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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기독교

미디어위원회
2017-05-30

하나님은 육체를 가지고 계시는가? 

창세기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Does God have body parts?)

Russell Grigg 


       최근에 나는 성경협회의 번역자 한 사람과 이야기 할 기회가 있었는데, 거기서 우연히 문자적 창세기에 대한 개념을 언급하게 되었다. 그는 즉시 내게 반문했다. “의인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의인화란 무엇인가? 그리고 사람들은 문자적 창세기에 대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나님과 사람의 특성(God and human characteristics)

의인화(anthropomorphism = <그리스어 anthropos = 사람> + <morphe = 형상>)란 하나님을 인간의 특성과 형상 혹은 인격을 가진 분으로 묘사하는 비유적 표현이다. 그것은 상징적인 표현으로써, 하나님의 속성, 능력, 및 활동을 우리가 실질적으로 알 수 있게 해 준다. 예를 들면 창세기에 다음과 같은 말들이 나온다 ;

• "하나님이 가라사대 (God speaking)" (창1:3) : 이것은 하나님이 성대를 가지셨다는 것을 의미할까?
• "하나님의 보시기에 (God seeing)" (창1:4) : 하나님이 눈동자와 망막이 있는 눈을 가지셨는가?
•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God walking)" (창3:8) : 하나님이 다리를 가지셨는가?
•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God making clothes for Adam and Eve)" (창3:21) : 하나님이 손을 가지셨는가?
•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God smelling a sweet savour from Noah's sacrifice)" (창8:21) : 하나님이 코와 후각기관(olfactory receptor)을 가지고 계신가?

만약에 우리가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러한 표현들도 역시 문자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면, 창세기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우리의 주장을 손상시키는 것이 아닌가?


저자의 의도 (The author's intention)

이들 질문에 대답하려면 먼저 저자의 의도를 고려해야만 한다. 창세기는 하나님의 성령의 지시 하에서 모세가 썼다. 모세의 목적은 이런 경우에 하나님이 하신 일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이지, 하나님에 대한 어떤 물리적인 묘사를 하려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위의 예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행동을 그에 상응하는 인간의 행동, 즉, 음성(voice), 시력(sight), 교제(companionship), 일하심(work), 만족(satisfaction)으로 묘사했다.

하나님이 창조를 말씀하심으로 그것들이 존재하게 되는 것과 관련하여 (예를 들면, 창조의 첫째 날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고 하신 것과, 또한 2일에서 6일까지 각각 그와 유사한 형태로 말씀하심), 하나님은 그 분의 뜻을 표현하심으로 창조의 사건이 일어나게 하셨다. 하나님은 창조가 우연한 임의의 과정의 결과 같은 것이 아니라, 그분의 주도권(initiative) 하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나타내는 명령의 방식으로 이것을 하기로 선택하셨다.

예술가의 걸작품? 미켈란젤로(Michelangelo)는 위의 그림에서처럼, 아담의 창조 시에 하나님의 모습을 족장의 모습으로서 묘사함으로서 극단적으로 성경적 의인화를 취했다. 이것은 1508-1512년에 로마의 바티칸에 있는 시스틴 성당(Sistine Chapel)의 천장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33개의 그림 작품 중에 하나이다.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이 이와 같은 방법으로 표현되어야만 하는 지에 대해 일반적으로 의문을 가지고 있다.    


반복되는 구절인 "그대로 되니라(and it was so)"는 우리들에게 각각의 창조 명령이 즉각적으로 성취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한, 관련된 날이 끝나기 전에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라는 하나님의 객관적인 평가가 있었다. 이것은 분명히 긴 시대 및 점진적인 창조론(long-age/progressive creation theories), 그리고 유신론적 진화론(theistic evolution theories)을 반박한다. 그것은 또한 명백히, "그리고 그것이 좋았더라" 라고 단순하게 언급하는 기록보다 더 어조가 강하다. 덧붙여진 "하나님의 보시기에" 라는 말은 신뢰성 있는 평결을 내릴 수 있는, 자격 있는 권위자에 의한 조심스런 평가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행동을 이런 방식으로 묘사하는 데 있어서 모세의 의도는 분명하다.

창세기 2장과 3장에서는 하나님이 아담과 대화를 나누고 그 다음에 하와와 대화하시는 내용이 나온다. 하나님은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다가, 아담과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시고, 그 다음에는 아담과 하와와 함께 담화하신다. 이 모든 것에 대해 우리는 뭐라고 해야 할까? 어떻게 인간이, 그것도 그들이 죄를 저지른 이후에 하나님을 볼 수 있을까? 죄를 짓지 않은 상태에서라도 마찬가지이다.


신의 현현 (Theophanies, 顯現)

하나님은 그분이 원하시기만 하면 그분 자신을 어느 장소에서든, 완전하신 형태를 감하셔서 명백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내 보이실 수 있다. 그러한 일시적인 방문을 신의 현현(theophany = <그리스어 theos = 신> + <phaino = 빛나다>)이라고 한다. 이것이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일이다.

구약의 다른 경우에 이런 식으로 나타난 사람을 종종 ‘여호와의 천사(the angel of the LORD)’라고 부른다. 때로는 이 분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2격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로 언급하기도 한다. 실제로, 그러한 현시는 성육신 때에 하나님의 아들이 완전한 육신의 모습으로 오실 것에 대한 예표였다.


역사적으로 사실이며 정확했다 (Historically true and accurate)

그래서 이것이 창세기의 문자성(literalness of Genesis)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들과 상세한 내용들에 대한 기록을 주셨다. 기록된 사건은 우화 또는 신학적인 시가 아니며, 또한 수세기가 지난 다음에 작성한 캠프파이어 이야기도 아니고, 역사적으로 사실이며 정확한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모든 신약의 저자들이 항상 그것들을 그렇게 받아들인다.

모세의 목적은 이들 역사적인 사건과 상세한 내용들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행함에 있어서, 그는 필요한 경우에 하나님에 관하여 비유적 표현을 사용하여 - 마치 그분이 사람인 것처럼 - 그가 전달하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한다.

흥미롭게도, 교회 지도자들은 일찍이 AD 4세기에 이 문제를 다루었었는데, 그러한 기록들은 "하나님께 어울리는"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를 들면, 성 요한 크리소스톰 (St John Chrysostom, c. 347-407)은 이렇게 말한다 : “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And the Lord God planted a garden eastward in Eden)’ 라는 말씀을 들을 때, ‘창설하시고(planted)’ 라는 단어를 하나님께 어울리게 이해하라. 즉, 그분은 명령만 했을 뿐인데, 그 이후에 나오는 단어들을 보고, 성경에서 지정한 바로 그 장소에 정확하게 동산이 만들어졌다고 믿어야 한다.”

즉, 창조된 것들에 대해, 그와 거의 동시대 사람이었던 성 바질 대제(329-379)가 말한 것처럼 평범한 의미를 취하라 : “정말로, 성경에서 상식을 수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물이 물이 아니라, 식물 안에서 또는 물고기 안에서 보게 되는 다른 성질로 여긴다. 참으로 엉뚱한 소망이다. 그리고 파충류와 야생동물의 성질을 자기들의 풍유에 알맞게 바꿔버린다. 마치 잠 속에서의 환상이 그들의 인생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으로 설명하는 꿈 해몽가와 같다. 나에게는 풀은 풀이다. 나는 나무, 물고기, 야생동물, 가축 등 모두를 문자적 의미로 받아들인다.“

역사를 통하여, 인류는 사람이나 동물과 같은 모습으로 잘못된 신들을 묘사하여 왔다 (이와 같은 제우스의 신상처럼).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영(spirit)이시고, 형체를 가지시지 않은 진정한 창조주 하나님과 대조된다.


창세기에서 모세가 사용한 의인화는 저자가 분명히 의도하는 것으로, 즉, 솔직한 역사로 받아들이는 데에 전혀 장애가 되지 않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교회가 대부분의 교회 역사를 통하여 그런 입장을 취한 이유이다. 반면에,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오랜 연대 ‘과학’과 타협하고 있는 것이다.



References and notes

1. Concerning the authorship of Genesis, see Grigg, R., Did Moses really write Genesis? Creation20(4):43–46, 1998.
2. E.g. Genesis 22:11; Judges 6:11; 2 Kings 1:3; Isaiah 37:36, etc.
3. See Grigg, R., Should Genesis be taken literally? Creation 16(1):38–41, 1993.
4. John Chrysostom, Homilies in Genesis 13(3):106, quoted from Rose, S., Genesis, Creation and Early Man, St. Herman of Alaska Brotherhood, pp. 87–88, 2000.
5. Basil the Great, Hexaëmeron (= ‘Six Days’) Homily IX, <www.newadvent.org/fathers/32019.htm>.
6. Sarfati, J., Refuting Compromise, ch. 3, Master Books, Arkansas, USA, 2004.

 



부록 : 하나님은 영이시다 (God is spirit)


신약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은 영이시니’(요 4:24)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이 물질이 아니시며 육체를 갖고 있지 않으시므로, 그분은 우리의 육체적 감각으로 보거나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인격적이시며, 초월적인 생명과 존재를 가지고 계신다. 이것은 하나님이 물질적인 우주의 한계와 무관하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들은 인간 이성의 이해력을 넘어선 것이므로, 그 분에 대해 인간이 뭐라고 묘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그러한 초월적인 신성을 묘사할 단어가 없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의 특성에 관련된 단어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의인화를 사용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실감하게 해 주며, 그분의 다양한 능력과 관심과 활동들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용은 정당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경에서 그분 자신에 관하여 이러한 방식으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즉, 그분이 그것을 사용하시며 거기에 대해 권위를 부여하신다. 또한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image)과 모양(likeness)대로 사람을 만드셨으므로(창 1:26-27),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약간의 유사성이 있다. - 물론 커다란 차이점도 있기는 하다.

위의 사항들로 볼 때, 기독교인들이 창세기에 관하여 이야기 할 때, (어떠한 해명 없이) ‘문자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보다는, ‘평범한’ 또는 ‘문법적-역사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낫다.


번역 - 이종헌

주소 - https://creation.com/does-god-have-body-parts

출처 - Creation 27(2):42–44, March 2005.

유종호
2017-05-30

인간이란 무엇인가? 5 : 다른 행성의 생명체


26. 다른 행성의 생명체

진화론자들은 점점 더 망상에 사로잡혀서, 다른 외계 행성들에도 생명체가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주에는 수백억의 은하들이 있고 각 은하에는 수백억의 항성들이 있기 때문에, 수많은 행성들도 존재할 것이다. 진화론자들에게 있어 지구 이외의 장소에서 지능이 발달된 생명체의 존재 가능성은 수학적 확률일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는 필연적 확실성이다. 만약 지구가 수많은 행성들 가운데 하나의 행성이며, 태양계 안에 있는 달과 화성에는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태양계 이외의 다른 별들의 행성에서는 생명체가 진화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다른 행성들에 생명체가 존재할 것이라는 진화론자들의 주장은 두 가지의 빗나간 가정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첫째는 생명체가 지구상에서 진화했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우주 어디에선가에 또 다른 생명체가 진화할 수 있었을 것으로 가정하는 것이다. 둘째로 생명체의 진화가 입증되지 못했고, 무기물에서 생명체가 생겨날 수 없다는 과학자들의 주장들로 인해, 지구 밖에서 진화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하고 외계 생명체를 탐사하고 있는 것이다.

미네소타 맨카토의 1987년 4월 4일자『자유언론』에서는 캘리포니아 주 파사데나에서 1,200명이 회합했음을 보도했다. 코넬대학의 칼 세이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각각 수천억의 별들을 포함하는 1천억의 은하계로 구성된 우주에서 우리의 태양만이 사람이 살 수 있는 행성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별이라는 생각은 어처구니없는 것이다. 우리가 우주에서 유일한 생명체라고 상상한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떨어졌는가?”

이 말은 그럴 듯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다음과 같이 입증된바 없는 과거의 전제와 결과에 근거를 두고 있다.

“지구상에 생명체를 발생시킨 화학적 진화 작용이 우주 전역에 걸쳐서도 존재할 것이기 때문에, 지능이 있는 생명체는 지구를 벗어난 그 어느 곳에서도 100%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이 인용문은 산타 그루즈(Santa Cruz)의 캘리포니아의 대학 자연과학학장인 프랭크 드래크가 한 말이다. NASA에서 은퇴한 알 힙스(Al Hibbs)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지금부터 내가 죽을 때까지 지능이 있는 생명체가 지구 밖 어디에선가 존재한다는 증거물을 발견할 것이라는 쪽에 100 달러의 돈을 걸겠소.”

만약 내가 그 정도로 확신을 갖는 입장이라면 훨씬 많은 돈을 걸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이러한 진화론자들은 ‘외계문명의 증거’를 찾기 위해 이미 소비한 수십억 달러 이외에도, 우리로부터 수백만 달러의 기부금을 요청하고 있다. 그들은 지구 밖에 생명체의 연구를 위해 수세대에 걸쳐 일체가 완비된 이성(異性)의 우주선을 보내려고 한다.

지구 밖 우주 어디엔가 생명체가 있다는 신념과 믿음은 무생물이 화학적 작용으로 우연히 생명체가 등장했다는 잘못된 가정에 근거한다. 미네소타의 1979년 9월 10일의『자유언론』은 워싱턴의 AP통신을 인용했다.

“과학자들은 남극에서 발견된 2개의 운석에서 지구 이외에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뒷받침해 줄 만한 화학적인 생명의 원조를 발견했다. 그들은 말하기를, 이러한 발견을 통해 지구상의 생명체가 수십억 년 전에 원시 바다에서 화학적 삼투작용을 거쳐 등장했음을 알 수 있다.”

많은 진화론자들에게 화학적 작용에 의해 지구상에 생명체가 등장했다는 말은 단지 이론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자명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명한 가정(Postulate)이란 의미는 증거 없이도 논의의 토대로서 진실이고, 사실이고, 필연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일주일 후인 1979년 9월 17일의 『자유언론』은 미국의 화학학회에 제출된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운석의 발견은 지구의 경우 자명하게 여겨지는 화학진화 과정이 어디에서나 발생할 수 있다는 이론에 과학적인 신빙성을 더해 주고 있다.”

그들이 얼마나 성급하게 잘못된 결론을 내리는지 주목해보자. 그들이 주장하는 잘못된 “지구상에서 자명하게 여겨지는 화학진화 과정”에서, 그들은 금방 “화학진화 과정”이 어디에서나 생명체를 탄생시킬 수 있다는 빗나간 결론으로 넘어가고 있다. 그러나 생명의 시초를 증명하기 위해 수십억 달러를 소비하며 우주로 뛰쳐나가기 전에, 먼저 과연 그런 화학적 작용이 생명체를 만들 수 있는지를 증명해야 할 것이다. 살아있는 물질에서 발견되는 분자와 비슷한 운석과 우주의 분자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이 우주에서도 생명체의 진화가 발생했을 것이라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그런 분자는 결코 살지 못한다. 달과 화성에도 분자와 화학물질들이 있다. 그러나 그곳 어디에도 생명체는 없다.

외계에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가 외계인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일이 현명한 일인가? 만약 그들이 우리보다 훨씬 우월한 존재라면 그들은 지구에서 직면하는 적들보다도 우리에게 훨씬 위험한 존재가 될 것이다. 어떤 현명한 사람은 “만약 외계에서 전화가 걸려온다면 인류를 위하여 전화를 받지 마라. 오히려 그들의 관심을 끌지 말고 피하라. 가능한 한 주의를 기울이지 말라.”고 말했다.

만약 우리가 너무 참견을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이전에 인용했던 1979년 9월 17일자 『자유언론』은 외계인과 관련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외계 생명체에 대한 정당한 근거를 세우기 위해 사용될 수 있는 물질적 증거는 8월 27일에 경찰관인 발 존슨(Val Johnson)이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두 번째 종류의 “외계인과의 만남”에서 나타난다. 존슨은 스스로 표현한 “미확인 존재”에 의해 공격을 받았다. 그것이 그의 차로 뛰어들어 앞 유리와 헤드라이트가 깨졌다. 후드에도 조그만 구멍이 생겼고, 차 위의 빨간 등이 깨졌으며, 두 개의 안테나가 거의 90도로 꺾였다. 존슨은 그 물체의 밝은 빛 때문에 눈에 화상을 입어서 의사에게 치료를 받았다.... 그러한 근거에 대한 어떤 설명도 주어지지 않았다. 존슨과 그의 순찰차에 특별한 일이 발생했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차를 내리치고 경찰의 눈을 다치게 한 물체가 외계에서 온 우주인에 의해 조정된 우주선이라는 가설은 그 어떤 다른 설명보다 좋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이러한 일이 사실이라면, 그런 외계인과 그들의 문명(?)을 피하는 것이 나을 것이며, 그들의 전화도 받지 않고, 그들의 존재를 찾느라고 수십억 달러를 소비하지 않는 것이 훨씬 현명할 것이다.

한편 그것과 비슷한 뉴스 보도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비록 인류가 크나큰 과학의 진보를 했다하더라도 우리는 아직도 감기조차 제대로 치료할 수 없다. 우리는 외계의 친구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지도 모른다. 확실히 인간을 달에 거주시킬 정도의 문명이라면 감기 정도는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빗나간 전제에서 성급한 결론을 내리고 있는 이러한 진화론자들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몽상가들인가?

이와는 반대로 생명체가 외계에서 진화한다고는 믿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우주의 또 다른 장소에 어떤 생명체를 두어 지능이 있는 존재를 창조했는지 어떤지 궁금증을 갖은 사람들도 있다. 성경에는 다른 행성 어디에서도 지적인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있다. 바로 정반대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창세기 1장을 보면 우리는 지구가 제일 먼저 만들어지고, 3일후에 태양, 달과 별들을 만들었음을 알게 된다. 창세기 1장 16절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두 가지의 빛을 만들어, 하나는 낮을, 하나는 밤을 지배하도록 했다. 그는 또한 별들도 만들었다.” 별들에는 행성을 포함된다. 이러한 점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지구와 인간을 위해 하늘의 전체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명백하다. 창세기 1장 14절에는 “그러한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고 되어있다. 성경에 주어진 모든 지시를 토대로 해볼 때 다른 행성에는 인간과 같은 살아있는 존재는 없다. 시편 115장 16절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즉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도 땅은 인간의 아들에게 주셨도다.”

더욱이 베드로후서 3장 10절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하늘(별들과 행성들)은 지구와 함께 사라질 것이다. 마태복음 24장 29절에는 세상의 종말에 대해 말하고 있다.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이제 별들 가까이에 있는 다른 행성들 위에 다른 생물체나 인간이 존재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 그들과 그들의 행성까지 파멸케 하는 일이 정당한 일일까? 우주 전체는 단지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파멸될 것이다.

반면에 우리의 전능하신 하나님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주 전체를 책임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독교인들이 알고 있다는 점은 참으로 위안이 될 만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주의 침입과 외계인의 출현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육체와 영혼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장중에 시간과 공간도 존재하는 것이다.



출처 - 앨버트 시퍼트의 [진화론의 비과학성 : 그 32가지 이유들] 번역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917

참고 :

Gary Bates
2017-05-30

외계인에 의한 디자인? 

: DNA 구조의 발견자들은 기독교를 공격하고 있다. 

(Designed by aliens?)


      프란시스 크릭(Francis Crick)과 제임스 왓슨(James Watson)은 그들의 DNA 이중 나선 구조의 발견에 대한 50주년 기념행사를 창조주에 대한 믿음을 공격하는 근거로서 사용하였다.[1] 최근 이 노벨상 수상 팀에 관한 영국 뉴스 기사는 ”과학적인 발견들이 불쾌한 종교적 감수성들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왓슨과 크릭은 둘 다 무신론자들임”을 지적하였다.[1]

이러한 논평은 과학이 어느 정도 기독교를 반증하였다는 오래된 허위보도를 재강조하는 시도인 것이다. 창조론자들이 오랫동안 지적해왔던 것처럼, 그 문제는 과학적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이들 사실들에 대한 해석(interpretation)인 것이다. 이것은 크릭의 믿음에 의해서 명백하게 드러났다. 오래 전에 그가 DNA 구조를 발견하였을 때부터 그는 강한 무신론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뉴스 기사도[1] 크릭의 종교에 대한 혐오는 그의 발견을 이끌어내었던 주요한 동기 중에 하나라고 보도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DNA 개척자의 종교에 대한 반감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1961년에 크릭은 케임브리지의 처칠 대학(Churchill College)의 일원으로서, 대학에 예배당이 지어지도록 제안되었을 때 사임하였다."
 

DNA : 설계(design)에 대한 실제적인 증거

왓슨과 크릭이 발견했던 것은 지적인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반증하였는가? DNA 분자는 전 우주에서 가장 효율적인 정보 저장 시스템이라고 자주 기술되고 있다. DNA에 기록되어 배열되어 있는 엄청난 복잡성과 암호들과 그 정확성은 가히 충격적이다. 그것들은 고도의 지성과, 정보를 집적할 수 있는 설계를 강력히 증거하고 있는 것이었다. 복잡한 DNA 암호는 최초의 소위 ‘단순한 세포(simple cell)’라고 추정하는 것에서도 필요하다. 창조 지(Creation magazine)도 DNA 이중 나선 구조의 발견 제 50주년 기념으로 DNA의 경이로움에 관한 상세한 기사를 또한 출판했었다.[2]

심지어 크릭 자신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정직한 사람이라면, 지금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지식들을 가지고 말할 때, 생명체의 기원은 거의 하나의 기적(a miracle)으로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발견하였다는 것으로만 만족해하고 있는 상태이다.”[3]

크릭은 어떤 가상적인 지구 조건 하에서도 생명체가 무생물로부터 우연히 저절로 만들어질 수는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그는 창조주에 대한 개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무신론적 신념에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서 이것을 확인하였다. ”나 자신과 같은 사람들은 종교적 개념 없이도 완전히 잘 살아간다.”[1]


크릭의 무신론적 신념은 불합리한 의사과학을 이끌어 내었다.

불행하게도 크릭은 이 점에 대하여 전혀 솔직하지 않았다. 그는 종교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무신론(atheism)은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와 같은 심오한 질문들에 대답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종교(a religion)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입증되어질 수 없기 때문에, 무신론은 근본적으로 하나의 믿음 체계이다! 그래서 그는 그의 종교적인 관점에서 DNA의 기원과 지구상의 생물체들에 대한 기원을 설명해야만 했다.

그는 이들의 기원을 ‘외계생명체 유입설(panspermia)’이라고 불리는 하나의 이론으로 설명하였다. 이 단어는 그리스어인 pas/pan (all) sperma (seed) 으로부터 유래한 단어로서, 생명체의 씨앗은 우주를 통하여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크릭은 이 개념을 ‘지시된 외계생명체 유입설(directed panspermia)’로 상세히 논하였다. 무기 화학물질들로부터 생명체로의 진화 사이에 있는 거대한 장벽을 극복하기 위해서 크릭은 ’Life Itself' 라는 한 권의 책에서, 원시 생명체들의 일부 형태들은 수십억 년 전에 ‘더 진화된(발달된) 외계인'들에 의해서 우주선을 통해 지구로 보내졌다고 주장하였다.[4]

비록 그가 하나님 없이 DNA의 지적 근원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였지만, 크릭은 단지 그 문제를 우주 밖으로 밀어내는 데에 성공했을 뿐이다. 물론 그것은 실험될 수 없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은 외계인들도 그들보다 더 지적인 근원에 의해서 창조되지 않았다면, 결국 외계에서는 어떻게 무기물로부터 외계생물체가 진화될 수 있었는지에 관한 질문으로 되돌아간다.  

더군다나 이 인자한 외계인들이 진화의 결과가 무엇과 같을지 어떻게 알았다는 것인가? 진화는 오랜 시간 동안 우연히 일어나는 지시되지 않은 과정 아닌가? 크릭이 극복할 수 없었던 또 다른 문제점은, 진화는 지난 35억 년 동안 발생되었다고 추정하는 것이었다. 어떠한 지적인 외계종족이 수십억 년 후에 일어날 결과를 기대하면서 그러한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는 것인가?

크릭은 후에 그 개념의 허구와 엄청난 문제점들을 인정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생명체의 기원에 대한 논문을 쓸 때마다, 다시는 이러한 논문을 쓰지 않겠다고 매번 맹세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너무도 적은 사실들을 가지고 너무도 많은 추론들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3]

이러한 모든 사색들 후에, 크릭과 왓슨은 지적설계의 증거를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과 조화시켰는가? 절대적으로 아니다! 왓슨은 아직도 종교적인 설명은 ”과거로부터의 신화”라는 생각을 유지하고 있다.[1]

생명체가 보여주고 있는 극도로 미세한 구조 속에 엄청난 복잡성이 있다는 것은 무신론적  진화 이론을 강력하게 거부하고 있다. 진화론자들은 최초 세포의 기원을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고등한 또는 더 진화된 생물체들을 만드는 데 필요한 새로운 정보(new information)와 증가되는 복잡성(increasing complexity)이라는 더 심각한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비기독교인 분자생물학자인 마이클 덴톤(Michael Denton)까지도, 그의 베스트셀러 책인 ‘진화론 위기의 이론(Evolution a Theory in Crisis)’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계적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외계생명체 유입설이라는 개념으로 심각하게 희롱당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생명의 기원 문제가 얼마나 처리하기 어려운 것인지를 분명하게 예증하고 있는 것이다.”[3]       

어디를 보아도, 생명체들은 설계의 흔적과 창조주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세계관으로 눈과 귀가 멀어, 명백하고 분별력 있는 이러한 설명들에 대해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며 일부러 외면해 버리는 것이다.



References

1. Do our genes reveal the hand of God? <www.telegraph.co.uk/connected/main.jhtml?xml=/connected/2003/03/19/ecfgod19.xml>, 15 July 2003.
2. Sarfati, J., DNA: Marvellous messages or mostly mess? Creation 25(2):26-31, 2003.
3. Panspermia, <www.creationdefense.org/68.htm>, 9 March 2003 (emphasis ours).
4. Panspermia, <www.pathlights.com/ce_encyclopedia/20hist11.htm#Rocket Sperm>, 30 May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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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슨과 크릭의 큰 실수 : 자동차가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알아낸 것은 만든 사람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가?


왓슨과 크릭에 의해서 지적 창조주 개념이 반증되었다는 생각하는 가장 주요한 논지는 무엇인가? 그들은 유전 정보를 복사하는 데에 화학법칙(laws of chemistry)에 의해 기능하고 있는 한 메커니즘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이 창조주가 필요하지 않다는 증거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살아있는 생물체들은 일상적인 물리와 화학 이상의 ‘생명력(vital force)’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활력론(vitalism)이라는 잘못된 믿음의 허수아비를 쓰러트리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 시각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이 6일 동안 창조를 마치셨으며, 이제는 창조하신 만물을 붙들고 계시다고 기록하고 있다 (골 1:15-17, 히 1:3). 성경은 질서의 하나님이 그의 창조물들을 규칙적이고, 반복 가능한 방법으로 유지시키고 계시며, 이것은 자체가 현대 과학의 기초를 태동하게 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1] 과학적 법칙들은 단지 이러한 붙들고 계시는 활동에 대한 우리들의 묘사인 것이다. 무신론은 과학을 있게 만들었던 우주의 질서에 대해서 어떠한 논리적 기초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왓슨과 크릭의 반유신론적 주장들은 특별히 부적절하다. 이것은 우리가 자동차를 생각해볼 때 쉽게 알 수 있다. 자동차는 물리와 화학 법칙들에 의해서 작동되어진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자동차를 작동시키는 데에는 각 부분들에 대한 세밀한 지식 없이도 가능하다. 그러나 물리와 화학 법칙들이 최초에 어떻게 자동차가 만들어졌는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한 지적설계자가 올바른 방법으로 자동차 부속품들을 조직화하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 부속품들이 이들 법칙들에 의해서 작동되는 것이다.[2] 


Notes

1. See Wieland, C. and Sarfati, J., The Christian origin of modern science, Creation 25(1):48, 2003.
2. See also Wieland, C., A tale of two fleas, Creation 20(3):45, 1998..



*참조 : 1. 외계생명체 유입설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86

2. 2 마리의 벼룩 이야기 : 자동차는 저절로 생겨났는가, 누군가가 만들었는가?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891

3. 진화는 왜 진행될 수 없는가? 자동차 : 진화를 거부하는 증거?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451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25/i4/aliens.asp

출처 - Creation 25(4):54-55, September 2003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860

참고 : 5003|4997|4993|4612|4311|2860|3012

미디어위원회
2017-05-30

SETI는 “진화론을 가르치라”고 주장한다. 

(SETI Outreach Director : “Teach Evolution")

David F. Coppedge


      진화론은 생물학, 지질학, 천문학의 근본(foundation)이라고, 외계 지적생명체 탐사 연구소(SETI Institute, search for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의 교육과 공교육 책임자인 에드나 드보어(Edna Devore)는 주장한다. Space.Com(2005. 2. 10)에 게재한 글에서, 그녀는 진화론이 논쟁의 여지가 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비행기 창문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것은 명백하다는 것이다. "진화론은 현대 생물학, 지질학과 천문학의 근본이 되는 이론이다. 자연 세계에 대한 근본이 되는 과학적 이해를 무시하거나 버리는 것은, 우리 아이들에게 미래를 잘 준비할 수 없도록 할 것이다.”고 그녀는 결론짓는다. 미국이 "어떤 어린이도 뒤에 남겨지지 않는(leave no child behind)” 교육정책을 펴고 있는 것처럼, 진화론이 어린이들의 과학 수업에서 뒤로 남겨져서는 안 되는 시기라는 것이다.



그녀는 엉뚱한 나무 위로 소리를 지르고 있다. 어떠한 알려진 비판 단체도 진화론을 무시하거나, 폐기하라고 주장하고 있지 않다. '자연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과학적 이해”로 분류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가정(assumptions)들에 의해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그리고 논쟁의 상대편인 지적설계 측도 진화론이 가르쳐지기를 원한다. 진화론 없이 20 세기의 역사나 과학을 이해할 수 없다. 찰스 다윈의 작은 세계 일주는 한 편의 멋있는 이야기를 만들었고, 헤켈(Haeckel)의 위조한 그림은 십대들을 웃음으로 몰아넣은 멋있는 만화를 만들게 하였다. 그러나 좋은 것, 나쁜 것, 추한 것 모두를 포함해서 진화론은 가르쳐져야 한다. 다윈 당원들이 당신이 몰랐으면 하는 부분들도 가르쳐져야 한다. 이곳 웹 사이트에서 우리는 그것을 도울 것이다. 진화론에 대한 여덟 부분의 포괄적인 교과과정의 개요를 제시해 보았다 :


1. 과학의 규칙들 : 과학은 자연적(naturalistic)이어야만 하는지, 위대한 과학자들은 종교적으로 동기를 부여받았고, 창조론과 설계를 믿었다 (뉴턴, 케플러, 맥스웰, 루벤후크, 보일, 페러데이 등). 찰스 다윈이 어떻게 과학의 규칙들을 진리를 찾는 것에서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드는 것으로 바꾸어 버렸는지, 이 세계에 대한 진실된 설명이라는 것이 앞뒤가 맞지 않은 부적절한 추론에 기초하고 있으며, "오래된 논쟁”을 갖는 이유는 무엇인지가 가르쳐져야 한다. 진화론은 사람들을 나쁜 길로 이끌었으며, 과학을 제한하고, 역사와 실증주의에 대한 착오였으며, 추론과 위조로 점철되어 있었다. 진화론은 오류투성이며, 그랬을 것이다 라는 이야기(just-so story) 만들기 기술이며, 끝이 없는 미래의 발견들을 간청하고 있고, 오컴의 면도날(Occam’s razor)을 사용한 구성(plot)을 첨가하고 있다. 진화론은 관측되는 과학, 반복되는 과학, 그리고 법의학적 과학과 차이가 있다. 그리고 진화론에 대한 어떠한 비평도 무조건 종교적이 되어버린다. 학생들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의문점들에 대한 증거들을 검사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지, 그들은 단지 "받아들여진(accepted)” 이론 만을 배워야만 하는지, 과학은 여론에 따르는 것인지, 올바른 진실을 추구하는 것인지 등이 논의되어야 한다.


2. 진화론의 상징물들 : 진화론의 가장 유명한 ‘증거(proofs)들’이라는 것들에 대한 비판적인 조사가 필요하다. 여기에는 나중에 번복된 역사적 주장들(가령 발생반복설, 말의 진화, 흔적기관 등)들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리고 인공선택(artificial selection, 지시된 선택)과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 지시되지 않은 선택)과의 차이도 포함되어야 하고, 진화에 의해서 설명되지 않는 현상들의 예들도 제시되어야 한다. 이전의 수업 방식과는 다르게, 학생들은 다윈주의적 설명들에 대한 문제점들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어야하고, 같은 증거들에 대한 대안적인 설명도 제시되어야 한다.

3. 사기들, 속임수들, 오류들 : 허튼소리인지를 탐지하고, 순환논법, 빙둘러 말하기, 의인법, 다른 논리적 비약들을 조심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필트다운인(Piltdown Man), 헤켈의 배아(Haeckel’s embryos), 네브라스카인(Nebraska Man), 자바인(Java Man), 북경인(Peking Man), 가지나방(peppered moths), 마가렛 메드의 사모아(Margaret Mead’s Samoa), 밀러의 실험(Miller experiment), 화성에서 온 운석(Martian meteorite), 시조새(Archaeoraptor), 다른 고전적인 진화론적 실수 등에서 배운 교훈들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심지어 전문가들도 바보가 될 수 있다는 것과, 자신들의 편견에 의해서 잘못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주제들이 가르쳐져야 한다.  


4. 비판적인 사고 : 정보 이론과 설계 흔적들에 대한 발견들이 가르쳐져야 한다. 생물학적 설계는 정말이며 분명한지, 지시되지 않은 우연한 과정들이 고도로 복잡하고 기능적이며 자기 복제(self-replicating)를 하는 시스템을 만들 수 있는지, 증명된 메커니즘이 전혀 없는 이론이 정말로 하나의 이론이 될 수 있는지,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론이 어떠한 것도 설명할 수 있는지, 진화론은 스스로 반박(self-refuting)되는 것인지, 즉, 절대적인 진리를 부정하는 이론이 절대적 진리라고 주장될 수 있는지, 한 결론을 가정하고 이것과 맞지 않는 데이터들을 폐기하거나 강제하는 것이 합법적인지, 진화론은 하나의 관측(observation)인지, 아니면 하나의 교리(dogma)인지 등이 가르쳐져야 한다 (이전의 교과 과정과 다르게, 자연선택이 새로운 정보(new information)와 복잡하고, 필수 불가결하고, 상호작용하고 있는 부분들을 생성할 수 없다는 선도적 과학자들의 주장도 숨겨져서는 안 된다.)


5. 화석 기록 : 만약 모든 동물과 식물들이 단세포의 공통조상을 가졌다면, 그 기록은 화석으로 보존되어 있어야만 한다. 이 부분은 증거들에 대한 비교리적이며 열린 마음으로의 평가가 필요하다. 법의학(과학 수사)적 기술이 고려되어야 한다. 편견들은 환경적 상황들에 기초하여 잘못된 결론을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만약 전제된 추론이 있다면, 어떠한 일련의 대상들이 어떻게 하나의 계통적 조상 순서대로 나열될 수 있는지 볼 수 있어야만 하고, 그리고 연대측정 방법에는 어떤 진화론적 가정(assumptions)들과 동일과정설적 가정들이 들어있는지가 가르쳐져야 한다.


6. 생명체의 기원 : 자연발생설(spontaneous generation)에 대한 초기의 믿음들과 그들이 어떻게 반증되었는지, 루벤후크, 스팔란자니, 파스퇴르, 그리고 생물속생설(Biogenesis)의 법칙들과, 다윈이 제안한 ‘따뜻한 작은 연못(warm little pond)’, 오파린, 밀러, 세이건, 외계 지적생명체 탐사(SETI), 현대 우주생물학 등이 가르쳐져야 한다. 왜 케뇬(Dean Kenyon)은 화학진화(chemical evolution)를 포기했는지, 왜 프란시스 크릭은 외계생명체 유입설(panspermia)을 생각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프레드 호일와 위스타(Wistar) 학회는 진화론에 대해서 수학적 도전을 하게 되었는지, 하나의 생명체가 존재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세 가지 사항들(저장된 정보, 물질대사 시스템, 수많은 구성물질들), 살아있는 세포가 그들의 필요를 완수하기 위해 분자 기계들을 사용하는 방법들, 화학과 생물학 사이에 거대한 간격, 선도하는 'RNA World” 시나리오가 가지는 문제점들, 자연선택이 자동적이며 정확한 복제(replication) 없이는 속수무책인 이유, 그러한 복제에 필요한 엄청난 정보의 수준, 나사선성(chirality)의 문제, 열역학적 문제, 교차반응들, 방사선, 희석 문제, 상호 관련성, 구성물질들의 반감기, 복잡성에 관한 문제 등과, 진화론자들의 설명은 하나로 점점 모아지는지, 화학진화는 왜곡되었는지, 비진화론적 설명을 들어봐야 하는지 등이 가르쳐져야 한다.


7. 진화론적 사고의 역사 : 그리스 시대 이전까지도 거슬러 올라가는 진화론적 추론들, 고대부터 현재까지 설계논쟁의 역사, 찰스 다윈의 유일한 학위는 신학이었는데 그의 믿음이 라이엘의 잘못된 증거들에 의해서 어떻게 무너져 갔는지, 다윈이 다른 사람의 것을 표절했는지, 멘델과 다윈, 신다윈주의와의 휴전을 이끌었던 논쟁들, 다윈의 불독과 사총사들, 엉터리 증거들로 그럴듯하게 꾸며졌던 진화론의 선전 전략이었던 스코프스 재판(Scopes Trial), 바람의 상속자(Inherit the Wind), 텔레비전 만화들, 찬란한 보편성, 진화론자들 사이에서의 투쟁들, 즉 점진론자 대 단속평형론자, 개인선택론자 대 그룹선택론자, 동소적 종분화론자 대 이소적 종분화론자, 성선택을 믿는 자와 거부하는 자, 서로의 발견들의 유효성을 거부하는 고인류학자들, 진화심리학과 진화사회학의 유효성에 관한 의심들, 진화론 종교(Michael Ruse), 토론을 회피하는 현대 다윈주의자(NCSE, ACLU)들의 전략 등이 가르쳐져야 한다.


8. 사상들과 그 결과들 : 다윈과 마르크스, 다윈과 히틀러, 다윈과 레닌, 스탈린, 모택동, 사회적 다윈니즘(Social Darwinism), 우생학(Eugenics), 빅사이언스(Big Science)의 부상과 비자연주의적 설명들에 대한 강제적 배제, 다윈주의와 낙태, 다윈주의와 종교, 다윈주의와 역사적인 해석, 다윈주의와 상대주의(relativism), 다윈주의적 의학, 다윈주의와 오락(영화 등), 다윈주의와 예술과 문학에서 절망(despair)의 유행(Tennyson, H.G. Wells 등), 다윈주의와 안락사, 인간복제와 다른 현대적 윤리 문제들에 대한 다윈주의의 영향, 다윈주의적 법률 철학(법도 진화한다.. 등), 형법에서 진화론의 영향, 다윈주의적 경제학, 정치학, 외교 정책, 그리고 교육 등이 가르쳐져야 한다. 토론으로 오늘날 다윈주의에 기초한 전체주의 정권들(북한, 쿠바, 중국), 젊은이들에 대한 다윈주의의 영향(성적문란, 자살, 우울증, 허무주의...), 왜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기난사 사건을 벌인 십대들이 Natural Selection 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었는지? 대안적인 설계는 무엇인지 등이 가르쳐져야 한다.


이러한 교육들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교사들은 이것들과 관련된 자료들을 무료로 얻을 수 있다. 위에 열거한 모든 자료들을 이곳에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알기 원하는 자료들을 검색하거나, 진화론에 대한 링크들을 계속 클릭하라). 이곳의 자료들로부터 배우게 된 누구나, 희석되고 삭제되고 여과된 학생들 교과서가 제공하고 있는 일방적인 교리보다 진화론에 대한 훨씬 우수한 교육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진화론을 가르치라! 진화론에 대한 더 많은 것들을, 아니 모든 것들을 가르치라. 공정하고 균형되게 가르치라. 무지는 축복이 아니다. 양쪽의 주장들에 대해서 같이 알려주어야 한다. 어떠한 어린이도, 어떠한 성인도, 누구도 (교육으로부터) 남겨져서는 (Left Behind) 안 된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crev.info/2005/02/seti_outreach_director_147teach_evolution148/

출처 - CEH, 2005. 2. 11.

미디어위원회
2017-05-30

외계 지적생명체 탐사에 자금이 퍼부어지고 있다. 

(SETI—coming in from the cold of space.

Fantasy fuels funding)

Gary Bates 


      최근의 뉴스로 인해 지구 밖 외계생명체에 관한 일들이 다시 한번 대중들의 관심으로 떠올랐다. SETI (the Search for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 외계 지적 생명체 탐사)는 여러 해 동안 전파망원경으로 우주를 탐사(scanning)하여, 우주로부터 오는 전파 신호(radio signals)를 감지해 내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들의 소망은 지구 밖의 지적 문명으로부터 확신할 수 있을만한 메시지를 받아내는 것이었다.

몇 해 전, 그러니까 미국과 소련의 무모한 우주경쟁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SETI는 ‘일시적인 유행(flavour of the month)'이 되었고, 미국 정부로부터 별들을 연구하는 데에 드는 막대한 연구 자금을 후원 받았었다. 그러나 ET는 지구로 전화하지 않았고, 그들의 프로젝트는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미국 의회는 전적으로 연구자금을 끊어 버렸다. SETI의 전임 회장이자 외계문명 탐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드레이크(Frank Drake) 박사는, 지난 10년이 외계문명 탐사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고 말하고 있다. ”SETI는 NASA에서 단지 네 개의 글자였다..... SETI는 연설이나 문서에서 언급되어지지 않았다.”1

그런데 최근 들어 SETI는 기대하지 않던 곳으로부터 지원금을 받았는데, 그 지원금을 준 곳이 그렇게도 SETI를 비판하던 NASA로부터 였다. NASA의 방침이 그렇게 근본적으로 바뀐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그들은 우주 탐험에 대한 정책은 바뀐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 NASA는 대중들의 상상력에 기름을 붓는 듯한 프로젝트들에 약속을 하곤 했다. 그리고 그런 것들에 많은 돈을 소비했다. 예를 들면, '아폴로 호의 달 탐사'와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몇 해 전에 우주왕복선 챌린저 호가 폭발하는 큰 재앙을 만남으로써 흥미가 감소되었다. 이로 인해 '우주 경쟁'에서 우위를 지키던 행복했던 시절로 결코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로 우주 탐사는 그 타당성과 목적성, 심지어 매우 고비용이라는 문제 등이 도전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에 NASA는 'Origin' 이라는 프로그램을 시작하였다. 그 프로그램의 목적은 ”우주를 탐사하고 외계 생명체를 찾아내는 것”이다.2 NASA는 자신들의 홈페이지에 이 프로그램의 목적은 ”우리는 어로부터 왔는가?”, 그리고 ”이 우주에서 우리는 혼자인가?"를 확실하게 결정하기 위해서라고 하였다”.2NASA의 당시 수장이었던 댄 골딘(Dan Goldin)은 연설문에서, 우주탐험에 대한 목적들 중 하나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의 네 번째 목표는 지구와 비슷한 행성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이 거주할 만한 곳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3  이것은 NASA의 초점이 바뀌었음을 쉽게 보여주는 것이다. 1996년 그들은 화성에 생명체가 있다는 흔적을 남극지방의 얼음덩이 속의 작은 암석 조각에서 발견했다고 선언했었다. (지금 이것은 여러 과학자들에 의해서 실체가 폭로 되었다).4

2004년 NASA는 이동탐사 로봇을 장착한 두 대의 화성탐사 우주선을 발사했다. 'Spirit'과 'Opportunity'로 이름 붙여진 탐사선들인데, 그것들은 화성에 물이 있는지를 탐사할 것이고, NASA는 그것들이 그 붉은 행성에 생명체가 한때 존재했었는지를 알아내길 희망하고 있다. NASA는 그들 자신을 어떻게 마케팅해야 하는지를 매우 잘 배워왔다. 그것은 바로 '외계 생명체'에 대한 아이디어로서 대중들을 계속적으로 매혹하는 것이었다. 외계인을 주제로 한 공상과학 소설이나 영화 같은 오락 분야들은 이러한 일에 기름을 붓는 것이다. 미국의 하원 의원인 라마 스미스(Lamar Smith)는 SETI는 신뢰받기 보다는 대중적이었다고 믿고 있다. 그는 말한다 : ”재정적 지원은 대중들의 흥미와 맞물려 있다. 그러나 난 그것을 믿지 않는다.”1

SETI의 재정적 지원이 줄었던 기간 동안, 그들은 개인적인 후원자의 후원에 의지하여왔다. 그들의 확실한 후원자는 데이비드 팩커드(David Packard), 휴렛-팩커드 사의 윌리암 휴렛(William Hewlett)과 바니 올리버(Dr. Barney Oliver), 인텔사의 공동 설립자인 고든 무어(Gordon Moore), 마이크로소프트 사의 공동 설립자 폴 알렌(Paul G. Allen), 공상과학 소설가 아더 클라크(Arthur C. Clarke), 그리고 유명한 헐리우드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 등이다. 또한 추가적으로 수백만 명의 전 세계 사람들이 '우주 탐사' 프로젝트에 용기를 북돋아 주는 이메일을 'SETI@Home'으로 보냈다. 그들에 대한 지지는 아레시보 전파 망원경(Arecibo radio telescope)으로부터 얻은 정보를 분석해서 사용하는 개인 컴퓨터 사용자들로부터 온 것이다.

이러한 인사들의 SETI에 대한 후원과 대중적 문화는 그들의 이미지 상승에 도움이 되었다. '외계 생명체의 발견'이란 아이디어에 대한 대중적 인기가 높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NASA는 자금을 지원하게 되었던 것이다.

 

ET는 어디에 있는가?

1960년 프랑크 드레이크(Frank Drake)는 처음으로 외계에서 지적 생물체가 보내는 전파 신호를 찾아내는 프로젝트인 Project OZMA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공주 오즈마의 이름을 따서)를 시작했다. 그는 또한 특유한 암호 해독으로 얻게 된 그림으로 2진법의 암호화된 메시지 체계를 발전시켰다.

드레이크는 이 행성 지구에서 다른 외계 문명으로 전자파를 통해 전달될 수 있는 최초의 행성간 메시지를 만들었다. 이렇게 지구 밖으로 보내어진 메시지가 바로 1974년 11월의 'Arecibo Message of November 1974' 이다. 그의 메시지는 우주선 '파이오니어(Pioneer)' 10호와 11호의 벽 장식판에 결합되어졌고, 녹음되어져서 보이저 우주 탐사선 안에 장착되어졌다. 이것은 만약 외계인들이 이 우주 탐사선들을 가로채는 일이 발생했을 때를 대비해서였다.

1995년, 개인적 후원의 결과로 '불사조 프로젝트(Project Phoenix)'가 시작되었다. SETI는 자신들의 홈페이지에서 말했다. ”이 이름의 의미는 잿더미에서 일어나는 이집트의 신화적인 새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이 의미는 정부에서의 지원이 끊겨 어려움을 겪었던 SETI의 방황과도 연결이 된다).” 7

불사조 프로젝트는 일반적인 하늘의 범위 반대쪽 부분의 탐사에 중점을 두고 있다. SETI의 전파망원경 네트워크는 1초에 2천8백만 전파 주파수를 주사(scan)할 수 있으며, OZMA 프로젝트보다 100조 배 더 효과적인 것으로 평가되어진다. SETI의 노력들에 덧붙여서, 그들은 40여년 동안 60여개 이상의 프로젝트들을 시도해 왔었다. 이렇게 굉장히 난해한 노력 끝에 그들은 무엇을 얻어냈을까? 답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외계로부터 단 한 줄의 메시지도 얻어내지 못했다.

 

무엇이 SETI를 이끄는가?

혹자는 이렇게 묻는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자금을 들여서, 어떻게 그렇게 아무 것도 얻어내지 못하는가?” 이유는 그들이 진화론(evolution)을 믿기 때문이다!

SETI의 한 문서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이곳 지구에서 진화가 일어나고 있다면, 우주의 어떤 곳에서 왜 진화가 일어날 수 없겠는가?” 그들은 우리 은하계에서만도 약 1천만 개의 진보된 문명들이 존재할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진화(우주적, 화학적, 생물학적 진화)는 명백한 사실이며, 이 광대한 우주에는 무수한 생명체들이 살고 있을 것으로 많은 사람들은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40년 동안의 매초 2천8백만 개의 주파수를 들어보았으나, ET는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명백한 증거들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는 다시 한번 수백만 달러의 국민들의 세금을 SETI에 지원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SETI가 지적 메시지를 본다면, 그들은 그 지적 메시지를 인정할까?

혹자는 지구 밖 문명세계에서 어떠한 신호라도 오게 된다면, 그것은 암호화 된 정보(coded information)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모든 언어 체계는 암호화 된 정보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확실히 누군가가 지성(intelligence)을 가지고 있다는 것의 신호이다. 왜냐하면 정보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언제나 더 큰 정보가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보란 결국 ‘지성’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여러 해 전, 우주로부터 최초의 전파신호를 받게 되었다. 그것은 LGM-1이라 칭해졌다.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삑 하는 소리(blip)에 진화론적 천문학자들은 매우 흥분했었다. 공동 발견자인 Jocelyn Bell-Burnell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이 전파 신호는 아마도 우주 밖 어디에선가 우리와 통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문명화 된 어떤 ‘작은 초록 인간(little green man)'으로부터 온 것일 수 있습니다.” 8

LGM-1은 사실 ‘Little Green Man-1'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들이 찾고자 기대하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전파 신호는 매우 치밀한 천체인 한 맥동성(pulsar)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었고, 아마도 중력붕괴를 진행하고 있는 별로부터 형성되어진 것이었다. 그 별은 빠르게 자전하면서, 규칙적인 전파의 '파동'을 분출했던 것이다.9

 

부러 잊으려함

외계 생명체를 찾기 위해 수십억 달러를 소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탐사는 결국 이 우주에는 오직 '지구' 만이 생명체들이 살 수 있도록 독특하게 디자인된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이들 과학자들이 망원경을 현미경으로 바꿔서,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 내에 들어있는 DNA 분자들을 보게 된다면, 그들은 이 우주에서 가장 복잡한 언어 시스템으로 고도로 암호화되어 있는 정보(information)들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하늘'에서 찾고 있는 것과 같은 고도 지성의 증거인 것이다. 그들은 이 '정보'들이 우연히 자연적으로 진화되어 생겨난 것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이 만약 우주로부터 매우 단순한 질서적 배열을 보게 된다면, 그것은 어떠한 지성이 있다는 신호라고 떠들어 댈 것이다.

슬프게도 이미 깊이 각인되어버린 그들의 진화론적 세계관이 그들을 장님으로 만들어, 모든 지식의 근본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진정한 영광의 세계를 바라보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여호와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땅도 조성하시고 견고케 하시되 헛되이 창조치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거하게 지으신 자시니라 그 말씀에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이사야 45:18)'

 

*참조 : Raise Money by Accomplishing Nothing (CEH, 2008. 11. 24)

 https://crev.info/2008/11/raise_money_by_accomplishing_nothing/


References and notes

1. Quoted in: Search for Life Out There Gains Respect, Bit by Bit,                      <www.nytimes.com/2003/07/08/science/space/08SETI.html>,8 July 2003.
2. Origins, ,29 March 2004.
3. Dan Goldin's speech to the American Astronomical Society,29 March 2004.
4. More Mars doubts, Creation 24(3):8, 2002; Mars bacteria disputed, Creation 24(2):7, 2002; Sarfati,J.,Life on Mars? Separating fact from ficition, Creation 19(1):18-20,1997.
5. Rigg, A., Mission to Mars-the search for meaning, Creation 26(1):10-15,2003.
6. SETI Institute/Drake, Frank, The Encyclopedia of Extraterrestrial Encounters, Robinson, London, pp. 192-193,2001.
7. Frequently Asked Questions, 22 February 2003.
8. Ham, K., Calling little green men, Acts & Facts 21(11):a, ICR, California, USA,1992.
9. In contrast to the complex DNA code, or the writing on this page, a repeating signal actually has a very low of information.

*Gary Bates heads the Ministry Development department of Answers in Genesis in Brisbane, Australia. He was previously a business proprietor and volunteer state coordinator/speaker for Answers in Genesis in Western Australia.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creation.com/seti-coming-in-from-the-cold-of-space

출처 - Creation 26(3): June 2004.

미디어위원회
2017-05-30

세계관과 비교된 창조와 진화에 대한 중·고등학생들의 태도

(High School Students' Attitudes Toward Creation And Evolution Compared to Their Worldview)

Steve Deckard, Ed.D. 


     기원에 관한 중고등학생의 믿음은 매우 중요하다. 많은 중고등학생들은 초자연적인 유신론적 창조자를 믿는다고 주장한다. 또한 많은 학생들이 거듭남의 체험을 보고하고 있고, 따라서 창조주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지속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한 관계는 한 사람의 인격적인 삶과 세계관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성경말씀(고린도전서 2:14-16, 로마서 1:20)은 창조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이분법(dichotomy)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단지 진실로 거듭난 자만이 모든 생각과 자세를 사로잡아,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과 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10:5, 골로새서 1:16). 하나님이 명하신 이러한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것은, 성경적 유신론과 자연주의 사이의 충돌(모든 것을 둘러싸고 있는 두 가지의 세계관, 즉 ‘창조론적 세계관(Creationist Worldview)’과 ‘진화론적 세계관(Evolutionary Worldview)’ 사이의 충돌)에 있어서 올바른 시각을 갖게 되는 데에 필수적이다. 이러한 둘로 나뉘어진 세계관을 철저히 조사한 사람이 데이비드 레이(David Ray) 였다. 그의 연구결과를 이 글에서 요약했다.


레이의 연구 배경

레이(Ray)는 조지아 주, 애틀랜타의 동부에 있는 학교 학생들 4 그룹을 연구했다. 그 그룹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1)두 개의 기독교 학교 그룹 (학생 30명), (2)두 교회의 중고등부 그룹 (학생 30명), (3)한 공립학교의 반 (학생 42명), 그리고 (4)한 홈 스쿨 그룹 (학생 30명).


조사 도구와 방법

자료를 모으기 위해서 2가지 조사 도구, 즉 CWT/Creationist Worldview Test(창조론적 세계관 검사, Deckard, 1997)와 PEERS Test(Smithwick, 느헤미아 연구소, 1995)가 사용되었다.1 CWT 검사는 창조/진화 논쟁과 관련된 관점을 평가할 목적으로 51개 항목으로 구성되었다. PEERS Test는 정치, 경제, 교육, 종교, 사회적 관심 등에 관한 기독교인의 관점을 평가할 목적으로 70개 항목으로 구성되었다. 학생들은 두 개의 그룹으로 분류하였다: 즉 (1)창조론적 인생관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과 (2)진화론적 인생관을 가지고 있는 학생. 이 평가 과정은 CWT에 대한 대답에 의거했다. 이 두 개 그룹의 관점을 PEERS Test의 세 가지 범주인, 교육, 종교, 사회적 관심과 비교하였다. PEERS Test의 척도는 다음과 같다: 즉, 성경적 기독교(70-100), 보통의 기독교(30-69), 세속적 인본주의(0-29), 사회주의(<0). 비교 목적을 위해 이와 동일한 척도를 CWT에도 적용하였다.


조사에 사용된 질문.

조사 항목은 다음 질문에 대답하도록 구성하였다. 창조론적 태도와 진화론적 태도를 지닌 학생들이 다음 항목들에 대한 질문에 어떻게 다르게 대답하는가?

◦ 1과 2 항목은 교육에 관한 질문.

◦ 3과 4 항목은 종교에 관한 질문.

◦ 5와 6 항목은 사회적 이슈들에 대한 질문.

◦ 7과 8 항목은 하나님에 관한 그들의 견해

◦ 9와 10 항목은 기독교에 대한 그들의 견해.

◦ 11 항목은 홈 스쿨링과 기독교 학교의 학생들을 비교하였을 때, 성경적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진 공립학교 학생들의 비율과 상대적 신앙 정도.


연구 결과와 결론

아래는 상기 조사에 사용된 질문에 의거한 연구 결과와 결론이다.


1, 2번 질문

자료에 따르면 창조론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이 PEERS 교육 범주에서는 복합 점수가 평균 18.77에 불과했다. 비록 이 학생들 모두가 거듭났다고 주장했을 지라도, 세속적 인본주의 세계관 범주에서 39%를, 사회주의 세계관 범주에서 28%를 득점했다. 이것은 많은 기독교인 학생들이 교육적인 이슈들에 대해 성경적으로 혹은 세계관적 견해로 생각하도록 배우지 않았다는 강력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2

더군다나, 창조론을 가진 학생들이 교육에 관해서 낮은 점수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창조론적 자세와 교육에 대한 그들의 견해 사이에는 긍정적인 상호관계가 여전히 존재했다. 그들은 창조론적 교육 범주의 점수는 낮았으나, 진화론적 학생들의 자세는 매우 낮은 점수인 -18.75로써, 사회주의적 세계관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그룹의 학생들은 교육을 사회주의적 사고방식의 중심에 있는 시민 정부의 적절한 과업으로서 바라보았다. 진화론적 시각을 가진 학생들은 아무도 성경적 기독교나 보통의 기독교 범주에 속하는 득점을 하지 못했다. 이것은 진화론과 교육관 사이에 강한 관계가 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관계는 통계학적으로 유의했다(p 0.01). 따라서 자료에 따르면 창조론적 관점을 가진 학생들과 비교했을 때, 진화론적 태도를 가진 중고등학생의 교육에 대한 시각이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3, 4번 질문

창조론적 관점을 지닌 학생들과 진화론적 관점을 가진 학생들 사이에 종교(religion) 변수에 대해 비교했다. 창조론적 관점을 지닌 학생들은 CWT에서 평균 59.53을, PEERS에서 평균 52.59라는 점수를 얻었다 (둘 다 보통의 기독교 범주에서 중간 범위이다). 이것은 창조론적 관점을 가진 학생들이 어느 정도의 성경적 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다.

반면에 진화론적 관점을 지닌 학생들은 CWT에서 -5.39와 PEERS에서 -12.68을 얻었다. 이러한 불균형은 카이 제곱 값(chi square value, p 0.001)으로 보면 현저하게 두드러진다. 종교에 관한한, 진화론적 시각을 가진 학생들은 창조론적 시각을 가진 학생들과 현저하게 달랐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5, 6번 질문

창조론적 관점을 지닌 학생들과 진화론적 관점을 가진 학생들 사이에 PEERS 변수인 사회적 연구(social studies)에 대해 비교했다. 창조론적 시각을 가진 학생들은 CWT에서 평균 59.53을, PEERS에서는 평균 32.99를 받았다 (양쪽 다 보통의 기독교 범주 안에 있다). 비록 PEERS Test에서 동성애, 사형, 혼전순결, 가족의 정의와 같은 주제에 관해서는 ‘사회적 이슈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를 나타냈더라도, 창조론적 학생들은 어느 정도의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진화론적 관점을 지닌 학생들은 CWT에서 -5.39를, 그리고 PEERS에서 -0.71이라는 점수를 받았는데, 이것은 사회주의적 태도를 보여준다. 그 격차는 카이 제곱 값(p 0.001)에서 현저히 크다. 따라서, 사회적 이슈에 있어서 진화론적 시각을 가진 학생들은 창조론적 시각을 가진 학생들과 현저하게 달랐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7, 8번 질문

창조론적 관점을 지닌 학생들과 진화론적 관점을 가진 학생들 사이에 PEERS 변수인 하나님(God)에 대해 비교했다. 하나님과 관련된 8가지의 다른 범주에 대한 카이 제곱 분석(chi-square analysis)의 결과, 창조론적 태도를 가진 중고등학생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관점 사이에 의미 있는 분포와 강한 상관관계를 보여주었다. 창조론적 시각을 가진 학생들은 하나님을 어떤 궁극적 목적을 위해 천지만물을 초자연적으로 만든 존재로, 그리고 유일무이한 주권자로 보았다. 그들은 또한 성경을 오류가 없으며 영감으로 쓰여진 것으로 보았다. 대조적으로, 진화론적 시각을 가진 대다수의 학생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이 많이 있다는 것도 믿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로 보지 않는다고 표현했다.


9, 10번 질문

창조론적 관점을 지닌 학생들과 진화론적 관점을 가진 학생들 사이에 PEERS 변수인 기독교(Christianity)에 대해 비교했다. 8가지 카이 제곱 해석 중에서 7가지는 창조론적 관점을 갖는 중고등학생과 기독교에 대한 관점 사이에 의미 있는 분포와 강한 상관관계를 보여주었다. 이들 학생들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의 분리에 대한 유일한 소망인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진화론적 관점을 가진 학생들은 하나님의 존재는 믿지만, 정통 기독교의 어떤 주된 교리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이들 학생들의 대다수는 죄(sin)를 신화적인 개념(mythical concept)으로 생각했다.


11번 질문

마지막 질문은 홈 스쿨과 기독교 학교 학생들과 비교했을 때, 성경적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진 공립학교 학생들의 빈도와 신앙 정도에 포커스를 맞췄다. 결과에 따르면 참여 학생들 132명 중에서 39명이 CWT에서 70.00 이상(성경적 기독교인에 대한 커트라인(cutoff) 점수)을 받았다. 그 39명 중에서 20명은 홈스쿨 학생이었고, 10명은 기독교 학교 학생이었으며, 9명은 공립학교 학생들이었다. PEERS 결과에 있어서, 5명은 성경적 기독교인으로 점수를 얻었는데, 4명은 홈스쿨링 학생이었고, 1명은 기독교 학교 학생이었다.

홈스쿨 학생들은 양쪽 측정도구(PEERS와 CWT)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보여준 반면, 42명의 공립학교 학생들은 양쪽 측정도구에서 가장 낮은 점수를 받았다. 42명 중에서 37명이 거듭났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42명 중에서 단지 1명만이 한 쪽 측정도구에서 성경적 기독교인 범주 내의 점수를 얻었다. 이것은 공립/국립 학교 체계가 크리스천 청소년들의 세계관 확립과 사고에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는 심상치 않은 증거이다.

카이 제곱 분석에 따르면 홈스쿨, 기독교 학교, 그리고 공립학교 환경들로부터 의미있는 분포를 얻었다. 따라서, 성경적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지는 것과 교육 방식(mode) 사이에 커다란 상관관계가 존재한다고 결론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결론

성경은 부모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한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언 22:6). 레이의 논문은 세계관의 확립과 발달에 있어서, 기원에 관한 성경적 시각을 가르친다는 강한 목적의식과 과학적 증거들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인 창조과학자 단체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진화론적 사고의 환경, 또는 창조론이 확고하게 가르쳐지지 않는 환경 속에서 어린이를 교육하는 것은, 어린이를 기독교적 신앙에서 멀어지게 하는 확실한 방법이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 것은 진화론의 유일한 대안을 가르치도록 이끌 것이다. 크리스천 가정과 교회에서 (가정, 학교, 혹은 주일학교에서) 청소년들에게 창조론에 대한 성경적 교리를 가르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이슈는 없을 것이다.


End notes

1. Tests and follow-up training materials are available through Nehemiah Institute by calling 800/948-3101. Or visit their web site: nehemiahinstitute.com

2. 학생들은 PEERS에 비해 CWT 스케일에서 더 높은 점수를 얻었다. 이것은 조사로 인한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CWT는 성경과 창조/진화론 이슈에 관한 기초적인 교리를 측정하는 반면, PEERS는 성경 원리의 적용 영역에서 더 많은 조사를 한다. 이것은 많은 학생들이 기독교의 기초적인 교리는 알고 있으나, 그것의 적용에는 약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CWT와 PEERS의 Spearman rho 상관관계가 0.789를 나타낸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상관관계가 높다는 것은 두 개의 조사기구가 유사한 측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 Dr. Deckard is adjunct professor of Science Education at ICR and Academic Dean at Vision University. Daniel Smithwick is President of Nehemiah Institute.


번역 - 한국창조과학회 대구지부

주소 - https://www.icr.org/article/309/

출처 - ICR, Impact No. 347, 2002.

미디어위원회
2016-03-25

그리스도의 부활 : 확증된 역사적 사실

(The Resurrection of Christ - The Best-Proved Fact in History)

Dr. Henry Morris 


부활의 중요성 (Importance of the Resurrection)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부활은 기독교의 최종적 승리를 장식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물론이고 그의 사도들이 하신 말씀이나 사역의 모든 내용들도 그 중요도 측면에서 볼 때, 부활의 그것에 미치지 못한다. 만약에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허구의 종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이 확실하다면, 그리스도는 틀림없이 하나님이시며, 크리스천의 신앙은 절대 진리에 대한 믿음이 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최대의 적인 죽음은 그리스도만을 빼고는 모든 인간을 정복했다. 아무리 현명한 사람도 죽음을 속일 수는 없다. 아무리 큰 부자라도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살 수는 없다. 또 아무리 힘센 사람도 죽음을 굴복시킬 수는 없다. 무덤은 언제나 승리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조만간 다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있다.

사실상 죽음의 불퇴전의 승리는 사람에 대한 것만이 아니고, 모든 사물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동물도 죽을 것이며, 식물도 죽는다. 심지어 모든 생물체의 종 전체가 퇴화하다가 마침내 멸종할 수도 있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도시나 국가도 태어나서 한 때나마 성장하다가 사라지곤 한다. 가정이나 승용차, 그리고 의복까지도 닳고 해지다가, 결국에는 제 주인처럼 흙으로 돌아간다. 심지어 우주 자체도 팽창 수축하다가, 종국적인 '죽음의 열'을 향해 나아간다.

바로 이 쇠퇴와 죽음의 보편적 권세의 지배하게 있는 인생을 성경에서는 '썩어짐의 종노릇'이라고 불렀다(로마서 8:21). 과학은 죽음을 '열역학 제2법칙'으로 인식하고 있다. 동시에 엔트로피(entropy, 무질서도) 증가의 법칙으로 알려져 있는 이 법칙은 과학에서는 일종의 보편법칙으로 인식되어있고, 이 법칙의 굴레를 벗어나는 예외는 전혀 관측된 적이 없다. 이 법칙을 간단히 요약하면, 모든 시스템은 질서에서 무질서로 변질되는 경향이 있어서, 스스로 마모되어 결국에는 죽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시스템에서 무질서의 척도인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썩어짐과 죽음의 보편성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갖는 절대적 유일성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표시이기도 하다.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 물론 위인이나 성인들까지도 안 죽은 사람은 없다. 석가모니, 마호메트, 조로아스터, 공자, 씨이저, 마르크스... 등 나름대로 세계에 충격적인 영향을 끼쳤던 사람들도 모두 다 죽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살아나셨다! 물론 그도 보통사람들처럼 죽었으며, 또 매장됐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명부(冥府)로부터 다시 돌아와 당신 자신의 육신의 몸으로 부활하셨다. 그리고 그의 썩지 않은 몸으로 무덤에서 나오신 이후 영원히 살아계신다! 이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창조 이후 기적중의 최대의 기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기적은 예수 그리스도가 스스로도 단언하셨던 바대로 당신 자신이 하나님이셨기에 이루실 수 있었다.

짧은 본 고찰(考察)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실질적인 증거들을 적게나마 주의 깊게 살펴보기로 하겠다. 만약에 이 모든 사건들이 망상에 지니지 않고, 나사렛 예수가 죽음에서 진정 다시 살아나시지 못했다면, 그 때엔 그도 결국에는 죽었던 다른 위인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는 오히려 그들보다 더 못할 수도 있다. 그것은 그가 스스로의 절대적 신성을 걸고 죽음에서 부활하리라고 했던 약속으로 인해서, 허풍쟁이 아니면, 미친 사람이라고 낙인찍혀 마땅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만약에 그의 부활이 진정으로 역사상 논증될 수 있는 사실이었다면, 그 때엔 그의 주장뿐만 아니라, 그의 약속도 입증된다. 죽음은 결국 최대의 승리자가 아니고, 패배한 적에 불과해진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베드로전서 1:3).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린도전서 15:20,22).

 

기독교 신앙의 기초 (The Foundation of Christianity)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 교회도 없었으리라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그들의 교주가 보잘 것 없는 죽음을 죽었다면, 그의 제자들은 극도로 혼란에 빠져, 자기네 목숨 보전에 급급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 하에서는, 그들은 남을 설득하여 그들을 따르게 할 수는 없었을 것임은 물론이고, 기독교 신앙의 교사로서의 사역을 계속하리라고는 엄두도 못 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다는 확신을 가졌기에, 그들은 방방곡곡을 누비면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공표하여,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살아있는 그들의 주님을 믿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도행전을 한번 읽어보면, 초기 교회의 설교에서 부활의 의미가 얼마나 중요했던가를 알 수 있다. (참조: 사도행전 2:22-36; 3:13-18; 4:10-12,33; 5:29-32; 10:37-43; 17:23, 30-32; 23:6; 24:14-16; 25:19; 26:68, 22-23: 등등).

이에 못지않게 사도들의 서한에서도 부활의 의미는 중요했다. (예 로마서 1:3,4; 6:39; 고린도전서 15:1-58; 고린도후서 4:10-14; 갈라디아서 2:20; 에베소서 1:19-23; 빌립보서 2:5-11: 골로새서 2:12; 데살로니가전서 1:10; 4:14; 디모데전서 3:16; 디모데후서 2:8-11; 히브리서 13:20; 베드로전서 1:21; 등등). 부활이 뚜렷하게 강조되지 않은 곳에서도 부활의 내용은 언제나 당연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은 그 첫 장을 열면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로 확인하고, 이어서 당신 자신이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라고 밝히고 있음을 본다 (요한계시록 1:5, 18).

 

부활의 예언들 (Predictions of the Resurrection)

그리스도의 부활에 제자들은 완전히 허를 찔렸었다. 그리스도가 죽은 다음 그들은 한 가닥의 희망도 갖지 못했던 것이 명백하다. 실제로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서는 환영을 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두려워했다고 전해진다 (누가복음 24:37).

그런데 그들은 성경과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 그가 죽을 것이며, 또 다시 살아날 것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다시 살아나신 그를 만났을 때 하나같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나중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신 적도 있었다(누가복음 24:44).

비록 피상적인 독자한테는 구약에 있는 그의 부활에 관한 예언들이 명백하게 들리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이스라엘에서 성경을 성실하게 연구하는 사람들이라면 그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할 것이다. 창세기 3:15, 시편 2:7, 시편 22:14-25, 시편 30:29, 시편 40:13, 시편 110:1, 시편 118:21-24, 이사야 53:9-12, 호세아 5:15-6:3, 스가랴 12:10, 등등에서 보이는 예언들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장차 오실 메시아는 죽음에 처해졌다가, 다시 살아나신다는 예언을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구약에서 부활의 말씀을 그에 해당하는 예언으로 해석할 수 없는 사람도 그리스도께서 직접 하신 말씀에서 이 뜻이 명백하게 담긴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참조: 요한복음 2:19. 마태복음 12:38-42, 17:22-23. 20:17-19, 26:30-32, 요한복음 10:17-18, 16:16, 그리고 4복음서의 많은 말씀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의 제자들이 부활의 이야기를 제 나름의 상상으로 꾸며낼 수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예상과는 달리 그들은 부활에 관한 그 많은 예언을 성경과 그리스도의 입을 통해서 듣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부지부식 간에 부활을 예상하고 있지 않았었던 것이다. 그러던 그들이 마침내 부활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부활을 간증한다고 할 수 있다.

 

빈 무덤 (The Empty Tomb)

제자들이 확인한 부활의 첫 번째 증거는 속이 텅 빈 무덤이었다. 그리고 이 증거는 지금까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 속을 들여다보고 놀라운 일을 목격했다.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의 시신을 겹겹이 감쌌던 세마포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요한 19:39, 40). 그리고 시신만이 빠져나가 사라지고 폭삭 주저앉은 수의만이 그대로 남겨진 채로 있었다. 그 때에 요한이 무덤 안에 ”들어가 보고 믿더라”(요한복음 20:8) 라는 기록으로 보아 그들이 놀랬던 것도 당연하다. 현장에서 느꼈던 요한의 의심과 두려움은 당장에 놀라운 믿음으로 변했다. 폭삭 주저앉은 수의를 보고 십자가에 못박혔던 그리스도의 육신이 다시 살아나서 세마포의 묶음을 빠져나가 영원한 생명의 세계에 오르셨다는 사실말고는 달리 해석할 길이 없었다!

베드로와 요한은 요한의 집으로 내달렸다. 그 놀라운 소식을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알려주려고 그랬을 것이다(참조. 요한복음 19:27, 20:10). 얼마쯤 후에 무덤에 먼저 왔었던 여인들이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그들도 또한 무덤이 비어있음을 알게 되었다(누가복음 24:3).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영혼만의 부활이 아니고, 육신의 부활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영혼의 부활이라는 주장은 실질적으로 자가당착에 빠진다. 영혼은 죽지 않으므로 '부활'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부활은 육신을 실제로 떠났던 영혼이 육신으로 되돌아왔을 때 일어난다.

빈 무덤의 간증이 너무도 극명한 까닭에, 그리스도의 적들은 어떻게든 그리스도의 부활을 깔아 뭉개버리기 위하여 사람을 아연실색케 하는 수많은 황당한 설명들을 고안해냈다. 그 첫 번째 고안은 제자들이 시신을 훔쳤다는 허구이다 (마태복음 28:11-15). 그따위 설명은 얼토당토하지 않은 말임은 너무도 당연하다. 제자들은 제 목숨이 아까워 다들 몸을 숨기는 일 말고는 다른 생각을 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더욱이 밀폐된 그 무덤 입구를 큼직한 바위덩어리가 가로막고 있었던 데다가, 로마 병사들의 경비도 삼엄했을 것이다 (마태복음 27: 62-66).

이 허구만큼이나 무모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황당한 다른 고안들 가운데 하나는,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죽었던 것이 아니고, 다만 쇠잔한 몸을 지탱하지 못한 나머지 졸도 상태에 빠져 있었다는 주장이다. 예수는 죽었던 것으로 오해되어 매장되었다가 무덤 속에서 의식을 되찾고 일어나서 무덤을 떠났다는 줄거리다. 그토록 쇠잔한 상태에 있던 그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다는 것인가? 시신을 겹겹이 감싼 세마포와 몰약의 엄청난 무게를 그가 어떻게 떨쳐버릴 수 있었으며, 로마의 봉인을 부수고, 무덤 입구를 막고 있는 큼직한 바위를 굴려버리고, 망을 보던 로마 병사를 어떻게 물리치고 제자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는 것인가? 이 어이없는 허구를 지지하는 사람들한테까지도 이 이론은 일고의 가치조차 없다는 것은 너무도 명백하다. 그 뿐만 아니다. 수없이 얻어맞고 무의식 상태에서 다시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다 흘리시고 감당할 수 없을 만치 쇠약해진 예수가 어떻게 겁에 질린 제자들 속에 온전한 모습으로 변하여 나타나서 그들을 위무할 수 있었겠는가? 백보 양보해서 그랬다고 쳐도, 그는 조만간에 다시 쓰러져 결국에는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기에, 그 이후의 부활의 설교는 허위가 아니면, 위선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이 모든 조작들과는 달리, 그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빌라도는 로마 백부장에게서 이 보고를 받았다 (마가복음 15:43-45). 로마 병사의 창끝은 그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그의 옆구리를 잔인하게 꿰뚫어 (요한복음 19:34) ”곧 거기서 피와 물이 나오게” 하였다고 하는 내용으로 보아, 그의 심장이 완전하게 주저앉아버렸음을 증언하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를 필두로 하여 베드로와 요한, 그 다음에 다른 여인들이 모두 엉뚱한 무덤에 들어갔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토록 멍청한 실수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특히 당시 그곳에는 다른 무덤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곳은 아리마대의 요셉이 소유하고 있던 정원으로서(마태복음 27:60, 요한복음 19:41), 다른 사람의 무덤은 전혀 없었다고 기록되어있다.

그 뿐만 아니다. 만약에 시신이 여전히 어디엔가 묻혀있었다면, 로마나 유대 당국에 의해 어렵지 않게 시신을 내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 주가 지난 후, 무리를 이룬 많은 사람들이 부활의 설교를 듣고 예수를 영접할 때, 로마와 유대 당국은 새로운 기독교 신앙의 확산을 막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 써봤으나 전적으로 실패하였던 것이다. 이 때에 그들이 그냥 예수의 시신을 내놓기만 했어도, 기독교도들의 부흥운동은 하루 밤새에 송두리째 괴멸되고 말았을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할 수 없었다.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는 바로 그 몸으로 천국에 오르셨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The Appearance of Christ)

무덤이 비어있었다는 증거가 전부는 아니다. 그가 무덤을 떠난 이후 최소한 열 번에 걸쳐 여러 곳에서 제자들은 부활하신 그들의 주님을 실제로 만났던 것이다. 아마 그의 나타나신 순서는 아래와 같이 되었던 것 같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요한복음 20:11-18; 마가복음 16:12)

다른 여인들에게 (마태복음 28:8-10)

베드로에게 (누가복음 24:34; 고린도전서 15:5)

엠마오로 가는 노상에서 두 사람에게 (누가복음 24:13-35; 마가복음 16:12)

열 명의 제자들에게 (누가복음 24:36-43; 요한복음 20:19-29)

여드레 후 열한 명의 제자들에게 (요한복음 20:24-29)

디베랴 바닷가에서 일곱 명의 제자들에게 (요한복음 21:1-23)

오백여 그를 뒤좇는 형제들에게 (고린도전서 15:6)

야고보에게 (고린도전서 15:7)

승천하는 곳에서 열한 명의 제자들에게 (사도행전 1:3-12)

그밖에도 그리스도는 한 명 또는 그 이상의 제자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셨다. 실제로 누가는 ”해(害)받으신 이후에 또한 저희에게 나타내사 사십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라고 했다(사도행전 1:13). 그는 확실히 스데반에게 나타내셨으며 (사도행전 7:56), 마지막으로 그는 드디어 바울에게도 나타나셨다 (사도행전 9:38, 고린도전서 15:8). 그리고는 다시 한번은 요한에게 나타나셨던 일이 있다(요한계시록 1:12-18).

자, 그런데 회의론자들은 여섯 곳에서의 나타났던 상황들에서 다양한 모순점이 드러난다고 지적하면서, 부활 후 그리스도의 나타나신 증거들을 부인하려 노력하였다. 그들의 지적한 내용은, 마태복음 28:8-20, 마가복음 16:9-20, 누가복음 24:13-15, 요한복음 20:11-21, 14; 사도행전 1:1-11, 그리고 고린도전서 15:5-8절의 기사들이다. 그리고 복음서의 저자들이 이야기를 꾸며냈다고 주장한다. 물론 겉으로 나타나는 단순한 사실만을 보면 이야기 속에는 많은 피상적 모순점들과 탈락이 나타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오히려 제자들이 그 어떤 모의 같은 불순한 일을 꾸미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일 수 있다. 만약에 그들이 이야기를 꾸며냈다면, 각 사람은 나머지 사람들과는 독립적으로 제 나름의 이야기를 꾸몄을 것임이 확실하다. 이 대목이 진정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특히 지적되는 모순점들도 서로를 상세히 비교 분석하여보면, 봄눈 녹듯이 사그라지기 때문이다. 여러 명의 서로 다른 입장에 있는 목격자들이 제 각기 유리한 입장을 내세우는 증언들이 피상적인 모순점들을 드러낼 때, 그것들을 면밀히 비교 분석해보면, 문제가 오히려 더 잘 풀린다는 사실이 증언의 법칙처럼 알려지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런 현상이 바로 부활에 대한 다양한 증언들의 경우에 해당한다.

부활 후의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부인할 수 있는 마지막 한 가지 그럴듯한 책략은, 부활의 증언들을 몽땅 약물이나 최면 또는 히스테리가 원인이 된 단순한 망상이나 환상으로 몰아붙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 따위 황당한 가정은 확실히 자가당착적이다.

그들이 보았던 부활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 만약 망상이나 환상이었다면, 그 환상은 인류 역사상 유일무이한 현상이 될 것이기에 최대의 주의를 경주한 정신분석적 논리적 정밀조사를 시도해봄이 옳을 것이다. 서로 다른 시간대에 서로 다른 집단 속에 섞인 수많은 개인들에게 나타나셨던 부활의 그리스도는 모두가 같은 모습이었다. 어떤 때에는 실내에서 또 다른 때에는 실외에서, 언덕 위에서, 한 길 가에서, 또는 호숫가에서 그리고 다른 곳에서도 나타나셨다. 더욱이 그들은 애당초 예수를 찾으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어느 누구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스스로를 그들에게 확신시키기 전에는 그들은 최소한 한번은 그를 실질적인 유령으로 오인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당신의 몸을 만져보게 하셨다. 그리고 그들은 그의 손에 상처를 알아보았다 (요한복음 20:27; 누가복음 24:39). 그들은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기도 했다 (누가복음 24:41-43). 한 번은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동시에 그를 보았던 적도 있었다 (고린도전서 15:6), 그들 중 대부분은 그 때의 그의 나타나신 사실에 대한 증언이 필요할 때 살고 있던 사람도 있었다.

이런 까닭으로 환상이었다는 이론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 모든 것으로 보아, 여러 번에 걸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은 절대적으로 순수한 역사적인 사건으로 간주되어야 마땅하다. 빈 무덤과 더불어, 그가 모습을 나타내셨다는 사실은, 그의 부활을 어떤 역사적인 사실에 못지않게 확실한 역사적인 사건으로 귀착시키고도 남는다.

 

사도들의 증언 (The Witness of the Apostles)

사도들이 설교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더없이 진지하고 깊은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그들이 실제로 그렇게 자신있게 예수님의 부활을 전했을 가능성은 조금도 없다. 그들이 비겁한 도망자로부터,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하여 그의 부활을 선언하는 담대한 설교자로 변신하는데 까지 걸린 시간은 그야말로 즉각적이었다. 그렇게 열정적인 설교를 하려면, 그들은 재산상 손실이나 엄청난 박해는 물론이고, 끝내는 생명까지도 걸어야한다는 것을 각오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힘닿는 데까지 설교를 계속했다. 그들의 설교를 믿었던 군중들도 그들과 똑같은 박해를 받았다.

만약에 사도들이 이 모든 것을 조작했다면, 만약에 그들이 예수의 시신을 은닉하고 있었다면, 만약에 예수께서 어디에선가 병상에 누어 쇠잔한 생명을 겨우 이어가고 계셨다면, 혹은 만약에 그들이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면, 또한 만약에 그들이 만나본 대상이 예수님이었는지 아니면 그의 허깨비인지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면, 과연 그들 모두가 (그들의 설교로 개종한 많은 사람들을 포함하여) 목숨을 내놓고 그와 같은 사기극을 계속할 수 있었겠는가? 거기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이 세상 것으로 믿어지지 않는, 그 무엇이 그들에게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그 사건이야말로 세상 것이 아닌, 그런 것이었던 것이다!

빈 무덤과 더불어 여러 증거들, 부활의 그리스도의 거듭된 나타나심과 제자들의 변화, 출처 확실한 기록들, 그리고 당연히 2000년에 걸친 기독교 역사의 간증들을 종합하여 살펴본 견지에서, 러그비와 옥스퍼드의 역사 교수였던 세계적 역사학자인 토머스 아놀드 (Thomas Arnold) 와 같은 석학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한 사람의 공정한 조사자가 알고 있는 한에서, 인류 역사에서 그리스도를 죽음에 이르게하셨다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능력의 증거보다 더 확실하고 전폭적인 증거가 어떤 형태로서도 있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1]  

이와 비슷하게, 우리나라의 유능한 법학자들 가운데 한사람이며, 확고한 증거요건의 구성 문제에 관한 최고의 권위자이고, 하버드 대학교의 법학과의 개척자인 시몬 그린리프(Simon Greenleaf)는 4 복음서를 객관적 증거물로서의 타당성 유무를 감안한 철저한 평가를 거친 후에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아무튼, 예수가 실제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들이 확실히 알고 있는 것에 못지 않게 확실하게 이 사실을 알고 있지 않았다면, 그들은 자기들이 진술한 내용이 진실이라고 그토록 끈질기게 증언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2]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육신의 부활이 그 어떤 역사상의 사실에 못지 않게 확실한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만약에 우리가 절대적 확신을 가지고 믿을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천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어서 무덤 속에 묻혔다가, 죽음을 이기시고 마침내 다시 살아나서 지금도 살아 계신다는 사실이다!  

 

창조와 부활 (Creation and Resurrection)

오늘날의 세계에서 죽음의 보편적 권세는 오직 인간의 죄로 인하여, 인간에 대한 창조주의 저주와 지배의 관점에서만이 설명이 가능하다 (창세기 3:17-19). 이 죽음의 보편적인 법을 인간에게 씌우신 이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시기에, 그 분만이 그 법을 빼앗을 수도, 바꿀 수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한하였던 유일했던 육신의 부활은 그가 인간이었음과 동시에 하나님이셨다는 명백한 증거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죽음을 정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대하신 창조주께서 인간의 아들로 오셨음은, 그가 인간의 죄로 인하여 죽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었기에 죽음이 그를 묶을 수 없었다!

창조주의 최초의 사역인 창조는 세계의 기초를 세움으로써 끝을 맺었다 (창세기 2:1-3; 히브리서 11:3). 창조의 사역은 애초부터 완벽하고 온전했다. 완성된 창조는 완벽했기 때문에, 덤으로 그 사역을 끝내기 위한 그 어떤 진화라는 허황된 과정 따위로부터의 도움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는다.

이와 똑같은 맥락에서 그의 두 번째 사역인 속죄의 사역도 또한 완벽하고 온전하셨다. 십자가 위에서 모든 사람의 죄 값의 무게를 혼자 짊어지시고 죽으시면서, 지옥 그 자체인 영혼의 죽음을 감당하신 후에 그는 승리를 외치셨던 것이다.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30). 그 분은 당신의 영을 놓아주어 그의 죽음이 육신의 죽음이었다는 확증을 세우신 가운데, 시신과 함께 무덤 속에 묻히도록 허락하셨다. 삼일 후 그가 육신으로 다시 돌아와 육신에 영광과 영원한 부활의 삶을 나타냈을 때, 그는 모든 시대의 모든 인간들 앞에, 당신 자신이 진정으로 창조주이심과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그리고 죽음은 영원히 그 독아(毒牙)를 잃어버렸음을 극명하게 알리셨던 것이다.

속죄의 값은 치러졌다.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로마서 8:21).

그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요한계시록 21:5) 그날까지, 그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한테, 용서와 구원과 부활,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다짐하신 그 분의 약속이 허락되었던 것이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로마서 5:10).


*Author : Henry M. Morris (Ph.D., Minnesota) is President of the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This booklet is adapted from a section one of his books on scientific Christian evidences, Many Infallible Proofs (San Diego: Master Books, 1974, 381 pp).


1. Thomas Arnold Sermons on Christian life, Its Fears and Its Close, (6th ed., London, 1854), p. 324.
2. Simon Greenleaf, the Testimony of the Evangelists, (New York, 1874), p.28.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www.eurochicago.com/2014/04/the-resurrection-of-christ-the-best-proved-fact-in-history/

출처 - ICR, BTG,

미디어위원회
2016-03-23

스스로 있는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 성경에서 반복되고 있는 ”I am ...”

Dr. Henry Morris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한복음 11:25).

주 예수 그리스도가 스스로를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사실이 없다고 생각하는 '크리스천들'이 있다면, 한 번쯤 그리스도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호된 꾸중을 하실 때, 그들에게 말씀하신 예수님의 놀라운 진술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요한복음 8:56). 그리고 그들이 그 확증을 대라고 요구하자, 예수님은 이어서,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요한복음 8:58)고 하셨다.

스스로의 신성(神性)을 언명하는 예수님의 주장이 하도 대담해서 그들은 이를 신성모독이라고 단정하고, 당장에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고 대들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든 '숨어' 몸을 피하셨다.(59절).

만약에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예수님의 주장은 당연히 신성모독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한 죄에 대한 벌은 모세 율법에 의하면 사형에 해당한다.(레위기 24:16). 예수님은 이 대목에서 스스로를, 모세가 불꽃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던, 바로 그 분이라고 실질적으로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이, ”나는 스스로 있는 자 (I am who I am)”(NIV) 라고 하셨다 (출애굽기 3:14). 즉, 하나님은 시간은 물론 공간과 물질을 초월하여 영원히 자존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그 분이라고 주장하셨던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님과 아브라함이 서로 만났다고 하고, 아브라함이 그의 때를 보고 기뻐하였다고 하신 예수님의 주장은 어떻게 해석하여야 하는가? 아브라함의 시대는 모세의 시대보다도 수 세기나 먼저 있었지 않았는가!

이 주장은 아마, ”여호와의 말씀이 [그리스도의 육화(肉化) 이전에]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하셨던 바로 그 중요한 사건을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창세기 15:1).

이것은 낯설고 적의(敵意)마저 흉흉한 남의 땅에서 외로운 아브라함에게 보호자가 되고 부양자가 되겠노라 약속하실 때, 하나님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라고 하신 최초의 엄청난 자기 주장의 말씀이다.


성경 안에서 ”나는 …이다 (I am)”라 하신 이 최초의 주장이 있은 이후, 나타난 빈도를 주목하여보면 매우 흥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 나타나는 빈도가 7 회씩을 한 묶음으로 중첩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설계한 결과로 보기보다는 성경의 저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그렇게 설계한 것 같다. (이것은 물론 나의 독단적인 계산에 근거한 가정이 정확하다는 전제 하에서 이루어진 추론이다).

예컨대, 창세기 안에 ”나는 … 이다 (I am)” 라는 말씀이 일곱 번 기록되어 있다. 그 첫 번째가 창세기 15장 1절의 말씀으로서 이미 위에서 언급되었다. 두 번째는 창세기 15장 7절의 말씀으로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단순히, ”나는 여호와다 (I am the Lord)” 라고 하셨다. 이 'Lord' 라는 단어는 물론 히브리어 'Yahweh' (혹은 Jehovah)라는 단어다. 이 단어는 본질적으로 'I am' 또는 'The One Whom Is (스스로 있는 자)'를 뜻한다.


그 다음에 ”나는 … 이다 (I am)” 라는 구절이 출애굽기에서는 21번 (3×7) 보인다. 그 속에는, 위에서 언급된바 있는,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I am that I am)” (KJV) (출애굽기 3:14) 도 포함되어 있다.


경이로운 책, 시편에는 ”나는 … 이다 (I am)”가 7번 보이는데, 그 말의 뜻은 육화된 그리스도의 미래의 고난을 예언적으로 슬프게 말하고 있다. 그 예가 아래와 같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I am a worm, and no man)” (시편 22:6).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I am poor and needy)” (시편 40:17).

”내가 내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I am....a stranger unto my brethren)” (시편 69:8).

”내 마음을 상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I am full of heaviness)” (시편 69:20).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I am poor and sorrowful)” (시편 69:29).

”내가 밤을 세우니 지붕 위에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I....am as a sparrow alone upon the house top)” (시편 102:7).

”내가 풀의 쇠잔함 같으니이다 (I am withered like grass)” (시편 102:11).

이 예들은 모두 시편에 있는 말씀으로서 (그리스도를 언급하고 있어서) 특별히 메시아적인 시편(詩片)들인 것은 이 구절들이 그렇게 신약에서 인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언서에서는 ”나 여호와는” 이라는 진술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예컨대 이사야서의 뒷부분(40장-66장) 안에는 35(7×5) 번에 걸쳐 그와 같은 주장이 보인다. 첫 번째는 이사야 41장 4절의 ”나 여호와라 태초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가 그것이다. 마지막 번째는 이사야 60장 16절의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 네 구속자, 야곱의 전능자인 줄 알리라” 이다. 그러나 이사야서의 뒷부분의 주제와는 다른 주제를 다루고 있는 이사야서 앞부분에서는 ”나는…이다 (I am)” 라는 구절이 없다.


에스겔에서는 70번이나 (이 보다 더 많이 들어있는 단일 책은 없다) 그 위대한 주장이 들어있다. 예레미아에서는 이 주장이 21번 들어있다. 그 다음, 선지자들의 비교적 작은 소예언서들 속에는 21번에 걸쳐서 ”나는…이다 (I am)”의 주장이 들어있다. 전체 예언서들을 총 망라하고 보면, 총 154번(22×7)이나 하나님이 이 엄청난 ”나는…이다 (I am)” 주장을 언명하고 있는 셈이다.


구약성경 안에서 마지막으로 그런 주장을 한 곳은 말라기 3장 6절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나 여호와는 변치 아니하니… (I am the Lord, I change not …)”라고 적절하게 당신의 영원하심을 재삼 새겨주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위대하신 ”나는 스스로 있는 자 (I am)”, 즉 자존의 하나님이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우리 개개인의 구주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를 똑같은 그 위대한 ”나 스스로 있는 자 (I am)” 되심을 우리들에게 계시하셨다는 사실을 언제나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가장 아름답게 인간적인 모습으로 쓰인 ”나는 … 이다 (I am)” 라는 구절이 보이는 곳은 요한복음이다. 이 복음서에는 7번 보인다.

”…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 (요한복음 6:35, 48, 51).

”… 나는 세상의 빛이니 … ” (요한복음 8:12).

”… 나는 양의 문이니 …  ” (요한복음 10:7, 9)

”… 나는 선한 목자라 …” (요한복음 10:11, 14).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 (요한복음 11:25).

”…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 (요한복음 14:6).

”    내가 참 포도나무요 … ” (요한복음 15:1, 5)

이와 같은 주장들을 듣고 보았던 사람이 어떻게 그 주장들을 신성(神性)을 나타내는 주장들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겠는가? 예를 들어보자, 하나님 자신이 아니고서는 그 누가 스스로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글쎄…, 어쩌면 미친 사람이나 그런 주장을 할 수 있을는지…?! 이도 아니라면, 뻔뻔스러운 사기꾼 같은 족속이 그럴 수 있을까? 어쨌든 간에 그 주장들이 진실이 아닌 다음에야 정직하고 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런 주장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선택의 기로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미친 사람이나 사기꾼으로 믿든지, 아니면 그를 진정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믿는가의 기로이다. 그 둘 중 택일하여야 할 기로에 서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하나님의 내용이 육화되신 분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진실로 유일한 분이시다. 누구라도 이 7 가지 위대한 ”나는…이다 (I am)” 주장들 하나하나를 꼼꼼히 음미해본다면, 이 결론에 이를 것이다.


옛 사도신경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의 참 하나님(very God of very God)” 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물을 창조하셨다(created all things by Jesus Christ)고 기록되어 있다.(에베소서 3:9). 그리고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사도행전 17:28). 더욱이 그는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로새서 1:20).


요한복음 11:25-26절에 있는 놀랄만한 주장을 주목하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

죽음은 언제나 인간에게는 엄청난 원수로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정말 참기 어려운 비극이요 슬픔이다. 대개 사람이라면 너나없이 가능한한 장수를 위해 애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사람이 죽은 다음에도 그의 생명을 되돌려줄 수 있으며, 그리고 영원히 그의 생명을 보전할 수 있다고 주장하신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한 말이라면 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주장인가!

그렇지만 그는 장사한지 사흘만에 무덤에서 되살아나 죽음을 물리침으로써 그에게는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셨던 것이다. 결국 그는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 즉 자존하시는 존재다! 그러므로 그는 용서와 구원을 구하기 위하여 그에게로 오는 사람에게 주신 약속을 조금도 빠트리지 않고 지킬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요한복음 14:19) 하고 말하신다.


요한계시록에도 그 위대한 ”나는 … 이다 (I am)” 주장이 일곱 번 나타난다. 그리고 이 뜻으로 쓰인 중요한 구절들 가운데 하나는 그의 부활과 관련이 있다.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요한계시록 1:18).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오늘날에도 이렇게 묻고 계신다. 오래 전에 마르다가 그녀의 동생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할 때, 예수님이 마르다를 보고 물으셨던 질문이다(요한복음 1:26). 이것을 보고,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길 수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어느 누가 감히 의심할 수 있겠는가! (텅 비었던 무덤, 부활 이후 수없이 많은 나타나심, 제자들의 변화, 그리고 또한 2000년 동안 면면히 이어져온 그에 대한 신앙을 통하여 변화된 수많은 신도들의 간증 등... 그 증거들은 수없이 많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들도 또한 많다. 그런데 불신자들에게는 하나님 없이 보내야하는 영겁의 시간이 을씨년스럽게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If you believe not that I am He [그러나 원전에는 'He' 로 되어있지 않았다; 예수는 'I am' 이라고 말씀했다 로 되어있다.]” (요한복음 8:24).

요한계시록에 있는 나머지 6 번의 ”나는…이다 (I am)” 구절도 역시 그 분의 영원하신 존재, 즉 영원에서 영원까지 존재하심을 중요하게 강조하고 있다. 아래 열거된 예문을 주목해보라. 

”…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 (요한계시록 1:8).

”… 나는 알파요 오메가라, 처음이요 나중이니…” (요한계시록 1:11)

”…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요한계시록1:17).

”… 나는 알파요 오메가라, 처음과 나중이라…” (요한계시록 21:6).

”… 나는 알파요 오메가라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요한계시록 22:13).

”…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요한계시록 22:16).

우리가 우리의 영원한 영혼을 내맡긴 영광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오래 전에 자기 믿음을 위해 순교한 한 사람의 위대한 종교적인 스승 이상의 존재이시다. 그 분은 죽음을 영원히 이기시고 살아서 천국에 있는 그 분의 보좌에 앉아 계신다. 그 분은 우리의 위대한 창조주이시며,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신 구세주이시며, 우리의 영원한 주님이시고, 왕이시다.


*Henry Morris - CreationWiki 

https://creationwiki.org/Henry_Morris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

출처 - ICR

미디어위원회
2011-12-28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

(The Creator God of the Bible)

Ivan Bowden 


      이 주제는 무궁무진한 내용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짧은 읽을 거리에 붙일 논설의 제목으로는 너무 무겁다. 그것은 마치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읽으라고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기 때문에 이 논설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속성들 가운데 몇 가지만 집중적으로 논하려한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라는 말씀으로 시작되어,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요한계시록 21:1) 라는 말씀으로 끝을 맺는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베드로후서 3:13에서도 언급되었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세상의 창조 이야기를 확실한 근거도 없이 "옛날 옛적에"로 시작되는 옛날이야기, 또는 일종의 우화의 범주에 포함시키려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들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그런데 슬픈 사실은 우화의 선량한 인물들과는 달리, 그들은 ”이후 영영 행복하게 살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성경은 창세기를 우화는 고사하고 어떤 상징적인 이야기로도 지목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창세기의 기록을 글자 그대로 받아드린다고 말씀하셨기에 우리는 그의 생각을 전폭 수용할 것이다.

다시 베드로후서 3장과 요한계시록 21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왜 새 하늘과 새 땅이 필요한지 묻게 된다. 슬프게도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첫 번째 하늘과 땅은 뭔가 몹시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오로지 의로움만이 거할 것이라는 찬란한 생각을 하면 소망에 부푼 우리 기운은 하늘을 찌를 것 같다. 이 세상이 잘못된 것 중에서도 특히 나쁜 것은 불의가 도저히 걷잡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스스로 의로우신 하나님은 의를 괘념하시는 동안에도 사람은 전적으로 의에 무관심하였다.

하나님이 첫 번째 세상을 만드실 때 사람이 살기에 단순히 좋은 곳을 만들어 주신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뭔가를 일러두셨다.

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실 때 말씀하신 메시지를 고려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선 시편 95장을 읽어보는 것이 좋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로 그를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그리고 그렇게 해야할 이유는 이렇다.

”대저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오 모든 신위에 크신 왕이시로다. 땅의 깊은 곳이 그 위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것도 그의 것이로다. 바다가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시편 104:1-7은 이렇게 읊고 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광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를 입으셨나이다. 주께서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같이 치시며,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세우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땅의 기초를 두사 영원히 요동치 않게 하셨나이다. 옷으로 덮음같이 땅을 바다로 덮으시매 물이 산들 위에 섰더니...

10절... 여호와께서 샘으로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사
13절... 저가 그 누각에서 사에 물을 주시니, 주의 행사의 결과가 땅에 풍족하도다. 저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의 소용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식물이 나게 하시고...
19절... 여호와께서 달로 절기를 정하심이여 해는 그 지는 것을 알도다...
24절...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 주의 부요가 땅에 가득하나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하신 일에 대한 훌륭한 시편으로서, 그 시작을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광대하시며...!” 라고 읊으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가 실로 광대함을 찬양하고 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응답은 경배와 경외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대한 사람의 반응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전일성을 경배하는 마음이어야 한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두 번째 반응은 두려움이다. 그런 마음의 메시지는 시편 33:6-8에 담겨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저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계의 모든 거민은 그를 경외할지어다”

여기서 언급된 '경배 (worship)'의 개념을 고찰하여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렇게 설명해 보자. 교회에서의 주일날 아침예배는 '경배'의 예배라고 한다. 그런데 '경배'의 참 뜻은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 인데 반하여, 예배 순서(Order of Service)에서는 많은 시간이 '얻는 것'에 소진되고 있다. 이에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권속들이 모두 모여 다 함께 하나님에게 자연발생적인 경모의 마음과 감사의 마음을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즐거운 일이겠는가! 시편에서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하나님은 위대하시기에 크게 칭송받아 마땅하시다.” 그런데 하나님의 권속이라면 진정한 경배에서 당연히 하나님에게 드려야 할 하나님의 몫을 크리스천이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심각할 정도로 빼앗고 있지는 않았을까? 심지어 하나님과 독대하고 있을 때에서까지 너무도 쉽게 크리스천은 ”하나님 이렇게 저렇게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제발 이런 걸 주옵소서! 저를 보전하여 주옵소서. 저를 지켜 주옵소서... 그리고 우리의 선교를 축복하여 주옵소서”라고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스러운 이름에 마땅한 영광을 하나님에게 드리기 위하여 얼마큼 우리의 헌신적인 삶을 하나님에게 드렸는가를 자문하여야 할 것이다.

'경외' 라는 단어의 뜻은 새겨보아야 한다. 성경의 용어색인을 펼쳐들고 '경외' 라는 단어를 찾아보는 수련도 유용하리라─이 단어는 성경 안에서는 일반적으로 쓰인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시편 34:9).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잠언 9:10) 등등. 나는 20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나 두려움의 결여로 인하여 영적 이해의 분야에서 길 잃은 미아의 신세가 되어버렸다는 생각에 '두렵다'. 오늘날 우리들 사이에는 하나님을 우리와 같은 수준에 있는 '친구' 급의 그 어떤 존재쯤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친숙함이 팽배하다. 때로는 하나님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너무도 격이 없어서 어쩌다 보면 하나님이 우리 이웃집 어느 양반보다도 못한 것 같은 인상을 받기 쉽다. 유인물 안에서 하나님을 호칭 할 때 '그대를 (Thee),' 또는 '그대는 (Thou)'이라는 용어를 쓰는 데 대한 찬반에 관한 말다툼이 아니고, 우리들보다 영원히 높으신 존재에 대한 숭배와 존경을 위한 강력한 논쟁이다. 히브리서는 ”우리의 하나님은 전소(全燒)하시는 불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사야는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 그는 ”거룩, 거룩, 거룩하도다, 만군의 하나님이시요” 라는 목소리를 듣고 자신이 너무도 부정하다는 자격지심에 '내게 화 있을진저!' 하고 외쳤다.

계시록의 기록을 보면, 늙은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그리스도의 환영을 만났을 때, 그는 죽은 사람처럼 주님의 발끝에 엎드렸다. 밤새껏 허탕을 친 베드로가 기적적으로 만선을 채운 다음 바닷가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 그는 ”오 주님이시어 저를 떠나옵소서! 저는 죄 많은 자이옵니다” 하고 부르짖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들의 사랑이신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이시기에 하나님의 당연한 몫인 거룩한 외경과 존경, 그리고 숭배의 감정을 일으키게 하시는 대상이신 까닭에 그가 느낀 두려움은 결코 비참한 두려움일 순 없다.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인간은 저들을 만드신 창조주를 마땅히 경배하는 마음으로 맞아들여야 할 것이지만 그러지 않았다! 바울은 로마서 1:25절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하였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올바로 모시지 않고 제각각 뭔가를 경배하며 다른 것을 모시고 있다. 바울 사도가 사람들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한다고 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배도 않으며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로마서 3:18절은, ”저희는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그리고 로마서 1:32절은 이와 같은 두려움의 결여를 강조하면서,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라고 말한다. 이 얼마나 20세기 보통의 인간상을 정확하게 그리고 있는가! 오늘날 사람들은 10계명을 자의로 위반한 후 입맛을 한 번 쩍 다시고는 그 죄를 다시 범한다. 그 뿐만 아니라 자기를 따라 죄를 범해보라고 다른 사람을 서슴없이 부추긴다.

오늘날 도덕적 가치에 대한 경박한 태도를 가져다준 책임의 일단이 텔레비전의 영향에 있다 할 것이다. 텔레비전은 천박한 비도덕적 기준을 마치 인간의 전형적인 행동양식인양 그리고 더할 나위없는 만족감과 쾌락을 가져다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묘사한다. 불행한 일이지만, 시청자는 TV 화면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각본을 연출하는 배우들에 불과하고, 연극 이야기의 일부분으로서의 결과는 좀처럼 죄스러운 것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쉽다. 특히 간음사건일수록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간음사건은 매혹적이며 재미있게 그려진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이 죄스러운 삶의 스타일이 행복과 만족으로 가는 길로 받아들이게끔 세뇌되고 있다. 그렇게 된 젊은이들은 인생의 안녕을 위한 하나님의 기준을 무시하고 자기네들과는 무관한 것으로 치부하고 영영 잊어버리고 만다. 그 정도가 심해지면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비웃다 못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배우지 못하고 만다.

 

창조는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선언하는 것이다.

창조를 통하여 사람에게 주시는 또 다른 하나의 메시지는 로마서 1:20절에 이렇게 시작된다. 즉,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 찌니라”

이사야 45:18) ”여호와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땅도 조성하시고 견고케 하시되 헛되이 창조치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거하게 지으신 자시니라 그 말씀에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그리고 21절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진실한 하나님이 많은 사람들이 경배해 마지않는 숲이나 돌의 신들과 다른 점은 바로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이다. 하늘과 땅이 그가 하나님이심을 그리고 그의 신성하심을 증명하고 있다.

 

사람의 응답은 복종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하나님 되신 사실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이사야 45:22절은 그것을 명료하게 밝힌다.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나의 입에서 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약하리라 하였노라”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우리의 응답은 몸과 마음을 바쳐 복종하는 뜻으로 그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

어느 크리스천 사역자가 골프 코스에서 친구에게 간증하는 중에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 하나님으로 자복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자, 그의 친구는 즐거운 듯이 이렇게 대답했다. 즉, ”나는 내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찾을 수 없어” 하자 그 크리스천 친구는, ”문제는 네가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든지 않든지 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야. 그는 우리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자네는 그에게 빚을 지고 있기에 그에게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는 것이야.” 라고 대답했다.

풍요로운 20세기 인간은 자족감에 탐닉하기 일쑤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여전히, ”나는 하나님이다. 모든 이는 다 내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라고 하신다. 세속적인 제왕 (예컨대 헨리 7세)은 자기 백성 중의 누가 ”나는 그대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했다면, 이를 순순히 봐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헨리 7세는, ”짐도 또한 너를 필요로 하지 않네... 이 자를 끌어내어 참수하라!” 라고 하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사람한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로마서 1:28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메시지에 대한 사람의 응답을 훌륭하게 기술하고 있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진화론을 주장하는 주요 이유들 중 한 가지는 하나님이 진화론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인정한다는 암시이다. 그리고 만약에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그는 바로 우리의 주님이시기에 우리는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할 수 없다. 우리는 그에게 무릎을 꿇고 그의 시키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교과서에서 진화론을 마치 사실처럼 가르치는 반면 하나님을 알리지도 않고 ”하나님에게 무릎을 꿇지도 말며 머리를 조아리지도 말라”고 가르치는 구실로 삼는다.

 

창조는 하나님의 영광을 선언한다.

세 번째로, 천지 창조는 하나님을 다르게 말하고 있다. 앞서 시편 104절에서는 하나님의 역사를 거듭거듭 찬양하고 있음을 보았다. 하나님이 이루신 그 모든 경탄스러운 역사들을 일일이 열거한 다음 저자는 31절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라고, 다시 시편 97:6절에서는 ”하늘이 그 의를 선포하니 모든 백성이 그 영광을 보았도다” 라고 소리높이어 읊는다. 어두운 밤하늘을 가득 채운 별들의 향연을 쳐다보고 섰노라면, 우리들은 불현듯 ”하나님은 어찌 그리 영광스러운지요! 참으로 찬란하시며, 정말 웅대하시다!”라고 감탄을 연발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응답은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는 일이어야 한다.

이 대목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시편 96:3-6절의 내용으로 대표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영광을 열방 중에, 그 기이한 행적을 만민 중에 선포할찌어다.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극진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존귀와 위엄이 그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 성소에 있도다.”

같은 장 7절은, ”만방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라고 명령한다. 인간의 응답은 영광의 하나님이신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는 일이어야 한다. 계시록 4:11절의 말씀,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그 이유인즉슨)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라고 읊으면 이 아니 좋은가!

사람은 자기를 지으신 자를 영광되게 하여야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장려함에 대한 인간의 응답은 그렇지 못하니 어찌 비극이 아닐까! 로마서 1장은 하나님의 메시지에 대한 인간의 응답은 이러하여야 한다고 다시 일러주고 있다. 즉,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왜 그런가 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에게 합당한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내려다보시기에 저들의 모습은 얼마나 비참할까!

하나님께서 창조를 통하여 인간에게 보내신 메시지 (하나님의 광대하심, 신성하심, 영광되심)에 대한 응답으로 인간이 경배와 경외, 그리고 영광을 기쁘게 바치기를 기대하시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가 특히 로마서 1장을 통하여 보아온 바로는 하나님의 이러한 기대와는 정반대의 경우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로마서 1장은 우리 세상이 무엇이 잘못됐는가를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다.

만약 인간사회에 죄가 없다면 인플레이션 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하여야할지 모를 정도로 많은 돈을 가지고 산다. 별 생각 없이 파손한 물건들을 수리하는 데만 쓰이는 돈이 매년 수백만 불이 넘는다. 생각 없이 긁어 상처를 낸 객차들이나 무심코 파손한 전화부나 공중전화 박스들로 해서 드는 비용이 매년 엄청나다. 뜻 있는 크리스천 경제학자한테는 우리나라에서 인간의 죄스러운 행위로 인해서 드는 비용에 관한 책을 저술해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응답을 하나님에 당연히 합당한 방법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이 오늘날처럼 절망적인 상태에 떨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창조로 인간에게 보낸 메시지에 대한 인간의 응답을 부적절하게 보시고 이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로마서 1장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즉 18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니” 라고 한다. 사람의 반항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한 마디로 요약해서 '진노' 바로 그것이다.

이 글의 서두에서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이 그의 창조의 역사에 드러난다. 그러나 별들을 바라보는 것만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의에 관한 마음을 나눌 수는 없다. 비록 경이롭지만, 창조의 메시지는 한정적이다. 따라서 사람은 계시의 메시지가 필요하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새길 줄 알아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은 의로운 하나님이신 것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불의에 대한 의의 대응은 '진노' 라는 한마디 단어로 요약하고 있다. 진노의 마음은 하나님에게 부합하기에는 너무도 몰취미한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점잖은 양반' 정도로 간주하고 있으며 진노의 마음은 얼토당토않게 부적절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성경은 이 단어를 하나님의 속성에 적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임을 알아야 한다. 시편의 저자는, 하나님은 사악한 자들에게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한다. (시편 7:11). 그리고 에베소서 2:3에 우리는 모두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라고 쓰여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에 대하여 진노로 반응하신다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도의 신경들 중의 하나에는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 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 인간들한테서 자주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발작적인 노기나 돌발적인 분노의 폭발 같은 감정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의 불의에 대한 피할 수 없는 그의 의로움의 반응이며, 인간의 죄에 쏟아 붓는 그의 거룩함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반응의 일단을 우리는 인간적인 경험을 통해서 볼 수도 느낄 수도 있다. A. H. Strong의 설명을 증폭하여 보자. 하나님이 재판관의 자리에 앉아 계시는 법정을 상상해보라. 재판관 앞에 선 범인한테 변론의 여지가 없는 살인의 증거가 제시되었다. 그 때 방청석에서 개기름이 번질거리는 얼굴을 한 어떤 남정네가 뛰쳐나와서 재판관 (하나님)의 어깨를 툭 치고는, '재판관님, 내 친구를 풀어주면 내가 10000불을 드리리다' 한다. 재판관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의로운 재판관이라는 그가, ”내일 아침 차 마시는 시간에 보세”라고 할까? 천만에,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경관! 당장 이 자를 체포하여 법정에서 끌어내라!” 하실 것이다. 또한 이런 경우도 상상해 보자. 어떤 불한당이 원칙적으로 사는 의로운 사람한테 다가와서 그의 순결하고 사랑스러운 누이동생에 대하여 은근한 제안을 비춘다면, 그는 크게 격분하여 누이동생에 대한 자기 애정을 내비칠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은 의로운 하나님인 이상, 불의에 거부감으로 반응할 것임은 너무나 당연하다. 성경에서는 그러한 반응을 '진노' 라는 단어로 나타낸다.

그런데 어쩌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응답은 참으로 비참한 모습니다. 로마서 3장은 사람마다 너나없이 로마서 1장에 열거된 행동을 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구약성경을 인용하고 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았다. 우리들은 그를 경외하지도 않았다. 우리들은 그 앞에 자복하지도 않았다. 이와 같은 우리들의 모든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그의 '진노'다.

그렇지만 창조에 담긴 하나님의 메시지에 대해 반항적으로 응답하는 인간의 우울한 모습을 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진노하는 하나님의 응답은 즐겁고 고무적인 뉴스이다. 하나님은 의의 하나님인 이상, 인류는 반드시 두 가지 일을 기대하여야 할 것이다. 첫째, 하나님은 죄를 벌하신다는 것과, 둘째, 그는 의를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이 둘은 다 합리적인 기대다. 로마서 3:25절은 이 문제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를 알려주고 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그 죄는 구약성경을 믿는 자들의 죄로서 지나가 버린 것들이다.) 다윗이 간음과 살인을 범하였기에 율법에 따르면 당연히 투석으로 응징하여야 마땅한 그의 죄를 풀어주신 하나님은 진정 의로운 이신가? 하나님이 다윗을 풀어주신 것으로 보아 의롭지 않으신 이처럼 보인다고도 하겠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예수를 내가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웠으니...” 라는 말씀 속에 담겨있다. (그런데 그러한 말씀 가운데에는 '공공연히' 라는 생각이 내포되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골고다의 사건을 예견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형틀에서 죽임을 당하신 것은 우리들의 죄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에 관한 무엇인가를 우리들에게 알려주시려고 그랬다. 그것은 하나님이 저 구약의 사람들이 저지른 죄들을 눈감아 주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의롭다 할 수 없을 것이기에 그들이 지은 그 모든 죄까지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속죄시키려 예견하셨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언젠가 그의 독생자를 골고다의 제물로 세우기 위해 저들의 죄를 눈감아 주셨던 것이다. 즉, 예수께서 그 모든 형벌을 혼자 감당함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구약의 사람들이 지은 죄를 눈감아 주셨던 일에 대한 정당화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인간의 문제는 명백하다. 만약 의로운 하나님이 죄를 벌하여야만 하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 하였으니” (로마서 3:23),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를 피하려는 희망을 어느 누가 가질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오직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개념을 싫어하는 신학자들은 '위무(慰撫, propitiation)' 라는 단어 (어떤 번역에 있는 속죄(贖罪, expiation) 라는 단어와 대조하여)가 성경의 가르침 속에서 일관되게 사용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을 위무한다. 그런데 '위무' 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진노를 돌려놓는다는 생각을 내포한다. Apostolic Preaching of the Cross라는 책에서 리온 모리스 (Leon Morris)는 이렇게 지적하였다. 즉, 이것은 신들을 달래기 위해 닭을 죽여 하늘에 드리는 제례 과정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들이 지은 죄에 내려질 징벌을 혼자서 감당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인간에 대한 처리를 바꾸게 하였다. 하나님은 진노 대신에 이제는 긍휼로 반응하실 수 있게 되었다고 하겠다. 그것은 그의 진노와 그의 율법 그리고 그의 의가 이제는 충족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이로운 뉴스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즉,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을 위무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인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신앙을 가진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대신에 긍휼을 받을 것이다.

어쨌거나 의로운 하나님은 의를 요구하신다. 그는 진정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모던니스트들은 비록 동전의 한 쪽만을 보고 있다지만 옳은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들이 영원히 그와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 뿐만 아니라 그는 ”우리들 가운데 어느 누구 하나라도 멸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모두가 다 회개하기를 원하신다.” 그렇지만 그의 의는 의를 요구하신다. 그런데 어느 누구가 하나님께서 설정해놓으신 완벽한 기준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다시 이런 질문이 우리를 찌른다. 즉, ”어떤 희망이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한 팔로는 우리를 영원히 함께 하자시며 사랑의 포용으로 우리를 감싸 안으시지만, 다른 한 팔로는 완벽한 순수성을 요구하는 그의 의로 인해서 우리를 밀어내며 곁을 안 주신다. 하나님의 애증의 양면성 속에 내재하는 이와 같은 갈등도 또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해결하신다. 로마서 3:26절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용서를 허락하실 뿐만 아니라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선언한다. 정당화하는 역사는 (로마 가톨릭 교리가 가르치는 바처럼)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에 관해서 발표하는 선언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 관해서 언급되는 그 무엇이다. 피진 신약성경(Pidgin New Testament)은 의롭다 하려 하시는 (justification) 행위를 ”하나님은 그가 옳다고 말씀하신다. (God say him all right.)” 로 번역하였다. 가히 정곡을 찌른 표현이 아닌가!

클로이든 성경학교(Cloydon Bible College)의 전임 학장, 차스 롤즈 박사 (Dr. Chas. Rolls)는 의롭게 하는 행위 (justification)에 대해서 아주 괄목할만한 해설을 한 적이 있었다. 겟세마네 정원에서의 사건(예수가 배신을 당하던 날 밤)이 벌어질 때, 용감한 베드로가 검을 휘둘러 말고(Malchus) 라는 사람의 귀를 잘라버렸다. 이 자는 바로 대제사장의 하인이었다. 예수님은 다정하게 당신의 손으로 그 떨어진 귀를 집어 들고 제 자리에 갖다 붙이셨다. 그런데 말고는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신 호의를 아직은 충분히 소화하지 못하였을 가능성이 충분하였다. 그래서 어쩌면 그는 돌아가 대제사장에게 이와 비슷하게 보고했을 것이다. 즉, ”저는 예수의 추종자들 중 한 사람에게 원한이 있습니다.” ”아, 그래! 무슨 짓을 하였던고?” 대제사장이 대꾸를 하자, 그는 ”그놈이 제 귀를 잘라내었습니다.” 했을 것이다. 그 대제사장은 그의 한 쪽 귀를 쳐다보고는 다른 귀도 살폈다. 그리고는 이 자가 혹시 세 번째 귀를 가지고 있었던가 하고 의아해 하였을 것이다. 그의 두 귀는 말짱하였을 테니까! 그러니 이제 베드로에게 어떤 죄목을 과하여야 하겠는가? 당연히 유죄 판결이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증거가 없다. 그는 무죄판결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그 귀를 복원하셨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법은 그를 고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사람의 문제다. 만약에 의로운 하나님이신 하나님께서 천국에 들어갈 자격조건으로 의로움을 요구한다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다가가 본 적이 없는 우리로서는 어떻게 이 자격을 딸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에는 두 가지가 존재한다. 그 중 한 가지는 로마서 3:25-26절에서 말씀하신 의다. 즉, ”예수를 화목 제물로 받아드림으로 인해서 하나님 당신 자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신” 의로우심이고, 다른 한 가지는(22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이고, ”선물로 받은 의롭게 됨”을 말한다. (로마서 5:17)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의롭다 여기신 의(로마서 4:3)가 그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사람이 제 힘으로는 도저히 이겨내기 어려운 문제의 해법을 하나님이 풀어주시는 경이로운 대답이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힘으로 얻은 의로움이 아니고, 골고다의 언덕에서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덕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의로움으로 인해서 천국 입국사증을 얻게 된 것이다.

주먹구구식 계산으로 따져보면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하나님 앞에 나선 우리들의 일차적 모습은 무한대의 마이너스였다... 천국 입국자격 심사에서는 아득히 먼데 있는 우리를 발견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로 인한 죽음이다. 그러나 내가 믿음으로 나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그리고 구세주로 영접할 때면, 하나님은 예수의 그 죽음으로 얻는 이익을 내 계산서에 기재하시어 나의 죄를 하나님께서 온전히 용서하실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신다. 사실 그 결과로 내 죄의 기록은 영(零)이 되는 것이다. 더욱이 경이로운 일은 내가 의롭다 여기심을 받게 된 일에는 긍정적인 요소가 내포되어 있는데─그것은, 내 죄가 사함을 받을 수 있게 그리스도의 죽음이 내 계산서에 계상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이 내 계산서에 계상되어 나도 또한 사랑받는 하나님의 권속으로 받아드려진다는 일이다. 내가 의롭다 여기심을 받는다는 것은 나를 보다 선량한 사람으로 만들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안(聖眼)으로 보시기에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서 그가 정당하게 나를 의롭게 하신다는 뜻이다. 그럼으로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당하지 못하게 아무한테나 천국입국사증을 주신다는 뜻이 아니다.

범인이 50만 불을 횡령하고 도주한 죄벌로 형기를 다 마쳤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나 그가 출감하였을 때에도 그 오명은 여전히 남아있어서 예전에 근무하던 은행에서 그를 받아드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받는 권속으로 받아드려진 이상 우리의 죄의 흔적은 말끔히 지워진다.

애미 카밍클 (Amy Carminchael)의 자서전에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이 있다.

내가 살아온 삶이 아니고
내가 죽을 죽음이 아니고
또 다른 삶, 또 다른 죽음에
나는 나의 영원을 온전히 걸리라.

당신은 과연 어디에 당신의 영원을 쓰시려 하십니까?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에 쓰시렵니까? 이 글을 읽는 분들은 그 곳에서 ”행복하게 영원히 살게 될 것”을 이 사람은 확신한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3/i3/creator.asp

출처 - Creation 3(3):36–45, August 1980.

미디어위원회
2004-11-12

과학과 종교의 싸움이 아닌 세계관의 싸움

김무현 


      흔히 일반대중들에게는 창조와 진화의 논쟁이 주관적인 종교와 객관적인 과학의 갈등으로 비추어지고 있다. 진화론자들은 종교는 윤리적으로 인류에게 필요한 것이고, 과학은 물질세계를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니 서로 갈등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만약 우리가 성경을 인간의 머리에서 만들어낸 윤리적 경전이나 모범적 도덕교과서 정도로 생각한다면, 성경과 진화를 동시에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창조주에 의한 무에서 유로의 창조와 성경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참 계시임을 믿는다면, 우리의 신앙과 진화를 동시에 수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진화란 모든 것에 초월적 전능자를 배제하고 철저하게 자연주의(naturalism)에 입각해서 모든 현상을 설명하고 있다. 서로 상반되는 두 기원 이론이 동시에 참일 수는 없다. 만약 성경과 진화를 동시에 믿는 분이 있다면, 성경이나 진화론이 무엇인지 아직 확실히 이해하지 못해서 그럴 것이다.


진화론은 참 과학이 아니다. 진화란 창조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관찰할 수도 없으며 실험실에서 증명할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진화는 과학적 가설 및 추론이고 배경신념이지, 과학적 이론이나 법칙이 될 수 없다. 창조와 진화는 두 배경신념, 즉 두 세계관의 싸움이지, 종교와 과학의 싸움이 아니다. 차라리 기원에 관한 두 종교의 싸움이라 하는 것이 더 타당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크리스천들이 일반 대중들과 마찬가지로, 진화론이 마치 객관적으로 충분히 증명된 과학적 사실인 것처럼 잘못 알고 있다. 그래서 창조와 진화에 관한 문제가 대두되면 될 수 있는 대로 회피하려 한다. 성경을 대하는 입장도 창세기를 포함한 전체가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이라 믿지 않고, 대신 구속에 관한 중심내용만을 계시로 보는 그런 추세로 가고 있다.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 행사는 다 진실하시도다” (시편 33:4)

하지만, 예수님과 사도 바울과 성경의 많은 저자들이 성령님의 인도로 창세기를 포함한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참 계시로 기록되었다고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다.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예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요한복음 5:46-47)

크리스천들의 그러한 회피와 패배의식 때문에 교육기관과 교과서에서는 우리가 내는 세금으로 진화론 교육이 더욱 강화되고, 우리들의 자녀들은 그 안에서 더욱 자연주의로 세뇌되며 신앙의 혼란과 방황을 거듭하고 있다. 진화론으로 세뇌된 자녀들에게는 창세기의 창조는 사람이 만들어낸 그리스-로마 신화정도로 들릴 것이다.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고린도전서 1:21)

다시 한번 강조하건데, 기원에 관한 한 오직 창조와 진화의 두 가능성밖에 없다. 즉 초월의 전능자가 다 이루셨느냐, 아니면 철저히 자연현상으로 150억 년에 걸쳐 분자들이 부딪히다 보니 확률에 의해 여기까지 왔느냐는 두 가능성뿐이다. 후자를 믿으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동시에 믿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어폐가 있다.

 

성경에서는 분명히 무에서 유로의 창조(히브리어 바라(bara))를 선포하고 있다. 특히 생물의 종들도 진화된 것이 아니라, 종류대로 창조된 것(bara-min)임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미국의 지성인들을 위한 주요 잡지들 중 하나인 『American Spectators』 2001년 1월 판에는 진화론의 기둥들이 무너지고 있다는 제목의 특집호가 실렸다. 그 내용인 즉, 진화론을 입증하는 핵심적 증거라고 교과서에 실려있는 내용들의 대부분이 이미 전문과학자들 사이에서 부정되었거나, 부정되어 가는 추세거나, 또는 적어도 지지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사항들이, 아직도 중•고교뿐만 아니라 대학의 과학 교과서에 내용이 수정되지 않은 채 과학적 사실로서 잘못 전달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틀린 내용들이 아직도 교과서에 남아있는 것일까? 만약 그러한 근거 없는 자료들을 현행 교과서에서 모두 제외시켜 버린다면 진화론 Chapter는 오직 서론만이 남기 때문일 것이다.


섬세한 과학적 연구는 우리가 현재 교과서에서 배우고 있는 진화론이 잘못된 것임을 계속 드러낼 것이다. 그렇다면 진화론의 과학에서의 현 위치가 과연 맞는 것인지 다시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진화론이 기존의 진화론의 핵심요소들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라면, 그 핵심사항들의 거의가 틀렸거나 잘못 해석된 것이라면 그것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진화론은 과연 과학인가, 신화인가? (Is evolution science or my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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