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BRARY

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성경

미디어위원회
2019-10-21

사울 왕의 아들 ‘에스바알(이스보셋)’의 이름이 새겨진

 3,000년 전 도자기가 발견되었다. 

(Biblical Name Found on Pottery)

David F. Coppedge


      예루살렘 남쪽의 한 요새에서 발견된 도자기에 다윗왕의 시대에 살았던 사울 왕의 후계자의 이름과 같은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키르벳 케이야파(Khirbet Qeiyafa)에서 점점 더 많은 발굴들이 계속되면서, 그곳은 고고학적 보물 장소가 되고 있다. 그곳은 사울 왕, 다윗 왕, 솔로몬 왕의 시기에 중요한 전초 기지였음이 명확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발굴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최초 군주들이 넓은 지역의 왕국을 다스렸다는 구약성경의 기록을 지지해주고 있는 것이다. 몇 년 전만해도, 성경 비판가들은 이들 왕들이 작은 부족을 다스렸던 족장들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었다.(4/24/2012) 그러나 이제 그러한 주장은 새로운 발굴들로 인하여 기각되고 있다.


이제 최초로, 다윗왕의 경쟁자였던, 사울 왕(King Saul)의 아들과 동일한 이름인 에스바알(Esh-baal, 성경적 이름으로 이스보셋 Ish-bosheth)이 새겨져 있는 도자기 물병(pottery jug)이 발견되었다. 이 발굴은 성서고고학회(Biblical Archaeology Society) 지에 발표되었다 (2015. 6. 16. Daily Mail 참조) (Christian Today, 2015. 7. 28)

고대의 도자기에 성경에 등장하는 이름인 에스바알(Eshbaal)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이 최초로 발견되었다. 3,000년 된 큰 단지(pithos, 대형 저장 항아리)에 불타기 전 새겨져 있던 명문(inscription)이 이스라엘의 키르벳 케이야파(Khirbet Qeiyafa)에서 발견되었다. 연구자들의 연구는 미국 동양연구소(Bulletin of the American Schools of Oriental Research, BASOR) 저널에 게재되었다.

'Eshba'al Ben Beda' (man of Ba'al son of Beda 라는 의미)’라는 명문은 가나안 알파벳 철자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여졌다. 일반적으로 이스바알(또는 에스바알 = 바알의 사람)로 번역되는 이름인 'šb'l은 성경에서 알려져 있다. 사울의 아들로서, 다윗왕의 경쟁자였던 에스바알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다. (역대상 8:33, 사무엘하 2~4장, 이 왕은 이스보셋이라 불렸다). 그러나 Beda라는 이름은 유일하게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 이름이 사울왕의 아들과 관련된 것인지,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을 의미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이 이름은 다윗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왜냐하면 다윗 이후에 바알이라는 단어는 이름에서 선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알(baal)'이라는 단어가 때때로 '주(lord)'를 의미하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지만, 사무엘하의 저자는 가나안 사람들의 신인 바알이 높임 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초기 이름에 보셋(bosheth, = shame, 수치)을 붙여 교정했을 수 있다. 따라서 이스바알(Ishbaal, 또는 Eshbaal)은 성경 사무엘하에서는 이스보셋(Ishbosheth)으로 바뀌어졌고, 요나단의 아들인 므립바알(Merib-baal, ‘바알의 대변자’라는 뜻)은 므비보셋(Mephibosheth)으로 기록되었다. (see Luke Chandler blog). ‘에스바알’이라는 원래 이름은 역대상에는 남아있다.(대상 8:33, 9:39).  


이 시대의 명문은 매우 드물다. 2008년에 그곳에서 발견된 문자가 새겨진 도자기 파편(ostracon)은 센세이션을 일으켰었다. 그것은 이제까지 이스라엘에서 발견됐던 가장 초기의 철기시대의 명문이었다. 

”이 새로운 명문은 적어도 기원전 10세기에 가나안 지역과 왕국에서 사용됐던 공식적이고 표준화된 페니키아 문자와 800년 동안 사용됐던 문자 체계 사이의 과도기적 단계를 나타내고 있다.”

방사성탄소 연대측정은 대략 BC 1020~980년으로 연대를 평가하였다. 다윗왕은 BC 1010~970년 동안 통치했다. 화재 이전에 커다란 분명한 철자들로 된 문장이 도자기에 새겨져 있었다는 사실은, 그것이 훈련된 조각가에 의한 작품임을 가리킨다. 이것은 초기 유다 왕국의 통치 범위에 대한 또 하나의 단서가 되는 것이다. 키르벳 케이야파는 다윗이 골리앗을 죽였던 엘라 계곡(Elah Valley)에 인접해 있다.


이스라엘 타임스(The Times of Israel, 2015. 6. 16) 지는 이 발견을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발견”이라고 불렀다. 또한 Israel National News(2015. 6. 16)를 참조하라. Live Science(2015. 6. 16) 지의 기사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었다 :

”5년 전까지만 해도, 기원전 10세기 유다 왕국의 명문(inscriptions)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네 개의 명문이 보고되었다. 두 개는 키르벳 케이야파에서, 하나는 예루살렘에서, 하나는 벳세메스(Bet Shemesh)에서 보고되었다.” 가핑클(Garfinkel)과 가노르(Ganor)는 IAA에서 말했다. ”이것은 유다 왕국의 문자 분포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완전히 변경하는 것이고, 저작(writing) 활동이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다는 것이 이제 분명해졌다.”


성경 고고학에 관한 또 다른 뉴스들

오늘날 예루살렘 남쪽 벽 외곽인 다윗성(City of David)에서, 에일랏 마자르(Eilat Mazar)는 발굴을 계속해오고 있다. 그녀는 이제 솔로몬의 궁전 벽(Solomon’s palace wall)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Israel Video Network는 CBN의 한 비디오를 게재했는데, 거기에서 마자르는 페니키아식 문양, 조각된 상아 장식품 및 왕실 물개 등으로 장식되어있는 커다란 벽을 발견했는데, 이것은 솔로몬의 통치를 가리킨다고 믿고 있었다.  

북쪽으로 키르벳 엘 마카티르(Khirbet el-Maqatir)에서 발굴자들은 또 다른 저수조(cistern)를 발견했다. 그 장소는 여호수아에 의해서 점령당했던 성경의 아이 성(fort of Ai)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스콧 스트리플링(Scott Stripling)의 비디오는 그 발견을 보여주고 있다.

창조 지(Creation Magazine)의 이번 호 이슈에서는 다니엘 서에 언급된 벨사살(Belshazzar) 왕의 정체성과 역할에 관한 혼란을 명확하게 해주고 있었다.

Bible Places Blog는 성서 고고학에 대한 최신의 발견들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웹 사이트이다. 또 다른 뉴스 웹사이트는 Bible History Daily 이다. 페이스북 사용자들도 성경 고고학 그룹(Bible Archaeology group)에 가입하여 대화에 참여할 수 있다.



성경은 결국 승리한다. 그렇지 않은가? 1세기 이상 전에 로버트 앤더슨(Robert Anderson)은 ‘비평가들의 굴속의 다니엘(Daniel in the Critics’ Den)‘ 이라는 책을 썼었다.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던 주님이 지금도 비평가들의 입을 다물게 하고 계신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crev.info/2015/06/ishbosheth/ 

출처 - CEH, 2015. 6. 17.

미디어위원회
2019-10-17

여호수아의 아이성에 대한 새로운 고고학적 발굴. 

: 또 다시 확인된 성경 기록의 정확성.

 (Getting Archaeology Right at Ai)

Henry Smith 


      수십 년간 세속적 고고학자들은 여호수아의 아이(Ai) 성 전투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부정해왔다. (아이성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어왔던) 엣 텔(et-Tell)의 지형은 성경 기록과 비슷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잘못된 장소를 보고 있었다면, 이 논의는 어떻게 될까?


여호수아의 여리고 정복 사건은 구약을 통틀어서 가장 흥미진진한 인기 있는 이야기 중 하나이다.(여호수아 6장). 그 사건 후 몇 주 후에 일어났던 아이성 전투는 그에 비해 덜 알려져 있으며, 종종 간과되어왔다. 하지만 여호수아 7~8장에 나오는 가나안의 요새(혹은 도시)인 아이성 점령 사건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인도하셨던 역사에서 엄청난 중요성을 가진다.[1]

성경에 등장하는 다른 놀라운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이 사건 역시 역사적 정확성의 측면에서 비판받아왔다. 다행히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기록은 우리로 하여금 고고학적 증거들을 재평가해볼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한다.



이스라엘 진영에서의 죄

여리고에서 승리한 이후 아간은 온전히 바쳐야할 물건들 중 일부를 몰래 가져간다.(수 7:1 NIV)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아간의 어리석은 죄 때문에, 이스라엘은 아이왕에게 크게 패하는 영적인 심판을 하나님께 받아야했다.(수 7:2~5) 아간의 죄가 발견되고 처벌되었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한 번 전투로 내보낸다. 그리고 이번에는 크게 승리한다.

성경은 그 지역에 대해서, 그리고 여호수아가 사용했던 전술에 대해서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성경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은 성경을 오류가 없는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이 사건들의 역사성을 거부하며, 증거들을 해석하는 출발점으로 성경 기록을 사용하지 않는다.  

수년 간 고고학자들은 '엣 텔(et-Tell)'이라는 지역을 발굴해왔고, 그곳이 바로 아이성이 있던 곳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그 지역의 증거들이 성경과 일치하지 않자, 성경의 기록이 틀렸다고 결론을 내렸다.[2] 다음의 주장은 꽤 보편적인 주장이다 : ”고고학은 여호수아 7~8장에 기록된 아이성의 점령에 대한 기록이 역사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것임을 입증했다.”[3]


다른 관점

성경의 기록을 확증하는 고고학적 발견

.여호수아 7~8장에 나오는 고대 도시 아이로 생각되고 있는 마카티르(Maqtir).

.여호수아의 군대가 머물렀던 아이의 북쪽 골짜기가 지금은 제벨 아부 암마르(Jebel Abu Ammar)라 불린다. 앞쪽에 아이의 성문이 있다.

.문에 사용됐던 소켓 돌(socket stones)

(좌) 마카티르에서 발견된 도자기는 여호수아의 시대로 연대가 평가되었다.
(우) 매장용 항아리(burial jar) 속에 들어있는 갓난아이의 유골은 성경의 기록처럼 그 장소에 여자도 있었음을 가리키고 있다.


과학자들이 성경과 모순되는 증거를 발견했다고 주장할 때마다, 당신은 한 가지를 확신해도 된다. 그것은 성경에는 오류가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는 것이다. 항상 대안적인 해석이 존재한다. 이 경우에도, 그들은 그저 잘못된 장소를 발굴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수년간의 신중한 고고학적, 성경적, 그리고 역사적 조사 끝에 성경연구회(ABR, Associates for Biblical Research)는 이들 과학자들이 실제로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음을 발견했다.

브라이언트 우드(Bryant Wood) 박사의 지휘아래 ABR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9마일 (14.5km) 떨어진 키르벳 엘-마카티르(Khirbet el-Maqatir)라는 대안적 장소를 발견했다.[4] 그곳의 지리는 성경의 기록과 매우 잘 맞아떨어졌으며, 이에 ABR은 1995년부터 고고학적 발굴을 시작했다.

여호수아 7~8장은 많은 자세한 사항들을 기록해놓고 있었고, ABR은 그것들 중 많은 것들을 입증할 수 있었다. 열 시즌 이상의 발굴 후에[6], 그들은 잃어버린 도시 아이를 발견했다는 설득력 있는 이유들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들은 성경 기록을 확증하는 증거들을 발견했다고 믿었다. 키르벳 엘-마카티르는 성경 본문이 요구하는 모든 사항들에 부합하고 있었다. 다음은 그 이유들이다 :


1. 아이의 언덕 북쪽

여호수아의 군대는 아이 북쪽에 진을 쳤다. ”그와 함께 한 군사가 다 올라가서 그 성읍 앞에 가까이 이르러 아이 북쪽에 진 치니 그와 아이 사이에는 한 골짜기가 있더라 그가 약 오천 명을 택하여 성읍 서쪽 벧엘과 아이 사이에 매복시키니 이와 같이 성읍 북쪽에는 온 군대가 있고 성읍 서쪽에는 복병이 있었더라 여호수아가 그 밤에 골짜기 가운데로 들어가니” (수 8:11~13). 그 장소 북쪽에는 제벨 아부 암마르(Jebel Abu Ammar)라는 언덕이 있다. 그것은 지역에서 가장 높은 언덕이며, 군사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매우 훌륭한 전술적 위치를 제공한다.


2. 북쪽을 향한 요새의 정문

여호수아가 그의 군대와 함께 아이에 도착했을 때, 그는 아이 앞에, 그 북쪽에 진을 쳤다.(수 8:11). 그 도시의 '앞”은 성문이 있는 벽이었을 것이다. 1995년에 ABR은 도시의 북쪽에서 성문의 흔적을 발견했고, 그것은 이곳이 아이였다는 매우 중요한 요구사항을 충족시켰던 것이다. ABR 팀은 또한 문설주를 이루었던 소켓 돌(socket stones)도 발견했다.


3. 매복부대가 숨을만한 곳

여호수아 7~8장을 잘 읽어보면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군대를 나누라고 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수 8:2). 여호수아는 이에 순종하여 서쪽에 매복부대를 준비시킨다.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매복할 곳으로 가서 아이 서쪽 벧엘과 아이 사이에 매복하였고... 그가 약 오천 명을 택하여 성읍 서쪽 벧엘과 아이 사이에 매복시키니”(수 8:9,12). 따라서 아이는 매복하여 공격을 준비하되 눈에 띄지 않을만한 곳을 갖추고 있어야만 한다. 마카티르의 서쪽에는 '와디 쉬반(Wadi Sheban)'이라는 매우 깊은 골짜기가 있다.[7] 그 골짜기는 아이에서 가까울 뿐만 아니라, 여호수아의 매복부대가 쉽게 숨을 수 있을 만큼 깊다.


4. 고고학적 증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15세기 말경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아이는 이미 점령되어 있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비슷한 시기로 추정되는 도자기를 발견하는 것이다. ABR은 여호수아 시대와 같은 시기로 추정되는 저장 항아리, 항아리 가장자리, 물매 돌(sling stones), 그리고 다른 유물들을 발굴했다.[8] 도시의 서쪽 벽은 드러났고, 4m(12 feet) 두께였다. 벽의 규모와 스타일, 그리고 벽 가까이 있던 도자기들은 여호수아 시대와 일치했다.


5. 아이에서의 여자

군사적 요새에 여자들이 사는 것이 정상적이지 않았음에도, 여호수아 8:25절은 여자들이 거기에 살았음을 보여준다. ”그 날에 엎드러진 아이 사람들은 남녀가 모두 만 이천 명이라”(수 8:25). 2009년에 우리 팀은 성문 근처에서 갓난아기의 유골을 발견했다. 그 아이는 거의 태어나자마자 죽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그녀는 항아리에 넣어졌는데, 이는 의식적인 매장행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항아리는 여호수아의 정복 직전의 시대로 연대가 평가되었고, 이것은 아이에 여성들이 있었음을 확인해주는 것이었다.


6. 화재의 증거

여호수아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의 세 도시인 하솔(Hazor), 여리고(Jericho), 아이(Ai)를 불태웠음을 기록하고 있다.[9]  ”...복병이 그들의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 성읍으로 달려 들어가서 점령하고 곧 성읍에 불을 놓았더라 아이 사람이 뒤를 돌아본즉 그 성읍에 연기가 하늘에 닿은 것이 보이니...”(수 8:19~20). 마카티르에서, 우리는 불에 의한 재 층, 가열된(소성) 암반, 불에 탄 돌, 불에 다시 탄 도자기 등과 같은 화재에 대한 증거를 발견했다. 그 시대의 도자기(pottery)는 일반적으로 가마에서 구워졌다. 도자기가 두 번째로 (도시에 화재가 발생했던 것과 같은) 강한 열에 노출되면, 도자기는 콘크리트처럼 극도로 단단해진다. ABR 팀은 그 장소에서 여호수아 시기의 재가열 된 도자기들을 대량으로 발견했다.


7. 기념비로서 세워진 수도원?

비잔틴(ca. AD 324-640) 사람들은 성경의 사건들이 일어났던 곳으로 자신들이 믿고 있는 장소에 교회와 수도원을 세우는 것으로 유명하다. 마카티르의 언덕 정상에는, 여호수아 7~8장의 중요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졌을 가능성이 높은 비잔틴 수도원이 있다.[10]


8. 기타 증거들

성경은 아이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들에 대해 기타 여러 가지 요구사항들을 제시하고 있다. 도시는 (1)기브온보다 작았으며(수 10:2), (2)벧아웬 곁에 있었고(수 7:2), (3)벧엘의 동쪽이었고(수 7:2), (4)벧엘 곁이었고(수 12:9), (5)오늘날까지 황폐해있었고(수 8:28), (6)아이의 북쪽에 얕은 골짜기가 있었고, 아이의 왕이 여호수아와 그의 백성들의 이동을 관측할 수 있었다.(수 8:13~14). 이러한 기준들은 기타 아이의 후보가 될 법한 곳들을 심히 제한하는 것으로, 그곳이 강력한 후보지임을 가리킨다.[11]


이런 흥분되는 지리학적, 고고학적 발견들은 신실한 크리스천들이 이미 알고 있던 것, 즉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기록된 모든 것들이 신뢰할만한 것이라는 사실을 확증해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로, 우리로 하여금 고대의 유적들을 발견하게 하시고, 성경의 말씀이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정확 무오한 계시의 말씀임을 확인하도록 허락하신 것을 찬양한다.

ABR은 주님의 뜻대로 더 많은 증거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마카티르에서 매년 발굴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봉사자들이 발굴에 참여해준다면, 환영할 것이다. 그리고 어떠한 발굴 경험이 없어도 참여하실 수 있다. 웹사이트 www.Maqatir.com를 방문하셔서 더 자세한 정보를 얻으시고, 이스라엘에서 인생의 한번 뿐인 경험을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란다.



Footnotes
1.English Bibles call Ai a 'city.” The English term can be misleading because of our modern usage. The Hebrew term, ‘îr, עִיר has a very wide range of meaning, so 'fortress” is applicable and fits the biblical and archaeological context well.
2.Et-Tell means 'the ruin.” This site was abandoned just before the time of Abraham and was unoccupied at the time of Joshua. It was probably the 'Ai” recorded in Genesis 12:8, so in some ways, the error itself was understandable. The transferring of the name 'Ai” to Khirbet el-Maqatir would not be an unusual scenario, as it is only 6/10 miles west of et-Tell.
3.Joseph A. Callaway, 'Was My Excavation of Ai Worthwhile?” Biblical Archaeology Review 11 (1985): 68.
4.This Arabic name is pronounced 'Kir-bit” 'El” 'Mah-Kah-Tir.” A 'khirbet” is typically a shallow site where bedrock is reached quickly during excavations. A 'tell” is usually much deeper, with many layers of occupation, such as Tell Jericho.
5.ABR’s extensive research, led by Dr. Bryant Wood, can be found at www.BibleArchaeology.org.
6.ABR dug at Maqatir from 1995–2000 but because of political turmoil in Israel was unable to return again until 2009.
7.A wadi is a dried-up channel or valley where a river or stream once ran.
8.Extensive analysis of the pottery found at Maqatir is found in: Bryant G. Wood, 'The Search for Joshua’s Ai” in Critical Issues in Early Israelite History, eds. Richard S. Hess, Gerald A. Klingbeil, and Paul J. Ray, Jr. (Winona Lake, Indiana: Eisenbrauns, 2008), pp. 205–240.
9.Archaeological excavations at Hazor (Joshua 11:10–11) and Jericho (Joshua 6:21–24) have revealed evidence for massive destructions by fire, both of which can be dated to the time of Joshua. Douglas Petrovich, 'The Dating of Hazor’s Destruction in Joshua 11 via Biblical, Archaeological, and Epigraphical Evidence,” Journal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51.3 (Sept. 2008): 489–512. Bryant G. Wood, 'Did the Israelites Conquer Jericho? A New Look at the Archaeological Evidence,” Biblical Archaeology Review 16.2 (March/April 1990): 44–58.
10.The monastery may instead commemorate Genesis 12:8, but we cannot be certain. 'From there [Abraham] moved to the hill country on the east of Bethel and pitched his tent, with Bethel on the west and Ai on the east. And there he built an altar to the Lord and called upon the name of the Lord” (ESV). The 'Ai” of Abraham’s day was probably et-Tell, as noted in footnote 2.
11.For extensive details, see http://www.biblearchaeology.org/file.axd?file=The+Search+for+Joshuas+Ai.pdf

*Henry B. Smith Jr. earned his MA degree in theology with an emphasis on apologetics from Trinity Seminary in Indiana. He is the Director of Development for the Associates for Biblical Research and is currently enrolled in the MAR program at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관련기사 : 벧엘과 아이 (2013. 8. 15. 쿠키뉴스)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7466532&cp=nv


번역 - 최형원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8/n3/getting-archaeology-right-at-ai 

출처 - Answers, 2013. 6. 16.

미디어위원회
2019-09-16

바빌로니아 점토판에 성경 속 인물이 언급되어 있었다. 

: 느부갓네살 왕의 환관장 살스김의 이름이 새겨진 점토판의 발견 

(Archaeology : Babylonian Clay Tablet Mentions Biblical Name)

David F. Coppedge


      예레미야(Jeremiah)는 환관장 살스김(Nebo-Sarsekim)과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왕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빌로니아의 기자도 그렇게 언급하고 있었다. The Times(2007. 7. 11) 지는 ”대영박물관(British Museum)은 어제 소장하고 있던 한 점토판(clay tablet)에서 성경적 고고학의 커다란 발전을 가져올 한 발견을 하였는데, 이것은 구약 성경의 정확성에 대한 극적인 증거(dramatic proof of the accuracy of the Old Testament)가 되고 있다.”라고 보도하였다. Telegraph(2007. 7. 11) 지는 그것을 ”환상적이며, 세계적인 발견(a fantastic discovery, world-class find)”으로 불렀다. 그리고 사진과 작은 점토판의 전체 번역문을 게재하고 있었다. 


바벨론의 위대한 왕 느부갓네살은 성경 외의 기록에서도 알려져 왔다. 그러나 환관장 살스김은 아직까지 알려져 있지 않았었다. 그는 예레미야 39:3절에서, 바벨론에 의해 BC 586년 예루살렘성이 함락될 때에 느부갓네살의 각료 중 한 사람으로 언급되어져 있었다. 예레미야는 그 사건의 목격자였다. 이제 같은 이름이 시파르(Sippar, 바그다드에서 1.6km 떨어진 장소)에서 발굴된 한 점토판에서 해독되어졌던 것이다. 그곳은 바벨론 사람들의 거대한 태양 사원(sun temple)이 있던 곳이다. 이 점토판은 예루살렘성이 포위되기 10년 전에(BC 595년) 수메르 설형문자(cuneiform script)로 쓰여진 것으로, 느부갓네살 왕의 환관장인 살스김이 바벨론 사원에 금을 기부했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대영박물관은 이 작은 점토판을 1920년에 소장하게 되었지만, 그것은 지금까지 번역되지 못했었다. 설형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학자들 중 한 사람인 오스트리아 비엔나 대학의 미카엘 유르사(Michael Jursa) 박사는 대영박물관을 연구 여행 중에 점토판들을 번역하다가 이러한 발견을 하게 되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 바벨론 사원에 일상적인 기부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정확한 날짜와 함께 기록하고 있는 이러한 점토판을 발견한 것은 매우 놀랄만한 일입니다” 그가 말했다. 대영박물관의 어빙 핀켈(Irving Finkel)은 덧붙였다. ”만약 살스김이 실제로 존재하였다면, 구약성경에 기록된 다른 작은 인물들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겠는가? 구약성경에 가볍게 기록된 세부적인 사항들도 정확한 사실임이 밝혀진 것이다. 나는 이것이 예레미야서 전체 기록에 대한 새로운 종류의 강력한 신뢰성을 부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는 토드 보렌(Todd Bolen)의 Bible Places 블로그에서도 발견된다. 보렌은 성경 외의 출처에서 기록된 성경 인물들에 대한 목록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이제 그는 또 하나의 인물을 추가할 수 있게 되었다.



토드 보렌은 타임지가 ”성경의 이야기는 모두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라는 한 학자의 말을 인용한 것을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다. 성경의 이야기는 조금도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고 그는 반박했다. 증거가 점점 더 발견되면 될수록, 자유주의적 회의론자들의 비판은 점점 더 근거를 잃어가고 있다. 지금은 예레미야서를 다시 읽어볼 좋은 시점인 것 같다.

구약성경의 이야기는 역사(history)라는 느낌을 주고 있다. 확실히 거기에는 모험, 음모, 관계, 업적, 영웅들, 악인들에 관한 위대한 이야기들이 있다. 그것은 꾸며서 만들어진 이야기들이 아니다. 등장하는 상세한 내용(이름들, 장소들, 날짜들, 사건들...)들의 양은 꾸며낸 이야기에서 예상되는 것보다 훨씬 많고 방대하다. 기록된 세부적 사항들은 실제 일어났던 진정한 사실들을 나타내고 있다. (예를 들어, 역대상에 기록된 다윗의 고관들, 제사장들, 관련인물들의 목록을 보라). 어떠한 독자도 이것을 꾸며낸 것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공식적인 문서로 보이며 그렇게 생각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이름들은 이집트, 모압, 바벨론, 이스라엘의 비문(inscriptions)들에서 기록되어 있음이 밝혀져 왔다. 고려해야할 또 하나의 흥미로운 점은 성경은 영웅들의 모든 인간적인 약점들까지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외의 다른 왕국들의 비문들은 대부분 그들의 승리를 과장하고, 그들의 낭패를 지워버리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다. 심지어 다윗과 솔로몬의 범죄와 모든 추함까지도, 그들의 승리와 위대함 바로 다음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기록의 상세함과 고고학적 증거들을 고려해볼 때, 이것은 고대의 기록에서는 전례가 없는 것이다    

박물관 구석의 먼지 속에 놓여있던 한 점토판에 관한 오늘의 이 뉴스는, 성경이 실제 사람들과 실제 사건들에 대한 실제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어떠한 고대의 경전도 이와 같은 내부적 외부적으로 확인된 증거들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스라엘과 주변 왕국들은 수없이 약탈되고 파괴되었다. 따라서 증거들은 흩어졌고, 단편적이라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사해사본(Dead Sea Scrolls), 시내사본(Codex Sinaiticus), 모압석비(Moabite Stone, 금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되어 유목민들에 의해 거의 파괴됨) 등과 같은 뜻하지 않은 발견들을 생각해보라. 많은 유물들이 먼지 속에 숨겨져 있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을 믿는 정직한 탐구자들에게 이것은 강한 신뢰성을 주기에 충분하다.


성경 고고학에 대한 또 다른 연구인, 알란 밀라드(Alan Millard) 박사의 솔로몬 왕(King Solomon)의 부에 관한 역사적 고고학적 사례에 관한 리뷰 글들을 읽어보라.(02/09/2007, 08/09/2005). 솔로몬은 예레미아 보다 360년 이전에 살았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갈수록, 더 많은 증거의 조각들이 발견되고 있다. 그런데 왜 성경은 우선적인 증거로서 간주되어지지 않는가? 성경의 기록은 시대들과 맞아 떨어지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리적 증거들과도 일치한다. 밀라드는 비판가들의 주장들이 왜 학술적인 것이 아니라, 편견에 의한 것인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성경 고고학에 대해 일반인들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 좋은 개관 글은 랜달 프라이스(Randall Price)의 ”돌들이 소리 지르고 있다(The Stones Cry Out1997)”이다. (참조. 누가복음 19:40). 성경을 확증하는 흥미로운 많은 유물들이 지난 10년 동안에 새롭게 발굴되어지고 있다. 고고학적 조각들은 완벽히 맞아 떨어지고 있고, 이제 성경비판가를 긴 침묵에 빠져들고 있다. 아직도 대영박물관의 어두운 선반 위에는 번역되지 않은 130,000 개의 점토판들이 더 많은 발견들을 위해 기다리고 있다.



*참조 : 예레미야의 인물, 대영박물관 소장품에서 발견 (2007. 7. 13. 크리스천투데이)
http://www.chtoday.co.kr/view.htm?id=186444

Tablet Is 'Proof' for Jeremiah Passage (2007. 7. 12. Christianity Today) 

https://www.christianitytoday.com/ct/2007/julyweb-only/128-41.0.html#other

New archaeological find affirms Old Testament historicity : A clay tablet with details of one of Nebuchadnezzar’s court officials supports the historicity of the book of Jeremiah.  

http://www.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5255

Evidentialism–the Bible and Assyrian chronology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1802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crev.info/2007/07/archaeology_babylonian_clay_tablet_mentions_biblical_name/

출처 - CEH, 2007. 7. 11.

미디어위원회
2019-09-16

성경 속 이름의 인장이 예루살렘에서 발견되었다. 

: 느헤미야에 기록된 데마의 인장은 성경의 고고학적 정확성을 입증하였다.

 (Bible Name Found on Jerusalem Artifact)

David F. Coppedge


      예루살렘에서 발견된 돌 인장(stone seal)에 구약 성경 속에 언급된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성경의 고고학적 정확성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발견이 되고 있다.


예루살렘 포스트(Jerusalem Post, 2008. 1. 17. 클릭하면 인장의 사진을 볼 수 있다) 지에 의하면, 고고학자 에일랏 마자르(Eilat Mazar) 박사가 이끄는 발굴 팀은(그녀는 느헤미야의 성벽 발굴도 이끌었다.), 예루살렘의 성전산(Temple Mount) 남쪽 구시가(Old City)의 오물성문(Dung Gate) 근처 성벽 바로 바깥쪽에서 '데마(Temech)”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검은 색의 돌 인장(2.1×1.8cm)을 발굴하였는데, 그 인장은 BC 538-445 년 사이의 것으로 연대가 평가되었다는 것이다. 데마라는 이름은 특별히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갔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제1성전(First Temple, 솔로몬의 성전)의 재건에 참여 했던 가계들 중 하나로서, 구약 성경 느헤미야서(느헤미야 7:55, 에스라 2:53)에 언급되어 있다. 데마의 가계는 BC 586년에 바벨론(바빌로니아)으로 끌려갔고, 느헤미야와 에스라서에 기록된 것과 같이 후에 귀환하게 되었다. 그의 인장은 바벨론에서 구입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져왔을 수 있다. 또한 Bible Places(2008. 1. 17)의 블로그에도 이 발견이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인장에는 바빌로니아 종교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는 ‘이교적 장면(cultic scene)’이 새겨져 있었다. 인장에는 두 명의 턱수염을 기른 사제들이 향을 피우는 제단 앞에 서서, 바빌로니아의 주요 신인 ‘신(Sin)’의 상징물 초승달(crescent moon, 인장 가장 위쪽에 새겨져 있음)에 경배하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데마(Temech)”라는 이름은 아래쪽에 새겨져 있었는데, 이것은 어느 정도 바빌로니아 종교와 혼합되었음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의 신이 문양으로 새겨져 있는 인장을 자신의 인장으로 사용하는 것을 꺼려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고 마자르는 그 기사에서 말했다. 우리는 에스라와 느헤미야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교도의 문화와 생활습관에서 돌이키도록 여러 번 질책 받았음을 알고 있다.


마자르는 발견의 중요성을 논평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데마 가계의 인장은 고고학과 성경 기록 사이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성경에 언급된 가계들이 실제로 존재했었음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고고학적 발견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성경 기록의 신뢰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고고학적 발견에 뒤이은 발견들은 성경의 역사적 기록들이 정확하며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성경 기록이 고고학적 발견들과 모순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단 하나의 발견이 아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발견이 주는 또 하나의 교훈이 있다. 시대마다 그 시대의 유행하는 우상들을 제거해버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미래의 역사학자들이 2008년 교회의 모습들에서 어떠한 혼합된 모습들을 발견할지 궁금하다. 당신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물건들에서 우상의 상징물들은 없는가? 팝스타, 해리 포터, 외계인, 다른 비기독교적 상징물들이 당신의 액세서리나 소장품들에 새겨져 있지는 않은가? 이러한 것들이 미래의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발굴된다면, 그들은 무엇이라고 말할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바빌로니아의 초승달 신이 오늘날에는 다윈(Darwin)이라는 것이다.

 


*참조 : 성경 속 인물들의 인장에 관한 이야기들은 다음을 참조하세요.

Seal Controversy: From Temech to Shlomit (2008. 1. 30. Biblical Archaeology Review)

https://www.biblicalarchaeology.org/scholars-study/seal-controversy-from-temech-to-shlomit/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s://crev.info/2008/01/bible_name_found_on_jerusalem_artifact/

          https://answersingenesis.org/archaeology/old-testament-evidence-on-jerusalem-seal/

출처 - CEH, 2008. 1. 17.

미디어위원회
2019-09-16

제1성전 시대의 저수조가 예루살렘에서 발견되었다. 

(Jerusalem Cistern Found from First Temple Era)

by David F. Coppedge


       예루살렘의 성전 산(Temple Mount) 근처에서 한 거대한 저수조(cistern)가 솔로몬 성전 단지(Solomon’s Temple complex)의 일부로써 발견되었다.

한 발굴팀은 다윗의 도시(City of David)로부터 성전산으로 통과하는 거리(cardo, street)를 발굴하는 동안, 거대한 저수조를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가 탐사할 수 있었다. 이 저수조의 연대는 새겨져 있는 비문과 사용된 석고의 유형에 기초하여 솔로몬 시대로 평가되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제사장들과 참배객들이 성전에서 필요한 다량의 물을 어디서 얻을 수 있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 발견은 Jerusalem Post (2012. 9. 6) 지에서 보도되었다. 짧은 YouTube 동영상은 거대한 물 저장고 내부로 들어가는 탐사자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Live Science 지와 Bible Places Blog도 그 발견을 보도하고 있었다.


이 발견은 물의 조달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역사가들은 예루살렘의 유일한 물 공급처는 성전으로부터 약 800m 떨어진 곳에 있는 기혼샘(Gihon Spring)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물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많은 수의 당나귀를 이용한 힘든 운반이 요구된다. 비가 올 때 성전에 인접한 티로포에온 골짜기(Tyropoean Valley)에 흐르는 물을 가두어 저장함으로써, 이 저수조는 제사장들이 희생제사를 드릴 때에 사용되는 많은 양의 물과, 그리고 절기에 성전을 방문하는 많은 참배객들이 마시는 물을 공급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전쟁에서 포위되었을 동안 도시를 보호해줄 수도 있었다.         


발견자들 중 한 사람은 그 발견에 대해 황홀해했다. ”예루살렘에 이와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우리가 제1성전 시대에 예루살렘에서 한 거대한 저수조와 그 옆에 작은 두 개의 저수조를 만난 것은 처음입니다. 19세기 이후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지역을 발굴해왔지만, 이와 같은 것은 결코 발견한 적이 없었습니다.”



고고학은 일종의 지적설계 과학이다. 발굴자들은 지성(intelligence)의 흔적, 즉 유물, 비문, 또는 의도적인 특징을 갖고 있는 기타 유물들을 찾고 있다. 지적 존재는 어떤 목적을 위해서 자연 물질들을 조직하고 사용할 수 있다. 우리는 고고학에서 그것을 보고 있다. 우리는 살아있는 세포(living cells)에서 유사한 목적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덧붙여서, 고고학자들은 예리한 관찰자이다. 그들은 단지 컴퓨터로 모델 작업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꺼내고 발굴하고 살펴보고 조사한다.


또한 이 특별한 발견은 성경의 역사에 대한 '최소주의자(minimalist)'들의 해석과는 다르게, 솔로몬 시대의 사람들은 암석을 깊이 파내어 성전에 필요한 물을 저장할 수 있을 정도로 고도로 지적이었음을 보여준다. 다윗과 솔로몬은 단순한 유목민의 족장이었다는 주장과는 거리가 멀게, 우수한 도시계획가요 건축가였다. 이 저수조와 전체 성전산 단지에 대한 계획은 실제 건축이 시작되기 오래 전에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다윗 왕은 죽기 전에 성전 건축에 필요한 많은 물품들(돌, 철, 놋, 백향목... 등)을 준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역대상 22장). 이 저수조는 그들의 공학적 기술 수준과, 성경 기록의 역사적 정확성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증거판인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 :

The Forgotten Discovery: A First Temple Era Water Cistern near the Temple Mount in Jerusalem (2019. 8. 8. Jerusalem Center for Public Affairs) 

https://jcpa.org/the-forgotten-discovery-a-secret-water-cistern-from-the-first-temple-era-at-the-foot-of-the-temple-mount/

Cistern dated to First Temple period found in Jerusalem (2012. 9. 6. The Times of Israel)

https://www.timesofisrael.com/cistern-dated-to-first-temple-period-discovered-in-jerusalem/

Discovery of the First Temple Cistern (youtube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6xlFWIqXDgQ


*관련기사 : 예루살렘서 3000년 전 ‘고대 저수지’ 발견 (2012. 9. 11. 나우뉴스)
http://nownews.seoul.co.kr/news/newsView.php?id=20120911601003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crev.info/2012/09/jerusalem-cistern-found-from-first-temple-era/ 

출처 - CEH, 2012. 9. 10.

미디어위원회
2018-03-29

인도의 가장 오래된 언어는 단지 4500년 되었다. 

(Oldest Language in India Only 4,500 Years Old)

David F. Coppedge 


     현대 인류가 185,000년 전 아프리카를 떠났다면, 왜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언어는 그 시간의 97%가 지난 시점인 4500년 전이 되어서야 시작됐는가?

인간의 언어(human language) 중에서 가장 오래된 언어는 얼마의 나이를 갖고 있을까? 그것은 말하기 힘들다. 맥스 플랑크 연구소(Max Planck Institute. 2018. 3. 21)의 과학자들은 언어 분석과 통계 기법을 사용해서, 인도 남부의 드라비다어족(Dravidian family of languages)의 언어가 시작된 연대를 4,500년 전으로 추정했다. Phys.org(2018. 3. 20) 지는 인도아리아족이 인도에 도착하기 1000년 전에, 드라비다인(Dravidians)이 존재했었다고 보고하고 있었다. 고대의 어족(language family)에서 파생된 80개의 지방어(dialects)들은 오늘날에도 인도에서 약 2억2천만 명의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다.

”드라비다어(Dravidian language)에 대한 연구는 유라시아(Eurasia)의 선사시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그 언어는 다른 언어 그룹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맥스 플랑크 인류과학 연구소의 Annemarie Verkerk는 설명한다. 드라비다어의 지리적 기원이나, 정확하게 언제 확산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연구 공동체의 합의된 의견은 드라비다인들은 인도 대륙의 원주민이며, 인도에 약 3,500년 전 인도아리아족(Indo-Aryans, 인도-유럽어를 사용)이 도착하기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는 것이다. 드라비다어가 서구에 오늘날보다 훨씬 더 널리 퍼졌을 가능성이 있다.

언어의 시작에 대한 평가는 이전의 생각보다 더 내려가고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4500년을 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연구자들은 발전된 통계적 기법을 사용하여, 약 4,000~4,500년 경의 드라비다어족의 하위 그룹들과 연대를 추정했다. 이 추정은 이전 언어학 연구들이 제안했던 것과 일치하지만, 보다 강력한 결과를 보여준다. 왜냐하면 이 연구에서 시험됐던 진화의 여러 통계적 모델들과 일치되는 것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연대는 정확하게 이 시기에 북부, 중부, 남부로 갈라졌던 드라비다인의 분산을 추정하는 고고학적 추론과, 고고학적 기록에서 분명히 드러난 문화적 발전의 시작과 잘 일치한다.

Royal Society Open Science(2018. 3. 21) 지에 발표된 이 논문은 6,000~6,500년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드라비다어의 기원에 대한 가장 지지되는 연대는 4,500년 전이라고 결론짓고 있었다. 이 새로운 연대는 이전 추정치인 6,000년, 또는 13,000년 보다 젊다. 어느 경우이든, 이 어족의 시작 연대는 현생인류가 아시아에 존재해왔었다는 진화론적 추정 연대보다 훨씬 젊다.


BBC News(2018. 1. 25)는 우리 종(Homo sapiens)이 생각보다 일찍 아프리카를 떠났다고 지난 1월에 말했었다. 팔랍 고쉬(Pallab Ghosh)는 이렇게 썼었다 :

이스라엘에서 발견된 새로운 화석 연대측정 결과, 우리 종(Homo sapiens)은 이전 증거보다 약 8만 년 더 초기인, 185,000년 전에 아프리카를 떠나 살고 있었다...

텔아비브 대학(Tel Aviv University)의 연구자는 설명했다 : ”우리 자신의 종뿐만 아니라, 그 당시 아프리카 밖에 살았던 다른 모든 종들을 포함해서, 인간 진화론에 관한 모든 이야기들을 다시 써야한다.”

이 연구에 참여하지 않았던, 런던 자연사박물관의 크리스 스트링거(Chris Stringer) 교수는 ”이 발견은 아프리카 밖에서 현생인류에 대한 오랫동안 확립된 130,000년의 한계를 깨뜨렸다...”고 말했다.

사실 연구자들은 현생인류의 더 오래된 화석도 아시아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이 기사는 인간이 이주한 연대를 25만 년 전, 또는 그 이상으로 끌어내리고 있다. 고쉬는 모로코에서 발견됐던 현생인류 화석은 315,000년 전의 것이었음을 독자들에게 상기시켜주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었다 :

이 연대는 195,000년 전으로 추정하는 에디오피아의 오모 유골(Omo remains)과 같은 화석과, 유전자 연구에 기초하여, 인간 종의 기원에 대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20만 년보다 훨씬 초기의 연대이다. 그리고 미래의 발견은 이 연대를 더욱 끌어내릴 수도 있다.

분명히 이 사람들이 어떤 언어를 사용했는지는, 발견되는 뼈들을 통해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해부학적으로 우리와 동일하며, 동일한 크기의 뇌를 가졌던(네안데르탈인은 현생인류보다 뇌 크기가 더 큰 경우도 있음) 인류가 295,000 년 동안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고 가정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생각처럼 보인다. 특히 그들이 대륙을 넘어 이동할 수 있는 지능을 가지고 있었는데 말이다.

드라비다어족의 시작 연대는 진화론자들의 믿음에 극도의 위기감을 조성하고 있었다. 진화론자들은 우리와 동등한 인류가 30만 년 전에 ”진화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 후에 유럽과 아시아로 이주했다는 것이다. 또한 현생인류가 거기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네안데르탈인들과 교배하는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가장 오래된 언어 그룹 중 하나가 불과 4,500년 전에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와 동일했던 사람들이 295,000년 동안은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들은 서로 말을 할 수 없었고,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는가? 왜 그들은 도시를 건설하지 않았는가? 왜 그들은 그 오랜 시간 동굴에서 살았는가? 왜 그렇게도 늦게 첫 번째 문명이 시작되었는가?



드라비다어족의 시작 연대는 진화론적 연대에 의문을 제기한다. 진화론에 의하면, 침팬지에서 사람이 되는 데에 약 6백만 년이 필요하다. CEH가 18년 동안 보고해왔던 것처럼, 진화론자들이 주장해왔던 연대들은 끊임없이 수정되고 번복되어왔다. 새로운 발견이 있을 때마다 인간의 진화 이야기는 모두 다시 써야하는 일들이 발생하곤 했다. 이제 진화론이 잘못됐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가? 오랜 연대가 틀렸을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가? 수십 년 동안 반복적으로 실패해온 이론을 왜 우리는 계속 들어야만 하는 것인가?


성경을 믿는 사람들은 드라비다어족의 연대에 대해서 놀라지 않는다. 그러한 연대는 바벨탑에서의 인류가 분산됐던 추정 연대와 매우 유사하다. 바벨탑 사건 직후에 서로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끼리 그룹을 이루어 모든 방향으로 퍼져 나갔다는 생각은 합리적이지 않겠는가? 물론 그랬다. 그것은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 9~11장과 다음 12장은 성경 밖의 역사적 증거들과 매끄럽게 연결된다). 분명히 어떤 그룹의 사람들이 바벨로부터 인도 대륙으로 이주해 왔다. 그곳에서 그들은 적합한 서식지를 발견하고, 그들의 공통 언어를 사용하면서, 그 지역에서 번성하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은 더 동쪽으로 이동했고, 중국에 도착했고, 세계의 다른 지역들로 퍼져나갔다.


언어는 자연선택이 아닌, 지적설계에 의해서 발전한다. 일단 공통 언어가 부여되면, 사람들은 특정 단어의 뜻을 결정하고, 편의를 위해 수정하거나, 새로운 상황에 맞도록 문법 규칙을 결정할 수 있다. 서식지에서 격리된 그룹들은 지방어를 개발했을 것이며, 지방어는 시간이 갈수록 차이가 벌어졌을 것이다. 그것이 몇 세기 만에 미국의 영어와 영국의 영어 사이에서 일어났던 일이었다. 오늘날 다양한 드라비다어와 지방어들은 바벨 이후 그 지역에 정착했던 원래의 집단이 있었음을 가리킨다.


물론 이것은 185,000년, 250,000년, 315,000년, 그리고 모이보이들이 추정하는 많은 진화론적 연대들이 모두 공상 소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연대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인류 역사는 단지 수천 년에 불과하다. 창조주께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다. 증거들은 그것과 일치하는 것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s://crev.info/2018/03/oldest-language-india-4500-years-old/ 

출처 - CEH, 2018. 3. 21.

미디어위원회
2018-03-09

중국 삼성퇴(싼싱두이)의 청동나무 

: 창세기를 묘사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유물?

(The Bronze Tree of Sangxingdui 

: the oldest man-made Genesis artefact?)

Stephen Brennecke 


      1986년 중국의 사천성(쓰촨성) 광한(Guanghan) 시의 한 벽돌공장 근로자들은 마을 주변에서 진흙들을 파내다가, 여러 청동 조각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당국에 보고했고, 청두(Chenddu)에 있는 화시(Huaxi) 대학의 고고학자들이 도착해, 고대 촉(蜀, Shu) 나라의 삼성퇴(三星堆, Sanxingdui) 사람들이 만들었던 뛰어난 유물들로 가득 차 있는 두 개의 다른 구덩이(제사 갱)들을 발굴했다. 이 고고학적 노력은 1929년에 시작되었던 초기 발굴에 뒤따르는 것이었다. 이 두 구덩이로부터 옥으로 만들어진 물건들, 청동, 금, 상아, 도자기, 대리석, 뼈를 담는 용기 등을 포함하여 거의 1,000여점의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구덩이에서 나온 유물들 중 거의 800여점은 청동(bronze)으로 만들어진 것들이었는데, 여기에는 크고 작은 사람 상들과 수십 개의 실물크기의 청동 두상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들 청동 두상들 중 일부는 부분적으로 금으로 덧붙여져 있었다. 당국자들은 이들 유물들이 2700~47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평가하였다.

또한 고고학자들은 커다란 청동 나무 조각들을 발견하였고, 이것들은 깨끗이 닦여져서 재조립되었다. 대부분의 발견들처럼, 발견된 것에 대한 논란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발굴된 유물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함축된 뜻에 대해서는 엄청난 논의가 있었다. 특별히 그 나무의 의미에 대해서 주로 불일치가 있었다.[1] 정말로 삼성퇴 발굴에 있어서, 그 유물들을 만든 사람들의 기원과 운명에 관한 것은 수십 년 동안 고고학자들과 같은 전문가들 사이에서 가장 큰 신비 중의 하나였다. 예를 들어 그들은 묻고 있다 :

”삼성퇴 유물들에 의해서 상징되어 있는 문화와 그들의 경이적인 청동 제조 기술은 어떻게 생겨나게 된 것일까?” ”삼성퇴의 수수께끼는 하나의 시대에 관한 수수께끼이다”[2]

그 해답을 푸는 데에 아마도 성경이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청동나무는 어떠한 모습인가?

청동나무(Bronze Tree)는 3.95m 크기이고, 둥근 기초 부분에서 가지 꼭대기까지의 높이는 거의 3.65m이다. (그림 1A). 이렇게 그것은 실물크기의 과일나무(fruit tree)이다. 위로부터 보면, 가지들은 가운데 나무줄기로부터 방사상으로 뻗어져 있다. 측면에서 볼 때, 가지들은 나무줄기에서 위쪽으로 자라다가 동일한 방식으로 아래쪽으로 휘어져 내려가 있다. 각 가지들 끝에는 한 과일이 달려있는데, 화려한 주조된 청동 잎으로 덮여져 있다. 놀랍게도 이들 주요 가지들에 있는 과일 근처의 잎들은 커다랗고 날카로운 칼(menacing knives) 모양으로 주조되어 있었다! (그림 1B).

그림 1. 창세기의 선악과를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삼성퇴의 청동나무(bronze tree).(‘신목 (divine tree)’으로 불리고 있다).  A.나무 전체의 모습. B.칼이 달려있는 금지된 열매(forbidden fruit)의 확대된 모습. C.두 개의 뿔이 달린 큰 뱀(serpent). D.하와의 손(Eve's hand).

                             
그 나무의 가지 아래에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가늘고, 긴, 뱀(snake)과 같은 몸을 가진 한 커다란 뱀(serpent)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림 1C). 그 뱀은 나무 아래 원형 받침 부분에 머리를 두고 있었는데, 머리를 수평으로 똑바로 쳐들고 있음으로 해서 그 등은 휘어져 있었고, 머리끝에는 두 개의 뿔이 나있었다. 뱀의 일부분은 잃어버렸다. 그러나 회복된 그 조각들은 긴 칼로 끝나있는 꼬리 같은 사지(tail-like limb)와, 사람의 손(human hand)과 함께 주조된 또 다른 짧은 부속지(short appendage)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 손은 완전한 엄지손가락, 해부학적으로 정확한 손가락 마디들, 세밀한 손톱을 가지고 있었다. (그림 1A, 1D) 마지막으로 뱀은 작은 어깨를 가지고 있었고, 서있는 곳에 앞발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글거리는 커다란 눈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나무에는 9마리의 새들이 있었고, 각 새들은 각 가지들의 꼭대기에 앉아있었다.              


창세기 선악과와의 비교

삼성퇴의 청동나무를 창세기 2, 3장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와 비교하여 보면, 너무도 많은 분명한 공통점들을 볼 수 있다.

1.삼성퇴의 청동 미술가들은 한 커다란 나무를 만들었다. 이것은 고대의 청동 유물들 중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것이다. 이 나무는 인류 타락(Fall of Man)에 대한 창세기 말씀이 떠오르도록 한다.

2. 삼성퇴 나무는 과일나무(fruit tree)이다. 한 나무를 제작하기로 결정했던 고대의 미술가들은 침엽수나 낙엽수들, 키 큰 나무와 작은 나무들, 또는 청두 평원에서 볼 수 있었던 많은 다른 형태의 나무들을 선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실물 크기의 과일나무와 실물 크기의 열매를 만들기로 선택했다. 창세기의 나무는 과일나무이다.

3. 청동나무에 달려져 있는 과일 주변의 잎들을 주조할 때, 그 여러 잎들을 긴 칼 모양으로 만든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결정을 내린 것이며, 이것은 미술적 표현으로 그 과일은 금지되어(forbidden)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이것은 두 가지의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 ”이 과일을 먹지 말라”. 그리고 ”이 과일을 먹으면 죽는다” 이다. 마찬가지로 창세기의 나무도 금지되어 있었다. 

4. 미술가들은 나무에 매우 상세하게 한 뱀을 포함시켜 놓았다. 창세기의 나무에도 한 뱀이 등장한다.

5. 뱀은 아직까지 걸어 다니는 발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과일들 중에 어느 것도 나무로부터 따먹혀지지 않았다. 창세기 3:14절에서 뱀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는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는 것이었다. 이것은 과일이 따먹혀지기 전에 뱀은 다리를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6. 뱀은 과일주변 잎들에 있는 칼 모양과 유사한 꼬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디자인되어 있다. 이것은 뱀이 과일에서처럼 치명적이고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창세기도 사망의 기원을 여자가 뱀의 유혹을 받아 금지된 과일을 먹게 됨으로서 시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7. 이 나무에는 손으로 표현되어진 한 사람이 존재한다. 그 손은 뱀의 몸체와 같이 위치하고 있다. 이것은 뱀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순간의 하와의 손(Eve's hand)이지 않을까? 그러나 아직까지 과일을 취해지지 않았다.

이러한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숙고해볼 때, 고대 미술가는 한 특별한 나무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한 특별한 순간의 상황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 순간은 창조 이후 인류 역사에게 두 번째로 가장 중요했던 시점임이 틀림없다. 삼성퇴 청동나무는 하나님 앞에서 죄가 없었던 인류의 마지막 순간을 묘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무의 가지들에서 우리는 금지된 과일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아직 인간에 의해 취해지지 않았다. 인간의 타락을 도운 뱀은 저주 이전의 상태로 그곳에 있었다. 그 뱀은 칼과 같은 꼬리를 가지고, 죽음을 가져오는 것으로 상징화되어 있다.


삼성퇴와 창세기가 관련 있다는 것의 의미      

만약 삼성퇴의 청동나무가 창세기의 선악과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가지는 논리적 의미들은 무엇일까? 그 질문에는 많은 가능성 있는 대답들이 있지만, 몇 가지만 제시해 보겠다.

삼성퇴 사람들의 기원은 세속적 학계에서는 하나의 신비로 남아있다. 따라서 삼성퇴-창세기의 연관성은 그 신비를 푸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는, 삼성퇴 문명의 시기와 창세기의 기록 시기를 비교하는 것은 중요하다. 삼성퇴 사람들은 BC 2800~800년 까지 2000여년 동안 번성해 온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2] 따라서 그 청동나무는 그 기간 동안에 만들어졌음에 틀림없다.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한 시기는 대게 BC 1450~1410년 경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3] 만약 청동나무가 모세의 기록 이전에 만들어져서(이럴 가능성이 큼), 모세의 기록과는 독립된 것이라면(이것은 거의 확실함), 어떻게 삼성퇴 사람들은 선악과에 대해서 알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삼성퇴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만드셨던 사람들과 같은 조상들의 구전(traditions)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창세기 11장은 이 개념을 지지한다. 거기에는 바벨탑 사건에 의해 야기된 사람들의 언어의 혼잡과 온 지면으로의 분산(dispersion)이 기록되어있다. 분산에 대한 설명은, 한때 인류가 한 언어를 가진 하나의 민족이었음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비록 하나님이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지만, 그들은 같은 기술력, 같은 유산, 같은 조상적 전통들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 청동나무가 모세의 창세기 기록 이전에 만들어졌다면, 또는 그 청동나무가 모세의 영감된 기록과는 독립적으로 만들어졌다면, 성경은 창세기의 기록이 매우 상세한 내용까지도 사실임을 지지해주는 하나의 편견 없는 강력한 외부적 증거를 갖게 되는 것이다. 세상이 하나의 미스터리(mystery)로 여기고 있는 이 삼성퇴의 청동나무는 창세기를 묘사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유물이며, 인류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위대한 보물일지도 모른다.  
   


References

1. Ruins of ancient city discovered, history gets rewrittens, Shanghai Star, Shanghai
, 19 July 2001.
2. Historical wonders of Sanxingdui : puzzles of Sanxingdui through the ages, <www.china.org.cn/e-sanxingdui/jingtai/8.htm>, 7 April 2006.
3. Ryrie, C. C., The Ryrie Study Bible, Introduction to the Book of Genesis, King James Version, Moody Press, Chicago, IL, p. 5, 1978


참조 : 1. Sanxingdui Museum
http://sxd.cn/en/

2. 위키백과, 삼성퇴
http://ko.wikipedia.org/wiki/삼성퇴


관련기사 : 中 쓰촨성서 3000년전 ‘황금 가면’ 발견… 中 고대사 다시 쓰나(2021. 3. 21. 세계일보)

http://www.segye.com/newsView/20210321509442?OutUrl=naver

中 쓰촨서 3000년전 황금가면 발견...중국사 새로 쓰나(2021. 3. 21. 조선일보)

https://www.chosun.com/international/china/2021/03/21/AFC6BBK7ZZAGBAYSXQ3AIY3SO4/

‘황금가면’의 비밀…중국은 왜 열광하나?(2021. 3. 23. KBS News)

http://news.kbs.co.kr/news/view.do?ncd=5145053&ref=A


Related Articles


Further Reading


번역 - 미디어위원회

출처 - Journal of Creation 20(2), 2006

주소 - https://creation.com/the-bronze-tree-of-sanxingdui-genesis-artefact

미디어위원회
2017-01-23

팀나의 구리 광산은 솔로몬 왕국의 부강함을 보여준다. 

(Copper Mine at Timna Shows Solomon’s Power)

David F. Coppedge


       홍해 아카바 만(Gulf of Aqaba) 근처의 이스라엘 남부의 팀나 밸리(Timna Valley)에서 계속된 발굴은 솔로몬 왕국(Solomon’s kingdom)이 광범위했고 지배적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Fox News(2017. 1. 12)에서 제임스 로저스(James Rogers)는 팀나에서의 광범위한 구리 채굴 작업에 대한 새로운 발견에 대해 보도했다. ”이스라엘 남부의 솔로몬 시대의 요새는 그 비밀을 드러냈다.”그는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시기로 평가되는 광산 근처의 한 요새에서 채취된 유물로부터 새로운 방사성탄소 연대측정을 실시했다.

BC 10세기에 지어진 복잡한 문루(gatehouse)가 2014년 이스라엘 남부의 팀나 계곡에서 발굴되었다. 그러나 요새의 마구간에서 발견된 유기물 잔해에 대한 최근의 분석은 요새에 거주했던는 사람들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

전문가들은 팀나 계곡의 고온 건조한 기후에서 보존된 동물의 뼈와 배설물을 연구할 수있었다. ”우리가 마굿간을 발견했을 때, 물질들은 매우 잘 보존되어 있었으며, 3,000년 전으로 믿을 수 없을만큼 '신선한' 것이었다.” 발굴팀의 리더중 한 명인 텔아비브 대학의 고고학 연구소의 에레쯔 벤요세프(Erez Ben-Yosef)는 FoxNews에서 말했다. ”실험실로 돌아와 연대를 측정했을 때, 우리는 실제로 이것이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마구간과 다른 활동의 잔해임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관광객들이 이스라엘의 팀나 밸리에서 구리 광산을 탐사하고 있다. (Photo by David Coppedge, 2006.)

연구자들은 군인들이 당나귀와 다른 동물들에게 무엇을 먹였는지도 결정할 수 있었다.

침략을 막기 위해 튼튼한 돌로 지어졌던 요새는 동물과 다른 가축을 위한 울타리를 가지고 있었다. 연구자들은 동물들의 배설물에 들어있는 꽃가루, 종자, 생물군을 연구함으로써, 수백 마일 떨어진 지중해 연안에서 공급된 건초와 건포도를 먹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연안으로부터, 그리고 수도인 예루살렘으로부터 수백 마일 떨어진 곳들을 방어하고, 무역으로 연결하기 위해서는 광범위한 연락망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증거는 지중해 지역과의 장거리 연결을 보여준다.” 벤요세프는 말했다. 팀나는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240km 떨어져 있고, 동물 사료를 공급했던 가장 가까운 항구로 추정될 수 있는 악코(Acco)로부터 350km 정도 떨어져있다.

1934년에 발견되어, 처음에는 노예 수용소로 생각됐던, 팀나(Timna) 지역은 훨씬 더 많은 것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벤요세프는 2014년에 철기시대 유물들은 노예 수용소의 것이 아니며, ”계층적이고 세련된 사회”를 가리킨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와 같은 발견은 다윗과 솔로몬이 제한된 지식과 영향력을 지닌 단순한 그 지역의 족장에 불과했다는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을 완전히 기각시키는 것이다. 팀나는 광범위한 무역, 협력적인 방어, 세련된 자원들을 제공할 수 있었던 하나의 제국이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조각판(engravings)들은 팀나가 BC 12세기의 상반기에는 이집트의 바로였던 람세스 3세(Rameses III)의 통치하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사건은 이것보다 2세기 후의 일이었다.

벤요세프에 따르면, 요새가 팀나 계곡에서 가장 큰 고대 제련공장 중 하나에 위치한다는 사실은 특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팀나의 구리 광산에서 군사적 충돌에 대한 증거를 얻지 못했다”라고 그는 FoxNews.com에서 말했다. ”또한 그것은 이 지역에 살고 있었던 에돔 사람들과 다윗왕 사이의 전쟁을 기록해놓은 성경의 기록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성경 역사가들이 이 기록에 대해 열띤 논쟁을 벌여왔기 때문에, 어떠한 증거도 매우 중요하다고, 그 고고학자는 덧붙였다.

그 발굴은 텔아비브 대학의 후원 하에 계속 진행 중이다.


*1/14/2017 업데이트 : Live Science(2017. 1. 13) 지는 그 유기물 잔해가 노예들의 식사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대신에, ”금속 세공인들은 지중해에서 수입한 고기, 피스타치오, 생선 등의 양질의 식사를 했으며, 이것은 그들이 상당히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의 재능을 귀하게 평가 받았다”는 것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무신론자들과, 진화론적 고고학자들과,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성경의 기록을 비웃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것은 그들의 무지와 영적 수준을 가리키는 것이지, 실제 역사가 그렇다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잠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이후에 발견된 증거들은 비판가들의 주장이 틀렸음을 보여준다. 출애굽의 증거를 다루고 있는 두 편의 다큐멘터리, ‘Patterns of Evidence: Exodus’ 과 ‘The Exodus Revealed: Search for the Red Sea Crossing 는 그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진화론과 마찬가지로, 전문가들도 틀릴 수 있다. 그들의 성경에 대한 잘못된 주장이 대학에서 가르쳐지면서, 그들의 편견은 서로 강화되고 있다. 비난하는 사람들의 조롱이 들려올 경우, 증거들을 상세히 살펴보라. 의심하는 태도를 제거하고, 열린 마음으로 증거들을 들여다본다면, 종종 있던 성경과의 갈등은 사라질 것이다.

 


*관련동영상 : The Exodus Revealed: Searching for the Red Sea Crossing

https://www.youtube.com/watch?v=yTnqRpXKcaQ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crev.info/2017/01/copper-mine-at-timna-shows-solomons-power/ 

출처 - CEH, 2017. 1. 12.

미디어위원회
2016-09-27

창세기와 욥기에 기록된 기후와 일치되는 고고학적 발굴

(Archaeology Confirms Genesis, Job Climate)

by Brian Thomas, Ph.D.


      한 국제적 고고학 발굴팀은 현재의 요르단에 있는, 먼 과거에 습한 시기가 있었던, 고대의 한 장소로부터 동물과 인간의 유물들을 조사했다. 오늘날의 아즈라크 오아시스(Azraq Oasis)는 과거의 흐름과 비교해 볼 때, 약수물을 받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최근 아즈라크에서 발굴된 오랜 기간 보존되어 왔던 여러 단서들은 진화론적 역사보다 성경적 역사와 더 잘 일치하고 있었다.

구약성경은 자주 중동지역(Middle East)이 과거에 물이 넉넉했음을 말하고 있다. 약 3,500년 전에 욥(Job)은 아라비아 또는 그 근처에서 살았다. 오늘날 그곳은 대부분이 사막이다. 그러나 욥은 많은 가축을 소유하고 있었고, 특별히 그의 유명한 시련 후에도 그랬다. 이것은 그 시기가 건조한 기후가 아니었음을 추론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욥기에는 눈, 얼음, 폭풍, 늪 등이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것들은 습한 과거를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욥보다 그리 오래 전이 아닌 시기에 살았던 아브라함과 롯은 요르단 강 일대를 바라보면서 어느 쪽을 택할 지를 결정할 때,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창 13:10) 라고 창세기는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지역의 기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가? 성경은 아브라함의 시대 이후 오랫동안 지속됐던 일련의 심각했던 가뭄들을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가장 잘 알려진 가뭄은 요셉의 시대에 있었던 가뭄이었을 것이다. 요셉은 7년의 풍년 동안에 곡식들을 잘 비축해서, 온 지면에 있었던 7년의 기근(가뭄) 동안에 애굽 백성과 '각국 백성'들을 구해냈다.(창 41:53-57). 마찬가지로, 누가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하면서 열왕기상 17장의 가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all the land)에 큰 흉년(great famine)이 들었을 때에...”(눅 4:25) 이들 큰 흉년의 원인이 되었던 가뭄들은 극적으로 기후를 건조하게 만들었을 것임을 가리킨다.


예루살렘 동쪽으로 130km 정도에 위치하는, 오늘날 요르단에 속해있는 아즈라크 오아시스는 이러한 성경적 무대의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그곳을 발굴한 고고학자들은 Journal of Archaeological Science 지에 그 결과를 보고했다. 그들은 ”더욱이, 분지 주변의 계단식 대지(terraces)로부터의 증거들과 묻혀있는 호수 퇴적물(lacustrine deposits)은 과거에 호수의 수면이 높았음을 가리킨다”고 말했다.[1] 오래 전에 그 지역은 호수의 바닥 층이었다는 것이다. 연구의 저자들은 썼다. ”역사적으로, 오아시스는 분지의 위쪽 대수층(aquifer)으로부터 기원된 샘들에 의해서 물을 공급받고 있었는데, 그 대수층은 북쪽의 제벨 드루즈 현무암 암괴(Jebel Druze basalt massif)에서 재충전되고 있었다.”[1] 감소된 강우량은 그 대수층을 충전하는 데 실패했고, 샘들은 말라버렸다. 그 이후로 습한 시기와 건조 시기를 오갔던 변동은 아즈라크 위치에 늪지대, 강물 유출, 심지어 바람에 날린 퇴적층 (인공 유물들을 파묻은) 등을 남겨놓았다.


고대의 오아시스는 모든 종류의 생물들을 이끌어 들였다. 연구 팀은 작은 영양(gazelle), 낙타(camel), 들소(wild cattle), 말(horses), 코끼리(elephant), 코뿔소(rhinoceros), 사자(lion), 다른 대형 육식동물의 잔해 등, 빙하기의 유물 같은 것들을 (분명 홍수 화석들은 아니었다) 발굴했다. 날카로운 돌조각 도구에는 오리(duck)의 특정 단백질이 남아있었다. 그러한 증거들은, 연구 저자들이 '호미니드(hominids)'라 불렀던 어떤 사람 같은 그룹(human-like group)이 다양한 동물들을 사냥했음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사람인가, 유인원인가?


세속적 과학자들은 고릴라, 침팬지, 오랑우탄, 가상의 유인원, 사람을 포함하는 영장류의 한 과로서 사람과(Hominidae)를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과거에 현대인류보다 열등했던 어떤 사람같은 존재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화론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유인원은 아직 우리와 같은 영리한 생물로 진화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즈라크 오아시스에 있었던 소위 호미닌들은 코뿔소들과 오리들을 사냥하는데 필요한 모든 기술들을 완벽하게 가지고 있었다는 분명한 증거를 보여주었다. 그밖에도 이들 고고학자들은 ”이들 호미닌들이 포식자로부터 피할 수 있는 장소, 사체의 보존 등과 같은 고도의 효율적 전략을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1] 물론 그들은 효율적인 전략을 사용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호미닌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고대 사하라(Sahara) 지역이 과거에 습했던 것처럼, 고대 중동지역이 과거에 습했다는 사실은 성경에서 살펴볼 수 있는 기후 단서들과 잘 맞아 떨어진다.[2] 그리고 처음부터 완전히 발달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은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하는 인류의 성경적 역사와 일치하는 것이다.



References

1.Nowell, A. et al. 2016. Middle Pleistocene subsistence in the Azraq Oasis, Jordan: Protein residue and other proxies. Journal of Archaeological Science. 73 (2016): 36-44.
2.Thomas, B. Genesis and a 'Wet' Sahara. Creation Science Update. Posted on ICR.org November 3, 2008, accessed August 30, 2016.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article/9581 

출처 - ICR News, 2016. 9. 20.

미디어위원회
2016-08-04

놀라운 말타의 동굴인들 :

 현대인도 최근까지 동굴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The amazing cave people of Malta)

Joseph Mizzi 


     진화론자들의 주장으로 인해, ‘태초의 원시 인류’는 ‘동굴생활’을 한 것으로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확인된 증거들에 의하면, 그러한 생각은 논리적이지 않음이 밝혀졌다.


당신은 ‘동굴인(cavemen, 혈거인)’을 믿고 있는가? 회의론자(sceptics)들은 이런 질문들을 받으면 ”당연하지!” 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들은 성경에 아담의 후예들이 거대 도시들을 건축했음이 기록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증거들‘은 확실히 초기 인류가 동굴에서 생활했음을 보여준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만약 ‘동굴인’이 동굴에 사는 사람만을 의미한다면, 우리도 ”물론 동굴인이 있었다는 것을 믿는다”고 대답할 수 있다. 오팔 광산이 있는 호주 남부의 도시 쿠버 페디(Coober Pedy)를 방문하면, 그곳의 날씨가 너무 더워서, 일부 광부들은 땅속 집에 살고 있음을 보게 된다. 실제로 ‘동굴인’들이 텔레비전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질문은 실제로 동굴에 사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질문은 책과 박물관에서 자주 묘사되고 있는, 털이 많고 동굴에 거주하는 ‘유인원(apemen)’에 관한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진화론적 믿음에 의거하여, 한때 동굴에서 살았던 인간은 원시적 짐승이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증거로부터 결론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진화론적 추정에 의한 하나의 결과인 것이다. 심지어 동굴에 살았던 네안데르탈인들도, 그들은 기술을 가진 인류였으며, 심지어 재능있는 음악가였다는 명백한 증거들을 보여주고 있다.

성경은 많은 동굴인(cavemen)들을 언급하고 있다. 창세기에 의하면, 롯(Lot)도 한때 혈거인(그가 소돔으로부터 도망치고 난 후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윗도 사울 왕으로부터 도망가 동굴에서 살았으며, 오바댜는 동굴에 100명의 선지자들을 숨겨주었고, 그들에게 빵과 물을 주었으며, 이세벨로부터 그들을 구했다. 미디안(Midianites)을 벗어나기 위해서 이스라엘 사람들도 일시적으로 동굴에서 살았다. 엘리야 자신도 한 동굴에서 지냈으며, 심지어 욥도 동굴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욥기 30:6).

성서적 역사의 관점으로 볼 때, 사람들이 바벨에서 언어의 혼란 이후 흩어짐에 따라, 그들은 여러 곳에서 다양한 주거의 형태를 가졌는데(어떤 것은 일시적이고, 어떤 것은 영구적이었는데), 예를 들면, 천막, 진흙집, 돌집, 또는 나무집 등이었고, 많은 사람들은 확실히 동굴에서 거주하였을 것이다. (노아의 홍수 이후 물이 빠져나가면서, 아마도 많은 동굴들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래의 석회암 동굴들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참조). 따라서 전 세계에 걸쳐서 사람들이 동굴들에서 살았다는 증거들이 발견될 것이 예측된다.

한 흥미로운 예를 지중해에 있는 시실리(Sicily) 남쪽의 말타 섬(island of Malta)에서 찾을 수 있다.

지중해 사람들은 항상 편리하면서도 시원한 거주 장소로서 동굴과 바위동굴들을 선호했다. 말타도 예외는 아니었다. 동굴생활의 전통은 고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동굴에서의 거주, 또는 혈거(troglodytism)는 중세 동안에 아주 인기 있는 주거방식이었다는 강력한 고고학적, 문서적 증거들이 있다. 진 퀸틴(Jean Quintin d’Autun)이 1536년에 그 섬에 대해 기록하였을 때[1], 그는 말타에서는 동굴(cave)에 거주하는 이들이 아주 많았으며, 일부 사람들은 매우 최근까지도 동굴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에 매우 놀라워했다. 이러한 동굴 정착자들의 여러 후손들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으며, 심지어 동굴 교회(cave churches)들까지 있었다.


거대한 동굴

가르 일크비르(Ghar il-Kbir, the Great Cave) 동굴은 이들 정착지 중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다.[2, 3, 4, 5, 6] 그것은 2개의 다른 높이에 8개의 작은 동굴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나의 커다란 자연동굴로 둘러싸여 있다. 동굴의 지붕(‘텅빈 카르스트(karst hollow)’라고 불리는)은 무너져있다. 동굴거주자들은 더 작은 동굴들에서 살았는데, 내부에는 돌로 벽을 만들어 (물론 입구도) 거실과 구분했다. 다른 장소에서 발견된 것처럼 벽화의 흔적은 없으나, 돌로 여러 가지 작품들을 남겼다 - 천정의 고리, 도관(ducts), 선반(shelves), 그리고 벽감(niches, 벽의 움푹 들어간 곳)들인데, 이들은 확실히 실용적인 용도로 쓰였다. 

가르 일크비르 동굴의 가장 오래된 정착 년도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처음 알려진 것은 1544년으로, Simone Camilleri de gar il-chibir  (‘큰 동굴의 Simone Camilleri’)라는 글의 참고문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말타의 역사가인 프란세스코 아벨라(Giovanni Francesco Abela)는 그 섬에서 사람들이 사는 거주 장소의 목록에 그 가르 일크비르 동굴을 포함시켰다. 그는 그곳에 27가구의 117명의 사람들이 살았던 거대한 동굴로 표현하고 있었다.[7] 그들은 목동과 양치는 사람(pastori e pecorai)들이었다.      

가르 일크비르 동굴의 생활을 가장 극적으로 기술했던 사람은 독일의 학자 아타나시우스 키쳐(Athanasius Kircher, 1602~1680)로서, 그의 두터운 책 ‘Mundus Subterraneus’ (라틴어로 ‘지구 아래의 세계’)에서 였다.[8] 그가 그 장소를 방문했을 때, 크고 강한 체구에 간단한 옷차림을 한 어른과 아이들이 그에게 인사를 하였다. 그는 또한 그곳의 여인들의 아름다움에 주목했는데, 이것은 어린이들의 책에 그려져 있는 짐승같이 추하게 생긴 여인들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그곳 사람들은 채식주의자들로서 야채, 치즈, 집에서 구운 빵을 주식으로 하였으며, 소들의 분변을 말려 연료로 사용하고 있었다. 남자들은 들에서 일했고, 가축들을 길렀으며, 그것들을 도시로 내다팔았다. 여인들은 아이들을 돌보고 치즈를 만들었다. 식수는 흙으로 빚은 커다란 용기에 보관되어 있었다. 동굴은 비와 바람을 내보내도록 고안된 창을 통해 환기가 되고 있었다. 동굴의 거주자들은 십자가와 성화 등으로 동굴을 장식하고 있었다.  



동굴, 아름다운 내집 동굴!


”‘내집 만한 곳이 없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가르 일크비르 동굴의 거주자들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었다. 외국인들은 그들의 동굴생활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들은 동굴생활에 철저히 얽매여 있었는데, 그들이 멜리타(Melita) 라는 도시로 가서 그들의 상품을 팔거나 생필품을 살 때는, 마치 추방 명령을 받은 사람들처럼 볼일도 가능한 빨리 끝냈으며, 하루 밤도 밖에서 보내지 않기 위해 서둘러 돌아가곤 했다” - Kircher, 1637 [1]

”...이들 말타의 동굴인들은... 마치 그들 자신들을 살아있는 채로 땅에 묻어 버린 듯이, 땅 위의 집들에 나와 사는 것보다, 어둡고 외딴 동굴에 사는 것을 택하였다.” - Veryard, 1701 [2]

현대 동굴 거주자들의 발견은 우리들에게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진화론적 생각은 동굴 거주자를 원시인으로 여기도록 세뇌시키고 있다. 증거들은 스스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만일 기독교인들이 성경에 근거한 안목으로 동굴 거주자들을 바라본다면, 노아의 후손들은 머리가 나쁜 짐승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편의 또는 취향에 의해 동굴에서 살기로 선택했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References

1. Zammit Ciantar, J., Life at Ghar il-Kbir, Dingli Local Council, Malta, p. 11, 2000.
2. Veryard, E., An Account of Divers Choice Remarks, as well Geographical, as Historical, Political, Mathematical, Physical, and Moral; taken in a Journey through the Low-Countries, France, Italy, and Part of Spain; with the isles of Sicily and Malta,Sam Farley, London, pp. 233-236,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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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을 직접 방문한 여행객의 설명


가르 일크비르 동굴은 그 당시에 여행자들 사이에서 미니 관광 명소가 되어 있었다. 동굴에서 실제 살고 있는 사회를 방문하는 것을 상상해 보라. 독일인 방문자였던 아타나시우스 키쳐(Athanasius Kircher)가 기록한 설명은 가장 생생했다 :

”1637년에, 내가 말타(Malta)를 방문했을 때, 근처에는 한 언덕이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땅속에서 살고 있었다. 초대했던 사람은 내가 그곳에 가서 그들이 그 동굴을 장식해 놓은 예술적인 감각과 어떻게 그들이 살고 있는 장소를 꾸며 놓았는지를 보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정말로 잘 조직된 방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단단한 암석을 파내어 만든 침대를 가지고 있었다. 벽에는 하나의 벽 찬장을 가지고 있었고, 그곳에 빵과 치즈 등을 올려놓고 있었다. 다른 장소에, 그들은 소, 양, 당나귀들을 위한 우리(pens)를 가지고 있었고, 일부 닭들을 위한 우리도 가지고 있었다. 저수조를 대신하는 항아리들은 충분히 커서 물을 보관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양파와 마늘은 꽃줄(festoons)처럼 다발로 묶여져서 매달려 있었고,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또한 빵을 굽기 위한 오븐이 있었다.... 오븐은 또한 굴뚝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연기는 동굴 안으로 퍼졌을 것이고 …사람들은 숨이 막혔을 것이다.”[1]

인구수는 점차적으로 감소하였다. 그러나 일부 거주자들은 19세기 초까지도 남아 있었다. 떠도는 이야기에 의하면, 영국 식민지 정부가 1830년대에 마지막 거주민들을 강제로 내쫓았고, 그들을 근처 마을로 이주시켰다고 한다.

딩글리(Dingli)의 근처 마을에 있는 교회 기록에는 가르 일크비르 동굴에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개인적인 상세한 기록들이 남아있다.[2] 예를 들면, 1699년에 프랑코 벨라(Franco Vella)라고 불리는 53세의 남자는 38세의 아내 필루메나(Filumena)와 3명의 아이들과 그곳 동굴에서 살았다고 되어있다.

분명히, 이들 동굴 거주자들은 근처의 마을 사람과 상호 교류를 했던 정상적인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귀족과 부자들은 궁궐 같은 집에서 사는 동안, 가난한 대중들은 돌집이나 동굴에서 살았다. 이들 동굴의 주거 상황은 근처 베르다라 궁전(Verdala Palace)의 건축학적 아름다움과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뜨거운 여름 동안에 동굴들은 섬의 어느 곳보다도 확실히 안락했을 것이다.

 

References

1. Zammit Ciantar, J., Life at Ghar il-Kbir, Dingli Local Council, Malta, pp. 8-10, 2000.
2. Buhagiar, K., The Ghar il-Kbir Settlement and the Cave Dwelling Phenomenon in Malta, B.A. (Archaeology) thesis, University of Malta, 1997, Appendix 1, pp. 31-34.


 

References

1. Quintin d’Autun, J., Insulae Melitae Descriptio, Lyons, France, 1536.
2. Zammit Ciantar, J., Life at Ghar il-Kbir, Dingli Local Council, Malta, 2000.
3. Wettinger, G., The lost villages and hamlets of Malta, in: Luttrell, A. (Ed.), Medieval Malta, London, p. 188, n. 24, 1975.
4. Messina, A., Trogloditisma Medievale a Malta, Melita Historica, Malta Historical Society 10(2):109-120, 1989.
5. Buhagiar, K., The Ghar il-Kbir Settlement and the Cave Dwelling Phenomenon in Malta, B.A. (Archaeology) thesis, University of Malta, chapter 2, pp. 19-23, 1997.
6. Luttrell, A., Malta Troglodytica: Ghar il-Kbir, Heritage (publisher: Midsea Books, Malta) 24:461-464, 1979.
7. Abela, G.F., Della Descrittione di Malta, Isola nel Mare Siciliano, Bonacota, Malta, pp. 79-80, 1647.
8. A photocopy of pp. 97-99 in volume II of the original 1665 Latin text of Kircher, A., Mundus Subterraneus, can be found in Hein, O. and Mader, R., Athanasius Kircher S.J., in Malta, Akademie Verlag Berlin, pp. 139-141, 1997.


* Joseph Mizzi, M.D., MRCP (UK), who has visited Ghar il-Kbir, is a paediatrician in the Neonatal Intensive Care Unit, St. Luke’s Hospital, Malta. He runs an evangelical internet ministry at www.justforcatholics.org.

*Mike Matthews, M.Ed., is a writer and educator with extensive experience in Christian publishing. His writings include several yearbooks on current events and a geography textbook used in Christian schools. He now serves as a writer/editor at Answers in Genesis-USA.

 

*참조  : Kinver Caveman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2/n1/kinver-cavemen

A Better Model for the Stone Age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227

A Better Model for the Stone Age Part 2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225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26/i1/malta.asp 

출처 - Creation 26(1):40-43, December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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