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와 외계 생명체
우리는 모두 1997년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을 기하여 화성에 착륙한 화성 탐사선 소저너를 기억하고 있다. 당시 전 세계가 이 사실을 톱기사로 계속 보도하였으며, NASA 인터넷 사이트는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소저너가 발사되기 이전에 이미 화성에서 떨어져 나와 지구로 추락했다는 운석에서 미생물로 추정되는 화석이 발견되었다는 뉴스도 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화성탐사선 소저너의 주 임무의 하나는 화성에서 생명체가 존재하였던 증거를 찾는 것이었다. 그리고 매스컴은 마치 화성에서 생명체가 발견되기나 한 것처럼 대중을 오도하고 있었다.
소저너 이후 거의 1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당시의 그 요란함은 어디갔는지 화성 탐사선 소저너가 화성에서 생명체 비슷한 것이라도 발견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화성 운석에서 발견된 생명체 화석 흔적은 탄소 나중에 동위원소 방법을 사용하여 그 샘플을 상세히 연구한 과학자들에 의해 지구의 생명체가 운석에 오염된 것이라는 사실로 판명되었다.
목성 탐사선이 목성의 위성 이오(Io)에 가까이 접근하여 물이 존재하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러자 곧 진화론적 사상을 가진 일부 과학자들은 마치 목성 위성 이오에서 생명체가 존재하며 진화의 실마리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주장들을 서슴치 않았다.
그러나 목성의 위성 이오는 영하 일백도 이하의 추운 곳이며, 물만 있으면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간단하고도 중요한 사실을 이들은 고려하지도 않고 달이건 화성이건 이오이건 간에 외계에 저절로 생명체가 진화하여 존재할 수 있다는 무조건적 신념을 확산하는데 몰두하고 있는 것 같다.
생명체는 물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동물, 식물, 공기, 산소, 탄소, 온도, 육지, 강, 바다 등등 모든 생태계적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들은 생명체가 생존하는데 필요한 조건이지 자연 발생하여 진화하는 조건이 아니다. 환경적 조건이 최악인 화성이나 이오로 나갈 필요도 없이 풍부하고도 알맞은 온도를 갖춘 액체 상태의 물이 무진장 존재하는 지구에서도 오늘날 박테리아 한 마리도 저절로 자연발생하지 않는다는 실험적으로 철저하게 검증된 사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영하 100도의 어두운 곳에서 박테리아 한 마리라도 찾으려는 노력이 측은하기도 하다. 한 줌의 흙만 파면 수억마리의 미생물이 득실거리는 지구에서 수만 명의 과학자들이 수십년동안에 걸쳐 전자현미경과 각종 초고성능 측정분석 장비를 동원하여서도 생명의 기원을 규명하지 못하는데 기껏해야 조그만 우주 탐사선에 몇가지 무인 측정분석기기를 싣고 가서 로봇이 집어오는 샘플을 가지고 몇가지 간단한 화학실험 밖에서 못하는 상황에서 생명의 기원이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심히 의심스럽다.
며칠전 신문에 태양에서 가까운 어느 별 주위에 회전하는 먼지가스의 천체 사진이 실렸다. 그리고 이것은 별 주위에 새로이 혹성이 형성되는 과정에 있는 것이라는 해설도 곁들여졌다. 그리고 이 먼지가스가 혹성이 되면 생명체가 저절로 진화하여 존재하게 될 것이라는 '과학적 의견'도 부가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발견한 것은 희미한 먼지이지 혹성이 아니며, 이 먼지가 점점 농축되어 지구와 같은 혹성이 된다는 증거도 전혀 없다. 이 먼지는 그 별과 함께 처음부터 먼지로 존재하여 왔고, 앞으로도 먼지 그대로 남아있을 가능성이 많다.
이오에서 물이 발견된 것을 마치 생명체가 발견된 것처럼 오도하는 것이나, 별 주위의 먼지가스를 마치 혹성이 진화하는 것을 증명한 것처럼 발표하는 것이나 모두 냉정하고 객관적인 과학자의 자세가 아니다. 과학자들은 자신이 실험하여 얻은 증거일지라도 혹시나 오류가 없는지 잘못 계산하거나 잘못 해석한 부분이 없는지 거듭 거듭 확인하여 조심스럽게 발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문학적 발견들에 대하여서는 확인된 사실보다는 미확인된 사실이 몇배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진화론적 견해에 비추어 해석할 뿐 아니라 이러한 불확실한 사실을 대중들에게 그대로 홍보하여 세뇌하는데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과학자로서의 참된 자질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진화론이 과학이 아니며 진정한 과학적 자세도 견지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학철학자 포퍼가 말한 것처럼 과학이란 반증 가능성에 대하여 열린 자세를 견지하고 있어야 한다. 진화론이 과학이라면 진화론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조차도 냉정하게 실험대 위에 내 놓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몇가지 되지 않는 초보적 자료를 가지고 마치 위대한 발견을 한 것 같은 언론조작도 그쳐야 할 것이다.
링크 - http://www.kacr.or.kr/databank/document/data/culture/c3/c3c3.htm
출처 - 창조지, 제 108호 [1998. 5~6]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05
참고 :
우리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 3
(God's Plan for Your Life)
Section III - 화목의 댓가 (The Price of Reconciliation)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과의 친교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까요?”
우리 누구도 우리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을 결코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제아무리 선하고 또는 종교적인 노력을 한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은 고사하고 우리 자신도 구원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영적으로 우리는 ”배반과 죄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도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도저히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피조물의 죄가 아무리 작아도 그것을 묵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 (이사야 64:6).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욥기 25:4).
구원의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 스스로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오셔야 가능합니다.
인간은 누구도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자신과 친교관계를 맺기 위해 사람을 지으신 당신의 목적을 저버릴 수 없으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스스로 구원의 방법을 강구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으로써 하나님은 스스로를 창조주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되찾는 이라는 사실을 나타내십니다. 당신의 영원한 독생자를 통해서 그는 미망에 헤매는 자들에게 완전한 화목과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3:24-26)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이 여기에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한일서 4:9, 1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값을 온전히 치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죄지은 자로 서야하는 우리의 자리에 대신 서서 우리의 죄 값으로 우리가 받아 마땅한 고통을 그가 대신에 받으셨습니다. 이는 크신 재판관이 우리 지은 죄를 용서하게 하고 의롭다 하게 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거역한 죄로 정죄된 판결을 우리 대신에 짊어질 수 있는 자격을 얻기 위해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 죄 없는 인생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는 십자가 위에 매달려 아버지로부터의 버리심을 받는 엄청난 고통을 겪으면서 지옥의 농도 높은 아픔을 감내하였습니다. 우리 대신에 그랬던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3:5, 6).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한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린도후서 5:21).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로마서 5:8,9).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하나님과의 화목을 확보한 다음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서 그 화목이 보장된 것입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의 육신으로의 부활은 어떤 합리적인 질문도 능히 대답할 수 있는 객관적 역사적 사실로서 여하한 역사상의 사건에 못지 않게 확실합니다. 빈 무덤과 부활 이후 육신의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수없이 나타나셨던 사실은 연합하여 회의론자들의 반론에 그의 부활을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육신으로의 부활은 인간 중에서의 그의 유일성을 극명하게 드러내며, 또한 그 자신과 그의 사역에 관해 그가 주장하던 모든 내용이 참이었다는 것을 여실히 웅변합니다. 더욱이 그의 부활로 인해서 하나님은 속죄의 값을 온전히 받아내어 만족하셨음을 드러냅니다. 끝으로 그의 부활은 하나님의 우주 안에서 그에 대한 모든 반항과 죄의 영향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목적이 궁극적으로 승리하였음을 보장한다고 하겠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은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베드로전서 1:3).
”만약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우리가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로마서 6:8-10).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로마서 4:25).
화목은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에 완성될 것입니다. 그 때에는 죽은 자와 산 자 가리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어 죄 사함을 입은 우리 모두는 다 일으켜 세워져서 영광을 입을 것이며, 모든 죄에서 정결히 되어 주님과 영원히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데살로니가전서 4:16, 17)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빌립보서 3:20, 21).
”이 구원을 얻으려면 나는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 신성(神性)과 구세주이심을 믿는 것이 구원의 기본임은 당연합니다. 누구도 믿지 않는 것을 제 것으로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화신에 죽음이라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게 하시고 온전하고 완전한 구원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라고 부르는 것과 그의 독생자를 사기꾼이라고 부르는 것은 물론이고, 그와 그의 속죄의 행위를 거부(또는 무시)하면서 그의 고귀한 피를 짓밟아버리는 행위는 더없이 큰 죄악이 됩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한복음 3:18).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해서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한일서 5:10-12).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 덕분으로 얻을 수 있게 된 순수한 개인적인 용서를 구하기 전에 성령의 감화를 받고 스스로의 죄 많음과 구세주의 구원의 필요함을 깊이 확신하고 모든 자기정당화 또는 독선적인 노력을 포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디도서 3:5).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8:13, 14).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개인 개인의 유일한 구세주로 무조건적으로 영접함으로 인해서, 즉 그리스도를 신앙으로 영접하며, 그의 대속의 죽음과 승리의 부활에 근거하여 오직 그만이 구원을 마련해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진지하게 믿음으로 인해서 성령님이 우리의 삶의 안에 오시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오신 성령님은 우리 안에 온전한 영적 정결 사역을 강구하시어 그리스도의 참 생명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그것은 물론 영생하는 생명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지게 되어 마침내 성경의 말씀대로 '중생 (重生)'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10:9).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사도행전 16:3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었으니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16).
(다음에 계속됩니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bible/godpln-3.htm
출처 - ICR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598
참고 :
우리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 2
(God's Plan for Your Life)
Foreword
Section I - God's Purpose in Creation
Section II - The Problem of Sin
Section III - The Price of Reconciliation
Section IV - Blessings of the Christian Life
Section V - Problems and Difficulties
Summary - What Must I Do To Be Saved? (footnotes)
Section II - 죄의 문제 (The Problem of Sin)
”아무리 해도 나는 나의 삶에서 영적 기쁨이나 거룩함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죄는 우리를 하나님과의 친교 관계에서 끊어버렸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친교관계를 위하여 창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죄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교관계가 끊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최초의 사람한테 있어서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죄를 그로부터 유산으로 물려받고, 경험한 그의 후손들 각각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사실입니다. 지금에 이르러 사람들은 하나님 중심적으로 살지 못하고, 모두가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하나님과 조화로운 교감을 유지할 때만 가능한 모든 영적축복이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사야 59:1,2).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느니라” (로마서 8:7, 8).
지금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같이 다 영적 죽음의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과의 친교관계에서 끊어진 조건 하에 놓여있는 상태에 대한 적절한 표현은 죽음뿐입니다. 그리되어 자연 상태의 우리는 영적인 삶의 축복을 원하지 않고 있으며, 또 그런 축복을 받고 있는 경우에도 그것을 인정하려하지 않습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5:1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3).
”죄란 근본적으로 무엇을 뜻합니까?”
죄란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의 온전한 기준에 미달한다는 뜻입니다. 또는 ”표적을 벗어난다”는 뜻도 됩니다. 우리가 하는 생각이나 말, 그리고 행동이 고의든 아니든 상관없이 온전한 거룩함에서 함량이 모자라는 것은 전적으로 의로우신 하나님과의 친교관계를 반드시 훼손시키고야 맙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죄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3:23).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야고보서 2:10).
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중심적이 되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생각은 근본적으로 두 가지 형태로 표출됩니다. 자존심(하나님의 의지와 영광보다는 자기 자신의 입장과 욕망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 자세)과 불신앙(모든 사물에 있어서 하나님의 우선권과 권위를 의심하는 마음 자세)이 그것입니다. 모든 죄는 자존심과 불신앙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로마서 14:23).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로마서 1:28).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왜 사람들이 죄를 범하게 내버려 두십니까?”
하나님은 당신과의 친교관계를 받아들이든지 거절하든지, 우리의 자유의사에 따라 결정하게 하셨습니다. 친교관계는 자발적인 의사에 의하지 않는 한 무의미한 것임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사랑은 기계의 속성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자유로운 선택에는 잘못된 선택을 할 가능성이 언제나 내포되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신명기 30:19).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 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야고보서 4: 7,8).
하나님은 이미 죄에서 구원하시는 완벽한 방법을 예비하셨습니다. 그것은 물론 죄에서 비롯되는 모든 결과에서도 건지시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모두가 죄를 범할 것임을 미리 알고 계셨던 하나님은 전폭적인 용서와 화목의 방법을 마련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독생자의 몸을 빌어 당신 자신의 자발적인 희생으로, 세상의 죄에 대한 판결과 정죄함을 감내하심을 통해서 이루었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베드로전서 1: 18-20).
하나님은 우리들의 더 큰 선을 위해서 우리 죄의 효력을 파기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원토록 더욱 더 큰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 죄의 효력을 파기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자기희생의 덕분으로 죄에서 건짐을 받은 자들은 죄의 선고에 망연자실해 본 적이 없었다면 결코 경험을 해볼 수 없었을 것 같이 큰 사랑으로 그를 더욱 사랑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요한계시록 1:5, 6).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고린도후서 4:17).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28).
”그러나 내가 만약 이 죄 많은 상태로 남기를 원한다면 무슨 일이 있을까요?”
영적 죽음의 계속상태가 영원토록 이어질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적 생명의 원천을 소홀히 하고 거부한 가운데서 살아간 삶의 당연한 정점은 영원토록 이어지는 영적 죽음의 상태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영적 죽음의 상태로 이어지는 삶의 본질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결국 그의 사랑과 은혜로부터의 영원히 이별한 상태로 삶을 이어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죄 많은 특성을 씻고 회복할 가능성을 더는 찾지 못하고, 죄 많은 삶을 영원히 이어간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15).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데살로니가후서 1:7-9).
영원한 형벌은 하나님과 화해하지 않고 죽는 자들의 미래에 주어지는 것이라고 성경은 거듭거듭 밝히고 있습니다. 불꽃의 연못에 던져진 존재의 정확한 내용은 알려진바 없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의 본질은 하나님의 모습은 물론 그의 능력이나 사랑이 그곳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형벌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그의 크신 사랑까지도 거부한 자들이 맞는 당연하고 타당한 결과입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요한계시록 20:12; 15).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5: 41,46).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14:11).
(다음에 계속됩니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bible/godpln-2.htm
출처 - ICR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594
참고 :
우리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 1
(God's Plan for Your Life)
Foreword
Section I - God's Purpose in Creation
Section II - The Problem of Sin
Section III - The Price of Reconciliation
Section IV - Blessings of the Christian Life
Section V - Problems and Difficulties
Summary - What Must I Do To Be Saved? (footnotes)
머리말(Foreword)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위한 목적을 정말 가지고 계신가요?”
네, 확실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그리고 하시는 일마다 지고(至高)한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각 사람의 독립된 인격으로 만드신 데는 그럴만한 목적이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크신 계획을 찾아내어 그것에 헌신하는 일입니다. 누구도 이 세상에서 삶을 영위하는 동안 하나님의 목적에 부응하는 삶을 사는 사람한테는 영원한 천국에서는 경이롭고 영광된 하나님의 뜻이 기다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 현세의 삶에서는 뜻 있고 승리하는 삶이 마련되어있는 것입니다!
”나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 수 있을까요?”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권속들에게 당신의 의지를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그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틀림없이 그러시기를 원하실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그리고 당신의 의지를 우리들한테 드러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현세의 삶과 내세의 삶에 대한 만족과 확신을 찾아낸 고금의 수많은 사람들한테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그리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당신을 드러내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었던 것입니다.
이 책은 하나님이 당신의 거룩한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드러내신 영광스러운 계획이 독자여러분의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독자 여러분이 스스로 찾아낼 수 있게 도우려는 것입니다. 대담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매 단락은 독자가 물어보는 중요한 질문을 먼저 소개하는 형식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그 질문에 대해 적절한 성경 구절에 의해 뒷받침되는 논리적이며 과학적인 간단한 대답이 주어질 것입니다. 우리 삶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찾는데 정말로 중요한 모든 질문에 하나님이 합리적인 성경 말씀을 통해서 대답해 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할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여기 게재되는 대답에 반대의견이나 추가적인 질문을 할 수 있음은 당연합니다. 비록 반대의견이나 추가질문의 증거들이 신랄하고 논리적인 것이라고 해도 환영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의지를 누구한테도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지를 피하고 싶은 사람은 언제나 자유롭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중요한 질문들에 충족하는 대답들을 찾아보고 얻어진 대답을 믿고 그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 여러분의 이익에 최선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모든 국가에서 예나 지금이나 직위 고하에 상관없이 성경적 기독교 교리 속에서 지적, 정신적 만족을 전폭적으로 맛본 사람들이 수천 수백만을 헤아립니다. 독자 여러분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열린 마음과 의지를 가지고 이 소책자를 읽어보십시요. 원컨대 하나님 아버지시여, 이들을 인도하사 당신의 참 모습을 그리고 이들의 삶을 위한 당신의 현재와 영원하신 목적을 알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Section I : 피조물 안에 담긴 하나님의 목적 (God's Purpose in Creation)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은 진정 인격입니다. 이 단어는 자연에 대한 동의어는 아닙니다. 이것은 세상에 감정과 지성, 그리고 의지를 가지고 있는 진짜 사람들이 살고 있는한 참 말입니다. 원인과 결과의 보편적 과학원리에 의하면, 어떠한 결과도 그 원인보다 더 위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주 안에 인격적 존재를 생산한 위대한 원인은 반드시 인격을 소유하고 있어야 이치에 맞습니다.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 (시편 94:9,10)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은 시간 이전부터 시작하시어 엄청난 천문학적 거시우주와 경이로운 미립자의 미시세계를 창조하심은 물론이고, 다소나마 하나님의 창조의 위대성을 이해할 수 있는 우리 인생도 지으신 것입니다.
”너는 알지 못 하였느냐 듣지 못 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이사야 40:28).
하나님은 완벽하게 거룩하시어 죄가 없으십니다. 비록 그의 피조물에 죄가 나중에 거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죄가 없으십니다. 세상천지 그 어떤 곳에서도 사람이라면 다 하나같이 양심을 가지고 삽니다. 비록 그들은 제 각기 어떤 행동은 옳고 어떤 행동은 그른가에 대한 의견은 달리할 수 있을지언정, 다 하나같이 옳고 그름의 차이점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옳은 행동을 하여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보편적 각성은 오직 완벽하게 성스러움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 도덕적 존재로서의 위대한 제 일차적 원인에 의해서만 적절하게 설명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요한일서1:5).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행사에 은혜로우시도다” (시편145:17).
변함없이 그는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인간이 죄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당신의 사랑과 은혜를 우리들에게 베푸시기를 원하시며 우리와 교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에베소서2:4).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한 일서4:16).
”무한한 우주 안에 있는 조그만 행성에 불과한 이 지구 위에서 어쩌다 진화한 존재로 태어나 삶을 영위하고 있는 미련한 동물을 하나님은 왜 돌보아야 한단 말인가요?”
사람은 저마다 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특별히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절대로 진화하는 동물이 아닙니다. 오직 (동물이 아닌) 사람만이 지성적이며, 추상적 상징인 언어를 매체로 교감할 수 있으며,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축적된 지식을 전수할 수 있습니다. 오직 사람만이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으며, 특히 저들의 창조주를 사랑하고 경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27, 28).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우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으니” (시편 8:5, 6).
창조는 크기로서가 아니고, 복잡성으로 그 피조물의 중요도가 측정됩니다. 그런데 인간의 신체와 두뇌야말로 우주 안에서 물질의 가장 복잡한 집적(集積)물 입니다. 심지어 가장 거대한 별도 단순한 연소(燃燒) 중인 원소의 질량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태양계 안에 있는 행성들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행성의 실물증거도 발견된 것은 없습니다. 아름다운 대기권과 수계 (水界) 그리고 생물권(生物圈)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지구야말로 우주 안에서 알려진 그 어떤 별이나 행성보다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고도로 조직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생명체의 생존유지에 적절한 행성으로 알려진 유일한 행성입니다. 그런 이유로 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야말로 하나님께서 우주의 중심으로 창조하셨다는 상식적인 믿음에 한 점의 의심도 제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 막측 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시편 139:14).
”너희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로다.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도 땅은 인생에게 주셨도다” (시편 115:15, 16).
”너희는 눈을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이사야 40:26, 27).
피조물의 모든 종류는 각기 피조된 목적에 부합하는 제 나름의 구조를 가졌습니다. 모든 동물들은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우연한 진화를 거쳐 생식된 후손들이라고 말하는 일반적인 관념은 그 어떤 과학적 실물사실들에 의해서 입증되지 않고 있습니다. (1) 각 '종류' 안에서는 '수평적' 변이가 풍성합니다. 그러나 현재 살고 있는 동물도감과 화석의 기록에 의하면, 어느 한 종류의 동물에서 보다 복잡한 새로운 종류로 '수직적' 변동이 있었다는 증거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진화론은 참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회피하기 위해 인간이 강구한 이론적인 설계일 따름이지, 사실에 근거하는 과학은 결코 아닙니다. 모든 개별적 유기체들은, 특히 인간의 생명체는 복잡한 디자인으로서 가히 경이롭다 할 것입니다. 이러한 유기체들은 시간의 연속 가운데 자연의 과정을 거치 동안 우연히 생길 가능성은 조금도 없습니다. 각각의 유기체는 하나님이 특별히 창조하신 것이 확실합니다.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고린도전서 15:38, 39).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나” (로마서 1:21-23; 28).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나를 창조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와 교감하기를 원하셔서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그의 정신적 형상대로 지어진 그의 피조물인 우리와 그는 교감을 원하십니다. 그는 당신의 사랑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자진하여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한테 당신의 사랑을 베풀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 자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요한계시록 4:11).
하나님은 경이로운 영원한 집을 마련하시어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예비하시고, 그들이 당신과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곳은 영광스러운 곳이기에 병고나 고통 또는 죽음도 없음은 물론이고, 그 어떤 종류의 죄도 없습니다. 그리고 현세적인 이곳이 지금 우리에게 실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곳은 그곳에 가신 자들에게는 실재하는 곳입니다.
”무엇이든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 뿐이라” (요한계시록 21:27).
그의 완성된 목적이 아직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완성되는 위대한 날에 유감없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 때에 가서는 모든 수수께끼는 말끔히 풀리고 영원히 하나님의 권속들은 그와 온전히 하나가 될 것입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편 16:11).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서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에베소서 2:6,7).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고린도전서 2:9).
”그렇다면, 하나님은 내가 살아가는 동안 나한테서 무엇을 기대하십니까?”
이 한 세상 우리는 하나님과 완전한 교감을 유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같이 할 날을 확신을 가지고 예비하기 위해서 그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한 세상은 한갓 준비단계의 삶에 불과합니다. 이 현세의 삶을 영위하는 동안 우리는 그런대로 선택의 자유를 허락받고 있어서,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와의 교감관계를 기꺼이 유지하기를 원하든 않든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 의사에 달려있습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시편 37:4).
하나님과의 교감은 온전한 거룩함과 사랑이 특징이다. 그것은 거룩함과 사랑이 하나님의 본성이며 우리는 그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참 사랑은 우리 이웃에 대한 희생적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우리가 거룩함을 얻으려면 모든 죄와 불순종과 결별하고 하나님에게 그리고 그의 사역에 온전히 헌신하여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태복음 22:37-39).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로마서 1:18).
하나님과의 교감을 유지하는 삶이 온전하게 기쁘고 평화롭게 사는 한 방법입니다. 그것은 모든 행동에 있어서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는 일이며, 그와 완벽하고 끊어지지 않는 친교를 유지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현세를 사는 동안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더할 데 없이 큰 행복을 우리한테 마련해 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요한복음 15:10, 11).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로마서 14:17).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린도전서 10:31).
(다음에 계속됩니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bible/godsplan.htm
출처 - ICR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592
참고 :
진화론과 하나님의 형상
(Evolution and The Image of God)
by John D. Morris, Ph.D.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 창세기 1:27
”만약에 남자와 여자가 애초부터 아메바로부터 생긴 것이라면, 그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것이다.” - Ken Wilber, 뉴에이지 이론가
하나님의 형상을 한 인간! 이 얼마나 고귀한 가르침인가! 이토록 놀라운 사상에는 책임 또한 따른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을 충분히 반영하는 특질과 특성을 오직 당신 자신만이 아는 방법으로 인간에게 부여하여, 인간을 다른 생명체들로부터 온전히 구별시키셨다. 동물들도 경이롭게 디자인되었지만, 결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지는 못한다. 천사들도 특별히 고매한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지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것은 아니다.
일찍이 창조된 천사들 중에서 최고 지위에 있던 천사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 베푼 특별한 관심에 몹시 원망하였던 것 같다. 상처받은 자존심 때문에 분을 새기지 못한 그 천사는 자신의 창조주에 반항하는 데까지 내닫게 되었고, 마침내 천국에서 쫒겨난 다음 일련의 부하 악마들을 대동하고 지상으로 추방되는 몸이 되었다.
그 추방된 천사는 자기의 강력한 원수의 '형상대로 지어진' 사람들 위에 분노의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사탄의 증오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작품들이 모두 자연과정에 의해서 생긴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를 조롱하면서, 그의 형상대로 지어졌다는 가르침을 가짜라고 왜곡하였다. 아담과 하와를 부추겨 하나님을 배반케 하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던 것이다. 사탄은 인간들이 스스로 신의 지위까지 높아질 수 있다는 거짓말로 그들은 물론 후손들까지도 속여서, 하나님의 형상에서 타락한 존재들이 아니고, 동물로부터 상향진화하고 있는 존재란 것을 믿으라고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속아서 그것을 믿은 자들의 생각은 바뀌어졌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로마서 1:23). 창조주의 권위를 무시하고 얻어진 증가된 지식은 어느 정도 그들을 보다 많은 지혜로 인도하였다.
그 반란의 길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창세기 6:4) 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를 만들었고, 하나님의 형상을 한 인간을 왜곡시켜 여자한테서 나올 약속된 속죄의 씨앗이(창세기 3:15) 영영 태어나지 못하게 하려 하였다. 창조주께서는 사탄이 지향하는 목표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의 계획을 차단시켜버렸다. 그러나 이 속이는 자는 인간 내면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워버리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그렇게 하여 그는 인간과 사랑의 친교관계를 구축하려는 하나님의 의도에 제동을 걸고 있는 것이다.
인간을 하나님에게서부터 떼어놓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는 사탄은 자기의 거짓말에 속는 사람들까지 망쳐놓는데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파탄 난 결혼,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들, 호흡을 힘들어하는 폐기종 환자, 통증을 못 참아 모르핀을 요구하는 암 환자, 마약중독자를 도와주기 위해 어른들의 호주머니에서 돈을 훔치는 십대들... 이런 고통 속에 있는 자들을 보고 황홀감에 젖는 것이 사탄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형상에 상처를 입히고 고통을 안겨주는 재주를 전문으로 하고 있다.
뉴에이지(New Age) 문학작품들 속에서 성경의 여호와 하나님은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깨달음의 길을 막고, 관능적 쾌락을 쫒아버린 심술궂은 재판관으로 중상모략 되고 있다. New Age 신봉자들은 하나님을 창조 그 자체로 인식해 버린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어머니 지구, 즉 가이아(Gaia) 신(神)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인간은 우주적 통찰력을 획득함으로서,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고 인식하고 있다. 그들은 마침내 다음과 같이 되었다.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로마서 1:25).
오늘날 남자와 여자로 구별하여 창조하신 의미가 땅에 떨어졌으며, 동성애가 환영받는 행동 패턴이 발호하고 있다. 결혼과 정절은 선택의 문제로 밀려나고 말았다. 아기의 출산은 무시되고, 고령자는 물론 태아와 어린아이들은 소모품 신세로 전락하였다. 오늘날의 사회악의 많은 부분은 하나님과 그의 형상(인간)에 대한 이와 같은 공격적인 전쟁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지지 않은 나무나 고래를 보존하라고 그들은 외치고 있다.
New Age 신봉자들이 표방하는 이와 같은 교리는 고대 이교도의 그것과 거의 다른 데가 없다고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그노시스주의(gnosticism, 지식주의) 사상은 이들과 비슷하게 확산되었었는데, New Age 신봉자들의 교리와 고대의 이교적 교리를 고루 내포하고 있었다. 거짓말의 아버지(사탄)는 세부적 교리의 내용을 바꿀 수 있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목표는 변하지 않았다. 사탄은 그의 추종자들을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배반하도록 훈련시키면서, 하나님의 피조물과 하나님의 형상들이 줄줄이 망하는 것을 즐거워한다.
초기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노시스주의의 도전에 성경의 가르침으로 강력하게 맞대결하면서, 진화론적 이교적 사상과 조금도 타협하지 않았다. 오늘날의 교회도 거의 동일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우리들의 무기도 그때의 그것과 동일하다. 승리에 대한 우리들의 유일한 희망은 창조자의 말씀과 세계관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www.icr.org/article/evolution-image-god
출처 - ICR, 1999. 4. 1.
창조의 신비 30. UFO는 과연 존재할까?
이웅상
미국 항공우주국의 화성탐사로 외계인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하나님은 지구밖의 외계에 인간과 같은 생명체를 창조하셨을까? 정체불명의비행물체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 특별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UFO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먼저 현재까지 보고된 UFO의 특성에 대해 살펴보면,
첫째로, UFO는 뚜렷한 과학적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무수한 사람들이 비행물체가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이나 혹은 착륙한 것을 보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이 제시하고 있는 증거로는 수만장의 사진과 손발이 잘린 동물,전파 방해,비행접시의 침전물,자동차의 증발 등 수도 없이 많지만, 누구 하나 이중에 뚜렷한 UFO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밝혀낸 사람이 없다.
둘째로, 현재까지 관찰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사진과 기록에 의하면 UFO의 모양은 모두가 다르며, 그 모양은 당시 과학문명과 연관이 되어 있다. 즉 비행기 같은 것이 발명되기 이전에는 태양 혹은 불덩어리처럼 보였으며, 현재는 상당히 발달된 고도의 우주선과 같은 모양으로 관찰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UFO는 항상 당시의 과학문명보다는 훨씬 진보된 모습으로 꾸며져, 허상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셋째로, UFO의 비행에 관한 관찰이 지구에서의 물리법칙에 위배되고 있다는 것이다. UFO가 다른 외계에서 왔다하더라도 지구에서의 행동은 지구의 중력의 법칙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소리도 없이 엄청난 속도로 날아간다든지, 공기층을 뚫고 사라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면 실제로 관찰되었다고 주장되는 UFO의 정체는 무엇인가?
첫째로, 악령의 장난일 수 있다. 실제로 지구에 도착했다고 말하는 비행물체와 접한 사람들이 악령을 접한 것과 같은 피해를 입었다는 보고가 수없이 많다. 예를 들면 신들림, 기억력 상실, 눈 멀음, 최면상태에 빠짐, 심한 두통, 마술에 빠짐, 거짓말 등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인가에 사로잡혀 있는 것과 같은 상태에 빠지게 된다.
둘째로, UFO는 환상에 의해 보일 수도 있다. 우리도 종종 꿈과 실제를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특수한 사람들에게는 환상이 실제로 일어난 것처럼 기억될 수도 있다.
셋째로, UFO는 마술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마술사들이 금성에서 온 인물과 대화를 했다느니, 마귀와 성교를 했다는 등의 기록은 외계인이 인간과 성교를 했다는 보고와 접촉한 후 신들림의 능력이나 심령치료의 능력을 얻었다는 기록 등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제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UFO에 미혹되어서는 안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 위험성을 진단해보자.
첫째로, 성경을 잘못 해석하게 된다. 이들은 성경의 기적과 천사의 방문 등을 외계인에 의한 것으로 왜곡하여 해석하고, 천사와 하나님의 나라를 마치 외계인이 사는 혹성인 것처럼 해석하려 한다.
둘째로, 이단의 교리에 빠지게 된다. UFO와 관련된 대표적인 이단으로는 캘리포니아교가 있다. 교주인 알램 미가엘 눈난은 자신이 구세주로 천사장 미가엘의 영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외계의 소식을 듣고 있다고 가르친다. 1947년 비행접시의 출현이 곳곳에서 보고되어 미공군에서 조사를 나섰던 해에 자신은 하나님의 보좌에 갔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더 나아가서 1, 2차원의 금성인들이 세계를 구하도록 자기에게 명했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가 가르치는 교리에 사용하는 용어들을 보면, 은하의 명령, 모태가 되는 혹성, 전기성을 띤 사람, 미네마의 두뇌, 초능력의 하나님 등 UFO에 관련된 용어가 대부분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세계적인 하나의 가족」이란 명칭 하에 전 세계를 지배하려는 이단 운동을 확대해 가고 있다.
출처 - 국민일보
창조의 신비 23. 「화성에 생명체가 있을까」
미국 NASA에서 화성에 착륙시킨 패스파인더에 지구인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무엇보다 생명체가 존재하기위해서는 물이 반드시 필요하다.진화론자들은 그동안 최초의 생명체는 원시지구에서 우연히 화학적 진화를 통해 발생되었다는 가정속에서 그 증거를 찾아왔다.그러나 단서가 발견되지 않자 지구와 가장 가까이 있고 환경조건이 유사한 화성을 탐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물이 생명체와 뗄 수 없는 필연적 관계에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가장 중요한 이유는 물이 갖고 있는 특징때문이다.물은 세 가지 형태로 존재한다.액체형태의 물은 태양열에 의해 증발해 기체가 되지만 구름을 형성하면서 비나 눈의 형태로 다시 지상에 내려 호수나 바다와 합쳐지게 된다.
물은 온도가 영하로 내려가게 된면 얼어 고체가 된다.다른 대부분의 액체는 고체가 되면 부피가 줄어 들면서 밀도가 높아져 가라앉게 된다.그러나 물은 4도까지는 다른 액체와 같이 온도가 낮아지면서 부피가 줄어들지만 4도 이하로 내려가면 오히려 부피가 커지면서 밀도가 낮아진다.
그러므로 영도에서 물이 얼게되면 밀도가 액체상태의 물보다 낮아져 뜨게 되는 것이다.이 때문에 병에 물을 넣고 얼리면 터지게 된다.만약 물도 다른 액체처럼 고체가 되면서 밀도가 증가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영하의 추운 날씨에 얼기 시작한 호수와 바다에는 얼음들이 가라앉기 시작해 결국 호수와 바다 전체를 얼음덩어리로 만들어 버리고 말 것이며 그 속의 생물들은 죽고 말 것이다.
그러나 물은 다행히 얼면서 가벼워 지기때문에 수면에 뜨게 되고 두꺼운 얼음층을 형성,호수나 바다속을 추운 공기로부터 보호해 수중생물들이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또한 물은 화학적 특징때문에 다른 액체에 비해 온도의 변화에 느리게 반응하며 기체로 변할 때에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게 된다.이 때문에 몸의 70%가 물로 구성된 생물들은 급격한 기온의 변화에도 잘 적응해 살 수 있는 것이다.더운 날씨에는 동물들은 땀으로 물을 증발시켜 체온을 낮춰 주는가 하면 식물들도 뿌리에서 흡수한 물을 잎에 있는 기공을 통해 증발시키므로써 더위를 식힌다.
물은 생물체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화학반응에 없어서는 안될 용매로 때로는 직접 반응물로 관여하므로 물의 역할이 없이는 생물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폴로 우주선이 달에 착륙했을 때 지구를 바라보며 『공중에 매달린 보석』이라며 그 아름다움을 묘사했다.흰색과 청색,녹색을 띄는 보석과 같이 아름다운 지구,이는 바로 지구에 있는 물과 생물때문인 것이다.흰색은 구름과 얼음 그리고 눈으로 덮힌 부분이며, 녹색은 물과 더불어 생활하는 식물들이며, 청색은 바다와 호수들에 의한 것이다.
태평양 하나만도 지구의 1 / 3 을 덮고 있어 물로 충만한 지구에는 생물로 충만할 수 있게 된 것이다.물이 없으면 생물은 존재할 수 없다.지구외에 어느 행성에도 이렇게 물로 충만한 곳은 없다.이 풍부한 물과 그 속의 생명들의 수많은 가정과 기대를 갖고 탐사하고 있는 패스파인더를 통해 화성의 삭막한 모습을 보면서 이 아름다운 지구를 주신 하나님께 시편의 말씀으로 찬양할 수 밖에 없다.
『바다가 그의 것이라.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시편 95편 5절∼6절)
출처 - 국민일보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465
참고 : 5703|5685|5613|5592|4730|4552|4522|3830|3741|3664|3626|3579|2858|2785
학문의 목적과 역사 2
(3) 서양의 구도활동
서양학문은 그리스철학과 기독교사상(Christianity)에 바탕을 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학문의 역사를 말할 수 없으며 바르게 이해할 수도 없다.
주지하듯이, 학문의 기원은 그리스의 밀레토스 학파(7 BC)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은 동양인들과는 달리 논리적인 방법으로 진리의 실체탐구에 접근하였다. 그들은 처음에는 우주의 본질(en arche)이 물, 불, 공기, 흙이라는 일원론적 사고(monoism)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Sokrates 470-399 BC)는 연구의 대상을 자연으로부터 인간으로 전환시켰다. 그의 제자인 플라톤(Platon 427-347 BC)은 망각(忘却)의 레떼강 너머로 희미하게 어른대는 이데아계(睿智界 idea)가 진리의 본체라 하였다. 이데아계는 불변의 이상(理想)이며, 이것이 투영된 것이 현상계(現象界)라 하였다. 인간의 영혼(psyche)은 이데아를 인식하는 이성(理性)과 감정을 다스리는 기개(氣槪), 그리고 식욕이나 성욕과 같은 욕망(慾望)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의 목적론적 이원론은 후일 기독교(특히 개신교)와 이슬람권의 환영을 받았다.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384-322 BC)는 형상과 질료를 구분하는 이원론적인 연구자세를 취하였다. 그는 인간은 질료인(質料因)인 점토(粘土)로 만들어진 육체, 조물주의 이미지인 형상인(形相因 영혼), 조물주의 손이나 도구에 해당하는 동력인(動力因), 이러한 물체(生命體)를 만드는 설계도에 해당하는 목적인(目的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 중에서 그는 형상인을 중시하였고, 목적인과 형상인을 가진 것이 신이라 하였다. 그는 식물의 영은 영양적이며, 동물은 여기에 감각적인 요소를 가미한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인간의 영혼은 동물의 영혼에 이성(理性)을 가미한 것이라 하였다. 그리스의 이원론은 그 후 다원론적인 원자론(atoma theory)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구약성경(舊約聖經)을 경전으로 하는 이스라엘의 유대교(Judaism)에서는 야훼 하나님이 우주의 창조주라고 주장하였다. 구약에 대한 해설과 실천방안을 해설한 탈무드(Talmud)는 유대인 뿐 아니라 세계의 정신사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런가 하면, 2천년전에 태어난 예수(Jesus Christ)는 자신이 구약성경에 예언된 대로 인간세계에 내려 온(incarnation) 하나님의 아들이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파격적인 선언을 하였다. 다른 사람들이 진리를 탐구하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이 바로 진리의 실체라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외침은 전 세계의 학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7세기(606)에 마호멧에 의해 일어난 이슬람(Islam)은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파생한 종교로 성경의 일부 내용에 마호멧의 예언(코란)을 포함시킨 알키탑(Al Kitab)을 경전으로 삼고, 알라(Allah)에게 절대복종을 요구하는 유일신교(唯一神敎 monotheism)이다. 그들은 코란과 칼로 중동을 포함한 지중해 연안을 삽시간에 지배하면서 찬란한 사라센문화를 꽃피웠다.
한편, 기독교가 지배했던 중세 유럽에서는 신에 대한 증명(神論)과 세계와 자아를 관통하여 흐르는 시간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탐구(時間觀)하였다. 사도 바울(St. Paul) 이래 최대의 기독교 신학자로 불리우는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 354-430)이 수립한 직선적 시간관(linear view of time)은 비기독교적인 순환론적 시간관과 극명하게 대치되는 개념이었다. 그는 <두 도성>(Two Castles)에서 시간은 창조(創造)에서 출발하여 인류의 종말(終末)을 향해 달리는 화살과 같다고 하였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는 그리스철학과 하나님, 인간, 자연의 상호관계를 조화적으로 설명한 스콜라철학(Scolaticism, Thomism)을 수립하여 카톨릭에 범신론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관을 도입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만물의 제일 생성원인‘(Prima Causa)이라 하였다.
13세기 이후에는 그리스와 로마시대로 복귀하려는 르네상스(Reneisance, Born Again)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종교개혁(Reformation 1517-1650)이 일어나 근세과학의 탄생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 때부터 철학의 주제는 신(神)으로부터 인간으로 바뀌면서, 인본주의(humanism)가 싹트기 시작하여 계몽주의에서 꽃을 피우게 되었다. 이러한 무신론적 인본주의가 힘을 얻게 된 배경에는 중세 카톨릭이 종교의 이름으로 인간을 억압해 온 데 대한 반발이 크게 작용한 것이었다. 한편, 루터, 멜랑히톤,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은 노동신성설(勞動神聖說)을 주장하였고, 자연을 숭배가 아닌 조작(操作)의 대상으로 선언함으로써 자연과학이 발전할 수 있는 정신적인 근거를 제공하였다.
근세철학의 원조라 불리우는 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이원론(二元論 dualism)을 주장하면서, 주관(보이는 자기)과 객관(보여지는 세계), 마음과 물질로 나뉜 세계상을 어떻게 하나로 연결하여 해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리고, 진리탐구에 대한 방법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러한 회의론으로부터 근세철학이 싹트게 되었다. 데칼트의 방법론적 회의에 대하여 스피노자와 라이프닛츠를 중심으로 한 대륙의 합리론(合理論 rationalism)과 베이컨, 록크, 버클리, 흄 등을 중심으로 한 영국의 경험론(經驗論 empiricism)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해답을 추구하였다. 그는 화란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정신과 물질이 서로 다른 것이라면 왜 슬플 때 눈물이 나오느냐?'고 묻자, '신이 정신과 물질을 만들었으며, 이 세 가지(신, 정신, 물질)가 우주의 실체(實體)'라고 대답하였다.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 1632-1677)는 '신이 유일의 실체'라 하였고(一元論), 라이프닛츠(Gottfried Wihelm Leipnitz 1646-1716)는 '신이 만든 비물질적이면서 독립적으로 운동하는 모노드(monod 單子)가 우주의 근본적 실체이며, 이들의 복합체가 세계를 이룬다'는 다원론(多元論 pluralism)을 주장하였다.
이처럼, 데카르트의 영향을 받은 대륙의 합리론은 이성으로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으나, 영국에서는 이성의 한계를 인식하고 경험에 의존하려는 사조가 등장하였다. 유니테리언주의자였던 록크(John Locke 1632-1704)는 사람이 어려서부터 관념(觀念)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데칼트의 주장을 부인하였다. 그는 인간에 대해서는 물심이원론(物心二元論)을 주장하였으며, 신(神)을 만물의 제일생성원으로만 이해하였다. 인간은 태어날 때 백지같은 상태인 데, 교육을 통하여 감각(感覺)으로 그 위에 자기가 받은 인상을 그리며, 이를 반성하는 과정에서 관념이 형성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감각과 반성은 경험에 의존하는 것이며, 관념은 단순에서 복잡한 방향으로 발달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구미의 교육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버클리(George Buckley)는 인식(認識)이란 정신과 관념 사이에 있는 것이므로 여기에 감각세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관념은 마음에서 나오며, 마음은 자유로운 존재(神)로부터 유래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마음 밖의 존재와 아무런 관계가 없이 경험은 생긴다고 하였다.
이러한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은 칸트와 헤겔로 대표되는 독일의 관념론(觀念論 idealism)을 통하여 하나로 통합되었다.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순수이성비판>에서 감성으로 알 수 없는 세계를 물자체(ding an sich)의 세계라 하였다. 인간이 시공을 통해 감성(感性)으로 현상을 인식하고, 오성(悟性)으로는 현상을 정리하여 개념화한다고 하였다. 이성(理性)은 경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이성으로 마음 속의 도덕율(道德律)을 깨닫게 된다고 하였다. 그는 신이나 영혼과 같은 문제는 경험이나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물자체’의 세계에 속한 것이라 하여 이성의 한계를 지적하고 비판하였다.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양심의 소리’에 따른 도덕율을 강조하였고, <판단력비판>에서는 ‘천상의 별’(물자체)과 ‘마음속의 도덕율’(행위의 기준)을 연결시킴으로써 주관과 객관을 일치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이처럼, 순수이성을 비판함으로써 데칼트가 제기했던 문제(주관과 객관, 물질과 정신의 연결문제)는 이론적인 해결을 보게 되었으며, 도도히 흘러 온 철학의 사조는 사실상 대단원의 막을 내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헤겔(Georg Wilhelm F. Hegel 1770-1831)은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체계로 보고, 인간의 성장이나 역사의 발전이 정(正 these)과 반(反 antithese)이 대립하다가 합(合 synthese)으로 조화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세계정신(World Spirit, Welt Geist)을 향해 발전해 간다고 하는 변증사관(辨證史觀 dialectic view)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는 헤겔의 그러한 이론이 추상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세계는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변혁의 대상이며, 모든 세계는 물질로 되어 있다는 유물론(materialism)을 주장하였다. 그는 정신도 물질에서 나온다고 하였고, 종교는 민중을 마비시키는 아편이라고 공격하였다. 인간의 역사는 계급투쟁이 없었던 원시공산사회에서 노예제도, 중세봉건제도, 자본주의, 사회주의를 거쳐 공산유토피아에 이르게 된다는 유물사관(唯物史觀 materialistic view)도 제시하였다. 그러나. 공산종주국인 소련이 몰락하고(1989) 중국이 자본주의를 수용함으로써 이러한 마르크스의 예언은 빗나가게 되었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서양철학의 시대적 특징을 요약한다면 그리스철학은 근본에 대한 탐구시대요, 중세철학은 신학적 철학시대이며, 근세철학은 체계적 철학시대라 할 수 있다. [甲田 烈等; ibid, pp 34-35]
(4) 진리의 본체
1995년 어느 밤은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진리가 무엇인지 내 나름으로 깨달았으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찾고 있는 진리의 실체를 발견했으니 흥분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 내용은 매우 단순했지만, 내게는 매우 명확한 것이었다.
모든 학문은 깊이 파고 들어가면 결국 <진리의 샘>에 도달하게 된다. 자연과학(생물학, 물리학, 화학, 지질학, 천체학)의 많은 법칙들 (예컨데, 유전법칙, 열역학법칙, 파스칼의 원리, 만유인력의 법칙, 상대성원리, 질량불변의 법칙 등)이 그것이다. 인문과학(철학, 문학, 수학, 신학, 사학)에서는 귀납법, 연역법, 생명의 존엄성, 진리의 추구, 피타고라스의 정리, 역사정신 등을, 사회과학(법학, 경제학, 경영학, 사회학, 정치학, 인류학)에서는 한계효용의 법칙, 경세제민의 원리, 자유, 정의, 평등정신, 법의 정신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원리나 법칙들은 반론할 수 없는 확고한 원리들이지만, 이들을 바로 진리라 부르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느낌이 있다. 어디까지나 원리요 법칙일 뿐이며, 진리의 한 단면을 발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진리의 샘>을 더 깊이 파고 들어가면 그것을 뿜어내는 <거대한 수맥(水脈)>에 도달하게 된다. 자연과학의 법칙과 원리 및 정리들은 결국 자연의 원리를 탐구하여 활용하려는 것이며, 인문과학의 제반 법칙이나 정리, 사회과학에서의 양심법, 자유, 정의, 평등의 추구는 자연현상을 본질적으로 이해하고 생명과 인간존엄을 지키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수맥을 더 깊이 파고 들어가면 이들은 <진리의 강>과 만나게 된다. 앞에서 기술했던 모든 법칙과 원리들이 결국은 우주 안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우주의 지배를 받는, <우주의 법칙>이라는 말이다.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예외가 없이 우주의 법칙 아래서 움직이고 있다. 우주법칙이란 ‘온 우주에 통일되게 작용하고 있는 거대한 질서체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우주의 법칙은 우리가 그것을 느끼든 못 느끼든, 알든 모르든 간에 우리의 인식과는 무관하지만 일관되게 작용하고 있다. 자연계 속의 모든 생물이나 인간은 그 법칙 아래서 움직이고 살다가 사라지는 한시적 존재일 뿐이다. 그런데, 이처럼 거대한 우주계에는 변하지 않는 질서가 존재하게 마련이다. 만일, 우주계의 질서가 수시로 변하든지 지역에 따라 달라진다면 우주는 존재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변하지 않는 우주법칙을 탐구하려는 것이 모든 학문의 궁극적 목표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우주의 법칙>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러 진리의 강들은 흐르고 흘러서 마지막으로 <진리의 바다>에 이르게 마련이다. 그곳이 바로 진리의 원천이요 진리의 형체가 숨쉬는 곳이며, 진리가 베일을 벗고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다. 그러면, <진리의 바다>란 과연 무엇일까? 그 마지막 베일을 걷고 보면 그것은 놀랍게도 우주와 우주의 법칙을 만들고 운용하시는 우주의 창조자인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 그 하나님이 우주를 만드시고 일정한 우주의 법칙에 따라 우주를 운행하시기 때문에 만물이 조화롭게 돌아가며 생존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찾아 헤메던 진리의 본체는 다름 아닌 창조주였던 것이다(그림 1).
그러면, 이러한 창조주는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최종적인 물음에 우리는 봉착하게 된다. 이것은 분명 믿음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과학의 문제가 아닌 것도 아니다. 학문적인 문제이면서 개인적 선택을 요구하는 문제이다. 학문적 문제라 함은 창조주가 실존하고 우주를 만드신 분이라면 창조론적으로 자연현상을 설명해야 합리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주를 공부한다는 것은 자연과학의 세계를 넘어 신학과 철학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자연과학만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서 물질계를 연구대상으로 하는 자연과학과 형이상학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인문, 사회과학이 서로 만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절감하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1,500 BC) 기록물인 성경(Bible)에서는 “만물이 주(主)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갈 것“(롬11;36)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여기서, 주(主)란 예수를 지칭하는 말이다. 예수가 우주를 만들고 운행하며, 만물이 궁극적으로는 그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학문을 깊이 탐구하면 궁극적으로는 진리의 본체인 예수그리스도와 만나게 된다는 말이다. 이것이 학문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사람들은 동의나 거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에 속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선택은 학문적 선택이면서도 인생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성경에 기초한 기독교사상은 헬레니즘과 더불어 서양학문의 근간을 이루어 왔으며, 세계사적으로 모든 분야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그대로 믿는 성경적 창조론(biblical creationism)이 다윈의 진화론(19C)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서양학문을 지배하였다. 이와는 달리, 성경기록이나 진화론과 관계없이, 절대자의 지적설계에 의존치 않고서는 자연계의 기원이나 운행에 대해 과학적인 해답을 얻을 수 없다고 보는 입장이 과학적 창조론(scientific creationism)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절대자란 창조주가 될 수도 있고, 자연법칙을 지칭할 수도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과학적 창조론은 범신론적인 성향을 내포한다. 성경적 창조론과 과학적 창조론은 일부 주장에서는 일치하지만 다른 부분도 많다. 그러나, 진화론과 대치된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과학적 창조론은 후일, 유신진화론의 탄생을 예고하는 신호탄이기도 하였다.
(5) 진리의 목적
우주(universe, cosmos)는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질서체계(orderness, cosmos)이다. 질서가 무너지면 우주는 존립자체가 불가능하다. 이러한 질서는 생명을 살리기 위한 것이며, 그 중에서도 만물의 영장인 사람을 위한 것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모든 질서의 지향방향은 생명을 살리는 쪽으로 나가야 한다. 생명을 최우선으로 하고, 인간성을 꽃피우며, 자유, 정의, 진리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우리는 이미 역사를 통하여 ‘지식에 지식만을 더하는 학문’은 인류에게 해로운 역기능을 했던 많은 사건들을 보아 왔다. 따라서, 이러한 잘못된 역사가 더 이상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는 파수군의 역할을 해야 한다. 참다운 진리는 사람을 얽매는 것이 아니라, 자유케 한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학문의 목적인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세 학문 간에 경계선을 긋는 일은 부질없는 노릇인지도 모른다. 오늘의 자연과학은 그 연구대상이 실험 가능한 물질계(物質界)로 국한이 되어 있는 것은 16세기부터 베이컨과 로크의 귀납적 경험론의 도입, 그리고 데카르트와 라메뜨리의 생명기계론(生命機械論)이 과학자들에게 널리 수용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는 학제 간에 구분이 없었다. 그래서, 옛날에는 많은 학자들이 철학자이면서 동식물학자요, 의학자이면서 수학자이기도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이면서 동물학자였으며, 데카르트는 철학자이면서 수학자요 물리학자였고, 다빈치는 예술가이면서 해부학자였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베이컨을 비롯한 경험주의자들은 자연과학을 발전시킨 방법론을 제시한 공로자들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학문의 궁극적 목적인 진리를 발견치 못하도록 오도한 책임도 아울러 져야 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자연과학자에게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창의와 영감의 원천이다. 반대로, 인문과학자와 사회과학자에게는 자연과학이 추상적 연구대상에 대한 실증의 수단이 된다. 따라서, 물질계를 연구대상으로 한정한 오늘의 자연과학은 진리의 본체를 규명하는 데 있어서 구조적인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진리는 형이하학이 아닌 형이상학의 영역에 숨어 있으며, 학제의 연계를 통해서만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형이하학적인 생명활동은 형이상학적인 생명이 연출하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물질계로 한정된 자연과학의 학제는 일정한 부분을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을 보강하는 방향으로 개편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인문, 사회과학분야에 대해서도 역으로 적용되는 말이다.
출처 - 잃어버린 생명나무를 찾아서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451
참고 :
학문의 목적과 역사 1
1. 학문의 목적은 무엇인가?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이다(Homo sapiens). 그러나, 연약한 존재이기에 파스칼은 생각하는 갈대(thinking reed)라 하였다.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 왜 태어나 살며, 사는 동안 왜 고통은 끊이지 않고, 결국은 죽는 것일까? 죽음은 무엇일까? 죽은 후에 천당과 지옥은 있을까? 그리고, 인간을 심판한다는 신은 정말로 존재할까? 우주만물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우주와 인간 사이엔 무슨 관계라도 있는 것일까? 간단하게는 얻을 수 없는 이러한 질문들을 수없이 되뇌이며 우리 조상들은 살아 왔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것이었다. 그래서, 학문의 출발지라는 그리스에서는 자연(동물, 식물, 광물, 우주, 인간)에 대하여 연구하는 자연철학(natural philosophy)이 곧 학문의 출발점이었다. 자연철학은 자연의 기원과 존재 및 그 운행원리(변화, 운동, 소멸)에 대해 연구하고, 거기서 얻은 지식(sophia)을 사랑하여(philia) 학습하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한 연구로 얻은 지식은 동물지(動物誌 animal history), 식물지(植物誌 plant hitsory), 광물지(鑛物誌 mineral history), 자연지(自然誌 natural history), 존재론(存在論 ontology) 등의 이름으로 기록되어 전해 내려온다.
자연철학은 중세 말에는 자연의 역사에 대해 연구하는 박물학(博物學 natural history)으로, 근세에는 여러 갈래로 분과된 학문(分科的學問), 즉 과학(科學)으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 <과학>(science)이라는 말은 라틴어의 지식(scientica)에서 유래한 것으로, 지금은 자연과학(natural science), 인문과학(cultural science), 사회과학(social science)으로 나누고 있다. 브리타니카는 무생명체를 다루는 물리과학(physical science), 생명체를 다루는 생물과학(biological science), 인간사회를 다루는 사회과학(social science), 및 통합과학(combined science) 등으로 나누고 있다. [Britanica Encyclopedia, S-Sound, Vol. 22, pp 61-61e, 1974] 이처럼, 학문이란 배우고 익히는 것(learning)이며,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얻어진 체계화된 지식(science)을 일컫는 말이다.
선인들은 학문의 목표가 자연과 인간의 본질을 규명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달리 말해서 학문의 목적이 진리의 탐구라는 말이다. 그런데, 진리란 무엇이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은 매우 기본적이면서도 궁극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나는 학문의 목적이 진리의 탐구에 있으며, 영원불멸의 진리는 하나뿐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이 글을 통하여 그것을 나타내고자 한다. 따라서, 이 글은 단순히 ‘지식에 지식을 더 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실체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소개하려는 데 촛점’을 맞추려 한다. 이러한 기술자세에는 주관이 개입될 소지가 많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주관적이긴 하나 내 나름대로는 학문적 객관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시중에 나도는 대부분의 고전들도 내용적으로는 저자들의 주관적 시각으로 일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주관이 어떤 면에서는 차별성과 독창성(distinction & originality)을 제공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학문이란 그러한 개성있는 주장들이 다양하게 제시되면서 논쟁하며 발전해 가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오늘날의 학계에서는 실험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진화론이 흡사 실증된 이론인 양 자연과학의 이름으로 가르쳐지고 있는 것은 우려할만한 일이다. 본인이 본서를 기술하게 된 동기는 진화론의 오류들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인류사에 끼친 해악이 너무나 컸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서는 생명과학의 주제들에 대하여 진화론적 견해를 먼저 소개한 후, 이에 대한 창조과학적 비판을 병기하여 두 이론을 비교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창조론적 시각이 현대과학의 논리에 더욱 부합함을 많은 자료를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이 책을 쓰면서 나는 진리를 찾는 길이 얼마나 어렵고 험난한 가시밭길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진리가 불의한 세력에 의해 가리워져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면, 지금부터 독자 여러분과 같이 타임캡슐을 타고 우리 선조 아담이 잃어버린 생명나무의 행방을 찾아 과거의 세계로 떠나 보기로 하자.
2. 진리란 무엇인가?
(1) 철학, 과학, 사상, 종교의 관계
사람들은 옛날부터 진리를 찾느라 노력해 왔으나, 진리는 베일 속에 제 몸을 감춘 채 나타나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수많은 현인들이 진리를 찾아 헤메었으나, 뚜렷한 해답을 얻지 못한 채 지금까지도 구도행렬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절망하였고, 부질없는 짓이라 자포자기 했으며, 어떤 이들은 자신이 깨달은 내용이 진리라 속단하고 사람들을 오도(誤導)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양상은 동서양의 역사를 통하여 유사하였다.
인간이 진리를 찾는 방식은 종교와 철학 및 사상의 형태로 나타났다. 종교의 주된 관심은 우주의 기원(起源)이 무엇이며,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하는 두 명제에 집중된 것이었다. 종교(宗敎 religion)는 절대자와 내세관에 대한 믿음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반하여, 철학은 절대정신을 가지고 있으나 내세관을 필수조건으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종교와 구별된다.
종교에서 말하는 절대자(絶對者)란 만물을 창조하고 자연법칙을 만든 초월적 존재이거나(人格神論), 우주법칙 자체(汎神論)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전자에는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가, 후자에는 힌두교, 불교, 도교를 비롯한 거의 모든 종교들이 속한다. 유교는 절대정신(仁)을 가지고 있으나 내세관이 없으므로 종교라기보다는 사상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내세관(來世觀)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것이므로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믿음은 과학적으로 실험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종교는 실험과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학문의 궁극 목표인 진리를 탐구하려면 실험과학만으로는 한계를 지니게 되므로, 종교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실험과학과 종교는 경쟁 아닌 보합적이고, 표리적인 관계라 할 수 있다.
자연과 인간에 대하여 철학(哲學 philosophy)은 이성(理性)을 통하여 객관적이며 분석적으로 접근하려는 데 반하여, 사상(思想 thought)은 주관적인 추론이나 감성적(感性的) 인 직관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헤겔(Hegel)은 일찍이 서양에서는 철학이 발달한 반면, 동양에서는 철학(학문) 보다는 사상이 발달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아울러, 철학은 후일 학문으로 발전할 수 있었으나, 사상은 객관성의 결여로 학문화되지 못했다고 비판하였다. [甲田 烈, 山本伸裕; 哲學, pp 20-37, Kanki Publishing Co, 東京, 1999]
논리성과 객관성을 필수조건으로 하는 철학은 후일 서양에서 자연과학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특히, 과학의 혁명기(15-16C)와 계몽주의(啓蒙主義 Philosophy of Enlightment) 시대를 거치면서 철학은 ‘관찰과 실험’에 의한 실증적인 분야로 더욱 세분화되었다. 이에 따라, 종합적 성격의 철학이라는 이름의 학문은 인문과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으로 나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세분화 된 과학은 학문본연의 목적인 진리를 규명하기에는 뛰어 넘을 수 없는 한계를 스스로 지니게 되었다. 전문화는 되었지만 부분적이기에 가지는 한계성인 것이다. 이러한 한계성을 인문과학의 한 분야로 전락한 근세철학에서는 직관(直觀)과 자기비판(自己批判)으로 해결하려 하였던 것이다. [Okuyama Minoru; 基督敎界ニ ォケル 創造ニ 關スル 異ナル 見解, pp 3-4, 創造ニ 關スル 一日セミナ, Ochanomizu Center, Mar. 20, 東京, 1993].
이상에서 보았듯이, 진리를 찾으려는 인류의 노력은 세 가지의 형태로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즉, 사상은 감성과 주관으로, 철학은 이성에 의해 논리적으로, 그리고 종교는 믿음으로 접근하였던 것이다.
(2) 동양의 구도활동
동양에서는 옛날부터 진리를 도(道)라 하였고, 많은 선인들이 그것을 찾아 헤메었다. 도를 깨달은 사람은 성인과 현인으로 추앙받았으며, 그들의 가르침은 종교의 형태로 후계자들에게 이어졌다. 그들이 깨달았다는 대표적인 사례를 소개한다.
동양에서 정신적 유산을 가장 많아 남긴 곳은 인도라 할 수 있다. 고대인도에서 발흥했던 브라만교(Brahmanism)의 경전인 우파니샤드(Upanishad 30C BC)는 신(deva 하늘)에 대한 찬가인 베다(veda)를 해설한 책이다. 베다는 아리안족이 기원전 18세기경에 가지고 들어 온 경전이다. 그 내용에 의하면, 우주의 근원은 브라만(Brahman 梵)이며, 우주의 창조자인 브라만(Brahman), 파괴자인 쉬바(Shiva), 보존자인 비슈느(Vishne)의 삼신이 일체(trimurti)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개인 속에 내재하는 원리가 아트만(atman 眞我)이며, 범아는 일체(梵我一體)라 하였다. 전생(前生)의 업보(業報 karma)에 따라 윤회전생(輪回轉生)을 하게 되므로, 범아일치(梵我一致)로 윤회에서 해탈해야 한다고 말한다. 엄격한 카스트 제도(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를 기반으로 출현한 이러한 브라만교는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인도인으로 태어나 브라만이 되어야 하며, 제사, 지혜, 봉헌을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러한 사상은 기원전 1,500년경 힌두교(Hinduism)로 계승되어 인도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힌두교는 인과응보, 윤회설 등의 브라만 사상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 그 후 8백여년(300BC-500AD)을 지나면서 힌두교의 교리는 더욱 체계화되었다. 지금과 같은 근대적 교리는 8세기에서 15세기 사이에 다시 보강된 것이다. 흥미있는 사실은 이 때에 근대교리를 확립한 사람들이 유물론적이고 숙명론적이며 허무주의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J.B. 노스원저, 尹以欽역; 世界宗敎史(下), pp 581-624, 762-839, 玄音社, 서울, 2000]
기원전 6-7세기경에는 이러한 힌두 교리에 반발하여 많은 자유사상가들이 일어났다. 그들은 산과 들의 나무와 바위에 앉아 부동의 자세로 진리를 깨달으려 정진하였다. 석가도 그들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 결과, 탄생한 대표적인 종교가 자이나교(Jainaism)와 불교(Buddhism)였다. 두 종교의 공통점은 인도인의 최대 관심사인 업(業 karma)과 윤회로부터의 해탈(解脫)을 이루는 방안으로 현실부정과 고행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전자가 철저한 고행을 주장한 데 반하여, 후자는 중도(中道)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카피라성의 왕자였던 석가(Gautama Shidata)는 인간의 생노병사(生老病死)에 대해 고민하다가 29세의 젊은 나이에 출가하여 보리수 밑에서 6년간 수행하며 진리를 깨달았다고 하였다. 부처는 산스크리트어로 붓다(Buddha)라는 말인 데 ‘진리를 깨달은 자’ 라는 뜻이다. 그가 깨달은 내용(大覺)은 '인생은 고해'(苦海)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인간의 고통(苦)은 욕심(集)에서 오므로 욕심을 없애야(滅) 참다운 깨달음(道)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사성체(四聖諦)라 부른다. 이러한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윤회(輪廻)에서 해탈(解脫)한 부처(神)가 되어 열반(nirvana)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는 브라만(梵 하늘)과 아트만(참나)의 존재를 부인하고 자아와 세계는 관계성에 의해 성립하며, 우주에는 변화만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괴로움은 12 가지의 인연(전생2 + 현생8 + 내생2) 때문에 오는 것이며,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계(現象界)는 색(色=물질, 육체), 수(受=감각, 지각), 상(想=인간과 세계의 개념구성), 행(行=의지, 기억), 식(識=순수의식)의 오감으로 형성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악이 존재하는 것은 절대자가 없다는 증거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절대자가 없다면 악의 개념이나 선악의 기준을 설정할 수 없다는 모순논리를 안게 되었다.
불교는 자리적(自利的)인 구도에 정진하여 깨달음의 최고 경지(阿羅漢果)에 들어가자며 사체설(四諦說)를 강조하는 소승불교(hinaya 500BC-기원)에서 출발하였다. 그 후, 중국의 달마대사(達磨大師 520AD) 등이 제행무상제법무아(諸行無常諸法無我)의 공(空)사상과 연기설(緣起說)을 주장하며, 중생의 구원을 외친 대승불교(mahaya 기원-500AD)의 교리를 수립하였다. [윤이흠 역; ibid, pp 644-761], [Hiro Sachiya; 佛敎ト 基督敎, pp 13-17, 新潮社, 東京, 1986] 이처럼, 불교는 초월적인 인격신을 부정하며, 우주의 원리만을 인정하는 범신론(pantheism)임을 알 수 있다.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는 인격신에 의한 창조설을 부인하며, 모든 것이 무시무종(無始無終)하고 우주에는 변화만 있을 뿐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인도에서 일어난 이러한 종교들의 공통점은 자연 속에 신의 성품이 들어 있는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자연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게 되어 자연과학의 발달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고대중국은 왕들이 백성들을 대표하여 유일신인 상제(上帝)에게 매년 제사를 드리던 제정일치(祭政一致)의 국가였다. 기원전 11-15세기의 상(商)과 은(殷)나라에서는 하늘의 옥황상제에게 제사했으며, 주(周)나라 때에도 하늘(天)에 제사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권선징악(勸善懲惡) 사상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전광호/우제태 공역; 고대한자 속에 감추어진 창세기 이야기, pp 15-31, 도서출판 예향, 인천, 1996, 원저는 Ethel R. Nelson & E. Broadberry; Genesis and the Mystery Confusius Couldn't Solve, Concordia Publishing House, St. Louis, 1994].
기원전 10세기부터는 음양의 조화로 만물의 근본물질들(水火木金土)이 생성되었다는 음양오행사상(陰陽五行思想)이 나타나 유교, 도교와 더불어 중국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였다. 그러다가, 주나라 때에 북방 유목민의 침입이 잦아지면서 이에 위험을 느낀 귀족들이 군대를 양성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황제는 상대적으로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하면서 전통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일곱 국가들(진, 초, 연, 제, 한, 위, 조)이 할거하는 춘추전국시대(722-221 BC)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러한 국가간의 경쟁적 상황에서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출현하여 현세적인 학문을 꽃 피우게 하였다.
노자(老子 604 BC-?)와 장자(壯者 365-290 BC)는 자연을 중시했으나,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이해하고 인간이 자연으로 돌아가야 행복하다는 신비주의적이고도 회의론적인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道)를 설파하였다. 노자의 사상이 집약된 도덕경(道德經)은 우주의 근본인 도(道)에서 기(氣)가 나오고, 기는 음기와 양기로 나뉘며, 이들의 조화로 나온 화합물에서 만물이 유래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존재는 비존재로부터 나온다고도 하였다. 그의 가르침은 도교(道敎 Taoism)의 형태로 유교와 더불어 중국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였다. 공자(551-479 BC)와 맹자(371-289 BC)의 가르침을 유교(儒敎 Confucianism)라 하며, 이들의 사상은 사서(四書; 논어, 대학, 중용, 맹자)와 오경(五經; 시경, 서경, 춘추, 역경, 예기)에 집약되어 있다. 이들은 인간이 공동선(共同善)을 이루려면 다섯 덕목(仁, 義, 禮, 智, 信)을 갖추어야 한다고 하였다. 공자는 제자인 계로(季路)가 죽음에 대해 묻자 “삶에 대해서도 모르는 데 어찌 죽음을 알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이 밖에도, 묵자(博愛主義), 한비자(法治主義), 순자(性惡說), 맹자(性善說) 등이 나타나 다양한 통치이념을 제시하였다. 이처럼, 중국의 제자백가들은 인간사이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반면, 자연과 우주의 기원이나 현상에 대해서는 비교적 무관심한 편이었다. [윤이흠역; ibid, pp 865-1011]
그 후,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 뒤이어 일어난 한(漢)나라가 도교를 국교화 함으로써 중국의 유일신 사상은 급속히 다신론(多神論 polytheism)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후, 송(宋)의 주자(朱子 1130-1200)는 만물이 음(陰)과 양(陽), 이(理)와 기(氣)의 두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 이원론적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을 집대성하여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의 성리학(性理學)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우리나라에서는 옛날부터 하늘을 숭배하는 하늘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다. 환단고기(桓檀古記)와 태백일사(太白逸史) 등에 의하면 환인(桓因 하늘님)이 아들 환웅(桓雄)에게 비(雨師=북), 바람(風伯=거울), 구름(雲師=검)의 삼부인(三符印)을 주어 세상으로 내려 보냈다 한다. 그는 곰녀(熊女)와 결혼하여 반신반인(半神半人)인 단군왕검(檀君王儉 2370 BC)을 낳았다는 것이다. 단군은 아사달에 나라를 세우고 배달겨레를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으로 다스렸다고 하였다. [임승국 번역/해석; 환단고기, pp 15-22, 정신세계사, 서울, 1986].
삼국초기에는 중국으로부터 불교가 전래되어 고려조까지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배불숭유책을 내세운 조선조 초기에는 유교와 주자학에 영향을 받은 성리학(性理學)이 이퇴계과 이율곡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조선조 말기에 최재우는 ‘사람이 곧 하늘’(人乃天)이라는 동학(東學, 天道敎)을 창도하였다.
일본은 다신사상이 지배하는 나라이다. 원시신도(原始神道)에 의하면, 고천원(高天原 Takamigahara)에서 제사를 받는 우두머리 신인 모노카미(Monokami 本神)에게 옷을 지어주며 제사를 드리는 천조대신(天照大神 Amateras Okami)이 게으름을 피우다가 모노카미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다른 신들의 청원으로 다시 살게 된 천조대신은 그 후 영신(靈神 Tamakami)이 되었으며, 그가 낳은 후손이 천황(天皇)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천황의 즉위식 때에는 모노카미에게 제사를 드리는 신상제(新嘗祭 ninamesai)를 거행한다. 이세신궁(伊勢神宮)이 대표적인 천황을 받드는 절간(神社)이다. [飛鳥昭雄, 三神タケル; 天照大神ノ謎, pp 42-46, 學習硏究社, 東京, 1998].
일본서기(日本書紀)에 기록된 이러한 내용을 근거로 그들은 일본을 신의 나라로 자처하면서 동아시아 제국에 대한 침략의 근거로 삼기도 하였다. 이러한 천손신화(天孫神話)는 일본인의 조상이 큐슈남부의 아소산(峨蘇山)에서 솟아 나왔다는 지신신화(地神神話)와 대립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흘러 들어간 것으로 일본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천황의 시조가 비류(沸流)라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어 우리의 관심을 끈다. [飛鳥昭雄外; ibid, pp 137-140]
출처 - 잃어버린 생명나무를 찾아서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450
참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