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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성경

미디어위원회
2010-03-01

솔로몬 왕이 건설했을 가능성이 있는 성벽이 예루살렘에서 발견되었다. 

(Solomonic Wall in Jerusalem Announced)

David F. Coppedge


     2010. 2. 22. - 솔로몬 시대(BC 10 세기)로 연대가 평가되는 커다란 성벽이 발견되었다고 언론 매체들은 보도하였다. (see PhysOrg, Live Science and Israel Ministry of Foreign Affairs). 고고학자인 마자르(Eilat Mazar)는 성전산(Temple Mount) 남동쪽 끝에서 발견된 그 구조를 열왕기상 3:1절의 성경 구절과 연결시키고 있었다. "솔로몬이 애굽의 왕 바로와 더불어 혼인 관계를 맺어 그의 딸을 맞이하고 다윗 성에 데려다가 두고 자기의 왕궁과 여호와의 성전과 예루살렘 주위의 성의 공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니라”(왕상 3:1). 그 성벽은 길이가 약 46m, 높이가 거의 6m나 되었다. 조각된 돌들로 이루어진 커다란 망루(tower)도 확인되었는데, 방이 있는 문루(chambered gatehouse)였을 가능성이 있다.


Bible Places Blog에서 토드 볼른(Todd Bolen)은 그 발견을 해석함에 있어서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그 성벽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지역은 마자르와 그의 부친에 의해서 1986-1987년에 발굴되었다. (see his second post on the story). 새로운 것은 그 장소에서 발견된 도자기와 단지(pottery and jars)들에 기초하여 그 성벽이 솔로몬 시대의 것으로 연대가 평가된 것이다. 단지들 중에 ‘왕에게(to the king)’라는 글귀가 새겨져있는 단지는 일찌기 예루살렘에서 발견된 것들 중에서 가장 큰 단지에 속한다. 이것이 새로운 발견이 아니라 하더라도, 솔로몬 시대로 연대가 재평가되었다는 것은 중요하다.



성경을 비판하는 일부 고고학자들은 다윗과 솔로몬은 철기시대 II (Iron Age II)에 있었던 작은 부족의 족장들이었다고 오랫동안 주장해왔었다. 그래서 커다란 도시들을 건설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발견은 그렇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건축물은 대규모적이었고 복잡했다. 이것은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가 번성했음을 가리키고 있으며, 성경의 기록과 일치하는 것이다. (see also the Edom findings from 10/27/2008 and the Qeiyafa inscription from 01/07/2010).   



*참조 : 솔로몬 건설 추정 성벽 예루살렘서 발견 (2010. 2. 23. 연합뉴스) 

https://www.yna.co.kr/view/AKR20100223105900009

솔로몬 왕 건설 추정 성벽 예루살렘서 발견  (2010. 2. 23. KBS News)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2052189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crev.info/2010/02/solomonic_wall_in_jerusalem_announced/

출처 - CEH, 2010. 2. 22.

미디어위원회
2010-01-06

예수님의 고향 마을이 발굴되었다. 

(Hometown of Jesus Was Real)

by David F. Coppedge


     예수님이 자라셨던 마을인 나사렛(Nazareth)에서 1세기 경의 집이 발굴되었다. 이스라엘 문화재청(Israeli Antiquities Authority)은 그 발견을 발표했다. Phys.org(2009. 12. 21)의 글과 사진을 클릭하여 보라. 이것은 예수님이 사셨던 시기를 포함하여 초기 로마 시대에 최초로 발굴된 거주 장소이다.

Bible Places에서 토드 보렌(Todd Bolen)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 ”이 발견은 나사렛이 신약성경에서 1세기 경 언급된 이후, 그러한 도시는 그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었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적어도 한 사람)의 이론을 잠재우는 것이다. 요세푸스와 동시대의 다른 문헌들에서 나사렛이 언급되어있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그 도시가 별로 중요하지 않았음을 가리킬 뿐이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  와서 보라.


윌리엄 크레이그(William Lane Craig)는 크리스토퍼 히친스(Christopher Hitchens, ‘신은 위대하지 않다’의 저자)와의 논쟁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 역사의 시간선 상에서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인류의 2%가 살았던 시점에 오셨다는 것을 지적했었다. 이것은 갈라디아 4:4절에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라고 바울이 말한 것을 설명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히친스가 주장했던 것처럼, 복음 이전에 많은 사람들이 살았었기 때문에 인류의 역사에서 예수님이 너무 늦게 오신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시기는 로마제국(Pax Romana)이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도로망과 연결망을 가지고 있어서, 복음이 로마제국을 통해서 그 당시의 문명들에게 빠르게 확산될 수 있었던 시기였다.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before Christ, BC) 살았던 사람들은 구세주(Redeemer)가 오실 것이라는 아담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있었다.(창 3:15). 바울이 말했던 것처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의롭다하심을 받았다. 약속된 메시야가 오시기 이전이든지 이후이든지,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들의 아버지가 되었다. 이에 반해 진화론자들은 사람 이전에 오래된 세계가 있었으며, 수백만 년 동안의 진화를 거쳐서 사람이 되었다고 가정한다. 당신이 원한다면, 그러한 주장은 비과학적이며, 자기 모순적이며, 증거들과도 일치하지 않는, 어리석은 신화라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둘 중에 하나이다. 당신의 믿음을 어디에 둘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가치 있고 영원한 것을 선택하기 바란다.    



*관련기사 : 예수가 놀던 집 발견? (2009. 12. 22. 한국경제)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912228147g&sid=01050601&nid=005

나사렛서 예수시대 집터 발굴 (2009. 12. 21. 연합뉴스)
http://www.yonhapnews.co.kr/international/2009/12/21/0601170100AKR20091221203600079.HTML?template=3386


*참조 : Jesus' House? 1st-Century Structure May Be Where He Grew Up (2015. 3. 2. LiveScience) 

https://www.livescience.com/49997-jesus-house-possibly-found-nazareth.html

First-Century House Found in Nazareth: Did Jesus Live There? (2015. 3. 3. NBC News)

https://www.nbcnews.com/science/science-news/first-century-house-found-nazareth-did-jesus-live-there-n315871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crev.info/2009/12/hometown_of_jesus_was_real/

출처 - CEH, 2009. 12. 21.

미디어위원회
2009-10-19

”야벳, 컴퓨터 끄는 것을 잊지 말거라!” 

안티키테라 : 2,000 여년 전의 고대 난파선에서 발견된 놀라운 기계 장치 

(Japheth, remember to turn off the computer...)

Calvin Smith 


      오늘날 대부분의 학교에서 가르쳐지는 진화론적 세계관에 의하면, 고대 인류는 원시적이었으며, 시간이 흘러 진화하면서 점점 더 지적으로 발전했던 역사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수천년 전의 사람들이 기술적으로 발전된 사람들이었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노아 홍수와 같은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의 신화로서 분류된다. 왜냐하면 노아와 같은 고대의 사람이 창세기 6장에 기록된 것과 같은 거대한 배를 만들 수 없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때때로 주의 깊은 관찰자들은 사람은 매우 현명하게 창조되었으며, 하나님께 불순종한 사람의 죄와 저주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진화되기보다 오히려 쇠퇴되고 있다는, 성경의 창조론적 견해를 지지하는 뉴스들을 접할 수 있다.


최근에 CBC 뉴스는 BC 150-100년 사이에 만들어진 한 장치(device)에 대한 이야기를 보도하였다. 이 장치는 1901년 그리스 안티키테라(Antikythera) 섬의 한 난파선에서 발견된 것이었다. 그 이야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그 장치는 암석 속에 파묻혀 있었으며, 내부를 조사하기 위해서 처음 X-레이로 조사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암석의 형성에는 수백만 년이 걸린다고 일반적으로 가르쳐지고 있지 않은가! [2]  


.안티키테라 메커니즘은 고대에 있었던 일종의 기계적 유사 컴퓨터이다.


그 기사는 다음과 같이 그 장치의 놀라움을 기술하고 있었다 : ”매우 뛰어난... 그 기계가 디자인된 방식은 당신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도록 한다. 이 장치를 만들어낸 사람이라면 놀라운 일들을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기사는 그 기계를 설명하면서, 그것은 일종의 유사 컴퓨터로서 (흔히 현대 자동차에서 사용되어지는) 차동기어(differential gear)를 가지고 있었고, 태양, 달의 움직임과 일식을 추적할 수 있었다고 보도하고 있었다. 그 기계는 또한 행성들의 움직임들도 추적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 복잡함은 18세기의 시계에 비견된다는 것이다. 


이 발견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그 기사의 다음과 같은 내용에서 알 수 있다 :

과학자들에게 가장 커다란 수수께끼는 어떻게 그러한 유용한 장치가 또 다른 1000 년 동안 어떠한 기록도 없이 고고학적 기록에서 완전히 사라질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런던 과학박물관의 관장인 마이클 라이트(Michael Wright)는 말했다. ”나는 이와 같은 과학 기술이 어떠한 기록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가, 유사한 형태로 재발명되는 일을 쉽게 발견한다.”

이 말은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1700년대에 시작되었다고 가르쳐지고 있는 일부 과학 기술들은 사실 수천년 전에도 존재했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단지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았을 뿐이지, 그러한 복잡한 기계장치를 만들 수 있는 지성이 오래 전에도 존재했었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과학 기술은 지난 100여년 동안 아이디어들을 기록하고 공유함으로서 빠르게 발전되어 왔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발견에 빠르게 접근 도달할 수 있었고,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고립된 한 개인이나 작은 그룹들은 짧은 기간 내에 빠르게 원시적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집을 건축하는 방법이나, 핸드폰이나, 컴퓨터를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는가?)


지난 300년 동안 이루어진 과학 기술의 발전 양을 생각해 보라. 인류는 단지 300여년 안에 전기, 자동차, 컴퓨터 등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인류는 노아 홍수가 일어나기 전까지 1656년 동안 커다란 발전을 이룩했을 지도 모른다. 물론 아이디어들이 기록되고 공유되는 조직화된 구조가 없었다면, 엄청난 발전은 없었을 것이지만 말이다. 범법자를 처벌하는 정부나 경찰력의 부재는 노아 홍수 이전 시대의 과학 기술 발전에 있어서 주요한 제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서구 유럽의 과학 기술을 활짝 꽃피운 것이 성경적 기독교와 그것으로부터 흘러나온 사상이었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4]


아담은 완벽하게 창조되었고, 언어를 구사할 수 있도록(아담은 매우 짧은 기간 동안에 동물들의 이름을 지었다) 창조되었다. 창세기 4:21-22절에는 창조 이후 짧은 기간 안에 사람들은 금속들을 가공 제조할 수 있었으며, 악기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한 일들은 노아가 거대한 방주를 건조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매우 높은 수준의 지적 능력과 창의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래서 오랜 시간 동안 세뇌되어 왔던 진화론적 사고의 틀을 벗어버린다면, 이 새로운 발견은 노아의 방주에 유사 컴퓨터와 같은 이러한 기계 장치가 장착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며, 고대인들이 원시적이었다거나 오늘날의 우리보다 덜 지적이었다고 생각할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References and notes
[1] CBC News, Scientists unlock mystery of 2,000-year-old computer.
[2] See Keys to Rapid Rock Formation, Creation 17(1):45, 1994. Also Walker, T., Rapid Rock, Creation 24(2):38-39, 2002.
[3] Note that by ‘primitive’ we do not mean the standard evolutionary ‘Stone Age caveman’ stereotype. See (a) Cardno, S., The mystery of ancient man, Creation 20(2):10–14, 1998; (b) Niemand, R., The Stone ‘Age’—a figment of the imagination?, Creation 27(4):13, 2005.
[4] Noah would have had considerable time to accumulate the ‘know-how’ of his age to take with him to the new world he was about to enter. Looking at the high level of ingenuity in the civilizations that sprang up shortly after the Flood, like Babylon and Egypt (while other groups of those dispersed at Babel, isolated from people possessing metallurgy and engineering knowledge, improvised with stone tools and sought temporary shelter in caves), gives us some idea of what that pre-Flood technology would have been like.

Published: 22 December 2006 (GMT+10)


*참조 : '고대 그리스인, 2100년 전 천체 계산용 컴퓨터 발명' 연구결과 발표 (2016. 6. 10. 뉴시스)

https://mobile.newsis.com/view.html?ar_id=NISX20160610_0014141856#_PA

“기원전 그리스 천체 슈퍼컴퓨터 썼다” (2006. 11. 30. 경향신문) 

https://m.khan.co.kr/world/europe-russia/article/200611301820151#c2b

'약 2300년전 고대 바빌론人 미적분 개념 알았다…목성 궤도 계산' (2016. 1. 29. 뉴시스)

https://mobile.newsis.com/view.html?ar_id=NISX20160129_0013867248#_enliple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creation.com/japheth-remember-to-turn-off-the-computer

출처 - Creation, 22 December 2006.

미디어위원회
2009-09-30

석기시대에 삼각함수 전문가가 영국에 있었는가? 

(Were Stone Age Britons Trigonometry Experts?)

by Brian Thomas, Ph.D.


      영국 남부와 웨일즈에는 수 세기 동안 스톤헨지(Stonehenge) 같은 석조 기념물들, 대지예술(earthworks), 언덕 야영지(hill camps) 등을 포함하여 사람이 만든 구조물들이 지리학적으로 높은 지점들에서 관측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분포에 있어서 기대하지 않던 어떤 것이 입증될 수도 있게 되었다. 지상 높은 곳에서 바라보았을 때, 고대의 많은 장소들은 다른 장소들과 관련되어 이등변 삼각형(isosceles triangles)의 모서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장거리 이동을 용이하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마추어 역사학자이며 은퇴한 행정관인 톰 브룩스(Tom Brooks)는 이러한 장소들 1,500여 군데를 분석했다. 그는 그 장소들이 똑같은 길이의 두 변을 가지는, 이등변 삼각형을 이루는 곳에 위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고대 여행자들에게 언덕 꼭대기의 표지물들을 바라보는 선들을 이용하여, 다음 위치까지의 방향과 거리, 또는 삼각형의 꼭지점 지점을 정확하게 알 수 있도록 나타내주는 것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지점들이 서로 서로 보일 수 있는 위치에 지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A에서 B로 가는 간결한 길을 제공할 수 있었다.”[1]  

브룩스는 말했다. ”몇몇 삼각형들은 160km나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위치는 100m 이내로 정확합니다. 그것은 우연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제 매우 발전되고, 복잡하고, 정확한 기하학적 측량술(geometrical surveying)이 발견된 것입니다. 석기시대의 조상들은 원시적이었다는 개념은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어떤 외부 지성에 의해 도움을 받았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1] 그의 관측에 의거하면, 석기시대의 조상들은 여행을 위해 이들 삼각형의 기하학적 패턴들을 사용하였고, 표시를 남겨둔 구면삼각법(spherical trigonometry)의 전문가들이었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관측과 추정들은 성경적 역사와 완벽하게 일치한다. 창조와 타락에 대한 성경적 설명으로부터 하나님은 최초의 사람을 원래 완벽하게 만드셨으나, 아담의 범죄로 인해 저주를 받아, 그 후손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유전적 오류들이 일어나 점차적으로 쇠퇴되어 갔다고 추론할 수 있다. 이것은 고대인들은 원숭이 같은 유인원으로부터 진화하였기 때문에 현대인보다 매우 지적 능력이 떨어졌을 것이라는 오류투성이의 진화론적 개념과는 정반대 되는 설명이다. 고대의 영국 거주민들은 수학적으로 매우 현명했다는 이와 같은 새로운 증거는 진화론적 개념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Daily Mail 뉴스가 보도되고 하룻밤이 지나서 한 동굴인(caveman)의 그림이 그 기사에 추가되었다. 그 기사가 9월 14일에 게재되었을 때, 동굴인에 대한 그림은 없었고, 단지 지도와 거석기념물 사진만 있었다. 그러나 15일에 마치 진화 이야기를 강화시켜주는 것처럼 동굴인이 나타났다. 그리고 새로운 제목과 URL이 그 기사에 할당되었다.[2] 이러한 변경은 편집자가 고대 영국인들의 천재성에 대한 이러한 증거를 폄하시키려는 듯한 행동으로 보인다.     


또한 새로운 한 결론이 분명히 유사한 목적을 가지고 업데이트된 글 속에 추가되어 있었다. 

그러나 영국 고고학 지의 편집장인 마이크 핏츠(Mike Pitts)는 말했다 : ”영국 남부의 풍경(landscape)은 집중적으로 조사되었고, 많은 대지예술들과 고고학적 발견들이 있었다. 그 풍경에서 패턴들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쉽다. 그러나 그 패턴들은 그것들이 진짜였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1]

그러나 브룩스가 조망하여 발견해낸 패턴들은 발견하기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을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패턴들은 고도의 수학적 지식과 응용 없이는 사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가 발견해낸 복잡한 지형적 배치는, 따르도록 강요되는 어떤 이론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만든 기념물들로부터 출현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발견으로 인해 고대인들이 매우 지적이었다는 결론을 내린 사람은 브룩스만이 아니다.


그 뉴스는 진화론에 더 우호적으로 보도하고 있었지만, 계속되는 과학적 발견들은 고대인들이 현대인들보다 더 현명하지는 않았다하더라도, 매우 현명하였음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3]



References

[1] Derbyshire, D. Stone Age satnav: Did ancient man use 5,000-year-old travel chart to navigate across Britain. Daily Mail. Posted on dailymail.co.uk September 14, 2009 and updated September 15, 2009, accessed September 14, 2009 and September 15, 2009.
[2] The original title was ”Ancient man used stone ‘sat nav’ 5,000 years ago to navigate across country.”
[3] See also Thomas, B. Ancient Stone Knives Made by ‘Smart’ Humans. ICR News. Posted on icr.org August 24, 2009.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article/4964/ 

출처 - ICR News, 2009. 9. 21.

미디어위원회
2009-02-17

언어는 생물학이 아니라, 문화에 의해서 생겨났다. 

(Language Driven By Culture, Not Biology, Study Shows)

AiG News 


      만약 보편적인 문법(grammar)이 자연선택에 의해서 진화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어떻게 생겨날 수 있었을까? (ScienceDaily. 2009. 1. 19) 그것은 최근의 한 연구가 던지고 있는 질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 대한 확실한 답을 알고 있다!

PNAS 지에 게재된 최근의 한 논문에 의하면, 언어(language)는 유전자들의 진화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문화적 발달(cultural development)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을 미국과 영국 연구자들은 내리고 있었다. 그 논문은 실험될 수 없는 진화론적 생각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언어를 성졍적 조망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훌륭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었다.


연구자들이 묻고 있는 질문은, 인간의 생물학이 언어적 발달을 수용하도록 진화되어졌는가? 또는 생물학이 이미 거기에 있었는가? 이다. ”언어 유전자들은 매우 안정적인 언어적 환경에서만 오직 상호진화 될 수 있었을 것이며, 빠르게 변화하는 언어적 환경은 자연선택을 위한 안정적인 표적을 제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라고 그들은 대답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언어는 유전학에 비해 너무도 빠르게 변화하여 유전학과 나란히 진화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ScienceDaily는 설명하고 있었다 :

”사람은 자연선택에 의해서 진화된 유전적 ‘언어 모듈(language module)’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 않다고 저자들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인간 언어의 유전학적 기초는 언어의 출현보다 먼저 일어난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우리들이 다른 언어를 말할지라도, 모든 사람 그룹들은 같은 언어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과 매우 다른 문화적 언어를 배우는 사람의 능력과 일치한다.


런던대학의 닉 채터(Nick Chater)는 덧붙이고 있다 :

”우리 논문은 인간 언어의 진화론적 기원과 유전학적 기초에 관한 이론들의 내부적 모순들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가 언어에 대한 유전학적 경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할지라도, 인간 언어는 우리의 유전자들이 따라가는 것보다 너무도 빠르게 진화되어왔다. 이것은 언어가 생물학에 의해서라기 보다, 문화에 의해서 모양을 갖추고 생겨났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보편적인 문법이 자연선택에 의해서 진화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것은 발생할 수 있었을까? 우리의 발견은 언어는 생물학적 적응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진화되어진 시스템에 의해 존재했음에 틀림없음을 가리킨다. 이것은 언어는 사회적 지능(social intelligence)이라는 독특한 인간 능력으로부터 발생되었다는 널리 알려진 이론들과 일치한다.”

또한 채터는 전체 인도-유럽 언어 그룹은 1만년 이내에 갈라져나갔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것은 언어가 어떠한 진화론적 기초를 가지고 있다는 것보다, 오히려 창조 시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진 독특한 인간의 능력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바벨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해부학적 구조를 바꾸시지 않으면서 언어를 혼잡케 하셨다. 그리고 흩어진 사람들은 오늘날에 이르러 더욱 많은 언어들로 다양화되었다.

 


For more information :

  FOXP2 and the non-evolution of human language

  Is there any such thing as a primitive language?

  Get Answers : Anthropology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9/01/24/news-to-note-01242009 

출처 - AiG News, 2009. 1. 24.

미디어위원회
2008-11-18

솔로몬 시대의 광산이 발견되었다. 

(Mine from Time of King Solomon Found)

AiG News 


      다시 한번 성경의 역사가 고고학적 발견과 일치됨이 증명되었다.

미국과 요르단의 고고학자들로 이루어진 한 연구팀은 오늘날 요르단의 사해 남쪽 지방인 ‘구리 유적(Ruins of Copper, 아랍어로 Khirbat en-Nahas)’에서 성경에 기록된 사실들을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AP. 2008. 10. 27.)


그 장소는 BC 7세기부터 금속가공이 이루어졌던 장소로 수십년 동안 알려져 왔었다. 그러나 토마스 레비(Thomas Levy)가 이끄는 캘리포니아-샌디아고 대학 팀원들과 모하마드 나자르(Mohammad Najjar)가 이끄는 요르단 고고학자들로 이루어진 발굴 팀은 이곳에서 BC 10세기 경으로 주장되는 씨앗(seeds)들과 막대기(sticks) 같은 것들을 발굴하였다. 그 시기는 이 세상의 모든 왕들보다 부유하였으며(왕상 10:23), 구리를 포함하여 다른 많은 천연자원들에 대한 전례가 없던 권리를 가지고 있었던 솔로몬(Solomon) 왕의 시대였다.

레비의 연구는 ”고고학 및 과학적 자료들이 성경과 일치함을 나타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대의 기록들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을 모두 믿을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자신의 연구가 성경의 한 부분에 대한 정확성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고 있음에도, 성경(고대 문서들로 표현되는)의 기록을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우리는 레비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레비의 대답은 그의 전제된 종교적 믿음, 또는 생명의 기원과 인류의 역사에 대한 진화론적 견해를 수용하고 있기 때문일 것으로 예측된다. 그러나 성경에서 출발할 때, 관측되는 과학적 사실들과 발굴되는 고고학적 유물들이 성경과 완전한 일치된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는 것이다.


관련 뉴스로서, BBC News(2008. 10. 30)는 가장 오래된 히브리어 글(Hebrew text)일 수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고 보도하였다. 그것은 도기(pottery) 조각에 새겨진 5줄의 글로서 예루살렘 남서쪽 32km 지점의 킬벳 퀘야파에 있는 엘라(Elah) 요새에서 발견되었다. 연구원들은 아직도 전체 원문에 대한 번역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그 글은 히브리 알파벳의 전신인 원시가나안 문자(proto-Canaanite)로 쓰여져 있었다. 몇몇 단어들이 번역되었는데, ‘재판관’, ‘노예’, ‘왕’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현재로서 그 문자들은 같은 지역에서 말해지던 언어와는 반대되는 것이므로 고대 히브리어 문자였는지 전적으로 확신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뉴스 뒤에 숨어있는 중요한 사실은 다윗 왕(솔로몬 왕의 아버지)의 시대인 대략 3,000년 전까지로 거슬러 올라가는 그 도기의 연대이다. 왜냐하면 도기들과 다른 유물들이 근처 엘라 계곡에서 발견되었는데, 그곳은 다윗과 골리앗이 싸웠던 장소로서 성경이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임 고고학자인 이스라엘 헤브루 대학의 요셉 가핀켈(Yosef Garfinkel) 교수는 ”이 발견은 다윗 왕의 통치 기간 동안의 중요한 빛을 비춰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고 BBC는 보도하였다.  


”그 발견들은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과 지리적 위치들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이미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고 AP (2008. 10. 31.)통신은 보도하였다. 성경 사무엘하의 기록이 문자적 역사 이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 받아들여한다는 사람들의 주장은 무엇에 근거한 것인지 우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 보도는 또한 ”성경의 기록은 신문처럼 정확한 것이라는 믿음”에 대해 반대하며 비난하고 있었던 고고학자 핀켈스타인(Israel Finkelstein)의 논평을 덧붙이고 있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우리는 성경이 신문보다 훨씬 더 정확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다윗 시대 유물이 발굴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지만, 우리는 이것을 성경을 입증하거나 반증하는 증거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고학과 방사성탄소 연대측정이 성경보다 더 우선하는 권위로서 말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For more information:

Does Archaeology Support the Bible?

Doesn’t Carbon-14 Dating Disprove the Bible?

Get Answers: Archaeology,   Bible,   History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answersingenesis.org/archaeology/biblical-landmark-king-solomons-time-found/

출처 - AiG News, 2008. 11. 1.

미디어위원회
2008-10-08

고고학은 성경을 지지하는가? 3

(Does Archaeology Support the Bible? 3)

Clifford Wilson 


고레스와 메데, 바사에 관한 주요 증거들 

메데(Medes)와 바사(Persians, 페르시아)가 바벨론을 계승했다.

1. 고레스(Cyrus, 키로스)는 메대와 바사를 통치하는 왕이 되었다. 고레스의 이름은 이사야 44:28, 45:1절에 예언적으로 기록되어져 있다.(아래 관련자료 링크 41번 참조). 그는 포로 되었던 사람들을 그들의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던 유명한 고레스 칙령(Cyrus Decree)을 내렸다.(대하 36:22,23, 스 1:1-4). 고레스왕의 무덤은 발견되었다.

2. 하나님은 그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방 나라의 왕을 사용하기까지 하면서, 하나님 백성들의 역사를 주관하셨다. 고레스 실린더(Cyrus Cylinder, 1879년에 발견된 점토로 된 원통 모양의 돌로, BC 539년에 고레스가 바빌론을 정복하였다는 설명이 바빌론 설형문자로 새겨져 있다)는 고레스가 바빌론의 정복자였음을 확인시켜 준다. 

고레스 실린더(Cyrus Cylinder). 이사야는 고레스를 예언적으로 언급하고 있었다.

3. 에스더서에 나타난 바와 같이 일부 유대인들은 바빌론에 남았다. 메대와 파사의 ”변화(변역)함이 없는” 법의 형태가 그곳에서 보여진다.(에 1:19)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관한 주요한 증거들

이때는 바빌론 포로생활 후 귀환하여 이스라엘 땅에 재정착한 시기였다.

1. 엘레판틴 고문서(Elephantine papyri), 사해사본(Dead Sea Scrolls), 욥기 타르굼(Targums of Job) 등은 에스라서가 시사하는 바와 같이 그 당시에는 아람어(Aramaic)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느헤미야가 재건한 성벽의 일부(아래 관련자료 링크 15번 참조)

2. 산발랏(Sanballat)은 느헤미야 보다 훨씬 후대 인물이었다고 많은 저자들에 의해서 주장되기도 하지만, 그는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사마리아의 총독(Governor of Samaria)이었다.(느 4, 6장). 지금은 여러 명의 산발랏이 알려져 있고, 심지어 복원된 편지들에는 여호하난(Johanan, 느 12:13)이 언급되어져 있기도 한다. 또한 아라비아 사람 게셈(Geshem, 느 6:1)도 알려져 있다.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성경 비판가들의 비평들에도 불구하고,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상황들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었다.

3. 산발랏에 관한 편지들은 느헤미야서에 대한 연대 평가를 명확하게 해준다. 느헤미야가 살았던 시대는 아닥사스다(Artaxerxes) II 세 때가 아니라, BC 465-423년 기간을 통치했던 아닥사스다 I 세 때였다. 이것은 구약성경의 연대표가 확립되어진 현대 연구들에 의해서 매우 정확한 것이었음을 보여주었다.


사해사본에 관한 주요 증거들

사해사본(Dead Sea Scrolls)

1. 이 성경 두루마리들은 사해 근처 동굴에서 약 2,000년 동안 묻혀 있다가 1947년에 다시 햇빛을 보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한 분의 메시아, 또는 메시아들(다윗과 같은 왕, 이스라엘 백성들의 위대한 대제사장,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은 대제사장, 모세와 같은 선지자, 그리고 어쩌면 찔리신 메시야)을 갈망하고 있었다. 내가 ”어쩌면 찔리신 메시아(pierced Messiah)라고 말하는 것은, 이것이 매우 작은 단편들로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히브리어에서 미래 시제와 불완전 시제들은 매우 자주 같이 표현되어서, 문맥에 의해서만 결정될 수 있다.  


사해 연안에서 발견된 사해사본의 이사야서 일부분.

이 경우에서 예언은 오실 메시아가 ”찔리게” 될 것이다, 또는 ”찔렸다”라고 말해질 수 있다. 이사야 11:4절에는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NASB(New American Standard Bible)의 이사야 53:5절에서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라고 기록되어 있다. 두 표현이 다 적절하다. 왜냐하면 실제로 메시아는 찔렸고, 다가올 심판 때에 메시아를 거부하는 자들은 찔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 그 두루마리들은 대부분의 구약성경 사본들을 제공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에스더서를 제외한 구약의 각 권들은 전에 남아있던 히브리어 사본들보다 약 1,000년 더 이른 히브리 성경으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에스더서의 한 기록이 다른 두루마리에서 발견되었다.)  

3. 상당한 빛이 신약성경의 배경과 요한복음의 유대적 본질에 비춰지게 되었다. 예를 들면 ”빛과 어두움”과 같은 대조법은 요한복음과 종말론적 최후의 전쟁을 묘사하고 있는 텍스트인 ”전쟁 두루마리(War Scroll)”에 흔히 나타난다. 그리고 히브리어는 단지 성직자들만의 언어가 아니고, 당시에 통용되는 언어였다.

또한 이사야서의 사해사본은 히브리 철자 ‘타우(tau)’의 옛날 형태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 글자는 두루마리 가장자리에서 ‘X’처럼 보인다. 그것은 이사야 32:1, 42:1,5,19, 44:28, 49:5-7, 55:3,4, 56:1-3, 58:13, 66:5 등에서 11번 나타나 있다. 이미 언급한 대로, 앗시리아 사본과 사해사본(이사야서의 거의 완전한 사본)의 두 기록들은 약 2,000년 동안 인간의 눈에서 완전히 감춰져 있었다. 이 두 자료의 내용 대부분은 겹쳐진다. 그래서 이것은 이사야의 예언들이 진실함을 확증해주었다.

이 사해사본 발견의 중요성 중 하나는 그것들이 1840년대 이래 행해지고 있는 앗시리아의 궁전들을 발굴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사야서는 앗시리아와 관련된 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제공하고 있다. 이것은 이사야서의 놀라운 정확성을 확인해주는 것이다. 아마도 사해 두루마리의 발견은 성서고고학과 성경의 타당성에 관한 가장 뛰어난 발견 중의 하나일 것이다.[4] 

*참조 : What is the importance of the Dead Sea Scrolls?
http://christiananswers.net/q-abr/abr-a023.html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주요한 증거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둘러싼 사건들은 고고학적 발굴들에 의해 사실로 입증되었다.

1. 예수님의 탄생 때에 실시된 인구조사(호적)에 관한 의문들은 중요한 파피루스 문서의 발견으로 해결되었다. 이 문서들은 이집트에서 방부 처리된 신성시 되는 악어들 내부에서 발견되었다. 문서들은 신약시대 직전 및 동안, 또는 직후에 쓰여진 것으로 유대 성직자의 기록들이었다.


인두세(poll tax)의 등록에 관한 한 비문의 일부.

발굴자인 그란펠(Granfell)과 헌트(Hunt)는 그들의 증거가 구레뇨(Quirinius) 총독 때 실시됐던 첫 번째의 인구조사(인두세 등록)였음을 보여준다고 보고했다. (또 다른 비문은 구레뇨가 시리아에서 첫 번째는 시민들의 소요 때 군사령관(군대장관)으로서, 다음에는 시리아의 총독으로서 두 번의 인구조사를 했음을 보여준다.) 아마도 인구조사는 그 민간인들의 소요 사건 때문에 팔레스타인에서는 지연되어졌다.  (아래 관련자료 링크 27번 참조)

2. 그러한 파피루스의 발견들은 우리 주님께서 사용하셨던 말씀들에 많은 빛을 비춰주었다. 그분이 지상 생활을 하실 때의 언어를 사용하셨다는 것은 정말로 사실이다. (막 12:37)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더라. 백성이 즐겁게 듣더라.”

3. 빌라도(Pilate)는 가이사랴(Caesarea)에서 발견된 비문 때문에 이제 잘 알려져 있다. 존 라이랜즈 파피루스(John Rylands papyrus, AD 125)에는 빌라도 앞에서 행해진 재판의 부분이 기록되어 있는데, 단편적 내용은 요한복음 18:31-33,37,38절에 기록되어 있다.


라이랜즈 파피루스의 양면


신약성경, 초대교회 그리고 초기 기독교와 관련된 주요한 증거들

신약성경의 기록들은 정확한 역사적 문서들임이 검증되었다.

1. 그 이집트의 ”말하는 악어들(talking crocodiles)”로부터 나온 파피루스들은 신약성경이 그 시대의 일상적인 사람들의 언어로 된 놀라운 기록들임을 증명했다. 바울 시대의 일상적 표현들도 또한 바울 서신들 자체에 신뢰성을 더해주고 있다.

2. 소아시아에서 윌리암 람세이(William Ramsay) 경과 그 후계자들의 발견들은 역사적으로 누가와 다른 신약성경 저자들의 실재성을 재확립해주었다. 비판가들에 의해 가장 공격을 많이 받은 성경책들은 모세오경, 에스라/느헤미야, 그리고 누가복음이었다. 이들 각 권들은 믿을만한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서, 정확하며 신빙성이 있음이 분명하게 확인되었다.

3. 수많은 증거들은 신약성경 문서들(예컨대 한쪽에는 요 18:31–33, 반대쪽에는 요 18:37–38 부분이 쓰여 있는 라이랜즈 파피루스)과 세속적인 로마 작가들 및 초대교회 교부들의 풍부한 증거들 사이에 연속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참조 : Paul's Cyprus Travels—What has archaeology revealed?
http://christiananswers.net/q-abr/abr-a020.html


고고학이 성경을 증거하는가?

발굴자들이 성경에 기록된 과거 시대를 밝혀내기 위해 땅을 파내고 있지만, 직접적인 성경적 역사가 밝혀지리라고는 결코 확신할 수 없다. 그러한 발견들은 성경을 공부하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성경에 관심 없는 고고학자들도 똑같이 희망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경의 기록을 신중히 취급해야만 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적 역사와의 연관성은 발굴 연대를 멋지게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 발굴자들은 늘 원했으나, 가능하지 않았고 성취되지 않았다. 이런 발견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훌륭한 확인들은 되었지만, ”성경을 입증하는 것”에는 오히려 반대가 되었다.  

고고학자들은 학자들이고, 가끔씩 출처가 되는 고문서로서 성경에 관심을 가지는 정도의 일반적인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학구적 고고학자들 중에서 일부 헌신된 크리스천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이다. 많은 사람들은 모든 고고학자들이 성경적 역사를 입증하기 위하여 여행에 나섰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사실 많은 발굴자들은 성경에 관심이 없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예외들이 있다.


비판가들의 공격에도 불구한 성경의 탁월성

우리는 ”고고학이 성경을 증거한다”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이미 말했었다. 그런 주장은 사실상 고고학을 성경보다 위에 놓여지게 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 확실했던 것처럼 보였던 고고학적 결과가 나중에 오류로 밝혀진다면, 무슨 일이 생기겠는가? 매우 흔히 고고학이 성경의 특별한 사건을 확증해주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그와 같이 고고학이 ”성경을 입증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말은 고고학이 주된 기초가 아니라 지원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제한적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성경 안에 기록되어 있는 수천가지 사실들은 그 증거들을 오래 전에 잃어버렸기 때문에 입증할 수 없다. 그러나 확인이 가능하고 빛이 비춰지는 곳에서, 성경은 모든 문헌들 중에서 세밀한 조사들에 대해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다는 것은 놀랍다. 수많은 공격들에 대한 탁월성, 수많은 비판들을 견디는 능력, 결국 옳은 것으로 증명되는 놀라운 유연성들은 어떠한 학문적 기준 보다도 놀라운 것이다. 성경을 ”논박하는” 외견상 확실한 것처럼 보이는 주장들도 세밀한 연구 후에는 재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거듭거듭 다시 말하건대,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진실임이 입증되어져 왔다. 창세기 1-11장의 탁월성은 확립되었고, 족장들의 배경들은 인정되었다. 모세의 글들은 그의 당대에 쓰여졌고, 여호수아가 지휘한 가나안 정복의 기록은 목격자의 기록이라는 많은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 다윗의 시편은 명백히 그 당대의 산물이었고, 솔로몬에 대한 기록들은 더 이상 ”전설”로 치부될 수 없게 되었다. 솔로몬은 문학적 거인이었고, 막대한 재산을 가진 거부였으며, 하나님 다음의 강력한 통치자였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황금시대”를 열어주셨던 것이다.

최근 150년 이상 동안 여러 앗수르 왕궁들의 발굴을 통해, 앗수르 시대는 성경 기록에 대해 극적인 확증을 해주었다. 그러한 발굴들은 지속적으로 구약의 왕들, 예언자들, 백성들, 그리고 사건들의 배경들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를 더해주고 있다.

(유대인들의) 바빌론 유수는 여러 가지 면에서 확증되었고, 고레스왕의 칙령은 포로되었던 사람들이 그들의 조국으로 귀환하여 그들의 신앙에 따라 예배드릴 수 있도록 해주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서는 귀환 이후의 시대를 정확히 나타내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신약성경의 문서들도 사실에 입각해서 쓰여진, 목격한 증인들의 기록임이 지속적으로 입증되어지고 있다. 왕들과 통치자들과 관리들의 이름들이 정확하게 기록되었고, 칭호들도 주의 깊게 그리고 놀랍도록 정확하게 사용되었다. 지리적 경계들도 돋보이도록 기록되었고, 관습들도 정확하게 다루어졌다.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시 85:11)라는 말씀은 참으로 진실이다.  


 

Footnotes

1. N. Osanai, A comparative study of the flood accounts in the Gilgamesh Epic and Genesis, www.answersingenesis.org/go/gilgamesh.
2. There was another Ur to the north, mentioned in the Ebla Tablets. The same name was often used for another city. Woolley’s 'Ur” in the south was Abraham’s city.
3. W.F. Albright, History, Archaeology, and Christian Humanism, McGraw-Hill, New York, 1964, 35.
4. Many other points of interest from the Dead Sea Scrolls are outlined in the book The Stones Still Shout by Clifford Wilson.
5. This acrostic may be photocopied and enlarged.

 

*참고 : A reliable historical record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0_2/j20_2_20-23.pdf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nab/does-archaeology-support-the-bible 

출처 - Answers Magazine, January 24, 2008.

미디어위원회
2008-09-29

고고학은 성경을 지지하는가? 2 

(Does Archaeology Support the Bible?)

Clifford Wilson 


출애굽기~신명기에 관한 주요 증거들

이 책들은 모세가 쓴 모세오경(Pentateuch) 중에서 네 권의 책들인데, 아마도 아론, 대제사장, 여호수아, 그리고 군사지도자들과 협의할 시기에 쓰여졌다.

1. 모세의 율법(Law of Moses)은 바로의 궁전에서 자란 사람에 의해 쓰여졌다. 그리고 그것은 바벨론 왕인 함무라비(Hammurabi)의 법전이나, 오늘날의 바그다드 근처에서 발견되어진 에슈눈나 법전(Eshnunna Law Code)과 같은 다른 법전들보다도 매우 월등하다.


.약 BC 1900 경으로 연대가 평가되고 있는 에슈눈나 법전.

2. 멘델홀(George Mendenhall) 교수가 보증하고 있는 것처럼, 모세의 기록들에 대한 언약 형태는 헷 족속의 것들과 동일한 형식을 따르고 있다. 모세의 법전은 대략 BC 1500년 경(모세의 시대)이라는 단일한 연대로 평가되고 있다. 이 저술들은 오직 한 출처로부터 왔고, 이 시대에 모세 외에 이러한 저술을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은 없었다. 초기 회의론자들이 비판한 것처럼, 율법의 윤리 개념들은 모세의 시대에 너무 이른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모세 이전으로 평가되는 시리아의 에블바 토판들도 강간에 대한 형벌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 점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두 고고학자들의 논평은 적절하다. 나는 그 분들과 오래 전에 이스라엘의 게셀(Gezer)을 발굴할 때, 미국의 동양학 연구원들과 함께 한 지역의 감독관으로서 일할 특권을 가졌었다. (별개의 두 발굴 현장을 이끈) 그들 각자는 140명의 미국 대학생들에게 훌륭한 강의를 해주었다.

넬슨 글루엑(Nelson Glueck) 교수는 강의 시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나는 30년 동안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손에는 삽을 들고 발굴 작업을 해오고 있다. 역사적 관점에 있어서 나는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것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글루엑 교수는 세계적인 유대 학자로서, 그가 성경을 언급할 때는 구약성경을 의미하였지만, 내가 알기로 적어도 한 경우에서 신약성경의 정확성도 또한 마찬가지로 변증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다른 강의는 하버드 대학의 조지 라이트(George Ernest Wright) 교수에 의해 행해졌었다. 그는 모세의 글, 특별히 모세오경의 언약 문서들의 타당성(validity)에 대해서 언급했다. 멘델홀 교수의 연구는 모세의 언약 문서들은 하나의 통일성을 가지며, 대략 BC 1500 경에 쓰여진 것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는데, 자기도 동의하는 바라고 그는 말했다.

강의 후의 이어진 대화에서 라이트 교수는 나에게 자기는 특별히 하버드 대학에서 대학원생들에게 30년 이상 강의해 왔으며, 학생들에게 오경에서 모세를 잊어버릴 수 있도록 강의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30년 동안 자기가 틀렸었으며, 모세가 실제로 오경의 실제적 기록에 직접 관여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3. 애굽(이집트)의 주신들(leading gods)과 맞선 열 가지 재앙 또는 심판(출 12:12)은 애굽의 각 주신들을 택해 내려진 각 재앙들로서 실제로 일어났던 심판으로 보여진다.


여호수아~사울에 관한 주요 증거들

이 부분은 가나안 정복, 심판, 그리고 초기 왕국을 포함하고 있다.

1. 바알(Baal), 아세라(Asherah), 다곤(Dagan)과 같은 신들은 의인들과 관련하여 정확히 확인된다.


.가나안의 신들인 바알과 아세라.

2. 도시국가들도 또한 확인되어진다. (예로 ”하솔(Hazor)은 본래 그 모든 나라의 머리였더니”(수 11:10). 하솔의 발굴은 그 도시의 거대한 크기를 확증하였다).

3. 사울의 머리와 갑옷이 벧산(Beth-Shan)에 있는 2개의 신당에 안치되어 있다. 블레셋과 가나안의 두 신당이 모두 발견되었다. 이러한 발견들은 틀린 것처럼 보이는 성경 기록의 정확성을 확증하는 것이다. (삼상 31:9-10; 대상 10:10).


다윗과 솔로몬에 관한 주요 증거들.

이 시기에 이스라엘 왕국이 확립되어진다.

1. 사울의 죽음에 대한 다윗의 애가에는 당시의 문학 형식이 정확하게 반영되어 있다. (시리아의 고대 우가리트인) 라스 샴라(Ras Shamra)에서 발굴들은 삼하 1:21절에서와 같이 ”fields of offerings” 대신에 ”upsurgings of the deep” 등과 같은 여러 표현들이 그 당시에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솔로몬의 성읍인 게셀의 입구

2. 우가리트 도서관(Ugaritic library)의 발견으로 인해, 다윗의 시편은 비판가들의 주장처럼 800년 후인 마카비 시대(Maccabean period)가 아니라, 그 당대로 연대가 평가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유명한 학자인 윌리암 알브라이트(William Foxwell Albright)는 ”다윗의 시편들이 마카비 시대에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은 불합리하다.” 라고 썼다.[3]

3. 하솔, 므깃도, 게셀 등과 같은 솔로몬의 성읍(왕상 9:15)들이 발굴되었다. 솔로몬은 심지어 몇몇 똑같은 모습의 건물들을 짓기 위해서 비슷한 청사진을 사용하기까지 했다.


앗수르 시대에 관한 주요 증거들

이 시기는 솔로몬이 죽은 지 오래지 않은 ”공포 정치”의 시대였다.

1. 이사야 20:1절은 비판자들에 의해 공격받았었는데, 그들은 앗수르 왕들의 목록(lists of Assyrian kings)에서 사르곤(Sargon)이라는 이름의 왕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은 사르곤의 왕궁이 코르사바드(Khorsabad)에서 발견되어서 발굴되어 오고 있다. 여기에서 발견된 벽 위에 새겨진 한 비명과 도서관 기록은 아스돗이라는 블레셋 성읍을 공격했던 전쟁을(사 20:1에 언급된) 확인해주고 있었다. 가령 타탄(tartan, 사령관)과 같은 앗수르의 칭호들과 여러 다른 명칭들은 성경 기자들에 의해서 일상적으로 그러나 정확히 사용되고 있었다.


이사야 20:1절에 언급된 앗수르 왕 사르곤(Sargon)

2. 라브막(rabmag), 랍사게(rabshakeh), 팁사루(tipsarru)와 같은 다른 앗수르 칭호들도 성경 기자들에 의해 사용되고 있었다. BC 605년에 갈그미스 전투(Battle of Carchemish)의 전투 후 역사에서 사라진 앗수르어처럼, 없어진 ”쓰이지 않는” 단어들의 이러한 잔존은 목격자적 기록의 특성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적 사실을 기록했던 동일한 사람들이 또한 예언들을 기록했기 때문에, 그것은 예언의 순수성 또한 가리키는 것이다.

3. 산헤립(Sennacherib)의 죽음은 이사야 37:38절과 열왕기하 19:37절에 기록되어 있고, 이것은 산헤립의 아들 에사르하돈(Esarhaddon)에 의한 기록들에서 확증된다. 그 기록은 후에 에사르하돈의 아들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에 의해서 추가되었다.

니느웨(Nineveh)에 대한 여러 상세한 사항들과 요나(Jonah)의 기록은 성경의 역사성을 보여주고 있다. 니느웨의 상징(symbol)은 ‘자궁 속에 물고기 한 마리를 가지고 있는 임신한 여성’이다. 요나 시대에 왕일 가능성이 있는 아다르 니나리 3세(Adad-Nirari Ⅲ)는 아마도 선지자 요나의 메시지를 듣고 괄목할만한 개혁을 도입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아다르 니나리의 궁전은 네비 유니스(Nebi Yunis, 선지자 요나)로 알려진 이후의 건축물과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그 건축물은 요나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장소이다. 그리고 가능성은 적지만, 그가 요나를 공경했을 수도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바벨론인들과 느부갓네살에 관한 주요한 증거들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 왕은 예루살렘을 포위했고 유대인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1.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이 바벨론(Babylon) 위엄의 영광이라는 것을 알았다.(단 4:30) 이것은 약 100년 전에 바벨론을 발굴했던 독일의 콜데바이(Koldewey) 교수에 의해 확인될 때까지는 현대의 역사가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었다.

2. 우리는 이제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날자가  BC 597년 3월 15/16일 밤이었음을 바벨론 연대기를 통해서 알고 있다. 또한 우리는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벨사살(Belshazzar)이 실제로 이 시기에 바벨론의 왕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 나보니두스(Nabonidus)가 약 10년간을 바벨론을 떠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아들 벨사살을 그 기간 동안 공동 통치자로 지명했던 것이다. (따라서 다니엘서 5장에 기록된, 손가락이 나타나 벽에 쓰여진 글자를 읽고 해석하는 자에게 나라의 세째 치리자를 삼으리라고 말한 벨사살의 말은 정확한 것이었다. 단 5:7,16,29).

3. 바벨론에 대한 예언(예로 렘 51:52)들은 글자 그대로 성취되었다. 느브갓네살은 바벨론 성벽이 그의 이름을 영원히 기념하게 될 것이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바벨론의 넓은 성벽이 온전히 무너질 것이라.”(렘 51:58)고 말했다.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예레미야의 예언이 사실로서 확인되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그 조각한 신상을 벌할 것이라 상함을 입은 자들이 그 땅에서 신음하리라” (렘 51:52)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의 넓은 성벽은 온전히 무너지겠고 그 높은 문들은 불에 탈 것이며 백성들의 수고는 헛될 것이요 민족들의 수고는 불탈 것인즉 그들이 쇠패하리라 하시니라” (렘 51:58)


비판가들은 ”그런 왕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그의 궁전과 도서관이 발굴되었다.

*참조 : The times of the 'Great Kings' of Persia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03_1/j03_1_128-134.pdf

 

<다음에 계속 됩니다>

 

*참조 : The Times of the Judges - The Archaeology : (a) Exodus to Conquest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910

The Time of the Judges - The Archaeology : (b) Settlement and Apostasy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5025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nab/does-archaeology-support-the-bible ,

출처 - Answers Magazine, January 24, 2008.

미디어위원회
2008-09-24

고고학은 성경을 지지하는가? 1

(Does Archaeology Support the Bible? 1)

Clifford Wilson 


     증언(testimony)은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할 때 성립된다는 것이 성경적 원칙이다.(마 18:16). 물론 이 법은 예수님의 재판 때는 무시되었지만, 히브리 율법에 따르면, 증인들에 의한 정당하게 입증된 증거 없이는 누구도 유죄로 판결될 수 없었다.

유사한 원리로, 하나님의 말씀(Word of God)은 현대 고고학(archaeology)으로부터 입증될 수 있다. 시편 85:11절에는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그리고 시편 119:89절에는 ”여호와여 주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확실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수명(세대들)보다 오래 가고, 하나님은 그의 시간 안에서 말씀이 진실임을 입증하고 계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독특한 범주에 두게 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양방향 의사전달 패턴에서 ‘상대방’이 되시는 것이다. 인간의 언어는 인간을 모든 동물들과 특별하게 구별되게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성경)은 모든 다른 추정적 계시들보다 매우 우월하게 인간을 향한 그의 특별하신 의사소통으로 구별된다.

”두 세 증인의 입”이라는 성경적 원리에 따르면, 우리는 지금 하나님 말씀의 진실성과 정확성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을 택해야 한다. 모든 분야에서 증거들이 나타나고 있다. 즉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입증해 오셨고, 그 분의 책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만 하는 예언들과 계시들을 포함하고 있는 진실된 기록이다. 그 분의 책은 그 분의 책이기 때문에 독특하다.

오래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시대에 적용될 수 있는, 그리고 시간을 초월하여 현재의 세기에도 남녀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기록했다. 성경은 언어의 기적으로 쓰여진 크리스천들이 연구해야할 ‘상대방’인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 분의 생각(성령의 계시에 의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심오한 것들)을 계시하시기 위해 선택되어진 방법이다.

아래의 개괄적인 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몇 부분으로 나누어 제시하였다. 그리고 각 단락마다 고고학으로부터 얻어진 3가지의 중요한 증거들을 열거하였다. 그 증거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진정으로 진실이라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함을 보여주고 있다. 


창세기 1-11 장에 관한 주요 증거들

창세기 1-11장은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친구가 되시고, 계시자이시며, 심판자이시고, 구속자이시며, 회복자이시고, 만물을 붙들고 계시는 분...이라는 위대한 교리들에 대한 서론으로서, 성경의 ”못자리 판(seed-plot)”이다. 그것은 실제적 역사이며, 모든 시작들에 대한 요약이다.

1. 에누마 엘리시(Enuma Elish). 이것은 바벨론인들의 창조 기록(Babylonian Creation Record)이다. 우리는 또한 에블라 창조 토판(Ebla Creation Tablet)도 가지고 있다. 성경 기록은 이것보다 확실히 우월하다. 에누마 엘리시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물질로부터의 창조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진정한 창조가 아니다. 성경은 이 역사적인 사건(창조)에 대한 참된 설명이다.


바빌론인의 창조 토판들 중의 하나인 에누마 엘리시(Enuma Elish)

2. 길가메시 서사시(The Epic of Gilgamesh)에는 바벨론의 홍수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다시 한 번 성경의 기록이 매우 우월하다. 오사나이(Nozomi Osanai)가 노아의 홍수와 길가메시 서사시를 비교한 그녀의 석사 논문에서 썼던 바와 같이, ”세부적 특성, 과학적 신뢰도, 내적 일관성, 세속 기록들과의 일치, 세계 전역의 홍수 전설들 사이의 공통 요소들의 존재 등에 의하면, 창세기의 설명은 하나의 정확한 역사적 기록처럼  더욱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1].        


길가메시 서사시의 부분

3. 키쉬(수메르)에서 장수했던 왕들(Long-Living Kings at Kish). 이 왕들은 아마도 10,000년에서 64,000년 전에 살았다고 추정되었다. 바벨론의 전설들과 다른 전설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미화되어 온 반면에, 성경의 기록은 보수적이고 참된 설명인 것이다. 후에 바벨론인들은 십진법, 또는 6진법에 근거를 둔 두 가지의 계산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 기록된 연대가 십진법으로 환산되었을 때, 그것은 성경 기록과 200년 이내의 오차로 맞아떨어졌다. 

 

창세기 11-36 장에 관한 주요 증거들

이 부분은 족장들의 기록, 특별히 히브리 족의 조상인 아브라함에 대한 언급을 포함하고 있다.

1. 아브라함의 고향 우르(Ur)는 울리(Leonard Woolley) 경에 의해 준환락의 도시였음을 보여주는 놀라운 증거들과 함께 발굴되었다.[2]

2. 성경에 묘사되어 있는 것과 같은 족장시대의 관습들이 우르, 마리(Mari), 보가즈코이(Boghazkoi), 니느웨(Nineveh)와 같은 곳에서의 고고학적 발견들에 의해 확인되었다. 이들은 수 세기가 지난 후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그 당시에 쓰여진 기록들이다. 거기에는 목격자의 목격이 기록됐다는 흔적들이 들어있다.


.한 유명한 탑을 세웠다고 주장되는 우르의 왕, 우르 남무(Ur Nammu)

그래서 아브라함의 하갈과의 관계는, 당시 관습이 남편에게 아이를 낳아줄 수 없었던 여인은 남편에게 그녀의 하인 중 한 사람을 제공해야 했다는 것을 이해함으로써,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성경의 기록에서 아브라함에게 하갈을 데려다준 사람은 사라였다고 말한다.(창 16:2). 그리고 그녀의 여종 하갈은 아브라함의 아이를 가지는 데에 자발적인 공범자였다. 그래서 그녀는 경제적인 안전과 개인적인 명예를 얻었다. 하갈에게 처음 접근한 사람은 아브라함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당시의 관습을 따랐던 것이다.

4왕들과 싸웠던 5왕들에 대한 기록(창 14장)은 관련된 사람들의 이름이 그 시대에 알려져 있는 단어들 및 이름들과 어울린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3. 헷(Hittites, 히타이트) 족속과 아브라함의 협상은(창 23장) 알려져 있는 헷 족속의 일처리 방식을 정확하게 따르고 있었다. 신-헷 족속(Neo-Hittites)이 나중에 나왔지만, 그들의 언어는 현저히 다른 관계였다. 성경이 초기의 사람들을 ”하티의 자손들(sons of Hatti)” 또는 ”헷 족속들”이라고 부른 것은 옳았다.

흥미롭게도, 가신(retainers)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헷 족속의 'hanakim' 이라는 단어는 ”남자 자신의 집에서 훈련된 하인들(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을 뜻한다.(창 14:14). 이 용어는 성경에서는 오직 여기에만 사용되었다. 이집트인들의 저주 문서(Execration texts)들은 (도자기 항아리의 조각에서 발견된 것으로, 주위 사람들을 저주하는 제의식의 주문으로 사용됐던 것으로 보이는 문서) 이 용어의 뜻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창세기 14장의 성경 기록에서 정확하게 사용되고 있었다.


창세기 37-50 장에 관한 주요 증거들

이 단락은 야곱의 아들이요 아브라함의 증손자인 요셉(Joseph)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그의 형제들은 그를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아넘겼고, 그들은 이집트 환관(eunuch,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을 말함)에게 그를 되팔았다. 요셉은 이집트(애굽)에서 성공했고,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을 그곳에 정착하도록 도왔다.

1. ‘시위대장(captain of the guard)’(창 39:1), ‘가정 총무(overseer)’(창 39:4), ‘술 맡은 관원장(chief of the butlers)’과 ‘떡 굽는 관원장(chief of the bakers)’(창 40:2), ‘바로의 아비(father to the Pharaoh)’ (실제로는 ‘신들의 아버지’라는 말인데, 요셉은 바로를 태양신 라(Ra)의 발현으로서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요셉에게는 신성 모독적이었다. 요셉은 그가 여호와께 불경하지 않기 위하여 그 칭호를 히브리 식으로 바꾸었다.)(창 45:8), ‘바로의 온 집(궁전)의 주(Lord of Pharaoh’s House)‘, ’애굽 온 땅의 치리자(Ruler of all Egypt)‘(창 45:8)와 같은 그런 알려진 이집트의 칭호들은 이 설명의 역사성을 확증하는 것이다.

2. 요셉의 총리 임명 절차는(창 41:41-45) 다른 기록된 의식들과 매우 유사하다. 그의 새 이름은 사브낫-바네아(Zaphnath-Paaneah) 였다. 이것은 ‘신성한 대학의 장(head of the sacred college)‘이라는 의미이다. 다른 이집트 용어들과 지방색들은 성경 기록에서 풍부히 발견된다.(예로, 시체의 방부와 매장 습관 등). (창 50장).

3. 사해 사본(Dead Sea Scrolls)에는 야곱 일행의 숫자가 70명이 아니라(창 46:27), 75명이다. 그래서 필사 오류가 바로 잡아졌고, 스데반이 말한 숫자(행 7:14)가 옳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음에 계속 됩니다>


  

*참조 : Is the story of Joseph in the Bible a true story?
http://christiananswers.net/q-abr/abr-a016.html

Is there evidence that the Israelites once lived in Egypt as the Bible says? Has Joseph's original tomb been found?
http://christiananswers.net/q-abr/abr-a027.html

The Times of Abraham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226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nab/does-archaeology-support-the-bible ,

출처 - AiG, January 24, 2008.

미디어위원회
2008-09-18

바벨탑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What Did the Tower Look Like?)


       이에 대한 간결한 대답은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부는 바벨탑 건설 프로젝트가 완료되기 전에 하나님께서 간섭하셨다는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그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구조물들을 연구하여, 바벨탑은 지구랏트(ziggurat, 고대 바벨론과 앗수르의 피라미드 형태의 신전)처럼 생겼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후의 건축물들을 연구하여, 그것을 역으로 상정할 수 없다. 바벨에서 사람들은 하나의 독특한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인류가 가지고 있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건축 기술들이 한 곳에 모여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흩어버렸을 때, 각 가계들은 그들의 재능들도 함께 가져가 버렸다. 그래서 후에 바벨론과 이집트를 건설한 사람들은 그들의 선조들이 가지고 있던 전문적 지식들이 부족했다. 


갈대아 우르(Ur)에서 발굴 작업을 했던 레오나드 울리(Leonard Woolly)에 의해 복원된 유명한 건축물.


로마의 콜로세움처럼 보이는 피터 브뤼겔(Pieter Bruegel, 네덜란드의 화가)이 그린 바벨탑.


사마라(Samarra, 이라크 중부 바그다드에 있는 도시)에 있는 아랍의 첨탑 형태를 모방한 구스타프 도레(Gustave Dore)의 판화.

우리는 그들의 원래의 계획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 단지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아마도 그들은 완성하는 데 천년은 걸릴 거대한 도시를 설계했을 지도 모른다. 그들은 아마도 홍수 이전 사람들이 그랬듯이 천년을 살 것으로 기대했었을 수 있다.  

그들은 홍수 이후에 사용할 수 있었던 독특한 건축 자재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홍수가 일어난 후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석회와 다른 퇴적물들의 두꺼운 층들은 굳어지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들 재료들은 오늘날 만들어지는 콘크리트 불럭만큼이나 강력한 벽돌들로 만들어질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만일 바벨에서의 계획이 그렇게 거대했다면, 왜 우리는 오늘날 어떠한 유적들도 찾아내지 못하는 것일까? 아마도 하나님께서 도시와 건물의 골조공사를 하고 있던 초기 단계에서 그들의 일을 좌절시켜버렸지 않았나 싶다.

예술가들은 그들을 제한하는 많은 증거들이 없기 때문에,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다. 어쩌면 그들의 환상적인 디자인들이 고고학자들의 추정보다 원형에 더 가까울지 누가 알겠는가?


우룩(Uruk, 오늘날의 와카)에 있는 가장 초기의 지구라트(earliest ziggurat)를 복원한 모습.


가장 오래된 이집트의 피라미드인, 사카라(Saqqara)에 있는 조세르 계단식 피라미드(Step Pyramid of Djoser)는 바벨론 지역에서 건축된 지구라트를 닮았다.


미국 신시내티 인근 창조박물관(Creation Museum) 내에 전시될 바벨탑은 초기 단계에서 건축이 포기되어졌던 한 도시와 탑을 묘사하고 있다.

*참조 : Answers, April – June 2008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3/n2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3/n2/what-tower-looked-like 

출처 - Answers Magazines, February 13,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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