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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위원회
2005-10-28

현대 진화론의 역사 - 2 

: 20세기의 진화론자들

유종호 


5. 20세기의 진화론자들

20세기에 접어들어 가장 주목할 만한 진화론자들은 리키 집안사람들이다. 부모인 루이스 리키와 메리 리키, 그리고 아들인 리처드 리키가 그들이다. 루이스는 1926년에 화석 탐사와 연구를 시작했다. 1960년대 중반 경에 루이스와 메리는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인간의 화석, 즉 그들이 호미니드(hominid)라 부르는 화석을 발견했다. 과학적 증거는 없었지만, 그러한 화석의 연령이 2백만 년 정도라고 루이스는 믿었다. 그는 영국 여행을 끝낸 직후에 사망했다.

메리와 리처드 리키가 쓴 진화의 이야기는 『내셔널 지오그래픽』, 『리더스 다이제스트』, 『패밀리 위클리』, 신문과 텔레비전 그리고 라디오에서 지금도 다뤄지고 있다. 그들은 아프리카, 케냐의 투르카나 호수 근처에 있는 퇴적암을 지금도 뒤지고 있다. 화산에서 터져 나온 잔해들과 노아 시대에 홍수로 인한 퇴적물에서 많은 화석들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리더스 다이제스트(1978년 2월호)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사로 그 곳에서 발견된 화석에 관한 진화론 편을 발행했다. 

”제목 : 인류의 뿌리 찾기. 거의 4백만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단서들이 인간의 가계도(家系圖)가 될 만한 놀라운 증거를 드러내고 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p.71을 보면 다음과 같다. 즉,

”2백만 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는 부서진 두개골 조각들이 케냐의 투르카나 호수의 퇴적층에서 발굴되었다. 그것은 케냐의 국립박물관에서 분류된 후에 ‘1470’의 번호 꼬리표를 달았다. 두개골 1470이 정리되었을 때 놀라울 정도의 현대적 머리모양이 나타났다.”

사실 그 두개골의 모양은 오늘날의 지성인의 두개골과 흡사하다. 그러나 두개골에 대한 예술가의 해설에 따르면 최초의 인간은 절반 정도 원숭이를 닮았다는 것이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p.72를 보면

”1975년에 메리 리키는 탄자니아의 레톨릴에서 375만 년 전으로 추정되는 인간의 턱뼈와 이빨 화석들을 발굴했다.”

여기서 수백만 년의 세월이 얼마나 가볍게 다루어졌는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미니애폴리스 트리뷴』(1976년 3월 9일)에서 행해진 다음과 같은 설명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인류학자인 도날드 요한슨과 리처드 리키는 인간의 선조라 할 수 있는 새로 발굴된 두개골에 관하여 월요일 워싱턴에서 회의를 했다. 이러한 일련의 발굴로 인해서 진화론자들은 375만 년 전의 인간이,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해부학적으로 현대인과 더 흡사했다고 믿게 되었다.”

그들의 주장에 반대되는 3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수백만 년의 세월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바 없는 추정에 근거한 연대측정방식에서 나온 계산이다. 왜냐하면 창조되었을 때 성숙한 채였다는 이유와 표면적인 연령만을 보고 추정하기 때문이다. 둘째, 만약 인간이 구조적으로나 해부학적으로 375만 년 전에 존재하였다면, 왜 인간은 1만 년 전에 와서야 농업을 이용하고 집과 도시를 건설하는가? 낙뢰 등으로 수천 번의 자연적 화재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불의 사용을 배우기까지 수백만 년의 세월이 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셋째, 그들은 퇴적암을 잘못 분석했다. 퇴적암은 매우 진한 흙탕물이 급격히 가라앉아 된 것이다. 

리더스 다이제스트(1978년 2월)의 p.73을 보면 1800년에서 1829 년까지 라마르크의 옛 이론(기린의 목이 긴 이유는 높은 데에 있는 나뭇잎을 먹으려고 자꾸 목을 위로 뻗쳐 올렸기 때문이라는 옛 우화)을 다시 고쳐 말하고 있다. 즉, 리더스 다이제스트는 원숭이 같은 인류의 허구적인 선조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라마피데쿠스의 후손들은 숲을 떠나 평야와 개간지를 찾아갔다. 그들은 평지에서도 멀리 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네 다리 보다는 두 다리로 서게 되었고, 그에 따라 그들은 양손을 다른 용도로 쓸 수 있었다.”

1978 년에도 진화론자들은 의심을 받았던 150년 전의 옛 이론에 매달리고 있었다. 진화론 우화를 만들기 위한 짓이 그럴 듯하다.

맨카토 자유언론(1984. 10. 19)에서는 리처드 리키가 제공한 케냐 나이로비의 이야기를 다시 실었다. 즉,

”과학자들은 160만 년 전에 죽은, 덩치 큰 12살 소년으로 보이는 화석을 보고 초기의 인간은 과학자들의 생각보다 훨씬 몸집이 크다고 말한다.... 그 소년은 아마도 180cm 이상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라고 리키는 말했다. 과학자들은 초기의 인간은 오늘날 우리보다 작다고 생각했다. 이 소년의 화석은 직립 원인이 현대인만큼 키가 크다는 이전의 추측을 확인해 준다.... 리키는 그 소년의 죽음에 대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늪 근처에 있었다. 그의 몸이 빨리 묻혀져서 상대적으로 본래의 몸을 그대로 보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틀림없이 그는 노아 시대에 홍수로 인해 진흙더미에 신속히 매장되었을 것이다. 또한 키 큰 소년은 대홍수 이전에 커다란 인간이 존재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메리 리키는 진화론의 시각에서 360만 년 전에 생존했던 현대인과 같은 인간의 발자국의 이야기를 실었다. 패밀리 위클리(1981. 9. 13)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즉,

”발자국의 흔적이 탄자니아의 올두바이 협곡으로부터 25마일 남부에 있는 화산근처 숲이 우거진 라에톨리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화산재가 비와 섞이고 태양에 의해 건조해졌을 때 발자국을 시멘트처럼 굳게 하는 화학성분이 생겼다. 비 온 후에 여러 동물들이 화산재에 발자국을 남기었다. 수많은 발자국들이 오늘날에도 뚜렷이 나타난다. 그러한 발자국들 중에는 세 원시인의 발자국이 있었다.... 그들은 오늘날의 우리들처럼 직립보행을 했다.”

미니애폴리스 트리뷴(1979년 3월 22)에 따르면

”발자국 전문가인 북 루이지애나 대학의 인류학자 루이스 로빈스 박사는 발자국의 의미에 대한 브리핑에서 모양과 기능적인 측면에서 현대인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했다.” 

왜 그들이 대홍수 이전에 생존했던 사람들이 아니어야 했는가? 메리 리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그들의 발자국은 현대인처럼 세련된 걸음을 걸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에, 아마도 과학자들은 직립보행의 시초를 알기 위해서는 그 시대보다 수백만 년을 더 소급하여 살펴보아야 한다는 점을 나타내고 있다.”

진화론자들이 자신들의 우화를 만들기 위해 수백만 년의 세월을 얼마나 쉽게 설정했는지를 보라! 나는 그들이 자기들의 가정과 가설을 세우기 위해 스스로 과학자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들은 어떠한 과학적 증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오늘날 간단하게 할 수 있는 것을 수백만 년의 세월이 걸려야 하는 지 알 수 없다.

1978년 3월 22일자 LA 타임스에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즉,

”그것은 마치 그녀가 왼쪽에서 무엇인가를 보고 들은 것 같았다. 아마도 위협이었던 것 같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몸을 돌렸을 것이고 그리고 계속 움직였던 것 같다고 메리 리키는 말했다.”

비록 우화의 드라마가 설정되었다 할지라도 실제 사실은 더 감상적이고 공포스러웠을 것이다. 대홍수 때에 발생했던 화산 폭발과 홍수가 그녀를 압도했기 때문에 그는 공포에 사로잡혀서 몸을 돌렸을 수 있었을 것이다.

진화론자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인류를 고도로 발달됐던 이집트인과 바빌론인과 그들의 선조들 그리고 리키와 그 일당들이 발굴하고 있는 홍수 때 익사해서 퇴적암으로 덮여있는 더 문명된 사람들에게로 추적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원숭이에게로 추적해 가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찾는 원숭이들(Australopithecus)은 다른 동물들과 함께 홍수로 죽은 원숭이들이고, 그들이 찾는 인간들은 대홍수에 익사하여 묻힌 인간들이다.

진화론자들이 진화의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그렇게 악하고 광범위하게 설명하는지를 보려면 1978년 2월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끝부분에

'인류의 뿌리를 찾아서'에 나와 있는 진화론자들의 전형적인 실수들이 다음과 같이 밝혀지게 되었다.

1. 150만 년 전에서 20만 년 전 사이에 인간 혹은 호모 에렉투스는 ”불의 사용을 배웠다.”  - 인간은 확실히 번개로 인한 화재에서 즉시로 무언가를 배웠을 것이다.

2. "25만 년 전에서 10만 년 전 사이에 네안데르탈인들이 무리들로부터 진화했다. 그들의 두뇌는 우리의 두뇌만큼 충분히 컸다. 어떤 경우에는 더 크기까지 했다.”  - 소위 이 네안데르탈인들은 창 6:4에 나오는 거인일 수 있다.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3. ”진화론적인 드라마에서 마지막 주인공은 우리 자신의 종, 즉 기원전 4만 년 전에 어디에선가 출현했던 호모 사피엔스였다.” - 여기서 다시 진화론자들은 이집트인들, 바빌로니아인들, 그리고 어디에선가 갑자기 튀어나온 다른 인종들과 리키의 집안사람들이 지금도 세계 전역에서 발굴하고 있는 진흙 속에 익사하여 매장된 사람들이 고도로 발달된 선조들임을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4. ”다른 전문가들은....을 믿는다.” - 나는 사람들이 마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하여 모든 해답을 알고 있는 전문가처럼 언급되어질 때 몸서리가 처진다. 인간의 많은 분야에서 소위 전문가의 조언에 의해 오도된 수십억의 사람들이 있다. 주식의 조언자들, 그 밖의 많은 금융전문가들의 조언을 듣고 월 스트리트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수십, 수백만 달러를 손해 보았던가? 시 118:81)에 얼마나 진실하게 적혀있는가? ”인간 자신을 믿지 말고 주님을 믿는 것이 더 났다”고 전문가의 충고에 귀를 기울일 때는 걸러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진화론 전문가들의 충고를 들을 때는 걸러내야 할 채가 필요할 정도이다. 의학 논문과 다른 과학 분야의 논문 사이에는 엄격한 차이의 세계가 있다. 그리고 경제 전문가와 진화론 전문가 사이에도 엄격한 차이가 있다. 소위 경제 전문가의 조언에 따른 손실은 금전만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소위 진화론 전문가의 조언에 따른 손실은 창조주와 구원자에게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리고 영원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 전역에 걸쳐, 특히 대학들을 보면 1967년에 콜롬비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하버드 대학의 스티븐 굴드와 같은 많은 현대 진화론자들이 있다. 칼 세이건과 아이삭 아시모프는 진화론으로 많은 소란을 일으켰다. 만약 현대의 다른 진화론자들을 언급하려면 이 책의 지면이 훨씬 많이 요구될 것이다. 그러나 이 점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출처 - 앨버트 시퍼트의 [진화론의 비과학성 : 그 32가지 이유들] 번역


미디어위원회
2005-10-27

현대 진화론의 역사 - 1 

: 초기의 진화론과 찰스 다윈

유종호 


1. 초기의 진화론

진화론 사상은 다음의 성경 말씀에서 보는바와 같이 사람의 아들들이 창조주를 거부하고 반역한 이래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6:1-5)

그 후 수세기에 걸쳐서 인간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진화론을 발전시킨 여러 가지 경우가 있어왔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아낙시만더(Anaximanders)는 BC 600 년경에 인간은 원래 물고기와 유사했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BC 400 년경 중국의 츄안체(Chuantze)는 생물 종들은 변이의 과정을 통해서 발전되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AD 1589년경에 프랑스인인 버나드 팔어시(Bernard Palissy)는 이교도들 사이에서 진화론 사상을 펼치다가 바스티유 감옥에서 죽었다.

비록 스웨덴의 카를로스 린네(Carolus Linnaeus: 1707-1778)는 진화론자가 아니고 진화론을 반대했지만, 그는 생물학자들이 종에 따라 동·식물을 분류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하여 진화론자들에게 이론적 바탕을 제공해 주었다. 그는 동식물을 분류하여 라틴 명칭을 부여하는 시스템을 발전시켰다. 그러한 명칭은 종, 속,  과, 목, 강, 문 계 등으로 부여되었다.

대략 1750년 이후에 진화론을 끌어낸 근대의 인물은 프랑스 자연주의학자인 콩트 부퐁(1707-1788)과 찰스 다윈의 할아버지이고 영국의 의사인 에라스무스 다윈이다. 그들은 1700년 후반부에 글을 써서 짐을 실을 때 무릎을 꿇음으로써 후천적으로 무릎이 두꺼워진 낙타의 경우처럼 후천적 특성을 다루었다. 부퐁은 그 당시에 계속해서 진화론을 연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두 사람을 추종한 인물은 프랑스의 생물학자인 동시에 식물학자인 장 라마르크(Jean Lamarck: 1744-1788)이다. 그는 동식물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하여 자신의 모양을 변형시키고 이것이 후대에도 이어진다고 추론했다. 그는 빗나간 진화론을 마음에 품었다. 예를 들어 기린의 목은 나무의 잎사귀를 먹으려고 위쪽으로 목을 늘리다가 길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기린의 목이 될 때까지 후천적으로 점점 길어졌다고 그는 주장했다. 이러한 생각은 그 당시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의 과학자들도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독일의 생물학자인 아우구스트 바이스만(1834-1914)은 꼬리 없는 쥐를 만들기 위하여 수십 세대에 걸쳐 쥐의 꼬리를 자르고 교배를 시켜 봤다. 그는 라마르크의 이론에 근거가 없음을 증명했다. 그러나 찰스 다윈을 라마르크의 사상에 관하여 ”내가 내린 결론은 그의 결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던 것이다.

라마르크 직후, 영국의 지질학자인 찰스 라이엘(Charles Lyell, 1797-1875)은 현대지질학을 발전시켰다. 그는 3권으로 된 『지질학의 원리』라는 책을 썼다. 그 책에서 그는 기존의 지질학에 관한 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그는 오늘날 여전히 발생하고 있는 지질작용들에 의해서 시대에 따라 천천히 그리고 점진적으로 지구가 변해가고 있음을 나타내려고 노력했다. (천천히 그리고 점진적이라는 말은 진화론자들의 핵심 단어다). 이런 일로 라이엘은 찰스 다윈과 진화론에 또 하나의 빗나간 기반을 제공했다. 찰스 다윈은 ”나의 사상과 저술의 절반정도는 라이엘 경의 두뇌에서 비롯되었다”라고 고백하였다. 라이엘의 작업은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서 진화가 가능함을 드러내기 위해 필요로 했던 엄청난 시간을 제공해 주었다. 그때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구상에서 발생해온 지질학에서의 변화란 갑작스럽고 전 지구적인 격변과 융기작용에 기인한다고 믿고 있었다.

알프레드 월리스(Alfred Wallace, 1823-1913)는 찰스 다윈보다 14살 정도 젊었지만, 월리스는 다윈이 진화론을 설명함에 있어 취했던 것과 같은 생각을 발전시켰다.


2. 찰스 다윈

어떤 사람보다도 진화론을 신봉했던 영국의 자연주의 학자인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은 우리가 주목해 볼 만한 인물이다. 진화론이 다윈의 시대에 그토록 쉽게 파고든 이유는 당시의 영국에서 과학이 유행했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산업화가 진전됨에 따라 진정한 과학으로부터의 도움을 점점 더 많이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850년대는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격변의 시기였다. 그 시대는 칼 마르크스의 시대였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유럽 일대를 뒤덮고 있었다. 자유주의와 합리주의가 많은 기독교의 여러 교파에 파고들던 시기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의 움직임은 진화론이 번성하기에 알맞은 토양이었다.

합리주의와 유물론, 그리고 자연과 과학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일체를 거부하는 시대적 풍조로 인해서, 당시의 많은 지성인들은 성경과 초자연적인 것에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다. 고대의 이교도 철학자들처럼 그들은 우주의 기원에 대하여 이성에 호소하는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당시의 철학적이고 정신적인 분위기는 다윈과 같은 진화론자들이 귀를 기울이고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1859년에 다윈은 『종의 기원』을 발표했다. 그것을 계기로 그는 오늘날 다윈론으로 알려진 진화론의 지도자가 되었다. 1832년에 다윈은 세계여행 중에 종의 기원에 대한 해답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남미 해안 밖 갈라파고스군도 무인도에 갔을 때 흙과 기후가 비슷해도 섬마다 독특한 동물과 식물이 있음을 알았다. 이것을 보고 그가 내린 2가지 결론은 1) 동물이나 식물에 있어서 정확히 동일할 수 없을 만큼 변이가 존재한다는 점 2) 생물체는 지구의 공간과 식량이 부족할 정도로 번식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는 다른 종뿐만 아니라 같은 종끼리도 먹이를 얻기 위해 경쟁하는 것을 보았다. 그가 내린 결론은 우수한 종자가 약한 종자를 밀어내는 가운데 자연에는 지속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투쟁으로 인해 약한 동·식물은 결국 사라지고 우월한 존재가 살아남게 된다. 이러한 일이 계속해서 벌어지면서 사소한 차이가 점차적으로 거대한 차이로 변해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점차 자연선택에 의해 지구상의 존재는 고차원적인 단계로 진화하고 단순한 존재(단세포)에서 복잡한 존재로 진화한다. 결국 상위의 동물은 가장 하위의 동물로부터 진화했고 모든 인간이 그런 동물에서 진화했다는 것이다. 적자생존의 개념은 자연선택의 개념에서 발전되었다.

그 동안 다윈의 생각이 전 세계에 미친 영향력은 과소평가될 수 없다. 그의 진화론은 오늘날 모든 분야로 확대되었다. 천문학자들은 빅뱅으로 시작한 우주의 기원과 지구의 진화를 설명하면서 우주의 진화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다. 역사가들과 인류학자들은 선사시대의 인간에 대하여 사색하기 시작했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을 고도로 발전된 동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물리적 환경을 변화시켜서 인간의 도덕적 질병을 치료하려고 노력했다. 심지어 신학자들조차도 성경의 가르침과 소위 과학적 진화론을 합치할 수 없어 그것을 신뢰함으로써 진화론에 굴복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성경을 단지 고도로 발달된 종교적 이상을 표현한 책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나는 가장 보수적인 교단에서 훈련받은 신학박사들이 성경을 신화에 불과하다느니 인간 타락의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위스콘신 대학의 오토 박사는 정확히 40년 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만약 누구든지 진화론을 받아들이면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과 하나님 안에서 진화론과 믿음을 조화시키는 것은 투명한 논리적 사고에 어떤 결함을 보인다고 확신하게 될 것이다.”


3. 다윈은 어디에서 잘못되었는가?

다윈은 그의 책 『종의 기원』의 제목에도 불구하고 결코 종의 기원을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종 안에 변이를 말했을 뿐이다. 그것은 창조를 신뢰하는 사람들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자연선택은 적자생존을 설명할 수 있지만 적자의 출현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다윈은 스스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반적으로 생각해 볼 때 지구상에는 관찰할 수 있는 2-3백만의 생물의 종들이 있다. 그러나 노련한 관찰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종의 변화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오늘날 흔히들 말한다.”

진화란 새롭고 다른 종류의 생물뿐만 아니라, 눈, 뇌, 귀, 심장, 신경계, 폐, 위, 그리고 많은 다른 기관들을 생산함을 의미한다. 다윈이나 어떤 다른 진화론자들도 이러한 신체기관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으며, 이 모든 기관들이 즉시로 기능을 하는 신체로 갑작스럽게 발달할 수 있었는지 지금까지 설명할 수 없다.

다윈의 진화론은 과학적 사실이 아닌 가정, 추측, 상상 및 사색에 근거한 것이다. 다윈의 책 Ⅳ장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사용하였다. 즉,  ”만약....가령 가정한다면....인것 같다. 그러므로 아마도....우리가 가정해 본다면....만약 다음과 같이 가정된다면....였을지도 모른다....아마도....가령....가정할 수 있다....그럴 수도 있다... ” 등등

이러한 표현은 과학자가 표현하는 방식이 아니다. 과학자는 입증되고 실험된 사실을 근거로 일한다.


4. 과학자들이 거부하는 다윈론

1890년경에 조지 미바트(George Mivart)는 다윈의 이론을 세밀히 검토한 『종의 내력』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썼다. 그는 다윈의 이론을 모든 부분에서 입증된 바 없으며, 자연의 사실과는 위배되는 것으로 치부해버렸다. 그는 다윈의 가설을 ‘유치한 가설(puerile hypothesis)’이라 불렀다.

디오 그래브너(Theo Graebner) 박사는 자신의 책 『하나님과 우주-무신론의 비판적 분석, 1932』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1880년대에는 다윈의 영향력은 절정에 이르렀고, 기술적 연구에 대한 철저한 통제를 실시했다. 90년대에 비로소 의심과 반대의 목소리가 소심한 표현으로 들려오더니 이러한 반응은 점차 부풀어 올라 다윈 이론의 타도를 겨냥하면서 거대한 합창으로 자리 잡았다. 20세기 첫 10년 동안은 분명히 다윈론의 시대라고 표기될 정도가 되었다.”

프랑스의 『과학 대백과사전』(Dictionaire Encylopedique des sciences)을 보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즉,

”다윈론은 증거도 없이 단지 개연성에 불과한 것을 시적으로 모아놓은 허구이다.”

다윈과 연관지어 우리는 토마스 헉슬리(Thomas Huxley: 1825-1895)를 언급해야만 한다. 그는 다윈의 책이 나오기 전부터 이미 진화론자였다. 그러나 다윈의 책으로 인해서 그는 자신의 신념을 뒷받침 해줄 근거를 찾게 되었다. 그는 열성적인 다윈 신봉자가 되었다. 그는 다윈의 진화론을 확산시키기 위해서 전심전력을 다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그는 "다윈의 불독(Darwin's bulldog)”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그는 또한 창조에 관한 성경의 설명, 기독교, 그리스도의 부활, 그리고 그밖의 성경의 다른 내용들을 거부하고 반대론을 강의했다.

다윈과 헉슬리가 활발하게 활동하는 동안에 오스트리아의 수도승이며 식물학자인 그레고르 멘델(1822-1884)은 다윈론에 관하여 심각한 의문을 일으키는 과학적 증거를 제시했다. 멘델은 수차례의 과학적 실험을 통해서 창조자가 식물과 동물의 종에 설정해준 한계를 벗어나서는 변이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증명했다.

”개인이 받은 유전인자를 제외하고는 어떤 다른 인자도 자손에게 전달해 줄 수 없다는 것은 지금 생물학에서는 단순한 법칙에 불과하다. 생명체는 자신이 물려받지 않은 어떤 유전자도 후손에게 물려 줄 수 없다” (『유전과 환경』 p.99)

이러한 사실이 환경의 변화에 따라 진화한다는 다윈의 이론에 자물쇠를 채웠다. 그러나 멘델이 이룩한 업적의 중요성은 다윈의 이론이 발표된 지 50년 후에야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 시대에 진화의 원인에 관하여 깊이 사색했던 또 다른 인물은 네덜란드 식물학자인 휴고 드 브리스(1848-1935)이다. 그는 달맞이꽃을 가지고 실험했다. 실험 도중에 그는 새로운 종의 식물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새로운 종은 갑자기 자발적으로 단계를 건너뛰며 발생했고 후손을 건너뛰었다”고 말했다. 그의 이론은 돌연변이 이론(mutation theory)으로 불렸다. 이러한 이론은 짧은 기간 동안 진화론자들 사이에서 큰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가정된 새 종이 동일한 종 안에 다른 변종일 뿐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그의 이론은 허망한 종국을 맞이하였다. 하버드 대학의 제프리 교수는 「과학」(Science, 1914. 4. 3) 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드 브리스의 돌연변이 이론은 이제 폐기된 가설들이 머무는 망각의 구렁으로 추방되어야 한다.”  


출처 - 앨버트 시퍼트의 [진화론의 비과학성 : 그 32가지 이유들] 번역

미디어위원회
2005-10-01

다윈은 자기의 주장을 철회하였는가?

(Did Darwin recant?)

Russell M. Grigg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은 1882년 4월 19일에 73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가 불신자로 죽었다는 것을 슬퍼했던 일부 사람들에 의해서, 다윈이 죽음 직전에 침상에서 기독교로 전향(death-bed conversion)했고 진화론을 포기하였다는 여러 뒷이야기들이 몇 년 동안 떠돌아 다녔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그가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1882년 5월경부터 설교들에 포함되기 시작하였다.[1] 이러한 이야기들은 1881년 가을에 다운 하우스(Down House)[2]를 방문하여 병상의 다윈을 만났었다고 주장하는 호프 부인(Lady Hope)의 말에 의해서 기인되었다.

그녀가 도착했을 때 다윈은 히브리서를 읽고 있는 중이었고, 그녀가 창세기의 창조에 대해서 언급했을 때 그는 괴로워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윈은 그녀에게 다음 날 다시 와줄 수 있느냐고 물었고, 여름 집의 정원에서 열리는 하인, 소작인, 이웃들 30여명이 모이는 모임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주장했다. 이 이야기는 처음 미국 침례교도 저널인 Watchman Examiner (1915년) [3]에 521 개의 단어로 된 기사로서 인쇄되어 나타났고, 그때 이후로 많은 책들, 잡지들, 소책자들에서 재인쇄 되었다.

이 이야기에 있어서 주요한 문제점은 다윈의 가족들에 의해서 그러한 사실들이 모두 부인되었다는 것이다. 프란시스 다윈(Francis Darwin)은 1887년 2월 8일 토마스 헉슬리(Thomas Huxley)에게 편지를 썼는데, 찰스 다윈이 죽기 직전 침상에서 진화론을 철회했다는 보고는 "잘못되었으며 어떠한 근거도 없다”[4] 라고 하였다. 그리고 1917년에도 프란시스는 "아버지가 그의 회의론적(agnostic) 관점을 바꾸었다고 믿을만한 어떠한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5] 라고 단언했다.

찰스 다윈의 딸 헨리에타(Henrietta, Litchfield)는 1922년 2월 23일 영국의 복음 주간지인 The Christian 의 p.12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아버지의 임종 시에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호프 부인은 아버지의 마지막 또는 어떠한 투병 기간 동안에도 있지 않았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심지어 그녀를 보지도 못했으며, 그래서 어떤 경우에서든지 아버지의 사상과 믿음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주지 못했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또는 그 이전에도 그의 과학적 견해를 조금이라도 결코 철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한 모든 이야기들은 어떠한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6]

일부 사람들은 심지어 어떠한 호프 부인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결론 내리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만 하는가?

다윈의 전기 작가이며, 영국 오픈 대학(The Open University)의 과학사 강사인 제임스 무어(James Moore) 박사는 20여년 동안 3개 대륙에 걸쳐서 자료들을 조사하였다. 그는 그가 ‘다윈의 전설(Darwin legend)’[7] 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조사하여 218 페이지의 책을 발간하였다.

그는 호프 부인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1842년 Elizabeth Reid Cotton에서 태어났고, 1877년에 은퇴한 홀아비인 제임스 호프(James Hope) 제독과 결혼했다. 그녀는 복음 전도(tent evangelism) 팀에 몰두했으며, 1880년 대에 켄트(Kent, 다윈의 집이 있던 곳)에서 나이든 사람들과 아픈 사람들을 방문하곤 했었다. 그녀는 1922년에 호주 시드니에서 암으로 죽었고, 그곳에서 그녀의 무덤을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8] 무어는 프란시스와 헨리에타가 거의 확실히 없었던 기간인 1881년 9월 28일(수요일)과 10월 2일(일요일) 사이에 아마도 호프 부인이 찰스 다윈을 방문했을 것이라고 결론 내리고 있다. 그러나 그때 다윈의 부인 엠마(Emma)는 아마도 있었다는 것이다.[9] 그는 호프 부인을 묘사하면서 감동적인 장면과 대화를 유도할 수 있는, 그리고 감상적인 영성(sentimental spirituality)을 가지고 그것들을 과장하여 이야기할 수 있는 숙련된 이야기꾼(a skilled raconteur)으로서 기술하고 있다. 그는 그녀의 출판된 이야기가 시기와 장소에 관해서 일부 신뢰할만한 세부사항들을 포함하고 있었으나, 실제와 틀린 사실들도 있었음을 또한 지적했다. 즉, 찰스 다윈은 죽기 전에 6개월 동안 병상에 누워있지 않았으며, 그의 여름 집은 30여명의 사람들을 수용하기에는 너무 작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찰스 다윈이 진화론을 포기하거나, 기독교를 받아들였다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단지 그가 젊었을 때 발표했던 이론들의 운명에 대해서 관심을 표현하였고, 종교적 모임에 소수의 사람들이 참석하는 것을 찬성했다는 것이다. 주장되는 다윈의 철회/전향(recantation/conversion)은 다른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읽거나, 스스로 만들어서 가지게 된 장식(embellishments)이라는 것이다. 무어는 그러한 행위를 "거룩한 위조(holy fabrication)" 라고 부르고 있다!

다윈의 아내였던 엠마는 결혼 생활 대부분의 기간 동안 다윈의 견해가 가지는 반종교적인 본질(irreligious nature) 때문에 굉장히 고통을 받았었다는 것을 주목해야만 한다. 만약에 그러한 일이 진정으로 발생했다면, 그녀는 다윈의 전향에 대한 이야기들을 확증하기 위한 강한 동기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다윈은 자기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오늘날 호프 부인의 이야기가 간혹 소책자에 출판되어 선의의 사람들에 의해서 배포되고 있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References

1. James Moore, The Darwin Legend, Baker Books, Grand Rapids, Michigan, 1994, pp. 113-14.
2. Down House retained the spelling of the old name of Darwin's village, which was changed to Downe in the mid-nineteenth century to avoid confusion with County Down in Northern Ireland. Source: Ref. 1, p. 176.
3. Watchman Examiner, Boston, 19 August 1915, p. 1071. Source: Ref. 1 , pp. 92-93 and 190.
4. Ref. 1, pp. 117, 144.
5. ibid, p. 145.
6. ibid, p. 146.
7. ibid.
8. After the death of Admiral Hope in 1881, Lady Hope married T.A. Denny, a 'pork philanthropist', in 1893, but preferred to retain her former name and title (Ref. 1, pp. 85; 89-90).
9. Ref. 1, p. 167.
10. ibid, p. 94.

 

*관련기사 : '성경·예수 안 믿어' 다윈 편지 첫 공개 (2015. 9. 12. 조선일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9/12/2015091200286.html

다윈의 편지 공개... '성서도 예수도 믿지 않는다'(2015. 9. 12.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43522

'성경·예수 안 믿는다' 다윈 편지 경매에 나와 (2015. 9. 11. 연합뉴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09/11/0200000000AKR20150911071200091.HTML


* 참조 : Did Darwin Renounce Evolution on His Deathbed? 

https://www.icr.org/article/2834/

Charles Darwin Questions and Answers
http://www.answersingenesis.org/home/area/faq/darwin.asp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creation.com/did-charles-darwin-recant

출처 - Creation 18(1):36–37, December 1995.



미디어위원회
2005-08-31

런던동물원은 사람을 전시하였다. 

(Do You Belong in the Zoo?)

David F. Coppedge


        런던동물원에서 관람객들은 한쪽 우리에 갇혀서 전시되고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영장류 중의 하나를 전시하기 위해서, 몸의 중요 부위만을 살짝 가린 8명의 백인들이 우리 안에 전시되고 있다고 언론 매체들은 보도했다 (NBC News, CBC News(2005. 8. 26)을 보라). 수영복 위에 무화과 나뭇잎으로 옷을 입은 그들은 서로 놀고, 긁어주며, 단장시켜주고, 관람객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준다. 이러한 전시 의도는 사람은 특별하지 않으며, 단지 동물과 같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영장류 우리에 있는 원숭이나 침팬지와 같지 않게 우리 안에 있던 사람들은 밤에는 집으로 퇴근한다.

이러한 이목을 끄는 행사는 동물원을 결코 방문하지 않았던 관람객들을 끌어 모으기 위한 것이다. 일부 관람객들은 사람들이 옷을 입고 있는 것에 대해 실망한다. 전시가 전해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잘 모르는 어린이들은 머리를 갸우뚱하며 질문하곤 한다. "왜 사람들이 저기에 있어요?” 진화론자들의 개조된 성경이야기에는 침팬지 중의 하나가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한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적어도 이번에는 백인을 전시하였다. (흑인 오타 벵가를 동물원에 전시했던 사건에 대한  Carl Wieland의 글과 아래의 글들을 보라). 


*참조 : Ota Benga: The Story of the Pygmy on Display in a Zoo

https://www.creationresearch.org/crsq-1993-volume-30-number-3_ota-benga-the-story-of-the-pygmy-on-display-in-a-zoo

오타 벵가의 비극

https://creation.kr/HistoryofEvolution/?idx=1290079&bmode=view


*관련기사 :  ‘인간 동물원’ 등장 … 런던동물원, 남.여 8명 4일간 ‘전시’ (2005. 8. 28. 어린이조선일보) 

http://kid.chosun.com/site/data/html_dir/2005/08/28/2005082800016.html

런던 동물원에 '사람'도 전시 (2005. 8. 27. 한겨레)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60179.html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crev.info/2005/08/do_you_belong_in_the_zoo/

출처 - CEH, 2005. 8. 29.

미디어위원회
2005-07-18

제임스 허튼의 전기 

: 현대지질학의 주류인 동일과정설의 창시자 

(Biography of James Hutton)


제임스 허튼 (James Hutton, 1726-1797).

스코틀랜드의 지질학자였던 제임스 허튼은 1726년 6월 3일 에든버러(Edinburgh)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 도시인 에든버러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니면서, 그는 과학적 질문들에 대해 열정적인 사랑을 가지고 있었던 학생이었다. 그는 법률가(lawyer)로 도제(apprentice, 견습생)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의 고용주는 그에게 취미가 맞는 직업을 선택할 것을 충고하였다. 젊은 도제는 그가 좋아했던 화학 과목과 가장 가까운 의학(medicine)을 선택했다. 그는 에든버러에서 3년 동안 공부를 하고, 파리에서 의학 교육을 마쳤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고, 1749년(23세)에 레이덴(Leiden)에서 의사(doctor of medicine) 자격을 취득했다. 그러나 그의 앞에 진로가 잘 보이지 않자, 그는 의사로서의 직업을 포기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베르윅셔(Berwickshire)에 있는 약간의 유산을 물려받았고, 농업(agriculture)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농사에 필요한 경작 방법을 배우기 위해 노폭(Norfolk)에 갔고, 계속하여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북부를 여행했다. 이 기간 동안에 그는 지구 표면에 관한 공부를 하기 시작하였고, 훗날 그의 정렬을 바쳤던 문제들에 대해서 점차적으로 그의 생각 깊은 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1754년(28세) 여름, 그는 베르윅셔에 자신의 농장을 세우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14 년 동안을 살았고, 농업의 가장 개선된 형태들을 소개했다. 농장이 체계적으로 잘 돌아가게 되면서, 농장의 관리는 더 쉬워졌고, 흥미를 점점 잃어갔으며, 농장은 스스로 돌아가도록 하게 하였다. 그는 에든버러에 돌아와 삶의 휴식을 취하게 된다. 이것은 1768년(42세) 쯤에 일어난 일이다. 그는 결혼하지 않았고, 이 기간부터 그가 죽은 1797년(71세)까지 그의 세 여동생들과 살았다. 그는 취향이 같은 문학적 과학적 친구들과 어울렸고, 연구를 가까이 하게 된다.


그 당시에 지질학(geology)이라는 적절한 의미를 갖는 용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광물학(mineralogy)은 상당한 진보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허튼은 그 당시의 광물학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보다 더 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여러 가지 광물과 암석들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지구의 역사를 어느 정도 명백히 이해해 보고 싶어 했다. 수 년동안 그는 그 주제를 연구하기를 계속했다. 마침내 1785년(59세) 봄에, 그의 견해를 당시 설립되지 얼마 안 된 에든버러 왕립협회에 ”지구의 이론, 또는 지구 육지의 구성, 소멸, 회복에 있어서 관측되는 법칙들에 대한 조사 (Theory of the Earth, or an Investigation of the Laws Observable in the Composition, Dissolution and Restoration of Land upon the Globe.)” 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주목할 만한 논문에서, 지질학은 우주창조설(cosmogony)이 아니라, 지구 물질들에 대한 연구에 한정되어야만 하다고 상술되었다. 지구 도처에 다음과 같은 증거들이 보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지구 표면의 현재 암석들은 더 오래된 암석의 부스러기들로부터 많은 부분들이 형성되었다. 바다 아래에 쌓여져 내려오던 이들 물질들은 엄청난 압력 하에서 단단해지고, 연속적으로 파열되고, 지하 열(subterranean heat)의 팽창적인 힘에 의해서 융기되었다. 이 격동 동안에 광맥들과 용융된 암석 덩어리들은 지층 단층면의 갈라진 틈으로 관입되었다. 융기된 땅들의 모든 부분들은 대기에 노출되자마자 분해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분해는 육지 전체가 닳아 없어져 해양저에 퇴적될 때까지 계속 진행되었으며, 미래의 또 다른 융기가 단단해진 퇴적물들을 새로운 땅으로 다시 또 들어 올릴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허튼의 이러한 광대하고 대담한 개념의 일부는 이탈리아 지질학자들에 의해서 제시되었던 것이었지만, 허튼은 최초로 그들의 상호 관계를 신뢰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그들을 관측에 기초한 반짝이는 조리있는 이론으로 연합해 내었다.


허튼이 직접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단지 땅(earth)만이 아니었다. 그는 대기의 변화에 대해서 오랜 기간 연구를 하였다. 그의 책 ‘지구의 이론 (Theory of the Earth)’에 나타났던 같은 부피의 량이 또한 ‘비의 이론 (Theory of Rain)’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것은 1784년 에든버러에 있는 왕립협회에서 읽혀졌다. 그는 공기가 용액으로 보유할 수 있는 습기의 양은 온도가 증가함으로서 증가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다른 온도를 가진 두 덩어리의 공기가 혼합되었을 때 습기를 가진 부분은 응축되어,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지구의 다른 지역에서의 강우(rainfall)와 기후(climate)에 관련된 이용할 수 있는 자료들을 조사했다. 그리고 강우는 모든 곳에서 한편으로는 습도에 의해서 조절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높은 대기 중에서 다른 공기 흐름들의 혼합을 증진시키는 원인이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의 천부적인 재능과 열정은 그가 30년 동안 에든버러에 거주하면서 발표한 다양한 연구들로부터 알 수 있다. 1792 년에, 그는 ‘자연 철학에 있어서 다른 주제들에 대한 논문(Dissertations on different Subjects in Natural Philosophy)’ 이라는 제목의 4절판으로 된 책을 출판하였다. 거기에서 그는 물질, 유동성(fluidity), 응집(cohesion), 빛, 열, 전기 등의 본질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이 주제들의 일부는 에든버러 왕립협회에서 읽혀진 논문들에서 그에 의해서 더 자세히 설명되었다. 그는 물리학(physics)의 영역 내에서만 자신을 제한하지 않았고, ‘지식의 원리 및 이성의 과정들에 대한 조사 - 감각으로부터 과학과 철학까지 (An Investigation of the Principles of Knowledge, and of the Progress of Reason - from Sense to Science and Philosophy)’ 라는 제목의 세 권의 4절판 책을 출판하면서 대담하게 형이상학(metaphysics)의 영역까지 나아갔다.


그 책에서, 그는 우리에 의해서 인지되고 있는 외부 세계는, 외부로부터 자극에 의해서 영향을 받은 우리 자신의 마음의 창조물이라는 개념을 전개하였다. 즉, 바깥 세계에 대한 우리의 그림과 실제성(reality) 사이에는 유사점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성과 일관성을 가지는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인상(impressions)들은  마치 그들이 정확히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물체들처럼 우리들에게 많은 실제성을 가지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도덕적 행위는 마치 우리의 생각이 완벽하게 그것들을 만드는 원인들과 부합되는 것처럼 똑같이 남아있음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의 말년은 그의 ‘지구의 이론’의 확장과 재출판에 힘을 쏟으며 보냈다. 그것에 대한 2 권의 책이 1795년(69세)에 출판되었다.


그 작업을 완료하는 데에 필요했던 세 번째 책은 그의 손으로 쓴 필사본으로 남겨졌고, 그의 전기 작가인 플레이페어(John Playfair)에게 넘겨졌다. 이 책의 한 부분은 레오나드 호너(Leonard Horner)에 의해서 런던 지질학회(Geological Society of London)로 보내졌고, 1899년에 게이키 경(Sir A. Geikie)의 편집 하에 학회에 의해서 출판되었다. 필사본의 나머지 원고들은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허튼은 경작(husbandry)에 관한 그가 기록했던 많은 글들을 수집하는 분류하는 작업을 하였다. 그는 이것을 ‘농업의 요소들(Elements of Agriculture)’ 이라는 제목 하에 출판하려고 하였다. 그가 거의 이 작업을 마무리할 무렵인 1797년 3월 26일, 치유할 수 없는 질병으로 그의 활동적인 경력은 끝을 맺게 되었다.


그의 책 ‘지구의 이론(Theory of the Earth)’에 의해서, 허튼은 지질학이 발전을 지속하는 한 숭배를 받으며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무겁고 애매한 허튼의 글 형태 때문에, 그의 책들은 그의 생애 동안에는 그가 노력을 기울인 만큼 관심을 끌지 못했다. 허튼에게 다행스러운 것은 그의 과학 친구들 가운데 존 플레이페어(John Playfair)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에든버러 대학의 수학(mathematics) 교수였으며, 허튼의 교리를 전파하고자 하는 열정이 넘쳤던 사람으로 허튼의 주장들이 빛을 발하게 하였다. 허튼이 죽은 후 5년 후에, 그는 ‘허튼의 지구의 이론에 대한 해설(Illustrations of the Huttonian Theory of the Earth)’ 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하였다. 이 책에서 플레이페어는 허튼의 이론을 훌륭하게 요약하였고, 많은 부가적인 해설과 논의들을 첨부하였다. 이 작업은 지질학 저술들에서 공헌도가 높은 고전 중에 하나로서 간주된다. 그 책은 영국 지질학의 발달에 있어서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 1805년에, 플레이페어에 의해서 쓰여진 허튼의 전기는 ‘에든버러 왕립협회 보고서 (Transactions of the Royal Society of Edinburgh)’ (A. Ge.) 제 5권에 실리게 되었다.     

 

*참조 : The man who made the wedge: James Hutton and the overthrow of biblical authority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18_2/j18_2_55-57.pdf

St Hutton’s Hagiography
http://creation.com/st-huttons-hagiography

Darwin, Lyell and Origin of Species
http://creation.com/darwin-and-lyell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gennet.org/facts/hutton.html 

출처 - GenNet.org

미디어위원회
2005-06-23

역사학자가 근본주의 진화론의 몰락을 예언하다. 

(Historian Predicts Downfall of Darwinian Fundamentalism)

David F. Coppedge


      2005. 6. 20일자 Forbes 지에서, 영국의 역사학자인 폴 존슨(Paul Johnson)은 근본주의적 진화론자들을 공격하면서, 그들의 서거(demise)를 예측하고 있다.

"오늘날 전 세계의 거대한 근본주의자들 그룹 중에서, 다윈주의 신봉자들은 나에게는 가장 못마땅한(most objectionable) 그룹으로 여겨진다. 그들은 기독교나 이슬람교의 근본주의자들처럼 논쟁에 대해 폐쇄적이고, 불쾌한 발언들을 쏟아낸다. 그러나 이들 두 그룹과는 다르게 다윈주의자들은 지적인 존경(intellectual respectability)을 받으며 그것을 즐기고 있다.

다윈주의자들과 그들의 동맹자들은 서양의 과학 체제를 지배하고 있다. 그들은 대학 캠퍼스를 지배하고 있다. 무신론(atheism)이라는 그들의 호전적인 상표는 대부분 대학의 교수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철학적 무신론자들과 자연적인 동맹을 맺게 하였다. 그들은 선도적인 과학 잡지들을 지배하였고, 그들에 대한 비평과 반대 의견들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텔레비전에서 가장 좋은 시간대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진화론이라는 다윈주의자들의 상표는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그 약점들이 계속 드러남으로서 점점 상처투성이가 되어가고 있다. 어느 날 (아마도 곧) 진화론은 처참하게 붕괴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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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주의자들에 반대하는 그의 가치있는 열변에도 불구하고, 존슨은 비판력 없이 빅뱅 이론과 장구한 우주 연대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는 뉴튼을 자연력(impersonal Force)을 가르쳤던 사람으로 잘못 해석하고 있는 선행적(front-loading, 생명체에 필요한 모든 정보가 어느 정도 빅뱅 시에 이미 존재했고 적당한 시기에 기계적으로 스스로 작동되었다는) 설계철학(design philosophy)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사람이 만들어지는 데에 선행적 설계를 가정한 후에, 언어의 기원에 대해서는 신의 간섭을 주장하였다. 이 이상한 생각은 진화론의 몰락에 대한 그의 흥미로운 예언을 반감시키고 있다.


존슨도 또한 상투적인 황색 언론(yellow-journalism) 이외의 근본주의에 대해서는 거의 알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는 근본주의를 폐쇄적이고 불쾌한 발언들을 쏟아내는 것으로 정의했다. 그것은 그레셤 마헨(J. Gresham Machen)과 같은 기독교 학자가 사용하는 단어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근본주의란 기독교 신앙의 훼손 없이 타협될 수 없는 성서적 교리를 지켜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존슨이 오늘날 많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교회 안에 들어와 본다면, 그는 폐쇄된 생각을 가지지 않은, 불쾌한 말을 쏟아내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게 것이다. 그는 AK47 총들로 무장하고, 깃발을 불태우며, 일전불사를 외치는 무슬림 전사들과 같은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반대의견에 대해서 철저한 사전검열을 가하고 있는 진화론자들과 같은 모습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는 겸손하고, 기쁨에 넘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낮선 사람을 환영하면서 다음과 같이 물어보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당신을 위해 어떻게 기도하면 될까요?”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crev.info/2005/06/historian_predicts_downfall_of_darwinian_fundamentalism/

출처 - CEH, 2005. 6. 8


김정훈
2005-05-27

해리포터와 마술, 그리고 창조과학


      <해리포터> 보셨습니까?  동명의 베스트 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해리포터>가 2001년 연말에 처음 개봉할 당시 많은 사람들 사이에 큰 화제가 되어 한 두 번쯤은 서로 이런 인사를 주고받곤 했던 적이 있었다. 특히 초등학교나 중학교 학령기의 자녀를 가진 분들이라면 자녀들의 등쌀에 못 이겨 같이 영화를 관람하셨을 분들도 많을 것 같다. 최근에는 그 2편까지 개봉되어 여전히 세계 극장가의 box office를 석권하며 그 위력을 과시하고 있는데, 이미 여러 형태의 대중매체를 통해서 <해리포터>의 내용이나 아이들에 대한 유해성 논란이 많이 보도되어 있으므로, 영화가 좋은지 나쁜지는 각자 독자의 판단에 맡기기로 하고, 대신 필자는 이 자리에서 작품 <해리포터>의 중요한 배경과 소재가 되고 있는 ‘마술’이란 것에 대해서, 특별히 창조과학을 연구하는 한 과학자로서의 견해를 피력해 보고자 한다.


우선, 마술은 과연 사실일까? 각종 오락 시설을 잘 갖춘 웬만한 테마 파크에 가면, 으레껏 마술쇼를 위한 상설 공연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동네나 학교의 크고 작은 축제가 있을 때에도 마술쇼는 인기 프로그램의 하나이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마술쇼는 비록 그 재빠른 마술사의 손놀림에 박수를 보내며 즐거워한다고 할지라도, 모자 속에서 사과를 토끼로 바꾸어 꺼내는 것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단지 눈속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어린 아이들도 잘 알고 있다. 물론 세계적인 일류 마술사 David Copperfield의 마술쇼쯤 되면, 그 trick이 매우 고단수여서 현실과 환영을 분별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수준이 높아지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역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단지 고도로 훈련된 마술사의 눈속임이라는 것을 의심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해리포터>에서 보여 주는 마술의 세계는 눈속임의 경지를 넘어서 어떤 다른 차원의 세계로 사람들을 이끈다. 가로막힌 벽 속으로 사람의 몸이 그대로 통과하는 것이나, 빗자루를 타고 공중을 날라 다니는 것, 물체를 물리적인 접촉 없이도 움직이는 것, 그리고 투명 담요로 덮어 몸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 등은 모두가 자연과학의 법칙을 벗어나는 일 들인데, 이런 일들이 마술이라는 이름으로 다반사로 행해짐으로, 일시적인 눈가림과는 차원이 다른 어떤 세계의 존재를 은연중에 암시 받게 된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이 소설이나 영화적 재미를 위한 가공의 것들이긴 하지만, 마술사 양성을 위한 학교가 등장하고 연구와 훈련을 통해서 마술의 경지를 넓혀간다는 이야기의 기본 전개는 이런 차원의 마술도 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기에 충분하게 만들고 있다. 이에 대한 필자의 견해는, <해리포터>식의 마술도 어느 정도는 가능할 수 있다는 쪽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런 일들은 자연 법칙으로는 불가능하며, 동네 마술쇼에서와 같이 무대 뒤에서 보이지 않게 돕는 제 3자가 있거나, 혹은 감추어진 상자나 물체가 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첫째, 고도로 발달된 과학 지식을 갖추어 자연 법칙을 위배하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자연을 다스려 마술처럼 보이는 현상을 창출해 내는 것이요, 둘째는 어떤 영적 존재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 눈부시게 발달한 과학 기술은 마술이 횡행하던 고대나 혹은 중세시대의 사람들의 눈에는 당연히 마술로 보일 것이 틀림없다. 가령, 현대인들이 remote control 이나 자동음성인식 장치를 통해 직접적인 신체의 접촉이 없이도 전자제품을 작동시키는 것이나, 개인용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아 오르는 것들을 과학을 모르는 옛날 사람들이 본다면, 무어라고 하겠는가? 벽 속으로 사람의 몸이 사라지는 것도 영화에 나오는 물체 전송장치 같은 것을 이용하면 될 일이겠지만, 이것은 아직까지는 언제 실현될지 모르는 과학적 허구이다. 과학의 역사는 학자들의 보는 견해에 따라 그 시작점을 정하는데 차이가 있지만, 소위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으로서의 과학이 시작한 시점을 갈릴레오와 뉴튼 등에 의해 주도되었던 ‘과학혁명’이 일어났던 17세기로 보는데 대부분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일이 그렇듯이 ‘과학혁명’ 이전에 이미 혁명을 위한 지성적 그리고 기술적 토양이 준비되어 가고 있었음을 지적하는 학자들이 늘고 있다. Paolo Rossi 같은 과학 역사학자는 중세에 횡행했던 연금술 같은 작업들이 어떻게 과학적 지식과 기술의 축적으로 전환되어 갔었는지를 그의 저서 <마술에서 과학으로>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과학이 발달하기 오래 전에 소위 마술사들에 의해 행해지던 많은 신비로운 행위들이 이제는 과학적 지식에 의하여 더 이상 마술이 아니거나 혹은 그 신비로움을 상실해 버린 것들이 많다. 


당시의 그리고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일부 마술사들은 체계적인 과학 지식도 없이 비록 작게나마 어떻게 자연을 다스리는 효과를 낼 수 있었을까? 물론, 그들에게 체계적인 과학지식이 없음으로 인해 오늘날 우리가 자연의 법칙을 이용하여 얻어내는 유익과는 수준의 격차가 현격히 크지만은, 그들 나름대로의 방법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물론 일부는 타고난 지혜로 말미암아 체계적인 이론은 갖고 있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자연의 이치를 이용할 수 있었을 수도 있지만, 보다 더 근본적인 마술적 힘의 원천은 아마도 영적 존재에 의탁하여 얻어낸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었나 싶다. 앞서 언급한 <해리포터>식의 마술도 사실 정도의 차이는 크게 있지만, 이방 종교의식이나 주술 가운데 영적 존재의 힘을 빌어 지금도 어느 정도 행해지고 있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이런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와 비슷하게 요가에서 행하는 공중부양이나 유리겔러 식의 초능력, 혹은 심령술 등의 배후에도 사실은 뒤에서 보이지 않게 작용하는 영적 존재가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마술이나 무당, 그리고 점성술 등에 대해서 단호하게 사악한 행위로 규정을 짓고 있으며, 이러한 행위의 뒤에는 결국 사탄이 자리하고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아마 이러한 이유 때문에 기독교계에서 특히 <해리포터>에 대한 경계심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결국 마술이라고 하는 것은 그 근본 성격이 사람의 눈을 속인다는 점에서, 에덴 동산에서부터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를 속여왔던 사탄의 작품일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지혜를 주시어 과학이라는 열매를 잉태케 하심으로, 혼돈 속에서 질서를 깨닫게 하시고 그 분이 설계하신 자연의 원리들을 하나씩 발견케 함으로써 마술적 눈속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축복하시었다. 그러나, 이같은 축복은 마술적 현상 뒤에 숨어서 역사 하는 사탄의 존재를 바로 인식하기 위함이기도 하였는데, 과학적 결과에 교만해진 대다수의 인간은 그만 영적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우를 범하고 모든 것을 물질로만 해석하고 이해하려고 하는 진화론적 인본주의 유물사상을 낳게 되었으니, 이 또한 과거 마술이 인간을 우매하게 하던 시대와 마찬가지로 또 다른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상이 되고 말았다. 이런 점에서 창조과학자들은 과학의 본래의 목적을 회복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는 자들이다. 마술과 같은 눈속임에 더 이상 무지한 사람들이 현혹되지 않도록 과학적인 답을 찾는데 노력을 기울일 뿐만 아니라, 그 과학적 발견을 주신 자의 지혜와 솜씨를 찬양하기 즐겨하는 자들이다. 더 나아가 그 마술적 현상 뒤에 숨어 있는 영적 존재를 인정하고 그에 대한 적절한 대응을 성경을 통해 찾기를 마다하지 않는 자들이다.  <해리포터>의 상업적 성공을 지켜보면서, 자연의 이치를 밝히 보여주는 과학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기는커녕 여전히 영적으로 공허한 그래서 신비적 마술에 시선을 뺏기는 현대인의 참모습을 보는 듯 하였다면, 그것이 단지 필자만의 기우일까?



출처 - 이브의 배꼽, 아담의 갈비뼈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655

참고 :

미디어위원회
2005-05-20

오타 벵가의 비극 

: 진화론에 의해 동물원에 전시됐던 흑인

김정훈


       만약에 우리가 사는 근처의 어느 동물원에서, 진화가 아직 덜된 어떤 사람을 전시한다는 광고가 났다면, 이에 대한 우리들의 반응은 어떻게들 나타날까? 뭐? 동물원에서 사람을 전시해? 그것 참 흥미롭겠군. 진화가 아직 덜 되었다니 무척 재미있을 거야. 혹시 이런 반응은 아닐까?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같은 일이 실제로 미국에서 일어났었다. 1904년 미국의 St. Louis에서는 만국 박람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이곳의 한 쪽에서는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데리고 온 몇 명의 흑인 피그미족들이 진화가 덜 된 이상한 사람들이라는 딱지가 붙은 채로 전시되고 있었다. 그 중에 오타 벵가라는 이름을 가진 23살의 젊은 흑인 청년이 있었는데, 그도 당시 저명한 아프리카 탐험가였던 Samuel Verner라는 사람에 의하여 그의 고향 아프리카 Congo로부터 붙잡혀와 이곳에서 함께 전시되고 있었다. 그 후 St. Louis 만국 박람회가 끝나고 오타 벵가는 New York에 있는 Bronx 동물원에 팔려가게 되었고, 이곳에서 그는 그만, 원숭이 우리 안에 그를 위하여 특별히 마련된 전시실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야 말았다. 이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기 위하여 동물원에 줄을 섰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오타 벵가는 구경꾼들의 야유와 장난에 싫증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처음 미국에 잡혀 왔을 때와는 달리 점차 성질이 사나와져 갔다. 그러나, 이같은 동물원 측의 비인간적인 행위에 반대하는 항의자들이 늘어감에 따라 어쩔수 없이 동물원 측에서는 오타 벵가를 풀어 주게 되었고, 그후 오타 벵가는 Virginia의 Lynchburg에 있는 어느 담배 공장에서 한 동안 일하게 되지만, 그가 동물원에서 받은 상처는 이미 너무나도 깊어 있어서 줄곧 그는 외로움과 우울증,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강한 적대감으로 괴로워 하다가 끝내는 1916년, 자살을 함으로 그의 짧은 인생을 마치고 말았다. 이때 그의 나이가 35 세로, 미국으로 잡혀온지 12 년이 지난 해의 일이었다. 

과연 무엇이 오타 벵가를 원숭이 우리 안에 갇히게 하였을까? 그의 피부가 검기 때문에? 그가 피그미 족으로서 체격이 왜소했기 때문에? 아니다.  그것은 당시 사람들이 갖고 있던 잘못된 진화론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셨다고 성경(행 17:26)은 분명히 말하고 있는데도, 원숭이를 우리의 조상으로 가르치는 진화론을 받아들이면 이같은 인종차별 의식을 쉽게 갖을 수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육체의 유전적 다양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이 마치 우등하고 열등한 것이라도 있는 양, 사람들의 신체 어느 일부분을 가지고 서로 놀려대는 일도 쉽게 할 수 있게 된다. 

진화론이란 어디 멀리 있는, 나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이론이 아니다. 바로 우리의 행동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이 사회의 보이지 않는 암적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챤들이여, 일어나자!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 아래 아름답게 창조된 피조물인 것을 세상에 외치자. 난쟁이도 꺽다리도, 뚱뚱이도 홀쭉이도, 그리고 검둥이도 흰둥이도 우리 모두가 사랑을 나누어야 할 형제 자매임을 세상이 알 수 있도록, 우리가 먼저 모두에게 사랑에 빚진 자로 살자 (롬 13:8)!

 

 

*참조 : Ota Benga: The Story of the Pygmy on Display in a Zoo

https://www.creationresearch.org/crsq-1993-volume-30-number-3_ota-benga-the-story-of-the-pygmy-on-display-in-a-zoo

Academia and the press as the bad guys : A review of  'Spectacle: The astonishing life of Ota Benga'

https://creation.com/review-spectacle-newkirk

Anti-slavery activist William Wilberforce: Christan hero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1_2/j21_2_121-127.pdf

William Wilberforce : A Leader for Biblical Equality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2/n1/william-wilberforce


출처 - 이브의 배꼽, 아담의 갈비뼈

미디어위원회
2005-05-20

진화론에 의한 창세기 

(Genesis according to Evolution)

Terry Mortenson Ph.D. 


      만약 수억 년에 걸친 진화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방법이었다면, 하나님은 간단한 단어들로 그것을 쉽게 말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전 세계에 있는 많은(아마도 상당히 많은 수의)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이 우주 대폭발(big bang), 별의 진화 과정들, 그리고 수억 수천만 년에 걸친 점진적인 지질학적 변화 과정들을 통해 오늘날의 세계를 만드셨다고 믿고 있다. 또한 이들 크리스천들 중 일부는 하나님이 수많은 동식물들을 만드시기 위해서 신다윈주의적 진화 과정을 사용하셨다고 믿고 있다. 전자는 '점진적 창조론자(progressive creationists)'라 불리워지고, 후자는 '유신론적 진화론자(theistic evolutionists)'로 불리워진다.

성경이 최초의 기원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을 대하게 될 때, 많은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이 과학시대 이전의 고대 사람들에게 당신의 창조하신 방법을 잘 전달하실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여 왔다. 고대 히브리 인들은 오늘날의 복잡한 천문학, 지질학, 생물학적 이론들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창세기는 단지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쓰여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것은 분명히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점진적 창조론자나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만약 하나님이 정말로 그러한 방법으로 창조하셨다면, 어떻게 말씀하셨을까를 간단한 단어들을 사용해서 표현해 보았다.1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작은 먼지 알갱이들을 팽창시키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빛이 있으라 그러자 그렇게 되었다. 이 먼지 알갱이들로부터 오랜 시간에 걸쳐서 별들을 만드셨고, 해를 만드셨고, 또 오랜 시간 후에 이 땅과 달을 만드셨다. 그때 땅은 매우 뜨겁고 건조했다. 이 땅 어디에도 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천천히 하나님은 바다가 생기게 하셨고, 매우 작은 피조물들을 바다에 만드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그리고 천천히 물고기와 바다의 식물들과 기는 것과 땅에 사는 육축과 짐승과 공중의 새들로 변화하라. 해변의 모래와 같이 무수한 시간이 흐른 후에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그 때에 땅과 하늘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많은 생물들은 무서운 역병으로 희생되었으며, 동물들은 서로를 잡아먹었고, 독이 있는 가시로 죽였다. 많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하나님이 만드셨던 창조물들은 죽어갔고, 땅에 묻혔고, 일부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생물들이 계속 태어났다.”        

”또 다시 오랜 시간이 흐른 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닮은 동물을 하나 택하셔서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아담'이라 부르셨다.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은 여자를 만드셨고, 아담은 그녀를 이브라고 불렀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그러자 그렇게 되었고, 이 최초의 쌍으로부터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퍼지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세대 후에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주변에 앗시리아인이라고 불려지는 사람들이 살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점점 사악해져 갔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단지 노아만이 의로운 사람임을 발견하였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이 패괴한 자들을 모두 쓸어버리고자 한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동물들을 데리고 내가 네게 보여주는 땅으로 옮겨 가거라. 그곳에서 내가 곧 앗시리아 지역과 그 거민들에게 닥칠 홍수로부터 너를 보호할 것이다. 노아와 그 가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고 그들과 그를 따른 동물들은 살아남았다. 앗시리아 지역에 다른 모든 사람들은 죽었고, 그 지역에 있던 동물들도 죽었다. 새들은 물이 불어나자 그 지역을 멀리 떠났다가 곧 돌아왔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점점 증대되어 점차적으로 다른 종족으로 나뉘어졌고 다른 언어들을 사용하게 되었으며 온 땅으로 퍼져 나갔다. 그들 종족 중 하나에서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의 사람을 하나님이 부르셨다......”  

이것은 창세기 1~11장의 기록을 진화론에 근거하여 재구성하여 본 것이다. 만약 지금 실제 성경을 읽는 사람이라면, 그 차이가 분명히 대조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만물을 수십억 년에 걸쳐서 창조하시고, 노아 시대의 홍수가 단지 메소포타미아 지역(오늘날의 이라크)에 있었던 국소적인 홍수였다면, 하나님은 그렇게 잘못 이해될 수 있는 기록을 성경에 남기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반대로 하나님이 만약

1) 온 우주와 만물을 대략 6천년 전쯤에 글자 그대로 6일 만에 창조하셨다면, 그리고

2) 아담이 범죄하여 모든 피조물들이 저주를 받았고 1,600여년 후 노아의 시기에

3) 전 세계는 한 번의 전 지구적인 대격변적 홍수로 심판받았으며, 그 이후

4) 민족들의 형성을 촉진시키시기 위해서 초자연적인 힘으로 바벨탑에서 다른 언어들을 창조하셨다면,


그러면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야만 한다. 만약 하나님이 이와 같은 모든 것들을 정말로 행하셨다면, 창세기에 기록된 것보다 어떻게 더 명확하게 말씀하실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성경에 당신의 말씀을 기록하셨다. 우리들은 성경이 명백히 말씀하고 있는 것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진화론자들(그리고 그들에게 현혹당해 버린 교회 지도자들과 신학자들)에 의해서 근본적으로 다른 것(오래된 지구와 진화론적 재해석)을 말하고 있는 왜곡된 창세기를 믿을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Notes

1. Thanks to Dave Prentice, a New Orleans, USA, high school science, for inspiring this article.

2. Many evolutionists within the church do not even believe in a literal first man or woman, because evolutionary theory says that populations evolve, not individuals. This not only contradicts Genesis, but also the Apostle Paul, who compared the First Adam to the Last Adam (1 Corinthians 15:45).

3. Believers in millions of years of Earth history, whether progressive creationists or theistic evolutionists, are compelled to 'water down' the Flood account into a local event. A global Food would have wiped out any geological rationale for long ages; the fossil record would then be the evidence of massive catastrophic changes, not a succession of ages.

*Terry Mortenson, B.A., M.Div., Ph.D.

Dr Mortenson's Ph.D. in history of geology is from Coventry University (UK). Having qualifications in mathematics and theology, plus 26 years' experience as a missionary with Campus Crusade for Christ, he now works full-time with Answers in Genesis (USA).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26/i4/genesis.asp 

출처 - Creation 26(4):50-51, September 2004.

미디어위원회
2005-05-20

다윈의 불법적인 발명품 

(Darwin's Illegitimate Brainchild)

Russell Grigg 


<종의 기원>의 원조가 다윈이라는 생각은 재고되어야 한다.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evolution)의 개념은 찰스 다윈에 의해서 창안한 이론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리고 그 자신도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진화의 개념을 자기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child)' 이라고 언급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은 모두가 다 사실과는 엄청난 거리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좋게 평가한다 해도 진화론은 그의 양아들에 지나지 않으며, 최악으로 평가한다면 그의 사생아였던 것이다.


에라스므스 다윈과 제임스 허튼 : 1794.

우리는 최근 판 <Creation>지에서 1895년에 <종의 기원>1에서 찰스 다윈이 주장하고 제시한 개념과 실례들은 거의 모두가 그 보다 65년이나 앞서서 그의 할아버지였던 인본주의자 에라스므스 다윈이 (1789)에서 이미 써먹은 개념이고 실례들이라는 것을 밝힌바 있다.

그런데 스코틀랜드 출신의 지질학자 제임스 허튼(1726-1797)도 일찍이 1794년에 이미 자연선택 이론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새로운 증거가 드러나고 있다. 허튼은 지구의 나이는 광대하여(수천 년이 아니라) 도저히 '측량할 수 없다' 라고 주장했던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은 그가 성경의 대홍수 내용을 거부했기 때문에, 지구 역사의 초기에 대격변은 없었다고 주장하면서 오류를 범했던 것이다.2

.제임스 허튼은 지질학자, 의사, 화학 제조자, 박물학자, 실험 농업가로 기술되고 있다.


카디프 대학(Cardiff University)의 고기후학 교수로 재직 중인 폴 피어슨 (Paul Pearson)은 최근에 스코틀랜드의 국립도서관에서 이전에 출판된 적이 없었던 2,138페이지에 달하는 3 권의 저작물을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1794년 허튼이 저술했던 저작물이었다. 제목이 'An Investigation of the Principles of Knowledge and Progress of Reason, from Sense to Science and Philosophy' 3로 되어 있다. 이 저작물에는 '종자의 변이'(seminal variation)‘4에 대한 허튼의 이론 전체가 담겨져 있었다.

그 저술 내용 중에서 하나의 예를 살펴보자. ”생존을 위해 날쌘 네 발과 예민한 시력 말고는 의지할 만한 장점이 없는 개들 속에 끼어 있는 느림보 개들은 아마도 멸종할 것이다. 그리고 날쌘 개들은 그 종족을 계속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예민한 후각이 생존에 더 필요하다”면, 그 때에는 '그 종족의 자연스러운 경향이 종자의 변이라는 동일한 원칙이 그 짐승의 성질을 변화시키고 날쌘 동작으로 먹이를 잡는 종족들 대신에 후각이 발달한 사냥개 종족을 생산할 것이다.” 라고 말하면서, 이어서 그는 ”동일한 변이의 원칙은 서식처가 숲 속이든 초원이든 상관 없이, 모든 식물의 종에도 반드시 영향을 줄 것이다”5 라고 말했다.


그 밖에 인물들 : 1831 ~ 1858

찰스 다윈보다 여러 해를 앞서서 자연선택의 주제에 관해 기사를 발표했던 저술가들이 제임스 허튼 말고도 여럿이 있었다.

윌리엄 웰즈 (William Wells; 1757-1817)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미국인 의사로서, 1813년에 (사후 1818년에 출판됨)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과 유사한 개념을 기술한 적이 있었다. ”중앙아프리카 지방에 사는 어떤 부족은 다른 부족들보다 그곳 풍토병에 적응하는 능력이 많았을 것이다. 적응능력이 미약한 부족들은 인구 수가 줄어가는 동안, 이 부족은 결국 인구 수가 늘어날 것이다.” 그는 이어서, ”이 원기 왕성한 부족은  검은 피부색을 하고 있을 것이다. 제일 검은 피부를 한 부족이 계속 살아 남아서 마침내 제일 번창할 것이다. 한 부족이 특정 지역에서 기원하여 그 곳에서 번창하는 것이 어찌 그 부족뿐이겠는가” 라고 말하고 있었다.6

패트릭 매튜 (Patrick Matthew; 1790-1874)는 스코틀랜드의 어느 과수원의 주인이었다. 그는 1831년에 출판했던 책 On Naval Timber and Arboriculture의 부록에서 자연선택과 진화론적 변화의 개념을 간단하게 언급한 적이 있었다. 매튜는 자신이 찰스 다윈을 예견해왔었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의 책 제목 위에 ‘자연선택 원리의 발견’ 이라고 써 놓기까지 하였다.  피어슨 교수는 웰즈, 매튜, 그리고 찰스 다윈 등 모두가 에딘버러 시에 있는 대학을 졸업했으며, 그곳은 ‘과학 클럽과 사교 클럽으로 유명한 곳'으로서, 제임스 허튼의 고향이기도 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또, ”찰스는 비글호의 항해에서 관찰된 다양한 종(種)들에 대한 설명을 위해, 반쯤 망각하고 있던 대학시절의 사상이 그의 마음 속에 되살아났을 것이라”3는 흥미로운 암시를 한바 있다.

에드워드 블라이드 (Edward Blyth; 1810-1873)는 아마 다윈에게 가장 큰 사상적 영향력을 끼쳤던 사람일 것이다. 영국의 화학자요 동물학자였던 블라이드는 세 번에 걸쳐 자연선택에 관한 주요한 기사를 썼다. 그 글은 1835년에서 1837년까지의 기간에 출판된 잡지 The Magazine of Natural History에 실렸다.7 찰스 다윈도 그 내용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이 잡지는 당시 선도적인 동물학 잡지 중의 하나로서, 그의 친구였던 헨스로우(Henslow)나 제닌스(Jenyns)의 기사들도 담고 있었다. 그리고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는 블라이드의 기사들이 실렸던 이 잡지들이 보관되어 있는데, 그 잡지에는 블라이드의 기사에 찰스가 직접 손으로 각주를 달아 놓은 사본들도 포함되어 있다.8


찰스 다윈의 '역사적인 소묘' (Charles Darwin's 'Historical Sketch')

1859년에 <종의 기원>을 출판한 후, 찰스는 그보다 앞서 자연선택에 관한 글들을 발표했던 이들 말고도 다른 사람들에게 지고 있던 빚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에 대해, 동시대의 학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었다. 비난의 목소리가 너무도 고조되자, 찰스는 1861년에 <종의 기원>의 제 3판의 출판에 즈음해서 이들 중 일부 학자들의 이름을 언급하는 '역사적인 소묘' ('Historical Sketch')를 부언했다. 그런 다음 그는 계속되는 비난 속에서 세 번에 걸친 후속 출판에 올린 학자들의 이름의 수를 늘리다가, 마침내 제 6판과 최종 판에서 그는 종(種)이 어떻게 기원했으며 변화했는가를 발표한바 있었던 34 명의 학자들의 이름을 언급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그 기사의 세부 내용에 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고, 다만 주제의 본론이 아닌 '역사적인 소묘'라는 장에 한정시켜 언급했을 뿐이다. 달링턴 (Darlington)은 그것을 ”일찌기 기록된 것 중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기술” 이라고 평했다.9

영국의 풍자 작가 사무엘 버틀러 (Samuel Butler)에게 이 혹평은 오히려 약과였다. 1879년, 사무엘은 Evolution Old and New를 출판하였는데, 그 책에서 그는 찰스 다윈이 뷰퐁(Buffon), 라마르크(Lamarck), 그리고 다윈의 할아버지 에라스므스의 진화론을 모독하였다고 비난했다.


표절에 대한 현대의 비난 (Modern Accusations of Plagiarism)

다윈이 다른 사람들의 이론을 도용('표절'로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하였다고 주장하는 현대의 지도자급 진화론자들 중에 한 사람으로서 故 로렌 아이슬리(Loren Eiseley)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죽기 전에 펜실바니아 대학교에서 동물학과의 역사과학 교수로 있으면서, 벤자민 프랭클린을 가르친 적이 있었다. 아이슬리는 10 여년간을 다윈의 사상이라고 일컫는 기원 이론을 추적한바 있었다. 1979년에10 그는 다윈의 저작물들이 담고 있는 주요 개념들 - 생존경쟁, 돌연변이, 자연선택, 그리고 성선택(sexual selection) - 은 ”1835년에 발표된 블라이드의 저작물” 안에 충분히 발표되어 있던 내용들이었다11고 주장하였다. 아이슬리는 또한 ”블라이디즘 (Blythisms)”을 인용하면서, 1836년판 블라이드의 출판물이 발표된 이후, 다윈은 드물게 어떤 단어들을 사용했다는 내용도 인용하였다. (예를 들어 inosculate(접합하다, 결합하다) 라는 단어를 pass into(~로 변화한다)'라는 뜻으로 사용함). 심지어 비슷한 문장 안에서 비슷한 생물체들의 목록을 다윈이 선택한 내용도12 인용했다.

아이슬리의 저작물을 읽은 20세기의 여러 진화론자들도 말할 용기를 얻었던 것 같다. 달링턴은 ”심지어 보통의 지적 완전함과도 타협되지 않는 유연한 전략을 가지고 있다”고 다윈을 비난했다.13 1981년에 호일레 (Hoyle)와 위클라마싱헤(Wickramasinhhe)는 아이슬레의 '용감한' 저항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기술했다. 

”다윈은 제 나름으로는 걸신들린 사람처럼 남의 저작물을 탐독했다. 그러나 그는 남한테서 얻은 것을 보답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리고, 증거들로 미루어 짐작컨대 [다윈이] 다른 학자들의 내용들은 고의적으로 누락(생략)시켰다는 결론 말고는 다른 결론이 있을 수 없다. 고의적으로 누락시킨 죄는 심각하다. 그런 까닭에 그 누락은 전문 생물학계에 되돌려지게 되었다.”14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자신이 블라이드와 통신을 교환하고 정보-인디언 가축의 습관, [아시아 야생 당나귀]의 튀기, 그리고 잡종 거위15에 관한-를 얻었다는 언급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이슬리가 토를 달아 한 말과 같이, 다윈은 ”블라이드를 분류(分類)학자의 역할에 한정시켜 놓고, 현장 관찰자 이상의 학자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16 다윈은 왜 자기 이론의 핵심 요소를 가지고 있는 블라이드를 그토록 인정하기를 싫어했을까? 다윈은 왜 자연선택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블라이드의 저작물을 인용하려 하지 않았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그 이유에 대한 대답은 아마도 두 가지 였을 것이다.

1. 블라이드는 기독교도였으며, 또 오늘날 우리가 일컫는 '특별한 창조주의자' 였다.  예컨대, 계절에 따라 변하는 동물의 색 (산토끼의 색은 겨울에 흰색이 되는 것과 같은)에 관한 고찰에서, 블라이드는 이 사실을 ”놀라운 설계의 실례들이다. 그것은 극명하게 그리고 강력하게 전지전능한 위대한 제 1차 원인자의 존재를 증명한다”라고 말했다.17 그리고 그는 ”동물들의 생태는 초인간적인 지혜를 나타내고 있다. 왜냐하면 동물들은 태어날때부터 그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전지전능한 창조주가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다.”18 라고 말했다.

2. 블라이드가 자연선택의 개념을 병들고 늙어 부적자로 된 자들을 생존자들로부터 제거시키는 하나의 메커니즘의 개념으로 간주한 것은 정확하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연선택을 창조된 종류에 대한 보전의 요인으로, 그리고 현상유지를 위한 메커니즘으로 보았던 것이다.19 에드워드 블라이드 (그리고 영국의 신학자 William Paley)와 같은 창조론자들은 자연선택을 속아내는 과정으로 보았다. 다시 말해서, 자연선택은 애초에는 존재하여야만 했던 여러 특성들 가운데서 특정 부분을 선택해내는 과정으로 보았던 것이다.


결론 (Conclusion)

역사는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개념을 찰스 다윈이 발견한 이론으로 치부하는 고정관념에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자연선택 그 자체는 새로운 특성들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추가적인 (유전) 정보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사실과는 별도로, 다윈에게 귀속시켰던 주요 개념들-전부는 아니지만-대부분은 다른 사람들이 출판물을 통해서 이전에 발표된 적이 있었던 것들이었다.  다윈의 머리에서 태어난 이 '아들'이 진정 그의 소생이 아님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아들은 실상 여러 아버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Reference and Notes

1. Grigg, R., Darwinism: it was all in the family, Creation 26(1):16-18, 2003.

2. Hutton's views have been summarized as 'the present is the key to past.'  Hutton's misconception is now sometimes referred to as uniformitarianism.

3. Reviewed by Paul Pearson in Nature 425(6959): 665,16 October 2003.

4. Pearson says that Hutton  'used the selection mechanism to explain the origin of varietied the idea of evolution between species as a 'romantic fantasy'

5. Quoted from ref.3.

6. Quoted by Stephen Jay Gould in Gould, S., Natural selection as a creative force, The Structure of Evolution Theory,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Massachusetts, USA, p. 138, 2002.

7. Blyth, E, The Magazine of Natural History Volumes 8, 9 and 10, 1835-1837. Sourced from ref. 8, Appendices.

8. Source: Bradbury, A, Charles Darwin-The truth? Part 7-The missing link. , 30 October 2003.

9. Darlington C.D., The origin of Darwinism, Scientific American 200(5):61, May 1959.

10. Eiseley, L., Darwin and the Mysterious Mr X, E.P. Dutton, New York. 1979, Published Posthumously by the executors of his will; from Eiseley, L., Charles Darwin, Edward Blyth, and the Theory of Natural selection. Proceedings of the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103(1):94-114, February 1959.

11. Ref. 10, p.55.

12. Ref. 10, pp. 59-62

13. Darlington, C, D. Darwin's Place in History, Basil Blackwell, Oxford, p. 60. 1959.

14. Hoyle F. and Wickramasinghe, C., Evolution from Space, Paladin, London pp.175-179, 1981.

15. Darwin, C., The Origin of Species, 6th ed. John Murray, London, 1902, pp.21, 199, and 374 respectively.

16. Ref.10. p. 52.

17. Blyth, E. (1835), ref. 7

18. Blyth, E. (1837), ref. 7

19. Wieland, C., Muddy waters: Clarifying the confusion about natural selection, Creation 23(2):26-29, 2001

* Russell Grigg, M.Sc (Hons.) was an industrial chemist before serving 20 years with Overseas Missionary Fellowship. He is a staff member of Answers in Genesis in Austra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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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명정대, 아니면 공포감? (Fairness or fear?)

.알프레드 러셀 월리스… 탐험가, 지리학자, 인류학자, 생물학자. 


알프레드 러셀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 1823-1913)는 말레이 군도에 있는 테마테 (Temate)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 독자적으로 진화 이론을 개발했다. 그 이론은 찰스 다윈의 이론과 거의 동일하였다.1 그는 1858년에 다윈에게 자연선택에 관한 필사본의 사본을 보냈다. 그 글의 제목은 'On the Tendency of Varieties to Depart Indefinitely from the Original Type'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그 글의 내용은 다윈의 진화 이론을 완벽하게 개관하고 있었다.2 찰스 라이엘(Charles Lyell)과 조셉 후커(Joseph Hooker) 같은 다윈의 친구들은 당장에 월리스의 필사본과 출판되지 않은 다윈의 두 편의 초기 이론을 묶어서 1858년 7월 1일에 개최되는 런던의 Linnean Society의 차기 회합에서 발표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 회합은 완곡하게도 '합동 논문 (joint paper)'의 발표회라고 명명됐다. 그러나 이 모든 조치는 월리스의 참석 없이 진행됐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가 알지도 못하는 중에 그리고 그의 허락도 받지 않고 진행됐었다. 사실상 월리스는 뉴기니 해안의 어느 섬에 있었던 것이다. 이 회합을 계기로 찰스 다윈은 서둘러 <종의 기원>을 탈고하고 이듬 해, 1859년 11월 24일에 출판했다. 소위 '합동 논문(joint paper)'은 다윈으로서는 공명정대하지 못한 처사였음은 물론, 차라리 월리스한테서 밀려날 것을 두려워한 공포감에서 저지른 처사였다고 보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블랙맨드(Blackmand)는 ”최초로 완벽한 기원 이론과 자연선택에 의한 분화 이론을 쓴 사람은 다윈이 아니고 월리스다. 그리고 그는 이 이론에 대한 발표의 우선권을 1858년에 강탈당했다.” 3 라고 말하고 있다.

 

References and notes

1. Wallace had been thinking on the subject as early as 1845, and had published a rather general paper on it in the Annals and Magazine of National History, September 1855, See ref. 2, p.78.

2. Eiseley says, 'It was Darwin's unpublished conception down to the last detail, independently duplicated by a man sitting in a hut at the world's end.'  Eiseley, L., Alfred Russel Wallace, Scientific American 200(2): 80, February 1959.

3. Brackman, A., A delicate Arrangement : The Strange Case of Charles Darwin and Russel Wallace, Times Books, New York, p. xi, 1980.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creation.com/charles-darwins-illegitimate-brainchild

출처 - Creation 26(2):39–41, March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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