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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기독교

임번삼
2003-12-09

학문의 목적과 역사 2


(3) 서양의 구도활동

서양학문은 그리스철학과 기독교사상(Christianity)에 바탕을 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학문의 역사를 말할 수 없으며 바르게 이해할 수도 없다.

주지하듯이, 학문의 기원은 그리스의 밀레토스 학파(7 BC)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은 동양인들과는 달리 논리적인 방법으로 진리의 실체탐구에 접근하였다. 그들은 처음에는 우주의 본질(en arche)이 물, 불, 공기, 흙이라는 일원론적 사고(monoism)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Sokrates 470-399 BC)는 연구의 대상을 자연으로부터 인간으로 전환시켰다. 그의 제자인 플라톤(Platon 427-347 BC)은 망각(忘却)의 레떼강 너머로 희미하게 어른대는 이데아계(睿智界 idea)가 진리의 본체라 하였다. 이데아계는 불변의 이상(理想)이며, 이것이 투영된 것이 현상계(現象界)라 하였다. 인간의 영혼(psyche)은 이데아를 인식하는 이성(理性)과 감정을 다스리는 기개(氣槪), 그리고 식욕이나 성욕과 같은 욕망(慾望)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의 목적론적 이원론은 후일 기독교(특히 개신교)와 이슬람권의 환영을 받았다.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384-322 BC)는 형상과 질료를 구분하는 이원론적인 연구자세를 취하였다. 그는 인간은 질료인(質料因)인 점토(粘土)로 만들어진 육체, 조물주의 이미지인 형상인(形相因 영혼), 조물주의 손이나 도구에 해당하는 동력인(動力因), 이러한 물체(生命體)를 만드는 설계도에 해당하는 목적인(目的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 중에서 그는 형상인을 중시하였고, 목적인과 형상인을 가진 것이 신이라 하였다. 그는 식물의 영은 영양적이며, 동물은 여기에 감각적인 요소를 가미한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인간의 영혼은 동물의 영혼에 이성(理性)을 가미한 것이라 하였다. 그리스의 이원론은 그 후 다원론적인 원자론(atoma theory)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구약성경(舊約聖經)을 경전으로 하는 이스라엘의 유대교(Judaism)에서는 야훼 하나님이 우주의 창조주라고 주장하였다. 구약에 대한 해설과 실천방안을 해설한 탈무드(Talmud)는 유대인 뿐 아니라 세계의 정신사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런가 하면, 2천년전에 태어난 예수(Jesus Christ)는 자신이 구약성경에 예언된 대로 인간세계에 내려 온(incarnation) 하나님의 아들이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파격적인 선언을 하였다. 다른 사람들이 진리를 탐구하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이 바로 진리의 실체라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외침은 전 세계의 학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7세기(606)에 마호멧에 의해 일어난 이슬람(Islam)은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파생한 종교로 성경의 일부 내용에 마호멧의 예언(코란)을 포함시킨 알키탑(Al Kitab)을 경전으로 삼고, 알라(Allah)에게 절대복종을 요구하는 유일신교(唯一神敎 monotheism)이다. 그들은 코란과 칼로 중동을 포함한 지중해 연안을 삽시간에 지배하면서 찬란한 사라센문화를 꽃피웠다.

한편, 기독교가 지배했던 중세 유럽에서는 신에 대한 증명(神論)과 세계와 자아를 관통하여 흐르는 시간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탐구(時間觀)하였다. 사도 바울(St. Paul) 이래 최대의 기독교 신학자로 불리우는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 354-430)이 수립한 직선적 시간관(linear view of time)은 비기독교적인 순환론적 시간관과 극명하게 대치되는 개념이었다. 그는 <두 도성>(Two Castles)에서 시간은 창조(創造)에서 출발하여 인류의 종말(終末)을 향해 달리는 화살과 같다고 하였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는 그리스철학과 하나님, 인간, 자연의 상호관계를 조화적으로 설명한 스콜라철학(Scolaticism, Thomism)을 수립하여 카톨릭에 범신론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관을 도입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만물의 제일 생성원인‘(Prima Causa)이라 하였다.

13세기 이후에는 그리스와 로마시대로 복귀하려는 르네상스(Reneisance, Born Again)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종교개혁(Reformation 1517-1650)이 일어나 근세과학의 탄생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 때부터 철학의 주제는 신(神)으로부터 인간으로 바뀌면서, 인본주의(humanism)가 싹트기 시작하여 계몽주의에서 꽃을 피우게 되었다. 이러한 무신론적 인본주의가 힘을 얻게 된 배경에는 중세 카톨릭이 종교의 이름으로 인간을 억압해 온 데 대한 반발이 크게 작용한 것이었다. 한편, 루터, 멜랑히톤,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은 노동신성설(勞動神聖說)을 주장하였고, 자연을 숭배가 아닌 조작(操作)의 대상으로 선언함으로써 자연과학이 발전할 수 있는 정신적인 근거를 제공하였다.

근세철학의 원조라 불리우는 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이원론(二元論 dualism)을 주장하면서, 주관(보이는 자기)과 객관(보여지는 세계), 마음과 물질로 나뉜 세계상을 어떻게 하나로 연결하여 해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리고, 진리탐구에 대한 방법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러한 회의론으로부터 근세철학이 싹트게 되었다. 데칼트의 방법론적 회의에 대하여 스피노자와 라이프닛츠를 중심으로 한 대륙의 합리론(合理論 rationalism)과 베이컨, 록크, 버클리, 흄 등을 중심으로 한 영국의 경험론(經驗論 empiricism)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해답을 추구하였다. 그는 화란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정신과 물질이 서로 다른 것이라면 왜 슬플 때 눈물이 나오느냐?'고 묻자, '신이 정신과 물질을 만들었으며, 이 세 가지(신, 정신, 물질)가 우주의 실체(實體)'라고 대답하였다.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 1632-1677)는 '신이 유일의 실체'라 하였고(一元論), 라이프닛츠(Gottfried Wihelm Leipnitz 1646-1716)는 '신이 만든 비물질적이면서 독립적으로 운동하는 모노드(monod 單子)가 우주의 근본적 실체이며, 이들의 복합체가 세계를 이룬다'는 다원론(多元論 pluralism)을 주장하였다.

이처럼, 데카르트의 영향을 받은 대륙의 합리론은 이성으로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으나, 영국에서는 이성의 한계를 인식하고 경험에 의존하려는 사조가 등장하였다. 유니테리언주의자였던 록크(John Locke 1632-1704)는 사람이 어려서부터 관념(觀念)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데칼트의 주장을 부인하였다. 그는 인간에 대해서는 물심이원론(物心二元論)을 주장하였으며, 신(神)을 만물의 제일생성원으로만 이해하였다. 인간은 태어날 때 백지같은 상태인 데, 교육을 통하여 감각(感覺)으로 그 위에 자기가 받은 인상을 그리며, 이를 반성하는 과정에서 관념이 형성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감각과 반성은 경험에 의존하는 것이며, 관념은 단순에서 복잡한 방향으로 발달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구미의 교육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버클리(George Buckley)는 인식(認識)이란 정신과 관념 사이에 있는 것이므로 여기에 감각세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관념은 마음에서 나오며, 마음은 자유로운 존재(神)로부터 유래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마음 밖의 존재와 아무런 관계가 없이 경험은 생긴다고 하였다.

이러한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은 칸트와 헤겔로 대표되는 독일의 관념론(觀念論 idealism)을 통하여 하나로 통합되었다.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순수이성비판>에서 감성으로 알 수 없는 세계를 물자체(ding an sich)의 세계라 하였다. 인간이 시공을 통해 감성(感性)으로 현상을 인식하고, 오성(悟性)으로는 현상을 정리하여 개념화한다고 하였다. 이성(理性)은 경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이성으로 마음 속의 도덕율(道德律)을 깨닫게 된다고 하였다. 그는 신이나 영혼과 같은 문제는 경험이나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물자체’의 세계에 속한 것이라 하여 이성의 한계를 지적하고 비판하였다.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양심의 소리’에 따른 도덕율을 강조하였고, <판단력비판>에서는 ‘천상의 별’(물자체)과 ‘마음속의 도덕율’(행위의 기준)을 연결시킴으로써 주관과 객관을 일치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이처럼, 순수이성을 비판함으로써 데칼트가 제기했던 문제(주관과 객관, 물질과 정신의 연결문제)는 이론적인 해결을 보게 되었으며, 도도히 흘러 온 철학의 사조는 사실상 대단원의 막을 내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헤겔(Georg Wilhelm F. Hegel 1770-1831)은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체계로 보고, 인간의 성장이나 역사의 발전이 정(正 these)과 반(反 antithese)이 대립하다가 합(合 synthese)으로 조화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세계정신(World Spirit, Welt Geist)을 향해 발전해 간다고 하는 변증사관(辨證史觀 dialectic view)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는 헤겔의 그러한 이론이 추상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세계는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변혁의 대상이며, 모든 세계는 물질로 되어 있다는 유물론(materialism)을 주장하였다. 그는 정신도 물질에서 나온다고 하였고, 종교는 민중을 마비시키는 아편이라고 공격하였다. 인간의 역사는 계급투쟁이 없었던 원시공산사회에서 노예제도, 중세봉건제도, 자본주의, 사회주의를 거쳐 공산유토피아에 이르게 된다는 유물사관(唯物史觀 materialistic view)도 제시하였다. 그러나. 공산종주국인 소련이 몰락하고(1989) 중국이 자본주의를 수용함으로써 이러한 마르크스의 예언은 빗나가게 되었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서양철학의 시대적 특징을 요약한다면 그리스철학은 근본에 대한 탐구시대요, 중세철학은 신학적 철학시대이며, 근세철학은 체계적 철학시대라 할 수 있다. [甲田 烈等; ibid, pp 34-35]


(4) 진리의 본체

1995년 어느 밤은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진리가 무엇인지 내 나름으로 깨달았으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찾고 있는 진리의 실체를 발견했으니 흥분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 내용은 매우 단순했지만, 내게는 매우 명확한 것이었다.

모든 학문은 깊이 파고 들어가면 결국 <진리의 샘>에 도달하게 된다. 자연과학(생물학, 물리학, 화학, 지질학, 천체학)의 많은 법칙들 (예컨데, 유전법칙, 열역학법칙, 파스칼의 원리, 만유인력의 법칙, 상대성원리, 질량불변의 법칙 등)이 그것이다. 인문과학(철학, 문학, 수학, 신학, 사학)에서는 귀납법, 연역법, 생명의 존엄성, 진리의 추구, 피타고라스의 정리, 역사정신 등을, 사회과학(법학, 경제학, 경영학, 사회학, 정치학, 인류학)에서는 한계효용의 법칙, 경세제민의 원리, 자유, 정의, 평등정신, 법의 정신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원리나 법칙들은 반론할 수 없는 확고한 원리들이지만, 이들을 바로 진리라 부르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느낌이 있다. 어디까지나 원리요 법칙일 뿐이며, 진리의 한 단면을 발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진리의 샘>을 더 깊이 파고 들어가면 그것을 뿜어내는 <거대한 수맥(水脈)>에 도달하게 된다. 자연과학의 법칙과 원리 및 정리들은 결국 자연의 원리를 탐구하여 활용하려는 것이며, 인문과학의 제반 법칙이나 정리, 사회과학에서의 양심법, 자유, 정의, 평등의 추구는 자연현상을 본질적으로 이해하고 생명과 인간존엄을 지키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수맥을 더 깊이 파고 들어가면 이들은 <진리의 강>과 만나게 된다. 앞에서 기술했던 모든 법칙과 원리들이 결국은 우주 안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우주의 지배를 받는, <우주의 법칙>이라는 말이다.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예외가 없이 우주의 법칙 아래서 움직이고 있다. 우주법칙이란 ‘온 우주에 통일되게 작용하고 있는 거대한 질서체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우주의 법칙은 우리가 그것을 느끼든 못 느끼든, 알든 모르든 간에 우리의 인식과는 무관하지만 일관되게 작용하고 있다. 자연계 속의 모든 생물이나 인간은 그 법칙 아래서 움직이고 살다가 사라지는 한시적 존재일 뿐이다. 그런데, 이처럼 거대한 우주계에는 변하지 않는 질서가 존재하게 마련이다. 만일, 우주계의 질서가 수시로 변하든지 지역에 따라 달라진다면 우주는 존재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변하지 않는 우주법칙을 탐구하려는 것이 모든 학문의 궁극적 목표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우주의 법칙>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러 진리의 강들은 흐르고 흘러서 마지막으로 <진리의 바다>에 이르게 마련이다. 그곳이 바로 진리의 원천이요 진리의 형체가 숨쉬는 곳이며, 진리가 베일을 벗고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다. 그러면, <진리의 바다>란 과연 무엇일까? 그 마지막 베일을 걷고 보면 그것은 놀랍게도 우주와 우주의 법칙을 만들고 운용하시는 우주의 창조자인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 그 하나님이 우주를 만드시고 일정한 우주의 법칙에 따라 우주를 운행하시기 때문에 만물이 조화롭게 돌아가며 생존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찾아 헤메던 진리의 본체는 다름 아닌 창조주였던 것이다(그림 1).


그러면, 이러한 창조주는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최종적인 물음에 우리는 봉착하게 된다. 이것은 분명 믿음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과학의 문제가 아닌 것도 아니다. 학문적인 문제이면서 개인적 선택을 요구하는 문제이다. 학문적 문제라 함은 창조주가 실존하고 우주를 만드신 분이라면 창조론적으로 자연현상을 설명해야 합리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주를 공부한다는 것은 자연과학의 세계를 넘어 신학과 철학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자연과학만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서 물질계를 연구대상으로 하는 자연과학과 형이상학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인문, 사회과학이 서로 만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절감하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1,500 BC) 기록물인 성경(Bible)에서는 “만물이 주(主)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갈 것“(롬11;36)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여기서, 주(主)란 예수를 지칭하는 말이다. 예수가 우주를 만들고 운행하며, 만물이 궁극적으로는 그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학문을 깊이 탐구하면 궁극적으로는 진리의 본체인 예수그리스도와 만나게 된다는 말이다. 이것이 학문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사람들은 동의나 거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에 속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선택은 학문적 선택이면서도 인생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성경에 기초한 기독교사상은 헬레니즘과 더불어 서양학문의 근간을 이루어 왔으며, 세계사적으로 모든 분야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그대로 믿는 성경적 창조론(biblical creationism)이 다윈의 진화론(19C)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서양학문을 지배하였다. 이와는 달리, 성경기록이나 진화론과 관계없이, 절대자의 지적설계에 의존치 않고서는 자연계의 기원이나 운행에 대해 과학적인 해답을 얻을 수 없다고 보는 입장이 과학적 창조론(scientific creationism)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절대자란 창조주가 될 수도 있고, 자연법칙을 지칭할 수도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과학적 창조론은 범신론적인 성향을 내포한다. 성경적 창조론과 과학적 창조론은 일부 주장에서는 일치하지만 다른 부분도 많다. 그러나, 진화론과 대치된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과학적 창조론은 후일, 유신진화론의 탄생을 예고하는 신호탄이기도 하였다.


(5) 진리의 목적

우주(universe, cosmos)는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질서체계(orderness, cosmos)이다. 질서가 무너지면 우주는 존립자체가 불가능하다. 이러한 질서는 생명을 살리기 위한 것이며, 그 중에서도 만물의 영장인 사람을 위한 것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모든 질서의 지향방향은 생명을 살리는 쪽으로 나가야 한다. 생명을 최우선으로 하고, 인간성을 꽃피우며, 자유, 정의, 진리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우리는 이미 역사를 통하여 ‘지식에 지식만을 더하는 학문’은 인류에게 해로운 역기능을 했던 많은 사건들을 보아 왔다. 따라서, 이러한 잘못된 역사가 더 이상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는 파수군의 역할을 해야 한다. 참다운 진리는 사람을 얽매는 것이 아니라, 자유케 한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학문의 목적인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세 학문 간에 경계선을 긋는 일은 부질없는 노릇인지도 모른다. 오늘의 자연과학은 그 연구대상이 실험 가능한 물질계(物質界)로 국한이 되어 있는 것은 16세기부터 베이컨과 로크의 귀납적 경험론의 도입, 그리고 데카르트와 라메뜨리의 생명기계론(生命機械論)이 과학자들에게 널리 수용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는 학제 간에 구분이 없었다. 그래서, 옛날에는 많은 학자들이 철학자이면서 동식물학자요, 의학자이면서 수학자이기도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이면서 동물학자였으며, 데카르트는 철학자이면서 수학자요 물리학자였고, 다빈치는 예술가이면서 해부학자였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베이컨을 비롯한 경험주의자들은 자연과학을 발전시킨 방법론을 제시한 공로자들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학문의 궁극적 목적인 진리를 발견치 못하도록 오도한 책임도 아울러 져야 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자연과학자에게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창의와 영감의 원천이다. 반대로, 인문과학자와 사회과학자에게는 자연과학이 추상적 연구대상에 대한 실증의 수단이 된다. 따라서, 물질계를 연구대상으로 한정한 오늘의 자연과학은 진리의 본체를 규명하는 데 있어서 구조적인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진리는 형이하학이 아닌 형이상학의 영역에 숨어 있으며, 학제의 연계를 통해서만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형이하학적인 생명활동은 형이상학적인 생명이 연출하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물질계로 한정된 자연과학의 학제는 일정한 부분을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을 보강하는 방향으로 개편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인문, 사회과학분야에 대해서도 역으로 적용되는 말이다.



출처 - 잃어버린 생명나무를 찾아서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451

참고 :



임번삼
2003-12-09

학문의 목적과 역사 1


1. 학문의 목적은 무엇인가?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이다(Homo sapiens). 그러나, 연약한 존재이기에 파스칼은 생각하는 갈대(thinking reed)라 하였다.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 왜 태어나 살며, 사는 동안 왜 고통은 끊이지 않고, 결국은 죽는 것일까? 죽음은 무엇일까? 죽은 후에 천당과 지옥은 있을까? 그리고, 인간을 심판한다는 신은 정말로 존재할까? 우주만물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우주와 인간 사이엔 무슨 관계라도 있는 것일까? 간단하게는 얻을 수 없는 이러한 질문들을 수없이 되뇌이며 우리 조상들은 살아 왔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것이었다. 그래서, 학문의 출발지라는 그리스에서는 자연(동물, 식물, 광물, 우주, 인간)에 대하여 연구하는 자연철학(natural philosophy)이 곧 학문의 출발점이었다. 자연철학은 자연의 기원과 존재 및 그 운행원리(변화, 운동, 소멸)에 대해 연구하고, 거기서 얻은 지식(sophia)을 사랑하여(philia) 학습하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한 연구로 얻은 지식은 동물지(動物誌 animal history), 식물지(植物誌 plant hitsory), 광물지(鑛物誌 mineral history), 자연지(自然誌 natural history), 존재론(存在論 ontology) 등의 이름으로 기록되어 전해 내려온다.

자연철학은 중세 말에는 자연의 역사에 대해 연구하는 박물학(博物學 natural history)으로, 근세에는 여러 갈래로 분과된 학문(分科的學問), 즉 과학(科學)으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 <과학>(science)이라는 말은 라틴어의 지식(scientica)에서 유래한 것으로, 지금은  자연과학(natural science), 인문과학(cultural science), 사회과학(social science)으로 나누고  있다. 브리타니카는 무생명체를 다루는 물리과학(physical science), 생명체를 다루는 생물과학(biological science), 인간사회를 다루는 사회과학(social science), 및 통합과학(combined science) 등으로 나누고 있다. [Britanica Encyclopedia, S-Sound, Vol. 22, pp 61-61e, 1974]  이처럼, 학문이란 배우고 익히는 것(learning)이며,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얻어진 체계화된 지식(science)을 일컫는 말이다.

선인들은 학문의 목표가 자연과 인간의 본질을 규명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달리 말해서 학문의 목적이 진리의 탐구라는 말이다. 그런데, 진리란 무엇이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은 매우 기본적이면서도 궁극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나는 학문의 목적이 진리의 탐구에 있으며, 영원불멸의 진리는 하나뿐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이 글을 통하여 그것을 나타내고자 한다. 따라서, 이 글은 단순히 ‘지식에 지식을 더 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실체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소개하려는 데 촛점’을 맞추려 한다. 이러한 기술자세에는 주관이 개입될 소지가 많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주관적이긴 하나 내 나름대로는 학문적 객관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시중에 나도는 대부분의 고전들도 내용적으로는 저자들의 주관적 시각으로 일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주관이 어떤 면에서는 차별성과 독창성(distinction & originality)을 제공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학문이란 그러한 개성있는 주장들이 다양하게 제시되면서 논쟁하며 발전해 가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오늘날의 학계에서는 실험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진화론이 흡사 실증된 이론인 양 자연과학의 이름으로 가르쳐지고 있는 것은 우려할만한 일이다. 본인이 본서를 기술하게 된 동기는 진화론의 오류들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인류사에 끼친 해악이 너무나 컸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서는 생명과학의 주제들에 대하여 진화론적 견해를 먼저 소개한 후, 이에 대한 창조과학적 비판을 병기하여 두 이론을 비교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창조론적 시각이 현대과학의 논리에 더욱 부합함을 많은 자료를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이 책을 쓰면서 나는 진리를 찾는 길이 얼마나 어렵고 험난한 가시밭길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진리가 불의한 세력에 의해 가리워져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면, 지금부터 독자 여러분과 같이 타임캡슐을 타고 우리 선조 아담이 잃어버린 생명나무의 행방을 찾아 과거의 세계로 떠나 보기로 하자.


2. 진리란 무엇인가?

(1) 철학, 과학, 사상, 종교의 관계

사람들은 옛날부터 진리를 찾느라 노력해 왔으나, 진리는 베일 속에 제 몸을 감춘 채 나타나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수많은 현인들이 진리를 찾아 헤메었으나, 뚜렷한 해답을 얻지 못한 채 지금까지도 구도행렬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절망하였고, 부질없는 짓이라 자포자기 했으며, 어떤 이들은 자신이 깨달은 내용이 진리라 속단하고 사람들을 오도(誤導)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양상은 동서양의 역사를 통하여 유사하였다.

인간이 진리를 찾는 방식은 종교와 철학 및 사상의 형태로 나타났다. 종교의 주된 관심은 우주의 기원(起源)이 무엇이며,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하는 두 명제에 집중된 것이었다. 종교(宗敎 religion)는 절대자와 내세관에 대한 믿음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반하여, 철학은 절대정신을 가지고 있으나 내세관을 필수조건으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종교와 구별된다.

종교에서 말하는 절대자(絶對者)란 만물을 창조하고 자연법칙을 만든 초월적 존재이거나(人格神論), 우주법칙 자체(汎神論)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전자에는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가, 후자에는 힌두교, 불교, 도교를 비롯한 거의 모든 종교들이 속한다. 유교는 절대정신(仁)을 가지고 있으나 내세관이 없으므로 종교라기보다는 사상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내세관(來世觀)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것이므로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믿음은 과학적으로 실험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종교는 실험과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학문의 궁극 목표인 진리를 탐구하려면 실험과학만으로는 한계를 지니게 되므로, 종교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실험과학과 종교는 경쟁 아닌 보합적이고, 표리적인 관계라 할 수 있다.

자연과 인간에 대하여 철학(哲學 philosophy)은 이성(理性)을 통하여 객관적이며 분석적으로 접근하려는 데 반하여, 사상(思想 thought)은 주관적인 추론이나 감성적(感性的) 인 직관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헤겔(Hegel)은 일찍이 서양에서는 철학이 발달한 반면, 동양에서는 철학(학문) 보다는 사상이 발달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아울러, 철학은 후일 학문으로 발전할 수 있었으나, 사상은 객관성의 결여로 학문화되지 못했다고 비판하였다. [甲田 烈, 山本伸裕; 哲學, pp 20-37, Kanki Publishing Co, 東京, 1999]

논리성과 객관성을 필수조건으로 하는 철학은 후일 서양에서 자연과학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특히, 과학의 혁명기(15-16C)와 계몽주의(啓蒙主義 Philosophy of Enlightment) 시대를 거치면서 철학은 ‘관찰과 실험’에 의한 실증적인 분야로 더욱 세분화되었다. 이에 따라, 종합적 성격의 철학이라는 이름의 학문은 인문과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으로 나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세분화 된 과학은 학문본연의 목적인 진리를 규명하기에는 뛰어 넘을 수 없는 한계를 스스로 지니게 되었다. 전문화는 되었지만 부분적이기에 가지는 한계성인 것이다. 이러한 한계성을 인문과학의 한 분야로 전락한 근세철학에서는 직관(直觀)과 자기비판(自己批判)으로 해결하려 하였던 것이다. [Okuyama Minoru; 基督敎界ニ ォケル 創造ニ 關スル 異ナル 見解, pp 3-4, 創造ニ 關スル 一日セミナ, Ochanomizu Center, Mar. 20, 東京, 1993].

이상에서 보았듯이, 진리를 찾으려는 인류의 노력은 세 가지의 형태로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즉, 사상은 감성과 주관으로, 철학은 이성에 의해 논리적으로, 그리고 종교는 믿음으로 접근하였던 것이다.


(2) 동양의 구도활동

동양에서는 옛날부터 진리를 도(道)라 하였고, 많은 선인들이 그것을 찾아 헤메었다. 도를 깨달은 사람은 성인과 현인으로 추앙받았으며, 그들의 가르침은 종교의 형태로 후계자들에게 이어졌다. 그들이 깨달았다는 대표적인 사례를 소개한다.

동양에서 정신적 유산을 가장 많아 남긴 곳은 인도라 할 수 있다. 고대인도에서 발흥했던 브라만교(Brahmanism)의 경전인 우파니샤드(Upanishad 30C BC)는 신(deva 하늘)에 대한 찬가인 베다(veda)를 해설한 책이다. 베다는 아리안족이 기원전 18세기경에 가지고 들어 온 경전이다. 그 내용에 의하면, 우주의 근원은 브라만(Brahman 梵)이며, 우주의 창조자인 브라만(Brahman), 파괴자인 쉬바(Shiva), 보존자인 비슈느(Vishne)의 삼신이 일체(trimurti)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개인 속에 내재하는 원리가 아트만(atman 眞我)이며, 범아는 일체(梵我一體)라 하였다. 전생(前生)의 업보(業報 karma)에 따라 윤회전생(輪回轉生)을 하게 되므로, 범아일치(梵我一致)로 윤회에서 해탈해야 한다고 말한다. 엄격한 카스트 제도(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를 기반으로 출현한 이러한 브라만교는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인도인으로 태어나 브라만이 되어야 하며, 제사, 지혜, 봉헌을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러한 사상은 기원전 1,500년경 힌두교(Hinduism)로 계승되어 인도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힌두교는 인과응보, 윤회설 등의 브라만 사상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 그 후 8백여년(300BC-500AD)을 지나면서 힌두교의 교리는 더욱 체계화되었다. 지금과 같은 근대적 교리는 8세기에서 15세기 사이에 다시 보강된 것이다. 흥미있는 사실은 이 때에 근대교리를 확립한 사람들이 유물론적이고 숙명론적이며 허무주의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J.B. 노스원저, 尹以欽역; 世界宗敎史(下), pp 581-624, 762-839, 玄音社, 서울, 2000]

기원전 6-7세기경에는 이러한 힌두 교리에 반발하여 많은 자유사상가들이 일어났다. 그들은 산과 들의 나무와 바위에 앉아 부동의 자세로 진리를 깨달으려 정진하였다. 석가도 그들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 결과, 탄생한 대표적인 종교가 자이나교(Jainaism)와 불교(Buddhism)였다. 두 종교의 공통점은 인도인의 최대 관심사인 업(業 karma)과 윤회로부터의 해탈(解脫)을 이루는 방안으로 현실부정과 고행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전자가 철저한 고행을 주장한 데 반하여, 후자는 중도(中道)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카피라성의 왕자였던 석가(Gautama Shidata)는 인간의 생노병사(生老病死)에 대해 고민하다가 29세의 젊은 나이에 출가하여 보리수 밑에서 6년간 수행하며 진리를 깨달았다고 하였다. 부처는 산스크리트어로 붓다(Buddha)라는 말인 데 ‘진리를 깨달은 자’ 라는 뜻이다. 그가 깨달은 내용(大覺)은 '인생은 고해'(苦海)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인간의 고통(苦)은 욕심(集)에서 오므로 욕심을 없애야(滅) 참다운 깨달음(道)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사성체(四聖諦)라 부른다. 이러한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윤회(輪廻)에서 해탈(解脫)한 부처(神)가 되어 열반(nirvana)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는 브라만(梵 하늘)과 아트만(참나)의 존재를 부인하고 자아와 세계는 관계성에 의해 성립하며, 우주에는 변화만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괴로움은 12 가지의 인연(전생2 + 현생8 + 내생2) 때문에 오는 것이며,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계(現象界)는 색(色=물질, 육체), 수(受=감각, 지각), 상(想=인간과 세계의 개념구성), 행(行=의지, 기억), 식(識=순수의식)의 오감으로 형성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악이 존재하는 것은 절대자가 없다는 증거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절대자가 없다면 악의 개념이나 선악의 기준을 설정할 수 없다는 모순논리를 안게 되었다.

불교는 자리적(自利的)인 구도에 정진하여 깨달음의 최고 경지(阿羅漢果)에 들어가자며 사체설(四諦說)를 강조하는 소승불교(hinaya 500BC-기원)에서 출발하였다. 그 후, 중국의 달마대사(達磨大師 520AD) 등이 제행무상제법무아(諸行無常諸法無我)의 공(空)사상과 연기설(緣起說)을 주장하며, 중생의 구원을 외친 대승불교(mahaya 기원-500AD)의 교리를 수립하였다. [윤이흠 역; ibid, pp 644-761], [Hiro Sachiya; 佛敎ト 基督敎, pp 13-17, 新潮社, 東京, 1986] 이처럼, 불교는 초월적인 인격신을 부정하며, 우주의 원리만을 인정하는 범신론(pantheism)임을 알 수 있다.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는 인격신에 의한 창조설을 부인하며, 모든 것이 무시무종(無始無終)하고 우주에는 변화만 있을 뿐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인도에서 일어난 이러한 종교들의 공통점은 자연 속에 신의 성품이 들어 있는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자연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게 되어 자연과학의 발달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고대중국은 왕들이 백성들을 대표하여 유일신인 상제(上帝)에게 매년 제사를 드리던 제정일치(祭政一致)의 국가였다. 기원전 11-15세기의 상(商)과 은(殷)나라에서는 하늘의 옥황상제에게 제사했으며, 주(周)나라 때에도 하늘(天)에 제사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권선징악(勸善懲惡) 사상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전광호/우제태 공역; 고대한자 속에 감추어진 창세기 이야기, pp 15-31, 도서출판 예향, 인천, 1996, 원저는 Ethel R. Nelson & E. Broadberry; Genesis and the Mystery Confusius Couldn't Solve, Concordia Publishing House, St. Louis, 1994].

기원전 10세기부터는 음양의 조화로 만물의 근본물질들(水火木金土)이 생성되었다는 음양오행사상(陰陽五行思想)이 나타나 유교, 도교와 더불어 중국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였다. 그러다가, 주나라 때에 북방 유목민의 침입이 잦아지면서 이에 위험을 느낀 귀족들이 군대를 양성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황제는 상대적으로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하면서 전통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일곱 국가들(진, 초, 연, 제, 한, 위, 조)이 할거하는 춘추전국시대(722-221 BC)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러한 국가간의 경쟁적 상황에서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출현하여 현세적인 학문을 꽃 피우게 하였다.

노자(老子 604 BC-?)와 장자(壯者 365-290 BC)는 자연을 중시했으나,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이해하고 인간이 자연으로 돌아가야 행복하다는 신비주의적이고도 회의론적인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道)를 설파하였다. 노자의 사상이 집약된 도덕경(道德經)은 우주의 근본인 도(道)에서 기(氣)가 나오고, 기는 음기와 양기로 나뉘며, 이들의 조화로 나온 화합물에서 만물이 유래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존재는 비존재로부터 나온다고도 하였다. 그의 가르침은 도교(道敎 Taoism)의 형태로 유교와 더불어 중국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였다. 공자(551-479 BC)와 맹자(371-289 BC)의 가르침을 유교(儒敎 Confucianism)라 하며, 이들의 사상은 사서(四書; 논어, 대학, 중용, 맹자)와 오경(五經; 시경, 서경, 춘추, 역경, 예기)에 집약되어 있다. 이들은 인간이 공동선(共同善)을 이루려면 다섯 덕목(仁, 義, 禮, 智, 信)을 갖추어야 한다고 하였다. 공자는 제자인 계로(季路)가 죽음에 대해 묻자 “삶에 대해서도 모르는 데 어찌 죽음을 알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이 밖에도, 묵자(博愛主義), 한비자(法治主義), 순자(性惡說), 맹자(性善說) 등이 나타나 다양한 통치이념을 제시하였다. 이처럼, 중국의 제자백가들은 인간사이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반면, 자연과 우주의 기원이나 현상에 대해서는 비교적 무관심한 편이었다. [윤이흠역; ibid, pp 865-1011]

그 후,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 뒤이어 일어난 한(漢)나라가 도교를 국교화 함으로써 중국의 유일신 사상은 급속히 다신론(多神論 polytheism)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후, 송(宋)의 주자(朱子 1130-1200)는 만물이 음(陰)과 양(陽), 이(理)와 기(氣)의 두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 이원론적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을 집대성하여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의 성리학(性理學)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우리나라에서는 옛날부터 하늘을 숭배하는 하늘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다. 환단고기(桓檀古記)와 태백일사(太白逸史) 등에 의하면 환인(桓因 하늘님)이 아들 환웅(桓雄)에게 비(雨師=북), 바람(風伯=거울), 구름(雲師=검)의 삼부인(三符印)을 주어 세상으로 내려 보냈다 한다. 그는 곰녀(熊女)와 결혼하여 반신반인(半神半人)인 단군왕검(檀君王儉 2370 BC)을 낳았다는 것이다. 단군은 아사달에 나라를 세우고 배달겨레를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으로 다스렸다고 하였다. [임승국 번역/해석; 환단고기, pp 15-22, 정신세계사, 서울, 1986].

삼국초기에는 중국으로부터 불교가 전래되어 고려조까지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배불숭유책을 내세운 조선조 초기에는 유교와 주자학에 영향을 받은 성리학(性理學)이 이퇴계과 이율곡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조선조 말기에 최재우는 ‘사람이 곧 하늘’(人乃天)이라는 동학(東學, 天道敎)을 창도하였다.

일본은 다신사상이 지배하는 나라이다. 원시신도(原始神道)에 의하면, 고천원(高天原 Takamigahara)에서 제사를 받는 우두머리 신인 모노카미(Monokami 本神)에게 옷을 지어주며 제사를 드리는 천조대신(天照大神 Amateras Okami)이 게으름을 피우다가 모노카미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다른 신들의 청원으로 다시 살게 된 천조대신은 그 후 영신(靈神 Tamakami)이 되었으며, 그가 낳은 후손이 천황(天皇)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천황의 즉위식 때에는 모노카미에게 제사를 드리는 신상제(新嘗祭 ninamesai)를 거행한다. 이세신궁(伊勢神宮)이 대표적인 천황을 받드는 절간(神社)이다. [飛鳥昭雄, 三神タケル; 天照大神ノ謎, pp  42-46, 學習硏究社, 東京, 1998].

일본서기(日本書紀)에 기록된 이러한 내용을 근거로 그들은 일본을 신의 나라로 자처하면서 동아시아 제국에 대한 침략의 근거로 삼기도 하였다. 이러한 천손신화(天孫神話)는 일본인의 조상이 큐슈남부의 아소산(峨蘇山)에서 솟아 나왔다는 지신신화(地神神話)와 대립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흘러 들어간 것으로 일본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천황의 시조가 비류(沸流)라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어 우리의 관심을 끈다. [飛鳥昭雄外; ibid, pp 137-140]



출처 - 잃어버린 생명나무를 찾아서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450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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