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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성경

미디어위원회
2018-03-29

인도의 가장 오래된 언어는 단지 4500년 되었다. 

(Oldest Language in India Only 4,500 Years Old)

David F. Coppedge 


     현대 인류가 185,000년 전 아프리카를 떠났다면, 왜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언어는 그 시간의 97%가 지난 시점인 4500년 전이 되어서야 시작됐는가?

인간의 언어(human language) 중에서 가장 오래된 언어는 얼마의 나이를 갖고 있을까? 그것은 말하기 힘들다. 맥스 플랑크 연구소(Max Planck Institute. 2018. 3. 21)의 과학자들은 언어 분석과 통계 기법을 사용해서, 인도 남부의 드라비다어족(Dravidian family of languages)의 언어가 시작된 연대를 4,500년 전으로 추정했다. Phys.org(2018. 3. 20) 지는 인도아리아족이 인도에 도착하기 1000년 전에, 드라비다인(Dravidians)이 존재했었다고 보고하고 있었다. 고대의 어족(language family)에서 파생된 80개의 지방어(dialects)들은 오늘날에도 인도에서 약 2억2천만 명의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다.

”드라비다어(Dravidian language)에 대한 연구는 유라시아(Eurasia)의 선사시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그 언어는 다른 언어 그룹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맥스 플랑크 인류과학 연구소의 Annemarie Verkerk는 설명한다. 드라비다어의 지리적 기원이나, 정확하게 언제 확산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연구 공동체의 합의된 의견은 드라비다인들은 인도 대륙의 원주민이며, 인도에 약 3,500년 전 인도아리아족(Indo-Aryans, 인도-유럽어를 사용)이 도착하기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는 것이다. 드라비다어가 서구에 오늘날보다 훨씬 더 널리 퍼졌을 가능성이 있다.

언어의 시작에 대한 평가는 이전의 생각보다 더 내려가고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4500년을 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연구자들은 발전된 통계적 기법을 사용하여, 약 4,000~4,500년 경의 드라비다어족의 하위 그룹들과 연대를 추정했다. 이 추정은 이전 언어학 연구들이 제안했던 것과 일치하지만, 보다 강력한 결과를 보여준다. 왜냐하면 이 연구에서 시험됐던 진화의 여러 통계적 모델들과 일치되는 것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연대는 정확하게 이 시기에 북부, 중부, 남부로 갈라졌던 드라비다인의 분산을 추정하는 고고학적 추론과, 고고학적 기록에서 분명히 드러난 문화적 발전의 시작과 잘 일치한다.

Royal Society Open Science(2018. 3. 21) 지에 발표된 이 논문은 6,000~6,500년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드라비다어의 기원에 대한 가장 지지되는 연대는 4,500년 전이라고 결론짓고 있었다. 이 새로운 연대는 이전 추정치인 6,000년, 또는 13,000년 보다 젊다. 어느 경우이든, 이 어족의 시작 연대는 현생인류가 아시아에 존재해왔었다는 진화론적 추정 연대보다 훨씬 젊다.


BBC News(2018. 1. 25)는 우리 종(Homo sapiens)이 생각보다 일찍 아프리카를 떠났다고 지난 1월에 말했었다. 팔랍 고쉬(Pallab Ghosh)는 이렇게 썼었다 :

이스라엘에서 발견된 새로운 화석 연대측정 결과, 우리 종(Homo sapiens)은 이전 증거보다 약 8만 년 더 초기인, 185,000년 전에 아프리카를 떠나 살고 있었다...

텔아비브 대학(Tel Aviv University)의 연구자는 설명했다 : ”우리 자신의 종뿐만 아니라, 그 당시 아프리카 밖에 살았던 다른 모든 종들을 포함해서, 인간 진화론에 관한 모든 이야기들을 다시 써야한다.”

이 연구에 참여하지 않았던, 런던 자연사박물관의 크리스 스트링거(Chris Stringer) 교수는 ”이 발견은 아프리카 밖에서 현생인류에 대한 오랫동안 확립된 130,000년의 한계를 깨뜨렸다...”고 말했다.

사실 연구자들은 현생인류의 더 오래된 화석도 아시아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이 기사는 인간이 이주한 연대를 25만 년 전, 또는 그 이상으로 끌어내리고 있다. 고쉬는 모로코에서 발견됐던 현생인류 화석은 315,000년 전의 것이었음을 독자들에게 상기시켜주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었다 :

이 연대는 195,000년 전으로 추정하는 에디오피아의 오모 유골(Omo remains)과 같은 화석과, 유전자 연구에 기초하여, 인간 종의 기원에 대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20만 년보다 훨씬 초기의 연대이다. 그리고 미래의 발견은 이 연대를 더욱 끌어내릴 수도 있다.

분명히 이 사람들이 어떤 언어를 사용했는지는, 발견되는 뼈들을 통해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해부학적으로 우리와 동일하며, 동일한 크기의 뇌를 가졌던(네안데르탈인은 현생인류보다 뇌 크기가 더 큰 경우도 있음) 인류가 295,000 년 동안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고 가정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생각처럼 보인다. 특히 그들이 대륙을 넘어 이동할 수 있는 지능을 가지고 있었는데 말이다.

드라비다어족의 시작 연대는 진화론자들의 믿음에 극도의 위기감을 조성하고 있었다. 진화론자들은 우리와 동등한 인류가 30만 년 전에 ”진화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 후에 유럽과 아시아로 이주했다는 것이다. 또한 현생인류가 거기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네안데르탈인들과 교배하는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가장 오래된 언어 그룹 중 하나가 불과 4,500년 전에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와 동일했던 사람들이 295,000년 동안은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들은 서로 말을 할 수 없었고,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는가? 왜 그들은 도시를 건설하지 않았는가? 왜 그들은 그 오랜 시간 동굴에서 살았는가? 왜 그렇게도 늦게 첫 번째 문명이 시작되었는가?



드라비다어족의 시작 연대는 진화론적 연대에 의문을 제기한다. 진화론에 의하면, 침팬지에서 사람이 되는 데에 약 6백만 년이 필요하다. CEH가 18년 동안 보고해왔던 것처럼, 진화론자들이 주장해왔던 연대들은 끊임없이 수정되고 번복되어왔다. 새로운 발견이 있을 때마다 인간의 진화 이야기는 모두 다시 써야하는 일들이 발생하곤 했다. 이제 진화론이 잘못됐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가? 오랜 연대가 틀렸을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가? 수십 년 동안 반복적으로 실패해온 이론을 왜 우리는 계속 들어야만 하는 것인가?


성경을 믿는 사람들은 드라비다어족의 연대에 대해서 놀라지 않는다. 그러한 연대는 바벨탑에서의 인류가 분산됐던 추정 연대와 매우 유사하다. 바벨탑 사건 직후에 서로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끼리 그룹을 이루어 모든 방향으로 퍼져 나갔다는 생각은 합리적이지 않겠는가? 물론 그랬다. 그것은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 9~11장과 다음 12장은 성경 밖의 역사적 증거들과 매끄럽게 연결된다). 분명히 어떤 그룹의 사람들이 바벨로부터 인도 대륙으로 이주해 왔다. 그곳에서 그들은 적합한 서식지를 발견하고, 그들의 공통 언어를 사용하면서, 그 지역에서 번성하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은 더 동쪽으로 이동했고, 중국에 도착했고, 세계의 다른 지역들로 퍼져나갔다.


언어는 자연선택이 아닌, 지적설계에 의해서 발전한다. 일단 공통 언어가 부여되면, 사람들은 특정 단어의 뜻을 결정하고, 편의를 위해 수정하거나, 새로운 상황에 맞도록 문법 규칙을 결정할 수 있다. 서식지에서 격리된 그룹들은 지방어를 개발했을 것이며, 지방어는 시간이 갈수록 차이가 벌어졌을 것이다. 그것이 몇 세기 만에 미국의 영어와 영국의 영어 사이에서 일어났던 일이었다. 오늘날 다양한 드라비다어와 지방어들은 바벨 이후 그 지역에 정착했던 원래의 집단이 있었음을 가리킨다.


물론 이것은 185,000년, 250,000년, 315,000년, 그리고 모이보이들이 추정하는 많은 진화론적 연대들이 모두 공상 소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연대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인류 역사는 단지 수천 년에 불과하다. 창조주께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다. 증거들은 그것과 일치하는 것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s://crev.info/2018/03/oldest-language-india-4500-years-old/ 

출처 - CEH, 2018. 3. 21.

미디어위원회
2018-03-09

중국 삼성퇴(싼싱두이)의 청동나무 

: 창세기를 묘사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유물?

(The Bronze Tree of Sangxingdui 

: the oldest man-made Genesis artefact?)

Stephen Brennecke 


      1986년 중국의 사천성(쓰촨성) 광한(Guanghan) 시의 한 벽돌공장 근로자들은 마을 주변에서 진흙들을 파내다가, 여러 청동 조각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당국에 보고했고, 청두(Chenddu)에 있는 화시(Huaxi) 대학의 고고학자들이 도착해, 고대 촉(蜀, Shu) 나라의 삼성퇴(三星堆, Sanxingdui) 사람들이 만들었던 뛰어난 유물들로 가득 차 있는 두 개의 다른 구덩이(제사 갱)들을 발굴했다. 이 고고학적 노력은 1929년에 시작되었던 초기 발굴에 뒤따르는 것이었다. 이 두 구덩이로부터 옥으로 만들어진 물건들, 청동, 금, 상아, 도자기, 대리석, 뼈를 담는 용기 등을 포함하여 거의 1,000여점의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구덩이에서 나온 유물들 중 거의 800여점은 청동(bronze)으로 만들어진 것들이었는데, 여기에는 크고 작은 사람 상들과 수십 개의 실물크기의 청동 두상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들 청동 두상들 중 일부는 부분적으로 금으로 덧붙여져 있었다. 당국자들은 이들 유물들이 2700~47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평가하였다.

또한 고고학자들은 커다란 청동 나무 조각들을 발견하였고, 이것들은 깨끗이 닦여져서 재조립되었다. 대부분의 발견들처럼, 발견된 것에 대한 논란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발굴된 유물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함축된 뜻에 대해서는 엄청난 논의가 있었다. 특별히 그 나무의 의미에 대해서 주로 불일치가 있었다.[1] 정말로 삼성퇴 발굴에 있어서, 그 유물들을 만든 사람들의 기원과 운명에 관한 것은 수십 년 동안 고고학자들과 같은 전문가들 사이에서 가장 큰 신비 중의 하나였다. 예를 들어 그들은 묻고 있다 :

”삼성퇴 유물들에 의해서 상징되어 있는 문화와 그들의 경이적인 청동 제조 기술은 어떻게 생겨나게 된 것일까?” ”삼성퇴의 수수께끼는 하나의 시대에 관한 수수께끼이다”[2]

그 해답을 푸는 데에 아마도 성경이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청동나무는 어떠한 모습인가?

청동나무(Bronze Tree)는 3.95m 크기이고, 둥근 기초 부분에서 가지 꼭대기까지의 높이는 거의 3.65m이다. (그림 1A). 이렇게 그것은 실물크기의 과일나무(fruit tree)이다. 위로부터 보면, 가지들은 가운데 나무줄기로부터 방사상으로 뻗어져 있다. 측면에서 볼 때, 가지들은 나무줄기에서 위쪽으로 자라다가 동일한 방식으로 아래쪽으로 휘어져 내려가 있다. 각 가지들 끝에는 한 과일이 달려있는데, 화려한 주조된 청동 잎으로 덮여져 있다. 놀랍게도 이들 주요 가지들에 있는 과일 근처의 잎들은 커다랗고 날카로운 칼(menacing knives) 모양으로 주조되어 있었다! (그림 1B).

그림 1. 창세기의 선악과를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삼성퇴의 청동나무(bronze tree).(‘신목 (divine tree)’으로 불리고 있다).  A.나무 전체의 모습. B.칼이 달려있는 금지된 열매(forbidden fruit)의 확대된 모습. C.두 개의 뿔이 달린 큰 뱀(serpent). D.하와의 손(Eve's hand).

                             
그 나무의 가지 아래에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가늘고, 긴, 뱀(snake)과 같은 몸을 가진 한 커다란 뱀(serpent)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림 1C). 그 뱀은 나무 아래 원형 받침 부분에 머리를 두고 있었는데, 머리를 수평으로 똑바로 쳐들고 있음으로 해서 그 등은 휘어져 있었고, 머리끝에는 두 개의 뿔이 나있었다. 뱀의 일부분은 잃어버렸다. 그러나 회복된 그 조각들은 긴 칼로 끝나있는 꼬리 같은 사지(tail-like limb)와, 사람의 손(human hand)과 함께 주조된 또 다른 짧은 부속지(short appendage)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 손은 완전한 엄지손가락, 해부학적으로 정확한 손가락 마디들, 세밀한 손톱을 가지고 있었다. (그림 1A, 1D) 마지막으로 뱀은 작은 어깨를 가지고 있었고, 서있는 곳에 앞발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글거리는 커다란 눈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나무에는 9마리의 새들이 있었고, 각 새들은 각 가지들의 꼭대기에 앉아있었다.              


창세기 선악과와의 비교

삼성퇴의 청동나무를 창세기 2, 3장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와 비교하여 보면, 너무도 많은 분명한 공통점들을 볼 수 있다.

1.삼성퇴의 청동 미술가들은 한 커다란 나무를 만들었다. 이것은 고대의 청동 유물들 중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것이다. 이 나무는 인류 타락(Fall of Man)에 대한 창세기 말씀이 떠오르도록 한다.

2. 삼성퇴 나무는 과일나무(fruit tree)이다. 한 나무를 제작하기로 결정했던 고대의 미술가들은 침엽수나 낙엽수들, 키 큰 나무와 작은 나무들, 또는 청두 평원에서 볼 수 있었던 많은 다른 형태의 나무들을 선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실물 크기의 과일나무와 실물 크기의 열매를 만들기로 선택했다. 창세기의 나무는 과일나무이다.

3. 청동나무에 달려져 있는 과일 주변의 잎들을 주조할 때, 그 여러 잎들을 긴 칼 모양으로 만든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결정을 내린 것이며, 이것은 미술적 표현으로 그 과일은 금지되어(forbidden)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이것은 두 가지의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 ”이 과일을 먹지 말라”. 그리고 ”이 과일을 먹으면 죽는다” 이다. 마찬가지로 창세기의 나무도 금지되어 있었다. 

4. 미술가들은 나무에 매우 상세하게 한 뱀을 포함시켜 놓았다. 창세기의 나무에도 한 뱀이 등장한다.

5. 뱀은 아직까지 걸어 다니는 발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과일들 중에 어느 것도 나무로부터 따먹혀지지 않았다. 창세기 3:14절에서 뱀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는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는 것이었다. 이것은 과일이 따먹혀지기 전에 뱀은 다리를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6. 뱀은 과일주변 잎들에 있는 칼 모양과 유사한 꼬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디자인되어 있다. 이것은 뱀이 과일에서처럼 치명적이고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창세기도 사망의 기원을 여자가 뱀의 유혹을 받아 금지된 과일을 먹게 됨으로서 시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7. 이 나무에는 손으로 표현되어진 한 사람이 존재한다. 그 손은 뱀의 몸체와 같이 위치하고 있다. 이것은 뱀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순간의 하와의 손(Eve's hand)이지 않을까? 그러나 아직까지 과일을 취해지지 않았다.

이러한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숙고해볼 때, 고대 미술가는 한 특별한 나무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한 특별한 순간의 상황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 순간은 창조 이후 인류 역사에게 두 번째로 가장 중요했던 시점임이 틀림없다. 삼성퇴 청동나무는 하나님 앞에서 죄가 없었던 인류의 마지막 순간을 묘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무의 가지들에서 우리는 금지된 과일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아직 인간에 의해 취해지지 않았다. 인간의 타락을 도운 뱀은 저주 이전의 상태로 그곳에 있었다. 그 뱀은 칼과 같은 꼬리를 가지고, 죽음을 가져오는 것으로 상징화되어 있다.


삼성퇴와 창세기가 관련 있다는 것의 의미      

만약 삼성퇴의 청동나무가 창세기의 선악과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가지는 논리적 의미들은 무엇일까? 그 질문에는 많은 가능성 있는 대답들이 있지만, 몇 가지만 제시해 보겠다.

삼성퇴 사람들의 기원은 세속적 학계에서는 하나의 신비로 남아있다. 따라서 삼성퇴-창세기의 연관성은 그 신비를 푸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는, 삼성퇴 문명의 시기와 창세기의 기록 시기를 비교하는 것은 중요하다. 삼성퇴 사람들은 BC 2800~800년 까지 2000여년 동안 번성해 온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2] 따라서 그 청동나무는 그 기간 동안에 만들어졌음에 틀림없다.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한 시기는 대게 BC 1450~1410년 경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3] 만약 청동나무가 모세의 기록 이전에 만들어져서(이럴 가능성이 큼), 모세의 기록과는 독립된 것이라면(이것은 거의 확실함), 어떻게 삼성퇴 사람들은 선악과에 대해서 알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삼성퇴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만드셨던 사람들과 같은 조상들의 구전(traditions)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창세기 11장은 이 개념을 지지한다. 거기에는 바벨탑 사건에 의해 야기된 사람들의 언어의 혼잡과 온 지면으로의 분산(dispersion)이 기록되어있다. 분산에 대한 설명은, 한때 인류가 한 언어를 가진 하나의 민족이었음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비록 하나님이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지만, 그들은 같은 기술력, 같은 유산, 같은 조상적 전통들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 청동나무가 모세의 창세기 기록 이전에 만들어졌다면, 또는 그 청동나무가 모세의 영감된 기록과는 독립적으로 만들어졌다면, 성경은 창세기의 기록이 매우 상세한 내용까지도 사실임을 지지해주는 하나의 편견 없는 강력한 외부적 증거를 갖게 되는 것이다. 세상이 하나의 미스터리(mystery)로 여기고 있는 이 삼성퇴의 청동나무는 창세기를 묘사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유물이며, 인류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위대한 보물일지도 모른다.  
   


References

1. Ruins of ancient city discovered, history gets rewrittens, Shanghai Star, Shanghai
, 19 July 2001.
2. Historical wonders of Sanxingdui : puzzles of Sanxingdui through the ages, <www.china.org.cn/e-sanxingdui/jingtai/8.htm>, 7 April 2006.
3. Ryrie, C. C., The Ryrie Study Bible, Introduction to the Book of Genesis, King James Version, Moody Press, Chicago, IL, p. 5, 1978


참조 : 1. Sanxingdui Museum
http://sxd.cn/en/

2. 위키백과, 삼성퇴
http://ko.wikipedia.org/wiki/삼성퇴


관련기사 : 中 쓰촨성서 3000년전 ‘황금 가면’ 발견… 中 고대사 다시 쓰나(2021. 3. 21. 세계일보)

http://www.segye.com/newsView/20210321509442?OutUrl=naver

中 쓰촨서 3000년전 황금가면 발견...중국사 새로 쓰나(2021. 3. 21. 조선일보)

https://www.chosun.com/international/china/2021/03/21/AFC6BBK7ZZAGBAYSXQ3AIY3SO4/

‘황금가면’의 비밀…중국은 왜 열광하나?(2021. 3. 23. KBS News)

http://news.kbs.co.kr/news/view.do?ncd=5145053&re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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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rther Reading


번역 - 미디어위원회

출처 - Journal of Creation 20(2), 2006

주소 - https://creation.com/the-bronze-tree-of-sanxingdui-genesis-artefact

미디어위원회
2017-01-23

팀나의 구리 광산은 솔로몬 왕국의 부강함을 보여준다. 

(Copper Mine at Timna Shows Solomon’s Power)

David F. Coppedge


       홍해 아카바 만(Gulf of Aqaba) 근처의 이스라엘 남부의 팀나 밸리(Timna Valley)에서 계속된 발굴은 솔로몬 왕국(Solomon’s kingdom)이 광범위했고 지배적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Fox News(2017. 1. 12)에서 제임스 로저스(James Rogers)는 팀나에서의 광범위한 구리 채굴 작업에 대한 새로운 발견에 대해 보도했다. ”이스라엘 남부의 솔로몬 시대의 요새는 그 비밀을 드러냈다.”그는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시기로 평가되는 광산 근처의 한 요새에서 채취된 유물로부터 새로운 방사성탄소 연대측정을 실시했다.

BC 10세기에 지어진 복잡한 문루(gatehouse)가 2014년 이스라엘 남부의 팀나 계곡에서 발굴되었다. 그러나 요새의 마구간에서 발견된 유기물 잔해에 대한 최근의 분석은 요새에 거주했던는 사람들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

전문가들은 팀나 계곡의 고온 건조한 기후에서 보존된 동물의 뼈와 배설물을 연구할 수있었다. ”우리가 마굿간을 발견했을 때, 물질들은 매우 잘 보존되어 있었으며, 3,000년 전으로 믿을 수 없을만큼 '신선한' 것이었다.” 발굴팀의 리더중 한 명인 텔아비브 대학의 고고학 연구소의 에레쯔 벤요세프(Erez Ben-Yosef)는 FoxNews에서 말했다. ”실험실로 돌아와 연대를 측정했을 때, 우리는 실제로 이것이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마구간과 다른 활동의 잔해임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관광객들이 이스라엘의 팀나 밸리에서 구리 광산을 탐사하고 있다. (Photo by David Coppedge, 2006.)

연구자들은 군인들이 당나귀와 다른 동물들에게 무엇을 먹였는지도 결정할 수 있었다.

침략을 막기 위해 튼튼한 돌로 지어졌던 요새는 동물과 다른 가축을 위한 울타리를 가지고 있었다. 연구자들은 동물들의 배설물에 들어있는 꽃가루, 종자, 생물군을 연구함으로써, 수백 마일 떨어진 지중해 연안에서 공급된 건초와 건포도를 먹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연안으로부터, 그리고 수도인 예루살렘으로부터 수백 마일 떨어진 곳들을 방어하고, 무역으로 연결하기 위해서는 광범위한 연락망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증거는 지중해 지역과의 장거리 연결을 보여준다.” 벤요세프는 말했다. 팀나는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240km 떨어져 있고, 동물 사료를 공급했던 가장 가까운 항구로 추정될 수 있는 악코(Acco)로부터 350km 정도 떨어져있다.

1934년에 발견되어, 처음에는 노예 수용소로 생각됐던, 팀나(Timna) 지역은 훨씬 더 많은 것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벤요세프는 2014년에 철기시대 유물들은 노예 수용소의 것이 아니며, ”계층적이고 세련된 사회”를 가리킨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와 같은 발견은 다윗과 솔로몬이 제한된 지식과 영향력을 지닌 단순한 그 지역의 족장에 불과했다는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을 완전히 기각시키는 것이다. 팀나는 광범위한 무역, 협력적인 방어, 세련된 자원들을 제공할 수 있었던 하나의 제국이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조각판(engravings)들은 팀나가 BC 12세기의 상반기에는 이집트의 바로였던 람세스 3세(Rameses III)의 통치하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사건은 이것보다 2세기 후의 일이었다.

벤요세프에 따르면, 요새가 팀나 계곡에서 가장 큰 고대 제련공장 중 하나에 위치한다는 사실은 특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팀나의 구리 광산에서 군사적 충돌에 대한 증거를 얻지 못했다”라고 그는 FoxNews.com에서 말했다. ”또한 그것은 이 지역에 살고 있었던 에돔 사람들과 다윗왕 사이의 전쟁을 기록해놓은 성경의 기록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성경 역사가들이 이 기록에 대해 열띤 논쟁을 벌여왔기 때문에, 어떠한 증거도 매우 중요하다고, 그 고고학자는 덧붙였다.

그 발굴은 텔아비브 대학의 후원 하에 계속 진행 중이다.


*1/14/2017 업데이트 : Live Science(2017. 1. 13) 지는 그 유기물 잔해가 노예들의 식사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대신에, ”금속 세공인들은 지중해에서 수입한 고기, 피스타치오, 생선 등의 양질의 식사를 했으며, 이것은 그들이 상당히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의 재능을 귀하게 평가 받았다”는 것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무신론자들과, 진화론적 고고학자들과,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성경의 기록을 비웃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것은 그들의 무지와 영적 수준을 가리키는 것이지, 실제 역사가 그렇다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잠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이후에 발견된 증거들은 비판가들의 주장이 틀렸음을 보여준다. 출애굽의 증거를 다루고 있는 두 편의 다큐멘터리, ‘Patterns of Evidence: Exodus’ 과 ‘The Exodus Revealed: Search for the Red Sea Crossing 는 그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진화론과 마찬가지로, 전문가들도 틀릴 수 있다. 그들의 성경에 대한 잘못된 주장이 대학에서 가르쳐지면서, 그들의 편견은 서로 강화되고 있다. 비난하는 사람들의 조롱이 들려올 경우, 증거들을 상세히 살펴보라. 의심하는 태도를 제거하고, 열린 마음으로 증거들을 들여다본다면, 종종 있던 성경과의 갈등은 사라질 것이다.

 


*관련동영상 : The Exodus Revealed: Searching for the Red Sea Crossing

https://www.youtube.com/watch?v=yTnqRpXKcaQ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crev.info/2017/01/copper-mine-at-timna-shows-solomons-power/ 

출처 - CEH, 2017. 1. 12.

미디어위원회
2016-09-27

창세기와 욥기에 기록된 기후와 일치되는 고고학적 발굴

(Archaeology Confirms Genesis, Job Climate)

by Brian Thomas, Ph.D.


      한 국제적 고고학 발굴팀은 현재의 요르단에 있는, 먼 과거에 습한 시기가 있었던, 고대의 한 장소로부터 동물과 인간의 유물들을 조사했다. 오늘날의 아즈라크 오아시스(Azraq Oasis)는 과거의 흐름과 비교해 볼 때, 약수물을 받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최근 아즈라크에서 발굴된 오랜 기간 보존되어 왔던 여러 단서들은 진화론적 역사보다 성경적 역사와 더 잘 일치하고 있었다.

구약성경은 자주 중동지역(Middle East)이 과거에 물이 넉넉했음을 말하고 있다. 약 3,500년 전에 욥(Job)은 아라비아 또는 그 근처에서 살았다. 오늘날 그곳은 대부분이 사막이다. 그러나 욥은 많은 가축을 소유하고 있었고, 특별히 그의 유명한 시련 후에도 그랬다. 이것은 그 시기가 건조한 기후가 아니었음을 추론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욥기에는 눈, 얼음, 폭풍, 늪 등이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것들은 습한 과거를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욥보다 그리 오래 전이 아닌 시기에 살았던 아브라함과 롯은 요르단 강 일대를 바라보면서 어느 쪽을 택할 지를 결정할 때,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창 13:10) 라고 창세기는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지역의 기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가? 성경은 아브라함의 시대 이후 오랫동안 지속됐던 일련의 심각했던 가뭄들을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가장 잘 알려진 가뭄은 요셉의 시대에 있었던 가뭄이었을 것이다. 요셉은 7년의 풍년 동안에 곡식들을 잘 비축해서, 온 지면에 있었던 7년의 기근(가뭄) 동안에 애굽 백성과 '각국 백성'들을 구해냈다.(창 41:53-57). 마찬가지로, 누가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하면서 열왕기상 17장의 가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all the land)에 큰 흉년(great famine)이 들었을 때에...”(눅 4:25) 이들 큰 흉년의 원인이 되었던 가뭄들은 극적으로 기후를 건조하게 만들었을 것임을 가리킨다.


예루살렘 동쪽으로 130km 정도에 위치하는, 오늘날 요르단에 속해있는 아즈라크 오아시스는 이러한 성경적 무대의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그곳을 발굴한 고고학자들은 Journal of Archaeological Science 지에 그 결과를 보고했다. 그들은 ”더욱이, 분지 주변의 계단식 대지(terraces)로부터의 증거들과 묻혀있는 호수 퇴적물(lacustrine deposits)은 과거에 호수의 수면이 높았음을 가리킨다”고 말했다.[1] 오래 전에 그 지역은 호수의 바닥 층이었다는 것이다. 연구의 저자들은 썼다. ”역사적으로, 오아시스는 분지의 위쪽 대수층(aquifer)으로부터 기원된 샘들에 의해서 물을 공급받고 있었는데, 그 대수층은 북쪽의 제벨 드루즈 현무암 암괴(Jebel Druze basalt massif)에서 재충전되고 있었다.”[1] 감소된 강우량은 그 대수층을 충전하는 데 실패했고, 샘들은 말라버렸다. 그 이후로 습한 시기와 건조 시기를 오갔던 변동은 아즈라크 위치에 늪지대, 강물 유출, 심지어 바람에 날린 퇴적층 (인공 유물들을 파묻은) 등을 남겨놓았다.


고대의 오아시스는 모든 종류의 생물들을 이끌어 들였다. 연구 팀은 작은 영양(gazelle), 낙타(camel), 들소(wild cattle), 말(horses), 코끼리(elephant), 코뿔소(rhinoceros), 사자(lion), 다른 대형 육식동물의 잔해 등, 빙하기의 유물 같은 것들을 (분명 홍수 화석들은 아니었다) 발굴했다. 날카로운 돌조각 도구에는 오리(duck)의 특정 단백질이 남아있었다. 그러한 증거들은, 연구 저자들이 '호미니드(hominids)'라 불렀던 어떤 사람 같은 그룹(human-like group)이 다양한 동물들을 사냥했음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사람인가, 유인원인가?


세속적 과학자들은 고릴라, 침팬지, 오랑우탄, 가상의 유인원, 사람을 포함하는 영장류의 한 과로서 사람과(Hominidae)를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과거에 현대인류보다 열등했던 어떤 사람같은 존재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화론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유인원은 아직 우리와 같은 영리한 생물로 진화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즈라크 오아시스에 있었던 소위 호미닌들은 코뿔소들과 오리들을 사냥하는데 필요한 모든 기술들을 완벽하게 가지고 있었다는 분명한 증거를 보여주었다. 그밖에도 이들 고고학자들은 ”이들 호미닌들이 포식자로부터 피할 수 있는 장소, 사체의 보존 등과 같은 고도의 효율적 전략을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1] 물론 그들은 효율적인 전략을 사용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호미닌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고대 사하라(Sahara) 지역이 과거에 습했던 것처럼, 고대 중동지역이 과거에 습했다는 사실은 성경에서 살펴볼 수 있는 기후 단서들과 잘 맞아 떨어진다.[2] 그리고 처음부터 완전히 발달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은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하는 인류의 성경적 역사와 일치하는 것이다.



References

1.Nowell, A. et al. 2016. Middle Pleistocene subsistence in the Azraq Oasis, Jordan: Protein residue and other proxies. Journal of Archaeological Science. 73 (2016): 36-44.
2.Thomas, B. Genesis and a 'Wet' Sahara. Creation Science Update. Posted on ICR.org November 3, 2008, accessed August 30, 2016.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article/9581 

출처 - ICR News, 2016. 9. 20.

미디어위원회
2016-08-04

놀라운 말타의 동굴인들 :

 현대인도 최근까지 동굴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The amazing cave people of Malta)

Joseph Mizzi 


     진화론자들의 주장으로 인해, ‘태초의 원시 인류’는 ‘동굴생활’을 한 것으로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확인된 증거들에 의하면, 그러한 생각은 논리적이지 않음이 밝혀졌다.


당신은 ‘동굴인(cavemen, 혈거인)’을 믿고 있는가? 회의론자(sceptics)들은 이런 질문들을 받으면 ”당연하지!” 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들은 성경에 아담의 후예들이 거대 도시들을 건축했음이 기록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증거들‘은 확실히 초기 인류가 동굴에서 생활했음을 보여준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만약 ‘동굴인’이 동굴에 사는 사람만을 의미한다면, 우리도 ”물론 동굴인이 있었다는 것을 믿는다”고 대답할 수 있다. 오팔 광산이 있는 호주 남부의 도시 쿠버 페디(Coober Pedy)를 방문하면, 그곳의 날씨가 너무 더워서, 일부 광부들은 땅속 집에 살고 있음을 보게 된다. 실제로 ‘동굴인’들이 텔레비전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질문은 실제로 동굴에 사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질문은 책과 박물관에서 자주 묘사되고 있는, 털이 많고 동굴에 거주하는 ‘유인원(apemen)’에 관한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진화론적 믿음에 의거하여, 한때 동굴에서 살았던 인간은 원시적 짐승이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증거로부터 결론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진화론적 추정에 의한 하나의 결과인 것이다. 심지어 동굴에 살았던 네안데르탈인들도, 그들은 기술을 가진 인류였으며, 심지어 재능있는 음악가였다는 명백한 증거들을 보여주고 있다.

성경은 많은 동굴인(cavemen)들을 언급하고 있다. 창세기에 의하면, 롯(Lot)도 한때 혈거인(그가 소돔으로부터 도망치고 난 후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윗도 사울 왕으로부터 도망가 동굴에서 살았으며, 오바댜는 동굴에 100명의 선지자들을 숨겨주었고, 그들에게 빵과 물을 주었으며, 이세벨로부터 그들을 구했다. 미디안(Midianites)을 벗어나기 위해서 이스라엘 사람들도 일시적으로 동굴에서 살았다. 엘리야 자신도 한 동굴에서 지냈으며, 심지어 욥도 동굴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욥기 30:6).

성서적 역사의 관점으로 볼 때, 사람들이 바벨에서 언어의 혼란 이후 흩어짐에 따라, 그들은 여러 곳에서 다양한 주거의 형태를 가졌는데(어떤 것은 일시적이고, 어떤 것은 영구적이었는데), 예를 들면, 천막, 진흙집, 돌집, 또는 나무집 등이었고, 많은 사람들은 확실히 동굴에서 거주하였을 것이다. (노아의 홍수 이후 물이 빠져나가면서, 아마도 많은 동굴들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래의 석회암 동굴들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참조). 따라서 전 세계에 걸쳐서 사람들이 동굴들에서 살았다는 증거들이 발견될 것이 예측된다.

한 흥미로운 예를 지중해에 있는 시실리(Sicily) 남쪽의 말타 섬(island of Malta)에서 찾을 수 있다.

지중해 사람들은 항상 편리하면서도 시원한 거주 장소로서 동굴과 바위동굴들을 선호했다. 말타도 예외는 아니었다. 동굴생활의 전통은 고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동굴에서의 거주, 또는 혈거(troglodytism)는 중세 동안에 아주 인기 있는 주거방식이었다는 강력한 고고학적, 문서적 증거들이 있다. 진 퀸틴(Jean Quintin d’Autun)이 1536년에 그 섬에 대해 기록하였을 때[1], 그는 말타에서는 동굴(cave)에 거주하는 이들이 아주 많았으며, 일부 사람들은 매우 최근까지도 동굴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에 매우 놀라워했다. 이러한 동굴 정착자들의 여러 후손들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으며, 심지어 동굴 교회(cave churches)들까지 있었다.


거대한 동굴

가르 일크비르(Ghar il-Kbir, the Great Cave) 동굴은 이들 정착지 중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다.[2, 3, 4, 5, 6] 그것은 2개의 다른 높이에 8개의 작은 동굴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나의 커다란 자연동굴로 둘러싸여 있다. 동굴의 지붕(‘텅빈 카르스트(karst hollow)’라고 불리는)은 무너져있다. 동굴거주자들은 더 작은 동굴들에서 살았는데, 내부에는 돌로 벽을 만들어 (물론 입구도) 거실과 구분했다. 다른 장소에서 발견된 것처럼 벽화의 흔적은 없으나, 돌로 여러 가지 작품들을 남겼다 - 천정의 고리, 도관(ducts), 선반(shelves), 그리고 벽감(niches, 벽의 움푹 들어간 곳)들인데, 이들은 확실히 실용적인 용도로 쓰였다. 

가르 일크비르 동굴의 가장 오래된 정착 년도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처음 알려진 것은 1544년으로, Simone Camilleri de gar il-chibir  (‘큰 동굴의 Simone Camilleri’)라는 글의 참고문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말타의 역사가인 프란세스코 아벨라(Giovanni Francesco Abela)는 그 섬에서 사람들이 사는 거주 장소의 목록에 그 가르 일크비르 동굴을 포함시켰다. 그는 그곳에 27가구의 117명의 사람들이 살았던 거대한 동굴로 표현하고 있었다.[7] 그들은 목동과 양치는 사람(pastori e pecorai)들이었다.      

가르 일크비르 동굴의 생활을 가장 극적으로 기술했던 사람은 독일의 학자 아타나시우스 키쳐(Athanasius Kircher, 1602~1680)로서, 그의 두터운 책 ‘Mundus Subterraneus’ (라틴어로 ‘지구 아래의 세계’)에서 였다.[8] 그가 그 장소를 방문했을 때, 크고 강한 체구에 간단한 옷차림을 한 어른과 아이들이 그에게 인사를 하였다. 그는 또한 그곳의 여인들의 아름다움에 주목했는데, 이것은 어린이들의 책에 그려져 있는 짐승같이 추하게 생긴 여인들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그곳 사람들은 채식주의자들로서 야채, 치즈, 집에서 구운 빵을 주식으로 하였으며, 소들의 분변을 말려 연료로 사용하고 있었다. 남자들은 들에서 일했고, 가축들을 길렀으며, 그것들을 도시로 내다팔았다. 여인들은 아이들을 돌보고 치즈를 만들었다. 식수는 흙으로 빚은 커다란 용기에 보관되어 있었다. 동굴은 비와 바람을 내보내도록 고안된 창을 통해 환기가 되고 있었다. 동굴의 거주자들은 십자가와 성화 등으로 동굴을 장식하고 있었다.  



동굴, 아름다운 내집 동굴!


”‘내집 만한 곳이 없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가르 일크비르 동굴의 거주자들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었다. 외국인들은 그들의 동굴생활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들은 동굴생활에 철저히 얽매여 있었는데, 그들이 멜리타(Melita) 라는 도시로 가서 그들의 상품을 팔거나 생필품을 살 때는, 마치 추방 명령을 받은 사람들처럼 볼일도 가능한 빨리 끝냈으며, 하루 밤도 밖에서 보내지 않기 위해 서둘러 돌아가곤 했다” - Kircher, 1637 [1]

”...이들 말타의 동굴인들은... 마치 그들 자신들을 살아있는 채로 땅에 묻어 버린 듯이, 땅 위의 집들에 나와 사는 것보다, 어둡고 외딴 동굴에 사는 것을 택하였다.” - Veryard, 1701 [2]

현대 동굴 거주자들의 발견은 우리들에게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진화론적 생각은 동굴 거주자를 원시인으로 여기도록 세뇌시키고 있다. 증거들은 스스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만일 기독교인들이 성경에 근거한 안목으로 동굴 거주자들을 바라본다면, 노아의 후손들은 머리가 나쁜 짐승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편의 또는 취향에 의해 동굴에서 살기로 선택했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References

1. Zammit Ciantar, J., Life at Ghar il-Kbir, Dingli Local Council, Malta, p. 11, 2000.
2. Veryard, E., An Account of Divers Choice Remarks, as well Geographical, as Historical, Political, Mathematical, Physical, and Moral; taken in a Journey through the Low-Countries, France, Italy, and Part of Spain; with the isles of Sicily and Malta,Sam Farley, London, pp. 233-236,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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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을 직접 방문한 여행객의 설명


가르 일크비르 동굴은 그 당시에 여행자들 사이에서 미니 관광 명소가 되어 있었다. 동굴에서 실제 살고 있는 사회를 방문하는 것을 상상해 보라. 독일인 방문자였던 아타나시우스 키쳐(Athanasius Kircher)가 기록한 설명은 가장 생생했다 :

”1637년에, 내가 말타(Malta)를 방문했을 때, 근처에는 한 언덕이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땅속에서 살고 있었다. 초대했던 사람은 내가 그곳에 가서 그들이 그 동굴을 장식해 놓은 예술적인 감각과 어떻게 그들이 살고 있는 장소를 꾸며 놓았는지를 보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정말로 잘 조직된 방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단단한 암석을 파내어 만든 침대를 가지고 있었다. 벽에는 하나의 벽 찬장을 가지고 있었고, 그곳에 빵과 치즈 등을 올려놓고 있었다. 다른 장소에, 그들은 소, 양, 당나귀들을 위한 우리(pens)를 가지고 있었고, 일부 닭들을 위한 우리도 가지고 있었다. 저수조를 대신하는 항아리들은 충분히 커서 물을 보관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양파와 마늘은 꽃줄(festoons)처럼 다발로 묶여져서 매달려 있었고,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또한 빵을 굽기 위한 오븐이 있었다.... 오븐은 또한 굴뚝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연기는 동굴 안으로 퍼졌을 것이고 …사람들은 숨이 막혔을 것이다.”[1]

인구수는 점차적으로 감소하였다. 그러나 일부 거주자들은 19세기 초까지도 남아 있었다. 떠도는 이야기에 의하면, 영국 식민지 정부가 1830년대에 마지막 거주민들을 강제로 내쫓았고, 그들을 근처 마을로 이주시켰다고 한다.

딩글리(Dingli)의 근처 마을에 있는 교회 기록에는 가르 일크비르 동굴에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개인적인 상세한 기록들이 남아있다.[2] 예를 들면, 1699년에 프랑코 벨라(Franco Vella)라고 불리는 53세의 남자는 38세의 아내 필루메나(Filumena)와 3명의 아이들과 그곳 동굴에서 살았다고 되어있다.

분명히, 이들 동굴 거주자들은 근처의 마을 사람과 상호 교류를 했던 정상적인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귀족과 부자들은 궁궐 같은 집에서 사는 동안, 가난한 대중들은 돌집이나 동굴에서 살았다. 이들 동굴의 주거 상황은 근처 베르다라 궁전(Verdala Palace)의 건축학적 아름다움과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뜨거운 여름 동안에 동굴들은 섬의 어느 곳보다도 확실히 안락했을 것이다.

 

References

1. Zammit Ciantar, J., Life at Ghar il-Kbir, Dingli Local Council, Malta, pp. 8-10, 2000.
2. Buhagiar, K., The Ghar il-Kbir Settlement and the Cave Dwelling Phenomenon in Malta, B.A. (Archaeology) thesis, University of Malta, 1997, Appendix 1, pp. 31-34.


 

References

1. Quintin d’Autun, J., Insulae Melitae Descriptio, Lyons, France, 1536.
2. Zammit Ciantar, J., Life at Ghar il-Kbir, Dingli Local Council, Malta, 2000.
3. Wettinger, G., The lost villages and hamlets of Malta, in: Luttrell, A. (Ed.), Medieval Malta, London, p. 188, n. 24, 1975.
4. Messina, A., Trogloditisma Medievale a Malta, Melita Historica, Malta Historical Society 10(2):109-120, 1989.
5. Buhagiar, K., The Ghar il-Kbir Settlement and the Cave Dwelling Phenomenon in Malta, B.A. (Archaeology) thesis, University of Malta, chapter 2, pp. 19-23, 1997.
6. Luttrell, A., Malta Troglodytica: Ghar il-Kbir, Heritage (publisher: Midsea Books, Malta) 24:461-464, 1979.
7. Abela, G.F., Della Descrittione di Malta, Isola nel Mare Siciliano, Bonacota, Malta, pp. 79-80, 1647.
8. A photocopy of pp. 97-99 in volume II of the original 1665 Latin text of Kircher, A., Mundus Subterraneus, can be found in Hein, O. and Mader, R., Athanasius Kircher S.J., in Malta, Akademie Verlag Berlin, pp. 139-141, 1997.


* Joseph Mizzi, M.D., MRCP (UK), who has visited Ghar il-Kbir, is a paediatrician in the Neonatal Intensive Care Unit, St. Luke’s Hospital, Malta. He runs an evangelical internet ministry at www.justforcatholics.org.

*Mike Matthews, M.Ed., is a writer and educator with extensive experience in Christian publishing. His writings include several yearbooks on current events and a geography textbook used in Christian schools. He now serves as a writer/editor at Answers in Genesis-USA.

 

*참조  : Kinver Caveman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2/n1/kinver-cavemen

A Better Model for the Stone Age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227

A Better Model for the Stone Age Part 2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225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26/i1/malta.asp 

출처 - Creation 26(1):40-43, December 2003.

미디어위원회
2015-01-07

이집트 연대기와 성경 

: 현장 고고학자 데이비드와의 대화 

(Timing is everything : A talk with field archaeologist David Down)

Tas Walker 


      2년 전, 고고학자인 데이비드 다운(David Down, 아래 사진)은 이스라엘에서 반원 모양의 고대의 돌들이 있는 곳에서 발굴을 하고 있었다. 그때 그는 비명 소리를 들었다.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 그는 자원봉사자들 중 한 여성의 다리가 구멍 아래로 사라져있는 것을 보았다.

데이비드는 중동지역의 고고학 발굴지들을 20 여년동안 발굴해 왔기 때문에 그 상황을 잘 대처할 수 있었다.

”그녀를 구하려고 뛰어 들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 구멍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가 말했다.

데이비드는 성경이 신뢰할 만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많은 발견들을 해왔다. 최근에 그는 성경의 연대기에 이집트의 고고학을 연결시키면서, 성경의 바로(pharaohs)들에 관한 고정관념을 완전히 뒤집어엎는 책을 썼다.[1]

노련한 고고학적인 솜씨로 데이비드는 곧 그 입구를 통해 어둡고 서늘한 무덤으로 내려갔다.

”나는 2300년 만에 그 무덤에 들어간 첫 번째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도굴꾼들이 모든 것을 가져갔으리라 생각했지만 모든 것들이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86세의 나이에도 데이비드는 활기차게 최선을 다해서 발굴작업을 해오고 있다. 그는 아직도 일주일 중 세 번 오전 업무 시작 전에 테니스를 친다.

.작은 통로를 통하여 기어들어가는 것은 현장 고고학에서 흥미진진한 일이다. 이 사진은 데이비드가 이집트의 첫 번째 피라미드를 건축한 세네페루(Seneferu)의 아들 무덤(mastaba, tomb)을 기어 들어가고 있다. 데이비드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그는 실제로 세 개의 피라미드를 건축했고, 고금을 통털어 가장 위대한 피라미드 건축가였습니다. 그의 아들 쿠푸(Khufu)는 기자(Giza)에서 가장 큰 피라미드를 건축했습니다. 무덤이 완성되고 시체가 안치되면, 도굴꾼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입구를 막아 버립니다. 도굴꾼들은 결코 통로를 뚫고 들어갈 수 없을 것이지만, 무덤의 다른 측면으로 돌아서 무덤 방 안으로 들어가는 터널을 팠습니다.” 그들은 큰 통로를 파느라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지 않았고, 다만 비좁게 들어가는 것으로 충분했다. 오늘날 이 통로는 무덤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다.


현장 고고학자로서 데이비드는 이스라엘에 자원봉사자로서 발굴을 시작했다.

”점차 나는 나의 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대부분의 고고학자는 학문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고고학을 한 후에 공부를 했고 경험을 얻습니다.”

데이비드는 또한 ‘고고학적 발굴들(Archaeological Diggings)’ 이라는 고대 역사와 고고학에 관한 두 달에 한번 나오는 컬러 잡지의 편집을 맡고 있다.[1] ”나의 잡지는 성경을 지지하는 고고학 잡지입니다” 라고 데이비드는 설명했다.

”다른 고고학 잡지들, 예컨대 ‘성서고고학(Biblical Archaeology)’ 또는 ‘성서고고학 리뷰(Biblical Archaeology Review)' 등과 같은 것들은 그들의 잡지명에 '성서' 라는 단어는 사용하고 있지만, 거기에 실린 기사들 모두가 성경의 정확성을 반드시 지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모든 것이 시작되었나.

데이비드의 고고학에 대한 열정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그의 삼촌이 그를 호주 멜버른에서 개최된 공식 회의에 가자고 했을 때 시작되었다.

”그것은 한 극장에서 열렸고, 그래서 나는 이것이 정치 강좌라고 생각했습니다.” 라고 데이비드는 회상한다. ”그렇지만 그들이 기도로 시작하고 헌금을 드렸을 때 나는 도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해졌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만약 내가 삼촌과 같이 있지 않았다면 나는 떠났을 것입니다.”

데이비드는 생애 처음으로 바벨론(Babylon)의 왕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과 성경의 다니엘서 2장에 기록된 정금으로 된 머리와 은으로 된 가슴과 팔들을 지닌 한 신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지만 데이비드는 회의적이었다.

”나는 생각했습니다. 바벨론과 메데-바사(Medo-Persia)에 관한 것이 도대체 뭐란 말인가? 나는 그가 우리를 속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데이비드는 공공 도서관에 갔고, 결국 바벨론과 메데-바사가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는 다른 강좌에도 참석했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때로부터 계속해서 데이비드는 바벨론을 방문하였고, 그 스스로 그것을 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성서의 땅들, 즉 예루살렘, 베들레헴, 나사렛, 갈릴리, 그리고 특별히 바벨론과 니느웨를 보고자 하는 야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땅들에서 일어난 성경적 역사의 사실성 때문에 변화되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의 기회는 인도에서 선교사로서 마지막 기한을 보내고 있던 1958년에 찾아왔다. 본국인 호주로 귀향하는 대신에 그는 자동차와 캐러밴으로 성서의 땅들을 여행했다.

그의 아내와 네 명의 아이들(가장 어린 막내가 한 살도 채 안되었지만)과 함께 그들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으로 가는 카이버 고개(Khyber Pass), 이란, 이라크, 결국에는 바벨론에 도착하는 여행을 했다. ”우리들은 몸만 달랑 그곳에 있었습니다” 데이비드는 회상했다. 성경은 ”바벨론은 ‘온전한 황무지가 될 것'(예레미아 50:13)이라고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 온전한 황무지인 바벨론에서 우리 가족은 홀로 야영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7개월 반의 여행을 했지만, 집에 돌아오자마자 데이비드는 이미 다음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문제들을 발견하다

그 당시에 기독교인들 사이의 대중적인 의견은 고고학이 성경의 진실성을 증명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1960년대 들어서서 세속적인 고고학자들이 성경과 충돌되는 이야기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데이비드는 그가 호주에 있는 한 기독교 대학에서 고고학을 가르칠 때 이것을 발견했다.

”나는 이집트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었고, 표준 이집트 연대기에 의하면 아멘호텝 2세(Amenhotep II)가 출애굽 시기에 애굽을 다스리던 바로(pharaoh)였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제 나는 이집트에 가보았었고, 카이로 박물관에서 아멘호텝 2세의 미라를 보았습니다.”

데이비드는 그것이 그곳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약 그가 출애굽기의 바로였다면 그는 홍해(Red Sea)의 밑바닥에 있어야만 했을 것입니다.”(출애굽기 14:5~9, 28) [2].

데이비드는 미국 최고의 크리스천 고고학자인 지그프리드 혼(Siegfried Horn) 박사에게 그가 강의실에서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를 물었다. 혼 박사는 ”유감스럽지만 해답이 없군요.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십시오.” 라고 답장을 해왔다.

데이비드가 발견했던 또다른 문제는 솔로몬 왕과 관련된 것이었다. 고고학자들은 솔로몬이 살았음직한 시기에서 풍요로운 기간을 발견하지 못한다. 대신에 그들은 궁핍함을 발견하고 있다.

”이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데이비드는 설명했다.

”만약 당신이 고고학자들이 '철기 시대 IB (Iron Age IB)' 라고 불리는 곳을 발굴해 들어간다면, 당신은 오직 겉만 번드르르하게 보이는 도기류(pottery)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는 강력한 도시들이나 성벽들이나 요새들이나 그와 비슷한 어떠한 증거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어떠한 보석류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세속적인 고고학자들은 솔로몬 왕의 이야기를 지지할 만한 아무런 증거도 없다고 말하면서, 맹렬하게 성경의 그 이야기를 공격하고 있지만, 그들의 말과 모순되는 솔로몬이 존재했다는 많은 증거들이 있다.

”만약 솔로몬 왕의 이야기가 위조된 것이라면, 성경의 어떤 부분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데이비드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해답들이 있어야 할 것임을 알았지만, 2년 동안 그는 그것들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성경이 옳다는 것을 알았지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습니다.”


연대기의 핵심

그 무렵 어느 날 그는 도노반 쿠빌(Donovan Courville) 박사가 쓴 '출애굽 문제와 그것의 파생 문제들 (The Exodus Problem and Its Ramifications)' 이란 책을 발견했다. 이 책은 이집트 연대기가 축소되어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데이비드는 ”그것은 나에게 빛을 비춰 주었습니다” 라고 밝게 말했다. ”나는 그것이 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때로부터 줄곧, 그는 이집트의 '연대기를 개정하기 위한' 헌신적인 사람이 되었다.

오랫동안 고고학자들에게 있어서 이집트 연대기(Egyptian chronology)는 '절단되고 건조된(cut and dried)' 것이었다고 데이비드는 설명했다.

”그것은 천랑성 주기(Sothic cycle)에 의해 지지되는 것으로 주장되었고, 고고학자들은 그 날짜들이 천문학적으로 고정된 것으로 주장했습니다.”

”이집트 역사의 표준 시각을 표시하고 있는 태양의 일식(eclipses)들이 그 연대들이 정확하다는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랑성 주기는 일식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데이비드는 말한다.

데이비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천랑성 주기는 기괴하고 놀라운 것입니다. 이집트 역사에서 약간의 언급들이 천랑성의 떠오름(the rising of Sothis)을 말하고 있지만, 그것으로부터의 모든 것은 억측입니다. 천랑성(Sothis, Dog Star)은 무엇인가? 시리우스 별(Sirius) 인가? 금성(Venus)인가? 그것에 대한 어떤 동의도 없습니다. '떠오른다(rising)'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언제 그것은 수평선 위로 나오는가? 그것은 전부 추측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표면적으로는 그들의 연대를 지지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은 그냥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데이비드는 눈썹을 치켜 올리면서 말했다.

”사실,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은 천랑성 주기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집트의 연대들에 대해서 의문을 갖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천문학적으로 고정되었다(astronomically fixed)’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3]

”이집트 연대기가 단축되어야하는 이유는 왕조들이 겹치고(overlapping dynasties) 있기 때문입니다” 라고 데이비드는 설명한다.

”몇몇 왕조들이 동시대적으로 존재했다는 것을 부인하는 고고학자는 없을 것입니다. 사실  제3중간기(Third Intermediate Period) 에서도 있었는데, 그 시기에 대해 가장 권위를 가지고 있는 케네쓰 킷첸(Kenneth Kitchen)까지도 같은 시기에 4개의 왕조가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어떠한 왕조들이 동시대적으로 있었는가?’ 라는 질문이 아닙니다. 그 질문은 ‘얼마나 많은 왕조들이 그리고 얼마나 오랜 기간동안 그랬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곳에는 이전에 확인되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동시대적인 왕조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의 고고학은 이집트와 관련이 있고, 그들 자신만의 어떤 연대기도 가지고 있지 않고 있다고 데이비드는 설명했다.

”그래서 만약 당신이 이스라엘에서 바로(pharaoh)와 관련된 기록이 새겨져있는 도기 파편들을 발견한다면, 사람들은 그것에 그 바로에 해당하는 연대와 같은 연대를 부여합니다. 그러나 만약 바로의 연대가 틀렸다면, 이스라엘에서 발견된 도기류들의 연대도 또한 틀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증거들은 아름답게 들어맞다

데이비드는 이집트의 연대기가 줄어든다면 증거들은 아름답게 들어맞을 것임을 발견했다.

”그들이 솔로몬에 대한 그 어떤 증거도 발견하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초기 철기시대(Early Iron Age)를 찾아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틀린 곳입니다. 그러나 중기 청동기시대(Middle Bronze period)에서는 솔로몬의 영광스러움을 보여주는 풍부한 증거들이 있습니다.”


옥합(alabaster jar)을 발굴해서 들고 있는 데이비드의 이 사진은 특별히 흥미로운 것이다. 그는 말한다. 

"나는 그것을 벳산(Bethshan)에서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이집트로부터 수입되어온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막달라 마리아(Mary Magdalene)가 향유를 가득 담아두었던 옥합과 같은 크기, 같은 모양의 것입니다. 그녀는 봉인된 마개를 뜯고서 그 내용물을 예수님께 부었습니다.”


”그 시기에는 빠른 돌림판 위에서 만들어진 아름다운 도기류(pottery)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평범한 구리 대신에 청동(bronze)을 가졌습니다. 그곳에는 아름답고 잘 건축된 도시들을 포함하여 아주 많은 발명들과 대단한 번영이 있었습니다. 어떠한 고고학 서적도 중기 청동기 제2기(Middle Bronze II)는 중동지역에서 알려졌던 어떠한 시기보다 가장 영향력 있고 강력했던 시기였다고 이야기해 줄 것입니다. 이 시기는 개정된 연대기에 의하면 솔로몬의 시기입니다.” 라고 데이비드는 말한다.

데이비드는 또한 세소스트리스 1세(Sesostris I) 때에 살았던 요셉에 대한 많은 증거들을 발견했다. ”그는 너그러운 바로 였습니다” 데이비드는 생각에 잠겨 말했다. ”당신은 카이로 박물관(Cairo Museum)에서 그의 조각상을 볼 수 있습니다. 말쑥하게 보이는 조각상 말입니다.”

”그리고 노예의 시기(period of slavery)라고 인정되고 있는 시기에 오게 되면, 추잡하게 보이는 성격의 세소스트리스 3세(Sesostris III)를 보게 되는데, 이 이집트의 새로운 왕은 요셉을 알지 못했습니다 (출 1:8). 이것은 제12왕조(12th Dynasty) 였습니다.”

고고학 분야에서 표준적인 이집트 연대기에 과감한 개정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데이비드 혼자만이 아니다. 예를 들면, 그는 ‘시간의 시험(Test of Time, 미국에서의 제목은 ‘Pharaohs and Kings’)이라고 불리는 책을 쓴 데이비드 롤(David Rohl)을 언급하고 있다.

데이비드는 성경과 개정된 연대기에 대해서 친숙한 것이 다른 고고학자들이 가지지 못하는 장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발굴현장에서 뭔가를 발견할 때,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즉시 알고 연대기적으로 그 물건을 정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성경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유대인들과 발굴을 할지라도, 그들은 나만큼 성경에 친근하지 못합니다.”

그는 새로운 구조틀 안에서 이집트의 역사를 재해석한 최근의 책을 쓰면서 느꼈던 우려를 회상하였다.

”나는 표준적인 연대기가 틀렸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러나 처음에는 바로들을 올바른 장소에 두려고 감히 노력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나는 출애굽과 솔로몬으로부터 시작했고, 보기 좋게 들어맞는 많은 왕조들의 왕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매우 흥분되는 일이었습니다.”

데이비드는 그의 작업이 기독교 신앙과 성경을 방어하는 데에 매우 긴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당신이 성경이 역사적으로 틀렸다고 말하게 될 때, 어디에서 그것을 멈출 것입니까?”

전투는 모두 연대기(chronology)에 관한 것입니다” 라고 데이비드는 열정적으로 말한다.

표준 이집트 연대기에 의하면 BC 700년 이전의 성경적 기록에 대한 증거는 없게 됩니다. 그러나 개정된 연대기에 의하면 풍부한 증거들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모두 너무나도 아름답게 들어  맞습니다.”

 

References and notes

1. Contact Archaeological Diggings (Australia) for publishing details, editor@diggings.com.au
Phone: +61 2 9477 3595.
2. See also David’s article, Searching for Moses, TJ 15(1):53-57, 2001.
3. See also Mackey, D.F., Fall of the Sothic Theory: Egyptian chronology revisited, TJ 17(3):70-73, 2003; based on his M.A. thesis from the University of Sydney in Australia.



방사성 탄소(C-14) 연대측정법은 성경이 틀렸음을 입증하였는가?

”나는 방사성 탄소(C-14) 연대측정법을 사용해 왔습니다” 라며 데이비드는 재미있어 한다. ”솔직히 말해서, 고고학자들 사이에서는 방사성탄소 연대측정법은 하나의 큰 농담입니다. 그들은 실험실들에 연대가 측정될 시료들을 보냅니다. 만약 그 결과가 도기류의 형태로부터 이미 결정된 날짜들과 일치하면, ‘이 시료의 C-14 연대는 우리의 결론을 확증해준다’ 라고 말할 겁니다. 그러나 그 연대가 일치하지 않으면, 그들은 단지 연구소에서 그것을 잘못 취급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것은 단지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고고학자들은 결코(나에게 이 점을 강조함) 결코 결코 그들이 발견한 것을 방사성탄소 연대측정 결과로 연대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그들의 결론과 부합할 때에만 그것을 인용할 뿐입니다.”[1]

Reference
1. The same is true in geology. See Walker, T., The way it really is: little-known facts about radiometric dating, Creation 24(4):20-23, 2002.



히타이트 (Hittites) : 성경에 기초한 개정된 연대기에 의해 풀려진 종래의 연대기적 문제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은 이집트 연대기가 문제를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지만, 그냥 넘어가 버립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히타이트와 같은 것입니다” 데이비드는 말한다.

이스라엘처럼, 히타이트도 그들만의 그 어떤 연대기도 가지고 있지 않다. 히타이트와 이집트 사이에는 시간적으로 동시에 발생했던 일들이 많이 있으며, 그래서 히타이트의 날짜들은 이집트의 연대기적 기초 위에서 부여된다. 그렇지만, 삼각형의 세번째 구성원인 앗수르가 있다.

데이비드는 그 문제를 요약하였다.

”이집트 연대기에 따르면, 히타이트는 BC 1200년에 소멸되었지만, 앗수르인들은 BC 8세기와 9세기에 히타이트에 대항하여 싸운 전쟁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타이트인들이 소멸되고 난 후 500년이 지났는데 그들은 누구와 전쟁을 하였을까요? 고고학자들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든지 간에 '뒤에 남은 광채(afterglow)'라고 말합니다. 앗수르인들은 8세기와 9세기에 히타이트에 대항하여 전쟁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히타이트 기록에 의하면 500년 전에 살았던 왕들과 동일한 이름들을 가진 왕들과 전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점점 더 악화된다.

”작년에 터어키에 있는 히타이트 유적들을 방문했을 때, 나는 공예품(artefacts)에서 그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는 고왕국 시대에 만들어진 공예품이 있었고, 다른 하나는 후기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정확하게 꼭 같았습니다. 우리들은 왕조가 바뀌고 스타일이 바뀌면 공예품도 바뀐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공예품들은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는 이집트와 관련해서 연대가 정해진 것이었고, 다른 것은 앗수르와의 관련해서 500년 후로 정해진 것이었습니다.”

고고학자들은 이러한 문제점들을 알고 있지만, 그들은 그것들을 묻어 두고자 한다. 그러나 데이비드 다운에게 있어서, 이러한 문제들은 성경적인 개정된 연대기에 의해서는 풀려지기 때문에 흥미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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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된 이집트 연대기  

표준 이집트 연대기는 BC 3000년을 넘어서 확장되어 있다. 이것은 노아의 전 세계적인 홍수가 고왕국(Old Kingdom) 시대 동안 일어났다는 것이 된다. 또한, 요셉은 제2 중간기(Second Intermediate Period) 동안 애굽에 놓여지게 된다. 그러나 그 당시에 그에 대한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그리고 모세는 신왕국(New Kingdom) 시대에 이집트에 놓여지게 되지만, 번성했던 왕국에서 애굽 전역을 황폐화시켰던 질병들, 홍해에서 바로와 그의 군대의 괴멸 등과 같은 사건들의 영향을 찾아볼 수 없다.

왕조들이 동시대에 존재했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서, 개정된 연대기는 극적으로 시간 척도를 무너뜨리고, 성경적인 연대기와 조화된다. 제1 중간기(First Intermediate Period)는 제2 중간기와 같은 것이 되며, 여호수아와 사사기의 시기와 부합한다. 제3 중간기(Third Intermediate Period) 또한 사라지게 되고, 그 왕들은 신왕국(New Kingdom)과 후기 페르시아 시기(Late and Persian Periods)들의 왕들과 일치하게 된다.

따라서 이집트는 대홍수 이후, 그리고 바벨에서의 분산 이후 미스라임(Mizraim, 노아의 손자이며 함의 아들)의 후손들에 의해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창세기 10:6) (현재의 이집트(Egypt) 라는 이름은 미스르(Misr)에서 나왔다. 참조; 창50:11)

아브라함은 고왕국 시대 동안 이집트를 방문했으며, 요셉은 중왕국 시대 동안 이집트에 있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중왕국을 몰락시켰고, 한때 장엄했던 땅들에 황폐한 시기를 가져왔다.

 


References and notes

1. Contact Archaeological Diggings (Australia) for publishing details, editor@diggings.com.au
Phone: +61 2 9477 3595.
2. See also David’s article, Searching for Moses, TJ 15(1):53–57, 2001.
3. See also Mackey, D.F., Fall of the Sothic Theory: Egyptian chronology revisited, TJ17(3):70–73, 2003; based on his M.A. thesis from the University of Sydney in Australia.

 

*참조 : Egyptian history and the biblical record: a perfect match?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857

Fall of the Sothic theory: Egyptian chronology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1682

The Times of Abraham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226

From Abraham to Exodus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222

The Times of the Judges–The Archaeology: (a) Exodus to Conquest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910

The Time of the Judges—The Archaeology: (b) Settlement and Apostasy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5025

The times of the 'Great Kings' of Persia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03_1/j03_1_128-134.pdf

Evidentialism–the Bible and Assyrian chronology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1802

A reliable historical record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0_2/j20_2_20-23.pdf

Is there evidence that the Israelites once lived in Egypt as the Bible says? Has Joseph's original tomb been found?
http://christiananswers.net/q-abr/abr-a027.html

Is the story of Joseph in the Bible a true story?
http://christiananswers.net/q-abr/abr-a016.html

 

*추천자료 : Egyptian chronology and the Bible—framing the issues.
Do the dates ascribed to the Egyptian dynasties falsify the date of biblical creation?
http://creation.com/egypt-chronology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27/i3/down.asp 

출처 - Creation 27(3):30-35, June 2005.

미디어위원회
2014-10-16

성경 역사를 확증해주고 있는 고대 앗수르 유물. 

대영박물관에 있는 성경의 고고학적 증거. 

(Monuments from Ancient Assyria confirm biblical history. 

Archaeological evidence from the British Museum)

Peter Masters 


       대영박물관(British Museum)은 성경 역사에 대한 광범위한 직접적인 증거와 배경적 증거들을 제공하는 막대한 양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1]

성경과 관련이 있는 고고학적 발견의 전체 영역을 간결하게 요약하여 선택적으로 구성한 박물관의 전시물들을 관람할 수도 있다. 오늘날과 같은 세속적 분위기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경 기록의 문자적 정확성에 대한 강력한 증거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지 못한다.

앗수르 왕궁의 발굴로 발견된 전시품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기원전 880년 경에 앗수르 제국 (Assyrian empire)은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거의 3세기 동안 공포와 전제정치가 횡행했으며, 여러 왕국들을 점령하여 복속시켰다. 몇몇 앗수르의 왕들은 성경의 이스라엘과 유다 땅을 침략하고 협박하여 항복과 조공을 받아냈다. 오랜 세월 동안 이러한 상호간의 투쟁으로 말미암아, 성경과 앗수르의 기념비와 연대기들 모두에서 다양한 이름과 전투들이 언급되어있는 것은 당연하다. 앗수르의 기록은 성경 기록의 역사적 정확성에 대한 (성경 외적인) 독립적인 증거가 된다. 

.아슈르나시르팔 2세(Ashurnasirpal II)의 석비 [ANE 118883] (대영박물관 6호실)

오늘날과 같은 세속적 분위기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경 기록의 문자적 정확성에 대한 강력한 증거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지 못한다.

구약 성경에 등장하고 있는 두 왕의 이름을 언급한 앗수르 기념비는 흥미롭고도 중요하다. 세 개의 유사한 기념비가 박물관에 같이 서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아슈르나시르팔 2세(883~859 BC)를 기념하는 기념비이다. 아슈르나시르팔 2세는 제국의 확장과 건설 정책을 시작한 앗수르 왕이며, 앗수르의 무기체계에 새로운 공성(攻城) 기술, 특히 투석기와 궁수의 엄호를 받는 토성(土城)과 공성기(攻城機)를 도입했다.


.살만에셀 3세(Shalmaneser III)의 석비 [ANE 118884] (대영박물관 6호실)

성경 역사에 있어서 매우 큰 중요성을 갖는 옅은 갈색의 기념비도 볼 수 있다. 살만에셀 3세의 석비(Stela of Shalmaneser III)로 알려져 있으며, 쿠르크 석비(Kurkh Monolith)라 부르기도 한다. 살만에셀 3세는 앗수르를 기원전 859~824년에 통치했다. 석비를 보면 손 위에 위치한 작은 그림으로 상징되어있는 신들에게 경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석비에 글은 왕의 모습 위에도 쓰여있고, 뒷면에도 쓰여있는데, 이스라엘의 왕인 아합(Ahab)과 수리아(Syria = 아람 Aram)의 왕인 벤하닷 1세(Benhadad I)에 대한 구체적 언급을 포함하여, 살만에셀 3세의 여섯 번의 초기 전쟁을 기술하고 있다.

석비의 기록들은 <열왕기하>와 <역대하>에 등장하는 다양한 사람들을 확인해줌으로써, 그들이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적 인물이었다는 것을 확증하고 있다.

살만에셀 3세는 (기원전 853년에) 서쪽으로 진격하여 여러 나라를 압박하였으나, 하마스(Hamath)의 왕 이루렐니(Iruleni)는 (아합과 벤하닷을 포함한) 12명의 왕들의 지원을 받아 강력한 연합 방어군을 조직했다. 아합과 벤하닷 두 사람은 대부분의 시간을 서로 전쟁을 벌였지만, 3년 평화기에는(왕상 22:1절에 언급됨) 살만에셀 3세를 격퇴하기 위해 하마스와 연합했다.(이 시기는 선지자 엘리사가 사역한 기간이다.) 전투는 하마스 근처 카르카르(Karkar, Qarqar라고도 씀)에서 벌어졌다. 살만에셀은 그의 석비에서 이 전투를 다음과 같이 기술해놓고 있었다 :

”나는 카르카르로 진격하여, 파괴하고, 정복하고, 왕족들을 사로잡았다. 다마스커스의 하닷에셀(Hadadezer, 벤하닷 1세)은 도우려 전차 1,200대, 기병 1,200명, 보병 20,000명… 이스라엘 왕 아합은 전차 2,000대, 보병 10,000명을…보냈다.”

동맹군의 전력은 보병 50,000명, 기병 14,000명, 전차 4,000여대로 기록되어 있다. 살만에셀 3세는 큰 승리를 거두었고, 시체로 강이 막히고, 계곡은 피로 물들었다고 자랑하고 있다. 그런데 고대 근동의 왕들은 자신들의 업적을 과장하고, 모든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주장한다. 사실상 이 전투는 패배였는데, 살만에셀은 실질적으로 진격에 실패했으며, 적의 영토를 결코 점령한 적이 없다. 성경에는 아합이나 벤하닷이 그러한 규모의 후퇴를 했다는 언급이 없다. 이 일이 일어난 다음, 아합은 벤하닷을 공격하다가 전장에서 죽었다.(왕상 22:34~35)

카르카르 전투는 성경에 기술되어 있지는 않지만, 석비를 보면 <열왕기하>와 <역대하>에 기록되어 있는 여러 사람들을 확인할 수 있으므로, 그들이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기념비는 발굴되어, 성경의 인물들이 성경에 기록된 장소와 연대에 실제로 살았었다는 것을 확증해주는 전형적인 사례가 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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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rther Reading

•Archaeology Questions and Answers

•History Questions and Answers


References and notes
1.See documentation in Masters, P., Heritage of Evidence in the British Museum, The Wakeman Trust, London, 2004.


번역 - 홍기범

링크 - http://creation.com/assyrian-monuments 

출처 - Creation 35(3):48–49, July 2013.

미디어위원회
2013-11-19

영국에서 로마시대 이전의 도로가 발견됐다. 

(British Pre-Roman Roads Lead to Genesis)

by Brian Thomas, Ph.D.


      고고학자들은 2011년 영국에서 로마시대의 도로 아래에서, 잘 건설되고 유지됐던 고대 도로의 잔해를 발견했다. 이 증거는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영국을 정복하기 이전에 영국 땅에 살던 사람들은 원시적인 이교도들이었다는 현대 교과서가 가르치는 내용과는 다른 것이다. 또한 이것은 인류의 발달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진화론적 주장에도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슈루즈버리(Shrewsbury) 바로 남쪽에서 발견된 고대 도로는 자갈로 포장되어 있었고, 심지어 배수를 위해서 도로의 중앙 부분이 약간 볼록하게(camber) 설계되어 있었다. Daily Mail 지는 보도했다. ”그 도로는 심지어 가장자리 돌들을 붙잡기 위한 도로 경계석 시스템(kerb fence system)을 가지고 있었다.”[1] 연구자들은 방사성탄소 연대측정을 사용하여 그 도로의 연대가 로마시대 이전인 것으로 결정하였다.  


발굴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고고학자인 팀 마림(Tim Malim)은 Daily Mail 지에서 말했다. ”오늘날 전통적인 견해는 로마인들이 영국에 와서 도로들을 건설하고 사람들을 문명화시켰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로마의 침공 이전에 도로가 건설되어 있었음을 우리는 발견했다.”[1]

지식이 있는 문명화된 사람들만이 그러한 잘 설계된 도로들을 구축할 수 있다. 이것은 이들 고대인들이 전혀 '원시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오늘날과 같이 도로를 멋지게 건설하고 설계할 수 있었다.


이전 엑서터 대학 연구원이었던 그레이엄 롭(Graham Robb)은 새로운 책 ‘고대의 길(The Ancient Paths)’에서 자세히 영국의 로마시대 이전의 도로 및 다른 토목 구조물들에 대해 상세히 기술했다. 그 책에서 롭은 수백 개의 고대 마을들이 어떻게 배열되어 있었으며, 특정 순서로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Telegraph 지에서 말했다. ”나는 그것이 사실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매우 진보된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2]

”매우 진보된”이란 말은 석기시대나 철기시대 사람들이었을 것이라는 표준 개념과는 적합하지 않은 표현이다. 그러나 그 말은 고대의 기록과는 일치하는 것이다.


‘홍수 이후(After the Flood)’라는 책에서, 역사가인 빌 쿠퍼(Bill Cooper)는 로마의 침공 이전의 수세기 전까지 올라가는 왕들의 목록이 포함되어있는 고대 웨일스(Welsh)기록에 대해 쓰고 있었다. 쿠퍼는 ‘초기 영국의 연대기(The Chronicle of the Early Britons)’를 웨일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했던, 12세기 웨일스의 승려이며 학자였던 몬머스의 제프리(Geoffrey of Monmouth)를 참조하였다.[3] 쿠퍼는 이렇게 썼다. ”제프리는 우리에게 벨리누스(Belinus, 영국의 전설적인 왕)는 훌륭한 도로 건축가였다. 런던에 있는 빌링스게이트(Billingsgate)는 그에 의해서, 그리고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고 썼다.”[4] 벨리누스 왕은 ”왕국(전체 영국)을 BC 380~374년에 지배했다.”[5, 6]


최근 고대 웨일스어에서 영어로 번역된 연대기는 그들의 도로 배치가 어떻게 영국 국기의 줄무늬 패턴을 연상시키는 지를 포함하여, 이들 도로에 관한 상세한 내용을 제공해주고 있다.

그래서 벨리누스는 영국의 모든 석공들을 소집하고, 법으로 그들에게 돌과 모르타르(mortar)로 된 도로를 건설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그 도로는 콘월(Cornwall, Totnes)의 끝에서 알바니의 케이프 블라돈(Cape Bladdon, Caithness)에 이르기까지(영국의 전체 길이) 해당 경로에 놓여있는 도시들을 관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명령으로 또 하나의 도로가 건설되었다. 그 도로는 메네비아(Menevia, 오늘날의 St David's)에서 육지를 가로질러 오늘날의 사우샘프턴(Southampton)인 포트 하몬(Port Hamon) 해안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한 구석 구석을 연결하는 두 개의 다른 도로가 경로에 있는 도시들을 관통하며 구축되었다.[7] 

따라서 잘 관리되던 돌포장 도로와 같은 유물이 줄리어스 시저가 BC 55년 영국을 침공하기 이전에 이미 존재했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명백하게 언급하고 있는 고대 연대기는 막연하게 철기시대, 청동기시대, 석기시대, 원시시대, 심지어 유인원 시기가 있었다는 세속 역사가들의 주장을 전혀 지지하지 않는다.(오늘날 빌링스게이트는 벨리누스 왕의 연대기적 이름과 일치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고 있다.)[8] 결국 다른 유럽과 여러 고대 국가들의 연대기와 마찬가지로, 영국의 연대기는 그들의 왕들의 조상을 추적하다보면, 결국 야벳(Japheth, 노아의 아들)으로까지 올라가는 것이다.  


장구한 진화론적 시대들과 대립되고 있는, 성경 창세기에 기초한 인류 역사는 로마시대 이전 영국은 이미 문명화되어 있었다는 기록된 증거와 파묻혀있던 증거에 의해서 확증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는가? 좀 더 자세히 조사해본다면, 모든 길은 창세기(Genesis)로 통한다.



References

1. Ellicott, C. So what did the Romans do for us? Archaeologists find cobbled road that was built 100 years BEFORE they invadedMail Online. Posted on dailymail.co.uk March 16, 2011, accessed October 16, 2013.
2. Dixon, H. 'Roman' roads were actually built by the Celts, new book claimsThe Telegraph. Posted on telegraph.co.uk October 13, 2013, accessed October 18, 2013.
3. The work of Geoffrey of Monmouth and others 'was consigned to oblivion after the massacre, at the instigation of Augustine, of the [1,200] British monks at Bangor in AD 604 and was thus entirely unknown or ignored by the later Saxon and Norman chroniclers of England.' See Cooper, B. 1995. After the Flood. Chichester, England: New Wine Press, 69.
4. Ibid, 74.
5. 'Belinus' is his Latinized name, which in Welsh was Beli. His brother Bran (Brennius in Latin) was famous because he 'eventually led the Celtic sack of Rome in ca 390 BC,' an event that Roman records separately verify. See Ibid, 74.
6. Ibid, 73.
7. Cooper, B. (trans.) 2002. Chronicle of the Early Britons. Digital book, accessed October 28, 2013.
8. Thomas, B. Were Stone Age Britons Trigonometry Experts? Creation Science Update. Posted on icr.org September 21, 2009, accessed October 18, 2013.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article/7737/ 

출처 - ICR News, 2013. 10. 30.

솔로몬의 것으로 확증된 그의 구리 광산. 

(Solomon Corroborated: It’s His Copper Mine)


      새로운 연대 평가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아라바흐(Aravah)에 있는 구리 광산(copper mines)은 이집트인의 것이 아니라, 솔로몬의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성경적 연대기를 지지한다는 것이다.

PhysOrg(2013. 9. 3) 지의 헤드라인은 ”이스라엘에 솔로몬 광산의 증거”였다. 홍해 에일랏(Eilat) 부근의 이스라엘 국립공원 팀나(Timna)에 있는 유명한 구리 광산은 방사성탄소 연대측정 및 올리브 구덩이(olive pits)에 의해서 솔로몬 시대의 것으로 연대가 재확인되었다. 상세한 내용은 Haaretz 웹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새로운 연대측정은 그 광산이 이집트가 가나안을 지배했던 시기의 청동기 광산이라고 주장되던 '이집트 패러다임'으로부터, 정말로 솔로몬 왕의 광산, 또는 적어도 그의 통치 동안에 운영되던 광산이라는 '솔로몬 패러다임'으로 돌아오게 하고 있었다. 솔로몬은 강력한 왕이었다. 그가 광범위한 채굴 작업을 감독하고 있었다는 것은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재평가는 에돔(Edom)에 있는 구리 광산에도 빛을 비춰주고 있었다. Bible Places Blog의 토드 보렌(Todd Bolen)은 그 구리 광산을 소유했던 사람에 대해 예측하고 있었다. 에돔 사람들은 솔로몬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조공을 바치며 광산을 운영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집트 패러다임에서 솔로몬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옹호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시간이 있다면, 성경의 기록이 틀렸다는 증거로서, 솔로몬의 시기에 대한 증거가 없다고 했던 사람들의 진술을 검토하고 문헌들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울 것이다. 다시 한번 우리는 고고학적 연구에 의한 확실한 결과를 가지는 것이 중요함을 보고 있다. 

BASOR에 대한 고고학자들의 공개 보고서는 여기를 클릭하라. 



성경 기록의 역사성을 의심하는 주장들은 오래 되지 않아 곧 폐기된다는 또 하나의 사례를 우리는 보고 있는 것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crev.info/2013/09/solomon-corroborated-its-his-copper-mine/ 

출처 - CEH, 2013. 9. 5.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5741

참고 : 5116|4458|4852|3233|5625|3148|4376|4405|4409|4422|5852|5969|5985|6017|6066|6089|6179|6283|6351|6353|6387|6401|6432

미디어위원회
2013-04-15

다윗 왕은 부족장이 아니라, 도시들을 지배했다. 

(King David Ruled Cities, Not Shepherds)

by David F. Coppedge


      고대 유다의 키르벳 케이야파(Khirbet Qeiyafa) 지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고고학 발굴 결과는 결론부터 말해서 당대에 그 지역이 강력한 성벽관청 건물청동기구와 철기구및 외국 강대국과의 상당한 무역 거래를 암시하는 유물들을 보유하거나 생산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이 발견들을 통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다윗 왕은 존재했다하더라도 유목민의 부족장에 불과했다고 주장하는 일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축소 지향적연대기가 믿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토드 보렌(Todd Bolen)은 그의 블로그(Bible Places Blog)에서 주요한 발견물의 내용을 요약한바 있다요시 가핑클(Yossi Garfinkel) 등이 운영하는 이스라엘 문화재 관리청에 제출된 상세 보고서는 작년에 수행한 네 번째와 다섯 번째 발굴의 목표가 방사성 연대측정에 의해 기원전 11세기 말과 10세기 초로 추정되는 예루살렘 남쪽의 고대 군사 도시의 특징들을 확인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키르벳 케이야파는 그 시대에 명문이 새겨진 도자기가 발견되어 2008년에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11/16/2008, 1/07/2010). 그 새로운 보고서가 새겨진 내용까지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유물들은 다윗 시대 동안에 고도화된 문명을 암시하고 있다:

  하부 지층은 기원전 11세기 말에서 10세기 초 사이의 철기시대 IIA(Iron Age IIA)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지금까지 드러난 이 정착지의 유적들을 살펴보면 그 지역의 상층부에서 두 개의 성문두 개의 성문 광장, 28개의 참호(20개는 완전한 형태로 발굴됨), 10개의 주거 건물행정 관청 건물 등이 발굴되었다대량의 인공유물들이 각 지역의 가옥 마루에서 발견되었으며복구가 가능한 수백 개의 도자기 그릇수백 개의 석조 물체수십 개의 금속 물체 및 소품들을 포함하고 있다분명한 것은 이 지층이 어느 날 갑자기 파괴되었다는 것이다제례 의식에 관련된 많은 증거들이 발견되었으며 그 중에는 묘석(mazzevot), 제례실(cultic chamber), 사원 모형(2개는 세라믹, 1개는 돌로 만들어졌음), 소조각상 등이 있었다.


철기시대 도시에서 발견된 인상적인 구조물과 유물들 :

1. 유대 왕국의 도시 계획 특징이것은 베트 쉬메쉬(Bet Shemesh), 텔 엔 나스베(Tell en-Nasbeh), 텔 베이트 미르심(Tell Beit Mirsim) 및 브엘 쉐바(Be’er Sheva)와 같은 다른 지역들에서도 알려져 있다포곽벽(casemate wall)이 이들 지역 모두에 세워졌으며이 도시의 집들은 거주하는 하나의 방처럼 포곽벽과 접해져 있었다이러한 모델은 [당시의가나안팔레스타인 또는 이스라엘 왕국과 같은 지역의 양식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2. 대대적인 도시 요새화각각 8톤이 나가는 암석을 사용하여 건축되었다. 

3. 2개의 성문오늘 날까지 이스라엘이나 유다에서 2개의 성문이 있는 철기시대 도시가 발견된 사례가 없다. 

4. 각 성문 가까이 성문 광장을 위한 개방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C 지역에서는 세 개의 포곽벽과 병렬되게 오픈되어 있었고, D 지역에서는 네 개의 포곽벽과 병렬로 공간이 확보되어 있었다. 

5. 이 도시의 주택들은 다닥다닥 붙어 있는 형태로 건축되었다. 

6. 500개의 단지(jar) 손잡이에서 손가락 한 개의 지문이일부에서는 두 개 또는 세 개 손가락의 지문이 발견되었다단지 손잡이는 유대 왕국의 독특한 양식이며이러한 모양은 Iron Age IIA 시기에 이미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7. 대량의 청동기구와 철기구들이 발견되었다철기구들에는 검 3자루단검 약 20자루창촉2화살촉 다수가청동기에는 도끼 한 자루다수의 화살촉 및 반지작은 사발 한 개가 포함되어 있다. 

8. 무역을 통해서 수입된 물품해안 평야 지역으로부터 수입된 아슈도드(Ashdod) 물품들이 그 지역에서 발견되었다현무암으로 만든 그릇들이 100km 이상 떨어진 곳에서 수입되었으며사이프러스 산 점토 물병(clay juglet, 물을 차갑게 보관하기 위한 병)들과 두 개의 이집트 산 앨러베스터 그릇(alabaster vessels)들이 발견되었다. 

키르벳 케이야파는 비교적 작은 유대의 외곽지역의 요새였다유적 발굴단이 내린 결론은 다음의 증거를 볼 때 축소지향적 연대기는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키르벳 케이야파의 발굴은 기원전 11세기 말에 이미 유대에 도시 사회가 존재했음을 명확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유대 왕국이 기원전 8세기 말 또는 이후의 다른 시기에 이르러서야 발전되었다는 주장은 더 이상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우연히도 이 요새에서 보면 다윗과 골리앗이 싸웠던 엘라 계곡(Elah valley)이 보인다. 


201258일 업데이트 키르벳 케이야파에서 제사 도구들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이스라엘 외무성의 보도 자료를 통해 발표되었다두 개의 제단은 수세기 이후에 나타난 그리스 신전을 연상시키는 정밀한 건축 요소들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키르벳 케이야파에서 발견된 유물들이 나타내는 사실은 정교한 건축 양식이 다윗 왕 시기만큼이나 이른 시기에도 발전되어 있었다는 것이다그러한 건축 양식은 왕족 사회 양식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서국가 형성엘리트 집단의 구축그 지역의 사회적 수준과 도시 생활 등의 모습이 이스라엘의 초기 왕들의 시기에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이 유물들은 솔로몬 시대의 왕궁과 성전에 대한 성경 기록의 역사적 사실성과 높은 건축 기술 수준을 뒷받침해주고 있는 것이다. 

BiblePlaces.com에서 토드 보렌의 기고 글을 읽어보면이 유물들의 성경적 중요성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기다림 끝에 나온 희소식이 아닌가최소주의자(minimalists)들은 다윗 왕이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이었다 하더라도실제 도시들을 통치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부족장 정도로주장해왔다그러나 당신이 그러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사실이 밝혀질 때까지 판단을 유보했던 것은 잘한 일이 아니었을까최소주의자들을 축소시켜야 한다. [고고학적인공 유물들에 대한 팩트(fact)를 찾아내는 사람들의 의견을 최대화해야 한다왜냐하면 대개의 경우 이들이야말로 성경 기록의 역사성을 확인하고 회의론자들을 굴복시키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고고학은 일종의 지적설계 과학임을 잊지 말라이 인공 유물들을 통해서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지성과 목적을 추론할 수 있다물론 우리는 그것을 디자인한 사람들을 만난 적도 없고그들의 이름도 모르며그 작품을 존재하도록 한 모든 과정을 설명할 수도 없다추론되는 사실로부터지적설계는 과학계에서 사용하고 있는 과학적 원칙과 방법임을 보여주는데 부족함이 없다동일한 방법을 사용하여 유전 암호나 네트워크미세하게 조정된 물리법칙들과 같은 현상들에서 지적 원인을(어떤 초월적 지성이 존재함을추론할 수 있는 것이다.

 

*관련기사 : 다윗 왕이 강력한 중앙집권 통치를 했다는 증거 (2011. 8. 17. 기독일보)

다윗의 궁전이 발견되다 (2011. 9. 1. 기독일보)

다윗 시대: PAX Israel (2013. 9. 23. 크리스천투데이)

되살아나고 있는 이스라엘 수도, 예루살렘 (2018. 9. 19. CTS TV)

다윗 왕조 상징, 구조물 발견 ... "석회암 기둥머리, 이스라엘 화폐 5세켈 동전에 새겨져 있다." (2020. 10. 2.NewsJesus)


번역 - 김형중

링크 - http://crev.info/2012/04/king-david-ruled-cities-not-shepherds/

출처 - CEH, 2012.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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