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위원회
2004-04-21

인본주의 운동의 실상

이양림 


목적 :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인본주의 운동의 영향력은 교회 밖에서는 물론 교회 안에서 까지 대단히 크다. 이러한 영향에 힘입어 교회 밖에서는 인간성이 상실되고, 윤리관이 몰락되는 반면에, 교회 안에서는 교회가 세속화 되고있다. 이러한 운동이 아직까지 우리 사회와 교회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지는 못하지만, 우리 사회와 교회에 인본주의적 요소가 잠재해 있다면 언젠가는 우리 교회도 그러한 영향권 속으로 잠식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본주의 운동의 실상을 파악함으로써 마지막 시대에 교회안으로 침투하여 교회를 세속화하는 인본주의 영향에 대처해야 할 것이다.


1. 서 론
 

인본주의는 아담과 이브가 타락할 때부터 있었고, 인류역사를 통해서 그 모양은 달리 했을지라도 한번도 지구상에서 그 정체를 보이지 않았든 때는 없다. 그러나 최근 미국과 구라파를 비롯하여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인본주의 운동은 겉으로는 매력적이면서도 속으로는 파괴적인 요소를 가지고 확산되고 있다. 더구나 이러한 인본주의 운동은 단순한 사상이나 이념의 수준을 넘어서 하나의 종교로서 부상하고 있다. 오늘날의 인본주의는 지구상의 모든 철학, 사상 및 이념을 담고 있다. 뿐만 아니라 힌두교, 불교를 비롯한 종교까지도 인본주의는 흡수하고 있다.

인본주의는 기독교까지도 흡수하고자 시도하고 있다. 인본주의가 교회 안으로 침투할 경우 교회는 쉽게 세속화한다. 교회의 목표가 하나님에게 있지 않고 사람에게 있게 된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인본주의 운동의 실상을 파악하는 것은 교회 안으로 인본주의가 침투하는 것을 막는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2. 미국의 인본주의 운동의 실상
 

기독교적 신앙을 토대로 하였던 미국의 교육이념과 사회윤리관이 최근에 와서 급변하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교육이념은 변질되고 있고, 사회윤리관은 몰락하고 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신앙이 오히려 인간적인 성공, 자기존중 및 자기개발과 같은 인본주의적인 신념으로 대치되는 현상이 부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을 출현시킨 뒷 배경에는 크게 두 가지 형태의 인본주의 운동이 관여하고 있다. 


 가. 인본주의자 선언 I 과 Ⅱ (Humanist manifesto Ⅰ and Ⅱ)

1933년 미국의 교육학자, 심리학자, 과학자들은 신으로부터 해방되어 인간의 힘으로 인간성을 회복하자는 15개 조항의 '인본주의자 선언 I'을 내놓았다. 그 내용을 분석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P6. 도표참조).

인본주의와 신본주의의 비교

기 준

신본주의

인본주의

세계관의 초점

인류의 구원자

세계관의 기초

우주와 인류 탄생

생 명 관

윤 리 관

삶 의 목 표

생 활 철 학

하 나 님

하 나 님

성 서

창 조

영적존재

절대윤리

내 세 적

예수 중심주의

인 간

인 간

과학주의

진 화

물질적인 존재

상황윤리

현 세 적

자기 중심주의

 

이러한 기준에서 특히 인본주의적 세계관의 기초가 되는 것은 과학주의, 진화사상 및 유물론적인 생명관이다. 이러한 세 가지 기준이 말해주는 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은 없다”이다. 그 외의 인본주의를 위한 기준은 오히려 이와 같은 기본적인 기준에서 이차적으로 발전된 것이다. 즉 상황윤리와 자기중심주의적 생활철학이 정당화되고, 인간을 세계관의 초점으로 삼을 수 있는 근거는 과학주의, 진화사상 및 유물론적 생명관이 사실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사실처럼 인식되어 하나님은 없다는 생각을 가능하게 하는데 있다. 1973년 인본주의자들은 17개 조항으로 된 '인본주의자 선언Ⅱ'를 내놓으면서 선언 I을 재확인하였다. 


 나. 새시대 운동 (New Age movement)

새시대 운동은 앞에서 언급한 인본주의 운동과 맥을 같이 하지만 더 적극적이고 폭이 넓은 인본주의 운동이다. 오늘날의 세계는 기근, 핵무기, 공해, 에너지, 식량과 같은 공통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인본주의자들은 이러한 공통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세계 단일정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세계 단일정부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전세계 인류를 하나로 만들어야하고, 인류를 하나로 만들기 위해서는 인류에게 가장 설득력 있는 법, 즉 운동의 형태로 출현한 것이다. 그 종교의 내용은 인간의 잠재력을 개발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무한한 잠재력을 개발하여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고 설득하는 것이다. 여기에 인간의 개발의 구체적인 방법으로 가장 설득력있게 이용되는 것이 동양 신비주의에서 나온 최면술, 명상, 요가, 텔레파시 등과 같은 것이 제시되었고, 과학은 이러한 것들이 모두 과학적으로 타당하다고 뒷받침해 주었다. 단순히 과학주의, 진화사상 및 유물론적인 생명관을 기초로하여 출발한 인본주의 운동은 이와 같이 동양신비주의에서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더구나 새시대 운동은 마치 물병과 같아서 동양신비주의만이 아니라, 모든 사상과 이념, 종교 그리고 기독교까지도 인간개발의 도구로 흡수하고 있다.

새시대운동에 참여한 인본주의자들은 인간은 물질에서부터 저절로 만들어진 존재로서 절대적인 과학에 의지하여 엄청나게 진화된 존재로서 변신할 수 있다는 꿈을 꾸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새시대운동은 교회밖에서만 일어날지라도 기독교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지만, 이러한 운동이 교회안으로 들어올 때 그 영향은 엄청나다. 만약에 교회가 순수한 복음을 유지하며, 하나님의 죄인 구속사업에만 교회의 목표를 두고 있다면, 새시대운동과 같은 인본주의 운동은 쉽게 교회속으로 수용될 수 있다. 만약에 과학주의, 진화사상 및 유물론적인 생명관이 교회속에 막연하게나마 존재할 때 인본주의의 수용력은 한층 더 커진다.


3. 한국교회의 인본주의적 요소
 

미국에서 일어난 인본주의 운동이 아직까지 한국사회에서 본격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교육기관에서의 교육내용 및 이념에는 인본주의적 요소가 대단히 많다. 이러한 교육을 받고 있는 우리의 자녀들과 앞으로 받을 후손들이 인본주의적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기도 대단히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이와 같은 교회밖의 인본주의적 사회분위기 속에 처해있는 한국교회는 두 가지 점에서 인본주의적 요소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즉 복과 인권에 초점을 맞춘 기독교인의 꿈이 오히려 한국 교회속에 잠재해 있는 인본주의적 요소가 될 수 있다. 복은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약속된 복을 받을 지라도 잘못이 있을 수 없으나, 복이 교회의 목적이 되는 한, 교회도 인본주의 운동의 영향을 쉽게 받게 된다. 또한 인권은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신 것으로 인권을 위해서 일을 할지라도 나쁠 것이 없으나, 교회의 목적이 인권에 있다면, 교회는 인본주의의 테두리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된다. 교회의 목적은 복과 인권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죄인 구속사업에 있다. 신앙적인 목표의 초점이 하나님에서 벗어나 인간에게 겨냥될 경우 인본주의적 함정에 빠질 수 있다. 복과 인권은 방법일 뿐이며 목적이 아니다.


4. 결 론
 

그러면 이러한 인본주의 세력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첫째는 복음을 순수하게 유지함과 동시에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을 명백하게 확인하는 것이다. 즉 복음전파 혹은 죄인구속사업을 교회의 최선의 목적으로 양육을 통해 확인하는 것이다.

둘째는 인본주의의 기초가 되는 과학주의, 진화사상, 유물론적 생명관의 허구성을 파악하는 것이다. 즉 과학은 절대적이 아니며, 한계성이 있고, 진화는 사실이 아니고, 생명은 단순한 물질의 집합체가 아님을 주지시키는 반면에, 창조신앙을 과학적으로 보다는 신앙적으로 정립해 나가고, 아직도 과학으로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신비한 생명 현상을 인식시키는 것이다.


5. 참고문헌
 

.Hunt Dave and Macmahon, Seduction of christianty.

.Hunt Dave, Peace, Prosperity, and the coming holocaust - The New Age movement in prophecy(1983).

.Simonds R. L., Communicating a Christian World View in the Classroom (1983).


제 72호 [1990. 11~12]

Walt Brown
2004-02-18

진화론자들은 당신이 말하는 것에 어떻게 응답하는가?

(How Do Evolutionists Respond to What You Say?)


     그들은 대개 그것을(창조론자들의 말을) 무시한다. 소수는 내가 응답할 수 없는 포럼에서 증거들을 비판할 것이다. 1년 또는 2년에 한 번 정도 식견이 있는 진화론자는 엄격한 대화식 토론에 동의할 것이다. 이 토론은 대개 활기 있고 진지할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2시간 반 정도를 넘지 않을 것이고, 토론의 내용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대대적으로 배포되거나, 연구되거나, 상기되지 않을 것이다.


창조-진화 토론을 명백하게 하기위한 최선의 방법은, 엄격한 과학적 토론의 전체 내용을 기록하고 출판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기록한 수많은 증거들처럼 양측에서 그들의 주장을 지지하는 증거들을 제시하고, 서로 하나 씩 하나 씩 각각의 증거들에 대해서 응답하는 것이다. 그리고 양측은 완료된 서로의 응답 내용들을 출판하고 권리를 가지는 것이다. 나는 1980년 이후로 그러한 교환을 할 것을 제안해 왔었다. 그러나 진지하고 자질을 갖춘 수락자를 찾지 못했다. 많은 저명한 진화론자들은 그 제안을 알고 있다. 내가 대학에서 강의했을 때, 학생들에게 토론을 완전히 끝마칠 수 있는 한 명의 진화론 교수를 발견할 수 있다면, 나는 그 학생에게 200 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했었다. 나는 그러한 한 명의 과학 교수를 발견할 수 있는 첫 학생에게 여기서도 그 제안을 반복해서 제안한다.     


다음은 진화론자들이 말하고 있는 여러 변명들이다.


1. ”시간이 없다”

응답 : 많은 사람들은 시간이 없다고 한다. 물론, 그들은 토론에 참여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창조론자들을 공격하고 왜곡하는 책들을 쓰는데 시간을 보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시대착오적인 진화론적 생각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이 가르치고 있는 것을 방어해야하는 토론장에는 나오지 않고 있다. 만약 당신이 어떤 것을 가르치고 있다면, 당신은 그것을 방어하기 위해서 기꺼이 나서야 한다. 특별히 납세자들이 당신의 봉급을 지불하고 있다면 말이다.


2. ”창조는 종교적 생각이다. 그것은 과학이 아니다.”

응답 : 창조는 확실히 종교적 함축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많은 과학적 증거들은 그 주제와 관계가 있다. 이 문서화된 토론에서는 오직 과학적 내용만이 허용될 것이다. 서로의 응답을 교환할 때, 편집자는 어떠한 종교적인, 또는 반종교적인 해석들을 제거시킬 것이다. 만약 나의 응답이 오로지 종교적이라면, 편집자는 토론에서 그것을 삭제할 것이다. 나는 나의 응답이 삭제됨으로서 진화론자가 승리하도록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진화론도 또한 종교적인 함축성을 가지고 있다)


3. ”나는 창조론자와 포럼을 갖기를 원하지 않는다.”

응답 : 수천의 과학적 논쟁들 중에서, 창조-진화 논쟁은 드물며 몇몇 과학자들은 증거들을 교환하고 토의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것은 비과학적인 태도이며, 닫힌 마음 자세이다.


4. ”나는 진화론에 대해서 충분히 알지 못한다” (칼 세이건의 말), 또는 ”나는 진화론의 단지 한 부분만을 전공하고 있다.”

응답 : 한 팀으로 된 진화론자들이 토론에 참여할 수 있었다.


5. ”어떠한 토론도 공인된 과학 학술지에서 실시되어야 한다.”

응답 : 어떠한 학술지도 그러한 토론 내용을 게재할 지면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과학 학술지들은 진화론자들에 의해서 조절된다. 그래서 그들의 믿음 체계를 비판하는 글들은 게재될 수 없다. 그리고 진화론의 문제점들을 제시하고 창조론을 지지하는 어떠한 연구물도 출판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러한 글들을 게재되었다면, 그 학술지의 편집자들은 그 잡지의 독자와 광고주들로부터 심각한 비난에 직면할 것이다. (대화식 창조-진화 토론에 참여했던 소수의 진화론자들은 토론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진화론자들에게 매우 심한 비난을 받았음을 자주 인정하고 있다.) 잘 알려진 사실로, Scientific American과 같은 학술지는 매우 실력있는 부편집장을 고용하려던 계약을 취소하였는데, 이유는 그가 창조론자였기 때문이었다.    

만약 누군가 기록 출판하는 토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페이지 334-336을 보라. 그러나 당신이 자격이 있는 진화론자에게 참여할 것인지를 물어보려 한다면, 위의 변명을 살펴보라.


진화론자들은 창조에 대한 과학적 사례들에 대해 어떻게 응답하는가? 대부분 그것을 무시한다. 당신이 위의 변명에서 볼 수 있듯이, 자격이 있는 진화론자들까지도 과학적 증거들에 대한 응답들을 서로 직접 교환하는 것을 피하고 있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creationscience.com/onlinebook/FAQ416.html#wp1675667

출처 - CSC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785

참고 : 6553|6486|6550|6149|6132|5081|5130|4639|5740|5683|5420|5994|6449|4821|6263|6018|6468|6148|6474|5510|5947|5954|5591|6211|5589|5602|5966|4837|6090|485|3890|390|2349|3782|6438|4510|5474|6495|5458|6243|5863|2698|6399|5460|6489|5135|5000|4828|6118|6394|6168|6138|5996|774|5497|5827|5158|5962|6358|6258|6119|4066|5544|5443|6556|6501|6096|5459|5274|5450|5909|6461|6436|5586|4542|5041|3391|6393|6476|6292|5796|5768|6271|5462|6146|6439|3591|6125|3426|6285|6152|6153|6022

김창환
2003-11-20

제4장 유한한 우주의 침묵 : 자연주의


I. 자연주의의 중요성 

우리의 입장에서 자연주의에 대한 이해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 첫 번째 이유는 현대의 거의 모든 학문이 자연주의적인 전제를 공개적으로, 또는 암묵적으로 채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앙과 학문의 통합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이는 피할 수 없는 주제일 것이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지적 설계와 관련된 것이다. 창조과학이 진화론을 그 적으로 삼은 것과 같이 지적 설계는 자연주의를 적으로 삼고 있다. 지피지기이면 백전백승이라는 말도 있거니와 지적 설계에 대한 이해는 자연주의를 이해함으로써 더 깊어질 수 있는 것이다.

 

II. 자연주의로의 이행 

유신론 ---> 이신론 ---> 자연주의 (1600-1750) 

* René Descartes (1596-1650) - 유신론자였으나 우주는 '물질'로 구성된 거대한 기계이며 인간의 '정신'에 의해서 파악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 John Locke (1632-1714) - 유신론자였으나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이성(Man's God-given reason)이 성경에 기록된 '계시'의 진위를 평가하는 심판자라고 생각하였다. 

* Julien Offray de La Mattrie (1709-1751) - "신의 존재란 실제적 가치가 거의 없는 하나의 이론적 진리에 불과한 것이다."

 

III. 자연주의의 기본내용 

1. 물질은 영원히 존재하며 존재하는 것의 전부이다.

"The Cosmos is all that is or ever was or ever will be." - Carl Sagan 

이신론에서 별 역할을 인정받지 못했던 하나님의 개념은 이제 완전히 제거되었다. 이신론에서 하나님의 유일한 역할은 제1원인(First Cause)이었다.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을 만든 하나님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면,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만든 어떤 존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이에 대한 전형적인 대답은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우주가 스스로 있는 존재일 수는 없는가? 오캄의 면도날로 하나님의 개념을 제거해 버릴 수도 있게 되었다.

2. 우주는 폐쇄 체계 속에서 인과율의 일치체로 존재한다.

"우리는 우주가 공간, 시간, 물질 등이 내적으로 결합된 연속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영적' 부분과 교통하기 위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거나 물질과 멀리 떨어져 존재하는 분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역시 우리와 동일한 진화의 산물이라는 사실에 대처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 David Jobling (신학교수)

이 점에 있어서는 이신론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우주는 초월적인 재조정이나 자율적이며 자기 초월적인 인간의 재조정에 대해서 닫혀 있다. 전자의 이유는 '1.'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초월적 존재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후자의 이유는 '3.'에서 다루게 된다.

3. 인간은 하나의 복잡한 '기계'이다. 인격이란 우리가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화학적, 물리적 성질의 상호 관계이다.

"간이 담즙을 분비하듯이 뇌는 생각을 분비한다."- Pierre Jean Georges Cabinis 

데카르트는 사람을 부분적으로는 기계이며 부분적으로는 정신이라고 보았다. 자연주의는 정신을 기계의 작용으로 본다. 비록 인간은 여러 특수성 - 개념적 사고, 언어사용, 문화, 도덕 등등 -을 지니고 있으나 그것은 기계적 작용의 범주를 넘지 않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비록 그 기계적 복합성이 아직 이해되고 있지는 않지만. 이런 사고방식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비록 어떤 자연주의자는 자연주의와 자유의지가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는 분명치 않다.

4. 사망은 인격과 개체성의 소멸이다.

"나는 인간의 존재가 사망시에 종료된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 A.J. Ayer 

이런 결론은 앞의 내용을 받아들이는 한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5. 역사는 인과율에 의해 연결된 사건의 직선적 연속이며, 전체적인 목적성은 없다.

"Man is the result of a purposeless and natural process that did not have him in mind." - Goerge Gaylord Simpson 

자연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는 공히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의미를 줄 수 있는 존재를 모두 제거해 버렸기 때문에 이 또한 피할 수 없는 귀결이다.

6. 윤리는 단지 인간에게만 관계된 것이다.

"우리는 도덕적 가치의 근원이 인간의 경험에 있음을 확신한다. 윤리는 자율적이며 상황적인 것으로서 신학적 혹은 사상적 재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윤리는 인간의 필요와 관심에서부터 발생한다." - Humanist Manifesto II 

의미를 줄 수 있는 존재를 제거한 것과 정확히 동일하게 자연주의는 윤리적 기준을 줄 수 있는 존재를 제거하였다. 그러나 자연주의자들은 윤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정도로 자기 전제에 충실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윤리를 자연주의와 조화시키려는 여러 노력을 하였다. 그들이 내리게 된 결론은 대체로 "선한 행동이란 집단이 승인하고 생존을 증대시키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는 식으로 주어지게 된다. 그들이 '윤리'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든 간에, 자연주의로부터의 논리적 결과로써, 그들의 '윤리'는 '현상'일 수는 있어도 '당위'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을 과연 '윤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가?

 

IV. 주목할 만한 두 가지 형태의 자연주의 

1. 세속적 인문주의

"인간은 인간을 위한 최고의 존재이다." - Karl Marx 

세속적 인문주의(많은 경우 인본주의라고 부르기도 함)는 기독교 인문주의와 구분하여 이해해야 한다. 기독교 인문주의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세속적 인문주의는 다르다.

유신론은 하나님께서 왕이심을 인정한다. 이신론은 그가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자연주의는 그의 폐위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세속적 인문주의는 '인간'의 즉위를 선언하였다.

2. 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주의는 기독교 이단이다." - ? 

*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0) - 세계와 구분할 수 없는 신, 또는 절대정신(absolute spirit)이 자기를 변증법적으로 실현해 나간다고 주장.

* Ludwig Feuerbach (1804-1872) - 인간은 '그가 먹는 것'(what he eat)이며 종교는 인간의 발명품이라고 주장. 

* 변증법적 유물론 또는 사적 유물론 - Marx는 Hegel의 견해와 Feuerbach의 견해를 결합하여 인간과 종교의 본질에 대해서는 Feuerbach와 같은 입장에서, 인간역사가 변증법적 투쟁을 통하여 이상적인 인간사회를 향하여 발전한다고 생각. 

* 하부구조(경제체제)가 상부구조(정치, 예술, 종교 등)를 결정. 계급투쟁. 프롤레타리아트 혁명. 

* 문제점 - 역사의 의미. 도덕적 기반. 인간의 본성.
 

V. 자연주의의 지속성 

어떻게 자연주의는 오랜 기독교 전통이 있는 곳을 포함하여 전세계를 석권할 수 있었는가? 어떻게 자연주의는 이신론과는 다르게 금방 소멸하지 않고 몇 세기에 걸쳐 지속될 수 있었는가? 어떻게 자연주의는 거의 모든 학문분야의 공개적, 또는 암묵적 전제가 될 수 있었는가? 그 저력은 어디서부터 나온 것일까?

이 책의 1장에서는 일곱 가지 기본질문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여섯 가지밖에 답하지 않았다. 그 나머지 하나를 살펴봄으로써 자연주의가 어떻게 이런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는지 답을 구해보자.

그 나머지 하나의 질문은 "지식이 가능한 까닭은 무엇인가?"이다. 유신론에서 이신론을 거쳐 자연주의로 이행된 시기가 대체로 1600년에서 1750년 정도라고 보면 당시의 사람들이 생각한 '지식이 가능한 까닭'은 실증주의적인 기반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자연주의가 힘을 얻은 것은 실증주의에게서 힙 입은 바가 큰 것 같다.

실증주의는 실증된 것만을 지식으로 인정한다. 그러므로 인식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지식도 가질 수 없고, 따라서 그런 것은 무시되었다. 그런 식으로 점점 과학활동을 하는 데에 자연주의가 암묵적인 가정이 되었다.

자연주의가 과학활동의 암묵적인 전제가 되자 그것은 자체 강화 시스템으로 작동하였다. 자연주의를 전제로 하여 이루어진 과학활동의 결과가 자연주의에 부합할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전제를 더욱 강화해 주었다.

실증주의가 믿어지는 시기에는, 즉 과학활동이 진정 객관적이라고 믿어지는 시기에는 그런 결과들이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받아들여졌고 "우리는 초자연적 존재를 믿을 만한 충분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말이 설득력 있게 들릴 수 있었다. 그러나 실증주의는 20세기에 집중포화를 맞고 침몰해버렸다. 아직도 자연주의를 지지할 만한 근거가 있는가? 

자연주의의 여러 치명적인 약점들은 다음 장 '영점: 허무주의'에서 다루게 된다.


출처 - 창조지

구분 - 2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63

참고 :

임번삼
2003-11-18

역사에 끼친 진화론의 해악


     진화론은 근대 역사에 깊은 뿌리를 두고 인류를 사망의 길로 빠뜨리고 있다.   

진화론은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엄청난 재앙을 끼쳤다. 반면에 아무도 진화론의 심각한 해악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아니, 골치가 아프기 때문에 피하려는 경향인 것으로 보인다.

진화론의 창시자 찰스 다윈의 사촌 갤튼은 인종우생학을 만들어 백인 위주의 인종 차별을 주도하였다. 그의 영향으로 일부 구미 국가에서는 백인과 유색인 간의 혼혈을 막으려고 이민제한법을 제정하였다. 또 단종법을 만들어 신체 부자유자와 유전 질환자를 제거할 목적으로 금혼 조치도 내렸다. 이 법에 근거해 나치 정권은 무려 200만 명 이상을 처형하기도 했다.

최근 들어 인간 게놈 구조가 해명되면서 우량 인간을 복제하려는 움직임이 어느 때보다 활발하다. 이는 새로운 인종우생학의 부활을 의미하는데,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인간배아 복제 역시 21세기 바벨탑을 쌓으려는 위험한 시도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생물에 대한 위해성을 사전에 저지하기 위한 생명윤리법 제정에 기독교계가 앞장서야 한다.

 

진화론에 뿌리 둔 대량 학살

약육강식에 의한 자연 선택의 원리를 내세운 진화론은 군국주의자들에게 약소국을 침공할 수 있는 논리를 제공해 주었다. 대표적인 예가 독일, 일본, 이탈리아에서 태동한 군국주의다. 독일 진화론자 헤켈은 나치 전신인 툴레당(Thule Geselschaft)의 비밀요원이었다. 툴레당 선서식에 참석한 히틀러는 정권을 잡으면서 나치 강령에 진화론의 이론을 첨부하였다. 그리고 헤켈이 그의 저서 「생명의 신비」에서 주장한대로, 팔벤사 레버쿠젠 공장에서 2억 2천만 명을 살상할 수 있는 양의 독가스를 생산해 32회나 사용했다. 그 중 최악의 사례가 유태인 600만 명을 죽인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집단 독살 사건이다.

일본에서 메이지(明治) 유신 후기에 기독교가 허용되었다. 이에 대항하는 세력들은 당시 대표적인 진화론자 모올스(Edward Morse)를 동경대에 초청해 대학생들을 모아놓고 진화론으로 세뇌시켰다. 그리고 창조론과 진화론을 병행해서 교육시키려던 모리(森) 문부상을 암살했다.

그 후 일본은 진화론적 약육강식의 논리에 입각해 국력이 쇠약한 조선, 청나라, 러시아를 차례로 침략하는 제국주의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들의 침략은 상대 국가의 고통으로 직결되었다. 이처럼 진화론은 사랑과 공생의 원리가 아닌 힘의 논리에 따른 지배 원리를 확산시켰다.

 

인간은 운명의 주인?

미국 교육기관에서 종교의 자유를 내세워 창조론 교육을 축출하고 진화론 교육으로 대체시키는 데에 진화론자들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이 운동에 앞장선 진화 교육자 존 듀이는 인본주의선언(Humanist Manifesto)을 초안하였다. 그는 “신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자”고 역설하며 진화론적 과학주의를 제창하였다. 바야흐로 21세기 과학주의가 새로운 종교로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1963년 케네디 대통령이 ‘종교로부터의 자유’를 선언했다. 미국의 모든 국공립 기관에서 기도와 성경을 축출하고 청교도적 창조 신앙을 추방하는 결과를 낳았다. 공교육 기관에서는 창조론적 기독교 교육이 사라지고 진화론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이처럼 세속 인본주의는 진화론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다. 미국인본주의협회는 “인본주의란 자기 운명을 만들어 가는 존재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유신론적 종교가 아니라 삶의 한 방식인 건설적인 철학이다”라고 주장한다.

역시 영국인본주의협회도 철저하게 유신론을 배격한다. “우리는 신을 믿지 않는다. 유신론 교육을 어린이에게 가르치는 것은 비교육적이다. 종교 교육은 없어져야 한다. 종교는 단지 역사적 관심거리로 가르치면 그만이다. 종교는 인본주의, 막스주의, 모택동 사상, 공산주의를 포함한다. 우리는 비종교적인 도덕성을 신봉하며 용서받아야 할 죄가 없다고 판단한다. 무엇보다 무덤 너머에 생명이 없고 영원한 죽음만 있을 뿐이다.”

헉슬리의 손자 줄리안 헉슬리는 진화론에 입각해 유네스코 헌장을 작성하였다. 그는 핵무기, 식량 부족, 에너지 고갈, 전쟁, 공해 등 인류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소수 엘리트 집단이 지배하는 세계 정부의 구성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그 정부를 이끌 세계 총통의 출현을 갈망하였다. 진화론은 이처럼 유엔을 통해 전 세계 교육계로 침투할 수 있는 교두보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인간 존엄성마저 파괴

인본주의자들의 최종 목표는 소수 엘리트 집단에 의한 사회주의 건설에 있다. 이런 반신본적인 세속 인본주의는 요가, 명상, 선 등 동양의 신비주의와 접목하면서 뉴에지 운동과 연계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진화론은 공산주의자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의 민중 봉기 이론을 수립한 허잔, 볼셰비키 혁명을 주도한 레닌, 피의 숙청을 단행한 스탈린 그리고 중국 공산당을 창건한 모택동 등은 진화론에 입각해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레닌과 스탈린은 다윈을 지식의 영웅으로 추앙하여 모스크바에 그를 기념하는 다윈 박물관도 세웠다. 모택동은 다윈과 헤켈 및 히틀러에게 심취해 공산당원들에게 약육강식 사상을 집중적으로 교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일부 공산 국가에서는 샤르뎅의 유신 진화론을 가르치고 있다.

진화론이 끼친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점은 인간 존엄성 거부와 전통 윤리관 붕괴이다. 그들은 인간이 유인원에서 진화한 것으로 믿기 때문에 인간 존엄에 근거한 기존 윤리관은 당연히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진화론자들은 진리나 가치관을 상대화시켰고 상황 윤리와 다원주의를 확산시켰다. 다원주의는 일면 합리적인 듯하지만, 이 사상에서 만민구원설을 주장하는 종교 다원주의가 출현하여 흠 없고 순전한 복음을 오염시키고 있다.

누구를 믿든 구원받을 수 있다면 굳이 예수를 믿어야 할 당위성이 사라지게 된다. 이것이 복음에 대한 정면 도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링크 - http://www.kacr.or.kr/databank/document/data/evolution/e1/e14/e14o4.htm

출처 - 기타

구분 - 2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88

참고 :

미디어위원회
2003-10-08

비글호의 항해 - 창조주를 위한 봉사 

(The Voyage Of The Beagle - In The Creator's Service)

 Louis Lavellee 


      국왕 폐하의 함선 비글호 (His Majesty's Ship (HMS) Beagle)의 1831년부터 1836년에 걸친 유명한 항해에 박물학자 찰스 다윈도 동승하고 있었다. 이 배의 항해 목적은 창조주에게 봉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항해의 주목적은 남아메리카 대륙의 남단 해안에 대한 탐사(探査)였다. 그 탐사는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창세기 1:28 절의 개척명령을 받들어 영국 선박의 안전한 항해를 확보하려는데 있었다. 다윈의 자연관찰 성과로 인해서 그 지역에 분포된 자연 자원들에 대한 인간의 지식을 넓힐 수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선장 로버트 피츠로이 (Robert Fitzroy)의 또 다른 하나의 목적은 남아프리카 대륙 남단에 위치한 티에라 델 푸에고(Tierra del Fuego)에 세 명의 푸에고 원주민을 그들 고향 땅에 귀향시키는 것이었다. 다윈은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원주민들을 제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여 정착시키려는 생각이 피츠로이 선장이 이번 항해를 결심하게 된 주 동인 중의 하나였다” (1:222). Anglican Mission Society의 리차드 매튜 (Richard Matthews) 목사가 그 원주민들과 동행하고 있었다. 매튜 목사는 마태복음 28:19-20의 위대한 선교의 명령을 좇아, 푸에고 사람들을 위한 선교 구역을 설립하기를 희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초기의 전도 사역은 퇴박을 맞았지만, 나중에는 푸에고 사람들 속에 폭 넓은 효과를 거두었다.

 

문화 명령을 완수하다 (Fulfilling the Cultural Mandate)

비글호는 해안지방의 육지 지형과 하천에 관한 상세한 조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 그 임무는 거치른 기후와 병마, 그리고 심지어 죽음까지도 무릅쓰고 진행하여만 했다. 한번은 선체 수리를 위해 비글호를 바닷가에 끌어올렸던 적이 있었다. 또 한번은 다윈까지 포함한 무장한 선원들이 몬테비데오(Montevideo)의 질서유지를 위해 지방경찰을 도운 적도 있었다. 보통 때에는 선원들이 답사를 하고 있는 동안, 다윈은 각종 동식물을 관찰하고 샘플을 채집하였다. 그리고 채집된 샘플들은 보관되었다가 영국으로 옮겨졌다.

3년 반 동안 계속된 탐사를 갈라파고스(Galapagos) 군도의 조사를 끝으로 마감하고, 비글호는 세계일주 항해를 계속하였다. 비글호는 타히티,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남아프리카에 있는 여러 항구도시들을 기항(寄港)하였다. 영국으로 귀국 후 피츠로이 선장은 왕실지도협회로부터는 금메달을, 그리고 의회로부터는 감사장을 받았다. 피츠로이와 다윈 두 사람이 기록한 항해일기는 인기리에 1839 년 동시 출판되었다. 그런데 이 두 책 중 어느 책도 진화에 관한 언급은 없었지만, 장차 다가올 논쟁의 암시를 남겨 놓았다.

 

위대한 전도사명에 순종하다 (Obeying the Great Commission)

피츠로이 선장은 예전 항해 시에 도난 당했던 보트를 되찾기 위하여 몇 사람의 인질을 잡아왔었다. 그 중 4명을 영국으로 데리고 왔던 것이다. 피츠로이의 설명은 이랬다.

”푸에고 해안을 떠날 차비를 하고 있을 때, 나는 네 사람의 원주민을 상선시키기로 결심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매우 즐거워하고 만족하는 것 같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한 동안 영국에서 생활해보면 여러 측면에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 나는 이 사람들에게 적절한 교육을 마련해 주어야 하겠다. 2, 3년 후에는 제 나라로 돌려보내야겠지.” (2:54)

선원들은 그들에게 이름을 지었다. 보트 메모리, 요크 민스터, 푸에고 바스켓, 지미 버튼 이라는 이름들이 그것이다. 그들은 모두 다 백신을 맞았지만, 보트 메모리는 마마로 죽고 말았다. 피츠로이 선장은 나머지 세 사람을 런던 근교에 자리한 월댐스토우(Walthamstow)에 있는 어느 학교에서 살게 하였다. 그들은 윌리엄 윌슨(Rev. William Wilson) 목사 부부의 감독을 받게 하였다. 그들은 영어와 기독교 교리, 그리고 농사법을 배웠다. 그들이 왕과 왕비를 알현하였을 때, 왕비는 그들에게 자기 머리에서 모자(bonnets) 하나와 자기 손가락에서 가락지 하나, 그리고 지참금으로 선물들을 하사하였다.

해군성은 피츠로이 선장이 푸에고 인들과 선교단을 티에라 델 푸에고(Tierra del Fuego)로 돌려보내도록 허락하였다. 월덤스토우 교회에서는 보급물자를 제공하였으며, 그 배의 키잡이 제임즈 벤네트(James Benett)가 예전처럼 푸에고 인들을 돌보기로 하였다. 젊은 전도사 리차드 매튜(Richard Matthews)는 푸에고 인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한편, 자기는 일 년여의 항해 기간에 저들의 언어를 공부하였다.

다윈은 비글호에서 푸에고 인을 처음 보았다. 그는 지미 버튼을 제일 좋아했다. 

”지미는 쾌활하고 웃음이 헤픈 편이었다. 그러나 어느 누가 아프면 그는 크게 동정심을 보였다. 풍랑이 심해 내가 멀미라도 하면, 그는 내 곁에 다가와서 푸념하듯 ”가련해라, 가련한 친구!” 하곤 했다.” 다윈은 그 푸에고 인들이 언어 습득에 소질이 있다는 것과 시력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아봤다. ”요크와 지미는 우리 선원들 어느 누구보다도 훨씬 우수했다. 그들은 먼 바다에 있는 물체를 알아본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다른 선원들이 그들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지만, 망원경으로 살펴보고는 그들의 말이 맞는다는 것이 증명되곤 하였던 것이다” (1:222-3).

1833년 1월에 한바탕 심한 폭풍을 만난 후, 배는 드디어 지미네 부족들이 사는 고장에 도착하였다. 풍광은 숨을 멈추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 그러나 다윈은 푸에고 원주민들의 형편을 보고 두려움 같은 감정을 느꼈다.

”그들은 내가 어느 곳에서도 본적이 없었던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비참한 사람들이었다. … 그 가엾은 사람들은 발육중단 상태에 있었다. 그들의 무시무시한 얼굴에는 더덕더덕 회칠을 하고 있었다. 온 몸의 피부는 더럽게 개기름이 번질거렸고, 머리카락은 뒤엉켜져 있었다. 목소리는 귀에 거슬렸고 몸짓은 거칠었다.” (1:228).

배 안의 세 명의 푸에고 인들도 알몸을 하고 있는 동족들을 처음 보는 순간 충격을 받았다. 항해사 햄몬드 (Hamond)는 탄식하듯 이렇게 내뱉었다. ”이 멋진 친구들을 어떻게 저토록 야만적인 상황에 내버려두고 떠난다지!”(2:92). 우리의 푸에고 친구들을 걱정하는 또 한 사람의 장교는 매일 빼지 않고 시편을 읽는다고 알려진 항해사 설리반 (B.J. Sullivan)이었다. 그는 나중에 해군 제독이 된 다음에도 푸에고 선교사역을 충실히 지원한 사람이다.

선교 본부 위치로 마땅한 한 곳을 울랴(Woolya)에서 찾았다. 그 곳은 정원이나 목장의 개발에 알맞은 땅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외부의 간섭으로부터 잘 보호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선원들은 세 채의 통나무집을 짓고, 월댐스토우에서 가져온 보급품을 하역하고, 두 곳에 정원을 개발하면서 분주하게 애를 썼다. 도난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한결같은 감시가 필요하였다. 모든 것이 정돈을 갖추자, 비글호는 열흘 계획으로 탐사항해를 떠났다.

탐사항해에서 돌아온 비글호 선원이 리넨과 바둑무늬 모직 옷을 걸친 원주민들을 지나쳤다. 그들은 매튜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머리가 온전치 못했다. 다윈의 말은 이랬다.

”매튜는 푸에고 인들의 행동을 하도 나쁘게 평하는 바람에 피츠로이 선장은 그를 비글호로 다시 데리고 와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리고 그는 결국은 뉴질랜드로 옮겨졌다. 거기엔 그의 형이 전도사역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울랴를 떠나자마자 그 곳에서는 일종의 조직적 약탈이 규칙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밤낮없이 매튜는 원주민들 속에 둘러싸여 끝도 없이 들려오는 그들의 소란스러운 소음들이 마침내 그의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고 했다… 나는 우리가 알맞은 시간에 돌아왔기에 그의 생명을 건졌다고 생각하였다” (1:241).

그곳을 떠나야 한다는 의견에 매튜도 동의했다. 그러나 지미와 요크, 그리고 푸에고는 남기를 원했다. 8일간 떠났다 돌아온 피츠로이 선장은 그들을 일일이 심사했다. 짓밟히기는 했어도 정원에는 작물이 돋아나고 있었다. 지미는 더 많은 도난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것말고는 모든 게 다 말짱하였다. 피츠로이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그들을 통해서 우리가 그들을 영국에 데리고 갔던 우리의 충정과 동기를 그들의 동족들에게 알려지고 이해되어, 장차 우리가 다시 이 곳에 돌아왔을 때, 그들이 우리들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면, 매튜가 이곳을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었지만, 상황이 허락하지 않아 뒤로 미루었던 전도사역을 훨씬 더 많은 성공할 확률을 가지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으로 나는 생각하였다” (2:103).

한 일년이 지나고 비글호가 1833년 3월 5일에 울랴에 마지막으로 들렸다. 그곳엔 인적이라곤 없었다. 카누 한 척이 우리 배로 다가오더니, 카누를 타고 온 그들 중 한 사람이 얼굴의 회칠을 물로 씻고 있었다. 이에 관한 다윈의 글은 이러했다.

”그 사람은 처량하게도 지미였다 - 앙상하고 초췌한 몰골을 한 야만인이 다 되어 긴 머리카락은 헝클어졌고, 허리에 두른 한 조각 담요 말고는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 우리가 그를 남기고 떠날 때 그는 포동포동하게 살이 찌고 말쑥한 몸에 좋은 옷을 입고 있었지 않았던가! 나로서는 그렇게도 완벽하고 처량하게 변한 몰골은 본 적이 없었다” (1:244).

다윈은 이어서 지미와의 마지막 해우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어쨌거나 그는 옷을 갈아입자마자 … 피츠로이 선장과 마주 앉아 식사를 했다. 그의 식사 매너는 예전처럼 정갈하였다. 그는 먹기엔 ”너무 많습니다.” (충분하다는 뜻으로) 라고 말했다. 그는 여러 말을 했다. 춥지 않다, 친척들은 아주 좋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영국으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다. 저녁에 그의 잘 생긴 젊은 아내가 도착하고서야 우리는 지미의 기분이 보여준 이렇듯 큰 변화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여전한 그의 착한 감정으로 그는 그가 제일 친하게 지내던 두 선원에게 아름다운 수달피 가죽을 선사하였다. 그리고 손수 만든 몇 점의 창끝과 화살촉을 선장에게 선사하였다. …  지미는 바닷가에 도착하자 봉화를 피워놓고 연기를 날려서 망망대해로 선수를 돌리고 떠나려는 우리 배에게 길고 긴 마지막 작별 인사를 올리고 있었다.” (1:244-5).

지미의 고향에 전도 본부가 다시 세워지기는, 그 때부터 30년 이란 세월이 지나는 동안 수없이 거듭된 실패와 순교를 경험한 다음이었다. 그러나 피츠로이와 다윈은 타히티와 뉴질랜드에서는 선교사역의 성공 사례를 볼 수 있었다. 다윈은 자기 누이 캐롤라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곳에서 우리들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영악한 야만인으로 알려진 부족들에 휩싸여있지만, 선교단의 덕분으로 영국 땅에서와 마찬가지로 안전하게 걸어 다닐 수 있었다”(3;176). 그의 책에서 다윈은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남태평양 전역에서는 기독교 도입의 결과로 된 진보의 행진이 자력으로 된 것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쿠크(Cook)조차도 그런 변화의 개연성을 예견하지 못했던 때부터 겨우 60년도 못된 기간에 이런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기억하고 다시 한번 놀랬다. 그런데 쿠크의  훌륭한 판단력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1:532). 


비글호의 항해와 진화론 (The Voyage and Evolution)

남아프리카에 머물고 있는 동안 피츠로이와 다윈은 원주민들 속에서 펼친 전도사역을 옹호하는 기사를 공동으로 집필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항해를 끝내고 3년여가 지난 다음부터 그 항해에 대한 평가에서 이들 두 사람의 세계관이 달라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다윈이 지향하는 목표가 어딘지 예견하고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피츠로이는 항해에 대한 설명을 성경의 진리를 믿을 것을 촉구하는 말로서 끝맺음을 하고 있다. 그는 모든 인간은 소아시아에서 기원한 조상을 뿌리로 가지고 있는 친척이라고 강조하였으며, 6일 동안의 창조설을 옹호하였다. 그리고 그는 또 전 세계적인 규모의 홍수가 지질학과 모순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2:176-9). 이에 반해 다윈의 설명에는 찰스 라이엘(Charles Lyell)의 책 '지질학의 원리(오늘날의 침식과 퇴적율을 기초하여 과거의 변화를 설명하려는 시도)에서 즐겨 참조한 내용들을 얼마쯤 포함하고 있었다. (1:965, 132,188, 346, 494). 다윈은 긴 항해 기간 중에 최근 창조설과 세계규모의 대홍수설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방하고 있는 이 장편 저서를 읽었던 것이다.


갈라파고스(Galapagos) 섬의 핀치(finch) 새에 관해서, 다윈은 이렇게 기술하였다. ”상호 밀접하게 관련된 조그만 새들의 한 집단에 개재하는 구조상의 이종(異種)과 변종들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로 이런 환상을 떠올릴 법도 하였다. 이 군도(群島) 내에 있는 새들의 원종에서부터 한 종이 취해져서 여러 목적에 따라 다르게 부분적인 변화를 겪었으리라는 상상이다”(1:402). 그러나 새들은 새들일 따름이었다. 다윈은 진화론적 이론을 제기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다.

”… 나그네가 가는 곳마다 잠시 동안씩만 머문다면, 나그네의 기술(記述)은 상세한 관찰 대신에 일반적으로 단순한 스케치 이상의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순전히 나 혼자 힘으로 지식과 현실간의 넓은 괴리를 부정확하고 피상적인 가정으로 채워보려는 경향이 집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1:532-3).

1859년에 들어서는 다윈이 그와 같은 조심성을 제쳐놓은 것이 확실하였다. 그는 '종의 기원'을 출판했던 것이다.

”박물학자로서 비글호를 타고 항해하면서, 나는 남아메리카 대륙에 서식하는 유기체의 분포에서 어떤 특정 사실들을 발견하고, 또한 지리학적 관계에서 그 대륙의 과거의 서식생물들과 현재의 서식생물들과의 사이에 어떤 특정 사실들을 발견하고 크게 충격을 받았다. 본 저서의 후반부에서 볼 수 있겠지만, 그 사실들은 종의 기원에 대하여 어떤 빛을 밝혀주는 것 같았다 …” (4:6).

비글호가 진화론의 이론을 위해 이용되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9세기에 살던 많은 영국 사람들처럼 비글호의 선원들도 성경적 세계관을 견지하고 있었다. 항해기간동안 그들은 매 주일 예배를 보았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의 항해목적의 성공을 허락하셨던 것이다. 그들이 수없이 많은 어려움들을 무릅쓰고 해안탐사를 진행하고 있는 동안, 다윈은 식물과 동물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들은 티에라 델 푸에고에서 최초의 전도사역을 도왔으며, 또 비글호의 항해를 유명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원전 : (1:222)와 같은 참조 표시는 원전을 표시한다, 즉 1(아래), 그리고 222 쪽을 가리킨다.

1. Charles Darwin, The Voyage of the Beagle, Harvard Classics 29, New York: P. F. Collier & Son, 1909 [1839].

2. H.E.L. Mellersh, Fitzroy of the Beagle, Mason & Lipscomb, 1968.

3. Adrian Desmond & James Moore, Darwin, New York, Warner Books, 1991.

4. Charles Darwin, 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Great Books of the Western World, 49, Chicago: Encyclopedia Britannica, 1952 [1859].

*Mr. Louis Lavellee (M.S., M.Div.) is an environmental engineer in Mississippi.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s://www.icr.org/article/voyage-beagle-creators-service

출처 - ICR, Impact No. 358, 2003.

미디어위원회
2003-10-08

진화론이 인문학과 과학에 끼친 충격 

(The Impact of Evolution on the Humanities and Science)

John N. Moore 


문학 (Literature)

런던(Jack London)의 소설,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의 연극, 그리고 심지어 테니슨(Alfred Tennyson)의 시(詩)까지도 인류의 '진화”를 확신하고 있는 듯 했다.1 테니슨은 다윈의 책이 1859년에 출판되기도 전에 이미 진화론적인 견해를 표현한 바 있다. 이 문학의 '거장들”과 몇몇 순수문인들의 작품들은, 다윈의 두 번째 저서인 ‘인간의 후손들 (The Descent of Man)’ 이 끼친 충격적인 영향력에 힘을 보태어, 19세기 지성인들이 소위 인간진화 개념을 수용하는데 크게 일조하였다. 

런던과 쇼는 영국에서 Karl Marx의 추종자 Beatrice와 Sidney Webb이 조직한 페이비언 협회(Fabian Society)가 표방하던 사상을 실질적으로 추종하던 사회주의자들이었다. 그렇게 되어서, 진화론적 세계관을 옹호하는 선전선동가들이 정선(精選)한 이론과 상호간의 연락을 공고히 하는 '망(web)'이 확장되게 되었다. 런던과 쇼는 문학작품을 통해서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 세계관을 그럴듯하게 제시하면서 생존경쟁의 개념을 설명하였다. 특히 런던은 자기 작품 ‘늑대 개(White Fang)’와 ‘야성의 외치는 소리(The Call of the Wild)’ 에서 묘사한 투쟁의 모습을 통해서 '붉은 이빨과 발톱'이라는 구절을 일반화시켰다. 그의 두 번째 작품은 1970년대 후반부에 TV 극으로도 만들어져 크게 인기를 얻기도 했다. Veblen, Norris, Dreiser, 그리고 Michener와 같은 소설가들은 계속 진화론의 사상을 소설에 이용하였다. 미케너의 작품 ‘센테니얼(Centennial)’은 초기의 '지사학(historical geology)'을 오용한 특별하고 실제적인 예이다.


철학 (Philosophy)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동식물 종류(kind)의 창조시 원형(原型)을 포함하는 생물학상 분류법을 비평하는 소리가 점점 더 그 범위를 넓혀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돌아보면, 철학에 있어서 진화사상의 충격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진화론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한 종류(kind)의 유기체(생명체)는 아마도 다른 종류의 유기체와 공통의 조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며, 각 종류의 유기체간에는 장구한 시간적인 공간을 통하여 완만하고 점진적인 변화를 거쳐 오늘날의 종류들로 알려지게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 견해를 과학적 사실에 근거한 것으로 오판하고 수용한 철학자들은, 범주(範疇)들은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으며, 절대는 식별될 수 없고, 모든 사물은 상대적이라는 철학적 논거를 세웠다. 여기서부터 논리에 혼란이 야기되어, 사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본 원칙들이 다가논리(多價論理) 체계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철학이 진화론을 수용하자, 윤리학과 미학은 한층 더 혼란한 상태에 빠졌다. 여기에서 진화론 사상을 전폭적으로 수용한 존 듀이(John Dewey)의 저작물들의 중요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견해가2 실존주의의 실망, 신의식(新意識; New Consciousness), 그리고 동방종교의 신비주의에 대한 '개방'에 크게 기여하였던 '신(新)' 20세기 철학의 발전에 크게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3


심리학 (Psychology)

프로이드(Sigmund Freud)가 인정한 후천적으로 획득한 성격의 유전에 대한 개념을 살펴보는 것이 심리학과 정신의학에서의 진화론의 영향을 규명하는데 적절한 출발점이 될 것 같다. 다윈은 '종의 기원'의 후속 판에서 개인의 후천적 형질은 어떤 모습으로든 후손에게 유전된다는 라마르크(Lamarck)의 신념을 적절히 이용하고 있다. 비록 이 개념이 오늘날의 원로 생물학자들과 유전학자들에 의해서 전적으로 부정되고, 또 철저하게 거부되고 있지만, 프로이드가 그 개념을 수용했을 때, 심리학계에 저명한 환경결정론자의 마음을 기울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환경결정론자들에 의하면, 개인의 개성은 성장과정에 만나는 환경의 영향이라고 한다. 오늘날, 스키너(B.F. Skinner)를 비롯하여 Robert Ardrey와 Konrad Lorenz, Desmond Morris와 같은 과학자들은 인류의 진화론적 기원에4 관한 비과학적인 이념에 기초를 둔 환경결정론자의 접근방법을 광범위하게 수용하고 있다.


과학 (Science)

과학의 여러 하부 분야에 끼친 진화론의 영향은 거의 완벽한 상태이다. 생물학과 관련된 과학의 모든 분야에 침투한 진화론 사상에 대한 헉슬리(Julian Huxley), 도브잔스키(Theodosius Dobzhansky), 그리고 사르댕(Pierre Teihard de Chardin)의 지지는 젊은 과학자들의 연구에는 물론 대중매체에까지 아직도 크게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이에 더하여, 심슨(G.G. Simpson)은 진화론 사상을 거의 모든 분야에 적용할 것을 강력히 선도(先導)하고 있다.

그렇지만 1895년에 ‘종의 기원’이 출판된 후, 10년 주기로 다윈니즘, 신다윈니즘, 그리고 심지어 진화에 관한 현대적인 합성 ‘이론’ 속에 숨겨진 약점들과 결점들을 비평하는 이론들이 과학자들에5 의해 발표되어 왔다. 하지만 이들의 비평 이론들은 과학교재에 전혀 심도있게 반영되지 않고 있다. 1960년대 미국의 중학교에서 생물종의 진화론적 기원에 대해 가르치는 것을 확대하고 증대시키기 위해 실질적으로 도입한 특별한 촉진책이 1970년대에 들어서는 오히려 창조론의 가르침, 즉 생물종의 창조론적 기원에 대한 과학적 근거와 지지를 설명하는 교재개발의6 원인이 되었다.


교육학 (Education)

현대 교육학의 '주도자' 존 듀이(John Dewey)는 방대한 저서들 속에 다윈니즘을 폭넓게 받아들였다. 그는 인간을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완만하게 진보하는 하나의 '진화된' 생물로서 보았다. 듀이는 가장 중요한 것은 학교교육이 시행되는 환경이라고 생각하였다. 듀이는 그의 모든 저서는 아닐지라도 많은 저서들 속에서 진화론적 교육관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그리고 수 세대에 걸친 교육자들이 어떤 형태로든 듀이의 사상을 추종하였기 때문에, ‘환경결정론(Environmentalism)‘이 미국 초등학교의 교육원리와 교육정책 개발에 가장 핵심적인 관점이 되었다. 인간은 환경과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발달되는 지적동물로서, 즉 지능을 써서 살아남는 '생존자'로 다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7


신학 (Theology)

심지어 오늘날의 신학 연구조차도 진화론 사상에 의해서 크게 조종되고 있다. 어디에든 Graff-Wellhausen의 성서원문 비평에 관한 '가설' 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광범한 진화론의 영향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그 가설에 따르면, 성경의 내용도 '진화'한 것이다. 성경에 대한 '진화론'적 견해를 가장 영향력 있게 대변한 사람은 Harry Emerson Fosdick이다.8 그는 신에 대한 인간의 예배는 태양신에 대한 예배로부터 시작되어, 월신, 산신, 하신(河神), 곡신(穀神), 부족신, 전능신으로 '진화' 하였다는 주제로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 오늘날의 저명한 학자들을 참조해보면, 다신교 신앙은 애초에는 지구상의 모든 인간집단이 시작하였던 고대 일신교에서 유래된 퇴화된 예배 양식이라는 것이다.성서의 고등비평과 형식비평의 포괄적 논거는 진화론적 견해에 뿌리를 두고 있다.


References

1. conner, Frederick W., Cosmic Optimism (A Study of the Interpretation of Evolution by American Poets From Emerson to Robinson), Gainesville, Florida: University of Florida Press; Leo J. Henkin 1940. Darwinism in the English Novel. N.Y.: Corporate Press, Inc.; Bert. Loewenberg 1964. Darwinism: Reaction or Reform? N. Y. :  Holt, Rinehart and Winston; Stow Parsons (Editor) 1956. Evolution Thought in America, N.Y.: George Braziller, Inc. Georg Roppen 1956. Evolution and Poetic Belief. Oslo, Norway: Oslo University Press; Lionel Stevenson 1963. Darwin Among the Poets. N.Y.: Russel. See also Zirkle, Conway 1959. Evolution, Marxian Biology and the Social Scene.Philadelphia: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especially Chapter 10, 'Marxian Biology in the Communist World.'

2. See various Dewey books such as Reconstruction in Philosophy (1920) and The Quest for Certainty (1929).

3. Schaefffer, Francis A. 1968. Escape from Reason. Chicago: Inter-Varsity Press; and James W. Sire 1976. The Universe Next Door (A Basic World View Catalog). Downers Grove, Illinois: Inter-Versity Press.

4. Skinner, B.F. 1971. Beyond Freedom and Dignity. Toronto, N.Y. Bantam Books, N.Y.: Vintage Books, N.Y.: Vintage Books; Robert Ardrey 1970. The Social Contract. N.Y.: Atheneum and African Genesis. 1962. N./Y.: Atheneum; Konrad Lorenz 1966. On Aggression. N.Y.: Harcourt, Brace and World; Desmond Morris 19676. The Naked Ape. London: Cape. See Francis A. Schaeffer 1972. Back to Freedom and Dignity. Downers Grove, Illinois: Intervarsity Press in which he responds to the Skinner Book as well as to Jacques Monod's 1971 Chance and Necessity. N.Y.: Knopt and to Francis Crick's 1966 Of Molecules and Men. Seattl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5. An accumulative computerized bibliographic compilation is available for one dollar upon request to Dr. Moore. These materials were gathered while using six research grants form Michigan State University over twelve years under the title, 'Library Search for Representative Statements by Scientists on Organic Evolution, Natural selection, and Related Topics since 1859.'

6. Books published by creation-Life Publishers, such as Origins: Two Modelsby Richard Bliss; Streams of Civilization, Vol. One. Ancient History to 1572 A.D. by Albert Hymn and Mary Stanton; Scientific Creationism by Henry M. Morris, Editor; or Biology: A Search for Order in Complexity Edited by John N. Moore and Harold S. Slusher. 1974. Grand Rapids,Michigan: Zondervan Publishing House.

7. White Morton. 1943. The Origins of Dewey's Instrumentalism. N.Y.: Columbia University Press. Among many books by John dewey see his Essays in Experimental Logic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16) and Logic: The Theory of Inquiry (N.Y.: Hery Holt & Co., 1938). See also Zirkle, Op. Cit., Reference 1.

8. McDowell, Josh. 1972. Evidence That Demands A Verdict (Historical Evidence for the Christian Faith). San Bernardino: Campus Crusade for Christ, International. also excellect on the Graff-Wellhausenb thesis is Oswald T. Allis, 1943. The Five Books of Moses.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mpany; and Clifford Wilson, 1977. Ebla Tablets: Secrets of a Forbidden City. San Diego: Master Books.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www.icr.org/article/impact-evolution-humanities-science

출처 - ICR, Impact No. 53, 1977.

미디어위원회
2003-10-06

진화론이 학문에 끼친 영향

임번삼


       다윈의 진화론은 초창기부터 경제학(Economics)의 막스, 사회학(sociology)의 창시자인 흄(David Hume)과 스펜서(Spencer), 지질학의 라이엘, 식물학의 아서 그레이 등과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 그 후, 인류학(anthropology), 심리학(psychology), 교육학(pedagogy), 철학(philosophy), 신학(theology), 문학(literature) 등의 거의 모든 학문분야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사회학의 창시자중 한 사람인 스펜서는 9명의 형제자매 중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으로서(사진 3)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공중 앞에서는 자신의 입장을 큰 소리로 주장하는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Spencer 1904). 그는 <생물의 원리>(Principles of Biology 1864)에서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ist)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소개하고 알렸다. 다윈은 그의 이러한 용어를 피하다가 <종의 기원> 제5판(1869)부터 이 용어를 채택하였다. 스펜서는 일체의 초월적 존재를 부인하고 모든 이론을 진화론적 기계론 위에 세웠다(Spencer 1890). 그는 1860년부터 1896년까지 인간지식에 관한 논문들을 거의 망라한 방대한 <합성철학>(Synthetic Philosophy, 10 vol.)을 저술했으나, 자기 이론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억지로 논문들을 끼워 맞추는 우를 범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Irving 1955). 그는 애매한 원칙들을 세운 후 연역적으로 추상적인 묘한 법칙들을 이끌어 내곤 했는데,  이러한 방식에 대해 다윈은 강하게 비판하였다 한다(Barlow 1958). 그는 기독교인이 아니면서도 자기 이론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성경을 자주 인용하였다. 그는 <심리학 원리>(Principle of Psychology 1870-1872)에서 인간은 육체뿐 아니라, 감정도 진화한다고 주장하였다. <윤리학 원리>(Principle of Ethics 1893)에서는 사회가 복잡화되면서 인간의 윤리도 진화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를 사회진화학의 원조라 부른다.


인류 관련학과와 심리학에서는 인간에 대해 연구하는 방안으로서 인류의 조상이라는 영장류의 거동을 연구하거나 생명현상을 기계론적으로 해석한다. 심리학의 프로이드와 교육학의 듀이가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프로이드(Sigmund Freud 1856-1939)는 라마르크의 후천획득형질의 유전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인간의 행동양식은 성장과정중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는 환경영향론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오드리(Robert Audrey), 로렌츠(Konrad Lolenz), 모리스(Desmund Morris), 스키너(Burrhus F. Skinner) 등에 의해 계승되었다.


하버드대학의 저명한 곤충행동학자인 윌슨(Edward Wilson)은 <새로운 합성>(The New Sythesis 1975)에서 모든 동물들에게는 행동을 결정하는 특수유전자가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이 책의 26장을 곤충에 대해 기술하다가 27장부터 그러한 곤충의 행동을 사람에게 적용하였다. 이러한 진화론적 주장은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On Human Nature 1978)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이 책에서도 인간의 동성애, 외국인기피증, 공격성, 원한, 남녀간의 성격차이 등을 포함한 인간의 성격과 변화의 특성은 특별유전자의 작용에 의한 것이라고 추리하였다.  그는 이기심뿐 아니라 이타심을 조정하는 유전자도 있다고 하였다. 이처럼 그는 동물의 모든 행동을 유전자에서 찾으려 하였다. 그는 인종우생학이나 엘리트주의를 내세우진 않았지만 그의 이론은 인종주의자들에게 이용되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교육학 분야에서도 진화론의 영향은 지대하였다. 갤튼의 환경중시적인 교육이론은 1930년대에 영국의 심리학자인 버트(Cyril Burt)가 53쌍의 쌍둥이들이 어떻게 환경의 영향을 받는지 실험하고 런던에 생물결정주의 학교(Biological Determination School)을 개설하였다. 그는 자연(출생)보다는 환경(양육)의 효과가 더 크다는 사실을 쌍둥이를 분리하여 양육한 실험으로 입증하고자 했으며, 그의 환경론은 영국의 교육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1971) 그의 추종자인 헌쇼(Hearnshaw)는 시릴 자서전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시릴 버트가 자신이 주필로 있었던 영국심리학회지(British Journal of Psychology)에 투고한 논문내용들이 실험결과를 조작했거나 거짓 내용을 발표했다고 폭로하였다. 그리고, 시릴이 투고자의 이름에 있지도 않은 사람을 등장시키거나 남의 이름을 도용했다는 사실도 밝혔다. 이러한 지적은 통계학자인 스피어맨( C.E. Spearman)의 이름을 도용하여 명예를 실추케 하였다고 진화학자인 굴드가 지적한 사례에서도 확인되었다. [S.J. Gould; The measure of man, p 234, W.W. Norton, New York, 1981]. 더구나, 이러한 거짓 행각으로 시릴은 오랫동안 편집증(偏執症)으로 고생했었다는 사실도 밝혀지게 되었다(Hearnshaw 1979).


이에 따라, 갤튼의 환경론적 우생학은 신뢰를 잃게 되었으며, 그와 경쟁관계에 있었던 문화결정론 학교(Cultural or Behavioral Determinist School)가 득세하게 되었다고 한다(Mahoney 1976). 이 학교를 세우고 이끈 사람은 유태계 미국인인 보아스(Franz Boas 1852-1942)와 그의 제자인 미이드(Margaret Mead 1901-1978)였다. 보아스는 버효(Rudorph Virchow)에게 사사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이민자들의 가계에 대하여 방대한 조사를 하였다. 그 결과, 빈곤층의 자녀들이 부유층 자녀들보다 발전이 더디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우생론자들과 논쟁하였다(Boas 1892). 1912년에는 인간의 다양한 두뇌형태(18721건)에 대해 검토하고 우생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두뇌의 형태가 인종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미국 이민자들과 미국에서 태어난 자녀들을 비교하여 입증하였다. 미국에 이민을 온 자녀들이 미국에 오래 살수록 앵글로 색슨형의 두골형으로 바뀌어간다는 사실을 밝혀 낸 것이다. 그리고, "먼 세대까지 더 오랜 영향을 끼치는 환경요인일수록 더 쉽게 유전현상인 양 잘못된 인상을 받게 될 수 있다”고 하였다(Boas 1916). 하나의 콩깍지 속에 여러 개의 콩이 들어 있을 경우 같이 태어난 콩들이지만 서로 다른 환경에서 키우면 나중에 전혀 다른 모습을 나타내게 된다는 것이 보아스 이론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유전요인과 환경요인이 어우러져 형질을 형성해 나간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미국의 대표적 사학의 명문인 하버드대학은 유신진화론자인 그레이(Asa Grey 1810-1888))에 의하여, 예일대학은 유신진화론자인 다나(James Dana 1813-1895)에 의해 유신진화론으로 바뀌었다(Went 1968). 미국의 교육체계에서 전통적인 성경교육을 제거하도록 제안한 사람은 진화학자인 호레이스 만(Horace Mann)이었다.


이러한 호레이스 만의 기치를 들고 휴메니스트의 이상에 맞도록 교육체계를 개혁한 사람이 듀이(John Dewey 1859-1952)였다. 그는 실용주의(pragmatism, unitarianism)를 주창함으로써 미국의 기존 가치관인 청교도주의(puritanism)의 기초를 파괴하였다. 그리고, 국공립학교에서 기도와 성경을 축출하고 진화론을 소개함으로써 인본주의 사상을 주입하는 일에 주력하였다(Clark 1960). 그는 인간의 육체와 정신은 진화의 산물이며, 교육환경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하다고 역설하였다. 그 결과, 청교도적이며 창조론적 신앙에 근거하여 세워졌던 수 많은 미국의 교육기관들이 창조론에서 진화론으로 급속히 탈바꿈하여 갔다. 그의 노력은 뒤에 설명하는 인본주의자선언의 채택(1933), 좌익잡지인 <새로운 공화국>(New Republic)에의 정규적인 기고 및 모스코바 재판(1936-1937)에서 트로츠키를 도운 공로로 사회주위 훈장을 받음으로써 꽃을 피우게 되었다.


<제1차 인본주의자 선언>(Humanist MenifestoⅠ)에는 교육자, 심리학자, 과학자들이 모여 ‘신으로부터 해방하여 인간의 힘으로 인간성을 회복하자’는 15개항의 결의문이 포함되어 있다. 이 선언의 기본사상은 과학주의, 진화론 및 유물론적 생명관에 기초한 무신론이다. [이양림; 인본주의 운동의 실상, 창조, 72호(11, 12월호), p 5-6, 1990]. 이들은 17개 항의 <제2차 인본주의자 선언>(Humanist manifesto Ⅱ)을 통하여 일차의 내용을 재확인하였다. 이렇게 성장해 가던 진화론 교육이 마침내 기독교와 논쟁일 일으킨 사건이 스코프스 원숭이재판(1926)이었다. 창조론을 대표한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은 수천명에 불과한 인본주의자들이 "4천만 기독교도들을 통치하려는 과도기구를 세우고”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는데 분개하였다(Coletta 1969). 그는 이러한 과도기구를 <과학적 노동평의회>(scientific soviet)라고 불렀다 (Levine 1965).


미국교육계에 충격을 준 또 하나의 사건은 케네디 대통령이 인간은 모든 빈곤, 공포, 인종, 종교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인간의 자유선언>(Declaration for  Human Freedom 1961)을 한 것이다. 그는 특히 <종교로부터의 자유>를 헌법에 명시토록 함으로써, 미국 전래의 기독교적 가치관을 제도적으로 제거시켰다. 그의 결정으로 대법원은 공교육에서 기도와 성경을 보는 일을 중단시켰으며, 이를 계기로 미국사회는 다양한 가치관이 유입되면서 진화사상이 모든 분야에 물밀듯이 스며들었다. 인본주의자들이 미국교육계에 끼친 영향은 라 하이에(La Haye 1980)에 의해 잘 정리되어 있다. [Tim LaHaye; The Battle for the Mind, Fleming H. Revell, New Jersey, 1980]


인본주의의 가장 강한 영향을 받은 교육분야는 <유네스코 교육지침>(1949)의 다음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어린이들이 국수주의에 오염된 공기를 마시는 한 세계지향적인 교육은 불확실성만 더 해 갈 뿐이다. 우리가 지적했듯이 어린이들에게 극단적인 국수주의를 감염시키는 것은 가정이다. 따라서, 학교는 그러한 가정과 싸우는 수단들을 동원해야 한다.” (UNESCO; In the classroom with children under 30 years of age, Brooklet 5 in the series Towards World Understanding, p 58, Paris, 1949)

경제학분야를 살펴보면, 전술한 공산주의외에도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 영국의 웹(Sideny Beatrice Webb)이 이끌었던 점진적 파비안사회주의(Fabian Socialism)와 케인즈(John Maynard Kaynes, 1883-1946)의 민주사회주의(Democratic Socialism)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전통적인 자본주의에서도 진화론의 영향으로 양육강식의 논리가 정당성을 갖게 함으로써 브르조아 계급과 프로레타리아 계급 간의 대립을 심화시켰다.


철학에서는 19세기의 헤겔과 니이체, 20세기 중반을 풍미했던 허무주의적 실존주의(nihilistic existentialism)에도 영향을 끼쳤다. 막스의 사상형성에 영향을 준 헤겔(George Hegel 1770-1831)은 무신론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자연계에는 세계정신(Weltgeist) 또는 절대정신(Absolute geist)이라는 것이 들어 있으며,  모든 자연계의 현상은 이러한 절대정신의 발현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종교는 이러한 철학의 진리를 나타내기 위한 상상적이고 도식적인 방편이라고 하였다. 그는 자연계의 절대정신이 곧 신이라고 해석하여 범신론적인 입장을 나타내었다. 그는 자연계가 진화적 과정으로 긍정적인 정(正 these)과 부정적인 반(反 antithese)이 변증적인 투쟁을 하다가 균형잡힌 합(合 synthese)으로 통합되며,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완성된 경지에 도달한다고 하였다. 후일, 샤르뎅은 이러한 궁극적 경지를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라 불렀다. 헤겔의 사상은 라이엘의 <지질학원리>보다 먼저 제시되었으나, 자연계에 발전적인 과정(진화론)이 있다는 다윈의 진화론이 발표되면서 독일사회에 더욱 확산되었다. 이러한 헤겔의 사상을 헤겔적 진화론(Hegelian evolutionism)이라고 부른다. 헤겔의 사상은 제자인 포이엘 바하(Ludwig Feuerbach)를 거쳐 인류학으로 바뀌게 되었다. 포이엘 바하는 신이란 인간의 투영이라 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니체(Friedrich Nitsche 1844-1900)로 연결되었다. 그는 이성대신 야성을 앞세웠다. 의회제도, 선거제도, 사회개혁을 비판하고 과학에 의한 진보와 기독교적 윤리관을 비판하였다. 기독교가 주장하는 절제, 순종, 희생정신이 인간의 본능을 억제하여 자유로운 활동을 저해한다고 비난하였다. 고대세계에서 기독교의 승리는 강자로부터 용기를 빼앗은 약자의 혁명이라고 조롱하였다. 계몽주의자들이 기독교는 비판하되 기독교윤리는 받아 들인 반면 니체는 기독교가 굴종의 정신을 전파한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는 <초인의 철리>,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등의 저서를 통하여 초인이 우매한 민중을 다스려야 한다는 초인주의를 역설하였다. 이는 헤켈이나 갤튼이 주장한 소수엘리뜨에 의한 지배이론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다윈이 죽던 1882년, 그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였다. [Friedrich Nitzsche; Die Froehliche Wissenschaft, 3 vol, p 108, Chemnitz, 1882].

 

이처럼, 헤겔이 진화론을 지지함으로써 진화론이 철학자들의 무신론 선언을 받아내기까지 걸린 기간은 겨우 한 세대에 불과했다. 나치에 협력했던 실존철학자 하이덱커를 비롯하여 무신론적이며 물질주의적인 알베르 카뮤와 쟝 폴 사르트르도 진화론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은 키엘케골, 칼 야스퍼스 등의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들과 이론적으로 대립하였다.


신학(theology)에서는 20세기에 서구사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고등비평주의(Higher Criticism)는 유니테리언과 헤겔 및 진화론의 영향을 크게 받은 분야이다. 이들은 성경 자체가 진화하였다는 성경진화론(Biblical Evolutionism)을 주장하였다. 고등비평의 창시자인 독일 신학자 벨하우젠(Julius Wellhausen 1844-1918)은 성경은 주변의 문화환경의 영향을 받아 다신론에서 유일신론으로 바뀌었으며, 기원전에 일부의 사제들이 편집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그라프-벨하우젠 개발(Graf-Wellhausen Development)로 알려진 많은 논문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 그는 진화론적인 헤겔의 영향을 받아 인간이 원시인으로부터 진화한 것이라고도 하였다. 그러한 영향으로 모세오경은 물론 구약성서에 대한 신뢰성이 크게 실추되었다. 문서가설(Documentary Hypothesis)로도 알려진 이러한 주장은 헤겔주의적 진화론(Hegelian evolutionism)에 기초한 것으로, 고문서의 발견에 의해 더욱 쟁점화되었다.


당시, 니느웨에서 발굴된 토판 계형문자들은 영국의 스미스(George Smith)의 노력으로 해독되었는데(1872), 그 속에는 노아의 홍수와 유사한 길가메쉬 서사시도 포함되어 있었다(Ceram 1971). 이러한 기록의 유사성에 대하여 전통적 견해는 이 서사시의 내용이 창세기의 내용을 담은 것으로 해석하지만 자유주의자들은 반대로, 창세기의 기자가 길가메쉬 서사시와 같은 바벨론 문서에서 홍수설을 인용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성경이 성령의 감동이 아닌 외부의 자료를 참고하여 편집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쟁으로 19세기 중반 이후에 신학계는 소위 신신학(新神學) 논쟁에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불행스럽게도, 19세기 후반 신신학자들이 구미 신학교의 요직을 독점하면서 복음주의적 신학자들의 승진이 전반적으로 저지되었다 (Lidsell 1976). 이러한 상태로 한 세대가 지나면서 구약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들이 집필한 것으로 의심하는 풍조가 확산되었다. 특히, 브리타니카사전의 편집책임자로 부임한(1881) 고생물학자이며 신학자인 스미스(William Robert Smith)에 의해 자유주의적 해석이 메스콤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그는 전통주의자에 의해 그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문서가설을 소개한 브리타니카사전(19판)을 14년간(1875-1889) 배포하며 문서가설의 확산에 기여하였다.

자유주의적 신학사상을 방송매체를 통하여 20년간(1926-1946) 퍼뜨린 또 한 사람이 포스딕(Harry Emerson Fosdick 1878-1969)이었다(사진 4). 성경 자체의 진화설을 주장한 그는 인간이 하나님을 경배하게 된 것은 토템신앙에서 출발하여 강신술과 부족신에 대한 숭배를 거쳐 하나님신앙을 갖게 된 것이라 하였다. 모세오경은 신화이며, 신구약은 그러한 사건들이 일어난지 수백 년 후에 사람들이 기록하거나 편집한 것이라 하였다. 이러한 그의 이론은 지금도 대부분의 미국 신학교에서 가르쳐지고 있다.


신과 자연과 인간을 일체화하려는 범신론은 힌두교나 불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적 창조설을 믿지 않는 모든 사상이 범신론에 기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카톨릭신부인 샤르뎅(Teilhard de Chardin)도 대표적인 진화론자이면서 범신론자이다. 아이러니칼하게도 공산세계에서는 이러한 유신진화론을 이론교육으로 강화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I.T. Taylor; ibid, p 376] 그러나, 자유주의적 해석은 고고학적인 지지물이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에 반하여 많은 성서적 유물들(Mari, Nazu, Ugarit, Dead Sea Scroll, Tell Mardikh)은 전통적인 성경해석법의 타당성을 뒷받침해 주고 있는 것이다.


문학 분야에서는 19세기의 인기작가였던 갓윈(William Godwin 1756-1836), 갓윈의 딸이면서 <무신론의 필요성>, <후란켄슈타인>(1818) 등을 쓴 쉘리(Mary Shelly), 베르느(Jules Verne 1828-1905), 추리소설가인 포(Adgar Alan Poe 1809-1849) 등을 들 수 있다. 쉘리는 바이런과 초자연적인 토론을 자주 하였고, 다윈의 사상에 대해서도 토론하곤 하였다 한다. [B. Aldiss, Billion Year Spree, p 25, Doubleday & Company Inc, Garden City, New York, 1973]. 후란켄슈타인은 신을 대신하여 인조인간을 창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다윈은 이러한 공상과학소설의 작가들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D. Kyle; A Pictorial History of Science Fiction, p 28, Han-dyn Publishing, London, 1976].

 

막시즘을 이상형으로 추구하던 페비언주의자(Fabianist)이며 토마스 헉슬리의 제자였던  웰스(H.G. Wells 1866-1946)와 쇼(Bernard Shaw)와 런던(J. London), 인기작가인 테니슨(Alfred Tennyson)과 아나톨 프랑스(Anatole France), 노리스(Frank Norris) 등이 잘 알려진 인물이다. 특히, 웰스와 런던 및 쇼는 파비안주의자들로서 생존경쟁의 개념을 작품속에 강하게 부각시켰다. 그들은 막스의 사상을 최상의 이념으로 제시하였다. 특히, 다섯편의 공상소설로 유명한 웰스는 진화론에 입각한 그의 사고를 이렇게 표현하였다. "만일, 사람이나 모든 동물이 같은 조상에서 진화한 것이라면, 인류의 첫 조상인 아담이나 그의 타락사건도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타락사건이 없었다면 그 죄 때문에 대속적인 죽음이 필요했다는 기독교의 교리는 역사적인 허구가 될 것이다. 이러한 허구 위에 세워진 기독교적 도덕과 윤리관은 따라서 카드로 만든 집처럼 붕괴되고 말 것이다.” [H.G. Wells; The Outline of History-Being A Plain History of Life and Mankind, p 616, Cassell & Company Ltd, London,(4th revision), 1925]. 그의 소설중 하나인 <타임머신>은 주인공이 두 종류의 신종으로 변하여 802,701년으로 미리 여행하는 내용도 들어 있다. 하나는 어린애와 같이 생긴 일롱(Elloi)이고, 다른 하나는 원숭이처럼 생긴 몰록스(Morlocks)이다. 그 곳에서 이들에 의해 막스주의적인 통치가 이루어지는 현상을 그리고 있다. [Rottensteiner; ibid, p 29] 한편, 쇼는 "신이란 인간의 형을 따라 만들어진 존재"라고 하였다.


낭만주의 문학은 범신론적인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분야이다. 독일의 괴테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리고, 요즈음 인기가 높은 대부분의 공상과학소설 속에는 진화론적 내용이 밑바닥에 짙게 깔리어 있다. 이처럼, 진화론은 공상과학소설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로텐슈타이너의 연대기(Rosensteiner's chronology)에 의하면 후란켄슈타인에서 종의 기원에 이르는 42년간에 주요한 과학소설이 5편이었으나, 다윈의 진화론이 발표된 후 42년간(1859-1901)에는 26편으로 급증하였다고 한다. [E. Rottensteiner; The Science Fiction Book, p 153, Seabury Press, New York, 1975]. 이 밖에, 자연과학분야에서도 수 많은 진화학자들이 진화론의 확산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앞장에서 상세히 살펴본 바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하고자 한다.

 

영화계에서도 인간과 유인원 또는 가상적인 우주인과 싸우는 내용이 자주 주제로 등장한다. 이티(ET)와 쥬라기공원으로 히트한 스필버그감독의 영화속에도 진화론적 색체가 짙게 깔려 있다. 이티에서는 외계의 생명체를, 쥬라기공원에서는 진화론적인 오랜 지질학적 개념을 관중들에게 전파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셀록 홈즈>를 비롯하여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 괴물들과 싸우는 괴기영화를 제작하여 크게 인기를 끈 코난 도일(Connan Doyle)은 실제로 ‘잃어버린 진화의 고리’를 찾아 나섰던 사람중 하나로(사진 5), 필트다운인의 사기극에 깊이 연루된 것으로 확인된 바 있다.


출처 - 임번삼 저, 잃어버린 생명나무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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