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의 결점들을 발견하는 것이 위법인가?
(Is It Against the Law to Find Flaws in Evolution?)
Minneapolis Star Tribune 지는 미국 대법원(Supreme Court)이 생물학을 가르칠 때 진화론이 사실로서 가르쳐지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한 고등학교 생물 교사이며 코치인 로드 레베크(Rod LeVake)의 재배정 사건을 기각했다고 보도했다. 그는 수업시간에 창조론이나 종교를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진화론의 결점들을 언급하기를 원했었다. ACLJ (The American Center for Law and Justice)의 검사(ACLJ attorney)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실망스럽다....나는 대법원이나 지방법원이 이 사건을 정말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교육구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로 돌아갔다. 레베크는 과학 분야에서 진화론을 비판하는 사람들 외의 과학자들이 있다는 것을 말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교육구는 그가 한 명의 숨어있는 창조론자가 되도록 결정했다고 생각한다.”
Update 01/15/2001 : Answers in Genesis 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공공학교의 학생들은 여전히 창조론을 배우고 싶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레베크 사건에 반응하여, 1 채널(Channel One)은 학생들이 과학 시간에 어떤 견해를 배우기를 원하는지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하였다. 단지 17%의 학생만이 진화론을 배우기를 원했고, 31%가 창조론을, 52%가 두 입장을 다 배우기를 원했다. 즉, 공공학교 학생들의 83%가 과학수업 시간에 창조론이 포함되기를 원하고 있었다.
숨어있는 창조론자 (stealth creationist) : 격한 감정의 표현인가, 두려움의 표현인가? 당신은 이 말에 충격을 느끼지 않는가? 지금은 러시아의 교사들이 다윈주의를 비판하는 것에 미국의 교사들보다 더 자유롭다. 레베크는 과학수업 시간에 종교를 가르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다윈주의를 지지하지 않는 과학적 사실들을 제시하기를 원했을 뿐이다.(just wanted to present scientific facts that don’t support Darwinism). 그러한 증거들은 항상 과학 저널에 발표되고 있어왔다. 그리고 그것을 지금 여기서도 읽을 수 있다.
또한 의회에서도 학교에서 진화론과 같은 논쟁 중인 주제들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를 들을 수 있도록 하는 교육 법안을 얼마 전에 통과시켰다. 그리고 레베크는 그 결의안을 지킬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윈주의자들은 심한 피해망상증에 빠져있다. 그들은 증거들에 대한 차분한 토론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무수한 증거들이 진화론을 거부하고 있음에도, 그들은 협박 전술을 사용하고, 기원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힘으로 세뇌시키기 위해 강요하고 있다. '숨어있는 창조론자” 라는 표현은 마치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에 빗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조바심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조만간 사람들은 진화론이 마치 마약처럼 학생들에게 강제로 주사되어졌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필립 존슨(Phillip Johnson)가 옳았음을 희망할 수 있다.
"만약 내가 기술한 것처럼 상황이 된다면, 다윈주의의 지적 파산(intellectual bankruptcy)은 그리 오랜 기간 숨겨질 수 없을 것이다. 다윈주의자들은 강력한 힘을 휘두르면서 잠시 동안 최후의 심판일을 지연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점점 많은 사람들이 올바른 질문들로 압박하며, 대답을 회피하거나 속이는 것을 거부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The Wedge of Truth, Inter-Varsity Press 2000, p. 150).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creationsafaris.com/crev0102.htm#school26
출처 - CEH, 2002. 1. 9
진화론, 창조론, 유신진화론 2
<진화론의 역사>
진화론의 역사는 그리스의 물질사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밀레투스의 삼인과 아낙시만드로스(BC 611-546 고대 그리스 밀레토스 학파의 철학자.) 및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는 생명이 무기물로부터 발생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중세기에 헬몬트(Jan Baptista van Helmont 벨기에의 의학자, 화학자 1579- 1644), 뷔퐁(Georges Louis Leclerc de Buffon 프랑스의 철학자, 박물학자 1707-1788), 니이덤, 풋세 등에 의해 꽃을 피웠다. 그들은 여러 그림과 책자를 만들어 시궁창에서 쥐가, 풀잎 이슬에서 반딧불이(우리가 흔히 반딧불로 알고 있는 곤충의 정식 이름)가, 갯벌에서 문어와 뱀장어가 저절로 생긴다고 하였다. 이러한 학술적 환경 속에서 라마르크(Lamarck 1744-1829 프랑스의 박물학자, 진화론자)의 용불용설과 후천획득형질의 유전설이 탄생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다.
다윈(Charles Darwin)은 여기에 라이엘(1797-1875 영국의 지질학자)의 동일과정설, 맬서스(Thomas Robert Malthus 1766-1834 영국 고전학파 경제학자)의 <인구론>, 페일리의 자연신학, 비들(George Wells Beadle 미국의 유전학자)의 유니테리언(1773), 및 계몽사상가인 몽테스키외(Montesquieu 1689-1755 프랑스의 사상가)의 인본주의 사상을 혼합하여 생물의 진화이론을 체계화한 <종의 기원>(1859)을 발표하였다.
그가 내세운 진화론의 요지는 이러하다. 생물은 필요 이상의 자손을 낳으며 (overproduction), 그들간에 자연환경에 적응하려고 개체변이(individual variation)가 생기고, 그 개체들간에는 생존을 위한 경쟁이 일어나며(competition), 그 결과 환경에 가장 적응한 개체만이 생존하게 된다는 것이다(The survival of the fittest). 이러한 방식으로 자연은 우량형질을 선택한다고 주장한다(natural selection).
이러한 주장은 후일 약육강식에 의한 힘의 논리를 독재권력에게 정당화시켜 주는 근거로 악용되었다. 다윈의 학설은 초창기에는 많은 반대에 부딪혔으나, 영국에서는 ‘다윈의 불독’이라는 헉슬리(Thomas Henry Huxley 영국의 동물학자 1825-1895)와 독일에서는 ‘진화론의 예언자’라는 헤켈(Ernst Haeckel 독일의 생물학자, 철학자 1834-1919)의 강력한 지지를 받으며 급속히 확산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다윈주의의 모순이 속속 밝혀지면서 이를 수정하려는 많은 이론들이 등장하였다. 드브리스(Hugo de Vries 네덜란드의 식물학자, 유전학자 1848-1935)와 바이스만(August Weismann 독일의 발생학자, 유전학자 1834-1914)은 획득형질의 유전설을 부인하고 돌연변이가 진화의 요인이라는 신다윈주의(Neo-Darwinism)를 표방하였다(1902). 그러나 스펜서(Herbert Spencer 영국의 철학자. 1820-1903)와 헤켈 등은 자연도태설을 반박하고 획득형질의 유전을 주장하는 신라마르크주의(Neo-Lamarkism)를 내세워 이들과 격돌하였다. 한편 네겔리(Karl Wilhelm von Negeli 스위스의 식물학자. 1817-1891)와 에이머(Teodor Eimer) 등은 말발굽의 진화과정을 예시하며 자연계의 ‘고차원의 섭리’에 의해 정해진 방향으로 진화가 일어난다는 정향진화설(Orthogenesis)을 주장하였으나, 다른 진화론자인 심프슨(George Gaylord Simpson 미국의 고생물학자 1902-1984)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한편 소련에서는 오파린(Aleksandr Ivanovich Oparin 러시아의 생화학자. 1894-1980)이 생명이 저절로 발생했다는 화학진화설(chemical evolutionism 1936)을 다시 주장하였다. 아울러 루이셍코가 부활시킨 라마르크주의가 스탈린의 비호 하에 스탈린이 죽을 때까지(1953)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는 공산주의의 뿌리인 무신적 유물론을 수호하기 위해 학문이 이데올로기에 이용당한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진화 이론들이 1950년을 전후하여 바그너(Moritz Friedrich Wagner 독일의 생물학자. 1813-1887)와 로마네스(1848-94) 등에 의해 집단유전학으로 발전하였다. 이것은 1960년대에 심프손, 피셔, 홀데인(John Burdon Sanderson Haldane 영국의 생리학자, 유전학자 1892-1964) 및 키무라 등에 의한 분자진화설과 1970년대의 굴드(Stephen Jay Gould) 와 엘드리지(Niles Eldredge) 등에 의한 단속평형설(punctuated equilibria theory 1973) 및 이영록 등에 의한 형질발현단계설(stepwise control theory 1989)로 이어졌다.
<진화론이 끼친 해악>
이러한 진화론은 역사적으로 엄청난 재앙을 우리에게 끼쳤지만 아무도 이러한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려고 하지 않는 것 같다. 아니, 골치가 아프기 때문에 피하려 하는 듯하다. 다윈의 사촌인 갤튼(1822-1911)은 우생학을 만들어 백인 위주의 인종차별을 주도하였다.
일부 구미의 백인국가에서는 백인종과 유색인종간의 혼혈을 막으려고 유색인종에 대한 이민제한법을 제정하거나 인종개량을 목적으로 단종법을 만들었다. 신체부자유자들과 유전질환자들을 제거할 목적으로 금혼 조치를 취하기도 했으며, 이 법에 준거하여 나치정권에서는 200만 명 이상을 처형하기도 하였다.
최근(1999-2001)에는 인간게놈(human genome)의 구조가 밝혀지면서 우량인간을 복제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한데, 이는 새로운 우생학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으로 비상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인간 배아의 복제 역시 21세기의 바벨탑을 쌓으려는 위험한 시도로 간주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바이오해저드(biohazard 생물학적 위험. 사람과 그 환경에 대하여 위험시되는 생물학적 물질, 상황)를 사전에 막기 위한 생명윤리법(bioethic law)의 제정에 창조과학회를 비롯한 기독교계가 앞장서야 할 것이다.
약육강식에 의한 자연선택의 원리를 내세운 진화론은 당연히 군국주의자들에게는 약소국가를 침공할 수 있는 논리를 제공해 주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독일, 일본, 이태리에서 태동한 군국주의였다. 독일의 진화론자인 헤켈은 나치당의 전신인 툴레당(Thule Geselschaft)의 비밀요원이 되었으며(1918), 이 선서식에 참석했던 히틀러는 1933년에 정권을 잡으면서 나치강령에 진화론을 삽입하였다.
그리고 헤켈이 <생명의 신비>(1904)에서 주장한 방식대로 데게쉬사(Degesch Chemie)가 개발한 독가스(Ziklon B)가 팔벤사(Farben Gmbh)의 레버쿠젠 공장에서 만들어졌다. 2억 2천만 명을 살상할 수 있는 양이 만들어지고 32회나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 중 최악의 사례가 유태인 600만 명을 죽인 아우슈비츠의 집단학살 사건이었다.
일본에서는 명치(明治) 후기에 미국의 요구로 기독교를 허용하면서(1837) 이에 대항하기 위한 방안으로 미국의 골수 진화론자인 모스(Edward Morse) 교수를 동경대학에 초빙하여(1877) 대학생들을 진화교육으로 세뇌시켰다. 그리고 창조론을 진화론과 병행하여 교육시키려고 하였던 모리(森) 문부상이 암살을 당하는 비운을 맞기도 하였다.
그 후 일본은 진화론적 약육강식의 논리에 입각하여 국력이 약했던 우리 나라를 비롯하여 청나라와 러시아를 차례로 침략하는 제국주의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들의 침략은 곧 피침략국가의 고통으로 직결된 것이었다. 이처럼 진화론은 사랑과 공생의 원리가 아닌 힘의 논리에 의한 강자의 지배원리를 확산시켰던 것이다.
청교도 국가였던 미국에서는 진화론자들이 교육기관에서 종교의 자유를 내세워 창조론 교육을 축출하고 진화론 교육으로 대체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운동에 앞장 선 진화론 교육자인 존 듀이(John Dewey 미국의 철학자, 교육학자. 1859-1952)는 인본주의 선언(Humanist Manifesto 1933)을 초안하여 ”인간을 신으로부터 해방시키자”고 역설하였다. 그리고 종교 대신 진화론적 과학주의를 제창하였다. 바야흐로 과학주의(scientism)가 21세기의 새로운 종교로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듀이는 후일 모스크바재판(1936-1937)에서 트로츠키를 도와 준 공로로 소련정부로부터 사회주의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1963년에는 케네디 대통령이 ‘종교로부터의 자유’를 선언하여 미국의 모든 국공립기관에서 기도와 성경을 축출함으로써 결정적으로 청교도적 창조신앙을 미국의 모든 공공기관으로부터 추방하는 폭거를 감행하였다. 이에 따라 모든 공교육기관에서는 창조론적 기독교교육이 사라지고 진화론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 후 케네디 가문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비운의 풍랑 속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처럼 세속인본주의(secular humanism 1979)는 진화론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다. 미국의 인본주의협회는 말하기를 ”인본주의란 인간이 자기 운명을 만들어 가는 존재라는 신념이다. 그것은 유신론적 종교가 아니라 삶의 한 방식인 건설적인 철학이다”고 하였다. 이 협회의 창시자 중 하나이며 진화론자인 헉슬리(Julian Sorell Huxley 영국의 생물학자. 1887-1975)는 같은 책자에서 ”인본주의라는 단어는 인간이 다른 동물처럼 자연의 산물이며, 인간의 영혼과 육체는 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과 자신의 힘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을 일컬을 때 사용하는 말”이라고 하였다. 영국인본주의협회는 인본주의의 신조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신에 대해 어린이에게 가르치는 것은 비교육적이다. 종교교육은 없애야 한다...종교는 단지 역사적 관심거리로 교육되어야 한다...종교는 인본주의, 마르크스주의, 모택동사상, 공산주의를 포함한다...나는 비종교적인 도덕성을 신봉한다...나는 용서받아야 할 죄가 없으며, 무덤 너머로는 생명이 없고 영원한 죽음만이 있을 뿐이라고 믿는다”
토마스 헉슬리의 손자인 줄리안 헉슬리는 유네스코헌장(1949)을 진화론에 입각하여 작성하였다. 그는 인류가 당면한 문제(핵무기, 식량부족, 에너지고갈, 전쟁, 공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소수 엘리트집단이 지배하는 세계정부의 구성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세계정부를 이끌 세계총통의 출현을 갈망하였다.
진화론은 이처럼 유엔을 통해 전세계의 교육계로 침투할 수 있는 교두보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이제 인본주의자들에게 남아 있는 최종 목표는 소수 엘리트 집단에 의한 사회주의의 건설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반신적(反神的)인 세속인본주의는 동양의 신비주의(요가, 명상, 선)와 접목되면서 뉴에이지운동(New Age Movement)과 연계되어 오늘에 이른다.
무신론적 유물론인 진화론은 공산주의자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러시아의 민중봉기이론을 수립한 허잔(1812-70), 볼셰비키 혁명(1817)을 주도한 레닌(Vladimir Il'ich Lenin 1870-1924), 피의 숙청을 단행한 스탈린(Iosif Vissarionovich Stalin1879-1953), 그리고 중국공산당을 창건한 모택동(毛澤東 1893-1976) 등은 진화론에 입각하여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레닌과 스탈린은 다윈을 지식의 영웅으로 추앙하여 모스크바에 다윈박물관을 세웠으며 모택동은 다윈과 헤켈 및 히틀러에게 심취하여 공산당원들에게 약육강식 사상을 집중적으로 교육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금도 일부 공산국가에서는 샤르뎅의 유신진화론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은 음미해야 할 일이라 생각한다.
진화론이 끼친 또 하나의 해악은 인간존엄성의 거부와 전통윤리관의 붕괴이다. 그들은 인간이 유인원으로부터 진화한 것이라 믿기 때문에 인간존엄에 근거한 기존의 윤리관은 당연히 바뀌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진리나 가치관을 모두 상대화시켰고, 상황윤리(situation ethics)와 다원주의(pluralism)를 확산시켰다.
다원주의는 일면 합리적인 듯 보이지만 이러한 사상에서 만민구원설을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의가 출현하여 전통복음에 심대한 위협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누구를 믿든 구원을 받게 되어 있다면 굳이 예수를 믿어야 할 당위성이 사라지게 된다. 이것이 전통복음에 대한 이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밖에도 진화론은 학문을 반신적인 물질중심으로 재편케 하였다. 이러한 유물론적 풍조는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독일의 철학자 1770-1831)의 진화론적인 변증사관과 결합되면서 더욱 확산되었다. 헤겔의 제자인 포이에르바하(Ludwig Andreas Feuerbach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1804-1872)는 ”신이란 인간의 투영”이라 했으며, 영국의 인기작가인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는 ”신이란 인간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존재”라고 하였다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독일의 시인, 철학자. 1844-1900)는 마침내 ”신은 죽었다”고 선언(1882)하였다. 이 해는 다윈이 서거한 날로 <종의 기원>을 발표한지 23년이 되는 해였다. 그 후, 니체는 정신질환으로 고통을 하다가 숨을 거두었다.
신학계에서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일부 랍비들이 편집한 것이라는 문서가설(Documentary Hypothesis)이 등장하여 헤겔주의와 진화론의 영향으로 더욱 확산되었다. 고등비평론(Higher Criticism)을 주장한 독일의 자유주의신학자 벨하우젠(Julius Wellhausen 독일의 신학자, 역사학자, 셈어(語)학자. 1844-1918)은 인간은 원숭이로부터 진화했다고 공공연히 주장하였다. 브리태니커의 편집인으로 부임한 윌리엄 스미스는 재위 14년간 19판을 인쇄하면서 이러한 문서가설의 확산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영향으로 유신진화론은 날개를 단 듯 세계 각지로 확산되어 나갔다.
<왜곡으로 점철된 진화론>
많은 진화이론은 조립, 조작, 사기극으로 점철된 것으로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인류의 조상이라는 호미노이드(라마피테쿠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호모 하빌리스, 호모 에렉투스 등)의 유골들은 조립된 것이 많다.
라마피테쿠스는 오랑우탄의 뼈로 , 네브라스카인의 어금니는 맷돼지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호모 하빌리스는 원숭이의 유골이었다. 호모에렉투스에 속하는 자바인과 북경인의 경우도 유사하였다. 자바인은 발견자인 듀보아(E. Dubois)가 고백했듯이(1937) 긴팔원숭이였다. 북경인도 원숭이의 뼈들을 조립한 것이었으며 대개의 유골들은 여러 번에 걸쳐 진화론자들에 의해 어디론가 증발되었고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어금니 두 개 뿐이다.
더 나아가 필트다운인의 것은 오랑우탄과 사람의 유골을 조립한 후 오래 된 것처럼 보이려고 치아를 줄톱으로 갈고 뼈들은 중크롬산카리액으로 염색한 사실도 드러났다(1953). 이러한 사기극을 주도한 사람의 명단에는 발견자인 우드워드(A. S Woodward)와 도오손(C. Dawson) 외에도 '1차 진상조사위원”이었던 아서 케이스(1866-1955)를 비롯하여 예수회 신부인 샤르뎅(당시 30세), 그리고 진화론에 심취하여 소위 ‘잃어버린 세계’(유인원의 세계)를 찾아 나섰던 인기 작가 코난 도일도 들어 있다.
샤르뎅은 이 밖에도 북경인의 유골조작과 로데지아인의 두개골에 있는 총탄구멍(?)을 메운 그림을 발행하기도 하였다. 그는 바이덴라이히와 더불어 석회채굴업자들이 남긴 잿더미(7m)를 흡사 북경원인이 처음으로 불을 사용한 흔적인 것처럼 오도하는 일에도 앞장을 섰다. 그들의 주도로 한 진화론자 화가가 그린 불을 사용하는 북경인의 걸개그림이 대영박물관 입구에 내어 걸리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진화론자들이 제시한 유인원의 두개골 용적은 실측한 것이 아니라 진화이론에 부합하도록 임의로 책정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행위는 진화론자들의 과학을 빙자한 비과학적 행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다윈을 도와 진화론의 확산에 기여했던 헤켈(1834-1919)은 인간이 원숭이에서 진화했다는 근거로 저 유명한 ‘배발생도’를 제시하여(1866) 지금도 세계의 많은 교과서들이 이를 싣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은 헤켈이 섬세하게 조작한 것임이 드러났다. 이러한 사실은 그 자신이 신문기자들에게 ”6-7%를 조작했을 뿐”이라고 한 고백에서도 입증되었다. 계속된 연구결과들은 헤켈이 6-7%가 아니라 엄청나게 조작했음을 밝혀 내었다. 뿐만 아니라 이 그림은 최근(1970)에 다른 진화론자인 리키가 최신 화보집을 발간하면서 재조작하였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이처럼, 진리 아닌 것이 진리를 위장하고 정의 아닌 것이 정의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만큼, 우리에게 주어진 책무가 크다는 의미일 것이다.
<유신진화론의 역사>
유신진화론의 정의와 범위는 아직 애매한 점이 많다. 이 단어가 내포하듯이 ”유신진화론은 하나님이 자연법칙에 따라 진화론적으로 우주만물을 만드셨다는 이론”이라 할 수 있다. 창조주를 믿으면서 진화론도 수용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창세기와 진화론을 연계시키려는 목적에서 시도된 것이다. 유신진화론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콘셉은 진화론의 그것과 맥을 같이 한다. 예컨 데, 우주만물의 진화, 진화에 필요한 긴 지질연대, 각 지질연대에 부응하는 지층과 생물화석의 형성, 유인원으로부터의 인간진화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유신진화론의 범주에 진화 자체를 주장하진 않았다 하더라도 긴 지질연대를 상정하는 간격설과 날-연대설은 물론, 생물의 진화를 주장하는 진행적 창조론, 및 창세기의 내용을 비유나 신화로 폄하하고 있는 비복음주의적인 골격가설을 포함시켜 기술하고자 한다. 이러한 견해는 미국 창조연구소(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의 설립자이면서 창조과학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헨리 모리스의 <과학적 창조론>에 근거한 것이다.(Scientific Creationism, 16th ed. pp 215-255, 1991)
유신진화론의 기점을 잡는 일 또한 애매한 점이 많다. 그러나, 유신진화론의 큰 사상적 뿌리는 어거스틴을 비롯한 일부 교부들의 6일에 대한 기간적 해석과 삼위일체설을 부인한 아리우스주의(Arianism)에서 찾아야 하리라 생각한다. 여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관에 영향을 받은 스콜라철학(Thomism), 근세의 자연주의(naturalism), 큐비에의 다중격변설(multiple catastrophism), 그리고 비들의 유니테리언(uniterianism), 벨그송의 생의 철학 등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요인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초대의 일부 교부들이 유신진화론자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6일에 대한 기간적 해석은 후일 동일과정설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루터는 일부 교부들의 그러한 해석태도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였다.
한편,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삼위일체설을 부인하여 니케아종교회의(327)에서 이단으로 정죄를 받게 되자 동유럽(폴란드, 헝가리)등지로 잠복하였다. 이들은 종교개혁시 루터교로 잠시 침투했으나 다시 영국과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그들의 영향을 받은 비들(1615-1662)은 영국에서 유니테리언 교회(Uniterian Church 17C)를 설립하였다.
이들은 삼위일체를 부인하고 사회적 이슈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자연현상이란 이성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모든 기적들을 부인하였다. 또한 설립 초기에는 유니테리언의 기치 아래 개별행동주의를 표방하였다. 이들의 세력은 소수였으나 매우 영향력 있는 지도급 인사들이 많았다.
경험주의 철학자인 로크를 비롯하여 고전물리학을 완성한 뉴튼, 산소의 발견자 프리스틀리, 인기작가인 밀턴과 에머슨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런던에 첫 교회(Uniterian Universal Church, 1773)을 세웠다. 그 후 보스톤에 세워진 킹스채플(King's Chapel, 1793)은 미국 유니테리언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다윈은 어린 시절부터 프리스틀리가 다녔던 유니테리언교회의 교인이었고, 그의 외가 겸 처가인 웨지우드 가문(Wedgewood family)도 골수 유니테리언이었다. 다윈의 가문은 대를 이어 명문인 웨지우드 가문과 겹사돈 관계를 맺었다. 이는 우량 가문간의 결합으로 좋은 자손들을 얻으려는 진화론적 발상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찰스 다윈의 10명의 자녀들은 막내(Leonard Darwin)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불구자이거나 어려서 죽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는 진화론적 우생학의 허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다윈 자신도 진화론을 구상한 시기(1838년경)부터 정신적 질환에 시달렸으며, 말년에는 얼굴에 번진 습진때문에 그 유명한 수염을 기르게 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유니테리언 사상은 문서가설과 진화론의 탄생에 크게 기여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윈의 진화론이 발표된 이후, 진화론과 문서가설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빠른 속도로 구미제국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사상들은 먼저 영국성공회 내로 침투하였다,
자유주의 신학자이면서 진화론자인 스미스(W.R. Smith)는 브리태니카의 주필이 되어(1881) 14년간 19판을 발행하면서 문서가설을 적극적으로 홍보, 확산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 결과, 성공회를 비롯한 기독교계가 유신진화론으로 급속히 물들어 갔다. 1890년경에는 구미 신학교의 요직이 문서가설을 신봉하는 유신진화론자들에 의해 독점되었고, 복음주의자들이 한직으로 밀려 나면서 창조론적 복음주의는 급속히 약화되었다.
미국에서는 다윈의 친구이면서, 유니테리언 신자인 부인의 영향을 받은 아사 그레이(1810-88)가 창조론적 고생물학자인 아가씨즈(1807-75)와 논쟁하였다. 불행스럽게도, 아가씨즈가 먼저 서거하는 바람에 하버드대학은 미국에서 가장 먼저 유신진화론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뒤이어, 그레이의 영향을 받은 스미스소니언의 초대관장을 지낸 제임스 다나(1813-95)가 퓨리탄 신앙의 본거지인 예일대학을 유신진화론으로 물들게 하였다. 그는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하였다고 선언하였다. 이어서, 프린스톤대학이 구이욧(1807-84) 등에 의해, 맥길대학이 도손(1820-99) 등에 의해 날-연대설을 수용하면서 유신진화론으로 옷을 갈아 입었다. 대부분의 신학교들도 유신진화사상으로 바뀌어 갔다. 미국의 교계 역시 인기있는 대중 설교가인헨리 비쳐와 포스딕(1878-1969) 등의 영향으로 진화사상으로 급속히 물들어 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유신진화론의 성립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챨머스(1780-1847)가 간격설(1814)을 제기하면서 부터라 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론을 더욱 정교하게 발전시킨 펨버의 이론이 스코필드주석성경에 소개됨으로써(1917) 간격설은 마침내 일반 대중속으로 널리, 그리고 깊속히 침투하게 되었다.
유신진화론의 위험성은 이들이 교회와 신학교에 진화사상을 퍼뜨림으로써 범신론적 자연주의와 물질주의를 확산시킨다는 데 있을 것이다. 유신진화론은 간격설로부터 날-연대설, 골격가설, 진행적 창조설 등으로 다양하게 발전되어 오늘에 이른다.
*참조 : Creation Compromises : Framework Hypothesis, Gap Theory, Progressive Creation, Theistic Evolution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3055
<신간> 예수와 다윈의 동행 - 신재식(호남신학대 신학과 교수) (2013. 7. 31. 연합뉴스)
http://www.yonhapnews.co.kr/culture/2013/07/31/0903000000AKR20130731125700005.HTML
진화론을 믿는 크리스천 과학자가 있다고? (2009. 6. 19. 오마이뉴스)
[서평] 우종학 박사의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159342
'창조의 방법으로 진화를 사용하셨다” (2015. 2. 10. 기독신문)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90276
링크 - http://www.kacr.or.kr/databank/document/data/evolution/e3/e31/2002_130_3.htm
출처 - 창조지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779
참고 : 5462|5461|5413|5272|5211|5210|5112|4766|4765|4636|4635|4542|4140|4039|3077|3426|3812|3244|3241|3041|3039|3037|3024|2864|2579|2359|2307|2114|2039|2016|1174|6107|6110
인본주의자 선언 2000 에서 언급된 현대 무신론
Bob, Gretchen Passantino
'천국이 없다고 상상해보자 (Imagine there's no heaven)'
제 1부
(이 논설은 최초로 Christian Research Journal 의 Vol. 22/No.3 Issue에 발표되었다. )
존 레논 (John Lennon)이 지금은 유명해진 자기 노래의 가사를 처음 창작하고 있을 때, 그는 하나님을 부정하기보다는 인간의 노력을 통해서 평화와 번영, 그리고 나눔을 지향하는 지구의 황금시대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었다. 상상해보자─만약에 남자와 여자가 서로 나누는 사랑이 그토록 충족되어 남의 사랑을 탐낼 필요가 없는 사랑. 상상해보자─다양한 문화의 혼재를 인정함으로써 전쟁이 근절된 세계를. 상상해보자─남자와 여자 그리고 어린이들이 생물학적 사회학적 진화를 거쳐 생육된 동일한 보편적 인간의 권리에 기쁘게 헌신하는 세계를. 우리가 이곳에 이상향(Utopia)을 보장받고 있으며, '우리가 삶을 영위하고 있는 세계가 하나인데', 별도로 하나님, 또는 천국을 필요하다고 할 사람이 누구겠는가?
이런 것들이 하나님이나 초자연적인 존재, 그리고 사후의 삶이 진실이 아니고, 또 부적절하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상상하는 세계의 정확한 모습들이다. 비종교적인 세계관이 보다 더 광범하게 받아들여지고, 더 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는 지금, 크리스천들은 저 사색적인 비종교인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현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 여부에 관한 문제를 어떻게 접근하려 하는지를 재평가해 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하겠다.1 흔히 '인본주의(humanism)' 라고 불려지는 그들의 운동은 무신론자(atheists), 불가지론자(agnostics), 회의론자(skeptics), 그리고 의심하는 자(doubters) 들로 구성되어있다. 인본주의 운동은 그 자체의 철학적 논거와 정치적 행동주의, 그리고 크리스천들과의 실제적인 대결에 있어 점점 더 복잡하게 세련되고 있다.
인본주의자들에게 보다 명료하게 복음을 이해시키고 복음과 교통하게 하는 일이야말로 변증론(apologetics)이 하여야할 중요한 의무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세상에 나가 모든 족속들을 '제자로 삼으라고'2 명령하셨을 때, 그는 믿는 자들보다 지적으로 우수하다고 자처하는 자들을 배제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기에 회의론자와 철학적 사상가를 위하여 죽으셨음은 너무도 당연하다.
용어의 정의
하나님에 관한 회의론자들은 '무신론자(atheist)' 즉,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 는 것을 믿는 사람이라는 딱지를 수용하기를 점점 꺼리는 경향이 있다. 회의론자들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 는 정의를 수용하게 되면, 무신론자(atheist)가 되어 공격에 취약해진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무신론자를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정의하는 대신에 믿음의 결여로 정의한다.3 이 조직은 저변을 확대하여 어떤 신이나 초자연적인 현실에 관련된 것을 배제하는 다른 용어들을 포함한다.
”세속적 인본주의자는 전형적으로 스스로를 무신론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다든지, 신의 존재 가능성에 관해서 확신이 없는)로 묘사한다. … 세속적 인본주의자는 문제해결과 행동의 선도(先導)를 위하여 신의 힘이나 초자연적인 힘에 의지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그들은 윤리적/도덕적 기초의 형성과 삶의 의미를 창출하기 위하여, 이성과 역사의 교훈, 그리고 개인적인 경험의 적용에 의지한다.” 4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사람으로서 '무신론자' 라는 꼬리표를 지키려는 노력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무신론자 (Atheist)
첫 번째로, 무신론자는 '보편적 부정(universal negative)'을 증명하는 문제에 봉착한다. 보편적 부정은 실제로 적용하기가 매우 어렵다.5 (하지만 언제나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세상 어디에도 흰색 까마귀는 없다는 사실을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증명하기 위해서는 세상 모든 곳을 철저하게 동시적으로 (조사를 위해 접근할 때 날아가 버릴 수도 있겠기에) 조사하여야할 것이다. 유추컨대,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다면, 물질 세계와 비물질 세계에 관한 무한한 지식과 존재의 두 상태를 '초월한' 것으로 가정되는 그 어떤 것에 대한 무한한 지식을 실질적으로 모두 알고 있어야할 것이다.
두 번째로, 무신론자는 지성적인 설계자가 있음을 가리키는 경험적이고 과학적인 풍부한 증거를 세우기 위하여 보다 나은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한다. 이 실체 (지성적인 설계자)는 생산된 우주보다 반드시 더 커야만 할 것이다.
세 번째로, 대부분의 무신론자들은 물질주의자들로서, 오직 물리적 우주만이 현실이라고 믿고 있다. 그들은 수(數), 도덕적 가치, 이념, 그리고 양심과 같은 비 물질적 실체들의 존재에 대해 적절한 정의를 내리지 못한다. 다른 이유 때문도 있지만, 이 이유 때문에 대부분의 불신자들은 '무신론자' 라는 딱지를 회피한다.
불가지론자 (Agnostics)
위에서 언급된 하나님-의심자들은 '회의론자' 라는 용어를 비신론자 (nontheist)라는 뜻과 동일하다고 생각되는 '불가지론자'로 재정의한다. 어쩌면 그들은 어떤 신, 또는 신들의 존재를 믿는 길로 인도하게 할 '지식을 거의, 또는 전혀 갖지 못하고 있다' 는 뜻으로 스스로를 그냥 '불가지적'이라고 표현되기를 선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불가지적'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고안한 헉슬리 (T. H. Huxley)는 사람은 ”이성이 미치는 한계까지” 이성을 따라야한다라고 하면서, 브리태니가 백과사전 이 지적한 바처럼, ”인간은 자신의 지식의 한계를 솔직하게 인식한다.” 6 라고 부언했다. 비록 우리는 이 글에서 불가지론 이론을 특별히 하나님의 존재에 관해서만 언급하려 하지만, 불가지론 이론은 다양한 세계관 분야에 제한적으로나마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불가지론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수 있게 할만한 충분한 정보를 갖지 못했다고 변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정보를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을 수도 있을 것이며, 따라서 장차 언젠가 그들도 갖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부류의 불가지론자들과의 대화는 쉬운 편이다. 그것은 그들이 새로운 이론이나 증거에 대한 평가에 열린 마음 자세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부류의 불가지론자들은 복음에 마냥 거부적인 자세가 아닐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신념을 바꾸는 것을 꺼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부류의 불가지론자들은 현재로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장차 언젠가 (예컨대, 과학이 충분하게 발전하였을 때, 또는 인간이 지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충분히 진화하였을 때가 오면) 알 수도 있을 것이라고 공언한다.
또 어떤 불가지론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안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일” 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하나님은 너무도 '다른 존재 (other)', 즉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지하기(to know)'에 전혀 불가능한 존재로 치부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들은 이런 비유로 논쟁을 펼칠는지도 모른다. 즉, 달팽이가 수학공식을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남자가 여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를 안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하나님을 이해한다든가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또 다른 부류의 불가지론자들은 인간의 언어는 물질 세계에서 쌓은 인간의 경험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래서 그것은 물질 세계의 사물들을 기술하는데 한정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비물질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할 수 없을뿐더러, 하나님도 당신의 존재를 우리 인간들에게 전달할 수 없다. 이들 뿐만 아니다. 여전히 또 다른 불가지론자들은 우리들은 실험할 수 있는 것만을, 그런 의미에서 오직 실험실에서 실험되는 것들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비물질적이기 때문에 (만약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는 실험적으로 식별이 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존재를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 마지막으로 예를 든 두 부류의 불가지론자들이야말로 대화하기에 가장 어려운 상대들이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도 우리는 기독교 교리의 주장을 숙고하여 보도록 도전장을 건네 볼 수 있다. 사람이라면 언제 어디에 있건 모두가 양심을 가지고 있기에 하나님의 능력과 그의 창조의 지혜와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될 것이다. (로마서 1:20-32, 2:14-15를 참조하시오.)
회의론자 (Skeptics)
하나님-의심자들은 때때로 자신들을 '회의론자' 라고 말한다. 이들은 대상이나 이념, 또는 사건들을 만나는 족족, 아무런 편견이나 선입관 또는 세계관도 없이 제 나름으로는 중립적인 입장에 섰다면서, 신랄하게 분석하려 든다. 회의론자와 관련이 있는 용어로 '합리주의자 (rationalist)'가 있다. 이들은 그냥 직관, 경험, 또는 감정이나, 아니면 남의 지령에 따르는 대신, 이성에 의해서 결론에 도달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심자들이 자신들을 '합리주의자' 라고 호칭할 때, 그들은 사람이란 합리적인 동시에 종교적일 수는 없다는 전제를 가정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이 가정은 허구인 것이다.
크리스천은 성경의 말씀, 즉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데살로니가 전서 2:21-22) 라는 가르침에 따라 '회의적' 이고도, '합리적 유신론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相考)하여야” (사도행전 17:11) 한다7. 유태종족이나, 무슬림, 그리고 크리스천이 다 받아드리고 있는 히브리어 성경은 증거채택의 기준, 다시 말해서 회의적 심문을 강구하고 있는데, 이 기준이야말로 오늘날의 대부분의 법률체계의 근거가 되어있는 것이다, (예컨대 신명기 17:6, 19:15). 예수님도 이와 같은 건전한 회의론의 원칙을 거듭거듭 가르쳤던 것이다. (마태복음 18:16, 요한복음 5:31-47, 8:14-18).
하지만 인본주의자가 자신을 회의론자라고 표현할 때엔, 그는 어떤 특정한 종류의 회의론자라는 뜻을 의미한다. 특히 이 문제의 토론에서, 그는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물질세계의 현실에서 하나님의 존재는 당치도 않고, 어떤 경우에도 탐지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만약에 존재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 세계에 간섭할 능력이 없다는 ”전제를 이미 견지하고 있는” 회의론자이다.
인본주의자 (Humanists)
이들과 비슷한 철학을 가지는 부류들을 묶을 수 있는 어떤 하나의 포괄적인 그룹이 없는 가운데, 대부분의 하나님-의심자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용어는 '인본주의(Humanism)' 이다. 비종교적인 인본주의자들을 대변하는 '신 인본주의자 선언 2000 (The New Humanists Manifesto 2000)' 에서 '그들 자체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신 프런티어로 진출하기 위하여 인간의 능력에 대한 신념을 새롭게 한다.' 라고 선언하였다.8 때때로 인본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세속적' 인본주의자로 정의를 내린다. 즉, 그들은 어떤 종교적 신앙도 갖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종교 행위도 종교 연구도 하지 않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들의 정의는 더 나아가 '인본주의자는 초자연적, 권위주의적, 반민주적 신앙이나 이념을 거절한다.'9 라고 결론내리고 있다. 이 선언에 담긴 세속적 인본주의의 인본 사상은 넘치도록 명백하다:
”초자연주의로부터 자유로운 입장에서 세속적 인본주의는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인식하고 모든 가치─종교적, 윤리적, 사회적 또는 정치적 가치 어느 것이든 상관없이─는 그 원천을 인간의 경험과 문화에 있다는 생각을 견지한다. 그런 까닭에 인본주의는 인생의 목적을 신학적 또는 이념적 추상개념에서 찾기보다는, 인간적 필요와 흥미에서 도출하려고 하면서 인간은 스스로의 운명에 책임을 질줄 알아야한다고 단언한다.” 10
기독교적 회의론자와 합리주의적 크리스천이 있듯이, 비록 매우 제한적인 의미이기는 하지만, 기독교의 유지자라는 세계관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도 창조적이며 완성하는 존재라는 맥락 속에 인본주의의 위치를 설정한다. 그렇지만, 훨씬 더 일반적으로 쓰이는 인본주의자라는 용어는 삶의 의미와 개인적 완성을 인간들 안에서 또는 그들 사이에서 추구하면서, 하나님을 포함한 어떠한 초자연적인 존재와는 상관하지 않는 하나님-의심자를 가리킨다.
크리스천이 인본주의자 (무신론자)의 세계관에 접근하다.
우리가 인본주의자 또는 하나님-의심자에 접근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 있다. 첫 번째 방법은 인본주의자의 인생철학과 그 원천을 검토하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합리적 찬반토론을 검토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인본주의자의 주장을 비평하는 동시에 우리 자신의 신앙을 방어하는 양면작전이어야 한다.
우리는 인본주의자의 세계관을 조심스럽게 살피면서, 그 속에 어떤 합리적인 또는 증거가 확실한 정당성이 있는지를 발견하려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진리를 발견하기 위한 합리적 탐구에 의존하는 인본주의자라면, 합리적 탐구에 대한 그의 신념 속에 어떤 정당성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 사람이 자기 이론에 합리적 이유가 있는가?, 혹은 자기 이론을 맹목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합리주의자들은 ”이성은 정당하다”, 또는 ”이성은 물질의 본질적 성질이다”, 혹은 ”이성은 진화의 생존 메커니즘이다”라고 대답하는 인본주의자들은 자신의 세계관에 대한 적절한 정당성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을 인정할 것이다. 합리적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성을 주셨기 때문에 이성을 진리발견에 쓰일 연장으로서 신임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대비해서, 이성이 신임을 받을 만 하니까 이성을 신임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어느 쪽이 더 합리적인가?
지도자들과 그들의 신념들
폴 커츠(Paul Kurtz) : 인본주의자들의 21 세기에 대한 근본적 주장은 인도주의 선언 2000 (Humanist Manifesto 2000; HM2K) 속에 포함되어있다. 이 주장은 세계적인 세속적 인도주의들의 선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폴 커츠가 제창한 것으로서, 그는 종전의 인본주의자 선언문을 작성하고 공표하는데 크게 도움을 주기도 했었다.
*Paul Kurtz is Professor Emeritus of Philosophy at the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at Buffalo, founder and chairman of the Committee for Scientific Investigation of Claims of the Paranormal (CSICOP), the Council for Secular Humanism, and Prometheus books. He is a former Co-Presidient of the International Humanist and Ethical Union (IHEU). BA, New York University; MA and Ph.D., Colombia University. He is a fellow of the American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 and Humanist Laureate and President of the International academy of Humanism.11
그 외에 다른 HM2K 지도자들
HM2K에 서명자들은 광범위한 학계의 여러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그의 저서, '눈먼 시계공 (The Blind Watchmaker: Why the Evidence Reveals a Universe without Design)' 으로 유명한 영국 과학자로서 1990년에 영국 왕립협회(the British Royal Society)로부터 ”과학을 일반 대중들이 이해하는데 크게 기여한 과학자”에 수여하는 마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 상을 받았다.12 다른 서명자들로는 고인류학자 리처드 리키(Richard Leakey), 물리학자 헤럴드 크로토(Harold W. Kroto), 국제우주대학 총장 아더 클락(Arthur C. Clarke), 화란의 생물물리학자 옌스 스코우(Jens C. Skou), 화학자 마리오 몰리나(Mario Molina), 그리고 허버트 하우프트만(Herbert Hauptman), 등 그밖에 많은 노벨상 수상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무신론자들 가운데 한 사람의 별종 : 매덜린 머레이 오헤어 (Madalyn Murray O'Hair)
위에 거명된 학자들은 더 활동적이었던 전 세대의 몇몇 무신론자들과 상당히 대조적이다. 미국 무신론자들(American Atheists)의 발행자인 매덜린 머레이 오헤어는 지성적인 행적보다는 종교의 공개적인 활동을 반대하기 위하여 서슴없이 내뱉던 터무니없는 폭언에 가까운 거친 언행으로 인해서 더 많이 알려졌던 사람이다. 그녀의 아들이 연루된 그녀의 송사가 1959년에 대법원의 판결을 받았던 일로 인해서, 그녀는 1963 년에 들어서서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Marray v. Curtlett 에서 법원은 공립학교에서의 필수적 기도 시간을 불법이라는 판결을 내렸던 적이 있었다. 이 사건이 머레이로 하여금 종교로부터 자유로운 미국을 창조하기 위해 30 년이 넘도록 사회활동에 발벗고 나서게 된 동기가 되었다. 머레이는 빈번하게 공개 토론에 참여하여 목청껏 기독교 교리를 비난하고 무신론 운동을 옹호하였다. 그녀는 종교 없는 미국 사회를 옹호하기 위하여 소송을 제기하면서, 미국의 지폐와 화폐에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 안에서 (In God We Trust)” 라는 글귀를 삭제하라고 요구하였다.13
그녀는 유사한 이념 조직들을 거의 예외 없이 소원케 하고 말았던 것 같다. '미국무신론자(American Atheists, 오헤어의 단체)' 와 '무신론자 연합(United Atheists)' 은 물론 '종교로부터의 자유 재단 (Freedom from Religion Foundation)' 과의 사이에 오랜 동안 지속되던 반감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어떤 동료 무신론 비평가는, ”그녀는 누구보다도 가장 빈번하게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비속한 행동이 멋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됐던 것이죠. 그리고 말입니다. 비속어를 사용하면서 어떻게 점잖을 수 있겠습니까? -욕지거리 말입니다.” 14 한 때는 그녀의 AA 회원 수가 75,000 명이 넘는다고 호언한 적도 있었으나, 정확하게는 대략 5,000 명 언저리에서 왔다 갔다 했을 것이다.
1995 년 그녀와 그녀의 친족 일단은15 그녀가 거느리던 여러 조직체의 자산에서 큰 몫을 챙겨 가지고 잠적하였다. 나중에 그들은 살해 된 것으로 판명되었다.16 저널리스트 루이 두보우스 (Louis Dubose)는, ”그 여자는 두둑한 배짱에, 겁도, 절조도 없었으며, 비속하고, 용감했다... 세상에서 가장 미움을 받던 부인으로서 보기에는 쾌활한 여인네로 알려졌었다.” 17 고 평했다.
그 밖의 기라성 같은 무신론자들
폴 쿨츠(Paul Kurtz)처럼 철학적 소양으로 해서 유명한 학자들이나, 매덜린 머레이 오헤어처럼 방종한 분노 표출 때문에 알려진 자들과 같은 무신론자들이 하나님의 존재의 모든 증거들에 대한 독단적 부정과 물질적 세계관의 우월성에 대한 숭배라는 그들의 공동 이념으로 인해서 한데 뭉쳤다. '무신론 인사들(Atheist Celebrities)' 웹 사이트에는 저명한 무신론자들이 관련 문서자료들과 함께 명단이 등재되어 있다. 그 중에 철학자로는 Thomas J. Altizer, Paul and Patricia Churchland, Paul Edwards, Antony Flew, Michael Martin, Kai Nielsen, 과학자로는 Fracis Crick, Richard Leakey, Stephen J. Gould, 정치가로는 Fidel Castro, 유명인사로는 Woody Allen, Ingmar Bergman, Bill Blass, Marlon Brando, Warren Buffett, George Carlin, Dick Cavett, George Cloone, Patrick Duffy, Katherine Hepburn, Arther Miller, Jack Nicholson, Penn and Teller, 사업가로는 Bill Gates, 그리고 그밖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들 - 또한 악명높은 인사들까지 Larry Flynt, Bob Guccione, Derek Humphry, Kack Kevorkian, Marily Manson, Howard Stern 등이 있다.18 기타 이름있는 무신론자/인본주의자로서는 Michael Shermer, Dan Barker, Jim Pippard, 그리고 Steve Allen 도 포함되어 있다.
인본주의자의 신념 선언 (Humanists Statements of Belief)
인본주의자들이 선언한 많은 신념들 가운데서 어떤 일정한 주제들만은 거의 보편적이라고 할 만큼 빠지지 않고 포함되어있다. 그것은 이런 것들이다. 즉, (1) 하나님의 존재 그리고, 또는 초자연적인 존재는 기껏 해봐야 적절하지도 않고 또 알 수도 없다. (2) 인간의 의미성과 인간의 완성은 인간만의 노력을 통해서 달성할 수 있다. (3) 종교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현실에 관한 지식을 획득하고 성장시키려는 순수한 인간의 노력에 정반대 입장에 있다. 그리고 (4) 물질(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존재만이 우리가 알 수 있고 또 경험하는 유일한 현실이다.
그런 다음, 문제가 하나님 즉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신앙 또는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에 대한 것에 관련되면, 인본주의자들은 중립적인 태도를 버린다. 인본주의자는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증거들을 인정하는 모든 종교적 신앙을 특히 기독교 신앙과 종교행위를 포함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반대한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왜 인본주의자들이 자신들이 세운 가정들이 합리적이라고 믿는지, 그리고 왜 크리스천들과 다른 종교 신봉자들에 대한 자기들의 반감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믿는지를 조사하려한다. 우리는 그들의 주장들이 실패할 것임을 곧 알게 될 것이다.
'미국무신론자들(American Atheists)'는 우리가 이미 위에서 간단하게 기술한 정의들과 궤를 같이하는 철학이념을 선양한다. 현재의 American Atheists의 행동강령은 다음과 같다.
”무신론자는 신을 사랑하는 대신에 자신을 그리고 동료 인간을 사랑한다. 무신론자는 지금 우리가 공헌할 수 있는 이곳─여기 이 지구 위에서─모든 인간이 다 함께 즐기기 위하여 우리가 일 할 수 있는 이곳을 천국으로 받아들인다. 무신론자는 기도를 통해서는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러나 무신론자는 삶을 맞아, 삶과 맞붙어 싸워, 삶을 굴복시키고, 삶을 즐기게 할 수 있는 내재적 확신과 힘을 자기 자신 안에서 찾아야한다는 명제를 받아들인다. 무신론자는 오직 자기 자신을 알고, 동료 인간을 알고 나서야 삶의 완성을 도울 수 있는 이해력을 발견할 수 있다고 인식한다.”19
다른 인본주의 단체들은 이와 유사한 반복구절을 그들의 결정적인 선언에 삽입한 것이 보인다. 종교로부터의 자유 재단 (The Freedom from Religion Foundation)은 이렇게 선언한다 :
”어느 누구라도 성경과 사도신경을, 또는 메시아를 따르라고 요구하는 사람은 자유사상가가 될 수 없다. 자유사상가한테는 계시나 신앙은 가치가 없으며, 종교를 신봉하는 것은 진리로 가는 길을 보장하지 못하게 한다...”
”자유사상가는 자연주의자이다. 진리는 지론(持論)과 현실의 합치의 정도 만큼이다. 현실이란 직접적으로는 우리의 오관을 통해서 인식이 가능한 한도이고, 간접적으로는 이성의 적절한 사용을 통해서 확인되는 한도이다...”
”의미는 반드시 마음속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자유사상가는 안다. 우주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우주체계는 괘념하지 않기 때문에, 당신이 만약에 목적을 가지려한다면 당신 자신이 괘념하여야 한다...”
”자유사상가는 종교의 주장이 이성의 시험을 이겨내지 못하였다고 확신한다... 대부분의 자유사상가는 종교가 진실이 아닐 뿐만 아니라, 유해하다고 간주한다. 종교는 전쟁, 노예제도, 성차별, 인종차별, 호모혐오, 문서훼손, 좁은 도량, 그리고 소수 민족에 대한 억압 등등의 정당화에 사용되었다. 종교적 절대라는 전제주의가 진보를 압살한다... 세속적 인본주의는 그 어떤 신도, 성경도, 구세주도 가지지 않는다. 세속적 인본주의는 합리적 자연 원리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것은 신축적이고도 상대적이다. ─ 즉 그것은 종교가 아니다.” 20
미국 무신론자 협회(The American Atheists Association)은 '우리는 교-정 분리를 위해 일한다. 우주를 이해하기 위하여 신이나 초자연적인 존재에 묻지 않고 과학과 철학을 이용하며, 유신론적 신앙을 수용하지 않는 사람들의 권익을 지적으로 옹호하기 위하여 나선다.' 21 라고 선언한다.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세속적 인도주의 평의회 (Council for Secular Humanism)는 '원리의 선언'을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우리는 비관주의보다는 낙관주의를, 절망보다는 희망을, 교의의 자리에 교습을, 무지대신에 진리를, 유죄판결이나 죄지음보다는 기쁨을, 공포의 자리에 관용을, 증오대신에 사랑을, 이기심보다는 동정심을, 추악한 것 대신에 아름다움을, 맹신이나 비합리적인 것보다는 이성을 신앙으로 여긴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달성 가능한 최선의 것과 가장 고상한 것을 완전하게 성취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다.” 22
미국 인본주의자 협회 (American Humanists Association)는 그들의 인본주의의 정의를 다음과 같은 대담한 선언으로 끝을 맺는다. ”인본주의는 철학이자 세계관이다, 또는 자연주의 기초 위에 선 삶의 자세 ─ 우주 곧 자연이 존재의 전부이고 진리라는 확신이다.” 23
미국 인본주의자 협회의 전임 회장이었던 세계적인 작가이자 무신론자인 故 아이작 아시모브 (Issac Asimoc)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인본주의의 주장을 이렇게 두드러지게 표현했다.
”나는 내 생애에서 단 한 순간도 종교 같은 것에 마음이 쏠렸던 적이 없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결코 정신적 공허 따위를 느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내 나름의 인생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어떤 형태로건 초자연적 존재자를 포함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것 그자체로서 전적으로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요컨대 나는 합리주의자인 것이다.” 24
정당화되지 않는 무더기 가정 (A Massive Presupposition with No Justification)
앞서 열거된 인본주의에 관한 그 많은 정의, 선언, 그리고 단정들 (그리고 기독교적 유신론에 관해서는 거의 관계가 없는 것들)이 마치 어떤 보편적 기준처럼 가정하고 있지만, 그에 대한 아무런 합리적 설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또 왜 우리가 정당성이 없는 그것들을 수용하여야 하는가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인본주의의 핵심은 개인의 개발이나 인간적 완성, 그리고 전 지구적 발전은 오직 물질만이 실체인 완전한 자연계를 대상으로 하는 인간의 노력을 통해서만 보장될 수 있다는 사상이다. 그렇지만 인본주의자는 어떻게, 그리고 왜 이 명제가 진실이란 것을 알 수 있는가를 확신을 가지고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만약에 인간성이라는 것은 장구한 진화의 과정 (모든 물체들은 시간 속에서 무작위로 운동하는 에너지와 물질로부터 발전된다)을 지나서 등장한 상대적으로 짧은 생애에 불과하다면, 그 때엔 과연 우리는 우리 種 안에 구원과 세상의 완성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무엇으로 정당화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인본주의 과학자 리차드 도킨즈 (Richard Dawkins)가 HM2K를 '종차별적'이라고, 또한 무보증 종의 자기본위라고 비난했을 때, 그의 생각이 앞에 말한 우리의 질문과 그다지 먼 데 있지 않았던 것 같다.25 보편적 인권에 관한 HM2K 선언에 관해서 언급하면서, 그는 ”HM2K의 윤리 규정은 의심할 바 없이 종 차별적이다. 이 선언문(Manifesto)은 토론이나 질문을 거치지 않고 윤리 문제에 관한 한 '호모 사피엔스' 종만이 고려의 대상으로서의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당연한 듯이 가정하고 있다. 내 생각으로는 이 선언은 비 진화론적이다.”26 라고 지적하였다.
인본주의자들이 그들이 내린 정의와 선언, 그리고 단언에서 가정한 보편적 기준이란 것들도 도킨즈가 인본주의자의 윤리 규정에 지적하였던 비평과 같은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인본주의자들이 근거 없이 오만스럽게 단정하는 소위 보편적 원리라는 것들에 대한 대응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을 뿐이다.27
첫째 : 그들의 주장에 증거를 요구하면, 그들은 합리적 근거를 제시할 기도는 조금도 하지 않고 단순히 ”그냥 그런 것이 있어” 라고 하던가, ”그것이 물질의 본래적인 속성이야”, ”그것은 자명한 것이야”, 또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일이거든” 이라고 한다. 그런데 인본주의자가 크리스천에게 신앙의 증거를 요구하면, 크리스천도 당연한 듯이 그들과 비슷하게 대답한다면 (”하나님은 당연히 계신다” ”당신도 내면 깊은 데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있다.” 또는 ”믿음을 가져보세요”라고), 인본주의자들은 일각의 여유도 주지 않고 당장에 크리스천의 대답을 거절하고는 크리스천의 믿음을 정당화할 수 없는 논리로 조소하기 일쑤다. 그와 같은 보편적 원리에 대한 '맹신'이야말로 Free Inquiry 잡지와 HM2K, 그리고 그밖에 많은 출판물에 발표된 인본주의의 실상이다.
둘째 : 근거 없는 세계관은 '맹신' 이라고 할 수 있는 바, 그것은 불합리하다. 그리고 합리주의자한테는 보편적 가치와 원리를 정당화하는 근거를 찾아야 할 의무가 있다. 여기에 속하는 합리주의자들은, 단연 소수 집단이지만, 기독교 교리의 합리적인 주장에 가장 열린 자세를 견지하고 있는 부류들이다. 기독교 교리의 합리적 주장이라 하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긍정적인 토론과 같은 것을 말한다. 이 글의 후반부에서 거론하려 한다.
셋째 : 인본주의자의 주장을 만났을 때, 우리는 낙담이라도 했다는 듯이 비유적으로 두 팔을 들어올리는 반응을 해 보이는 것이 어떨까? 그리고 보편적 진리와 가치 그리고 원리를 포기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이와 같은 대응은 불합리하겠지만, 그런 반응이 인본주의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세계관을 정당화하려는 기도를 포기시키고 기독교적 유신론으로 전향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범주에 속하는 인본주의자들은 수적으로는 많은 편이지만, 그들의 무의미한 상대론을 현재 유행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급진적인 표현으로 일반화시키는 데 매우 성공적이다.28
포스트모던 인본주의 (Postmodern Humanism)
포스트모던이즘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 침투하였다.29 많은 포스트모던 인본주의자들은 종전의 인도주의가 모든 물질적 현실 (과학적인 법칙, 보편적 인권, 절대치, 진리와 진리 인식의 가능성, 그리고 절대윤리)을 관장하는 보편적 절대가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정당화하려 하지만 근거가 없다고 인식한다.
그 좋은 예가 여기 있다. 1999년에 있었던 어떤 인본주의자들의 모임에 우리도 참석하였었다. 그때 한 젊은 강사는,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고 윤리의 보편적 절대 체계가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궁극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기독교 교리는 협소하고 바보 같다고 강의를 했다. ”천하에 옳은 것 (things of right)은 없는데”, 크리스천들은 오만하게도 감히 자기들이 옳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의 강의가 끝난 후에 우리는 그와 토론을 벌리던 중, 우리는 그의 말━천하에 옳은 것이 없는데 그는 어떻게 감히 자기 자신은 옳고 크리스천은 틀렸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이 오만한 말이 아닌가? 하고 지적하였다.
우리는 급기야 길고 긴 싸움과 난장판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했으나, 뜻밖에 그는 재빨리 손을 들고는 세속적 인본주의도 기독교 교리도 다 같이 참인 것 같다, 그래서 절대론도 상대론도 둘 다 정확한 것 같다, 그리고 우리들은 다 같이 모르는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는 것 같다 라고 답변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황당할 정도로 불합리한 그의 대답은 그의 일상적인 삶의 태도를 고스란히 반영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그렇지만 그의 대답은 일관성이 없는 급진적 포스트모던주의에 대한 그의 헌신을 잘 반영하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이 젊은 강사와 마찬가지로 포스트모던 인본주의자들도 오직 기독교 유신론에 의지하여야만 합리적 강론과 탐구에 필요한 논리적 근거를 얻을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를 않는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정당한 설명 없이 보편적 절대치에 대한 자신감을 붙들고 늘어지는 동료 인본주의자 (포스트모던 인본주의자가 아닌)들과도 손을 잡지 않는다. 그 대신 포스트모던 인본주의자들은 그냥 철학적 허무주의에, 즉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심지어 그 존재자체나 사상, 가치 그리고 행동까지도 최종 분석의 결과로 드러나는 것은 무의미와 무意義 그것뿐이라는 이념으로 전락하고 만다.
인본주의자 선언 2000 (Humanist Manifesto 2000)에 서명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포스트모던 주의자들이 표방하는 상대론을 거부하는 절대론자 라고 밝혔다.
”과학의 객관성을 부인하고, 현대기술의 사용을 한탄하며, 인권과 민주주의를 공격하는 소위 포스트모던 사상이 서유럽의 여러 나라에 대두하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형태는 패배주의를 권장한다. 최선의 경우라고 해봐야, 그들은 세계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그 어떤 프로그램도 제안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문제의 해결 가능성이나 달성 개연성조차도 부정하는 일이다. 이들의 철학-문학 운동의 효과는 역생산적 (逆生産的)이든가, 나쁘게 말해 허무주의적이다.” 30
크리스천은 이 비평에 동의하지만, 그들과는 전적으로 다른 유신론적 세계관의 시각에서 하는 비평이다. 허무주의는 비합리주의와 절망감이 표방하는 반-신앙 (anti-faith)이다. 그래서 허무주의는 ”스스로의 보조(步調)만으로는 자기 자신을 이끌어 갈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허무주의가 자기모순이라는 모래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절대론적 인본주의는 또 어떤가? 그도 별반 좋아 보이지 않는다. 이 사상은 모래수렁에서 빠져나왔다는 환상에 매달리려고 하지만, 주의 깊게 뜯어보면 그들의 발을 모래수렁 밖에서 붙들어 주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쉽게 알게 된다. 그래서 이 이념도 어쩔 수 없이 모래수렁 속에 빠져 자취를 감출 운명에 있음은 포스트모던 인본주의와 마찬가지다.
Free Inquiry 지의 최근 판 전체 지면은 포스트모더니즘과 주관주의, 그리고 상대론 같은 이념들의 주장을 반박하는데 할애하고 있다.31 작가인 매트 체리 (Matt Cherry)의 논설인 '진리 그리고 결과'에서 아래와 같이 선언했다.
”[포스트모더니스트 사상가들은] '진리' 라는 개념 그 자체를 거부한다. 그들은 '객관적 지식'은 물론 '사실들' 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고, 오직 개인적인 해석만이 존재한다 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그들은 '이성' 과 '과학' 은 '신화' 나 '이야기' 또는 '마술적인 표현' 들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 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비록 과학이 문화간의 진리를 주장할 수 없는 경우에도, 도덕적 관념만은 역시 완전하게 상대적이어야 한다 ─ 즉, 그것은 취미나 전통의 문제와 마찬가지다. 자연과 진리에 관한 이 이론들은 실물-세계의 결과를 만든다. 만약에 이 이론들이 심각하게 채택되면, 그것들은 예컨대 과학에 대한 지지, 사회 개형에 대한 지지, 그리고 보편적 인권에 지지를 파괴할 것이다.”32
하버드 대학의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nson) 교수는, 자신의 논설 ”다시 계몽사상으로 돌아가서 (Back to the Enlightenment)”에서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알 것이다.” 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계몽 사상가들은 우리가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포스트모던니스트들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라고 믿는다.”고 지적했다.33
체리와 윌슨 이들 두 사람의 주장은 마치 합리적인 크리스천 유신론의 절대론 즉, 절대 가치는 존재한다, 진리는 존재한다, 그리고 안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등등을 환영하는 듯이 보인다. 그렇지만 그들은 기독교가 ”영원, 무한, 전지, 전능하셔서 우리가 현실에서 조우하는 균형, 질서, 도덕, 가치, 그리고 진리를 창조 유지하시는 하나님 위에 근거하고 있다” 는 이유 때문에 가차없이 합리적 기독교 유신론을 거부해 버린다. 절대론적 인본주의는 기독교 유신론에 접근해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현실, 즉 실존하는 물질계의 총괄적 결과로 인식하는 자연주의에 대한 그들의 선입관을 얼마만큼이라도 접어보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진리로부터 몇 광년이나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겠다.
중국에 있는 인권단체의 시아오롱 리 (Xiaorong Li)는 Free Inquiry 지의 같은 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보편적 인권에 관한 그 어떤 사상에도 치명적이라는 이론에 동의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더는 학문적 토론이나 철학적 사색이 아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의 고통, 핍박, 그리고 심지어 죽음에 미칠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절대 윤리라든가 보편적 인권, 그리고 확실한 문화적 규범과 같은 가치 기준이 없다고 단언할 때, 개인이나 사회, 그리고 문화적 고립주의에 초래할 그 결과는 최악의 성질의 것이다. 리 여사는 클린턴 대통령이 중국에서의 인권위반 문제를 제기하였을 때, 중국정부가 ”정치적 억압은 전통적 '문화 가치' 기준에 의해서 정당화된다” 라고 대답했다고 지적하였다. 리 여사는 중국정부의 권위주의를 정당화하는 장쩌민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였다.
”우리 두 나라는 사회제도, 이념, 역사전통 그리고 문화배경이 상이하다. 두 나라는 인권이나 기본자유를 성취하는 방법이 다르다.” 34
보편적 가치기준을 거부하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을 통렬하게 해부한 리 여사의 비평은 그토록 강력하고도 합리적이어서 여러 곳에서 자주 인용된다. 기독교 유신론은 급진적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리 여사의 통렬한 비평에 동의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더 한 발 나아가서, 크리스천은 보편적 인권이 인간의 직관, 경험, 진화 또는 '그냥 옳음 (just-is-ness)'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유신론적 세계관의 입장에서 리 여사의 비평을 정당화할 수 있음을 말해야 한다. 보다 진실한 것은, 정의가 앞서 열거한 '빼앗을 수 없는 권리들'을 인간에게 '부여하여 주신' 영원하신 하나님한테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인본주의자인 리 여사는 이렇게 주장한다.
”그러나 다양한 도덕규범이 존재한다고 해서 다른 도덕 가치를 존중하여야 한다는 명제를 정당화 할 수 없는 것은, 병고, 기아, 고문, 노예제도가 존재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들의 가치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와 같이 경험적 주장들은 ”다른 문화를 판단하지 마라.” 또는 ”우리는 다른 가치도 인정하여야 한다.” 따위의 도덕적 원칙을 개발하기 위한 근거로서는 합당하지 않다.”
”만약에 존중되고 또 인정된 문화가 그 문화를 거역하는 개인을 존중하지 않고 인정도 하지 않을 때엔 어떻게 해야 좋다는 것인가? 한 소녀가 여성거세나, 발-묶기 또는 사전에 결정된 혼인을 피하기 위하여 싸울 때, 또는 과부가 죽은 남편을 섬기기 위한 분신을 원하지 않을 때에도, 상대론자는 이와 같은 개인들이 원하지 않는 문화 또는 전통적 관습이라도 그것들을 '반듯이 존중' 하여야만 할 것이 아닌가. 그럴 경우 상대론자는 개인을 존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고문, 간음 그리고 살인을 위한 도덕적 기초를 효과적으로 인준하여 주는 꼴이 된다. 도덕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윤리적 상대론자는 중립을 지켜낼 수는 없는 것이다. ─ 그들은 개인의 편에 서던가 아니면, 그 문화에 속한 군림하는 지배세력 편에 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상대론자들은 다른 삶의 방법에 대한 동등한 존중과 인정, 즉 그들이 절대적이고 보편적이라는 하나의 정교한 중심 가치를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윤리적 상대론자들은 스스로를 거부하고 말았다.” 35
같은 판 Free Inquiry 지에 올라있는 다른 논설들도 객관적 절대 윤리를 거절하는 급진적인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리 여사의 철퇴와 같은 비평에 힘을 실어주었다. 데오도르 쉬크 (Theodore Schick Jr.)는 ”문화는 도덕적으로 무오성이 아니기 때문에 - 동시에 문화가 비도덕적인 행위를 제재할 수 있기 때문에 - 문화적 상대론은 정확할 수 없다.” 라고 주장했다.36하비 시겔 (Harvey Siegel)은 ”왜 모든 것은 상대적이 아닌가 (Why Every Thing is Not Relative)” 에서 상대론자들의 아킬레스건이라고 할 수 있는 그들의 자체부조리의 문제를 지적했다.
”'상대론의 반대자들은 그 이론에 대한 비평을 수없이 많이 하였다. 가장 뛰어난 근본적인 비평은 이런 것이다. 즉, 상대론은 자기부조리를 스스로 밝힘으로써 자기반박적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이론에 대한 변호는 그 이론을 포기하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가장 강력한 [고발]은 상대론이 진리를 결정할 수 있는 가능성, 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론적인 주장이나 논설의 인식론적 장점을 배제하고 말았다는 점이다.” 37
우리는 절대론적 인주의자들이 인본주의적 상대론이 파산되었다는 지적에 동의할 수 있다. 더욱이 본 논설의 2부에서 제시하겠지만, 절대론적 인본주의도 다른 인본주의와 마찬가지로 파산하였다는 것이 우리 주장이다. 하나님의 존재에 반대하는 주장들 중에는 주목할만한 것이 없는 대신에, 하나님의 존재에 찬성하는 주장들은 가히 압권이라 하겠다.
NOTES
1. 많은 사람들이 삶의 의미나 자신의 존재 이유를 심사숙고하는데 전혀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이나 다른 종류의 궁극적 가치와 이념에 관하여 이야기하는데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Seinfield 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그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만족한다. 이 논설은 삶의 의미와 인생의 존재를 사유하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존재와 그 적절성에 관한 토론에 기쁘게 참여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2. 마태복음 28:19
3. 이 정의는 George Smith가 Atheism에서 일반화시켰다. The Case Against God (Amherst, NY: Prometheus, 1980).
4. 'Are Secular Humanists Atheists?' The Secular Humanism Organization.
5. 그 자체가 이미 보편적 부정인 명제, 즉 ”보편적 부정을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와 같은 진술의 허위인 것과 같이, 어떤 '보편적 부정'은 입증될 수도, 반증될 수도 있다. 매개변수들이 주의 깊게 알려지고 탐색되고 있는 한에서, 보편적 부정은 증명될 수 있다는 가설은 성립된다. 또 다른 하나의 예는 이런 것이 될 것이다. 즉, ”우리 집 연못 밑에서 살고 있는 호흡기관이 없는 낯익은 종류의 코끼리들은 없다.” 어쨌거나 보편적 부정은 증명하기가 어렵다.
6. 'Agnosticism,' in Encylopedia Britannica 2000. (on-line version at www.britannica.com).
7. An excellent book on this subject is J.P. Moreland's Love Your God with All Your Mind (Colorado springs, CO: NevPress, 1997).
8. Paul Kurtz, 'Humanists Manifeto to 2000 : a Call for a New Planetary Humanism,' Free inquiry, Fall 1999, 4.
9. 'Definitions of Humanism,' The American Humanist Association Web site (https://americanhumanist.org/), 1997, 2.
10. Ibid.
11. Council for Secular Humanism.
12. Quoted in Philip Johnson, Reason in the Balance (downers Grove, IL: Inter Varsity, 1995), 176.
13. A popular rumors attributed to her is false. It concerns a petition to the FCC to remove religious broadcasting from U.S. airwaves. This is completely fabricated and was never pursued by O'Hair or any other atheist organization and is beyond the power of the FCC to consider. See Bob Passantino, Fatasies, Legends, and Heroes (Costa mesa, CA: Answers In Action, 1989), 28.
14. Louis Dubose, 'Whatever Happened to the World's Most Famous Atheist?' The Progressive. Feb. 1999, 5
15. Excepting her son, William Murray (the subject of her original lawsuit), who had been estranged from his mother since his conversion to Christ.
16. See news reports, including Dubose.
17. Ibid.
18. (www.primenet.com/~lippard/atheistcelebs).
19. (www.atheists.org)
20. Dan Barker, 'What Is a Freethinker?' ('Nontract #11') (Madison, WI: Freedom from Religion Foundation, 1993), 1-3 (also at www.ffrf.org/nontracts/freethinker.html).
21. 'Welcome to the American Humanist Association Website,”
22. 'The Affirmations of Humanism: A Statement of Principles,” Council for Secular Humanism.
23.'Definitions of Humanism,” The American Humanist Association Web site, 1997, 3.
24. 'Rationalism,” American Rationalist: The Alternative to Religious Superstition Web site.
25. From the humanist's viewpoint is unwarranted, but from God's relvelation we are told that humans alone out of all of God's creation were made 'in His image.'
26. 'Manifesto 2000 Commendations and Comments,' Free inquiry, Winter 1999/2000, 8.
27. Christian auther Gregory Koukl explains the three responses as: 'One: Morality is simply an illusion. Two: Moral rules exist but are mere accidents, the product of chance. Three: Moral rules are not accidents but are the product of intelligence.' (Frances J. Beckwith and Gregory Koukl. Relativism: Feet Planet Firmly in Mid-Air [Grand Rapids: Baker, 1998, 167.)
28. 많은 사람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용어의 정확한 정의에 숙지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리고 그들이 포스트모더니스트가 어떤 부류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념들을 신봉한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원하는 사람은 Christian Research Journal 22, no.2 (1999): 56-58에 실린 Stephen Ross 의 'A Postmodern Promenade,'를 참조하세요.
29. 이 증거들을 요약한 재료가 Beckwith and Koukl 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도덕적 상대론의 역사와 광범한 내용은 Beckwith and Koukle의 제 8장 (가치의 해설과 교육)에서 그리고 정치의 정당성과 다중 문화주의는 제 10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30. HM2K Article II, 8.
31. What Happened to Truth? issue of Free Inquiry, Fall 1998.
32. Matt Cherry, 'Truth and Consequences,' Free Inquiry, Fall 1998, 20.
33. E. O. Wilson, 'Back to the Enlihtenment,' Free Inquiry, Fall 1998, 21.
34. Xiaorong Li, 'Postmodernism and Universal Human Rights: Why Theory and Reality Don't Mix,' Free Inquiry, Fall 1998, 28.
35. Theodore Schick, Jr., 'Is Morality a Matter of Taste?' Free Inquiry, Fall 1998, 32-34. 아마 그는 알지 못했는지 모르지만, 그가 설명하였던 원리는 2000년 전에 바울 사도가 로마서 2:1에서 이미 언급하였었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그런데, 바울의 대답은 Schick의 대답보다 훨씬 더 만족스럽다. 그것은 바울이 인간 내면의 양심을 윤리적 판단의 근거로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서 2:21,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6. Harvey Siegel, 'Why Everything Is Not Relative,' Free Inquiry, Fall 1998, 35-38.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equip.org/free/DR503-1.htm
출처 - 기타
다윈의 진화론과 나치의 인종 대학살
(Darwinism and Nazi race Holocaust)
by Jerry Bergman Ph.D.
나치당 간부들과 1900년 초의 유력한 독일 생물학자들은 그들의 저서에서, 다윈의 이론이 나치의 인종차별 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공언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인간의 유전인자 풀(pool)은 선택적 생식을 통하여 개량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것은 농부가 우량종 가축을 생식하는 방법과 유사하다는 생각에서 연유된 발상이었다. 히틀러 정부는 인종차별 정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다윈의 진화론에, 특히 스펜서(Spencer)와 헥켈(Haeckel)의 고심하여 쓴 책들에 크게 의존했다. 결과적으로, 히틀러 정부정책의 핵심은 '우등인종'의 보호를 위한 프로그램들을 개발하고 실행하는데 있었다. 이 정책이념은 가능한 한 우등인종이 '열등인종'과 섞이지 못하게 함으로써, '열등인종'의 유전자 풀에 의한 오염을 최소화 하자는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이른바 '우등인종'에 대한 그들의 신념이 근거하고 있던 이론은 모든 종이 각기 그 내부에 집단적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개념이다. 이 학설은 다윈의 진화론의 근본인 '적자생존(適者生存)' 이론에 대전제가 되며, 동시에 필요조건이기도 했다. 이 철학적 신념은 결국 '종국적 해결'이란 정책으로 현실화되어, 무려 6백만 명의 유태인과 독일 과학자들이 '열등인종'으로 판단한 인종에 속하는 무고한 사람들 4백만 명을 말살하기에 이르렀다.
서론
나치가 유태인을 대대적으로 학살하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데에는 많은 요인이 있겠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다윈의 진화론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이론에 의하면 진화의 진행은 주로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약자의 제거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비록 히틀러와 그의 지지자들의 모순되는 동기들을 평가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다윈의 진화론에 의해 한층 고무된 우생학(eugenics)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다. 다윈의 사상은 나치의 인종관념과 전쟁관념을 정당화하고 나아가 고무하였다. 만약에 나치가 신구약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대로 모든 인류는 아담(Adam)과 하와(Eve)의 후손들이고,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을 전폭적으로 포용하고 그 믿음의 바탕에서 일관되게 행동을 하였다면, 유태인 대학살(Holocaust)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독일의 주류(자유주의적) 신학과 이에 속한 여러 분파의 학파가 전개하던 운동(인류의 신성한 기원에 대한 유태교적-기독교적 이론을 삭제하고, 그 대신 다윈의 진화론적 인류기원론으로 대체하자는 운동)은 다윈의 진화론을 사회발전에 적용하자는 공공연한 주장에 크게 기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사회학의 진화론적 해석은 급기야 Holocaust1의 비극을 초래하고 말았다. 헥켈[2,3,4,5,6]과 챔버레인(Chamberlain)[7] 그리고 몇몇 학자들에 의해서 수정된 다윈의 학설은 9백만 명이 넘는 생명을 강제수용소에서 살해하고, 6조 달러의 전비를 소요케 하였던 전쟁에서 사천만의 생명을 희생시켰다. 더군다나, 나치 사상을 극악무도한 Holocaust에 까지 이르게 한 주요 이유는 사회발전의 진화론적 해석을 자연과학계에서는 물론 인문학계에서까지 광범하게 수용하였다는 사실에 기인했다.[1,8,9,10]
진화는 적자의 선택적 생존, 혹은 우등한 개인의 선택적 생존에 의해서 진전된다는 것이 다윈 이론의 핵심이었다. 이 이론이 성립하려면 하나의 종 안에 다양한 개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개체간에 존재하는 차이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벌어져, 마침내 보다 유리한 특성을 지닌 개체들(최적자들)이 더 생존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비록 인종의 차별화가 애초에는 근소한 차이에서 출발하지만, 차별적 생존율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종분화(speciation)의 과정(새로운 종의 개발 과정)을 거쳐 뚜렷하게 벌어져, 마침내 차별화 된 종족이 태어나게 된다는 이론이다.
오늘날 서구의 이념을 지배하는 사상, 즉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라는 평등주의 이념은 모든 국가와 문화들 사이에 보편적인 것은 아니었다.11 이 이념을 반대한 주요 세력은 사회 진화론적 우생학 운동, 특히 그들의 생경한 '적자생존'의 세계관이었다.10,12 루드머러(Ludmerer)가 일찍이 지적한 바도 있지만, 인종의 유전적 특성은 선택적 생식에 의해서 개량될 수 있다는 이념은 플라톤(Plato)의 공화국(Republic)에서 이미 엿볼 수 있을 만큼 오래된 사상이다. 그러나 :
”... 현대의 우생학은 19세기에 들어와서 생겼다. 이 신생 이념인 우생학의 뿌리는 다양하다. 가장 중요한 뿌리는 진화론이다. 프랜시스 갤튼(Francis Galton, 우생학 이라는 학술 용어를 만든 사람)은 그의 사촌,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과학적 이론(진화론)에서 파생한 직접적이며 논리적 부산물이다.”[13]
나치는 독일의 정부정책은 다윈사상으로 대표되던 당시의 과학자와 유식 계층 간에 존재하던 시대정신(Zeitgeist)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고 공공연하게 홍보하였다.[10] 당시의 독일의 시대정신이라는 것에 대한 평가는 20세기 나치 운동과 이를 지지하던 많은 과학자들이 작성한 현존하는 문서들, 저작물들, 그리고 문화유물들에 대한 조사로 기약될 수 있을 것이다. 케이스(Keith)는 이렇게 결론을 지었다. 즉, 유태인을 비롯해 '열등'한 '인종'으로 단정해버린 인종들에 대한 나치의 독단적 차별정책은 다윈 이론이 인류를 개량하는데 결정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그들 나름의 신념에서 연유된 결과가 크다,[14] 테네바움(Tenebaum)은 독일의 정치철학의 기초가 된 신념은 진화론적 발달 개념이 결정적인 요소들이었다 라고 했다.
”... 투쟁, 선택, 그리고 적자생존과 같은 개념과 관찰들은 모두 다윈한테서 비롯됐다... 그러나 그런 개념들은 이미 19세기 독일의 사회철학 속에 널리 싹트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 그런 밑바탕이 있었기에 독일제국(Reich)과 약소국과의 관계에서 '망치와 모루'의 그것처럼 ... 비교 우위에 있는 독일은 세계를 통치할 고유권리가 있다, 라는 이론이 개발될 수 있었다.” 14
다윈 이론에서의 인종 개념의 중요성
진화론은 개체가 독특한 특성을 습득하여 그것을 자기 것으로 하는 현상에 근거를 두고 있다. 새로운 특성을 제 것으로 만든 개체들은 그런 특성을 갖지 못한 개체들과 비하여 더 잘 역경을 극복하고 살아남는다. 우수한 개체는 보다 더 잘 살아남아서 이러한 특성들을 후손들에게 전수함으로써 그런 특성의 수가 점점 많이 축적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보다 약한' 개체들이 결국 도태되어 사라질 것이다. 만약 하나의 종 안에서 모든 개체들이 전적으로 평등하다면, 자연은 선택의 대상을 찾지 못할 것이며, 결국에는 그 종의 진화는 중단되고 말 것이다.
강자와 약자의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차이는 점진적으로 발전하여 궁극에는 전혀 새로운 집단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들 중 얼마는 살아남는 데 있어서 유리한 지점을 차지하게 되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집단은 우수한 집단, 다시 말해서 보다 진화된 종족이 될 것이다. 그런 특성을 습득하여 제 것으로 만든 종족이 차지한 유리한 생존경쟁 조건 때문에, 그 특성은 궁극적으로 전체 종족에 고루 확산될 것이다. 그리 되어 결과적으로 더 높고 더 진화된 형태의 동물이 출현할 것이다. 히틀러와 나치들은 자기네들의 주요 목표들 중 하나가 이 용인된 ”과학적인 이론을 사회에 적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다윈 이론의 핵심은 진화가 아니고 선택이었다. 진화는 ... 선택의 결과를 기술한다.”[16] 히틀러는 보다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나치]는 반듯이 과학을 이해하고 과학에 협조하여야 한다” 라고 강조하였다.
모든 다른 인종들 위에 자리하고 있는 유일한 인종으로서, 아리안족(Aryans)은 자기네의 진화론적 우수성으로 인해서 모든 타 인종을 지배할 권리뿐만 아니라, 의무도 또한 부여받았다고 믿었다. 인종문제야말로 나치 철학의 주요 강령의 하나였다; 그래서 테네바움(Tenebaum)은 나치주의는 다윈이념과 합병하였다, 라고 잘라 말했다 :
” ... 나치의 정치 체계 속에는 아무 것도 빠뜨린 것이 없었다. ... 그들의 정치 철학의 사전은 공간, 투쟁, 선택 그리고 멸종(Ausmerzen), 이런 類의 어휘로 가득 차있었다. 나치들은 연역법적 논리를 사용하여, 세계는 하나의 정글과 같아서 그 속에서는 서로 종족을 달리하는 인종들 간에 제각기 공간을 차지하기 위하여 쉬지 않고 투쟁하고 있다. 강자는 승리하며, 약자는 죽든지 죽임을 당한다, 라고 분명히 결론짓고 있었다. ...”[17]
1933년, 뉘름베르크에서 개최된 나치당 대회에서, 히틀러는 ”보다 고등한 인종은 보다 하등한 인종을 복종시킨다. ... 자연 속에서 관찰되는 이 권리야말로 우리의 사유(思惟)가 미치는 유일한 권리로 간주되어야 한다” 라고 선언하고, 그것은 과학을 통해서 발견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었다.[15]
히틀러는 인류도 동물이기 때문에, 가축의 생식(生殖) 과정에서 습득한, 유전인자의 유전법칙의 적용이 가능한 상대(相對)라고 믿었다. 나치들은 자연의 힘에게 진화를 주관하도록 허락하기보다는 자기들이 인종의 진화를 일일이 조종하여야 한다고 믿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계획의 첫 단계는 '열등 인종들'을 격리시켜서 '아리안족'의 유전인자 풀을 더 이상 오염시키지 못하게 하는 정책이었다. 사실상 이 정책은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얻었다. 그들은 열성인자가 열등 인종을 생식한다는 다윈 이론이 과학적으로 '입증' 되었다는 학설을 순수하게 믿었다. 이 신념은 독일의 지식계층 간에서는 상식으로 통했다. 나치들은 자신들의 정책은 보다 살기 좋은 세계의 수립을 위한 실천계획의 일환으로 과학이 입증한 학설들을 우등 인종 생식에 적용하고 있을 따름이라고 믿었다 : ”법인 국가(corporate state)의 사업은 우생학 다시 말해서 인위적 선택이라는 응용 생물학을 정책 기조로 한다.”[18,19]
일찍이 1925년에 벌써, 히틀러는 '나의 투쟁 (Mein Kampf)' 제 4장에서 다윈 이념이 독일의 성공에 이바지한 유일한 근거이라고 기술하고, 그 취지를 유명한 자신의 저서의 제목인 나의 투쟁 이 적절하게 암시하고 있다고 기술하였다. 클라크(Clark)가 결론적으로 지적한 바와 같이, 아돌프 히틀러는:
” ... 진화론의 이론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어릴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 진화론적인 관념들은 노골적으로 Mein Kampf와 그의 대중 연설문 안에 드러나 있는 조잡스러운 내용들의 근거가 되어 있었다. ... 히틀러는 ... 보다 고등한 인종이 언제나 보다 열등한 인종을 정복했다고 하면서 자기 이론의 합리화를 시도했다.”[20]
한편 히크만은 이에 부언하여, 히틀러는:
” ... 진화론의 돈독한 신자였으며 또 설교자였다. 그의 정신병적 복잡한 증세가 얼마나 깊고 심각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투쟁의 개념이 중요하였던 이유로] ... 그는 Mein Kamfp에서 더 살기 좋은 사회를 지향하는 수많은 진화론적 관념들, 특히 투쟁, 적자생존과 같은 관념들과 약자의 멸종과 같은 제안을 강조하는 관념들을 표현하고 있었다.'21 는 사실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라고 했다.
더욱이, '우등인종'을 생산하기 위해 과학자들이 진화의 과정을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이야말로 나치주의의 핵심적인 라이트모티브(Leitmotif: 중심사상)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밖에 여러 출처들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나치 사상은:
” ... 이념적 화주(火酒:독한 술)를 내놓았다. 이러한 관념들은 몽마(夢魔)와 연계하여 나치의 국가적 사회정책을 군사정책과 외교정책에 꽁꽁 묶어 크게 반영하고 있다. 그 사실들은 나치의 거대한 인종 프로그램에 비추어보아 명백하게 이해될 수 있다.”[22]
다윈의 진화론과 인종문제에 대한 나치 세계관의 운명적인 합병은 결과적으로 유태인 대학살(Holocaust)과 2차 세계대전을 야기한 주요한 이유로 불거져 나왔다.
”나치 사상과 이론의 중심 강령 중 하나는 ... 진화론이었다, [그리고] ...나치는 모든 생물학적 주체들이 상향(上向) 진화하는 것으로 믿었다. 그리고 보다 더디게 진화한 유형(type)들은 ... 실질적으로 멸종되어야 하는 것으로 믿었다, [그리고] ... 나치는 자연의 선택에 도움을 줄 수 있고 또 주어야만 한다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치들은] 유태인을, 그리고 ... 나치가 '후진'으로 간주한 흑인을 멸종시킬 정치적 대책을 제도화하였다.”[23]
'우등인종', '열등인종 유형', '인종의 오염', 그리고 진화론 이란 단어 그 자체 (Entwicklung), 이런 것들은 히틀러와 나치 지도자들이 빈번하게 사용하였던 용어들이다. 히틀러의 인종관은, 자주 주장되는 바처럼, 주변 과학에서 빌려온 것이 아니었다. 그 보다는 그의 인종관은:
”노골적인 다윈주의적 사회주의 유형이었다. 이런 이념은 전체 독일을 통해서 널리 알려지고 또 용인되어 있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과학자들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독일 국민이 그의 인종차별관을 과학적이라고 간주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국가사회주의와 히틀러에 관한 최근의 연구 발표에 의하면, 나치즘의 독특한 특징은 사회정책에 진화론을 실질적으로 적용하였다는 점이다. 국가사회주의 독일정부의 '생물학적-정치철학적 사회정책,'은 ... 인종 정책에 대한 도덕적 해석을 일원론적, 초자연주의적, 극단적 허무주의에 근거하고, 이를 인종 불평등에 대한 정책에 반영하고, 자연 법칙에 따르는 적자생존과 자연선택을 위한 영원한 투쟁의 이념을 공공정책 수립에 국가 권력을 동원하였다 ...”[24]
나치들은 보다 '고등한 인간'의 번식을 위한다면, 다윈의 이념도 조정할 수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자기네 정책에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철학을 내세워, 유력한 당원들의 저서와 연설을 통하여 거듭거듭 주창하게 하였다.[25] 그들은 진보된 세계건설을 위해 다윈의 이념에 따라서 당당하게 모든 방법을 다해서 부적자(不適者)를 무자비하게 제거하라고 요구하였다:
”독일의 사회주의적 다윈 이념의 기본 개념은 ... 인간이란 어떤 특별한 초월성도 또는 특별한 인간다움(humanness)도 없고 다만 자연의 한 부분일 따름이라고 했다. 다른 한편, 게르만족은 생물학적으로 우수한 군서(群棲) 집단의 구성 분자라는 것이었다... 그들의 정책은 생물학적 법칙의 솔직한 적용이라고 했다. 그들의 이념의 근본을 들여다보면, 헥켈과 그의 동료 사회주의적 다윈주의자들이 국가사회주의 사상의 핵심 이념을 진전시켰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이야말로 법인 국가의 사업은 우생학, 즉 인위적 선택 과업이다, 라고 주장했던 장본인들이다....”[18]
언젠가 한 번은 히틀러가 이렇게 진술한 적이 있었다, 우리 나치 당원들은: ... ”야만인들이다! 우리는 야만인이 되기를 원한다. 그것은 명예로운 명칭이다. [왜냐하면, 그 명칭으로 해서,] 우리는 세계를 도로 젊어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26] 한 사람의 진화론 신봉자로서의 히틀러는 ”의식적으로 독일의 실질적 정책 집행을 진화론의 이론에 합치하게 하려고 하였던 것이다.”[27] 케이스(Keith)는:
”만약에 전쟁이 진화의 아들이라면 나는 그렇다고 확신한다 (아들인) 전쟁이 발발했을 때엔, (아버지인) 진화는 '미쳐버릴 테고,' 급기야는 극도로 광포해져서, 생명의 세계에서 하여야 할 제 나름의 고유 역할을 수행 못하고 끝내 좌절하고 말 것이다 진화의 고유 역할이라면, 상호 경쟁하는 개체들, 말하자면, 부족들, 국가들, 또는 인종들 사이에 경쟁을 촉진시키는 역할이다. 단 한 가지 길 말고는 전쟁을 면할 수 있는 길은 없다. 그것은 진화의 법칙을 인간 본성에 그 법칙이 지워놓은 강제력을 인간 본성에서 제거하는 길이다. 그런데, 과연 인간은 진화의 법칙을 무효화할 수 있을까? ... 나로서는 당장에 그것은 가능한 일도 아니며 실천할 수도 없다는 걸 발견했다. ”인간이 본성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길은 없기 때문이다.” 독일이 진화의 술통에서 진화주(進化酒)를 마지막 남은 앙금까지 몽땅 마셔버리고 진화론에 만취된 상태에서 유럽을 물과 피로 목욕을 시켰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진화의 법칙이 악(惡)이라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인간을 정글로부터 끄집어내어 야수들의 왕으로 만들어 준 법칙이라면 그런 법칙 (진화의 법칙)을 마냥 나쁘다고만 말할 수 없을 것이다.”[28]
독일의 유태인과 다윈 사상
독일의 우생학 지도자들은 영국의 그들에 비교하여 원래가 그다지 심하게 반-셈족(anti-Semitic) 경향이 아니었다. 독일의 초기 우생학자들 대부분은 독일에 사는 유태인들을 아리안족(Ariyans)으로 믿고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독일의 우생학 운동이 독일 국내는 물론 국외에 사는 많은 유태인 교수들과 의사들에 의해 지지호응을 받았던 것이다. 유태인들은 완만하게나마 처음에는 독일의 우생학 이론에, 나중에는 우생학의 법 적용에 협조하였던 게 사실이다.
다윈주의 인종관은 순수했던 독일 사회의 많은 분야들 속으로 천천히 침투해 들어갔다.[9] 독일의 인종적 순결을 수호한다는 목적에 헌신하였던 범독일연맹 (Pan German League)은 애초부터 공공연한 반-셈족 경향을 지녔던 것은 아니다. 사실, 독일에 동화된 유태인들도 연맹의 정회원이 될 수 있었다. 독일의 인종 이론이, 비록 흑인종과 집시인종(Gypsies)을 열등 인종으로 분류하였지만, 독일 안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는 유태인들이 많았던 이유로 해서, 유태인종은 열등인종에 부합하지 않다고 믿었던 독일 사람들이 많았다. 슈로이네스(Schleunes)는 이렇게 말하였다. 즉, 1903부터 범독일연맹(Pan German League)의 제반 사업계획 속으로 고루 퍼지기 시작하던 인종 이념의 영향은 그 정도를 높이다가, 1912년까지 연맹은 마침내 ”인종 원리'에 근거하여 인종차별과업을 추진할 것이며, 그 이후 머지않아 유태인을 맹원의 자격요건에서 제외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29]
독일 사람들의 인종관이 품고 있는 첨예한 과학적 배타성에도 불구하고, 1930대 이전에는 대부분의 독일 유태인들한테 미친 영향이 그런대로 제한적이었다. 대부분의 독일 유태인들은 독일국민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으며, 자신들을 1차적으로는 독일인으로, 2차적으로는 유태인이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많은 유태인들은 독일 지식계급이 가지고 있던 인종관념을 적절히 수정하여 자신들을 독일인 범주에 포함시켰던 것이다. 나날이 높아가던 그들의 독일인으로의 동화 경향이 마침내 그 정도를 높여 대부분의 유태인들은 독일은 당시 유태인의 안전한 피난처라고 믿게까지 되었다.30 당시로서는 아직은 창세기의 창조설을 굳건히 고수하면서 인종주의를 근거로 하고 있는 진화론을 포함한 인종 차별적 세계관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또한 현실이었다. 그 이후 독일에서 전개되던 사태를 유태인 유전학자들은 물론 심지어 유태인 우생학자들과 몇몇 다른 유태인 사회집단들도 고분고분하게 수용하지 않았던 것만은 명백하였다:
”우생학 운동가들은 독일에서 전개되고 있던 우생학 계획의 진전을 우려와 감탄이 섞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가 집권한 후 표면으로 불거져 나오기 시작하던 우생학 계획의 실제적 세부 내용들을 그들은 어정쩡하게나마 환영하였던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우생학자들은 미국의 예를 들어, 그 곳에서는 결혼을 엄격히 통제하는 법을 시행하고 있으면서도, 강력한 정치적 자유의 전통이 존재한다는 점에 주목하자고 말하고 있었다.”[31]
히틀러의 우생학적 목표
나치의 정책들은 유태인이나 다른 인종들에 대한 '증오'에서 비롯된 결과보다는 우등인종을 열등인종의 '오염'으로부터 보호하자는 일견 이상주의적인 목표에서 오는 결과가 더 컸다. 히틀러는 자신의 다윈주의적 세계관을 생쥐를 포식하는 고양이에 비추어 설명하면서, 궁극적으로 유태인종을 멸종시켜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그 이유를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 유태인종은 사람을 타락시킨다. ... 궁극적으로 자연은 유해요인들을 제거하기 마련이다. 모든 생명체들은 자연 법칙에 따라서 상호간에 먹고 먹힌다. 사람도 이 법칙에 의해 누군가를 축출할 수 있어야 한다. 파리는 잠자리한테, 잠자리는 새한테 잡아먹히고, 새는 새 나름으로 더 큰 새에게 희생된다. ... 자연 법칙을 알고 나면 ... 그 법칙에 순종하게 된다.”[32]
그리고 히틀러는 또 이렇게 주장했다. 그래서 정부는 반드시 '자연의 법칙' 특히 '원천적으로 인류를 출산하고, 그 진화의 근본인 적자생존의 법칙'을 이해하고, 이를 정부 정책에 적용하여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내가 십계명 중에서 인정하는 계명이 있다면, 그것은, '너는 네 종족을 보존하라.' 이다. 개인의 생명을 지나치게 값을 매기지 말아야 한다. 만약 개인이 자연의 평가의 눈에 중요하게 평가되면, 자연은 그를 보전하려고 애쓸 것이다. 한 마리 파리가 한 번에 수백만 개의 알을 낳지만 부화되는 알의 수는 몇이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리 종족은 번창하고 있다.”[33]
히틀러는 아리안 족이 비(非)아리안 족과 섞여서 생식하는 것을 방지하려고 특단의 결심을 세웠다. 그의 결심은 결국 '종국적 해결책'으로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일단 열등한 인종들이 멸종하고 나면, 앞으로 오는 세대들은 그가 시행했던 계획이 인류에게 가져다 준 진보(improvement)를 두고두고 고마워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게르만족은 보다 고등한 인종으로서 영광된 진화의 미래가 약속되어 있다. 이 이유만으로도 유태인종은 게르만족으로부터 격리되어야 한다. 그걸 못했을 때엔 혼합 결혼이 발생할 것이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보다 고등한 진화 단계의 존재로 태어나기 위한 자연의 모든 노력은 허사가 되고 말 것이다.” (Mein Kampf, 나의 투쟁)[20] 라고 주장하고 있다.
개인은 종족에 비해 훨씬 중요한 존재가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어떤 인종들은 인간이 아니고 차라리 동물이다, 라고 나치는 결론을 내렸다:
”인간-이하의 인간이라는 딱지가 붙여진 유태 인종은 실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집산주의자(集産主義者: collectivist)와 진화주의자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을 멸종시키는 것은 정당하고 합법적이었다. 독일 정부의 시각으로는 그들을 사람(persons)으로 보지 않았다.”[34]
결과적으로, 다윈주의 운동세력은 '19세기-20세기 독일 지성사(知性史)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다, [그리고] 국가사회주의 [나치즘] 이론을 여는 서막으로 이해되었다.[35] 진화론이 세계 어느 지역에서 보다 독일에서 급속히 적용되어 공고하게 뿌리를 내렸던 이유는 왜일까?
독일의 인종주의를 정당화하는데 이용된 진화론
슈로이네스(Schleunes)는, 1895년에 출판된 다윈의 저서가 독일의 유태인 정책에 끼친 영향은 즉각적이고도 충격적이었다, 라고 하고, 그는 비교적 신랄하게 그 이유를 이렇게 지적했다:
”최근에 와서 과학적으로 적법성이 인정된 생존경쟁에 대한 다윈의 철학은 우등한 사람이나 국가가 열등한 사람이나 국가에 대해 인종차별주의적 개념을 표방하는 것을 정당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 사이에 발생하는 투쟁을 당연시했다,”[36]
인종차별주의자들은 다윈을 대변하던 독일의 탁월한 과학자, 헥켈(Haeckel) 교수의 저서들이 다윈의 진화론과 함께 자신들이 표방하는 인종차별관이 정당함을 강력히 간증해준다고 확신했다.[37] 헥켈의 지지에서 얻는 효과의 경우에서처럼, 기성 과학계의 지지는 인종차별주의 사상이 보다 광범하게 파급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들의 지지가 없었다면 그런 결과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인종차별주의자들은 ”인종에 대한 우리의 편견은 실질적으로는 과학적 진리의 표현이다”[36] 라는 데 크게 만족했다.
그런데, 그들의 인종관념에 대한 지지는 과학의 권위말고 어디서 그 이상의 권위를 구할 수 있겠는가? 가장 탁월한 동물-행동 과학자의 한 사람이었고, 또 그의 연구 분야의 창시자로 간주되던 콘라드 로렌즈(Konrad Lorenz)는:
”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종문제에 대한 최선의 치료 방법은 기생체(寄生體)의 성장을 가능한 한 조속히 근절시키는 방법이다. 사회 내에서 감염된 부차집단(副次集團:subpopulation)의 열생학(劣生學: dysgenic)적 영향에 대항하는 우생학적 사회집단의 방어수단은 기생체 제거를 위한 과감한 조치야말로 최소한의 필요한계다. ... [건강한] 사회집단이 이 열등 요소들을 효과적으로 제거하지 못했을 때에는 악성종양 세포가 인체 전부위로 확산하도록 내버려두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 열등 요소들은 자체뿐만 아니라 숙주체(宿主體)까지 파괴해 버린다.”[38]라고 진술했다.
로렌즈의 저서는 열등인종들의 ”기생적 성장”을 근절시키기 위해 설계된 나치의 계획을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게르만 종족(German Volk)'의 종족적 우수성 유지를 보장하기 위한 정부계획들은 인종차별주의를 거의 난공불락으로 만들었다. 비록 왕(King)은 ”유태인 대학살(holocaust)은 과학적 유전학적 근거에 준한 것처럼 위장한다....” 라고 말하였지만[39], 정부와 대학교의 엘리트들의 입장은 이미 단단히 확립되어 있어서 동시대의 과학자들은 정부의 인종정책에 진지하게 의문을 제기할 입장에 있지 못했던 것이다. 유태인 대학살(holocaust)에 대한 일부의 책임이 독일 국민의 반-셈족적인 태도에 돌릴 수는 있다 그것도, 다윈 사상이 기존의 독일 국민의 태도에 보태어졌을 때에 가서야, 그들의 반-셈족적인 태도가 그 효력을 치사량까지 높아지는 시너지 효과를 들어내는 결과를 보였던 것이 사실이지만.
우생학은 더욱 더 극단으로 흘렀다.
우생학 계획의 제 1단계는 어느 집단이 유전적으로 우등한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크게 보아 종족별 문화수준을 판단척도로 삼는 기준이었다. 우등 선별평가에 필요한 이상적인 특징들은 이러했다: 즉,
” ... 인종 이론가 한스 귄터(Hans F.K. G nther)가 묘사한 우등한 인간의 외양적 특징들을 살펴보면; '금발, 장신, 긴 두개골, 좁은 안면, 강조된 턱, 좁고 높은 콧날, 부드러운 모발, 엷은 파란색 눈, 큰 눈망울, 희고 분홍빛 피부색깔 이런 것들이다.”[40]
피상적인 관찰만으로 인종을 광의의 차등으로 분류하는 일은 아무한테나 가능한 일이 될 수 있겠지만, 심도있는 탐구를 하고 보면, 인종별 등급을 매기는 작업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실제로 나치가 그것을 인식하기까지엔 오랜 시일이 걸리지 않았다. 그들이 열등하다고 치부해버렸던 집단들 가운데 많은 소집단들, 예컨대 슬로바키아인(Slovaks), 집시인(Gypsies), 그리고 몇몇 다른 인종들은 순수 아리안(Aryan) 인종과 쉽게 구별되지 않았다. 나치가 분류 대상자들을 '최고등' 인종으로 구분할 때, 대상자의 두개골의 크기를 포함하여 여러 가지 육체적 특징들을 측정했다. 나치들은 제나(Jena) 대학교의 인종과학 교수 한스 귄터(Hans F.K. G nther)의 이론에 크게 의존했다. 당시 비록 귄터는 ”나치당과 개인적으로는 격렬하게 논쟁하는 관계에 있었지만, 그의 인종 개념들은 나치당에 의해 수용되고 있었다. ...” 사실, 그의 인종 개념들은 독일 정부안에서 광범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독일의 인종정책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41] 귄터는 ”하나의 인종이 비록 순수하지 못하다고 하여도, 그 구성원들은 해당 인종의 어떤 주도적인 특징들을 골고루 가질 수 있다” 라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주도적 특징들에 준하여 그 인종의 특징을 정형화(stereotyping)하는 길을 열어 주었다.[41]
귄터는, 모든 아리안족(Aryans)의 특징을 북유럽인(Nordic)의 유형이라 하고, 이 유형은 자기 자신이 혼합 인종으로 분류한 유태인의 유형과 대조된다고 결론 내렸다. 귄터는 한 인간의 족보, 두개골의 동물학적 치수 측정, 그리고 육체의 외형의 치수 평가 따위를 종합적으로 사용하여 그 사람의 소속 인종을 결정하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인체는 영혼의 쇼 윈도우이며, 영혼은 제 1원리다.”[42] 우등인종에 필요한 특징들을 지니고 있는 극상급(極上級) 여성들을 특별 구역의 주거에 거주하면서 임신하도록 하여 정부 계획이 끝날 때까지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실험으로 태어난 후손들에 대한 조사에 의하면, 그 후손들의 IQ는 열등인종 쪽으로 후퇴하고 있었으며, 대개가 부모의 그것에도 미치지 못하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나쁜 혈통 이론
나치즘에 미친 다윈의 영향은 비단 유태인에 대한 그들의 차별적인 태도에서 뿐만아니고 여타의 문화와 인종에 대한 태도에서도 마찬가지로 골고루 드러나고 있다. 나중에는 심지어 정신병 환자들에 대한 나치의 태도에서도 다윈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그러는 데는 부분적이긴 하지만 다름과 같은 이유가 있었다, 즉 정신질환은 유전의 영향이 크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정신병 환자들의 혈관 속에는 유태인의 피나 비-아리안족의 피가 섞여 있을 것이란 믿었다.) 그러기 때문에 나치는 궁극적으로 그들을 말살하여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폴리아코브(Poliakov)는 이렇게 지적하였다. 즉, 1900년대 초기 수년 동안에는 감응유전(感應遺傳: telegony) 이론을 수용한 지식인이 많았다. 이 이론은 '나쁜 피'가 한 인종의 혈통을 영원히 오염한다. 그것은 마치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쁜 피가 좋은 피를 몰아낸다”[43] 라는 이론이다. 그것은 오직 멸종만이 열성(劣性) 유전인자의 혈통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며, 그리 되면 진화도 한층 더 진전 될 것이라는 이론이었다.
다윈은 열성 혈통 사례들을 담은 긴 목록을 작성하였다. 그 사례 목록에서 그는 나쁜 피가 전체 유전인자의 혈통을 오염시켜서 영원히 불순한 피를 가진 후손을 출산하게 한다고 결론을 맺고 있다. 뮨헨(Munich)대학교의 언스트 류딘(Ernst Ruedin)을 포함하여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프랜시스 갤튼(Francis Galton), 그리고 나중에 예일(Yale) 대학교에서 정신병학 교수가 된 유진 칸(Eugene Kahn)과 같은 존경받던 수많은 생물학자들이 이 유전학적 주장에 찬성하였다. 이 과학자들이야말로 독일의 강제적 거세법의 주된 입안자들이었다. 이 법안은 아리안의 유전자 풀(pool)을 결함이 있는 '열성' 인자의 오염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설계되었던 것이다. 나중에 가서, '열성인자'는 또한 '무용지물'에 불과하다고 판단하고 대량학살을 정당화했다. 열등집단으로 판단하는 기준의 범위가 점차로 확대되어, 마침내 보다 다양한 인종들과 민족 집단들한테까지 적용되었다. 나중에는 그 기준은 건강이 좋지 못한 노인, 간질병 환자, 증세의 경중의 구별없이 정신지체자, 청각 또는 시각의 결손 환자, 그리고 심지어 어떤 정기적으로 병중에 있는 자, 이런 부류들한테까지 적용되었다.[1,44]
'열등'에 대한 판단기준이 나중에는 흑인계나 몽고계의 외모를 가진 사람이나, 집시들, 그리고 솜씨 있게 설계된 뻔뻔스러운 인종학적 골상학 실험 기준(지금은 쓸데없는 것으로 알려짐)[45]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한테까지 적용되었다.[44] 제스 오웬(Jesse Owen)이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경기에서 4개의 금메달을 획득하자, 히틀러는 흑인을 올림픽 경기에 참가시킨 것을 트집 잡아 미국을 혼내준 적도 있었다.[46]
어떤 진화론 학자들은 심지어 여성들이 남성들과 비교하여 진화론적으로 열등하다는 견해를 옹호하고 나서기까지 했다. 나중에 캘리포니아(California)에서 유명한 신경학(neurology) 교수가 된 로버트 바르텐버그 (Robert Wartenberg) 박사는 여성들은 '남성의 보호'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여성의 열등을 증명하려 노력하였다. 이어서 그는, 남성의 보호가 원인이 되어 약한 여성들이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에 진화의 속도가 훨씬 더디게 진행되었으며, 그 결과로 여성에 대한 자연 선택이 남성에 대한 그것보다 덜 작용하였다고 주장했다. 약자를 제거하기 위하여 어떻게 '선택' 하는가 하는 측면에 대해서 그는 명확한 해설이 없었다. 그 뿐만 아니라, '약자'를 결정하는 기준 또한 없었다. 나치 독일에서 여성들은 일부 업종에의 취업이 공공연히 제지받았다,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에만 맞춰서 취업하여야한다는 것이 법으로 요구되었던 것이다.[47]
나치 독일 내에서의 진화론, 그리고 전쟁
다윈 사상은 독일 사람들로 하여금 최근세에 들어 독일이 치렀던 군사행동에서 얻었던 경험에서 나름으로 뜻 있는 해석을 허락했을 뿐만 아니라, 장차 독일의 공격적 군사 행동을 정당화하는데 필요한 빌미를 제공하였다: ”비스마르크(Bismakian)의 전쟁들에서 거두었던 독일의 군사적 성공은 다윈 이론이 표방하는 생존경쟁의 범주들 속에 깨끗이 합치되어 ..." 독일이 적자임을 [천명하고 있다].[48] 전쟁은 '약한' 인종들을 제거한다는 이유에서뿐만 아니라 '우등' 인종 내에 있는 약한 구성분자들도 제거한다는 이유 때문에 긍정적인 힘으로 인정되었다. 히틀러는 뻔뻔스러울 정도로 대담하게 우등인종을 출산하려고 기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는 또한 공공연하게 인종의 멸종정책과 전쟁정책을 수립할 때 크게 다윈의 사상에 의지하였다.[25] 부분적으로나마 이래서 나치 독일은 공개적으로 전쟁을 찬양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쟁이야말로 고등한 인종으로부터 부적합한 인종을 제거하는 중요한 수단이라는 이유에서이다. 전쟁은 '인종의 등급을 한층 높이는' 데 필요한 단계라고 하였다. 클라크는 Mein Kampf 를 집중적으로 인용하면서 히틀러의 말을 이렇게 결론짓고 있다: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에 대한 히틀러의 태도와 전쟁과 평화에 대한 그의 태도는 동일한 원칙에 근거하고 있었다. ”세계 법정은 ... 하나의 농담에 불과할 것이다 ... 자연의 세계 전체가 강자와 약자간에 벌어지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투쟁의 격투장이다 약자에 대한 강자의 영원한 승리만이 지배하는 세계다. 만약에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전체 자연 안에는 부패물 외에는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 살고자하는 사람은 싸워야만 한다. 끝없는 투쟁이 삶의 법칙인 이 세상에서 싸우기를 원치 않는 자는 생존할 권리가 없다.” 이와 다른 생각은 자연을 '모욕하는' 것이다. 그런 모욕에 대해서 자연은 고통, 비참, 그리고 질병이라는 응분의 보복으로 대답할 것이다.”[49]
히틀러는, 독일 사람의 위대성은 주로 그들이 주전론자였기 때문에 여러 세기에 걸쳐 약한 구성원들을 제거해 버린 결과로 생겼다, 라고 주장하였다.[50] 독일 사람들한테 전쟁이 생소한 것이 아니었지만, 히틀러의 전쟁 정당론은 그들의 전쟁정책에 강력한 지지를 보태주었다. 약한 인종들을 멸종시키는 과업이야말로 진화의 주된 동력이라는 관념은 위감(Wiggam)에 의해 잘 표현되고 있다:
” ... 한 때에는 인간이 동물학적으로 사촌간인 유인원보다 양적으로 더 큰 뇌장(腦漿)을 가지지 못했었다. 그러나 발길질과 물어뜯기, 그리고 싸움으로 ... 그리고 적의 의표 찌르기로 사람은 적들을 물리쳤다. 그리고 이런 감각과 힘을 충분히 가지지 못한 적들은 도태되어버렸다. 더욱이, 인간의 뇌장은 커졌다. 그리고 신체 구조는 아닐지언정 인간의 지혜와 민첩성만은 증대했다. ...”[51]
다시 말해서, 오직 목숨을 담보한 투쟁을 통해서만 인간은 진화하기 때문에, 전쟁은 결국 긍정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인간의 문명이라는 것은 끝없는 전쟁이 아니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화두가 모순된 것 같지만 사실은 진리다 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대의 많은 과학자들은 공공연히 그의 전쟁관념을 옹호하고 나섰다 : 헥켈은 특히 고대의 스파르타 인을 즐겨 칭송하였다. 그는 스파르타 인이 성공적인 우등인종이 된 데는 생물학적 선택을 사회발전에 승인 적용하였던 결과라고 했다. '완벽하게 건강하고 강인한 아이들'을 제외하고 여타의 아이들을 도태시킴으로써 스파르타 인들은 '지속적으로 뛰어난 힘과 활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52] 기형아와 병약한 아이들을 살해하는 것이 오히려 ”공동체는 물론 살해된 아이들한테도 고루 유익한 정책이었던” 만큼 독일도 스파르타 인들의 관습을 따라야 한다. 모든 인생의 가치는 평등하며, 또한 모든 생명은 보전되어야한다는 명제는 도저히 과학적으로 진실임을 증명할 수 없는 '전통적 교의'에 불과할 뿐이다.[18,53]
그러나 유럽의 문명이 여타의 문명에 비해 훨씬 더 많이 진화한 데는 다른 민족들과 두드러지게 대조되게 끝없이 계속되던 전쟁도발이 주된 원인이라는 가정은 거짓이다. 풍족한 식량이 보장되는 조그만 도서의 집합인 군도(群島) 내에 사는 사람들이거나, 또는 혹한 지방에 사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전쟁은 실질적으로 모든 인류한테 전통적으로 수행되어 왔던 것이다.[54] 아시아 대륙에서나 북미 대륙에서와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의 수많은 부족들은 역사적으로 끊임없는 전쟁에 휘말려 왔다.
나치즘과 종교
독일 내에서 우생학 운동에 반대한 사람들 대다수는 기독교도들이었다. 히틀러는 비록 세례 받은 카톨릭 교도였지만, 그는 결코 파문을 당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젊은 시절 한 때에는 자신을 '독실한 로마 카톨릭 신도'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게 확실하다. 실제로 그는 때로는 종교적인 언사를 구사하기도 했다. 성인이 된 이후 그는 공공연히 강력한 반-기독교적 감정을 목청껏 외쳐댔다. 아마도 대부분의 나치 당 지도자들도 반-기독교적 감정에 있어서는 그와 같았던 것 같다. 일견 한 사람의 완숙한 정치인이 된 후부터 히틀러는 공공연하게 교회를 악용하려 하였다.[55] 히틀러는 기독교에 대한 자기 태도를 드러내면서, 노골적으로 이렇게 진술한 적이 있다:
”(종교는) ... 조직적인 거짓말이야, [그것을] 반듯이 박살내야 한다. 국가(the State)야말로 절대적 주인이 되어있어야 한다. 젊었을 때, 나는 종교를 파괴하기 위해 떨쳐나설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 다이너마이트를 가지고! 그 때 이후로, 나는 그게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고 조금은 야릇한 데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성 베드로의 의자(St. Perter's Chair)에 앉아있는 마지막 고위직 성직자는 어느 노쇠한 사제(司祭)인 게 틀림이 없다. 몇 명의 늙은 독부(毒婦)들이 그 사제와 마주보고 있다. ... 젊고 건강한 여자들은 우리 편에 있다. ... 인간성을 속박과 거짓말로 영원히 묶어둘 수는 없는 것이다. ... 기독교가 우리 국민들 위에 군림하였던 것은 오직 6세기에서 7세기에 걸치는 기간이었을 뿐이다. ... 우리 국민들은 예전에는 종교 없이도 온전히 살아오는데 성공했었다. 나는 지금 6개 사단의 SS (Schutzstaffel: 나치 친위대) 병력을 소유한다. 그들은 종교 문제 따위엔 절대적으로 무관심하다. 그들이 죽으러 떠날 때 종교 없이도 영혼의 평안함을 느끼고 있다.”[56]
여기 인용된 그의 말속에는 넘치도록 많은 그의 신념들이 그 진면목을 명백히 드러내고 있다: 독일의 희망인 청년들은 ”종교 문제에는 절대적으로 무관심하다.” 케이스(Keith)도 지적한바 있듯이, 나치당의 이념은 기독교 교리와 한 축의 양극과 같다고 생각했다. 밀너(Milner)는 독일 진화론의 아버지인 언스트 헥켈(Ernst Haeckel)에 대해서 말할 때, 헥켈이 자기 저서 창조론에 대한 자연사(Natural History of Creation)에서 ”사랑과 자비의 교회는 하나의 쇠잔한 사기꾼이 되어, 자연 질서를 왜곡한다.”[57] 라는 말을 지목했다. 헥켈이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된 주된 이유 중 한 가지를 보자. 그가 말하기를, 기독교는:
” ... 인종간의 차이나 피부색에 대해서는 전혀 차별을 두지 않는다. 즉, 기독교는 모든 인종간에 존재하는 장벽들을 허물어 버리려고 한다. 그래서 기독교의 손은 자연의 여신의 손에 반대 입장에 있다. 그것은 인종들이란 바로 자연의 여신의 손이 긴 긴 세월 애써 만들어낸 진화의 수확물이란 걸 망각한데서 오는 태도다..., 안 그런가? 그럴진댄, 기독교는 그 목적하는 바가 반-진화론적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58]
독일 과학계의 두드러진 특징은 종교에 반대 입장을 취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독일 정치계의 이론도 애초부터 종교에 반대하게 되었다. 스타인(Stein)은 진화론에 대하여: 다윈의 이론, 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실시한 어느 강의에서 헥켈(Haeckel)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 ... [헥켈]은, 다윈이 옳았다. ... 인류가 동물의 왕국에서 진화하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해서 그리고 여기서부터 헥켈은 독일에서 풍미(風靡)하던 다윈 이념에 대한 대대적인 해설을 버리려고 운명적인 첫발을 내디뎠다. 그에 의하면, 인류의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생존은 진화의 법칙, 자연의 선택, 그리고 생물학적 현상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다윈도 이를 명백히 예시한 바 있다. 이 해설을 반박하는 이론은 낙후한 자들의 미신 이외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 미신이란 것은 당연히 조직적인 종교를 지목하는 말이다, 그래서 종교는 과학과 사회의 발달에 걸림돌이 된다.”[59] 라고 하였다.
여러 해 동안 히틀러의 최측근으로서 나치 독일에서 가장 세력있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마르틴 보르만(Martin Bormann)은 히틀러 못지 않게 직설적이었다. 그는, 교회는 진화에 반대의사를 나타내고 있다. 이 이유만으로도 교회는 유죄선고를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나치는 과학과 진화의 편에 섰다. 더욱이 나치와 기독교 이념은 양립할 수 없다. 그는 이렇게 그 이유를 설명한다. 즉, 기독교는:
” ... 어리석은 사람들 위에 서 있으며, 대다수 국민을 무지몽매한 상태로 묶어두려 한다. ... 이에 반해서, 국가사회주의(National Socialism)는 과학적인 기초 위에 근거하고 있다. 최근 2000년 전에 설정된 기독교의 불변의 원리라는 것은 점차로 경직되어 마침내 생명력을 잃은 도그마로 변했다. 그러나 국가사회주의는 소명된 과업을 진전시키기 위하여 반듯이 과학적인 연구조사에서 비롯되는 최신 데이터에 따라 스스로의 진로를 결정한다.”[60]
보만(Bormann)은 이어서 주장하기를:
” 오래 전부터 기독교 교회는... 과학 지식이 교회의 생존에 위협이 되고 있다고 인식하였다. 교회는 신학이라는 의장과학(擬裝科學)을 이용하여, 과학적인 연구조사를 억압하고 또 왜곡하려고 상당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우리 국가사회주의의 세계관은 기독교의 교리보다 훨씬 높은 수준에 있다. 기독교 교리는 근본적으로 유태교 교리에서 온 것이다. 또한 이 이유 만으로서도, 우리는 기독교 없이 잘 해나갈 수 있다.”[60]
훔버(Humber)는 히틀러가 흑인종을 '인간과 원숭이의 중간에 있는 기형동물(奇形動物: monstronsities)로 보았기 때문에 독일 기독교도들이 다음과 같은 일을 하는 것을 찬성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교회가 '중앙아프리카'로 가서 '니그로 선교단'을 설립하겠다는데 난색을 보였다. 그는 그 선교활동이 결국에는 "건강한 사람을 허약한 호로(胡虜) 자식으로 변질시킬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하였다. "강자는 반드시 지배자로 남아있어야지, 약자와 피를 나누어 자신의 위대성을 결단코 희생시키지 말아야한다. 오직 약자로 태어난 자만이 내 말을 잔인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한계에 묶인 약자일 따름인 데야 어쩌겠는가! 그것은, 만약에 이 법칙이 승리하지 못한다면, 유기적 생명체의 괄목할만한 상향발전(Hoherntwicklung:上向發展) 따위는 생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몇 쪽 뒤에, 그는 다시 이어서, "살기를 원하는 자는 싸워야만 한다. 이 영원한 투쟁의 세계에서 싸우기를 원치 않는 자는 살 가치가 없다.”[61]라고 말하고 있다.
만약에 인종 해독(害毒)의 이론을 전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창조론적 역사관이 광범하게 수용되었다면, 독일의 인종차별주의는 존립할 수 없었을 것이다, 라고 기술한 참고 문헌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러한 성경적 이론들 중의 한 이론에 의하면, 창세기는 원래 '두 유형의 사람'이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즉, 아담(Adam)과 하와(Eve), 우등 인종 혈통과 '지구의 야수들', 즉 열등 흑인 혈통이 그런 유형이라는 것이다.[62,63] 그러나, 이따위 성경 해석을 받아들인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윈 사상과 나치 사상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과학적 연구 재료는 상대적으로 근소(僅少)한 편이다 진화는 피할 수 없이 선택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많은 진화론 학자들은 이 주제를 기피한다. 다윈 사상과 나치 사상을 다룬 최고의 해설들 중의 한 해설에 의하면, 나치는 열등인종에 대한 멸종계획이 진화론이라는 과학에 굳건히 근거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64] 최근에 수많은 대중 매체들이 놀라울 정도로 솔직하고 정직한 논조로 이 화두를 다루었다.[65] 극악한 나치 사상의 원천은 다윈 사상이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극악한 나치즘의 재발을 막기 위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이 이념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라고 하고 히틀러의 말을 알기 쉽게 바꿔 해설했다; 즉, 역사에서 교훈을 배우지 못한 자들은 역사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66] 진화론을 받아드리지 않는 비-진화론(non-evolution) 이론을 신봉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조차 인종차별주의(racism)를 수용하거나 심지어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은 많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또 그들이 개발한 이론이란 것도 주로 사회의 편견에 호응하든가 아니면 기존 사회제도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처럼 보였다. 오늘날 우리들의 현대적 시각으로 조망하고, 많은 사람들은 제2차 세계대전과 그 결과는 한 사람의 사악한 광인과 그에 뒤지지 않을 만큼 또한 사악한 그의 정부가 표방하던 이념이 계속적으로 야기하였던 결과라고 결론지었다. 그렇지만, 히틀러는 자신을 악인으로 보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오히려 자신을 인간에 대한 시혜자로 생각했다. 그는, 미래의 세계는 많은 세월이 흘러간 후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인종 계획 열등 인종들과의 잡혼을 금지하여 인종오염을 중단시킨 결과로 인종의 유전인자를 고수준의 진화단계에 끌어올린 계획 을 더없이 고맙게 생각할 것이라고 자만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그 어떤 이념보다도 19세기의 사회적 다윈주의 학파의 이론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인간을 생물학적 물질로 보았던 이 학파의 인간관은 결국 계획 사회를 지향하는 충동에 묶이게 하였던 것이다. 히틀러는, 분방한 자유주의에 물든 무차별 잡혼(雜婚)으로 비롯된 그릇된 생식(生殖)은 한 나라의 혈통을 더럽혀서 그 인종을 붕괴시키어 마침내 열등한 인종으로 타락시킨다고 확신하였다. 이 생각은 결국 '양성(positive)' 치유가능 기준을 표시하는 카탈로그를 작성하게 하였다: 즉, 결혼 상대를 인종적, 위생법적, 우생학적인 측면을 고려하여 선택하게 함으로써, 한 편으로는 선택의 방법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적출(摘出)의 방법으로 인간의 생식을 도모하게 하였던 것이다.”[67]
그의 옹호자들은 거듭거듭 이렇게 변명하였다. 즉, 열등 인종들을 강제수용소 안에 가두려 하였던 히틀러의 노력은 그들을 징벌하려는 의도에서보다는 병자들이 집단사회에 끼칠 오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격리수용과 비슷한 안전보호 조치였다, 라고. 실제로 하아스(Haas)의 말에 의하면, 나치가 ”유태인종과 다른 인종을 죽였던 것은 객관적으로 보다 큰 선(善)을 위한 하나의 과학적이고도 합리적인 방법이었다”[68] 라는 것이다. 또한, 아우스비츠(Auschwitz)의 사령관 루돌프 헤쓰(Rudolf Hoess)는 이어서, ”최근의 과학적인 견해가 합법화하였던 투쟁은 우등한 국민과 국가 대 열등한 국민과 국가 간에 개재하는 인종학적 차별개념을 정당화하고 있으며, 또 그들 간의 투쟁을 비준하고 있다”[69] 라고 말했다. 그런데 독일 안에서도 다윈 사상의 해악을 인정한 사람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프러시아(Prussian)의 교육부 장관 노르덴스키욀드(Nordenski ld)는, 비록 한 때나마 1875년에, 다윈의 가르침을 학교에서 금지시켰던 적이 있었다.
”... 프러시아의 교육부 장관은 나라의 각급 교장들한테 공문을 회송하고 다윈 이념과 그에 관계되는 일체의 자료의 취급을 엄격히 금지하였다. ... 이 새로운 이론의 위해성으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하자는 생각에서 그랬다.”[70]
여기서 하나의 흥미 있는 질문이 제기 된다. 즉, 만약 이 금지 조치가 계속 효력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나치의 유태인 대학살(holocaust)이 과연 발생할 수 있었을까? 헤겔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찬반 투쟁의 중심에 있었다. 그에게 큰 지지를 보냈던 사람들은:
”자유사상가들이었다. ... 그리고 위에서 언급하였던 학교 규정과 같은 조치가 각급 학교에서 채택되자,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지지하는 친구들은 많고 많은 헤겔의 망상(妄想)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그 때 그들의 열기가 어떠했었는지를 짐작하는 게 어렵지 않다. ... 더욱이 헤겔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열기 또한 이에 못지 않았다; 다윈 이념을 학교에서 금지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화론의 사상과 그 방법론은 모든 분야에 침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결과에 한한 한 헤겔은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크게 기여하였던 사람이다; 그의 발언 중에서 가치 있는 개념들은 영원한 것이 되었으나, 한편 우리는 그가 저지른 서툰 짓들을 마땅히 그런 것이라고 제쳐놓고 말았다.”[70]
헤켈이 부덕하고 못된 협잡꾼으로서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발생하였던 소름끼치는 사건들에서 결코 적지 않은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것이 인정된 이상, 오늘날 어느 생물학자가 위의 글을 써야할 입장이라면 이 글을 마땅히 그런 것이라고 하고 삭제하고 말 것이다.
대중매체들(mass media)은 Holocasut에 끼친 다윈 사상의 영향에 대한 훌륭한 문집을 그냥 경시해 버린다. 오늘날의 저술가들은 다윈 사상과 나치의 인종 이론과의 밀접한 연계관계, 그리고 그것이 자아내었던 나치의 여러 정책들에 관한 자신들의 포괄적 무지를 용케 둘러대던가, 아니면 심지어 왜곡 해석하려 한다. 그러나 스타인(Stein)은 이렇게 훈계하고 있다:
”민족중심주의, 인종주의, 민족주의 그리고 외국인 혐오증의 역사는 그들이 사용한 과학과 이런 이념들을 사회운동에 적용하는 운동의 역사였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과학은 단지 원료처럼 사용되든가, 아니면 이념 지향적인 정치 배우들이 지닌 선입관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한 증거로 이용되었던 것이 명백하다. 오늘날의 대부분의 사회생물학자들과 생물정치학 학도들은 이런 방법으로 과학을 이용하려하는 모든 기도(企圖)는 단지 의사과학(pseudoscience: 擬似科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71]
그는 이어서 말하기를, 이와 같은 오늘날의 자기방어적인 태도는:
”... 어쩐지 좀 고의적인 역사 왜곡에 근거하고 있다. 민족중심주의와 그 유사 이념들의 역사는 인종주의적이며 배타주의적인 정치사회학의 이론을 과학의 이름으로 진전시키고 또 지지하기 위하여 과학자의 권위를 이용하는데 열심히 참여하였던 당시의 수많은 존경받던 과학자들의 활동의 역사 바로 그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당시의 과학자들이 다만 인종차별주의를 진전시키기 위하여 당시의 과학을 이용하였다, 라고만 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쿠니안(Khunian)식 건망증의 한 행태에 지나지 않든가, 또는 과거의 과학오용(誤用)은 의사과학이라고 단순히 치부해버림으로써 오늘날에 있을 수 있는 과학오용에 대한 우려를 해소하여 역사적 사건을 말소 시킬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71]
자주 주장된 바와 같이 다윈은 자신의 교양에 합당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훌(Hull)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당시 독일사회가 성차별적이고, 인종차별적인 특징을 들어냈던 데는 다윈의 이론 속에 그런 특징들이 있었다는데 기인한다" 라는 설명을 거듭거듭 듣고 있다. 훌(Hull) 은 다윈이 "자기 사회의 특징을 자연의 소치로 돌릴 만큼 철없지 않았다"라고 지적했다.”[72]
종교적 열성의 위험에 대한 경고성 본보기로 나치주의가 자주 거론되지만, 프란시스 갤튼의 우생학이 위험한 역할을 수행한데 대해서는 아주 드물게 거론된다. 그의 우생학은 그의 사촌, 찰스 다윈이 지지한 자연의 선택 이론에 근거하여 창출된 학문이다. 우생학은 아직도 오늘날의 세계에서도 건재하다. 1955년에 캐나다의 어느 동물학자가 지적하기를, ”아마도 우리가 감과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다윈]이 교회가 행사하던 공권박탈의 막중한 규준(規準)으로부터 인간을 최종적으로 해방시키고 여러 세기를 걸쳐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사상의 자유를 인간에게 찾아주었다는 사실일 개연성이 크다.'73 는 것이다. 그런 다음 그는 주장하기를, 사회로부터 교회의 영향력을 줄였든 결과로 우리들은 진화의 원리를 발견하였을 뿐만 아니라, 진화의 수단을 소유하게 되어 그것을 이용하여 진화 그 자체한테 지시도 하고, 진화 스스로가 진전되게 내버려 두기도 하며, 진화의 방향이 나쁠 때엔 진화의 추진을 역추진 시켜서 진화를 멈추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즉 퇴화도 시킬 수 있게 되었다” 라고 하였다.
로완(Rowan)은 사람은 비극적으로 후자를 취했다고 하고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선택은 인간의 진보에 지금까지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위대한 다윈 이론의 원리는 남는다....”. 그런 다음 그는 ”사람이 지능을 얻었을 때, 그는 동물의 세계에서 선례가 없었던 전적으로 새로운 길로 떠났다. 이제 그 행로는 더 이상의 육체적 변화가 아니고 지능적 변화와 그에 버금가는 지적 선택에 의존한다.”[74] 라고 부언하였다. 그는 결론적으로, 불행히도 인간들은 지능적으로 열등한 자들을 '구제하고' 있다, 그리고 열등인종의 문제를 생물학적 법칙에 따라 해결하라는 지시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라고 했다.[74] 제 아무리 재치를 부린다고 해도, 이 이론이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는 내용은 바로 이것이다. 즉, 진화론자가 부적자로 판단한 자들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최소한 우리가 그들을 구제코자 하는 노력은 제한적이어야 하고, 나머지는 자연이 제 소임을 다 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우리는 인류의 궁극적 파멸을 자초하게 될 것이다, 라는 것이 그가 말한 요지이다.
결론
다윈의 진화론의 진실성을 확고부동하게 믿었던 히틀러는 스스로를 인류의 현대적 구원자로 인식했다. 또한 그는 사회가 때가 되면 자기를 위대한 '과학적 사회주의자'로, 그리고 모든 인류의 은인으로 간주하게 될 것이란 느낌을 간직하고 있었다. 자기야말로 우등한 인종을 생식, 그리고 번식케 함으로써, 인간을 보다 높은 수준의 진화론적 발전에 끌어올린 사람으로 온 세계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다윈의 사상이 진리라면, 히틀러는 우리들의 구원자일 것이며, 결과적으로 우리가 그를 십자가에 달리게 한 셈이 될 것이다. 그 결과로 인류는 슬픔을 당할 것이다. 반면에, 만약 다윈의 사상이 진리가 아니라면, 히틀러가 시도하였던 모든 실험은 역사상 가장 잔인무도한 범죄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윈은 가장 파괴적인 철학의 아버지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영슨(Youngson)의 평가에 의하면, 사회에 적용된 다윈의 이론, 즉 우생학은 고금동서를 통해서 가장 비극적인 과학의 실수들 가운데 하나였다고 결론 내리고 있다:
"이 우생학이 가지고 있는 어두운 측면의 정점에는 순수한 '아리안 족'을 그들 사이에서만 짝을 짓게 하여 '주인되는 인종'을 번식시키려 했던 히틀러의 시도와, 열성인자(劣性因子)를 소유한 인종이라 매도되어 6백만의 생사람을 살해한 히틀러의 시도가 자리잡고 있었다. 갤튼(Galton)이 Holocaust의 책임을 히틀러한테 돌리는 것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이 그 계획을 변호한 결과가 어떤 것이 될 것이라는 예측을 하지 못하였던 책임까지도 히틀러한테 돌리려하는 것은 전혀 온당치 못한 작태였다. 어쨌거나, 그는 우생학의 주요 창시자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리고 히틀러가 갤튼의 우생학에 사로잡혀 있었던 사실은 부인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결과를 고려하면, 우생학이야말로 역사상 가장 커다란 과학적 실수들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75]
*감사의 말. 이 문서의 조기 탈고를 위해 깊은 안식과 강평을 주신 Wayne Frair, John Woodmorappe, 그리고 Paul Humber 여러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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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tler’s ‘master race’ children haunted by their p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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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rial and death of Adolf Eich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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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범죄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던 진화론
https://creation.kr/HistoryofEvolution/?idx=17112918&bmode=view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tj/v13/i2/nazi.asp
출처 - TJ 13(2):101-111, November 1999.
반하나님적 철학과 과학 : 그 역사적 고찰
(Anti-God Philosophies and Science:an Historical Survey)
Ian scott
I. 철학의 기원 (The Beginning of Philosophy)
초기 희랍 철학자들은 ”세상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거기에, ”…순전히 인간의 이성을 사용하여 이해하려 노력하는 사람들”이라고 부언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들은 인간의 자유롭고 자주적인 의지에 근거한 이해력 탐구에 헌신한 사람들이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의 자유로운 사고(free-thinking)를 제외하고는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고 하겠다.
철학서적들 안에서 제일 먼저 거명되는 사람은 BC 600년 경에 살던 탈레스(Thales)가 상식이다. 그에 관한 에피소드들 가운데 일식에 대한 예언 이야기가 있다. 그에게 다행하게도 예언된 일식 날에 큰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태양이 갑자기 사라진 것을 보고 神들의 진노를 걱정한 나머지 양진영의 군대는 전투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다!
탈레스는 또한 바다에서의 배를 위한 거리측정법을 발견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기상예보기술도 그가 발견한 과학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발견들에 대한 반대자들의 도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들은, ”철학은 시간낭비다.” 그러므로 ”철학자라는 족속들은 보다 더 실용적인 일들을 하는 것이 더 잘 어울릴 것” 이라고 일갈했다. 탈레스가 실용적인 일을 하지 않았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다가오는 해의 기상조건이 올리브 수확에 최적이 될 것임을 예언하면서, 그는 치오스 섬의 모든 올리브에 대한 압착(壓搾)권을 받아냈었다. 다음 해 가을 과연 올리브는 대풍작이었다. 그러나 그는 올리브를 추수도 않고 판매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철학자들은 마음만 먹으면 축재할 수 있으나, 그런데 흥미를 가지지 않는다고 말할 뿐이었다. 후대에 와서 초기 크리스천들이 그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기술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그가 밤하늘의 별들을 올려다보면서 걷다가 떨어져 죽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탈레스를 좀더 전문적으로 고찰하려면, 우선 그가 자기 주변 사물들을 상당히 자연스러운 시각에서 설명하려 애썼다는 것에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은 물밑에 있다”라는 명제를 견지하였다. ”사실상 모든 것은 물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이와 같은 단언(斷言)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왜 그런가 하면, 그도 ”모든 것은 무엇으로 되어있는가?” 라는 질문을 처음으로 물었던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희랍인들은 올림퍼스 산 위에 살고 있는 제신(諸神)들이 세계 방방곡곡에서 자기네 마음대로 이런저런 일들을 일으킨다는 전통(傳統)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 한 철학자가 그들의 신화와 전설을, 그리고 제신의 이야기들을 감히 무시하고 인간의 이성에 대고, ”모든 것은 무엇으로 되어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실험은 합리적이었다. 민더 강 (River Meander; Miletus 근처를 흐르는) 물이 상류에 있는 석회암 언덕에서 흘러내리고 있다고 생각한 그는 그 강물을 떠다 용기에 넣고 없어질 때까지 끓였다. 그 물이 전부 공기로 변하였다고 말한 그의 결론은 그런대로 정확하였다. 물이 다 없어진 다음 용기 바닥에 남은 흰 잔류물이 관찰되었다. 그리고 얼마쯤은 흙탕도 섞여있었다. 이런 잔류물을 제외하고는 그 용기 안에 있던 물체가 전부 없어져 버린 것을 보니 모든 물체는 물로 되어있음이 틀림없었다. 건조한 토양을 난로 곁에서 뜨겁게 달아오른 돌 위에 올려놓고 관찰하던 탈레스는 그 토양에서 습기가 서서히 스며 나오고 있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는 얼음이 물보다 더 압축된 형태라는 것 말고는 물과 동일한 물체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눈(雪)과 안개의 관계도 얼음과 물의 관계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바위덩어리도 얼음덩어리와 유사한 물체로 생각하였다. 바위는 얼음보다 더 압축된 물체라는 것만 다를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어쩌면 바위도 얼음과 마찬가지로 물로 환원시킬 수 있을는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이와 같은 추론이 듣기보다는 바보스러운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요점은 그의 연역(演繹)은 자연스러운 설명으로서 상당히 호소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설명이 원소 단계에 있는 물체를 언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질문이 원칙적으로 기대하는 대답은 합리적인 사람이 합리적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대답이다.
BC 5세기경 희랍의 떠돌이 철학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프로타고라스는 자기가 체득한 인생체험들을 재치 있게 요약하여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인간의 이성이 궁극적인 시금석) 이라고 말하였다. 이 화두야말로 그때부터 현재까지 철학사조(哲學思潮)를 관통하는 기본적인 명제로 남아있다. 인간의 이성이 모든 사안의 심판관이기 때문에 여하한 명제도, 여하한 신념체계도, 그리고 여하한 사상도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철학은 초기 단계서부터, 난삽(難澁)한 문제에 봉착하였던 것이다. '만약에 두 합리적인 사람이 어떤 주제에 대하여 상반되는 의견을 들고 나온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어는 쪽이 더 합리적인 의견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판관은 누구란 말인가?' 기본적으로 이 문제는 해결이 불가능하였기에 그 때부터 두고두고 철학자들을 애먹였던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성경은 창조주의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에게 책임을 지고 있으며, 창조주는 인간에게 계명의 말씀을 주었다는 전제를 견지한다.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에서 (로마서 1장), 바울은 창조주에 대한 인간의 반항의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생생하게 설명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에게 복종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를 하나님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태도야말로 철학사조를 꿰뚫고 있는 기본적인 본질이라고 지적하였다.
Ⅱ. 현대 과학의 대두 (The Rise of Modern Science)
현대 과학이 부상할 즈음에 (17 세기의 벽두),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엄청난 과학적 신발견들이 폭발하였다. 그 때가 갈릴레오의 시대였고, 조금 나중에는 뉴턴의 시대였다.
1600년대까지는 혈액의 순환현상이 이해되지 않았었다. 그냥 혈액은 조수처럼 끌어올려졌다가 밀려나간다고 생각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만약 동맥이 절단되면, 혈액이 고르게 새어나가지 않고 내뿜질 않는가? 그렇기 때문에 혈액은 끌어올려졌다가 밀려나간다는 것이 분명하다.” 라고 말하였다. 당시로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제를 물리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화살은 어떻게 운동하는가?” 그는 어떤 물체가 한 곳에서부터 다른 곳으로 끌려가는 경우 더 세게 끌면 더 빨리 간다는 사실과 사람이 움직이는 그 물체에 제동을 가하면 그것이 멈춘다는 기본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공학적인 원리에 대한 단순한 이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 새로운 신전을 건축하기 위하여 바위덩어리를 끌고 올라간다고 상상해보라. 우리가 그 바위를 끌면 그것은 움직일 것이며, 우리가 멈추면 그 바위도 멈춘다!? 그러므로 속도는 힘에 정비례한다는 원리가 성립하는 것이다.” 라는 이론을 폈다. 아크로폴리스로 바위를 끌어올리던 노예는 모두 다 이 원리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화살은 어떻게 되었을까? 활시위를 떠난 화살은 뒤를 밀어주는 아무 것도 없는데도 움직인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로서는 풀리지 않는 문제였다. 마침내 그는 화살 끝이 옮겨놓은 공기가 화살 뒤끝을 부채질하면서 화살을 밀어붙이고 있을 것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그의 이론은 그의 말대로라면 화살은 영원히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것말고는 그런대로 괜찮은 착상이라 하겠다. 중세 유럽에 와서 이 주제에 대한 최선의 해설은 프랑스의 철학자/과학자 쟝 베리당 (Jean Buridan 1300-1358)에 의해서 세워졌다. 그는 잡아당겼던 활줄을 놓아주면, 운동량(impetus)이라는 무게도 없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어떤 유동체가 활줄로부터 화살로 옮겨갈 것이며, 그렇게 된 그 화살은 혼자서 속력을 내며 날아간다고 생각하였다. 날아가는 동안 화살은 그 자체 안에 옮겨온 운동량(impetus)이 서서히 빠져나간다고 보고, 운동량이 다 빠져나가는 순간 화살도 운동을 멈추고 떨어진다고 했다. 이 이론은 오늘날에 와서 들어보면 가소롭다. 하지만 그의 개념은 운동량 (impetus)라고 하는 호칭과 어떤 유동형태라는 생각을 제외하고는 오늘날의 운동에너지(kinetic energy)의 개념과 큰 차이가 없다.
17세기에 들어서서 신과학의 대두와 더불어, 인간 지식의 진보의 속도가 한 층 더 빨라졌다. 1700년에 케플러(Kepler)는 화성궤도의 상세도를 그려냈다. 갈릴레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공학 이론을 본격적으로 수정하였다. 그리고 뉴턴은 미적분학에 관한 자기 자신의 새로운 기술을 강력한 도구로 이용하여 천문학과 공학 분야를 전반적으로 재정립하였다. 독일의 기레크(Gierech)는 공기 펌프와 진공상태의 지구의(地球儀)를 가지고 역학실험을 공개하였다. 공기를 뺀 지구의의 반구에 각각 팀을 짠 몇 필의 말이 두 반대 방향으로 잡아당겨 보았으나 두 반구를 분리시키는데 실패하였던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파스칼이 파스칼의 원리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다음에 당신의 발이 자동차의 제동기 위를 밟을 때면, 그의 원리가 지금도 유효하다는 데 감사하십시오. 그의 원리는 수압기 체계의 기초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에서는 토리첼리(Torricelli)가 기압계와 기압측정법을 개발하는 연구를 실시하였다. 얼마 후에 영국에서는, 보일(Boyle)이 보일의 법칙이라는 기체에 관한 기본적인 원리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부피와 압력의 상관관계의 법칙이다. 그리고 뉴턴의 경쟁자로 알려진 후크(Hooke)는 탄력의 기본법을 확인하였다. 그 이후로는 이 법칙을 이용하여 스프링과 균형의 비율을 계산할 수 있어서 자신감을 가지고 스프링의 균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후크과 뉴턴의 또 다른 친교자인 헬리(Halley)는 혜성의 반복적 출현을 식별하는 일을 하였다. 혜성 헬리는 그가 확인하고 재출현을 예언하였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것이다.
제 2부 (Part Two)
아이작 뉴턴은 매우 복잡한 인물이었다. 그는 예언에 관한 자기 저서와 주화 가장자리를 까칠까칠하게 하는 기계를 발명한 공로로 기억될 것이라고 믿었다. (부정한 사람들이 금을 모을려는 목적으로 1파운드 금화의 가장자리를 줄로 쓸어내지 못하게 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는 전적으로 다른 이유 때문에 그는 과학자로 기억되었다. 첫째로 매우 단순한 힘의 시각으로 복잡한 것을 설명하는 능력은 그의 공로로 귀속된다. 사과나무 밑에 앉아있던 뉴턴의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다. (런던의 대역병(大疫病) 기간에 그는 안전을 위해서 케임브리지를 떠났었다! 그의 머리에 떨어진 사과를 맞고 갑자기 만유인력의 법칙을 깨우쳤다든가? 나로서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다. 어쨌거나 그는 떨어지는 사과에 작용하는 힘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그 무엇을 연역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그는 그런 힘이 수많은 현상을 발생시키는 힘들과 연관이 있는 힘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추론하였다. 어쩌면 바람이 불고 있었는지 모른다. 불어오는 바람의 힘 때문에 사과는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비스듬히 떨어졌을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가령, 보다 더 강한 바람이나 허리케인이 불었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났을까? 사과의 낙하는 지구의 곡률(曲律)에 의해 야기되는가? 지구 둘레를 돌 정도일까? 뉴턴은 정확한 계산을 통해서 기본적으로 달의 영향력의 내용을 설명하였다. 사실상 달은 인력을 지구에 보내고 그 힘은 지구 둘레에 미치고 있다.
그런 것이 로켓이 정확한 방향으로 띄워 보낸 위성들한테 일어나는 현상이다. 로켓은 위성을 밖으로 내보내면 위성은 로켓을 떠나 빙빙 돌겠지만 결코 떨어지지는 않는다.
과학자 뉴턴은 모든 현상을 하나로 묶었다━지구 주변을 도는 달, 태양 주변을 도는 지구, 조수의 힘,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이런 현상들을 매우 기본적인 원리로서 설명하였다.
17세기 말엽에 이르자 신세계가 열리고 있었다. 과학적 사고로 충만한 신세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것은 인간 지식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팽대하고 있는 세계였다. 지식은 두 분야로 분리되기 시작했다? 신학과 같이 이해하기 어려운 주제들. 그리고 과학 분야이다. 후자의 경우 아무런 전제도 없이 오로지 실험만이 인정되는 분야로서, '실질적인' 발견이 인간의 지적능력에 의해서 성취되는 분야이다.
18세기의 세계는 여러 방면에서 낙관적인 시대였다. 특히 프랑스가 그랬다. 프랑스에서는 이 시대를 계몽주의 시대라고 불렀다. (계몽 [Enlightenment]이라는 용어는 ”지금 우리는 자유로운 인간답게 사고할 수 있다!” 라는 뜻을 내포한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문학비평가인 볼테르(Voltair)는 그 시대의 대표적 사상가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우리는 이성적이며 합리적이어야 한다. 그러니만치 우리는 그밖에 어떤 것에도 우리 자신을 내맡기지 말아야 한다.” 라고 말했다. 수년 후, 프랑스 대혁명이 벌어질 때 로베스삐에르 (Robespierre)는 실질적으로 이성의 여신을 공식적으로 경배하는 기구를 설치하려고 기도하였던 적도 있었다.
합리적 유신론을 지향하던 볼테르의 태도는 가히 주목을 끌만큼 흥미롭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었음은 물론, 신학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사실상 그들이 18세기 초엽에 주장하던 내용을 고려하여보면, 그가 하나님이나 신학자의 말을 믿을 수 없었으리라는 개연성은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풍자한 내용을 들어다 보면, 이 '자주적인' 인간이 하나님을 정면을 대하면서 사실상 비웃을 수 있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좋은 예가 있다. 그의 기도문을 살펴보자, ”나는 하나님에게 이렇게 기도하였다. 주여, 나의 모든 적들을 우스꽝스럽게 만드소서.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그들뿐일까! 프랑스 디데로(France Diderot)는 방대한 백과사전을 편찬하였다. 디데로가 실질적인 지식이라고 간주하였던 것은 일차적으로 감각기관의 경험과 이성, 즉 과학의 새로운 지식에서 도출되는 지식을 뜻하였다. 계몽시대는 이성이 온전하고도 진정으로 궁극적인 왕좌에서 군림하던 시대였다.
뉴턴과 여러 과학자들이 제기하였던 이론들은 두 결과를 가져왔다.
첫째로 인간이성의 능력에 대한 엄청난 자신감이 생겼다는 것이다. 아래 인용된:
”자연과 자연의 법칙이 어두운 밤에 숨겨있었다 :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뉴턴이 생겨라!” 그러자, 빛이 생겼다.”
라는 시구는 극단적인 표현이라고 생각될 수 있을 것이나, 뉴턴의 충격이 얼마나 장대하였는가를 묘사하는 좋은 예라 하겠다.
둘째로, 뉴턴은 비록 삼위일체를 부정하였지만 유신론자였다고 알려진다. 그는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였다고 믿었다. 하나님이 아니라면 어느 누가 비스듬하게 끌어대는 달의 힘을 만들어낼 수 있었겠는가? 그렇지만 과학자로서 그는 계산과 관찰에 근거하여 이론전개에 집중하였다. 과학자로서의 뉴턴은 이 원칙을 넘어서지 않았던 것이다. 어떤 의미로서는 그의 철학은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나는 그 피조물이 어떻게 생겨나는가를 설명한다.”라고 말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사실상 그는 자기 자신의 좌우명으로, 'Hypothesis non fingo,' 즉, ”나는 가정을 세우지 않는다. 나는 다만 하나님을 좇아 하나님의 생각을 생각할 따름이다.” 이라는 구절을 택하였던 것이다. 사실상, 하나님이야말로 위대한 시계공이었으며, 뉴턴은 그 시계가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찾아내는 사역을 맡고 있었다고 하겠다.
뉴턴이 살았던 한 세기 중에 과학은 한 단계 도약하였다. 1800년에 이르러서는, 우주 밖에 서 행사하시는 창조주의 힘에 의지함이 없이 우주를 설명하려 기도하였던 사람들이 있었다. 프랑스 수학자 삐에르 라쁘라스(Pierre Laplace)는 네불라 가정(Nebula Hypothesis)이라고 알려진 이론을 세웠다. 뜨거운 기체단(氣體團; gas mass)이 원형운동을 그리다가 마침내 그 속에서 행성들이 자라서 나와 식어가면서 태양계를 형성한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최대의 대상, 즉 태양이 근접한 작은 대상들과 더 먼 곳에 떨어져 있는 대상들의 중심에 있다는 설명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상당히 합리적인 이론으로 생각되었다.
라플라스가 나폴레옹에게 소개되었을 때, 수학에 상당한 흥미를 느끼고 있던 이 프랑스 황제는 이 이론에 매료되었었다. 나폴레옹이 물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자리를 잡고 계시는 곳은 어디쯤인가?” 라플라스는 ”폐하, 저로서는 그 가정이 필요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라플라스는 결코 무신론자는 아니었다. 다만 그는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물을 관찰되는 한에서만 설명하려하였던 것이다. 그는 알고 있는 물리학적인 법칙들을 가지고 알려지지 않은 우주의 내용을 설명하려 하였던 것이다. 뉴턴과 그를 좇던 과학자들의 과학이론은 당시 관찰되어 알려진 법칙들을 최대한으로 설명하면서 이 충(衝; opposition)의 이론을 격려하였다.
Ⅲ. 신 지질학 (The New Geology)
18세기 말엽에 스코틀랜드의 버위크에 살고 있던 농부 출신 제임즈 허튼(James Hutton)은 지질학자로 성공을 거둔 사람이다. 그는 오늘날 우리에게 동일과정론(Uniformitarianism)으로 알려진 원리를 개발하였다. 그것은 지구가 지질학적으로 오늘날의 모습이 되는 데는 반드시 현재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힘과 유사한 힘의 작용에 의한 결과이어야 한다는 이론이다. 알 수 없는 것은 알고 있는 것에 근거하여서 설명될 수 있으며, 세계는 현재 작동하고 있는 힘에 비추어 이해된다고 했다. 과학자들은 이렇게 질문한다. ”지구가 탄생하였을 때 어떤 힘이 작동하고 있었는가?” 그리고 그들이 발견한 대답들 중의 하나는 대충 이랬다. ”풍화작용과 굽이진 강의 예를 들어보자. 풍화된 바위들을 관찰해 보라. 대륙의 해안선들의 완만한 융기를 주목하라. 이런 것들은 과거에 일어났던 모든 것을 설명해줄 것이다. 그것이 세계가 어떻게 오늘날과 같이 되었는가를 설명할 수 있다. 과거는 현재의 자연의 힘의 시각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허튼의 말년에 이르러 그의 생각이 지향하는 곳이 어떤 곳이 될 것인가를 인식한 사람들로부터 그는 공격을 받게 되었다. Royal Irish Academy를 비롯하여 여러 단체들이 허튼을 소위 '실천적 무신론자'로 매도하였던 것이다. 정직하게 말해서 허튼은 그의 이론이 자기를 어디로 인도할 것인지 조금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결국 그는 너무 혼란스러워 마침내 신경파탄에 시달리다가 죽음을 맞고 말았다. 허튼이 말하고자 하였던 내용은 이런 것이다. 즉, ”인간의 이성은 이것을 끝까지 생각해 낼 수 있다. 이런 것들이 현재 작동하고 있는 힘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힘들이 세계가 오늘과 같은 세계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부언하여 설명해보자. 당구공들이 어떤 정해진 위치에 놓여있는 당구대를 상상해 보자. 누군가 당구를 친다고 가정한다. 그는 ”저 공들은 어쩌면 그렇게 이상한 위치에 놓였는가! 큐 끝으로 이 공의 여기를 이렇게 치면 그 공은 저기를 가로질러 가서 저 뒤로 갈 것이다! 이 공이 저 구석으로 가는 데는 이 길만이 가능한 길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당구 게임을 하는 사람이 하는 가정이다. 그러나 그 공들은 어떤 침입자를 당황하게 할 생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놓았을 가능성도 있을 수 있다. 또는 어떤 어린아이가 게임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서 그 공들을 가지고 놀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을 수 있다. (정상적인 당구나 스누커 게임) 에서 알려진 힘은 당구대 위에서 볼 수 있는 내용으로 결과된다. 그러나 이 가정이 정확하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허튼의 이론은 찰스 라이엘 (Charles Lyell)에 의해서 더욱 발전되었다. 그의 책 '지질학의 원리(Principles of Geology)가 1830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은 그가 내다본 예측 때문에 지금까지도 어느 정도 유용하게 쓰인다. 라이엘이 이 책을 집필할 때, 그는 동일과정론의 원리를 그냥 수용하고 있었다. 그는 보드라운 진흙으로 된 125cm 두께의 앙금을 예로 들었다. 거기서 그는 진흙이 얼마나 빠르게 호수 안에서 침전될 수 있는가를 계산해보려 기도하였던 것이다. 일년에 1mm 씩 침전되어 125cm가 되려면 약 1000년이 걸린다는 계산이 나왔다.
19세기 초엽에 다른 과학자들이 이와 비슷한 계산을 기도하였다. 레이레이 경(Lord Rayleigh)은 지구의 나이를 추산하려 하였다. 그는 ”바다는 담수로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바다의 염분은 풍화된 바위들로부터 연유되었을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그는 몇몇 강을 선정하고 거기서 바다로 흘러갔을 염분의 양을 측정하려 하였다. 거기에 근거하여 전 지구에 있는 강물이 바다로 유입되는 총량을 추산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지구의 나이를 계산했다. 그는 지구의 나이를 대략 3000만에서 5000만년으로 추산하였다. 이 나이는 진화론자들이 이용하기에는 태부족한 나이였다. 어쨌거나 이것이 그가 계산해 낸 숫자였던 것만은 사실이다.
[NB: 이 숫자는 나이로서는 상한선이지, 지구의 실질적인 나이는 아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염수로 생존하는 어류에 유익한 염수 바다를 가진 지구를 창조하였다면, 지구 나이의 최대한의 상한선은 훨씬 적을 것이다. 물론 대홍수로 해서 바다의 염도가 상당히 희석되었을 것이며, 그 결과로 최대한의 상한선은 더욱 적을 것이다. 편집자 주]
제 3부 (Part three)
지구 나이 측정의 또 다른 방법은 납으로 변질하는 우라늄의 매장량을 알아내는 일이다. 우라늄은 어떤 특정한 율로 퇴화한다고 전제되어있다. 그 물질은 모두 우라늄으로 시작되었으리라고 가정하고 있으며, 납의 매장량이 어느 정도 알려져 있기 때문에 우라늄이 퇴화에 소요된 시간이 추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원리는 언제나 유효하겠지만, 잠재 오류를 무시할 수 없다. 잠재오류라 하면, ”현재에 관찰되는 힘만이 과거에도 작용하고 있었으리라고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라는 명제이다. 현재의 증거만을 가지고는 과거에 현재와 다른 일이 벌어졌을 개연성을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새롭게 ”붐을 이루고 있는” 광산 부락을 상상해보자. 그 광산 마을의 아침 한참 분주한 거리를 자동차로 지나가다 보면, 수년전까지만 해도 이 거리엔 아무 것도 없었으며, 지금 저토록 붐비는 곳이 최근까지는 조용한 두메였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울 것이다. ”이 곳이 이렇게 번창하는 마을로 되기까지엔 여러 해가 걸렸습니다. 저 나무숲과 탐스러운 관목 숲이 이만큼 자라는 데는 수년이 걸렸어요.” 그 관목 숲이 저기 두 그루 거목처럼 이곳에 옮겨 심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사람들은 놀랠 것이다. 이곳에 사는 친구네 집의 나이를 그 집 정원의 잔디를 보고 추측하다가, 그 잔디밭은 두루마리 잔디 세트를 사다가 펼쳐놓은 것이란 사실을 알면 결국 황당할 것이다. 이러한 실례들을 지적하려 들면 한 두 곳이 아닐 것이다.
Ⅳ. 다윈 (Darwin)
19세기 중엽에 다윈이 생물학 분야에서 이룩한 성과는 지질학 분야에서 허튼과 라이엘이, 물리학에서는 뉴턴이 이룩한 성과와 비교된다 하겠다. 예컨대, 다윈은 현재적으로 알려진 힘의 시각에서 사물을 설명하였다. 그는 유명한 세계 일주 여행기 The Beagle에 자기가 관찰하였던 여러 섬들과 핀치새들과 같은 대상들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바 있다. 영국으로 돌아온 후 그는 정원에 잡초들의 자라는 양상을 관찰하였다. 잡초의 생태계에서는 다른 잡초를 질식시키고 생존한 잡초의 개체군(個體群)은 변화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다윈의 진화론적 모델은 두 가지 핵심 본질에 근거한다. 첫째로, 어떤 개체군에서도 변화와 변이는 있을 수 있다는 사실과, 둘째로 어떤 형태로건 적자생존이 진행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대목은 더 이상의 질문이 필요하지 않는다. 즉, 개체군들은 각기 그 자체 내부에서 변화하고 있다. 그리고 적자가 생존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만약에 적자생존이 후손 생산을 잘 하려는 능력이라면, 이도 또한 사실임은 당연하다.
당시 다윈의 이론은 현재 관찰될 수 있는 힘의 시각에서 설명하려하는 또 다른 하나의 이론이었다. 그것은 인간 이성이 현재적으로 관찰될 수 있는 내용의 지지를 받아 모든 것을 궁극적으로 설명을 할 수 있다는 가정을 세웠다.
다윈의 이론이 초래한 결과는 어찌 보면 뉴턴의 이론만큼이나 흥미롭다. 그러나 인간과 자연 속에서의 인간의 위치에 대한 관념을 확립하는 측면에서는 뉴턴의 충격과는 결코 같은 성질의 것일 수는 없다.
다윈 이론이 초래한 결과를 세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사회에 미칠 영향력이 크게 우려되었다. 첫째로 기원에 대한 믿음에 미친 영향이다. 인생과 세계, 그리고 우주 기원에 대한 인간의 이해에 끼친 다윈의 충격은 의심할 바 없이 크다. 1895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대부분 우주생성에 관한 창세기 1장의 기사 내용을 글자 그대로 믿었다는 사실을 오늘날 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1859년 이후, 창세기 초두의 章들의 기사 내용의 진실성을 믿으려는 사람들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 이전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창세기 기사 내용을 글자 그대로 믿고 있었지, 어떤 알레고리나 시, 또는 하나님이 그와 같이 창조하셨다는 본질적인 내용에 대한 일반적인 구전진술(口傳陳述)로는 믿지 않았었다.
둘째로 다윈이 제기하였던 인간관은 더욱 의미심장하였다. 그의 저서, '종의 기원' 은 사실상 인간기원의 문제를 진지하게 파고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 문제는 나중에 가서 취급한 것이다. 그의 관점으로는, 인간은 연속적인 존재로서 원숭이와의 연결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들과도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동물과 인간과의 사이에 있는 간극이 그리 광대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윈이 그의 만년에 또 다른 하나의 저서, '동물과 인간의 정서표현 (The Expression at the Emotions in Animals and man)'을 탈고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 저서는 여러 측면에서 종의 기원 만큼이나 의미심장하다. 이 책에서 그는 생명체의 생존의 가치의 측면에서 평가할 때 생명체의 신체적 구조보다는 그 생명체의 행동 양식에 더 많을 역점을 두었다. 다윈은 기원에 관한 그의 최초의 이론에서 생명체의 외적 구조가 생존환경에 적응하는데 있어서 어떻게 유리한가를 설명하였다. 그는 동물과 인간의 정서표현에서 생명체가 취하는 어떤 특정한 행동 형태의 표현에 주목하였다. 인간은 왜 어떤 특정한 행동 특징들을 가지는가? 그런 특징들은 진화에 유리할까? 그런 특징들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면 생존환경 적응에 불리했을까? 예컨대 인간은 왜 얼굴을 찡그리고, 또 무시무시한 얼굴 표정을 지을까? 여기서 그는 그의 종전의 이론의 시각으로, ”그런 능력은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 라고 물었다. 아마도 이 질문은 쉽게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원시인의 동굴주거지에 송곳니를 세우고 호랑이가 기어들었다고 상상하자. 거기 살던 사람으로서 가장 효과적으로 으르렁거릴 수 있는 사람이 생존 가능성을 가장 많이 가지지 않았을까?
이 저서에서 찰스 다윈은 역시 인간의 감정표현을 얼굴을 찡그리고 으르렁거리는 원숭이와 같은 동물의 감정표현과 연관하였다. 개코원숭이의 군서지의 생활양태를 필름에 담은 것이 있다. 그들은 군서지에 접근하는 대상이 있으면 사람이건 동물이건 상관 않고 무작정 진흙이나 나무 조각들을 집어던지고 먹던 찌꺼기를 흩뿌린다. 인류의 제반 종족들은 거의 다 흙덩어리나 나무 조각들을 집어던지던 단계를 지난 것이 사실이지만, 아직도 으르렁거리는 단계에 있는 부류도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인간의 얼굴 표정을 설명하는데 사용되는 주장은 다른 것이 아니라 연속성에 대한 것이다. 하나의 행동 특징이 다른 행동 특징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렇게 해서 인간을 더욱 광범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할 것 같다. 과학자들은 동물에 관한 수많은 실험과 거기서 얻은 심리학적 발견들이 인간에 관한 심리학적 발견들과 연관지을 수 있을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학교 교실내의 수업태도와 수업관리에 관한 많은 증거들은 쥐와 비둘기에게 실시하였던 실험에 근거한 것이란 것을 알게 된 교사양성 사역에 몸담고 있는 교육자들 몇몇은 크게 우려하고 있다. (나 자신은 이 교육자들이 뭔가 매우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비난할 수 없다!)
동물의 행동수정기술을 개발한 하버드 대학교의 B.F. Skinners는 한 쪽 구석에 버튼을 단 상자 안에 쥐 한 마리를 집어넣었다. 그 쥐에게 버튼을 누르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우선 그 쥐에게 밀 알갱이나 치즈 조각을 던져놓은 위치로 눈을 옳게 방향을 바꾸게 하는 것부터 가르쳤다. 그 쥐는 그 방향을 바라본 대가로 먹이를 먹도록 하지 않고, 그 버튼이 설치된 위치로 다가섰다는 이유로 먹이를 먹게 하였다. 이렇게 반복하여 그 일에 익숙하게 하였다. 그 다음에는 한 조각의 먹이를 떨어뜨렸다. 그렇게 하여 그 쥐는 보상을 받는 습관에 길들게 되어 마침내 먹이를 원할 때면 언제나 그 버튼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결국 버튼을 눌러대게 되었다. 보상을 주는 방법을 매우 용의주도하게, 언제는 간헐적으로 다른 때는 무작위로 하여, 그 가련한 놈이 버튼 누르는 일에 중독 들게 만들었다. 사실상 그 놈은 버튼을 하루 종일 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과학자들은 비둘기가 보상을 받지 못하면 주둥이를 계속 찍어대어 어쩔 수 없이 새장에서 끄집어 낼 만큼 중독증세를 보이는 단계까지 실험을 계속하기도 하였다.
여러 분야 중에서도 특히 스포츠나 연예(演藝) 분야에서는 인간을 단시간 내에 일반화시키는 일이 가능하다. 외팔의 밴디트라는 포커 기계는 이 실험에 놀랄 정도로 안성맞춤이다. 실험은 사람이 이 기계 조작에 습관 들게 하는 방법이다. 지불 기능을 꺼버리고, 그 사람이 기계 조작을 중지하기 전에 그 기계 안에 약 800 개의 10전 짜리 주화를 집어넣었다. 그 실험에 그 사람이 반응하는 것을 주목해보자. 만약에 그 실험을 쥐에게 적용할 수 있다면, 인간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실험은 학교 수업 관리의 원리에도 적용할 수 있었다. 한 줌의 젤리 빈(콩 모양의 사탕과자)을 가지고 소란을 일으키는 아이들이 왁자지껄 시끄러운 교실에 교사가 들어선다. 순간 한 아이가 잠깐 조용해진다. 그리고 그에게 젤리 빈 한 톨을 건네준다. 이 행위가 그의 정숙을 더욱 북돋운다. 그리고 뒤따라 나머지 아이들도 조용해지다가 마침내 반 전체 어린아이들은 선생의 통제에 순순히 응하게 된다! 이 이론은, 만약에 아이들이 어느 정도 조용해지면, 그 선생은 말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질서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오늘날 신경질환 병자나 정신지체 아동에게 적용하고 있는 행동수정기술은 다양하고, 또 광범위하게 수용되고 있다. 그리고 쥐와 비둘기에 대한 조사에서 발견된 내용들이 교생실습 중인 예비교사들을 위한 교재에 포함되었다. 행동은 어떤 경우에는 유사점이 많다. 그러나 총체적 연속성에 대한 가정은 억지 가정이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가 그것을 오래 생각하면 할수록 쥐와 인간 사이에는 큰 차이점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Skinner의 상자 안에 든 쥐에 관해서 농담 하나를 만들었다. 쥐 한 마리가 다른 쥐에게 말을 건다. ”어이, 이거 봐, 내가 Skinner 실험에 길들어졌나봐! 저 버튼을 누를 때마다 그는 내게 먹이를 주거든!” 이 농담을 재미있게 만드는 것이 무언가 하면, 사람들이 쥐를 ”생각하는” 동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데 동물 실험 모델을 얼마나 빨리 인간의 사고 행동에 사용하는가를 알면 진정 흥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만치, 우리는 큰 목소리로 이렇게 물어야만 하겠다. 즉, ”이러한 실험결과를 이성의 범위 안에서 어디까지 적용하려 하는가?” 라고.
과학(science)이 반-하나님적 철학에 근거하고 있는 의식 또는 무의식적인 골격 안에서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불가능하다. 왜 그런가 하면, 더 이상 '이성'에 대한 수긍할 만한 정의는 없기 때문이다. 오직 인간은 하나님을 창조주로서, 그리고 우리 생명을 유지해주는 존재로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우리 구주로서 인정하고 영접할 때만, 무엇이 이성을 구성하고 무엇이 이성을 구성하지 않는가에 대한 유효한 결론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3/i4/anti_god.asp
출처 - Creation 3(4):28–37, November 1980.
과학자들에 대한 신화
(A Look as Some Myths about Scientists)
오늘날 사람들은 창조과학(creation science)이 현실과학(real science) 보다 더 편향적이고 '외골수' 라는 관념을 상식처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창조론자들이 결국에는 성경에서 시작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러니 어떻게 창조과학자들이 현실과학자들처럼 객관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겠는가? 라고 묻는다. 그런데, 우리는 과거를 연구함에 있어서 기원의 전제를 배제하고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이미 수없이 많은 글들에서 역설하였다.
본 글은 그 점을 거듭 거론하려는 의도로 쓰여진 것이 아니며, 또한 진화론의 종교적인 본질을 재삼 지적하려는 의도로 쓰여진 것도 아니다.
그 대신에, 본 글은 과학자들이 견지하는 증거에 대한 접근방법이 누가 뭐라고 해도 중립적이며 항상 객관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그들의 강력한 신화(myth)를 직접 다루어 보려는 것이다. 이 일을 추진함에 있어서 우리는 반과학(anti-science)이나, 반과학자(anti-scientist)적인 태도가 아님을 천명해둔다. 우리가 이룬 발견들은 창조론자로서의 우리의 설득이 포함되어 있지만, 어쨌거나 그 내용이 모든 과학자들에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자들도 여느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인간이라는 사실에 우리는 우선 주목하려 한다.
과학자들을 대상으로 1980 년에 사회학적인 조사를 시행한 적이 있었다.1 주제는 과학자들과 그들의 직업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전통적 믿음들을 그들이 어떤 태도로 대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믿음 (Belief) 1 : ”과학은 조직화된 회의론이다. 이 말의 뜻은 … 지식에 대한 과학자의 연구는 정밀한 분석 없이 수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과학자는 남의 발견들은 물론 자신의 발견에 대해서도 반드시 의심을 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2
조사대상이었던 과학자들 중 약 4분의 3은 이 믿음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사실상 자신의 생각(사상)과 합치하는 주제를 수용하는 것은 비정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과학사를 살펴보면… 과학자들은 자주 주관적인 방법으로 일을 추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과학 분야에 발생하였던 몇몇 주요한 개념상의 변화에 대한 최소한의 실험적 증명은 그 중요도에서 철학적 주장에 비하여 2 차적인(부수적인) 것으로 되어있음도 알 수 있다.”3
믿음 2 : ”감정적인 중립. 이 말은 과학자는 특정한 사상이나 이론에 감정적으로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사대상 과학자들의 대부분이 이 믿음을 아주 강력하게 거부하였다. 그들의 이런 반응을 보고 본 저자는 다른 연구를 참조하면서4 이렇게 지적하였다. 즉, 과학은 객관적이며 사심(私心)이 없는 사람들에 의해서 추진되는 무감정적인 기획이라는 신화는 이제 더 이상 효력이 없다. 더욱이 감정적 이해관계에 무관심하고 객관적이어야 하는 과학자의 자세는, 오직 초심자나 젊은 과학도만이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 조사와 유사한 조사에서 드러난 흥미로운 사실은, 과학자에 대한 일반적인 인상(즉 과학자들은 객관적이라는)이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과, 전문가들은 과학자들의 감정적 참여가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으며, 그러는 것이 정상적이라고 인정한다는 사실이었다. 과학탐구에 대한 고전적 관념은 더 이상 추구하지 말아야할 이상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 그런가 하면, 응답자들은 자신의 발견들과 새로운 정보들을 동료들과 공유하는 객관적이며, 비판적이고, 사심 없는 진리탐구자로서, 이상적인 과학자의 인상에 알맞게 행동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물론 스테픈 굴드 (Stephen J. Gould)가 ”(과학을 언급하면서) 본질적으로 가장 순수한 인간적인 행동” 이라고 말했을 때에 예견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과학자들의 대다수는 인간 기원에 대한 어떤 관념에 깊이 감정적으로 탐닉해버렸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기를 지은 이와 회복시켜주는 이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고 한다. 그런 사상이야말로 그들로 하여금 죄와 심판의 관념 없이도 살 수 있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References
1. Nina Toren, 'The New Code of Scientists', 1333 Transactions on Engineering Management, Volume EM-27, No.3, August 1980.
2. N.W. Storer, The Social System of Science, Holt, Rinehart, Winston, New York, 1966, p.79.
3. S.G. Brush, 'Should the History of Science be Rated X?' Science, Volume 188, March 22, 1974, p.183; T.S. Kuhn,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0.
4. American Sociological Review, Volume 39, August, 1974, pp.579-95.
*CARL WIELAND, M.B., B.S., is managing director of Australia's Creation Science Foundation in Brisbane. He is also actively involved in speaking and writing on creation science.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home/area/magazines/docs/v11n3_myths.asp
출처 - AiG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610
참고 :
진화론자들의 오만
(Evolutionary Arrogance)
Dr. Henry M. Morris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만 참으로 사람이로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욥기 12:1-2).
진화론 사상에 무엇이 있기에, 그 많은 진화론의 대변인들을 오만하게 만들까? 그들은 진화론의 이념이 우주질서의 기원서부터 종교의 기원까지를 망라하는 모든 분야의 문제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만큼 광범위하다고 주장한다. 어떤 진화론자들은 과학 그 자체를 '神'으로 삼고 스스로를 그 신의 선지자나 성직자가 된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 사상이 하나님의 필요성을 배제하는 것처럼 행세하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다. 사실상 그들의 내림굿을 받은 자들 가운데 한 사람은 그들을 진화론(이라는 신)의 '무당(shaman)'들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들은 우리의 지도자들에게 복종하고, 우리의 어른들에게 존경을 표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무당들의 지시를 따릅니다. 이 시대가 과학의 시대이기에, 과학주의의 무당들은 우리에게 당연히 존경을 요구합니다. … 과학자들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주도적인 신화창조자들입니다.” 1
저들의 위대한 무당들 가운데 한 사람, 언필칭 생존 중인 우두머리 진화론자는 하버드 대학교의 에른스트 메이어(Ernst Mayr) 교수다. 그는 진화론이 생명에 관한 그 엄청난 질문, '왜' 에 대해서까지 정답을 내놓을 수 있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과학자들까지를 포함하여 보통 수준의 지성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다들 '무엇'과 '어디에' 그리고 '어떻게' 라는 질문들은 다룰 수 있겠지만 '왜' 라는 질문만은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이 마지막 문제는 신학적인 대답을 요구한다. 최소한 철학적인 대답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메이어 무당께서는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즉, ”진화론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생물학에 관한 '왜'의 질문에 적절한 답을 내놓을 수 없다.” 2
셔머(Shermer)는 결국, ”우주론과 진화론은 전통적으로 종교와 신학의 영역에 속하던 궁극적 기원에 관한 질문들을 묻고 있지 않는가!” 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진화론 사상은 용감하게 초자연주의적인 대답을 대신하여 자연주의적인 대답을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 정신적인 자양분까지도 공급하고 있다.” 3 라고 말한다.
이 지도자들이 진화론 신앙에 그와 같은 거만한 권위의 옷을 입히려고 하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그들의 마음속에 창조론과 같은 반대론에 대한 깊은 초조감만 생기게 할 것이다. 그들은 대진화의 과학적 증거들을 들고 나와서 창조론자들에 대항하는 대신에 욕설과 조롱에 기대려 하고있다. 미주리 주에 있는 어느 대학의 교수 한 분은 ”창조론자들의 몽상적인 직해(直解)주의”4와 특히 ”헨리 모리스(Henry M. Morris)와 같은 지도급 창조주의자들의 황당한 이론”5에 분통을 터트렸다.
높은 존경을 만끽하던 사리가 밝은 故 굴드 (Stephen Jay Gould)와 같은 진화론자들까지도 그의 운명 직전에 출판된 1433쪽에 달하는 두툼한 자기 저서에서 분노 섞인 목소리로 '창조주의자들을 재난'6 이라고 언급하였다. 그는 어느 실력 있는 창조론 과학자와 토론을 갖자는 초대를, 그것은 창조론과 그들의 과학자들의 위상만 높여주는 실수를 범할 뿐이라며, 사뭇 자존적이며 오도(誤導)할 위험성마저 있는 설명을 섞어서 거절하였던 적이 있다.
기쉬 박사(Dr. Gish)와 몇몇 창조주의자들과 벌였던 여러 번의 토론에서 패배를 맛본 맛시모 피굴리우치 박사 (Dr. Massimo Pigliucci)는, ”수많은 미국사람들이 이름조차 자가당착적인 소위 창조과학회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7의 죤 모리스와 듀안 기쉬와 같은 (퇴물)공룡들에게 지금도 현혹되어 있다”니 참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며 비탄을 토로하였다.
토론에 응하면 적지 않은 재정적 인센티브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굴드 박사는 창조과학자들과의 토론을 결코 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돌아서자마자 유인물을 통해서 창조과학자들을 비평하는 데는 재빠르기 이를 데 없었다. 그는 창조과학자들을 ”통상적인 냉소주의와 무식을 노정하면서 스스로를 '창조과학자' 라고 호칭하는 근본주의자들”8 이라고 비하하였다. 사실상 굴드는 자기 입장을 지지하는 사실 증거를 가지지 못할 때면 언제나 욕설과 인신공격적인 토론 기술에 매달려왔던 것이 비일비재하였다.
굴드 박사는 진화론의 발전과정을 역사적으로 조명하는 걸작을 남겼다. 그 저서는 진화론자들 간에 벌어졌던 수많은 갈등들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1433쪽에 달하는 거대 역작은 대진화의 증거를 단 한 가지도 담지 못하고 있다. 존귀하신(?) 에른스트 메이어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도 그의 최근 교재9에 그런 증거를 제시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뻔뻔스럽게도 ”지식인들은 모두가 다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유래됐다는 것을 인정한다.” 10 라고 선언했던 것이다.
굴드의 말에 따른다면, 이론상 이 주제에 관해서 아는 것이 없는 우리 무식한 창조론자들은 주요 전략으로서 ”언제나 과학 원전들을 틀리게 인용하는데 의뢰한다.” 11 또한 그의 말에 의하면, 창조론자들은 무식할 뿐만 아니라 거짓말쟁이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은, 그의 묵중한 여러 저서들은 말할 것도 없이 앞서 언급한 1433쪽짜리 역작에서도 구울드 박사는 창조론자들이 틀리게 인용하였다는 원전을 단 한 건도 밝힐 수 없었던 것이다.
창조주의자들도 물론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인간이다. 그리고 우리가 진화론자들을 인용한 수 천 가지들 가운데 몇 개쯤은 틀린 것이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드문 경우임에 틀림없다. 물론 고의적인 실수는 더더구나 아니다.
만약에 공간만 주어진다면 진화론자들이 과학적인 증거 대신에 상대방을 험담으로 비하하고 모욕하는 사례들을 얼마든지 내놓을 수 있다. 더 어이없는 행태는 지성인이라면 어느 누가 진화론자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고 거듭거듭 주장하는 진화론자들의 오만한 태도다. 가히 놀랍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작가는, 1996년에 교황이 가톨릭 교회가 진화론을 인정한다는 것을 재확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가톨릭교 신도들의 40%가 하나님이 10,000년 전에 인간을 창조하였다는 것을 믿는 다는 2001년의 갤럽 여론조사를 보고 비애를 느낀다고 한탄했다. 사실상 전체 미국인의 45%가 창조주의자의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12
Evolution 지에 기고한 고명하신 두 분 작가들의 중요한 기사에서 그들은, 이것(위의 갤럽 여론조사 내용)은 단순히 ”일반대중의 진화론에 대한 이해의 결핍을” 시사할 뿐이라고 역설하고는 이와 같은 무식의 발로는 ”진화론 사상과 반진화론 사상에 대한 대중매체의 보도 태도의 결과로 생겼을 것”이라고 암시하고 있다.13
아마 이 작가들이 조롱하자는 뜻으로 쓴 글은 아닐는지! 그들도 모든 매체들이 실질적으로 진화론을 강력히 홍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틀림없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반대중'은 공교육기관이나 세속적인 최고학부를 거치는 동안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전 생애를 통해서 오직 진화론만을 교육받아왔다는 사실을 그들이 모를 리 없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와 같은 그들의 세뇌활동이 여하튼 간에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중은 왜 창조론을 지지하는가? '일반대중'의 소수만이 교회나 주일학교에 나간다는 통계이고 보면, 그들이 창조론 지지하게 되는 데는 혹시 진화론이 증거나 상식과는 모순 되기 때문에 직관적으로 진화론이 틀렸다는 것을 감지하였기 때문은 아닐까!?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진화론의 증거들을 그들 나름으로 연구한 결과 진화론이 결국은 전혀 과학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보았기 때문은 아닐까!?
고등교육도 크게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 같다. 알터즈(Alters)와 넬슨(Nelson)은 이 분야에 대해서 상당한 조사보고를 발표한바 있다.
”조사자들이 시행하였던 조사의 결과를 보면, 전공 학생과 입문단계의 비전공 학생 간에 생긴 생물학 성적의 차이가 거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1200명의 학생에게 생태학과 진화론적 생물학에 대한 예비 시험을 실시하였던 바, 생물학 전공 학생들의 점수가 비전공 학생들보다 겨우 6%만 높게 나타났다. 같은 학생들에게 다음 학기 첫날에 사후 시험을 실시하였던 결과를 보고, 조사자들은 ”이 자료를 더욱 집중 교수를 받았던 전공 학생들이 비전공 학생들과 같은 정도의 이해 수준을 나타냈다!”라고 결론을 맺고 있다.” 14
과학 분야를 전공하는 학생들도 진화론과 관련이 있는 교과목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비타협적이라는 형상을 나타내는데, 이것은 아마 종교가 원인인 것이 틀림없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그들은 말한다!
”종교교육이 심화되면 될수록 더욱더 많은 증거들이 종교적 신앙과 모순을 느끼지 않는 학생들의 시각과 다른 시각으로 조망되었다.” 15
그렇다, 일리 있는 이야기다. 만약에 진화론자들이 학생들을 설득시켜 무신론자로 만들 수 있다면, 그들을 진화론자로 전향시키는 일이 한결 수월할 것이다!
하지만, 과학적인 일반화를 추진하려면 최소한 과학적인 사실에 근거하여야한다는 것을 믿고 있는 학생들을 설득하는 데는 언제나 문제가 도사리고 있음을 그들도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더욱 어려운 것은 창조에 대한 성경의 설명이 창조주 자신이 계시를 통해서 보여준 진리라고 믿는 학생들을 설득하는 문제다.
신의(神意)에 의한 '진화의 계시'나 대진화의 참 과학적 증거도 내놓지 못하면서, 지성의 우월성을 내세우는 저들의 도전적인 태도 (심지어 온전히 실력을 갖춘 수천을 헤아리는 창조과학자들까지도 깔보려는 태도)를 진화론자들의 오만의 소치라고 밖에 달리 이해할 수 없지 않은가!
References
1. Michael Shermer, 'The Shaman of Scientism,' Scientific American (June 2002), p.35.
2. Ernst Mayr, What Evolution Is (New York: Basic Books, 2001), p. xiii
3. Michael Shermer, op cit., p.35.
4. Taner Edis, 'Darwin in Mind,' Skeptical Inquirer (vol. 25, no. 2, march/April 2001), p.36.
5. Ibid., p.35.
6. Stephen Jan Gould, The structure of Evolutionary Theory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2002), p.984
7. Massimo Pigliucci, 'Defending Evolution, as Strange as It May Seem,' Evolution (vol. 56, no. 1, 2002), p. 206.
8. Stephen Jay Gould, op cit., p.101, footnote.
9. Ernst Mayr, op cit.
10. Ernst Mayr, 'Interview,' Omni (March/April 1988), p.46, emphasis supplied.
11. Gould, op cit., p.986.
12. Roger Doyle, 'Down with Evolution,' Scientific American (vol. 286, March 2002), p. 30.
13. Brian J. Alters and craig E. Nelson, 'Perspective: Teaching Evolution in Higher Education,' Evolution (vol.56, October 2002), p.1892. Dr. Alters was the lead author of Defending Evolution (Boston: Jones & Bartlett, 2001, 261 pp), an anti-creationist book which was reviewed in the september 2001 issue of ICR's Acts & Facts. Dr. Nelson is a professor at the University of Indiana who has unsuccessfully debated for evolution several times.
14. Ibid.
15. Ibid., p. 1898.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www.icr.org/article/evolutionary-arrogance
출처 - ICR, 2009. 7. 1.
진화론의 미술
(The Art of Evolution)
미술은 진화론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사실상 관련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많이 있다. 자연사 박물관들에는 소위 잃어버린 고리 처럼 보이는 벽화들로 가득 차있다. 순전히 상상력에 의존한 그림임에도, 과학적으로 입증된 잃어버린 고리의 모습처럼 벽화들을 이용하고 있다.
어떤 대상을 전혀 색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면 종전의 시야를 넓히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그래서 추상미술의 시각으로 진화론의 개념들을 전개하면, 어떤 그림이 될지 그 귀추가 궁금해진다.
추상미술은 아무나 이해할 수 있는 예술은 아니다. 훌륭한 추상미술들 중에는 현실에 굴절을 가하는 정도가 지나치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은 사실화가 비교적 이해하기 쉬운 것이 사실이다. 즉, 추상미술은 저자가 가장 중요한 요점들을 한 두 단락에 집중시키는 문서의 요점발췌와 유사하다. 그런 발췌문은 기술적인 세부설명들을 배제함으로써 기본적인 문제에 주의를 집중시키게 한다. 이것은 혼란상태의 정보들을 제거하여 중요한 요점들만을 강조하는 효과가 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추상 화가는 중요한 특징들만을 내포하는 그림을 그린다. 그런 추상화는 중요하지 않은 세부사항들을 배제하여 핵심 포인트로부터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정보혼란 상태의 그림이 되지 않게 한다. 왼편에 있는 그림은 추상화가가 늑대의 얼굴을 어떻게 그리는가를 설명하는 하나의 예다.
늑대는 머리 정수리에 두 개의 커다란 귀를 가지고 있다. (이 그림에 그려놓은 유별난 귀로해서 주의가 딴 곳으로 팔리지 말기를 바란다). 늑대는 밀접하게 마주 접근한 두 눈, 그리고 기다란 코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유명한 모나리자의 눈을 마주 붙이고, 코를 기다랗게 밑으로 쳐진 채 붙여주었다. 우리가 그린 좁디좁은 늑대의 얼굴 안에 얼굴이 가지고 있는 특징들을 모두 차곡차곡 쌓아놓았다.
이 그림을 그린 추상화가가 고래의 얼굴을 그린다면 아래의 그림과 같이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추상적인 고래 그림의 특징들은 고래의 특징들과 그 모습이 차이가 있다. 고래는 귀를 머리 위에 가지지 않는다. 그런데 코는 머리 위에 붙어있다! 두 귀와 눈, 그리고 하나의 입이 대강 동일 선상에 수평으로 놓여있다. 그래서 하나의 선을 긋고 그 위에 그것들을 배열할 수 있다. 좁게 마주 붙은 늑대의 눈과는 다르게 고래의 두 눈은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어서 우리는 한 눈에 두 눈을 볼 수 없다. 더욱이 고래한테 유별스런 두 귀를 (그러나 못지 않게 유명한 귀) 달아놓아, 고래는 늑대의 귀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귀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고래는 두 귀를 반향정위 (反響定位)의 용도로 사용하지만 늑대의 귀는 그렇지 않다.
진화론자들은 어떤 늑대 닮은 괴상한 동물이 고래로 진화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고래로 진화되는 중간의 과도기 형태가 있어서, 두 눈 사이에 코가 위치하고, 중간형태의 두 귀를 달고 있어서, 아래의 그림과 같은 동물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비슷한 얼굴을 한 동물의 화석 따윈 일찍이 발견된 적이 없다. 로드호세투스(Rodhocetus), 앰블로세투스(Ambulocetus), 그리고 바실로사우르스(Basilosaurus)는 두 눈 아래에 있는 하나의 주먹코 끝에 두 콧구멍이 나있다. 이것들은 소위 ”고래의 진화과도기의 중간 화석”이라고 주장되는 것들인데, 이것들 중 어떤 것도 코가 두 눈 사이를 지나서 머리 정수리 위로 이동하였다는 설명을 전혀 하지 못한다.
여러분들은 어쩌면 '과도기 형태'에 대한 진화론자들의 미술 개념들 안에서 이와 같은 맹점을 인지하지 못하였을는지 모르겠다. 그것은 아마도 여러분들이 미술가의 '현실적' 개념 속에서 늑대 닮은 신체가 고래 닮은 신체로의 변화가 원활해서 쉽게 인지하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과연 여러분들이 그러한 신체의 변화과정의 기본이 될 수 있는 골격을 본 적이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우리도 본 적이 없다. 그 신체를 그린 화가들도 보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한, 그 어떤 파키세투스(Pakicetus), 앰블로세투스, 로드호세투스, 인도세투스, 또는 프로토세투스의 후-두개(post-cranial) 골은 아직까지 발견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연구에 이용하는 대상이라 것들은 기껏 해봐야 두개골(skull) 이든가, 어떤 경우에는 두개골 파편들이 전부다. 신체의 모양은 치아의 모양에 따라 결정되어진다.
단 한 개의 치아에 근거하여 구성한 네브라스카(Nebraska) 인의 그림을 여러분들도 보았을 것이다. 그 그림은 (어떤 사람들한테는) 매우 설득력이 있는 것 같았지만, 나머지 치아들이 돼지 턱의 치아라는 것이 확인되고는 그만이었다.
아래에 예시된 그림은 National Geographic 에 게재되었던 그림이다. 이것은 영국의 Boxgrove에서 발견된 두 개의 치아, 한 쪽 다리의 정강이뼈, 독일의 Heidelberg 근처에서 발견된 아래턱뼈, 그리고 에티오피아의 보도(Bodo)에서 가져온 두개골을 근거로 한 그림이다. 이 파편들이 동일한 개체의 것들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럼에도 진화론자들은 이 모든 파편들이 그들이 Homo heidelbergensis 라고 부르는 종(種)의 것들이라고 주장한다.
위에 전시된 늑대와 고래의 추상화 그림들은 실물을 왜곡하고 있으나 받아들일 만하다. 실물 늑대나 고래는 그 그림과 꼭 닮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추상화는 해당 동물의 얼굴의 핵심 요소들의 위치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어서 하나의 얼굴이 다른 얼굴로 진화하려면 어떤 변화를 거쳐야하는가를 알려준다.
진화론자들의 과도기형태의 그림은 이들 추상화 그림보다 훨씬 정직하지 못하다. 왜 그런가 하면, 사실적 양식에 기준을 두고 볼 때, 그들의 그림에서 어느 부분들이 사실에 근거하고 있는지, 어느 부분들이 진화론적 믿음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술을 사랑한다. 그러나 우리는 미술이 과학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미술은 과학일 수도, 과학이 아닐 수도 있는 일종의 이념표현의 방법이다. 미술가의 관념들은 과학적인 증거는 아니다. 그것들은 단순히 하나의 영상(image)을 표현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그림을 지나치게 믿지 않는 것이 좋다.
Footnotes
1. Taylor, The Illustrated Origins Answer Book, page 67 (CR)
2. Defense mapping Agency Technical Report DMA TR 8350. 2, September 30, 1987, page 6-1.
3. Ibid. Table 6. 1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ridgenet.net/~do_while/sage/v4i3f.htm
출처 - 기타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613
참고 : 6582|6553|6486|6550|6149|6132|5081|5130|4639|5740|5683|5420|5994|6449|4821|6263|6018|6468|6148|6474|5510|5947|5954|5591|6211|5589|5602|5966|4837|6090|485|3890|390|2349|3782|6438|4510|5474|6495|5458|6243|5863|2698|6399|5460|6489|5135|5000|4828|6118|6394|6168|6138|5996|774|5497|5827|5158|5962|6358|6258|6119|4066|5544|5443|6556|6501|6096|5459|5274|5450|5909|6461|6436|5586|4542|5041|3391|6393|6476|6292|5796|5768|6271|5462|6146|6439|3591|6125|3426|6285|6152|6153|6022|6286|5725|6586
진화론 : 역사의 평가
19세기 엄청난 발전을 이룬 과학 중에서도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에 의하여 제창된 진화론이었다. 이 진화론은 특이하게 학문적 영역에서보다도 사회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 다윈은 뉴턴이 물리학에서 달성한 것을 생물학에서 이루었다. 생물학을 일반법칙에 토대를 둔 과학적 학문으로 만들며, 다윈은 코페르니쿠스와 비견될 지식혁명을 선도하였다.
계몽주의가 풍미하던 시대, 생명의 시작은 모두 신으로부터 비롯되었고, 성경말씀에 의지하여 만물은 하나님의 피창조물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온 우주와 자연에 그가 창조한 만물을 배치하였고, 만물은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솜씨를 찬양할 뿐이었다. 이 같은 생각은 신이 만물창조를 약 6천여 년 전에 끝냈다는 확고한 믿음 속에서 사람들의 머릿속에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1830년대초 찰스 라이엘(Chales Lyell)이 '지질학 원칙' 이라는 세 권의 책을 출판하여 별들이 오랜 시일에 걸쳐 진화하였다고 설명하였고, 찰스 다윈의 조부인 에라스무스 다윈은 '유기적 생명의 법칙(Zoonomia)' 이라는 책에서 '지구는 인간이 나타나기 수백만 년 전에 이미 생성되어 존재하였고, 동물들이 진화하였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같은 견해들은 가설로서는 자리를 잡을 수 있었으나, 실증적 증거가 없었으므로 별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 따라서 만물이 신의 창조로부터 존재한다는 믿음은 굳건히 그 지위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1859년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판하고, 187l년 '인류의 혈통' 저술하였을 때, 이 글들이 사회에 던진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왜냐하면 다윈은 많은 증거를 제시하며 동물들의 여러 변종이 수백만 년의 진화의 결과라고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맬서스의 이론 틀을 사용하여 자기 주장을 폈는데, 그것은 식량의 증가가 인구의 증가를 감당하지 못하므로 필연적인 '생존경쟁'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모든 어린 생명이 다 생존하는 것은 아니며, 더욱 늙어서 죽는 것이 아니다. 자연도태의 원칙에 있어 생존에 적합한 종은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게 되고, 부적합한 종은 멸종한다. 예를 들면 기린은 살아남기 위하여 목이 그처럼 길게 발달되었으며, 카멜레온은 피부색을 바꾸는 생체조직을 개발하였다. 아주 조그마한 생체조직의 변화가 있어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은 종은 계속 그 생체조직을 발전시켜 수 세대에 걸쳐 이러한 변화가 지속되면 낡은 형태는 소멸되고 새로운 형질이 나타나서 새로운 종을 이룬다. 지구가 처음 생성될 때 존재하였던 종이 현존하는 것은 극히 드물고 현존하는 종은 원형으로부터 형질이 변화하여 현재에 생존하는데 유리하도록 바뀐 것들이다. 인간도 이 같은 자연의 법칙으로 진화되어 오늘의 모습에 이르렀다.”
다윈의 주장은 우선 종교분야와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약 6천여년 전 확정된 수의 생물이 순간적으로 신에 의하여 창조되었다는 종교적 믿음은 다윈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냐하면 다윈의 주장은 '성경말씀' 을 거짓으로 밝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측에서는 다윈의 진화론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성경의 진리를 수호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일부 성직자들은 이와는 달리 다윈의 진화론까지 포용하며 신의 창조설을 확대 적용하려는 노력을 시도했다. 이들은 신의 창조가 있었고, 진화의 과정도 신의 섭리에 의한 것이라고 믿었다.
결국 다윈의 진화론은 성경에 만사, 특히 과학의 문제에 있어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왔던 갈릴레이 이래의 종교적 권위주의를 끝장나게 만든 것이었다. 이것은 세속화의 경향을 가속화시켰고 자연과 인간을 종교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종교는 순수한 신앙의 차원으로 위축되었고, 과거와 같은 사회의 지도적 위치를 결코 되찾을 수 없게 되었다. 급진적 사회사상가들은‘신은 죽었다’고 공공연히 주장하였고, '인간은 창조주와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진화과정 중에서 우연히 나타난 종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우주의 중심으로서 지구를 부정하고 지구가 태양계에 위치한 혹성에 불과함을 밝혀내자 사람들은 무엇인가 불안함을 느꼈는데, 이제 다윈이 인간은 신의 특별한 창조물이 아니고, 원숭이 종으로부터 진화한 종에 불과함을 다시 밝혀내자, 사람들은 더욱 막연한 불안감에 빠지게 되었다. 인간이 신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그저 무수한 삼라만상 중 티끌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은 인간의 자기에 대한 신뢰를 상실케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다윈의 설은 다시 사회사상가들에게 수용되어 소위 '사회적 다윈주의(Social Darwinism)로 발전하였다. 다윈의 생물학적 생존경쟁을 경제, 사회, 정치 등 모든 분야로 확대시킨 사회적 다윈주의자들은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와 경제적으로는 자유방임, 개인주의를 자연의 법칙으로 만들 수 있었다. 이들은 성공한 기업가란 치열한 기업의 경쟁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던 그 능력을 증거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이들의 성공은 자연의 법칙을 따른 정당한 것이며 사회유지에 유익하게 기능한다고 주장한 사회진화론자들은, 그러므로 기존의 지배질서 전반을 자연의 질서로 정당화하였고, 이러한 질서에의 도전은 자연질서를 어지럽히는 나쁜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더욱 다윈의 주장처럼 진화는 단기간에 급속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사회는 진화도 급격하게 진행되어서는 자연질서와 어긋나는 것으로 판단되어졌다. 따라서 보수주의자들은 다윈의 진화론에서 그들이 기댈 수 있는 좋은 의지처를 발견하였다.
다윈의 영향은 여기에서 그친 것이 아니었다. 서구인들은 다윈의 설을 빌려 제국주의, 인종차별, 민족주의, 군국주의를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시행할 수 있었다. 현실에 가장 잘 적응한 생명체가 생존할 자격이 있고, 또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이들의 생각은 우수한 인종이 열등한 인종을 착취하는 것을 당연한 자연의 계율로서 받아들였고, 한 생명의 번성을 위하여 다른 생명이 말살되는 것도 당연시하였다. 미국의 의원 비버리지는'우리는 정복하는 민족이다. 따라서 우리는 피에 복종하여 필요하다면 새로운 영토를 점령하고 새로운 시장을 빼앗아야 한다.”라고 말하기조차 하였다. 프러시아의 장군 베른하르디는 '독일과 다음 전쟁' 에서'전쟁은 가장 본질적인 생물학적 욕구이다.”라고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정복민족을 자처하는 여러 민족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앵글로색슨 계통의 영국과 미국인들, 튜튼 계통의 독일인들은 인종적 우월감에 빠져서 자신들이 아시아, 아프리카, 슬라브족을 정복하고 다스릴 사명을 위임받았다고 외치며 군사적 제국주의의 침략전쟁을 자연현상으로 덮어 씌웠다. 다윈의 설에 직접 영향을 받지 않았으나, 진화론에 동조한 월리스는 1864년 다음과 같이 썼다. '유럽인들은 신체적 자질에서와 마찬가지로 지적 및 도덕적 자질에서 다른 인종보다 우월하다. 방황하며 야만생활을 하던 유럽인들을 오늘의 문화와 진보로 이끈 그 능력과 힘은 유럽인들이 야만인과 접촉할 때 정복하고 자신의 수를 늘어나게 하였다'
결국 사회진화론자들은 계몽철학의 전통을 위험하게 만드는 데까지 나아갔다. 즉 계몽철학자들의 주장인 평등과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천부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무시하고 진화론자들은 인류를 열등한 인종과 우월한 인종으로 가르는가 하면, 인종과 인종 사이, 또는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를 서로 적대시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한 민족과 국가는 생존할 권리가 있으며, 패배한 민족과 국가는 멸절되어야 하는 논리가 진화론자들에 의하여 정당화되었던 것이다. 이들에게는 휴머니즘과 범세계시민주의란 찾아볼 수 없는 덕성이었다. 따라서 진화론자들은 '무엇을 위한 진보인가?' 라는 궁극적 물음에는 답을 할 자격이 없었다.
진화론 그 자체는 인간 이성이 이룩한 훌륭한 업적임에 틀림없으나 사회적 진화론자들은 이것을 변용하여 영토확장, 군비증대, 민족 간 불신, 국가 간 적대감을 악화시키는 일에 사용하여 제 1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길을 예비하였다.
출처 - 도서
구분 - 2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47
참고 :
진화론자들의 목적
(Evolutionists Explain Their Objectives)
진화론자들이 그들의 이론이 가치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아래에 적어놓은 글들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과학 대 진화이다. Creation - Evolution Encyclopedia은 당신에게 창조과학이 진실임을 알려줄 것이다.
내용 : 진화론자들의 목적
1. 그들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고 싶어하지 않는다.
2. 그들은 하나님과 분리되기를 원한다.
3. 그들은 성적으로 자유를 원한다.
4.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숨을 길을 원한다.
5. 그들은 동물처럼 살기를 원한다.
6. 그들은 하나님과 분리된 지식을 원한다.
7. 그들은 종교가 파괴되는 것을 원한다.
진화론의 증거가 처음부터 전혀 없었으며, 그 이후로 계속적으로 반증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을 끝까지 주장하는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것들은 매우 중요한 이유들이다. 이번 글에서는 왜 그들이 그리도 광적으로 허구적인 이론에 매달려 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다.
이유 1 : 그들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고 싶어하지 않는다.
”우주에 홀로 서있는 인간은 오랜기간, 무의식적이고, 비인격적인, 물질과정에 의한 독특한 생성물로서 특별한 이해력과 잠재력을 가진 존재이다. 이 인간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에게 빚지고 있다. 그리고 책임져야하는 것은 자기 자신인 것이다. 인간은 통제불능의 불분명한 힘에 의한 창조물이 아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주인인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고, 이끌어 나갈 수 있으며, 그렇게 하여야 한다.” - *George G. Simpson, 'The World into Which Darwin Led Us,' in Science, 131 (1960), p. 966.
이유 2 : 그들은 하나님과 분리되고 짐승과 동일화 되기를 원한다.
”실제 이슈는 사람이 이 세상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야만 하느냐 아니면 인간의 정신을 동물과 같이 무질서한 사실로서 여기느냐 하는 것이다....진화론적 사고는 탁월한 창조주의 지식으로부터 스스로를 떨어뜨려 생각하려는 인간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생각이며, 인간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믿기에 대중화된 것이다.” - *G.L. Bahnsen, 'On Worshipping the Creature Rather than the Creator,' in Journal of Christian Reconstruction, 1 (1974), p. 89.
이유 3 : 그들은 성적으로 자유를 원한다.
”내가 진화론을 주장하는 동기는 의미를 가지는 세상을 원치 않기 때문이며, 결과적으로 세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가정하게 된다. 그리고 이 가정을 만족시킬만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세상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철학자는 순수 형이상학의 문제에 독점적으로 관여하지 않는다....허무주의 철학이 해방(자유방임)의 도구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나 자신뿐만 아니라 동료들 대부분도 의심하지 않는다. 우리가 바라는 자유는 정치적, 경제적인 구조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동시에 도덕적인 어떤 구조들에 관한 것들을 포함한 일체의 자유이다. 우리는 도덕성을 반대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성적 자유(sexual freedom)를 막기 때문이다.” - *Aldous Huxley, 'Confessions of a Professed Atheist,' Report: Perspective on the News, Vol. 3, June, 1966, p. 19. [Grandson of evolutionist *Thomas Huxley, *Aldous Huxley was one of the most influential writers and philosophers of the 20th century.]
이유 4 :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숨을 길을 원한다.
”다윈니즘은 합리적인 토론의 영역에서 생명체의 창조주로서 하나님이라는 일체의 개념을 제거하였다. 다윈은 초자연적 설계자가 필요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했다. 자연선택이 다른 새로운 종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진화론에는 초자연적 존재의 틈을 주지 않는다.” - *Julian Huxley, 'At Random, A Television Preview,' in Evolution after Darwin (1960), p. 41.
이유 5 : 그들은 동물처럼 살기를 원하고, 그것을 재고해 보려하지 않는다.
”다윈의 세계에서는, 인간이 다른 종들과 특별히 구별되는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동물의 한 종류일 뿐이다. 인간은 자연에 대한 많은 상식을 가지고 있는, 결코 그들과 분리되지않는 존재이다. 비유적인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인간은 아메바, 촌충, 벼룩, 해초, 참나무, 원숭이와 같이 살아있는 모든 것과 동종이다. 물론 관계성에 있어 깊이는 어느 정도 다르다. 우리가 원숭이와 형제라는 것에 비해 촌충과 42촌 간이라는 말은 덜 와닿을 수 있다.” - *George Gaylord Simpson, 'The World into Which Darwin Led Us,' Science, 131 (1960), p. 970.
이유 6 : 그들은 하나님과 분리된 지식을 원한다.
”신을 없애버리고, 우주의 신비를 설명하는 이 하나의 주장으로 새롭고 무한한 지식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 *Ernst Haeckel, The Riddle of the Universe (1899), p. 337.
이유 7 : 그들은 종교를 파괴하고자 한다.
”전통적 과학에 충격을 준 것을 너머서, 다윈니즘은 보수신학을 파괴시켰다.” - *D. Nelkin, Science Textbook Controversies and the Politics of Equal Time (1977), p. 11.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www.sdadefend.com/pathlights/ce_encyclopedia/Encyclopedia/20hist13.htm
출처 - Creation-Evolution Encyclo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