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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성경

미디어위원회
2004-10-14

창세기와 한자 (1)

이재만 


     만약 창세기 1장에서 11장까지의 역사가 사실이라면 성경만 아니라 다른 기록에도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들이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진화론적 역사관에서 벗어 버리고 조심스럽게 살펴보면 여러 곳에서 이러한 것들을 찾을 수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중국 문자인 한자이다. 앞으로 3회에 걸쳐 그냥 지나치기 아까운 이들의 내용을 알아보기로 한자.


가장 오래 전에 이러한 흥미로운 사실을 기록한 서양 사람은 James Legge(1852)라고 하는 사람인데, 후에 싱가포르에 거주하고 있던 중국인 Kang 선교사에 의해서 '창세기와 한자' (1950)라는 제목의 책으로 수집되었다. 1979년 치과의사인 Nelson과 Kang 선교사의 노력으로 '창세기 발견 (Discovery of Genesis)' 이라는 책을 출간하게 되었으며, 일리노이주 콘콜디아 대학장에게 '20세기 성경 고고학의 최대 발견' 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한자는 지금으로부터 4500년경, 그러니까 약 BC 2500년 경에 만들어졌다고 전해지지만, 요즈음은 이보다 2-300년 더 최근에 만들어진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시대는 성경적으로 바벨탑사건 시기이다. 한자는 영어나 한글과 같은 소리글자가 아니라 뜻글자이다. 그러므로 한자의 내용을 보면 만들 때 만든 사람의 생각을 반영한다. 그런데 이들 한자 중에 많은 것들이 성경, 특별히 창세기의 내용을 그대로 담고있는 놀라운 이야기들이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큰 배 船(선) 자는 배 舟, 여덟 八, 입 口로 구성 되어있다. 여덟 명의 사람(입구 자는 일반적으로 식구, 인구 할 때와 같이 사람을 의미한다)이 한 배에 탄 모양이 큰 배 船 자를 의미하고 있다. 왜 하필이면 여덟 명이 한 배에 탄 모양을 큰 배라고 하였을까? 창세기 노아의 방주에는 ”노아가 아들들과 아내와 자부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고 (창세기 7:7)” 라고 방주에 8 명이 들어갔다고 묘사하고 있다.


만들 造(조) 자는 생기를 준다는 의미인 삐침 변, 흙 土(토), 입 口(구), 걷는다는 의미를 주는 책받침 변으로 되어있다. 흙에 생기를 주니 사람이 되어 걷는 의미를 보여준다. 하나님이 첫 인간 아담을 지을 때 모습을 보여준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세기 2:7)”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먹지 말라고 한 나무가 두 그루 있다. 하나는 선악과이고, 다른 하나는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금했던 생명나무이다. 금할 禁(금) 자는 두개의 나무 木, 木(목) 자와 볼 示(시) 자로 되어있다. 한자에서 볼 示 자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神(신), 祈禱(기도), 禮拜(예배), 祭祀(제사) 등의 글자에 볼 示 변으로 되어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세기 3:24)”


두 개의 나무와 같이 있는 글자가 있는데 바로 탐할 婪(람) 자 이다. 두 개의 나무(목)는 역시 선악과와 생명나무이고, 앞에 있는 여자(녀)는 하와일 것이다.  어떻게 나무 두 그루와 여자가 있는 것이 '탐하다' 라는 뜻이 되었을까?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창세기 3:6)”.  하와가 나무를 보았을 때 탐스러웠다라고 성경에 기록되어있다.

미디어위원회
2004-07-26

언어와 말 (Language and Speech) 

: 최초의 사람은 언어 능력을 부여 받아야만 한다

Dr. Walt Brown 


1) 언어 (Language)

7 개월 된 어린 아기들도 문법적인 규칙을 배우고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1 게다가, 사람과의 접촉 없이 자라난 36 건의 어린이에 대한 연구보고에 의하면, 언어는 반드시 다른 사람에 의해서 배워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은 스스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최초의 사람은 언어 능력을 부여 받아야만 한다. 언어가 없는 비인간 사회에서 언어가 진화하여 생겨났다는 증거는 없다.2 정말로 언어는 어휘와 문법을 필요로 한다.

엄청난 노력을 들여, 조련사들은 침팬지와 고릴라들에게 수백 개의 단어들을 인식시키고, 200 여개의 신호들 가리키기, 제한적인 수신호 등을 가르쳐 왔다. 이러한 인상적인 업적은 영상매체에서 동물들의 성공으로 가끔 과장되어 편집되곤 하였다. (몇몇 초기의 사례들은 조련사들의 숨어서 보내는 신호들에 의해 결점을 남기기도 하였다3)       

원숭이들은 야생에서 이러한 기술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동물에게 전달하지도 않는다. 훈련된 동물이 죽었을 때, 조련사의 투자도 끝이 나는 것이다. 또한, 훈련된 원숭이라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문법적인 능력을 가지지 못한다. 단지 여러 생각들을 소수의 단어로 표현할 뿐이다. 언어가 사람이 아닌 다른 동물에 존재하거나, 진화했다는 어떠한 증거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종족들은 언어를 가지고 있다. 

만약 언어가 진화했다면, 초기의 언어들은 간단해야만 한다. 그러나 반대로 언어 연구에 의하면, 고대로 갈수록 (예로 라틴어 200 B.C, 그리스어 800 B.C., 산스크리트어 1500 B.C.) 언어들은 더 복잡해져서, 구문, 가정, 성, 화법, 태, 시제, 동사형태 등의 다양한 용법들을 가지고 있었다. 수많은 증거들에 의하면 언어는 오히려 퇴화되었다는 것이다. 즉, 언어는 더 복잡해지는 대신에 단순해졌다는 것이다.5 대부분의 언어학자들은 단순한 언어에서 복잡한 언어로 진화했다는 생각을 거부하고 있다.6 (See Figure 137 on page 257.)   

 

2) 말 (Speech)

말은 사람에게서만 유일하다.사람은 다양한 소리를 낼 수 있는 해부학적 구조(입, 목구멍, 혀, 후두 등)와, 관념적인 생각들을 배우고 전달할 수 있는 고도로 복잡한 회로망인 뇌를 함께 가지고 있다. 단지 소수의 동물만이 사람의 소리 일부를 근접하게 낼 수 있을 뿐이다.       

사람의 후두(larynx)는 목 아래에 있기 때문에, 긴 공기 기둥(a long air column)이 성대 위에 놓여있게 된다. 이것은 모음을 소리내는 데에 중요하다. 원숭이들(Apes)은 모음을 분명하게 발음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긴 공기 기둥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혀 뒤쪽은 목 깊숙이 확장되어 있어서, 소리가 공명을 일으키는 것을 돕도록 공기흐름을 조절한다. 원숭이는 납작하고 수평적인 혀를 가지고 있어서, 소리의 공명을 일으킬 수 없다.8 원숭이가 말을 할 수 있는 모든 생리구조를 진화를 통해 갖게되었다 할지라도, 언어의 기술, 특히 문법과 어휘를 배우기 위한 복잡한 회로망인 뇌가 없다면 쓸모 없게 되는 것이다.   

 

*참조 : The origins of language: an investigation of various theories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18_3/j18_3_24-27.pdf

The origin of language and communication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17_3/j17_3_93-101.pdf

The development of languages is nothing like biological evolution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1638

 

Reference and Notes

1. G. F. Marcus et al., 'Rule Learning by Seven-Month-Old Infants,” Science, Vol. 283, 1 January 1999, pp. 77-80.

2. Arthur Custance, Genesis and Early Man (Grand Rapids: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75), pp. 250-271.

'Nobody knows how [language] began. There doesn’t seem to be anything like syntax in non-human animals and it is hard to imagine evolutionary forerunners of it.” Richard Dawkins, Unweaving the Rainbow (Boston: Houghton Mifflin Co., 1998), p. 294.

3.'Projects devoted to teaching chimpanzees and gorillas to use language have shown that these apes can learn vocabularies of visual symbols. There is no evidence, however, that apes can combine such symbols in order to create new meanings. The function of the symbols of an ape’s vocabulary appears to be not so much to identify things or to convey information as it is to satisfy a demand that it use that symbol in order to obtain some reward.” H. S. Terrance et al., 'Can an Ape Create a Sentence?” Science, Vol. 206, 23 November 1979, p. 900.

'... human language appears to be a unique phenomenon, without significant analogue in the animal world.” Noam Chomsky, Language and Mind (Chicago: Harcourt, Brace & World, Inc., 1968), p. 59.

4.'No languageless community has ever been found.” Jean Aitchison, The Atlas of Languages (New York: Facts on File, Inc., 1996), p. 10

5. David C. C. Watson, The Great Brain Robbery (Chicago: Moody Press, 1976), pp. 83-89.

'Many other attempts have been made to determine the evolutionary origin of language, and all have failed. ... Even the peoples with least complex cultures have highly sophisticated languages, with complex grammar and large vocabularies, capable of naming and discussing anything that occurs in the sphere occupied by their speakers. ... The oldest language that can reasonably be reconstructed is already modern, sophisticated, complete from an evolutionary point of view.” George Gaylord Simpson, 'The Biological Nature of Man,” Science, Vol. 152, 22 April 1966, p. 477.

George Gaylord Simpson acknowledges the vast gulf that separates animal communication and human languages. Although he recognizes the apparent pattern of language development from complex to simple, he cannot digest it. He simply says, 'Yet it is incredible that the first language could have been the most complex.” He then shifts to a new subject. George Gaylord Simpson, Biology and Man (New York: Harcourt, Brace & World, Inc., 1969), p. 116.

'There is no reason to suppose that the ‘gaps’ [in language development between apes and man] are bridgeable.”  Chomsky, p. 60.

'The evolution of language, at least within the historical period, is a story of progressive simplification.” Albert C. Baugh, A History of the English Language, 2nd edition (New York: Appleton-Century-Crofts, Inc., 1957), p. 10.

'The so-called primitive languages can throw no light on language origins, since most of them are actually more complicated in grammar than the tongues spoken by civilized peoples.” Ralph Linton, The Tree of Culture (New York: Alfred A. Knopf, 1957), p. 9.

6.'It was Charles Darwin who first linked the evolution of languages to biology. In The Descent of Man (1871), he wrote, ‘the formation of different languages and of distinct species, and the proofs that both have been developed through a gradual process, are curiously parallel.’ But linguists cringe at the idea that evolution might transform simple languages into complex ones. Today it is believed that no language is, in any basic way, ‘prior’ to any other, living or dead. Language alters even as we speak it, but it neither improves nor degenerates.” Philip E. Ross, 'Hard Words,” Scientific American, Vol. 264, April 1991, p. 144.

'Norm Chomsky ... has firmly established his point that grammar, and in particular syntax, is innate. Interested linguistics people ... are busily speculating on how the language function could have evolved ... Derek Bickerton (Univ. Hawaii) insists that this faculty must have come into being all at once.” John Maddox, 'The Price of Language?” Nature, Vol. 388, 31 July 1977, p. 424.

7. Mark P.  Cosgrove, The Amazing Body Human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7), pp. 106-109.

'If we are honest, we will face the facts and admit that we can find no evolutionary development to explain our unique speech center [in the human brain].”  Ibid., p. 164.

8. Jeffrey T. Laitman, 'The Anatomy of Human Speech,” Natural History, August 1984, pp. 20-26.

'Chimpanzees communicate with each other by making vocal sounds just as most mammals do, but they don’t have the capacity for true language, either verbally or by using signs and symbols. ... Therefore, the speech sound production ability of a chimpanzee vocal tract is extremely limited, because it lacks the ability to produce the segmental contrast of consonants and vowels in a series. ... I conclude that all of the foregoing basic structural and functional deficiencies of the chimpanzee vocal tract, which interfere or limit the production of speech sounds, also pertain to all of the other nonhuman primates.” Edmund S. Crelin, The Human Vocal Tract (New York: Vantage Press, 1987), pp. 83-88.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creationscience.com/onlinebook/IntheBeginningTOC.html

출처 - CSC


미디어위원회
2004-07-26

언어, 창조, 그리고 속사람 

(Language, Creation And The Inner Man)

Henry M. Morris 


인간 언어의 독특성

인간을 원숭이뿐만 아니라 여타의 동물들과 구별짓는 가장 중요한 물리적 능력은 아마도 인간이 갖고 있는 괄목할만한 언어능력일 것이다. 인류 안에서 다른 종들과 추상적이며 상징적인 언어로 의사전달을 교환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만이 갖고 있는 유일무이한 특성이다. 그런데 진화론자들은 이와 같은 인간의 언어능력과 동물들이 통신수단으로 갖고 있는 꿀꿀거림, 지저귐, 꽥꽥거림과의 사이에 가로놓인 엄청난 심연에 아직까지 연결다리를 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침팬지의 언어습득 잠재력에 관한 황당무계한 주장을 들고 나온 연구자들이 있는가 하면, 동물의 발성하는 소음이 인간의 언어로 진화될 수 있는 개연성에 관한 고도의 상상력을 전개한 연구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관념들은 실질적인 과학적 관찰이나 증거에 근거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의 두뇌는 침팬지의 그것과는 너무도 다르다. 말을 조정하는 부분에 있어서 특히 그렇다. 아이잭 애시모브(Isaac Asimov)는 이렇게 언급하였다.

”일단 말을 할 수 있게 된 다음부터는 인간은 생각을 전하고, 또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정보를 의논하고 가르치고 저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그리고 말이 개발되고부터는 지성의 진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침팬지는 Broca's convolution (브로카의 뇌회(惱回), 뇌의 주름)이 부족하다. 그렇지만 침팬지도 어쩌면 의사교환(communication)의 싹을 가지고 있을는지 모른다. 만약에 뇌에 있는 그 부분(의사교환의 싹)이 진화하게 된다면 말이 급속하게 개발될는지도 알 수 없다.” 1

불행하게도 (비록 뇌 안에서 말을 조정하는 일은 'Broca's convolution'만 있으면 실질적으로 다 해결된다고 처도) 추상적인 생각이나 지적인 통화를 가능하게 하는 뇌회는 필요에 의해 '진화'가 그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가정해도 결코 얻어지지 않는다. 인간진화 가설의 최고 권위자들인 예일 대학의 인류학자 데이비드 필빔(David Pealbeam)과 하버드 대학의 지질학자 스테픈 굴드(Stephen Gould)는 각각 인간의 두뇌는 원숭이 두뇌의 단순한 확대 복사가 아니고, 결정적인 방법으로 질적인 차별성이 있다고 언급하였다.

”Homo sapiens는 원시인(primates)들 가운데서도 이 경향에서는 현저하게 이례(異例)에 속한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는 우리의 크기에 걸맞은 기대치와는 반대로 상대적으로 큰 뇌와 작은 얼굴로 진화하였기 때문이다. … Australopithecus africanus(가장 오래된 화석인간)는 상대적으로 작은 동물이었던 까닭에 둥근 두개골(braincase)를 하고 있다. 그런데 Homo sapiens는 큰 뇌로 진화되었으며, 또 소극적 상대생장(消極的 相對生長, negative allometry)에 대한 기대를 우회(迂廻)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특징을 나타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 유사성은 우연한 형상으로서 그것이 유전인자의 유사성의 증거는 되지 못한다.” 2

비록 창조론자들은 인간의 독특한 두뇌가 단순한 '진화'의 결과라고 하는 진화론자들의 허황된 신념에는 결코 참여하지 않지만, 이 인간두뇌의 독특한 특성으로 인해서 인간과 여하한 고등동물과의 사이에 연결다리를 놓을 수 없는 심연이 만들어졌다는 진화론자들의 의견에는 동의한다.

진화론자 죠지 게이로드 심슨(George Gaylord Simpson)은 언어에 관한 한 동물과 인간과의 사이에 진화론적 연결을 추적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인간의 언어는 동물들의 그 어떤 통신 체계와도 절대적으로 구별된다. … 그러나 우리 조상들이 언제부터 어떻게 해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는가 하는 문제를 알아낼 수 있을 개연성이 전무하지만은 않다.” 3

심슨은 언어학자이기보다는 차라리 생물학자이며 고생물학자이기 때문에, 보다 젊고 이론적인 언어학자들은 그가 자기 전문분야가 아닌 내용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의 언어의 진화론적 기원을 추적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현대 언어학자들은 오늘날 MIT의 언어학자 노암 춈스키(Noam Chomsky)교수를 '언어학의 세계적 선구적 석학'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 명칭은 뉴멕시코 대학교의 언어학부의 교수부장인 존 올러 박사 (Dr. John Oller)가 최근에 필자와 이 주제를 토론할 때에 붙여준 타이틀이기도 하다).  바로 그 춈스키 박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간의 언어는 다른 동물계에서 어떤 유사물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현상이다.” 4

동물의 잡음과 인간의 언어와의 사이에 있는 간격이 진화에 의해 연결된 적이 있었는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 춈스키 박사는 이렇게 진술하였다.

”인간언어와 동물잡음과의 사이에 있는 '간격'에 연결다리를 놓을 수 있다는 가정의 근거는 전무하다. '하등단계'에서 '고등단계'로의 진화론적 발전에 대한 가정은, 이 경우에 있어서는, 호흡으로부터 보행으로 진화론적 발전을 한다는 가정을 세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다.” 5

다시 말해서 그 어떤 비교로도 가정을 세울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이다!!

 

인간 언어의 기조적인 통일성 (The Underlying Unity of Human language)

춈스키를 비롯하여 많은 현대 언어학자들은 동물의 발성(發聲)과 인간의 말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들의 기본적 생각 패턴들 간에는 그들의 개별적인 언어들의 다양성에 상관없이 깊은 공통분모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즉, 모든 인간의 언어들 간에는 근본적인 연관성이 있다는 것과 인간의 언어와 동물의 '언어'와의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도 없다는 사실이다.

캘리포니아 바크레이 대학의 분자생물학 교수인 군터 스텐트(Dr. Gunther S. Stent) 박사는, 최근에 발표한 중요한 연구에서, 인간은 과학적 분석으로도 파악할 수 없는 어떤 확실한 근본적인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춈스키의 연구로부터 발전적 추론을 도출하고 있다.  

”춈스키의 지론(持論)에 의하면 언어문법은 소리와 의미의 짝을 맞추는(pairing) 어떤 확실한 변형법칙 체계다. 그 체계는 통사론적(統辭論的) 요소와 의미론적((意味論的) 요소, 그리고 음운논적(音韻論的) 요소로 구성되어있다. 표면구조(surface structure)는 음운론적 요소에 관한 정보를 내포하지만, 심층구조(deep structure)는 의미론적 요소에 관한 정보를 내포한다. 그리고 통사론적 요소는 표면구조와 심층구조의 짝을 맞춘다.” 6

춈스키와 그의 동료들은 '심층'구조와 '표면'구조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 언어학을 개발하고 구조언어학 (structural linguistics) 이라고 불렀다. 후자(표면구조)는 서로 다른 언어들의 일반적인 현상과 언어들 상호간에 번역이 가능한 현상들을 내포한다. 사람이 다른 언어를 습득할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 그 자체가 인류의 독특성과 근본적 통일성의 증거이다. 인간과 동물과의 사이에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심층구조'는 인간 자신의 기본적인 자의식적 사고의 구조이며, 불연속성 사고와 연쇄성 추리에 대한 직관적인 계통적 기술(formulation)이다. 사람이 남에게 자기 생각을 전달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목소리는 부족(部族, tribe)과 부족간에 광범하게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사고-체계는 엄연하고 인류들 상호간에 보편적이다.

”의미론적 요소는 불변이기 때문에, 이것은 모든 자연 언어의 구체화인 보편문법의 '보편적'인 측면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보편문법의 시간을 초월한 불변성은 인간심성의 본래 유전적 원인이 아닌 다른 원인에는 귀속시킬 수 없다. 그 이유는 구조언어학이 지향하는 일반적인 목표가 보편문법인 까닭이다.” 7

추측컨대, 만약 이 '보편문법 (universal grammar)' 이란 것을 확실히 알아낸다면, 그것은 인간의 언어기원의 열쇠를 제공해줄 것이다. 어쩌면 인간언어의 음운론적이며, 통사론적 구조는 물론 의미론적 내용까지도 풀 수 있는 열쇠를 마련해 줄는지도 모른다.

 

독특한 인간의 기원

창조론자들뿐만 아니라, 진화론자들도 최근에는 인류의 모든 종족들과 인종들이 단일종족에서 기원하였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초기의 모든 진화론자들은 인간의 다중(多重) 종족 기원을 믿었으며, 주요한 '인종들'은 각각 서로 다른 원인(原人) 계통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진화되어왔다고 생각하였다. 이 사상은 어렵지 않게 인종주의를 지향하게 되어 한 인종은 본래부터 다른 인종보다 우수하다는 믿음을 견지하게 하였다. 다시 말해서, 만약에 각각의 인종이 장구하고 독립적인 진화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면, 오랜 세월 무작위적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의 과정을 지나면서 서서히 그 종족의 독특한 개성을 전개시켰을 것이기 때문에, 다른 인종들 간에는 진화의 비율이 서로 다를 것임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결국 어떤 인종은 다른 인종들보다 고등한 인종으로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모든 19세기의 진화론 과학자들(다윈과 헉슬리를 포함하여)이 견지하였던 그와 같은 인종주의적 신념은 철두철미 문서화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8

그러나 인종주의는 현대 진화론자들에 의해서도 거부되어,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사회학적인 견지에서 평판이 좋지 못하다. 진화론자들도 요즘에 와서는 성경 말씀, 즉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사도행전 17:26)에 동의한다. 비록 지금에 와서 그들도 모든 현재의 인간집단들은 고대의 단일 주민(住民, population)에서 기원하였다는 것을 실질적으로 완전히 동의하지만, 정확한 인간계보에 관한 의견에 관해서는 전적으로 지리멸렬하고 있다. 원인집단으로 가정되었던 Australopithecines와 Homo erectus는 이들의 화석보다 더 오래된 연대의 진인(眞人, true man) 화석이 발견된 이후부터 더 이상 인간의 조상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1972년에 있었던 Leakey의 발견에 대한 온전한 평가를 여태껏 하지 못하고 있는 인간진화의 이론가들은 지금 더욱 더 난해한 문제들에 봉착하고 있다. 만약 인간 속(屬; genus)의 구성원이 4백만년 전에 번창하였다면, 그의 고대원인의 줄기로부터 최초의 인종 가지가 분리된 시기는 필연코 더욱 오래 전에 있어야 마땅할 것이다. 타이에브(Taieb)와 요한슨(Johanson)은 ”현대인의 인종계보를 거슬러 그 기원에 이르는 종전의 모든 이론들은 이제는 완전히 수정하여야만 할 것이라” 9 고 단언하였다.

프랑스의 국립과학원(French National Center for Scientific Research)의 모리스 띠에흐(Maurice Tieg)와 Case Western 대학의 칼 요한슨(D. Carl Johanson)은 에티오피아에서 발견한 인간의 턱 화석 3 점을 가지고 인간은 가정된 '조상들' 보다 더 '오래되었다'는 것을 논증하였다. 창조론자들은 이 턱의 화석들이 4백만 년이라는 나이 측정을 수용하지 않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진화론자들과 마찬가지로 창조론자들도 이 화석의 '상대적인' 층위학적(stratigraphic) 연대가 피테칸트로푸스(Pithecanthropus)나, 진잔트로푸스(Zinjanthropus), 또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alopithecus) 등등 보다 오래된 점에 주목하였다.

이와 같은 발견들이 인간은 신체구조가 원숭이의 그것과는 판이하였다는 것을 명시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발견된 화석에서 유추컨대) 인간은 언제나 독특한 의사전달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가리키고 있다.

”요한슨은 인간이 모종의 사회적 협동과 통신체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10

그러므로 고고학적 발굴과 인류학적 분석으로 알 수 있는 한에서, 인간은 기원 당시부터 이미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는 물론이고, 문화적으로나 언어적으로도 언제나 인간이었다.

 

서로 다른 언어들의 기원

고대 인간주민은 진화된 미지의 조상으로부터 미지의 진화과정을 통하여 새롭게 출현하였는가? (그 때를 수백만 년 전으로 가정하는 문제는 별개로 하고), 아니면 대홍수로부터 살아남은 몇 명의 생존자들의 후손인가? 하는 문제를 고찰해 보는 것은 중요하다. 어느 경우에 있어서도 인간 조상 주민은 본래적으로 진인(眞人)의 육신에 동일한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서로 다른 언어들은 어떻게 되어 생겼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것이다. 춈스키는 이렇게 물었다. 만약에 언어의 '의미론적 요소'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다면, 어떻게 해서 '음운론적 요소'가 그렇게도 다양다기(多樣多岐)할 수 있을까? 점진적 변화설은 이해될만하다 (영어가 현대영어로 되기까지에는 라틴어, 희랍어, 독일어 등등 여러 언어들의 단어들이 더하고 흡수되었다). 그러나 어떻게 인도-유럽 언어들이나, 아프리카 언어들과 같이 교착어(膠着語)들, 그리고 몽골 언어들과 같은 음조언어(音調言語)들과 같이 방대하게 다른 언어학적 체계들이 단일 조상언어로부터 발전할 수 있었을까?

더욱이 고대언어 일수록 더 복잡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오늘날 생존하는 '원시적'으로 보이는 종족의 언어가 더 복잡한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극히 단순한 문화를 가진 사람들까지도 사용하는 언어는 고도로 복잡해서, 문법은 복잡하고 어휘는 광범위하여 대화하는 사람들의 활동범위 안에서 발생하는 여하한 것도 이름들을 붙이면서 토론을 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합리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언어도 이미 현대적인 면모를 세련되게 갖추고 있어서, 진화론적 견해와는 완전히 동떨어지게 이미 완성단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11

그런 것만이 아니다. 어떤 주어진 언어의 역사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문화의 구조가 보다 높은 수준으로 복잡하게 진화함에 따라서 점증할 것으로 예상하였던 복잡한 구조를 나타내는 대신에 복잡성이 불가피하게 감소해지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 같다.

”언어의 진화는 최소한 기록된 역사에서 관찰된 바로는 점점 단순화되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12

이들 불가사의한 언어현상을 설명하려 한다면 두 대안들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1) 인간의 최초 주민들은 적어도 100,000년 전에 (어쩌면 4백만년 전이라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미 고도로 복잡한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이 인간의 최초 주민들은 (그 기원이 전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진화론적 근거로서는 설명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수많은 주민집단들로 분리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각각의 주민집단들은 그 이후부터는 여타의 주민집단들로부터 독립적으로 너무도 오래 동안 발전하였기 때문에, 그 언어는 음운론적, 그리고 통사론적으로 극도의 특이성은 띠어 자기 조상어에서 쇠퇴한 잔재로 나타났다.

      (2) 인간의 최초 주민들이 (성경의 년대기에 의한 계산뿐만 아니라, 수메르(Sumeria)와 이집트(Egypt), 그리고 다른 고대국가들의 문명사의 기원에서 알려진 바와 같이) 출현한 시기는 수십만 년 전이 아니고, 수천년 전이다. 한때나마 본원적으로 복잡한 공통 조상어를 사용하던 이 인류최초의 주민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군소 주민집단들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그 흩어짐은 수십만 년이라는 긴 기간을 거치는 완만한 진화의 과정을 통해서 생긴 것이 아니고, 오히려 모종의 외부충격에 의한 분리된 것이었다. 이 주민의 흩어짐은 조상어의 단일 음운체계에 돌연한 변화를 주어 순간적으로 변별적이며 독특하게 서로 다른 음운체계로 흩어지게 되었다.

 

진화론적 언어학자의 딜레마

위의 두 대안 중 어느 것도 진화론적 해석에는 순응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느 쪽도 인간의 조상어가 가지고 있던 복잡성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이 두 대안 모두가 (진화는 커녕) 후속되는 악화의 길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자는 관련된 시간범위가 크다는 전제로 인해서 동일과정론 철학에 더욱 걸맞기 때문에 진화론자들이 선호한다. 그리고 후자는 대격변이 있었다는 전제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간의 역사에 초자연의 개입이 있었다는 전제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진화론자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한다.

어쨌거나 장구한 시간 범위를 전제로 한 해석은 진화론적 표본에 다시 한번 인종주의적 함축을 필연적으로 내포시킨다. 왜 그런가하면, 그토록 엄청나게 다른 언어들로 갈라지려면, 그런 언어들을 사용하는 주민들 간에는 신체적 특징이나 정신적 자질도 그만큼 엄청나게 구별이 생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흩어진 주민들이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혹은 상호간에 교신을 유지할 만큼 교접관계(交接關係)에 있었다면(그런 교제는 그들 상호간에 이로울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들은 필연적으로 공통어를 사용하였을 것이고, 또 다른 종족간에 결혼을 하여 외모는 물론 정신적 특성까지도 공통적인 모습을 지속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종족들 간의 언어나 문화, 그리고 육체적 특징은 진정 너무나 다르다. 이 현상은 기록된 인류사의 여명기(黎明期)부터 그래 온 것이다! 스탠퍼드 대학의 어느 유전학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주류 인류의 분류(分類)를 관찰하면, 우리는 육안으로도 알아볼 수 있는 수많은 차이점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 모든 차이점들은 유전적으로 결정되었을 개연성이 농후하다. 그리고 결코 단순한 경로로 인해서 결정되지는 않았다. 예컨대 피부색에 관한 한 피부색소에서 변이(variation)를 조정하는데 기여하는 유전인자의 차이점은 최소한 4가지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3

만약에 피부색처럼 겉보기에 단순하고 분명한 차이점들도 그토록 복잡한 양식으로 결정된다면, 그리고 만약에 그런 유전인자의 모든 요소들이 애초부터 돌연변이에 의해서 전개된 것이라면 (진화론자들이 믿는 것처럼), 그때엔 매우 장구한 기간의 인종차별 과정이 필연적으로 있었을 것이란 이론도 이해될 만 하다.

”오늘날 이러한 결론들의 가장 단순한 해석은 현대인이 출현한 후 얼마 되지 않아서 확장되기 시작한 상대적으로 작은 집단들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확장과 더불어 여러 집단들은 분리되고 독립되었다. 뒤이어 인종분화(人種分化)가 생겼다. 5만여 년이라는 시간은 진화론적 계산으로는 짧은 기간이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유전학적으로 말해서 왜 인간 종족들은 상대적으로 적은 차이점들은 보이는가 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14

뿐만 아니라, 만약에 피부색이나 얼굴형태와 같이 명백한 차이점들이 50,000년이라는 기간에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으로 인해서 발생할 수 있다면, 그 때에는 확실히 정신적인 능력에도 첨예한 차이점들이 그와 같은 시간범위 안에 발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정신적인 능력들은 피부색소보다 오히려 상당히 더 크게 생존을 위한 자연선택의 효과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 인종주의적 추론이 분명해 진다.

사실상 창조주의자들이 누누이 지적한 바와 같이, 개인이나 주민이 생활하는 자연환경에서 경험하는 돌연변이가 '유익'하다는 실험적 증거는 전혀 없다. 다양한 외적 변화들 (피부색 같은 것들)은 창조된 유전적 요소들이 원인이라고 간단히 설명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조상 주민들로부터 분리되었던 어느 종족의 유전인자 체계 안에 잠복하고 있던 유전적 요소들이 강제된 동족번식으로 인해서 재번식된 소수 주민들 안에서만 공공연하게 표현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설명이 그것이다.

만약에 최초의 주민들이 어떤 방법으로든 간에 소수의 고립된 주민들로 분리되어 생산을 거듭했다면, 다만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세대들만이 다른 부족들 속에서 뚜렷한 육체적 특성들(모두 보다 큰 주민들에 잠재하는 창조된 유전요소들)을 드러내게 되어 다른 부족들 속에서 다른 인자들과의 배합 속에서 고정됐을 것이다. 타율적 인종분화는 조상어의 음운학(대화언어)적 돌연변이에 의해 수많은 독특한 음운언어(대화언어)로 급속하게 분리되어 나가게 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언어학적 분화가 원인이 되어 육체적 변화도 용이하고 급속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외부 충격적 변화요인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인간 본성에는 근본적인 변화는 전혀 없었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여전히 예전과 같이 '생각'하였을 것이며, 여전히 분명하게 인간이었을 것이다. 인간 의식과 의사전달 능력의 '심층구조'는 '표면구조'에 대한 외부 충격적 변화에 의해서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이 측면에 대한 스텐트 박사(Dr. Stent)는 흥미로운 해설을 이렇게 하고 있다.

”인간의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최소한 바벨탑의 건설이 기도됐을 때부터, 크게 분화된 것은 오로지 음운론적 요소뿐이다.”

 

창조론자들의 대답

스텐트 박사가 바벨탑에서의 언어 혼란을 역사적 실제 사건으로 믿든 안 믿든 상관없이,  그와 같은 언어분화가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과 정상적인 진화의 발전으로서는 그런 언어분화가 생길 수 없다는 사실은 최소한 상징적인 의미를 그에게 던졌을 것이다. 그런데 창조주의자들에게는 물론 바벨탑은 상징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실제 사건이다. 그 초자연적 언어의 혼란사건은 결과적으로 전 세계로의 부족의 이동분산을 초래케 하여 급속하게 부족 (여기 부족[tribal] 이라 함은 '종족' [race]이 아니다. 성경은 진화론적 생물학 범주의 종족[race]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간에 부상하는 개성들 속에 당연하게 유전 효과를 주었다는 이론은 모든 알려진 음운론적, 민족학적 그리고 고고학적 사실들에 멋지게 들어맞는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의미론적 의식이야말로 생명 세계에서의 인간의 독특성을 직접적으로 증명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심층 내부의 본성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자연과학의 무능을 극명하게 증명한다. 스텐트 박사 자신이 이 사실을 이렇게 인정하였다.

”우리가 가시적인 진로를 아무리 깊게 탐구한다고 하여도 결국 우리는 가시적 형상을 어떤 계율로 변형시키는 '심층 인간'을 필연적으로 단정하게 된다. 언어학에 관한 한, 언어의 분석은 환상분석과 같은 개념상의 막다른 골목을 지향하고 있는 것 같다.”16

춈스키를 비롯한 구조언어학자들은 인간 자의식의 '심층구조'를 단정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이 어디서부터 왔으며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물질주의적 과학은 화학과 물리학 등식(等式)들에 관해서는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으나, '영혼'과 '정신'의 영역에 이르러서는 넘어지고(실패하고) 만다. 스템 박사는 이 맥락에서 그의 말을 이렇게 계속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 '의미(meaning)'의 개념은 자아(self)와 연관하여서만 헤아릴 수 있는 것이다. 자아는 의미론적 기호로서는 궁극적 원천과 궁극적 목적지 양자를 다 포함한다. 그러나 자아의 개념은 … 분명한 정의를 내릴 수 없다. 대신에 '자아'의 의미는 직관적으로만 자명하여진다. 그것은 우리가 공간과 시간, 그리고 우연성을 자연 앞에 가져다 놓는 것과 같이 인간 앞에 가져다 놓는 또 다른 하나의 칸트철학의 초월적 개념이다.” 17

'자아'라는 개념은 직관적으로만 자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원인(cause)은 최소한 진화론자들에게는 그다지 분명하지 않은 것 같다. 그 현실성은 심지어 자연과학에까지도 필요한 것이다. 그런 '효과'에 관해서 그것은 적절한 '원인'이 요구된다. 그리고 어떠한 자연주의적인 원인도 그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오로지 초자연적인 창조주만이 필요한 것이다!

이 모든 이론들은 언어의 궁극적인 목적이 단순히 인간 상호 간의 의사전달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인간과 그의 창조자와의 사이에 의사전달 이라는 결론으로 인도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사람에게 말하시고, 사람은 하나님에게 찬양과 기도를 통해서 응답한다.

 


References

1. Isaac Aimove, 'Chimps Tell Us About Evolution,' Science Digest, November, 1974, p.89.

2. David Pilbeam and stephen jay Gould, 'Size and Scaling in Human Evolution,' Science, Vol. 186, December 6, 1974, pp. 899, 900.

3. George Gaylord simpson, 'The Biological Nature of Man.' Science, Vol. 152, April 22. 1966, pp. 476-477.

4. Noam Chomsky, Language and Mind, Harcourt, Brace, Hovanovich, Inc., New York, 1972, p. 67.

5. Ibid., p. 68.

6. Gunther S. Stent, 'Limits to the Scientific Understanding of Man,' Science, Vol. 187, March 21, 1975, p. 1054.

7. Ibid., p. 68.

8. John S. Haller, Jr. Outcasts from Evolution,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Urbana, 1971, 228 pp.

9. Scientific American, Volume 231, December, 1974, p.64, (News items).

10. 'Ethiopia Yields Oldest Human Fossils, 'Science News, Vol. 106, November 2, 1974, p. 276.

11. George Gaylord Simpson, op. cit., p.477.

12. Albert C. Baugh, A History of the English Language, Appleton-century-Grafts, Inc., New York, 1957, p. 10.

13. L. L. Cavalli-Sforza, 'The Genetics of Human Populations, 'Scientific America, Vol. 231, september, 1974, p. 85.

14. Ibid., p. 89. From what has been noted, however, it is obvious that even the author's 50,000 year estimate is much too small in the evolutionary framework. Even this, however, would surely involve significant racist connotations.

15. Gunther S. Stent, op. cit., p. 1054.

16. Ibid., p. 1057.

17. Ibid.

*Dr. Morris is Founder and President Emeritus of ICR.


번역 - IT 사역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pubs/imp/imp-028.htm 

출처 - ICR, Impact No. 28, 1975.

노혁진
2004-07-26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본 인류의 기원


I

     인간과 자연의 기원에 대한 설명은 결국 둘 중 하나에로 수렴될 것이다. 그 하나는 창조주에 의하여 창조되었다는 것과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고서도 가능한 설명으로서 자연히 되었다는 것이다. 부정할 수 없는 최소한의 사실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없다면 자기밖의 모든 것이 인식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모든 존재와 그에 대한 인식의 기본이 자신의 존재라면 바로 그만큼 근본적인 문제가 자신의 기원이다. 만약에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이 없다면 존재라는 사실만큼 당연한 진리이어야 하는 기원에 대한 답은 무엇일까? 이 답은 혹 물의 존재를 모르고 사는 물고기가 있겠으나 그와 무관하게 물고기의 존재에 물의 존재가 선재하듯이, 물체의 존재가 시간과 공간의 존재와 상쇄되어 실존을 이루듯이 인간의 존재라는 사실에 선행하거나 최소한 그러한 사실에 상응하는 실체적인 답은 인간이 알던 모르던 간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물고기나 물건과는 달리 이러한 의문도 품고 그 답도 알고자 한다. 인간이 물고기나 물건과 궁극적으로 다르기 위하여는 그 답을 인간의 존재에서 비롯되는 모든 문제에 앞서서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그 답은 인간이 존재하기 때문에 당연히 선재하고 있다. 이것은 추상이나 파토스의 대상이나 고고인류학자의 구체적인 과제로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 그 누가 탐구하던 지간에 모든 인간의 문제이다.

필자의 자유로운 사고로서 용납될 수 있다는 전제에서 그 문제에 대한 응답으로 가능한 설명은 세 가지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첫째는 물리적 차원의 존재를 초월하는 하나님에 의하여 인간과 모든 존재가 피조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종교인들뿐만 아니라, 막연하나마 많은 인간의 마음속에 감응되고 있는 깨달음이다.

또 한가지 가능한 것은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고 깨달아 보려는 시도이다. 즉 자연의 이치와 현상의 본질을 통하여 답을 발견하는 것이다.

나머지 한가지는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일 것이다. '자연의 섭리' 라거나 '다 그렇고 그런 것' 또는 이와 유사한 자각상태로 나타나는 반응들도 두번째 또는 세 번째의 탈바꿈이라 할 수 있다.

그 답이 분명히 실재한다는 입장에서는 위의 세 가지 중 두 가지만이 남는다.

현 학계에서는 (인식체계의 현재적 원상에서는) 첫번째의 입장은 종교라는 카테고리로 묶어서 거론을 제한시키고 있고, 두번째의 입장에서 다루어져야 정당한 앎의 방식이라는 공통심리 때문에, 그러한 입장에서 다루어진 결과만이 객관적인 사실로서 거론되고 있다. 즉 과학적 차원에서 객관화 된 설명을 통하여 기원문제에 대한 답을 구해야만 인정하려는 것이다. 

자연의 이치란 무엇을 뜻하는가? 자연계에서 가장 자율성을 지닌 존재는 인간일 것이다. 인간만은 못해도 동물들도 본능의 범위내에서 나름대로의 자율성을 지니고 있다. 식물도 생명력의 한계내에서 자율성을 지니고 있다. 이밖의 무생물에게는 스스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란 없다. 자연이란 시간과 공간속에 이러한 존재들이 각자 지니고 있는 자율성 또는 생명력을 힘입어 활동하는 상태 또는 그러한 전체적인 모습이 자연이고 자연의 이치이다

그러나 그중 가장 자율적인 「인간」이 제 스스로의 의도나 힘으로 자연계 내에 나타났다고 믿을 사람은 없다. 혹 불사의 이치를 깨닫는 자가 없다고 단언할 수야 없다손 치더라도 그자도 이미 존재케 된 자이다. 

시간과 공간이 자율성을 지니고 있는가? 그 안의 한계적인 자율성을 지닌 피존재들의 전체가 자연의 실체요 이치일 뿐이다.「자연의 이치」 또는 「섭리」라는 신비한 자각이 그 자연과 자연속의 존재의 기원에 대한 답이라는 깨달음은 착각이다.

피존재된 상태의 어떠한 이치로도 존재의 설명은 불가능한 것이다. 즉 인간과 자연의 기원문제는 본래 초자연적인 차원의 문제이지, 결코 시간, 공간, 물질의 차원에서 그 답까지 밝힐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엉뚱하고 구름 잡는 듯한 이야기를 논재의 서술에 앞서 언급하게 된 것은 인간의 기원문제가 종교나 과학이라는 카테고리에 따라 국한시켜서 다루어질 수 있는 그 밖의 모든 문제와 같은 문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깨달아 알아야 할 문제라는 것을 주장하고 싶은 필자의 충동때문이다. 우리는 누가 자기를 사랑하고 어떤 행동이 좋고 나쁜지를 마음으로 안다.

「민주사회」의 개념에 대한 객관적인 체계화나 「정의로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알고 있지만, 자신의 의도에 따라 깨달음이 다를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의 기원이라는 분명한 사실이며 근본적인 문제가 객관적인 설명 차원에서 속성의 체계화로는 결코 그 실체를 깨달을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해야 할 이유가 있다고 필자는 확신하고 있다. 왜냐하면 존재하는-존재하게 된-모든 것에 대한 어떠한 체계화도 결국은 환원일 뿐이며, 존재자체의 이유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기원하면 원숭이 비슷한 동물에서 진화되었다는 설명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이것이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별반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이 과학적으로 밝혀진 사실이므로 부정해서는 안되며, 그러한 사실을 부인하려고 하는 사람앞에서는 그 비과학적인 사고를 단호하게 판단한다. 과학의 로봇이 되어 주입된 정보대로 대응하는 미래형 인간의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진화론자들은 그 조상인 원숭이나 모든 동물이, 나아가 모든 존재가 수소보다도 더 간단한 원초물질 상태에서 지금의 인간을 포함하는 체계화된 세계로 진화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의 원인은 창조주의 어떠한 의도나 설계가 개입되지 않은 자연적인 과정일 뿐이라고 전제하고 있다.

이 무한이 정교한 자연과 생명체가 자연적으로 무작위적이고 비의도적인 물질의 시행착오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이며, 따라서 지금의 인간과 자연계도 그 한 국면일 뿐인 것이라고 너무나 자연스럽고 정당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 누가 울안의 원숭이가 머리를 긁으며 필자와 같은 의문에 바져 있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진화론자들은 바로 지금의 원숭이 같은 것이 3, 4백만년 전에 우연히 지금의 인간의 상

태를 향하여 비의도적인 시행착오의 전진을 계속하여 우리가 되었다고 권위와 과학을 앞세워 설득을 애쓰고 있다.

그들의 그러한 노력이나 인간존재에 대한 필연적인 물음도 언제부터인가 원숭이가 처음으로 머리를 긁기 시작했던 놀라운 사실만큼이나 궁극적으로는 무작위적인 우연일 것이다. 시작이 필연이 아니고 과정 전체가 무작위적이고 비의도적인데, 그 과정에서 어느 일부분이 필연성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그것은 우연이지 필연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시작과 과정전체가 필연인데, 어느 일부분이 아직은 우연적인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만약에 갖은 양념과 온갖 채소와 고기와 밀가루를 한 통속에 쓸어 넣고 아무 의도없이 계속 흔들면 때에 따라 각종 요리가 탄생돼 나온다는 이치를 믿으라는 것이나, 태초에 원초물질이 또는 물질의 원초상태가 있어서 오랜 세월동안 저절로 분해되고 합치는 과정에서 이 자연계와 인간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믿으라는 입장과, 직접 보지는 못하였지만 음식을 보고 요리사의 존재를 믿고 이 자연과 인간의 불가해한 필연성을 알고 창조주를 믿는 입장을 그저 기계적으로 종교와 과학이라는 결국 잠정적인 범주로 구분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실제로 하나님에 의해서 이 자연과 인간이 창조되었다면 그 존재를 깨달아 아는 데는 분명히 인간이 만들어 낸 범주들은 거추장스러울 뿐일 것이다. 

또 하나의 당면한 문제는 과연 진화론자들의 주장대로 실제로 진화가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즉 과학의 차원에서 진화가 증명된 사실인가? 그러하지는 않더라도 수긍할만한 이론인가 하는 것이다.

진화론자들이 망각하고 있거나 위반하고 있는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원래 의도나 설계가 전제되지 않은 무작위적이고 우연적인 자연현상의 기원과 과정을 인과적인 논리를 통하여 필연적인 결과로 설명하려드는 잘못이다.

또 하나는 그 이론의 내용이 자연의 법칙과 실제의 현상에 위배되는 잘못된 이론이라는 것이다. 법칙에 어긋나는 이론의 수립은 과학에 있어서 용납될 수 없다. 한 두 가지만 언급한다면, 무작위적이고 우연적인 자연 상태에서는 엔트로피가 감소하는 - 질서도가 증가하는 - 진화가 과거에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법칙에 위반하는 이론의 수립을 고집하는 과학자의 상식을 벗어나는 행동이다. 확률적으로도 비의도적으로 우연히 세포 하나가 생성될 확률은 10의 16만 7천승분의 1이며, 인간은 약 100조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이미 발생가능성을 0으로 보는 10의 50승분의 1을 훨씬 지난 수치이다. 이밖에도 따지고 들면 자연 전체가 진화를 부정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증거는 많다. 

그래도 진화론자들은 '지금 보듯이 진화가 이미 되어있지 않은가?' '진화는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공언하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진화가 부인되었을 때 처하게 될 대안의 문제에 대한 잠재심리의 표출일지도 모른다. 진화의 구체적 증거로 알았던 화석도 이제는 오히려 진화를 부인하고 있다. 지금의 생물들 사이의 종별차이가 완연한 것처럼 지질시대의 모든 화석이 애초부터 서로 다른 모습으로 발견되고 있다. 진화의 증거인 '種間化石'은 발견되지 않는 것이 법칙이다. 화석으로 진화를 증거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보듯이 말보다는 원숭이가 인간에 보다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다고 원숭이에게서 인간이 되었다고 주장하려 드는 발상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이러한 가정을 가지고 동물원에서 모든 동물을 그 상사성과 상이성의 정도에 따라 연속적으로 배열하려들 때 여러 가지 가정들이 덧붙을 것이며 결국은 이도 저도 아닌 원점으로 돌아오고 마는 것이 그 최선일 것이다. 

V

존재와 현상을 인식하는데 있어서 진화론이 얼마나 유용한 체계인가의 문제 이전에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진화론은 결코 과학적인 이론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과학은 오히려 원래부터 무한히 정교한 설계와 체계가 존재하였음을 설명하여주고 있다. 진화론자들이 이러한 질서와 체계를 우연적이고 비의도적인 결과로 인식하려 드는 맹목적인태도와 이러한 설계와 질서의 과정을 창조주의 계획과 의도로 보는 입장 중 어느 것이 이미 자신의 의도나 설계와는 무관하게 존재케 된, 어디까지나 그 작은 '피조자'인 인간에게 해당하는 것일까?

인류를 포함한 생물의 진화는 이젠 더 이상 과학적인 이론으로서 지탱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예는 급증하고 있다. 진화론자들의 논리대로라면 인간은(인간종은) 300만년이 넘도록 자신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도 모른 채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다. 이 지구상에 전 인류가 합의하여 지상천국을 이룩하게 되든, 서로 경쟁하여 그 중 한사람이 온 인류 위에 군림하게되든, 자신의 기원을 모른다면 물고기 한 마리가 모든 물고기를 다 잡아먹든 모든 물고기들이 함께 떼를 지어 물속에 충만하든 물이 마르면 끝장인 것과 사실상 똑같은 것이 아닐까?

삶이 위태롭게 느껴지고 핵전쟁이라도 일어나서 전부 멸망할 것 같은 불안을 실감하고 사는 우리에게 하나의 공감대로 실감해야 할 문제가 오히려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우리의 기원을 찾아보려는 노력이어야 되지 않을까?

이것은 이미 존재케 된 상태를 다루는 과학의 차원을 초월하여 그것을 수렴하는 문제인 것이다. 그 답은 인간이 이미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하여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 앞서 항존하고 있다.

인간에게는 물질이나 원숭이에게는 없는 영혼이라는 실체가 있다. 그 답은 온갖 과학적인 작동을 다 해볼 필요와 유익은 있겠으나 마음으로 받아들일 문제이다.

아무리 이리저리 생각하여 보아도 어차피 원점이요 불가지론일 때 창조주의 실존을 마음을 비우고(자아를 비우고) 받아들임이 더 진실한 태도가 아닐까? 그러한 창조주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차피 원래의 원점에 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근원은 원초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 있다. 눈을 감으면 온 우주와 만물이 가려서 볼 수 없게 되듯이, 눈을 열어야 온 세상을 볼 수 있게 되듯이, 인간의 기원에 대한 답도 마음을 열어야 알 수 있을 것이다.

 


번역 -

링크 - http://www.kacr.or.kr/databank/document/data/culture/c2/c2c4.html 

출처 - 창조지, 제 40호 [1987. 1]

구분 - 2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01

참고 :

미디어위원회
2004-07-26

고고학에서는 석기시대→청동기 시대→철기시대?

김희택, 박진호 


답: 진화론에서 주장하는 계보에 의하면 인간의 역사는 단지 수천 년 정도가 아니라, 그 연대를 수백만 년까지 소급하여 올라간다. 그래서 400만 년 전에서 130만 년 사이에 가장 오래되었다는 인류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alopithecus)에서 4만 년 전에 출현한 현생인류의 직계조상이라는 크로마뇽인(Cro-Magnon man)까지 오랜 역사계보를 주장한다.


이 주장에 따른 원생인류(原生人類)들이 가지고 있었다는 석기문명(石器文明)에는 '올도완(Oldowan)' 석기문화의 호모 하빌리스(260만 년 전), 유럽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 일부지역에 있었다는 구석기 문화전통인 '아슐리안(Acheulian)' 문화의 호모 에렉투스(150만 년~15만 년 전), 무스테리안(Mousterian) 문화의 네안데르탈인(20~10만 년) 등이다. 


그러나 진화역사를 믿는 현대의 인류학자(人類學者)들이 주장하는 이 연대를 자세히 살펴보면 인류의 역사가 최소한 수십만 년 이상이 된다는 주장에 의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위에 나온 네안데르탈인에게 10만 년을 할당한다고 한다면, 이보다 연대가 더 오래 매겨진 호모 에렉투스는 적게 잡아 5만 년 이상, 계속해서 올도완 문화를 일으켰던 호모 하빌리스에 대해서는 250만 년이라고 하는 엄청난 공백기간이 남는다. 이는 문서화(文書化) 되어 믿을 만하다는 인간 역사시대를 5000년 전으로 잡을 때, 인간 역사시대의 전 기간보다 각각 10배, 그리고 500배나 되는 엄청난 기간이 시간의 공백 속에 파묻히게 된다. 


이 시기에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진화론자들은 정확히 알고 있는가? 학자들이 어렴풋이 알고있는 사실은 단지 네안데르탈인의 거친 부싯돌이 단지 크로마뇽인들에게 와서는 약간 진보한 비교적 균형 잡힌 대칭적인 모양으로 개량되었다는 것이다. 끝부분이 약간 더 뾰족하고 섬세하게 다듬어졌고, 타격법이 좀더 계획적이고 세련되어 졌다는 것 정도를 제외하면 사실상은 거의 동일하다. 따라서 이렇게 오랜 공백의 기간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의구심이 당연히 생기게 된다. 그러나 이에 대해 진화론자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 과연 오늘날 고고학, 인류학의 기초가 되는 연대기준이 과연 정확하고 확실한 기준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현대의 고고학자는 문명의 진화와 진보를 판단할 때 돌의 화살촉과 창의 끝날에 중점을 둔다. 그리고 신석기 시대의 것은 구석기 시대의 것과 비교하여 보면 정교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구석기 시대보다도 신석기 시대의 문명이 발달해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이 곧 문명의 발달단계와 연결되는지는 의문이다. 그 반대의 예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모든 기술에서 다 뛰어났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것은 태고시절이나 현재나 변함이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숙련공은 완전한 제품을 만들어 낼 수가 있으나, 견습공은 만족할 만한 것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구석기 시대의 인간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말하자면 견습공이었다. 그러나 그 만큼 미개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건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 대재난(창조론적 입장에선 노아의 대홍수를 말함)으로 말미암아 가진 것을 다 잃고 벌거벗은 것이나 마찬가지 상태로 황량한 대자연속에 내동댕이쳤다고 하자. 도구 한 가지도 손에 가지지 않았다. 있는 것이라고는 다만 생각할 수 있는 머리와 움직일 수 있는 손발뿐이다. 불완전하고 서툰 솜씨로 우선 눈앞에 있는 재료로 도구를 만드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도대체 얼마만큼이나 잘 만들 수 있을까?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우리나라의 6.25를 생각해보면, 서울에서 부산으로 피난갔던 사람들은 살 곳을 마련하기 위하여 당장 손에 잡히는 잡풀과 짚가마니, 나뭇가지를 이용해 초막을 짓고 살았던 기억은 6.25 세대의 사람들은 한 번쯤은 경험해 봄직했던 일들이다. 또 [파리대왕]이라는 소설에 나와있는 이야기처럼 현대 문명인들이 타고 가던 비행기가 절해고도의 무인도에 불시착했다고 가정해 보자. 이들은 비록 도시문명의 환경에서 생활했다고는 하지만, 일단 현대 도시문명에서 누려왔던 모든 편리함과 문명의 여러 가지 이기(利器)들이 단절된 이상 원시시대의 삶과 별반 차이가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노아와 그의 7식구와 방주에 승선했던 모든 동물들은 그 광대무변하던 홍수 이전의 온난하고 쾌적한 날씨와 생물이 살기에 최고로 이상적인 기후와 토지를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홍수 이후 급격히 나빠진 환경 가운데서 식량을 찾기가 어려워 극도의 굶주림에 허덕이게 되었을 것이다. 자연환경은 아마 상당한 기간동안 농사를 허락지 아니하였을 것이고, 인간들은 막다른 곤경에 처하게 되었을 것이다. 대홍수 전에는 지구의 온실화로 식물이 풍성하고 인간과 동물은 채식을 하였으므로, 서로 잡아먹는 큰 비극은 일찍이 없었다. 그러므로 노아가 동물들을 방주 안에 모두 안전하게 승선시켰을 땐 동물들의 공격에 대비할 필요가 없었다. 노아는 대홍수 기간동안 지탱할 수 있는 물과 식량 그리고 동물 사육에 필요한 기구와 방주 보수용 장비 및 기계들을 적재하였을 것이다. 홍수 후 노아가 정결한 짐승을 잡아 하나님께 번제(燔祭)를 드린 후 인간과 동물이 육식을 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지상에선 약육강식의 처절한 생존 경쟁이 전개되게 되었다. 


인간들은 불을 무기화하고, 또 가지고 있던 철기들을 급히 변조하여 칼등의 무기들을 만들어 짐승과의 전투에 사용하였다. 그러나 식량은 절대 부족하였으므로 인간은 짐승의 공격에 대비할 뿐 아니라, 동물을 잡아 양식을 삼아야 했다. 그러나 동물을 잡아 사냥할만한 무기는 소량뿐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시날 평원으로 이동하는 동안에 노아의 자손들은 계속 증가되어 시날 평원에 이를 무렵에는 부족정도의 인구수로 불어났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생활해나가기 위해선 더 많은 무기와 연장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환경은 여전히 험악하였으므로, 지하자원을 개발하여 철기를 제작할 여건은 되지 못했다. 만일 노아의 후손들이 지상에 흩어져 있던 철광석을 발견할 수 있다면, 당장 그것을 제련하여 무기와 철기제품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홍수의 엄청난 퇴적으로 비중이 있는 철광석이 지표에서 보여지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사실상 노아의 가족들이 금속 제품의 공기구나 무기를 제작할 수 있으려면, 지하자원의 개발이 가능할 정도로 지각은 안정되어야 하며, 아울러 자연환경이 허락되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조건은 여전히 불안정하였으므로, 지하자원개발을 엄두도 낼 수 없고, 단지 지표면에 산재한 암석조각들을 깨트리거나 다듬어서 무기나 생활에 필요한 각종 연장을 만들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시날 평지에서 처음 농사를 짓게 되었을 때에도, 처음에는 농사를 위하여 석기를 다듬거나 급하면 대충대충 깨뜨려 사용하였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추론이다. 


그리고 바벨탑의 파괴후 인류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되었을 때, 흩어져 나간 사람들은 더욱 심각한 국면에 처하게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민족 분산에 앞장 선 사람들은 홍수 후 출생한 2, 3, 4 세대들로서 홍수 이전 문명을 습득했었던 선조상(先祖上)들의 슬기로운 가르침이 중단되어 그들의 지식과 지혜가 현저히 낙후되었을 것이다. 노아의 경우에는 거의 모든 지식과 지혜가 한 사람에게 소장되어 있었으나, 이들의 경우에는 어떤 한 가지 문제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들의 지력이 한데 모아져야만 해결 가능했을 것이 분명하다. 더구나 이제 인간은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본유적(本有的)인 지식과 지혜를 상실했기 때문에, 경험과 학습을 통해서 상실된 분량만큼의 지식과 지혜를 터득해야만 했다. 게다가 메소포타미아 유역은 거대한 하천을 끼고 있어 다른 곳보다 빨리 인간의 거주와 생활에 맞도록 조성되었으나, 민족의 분산시 흩어져 나간 사람들은 새로운 하천을 발견하기까지는 예전에 노아의 가족이 이동하던 때와 같이 석기로 무기 및 공기구를 제조하면서, 현재 자기들 앞에 닥친 문제들을 처리해 나갔을 것이다. 


거룩한 족장 노아가 홍수이전에 당시로서는 가장 우수한 기술로 거대한 방주를 제작하며 채득했던 기술을 써먹을 수 있었던 홍수직후의 초기시대를 회상하면서, 어쩌면 노아의 후손들도 그와 비슷하게 석기의 무기 또는 공기구를 제조하면서 자기들의 살길을 모색해 갔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고고학자(考古學者)들에 의해서 발굴되어 지고있는 타제석기, 마제석기 등 갖가지 종류의 석기 유물들이 남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흩어져 나간 사람들이 각기 살만한 곳들을 찾아 그들이 문화를 건설하게 되었을 때, 지각의 안정과 더불어 지하자원의 개발이 가능하고, 기술과 능력 있는 소유한 사람이 여럿 있을 때, 이들의 문화건설은 좀 더 조직적이고 신속했을 것이며, 그렇지 못한 민족들은 침체에 머물게 되었을 것이 확실하다. 


특히 상호교류 없이 어느 지역에 고립된 민족들은 예전보다 더 못한 상태로 퇴보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실제로 파푸아뉴기니섬의 국경에 접해있는 이리안자야(Irian Djaja)섬의 알리족, 라니족, 다니족들은 그들의 조상부터 후대인 20세기에 들어와서조차 아직 석기시대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진화론에서는 240여 만년 전, 지상에 출현한 인류는 오랜 진화 과정을 거쳐서 오늘날의 현대인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문명진화에 진화를 거듭한 끝에 현재 20세기 현대 산업문명을 이루게 되었다고 말해 왔었다. 그러나 이리안자야섬의 이들 원주민처럼 현대 도시인과 같은 인간의 모습은 갖추었지만, 아직까지도 원시의 생활모습을 이어가는 '현대문명과 공존하는 살아있는 원시종족' 이라고 명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종족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이 지역을 지켜온 신석기 시대의 원시 종족들로서, 이들이 신석기시대의 원시종족이라는 사실은 돌도끼나 돌칼로 만든 도구를 사용하고, 지금으로부터 50만 년 전에 출현했다는 베이징인(Sinanthropus erectus)처럼 아주 컴컴한 어둠 속에서 나무의 마찰에 의해 간단한 불을 지피는 원시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이렇게 인근지역과 상호교류없이 고립되어 살았던 이리안자야 종족들은 1960년대 후반 철기가 그들에게 소개될 때까지 여전히 돌과 부싯돌만을 사용하는 후진성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여하간에 사방으로 흩어져 나간 모든 족속들은 노아와 더불어 지내던 자기들(노아의 후손들을 말함)의 본래의 사회상태를 회상하며, 또 그것을 회복해 가면서 인적자원과 천연자원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자기들의 문화를 개발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 격변하는 시기에, 지하자원 개발이 불가능한 자연환경 가운데서 처음에는 동물의 공격을 막거나, 동물을 사냥하기 위해, 또 농사 및 생활용품을 위하여 부족한 철기대신 어쩌면 민족과 민족 간의 전쟁을 위하여 석기무기를 제작하였을 과도기적 문화건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 세계에 흩어져 나간 사람들은 퇴화를 겪으면서 황무지의 벌판 위에서 비록 처음에는 석기를 사용하여 문명건설에 착수하였을지라도, 천연자원을 개발하여 각기 특성 있는 고유한 문화를 건설해 나가는데는 긴 세월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엄청난 문화적 퇴보에도 불구하고 구비전승(具備傳承)된 얼마간의 지식과 지혜와 능력을 소유하였고, 무엇보다도 인간 본연의 타고난 독창적이고 창조성(創造性)을 개발시키는 능력이 있으며, 아울러 이를 더욱더 개발시키고 전수하며 협동해 나가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석기시대'에 해당하는 유물들이 세계 도처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는 것은 이와 같은 대홍수와 민족의 분산이라는 대변동의 증거로써 인류역사상 가장 열악한 환경 하에서 살아남기 위해 짜냈던 인간의 지혜를 보여주는 동시에, 고대문명의 발상까지 과도기적 현상이었음을 웅변해 주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류 역사상 대홍수로 인한 최악의 변동의 시대에 지극히 슬기로운 석기문화가 존재했던 것이다. 진실로 이것은 무지한 인간 진화의 흔적이나 문명도의 낮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홍수이전의 문명, 다시 말해 그 당시로는 최첨단 문화적 힘을 바탕으로 방주를 건조할 만한 능력까지도 소유한 고도의 문명이 대홍수를 겪고 난 후, 일부 야만화하여 가는 모습을 나타내 주는 것이라고도 하겠다. 이는 앞서 도시의 문명인들이 6.25 전쟁이나 비행기 사고로 인하여 퇴보될 수밖에 없었던 두 가지 예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빠를 것이다. 


그러나 지금껏 고고학자나 인류학자들은 이와 같은 홍수로 인한 인류 역사의 주요 단면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태까지 발견된 석기들을 진화론적인 사고에 입각하여, 그때 그때마다 발견된 석기들을 진화론적인 철학에 갖다 맞추어서 그 편년을 수십에서 수백만 년 정도로 단정짓게 되었다. 


진화론이 입증된 생물학적인 자료는 하나도 없으면서도, 오늘날 생물학 등 자연과학 사고의 중심틀을 차지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석기시대론 역시 입증된 사적(史的), 유물적(遺物的) 자료가 미비한데도 불구하고 고고학적, 인류학적 인간의 계보 역사를 점령하고 있으나, 그 근거라는 것은 오직 진화되었다는 빈약한 믿음뿐인 것이다.

 

 

 *참조 : What about the ‘Stone Age’?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5799/

A Better Model for the Stone Age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227

A Better Model for the Stone Age Part 2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225

The Stone ‘Age’—a figment of the imagination?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689/


출처 - 창조지, 제 84호 [1993. 2]

미디어위원회
2004-07-26

묘족(苗族)에게 전승되어온 창조(創造) 이야기

(Genesis According to the Miao People) 

Edgar Traux 


(머릿말)

묘족(苗族) 또는 Miao(苗)는 영어권의 사전에는 Miautso 라는 철자로 표기되어 있는데, 예전부터 중국대륙의 양자강 이남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들보다 군사력과 조직력이 강한 한민족(漢民族)에 의하여 남서쪽의 산악지대로 쫓겨가고 말았다.

우리가 전도(傳道)하고 있는 묘족인(苗族人)들은 자기들이 광서성(廣西省)에서 쫓겨왔노라고 말하고 있다. 묘족의 전승들은 다른 원시적인 민족과 비교하여 볼 때 매우 정확하게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것은 음율의 형태를 가질 뿐 아니라, 두 줄의 연속귀절(二行連句)기법을 이용하여 계승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 기법이란 다른 단어이면서 의미가 같든가, 아니면 비슷한 것으로서 표현되기 때문에 두 번째의 절(節)이 첫 번째 절의 의미를 부여하여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는 첫 번째 절은 그 의미가 불명하게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방식은 히브리어 시(詩)의 한 가지 형태와 매우 닮은 것인데, 예컨데, 시편 21편 1, 2절에서 볼 수가 있다.

(창조)

하나님이 천지(天地)를 창조하신 날

그 하나님이 빛의 문을 여셨도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구상에 흙과 돌로 산을 만드셨도다.

하늘에 하나님은 천체(天體)와 해와 달을 만드셨도다.

땅에는 하나님이 게와 소리개를 창조하셨도다.

물속에 가재와 물고기를 창조하셨도다.

들판에 하나님은 호랑이와 곰을 만드셨도다.

산들을 뒤덮어 줄 초목을 만드셨도다.

산과 산의 끝까지 나무를 가득 채우셨도다.

연두빛의 등나무를 만드셨도다.

대나무 숲을 만드셨도다. 


(사람)

지상에 하나님은 티끌로 사람을 만드셨도다.

창조된 남자에게서 하나님은 여자를 만드셨도다.

그 후에 흙의 첫조상 다아트는 돌저울을 만들었도다.

지구의 눈금을 그 기초까지 측정하였도다(註1).

천체의 크기를 계산하였도다.

그리고서 하나님의 도(道)를 깊히 생각하였도다.

흙의 첫조상 다아트는 첫조상 셋을 낳았도다.

첫조상 셋은 아들 루스를 낳았도다.

루스는 게이로를 얻었고, 게이로는 라마를 낳았도다.

첫조상 라마는 남자 누아를 낳았도다.

누아의 처는 여족장(女族長) 가우·보루엔이었도다.

그들의 아들은 로·한, 로·시엔 그리고 야아후였도다(註2).

그리하여 땅은 민족과 가족으로 채워져 갔도다.

피조물은 민족과 국민들에 의하여 공유(共有)되었도다. 


(사악한 세계)

이들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지 안했으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되돌아가지 아니하였도다.

오히려 하나님께 대항하며, 서로 다투었도다.

지도자들은 전능하신 주님을 향하여 반항하였도다.

그러자, 지구는 제삼층(第三層)의 깊은 곳까지 뒤흔들렸도다.

공기를 하늘끝까지 찢으셨도다.

하나님의 진노가 타올라 그 자신을 채우셨도다.

하나님이 오셔서 인류를 파멸시키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오셔서 사람으로 가득찬 온 땅을 멸망시키셨도다. 


(대홍수)

그래서 흙모래 섞인 비가 40일간 쏟아져 내렸도다.

그 후로 안개와 이슬비가 55일간 계속 내렸도다.

물은 산들과 산맥을 넘쳐흘렀도다.

산채같은 홍수(洪水)가 계곡과 웅덩이에 뛰어들어갔도다.

지구에는 피할 곳이 아무데도 없었도다.

세계에는 살아 갈만한 발붙일 데도 없었도다.

사람마다 좌절하고 무기력하게 되고 멸망케 되었도다.

절망하고 공포에 떨며 감소되고 종말을 고하였도다.

그러나, 족장(族長) 누아는 올바른 사람이었도다.

여족장 가우·보루엔은 고결한 사람이었도다.

매우 폭이 넓은 방주(方舟)를 만들었도다.

매우 커다란 방주를 만들었도다.

가족 모두가 방주에 오르자 방주는 떠올랐도다.

가족 모두가 무사히 대홍수를 피하였도다.

그와 함께 승선한 동물들은 암컷과 수컷이었도다.

날짐승들도 같이 들어갔는데 그것들은 쌍쌍(雙雙)이었도다.

때가 이르자 하나님은 물에게 명하셨도다.

그 날이 이르자 홍수의 물은 저 멀리로 물러갔도다.

그래서 누아는 피신처에서 한 마리 비둘기를

돌아와 소식을 전해준 까마귀를 다시 날려 보냈도다.

큰 홍수물은 호수로 물러가서 바다를 만들었도다.

진흙은 웅덩이와 움푹 패인 곳을 메웠도다.

다시 한번 사람 살만한 땅이 나타났도다.

이어서, 땅에 주거를 만들만한 장소가 나타났도다.

그때에 물소가 이끌려나와서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졌도다.

살찐 소가 창조자(創造者)에게 제물이 되었도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들을 축복하셨도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크신 은총을 베푸셨도다. 


(바벨탑)

그 후로 로·한은 쿠사와 메사이를 낳았고

로·산은 에란과 누가슈율을 낳았으며

그들의 자손은 민족과 여러 백성이 되었도다.

그들의 자손은 진영(陣營)을 넓혀 도시를 건설하였도다.

그들의 노래는 모두 같은 운률(韻律)이며 같은 음악이었도다.

그들은 모두가 같은 말과 언어로 말하였도다.

그런데, 어랍쇼, 거대한 도시를 만들자고 하였다.

자, 하늘까지 닿는 매우 높은 탑을 쌓자고,

이는 잘못된 일이었으나 그들은 강행하였도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들을 벌하사 언어와 액센트를 바꾸셨도다.

분노가 임하사 하나님은 말과 소리의 장단을 혼란케 하셨도다.

누가 말을 하드래도 옆사람은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도다.

말(單語)을 가지고 얘기하여도 사람들은 그 사람의 뜻을 알아들을 수 없었도다.

그래서, 그들이 건설하고 있었던 도시는 마무리되지 못하였도다.

그들이 힘들여서 만들고 있었던 탑은 이처럼 미완성인 채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도다.

그러자 그들은 절망하였고, 온 세계에 흩어져 나갔으며, 그들은 서로가 이리저리 헤어져서 지구를 빙돌게 되었노라.

그들은 여섯 지역에 이르렀고, 여섯 나라 말을 하게 되었노라(註4). 


(묘족의 계보)

족장(族長) 야후우는 여러 국가의 중심지에 살았노라(註5).

그의 아들은 족장 고오멘이라 불리웠노라.

그가 처로 삼은 여인은 여족장 고오용이라고 불리웠노라.

손자와 손자의 처는 두 사람 모두 이름을 튜우탄이라 하였노라.

후손들은 차례대로 다음과 같았노라.

족장 가운단·메우 = 완.

여족장 카운단·메우 = 쥬우.

족장 간겐·네왕(처는 없었다)

족장 세아게엑과 여족장 마우·구에

자녀들은 모두 11인으로서 각 가족의 우두머리였도다.

이중 5인의 분가(分家)는 묘족(苗族)이 되었으며

6인의 분가는 한민족(漢民族)으로 동화(同和)되었도다.

 

이 이야기는 한민족과 묘족의 분리에 대하여, 그 여로(族路)와 악마숭배, 및 각 부족으로 분파된 내용에 대하여 계속하여 기술하고 있다. 

묘족은 장례(葬禮)나 결혼식(結婚式)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선조(先祖)와, 사실은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중요한 사람들의 이름을 소리내어 낭독한다. 끊이지 않고서 이렇게 하여온 것이 이러한 전승들이 정확하게 된 이유인지도 모른다. 

 


註1. 지구의 깊숙한 곳에는 소인(小人)의 나라가 있으리라고 묘족은 말한다.

註2. 성경에 기술된 셋, 라멕, 노아, 함, 셈, 야벳 이라는 이름과 어느 정도로 닮은 이름이 있다는데 관심을 기울이시기 바란다. 

註3. 다음과 같은 유사성에 주의를 기울여주시기 바란다.

註4. 직역하면 “그들은 헤어져 나아가 거주하였고, 구슬같은 지구를 일주(一周)한다.”가 된다. 묘족인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으므로, 이 구절은 묘족 최초 사람의 지식이 완벽하였다는 것올 보고 주고 있는 듯하다. 즉, 진화가 아니라 퇴화하고 있는 것이다. 

註5. 이러한 사실에서 그들은 선조를 더듬어 보면 야곱과 고멜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알 수 있다. 야곱과 고멜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은 묘족이 인도·유럽 어족(語族)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묘족은 원래 우상숭배를 하지 아니했으나, 한민족에게 정복되면서 한민족으로부터 배우게 되었다. 암송되어 내려오는 이러한 시구(詩句)들은, 이들 묘족을 위해서 더욱 기도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뜻으로 번역(譯者註 : 英譯本)한 것을 얻게 된 것이다. 그들은 확실히 예전부터 참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그리고 예수로 시인하게 되도록 기도하여 주시기 바란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길로서 이 세상에 보내어 주셨던 분이신 것이다.

 

* 일본어 편집자 후기(日本語 編輯者 後記) : 이 창조와 대홍수에 관한 놀라울만한 기술은, 중국남서부의 산간지역에 살고 있는 묘족의 선조로부터 대대로 세대에서 세대로 간신히 이어져 내려온 것 같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선교사들과 만나기 전에 이 구전(口傳)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어네스트·트라욱스(Ernest Traux)라는 선교사가 영역한 것을 번역한 것이다. 그는 생애의 거의 전부를 묘족 중에 살면서 주님을 위하여 봉사해온 분이다. 「Acts & Facts」지(誌)가 발행되기 수년 이전에 그는 이 전설문을 나에게 보내주셨다. 최근, 제임스·하니이맨씨 라는 분이 그 복사물을 입수하여 내게 보내주었으며, E. Traux 선교사의 미망인인 엘렌·트라욱스(Elen Traux)씨의 주소를 찾아 연락을 취하게 되었다.

트라욱스 부인은 현재 이 번역물의 판권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친절하게도 그것을「Impact」지(譯者註 : 일본 '聖書と科學の會'誌의 자매지로서 宇左神正海 박사가 설립한 단체임)의 기사로 게재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었다. 그러므로, 어느 곳에 계신 크리스챤이라도 이 놀라운 기록에 접할 수 있게 되었으며, 트라욱스 부인이 바라고 있듯이 묘족의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기를 바란다. 

창조와 홍수에 관한 많은 신화(神話)가 보존되어 왔지만, 바벨탑이나 홍수 이후의 인류분산에 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매우 드문 상황이다. 이번 입수하게 된 이 글은, 이러한 모든 전승들 중에서 내용상 틀림이 없으며 무엇보다도 성경에 유사한 것들 중의 하나이며, 또한 창세기 기술(記述) 내용의 진실성을 증명해 주는 중요하고도 독보적인 자료이다. 예컨대, 지금까지 묘족의 전승에 대한 신뢰성과 번역의 정확성을 확인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이 전승이 진실성이 있음이 분명하며, 오늘날 충분히 신뢰할 만한 것이다. 성경의 기록과 차이점이 있다는 이유로 묘족의 전승의 근원이 성경에서 온 것이 아니라, 예컨대 그 당시 그곳에 거주한 기독교 선교사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 선교사들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님을 명백하게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이 전승(傳承)이 성경과 유사한 점이 분명한 것은 같은 출처, 즉 그 일어났던 사건자체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찌하든 간에 이 전승을 독자 여러분들과 나누어 가지게 된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혹시, 어느 분이든지 묘족의 전설이나 일반 역사에 대하여 어떠한 내용이든지 이곳에 기록된 내용이상의 자료를 가지고 계신 분이 있거든 꼭 연락하여 주기 바란다. 끝 


※ 譯者註 : 본 글은 일본의 「聖書と科學の會」誌에 일본어로 번역되어 있는 것을 입수하여 번역한 것이다. 일본어의 판권을 가지고 있는 일본창조과학회(日本創造科學會) 회장이신 宇左神正海(우사미 마사미) 박사의 허락을 받고서 번역한 것으로 이 지면을 통하여 감사의 뜻을 표한다.


번역 - 임번삼

출처 - 창조지, 제 78호 [1992. 4~6], ICR, 1991. 4. 1.

주소 - https://www.icr.org/article/genesis-according-miao-people

 

미디어위원회
2004-07-16

중국의 ‘알려지지 않은’ 신에 대한 기원 

: 고대 상형문자인 한자 속에 나타나있는 성경

(The Original 'Unknown' God of China

: An Ancient pictogram script points to the Bible)

Ethel Nelson


      중국 북경에 있는 450년 된 천단(天壇, Temple of Heaven)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왜 황제는 매년 소위 '교사 (郊祀, Border Sacrifice, 교외에서 드리던 제천의식)”라 불리는 그 해의 가장 중요하고 화려한 의식으로, 하얀색의 커다란 대리석 천제단(Altar of Heaven)에서 황소(bull)를 희생 제물로 드렸는가? 이 의식은 마지막 황제가 폐위된 1911년에 끝났다. 그러나 희생 의식은 단지 450년 전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 의식은 4000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Border Sacrifice가 기록되어 있는 가장 초기의 기록 중 하나는 공자(Confucius)에 의해서 편집된, 순(Shun) 황제(최초로 기록된 왕조가 시작되었을 때, BC 2256-2205년을 지배했던 황제)를 기록하여 놓은 서경(Shu Jing, Book of History)에서 발견된다. 거기에서 순 황제는 샹다이 (ShangDi, 상제, 上帝)에게 희생제물을 드렸다고 되어있다. 


샹다이는 누구인가? 이 이름은 문자적으로 '하늘의 지배자 (the Heavenly Ruler)”라는 의미를 가진다. 명나라 시대(AD 1368)의 법령(Statutes)에 기록된 Border Sacrifice에 사용된 낭송문(축문)을 검토해 보면, 샹다이에 대한 고대 중국인들의 숭배 사상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의식에 참예할 때, 황제는 먼저 천단에서 묵도하고, 악단의 풍악에 맞추어 전통복장의 소리하는 자들이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읊었다.      

”전능자시여, 신비로운 일들을 하시는 주재자시여, 내가 생각으로 당신을 바라보나이다.... 이 큰 의식을 통해 당신을 경배하며 높여드립니다. 당신의 종인 나는 단지 한 줄기의 갈대요 버드나무입니다. 나의 마음은 한 마리 개미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나는 제국을 다스리라는 당신의 은총의 명령을 받았나이다. 나의 무지함과 몽매함을 잘 알고 있음으로, 내가 당신에게 받은 위대한 은총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까봐 심히 두렵고 떨리나이다. 그러므로 나의 거룩한 의무를 이행하기 위하여 나 자신을 무가치한 것으로 생각하며 모든 법도와 율례를 준수하려고 하나이다. 이곳에서는 멀지만, 나는 천상에 계시는 당신을 바라보나이다. 당신의 천상의 병거를 타고 이 제단으로 오시옵소서. 당신의 종인 내가 나의 머리를 땅에 대고 공손하게 당신께 절하나이다. 영광스런 은총을 풍성하게 내려주시옵소서...우리의 후손들에게도 저희들처럼 축복내려 주시옵소서. 우리가 당신을 경배하나이다. 당신의 선하심은 끝이 없으시나이다.”  

여기서 황제는 샹다이를 경배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고대의 이 장엄한 의식의 원래의 의도를 추적할 수 있을까? 황제는 샹다이에게 드리는 이러한 연례 의식에 매년 참가하여 축문을 낭독케 함으로서, 샹다이가 천지의 창조주이심을 보여주고 있다.

”옛적 태초에 커다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있었다. 다섯 개의 원소들(행성들)은 회전을 시작하지 않았으며, 태양도 달도 빛나지 않았다. 영이시며 전능자이신 당신께서 처음에 순전한 것들에서 거친 부분들을 나누셨다. 전능자께서 하늘을 만드셨다. 땅을 만드셨다. 사람을 만드셨다. 번식하는 힘을 가진 모든 것들을 각기 모양대로 만드셨다.” 3

크리스챤에게 위의 낭송 소리는 이상하리만큼 매우 친숙하게 들린다. 그것은 성경의 창세기의 첫 장을 읽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히브리어로 쓰여진 더 상세한 이야기로부터 발췌된 것과 같은 유사함에 주목하기 바란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세기 1:1-2, 9-10, 16, 27-28)

중국의 창조주이신 샹다이는 확실히 히브리인들의 창조주 하나님과 같거나 하나인 것처럼 보인다. 사실, 히브리말로 전능자 하나님의 이름은 엘 샤다이(El Shaddai) 이다. 이것은 발음상으로 샹다이와 유사하다. 심지어 더욱 유사한 것은, 샹다이의 초기 발음인데, 그것은 ‘쟌 다이 (djanh-tigh) [Zhan-dai]’ 이다.고대 중국인들이 샹다이와 같이 사용하던 그들의 신에 대한 또 다른 이름은 ‘천 (天, Tian, Heaven)’이었다. 초기 한나라의 학자였던 쟁 후안(Zheng Xuan)은 '샹다이는 ‘천’의 또 다른 이름이다” 라고 하였다.위대한 철학자 묵자(Motze, 408-382 BC) 또한 천(Heaven, Tian)을 창조주(Creator-God)로 생각했다.    

”나는 천(Heaven)이 조건없이 인간들을 진정으로 사랑했음을 안다. 천은 태양과 달과 별들의 질서를 정하시고, 빛나게 하시며 그것들을 붙들고 계신다. 천은 그들을 조절하심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을 정해 놓으셨다. 천은 눈, 서리, 비, 이슬을 내리셔서 오곡과 아마(flax)와 비단을 자라게 하셔서 인간들이 그것들을 사용하고 즐기게 하셨다. 천은 산, 강, 골짜기, 계곡을 정하셨고, 선악을 다스리도록 많은 것들을 인간에게 위임하셨다.” 6

샹다이가 모든 만물들을 어떻게 창조하셨는가? 여기에 고대의 Border Sacrifice 의식에서 낭송되던 축문에 이러한 부분도 있다.

”전능자이신 태(Te, ShangDi) 시여, 당신이 명하실 때에, 하늘과 땅과 인간이 존재하게 되었나이다. 하늘과 땅 사이를 분리하시고, 인간과 만물을 질서 있게 하시고, 만상을 하늘에 펴셨나이다.”

샹다이가 명하실 때에 하늘과 땅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에 주목하라. 히브리어 책에 기록된 엘 샤다이의 창조하신 방법과 비교하여 보라. 우리는 샹다이와 샤다이는 이름도 유사하고 하신 일들도 매우 유사함으로 사실상 동일한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시편 33:6,9)      

우리는 황제가 샹다이에게 황소를 희생 제물로 드린 이유를 아직 설명하지 않았다. 이 중국에서 행해진 희생 제사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께 드려지던 희생 제사를 비교하여 보자. 

...흠 없는 송아지를 속죄제를 위하여 취하고 흠 없는 수양을 번제를 위하여 취하여 여호와 앞에 드리고” (레위기 9:2)

최초로 행해졌던 사례들은 창세기 4:3,4절, 8:20절에 기록되어 있다.


Border Sacrifice의 기원은 ‘God's Promise to the Chinese’ 라는 책에서 설명되어져 있다.8 저자인 Nelson, Broadberry과 Chock은 가장 오래된 중국의 상형문자들을 분석하여 왔는데, 그들은 이 문자들이 기독교의 진리를 기초로 하여 만들어졌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형 문자들이 만들어진 시기는 모세의 시대 이전으로, 이 문자들에는 창조, 유혹, 죄로 인한 인간의 타락, 동물 희생을 통한 죄의 용서 (이것은 오실 대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함) 등이 나타나 있었다. 놀랍게도 창세기 사건들의 모든 내용들이 중국의 독특한 문자 속에서 발견되어지고 있으며, 아직도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밑의 그림은 중국의 문자인 한자 속에 나타나 있는 놀라운 사실들의 일부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서로 관련이 있음과 창세기의 사건이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중국인들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민족들은 대홍수 이후 첫 문명이었던 바벨 문명에서 살았던 거주민들의 후손들인 것이다. 하나님은 최초로 오실 ‘여자의 후손’인 구세주에 대한 당신의 약속을 창세기 말씀 속에 주셨다 (창 3:15). 창조주 하나님의 어린 양인 구세주의 오심과 희생에 대한 예언은 인류의 나이만큼이나 오래 되었다.   

중국인들이 기독교를 서양인들의 종교라고 당신에게 말한다면, 당신은 그들에게 고대의 중국인들도 오늘날 크리스찬들이 믿는 하나님을 같이 믿었고 경배했었음을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주 그랬던 것처럼, 중국인들의 조상들도 거짓 신들을 따라 잘못된 길을 걸어갔으며, 그들이 원래부터 섬기던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기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희미해져 갔던 것이다.고대의 중국 글자들은 성경의 창세기가 역사적인 진실이라는 강력한 증거를 제공하고 있다.

 

*참조 : ‘성경으로 보는 한자의 세계’ 한문 강좌 열어 (2012. 9. 22. 시사코리아저널)
http://www.koreaj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8477

The Lamb of God hidden in the ancient Chinese characters

https://www.semanticscholar.org/paper/The-Lamb-of-God-hidden-in-the-ancient-Chinese-Gu-Zhuan/b9fb7c36489f52d4dd2c37bb529e1646ea583fb6

The Lamb of God Hidden in Chinese Characters

https://answersingenesis.org/jesus/the-lamb-of-god-hidden-in-chinese-characters/

Noah’s Ark hidden in the ancient Chinese characters

https://creation.com/images/pdfs/tj/j19_2/j19_2_96-108.pdf

Genesis in Chinese Pictographs 

https://www.icr.org/article/genesis-chinese-pictographs/


References

1. James Legge, The Chinese Classics (Vol. III), pp. 33-34, The Shoo King: Canon of Shun, Taipei, Southern Materials Centre Inc., 1983

2. James Legge, The Notions of the Chinese Concerning God and Spirits, pp. 24-25, Hong Kong, Hong Kong Register Office, 1852.

3. Ref. 2 p. 28.

4. Schuessler, Axel, A Dictionary of Early Zhou Chinese, pp. 123, 528, University of Hawaii Press. Honolulu, 1987.

5. Lung Ch'uan Kwei T'ai Lang, Shih Chi Hui Chu K'ao Cheng, p. 497, Taipei, Han Ching Wen Hua Enterprise Co. Ltd., 1983

6. The Works of Motze, p. 290, Taipei, Confucius Publishing Co.

7. Ref. 2, p. 29.

8. Read Books Publisher, Dunlap, UN, USA, 1997.

9. This was of course the near-universal experience of all tribes and nations.

*See also: Chinese Characters and Genesis for large printable versions of Chinese Characters that show that the ancient Chinese knew the Gospel message found in the book of Genesis.

*Ethel Nelson, M.D., F.A.S.C.P

Dr. Nelson is a retired pathologist living in Tennessee who was a medical missionary in Thailand for 20 years.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home/area/magazines/docs/v20n3_china.asp ,

출처 - Creation 20(3):50-53, June 1998.

Charles Taylor
2004-04-21

창조주(The Creator) : 언어학, 창세기, 그리고 진화론 제 5부


      나는 이제 창조주(Creator)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측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창조주는 누굴까? 히브리어 창세기는 어떻게 그를 기술하고 있을까?

여러분께서는 아마도 하나님에 대한 히브리어는 엘로힘(Elohim)이라는 말을 신학자들한테서는 물론 여러 사람들한테서 들었을 것이다. 이 단어는 복수형이다. 하지만 이 단어를 받는 술어동사는 단수 주어를 받는 형태이다. 여기서 우리는 삼위일체의 암시를 본다. 즉, 단수 속에 복수가 암시되었다.

성경에 처음 나타나는 세 마디 단어 즉, bereshith bara Elohim은 역사를(시작이 있었다, berehith), 다음에 창조를(그가 창조하였다, bara), 그리고 그 다음에 창조주를(창조주, Elohim) 담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God)은 인간의 상상력과 관계가 없고, 인간의 추상적인 영역밖에 계시는 창조주(Creator)이시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역사를 주관하신다. 기독교 교리는 무엇보다도 역사상의 사건에 대한 신앙이라는 점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창세기 2장에 이르면, 우리는 곧 또 다른 이름과 만난다. 이 이름에 대한 히브리어 글자는 YHWH 이다. 이 네 글자는 tetragrammation이라는 말로 알려지게 되었다. BC 시대의 후기에 유태민족은 이 단어를 발음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 (Master, 또는 우리가 종교적인 의미로 쓰는 '주님 the Lord' 라는 뜻)'을 뜻하는 adonai 이라는 단어를 YHWH의 대용으로 사용하였다. 유태인 독자들을 돕기 위해서 그들은 네 자의 子音 발음 글자 YHWH에 모음 발음 adonai를 첨가했다. 이것으로 독자는 YaJoWaiH 와 비슷한 발음을 할 수 있었다. 이 발음을 담고 있는 글자가 유럽 언어의 Jehova (여호와)가 된 것이다. 'j'는 'y'와 비슷한 것으로 'v'를 'w'와 비슷한 발음으로 되는 것이다. 언어학자들은 이 이름이 원래 하나님이 창세기 15:7에서 아브라함에게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실 때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믿고 있다. 그리고 출애굽기 3:14에서 모세한테는 더욱 뚜렷하게 드러내 보이실 때의 하나님과도 관련이 있다고 믿고 있다. 이 이름이 Ehyeh, 즉 I am (나는 ... 이다)으로서 나는 존재한다, 또는 나는 살아있다 라는 뜻을 내포한다.

더욱이 성경 속에 유명한 사람들의 이름과 접속된 접두어 Yehu (영어 성경들에서는 때때로 'Jeho-'로 철자가 된다)는 바로 이 이름에서 연유되어 있다. 그리고 Jesus (예수)의 히브리어 형태는 Yehoshua (예호수아)로서 YHWH가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그럼으로 창세기의 YHWH의 네 글자 형식은 예수와 특별한 연관을 가진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창세기 1:2b에서 Ruhch Elohim이라는 용어가 나타나는 것을 주목하게 된다. 이 말은 성령을 뜻한다. 이렇게 해서 창세기 기사 속에는 삼위일체의 증거가 한 방향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창조의 사역이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삼위의 인격들 전 존재가 그 사역에 관련하고 있다. 즉, ElohimYHWH 그리고 Ruach Elohim 이 세 인격이 다 관련하고 있는 것이다.

YHWH라는 이름은 Elohim이라는 이름보다 더 밀접하다. Elohim은 다른 신들도 뜻할 수 있다. 심지어 영웅적인 인물이나 천사들도 뜻한다. 그것은 일반적 형식의 하나님의 이름이다. 그러나 YHWH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그의 후손들의 하나님이다. 그리고 한 인격체의 이름인 것이다. 유태종족에게는 이것이 너무도 거룩한 이름이어서 그들은 그 이름을 입에 담지 않는다.

신약에서 예수는 스스로를 '주님 (the Lord)'으로 불러도 좋다고 허락하였다. 이 단어(주님)는 우리가 YHWH에 대신하는 이름인 Adonai 를 번역한 단어로서 예수는 물론 한 인격의 이름이다. 즉 한 인간의 이름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의 형태를 한 스스로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우리는 성령에 관련된 언급을 자주 만난다. 구약에서는 성령이 사람들 위에 오셨다. 그리고 오순절 이후로는 성령은 '하나님의 권속들' 속에 거하려 오신다. 신성(神性 Godhead)의 세 인격이 창조에 관련한다. 창세기 2장에서 요약되어 있는 바처럼 특히 사람의 창조에 관련한다. 

또한 창조의 사역을 뜻하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창세기 1:26에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는 표현을 만난다. 이 복수 명사형은 특별히 사람의 창조에 연관이 있어서 (1:27), 이 대목에 이르러는 성경은 신성(神性)이 갖는 인격들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은 남성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나의 대답은 예(yes)다. 성경은 남자들과 여자들의 역할을 명백히 가르친다. 비록 하나님의 눈은 남녀의 가치를 동등하게 보지만, 성경은 모든 점에 있어서 두 성을 동등하게 취급하지 않는다. 남자는 결혼에 있어서 책임지는 자격, 즉 대답하는 자격이고, 여자는 받드는 자, 즉 돕는 자의 자격으로 되어있다. 창세기 2:18에서 하나님은 당신이 지으신 남자를 돕는 배필을 지어 주리라 결심하신다. 이 단어(돕는 자)는 사무엘상 7:12에서도 보인다.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가로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에벤에셀(Ebenezer) 그 자체는 '돕는 바위' 라는 뜻이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자리를 뜨면서 하나님께서 이 곳을 그냥 돕는 여성이라고 하셨다고 혹시라도 주장하기 전에, 나는 여러분께 꼭 알려 드려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ezer 은 남성이라는 사실이다. 창세기 2:18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정확한 말씀은, '내가 그에게 어떤 돕는 자를 마련해 주리라 (I'll provide him some help for him.)' 이다. 히브리어의 추상적인 명사들은 대개가 여성인데, 여기서는 정말 뜻밖에도 추상적인 개념을 뜻하는 단어가 남성으로 되어있는 것이다.  

하나님 당신 자신에 관해서 살펴보면, 그의 이름 Elohim 만으로는 복수형이다. 히브리어에서 어미 -im을 가진 단어들 가운데 가끔은 여성 명사도 있지만, 대개는 거의 언제나 남성이다. 이것만이 하나님에게 남성이라는 이유를 달게 되는 절대적인 증거는 아니다. 이것을 증명하려면, 이 단어에 따르는 술어동사의 형태도 합당하여야 한다. 그런데 이 명사에 연결되는 술어동사의 형태가 명백하게 남성 단수 형식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격이 남성일 뿐만 아니라, 단수-복수 연관 인칭이라는 사실을 기술하고 있다고 보아야한다. 이것이 Elohim 이라는 단어가 소유하고 있는 우리를 놀라게 하는 문법적 특징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단어를 하나님(God) 이라고 번역하여야할 것인가, 또는 신들(gods) 이라고 번역할 것인가의 기로에서 그것을 분간할 수 있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후자(신들)로 번역이 되어야 할 때는 오직 술어동사가 복수형일 때에 한정되어있다. 그 예가 이사야 37:12, '그 나라 신들이 건졌더냐...? (Have the gods of the nations delivered them...?' 에서 볼 수 있다. 여기에서, Elohim은 복수 동사형인 Ha-Hittsilu를 뒤따른다, '신들이 건졌더라 (have they delivered)', 그래서 Elohim은 '신들 (gods)' 이어야 한다.

이와 똑같은 문법적 특징, 즉 남성 명사형이 통상 '주님 (the Lord)'으로 번역되는 거룩한 이름 YHWH에도 적용된다. 이 단어는 통상 남성 술어동사를 받는다. 그러나 이 단어에는 복수형 동사는 술부에서 사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어쩌면 하나님이 이 단어 속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언가를 드러내게 하는 요소를 함축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궁극적으로 예수께서는 엠마오(Emmaus)로 가시는 노상에서 두 가지를, 즉 당신 자신과 창세기에서 말라기까지 포함한 '성경의 모든 것'에 관해서 설명하셨다. (누가복음 24:27).

하나님(God)이 대명사로 언급될 때면, 그것은 언제나 남성대명사 huu 'he' 이지, 결코 여성대명사 hii 'she' 인 적은 없다. 이 모든 내용으로 보아 '하나님(God)'에 대한 히브리어 속에 그 어떤 여성적인 요소라든가, 심지어 공통성(common gender)의 원리를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몰론 여러분들은 희미하게나마 삼위일체의 존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또 다시 삼위 개개 인격이 다 남성임을 보게 된다. 술어동사야말로 주어의 성을 결정하는 요소다. 비록 ruach 'spirit' 가 보통은 여성명사이지만, 하나님을 언급할 때에는 이 단어는 Elohim과 어울려서 Elohim의 문법적 그리고 의미론적 성질을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열왕기상 24:27의 말씀, '주님의 영이 어느 길로 가셨는가...?'에서 Ruach  (spirit)라는 단어는 남성동사 abar 'went'를 취하였다. 

히브리어의 문법에 관한한, 성경이 신격(Deity)의 속성에 非-남성적인 요소를 나타낸다고 주장할 아무런 근거도 없다. 신격(Deity)의 속성에 여성의 흔적이 있다는 생각이 나돌고 있는데, 그것은 오늘에 이르러 일부의 사람들이 그랬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에서 연유된 결과 일 뿐이다. 그 일부의 사람들이라고 하면, 이 세상의 모든 사물에  하나님이 구별을 지어놓으신 개체들을 하나의 거대한 통일된 집단으로 묶어 두기를 원하는 부류의 사람들을 지목한다. 무엇보다 더 나쁜 것은 그런 생각이 소위 여성의 해방 운운하는 사상을 내세운 성차별의 철폐 운동권들에 의해 강력하게 부추겨졌다는 점이다. 그들의 운동은 과학 분야와 마찬가지로 해를 거듭할수록 변질되고 있다. 이들의 운동과 과학과의 차이는 과학이 하나님에게 공헌하는 입장에 있을 때에는 다시없이 선량한 반면에, 이 운동권의 사상은 그 자체로서 하나님에 반대되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회복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이념을 신봉하는 사람은 당연히 회복이 가능하다. 그들도 일단 회복된 이후로는 그 이념이 나쁜 속성에서 발단이 되었음을 인식하고 일반적으로 그 운동권을 비난한다. 

이와 같이 해서, 책임자로서의 남자와 남편을 돕는 특별한 역할을 담당하는 배필로서의 여자로 구성된 가정의 원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이어지는 성경 전체에 충만하다. 이에 더하여, 창세기 초두의 언어들은 물질계의 기원과 사람의 실질적인 기원을 밝혀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당신의 독생자, 즉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이 세상의 구원 속에 사람을 회복하려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흔적을 이미 내포하고 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하나님 당신 자신을 나타내는 이름들 안에 감춰져 있음을 읽을 수 있다는 뜻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7/i4/creator.asp 

출처 - Creation 7(4):21–23, June 1985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550

참고 :

미디어위원회
2004-02-28

소돔과 고모라의 재발견

(Sodom and Gomorrah Rediscovered)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 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창세기 19:24,25)

”Then the LORD rained down burning sulfur on Sodom and Gomorrah - from the LORD out of the heavens. Thus he overthrew those cities and the entire plain, including all those living in the cities - and also the vegetation in the land.' Genesis 19:24, 25 NIV)   

아름답지만 황폐한 사해(Dead Sea) 지역의 남쪽 끝에는, 소돔산(Mt. Sodom)이라고 알려져 있는 산이 있다. 이 지역은 소돔 성이 위치해있던 곳과 인접해 있다. 성경은 그 날에 파괴된 것은 소돔과 고모라 성을 포함하여 보다 넓은 지역이었음을 가리키고 있다. 지금까지 적어도 5 개 도시가 재로 변했고, 유황불이 그들에게 쏟아졌었음이 발견되었다. 이 도시들의 각각의 위치는 이 지역에 대한, 특히 정사각형 또는 직사각형 지역에 대한 정밀한 위성 지도와 지형학적 모습들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각 장소들을 방문한 사람들은 도시가 유황불(sulfur balls, King James version에서는 brimstone)로 재로 변해버렸음을 연달아 발견하면서 성경의 기록이 사실임을 확인하였다.

조나단 그레이(Jonathan Gray)가 도시 하나를 가리키고 있다. 성벽의 직사각형의 외곽선을 볼 수 있다. 재로 변한 하얀 색의 도시가 주변 회갈색의 사막과 대조되어 황량하게 놓여있다.

 

위의 사진에서 성의 벽은 꽤 분명해 보여서, 심사숙고가 필요치 않았다. 집과 건물들의 크기는 실제적으로 꽤 컸는데, 이것은 한때 이 도시에 큰 체구의 사람들이 살았었음을 가리키고 있다. 성벽과 도시의 모든 것들은 완전히 재로 변해 있었다.

여기에 마치 지구라트(ziggurat, 이교도의 피라미드 사원)가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흙무더기(mound)가 있다. 몇 도시의 외곽에는 이집트의 거대한 스핑크스와 모습이 매우 유사한 거대한 모습들이 있었다.

재로 변한 몇몇 집들에 들어갔을 때, 전갈의 존재는 일행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한 사람이 성벽의 조각을 손으로 쥐자 쉽게 부서졌다.

   수백의 유황 불(sulfur balls)들이 발견되었고, 수집되었다. 두 번의 경우에서, 조사팀은 비가 온 후에 도시에 들어갔다. 알갱이를 둘러싸고 있는 유리들은 빛에 의해 반짝거렸으며, 강우는 수백만 개의 유황불을 노출시켰다.

유황 불(balls)은 압축된 순수한 유황 가루로 구성되어 있었다. 여러 화산 전문가들에게 문의한 결과,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이러한 성분으로 구성된 불 덩어리들(balls)은 없었다는 것을 (화산 활동 주변에서 까지도) 확인할 수 있었다. 유황 불들이 하늘에서 떨어졌을 때, 온도는 대략 섭씨 5,000도(화씨 9,000도) 정도로 평가되었다. 그들 주변의 모든 것들을 태워버린 후, 열은 그들 주변에 형성된 재들을 녹이기를 계속하여 유리화된 재를 형성했다. 그래서 유황 덩어리들은 녹아서 재고체화 된 재들의 유리질 케이스에 의해서 둘러싸여지게 되었다.

금화(gold coins) 였다고 생각되는 어떤 것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분석결과, 동전은 금소금(gold salts)으로 변화되어 있음이 발견되었다. 열은 동전에 있던 금들을 태워서 금재(gold ash)로 바꾸어 버렸다. 다음 사진들은 탐험자들이 한 집 내부에서 재로 변해버린 유황 덩어리들 몇 개를 발견하는 것과 한 샘플을 태우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많은 유황 불 샘플 중의 하나가 검증 팀에 의해서 수집되었다. 독립된 실험실에서 분석된 결과 유황(sulfur)의 함유량이 95% 이상으로 높았다.

 

이 도시들의 재발견에 대한 더 많은 사진들과 정보들을 얻기 위한다면, 다음의 비디오를 추천한다. 다시 한번 성경의 기록이 진실임이 입증되었다.

 

Surprising Discoveries, Part II and the Ark of the Covenant CD-ROM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bibleplus.org/discoveries/sodomfound.htm 

출처 - BiblePlus 


미디어위원회
2004-01-27

언어의 기원에 관하여

 (On the Origin of Language)

Les Bruce 


       서유럽의 언어연구는 언어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로서 시작되었다.1  희랍 사람들이 시작한 언어연구는(B.C. 3, 4세기) 처음에는 언어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인습주의자(conventionalist)들은 언어형태 (주로 소리와 단어)와 그 의미와의 관계를 본래가 독단적인 것으로서 일종의 사회적 인습이라고 가정했다. 자연주의자(naturalist)들은 단어의 형태 (예컨대, 그 소리)는 실질 세계의 대상물과 자연스럽게 연관되어있다고 가정하였다. 어떤 소리의 조합(단어의 전체 또는 단어의 부분)은 대상물에의 흉내에 직접적으로 연관된다고 보고, 그 소리 또는 그 개념은 대상물에 대한 직접적 모방이라고 했다. (예컨대, kookaburra).

 

위의 예에서처럼 의미에 그다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대부분의 언어들도 어떻게 의성어(擬聲語)에서 파생되었는가를 설명하려는 노력에서 어원학(語源學)의 원리가 시작되었다.  언어파생역사의 연구(어원학)를 통하여 자연주의자들은 모든 언어의 기원은 의미하는 대상물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말에서 연유되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고 했다.


최초의 철학적인 언어 토론은 결국 언어 패턴의 규칙성에 관한 토론장으로 발전하였다. 언어설명의 구조로서 두 가지 기본적인 이론이 부각되었다. 그 중 하나는 불규칙성을 선택하였으며, 다른 하나는 언어의 근원적 규칙성을 주장하였다. 언어는 부적절하게 사용되는 과정에서 부지부식 간에 훼손된다는데 근거하여 언어의 불규칙성을 설명하고 있는 후자의 탁월한 이론은 크게 호응을 받았다. 이 이론은 언어의 옛날 형태가 현재의 그것보다 더 순수하다고 주장했다. 


19세기에 들어와서부터 종전의 언어연구를 크게 특징짓던 언어기원에 대한 이론화 노력은 필연적으로 개재하던 높은 불확실성 때문에 심각한 반동에 부닥쳤다. 새로운 관심사는 여전히 역사적이었으나 목표는 그다지 이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마침 민족국가들은 과거를 재발견하려 노력하던 낭만적인 시대였다. 전 인류의 모어(母語)보다는 오히려 민족의 모어와 동포의 문제가 관심의 초점이었다. 낭만적 민족주의가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어쩌면 현실적인 목표에 대한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기존의 비과학적인 불확실성에 대한 반작용이었을는지 모른다. 실험적인 데이터를 분석함으로써 보다 과학적인 접근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이와 같이 해서 역사적 과거를 재구성하기 위하여 체계적 비교언어학의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19세기 한 세기 동안 주로 독일 학자들의 선도로 엄청난 양의 학술 연구가 이루어졌다. 산스크리트(梵語)가 라틴어와 희랍어는 물론 기타의 유럽 언어들과 근원적으로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발견한 Sir William Jone의 학설 위에 근거하여, 초기의 언어역사학자들은 비교언어학의 원리를 개발하게 되었다. 발굴된 언어역사학의 데이터 덕분에 인도-유럽 조어(祖語, proto-Indo-European)2의 재구성이 진척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조어가 많은 유럽 언어들로 파생된 변화의 과정까지도 기술될 수 있었다.


독일에 근거한 ‘신문법학’ 파는 19세기 3/4분기에 음성변화의 연구에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문법학자들은 역사자료를 자세히 분석하여 음성변화의 놀라운 규칙성을 증명해 보였다. 선도적 신문법학자 Hermann Paul (1846―1921)은 음성변화의 중심 메커니즘의 편리한 법칙들을 식별하였다. 그리고 그 법칙의 테두리 안에서 ‘잘못 발음하는’ 양식으로 변화하는 음성변화를 그는 세 형태로 분류하였다.3 미국의 초기 구조주의자인 Leonard Bloomfield (1887-1949)는 신문법론자의 이론을 더 자세히 펼쳐냈던 사람이다. 그는 음성변화의 메커니즘을 두 가지 형태로 분류하여 목록을 작성하였다. 즉, 고정화 메커니즘에 대비시킨 퇴화 또는 단순화의 메커니즘이 그것이다. 그는 최소한 세 가지 고정화 메커니즘에 의한 변화를 실증하고 그것들을 재-구성의 과정과 보상적(補償的) 과정으로 성격 지었다. 그리고 Bloomfield는 단순화 메커니즘의 범주에 속하는 음성변화에 대해서는 최소한 11가지 과정을 실증하였다.


신문법학자들이 제시한 언어 변화의 다양한 과정에 관한 상세한 입증자료들, 특히 음성변화에 대한 입증자료들은 언어 변화의 두 가지 기본적인 원리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 원리는, 1) 간소화의 과정과 2) 재구성의 과정이다. 20세기의 저명한 역사언어학자들 중의 한 사람인 Martinet이 언어의 변화에 관한 이 두 원리를 세웠다는데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그는 적절한 대화를 유지하는 재구성의 과정이 인간이 갖는 노력의 최소화 경향을 지향하는 단순화는 재구성 과정과 상충한다고 언급했다.


'언어학적 진화는 대화를 필요로 하는 인간의 욕구와 정신과 육체의 활동을 최소화하려는 인간의 본래적인 경향과의 사이에 개재하는 갈등에 의해서 지배된 결과로 진행된다고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도 물론 다른데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행동은 노력의 최소화 법칙에 좌우되고 있다.” (Martinet 1964: 167).


최소 노력의 법칙은 현존상태를 무자비하게 간소화하고 복잡한 용장(冗長)을 줄여나가고, 이어서 궁극적으로 언어의 다양한 체계를 재구성하여 통화 가능 수준을 유지하려 한다. 재구성의 원리를 통화의 보존 법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Herman Paul이 언어의 기원에 관심이 없었다고 하는 말은 자칫 오도하는 말이 될 성 싶다. 언어기원의 문제는 오늘날의 언어학자들에게 여전히 흥미 있는 대상인 것처럼 Paul에게도 관심 있는 문제였다. 현대 언어학 (과거 175년 동안)과 예전의 2천년期의 언어학과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순수한 이론적인 영역에서부터 실험과학의 영역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언어학자들은 여전히 언어의 기원에 호기심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언어의 기원에 대한 그들의 추론은 반드시 관찰 가능한 언어 사실들에만 근거해야 할 것임은 물론이다.


언어의 두 가지 근본적인 원리는 반드시 언급해야만 한다. 즉, 최소의 노력으로 거두려는 간소화 효과와 통화의 보정(補正)유지, 즉 재구성이다. 이 두 원리에 연관된 두 가지 관찰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가) 원시언어 : 오늘날 어떤 인간 집단도, 심지어 석기 문화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까지도, 원시언어로 간주될 수 있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더욱이 인류역사를 통해서 알려진 언어들 중의 어떤 언어도 여하한 의미로 보나 원시언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Elgin은 '우리들이 기록을 가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고대언어 (예컨대, Sanskrit)들은 많은 현대 언어들보다 더 뒤엉키고 복잡한 문법구조를 가지고 있다.” 라고 지적했다 (Elgin 1973: 44). 인류역사를 통하여 꾸준히 이어온 간소화 과정은 오늘날 피할 수 없는 현상이라는 것을 안다면, 이 사실은 당연히 놀라운 것이 못 된다. (이것은 그 자체로서 물론 확정적이 되지는 못 하지만, 어쨌거나 우리는 최소한 물질문화의 단순성이 반드시 단순한 언어문화를 암시하는 것은 아니라고 결론내릴 수 있다).


나) 언어의 창조성 : 한 언어에 있어서 어휘가 가장 창조성이 높은 영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심지어 그런 어휘의 영역에 있어서까지도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전적으로 새로운 자료를 적용하기 보다는 차라리 기존의 어휘집에 담긴 자료를 재적용 하려는 경향이 농후하다.’ (Langacker 1967: 186). 어느 특정 언어 안에서부터 기존의 어휘를 재적용하고 연장하는 것 말고도 단어들이나 또는 단어의 부분들을 다른 언어에서부터 차용(借用)하는 관행이 보통이다. 일반적으로 언어는 특특한 형태를 새로 발명한다는 뜻으로의 창조성을 발휘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영어의 대명사 체계는 현재 활용되고 있는 기본적인 두 원리를 설명한다. 고대 영어의 대명사 체계는 1인칭, 2인칭 그리고 3인칭 각 인칭에 다 골고루 세 가지 수(數)를 구별했다 (단수, 兩數, 복수). 그런데 현행 표준영어에서는 단수와 복수로만 구별한다. 예전에 사용하던 ‘낭비’ 체계는 양수와 복수와의 사이에 있는 차이점을 중립화됨으로써 간소화 되었다. 게다가, 2인칭 ‘you'가 가지고 있던 단수-복수의 변별성이 상실된 결과로 때때로 어이없는 모호성(비효율적인 통화)이 돌출하기도 한다.

(지금의 내 아내의 소녀 시절 내가 그녀에게 데이트를 신청하였을 때, 나는 한 차 가득히 탄 사람들과 데이트를 한 경험을 했다. 그것은 내가 ’you'와 밖에서 만나자고 했을 때, 그녀는 그 ‘you'가 단수 ‘you'인지 복수 ’you'인지를 구별하지 않았던 결과였다. 그 때 그곳에 함께 온 나머지 사람들을 물리치는데 나는 얼마나 낯 뜨거운 경험을 했는지 모른다. 내 생각으로는 영어의 2인칭 대명사의 수의 개념은 용납될 수 없을 만큼 모호하다!)


현재 영어에서 이와 같은 현실을 교정하기 위해 진행되고 있는 재구성 작업은 문법상 다른 부분들을 대명사에 수혈하여 보려는 실험이 포함되어 있다. 미국의 북동 지방에서 새로운 2인칭 복수대명사를 만들기 위하여 일반적인 복수명사 어미 's'를 ”you'에 첨가 하였다. 그 결과 복수 'yous'를 창출하고 그 발음을 'ewes”로 하기로 하였다. 한편 크게 활용되고 있는 '남부 사투리”도 또 다른 하나의 방법을 재구성하였다. 그것은 구(句) 수준의 형용사인 'all'을 첨가하여 복합어 형식인 'you-all'을 사용하여 ”y'all'을 만들어냈다. 어쨌거나 이 두 경우 한결같이 혁신적이기 보다는 응용적인 재구성 과정인 것만은 분명하다.


분명히 Martinet도 포함된 많은 언어학자들은 이 두 반대 입장에 있는 원리가 그 세력이 동등하다고 믿고 있다. Langacker는, '원시언어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쇠퇴언어(corrupt language)’도 없다. 언어는 변화한다. 그러나 언어는 쇠퇴하지 않는다.” 라고 말했다. (Langacker 1973:17). 이것이 입증하기 어려운 점이다. 이 주장을 지지하는 현상은 스페인어의 음성체계에 대한 역사적 고찰에서 잘 입증된 것 같다. 음성은 변화된 한편, 그 언어 체계에 있는 적지 않은 특성들이 상당히 원상대로 보존되어 있다. 정보처리의 관점에서 볼 때에 총체적 변화의 과정이 커뮤니케이션의 잠재력에 아무런 변화도 주지 않았다. Bloomfield가 제시한 음성변화로 인한 간소화의 수많은 실례들은 통상적인 범주와 어휘에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영어명사에 있어서 격 어미(格 語尾)의 상실의 경우가 그 한 예다. 그 결과로 생긴 언어 체계에서 커뮤니케이션의 잠재력의 상대적 복잡성은 평가하기에 매우 어렵다. 주격, 목적격 등과 같은 명사의 격을 식별하는 격 어미의 기능이 또 다른 문법형태 (통상 주격절이나 목적격절로 식별되는 절에 있는 어순)에 의해 대체되었지만, 커뮤니케이션의 효율성의 측면에서 이 두 체계를 어떻게 비교하는 게 적절한 방법인가를 판단하기는 매우 어려운 문제다. 어쨌거나 이때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이라면 이런 것들이 될 것이다. 즉,

'절 안에서의 예전 어순은 어떻게 됐는가?” '이제 어순은 화법에서 옛 정보와 새 정보를 암호화하고 표시하는 격-역할을 이중으로 기능하는가?” '초점 맞추기가 포함되었는가?”


언어는 황당하리만치 복잡하다. 언어가 갖고 있는 짜 넣어진 의미와 재결합된 (차례로 포개 진) 다양한 어계(語階)들을 보고 수많은 지도급 언어학자들은 언어가 이론적으로는 부정형 (不定形)이지만 일상적인 용도에 있어서 실제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암시를 받는다. 언어는 너무 복잡해서 언어 현상 안에서 그 어떤 중요한 고르기 기능을 탐지할 수 없는 것은 마치 태양이 스스로를 소각하고 있는 것을 관찰만으로 식별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내가 알고 있는 한 그 어떤 언어학자도 언어의 재구성 과정이 간소화 과정을 무시하고 언어의 양적 실증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만약에 우리가 언어의 발생을 인정하고 또한 동물 간의 커뮤니케이션으로부터 진화됐을 가능성을 인정하는 결론을 내리려한다면, 우리는 진화를 실증 가능한 보편적 원리라는 가정을 인정하여야만 한다. 이와 같은 형태의 선험적 합리화는 전(前)-19세기 ‘추론문법’이 함입하였던 기본적 오류다. 그것은 언어에 대한 현대적 의미로서의 전(前)-과학적인 이론이었다.


더욱이 관찰된 데이터로 보아 유사이전에 언어의 발전이 있었던 시기라고 할만한 시기가 존재했었다는 흔적이 전혀 없다. 그런 유의 유사이전에 언어발전이 있었다면, 그 이후 한 동한 이어졌을 균형 고르기 기간이나 간소화 과정의 원인을 암시하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전혀 없다. 금세기 최고의 탁월한 언어학자의 한 사람인 Noam Chomsky는 인류의 언어와 동물의 커뮤니케이션은 비교조차도 할 수 없는 전적으로 별개의 실체라고 언급한다. 이 두 실체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간소화 과정과 재구성 과정은 상호간의 균형을 잡는 기간이었다. 또는 간소화 과정을 통하여 언어는 점진적으로 제한된 일반화 체계로 축소되었다. 인간의 언어는 현재 드러내고 있는 근본적 잠재력을 언제나 가지고 있었다. 또한 현재 언어의 정밀한 커뮤니케이션 잠재력은 과거 한 때에도 보다 더 광범위했었다. 


이 시대의 탁월한 사회언어학자 Labov는 진화론적 구조에서의 언어의 위치를 이해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이 두 과정에 관해서 이렇게 기술한바 있다.


즉, 언어 진화론의 ‘파괴와 재건’ 이론은 그 전 과정이 역기능적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동등하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언어학자들은 쉽게 이해한다. 왜 그런가 하면, 그 이론체계는 파괴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추하여 새로운 형태를 만드는 작업은 최악의 작업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최소 노력의 원리가 파괴의 배후에 숨어있는 악의 천재라고 하면, 우리는 언어의 변화를 일종의 원죄에 대한 거대한 증언으로 볼 수 있다. (Labov 1973:245).


Labov는 자기 논문의 나머지 부분에서 언어변화의 역기능적인 역할에 대한 적절한 대안을 전혀 강구하지 못했다. 그는 언어의 변화가 결과적으로 다양화 되었으면 되었지, 총체적인 복잡성이나 적응력의 분산으로 결과 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언어의 변화에서 인간 사회의 발전으로 결과 되는 순기능적인 진화를 찾으려 했다. 그래서 그는 언어의 다양성은 문화의 상대적 고립을 제공하면서 문화의 다중성을 유지하여 인간 사회의 진화를 촉진한다고 암시했다. 그러나 그는 순수하게 언어의 변화 안에서의 언어의 변화를 위한 순기능적 역할을 제시할 수 없었다. 언어의 발전은 역기능적(비-진화론적) 과정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것 같다.


언어현상에 대한 관찰이 아무리 광범위하든 상관없이, 언어 그 자체를 볼 때, 언어가 긍정적인 발전과정의 산물이라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다. 언어는 일관되게 변화의 상태에 있다. 언어는 기껏 해봐야 평형상태 유지가 고작인 것 같다.



1 인도 전통은 희랍인의 작품을 앞지른다. Panini (B.C. 4세기)는 범어 (Sanskrit)의 문법적인 기술로서 선배들의 작품을 앞질렀다. 그의 범어문법은 사상초유의 가장 상세하고 종합적인 문법으로 알려져 있다. 인도인은 범어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보다는 오히려 범어에 대한 정확한 설명에 더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2 19세기의 작품은 기본적으로 고전 언어들 (라틴어와 희랍어)과 가장 오래된 언어로 증명된 인도-유럽어인 Sanskrit어에 근거하고 있었다. 1870년대에 터키의 Ankara 동쪽 약 150km 지점에서 Hittite어 비명이 발굴된 이후부터는 히타이트어가 가장 오래된 인도-유럽어로 인정되었다. 히타이트어는 B.C.1200년경에 소멸되었다. 

3 잘못된 발음이나 변화된 발음은 편리상 나태나 무시 또는 개개 음성발음의 자연스러운 편의와 혼동되지 않기 위해서 발생하였다. 그 대신에 잘못된 발음은 음성의 동화작용과 전체 음성체계의 균형(패턴 압력)의 영향을 내포하는 효과이다. 이와 같은 변화는 초기의 언어학자들이 암시하였던 ‘쇠퇴(corrupting)’ 언어의 뜻으로 말해서 열등해진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Bibliography

Bloomfield, Leonard 1933. Language. New York: Henry Holt and Company, Inc. June, 1958 edition.

Elgin, Suzette H. 1973. What is Linguistics? Englewood Cliffs, New Jersey: Prentice-Hall Inc.

Greenberg, Joseph (ed.) 1966. Universals of Language (2nd ed.). Massachusetts: The M.I.T. Press.

Ivic, Milka 1965. Trends in Linguistics (translated by Muriel Hapell). The Hague: Mouton & Co.

Langacker, Ronald W. 1967. Language and itsStructure. New York: Harcourt, Brace, and World, Inc.

Labov, William 1973. 'The Social Setting of Linguistic Change,' Current Trends in Linguistics. T.A. Sebeok (ed.), V. 11, Paris: Mouton.

Lyons, John 1968. Introduction to TheoreticalLinguistics. Lond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Martinet, Andre 1960. Elements of General Linguistics (translated by Elisabeth Palmer, 1964. London: Faber and Faber). Originally published by Max Leclerc et Cie, Proprietors of Librairie Armand Colin.

Paul, Hermann 1970. Principles of the History ofLanguage (translated from 2nd edition by H.A. Strong). College Park: McGroth Publishing Company.


* The author is a member of the Summer Institute of Linguistics and the Wycliffe Bible Translators; he is presently a candidate for the degree of Ph.D. in the discipline of linguistics. He has also served as a visiting Professor of Linguistics at Christian Heritage College. He wishes to thank his colleagues who have offered critical comments on earlier drafts of this article, especially David Thomas, also of the Summer Institute of Linguistics.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pubs/imp/imp-044.htm 

출처 - ICR, Impact No. 44, February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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