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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위원회
2004-07-26

나치의 기독교 말살 계획

(Nazis planned to exterminate Christianity)

Jonathan Sarfati 


       나치 전범에 대한 뉘른베르크 (Nuremberg) 국제재판은 무려 6백만의 유태인을 살해한 Holocaust 사건을 나치의 인종학살 계획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것을 증명하고 고발하였다. 미국의 고소인 단을 이끌었던 윌리엄 도노반 장군(General William Donovan)은 나치가 유태인 학살뿐만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체계적 파괴도 계획하였다는 내용을 담은 방대한 분량의 문서들을 제출하였다.


도노반의 문서들―무려 150 권에 달하는 장정본(裝幀本)―은 1959년 도노반이 죽은 후에 코넬(Cornel) 대학교에 보관되었다. 지금은 Rutgers Journal of Law and Religion에서 internet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 이 범죄적 음모에는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선전부장 요셉 게벨스(Joseph Goebbels), 히틀러 소년단의 지도자 그리고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의 피고인 발두어 시라크(Baldure Schirach)를 포함한 나치당의 정상급 핵심 요원들이 연루되어 있었다.


이 문서에 의하면, 나치는 기독교회가 애초부터 나치의 인종차별과 정복전쟁 계획에 반대 입장을 견지한다는 이유로 제압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했다.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하여 나치는 교회의 내부에 침입하려 하였다. 즉, 중상모략, 체포, 습격 등을 획책하고  목회자를 살해하고, 신도의 사상을 개조하며, 교회 학교와 청소년 조직에 침입하는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성경 중심의 복음주의 교회는 타협적인 교회에 반대하면서 대(對) 나치 항거의 전면에 나섰다. 성경의 무오설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견지 하지 못했던 자유주의 교회들은 집권자의 친-진화론적 이념에 기독교 교리를 끼어 맞추려는 기도의 일환으로 기독교 교리를 서슴없이 ‘재해석’하려 하였다. 그것은 오늘날 다윈의 ‘과학’적 이론에 추종하려는 현상과 유사했다.


일찍이 1937년에 벌써,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나치 정책에 반대한다고 선언한 바 있다. 그러자 나치는 이를 보복하기 위하여 700명의 목회자를 체포 구금하였다.


인본주의자와 자칭 ‘민간 자유주의 단체’ 는 ‘창조설을 교회 내에 국한’ 시키자, 그리고 모든 기독교의 영향을 대중의 생활과 학교로부터 말살하자, 하고 외쳤다. 이 불길한 외침에 보조를 맞추어  ‘여러 교파의 교회들도 … 종교 활동을 가능한 한 좁은 범위 안으로 한정하려 하였다. 그런데 그들의 자진하여 축소한 활동범위 위에 더 많은 제약을 막무가내로 가하려 하던 나치의 방해 공작에 교회는 속수무책이었다.


기독교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이러한 현상은 나치의 ‘점진적 잠식을 위한 용의주도한 기독교 말살 계획’을 진전시키는데 도움을 주었고, 교회의 조직체계를 나치의 정치목적에 이용당하게 하였다.


 

*참조 : The Darwinian roots of the Nazi tree (Weikart review)
http://creation.com/the-darwinian-roots-of-the-nazi-tree-weikart-review

Darwinism and the Nazi race Holocaust
http://creation.com/darwinism-and-the-nazi-race-holocaust

The Darwinian foundation of communism
http://creation.com/the-darwinian-foundation-of-communism

Stalin’s ape-man Superwarriors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5198/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24/i3/nazi.asp 

출처 - Creation 24(3):47, June 2002.

미디어위원회
2004-07-26

린치버그의 거짓말 

- 어떻게 미국의 진화론 학자들이 나치를 가르쳤는가.

 (The lies of Lynchburg)

Carl Wieland 


     최근에 상영된 TV 다큐멘터리가1) 폭로한 기록은 진화론적인 사고가 초래할 수 있는 불온(不穩)한 결과가 얼마나 전율스러운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1920년대 초부터 수천을 헤아리는 사람들이 미국에서 자기 의사에 관계없이 강제로 ‘바람직하지 못한 번식’을 중단시킨다는 목적 때문에 거세(去勢) 되었다는 내용이다. 무려 8,000여 명이 넘는 소위 ‘탐탁치 못한 자’로 분류된 사람들이 버지니아 주의 린치버그(Lynchburg, Virginia)에 있는 시설로 보내져서 거세 절차를 거치게 되었다.


그 희생자들 가운데에는 그 정도가 다양한 정신지체자들도 얼마쯤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보다는 가정 파괴의 결과로 자포자기한 사람들, 또는 이런저런 사회적 불운(不運) 때문에 고통 받던 사람들이 많았다. 거기에는 학교의 우등생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이 기관의 절차가 ‘그들 자신을 위한 일’이라든가 아니면 ‘그들의 건강을 위한 일’이라는 이야기를 포함하여 온갖 거짓말을 정기적으로 들어야 했다. 그들이 받아야 할 수술 뒤에 감추어진 목적을 어떻게든 알아낸 노인들도 수술을 받기 전에는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


그 다큐멘터리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기관의 전반적인 노력은 우생학적 개념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이들이 추진한 우생학 운동은 프랜시스 갤튼 경(Sir Francis Galton)―찰스 다윈의 사촌 동생―이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적자의 생존’의 이념을 인간 사회에 적용, 내지는 권장하고자 했다. 이 운동의 목적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적용시키는 데는 ‘부적합한 자’로 간주될 수 있는 사람들을 강제로 거세하는 방법이었다. 이 생각은 ‘좌익 우익 구별 없이 모든 사회개혁 운동가들’을 솔깃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 중에는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와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도 끼어 있었다.

.찰스 다윈의 사촌 프랜시스 갤튼(Francis Galton)은 버지니아 린치버그에서 있었던 거세 프로그램(sterilization program)에 영감을 주었다. 


자기 고향에서 시행된 거세 수술의 대부분의 책임이 있던 린치버그의 주임 의사는 자신이 수행하고 있는 과업이 사회의 ‘과학적 선(善)'을 위한 일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다윈주의에 헌신적인 그에게는 절대 정(正)이나 절대 오(誤)의 개념은 ‘하층 민중’을  보다 큰 선으로 인도하는 길에 방해가 되는 구식 걸림돌이라고 생각했다. 미국 헌법(창조론에 근거한)이 보장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는 인권 조항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그의 행동을 엄폐할 필요성을 인식한 그는, 진화론을 지지하고 있는 미국의 지도급 생물학자 해리 로린 박사(Dr. Harry Laughlin)가 마련하였던 모범 입법에 매혹되었던 것이다.


로린 법률안은 ‘정신박약자들’ 뿐만 아니라, 맹인, 마약 중독자, 결핵이나 매독 환자, 간질병 환자,2) 극빈자, 귀머거리, 그리고 노숙자들에 대한 강제 거세를 요구했다. 그 법률안은 이 부류의 사람들은 "악성 유전인자의 희생자들임이 명백한 이상, 이 민족을 타락시킬 저들한테 후손 생식을 중단시킴으로써, 이 나라의 '백인의 인종적 순수성’을 유지하는 것을 공공연한 입법 목적으로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험 대상이다. 다시 말해서 이 법안이 헌법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선언할 것을 보증하는 ‘희생양’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그들은 갖고 있었다. 미국시민자유동맹 (the 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이 송사를 벌였던 저 유명한 '스코프스(Scopes) 재판'을3) 긍정적으로 온건하게 보이게 하기 위하여 노골적으로 조작된 재판에서, 어느 젊은 여성이 ‘삼대(三代)를 걸쳐 정신박약’한 가족의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에 거세의 대상으로 선별되었다. 그녀의 변호사는 대법원에까지 상고하면서 로린(Laughlin) 법에 도전하였다. 그러나 그는 실상은 그녀를 위한 변호 대신에 우생학 정책을 수립하는 단체의 일에 깊이 관여하였던 것이다!


그 젊은 여성에게 더욱 불행하게도, 1924년에 이 사건을 주재한 대법원의 주임 판사 오리버 웬델 홈즈(Oliver Wendell Holmes)는 유력한 다윈주의자로서4) 미국에서 세속적 인본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한 많은 사업에 법적 근거를 마련한 사람이었다. 홈즈가 그 법(Laughlin 법)이 합헌적이라고 판결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주 정부가 ‘사회적 부적합자’로 간주되는 사람들에게 거세를 강요하는 일은 수용될 수 있다는 판결이었다. 순진한 희생자에게 거세를 강요하는 일이 진행되었다. 뒤이어 추진된 일련의 조사에서 그녀가 ‘수 대(代)에 걸친 정신박약자 가족’ 출신이라는 저들의 이야기는 완전히 가공이었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그 대법원의 판결이 있은 이후로, 우생학 이론은 미국의 여러 주 정부에서 채택한 사회정책의 주요 항목이 되었다. 


1933년에 집권하자마자 히틀러(그는 적나라한 진화론―적자생존―운동을 전개했다)는 최초로 입법한 법안들 가운데 우생학에 관한 법도 포함시켰다. ‘부적합자’에 대한 나치의 강제 거세  프로그램은 미국에서 박수갈채를 받은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프로그램은 실제로는 로린이 입안했던 법안을 표본으로 삼고 있었던 만큼, 나중에 히틀러 정부는 로린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였다. 정신병동을 가득 채운 정신병자들 전원에게 나치가 안락-살인을 진행시키고 있을 때, 그들의 ‘인종 보건’ 정책에 대해서 ‘과학적’이라고 하는 감탄이 줄어들지 않았다. 어느 미국의 진화론 학자는 실제로 이렇게 진술한 적도 있었다 : "독일 사람들은 우리가 마련한 게임에서 우리를 이겼다"


일단 ‘게르만 인종의 정화(淨化)’를 실질적으로 실행한 과업을  ‘도덕적’ 이라고 인정한 이상, 그 출발선에서부터 더 나아가 홀로코스트 (Holocaust; 유태인 대학살)라는 대규모의 공포 프로그램까지 가는 길은 짧고 빠른, 논리적인 길이 되고 있었다.5)


제2차 세계대전 후, 진화론적 ‘인종 위생학(衛生學)’의 이름으로 자행된 상상을 초월한 잔혹행위에 경악한 미국 대중의 공포는 결국 우생학 실천운동을 지하로 잠입시키고 말았다. 그 운동은 이름을 바꾸었으나, 1970년 이후까지 계속 이어졌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무려 70,0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타의에 의한 거세로 고통 받았던 것이다.


당시 미국시민자유동맹(ACLU) (이 단체는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의 경우 진화론적 사고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에 소속되어 있던 젠니 크로케트(Jenny Crockett)라는 사람의 노력으로, 정부의 엄폐(掩蔽) 기도에도 불구하고  ‘인종 위생 운동’의 스캔들은 세상에 알려지고 말았다. 결과는 불분명한 사과의 변(辯)과 ‘정신건강 상담’을 제공하겠다는 것이 진화론의 가정(假定)으로 인해서 삶이 파괴된 많은 사람들한테 주는 보상의 전부이었다.


전체적으로 교회는 진화론자(그 때 이후 변화했으며 또 계속 변화하고 있는)들의 ‘과학적’ 주장이라는 ‘위압’에 억눌려서, 인간과 세계의 참된 역사를 강력히 옹호하지 못한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기 보다는, 대체로 외면하던가, 아니면 불안한 타협을 유지하고 있는―혹은 그보다도 더 못한―게 실상이다.6) 우리 주 예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어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지 못할 것이요" (마태복음 5:13-14)


만약 우리가 소금과 빛이 될 준비를 갖추지 못하고 또 성경적 현실의 실현을 위해 분연히 일어서지 못한다면, 우리는 자행되고 있는 사회악을 단순히 ‘사회’의 죄라고 탓할 수 만은 없을 것이다.

 

참조와 주석

1) ‘린치버그 사건(The Lynchburg story)'는 부루스 이디(Bruce Eadie)에 의해 출판되었고, 1993년에 Discovery Networks와 Channel Four와 합동으로 Worldview Pictures에 의해서 기록영화로 제작됨. 이 이야기는 그 책에 기록된 정보에 근거하고 있다.

2) 아이러니하게도, 로린은 만년에 간질병에 걸렸다. 그 이후 그가 후손출산을 중단시키려 그토록 애썼던 그의 노력의 대상인 소위 ‘백인 쓰레기’의 한 사람으로 되어버린 그도 진화론적 우생학회 동료들의 기피 대상자로 전락했다.

3) The ACLU = the 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은 통상적으로 좌익 친-인본주의 운동의 챔피언이었다. 1925년에 있었던 유명한 Scopes의 ‘monkey trial’ (원숭이 재판 : 인간은 원숭이에서 진화했다는 진화론자들과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창조론자들 간에 벌어진 재판)에서 이 단체는 진화론을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방지하는 테네시주 법에 도전하기 위하여, 누군가 엉뚱한 사람을 찾아내어 진화론을 가르쳤다는 허위자백을 유도하여 진화론 운동에 대중적 동정심을 노렸으며, 또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선전과업을 전개하였다.

4) 법학 교수 필립 존슨(Phillip Johnson)은 홈즈(Holmes)를 "확신에 찬 다윈주의자로서 다윈 이론의 철학적 함축을 깊게 이해하고 있다"고 하고, 또 그러기 때문에 홈즈는 "도덕률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을 싫어했다"라고 갈파했다.  존슨은 이 유력한 판사가 미래의 법학자들한테  "모든 도덕적 관념들을 접어두고, 법을 … 근본적으로 국가적 강제의 과학으로 보는 입장에서 접근하라고 부추겼다"라고 말했다. See David Menton, 'Inherit the Wind: An Hostorical Analysis' Creation 19(1):35-38, December 1996

5) 제2차 세계대전을 연구한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나중에 강제수용소에서 사용한 Zyklon-B gas를 포함한 대량학살의 기구들은 ‘우생학’ 운동을 목적으로 하고 설립된 의학/심리학/생물학회의 요원들로 일하던 존경받는 독일 학자들에 의해서 실제로 개발된 것들이었다.

6) 고(故) B. B. Warfield와 같은 성서의 무오류성(無誤謬性)을 옹호하는 유명한 인사들까지도 성서 옹호와 동시에 다윈의 진화론도 지지하였다.

*Oliver Wendell Holmes(1841-1935), 유력한 미국의 대법원 판사로서 강제 거세를 인정하였다. 그의 진화론적 인본주의 신념은 미국의 법률에 돌이킬 수 없는 자국을 남겼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법을 세속화시켜 피도 눈물도 없는 법으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creation.com/the-lies-of-lynchburg

출처 - Creation 19(4):22-23, September 1997.

미디어위원회
2004-07-26

다윈과 트로츠키의 관계 

(The Darwin/Trotsky connection)

Barry Woolley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 (1879-1940)는 1917년의 혁명에 뒤이어 러시아의 정권을 탈취한 공산당의 조직, 선전, 그리고 군대를 총괄하는 지도자였다. 그는 독재자 레닌의 후계자로 있다가 마침내 스탈린으로부터 그 자리를 박탈당했다. 대범하지 못한 도량에 재치 없고 성급한 성격의 트로츠키는 마르크스주의에 무한한 믿음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다윈의 사상 때문에 그의 마르크스주의 사상은 더욱 견고해졌다.


마르크스주의와 다윈의 사상에 대한 그의 광신에 가까운 신념과 무산계급의 적(敵)에 대한 그의 분노는 러시아 내전 (1918-1920)의 와중에서 태어난 소비에트의 적들을 괴멸시키기 위해 붉은군대 까지 동원하기에 이르렀다. 이어 그는 노동자의 군대화 (軍隊化) 농민의 식량 징발을 제도화하였다. 그는 무정부주의자 네스토 마크노 (Nestor Makhno) (1889-1934)가 이끈 우크라이나의 반란 농민 게릴라군을 괴멸시켰다. 결국 마크노는 중상을 입고 가족들과 함께 국외로 도주했다. 마크노는 볼셰비키가  백계 러시아 군과 대결하고 싸울 때 트로츠키와 동맹 관계에 있었던 사람이다. 트로츠키는 크론스타트 (Kronstadt)1)에서 소비에트의 수병 (水兵)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폭력을 서슴없이 자행하였다. 그러한 그의 잔학행위는 ‘프로레타리아트를 옹위하기 위한 것이며, 불퇴전 (不退轉)의 혁명 목적 기여한다는 절대적 확신’ 때문이었다.2)


러시아 내전의 종식 이후에도, 트로츠키는 정력적으로 행정부의 세부 업무와 ‘신(神) 없는 사회’의 지도자 과업을 수행했다.  이 단체는 소비에트에서 무신론을 선전하는 과업을 책임지고 있었다. 열렬한 무신론자였던 그는 ‘종교를 무신론으로 대체 (代替)하라‘고 주장했다. 이 목적을 위한 과업으로 종교의식 대신에 연극을 이용하고, ‘붉은’ 세례, ‘붉은’ 결혼, ‘붉은부활제’ 같은 것들을3) 권장했다. 그는 크리스쳔들을 핍박하고, 교회의 신성 (神性)을 모독하였다. 그리고 나아가 중산계급의 도덕심을 증오하기에 이르렀다.


트로츠키는 불퇴전의 혁명운동을 세계적 규모로 확대하라고 주장했다.4) 그리고 독일을 비롯해서 폭력적 혁명의 기운이 성숙하였다고 생각되는 여러 나라에서 공산당은 정권을 쟁취하라고 부르짖었다. 부유한 유태인 지주5)의 아들로 태어난 트로츠키가 어찌 되어서 자기 아버지가 속한 사회계급과 종교에 그토록 악의적인 편견을 품게 되었을까? 그것은 실패한 그의 대학 생활과 비정상적인 그의 여성문제와 크게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나이 17살에 어느 혁명 단체 (revolutionary commune)에 참가하기 위해 대학을 중단했다. 이 단체의 조직원들 가운데 유일한 공산주의자 알렉산드라 르보나 소코로브스카야 (Alexandra Lvona Sokolovskaya)는 그보다 6살 연상의 여자이었다. 처음에 그는 그녀는 물론 그녀의 마르크스주의적 세계관을 맹렬하게 비난했었다. 심지어, 1896년 신년 만찬 모임에서 그는 ‘살아있는 모들 것을 어렵고 무미건조하게 만드는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저주를!’이라고 말하며 건배를 제의한 적도 있었다.6)

그러나 그는 곧 그녀와 정분이 나고 말았다. 그 일로 해서 그는 그녀의 마르크스 사상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 단체가 추진한 사회운동으로 말미암아 결국 조직원들은 제정 러시아의 형무소7)에 수감되는 죄수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수감 생활 동안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자기 사상을 개발하는 기회로 삼았다. 오뎃사(Odessa)의 형무소 감방에서, 트로츠키는 다윈의 종의 기원과 그의 자서전을 정독했다. 그런지 수 년 후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다윈은 나한테 남아있던 마지막 이념적 파편들 마저 무너뜨려 버렸다. … 오뎃사의 형무소 감방에서 나는 과학이라는 견고한 기초 위에 우뚝 선 나 자신을 발견했다. 사실 (事實)을 어떤 확실한 체계 속에서 스스로를 세우기 시작했다. 진화론과 결정론 (determinism)이라는 이념 즉, 점진적 발전은 물질 세계의 특성에 의해 계속되고 있다는 이념은 나를 완전히 사로잡고 말았다.


나에게 있어서 다윈은 거대한 우주라는 사원의 출입문을 지키고 서있는 위대한 문지기와 같은 존재였다. 나는 그의 세밀, 정확, 정직 그리고 동시에 강력한 사상에 취하고 말았다. 나는 그의 글, 즉 그가 신에 대한 신앙8)을 견지하고 있다는 글을 일고 경악했다. 나는 종의 기원은 자연의 선별 (選別)에 의해 그리고 성(性)적 선별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이론을 세운 사람도 신에 대한 신앙을 한 머리로 사고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으며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다.9)


세부 내용은 나중에 언급하기로 하자. 어쨌거나 기독교 창조 이론가인 제임즈 클러크 맥스웰 (James Clerk Masxwell)이나 루이 페스튜어 (Louis Pasteur) 같은 위대한 과학자들의 시대에 산 트로츠키가 마르크스와 다윈의 이념을 받아들였다는 것이 이상하였다. 그의 사상 전향의 경험은 순수하고도 철저하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 사상 전향이 물려준 유산은 그의 손에 의해 흘린 소용돌이치는 유혈로 기록되었다.


1940년, 멕시코에서 생활하고 있던 트로츠키는 이 또한 다윈을 탐독하고 무신론적인 인생관으로 전향한 죠셉 스탈린 (Josef Stalin)의 지령을 받은 자객의 손에 의해 암살 당했다. 스탈린은 아마도 역사상 최대의 대량 학살자 일는지 모른다. 스탈린이나 트로츠키는 그들의 사상적 전제 (前提)에 충실하게 일관된 행동을 했다: 만약 나를 창조한 자가 없다면, 나를 지배할 자도 없다. 그리고 절대 정(正)?오(誤)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그것이다. 그와 같은 진화론적 세계관에서 조망하면, 사람들을 살해하는 일이, 심지어 그게 수백만을 헤아린다 해도, 본질적으로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BARRY WOOLLEY, M. S.

Barry Woolley는 연구기계공학자 (Research Mechanical Engineer)로서 운동의 양극항등식 (plate equations of motions)과 소리와 구조의 상호작용 (interaction of sound and structures) 분야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주제들에 관한 문서를 미국 음향학회 (Acoustical Society of America)의 간행물 (Journal)에 발표하였다.


References and notes

1) 크론스타트(Kronstadt)는 페트로그라드(오늘날의 성-페테스브르그)의 앞바다에 위치한 도서에 서있는 군항으로서 20,000 명의 수병이 주둔하고 있었다. 1921년 3월 그 수병들(그들 가운데 농민의 아들이 많았다)은 자기네 부모들이 당한 알곡 도난 사건에 대해 항의하고 또 근로자의 자유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봉기하였다. 트로츠키의 명령을 받아, 백색 제복으로 위장한 붉은군대는 빙판 위를 횡단하여 해군 기지를 함락한 후 수병들을 학살하였다.

2) Woolley, B. L., Adherent of Permanent Revolution: A History of the Fourth (Trotskyist) International, University Press of America, Lanham, Maryland. p.2, 1999.

3) Heller, M., Cogs in the Soviet Wheel, London, p.204, 1988.

4) "전쟁은 혁명과 마찬가지로 협박에 근거를 두고 수행한다. 전쟁에서 승리한 군대는 패배한 군대의 어느 부분만을 괴멸시키는 것이 일반적인 상례다. 그렇게 함으로써 적군의 나머지 부분을 겁먹게 하고 또 그들의 의지를 꺾는 호과를 얻어낸다.  혁명도 같은 수법으로 과업을 추진한다. 혁명은 몇 사람만을 죽이고 수천 사람을 겁먹게 한다" 라고 그는 기록했다. Ref. 3, p.119, which quotes Trotsky, L., Terrorizm i Kommunizm, Moscow, 0. 57, 1920.

5) 트로츠키는 Lev Davidovich Bronstein이란 이름으로 태어났다. 나중에 그는 Odessa의 감방에서 동료들 가운데 한 사람의 이름을 자신의 혁명 아호 (雅號)로 취해 사용하며 자기가 유태 출신아란 사실을 감추었다.

6) Carmichael, J., Trotsky: an Appreciation of his Life, Hodder and Stoughton, London, p. 43. 1975.

7) 트로츠키와 알렉산드라가 동부 시베리아로 4년간의 유배형을 선고 받은후, 1900년 모스크바를 통과하는 어느 이송 (移送) 형무소의 감방 안에서 유태인 군목의 주례로 그들은 결혼했다. 시베리아에 있는 동안 그녀는 그의 두 딸을 출산했다. 그리고 그녀는 1938년 사망할 때까지 브론스타인 부인 (Mrs. Bronstein)이란 이름을 고수했다. 그녀의 도움 (그녀는 며칠 동안 병상에 누어 ‘환자’ 마네킹을 품고 있었다)으로 그는 그곳을 탈출하여 1902년 파리로 갔다. 파리에서 그는 나탈랴 이바노브나 세도바 (Natalya Ivanovna Sedova)를 만났다. 그녀는 나중에 그의 정부가 되었다. 비록 알렉스산드라가 법적으로 결혼한 트로츠키의 아내였지만, 나탈랴는 ‘트로츠키 부인’으로 행세하면서 그의 두 아들을 낳았다. 그녀는 1904년 그가 죽을 때까지 그와 동거하였다.

8) 다윈의 종의 기원의 마지막 단락에서 언급한 ‘창조주’에 대한 그의 생각, 그리고 다분히 영국 목사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서 2판에서 6판에 걸쳐 추가로 언급한 그의 ‘창조주’에 대한 생각 때문에 트로츠키는 다윈을 오해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아무튼 다윈은 그의 나이 40에 가서 기독교를 포기 하였던 것이다. See Brentnall, J. Grigg. T., Darwin's slippery slide into unbelief. Creation 18 (1): 34, 1995.

9) Eastman. M., Trotsky: A protratit of his Youth, New York, pp. 117-118, 1925.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23/i2/darwin_trotsky.asp 

출처 - Creation 23(2):54-55, March 2001.

미디어위원회
2004-07-26

피로 물든 ‘진화론의 세기’ 

(The Blood-stained 'century of evolution')

Carl Wieland


     기독교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때때로 그리스도의 이름과 교회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많은 종교전쟁과 잔학행위들을 지적한다. 그들은 ‘크리스천’으로 자처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을 통해서 종교전쟁으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사람의 수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단지 20세기 한 세기 동안에 종교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유로 해서 죽임을 당한, 그것도 대개는 자기 나라 정부에 의해서 학살된 인명의 수가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1) 문제는 이 살육(殺戮)행위가 기독교의 성경적 가르침에 공개적으로 적대적인 철학 때문에 저질러졌다데 있다. 이 철학은 진화론을 신봉하는 데서부터 발원(發源)한다.


나치주의는 그 이념적 근거를 다윈(Darwin)에 두고 있다고 공언하였다.2) 그들은 인종간에도 약육강식(弱肉强食)은 당연하고 도덕적이라고 까지 주장했다. 약한 인종을 동정(同情)하는 것은 자연법을 거부하는 행위라고도 했다. 이러한 잔인무도한 이념으로서의 진화론(進化論)이 ‘과학적’ 이라는 지주목이 없었더라면, 바흐(Bach)나 루터(Leuther)와 같은 위인을 우리에게 보내주었던 민족을 그렇게 까지 송두리째 현혹할 수 있었을까 의심스럽다.


또한 공산주의자들도 자기들 이념의 논리적 결론으로 진화론을 내세운다. 만약에 모든 것이 ‘자연법’에 따라 진화하고 있다면, 그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의 의사(意思)가 정(正)?오(誤)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가령 노동계급이 무장투쟁을 통해서 권력을 쟁취하는 게 마땅하다고 한다면, 그 때에는 사회주의 천국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의 과정에서 죽임을 당하는 생명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과는 관계없이 그 이론이 옳다고 해야 할 것이다. 공산주의에 의해 살해된 생명의 수가 나치주의의 그것을 훨씬 능가한다 - 아마도 전 세계에 걸쳐 9천만 명은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3)


스탈린의 잔학 행위는 혁명의 이상(理想)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에 어쩔 수 없이 수반되는 일시적 ‘일탈행위(逸脫行爲)’ 라고 암시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어쨌거나, ‘대량 살육의 과학을 완성한’ 사람, 그리고 정치적 통제의 궁극적 방법으로써 전체적이고도 무자비한 잔인성을 완성한 사람은 러시아 혁명의 ‘아버지’인 레닌 바로 그 사람이었다.4) 진화론은 공산주의자들이 대중을 ‘과학적 무신론자’로 세뇌하는 데 사용한 주된 도구였다. 만약 모든 것이 마땅히 진화된 것이라면, 그 때엔 모든 것은 강자(强者)의 변덕에 좌지우지될 것이며, 그 이후로는 인간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물을 창조주의 존재는 없어질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스탈린의 신념, 즉 수백만의 인명을 도살하는 것이 잔디를 깎는 것보다 나쁠 것이 없다는 믿음이 비롯되었다. (잔디는 진화론의 이념에 있어서는 우리 사촌이다.)


마오쩌둥의 공포와 허위의 통치는 결과적으로 수천 수백만의 생명을 주검으로 내몰았다. 그가 애독했던 책이 두 진화론자, 즉 다윈과 헉슬리(Huxley)의 저서들이라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그가 강요한 기아(飢餓)로 인해서 수백만의 생명이 죽어나가는 마당에 마오는, ‘우리 인민의 수가 무수히 많으니까, 몇 명쯤 잃어도 끄떡없다.’ 라고 했다는 기록을 그의 주치의가 남겼다.5)그 이후 그의 후계자들은 수천 수만의 생명을 억압하고 살해하였다.


이와 같은 국가적 악(惡)의 영향을 받아, 타락한 모든 인간들에 내재하고 있는 악에 대해서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내용을 우리들은 망각하기 쉽다. 지금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의 기본 철학은 아직도 단단히 지속되고 있다. (예: 신의 뜻이 아닌 인간의 의사가 궁극적인 권위다.) 더 이상 베를린 장벽을 넘으려는 사람들이 사살되지는 않지만, ‘민주주의’ 국가들 안에서조차 수억의 생명들이 어머니 자궁 내에서 찢기어 죽어가고 있다.


오늘날, ‘힘은 정당하다’ 라는 표어에 직결되는 소위 초자유주의 시장경제의 이념은 날로 높아만 가고 있다. 성경도 당연히 사유재산과 상품의 자유롭고 공정한 유통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성경은 정부가 사악한 인간 본성에 제동을 걸 필요가 있음을 인정하고, 그러기를 권장한다. 심지어 억만장자 죠지 소로스(George Soros)조차 족쇄 풀린 자본주의의 ‘적자생존(適者生存)’ 이론에 반대하여 이를 경고하면서, ‘예전에는 교역의 수단이었던 것이 지금에 와서는 근본적 가치의 자리를 강탈하고 말았다.’ 라고 말했다. 성공한다는 것이 반드시 정당하다는 것과는 같을 수가 없다.6)


소로스의 논평은 불변의 가치와 절대권리가 존재할 때만 이치에 맞는다. 그런데 불변의 가치와 절대권리는 불변의 진리를 자신의 피조물에게 확실히 드러내 보이는 창조주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창조/진화의 문제는 단지 태생(胎生)에 관한 문제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사(人間事)의 근본을 따지는 데 있어서 어느 쪽 기원설이 정당한가 하는 문제 - 말씀으로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계시(啓示)인가, 아니면 인간의 의사인가 - 를 여는 열쇠가 된다. 하나님이시여, 원컨대 이 생명의 진리, 창조 진리의 복음을 널리 전파하고 있는 창조지(Creation magazine)를 축복하여 주옵소서.


References and notes

1. 약 1억3천만 명이 20세기 한 세기 동안에 무신론의 이름으로 살해됨 (낙태로 살해된 수억 명의 생명은 제외), 반면에 기록된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해된 인명은 최대로 잡아 약 1천7백만 명이다. See James Kennedy and Jerry Newcombe, What if Jesus had never been born? Thomas Nelson, Nashville, 1994.

2. 진화론자 아더 키스 경(Sir Arthur Keith)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 나는 변함없이 독일 총통은 진화론자이다 라는 주장을 견지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의식적으로 독일에서 진화론의 이론을 실제 문제에 적용하는 실험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Evolution and Ethics (NY: Putnam, 1947), p. 230.

3.'Black Book of Communism', The Courier-Mail Weekend, Brisbane, December 13, 1997, p. 8.

4.'Men who taught the world to hate', The Sunday Mail, Brisbane, July 6, 1997, p. 67.

5.'The Great Dying', The Sunday Mail, Brisbane, February 2, 1997, pp. 59-60.

6. G. Soros, in News Weekly, February 8, 1997, p. 24.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creation.com/the-blood-stained-century-of-evolution

출처 - Creation 20(3), June 1998.

미디어위원회
2004-07-26

진화론, 창조론, 그리고 유신진화론

임번삼 


자연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

우리는 자연을 바라보면서 많은 생각에 잠기곤 한다. 인간의 자연에 대한 이러한 생각들이 모여서 학문으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학문은 자연에 대한 해석체계로서 자연계에 내재되어 있는 우주의 법칙을 찾아내려는 합리적이고도 체계적인 활동인 것이다.

우주의 법칙 자체를 신격화한 것이 범신론(pantheism)인데, 기독교를 제외한 여러 종교와 진화론을 포함한 많은 학문이 이에 속한다. 이에 반해 우주법칙을 만든 초월적이며 인격적인 신을 진리의 본체로 믿는 인격신론(personal theism)에는 개신교를 비롯하여 카톨릭, 유대교 및 이슬람교가 있다.

학문은 그리스의 이오니아학파로부터 출발했다. 지금부터 2,700여 년 전의 일이다. 당시 학문의 주된 관심사는 자연과 인간의 본질(en arche)에 관한 것이었다. 우주와 생명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어떻게 탄생하였는지 추구하려는 것이었다. 이것이 오늘의 자연, 사회, 인문 분야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모든 학문의 공통목표는 우주와 생명의 실체, 즉 진리의 본질을 탐구하려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물질과 에너지를 대상으로 하는 자연과학만으로는 진리를 찾을 수 없으며, 인문 및 사회과학과 서로 손을 잡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역사적으로 진리를 찾으려는 노력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학문, 사상 및 종교의 형태로 추구되어 왔다.

학문분야에서는 자연에 대한 해석이 두 가지 시각으로 대립하여 왔다. 창조론과 진화론이 그것이다. 생명과학의 역사는 세 가지 테마에 대한 논쟁사라 할 수 있는데, 이 분야에서도 두 시각이 첨예하게 대립하여 왔다.


첫째는, 태초에 생명이 어떻게 탄생했는가 하는 기원의 문제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저절로 태어났다는 자연발생설과 창조주가 무로부터 창조했다는 창조론이 대립하여 왔다.

둘째는, 오늘의 수많은 동식물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나 하는 생물다양성(biodiversity)에 관한 문제이다. 여기에 대해서도 두 설이 극명하게 대립하였다. 무기물에서 단세포가 발생한 후, 지금과 같은 여러 종류의 동식물로 발달했다는 진화론(evolutionism)과 창조주가 처음부터 종류대로 완벽한 형태로 만들었다는 창조론(creationism)이 그것이다. 이 밖에 다른 천체로부터 생명의 씨앗이 지구로 날라 와서 부화했다는 우주유입설(panspermia)이 있으나 그 씨앗이 태초에 어떻게 탄생했느냐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므로 결국 모든 문제는 창조냐 진화냐 하는 문제로 귀결됨을 알 수 있다.

셋째는, 고생물의 흔적인 화석(fossils)과 그것을 품고 있는 지층(geological strata)의 형성에 관한 문제이다. 진화론자들은 지층이 오랜 세월에 걸쳐 쌓이면서 그 시대에 진화되어 살고 있었던 생물군이 화석으로 매몰되었다는 동일과정설을 주장한다. 그러나 창조론자들은 대홍수에 의한 격변으로 조산활동이 일어나고 그에 따라 지각이 변동하면서 지층과 화석이 짧은 기간에 생성되었다는 격변설을 주장한다.


어떤 문제이든 과거에 일어난 일이므로 정확한 실상을 알 수 없으며 단회적 사건(?)이었으므로 실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다만 그렇게 되었으리라고 설명하는 해석체계이면서 신념이요 신앙일 뿐이다.

진화론은 무신론적이며 유물론적 신앙이며 창조론은 목적론적이며 인격신에 대한 신앙이라 할 수 있다. 두 이론은 주장하는 내용이 대립적이므로 물과 기름처럼 타협될 수가 없다. 그리고 자연에 대한 학문적 해석체계는 이 두 이론뿐이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은 거짓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조화될 수 없는 두 이론을 하나로 엮어 놓은 것으니 유신진화론(theistic evolutionism)이다. 말하자면 유신론적 유물론(theistic materialism)이 탄생한 셈이다. 이질적인 요소가 봉합되었으니 여러모로 자가당착(自家撞着)적인 현상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유신진화론은 이론상 많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으며 주장하는 내용이 산만한 느낌을 준다.

실험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 창조론이나 진화론은 모두 비과학(non-science)이다. 그런데 오늘날 모든 교육기관에서 오로지 진화론만이 실험적으로 증명된 이론인 양 가르쳐지고 있다. 반면 창조론은 창세기에 근거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교리적인 비과학으로 매도되고 있다. 그러나 진화론은 과학으로 위장된 비과학이며 창조론은 비과학으로 매도되고 있는 초과학이라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뒤에서 차차로 설명할 것이다.


최근에 미국에서 실시한 어느 여론조사(John Hulley 1995)는 흥미있는 사실을 보여준다. 노벨상 수상자들(1900-1990)의 종교 분포에서 개신교가 64%로 수위를 점하였고, 카톨릭(22%), 유대교(11%), 정교회(1.6%)가 그 뒤를 따랐다. 기독교계가 98.6%로 압도적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의 기원'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식조사(Gallup poll 1993)에서도 매우 놀랄만한 결과가 나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창조론을 지지하는 비율이 47%이었으나 진화론은 9%에 불과하였다. 반면 유신진화론이 40%를 차지했다.

위의 두 여론조사 결과는 미국사회에서 진화론이 유신진화론으로 급속히 선회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유신진화론의 정체에 대해 좀 더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유신진화론은 오랜 역사를 가진 것으로 다윈의 진화론 형성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다가 다윈의 <종의 기원>이 발표된 20세기 후반부터는 진화론이 반대로 유신진화론에 영향을 주고 있는 형국이 되었다.

이들은 성경의 기적들을 부인하며 하나님이 모든 생물을 진화론적으로 창조했다고 믿는다. 이러한 유신진화론이 오늘날 기독교계로 깊속히 침투하고 있어 우리의 각성이 요구되고 있다. 말세에 교회에 '양의 가죽을 쓴 이리'가 들어온다면 그 중 하나는 이 유신진화론이라고 나는 분명하게 말하고 싶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과 교역자들이 이러한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그다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니, 관심마저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러면서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이러한 유신진화 사상으로 서서히 세뇌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된다면 머지 않아 기독교는 과연 무엇인가 하는 정체성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 같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진전된 것은 창조과학자들의 게으름이 큰 몫을 했음을 자성해야 할 것 같다. 지금부터라도 창조과학자들은 기독교계에 유신진화론에 대한 경종을 울리면서 체계적인 대처방안을 모색하도록 적극적인 역할을 하여야 할 것이다.

 

우주의 기원에 대한 논쟁사

앞에서도 기술했듯이, 생명과학의 역사는 생명의 기원과 다양성 및 고생물의 흔적인 화석과 지층의 형성에 대한 논쟁사라 할 수 있다. 진화론에서는 우주와 지구 및 생명체가  저절로 발생하였고, 유인원으로부터 현생인류가 진화했다고 가르친다. 유신진화론에서는 하나님이 창조의 주체라는 사실만 다를 뿐, 진화론의 주장에 거의 동의한다. 즉 하나님이 자연법칙에 따라 진화론적으로 우주만물을 만드셨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창조론에서는 6일 동안 하나님이 무에서 우주를 창조하셨고 모든 생명체들은 처음부터 종류대로 완벽한 형태로 만드셨다고 말한다. 따라서 진화라는 용어가 개입할 여지를 허락하지 않는다. 사상(事狀)은 하나인데 해석이 이처럼 확연하게 다른 것이다.

우주, 태양, 지구 등의 나이에 대해서도 진화론에서는 긴 연대(각각 120억 년, 50억 년, 46억 년)를 주장하나, 창조론에서는 모두 10만 년 이내(7-8천여 년)로 추정한다. 지층형성이나 그 속에 들어 있는 화석의 기원에 대해서도 진화론과 유신진화론에서는 장기간에 서서히 쌓였다는 동일과정설(uniformitarianism)을 주장하지만 창조론에서는 노아홍수에 의한 천재지변으로 갑자기 만들어졌다는 격변설(catastrophism)을 주장한다.


대표적으로 알려진 학설을 예시해 보면 진화론에서는 자연발생설, 화학진화설, 생물진화설, 동일과정설, 빅뱅설등이 있으며 유신진화론에는 다중격변설, 간격설, 날-연대설, 진행적 창조설, 골격가설 등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창조론에는 생명속생설, 세포설, 종의 불변설, 유전법칙, 격변설(노아 홍수에 의한) 등이 있다.

진화론이나 유신진화론의 특징은 모두 예외 없이 추리에서 출발하여 추측으로 끝을 맺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문장의 기술방식은 대개 '...라면', '...일 경우', '...로 추측된다', '...일 것이다', '...라 생각된다' 등과 같은 표현을 쓰고 있다.

이에 반해 창조론은 대부분 실험에 의해 확인된 확고부동한 사실들이다. 오늘의 생명과학 이론들은 거의 창조과학자들에 의해 수립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창조론과 싸우고 있는 진화론자들이 최근에는 이러한 창조과학적 이론을 진화론을 옹호하는 것처럼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해석은 사실 자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세 이론간의 논쟁은 매우 치열하였다. 생물의 진화문제에 대해서는 종의 가변설(evolution of species)을 주장한 뷰퐁-라마르크(1744-1829)팀이 종의 불변설(immutability of species)을 주장한 린네-큐비에팀과 부딪혀 창조론적인 종의 불변설이 승리를 거두었다.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는 창조론측의 레디(1626-97), 스팔란쨔니(1729-99), 파스퇴르(1822-95), 틴달(1823-93) 등의 생명속생설(biogenesis)이 각각 진화론측의 헬몬트, 뷔퐁1708-88), 니이덤과 푸셰(1800-72), 베스쳔(1837-1915) 등의 자연발생설(abiogenesis)과 격돌했으나 창조론측의 승리로 돌아갔다. 특히 파리에서 프랑스과학아카데미 주선으로 열렸던 파스퇴르와 푸셰간의 대결은 공개논쟁의 개시를 알리는 첫 신호탄이기도 하였다.

이후, 한동안 생명의 기원논쟁은 잠잠하여진 듯 했으나 20세기초(1936)에 소련의 오파린이 다시 화학진화설(chemical evolutionism)을 들고 나옴으로써 생명발생설에 대한 두번째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유물론적 주장은 생명을 단순한 자동기계로 해석하려는 생명기계론으로 연계되어 발전하고 있다.

이처럼 19세기 중반까지는 창조론이 연속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다윈의 <종의 기원>(1859)이 발표되면서 상황은 진화론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사인 멘델은 6년간 수도원에서 완두콩과 분꽃을 재배하면서 발견한 '유전법칙'을 오스트리아의 부린학회에서 공식 발표했으나(1866) 그 내용이 다윈의 진화론과 상치되었기 때문에 생물학계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빛나는 그의 업적은 1900년도에 그의 법칙이 재발견될 때까지 그의 죽음(1884)과 더불어 무덤 속에 들어가 침묵을 강요당하였다.

영국의 런던에서 공개적으로 열렸던 '옥스포드논쟁'(1860)에서는 창조론 측의 윌버포스 주교가 진화론자인 헉슬리에게 판정패를 당하였다. 이 논쟁은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첫 번째 공개논쟁이었으므로 매우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그 영향으로 진화론은 영국은 물론 구미제국으로 급속히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싸움은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서도 계속되었다. 하버드대학에서는 그레이(Asa Grey)와 아가시즈가 격돌하여 유신진화론이 승리한 데 이어 예일대학, 프린스턴대학, 맥길대학 등이 1880년대에 진화사상을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고등학교 교과서에 처음으로 진화론이 등장하게 되었으며, 20세기초부터는 창조론이 교과서에서 서서히 밀려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추세에 위협을 느낀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변호사는 반진화운동을 전개하여 테네시주(1925), 미시시피주(1926), 아칸소주(1928) 등이 진화론 교육을 금지시키도록 법제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실제로 스코프스 재판이 끝난 직후인 1927년에 13개 주에서 반진화론 입법이 상정되었다.

이에 반발한 진화론 측의 시민자유주의연맹(ACLU; 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은 이러한 법규들의 실효성을 실험할 목적으로 스코프스(John Thomas Scopes)라는 교사의 협조를 얻어 테네시주의 한 고등학교에서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했다는 내용을 가르친 사건을 연출토록 하였다.

이를 알게 된 한 학부형의 고발로 테네시주의 데이튼이라는 지방 법정에서 '원숭이재판'(1925. 7)이 열리게 된다. 세계 최초로 열린 이 법정재판에서 스코프스의 변호를 맡았던 ACLU측의 대로우(Clarence Darrow)가 제시한 네브라스카인(1922)과 필트다운인(1912)의 자료의 뒷받침으로 진화론측이 승리하였다.

 

*관련기사 : 유신 진화론은 복음을 어떻게 파괴하는가? (2016. 1. 9. 기독일보)


출처 - 창조지, 제 129호 [2002. 1~2]

미디어위원회
2004-07-26

시카고 학회의 결론 요약

김해리 


     1980년 10월 16일부터 19일까지 시카고의 자연박물관에서 160명의 세계정상급 진화론자들이 모여 '대진화'란 주제로 회의를 가졌었다. 공식회의 자료로 그 회의에 제출된 논문들로 편집된 논문집(proceedings)을 출판하지 않기로 했으나, 기자 레윈(Roger Lewin)이 회의 내용과 몇몇 참석 학자들과의 대담 등을 Science지에  종합하여 발표했다.(Science, Vol 210, 21, Nov. 1980).


"불타 없어져 가는 진화이론(Evolutionary theory under fire)"이란 제목의 이 기사는 이번 회의를 진화론의 큰 전환점이 될 역사적 회의였다고 평가한다. 왜냐하면 이번 회의에서 소진화가 쌓여 대진화를 이룬다는 종래의 진화론의 기본 명제가 부정되었기 때문이다. 종(種) 내에서의 작은 변이, 즉 소진화(microevolution)가 일어난다 해서 그것을 연장하여 한 종에서 더 진보된 다른 종으로 변화한다는 대진화(macroevolution)가 일어난다고 할 수 있겠는가 라는 중심 제목을 두고 회의를 했으나, 그 대답은 분명히 No! 라고 결론지었다.

1946년 프린스턴 회의에서 제기된 현대 종합이론(modern synthesis theory)이 지금 까지 거의 40여년간 진화론의 주요 메커니즘으로 해석되어 왔었다. 이것은 1942년 헉슬리(Julian Huxley)가 다윈설을 집단생물학 및 집단유전학적으로 설명한 것으로 요점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①유기체내에서의 다양성은 유전인자內의 변이 때문이다. 진화가 일어나는 것은 집단에서 유전자 빈도의 변화 때문이다. 새로운 종이 생기는 것은 이런 작은 유전적 變異가 점점 쌓여서 된 것이다. 종합이론에서도 이런 진화는 아주 서서히 수 백 만년이 걸려 일어난다고 본다.

   ②진화가 이루어지는 방향은 자연도태에 의해 결정된다. 작은 변이에서 살아남는 것은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는 변이다. 따라서 생물체의 형태는 적응성에 따라 나타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현대종합이론에서는 작은 유전적 변이가 집단의 유전자 빈도의 변화로 생기고, 이것이 수 백 만년에 걸쳐 축적되어 점점 더 진화된 다른 종으로 변화되고, 이것을 화석이 보여 준다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대부분 화석학자들은 화석은 이것을 보여주지 않고, 오히려 종은 변하지 않고 항상 같은 것으로 남아 있다고 증거했다. 이들에 의하면 화석은 어느 때가 되면 한 종이 끝나버리고, 더 다양하고 복잡해진 새로운 것이 갑자기 시작되는 것을 보여 준다고 한다. 즉, 먼저 있던 종에서 다음 종으로 가는 그 전이 과정이 연속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새로운 종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수 백 만년이 지나도 화석에서 보여주는 종은 불변이다. 다윈은 이 점에 대해 화석이 아직 충분히 많이 모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한지 120여 년이 지난 현재도 화석 자료는 충분하나 대진화를 보여 주지는 않는다. 화석 학자들은 화석 자료가 불충분한 것이 아니라, 종이 진화했다는 진화론의 주장에 근본적 잘못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미국에서 현대종합이론의 제일 지지자인 아얄라(Francisco Ayala)는 말하기를 화석학자들이 제시한 자료와 주장을 보고 작은 변이들이 축적되지 않음에 이제 확신한다고 했다.

 

이제까지의 점진적 진화론에 반해 이번에 새로이 제기된 '단속(중단)평형이론(Punctuated equilibria)'은 1940년에 캘리포니아 대학의 유전학자 골드슈미트(Richard B. Goldschmidt)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으나, 그동안 내내 무시되어 오다가 1972년에 하버드 대학의 굴드(Stephan Jay Gould)와 뉴욕에 있는 박물관의 엘리드지(Nile Eldridge)에 의해 다시 제창되었다. 이 이론에서는 종의 분화는 점차적으로 되는 게 아니요, 한 종이 오백만 년 내지 천만 년동안 불변으로 지나다가 어떤 순간에 새로운 종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순간이란 오만 년 정도의 기간을 말하는 것으로, 오백만 년이나 천만 년에 비하면 순간이라고 볼 수 있다는 그런 주장이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점진적으로 집단 유전인자 풀(gene pool)의 변이가 축적되어 대진화를 이룬다는 이제가지의 주장과 이론도 사실이요 일어나는 것이지만, 갑작스런 변이를 뜻하는 중단된 평형 과정이 가장 많이 일어날 뿐 아니라, 진화의 주된 메커니즘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어떻게 갑작스런 변이가 일어나는지에 대하여는 앞으로 종합적 연구와 설명이 나오게 될 것이라고 요약된다.

얼마 전 뉴스위크誌 과학란 에서는 최근의 이런 진화론의 변혁을 70년 전 양자론이 물리학을 혁신시켰던 것과 비슷하다고 논평했다. 이 단속평형이론(Punctuated equilibria)을 한편 희망적 괴물이론(Hopeful monster)이라고 부른다. 돌연변이로 갑작 새로운 종이 생길 때 대부분 괴물같은 것들이 생기지만, 오랜 세월동안 여러 번 이런 괴물들이 생기다 보면, 언젠가는 혹 생체에 이롭고 좋은 괴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뜻이 포함된 이론이라 하겠다.

 

출처 - 창조지, 제 2호 [1981. 7]

미디어위원회
2004-07-26

스탈린의 잔인성과 진화론

(Stalin's Brutal Faith)

Paul G. Humber


      믿음과 종교는 전능자에 대한 고백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녔다고 하는 잘못된 관념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또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믿음을 시험한다 (즉 신(神)을 배제한 상태로). 이것도 역시 종교는 종교인 것이다. 세상에서 각자의 입장과 역할에 대하여 기본적인 믿음의 체계를 가지고 섬기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확실히 믿음이요 종교인 것이다.

비록 무신론자이었을지라도 스탈린(Joseph Stalin)은 신앙인이었다. 엄청나게 잔인한 결과를 가져다준 믿음이었기는 하나 그렇더라도 이것도 믿음인 것이다! 이와 같은 믿음은 과연 무엇인가? 그와 같은 것은 스탈린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특별한 경우인가? 역시 어떻게 그와 같이 잔인할 수 있겠는가? 이 글의 목적은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 어떤 해답을 제공하고, 덧붙여서 러시아의 노벨상 작가인 솔제니친(Alexander Solzhenitsyn)의 뛰어난 작가적 통찰력을 통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스탈린의 믿음 -그것은 무엇이었는가? 

종종 개인적 믿음은 몇몇 종류의 서적에 상당히 밀착되어 있다. 모슬렘은 코란을 지녔으며, 힌두교는 그들의 베다경전(Veda),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바이블이 있다. 공자와 부처 그리고 모택동의 저서들은 어떤 다른 집단들과 비슷한 목적을 제공한다. 스탈린의 경우에 있어,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레닌의 저서는 그를 자극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는 것은 아직 이르다. 여기 스탈린에게 더욱 결정적인 영향을 준 책과 사람이 있다. 특히 그가 젊었던 시절, 상상력이 풍부하던 시기에 영향을 준 것들이다. 그 사람은 찰스 다윈이며, 책은 찰스 다윈이 쓴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 이다. 

이와 같은 것에 대한 기록은,「스탈린의 생애에 있어서의 라마르크」라는 제목으로 모스크바에서 출간된 책에 처음 언급되었다. 스탈린의 '전성기(glory)' 동안에 쓰여진 이 책은 그를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인용된 구절에 주목해보면, 다윈의 믿음과 그의 '책'은 전능자에 대한 믿음에 있어서 현저한 차이가 난다.

”아주 어린 시절, 교회학교의 학생 시절에 스탈린 동지는 비판적인 생각과 혁명적인 감정이 생겨났다. 그는 다윈의 저서를 읽기 시작하였으며 무신론자가 되었다.” 스탈린의 어린 시절 친구였던 글루드지즈(G. Glurdjidze) 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하나님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스탈린은 내 말을 듣더니, 잠시동안 침묵이 흐른 후에 ”그래, 그들은 우리를 조롱하고 있어, 하나님은 없다”고 말하였다. 나는 이 같은 말에 매우 놀랐다. 나는 전에는 그와 같은 어떤 말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그와 같이 말할 수 있느냐?”고 나는 외쳤다. ”네가 읽어볼 책 한 권을 내가 빌려주지, 이 책은 너에게 세상과 살아있는 모든 세계에 대해서 네가 상상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면을 보여줄 것이고,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완전히 넌센스이다"라고 스탈린은 말했다. "그 책이 무슨 책이냐?”고 내가 물었다. ”다윈의 책이다. 너는 그 책을 읽어보아야만 한다”고 스탈린은 내게 강조하였다.1)

수 페이지를 지나서 스탈린의 젊은 시절에 영향을 준 것들이 소개된다. 

”세상이 6일 동안에 창조되었다는 신화에 대하여 우리 학교 학생들의 어리석은 마음을 깨우쳐주기 위하여 우리는, 지구의 지질학적 기원과 연령을 스스로 알아야만 했으며, 또한 그것들을 토론을 통하여 증거할 수 있으며, 우리는 다윈의 가르침에 정통해야만 하였다.”1)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레닌은 같은 믿음을 소유하였는가? 

스탈린이 이들의 저서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이미 언급되었다. 이것이 그에 대한 다윈의 영향력을 희석시키는가? 아니면 이들도 역시 이 영국 박물학자에 의하여 영향받았는가?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긍정적이다. 펜실베니아 대학 식물학 교수인 저클(Conmay Zirkle)은 "진화론, 마르크스의 생물학 그리고 사회 현상"이라는 1959년 출간된 책에서 엥겔스와 마르크스 사이에는 서신 교환이 있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1859년 12월 12일, 엥겔스는 마르크스에게 쓰기를 (종의 기원이 출판된 지 단지 수개월 후) ”제가 지금 방금 읽고 있는 다윈의 책은 매우 놀랍다"고 하였다. 약 일년 후(1860년 12월 19일), 공산주의의 시조(始祖) 마르크스는 "나의 보잘것없는 생애 가운데, 지난 몇 주간 나는 모든 종류의 것을 읽었다. 이 가운데 자연도태에 관한 다윈의 책은 비록 조잡한 영어 문체로 전개하였기는 하나 우리들의 입장에 대하여 자연 세계 역사의 기초를 내포하고 있다”고 하였다. 사람들에게 라셀(Ferdinand Lassalle)은 쓰기를 ”다윈의 책은 매우 중요하며 내게 역사에 있어서 계급투쟁에 대한 자연과학적 기초를 제공한다”고 하였다. 저클은 역시 마르크스가 다윈에게 자본론(Das Kapitol)을 헌정(獻呈)하기를 원했음을 지적하였다.2) 진화론에 대한 현대의 맹렬한 옹호론자인 하버드 대학의 굴드(Stephen Jay Gould) 교수도 마르크스에 의하여 쓰여진 마르크스의 최초의 서적에 있는 다윈에 대한 묘사를 보았음을 보고하므로서 이 사실을 확증하였다. 마르크스는 이 영국의 박물학자를 '진정한 숭배자'(sincere admirer)로 묘사한다.3) (사진참조)

루이스(Ruis)는 다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 점을 통하여 레닌(Vladimir Lenin)의 입장을 추측한다.

"다윈은 동물과 식물의 종이 우연에 의하지 않고는 서로 연관을 맺을 수 없다는 믿음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것들은 신에 의하여 창조되었으며 그러므로 그것들은 변할 수 없다." 4) 

.칼 마르크스가 다윈에게 바친 '자본론'의 속표지 - 마르크스의 자필로 이렇게 쓰여져 있다. ”찰스 다윈 선생께, 그 분을 진심으로 숭배하는 칼 마르크스로부터, 1873년 6월 16일 런던에서”. 이와 같은 사실은 현대세계에 미친 진화론의 영향의 범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함을 보여준다.


스탈린의 믿음은 얼마나 잔인하였는가?
 

20세기에는 일련의 잔학행위와 대량학살이 있었다. 사람들은 단지 폴 포트 정권 하에서 자행된 2백만 캄보디아 인의 학살, 히틀러에 의하여 몰살된 600만 유대인, 아메리카에서 낙태된 2,000만 유아만을 기억한다. 그러나 잔악한 방법에 의하여, 스탈린의 살인자적 제도하에서 수 백 만의 러시아인들이 제거되었다. 뉴욕 타임즈지의 살리즈버리(Harrison E. Salisbury) 는 소련의 감옥수용소 제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공포의 전(全)대륙… 소비에트의 공포제도 하에서 수십만 명의 강제 처형된 사람들과 죽음에 이른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오히려 황제 시대는 아주 온순한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이같이 3~4백만 혹은 그 이상의 남녀가 해마다 강제 노동과 영원한 추방을 선고받는 이 조직적이고 일상화된 악에 대하여 생각하게 될 때 움찔해지는 것이다. 너무나 무심한 상태가 되어 죄수들은 그들에 대한 죄명이 무엇인지도 들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5)


솔제니친의 통찰력
 

1983년, 1970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알렉산더 솔제니친(Alexander I. Solzhenitsyn)은 그와 같은 크나큰 죄악이 그의 백성들에게 닥치게 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하여 런던에서 연설하였다.

『반세기보다 더 오래 전, 아직 내가 어렸던 시절에 나는 많은 노인들께서 러시아에서 일어난 커다란 재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들었음을 회상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렸다. 그것이 이 모든 일이 일어난 이유이다.” 그 이래로 나는 혁명의 역사 속에서 거의 50 평생을 허비하였고, 그 과정에서 나는 수백 권의 책을 섭렵하였으며, 수백 명의 사람들의 개인적 증언을 수집하였고, 격변기에 남겨진 찌꺼기들을 씻어버리기 위한 노력으로 나 자신 8권 분량의 책을 펴냈습니다. 비록 6,000만의 우리 동포들을 휩쓸어버린 파괴적 혁명의 주요 원인을 오늘날 내가 명백히 언급한다고 할지라도, 나는 후회한다는 말 이상 더 정확하게 그것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렸다. 그것이 이 모든 일이 일어난 이유이다"』6)

그러나 솔제니친은 소비에트의 억압 정치를 포함한 모든 관계에 있어 스탈린의 공포정치와 기원에 대한 다윈의 이론을 염두에 두었는가? 솔제니친은 그의 유명한 책 '수용소 군도(The Gulag Archipelago)'에서 1937-38년 모스크바 지방의 지방당 대회(a district Party conference meeting)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다. 당서기는 스탈린 동지에 경의를 표하였다. 새로운 당서기를 포함한 모인 무리들은 경애하는 지도자에게 기립하여 박수를 보냈다. 일 분간의 열광적인 박수로 기력을 소비하였지만, 이 경우에 그 이상 '열광적 분위기'가 지속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3분, 4분, 5분 점점 더 시간이 흘러갔다. 양손이 피곤할 정도로! 그런데 이 같은 경우에 과연 누가 박수를 멈추는 모험을 감수할 수 있었겠는가? 7, 8, 9분이 경과하였다.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최후의 11분이 지난 후, 어느 한 지방 공장 책임자가 박수를 멈추고 자리에 앉았다. 모든 사람이 따라서 앉았다. 그러나 그 날 밤 한 사람이 체포되었으며, 10년형을 언도 받았다! 그는 ”박수를 먼저 멈추지를 마라”는 말을 들었다. 솔제니친이 질문하였다.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어떻게 박수를 멈출 수 있는가?”7) 이와 같은 글의 입장과 조화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이것이 다윈의 자연도태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사람을 우둔해지도록 괴롭히는 것이다.”


결론
 

앞선 논문에서8) 저자는 히틀러가 광적인 진화론자임을 주제로 서술하였다. 진화론적인 언어와 용어는 히틀러의 작품인 '나의 투쟁(Mein Kampf)' 에서도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케이쓰경(Sir Arthur Keith)은 ”히틀러, 이 완고한 진화론자의 행동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진화론적인 설명에서 그것을 찾아야 한다”9)고 압축하여 설명한다. 이 논문은 공산주의의 시조와 더불어서 스탈린을 같은 개념으로 언급한다. 다윈에 대한 이들의 집착은 명백해졌다. 그리고 또한 만일 우리가 그들의 행동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진화론적인 설명을 포함시키는 것이 현명한 것처럼 보인다. 히틀러에게 있어 그가 살상한 수백만 명을 설명하고, 또 다른 이들, 특히 스탈린이 처형한 수천만 명에 대해서도! 물론 어느 이론도 진화론 그 자체를 증거하거나 논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악이 다윈의 진화론의 비호 아래에서 (물론 다윈 자신은 이것을 예측한 것은 아니지만 - 譯註) 세상에 스며들었음을 강력히 암시한다. 

오스본 (Henry Fairfield Osborn)은 한때 ”진화론에 있어서의 선천적인 윤리적 원리는 오직 최고의 존재만이 살아남게 되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이다.”10) 라고 진술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병든 자들과 불구자들을 치료하시는데 관심을 갖고 계셨다. 그는 힘없고 연약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분의 관심과 방법은 진화론적 원리와는 정반대였던 것이다 - 譯註). 진화론의 '윤리적 원리'의 추종자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는 그분이시다. 그럼에도 또다시,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이와 같은 사실을 기대하지 않는 것 같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렸다. 그것이 이 모든 일이 일어난 이유이다.” 

(글쓴이 Humber는 필라델피아 지역 대학입학 예비학교의 교장으로 재직 중).

 

*참조 : Stalin’s ape-man Superwarriors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5198/

Resurrecting Stalin’s Ghost (CEH, 2008. 9. 7)

https://crev.info/2008/09/resurrecting_stalin146s_ghost/

  

참고문헌

1. E. Yaroslavsky, Landmarks in the Life of Stalin(Moscow : Foreign Languages Publishing 033House, 1940), pp.8. 12.

2. Conway Zirkle, Zirkle, Evolurion, Marxian Biology, and the Social Scene (Philadelphia :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959), pp.85-87.

3. Stephen Jay Gould, Ever Since Darwin (New York : W. W. Norton and Co., Inc., 1977). p.26.

4. Eduardo del Rio(pseudonym='Rius'), Marx for Beginners (New York : Pantheon Books, 1976), Glossary, n.p.

5. Harrison E. Salisbury, 'Reading The Gulag Archipelago is like no other reading experience of our day,' Book-of-the-Month Club NEWS, Midsummer, 1974, pp.4, 5.

6. Edward E. Ericson Jr., 'Solzhenitsyn Voice from the Gulag,' Eternity, October 1985, pp.23, 24.

7. Alexander I. Solzhenitsyn, The Gulag Archipelage (New York : Harper Row, 1973), p.7.

8. Paul G. Humber, 'The Ascent Racism,' Impact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February 1987).

9. Sir Arthur Keith, Evolution and Ethics (New York : G. P. Putnam's Sons 1947), p. 14.

10. Henry Fairfield Osborn, Evolution and Religion in Education (London : Charles Scribner's Sons, 1926), p. 48. 참조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www.icr.org/article/stalins-brutal-faith

출처 - ICR, 1987. 10. 1. 창조지 제 54호 [1988. 7]

임번삼
2004-07-26

진화론이 학문세계에 끼친 영향


       ”생명체가 어떻게 탄생되었는가”하는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인류 최대의 질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의 이론이 있음은 이미 주지하시는 사실이라고 생각됩니다. 진화론과 창조론이 바로 그것입니다.

진화론은 몇몇 원소들이 우연히 결합하여 단세포 생명체가 자연적으로 발생하게 되었고, 이것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진화를 거듭하여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가설을 말하며, 창조론은 초자연적 존재인 창조주의 의도적인 설계에 따라서 모든 생물들이 그 종류대로, 처음부터 독립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는 이론을 말합니다.

따라서,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물이 물질에서 진화되었다고 하는 진화론은, 물질론 적이며, 창조주를 부인하는 무신론적인, 일종의 신앙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진화론은 과학적인 이론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반면, 창조론은 과학이 아닌 종교문제라고 오해하는 경향이 많으나,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진화론이나 창조론 모두 증명될 수 없는 이론들이라는 점입니다.

진화론은 이제 더이상 단순한 과학상의 문제만은 아니며, 모든 인류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하나의 무신론적인 신앙입니다. 여기에서 신앙이라고 하는 이유는 증명 불가능한 이론, 즉 모든 생물이 자연발생 되었고 그 후로 진화되었거나 진화되고 있다고 하는 이론들을 믿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화론은 과학을 앞세운 비과학적인 신앙이라 할 수 있는 반면에, 창조론은 비과학으로 오도되어온 초과학적인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 이론은 모두 신앙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나, 문제는 어느 이론이 더욱 과학적 이론에 가까운가 하는 것을 따져 볼 수 있을 따름입니다. 물론 이 방법 역시도 절대적인 것은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과학은 부단히 발전하면서 변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중고등학교에서 배우는 생물, 지리교육이 진화론을 지지하는 것처럼 알려지고 있으나, 파스퇴르에 의한 생명발생설이나 멘델의 유전법칙에서 보듯이 현행 교과서 내용의 최소한 50% 이상의 부분이 창조론을 지지하는 내용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잘못 인식되어 온 진화론의 실체를 파헤치고 올바른 학문체계를 세우는, 실로 엄청난 과제에 대하여 진지한 대책을 수립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진화론이 학문적으로 어떠한 부분이 잘못되었는가 하는 점은 다른 기회에 설명 드리기로 하고 오늘은 진화론이 다른 학문분야에 끼친 영향에 대하여 말씀드려 볼까 합니다. 

진화론은 우리 인간생명의 출발을 물질에 두었을 뿐만 아니라, 단세포가 물고기, 파충류, 조류, 원숭이를 거쳐서 사람으로 진화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어서, 역사적으로 정치, 경제, 사상, 종교, 문학 등의 모든 분야에 지대한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는데, 그 중 몇 가지 실례만 들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로, 생명현상을 '단순한 물성(物性)과 그 상호작용의 결과”로 해석하기 때문에 생명, 특히 인간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근거가 상실되게 하였습니다. 얼마전 북경 천안문 사건때 중공정권이 무자비하게 탱크로 시위대를 밀어 붙여서 유혈이 낭자하게 사태를 진압하고서도 이 사건에 대하여 사죄와 반성은커녕 오히려 유혈진압을 정당화시키고 있는 이유는 공산주의 이론으로 인간을 기본적으로 하나의 물질로 보기 때문입니다. 물질이기 때문에 인권 따위가 보장되어야 할 아무런 근원적인 근거가 없다고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물질로 만들어졌고, 동물(원숭이)의 연장선상에 있는 또 다른 호모사피엔스라는 동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생명체를 물질적으로 분석하게 되면서 '생명기계론(生命機械論)'이 대두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생명의 존엄은 물론 내세관에 대한 소망과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현실 위주적인 삶의 방식을 가져다 주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쾌락주의, 배금주의, 한탕주의, 이기주의 등이 자연스럽게 팽배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생명 존엄 사상에 근거한 전통적인 윤리관이 무너지고 있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과연 이대로 나가다가 인류사회의 질서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인지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셋째, 다원의 적자생존 이론과 자연선택 이론은 칼·막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그는 결국 자연선택 이론을 '계급투쟁의 과학적 정당성”에 응용하게 되었습니다. 진화론이나 공산주의나 모두 유물론적이며 자연선택적이고 적자생존적인 이론을 내세우는 점에서 그 이론의 바탕이 매우 근접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북한을 포함한 공산세계에서는 무신론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서 진화론 교육을 더욱 강화하고 있는 사실도 결코 우연적인 일이 아닙니다. 

넷째, 진화론의 영향으로 다윈과 종형제지간이던 C. Calton(1883)은 인종우생학(Eugenics)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만들었는데, 이는 인류자체를 유전학적으로 개량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정신박약아, 불구자, 유전적 질병을 가진 자 등은 아이를 낳지 못하도록 하는 비인도주의적인 소위 '임의 단종 법안'을 만들어서 미국의 일부 주정부와 나치 독일에서 실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같은 우생학은 1907년 영국에서, 1926년 미국에서 학회의 설립을 보게 되었는데, 미국 우생학회가 당시에 주장한 내용의 일부를 보면, 미국內의 백인종은 유색인종들 보다 우수하며, 백인 중에서는 북유럽계 백인(Nordic white)이 가장 우수하다는 내용입니다. 그 결과 유색인종에 대한 이민제한법이 제정되기에 이르렀고, 37 개 주에서 단종법이 발효되었는데, 1935년까지의 한 통계에 의하면 캘리포니아주에서만 총 9,931 건의 단종이 실시되었다고 합니다. 이 법이 그 뒤에도 덴마크, 스위스, 독일, 노르웨이, 스웨덴 등의 북부유럽국가들에 의해 채택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근세 구라파의 생물학자들이 저질렀던 또 하나의 범죄적인 사건 중 하나가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잡아온 흑인들을 대상으로 이들이 사람인지, 진화 중에 있는 동물인지의 여부를 연구하는 것이 한때 주요한 생물학적 과제로 검토되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역사란 망각하는 자에게는 또 다시 똑 같은 상황을 연출해 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생학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유전자를 화학적으로 개량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으며, 우량아동을 탄생시킬 목적으로 특수유전자를 염색체內로 이식시킬 연구계획도 추진 중에 있다고 합니다. 참으로 무섭고도 삭막한 세계를 살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다섯째로, 진화론은 인종우생학 및 니체의 초인주의와 결합되어서 히틀러의 나치즘을 탄생케 하였습니다. W, 후우퍼가 저술한 나치즈 다큐멘트에 의하면 '히틀러는 진화론을 그의 행동의 이론적인 근거로 삼아서 유태인들을 게르만 민족의 번영을 위해서는 기생충과 같은 존재들이라는 이유로 없애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국수주의적인 발상은 최근 이웃 일본에서도 대동아 전쟁을 통하여 나타난 바 있으며, 역사적으로는 앵글로색슨주의, 게르만주의 , 슬라브주의 등등이 이러한 국수주의적인 민족주의를 표방하여 일어난 반역사적 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적인 움직임은 종국적으로는, 성경이 지구역사의 종말에 대하여 한 예언에서 알 수 있듯이 적그리스도의 탄생과 全인류에 대한 가혹한 통치로 인류생활이 처참한 상태에 이를 것으로 예견이 되어 전율스러울 따름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앞에서 지적한 상황들에 대하여 현명하게 대처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먼저, 국내 모대학의 진화론 학자 한 분은 이렇게 그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생명은 신비하고 존엄하다고 초 중등 교육을 통하여 강조함으로써, 생명물질론의 충격을 어느 정도 완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은 물질론적으로 해석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지구상의 현존하는 모든 생물은 기나긴 진화의 소산이며, 또 인류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이 다 현재로서는 진화의 극치에 도달해 있는 고귀한 존재라는 개념을 교육의 초기에서부터 강조하는 것은 생명물질론에 대하여 완충작용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인간은 인간이 걸어온 길로 진화한 것이며, 다른 생물, 예컨데 세균은 세균대로의 진화의 길을 걸어와서 각자가 자신의 환경에서는 그리고, 현재로서는 최고도로 진화되어 있는 생물이라고 교육시켜야 할 것이다.”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처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이 동물에서 진화되었다고 믿는다면, 인간을 하나의 동물로 인정하고 동물답게 사는 방안에 대해서 거론하는 편이 오히려 솔직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진화론과 그로부터 잘못 파생된 주의 주장이나 학문으로부터 우리가 해방되어 참 인생을 살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할 때에만 가능하며, 인간 존엄성의 회복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하는 창세기의 놀라운 선언을 믿고 받아드릴 때에만 가능하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신본주의적인 삶을 살아갈 때에 역설적으로 우리는 참다운 인본주의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되찾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인간성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1:27-28) 


※참고 문헌 :

1. 동아원색 세계대백과사전, vol, 22 pp. 69 동아출판사, 서울(1988)

2. The new encyclopedia Britanica, 15th ed, vol. 30, pp. 1023-1026, 7-23(1984)

3. W. 호우퍼 : 나치즈 다큐멘트 …13 단계의 길, pp. 45-48 東京, 論爭社

 


번역 -

링크 - http://www.kacr.or.kr/databank/document/data/evolution/e1/e14/e14c2.htm 

출처 - 창조지, 제 70호 [1990. 7~8]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29

참고 : 5462|5461|5413|5272|5211|5210|5112|4766|4765|4636|4635|4542|4140|4039|3077|3426|3812|3244|3241|3041|3039|3037|3024|2864|2307|2039|2016|1174

전광호
2004-07-26

과학 기술 시대에서 보는 진화론의 실체


      한 세기 이상 과학이라는 이름을 빌려 진화론이 사실인 것처럼 주장되어 오던 것이 이제는 과학기술의 발달과 함께 그 이론의 바합리성과 비타당성들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지난호 계속>


5. 생명은 외계에서 왔는가?  

   노벨상수상자 Crick이 지구생명체 탄생가설을 포기하고 외계에서 생명의 씨앗이 지구에 떨어져 생명이 진화되었다고 하는 천체 유래설을 믿고 있다고 하는데 이는 생명 기원에 대한 가설들의 문제점이 회피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이와 같이 생명의 탄생에 대한 가설의 많은 문제점들로 인해 창조주의 '우주-각 종류대로의 생물-인간'의 특별창조를 믿지 않는 과학자들이 대체설로서 생명의 천체유래설을 주장하기 시작하였지만 여기에도 또한 진화론의 사상이 깔려 있다. 과연 생명은 외계에서 왔는가?

최근 매스콤에 오르내린 화성탐사선으로 Polar Lander가 있는데 1999년 12월 3일 착륙예정이었지만 착륙시간 몇 시간 전부터 지금까지 통신이 두절된 상태이다. 이 탐사선의 목적은 화성남극지역에 과연 물이 존재하는가를 조사하는 것이었다. 이번 화성탐사계획에서는 화성생명 존재여부에 대한 예비정보 수집이라는 완곡한 단어를 써 왔지만, 1996년에는 미 항공우주국(NASA)이 화성운석연구결과를 발표하면서 화성생명체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였었다. 그 내용인즉 1600만년 전 외계로부터 운석이 화성에 충돌하여 화성의 암석이 중력권을 벗어나 튕겨져 나와 우주를 떠돌다가 지금으로부터 1만3천년 전 지구남극에 떨어졌으며 1984년에 그 운석이 발견되었고(ALH84001라 명명됨) 이것을 조사해 본 결과 그 운석에 미생물 생명체 흔적이 있더라는 내용이었다1). 운석충돌에 의해 화성암석이 화성의 중력권을 벗어나 화성바깥으로 튀어 나올 수 있다는 시나리오라든가 화성운석이 화성을 벗어난 시점이 1600만년 전이며 지구에 떨어진 시점이 1만3천년 전이라는 내용, 그리고 남극에서 발견된 운석이 화성의 것이라는 내용 등 마치 공상과학 소설과도 같은 이 상식 이하의 허황된 시나리오가 여과 없이 과학이란 이름으로 매스콤을 타고 세계전역으로, 마치 화성에 생명체가 살고 있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나기라도 한 것처럼 보도되었다. 이 보도가 나가자 NASA로 E-메일이 쏟아져 들어왔고  'We are not alone.', 'Throw out your Bible...'이라고 세상은 떠들어댔다. NASA발표의 핵심인 운석 내 미생물화석의 흔적은 발표 당시부터 여러 과학자들로부터 의문이 제기되었고 발표 후 1년 이내 다른 연구그룹들로부터 수 편의 추가연구결과가 보고되었으며,2)3) 지구에서 생성된 자동차 배기가스 등이 암석사이로 들어가 미생물처럼 생긴 구조물을 만들 수 있다는 것들이 알려지면서 ALH84001내의 생명체흔적은 부정되었다. 소위 과학자의 이름을 걸고 발표된 NASA의 이 소동은 우주탐사 연구비를 따기 위한 전략이었다는 보도가 뒤따랐다.

이러한 NASA의 화성운석소동도 있었지만(1996), 사실 화성탐사를 통해 화성에는 생명체가 없다는 결론이 최초로 얻어진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인 1976년이었다. 그 때 무인우주선 바이킹 랜더(Viking Rander) I & II가 화성에 착륙하여 화성의 생명체 존재 또는 생명체의 흔적(열분석-기체크로마토그래피, 질량분석기, 생물학적 활성측정기 등의 장비를 이용함)을 조사한 적이 있었다.4) 이 우주선에는 유기물 분석 등 연구실 실험규모 이상의 분석능력을 갖춘 최첨단 장비가 구비되어 있었으며 이 장비에 의한 흙시료 분석결과 화성에는 아무런 생명체나 유기물의 흔적이 없음이 일찍이 판명되었던 것이다.

 ▲ 화성탐사선 바이킹호 

 ▲ 바이킹호에서 찍은 화성의 표면사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19세기말부터 진화론에 입각한 선입관 덕분에 화성에 생명체, 그것도 아주 고도로 진화된 지적 생명체가 살고 있다는 화성생명체 사상이 편만해 있었다. 이러한 사상 뒤에는 생명은 적당한 조건만 주어지면 어디에나 편만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진화론이 깔려 있는 것이다. 1870년대 망원경 관측을 통해 보이는 화성표면의 선이 화성인에 의해 만들어진 운하라는 설로부터 시작하여, 'Plurality of Worlds'(William Whewell),  '화성의 운하이야기'(Giovanni Schiapareli) 등의 책이 나왔다.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가공화성인이 만들어져 이를 소재로 하는 책들이 출판되었고('The Princess of Mars'(1912-1943), 'The Martian Chronicles'(1950), 'Space Ranger'(1952) 등), 라디오 텔레비젼 프로그램이 만들어졌으며('The War of the Worlds'(1938), 'Haredevil Hare, 'My favorate Martain'(1948) 등), 영화가 쏟아져 나왔다('Queen of Mars'(1924), 'Mars Attacks the World'(1938), 'The War of the Worlds'(1953) 등).

화성에는 생명체의 흔적이 없다는 결론이 난 1976년 이 후에도 가상의 화성인을 소재로 한 영화는 계속되어 왔고('Red Mars', 'Mars Attacks' 등등), 또 계속되고 있는 추세인 것을 보면('Red Planet'-2000년 여름 출시 예정), 진화론이 과학이란 이름을 빌어 얼마나 인간들을 세뇌시켜왔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6. 태고의 화석 DNA의 새로운 분석결과들

  현재 생명과학분야에서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딪치고 있는 문제이지만, 다윈의 대진화론에 의거한 진화계통도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생물종간의 유전자의 유사성(homology) 정도가 진화계보상의 거리를 나타낸다고 하는 개념을 가지고 'evolutionary'  또는 'conserved' 등의 단어를 유행처럼 사용하고 있는 것이 1980이후의 추세이다. 이에 대하여 생화학자 덴튼(M. Denton) 박사는 그의 저서 'Evolution: A Theory in Crisis'(한국어판-'진화론과 과학', 임번삼외 역)에서, 미생물로부터 사람에 이르는 각 생물 종간의 cytochrome DNA의 유사성 비교결과를 예로 들면서 생물 종간의 유전자 유사성이 진화론이 얘기하는 진화계통도와 결코 일치하지 않으며 오히려 각 생물문(門) 사이는 서로 독립적이라는 창조론 모델을 지지한다는 것을 밝힌 적이 있다5).

 ▲ 호박 속에 갇혀 있는 벌의 모습

 1980년도 후반에 polymerase chain reaction(PCR)이라는 새로운 유전자의 분석기술이 개발되었는데, 이 기술로 인해 시베리아 얼음 속에 갇혀 있는 맘모스라든가 이집트의 미이라 등 많은 생물샘플로부터의 유전자 분석이 가능하게 되었다. 바로 이 유전자 분석기술을 이용하여 화석 중에 남아 있는 생물의 유전자를 비교해 보는 연구가 1990년대 초반부터 이루어져 왔다. 한 예로, 호박(琥珀) 속에서 발견되는 곤충에 대한 연구가 있었는데, 카노(Cano)와 보루키(Borucki)는 멸절종인 도미니카 말벌을 호박 속에서 무균적으로 채취하여 위(胃)속에 남아 있는 미생물 포자로부터 Bacillus 라고 하는 미생물을 배양하는데 성공하였다6). 호박의 연대는 진화론자들의 추정으로2,500-4,000만년이 되었을 것이므로 호박 내 말벌의 위에서 발견된 그 Bacillus sphaericina의 유전자는 현시대의 Bacillus의 유전자와 상당히 다를 것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분석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분석된 유전자 배열 456염기 중에서 단지 2개의 염기만 다를 뿐 그 오래된 Bacillus의 유전자(16S rDNA)는 오늘날의 그 Bacillus 종과 동일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진화론자들의 예측을 완전히 빗나간 연구결과로 진화론의 연대추정이 완전히 잘못되었든지 생물 종은 매우 안정되어 있든지 둘 중 하나를 증거하는 결과를 보여주게 된 것이다.

  또 다른 재미있는 유전자분석은 공룡DNA에 관한 것이다. 공룡은 알을 낳는 파충류로 진화론자들은 이 공룡이 시조새와 연관하여 조류로 진화해 가는 진화계통상에 있다고 보고 있다. 1994년 우드워드(Woodward) 등은 미국 유타주에서 채취된 백악기 공룡 뼈에서 유전자증폭기술을 사용하여 DNA를 분리하였다고 발표하였다7). 그 공룡의 DNA(mitochondrial cytochrome)배열을 분석해 본 결과 조류나 파충류와의 유사성보다는 오히려 포유류와 높은 유사성(경우에 따라서는 사람의 것과 88%)을 보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진화론의 예측과 맞지 않는 결과를 보이자 헤지스(Hedges)와 슈바이처(Schweitzer) 그룹은 공룡DNA의 유전자 증폭분석시 사람의 유전자가 오염되었다는 반박을 하기도 했지만, 또 다른 연구그룹 헤니코프(Henikoff) 팀과 알라드(Allard) 팀도 독립적인 연구에서 공룡이 조류보다도 포유류에 훨씬 가깝다는 발표를 하고 있어,8)9)10) 공룡이 시조새와 연관하여 조류로 진화해 가는 진화계통상에 있다고 보는 진화론적 견해의 과학적 타당성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7. 대진화론을 격퇴하는 새로운 화석들의 발견 

 ▲ 살아 있는 실리칸스

 하나의 종에서 다른 종으로 진화되는 중간고리는 존재하는가? 다윈시대에는 제한된 화석수로 인하여 중간고리(missing link)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없었는데 다윈은 '현재는 화석수가 부족하지만 앞으로 화석발견이 더 이루어지면 종과 종을 이어주는 중간고리가 존재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변명하였다. 현재 발견되어 있는 화석은 수십만개에 이르고 조류를 제외한 육상척추동물에서 화석으로 발견되는 과(family)는 87%에 이르며 멸종된 생물을 빼고는 과거의 생물이 현재와 똑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통계학적으로 볼 때 중간고리는 메워질 가능성이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진화론에서 중간고리로 생각해 왔던 화석생물들과 연관하여 1980년 이후 제시된 몇 가지 새로운 사항들을 적어 본다.

다리가 달린 어류의 일종으로 화석으로 발견된 실리칸스(Coelacanth)는 다윈진화가설 이후 줄곧 어류와 양서류를 이어주는 중간고리로 진화의 증거라고 주장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이 실리칸스는 1938년에 처음으로, 그리고 그후 여러 차례 살아 있는 채로 아프리카 동부해역에서 잡혔으며 그후 1998년 인도네시아 술라웨시 해역에서도 최소한 2차례 잡혔음이 보고되어 있다.11) 실제로 실리칸스는 100-150m 깊이에 사는 심해어로 다양한 서식지에 분포되어 있는 것이 알려져 있다.

진화론자들 사이에서조차 이 어류가 양서류의 조상이라는 증거에 많은 회의가 일어오던 차에 1996년에는 자라도야(R. Zaradoya)의 연구그룹이 유전자비교(28S nuclear ribosomal gene의 3,500 염기 분석)를 통하여 실라칸스보다는 폐어(lung fish, 중앙아프리카의 소택지, 호수 등에 서식함)가 육상네발동물과 더 가깝다는 이유를 들어 육상네발동물의 조상은 실리칸스가 아닌 폐어라는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해 16,407염기에 이르는 미토콘드리아 게놈(mitochondria genome)을 분석해 보고는 실라칸스나 폐어 중 어느 것이 육상네발동물의 조상이 되는지 확실하게 말하기가 어렵다고 후퇴하였다.12)13)14) 두 어류종 실리칸스와 폐어는 전혀 다른 생태계에 서식하고 있다. 비슷하게 다리가 달렸다는 점에서 진화론자들이 양서류의 조상이 아닐까 하여 두 어류종 사이를 왔다갔다하고 있지만 두 어류종에 비슷하게 다리가 달렸다는 점은 일종의 수렴현상일 뿐이다.

시조새화석은 독일 졸호휀(Solnhofen)에서 1861년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시조새라는 이름이외에 별로 알려진 것이 없으나 이빨이 있고 날개 끝에 발톱이 있다는 것을 들어 파충류와 조류를 이어주는 훌륭한 진화의 증거로 왕자의 자리를 지켜왔다.

그러던 차에 1977년 사이언스 뉴스(Science News)지에, Brigham Young 대학의 젠센(J. Jensen)이 시조새가 발견되는 것과 동일한 지층에서 완전한 새의 화석(첫번째 발견은 머리부분이 없었고 그 다음해 머리가 포함된 몸전체의 화석이 추가로 발견되었다)을 발견하였다는 것이 보도되었다. 이듬해 '사이언스'(Sciene)지 기사에서 오스트롬(J. Ostrom)은 'If it is not a bird bone, I don't know what else it is.' 라고 하며 이것이 완전한 새임을 시인하였다15). 이는 시조새가 파충류와 조류를 이어주는 중간고리가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진화의 중간고리로 부동의 위치를 지켜오던 시조새가 격하되면 진화론이 허물어지게 될 것임. 

 ▲ 시조새 화석

그런데 1996년에도 시조새가 발견된 지층에서 딱다구리와 비슷한 완전한 새의 화석이 발견되었음을 North Carolina 대학 연구그룹이 '사이언스'지에 발표하였다.16) 1977년, 젠센의 완전한 새의 화석 발견에 이어 이번 결과 역시 시조새가 파충류와 조류를 이어오는 중간고리라는 진화론자들의 종래 주장에 치명적이었다. 진화론자들은 이번 발표결과를 애써 무시해 버리거나 이제 새의 조상을 다시 찾기 위하여 시조새가 발견되는 발견층보다도 더 아래의 지층을 뒤져야 할 상황이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지만, 진화론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는 것은 여전히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있다. 뉴스&옵저버(The News & Observer)지는 이 내용을 다루면서 'In paleontology, as comedy, timing is everything until the latest discovery, the oldest known bird (Archeopteryx) was 150 millions years old, and many scientists believe it was the ancestor of all birds.' 라고 하며, 오늘의 새의 기원에 대한 진화론의 현실을 꼬집고 있다.

또한 인간이 원숭이에서 진화하였다고 가정하여 그 중간고리를 유인원이라 설정, 이를 입증할 증거를 찾아왔지만 진화론적 선입견에 의해 가짜 유인원들(invented apemen)만 만들어 왔다. 실제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멸종된 원숭이의 일종이었고, 자바원인은 원숭이 두 개골과 사람의 다리뼈로 구성된 것이었으며, 필트다운인 역시 사람 두개골과 원숭이 턱뼈가  조합된 가짜였고, 네브라스카인은 멸종 멧돼지 이빨 1개가 네브라스카인 부부로 둔갑된 것이었음이 판명된 것이다.

1990년대에 들어와 네안데르탈인에 대하여도 많은 것들이 추가로 밝혀졌다. 1970-1980년대까지도 네안데르탈인은 지적 행위 및 문화행위가 동물보다 나을게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네안데르탈인은 뼈연장을 만들어 사용하였으며 동물뼈, 상아목걸이 등 정교한 장식품과 훌륭한 벽화를 남기고 있다고 한다.17) 그들은 몸집도 현대인보다도 평균 20-30%가 더 크고 근육질형의 건장한 체격의 소유자였다는 것이 밝혀졌는데,18) 이는 노아홍수 이전에 네피림(거인, 장부)이 살았었다는 성경의 구절(창6:4)을 상기시킨다. 네안데르탈인이 현재 인류에 이르는 중간고리라는 추론은 진화론자들 사이에서조차 자취를 감추고 있다.  

20세기 말에도 생물종과 생물종을 연결시킨다는 중간고리의 자리는 여전히 비워져 있으며, 진화론자들에 의해 그 중간고리의 후보들로 생각되어왔던 것들도 하나씩 하나씩 무대 뒤로 퇴장하고 있는 것이다.

 

8. 맺는 말

앞서서 우리들은 기원의 문제와 관련된 최근 10-20년 이내의 동향을 살펴보았는데, 진화의 증거가 밝혀져 간다는 것은 과학기술의 발전과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과학기술이 더욱 발전되면서 첨단과학기술을 빌려 기원의 문제를 분석해보면 볼수록 그 동안의 진화론적 주장들이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 추정과 해석으로 가득 차 있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19세기 말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문, 사회, 과학 등 제 분야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 오고 있는 진화론, 그러나 이 이론은 여전히 하나의 추측이론으로서 인간이 원숭이를 거쳐 하등생물에서 진화되어 왔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선상에 있을 뿐이다.

일본의 저명한 곤충학자 히다카 도시다카 교토대학 교수는 현대 생명과학의 무비판적인 진화론 수용에 대하여 학자로서의 양심을 고백하면서 '내게는 진화에 대해서 이해되지 않는 것들 투성이다.' '진화론은 근대의 유행어이다. 생물학 어느 분야를 보아도 이 유행어를 넣지 않고 설명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 같아 보인다. 그런 까닭에 앞뒤 따지지 않고 이 유행어가 오르내린다. 그러면서도 이것은 유행어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 실체는 문제시되지 않는다. 또한 진화의 메카니즘에 대해서는 어느 책을 뒤져봐도 똑같은 얘기만 쓰여져 있을 뿐이다...'19) 이는 진화론이 진정한 과학의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님을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은 '외계생명체는 있는가?'라는 질문도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신비를 바탕으로 한 세계관에서 나온 것이다. 외계생명체 사상에 편승하여 사람들을 무던히도 현혹시켜온 사람들 중에 아담스키(Adamski)란 인물이 있다. 그는 1947년 이래 UFO를 수차례 목격했으며, 금성인과 화성인을 만났었고, UFO에 직접 탑승하여 달-금성-화성에도 가보았는데 그곳에는 다양한 생물들이 있더라는 주장을 해왔었다.20)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바지만, 1969년에는 인간이 직접 달에 착륙하여 생명체가 살 수 없다는 것을 직접 판명하였고, 앞에서 살펴봤던 대로 1976년 바이킹 랜더 I&II가 화성에 착륙, 화성에는 생명체가 살 수 없으며 유기물의 흔적이 전혀 없다는 것도 보고된 바 있다.  

 ▲ 달에 착륙한 우주비행사와 달표면에 찍힌 그의 발자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스키는 정신병자라는 얘기를 전혀 듣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가 달과 화성은 생명체가 살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이 밝혀지기 전인 1959년에 죽었기 때문이었다. 그 자신이 외계사상을 과학적 근거 없이 퍼뜨려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외계생명이 존재한다라는 생각을 갖도록 세뇌시킨 역할을 톡톡히 했음은 물론이다. 아담스키의 거짓들이 당시 사회에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이유는 앞서 살펴본 19세기말부터 인간들의 마음에 자리잡아온 가상화성인 사상과 연계시켜 생각해 볼 수 있다. 과학적 현상이라고 볼 수 없는 UFO목격사건들, 많은 SF관련 소설, TV 프로그램, 영화들은 창조주를 배제하고 인본주의에 편승한 과학기술주의와 19세기말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진화사상이 만들어낸 현시대의 영적 현상들인 것이다.

1953년에 방전관 실험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발표하여 '생명의 기원' 연구분야에서 명성을 얻은 밀러도 그 후 이 분야의 연구에 50여년을 보냈으나 진화론적 세계관의 주장대로 물질에서 생명이 저절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앞서 언급된 아담스키처럼, 밀러 자신도 시대의 무신론과 인본주의 사상에 휩쓸려 창조주의 개념이 결여된 세계관의 희생자가 되어 생명이 물질에서 왔다는 진화론적 세계관을 퍼뜨리는 큰 역할만을 해온 셈이 되었다.

결국 한 세기 이상 과학이란 이름을 빌려 진화론이 사실인 것처럼 주장되어 오던 것이 이제는 과학기술의 발달과 함께 그 이론의 비합리성과 비타당성들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으며 오히려 과학기술의 발달과 함께 많은 반(反)진화/창조의 증거들이 대두되어오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현재의 진화이론이 지니고 있는 한계성과 그 동안의 진화론 주장이 가지고 있는 비과학성을 증거하는 것이 되며, 반면 반진화/창조의 증거들이 많은 양심있는 과학자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는데, 이 또한 진화론의 비과학성을 보여주는 훌륭한 증거인 것이다.

 

<참고문헌>

1) D. S. McKay et al., Science 273, p.924 (1996).

2) E. R. D. Scott et al., Nature 387, pp.377-379 (1997).

3) J. P. Bradly et al., Nature 390, p.454 (1997).

4) 임번삼 외, 진화론과 과학 pp.284-293 (1994) 한국창조과학회 출판부.

5) 임번삼 외, 진화론과 과학 pp.313-327 (1994) 한국창조과학회 출판부.

6) Cano et al., Science 268, pp.1060-1064 (1995).

7) S. R. Woodward et al., Science 266, pp.1229-1232 (1994).

8) S. B. Hedges et al., Science 268, p.1191 (1995).

9) S. Henikoff Science 268, p.1192 (1995).

10) M. W. Allard et al., Science 268, p.1192 (1995).

11) M. V. Erdmann et al., Nature 395, p.335 (1998).

12) R. Zadoya and A. Meyer, Pro Natl Acad.Sci USA 93, pp.5449-5454 (1996).

13) R. Zadoya and A. Meyer, Genetics 146, pp.995-1010 (1997).

14) W. Roush, Nature 277, p.1436 (1997).

15) Science 199, p.284 (1978).

16) L. Hou et al., Science 274, pp.1164-1167 (1996).

17) P. G. Bahn, Nature 394, pp.719-721 (1998).

18) J. Kappelman, Nature 387, pp.126-127 (1997).

19) T. Hitaka, 生きものの世界への疑問 - Chapter 4, (1991).

20) 조덕영, UFO의 실체.

 

출처 - 창조지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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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위원회
2004-07-26

역사로 본 생명의 발생과 기원



1-1.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22)

고대 그리스 이오니아(lonia) 학파의 자연철학자들은 열과 공기 그리고 태양에 의해 생물은 우연히 발생하였다고 보았다. 그중 대표적인 철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은 양친으로부터 태어나기도 하지만 무생물로부터 우연히 발생하기도 한다는 자연발생설을 주장하였다. 당시에는 실험으로 통한 검증의 단계 없이 관찰만을 통해 바로 학설이 만들어지던 시기였다. 예를 들어 연못 속의 생물들이 물이 마르면 사라져버렸다가 비가 와서 물이 고이면 다시 나타나는 것을 보고, 생물들이 연못 밑바닥의 진흙으로부터 생겨난다고 믿었으며, 또 많은 사람들이 썩은 고기에서 구더기가 생기고, 축축한 흙에서 지렁이가 생긴다고 믿었다. 생명기원에 대한 고대인들의 인식이 세계적으로 동일한 것은 아니었지만, 우연한 계기로 생명이 발생되었다는 생각은 널리 퍼져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진화론적 생명관은 고대 인도의 경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2. 헬몬트(1579-1644)

벨기에의 의학자 헬몬트(4) 헬몬트 Jan Baptistavan Helmont 1577∼1644 

인물소개 : 헬몬트

벨기에 화학자·의학자. 브뤼셀 출생. 1599년 루뱅에서 철학과 의학을 공부하고 스위스·이탈리아·프랑스 등지를 여행하였다. 1609년 박사학위를 받고 브뤼셀 근교에 정착하여 빈민에 대한 의료봉사와 화학실험에 전념하였다. 생리·병리현상을 화학적 과정으로 생각하는 P.A.파라켈수스의 사상을 신봉하였으며, 주로 마술적·연금술적 색채의 실험을 수행하였다. 

자연발생·만능용매(萬能溶媒)·원소전환(元素轉換) 등을 믿는 한편 물질의 불멸을 확신하여, 산에 녹은 금속이 적당한 수단으로 같은 양의 금속으로 환원될 수 있음을 예시하였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에 반대하여 기체와 물을 원소로 여겨, 유명한 <버드나무 실험>으로 물이 중요한 원소임을 증명하려 하였으며, 일산화탄소 등을 처음으로 공기와는 다른 물질로 보고 <가스>라는 명칭을 부여하였다. 저서로 《상처 자기요법(1621)》 《의학의 기원(1648)》 등이 있다.는 밀이나 치즈를 더러운 아마포로 덮어두면 생쥐가 태어난다고 주장했다.

 

1-3. 데카르트(1596-1650)

데카르트는 습기 있는 흙에 햇빛이 비치거나 생물이 부패할 때, 생물은 그 속에서 우연히 발생한다고 보았다.

 

1-4. 레디(1626-1697)

1668년 레디는 아래의 그림 같은 실험을 하고 처음으로 자연발생설에 대한 반대 의견을 제시하였다. 즉 병 속에 생선을 넣고 하나는 헝겊을 덮어 파리가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다른 하나는 헝겊으로 막지 않아 파리가 자유로이 드나들도록 하면 구더기는 헝겊을 덮지 않은 병의 생선에서만 발생했다. 그는 이와 같은 실험을 통해 생물의 자연발생설을 부인하였다. 레디는 구더기가 썩은 고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파리가 그 위에 낳은 알에서 깨어난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 결과로 자연발생설이 수그러들지는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시세계를 보여주는 현미경의 등장으로 인해, 사람들은 생쥐나 구더기는 자연적으로 생겨나지 않지만 미생물들은 자연 발생한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인물소개 : 레디 Francesco Redi 1626∼1697

이탈리아 의사·박물학자·시인. 토스카나 대공(大公)의 시의(侍醫)로 1668년에 출판된 《곤충에 관한 실험》에서 고기를 천 등으로 씌워 놓고 파리가 알을 낳지 못하게 하면 그 고기가 아무리 썩어도 구더기가 생기지 않는 데서 구더기가 고기에서 자연 발생한다는 것을 부정하였다. 그러나 내장의 기생충과 충영(곤충의 기생으로 이상발육을 하여 혹처럼 된 식물체) 속의 곤충은 자연 발생하는 것으로 믿었다. 과학적 탐구에 쏟은 정열을 문학에도 쏟아, 이탈리아 14세기의 시인에 정통(精通)하였으며, 시작품으로 술의 신(神)을 찬양한 다운율시(多韻律詩) 《토스카나지방의 바커스(1685)》 등이 있다.

 

1-5. 뷔퐁(1707-1788)

뷔퐁은 진화론자의 시조로 불리운다. 그는 '박물지'라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지구의 최초생명은 약 2만년 전 원시바다에서 우연히 발생한 생명체가 계속 진화를 해 왔다고 주장했다.  

 

1-6. 뿌세(1809-1872)

19세기 프랑스의 뿌세(Pouchet)는 산소와 질소를 혼합한 공기를 만들고, 수소를 태워 물을 만들어 외부로부터의 오염을 방지하기 위한 실험을 한 후 미생물이 자연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인물소개 : 뷔퐁 (Georges Louis Leclercde Buffon, 1707∼1788)

프랑스의 박물학자·계몽사상가. 부르고뉴의 몽바르 출생. 영국의 자연과학의 급격한 발전에 관심을 갖고, 1년간 영국에서 수학·물리학·식물학을 공부하였다. 1739년 이후 파리의 왕립식물원 관리자가 되어 박물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47년부터 많은 협력을 받아 《박물지》의 간행을 시작하였는데 총 44권이 된다. 그는 <유인원은 인간의 미발달상태 혹은 퇴화한 것>이라는 글을 써서, 진화론의 선구자가 되었다. 또 지구의 나이를 성서보다 길게 상정하여 신학자들의 비난을 사기도 하였다.

 

1-7. 파스퇴르(1822-1897) 

18세기 중엽까지 생물의 자연발생에 대한 논쟁이 매우 활발하였다. 이러한 자연발생설에 대한 길고 지루한 논쟁은 1861년 프랑스의 미생물학자 루이 파스퇴르에 의해 끝이 났다. 그는 고니의 목을 닮은 주둥이를 가진 S자형 플라스크를 만들어 공기는 통하되 박테리아는 들어갈 수 없게 했다. 그리고 플라스크에 고기즙을 넣고 열을 가한 후 식혀 놓았다. 그 결과 플라스크 안에는 어떤 미생물도 자라지 않았다.  

미생물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온도와 습도, 공기 및 영양분이 갖추어져야 하며, 이런 조건이 갖추어진 연후에 공기 중에 있는 미생물이 작용해야 한다. 파스퇴르의 S자형 플라스크는 1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생물이 발생하지 않은 상태로 파스퇴르 연구소의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파스퇴르는 생명체는 또 다른 생명(공기중의 미생물)이 함께 해야만 발생된다는 사실을 실험을 통해 입증시킨 것이다. 자연발생설을 지지하던 뿌세는 파스퇴르의 실험을 지켜보면서 비로소 파스퇴르의 견해가 타당함을 인정했다고 한다.


인물소개 : (1) 파스퇴르 Louis Pasteur 1822∼1895

프랑스 화학자·미생물학자. 쥐라주 돌 출생.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에서 물리·화학을 공부한 뒤 1849년 스트라스부르대학 화학교수가 되었다. 타르타르산에 의한 광회전성에 대한 연구를 통해 분자 내 원자 배열의 문제에 도달, 화학조성·결정구조·광학활성의 관계를 연구하여 J.H. 반트호프 입체화학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때 생물이 입체이성질(立體異性質)의 한쪽만을 이용, 합성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우주의 <비대칭성>을 강조하였다. 1854년 릴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1857년 젖산균에 의한 젖산 발효를, 1860년 효모에 의한 알코올 발효를 증명하여 발효의 의의를 확립하였다. 1861년 비등점에서 공기를 단절한 플라스크 안에서는 물질이 썩지 않음을 증명함으로써 생물의 자연발생설을 부정하였다.

1862년 아세트산의 발효와 알코올에서 아세트산으로 변하는 것을 연구하여 식초의 새로운 공업적 제법을 확립하였다. 1865년 포도주의 산패(酸敗) 원인균을 연구하여 약 60℃의 저온살균법을 고안함으로써 프랑스의 포도주제조에 크게 공헌하였다. 또 J.B.A.뒤마로부터 누에의 미립자병(微粒子病)과 연화병(軟化病)에 관한 연구를 의뢰받고 연구한 결과, 감염된 병충의 알에 의한 전염예방법 등을 발표하여 양잠업의 어려움을 덜어 주었다. 1867년 소르본대학 교수가 되었다가, 이듬해 뇌출혈로 반신불수가 되었으나, 연구를 계속하여 1877년 탄저병(炭疽病)·패혈증(敗血症)·산욕열(産褥熱) 등의 병원체를 밝혀냈다. 이 연구의 영향을 받은 영국의 외과의사 J.리스터는 외과수술에서 방부법(防腐法)의 응용에 관한 연구를 하게 되었다. 

1879년 닭콜레라의 독성을 약화시킨 배양균을 닭에게 주사하면 면역이 된다는 것을 발견하고, 백신접종에 의한 전염병 예방법을 일반화하였다. 1881년에는 양(羊)의 면역실험에 성공하였고, 탄저병 면역에 관한 공개실험을 하여 그 유효성을 실증하였다. 1882년 프랑스학사원 회원이 되었다. 그가 인류에 남긴 최대의 공헌은 광견병백신 제조에 성공한 것으로서, 1885년 광견에 물린 소년에게 처음으로 백신을 접종하여 생명을 구하였다. 1888년에 전 세계로부터 답지된 기부금으로 파스퇴르연구소가 세워져, 초대소장에 취임하였다.

출처 : 야후백과사전

 

결론 : 이같이 생명이 또 다른 생명에 의해서만 발생된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감지할 수 없는 존재가 있으며, 맨 처음 그에 의해 생명이 창조되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반면 우연한 계기로 발생된 원시생명체가 진화와 분화를 거듭하면서 오늘날의 동식물로 나타나게 되었다고 하는 종래의 견해는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되었다. 생물이 자연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은 파스퇴르 실험에 의해 입증되었다.

 

출처 - 창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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