가 갑자기 부화되어 나왔다고 가르치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은 진실이 아니고, 과학적인 사실과 일치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것들 때문에 진화론자들은 과학연구 분야와 학교교육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어왔다. 그러나 그들은 정당치 못한 방법을 사용해서 어쨌거나 여러 일들을 시행하여 왔다.
결론. 과거의 세기로 돌아가보면, 가장 유능한 유럽의 과학자들은 모두 창조론자들이었다. 자연의 명확한 증거들이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각각의 모든 다른 종들을 만들어 내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특별히 19세기에 접어들면서, 과학분야를 지배하고 싶어하는 무신론자들이 등장했다. 과학자가 아니면서, 약간의 돈과 시간을 가지고 있던 한 사람이, 모든 것은 무에서부터 스스로 생겨났다는 생각을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그의 이름은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이었다. 얼마 후에 그에게 동조하며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영국에서는 과학적 사실들을 믿으며, 모래와 바닷물에서 스스로 생명체가 생길 수 없고, 한 종이 다른 종으로 결코 변화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진 과학자들을 비웃기 위한 회합이 개최되기도 하였다. 독일에서는 *헥켈(Ernst Haeckel)이란 사람이 사실이 아닌 도표를 만들었다. 그 역시 사람은 동물로부터 진화되어 나왔다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려고 했다.
그러나 신중한 연구를 수행하는 양심적인 과학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진화가 사실일 수 없다는 새로운 증거들을 찾아내곤 하였다. 유럽의 멘델(Mendel)은 유전의 법칙을 발견하였는데, 모든 생명체는 태어날때 부모의 형질을 물려받는다는 사실이었다. 예를 들어 모르모트는 피부가 거칠거나, 부드럽거나, 하얗거나, 검거나 어떻든지 그 조상의 피부색을 물려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모르모트는 언제나 모르모트인 것이다. 그것은 까마귀도 도마뱀도 파인애플 나무도 아닌 것이다.
후에 미국에서 과학자들은 유전자(genes)를 발견하게 된다. 모르모트가 부드러운 털을 갖게될지, 거친 털을 갖게될지는 유전자에 의해 미리 결정된다는 것이었다. 연구자들 역시 20세기 거의 모든 기간동안 초파리와 나방을 가지고, 그들이 새로운 종으로 변화는지를 보기위해 실험을 하여 왔었다. X-ray는 돌연변이를 크게 증가시키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돌연변이는 오직 약해지거나, 기형을 일으키거나, 죽음을 초래할 뿐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이와같이 오늘날 진화(한 종이 다른 종으로 바뀌어 가는 것)가 발생할 수 있는 방법으로 밝혀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덧붙여 다른 과학자들은 땅속의 암석지층들을 연구하였는데, 모든 화석들은 분명한 한 종으로만 발견되었다.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변화해가는 것을 보여주는 중간단계의 종들은 없었던 것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www.sdadefend.com/pathlights/ce_encyclopedia/Encyclopedia/20hist04.htm
출처 - Creation-Evolution Encyclopedia
진화론의 역사 2 (1900 ~ 1950 년대)
(History of Evolutionary Theory 2)
여기에 한 세기를 지나서 1950년대까지 놀라운 역사가 있다. 진화론이 신화라는 것은 분명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증거를 발견하려고 노력했지만 할 수 없었다. 이것은 과학 대 진화이다. (* 표를 한 사람들은 비창조론자들이다.)
1900 ~ 1950 년대
*드 브리스 (Hugo de Vries, 1848~1935)는 네덜란드의 식물학자이자, 1900년대에 멘델의 유전법칙을 재발견한 세 사람 중의 하나였다. 어느 날, 달맞이꽃을 연구하던 중, 그는 그가 새로운 종(new species)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것이 '돌연변이(mutation)'에 의해 생겨나게 되었다고 이론화했다. 이것은 진화론자들에게 종의 전환이 일어나는 원인으로서(그것이 일어난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지만) 돌연변이 열풍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수십 년이 흘러, 돌연변이들은 늘 해로우며, 새로운 종을 만들어내지도 않고, 만들 수도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물론 드브리스는 그것들을 전부 알지 못했고, 달맞이꽃의 발견은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1914년에 *Edward Jeffries는 드브리스의 달맞이꽃이 그저 달맞이꽃의 한 종류이며, 새로운 종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 (돌연변이의 실패에 대한 더 많은 정보는 '돌연변이'를 읽으시오.)
*서튼과 보베리(Sutton and *Boveri)는 멘델 연구에 대한 재발견 후부터 단지 2년 후인 1902년에, 각기 염색체(chromosomes)와 유전적 특성의 계통(linkage of genetic characters)을 발견했다. 이것은 훗날 DNA 코드 발견의 유래가 되었던 주요 연구의 시작이었고, DNA 코드는 각각의 종들 안에서 닫혀있었다.
*모간과 뮬러(Morgan and *Muller). *모간(Thomas Haunt Morgan)은 유전적 결정인자가 염색체 속에서 명확한 선형의 순서로 지도화되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 개척자가 되었다. 그는 초파리 연구에 있어서 선두주자였다.
또한 미국에서 연구하던 *뮬러(H.J. Muller)는 X-ray를 사용하여 초파리들의 돌연변이를 유도해 내는데 선두주자가 되었다. 유전학, X-ray 연구, 돌연변이에 관한 더 많은 정보는 '돌연변이'를 보라.
신다윈주의 (Neo-Darwinism). 다윈 이론은 스스로에 의한 '자연 선택(natural selection)'이 진화를 만들어낸다는 가르침이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그것이 아무 것도 만들어내지 않음을 발견했다. 사실은 종 안에서 자연적인 변화(variations)들이 있었던 것이고, 종을 뛰어넘는 변화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많은 과학자들은 돌연변이가 종을 뛰어넘는 변화를 만들어낸다는 '신다윈설'로 옮겨가게 되었던 것이다.
스코프스 재판 (Scope Trial). 1925년 미국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일어났다. 고등학교 축구 코치였던 젊은 John Scopes는 테네시주의 반진화론 법을 검증하는 소송에서 피고가 되어 ACLU(미국시민자유연맹)에 의해 고소되었다. 모든 이야기는 책 {The Scopes Trial』에 자세히 나와있다. 거짓증거, 인신공격, 조롱, 과장된 언론보도, 그리고 일반적인 축제 분위기가 테네시 주의 결정에 효과적으로 작용하였고, 후에 다른 주 정부들은 진화론에 대한 반대를 철회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진화론은 테네시주 데이튼 재판의 경우에서부터 이기기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조지 프라이스(George McCready Price, 1870~1963)은 20세기 처음 50년의 주요 창조론 작가였다. 그는 때때로 4개 대학에서 강의를 했고, 5번째 대학에서 총장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진화론에 반대하는 보고서를 작성하고 연구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전부 38권의 책과 많은 잡지에 글들을 썼다.
*트로핌 리센코(Trofim Lysenko, 1836~1976)은 열렬한 진화론자로서, 오늘날 그의 이름은 불명예로 가득 차있다. 소련연방의 힘이 점점 강해지던 1930년대에 그는 모든 과학적 연구를 조종했다. 그리고 오직 진화론의 막스적 해석에 동의한 것만을 받아 들였다. 반대하거나 혹은 인가되지 않은 연구를 실행하는 기미를 보인 과학자들은 살해당했고, 수 백명이 죽임을 당했다.
*오스틴 클락(Austin Clark, 1880~1954)은 스미소니언(Smithsonian) 협회의 직원으로 열광적인 진화론자였다. 그는 몇 권의 책과 5개 국어로 된 약 600여 개에 달하는 글들을 썼다. 제일 앞선 진화론의 대변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상황을 매우 완벽하게 분석하여, 진화론으로는 아무리해도 수많은 다른 종들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다른 이론을 개발해냈는데, 그 이론은 1930년 그의 책 'zoogenesis(동물기원론)'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이었다. New evolution인 zoogenesis는 모든 동식물의 주요 형태는 더 일찍 각각 먼지, 해수 또는 어떤 것들로부터 갑자기 생겨난 것이라는 이론이다. 전통적 진화론자들에게 교육받아온 Clark에 의하면, 생명 없는 것에서 살아 있는 생명체로의 첫 번째의 불가능한 기적적 변화는 한 번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계속 일어났다는 것이다.
진화론자들은 그들의 이론에 대한 공격을 어떻게 막아내야 할 지를 거의 알지 못했다. 그 공격들은 그들의 이론들중 하나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미국 인본주의자 협회(American Humanist Association, AHA). 1933년 미국인본주의자 협회가 만들어졌고, 즉시 미국시민자유연맹(ACLU)과 밀접히 일하기 시작했다. '인본주의(humanism)'는 20세기에 들어와 '무신론(atheism)'으로 불려졌다. 그들은 그들의 이름을 바꾸었다. 하지만 지구상의 모든 사람으로부터 종교와 신을 지우기 위한 관점이나 목적을 바꾸지는 않았다. 잘 알려진 여러 사람들이 AHA의 멤버로 있었다.
*리처드 골드슈미트(Richard Goldschmidt, 1878~1958)는 독특했다. 골드슈미츠(Goldschmidt)처럼, 진화론은 입증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는 진화의 변화를 유도하기 위해, 집시나방(gypsy moth)을 기르는데 25년을 소비했다. 그러나 그의 연구는 단단한 벽에 부딪혔다. 몇 대를 거치는 동안 일어났던 어떠한 변화들도, 멸종되거나 또는 원래대로 돌아감으로써 모두 지워져버리는 것이었다. 1940년이 되자, 골드슈미트는 더 이상 연구를 계속할 수 없었다. 그는 일찍이 출판된 글중 진화론에 대한 가장 강력한 공격으로 쓰여진 글을 출판했다. 이것은 종을 뛰어넘는 변화를 유도해보기 위해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 연구했던 전문가가 쓴 글이었다.
골드슈미츠의 이론은 이것이었다. 수천 년에 한번 새로운 종('hopeful monsters')이 갑자기 튀어 나와 (독일어로 'saltated(도약)')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도약이론(saltation theory)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어느 날 엄마 코뿔소가 코끼리를 낳고, 어떤 때는 떡갈나무가 소나무로 자라 도토리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골드슈미츠는 클락(A.H.Clark)이 제창한 'zoogenesis' 이론보다 훨씬 커다란 기적들을 바라고 있었다.
골드슈미츠가 다윈론(자연선택설)과 신다윈론(돌연변이설)에 휘둘렀던 과학적으로 정확한 채찍질이 멍청하고 어리석은 희망적 괴물(hopeful monster) 이론과 결합하여, 진화론자들을 얼떨떨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뭐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이 총체적으로 불가능한 이론에 대해 깊이 알기를 원한다면, '돌연변이'를 보시오.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www.sdadefend.com/pathlights/ce_encyclopedia/Encyclopedia/20hist03.htm
출처 - Creation-Evolution Encyclopedia
진화론의 역사 1 (20세기 이전)
(History of Evolutionary Theory 1)
진화론의 역사는 거짓과 사기극과 절망의 이야기이다. 이것은 탁상공론이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같은 동화이다. 또한 이것은 공산주의와 나치즘의 여행 동료였다.
진화론의 역사 1
20세기 이전 : 오히려 일관되고 훌륭한 과학자들은 이 이론을 거부했다.
진화론의 역사 2
1900 ~ 1950년 : 이 이론을 구조하려는 절망적인 노력
진화론의 역사 3
1950 ~ 현재 : 위스타(Wistar)나 다른 회의들은 그것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마지막 희망을 무너뜨렸다.
진화론의 역사 1 (History of Evolutionary Theory 1)
시종일관 진화론의 기초를 만들어 낸 사람들은 과학적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그들이 꿈꾸었던 탁상공론에 올라 앉아있다. 1장에서는 20세기 이전에 이루어진 진화론의 역사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과학 대 진화이다. Creation-Evolution Encyclopedia은 당신에게 창조과학의 진실을 알려줄 것이다. ( * 표를 한 사람들은 비창조론자들이다.)
진화론자들은 우주의 모든 것들이 스스로 만들어졌다는 이론을 논리적으로 입증하기 위하여 상당히 애를 먹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입장을 지지해줄 사람이 충분할 때까지, 그들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이 글은 당신에게 이러한 사실들을 밝히 알려줄 것이다. 이것은 몽상가들이 서양과학을 어떻게 탈취해왔나에 대한 이야기이다.
20세기 이전
일찍이 사람들은 우리의 세계와 우주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이들은 뛰어난 이성을 가진 신중한 사람들이었다.
대부분의 사실들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걸 만들었다고 믿었다. 자연의 사실들은 이러한 위대한 진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에거시, 베비지, 보일, 페러데이, 플레밍, 허셀, 주울, 켈빈, 케플러, 린네, 리스터, 맥스웰, 멘델, 모르스, 뉴튼, 파스퇴르 등은 그 당시의 과학을 이끌어 나가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현대 과학의 기반을 닦았다. 그 때는 진화론자가 없었기 때문에, 당신이 진화론자가 아니라고, 과학선생이나 과학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하는 위원회는 없었다. 그때는 지금과 같이 철저하게 통제되는 과학위원회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윌리엄 페일리(William Paley, 1743~1805)는 하나님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지으신 유일한 분이라는 것에 대한 이유를 자세히 기술한 고전적 책인 '자연이론(Natural Theology)' 을 저술한 18세기의 특출한 사상가이다. 그가 가르친 그것은 '설계에 의한 논쟁(the argument by design)'이라 불린다. 그것은 식물과 동물의 놀라운 구조, 그것들의 뛰어난 적응능력, 그리고 그들을 만들어낸 지적설계들은 창조자로서, 또 생명을 주신 자로서의 하나님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놀라운 과학적 성취들을 이루어낸 현자들은 창조론자들이었고, 그러한 생각들을 비웃던 사람들은 비겁하고, 깊은 연구를 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뷔퐁(Georges Louis Comte de Buffin, 1707∼1788)이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가치 있는 어떠한 것도 성취하지 않았으며, 신에 대한 믿음을 거부하는 자였다. 생명체의 기원을 다른 곳에서 찾으면서, 지구는 태양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는 연구를 했다.
린네(Calrolus Linnaeus, 1707∼1778)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동식물의 유형을 연구하고 공부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많은 수의 동식물이 그에 의해서 이름지어졌다. 많은 정보자료를 모으면서 그가 알아낸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지 않고서는 종들의 구별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라마르크(Jean-Baptiste Lamarck, 1744∼1829)은 많은 부인과 첩을 거느리고, 일생의 대부분을 가난하게 보낸 사람이다. 과학계에서 그는 '후천적 획득형질의 유전' 이론으로 유명하다. 그는 또한 'Lamarckism' 이란 이론으로도 유명한데, 그 내용은 만약 당신이 다리를 잃으면 후대의 자식도 다리가 없는 채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퀴비에(Baron Cuvier, 1769∼1832)는 프랑스의 개신교인으로서, 뛰어난 동식물학자이고 연구자이었다. 파리 박물관의 총책임자인 그는, 하나의 뼈조각 화석으로 생물을 규명해낼 수 있는 학자로 세계적 명성을 갖고 있었다. 수년간의 연구분석결과 그는 생명체를 가진 종은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바뀔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에라스무스 다윈(Erasmus Darwin, 1731∼1802)은 인정받기 원했으나, 가치 있는 아무 것도 이루어낸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항상 동경하던 라마르키즘(Lamarckism)과 진화론의 내용을 담은 'Zoonomia' 라는 책을 써낸다. 자유개혁주의자들은 그의 책을 좋아했다. 그는 찰스 다윈의 할아버지였기에 후에 더 큰 명성을 얻게된다.
*제임스 허튼(James Hutton, 1726∼1797)은 스콜틀랜드의 지질학자이다. 그는 오랫동안 만들어져온 굽어진 지층이나 굴곡이 있는 지형이 대홍수와 같은 것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수백 년간에 걸쳐 지구가 조금씩 침전하고 눌려서 형성된 것이라 주장했다. 그는 그의 이론 '동일과정설(uniformitarianism)'에서 '현재는 과거를 알아내는 열쇠이다.' 라는 모토를 주장한다.
*로버트 챔버스(Robert Chambers, 1802∼1883)는 스코틀랜드 사람으로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은 첫 번째 진화론 책인 '자연역사의 흔적(Vestiges of natural History)'을 썼다. 그의 이론에서 보면, 종은 하나가 다른 것의 기원임을 말하고 있다.
챔버스의 책에서 강하게 영향을 받은 자들 중에는 3명의 심령술사(spiritualist)가 있었다. *임마누엘 스웨덴보그(Immanuel Swedenborg)는 1734년에 모든 별과 행성은 소용돌이치는 가스로부터 만들어졌다는 '성운 가설(nebular hypothesis)'을 창안해낸 사람이고, 또 다른 심령술사는 *알프레드 월리스(Alfred Wallace)와 종의 기원의 저자 *찰스 다윈이다. 심령술사들은 악령들과의 대화를 계속하고 있었다. (스웨덴보그에 대한 더 많은 정보는 책 3권을 보시오 : 'Origin of the Solar system from the Order Sheet')
*찰스 라이엘(Charles Lyell, 1797∼1875)은 찰스 다윈과 더불어 가장 영향력있는 19세기의 진화론자였다. 어떠한 과학적인 노력 없이도 그들의 이론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라이엘은 과거의 기록들이 여러 사실들과 일치하지 않으며 나타날 때 매우 고심했다. 그는 그것을 '지질학적 기록의 불완전함'에 기인한다며 변명했다. 그는 3권의 책인 '지질학의 원리(Principles of Geology)'를 저술했다.
*알프레드 월리스(Alfred Wallace, 1823∼1913)은 앞에서 언급한 심령술사이다. 동남 아시아에서 열병에 걸려있는 동안, 진화의 원인으로서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라는 문구를 생각해 내었다. 그는 영국으로 돌아가 기록하기를, 이 생각은 나에게 영감처럼 떠올랐다고 하면서, 그것은 진화의 원인임에 틀림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생존은 진화가 아니다. 만약 당신이 70살까지 살았다고 하자. 그만큼 진화한 것인가? 월리스는 그러한 생각들을 정리하는 동안, 찰스 다윈에 의해 그 이론을 도둑맞았다. 1875년 월리스는 공공연히 자신은 심령술과 막시즘주의자 라고 말하였다.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은 그의 아버지에 의해 대학으로 보내어졌는데, 신학과정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공부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었다. 그는 부유한 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전 세계를 여행하는 배를 자연학자(naturalist)로서 동승하게 된다. 다윈은 많은 곳은 여행했는데, 진화이론의 증거를 발견하게 되는 갈라파고스(Galapagos) 섬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 섬에는 18종류의 핀치새를 발견한다. 그것들은 확실히 모두 같은 종이었지만, 몇몇은 다른 것보다 긴 부리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그는 진화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핀치새들에 관한 한 그들은 진화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이후, 다윈은 결혼하여 가정생활을 꾸렸고, 유산으로 생계를 유지해 나갔다. 그는 비둘기를 가지고 새로운 종으로 바꿔보려고 계속 실험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옆 가게에서 발견한 연장으로(잣대로) 다른 것들을 측정해 버렸던 것이다. 그는 편지들을 썼고, 생각하고 생각했다. 그의 이론에 근거하여 그는 사람들에게 한 세기 안에 백인들이 모든 열등한 민족들을 짓밟아 버릴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Shrewsbury에서 고양이 꼬리를 잘랐을 때 새끼들도 짧은 꼬리를 가졌다는 소리를 듣고 매우 흥미를 느꼈다. 이것은 그가 책으로 쓰고 싶은 꿈같은 정보들이었다. 하지만 몇 년뒤 그는 너무 게을러서 이러한 사실들을 가지고 책을 쓰지 못했다. 그때 그의 경쟁자가 유사한 생각을 출판하고자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생각이 맨 처음으로 인쇄되어야 한다고 결정한다.
무엇보다도 다윈은 그의 할아버지 에라스무스 다윈(Erasmus Darwin) 처럼(무신론적 책을 출판한) 유명해지기를 바랬다. 그 결과가 '종의 기원(Origin of the Species)' 이라는 책이었다. 그것은 너무도 터무니없어서 현재 진화론자들도 쉽사리 적용될 수 없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다윈은 여러 종들이 기원될 수 있는 방법을 결코 고안하지 않았다. 그가 해낸 최선은 그렇게 일어나길 바란다는 것뿐이었다.
다윈은 전문적인 과학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시대에 열악한 조건을 가지고 연구한 아마추어였다. 그는 과학과정을 학교에서 결코 공부한 적이 없다. 다윈이 남아메리카의 나라들로부터 마술(witchcraft)을 시작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그 지방의 종교의식에 참여했고, 어떤 것이 그에게 발생했다. 그가 영국에 돌아왔을 때, 창조자를 가리키고 있는 자연세계와 사실들을 오로지 부정하면서 살았다.
그레고르 멘델(Gregor Mendel, 1822∼1884)은 동유럽에서 살며 연구하던 창조론자이다. 그는 과학과 수학선생이었다. 그는 혼돈스러운 Darwin과 추종자들의 생각과 주장들을 읽어본 뒤에, 실제로 과학연구를 하는 사람에 대한 글들을 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완두콩에 관한 연구로부터, 그는 유전학에 대한 여러 개념들을 확립하게 된다.
그는 1865년에 그의 발견을 정리해 발표하였으나, 전부 무시당하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다윈의 진기한 생각이 대중들에게 전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1900년에 과학자들은 멘델의 연구결과의 가치를 발견하였고, 그의 실험은 현대 유전학의 기초로 확립되었던 것이다.
그의 발견은 종의 진화에 대한 기초를 무너뜨릴 만큼 영향력이 있었다. 왜냐하면 동물이나 식물은 오직 같은 종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를 통해서만 다시 태어난다는 사실을 명확히 밝혔기 때문이었다.
루이스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1895)는 화학, 의학, 산업에 지대한 공헌을 세운 화학자이다. 그는 또한 창조론자이었다. 진화론이 대두되어 과학계를 흔들어놓고 지지를 얻을 때, 파스퇴르는 이에 맞서 싸우면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했음을 선포했다.
오구에일 운석(The Orgueil Meteorite). 진화론의 역사에 대한 연구에서, 우리는 자주 속임수나 몽상적인 생각, 거짓, 그리고 오류 등을 보게된다. 그 예중에 하나가 프랑스 남부지방에서 유기물질을 함유한 운석이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사건이었다. 결국 그것은 사기극으로 밝혀졌다.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는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칼 막스(Karl Marx), *프로이드(Sigmund Freud),*존 듀이(John Dewey)와 같은 사람들과 함께 했던 인물로, 사회분야(사회학, 심리학, 교육학, 경제학 등)에 진화론적인 가르침과 도덕을 도입했다. 이것에 대해서는 진화와 사회(Evolution and Society)를 보라. 스펜서는 또 한 명의 심령술사로 진화론이라는 동전에 영감을 불어넣은 사람이었다. 그는 *월리스의 '적자생존'이라는 문구를 *다윈에게 전달하였다. 그는 결코 연구를 하지 않았고, 이론들에 대해서 논평만 하였다.
*토마스 헉슬리(Thomas Huxley, 1825∼1895)는 다윈의 '불독' 이라고 불려지던 사람이다. 그들은 한 팀이었다. 다윈은 연약한 몸으로 자신의 이론을 꿈꾸었고, 헉슬리는 강인하고 끈끈한 힘으로 모든 곳에 그 이론을 전파했다.
*에른스트 헤켈(Ernst Haeckel, 1834∼1919)은 진화론자로서 과학분야 학위를 취득한 진화론자였다. 그러나 그는 거짓도표들과 사기적 주장들로 진화론을 발전시켰다. (그에 대한 더 자세한 자료는 Recapitulation을 보시오)
다른 여러 진화론자들을 따라, 그는 '열등한 종족'을 없애버리자는 투사이었다. (진화와 사회의 부분에서 이것에 대한 자료가 나온다.) 후에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그의 진화론에 관한 책에서 그 의견을 차용하여 쓰게된다. 히틀러는 다윈과 그의 동료들이 자신의 생각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고 말하였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www.sdadefend.com/pathlights/ce_encyclopedia/Encyclopedia/20hist02.htm
출처 - Creation-Evolution Encyclopedia
진화론은 순환논리
(circular reasoning)
필자는 지금까지 진화론의 여러 모순점들과 불가능성에 대해서 계속 지적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뿐 아니라 우리 자녀들도 공교육을 통하여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진화를 과학적 사실로 배웠기 때문에, 그 영향력이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몇년 전, 필자의 자녀가 학교에서 생물학 숙제를 가져왔는데, "최근 유전자 연구의 성과로 침팬지와 인간의 유전자간에 95-98% 유사성이 입증됨으로 침팬지가 인류의 조상이라는 진화론이 검증 되었는데, 그것에 대한 에세이를 쓰라”는 것이었다. 난감한 표정으로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묻길래, "그 연구 결과는 공통조상(common ancestor)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공통 설계자(common designer)가 비슷한 설계도와 비슷한 재료와 방법을 사용하여 만든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라고 쓰라고 훈수한 적이 있다. 그리고 "100% 물인 구름과 98% 이상이 물인 수박이 공통조상에서 온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아주 다른 것” 이란 코멘트도 덧붙이라고 하였다. 아마 그 생물 선생이 화가 나서 에세이 점수를 박하게 준 것으로 기억한다.
진화론이 나오기 전 역사지질학의 패러다임은 성경적인 젊은 지구와 노아의 홍수에 의한 퇴적암 지층형성이었다. 그러나 진화론이 과학적 사실로 받아 들여지면서, 진화가 가능할 만큼의 오랜 세월이 꼭 필요하게 되었고, 그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 오래된 지구와 균일론적인 지질학(약 5,000년 정도에 약 1ft 정도의 지층이 일정 속도로 쌓인다고 주장함)이 과학계의 패러다임으로 자라잡게 되었다.
이러한 균일론적 가정(Uniformitarianismic assumption)은 1795년 영국의 허튼(James Hutton)과 그 후 라이엘(Charles Lyell)에 의해 절대 불변할 수 없는 지질학적 원리처럼 주창되었고, 그와 병행하여 다윈(Charles Darwin)은 1859년 『종의 기원』을 출판하게 되어, 진화론의 개념이 기원에 관한 모든 사실을 설명할 수 있는 듯이 과장되어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로는 그 가정 하에 만들어진 고생대-중생대-신생대 등의 지질주상도(geological column)가 과학적 사실(scientific fact)처럼 공인 된 것이다 (이 지질주상도는 진화론의 배경신념하에 만들어 낸 상상도이며, 지구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필자의 이전 칼럼에서 이미 지적 한 바 있음). 그 후, 지구의 나이는 진화론의 필요와 과학자들의 합의에 따라 수 백번씩 수정되는 해프닝도 있었다.
즉, 작금의 역사지질학은 진화론의 가정 하에 그 기초가 만들어진 것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자들에게 진화론의 증거를 대라하면 바로 역사지질학에서 보여주는 오래된 지구가 그 증거라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순환논리(circular reasoning)이다. 순환논리라 함은 두 가지가 있어 서로가 서로를 증거하는 것처럼 보이나, 서로가 서로를 가정하기 때문에 사실은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쉬운 예를 들자면, 어느 한 왕에게 가서 "Are you a king?”라고 물었더니 "Yes.”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How do you know?”하고 물었더니 "Because my wife is a queen.”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여왕에게로 가서 "Are you a queen?”하고 물었더니 "Yes.”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How do you know?”하고 물었더니 "Because my husband is a king.”이라고 대답하였다. 이와 같은 것이 전형적인 순환논리이다. 진화론과 역사지질학은 이와 같이 king과 queen의 관계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일본 창조과학회의 회장이었던 우사미 마사미 박사는 그의 간증문에서 진화론을 열심히 공부하던 중, 생물교과서에는 "고생대 지층에서 나오는 것이 고생대에 살았던 생물들이다”라고 되어있고, 지학교과서에는 "고생대 생물의 화석이 나오는 지층이 고생대 지층이다”라고 적혀 있는 사실에서 진화론의 순환논리의 모순을 깨닫고 창조신앙을 갖기 시작하였다 라고 회고한 바 있다.
이러한 순환논리는 진화론자들의 주장을 잘 검토해 보면 어김없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한 예를 들자면, 진화론 지질학자인 루어케(O' Rourke)박사는 "지층이 화석의 연대를 정한다. 하지만, 화석이 지층의 연대를 더 정확히 보여준다(The rocks date the fossils, but fossils date the rocks more accurately.)”라는 과학적이라기엔 너무나 아리송한 결론을 주장하고 있다. 지금도 역사지질학자들은 오래된 지구의 가장 확실한 증거는 암석의 방사성 동위원소 측정법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의 문제점은 이미 필자의 이전 칼럼에 지적한 바 있음). 하지만, 그들조차도 화석의 배열순서와 동위원소법 사이에 모순이 생길 때, 오히려 화석의 배열에 더 신뢰를 두고 있는 현실이다. 이는 진화론의 배경신념이 다른 무엇보다도 가장 우선되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또한, 방사성 동위원소법이 그렇게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는 것을 진화론자들 마저도 이미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롬 1:22-25)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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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진화론과 연합될 수 없는 이유
: 유신론적 진화론의 어리석음
(Why God Cannot be Combined with Evolution)
말과 트랙터에 대한 비유
어느 날, 한 세일즈맨이 농부를 찾아갔다. 농부는 만족하게 말(horse)이 끄는 쟁기(plow)를 사용하고 있었다. 세일즈맨이 농부에게 최근에 발명된 디젤 트랙터에 대하여 말했다. ”당신에게 굉장한 도움을 줄 수 있는 한 기계를 소개하려고 방문했습니다.” 세일즈맨이 말했다.
트랙터가 어떻게 작동되는 지를 들은 후에, 농부는 말했다. ”트랙터는 말이 쟁기를 끌게 하는 새로운 수단이군요, 그렇죠?”
”아닙니다” 세일즈맨은 말했다. ”트랙터는 말과 함께 일하지 않습니다. 트랙터는 말을 대체하는 것입니다.” 세일즈맨은 트랙터는 스스로 추진력을 갖추었기 때문에 말이 필요하지 않음을 농부에게 설명했다.
”이제 알겠습니다.” 농부는 중얼거렸다. ”그러나, 나는 트랙터를 중립에 두고 트랙터와 말을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말이 트랙터와 쟁기를 같이 끌게 하는 것이지요.”
”잠깐만요” 세일즈맨은 말했다. ”말을 잘 못알아 들으시는군요. 왜 말이 트랙터와 쟁기를 같이 끌게 합니까? 당신이 트랙터를 사용하고자 한다면, 트랙터의 힘으로 작동하도록 하시면 됩니다. 만약 당신이 말을 정 사용하고 싶으시다면, 말이 쟁기 하나만 끌게 하면 됩니다. 불쌍한 동물이 무거운 기계까지 끌게 할 아무런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 경우에” 농부가 대답했다. ”나는 트랙터를 운전할 것이고, 말은 단지 휴식을 취하도록 사용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트랙터를 운전할 때마다, 나는 나의 말이 그것을 정말로 끌어당기고 있다고 모두에게 말할 것입니다.”
세일즈맨은 당황하여 그의 머리를 흔들면서 말했다. ”당신은 당신 맘대로 무슨 말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해야할 것은, 트랙터는 자기 힘으로 추진되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말은 그것과 상관이 없습니다.”
”오, 그러나 당신은 틀렸습니다.” 신념을 가지고 농부는 말했다. ”단지 우리가 트랙터 주변에서 말을 볼 수 없다고, 말이 그곳에 없다고는 말할 수는 없습니다. 말은 보이지 않게 끌어당기고 있는 것입니다.”
세일즈맨은 한숨을 쉬면서 코트를 입었다. ”예, 맞습니다” 그는 문쪽으로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당신과는 말이 통하지 않는군요. 당신에게 트랙터를 움직이고 추진력을 갖게 하는 상상의 존재는 오직 말이군요. 사실, 트랙터가 혼자서 움직인다는 것과,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말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차이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고객을 찾기 위해 나갔다.
말과 트랙터를 연합하려는 어리석음은 하나님과 진화론을 연합시키려는 것(소위 '유신론적 진화론', theistic evolution)과 동일하다. 자연주의적, 진화론적 설명은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 데에 하나님의 역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말처럼 매우 부적절하다. 만일 트랙터가 적절히 작동되고 있다면, 말은 초원에서 서성거릴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자연주의적 진화를 사용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을 상상해 보자. 이것은 트랙터를 중립으로 두고 끌고 있는 말처럼 넌센스이다. 만약 자연주의적 진화론이 진실로 충분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힘으로 달릴 것이다. 즉,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자연주의적인 추진력과 본질이 설명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사람들이 아직도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면) 하나님에게는 다른 일을 드려야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생물들의 창조하심은 없다.
반면에 진화가 충분하지 않다면 (트랙터가 가동되지 않는다면), 왜 하나님을 그 설명에 끌어넣는가? 왜 창조주 하나님을 거짓된, 그리고 잔인하고, 낭비적인 진화론적 과정을 끌고 가시는 것으로 짐을 지우는가? 가장 이상한 것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과정에서의 명목상, 또는 엄격히 수사적인 하나님의 역할이다. 농부가 주장한 것처럼, 모두가 관측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트랙터는 그의 말이 보이지 않게 끌고 있기 때문에 움직인다고 말할 수는 있다. 이것은 이웃들의 신뢰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대신 이웃들은 아마도 그가 자기망상에 사로잡혔다고 불쌍히 여길 것이다.
유신론적 진화론(theistic evolution)과 자연주의적 진화론(naturalistic evolution)은 기능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단지 차이는 전자인 경우에는 허울뿐인 신학적 용어가 붙어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트랙터 앞에 있는 보이지 않는 말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다.
* 유사 용어 : 하나님과 진화론의 연합, 진화와 창조의 연합, 진화론과 하나님의 화해, 진화론적 창조, 창조를 통한 진화, 창조적 진화론, 하나님에 의해 지시된 진화...
*관련기사 : 유신 진화론은 복음을 어떻게 파괴하는가? (2016. 1. 9. 기독일보)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rae.org/tractor.html ,
http://creation.com/the-horse-and-the-tractor
출처 - Revolution against Evolution, 1999. 7. 5
구분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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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교수에 대한 이야기
: 진화론을 가르치는 교수, 창조론을 가르치는 교수
(A Story of Two Professors)
오늘날의 고등교육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는 2 명의 교수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하디슨(Hardison) 교수는 생물학에 대해 논의하기를 좋아했던 철학 교수였고, 비숍(Bishop)은 철학을 논의하기 좋아했던 해부학 교수였다. 그러나 그들의 유사성은 거기서 끝난다.
리차드 하디슨 (Richard Hardison)
하디슨 박사는 하나님, 진화론, 그리고 삶의 목적에 관한 자신의 의견이 옳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확신시키려고 열심히 노력하였다. 하디슨은 ”철학과 신학, 특히 이성과 믿음에 관해서 명확히 생각할 수 있도록” 특별히 효과적으로 도왔다고 그를 존경하는 학생 중 한 명은 말했다 (Shermer, p.15). 하디슨이 많은 사람들에게 그의 사고방식을 받아들이도록 영향을 끼쳤지만, 그 중의 한 명인 마이클 셔머(Michael Shermer)에 대한 이야기만 여기에서 말하고자 한다.
마이클 셔머 박사는 어릴 때 기독교를 알게 되었고, 고등학교 3학년 때 정식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했다(p. 2). 사역을 위해 나아가는 가운데, 그는 페퍼딘 대학(Pepperdine University, 그리스도의 교회 학교)에 신학을 전공하기 위해서 등록했다. 글렌데일(Glendale) 대학에서 철학 강의를 들을 때, 이 예비 목사는 하디슨의 강의를 택했다. 마이클 셔머는 그의 교수에게 예수님을 증거하기로 결심하고, 그에게 기독교 신학에 관한 책을 주었다. 그의 교수인 하디슨은 그 책을 논박할 결심을 하고서, 문제점들의 목록을 타이핑해서 마이클에게 주었다. 곧 수업 도중과 후에 오랫동안에 걸친 많은 토론이 있은 뒤, 하디슨이 마이클을 이겼고, 마이클은 열성적인 기독교인에서 열성적인 무신론자로 전향하여, 기독교와 하나님에 대항하는 개종활동에 활약하게 되었다.
현재 마이클 셔머는 특히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과학과 이성을 사용하는’ 믿는 자들의 모든 시도에 대항하고 있다 (p.13). 얄궂게도 그는 회의론자 잡지(Skeptic Magazine)의 편집자로서, 그리고 수많은 책의 저자로서, ‘과학과 이성(science and reason)’을 사용해 하나님의 존재를 반증하기(최소 반박 주장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는 특히 창조론을 공격하는 일에 적극적이다. 왜냐하면 그의 말로 하자면, ”하나님을 믿는 이유에 대해 사람들이 제시하는 첫 번째 이유가... 고전적인 우주론이나 설계 논증이기 때문이다. 즉 훌륭한 설계, 자연의 아름다움, 세상과 우주의 완전성과 복잡성은 지적설계자 없이는 발생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사람들은 자신의 감각에 대한 증거가 그렇다고 말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한다 (p.14).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디슨 같은) 많은 교수들이 고전적인 우주론의 설계논쟁을 공격함으로써, 학생들로 하여금 무신론으로 돌아서도록 만들고 있다.
하디슨이 학생들을 그의 세계관으로 전환시키는데 매우 활동적이었지만, 그의 무신론적 전환 활동에 대해 (학교측이) 불평이나 염려하는 어떠한 기록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가 활발하게 학생들의 신앙을 무너뜨리고, 때때로 분명하게 학생들을 자신의 관점으로 바꿀 때조차도 학생들에게 진정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우수한 선생으로 여겨졌다. 때때로 몇몇 학생들은 그가 종교를 전향시키려고 한다고 느끼면서 반대를 했지만, 그들의 불평은 결코 법정으로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만약 그랬다면, ACLU와 다른 기관들은 십중팔구 하디슨의 학문적 자유를 지지했을 것이다.)
필립 비솝 박사 (Dr. Philip Bishop)
필립 비숍(Philip Bishop) 박사는 앨라배마 대학교의 생리학 부교수이자, 학내의 인간행동 실험실의 책임자이다. 그도 또한 인기 있는 선생으로 진화론적 자연주의 대신에 지적인 설계에 관한 풍부한 생리학적 연구들을 통해 제공된 증거들로부터 얻어진 결론을 가지고 2분간 토론을 함으로서 매 학기 강의를 시작했다 (McFarland, p.2). 이것에 대한 도전으로, 제 11대 미연방 순회 항소 법원의 3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된 위원회는 수업 중에 그의 종교적 신앙에 대해 결코 언급하지 말라는 대학측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비숍은 또한 자신만의 시간에 인간 생리학 내 하나님에 대한 증거 (Evidence of God in Human Physiology) 라는 선택과목도 포함시켰으나, 법정은 그것도 또한 그만두도록 명령했다 (Jaschik, p. A23).
그 대학은 단지 비숍에게만 (그 외의 사람은 없음) 수업 시간에 그의 개인적인 세계관을 아주 간략하게 언급하는 것조차도 못하도록 했다 (Bishop brief, p.7). 비숍의 소송 적요서(brief)는, 만약 오직 무신론적이거나 불가지론적인 세계관을 가진 교수들만이 자유롭게 그들의 견해를 표현할 수 있다면, 학생들은 모든 교수들이 그러한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는 그릇된 결론을 내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맥팔랜드(McFarland)는 이 소송을 다음과 같이 특징지었다.
”대학당국은 비숍 박사에게, 강의실에서의 말뿐 아니라 캠퍼스에서의 임의적인 이야기까지도 중단하도록 명령했다. 어떤 교수도 그리고 다른 어떤 주제도 그와 같이 박탈되지는 않았었다. 비숍 박사는 그의 언론의 자유와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는 연방 법원의 명령을 얻어냈지만, 그것은 제 11대 미연방 순회 항소 법원의 파괴적 의견에 의해 기각되었다. 법원은, 공립대학교 교수는 학문의 자유에 대한 어떠한 헌법상의 권리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강의실 내의 언론의 자유권은 대학당국에 의한 절대적인 관리(검열)에 속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p. 2).
비숍 사건의 초점은, 수업시간이건 강의실 밖에서건, 학문적 전문 지식의 주제에 관한 교수 개인의 관점을 언급하는 것을 제한하는 절대적 권리를 대학이 가지고 있다는 대학측의 주장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비록 비숍의 의견제시가 파괴적이지 않고, 위압적이지 않으며 분명히 개인적 성향으로 인정되었지만, 대학측에서는 교수들이 자신의 관점을 제시하도록 허용한 것은 대학이 그들에게 부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라고 주장하였다. 즉, ‘검열되지 않은 모든 것’은 양도되었다고 주장하였다 (Bishop, p.10). 비숍은 공립 대학교에서 개인적 믿음에 대한 간혹적인 표현은 "대학의 허가를 받아야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없으므로, 따라서 그것들이 파괴적이지 않고 위압적이지 않을 때는 헌법 수정 제 1조항에 따라 보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Bishop, p.9).
항소에서 대학 측은 비숍 박사의 말을 ”단지 종교적인 내용 때문에” 제한했다는 것과, ”종교적 관점을 갖는 말은 다른 형태의 말과 같이 차별적인 취급을 받지 않아야한다”고 주장됨으로서 압박을 받았다. (p.13). 항소 법원의 결정은 광범위한 판례(case law)나 헌법에 반하여, 만일 그것이 종교적이거나, 심지어 종교적인 동기로 해석될 수 있거나, 심지어 표현된 관점이 분명히 사적인 것으로 확인될 때조차도 ”사실상 교수의 수업 중 혹은 수업과 관련된 말에 대한 무제한적인 검열”(Bishop, p.9)을 승인했다.
엄격하게 적용하자면, 이번 판정은 교수가 자기는 유대인이라고 말하거나, 이슬람교도라고 말하거나, 교회에 간다거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부적당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같은 교수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거나, 종교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허용된다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교수는 ”종교적인” 가치나 믿음으로 정의되는 말과 반대되는 것은 무엇이나 강의할 수 있지만, 그것에 찬성하여 강의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항소 법원은 ”종교적 관점의 표현은 그것이 얼마나 주의 깊게 제시되었든지 간에 학생들에게 괴로움(anxiety)을 일으키므로” 학생들이 종교에 ”감염되는 것을” 막기 위한 ”합법적인 권리”를 학교 측이 가지도록 판정했던 것이다 (Bishop, p.15).
항소 법원은 또한 ”얼마나 주의 깊게 제시되었든지 간에, 세속적 과목 안에서 종교적인 태도의 표현은 대학측이 그러한 입장을 부여한 것으로 비춰지며, 유사한 믿음을 가지도록 더 나아가 자신의 믿음을 부정하라고 압박당할 수 있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괴로움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Bishop, 16). 만약 유신론을 지지하는 약간의 기미라도 있다면, 다른 모든 고려 사항(헌법 수정 제1조항을 포함하여)들은 통제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오직 무신론만이 가르쳐질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대법원은 사건 이송 명령(certiorari)에 대한 탄원을 기각했고, 그 사건은 끝이 났다.
비숍 사건에 대한 기타 논평
교수들은 대개, 자주 노골적으로 그들 자신의 무신론적인(또는 불가지론적인) 종교적 관점을 수업 시간 중에 주입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관점은 대게 제한받고 있지 않으며, 만일 제한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진다면, 학계의 거센 반발에 직면할 것이다 (Johnson, pp. 179-184). 법원은 수업시간에 반종교적이거나 무신론적이거나 혹은 불가지론적인 자료들을 계속 제시하고 주입한 교수들은 정당하지만, 반대되는 것을 주입한 교수들은 잘못이라는 판결을 내렸던 것이다 (Bergman, pp. 1-34).
코넬 대학의 생명과학 교수인 프로빈(William B. Provine)은 처음에는 자기의 수업시간에 유신론을 믿는 학생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나머지 학기 동안에 유신론적 논쟁을 뒤집기 위해 노력했다. 강좌 초기에는 약 75%의 학생들이 창조론자이거나, 적어도 진화의 목적을 믿었었다고 그는 말한다. 다시 말해서 유신론자이거나 하나님이 진화를 지시했다고 믿었었다. 프로빈은 자랑스럽게 말하기를(p.63), 강의가 끝날 무렵에는 유신론자들의 비율이 50%로 떨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사회 전체에서 약 90%에 상당한다) (Shermer, p. 156). 명백하게 그는 그의 학생들에게 무신론적인 영향을 주는데 성공적이었고, 그의 성공에 대해 매우 공개적임에도 불구하고, 대학과 법원은 간섭하지 않았다.
결론 (Conclusions)
2명의 교수 사이에는 많은 유사점이 존재한다. 둘 다 인기 있었고, 훌륭한 선생으로 간주되면서 자신의 분야에서 식견이 있었다. 둘 다 학생들이 그들의 관점을 이해하도록 돕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하디슨 박사는 학생들에게 저서를 통해, 수업 시간 중에, 공개적으로, 그리고 수업 시간 후에 그들을 만나면서 그러한 노력을 기울였다. 반대로 비숍은 단지 수업 시간 후에만 유신론을 지지하는 그의 관점을 들려주기 위해서 학생들을 신중하게 초대했다. 한 경우에 있어서는 법정과 연루되도록 요구조차 되지 않았다. 다른 경우는 명백한 법원 판결로 끝났다. 비숍은 그의 관점을 심지어 교실 밖에서조차 꺼내지 못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비기독교 학생들을 불편하게(uncomfortable) 할 수 있기 때문에 그의 개인적 종교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학생들에게 말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한 교수는 최대한의 학문적 자유를 가지는 한편, 다른 교수의 학문적 자유는 분명하게 박탈되었다. 차이점은 한 사람은 무신론자이고, 다른 사람은 유신론자라는 것뿐이었다. 한 사람은 그의 관점을 학생들에게 수업 시간에 상관없이 공개적으로 제시할 수 있도록 격려되었고, 기독교인 학생들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 조금도 언급되지 않았다. 해고의 고통 아래에 있는 다른 교수는 그가 개인적으로 믿는 것을 학생들에게 암시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다. 비숍 박사는 또한 그가 개인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관점을 가르쳐야 했고, 학생들에게 그것에 대하여 그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유사한 더 많은 경우가 인용될 수 있겠으나, 이 사례는 대학이 유신론뿐만 아니라 모든 형태의 종교에 대해 적대적인 세계관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수단이 되었다는 많은 사람들의 염려를 효과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법원은 어떻게 이 논쟁에서 중립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인가?
References
Bergman, Jerry. The Criterion; Religious Discrimination in America. Richfield, MN: Onesimus, 1984. Out of print.
Bishop, Phillip A. v. O.H. Delchamps, Jr., et al. Brief submitted to the U.S. Supreme Court, Oct. Term, 1991.
Hartwig, Mark. 'Christian Prof. Loses Free-Speech Case.' Moody Monthly, June 24, 1991, p. 55.
Jaschik, Scott. 'Academic Freedom Could Be Limited by Court Ruling.' The Chronicle of Higher Education, Apr. 17, 1991, p. A23.
Johnson, Phillip E. Reason in the Balance: The Case Against Naturalism in Science, Law, & Education.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5.
Myers, John (Ed.). 'U.S. Supreme Court Denies Review of Bishop: Academic Freedom stumbles in wake of 11th Circuit Court Ruling.' The Real Issue, 11(3), Oct. 1992.
Provine, William. 'Response to Johnson Review.' Creation/Evolution, Issue No. 32, Summer, 1993, pp. 62-63.
Shermer, Michael. How We Believe: The Search for God in an Age of Science. NY: Freeman, 2000.
Shermer, Michael. Why People Believe Weird Things. NY: Freeman, 1997, p. 156.
* Dr. Bergman is on the Biology faculty at Northwest State College in Ohio.
번역 - 한국창조과학회 대구지부
링크 - http://www.icr.org/pubs/imp/imp-372.htm
출처 - ICR, Impact No. 372, June 2004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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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허물기 작전 : 유럽의 전철을 밟으려나
이재만
유럽의 교회가 텅텅 비어가고 있다는 것은 그리 특별한 뉴스가 아니다. 사실 비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텅 비어있다. 그 수 많은 신학자들과 선교사들, 독실한 기독교인들을 배출했던 이들이 단지 수십 년 만에 이지경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교회성장에 대하여 연구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유럽교회가 타락하는데 여러 가지 그 원인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카톨릭이 타락 했어도 종교개혁이 있었다. 정치적 영향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 근본은 남아있었다. 많은 도전과 문제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끈끈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근본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성경이 무너지는 것은 다른 국면을 맞이했다. 유럽교회가 소생의 기미를 보이지 않게 되었다. 성경의 진리가 무너지면서 유럽교회는 도미노처럼 쓰러졌다.
서양이 하나님을 배제한 상태로 이성과 합리주의를 추구하기 시작한 계몽주의가 시작할 때만 해도 유럽교회의 위기가 크게 인식되지 않았다. 그러나 19세기 초 진화론적인 사고와 자연주의의 여파는 성경의 근본을 강타하는 전기를 마련했다. 성경을 믿어야 할 근거를 잃어버린 것이다. 기독교인이 되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가 타 종교 중에 하나로 떨어져 버렸다. 기독교인들이 설 자리를 찾지 못했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시 11:3)”. 19세기에 등장한 진화론은 20세기 교회의 뿌리를 흔들었고, 유럽은 더 이상 기독교가 발부칠 곳이 못 되었다.
미국은 어떠한가?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기독교 국가로서 선교의 중심지였던 미국도 성경이 무너지는 데는 맥을 못 추고 있다. 과학교과서가 진화론을 수용하고, 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과목들을 배우는 절차를 밟으면서 차세대들은 진화론 공습을 받기 시작했다. 오늘날 미국의 많은 교회들이 해결책을 찾으려고 부심하고 있지만 소수의 대형교회를 제외하고 지역사회의 중심이었던 대부분의 교회들은 수십 명의 노인들만이 교회를 지키고 있다. 결국 총 교인 숫자는 빠르게 감소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어떠한가? 1세들의 믿음으로 나날이 증가추세를 멈추지 않았던 교인숫자는 2세들로 넘어가면서 어떠한 국면을 맞고 있는지는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그대로이다. 대학에 들어가서 자신이 결정을 내려야 할 시기가 되면 교회와는 멀어지고, 설령 교회에 출석한다 할지라도 아슬아슬하고 힘없는 신앙만을 유지하고 있다.
2세들을 위해 적지 않은 재정을 책정하고, 건물도 지어주고, 하자는 데로 예배형태도 바꾸어주고 있지만 결과는 그리 만족스럽지만은 않다. 물론 이러한 노력들이 쓸데없다는 말이 아니라, 어떤 풀리지 않는 매듭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1세들이 하던 방식대로 이끌려고 해도 2세들이 이끌려오지도 않는 것도 현실이다.
유럽의 전철을 볼 때, 결국 해답은 말씀의 권위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설득력 있느냐에 달려 있다. 사탄은 유럽에 적용했던 성경 허물기 전략을 미국에 이어 우리 2세들에게도 이어가고 있다. 이대로 나가다간 50년 후의 한국교회도 불 보듯이 뻔하다. 유럽이 첫 번째로 당했다. 미국이 두 번째로 당했다. 사탄은 세 번째로 똑 같은 방법으로 우리 2세를 공략하고 있다. 우리는 유럽과 미국이 어떻게 당했는지 보아왔다. 이제는 대책을 세워야 할 때다. 다른 방법은 없다. 오직 영원한 말씀만이 해답이 되어야 한다.
“여호와여 주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시 1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