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BRARY

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성경

미디어위원회
2023-05-23

이집트의 태양신 호루스는 신격화된 함이다 : 1부

(Horus—the deified Ham : part 1)

by Gavin Cox


    이집트의 많은 신들 중 가장 유명하고 오래된 신 중의 하나는 팔콘 태양신(falcon sun-god)인 호루스(Horus)였다. 이번 글은 두 번에 나누어(part 1, part 2), 창세기에 기록된 노아의 셋째 아들 함(Ham)의 삶에 대한 12가지 핵심 특색(motifs)들을 살펴볼 것이다. 그런 다음 이집트의 증거들 중 가장 오래된 것에 집중하여, 묘사된 호루스와 비교할 것이다. 1부에서는 다음과 같은 특색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1)함은 아담으로부터 11대 후손, 2)‘함(Ham)’ 이름의 어원, 3)함의 가족은 8명, 4)함은 삼형제 중 막내. 이러한 함의 특색들을 호루스와 비교해보면, 이교도 이집트인들이 함(Ham)을 호루스(Horus)로 신격화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

 

성경의 역사적 기초

 시편 105:23,27, 106:22에서 이집트(Egypt)는 노아의 셋째 아들인 "함의 땅(the land of Ham)"으로, 그리고 시편 78:51에서는 "함의 장막(tents of Ham)"으로 불리고 있다. 함과 미스라임(Mizraim, 함의 셋째 아들)은 시편 105:23에서 이집트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함께 나온다.

“이에 이스라엘이 애굽(miṣrāyim)에 들어감이여 야곱이 함(ḥām)의 땅에 나그네가 되었도다.”(시 105:23, 개역개정)

여기서 '미스라임(Mizraim)'은 성경 전체에 걸쳐 애굽(이집트)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이름이다. 함은 대홍수의 직접적인 목격자였으며, 그의 형 셈과 비슷한 나이까지 살았을 것이다(대홍수 이후 500년, 창세기 11:11). 노아의 가르침을 통해, 함은 창조와 대홍수 이전의 세계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는 그 지식들을 자연스럽게 후손에게 물려줬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이집트인들에 의해 이교화되었다. 대홍수 이후 함이 대단히 오래 살았고, 대홍수 이후 문명의 재건에 관여한 일, 그리고 홍수 이전의 세계에 대한 지식들은, 이집트인들이 그에게 신성한 지위를 부여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함의 인생에 있어서 12개의 주요 특색 

함의 인생의 12가지 주요 특색(motif)들을 창세기 5~11장(표 1)에서 뽑아내어, 호루스와 비교할 것이다. 함이 호루스로 신격화되었다면, 이교적 방식이기는 하지만, 호루스는 식별 가능할 정도로 이러한 특색들이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이번 글(1부)은 특색 1~4를, 다음 글(2부)은 특색 5~12를 탐색할 것이다. 

 

함의 성경적 특색

함에 대한 기록

창세기 구절

1

아담의 11대 손

아주 오랜 수명을 산 아담의 11대 손에 위치함

5:1~32

2

이름의 어원

이름/특징이 육체적으로 폭력, 흙 같은 검은색, 태양의 열과 연관됨

6:11, 8:22, 11:3

3

8명의 가족

4명의 남자와 그들의 아내들

6:18, 7:7,13

4

총 3형제

함(막내), 셈, 야벳(장자)

5:32, 6:10, 7:13

5

아버지 노아

노아(저주받은 땅을 위로하는 이름)

5:9~32 6:8~10

6

방주(300×50×30 규빗, 3층)

방주로 들어간 노아와 가족

6:15~16, 7:11, 8:16~18

7

대홍수

심판으로 보내진 전 지구적 홍수

6:17

8

노아의 저주와 축복

함의 죄(형제 간 원한), 성적 무력화(랍비의 추정-거세), 정치적 지위 추락

9:22,24~27

9

함의 4 아들

구스, 미스라임, 붓, 가나안

10:1

10

동쪽에서 시날 땅으로 이동

바벨탑 사건에서 여호와가 인류를 흩으신 이후(함과 아들들 포함)

11:2,8~9

11

‘함의 땅’

시조인 함의 이름을 딴 애굽(Egypt)

시편 105:23 등

12

긴 수명의 삶

셈과 비슷한 수명을 살았을 것으로 보임

11:11

표 1. 함(Ham)의 인생의 12가지 주요 특색들

 

1부와 2부 글 모두 각 특색들에 대해 가장 오래된 이집트 문서들의 증거에 집중하여, 이러한 연관성을 탐구할 것이다. 탐구에 앞서 호루스가 누구였는지에 대한 간략한 논의가 순서일 것이다.

 

팔콘(매) 태양신 호루스의 소개

호루스(Horus)는 이집트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중요한 신 중 하나이며, 적어도 이집트 왕조 시대(Dynastic Period) 초기부터 있었으며, 친숙한 형태로 ‘호루스의 매(Horus falcon)’가 나르메르 왕의 팔레트(Narmer Palette)에 나타난다(그림 1).

그림 1. 나르메르 왕의 실트석 팔레트, 나르메르와 호루스가 적을 정복하는 모습. (Siltstone Narmer Palette (recto), CG14716 Narmer and Horus vanquishing foes).

그림 2. 검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호루스 조각상, 에드푸의 호루스 신전. (Horus statue in black granite, Temple of Horus, Edfu.)

 

호루스(Horus)는 그의 아들,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고왕국 피라미드 문서(Old Kingdom Pyramid Texts, OK PT)’에 나타난다(2부 글 참조). 호루스는 매(falcon, 그림 2), 또는 매의 머리를 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호루스는 태양의 한 형태로서, 창조의 신(a creator god)으로 여겨진다. 그의 아버지는 오시리스/게브(Osiris/Geb)였고, 유명한 세트(Seth)를 형제로 두고 있다. 이 가족과 관련된 신화는 오시리스가 살해된 후, 호루스와 세트 사이의 투쟁을 포함하고 있다(2부 참조). 여기에서 두 형제는 폭력적인 지배권 다툼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입힌다. 호루스는 눈 하나를 잃게 되고, 그것은 달(토트, Thoth)로 신격화되었으며, 건강한 눈은 태양(레, ReꜤ)으로 신격화되었다. 호루스의 다양한 면들은 별개의 신들이 되었다. 예를 들어 '아이 호루스(Horus the child)', '노인 호루스(Horus the elder)', ‘태양 형태의 호루스’ 등이 있다. 파라오(Pharaohs)는 호루스의 살아있는 화신이 되었고, 그들의 '호루스 이름'을 받았다. 죽으면 그들은 호루스의 매처럼 하늘로 날아가서, 영원히 하늘을 가로지르는 태양 배(solar barge)에 있는 태양신 레(, 라)와 합류한다고 믿고 있었다.[1] 호루스에 대해 많은 것을 쓸 수 있지만, 나의 두 글은 노아의 셋째 아들 함과 호루스의 연관성에 대한 논의로 제한하여 말할 것이다.

 

 특색 1. 아담의 11대 손 : 함과 호루스의 비교

 

창세기 5:1~32 연대기에 의하면, 함(그의 형제들과 함께)은 아담의 11번째 후손으로 위치하고 있다.[2] 호루스에 관한 이집트 신화에서 유사한 연대기적 관계가 식별될 수 있을까? 이집트의 고왕국 피라미드 문서에는 엔네아드(Ennead, 九神)라고 불리는 9명의 신들의 그룹이 기록되어 있다. 그들의 표시는 9개의 깃발(9 flags), 또는 수직 선(vertical dashes)이었다 : psḏ.t (Wb 1, 558.12). 그들은 Pepis II PT-600§1655에 수록되어 있다 :

"오 헬리오폴리스에 계시는 위대한 아홉 분이여! - 아툼(Atum), 슈(Shu), 테프누트(Tefnut), 게브(Geb), 누트(Nut), 오시리스(Osiris), 이시스(Isis), 세트(Seth), 네프티스(Nephthys) - 아툼의 자손들이여!“

 "위대한 엔네아드(The Greater Ennead)" psḏ.t-ꜤꜢ .t(Wb 1, 559.5)에는 토트(Thoth)와 호루스가 포함되어 있다. 방관자로 나타나는 (아버지 또는 형제) 오리시스(Osiris)가 설명될 때, 호루스의 위치는 아툼에서부터 11번째로 나타난다. Unas PT-219§167–177 :

"아툼... 슈... 테프누트... 게브... 누트... [오시리스]... 이시스... 세트... 네프티스... 토트(Thoth)... 호루스."

이전 글[3]에서 나는 아툼(Atum)이 이집트인들이 기억하는 이교화된 아담(Adam)이라고 주장했다. 여기 PT-219§167–177에서 호루스는 ‘위대한 엔네아드’ 내에서 오시리스를 방관자(bystander)로 고려할 때, 아툼으로부터 11번째에 위치한다. 이것은 창세기 5:1~32절의 족보에 대한 이교화된 기억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함(및 형제들)은 아담으로부터 11번째 줄에 서 있다. 엔네아드는 하나로 통합된 그룹(전형적으로 9명)으로 생각되었지만, 증거에 따르면(예: PT-600§1655), 그들은 동시에 아툼의 연속적인 자손으로 고려될 수 있다.[4] 그러나 ‘위대한 엔네아드’들의 나이는 어떻게 될까? 여기 창세기 5:1~32의 족장들의 수명과 비교될 수 있을까?

그림 3. 제19왕조의 튜린(토리노) 왕의 목록(19th Dynasty Turin King List, in hieratic script).

 

제19왕조의 튜린(토리노) 정경 파피루스(Turin Canon papyrus, 그림 3)는 많이 손상되었지만, 이집트의 초기 역사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 문서에서 이집트 초기 왕조의 통치자들은 "호루스의 계승자들(Followers of Horus, asšms.w-ḥr.w) (Wb 4, 486.16–19)로 기술되어 있다. 호루스는 1열과 2열(단편 11, 150)에서 세트(Seth), 토트(Thoth)와 함께 특별한 통치 기간을 가진, '신과 반신반인' 사이의 위치로 나타난다.[5] 흥미롭게도 목록의 첫 번째 이름들에는 호루스, 세트, 토트(위대한 엔네아드로부터 알려진)에 더하여, 창조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5]

코펜하겐 대학의 이집트학 교수인 리홀트(K. Ryholt)의 설명에 따르면,

“이집트 신화에 등장하는 왕들은 신(gods), 반신반인(demigods), 정령(spirits)으로 구성되어 있다. … 첫 번째 이름[n ib[...]]은 땅과 물이 모든 곳에 존재하기 이전의 원시 바다와 관련될 수 있다. '해변의 흙(clod of the shore, pns.t n spt)이라는 이름은 생명체가 없던 물질인 땅에서 생명체를 창조한 것을 가리키는 말일 수밖에 없다. 뒤에 나오는 두 이름('고귀한 여성의 소유주(possessor of noble women, ẖrḥm.wt-šps.w[t])‘와 '[고귀한?] 여성의 보호자(protector of [noble?] women, ḫw-ḥm.wt-[šps.wt?])’는 아마도 여자의 창조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더 아래에 있는, 2열의 사라진 부분에는 반신반인에서 정령으로의 추가 전환이 있으며, 이는 3열의 처음 9줄에서 계속된다. 정령은 일반적으로 선사시대의 왕들로 해석되어왔다. 하지만, 왕들의 목록(King-list)이 제공하는 정보에 얼마나 많은 역사적 중요성을 부여해야할 지는 불분명한 채로 남아있다.”[6]

 이것은 창세기 5:1~32절에 기록되어 있는, 아담(흙으로 만들어진)과 이브에서부터 시작되어 계승되고 있는 연대기적 인물들에 대한 이교화된 언급처럼 들린다. 9개의 잃어버린 행에는 위에 설명된 신화적 통치자의 숫자가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파피루스 문서가 창조부터 대홍수까지 창세기와 평행을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에 대해, 가이사랴의 주교였고 로마의 역사가이자 해석가였던 유세비우스(Eusebius, AD 260년경~339년)는 길을 잃지 않았다. 그는 마네토의 자료에 접근할 수 있었다. 1964년 와델(W.G. Waddell)은 유세비우스의 아르메니아어 버전 번역본에서 그가 생각한 바를 이렇게 말했다 :

“마네토(Manetho)가 자신의 해석을 세 권의 책으로 집필한 ‘이집트 역사(Egyptian History)’에서, 신들, 반신반인, 죽은 자의 정령, 그리고 이집트를 다스린 필멸하는 왕들을 다루고 있다... [유세비우스는 이 신들을 그리스 이름으로 족보(계보) 상으로 나열하고 있다]... 태양력 2,206년에 해당하는 태음력 24,900년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제 이 숫자들을 히브리 연대기와 비교해 보면, 그것들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집트는 히브리인들에 의해 메스트라임(Mestraim, 미스라임)이라고 불린다. 메스트라임은 대홍수 이후 오래 살지 못했다. 대홍수 후에 노아의 아들 참(Cham, or Ham(함))이 메스트라임(Mestraim, or Aegyptus(에집투스, 아이깁투스))을 낳았다. 노아의 후손들이 흩어지기 시작할 때에, 그는 이집트에 처음으로 정착한 자였다. 이제 아담으로부터 대홍수까지의 전체 시간은 히브리인들에 따르면 2,242년이었다...”[6]

(칠십인역(extended LXX) 연대기에 의존하는) 유세비우스는 이집트 연대기가 월 단위로 계산되어야 한다는 있을 법하지 않은 주장을 한다. 각주에서 와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Fn. 1) 왕조 이전 시대는 한 그룹의 신들로 시작되는데, 이들은 멤피스에서 숭배되었던 형태로 헬리오폴리스의 위대한 엔네아드(Great Ennead of Heliopolis)로 구성된다… 튜린(토리노)의 파피루스에서 신들은 동일한 순서로 기록되어 있다 : 프타(Ptah), 레(Rê), 슈(Shu), 게브(Geb), 오시리스(Osiris), 세트(Sêth, 200년), 호루스(Horus, 300년), 토트(Thoth, 3126년), 마아트(MaꜤat), 하르(Har) … "[6]

 “(Fn. 5) '반신반인들(Demigods)'은 죽음의 정령(Spirits of the Dead)과 동격이어야 한다… 이들은 아마도 튜린(토리노) 파피루스에서 호루스의 추종자 또는 숭배자였던 셈수 호르(Shemsu Hor)일 것이다…

 유세비우스가 사건을 과장하긴 했지만, 튜린 문서와 아담에서 노아의 가계에 이르는 창세기 연대기의 이집트 버전인 ‘위대한 엔네아드(Ennead, 구신)’는, 비록 이교도 형태로 기록 보존되었지만, 함에 대한 원래의 기억으로부터 유래했고, 함은 호루스로 신격화된 것으로 보인다.

 

특색 2. 호루스와 함이라는 이름의 어원 : 폭력, 검음, 뜨거움

 

함의 이름의 어원(Etymology of Ham’s name)

이전 글에서 논의한 바와같이[8], 함의 이름은 히브리 텍스트 내에서 비슷한 소리를 내는 단어에 대한 음성학적 연결을 통해 이해할 수 있으며, 성서학자들은 이것을 'paronomasia'(언어유희, 말장난)이라 한다. 창세기 6:11절에 홍수의 원인이 나오며, 이 땅에는 하마스(ḥāmas) 즉, "폭력(violence), 그릇됨(wrong)"(HALOT-2980)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말한다. '함(Ham)'과 음성적으로 일치하는 것은 11절에서 명백하다(아래 주황색으로 강조 표시된 텍스트 참조).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hām)과 야벳이라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ḥāmās)이 땅에 가득한지라”(창세기 6:10-11).

 신학자 무쉐 가르시엘(Moshe Garsiel)은 언어유희에 대해 언급하기를

“… 여기서 단순히 건전한 언어유희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함과 '불법' 사이의 연관성을 암시한다. 나중에(9:22-27), 이 아들은 실제로 형제들에 비해 자신의 본성이 열등하다는 것을 드러낸다”[9]

 하마스(ḥāmās)라는 단어는 창세기에 세 번 나온다(6:11, 13; 49:5). 이 단어의 의미는 창세기 49:5절에서 야곱의 저주와 그의 아들들의 축복에서 분명해진다. 문제의 구절은 이렇게 말한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ḥāmās)의 도구로다".

 문맥상 단순한 도덕적 잘못이 아니라, '폭력(violence)'을 구사했다는 것이다. 이 하마스(ḥāmās)의 특별한 면은 홍수 심판을 초래한 바로 그것이었다. 홍수 이후에 '함'에 대한 음성학적 연결은 두 개 더 발견될 수 있다.

 

1. 여호와께서 노아와 그의 가족과 언약을 맺으시며, 확실한 계절(창 8:22)과 추위와 ‘더위’(heat, ḥōm)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heat, ḥōm)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2. 함의 손자 니므롯(Nimrod)은 바벨탑을 건축함으로써(창 10:8~10) 인류의 두 번째 심판을 야기시켰다. 카수토(Cassuto)는 특히 바벨탑의 건축 재료에 내포된 창세기 11:3절의[10] 언어유희에 주목했다. 

       

… wəhaḥēmār hāyāh lāhem laḥōmer

“… and the bitumen hath been to them for mortar

“...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창 11:3, YLT)

바벨의 반란은 바벨탑의 건축을 통해 실현되었는데, 여기에는 특별히 땅에서 얻어진 검고, 어두운 색의 물질인 역청이 회반죽용으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 ḥēmār(역청)는 구약에서 세 번 더 나온다. 다음은 창세기 14:10절에 소돔과 고모라 왕들이 '역청 구덩이(tar pits)'에 빠진 내용이고, 그리고 출애굽기 2:3절에는 애굽에서 갓난아기 모세의 광주리를 역청(tar)으로 방수한 사건이 나온다. 다음으로 ḥōmer 는 출애굽기 1:14절에서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인들을 위해 흙 이기기를 할 때 나온다.

이들 유사한 '어휘'(ḥāmās, ḥōm, ḥēmār, ḥōmer)들은 음성학적으로 함(Ham)과 연결된다. 함의 이름에 대한 이론적 의미는 창세기의 초기 장들에서 비슷한 소리를 내는 히브리어 단어들과 비교할 때, 확립될 수 있다.[11] 표 2는 음성학적으로 히브리어 단어들과 그 의미를 연결하는 최초의 출현을 나열하고 있다. 이는 함이라는 '이름'이 사용하는 어휘와 의미 범위를 제공하며, 함이란 이름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표 2. 음성학적으로 ‘Ham’과 동등한 단어, 의미 및 가장 오래된 사례들(음성 어근은 주황색으로 강조하여 표시함)

 

표 2에 제시된 증거로부터, 창세기(및 고대 욥기)에 나오는 히브리어 단어들에서 음성학적으로 함의 이름과 연결되는 세 가지 주요 개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물리적) '폭력' 2) (흙) '검음/어두움' 3) (태양의) '열'. 그래서 어원학적으로 함의 이름이 이해될 수 있다. 이 세 가지 개념이 호루스에도 통합되어 있을까? 다음 증거(A~C)는 이것이 사실임을 지지해 준다.

 

히브리어 및 이집트어와 관련된 함의 이름에 대한 음성학적 고려 사항

히브리어 단어 ḥām(함)에서 초성은 무성(無聲) 인두 마찰음인 'ḥ', 중성 (히브리어 기호) 알레프 'a' 모음, 종성 양순비음(兩脣鼻音) 'm'으로 발음된다.[11] 또한 'ḥ'는 목구멍 마찰음 'ḫ', 'ẖ'와 함께 그룹화되어 발음된다.[12] 음성학적으로 유사한 '무성(無聲) 정지' /k/와 /kh/(ḳ 제외)는 이집트어에서 공존했으며, 콥트어로 살아남았다. 예를 들어 ⲕⲏⲙⲉ ⲭⲏⲙⲓkm.t('이집트')의 두 가지 형태를 나타낸다.[13]

셈어(Semitic)인 외래어가 이집트어로 번역된 증거를 통해[14], 히브리어 ḥeth(חֽ)는 이집트어에서 일관되게 /ḥ/로 표기된다. 히브리어 kaph כּ는 이집트어로 /k/ 또는 /g/로 표기되며, /ḥ/로 표기하지 않는다. 양음 기호 km(km.t 에서와 같이)을 포함하는 단어들은 셈어와의 교환 사례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기존의 음성학적 증거로는 히브리어 Ḥam과 이집트어 km이 표면적인 음성학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서로 관련된 이름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검은'(욥기 3:5, hapax legomenon)과 '뜨거움'(창세기 43:30, 세 번 등장)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의 두 가지 예는 히브리어 'k'로 철자가 표기되어 있어 음성학적 관계 가능성을 제시하지만, 이는 추가적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A) 폭력적인 호루스는 공격자-정령(attacker-spirit, kk)이다.

다음 텍스트 증거는 호루스를 투쟁, 폭력, 전쟁과 연관시킨다. 예를 들어, 신성한 별칭인 tkk는 '공격자, 공격하다'라는 뜻이다. 어근 kk의 중요성은 ‘특색 3‘에서 논의될 것이다. 이것은 고왕국 피라미드 텍스트(OK PT, Old Kingdom Pyramid Text)에서 찾을 수 있다 :

Teti PT-292§433a.

ntk tkk.n tk.j jkn-hj

"당신은 뱀(jkn-hj-Snake)을 공격한 공격자(attacker attacked)입니다!"

중왕국 관 텍스트(Middle Kingdom Coffin Text, MK CT)에서 호루스에게 적용된 ‘공격자’에 대한 설명과 별칭이 설명되어 있다: CT-885.

jntk tkk ntk ḥr.w nn.w sp-2 ḏ.t r p.t

“당신은 공격자, 당신, 호루스! 코브라여 하늘에서 지쳐 가라앉아라!”

‘이집트 사자의 서’(The Egypt Book of the Dead, BOD)는 호루스의 폭력을 미화하고 있다. 예를 들어 19장(제22 왕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시리스(Osiris N.)는 그의 모든 적들이 쓰러지고 전복되고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4번이나 찬양을 반복했다. 이시스의 아들이자 오시리스의 아들인 호루스는 그의 모든 적들이 쓰러지고 전복되고 살해되었기 때문에 수백만의 희년을 반복했다. 그들은 동방인의 도살장인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목이 잘리고, 목이 졸리고, 팔이 잘리고, 심장이 제거되었다. 그것들은 계곡에서 (위대한) 절멸자에게 주어졌다. 그들은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15]

이집트 학자인 블랙맨(A.M. Blackman)과 페어맨(H.W. Fairman)은 호루스를 전쟁의 신으로 인정하고 있다. 호루스는 이집트의 창시자로서, 역사적으로 실재했을 수 있다.

“정커(Junker)는 다음과 같은 이유 있는 의견을 표명했는데, 에드푸(Edfu)의 신인 베르데트(Behdet)의 호루스는 전사의 신이자, 신성한 왕이었으며, 그의 업적에 대한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역사적 근거가 있다는 것이다. 세테(Sethe)가 그의 ‘Urgeschichte(원역사, prehistory)’에서 제시한 이론을 받아들인다면, 그 근거는 왕조 이전 시대에 에드푸를 거점으로 한 헬리오폴리스의 호루스 왕이 옴보스(Ombos)와 남부 이집트의 왕인 세트(Seth)와 벌인 전쟁에서 찾을 수 있다.”[16]

 

B) 함과 호루스의 비교 : (흙 같은) 검은색/어둠

이집트어로 '검은색(black)'을 뜻하는 중요한 단어는 km(Wb 5, 124.10-12)이며, 이집트의 이름인 km.t는 검은 비옥한 나일강의 충적토를 가리키는 "검은 땅(the black land)"을 의미한다(part 2 참조). 위의 논의에서 이집트어 'km'와 히브리어 'Ham'은 '흙빛의 검은색/어둠'이라는 의미상 동일한 개념이다. 여기서 우리는 함과 이집트의 이름들에 내재된 검은 흙빛과 즉각적으로 명료한 연관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새까만 호루스

이집트학자 알렌(T.G. Allen)은 "호루스는 그의 이름 km-wr에서 볼 때, 검고 위대하다(또는 '매우 검다')"라고 말했다.[17]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PT-600§1657a–1658d.

(§1657a) ḥr.w… (§1658a) km.t wr.t m rn=k n(.j) ḥw.t-km-wr … (§1658d) ḥr.w

호루스 ... 당신은 검고, 거대한 검은 [황소]의 집(House of the Great Black [Bull])'이라는 이름에서 위대하고/매우 검습니다... 호루스...”

그림 4. 태양원반(solardisk)을 갖고 있는 아피스 황소(Apis bull, 검은 사문석(black serpentine)), BC 400~100년, 클리블랜드 미술관(Cleveland Museum of Art).

 

프랑스의 이집트학자 에밀(Émile Chassinat)은 "아주 초기 단계"부터 km-wr이 호루스를 의미했으며[18], 아트리비스(Athribis)의 검은 황소(black bull)는 호루스의 화신으로 숭배되었다고 말한다.[19] 예를 들어, 카바시(Khabash, 제31왕조의 파라오) 2년에 죽은 그의 아피스 황소의 석관에 새겨진 비문은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 "아피스-오시리스(Apis-Osiris)와 호루스 검은 황소(Horus the black bull)에 의해서 사랑받았던..."[18] 에밀은 이렇게 말했다 : "위대한 검은 황소'의 지위는 오시리스에 대한 지역적 의례에 기인하며, 그를 황소의 화신인 호루스와 연관시키고 있다."[20] (그림 4).

호루스는 또한 "어둠"(darkness, kk)에 거주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8th Dyn.) pKairo G51189 (pJuja), Tb153.

ḥr.w {tw} pw ḥmsi(.w) wꜤi.yw m kk.w jw.tj mꜢꜢ=f“

”저것은 어둠 속에 홀로 앉아 있는, 보이지 않는 호루스입니다.“

이제 나는 어근 kk(특색 3에서)를 포함되어있는 호루스 별칭의 의미로 돌아가겠다.

 

C) 태양의 뜨거움 : 호루스와 함의 비교

창세기 8:22절의 “계절에 관한 언약”에서 태양의 열(heat)을 설명하기 위해 ‘ḥōm’을 사용한다. (그래서 태양의 '열' 개념을 포함하도록 함의 이름의 의미 범위를 확장함). 호루스는 근본적으로 태양 및 열과 연결되어 있으며, 가장 이른 시기부터 태양신 레-하라크티(RēꜤ-Ḥarakhti, raw-ḥr.w-Ꜣḫ.tj)로 숭배되었고. 이는 태양신 레(RēꜤ, 또는 라)와 '지평선에 거하는' 호루스를 결합한 삼중의 별칭이다.

이집트학자 앨런(T.G. Alle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호루스의 눈(The eye of Horus)은 더 나아가 태양과 동일시되었다...Pyr. 698, 레(Re)와 호루스(Horus)를 동일시하고 있거나, 원래 호루스 자신이 거주하는 장소로 추가되어 가정된 사례이다.”[21]

예를 들어, Pepis II, PT-402§698d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ppy|)(|nfr-kꜢ-rꜤw|)pw jr.t tw n.t{ḥr.w} ‹raw› sḏr.t jj.t msi.t raw-nb.

“페피 네페르카레(Pepi Neferkare)는 매일 밤에 잉태되고 태어나는 호루스 (레)( {Horus} ‹Re›)의 눈이다.”

이집트학자 에드워드(S. Edwards)는 피라미드 "T[eti]에는 레의 눈이 있고, N[eith]에는 호루스의 눈이 있다"[22]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는 호루스와 레가 동의어로 생각되었음을 의미한다. 호루스의 눈의 불꽃과 열은 특히 중왕국 관 텍스트(MK CTs)에서 자세히 설명되고 있된다. 예를 들어, CT-313:91에는 :

“나는 신성한 이시스(Isis)에게서 태어난, 오시리스(Osiris)의 아들 호루스이다. 나는 켐미스(Chemmis)의 왕이고, 내 얼굴은 신성한 매의 얼굴이다. 나는 화염 속에서 내 눈을 창조했다… .”[23]

이집트 학자 송크와일러(R.L. Shonkwiler)는 호루스가 태양의 열과 불꽃(heat and flame)에 의해 태어났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태양의 아이(solar child)'인 호루스는 불꽃에 의해 잉태된 후, 불의 섬에서 태어났다."[24]

호루스의 또 다른 별칭은 고왕국 피라미드 문서(OK PT)에서 그를 "불같은 숨결(fiery breath)"(Wb 1, 471.16) bḫḫ.w와 연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Unas PT-313§503a–503b.

ḥr.w sp 2 sbn(|wnjs|) [j]m m bḫḫ.w pn ẖr jkn.t nṯr jri=śn wꜢ .t n(|wnjś|) śwꜢ(|wnjś|) jm =ś(|wnjś|) pj ḥr.w

"... 호루스(두 번) ... 저 타오르는 불빛 우나스(Unas) 안에 있고... 아래에.. 신들이

그들은 우나스가 그 길을 지나갈 수 있도록, 우나스를 위한 길을 닦는다, 우나스는 (하나의) 호루스이다."

더욱이, '타오르는 불빛(‘fiery glow, bḫḫ.w(ḫḫ))의 음성학적 어근은 고왕국(Old Kingdom)의 신성한 이름 ‘황혼(twilight)’(jḫḫ.w, Wb 1, 126.5)과 공유된다. 즉, Teti PT-421§751b는 kk 어근 단어와 음성학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특색 3 참조).

 

특색 2의 요약

성경의 함(Ham)과 마찬가지로, 호루스(Horus)는 다음과 같은 개념과 동의어이다. A) (물리적) ‘폭력’(tkk); B) (흙빛) ‘검음’(km)/‘어두움’(kk)/ ‘황혼’(jḫḫ.w) C) (태양의) ‘열’(bḫḫ.w). 어근 ‘kk’ 의 의미는 특색 3에서 논할 것이다.

  

특색 3. 8명의 가족 — 호루스와 함의 비교

 

창세기(6:18 등)는 함이 4명의 남자와 그들의 아내로 구성된 8명의 가족의 일원이었음을 알려준다. 고대 이집트에는 4명의 남성 신들과 그들의 아내 신들로 구성된 8명의 신 그룹(Ogdoad)이 있었으며, 이들의 이름은 고왕국 피라미드 문서(OK PT)에 나타난다. 이전 기고문에서[25] 나는 이 그룹이 노아 가족의 이교화된 기억을 나타낸다고 결론내렸다. 호루스가 신격화된 함이라면, 호루스도 8명의 가족과 연결되어 있을까? 아래에 제시된 증거들은 그랬음을 가리킨다. 특히, Kek(kk)과 Keket(kk.t) 쌍의 이름들이 들어있는 오그도아드(Ogdoad, ‘8’을 뜻하는 그리스어, 여덟 신의 무리)가 그 예이다.[11]

위에서 설명한 함(Ham)의 의미처럼, 호루스(Horus)도 비슷한 개념으로 연결된다. 즉, ‘공격자’(tkk), ‘어둠/황혼’(kk, jḫḫ.w), 및 음성학적으로 유사한 ’뜨거움’(bḫḫ.w)과 연결된다. 오그도아드 kk는 음성학적 어근 kk가 포함된 단어에서 의미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ḫḫ를 비교해보라). 따라서 성경의 함, 호루스, 오그도아드 쌍들 kk(.t) 사이에는 의미적으로 공유되는 범위가 존재한다.

호루스와 오그도아드를 연결하는 추가적인 문서나 그림 증거로는 [사자의 서, BOD, Book of Dead’s Spells](그림 5~7)에서 나온 것이 있다.

 그림 5. 후네페르의 사자의 서(BOD)의 삽화. 17장, EA9901-8,c. BC 1292~1190. 이집트 제19왕조. (from Budge[26] plate 1). <E.A.W. Budge/Public Domain>

 

이집트학자 버지(E.A.W. Budge)는 ‘사자의 서’ 17장(그림 5)에서 후네페르(Hunefer)의 삽화의 맥락을 설명한다.

"일출(The sunrise). 아치형 하늘 아래에는 뱀(serpent)으로 둘러싸인 원반을 머리에 얹은 한 마리의 매[hawk, 호루스]... 라-하르마키스(Ra-Harmachis, 원문 그대로)가 서 있다. 오른쪽에는 세 마리, 왼쪽에는 네 마리의 원숭이들이 있는데, 이는 해가 뜨자마자 원숭이로 변하는 새벽의 정령(spirits of the dawn)들을 상징한다. 수반된 전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라(Ra)가 지평선에 떠오를 때, 경배하라. 오! 이 원숭이들, 라-하르마키스를 숭배하라.'”[26]

그림 6에서 보듯 ‘사자의 서’에서 나온 다른 증거들은 호루스를 오그도아드 사이에 배치하고 있다. 이집트학자 버지(E.A.W. Budge)는 이 삽화의 맥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케멘누(Khemennu, 오그도아드 도시)의 이중 계단 꼭대기에 누워 있는 안하이(Anhai, 원문 그대로)의 미이라 … 여덟 개의 흰색 디스크[Khemennu/Ogdoad를 나타냄]는 푸른빛의 땅 위에 있다 … 누 신(god Nu, 노아처럼 들린다)이 딱정벌레와 태양 원반, 그리고 일곱 신들을 실은 배를 들어올리고 있다 … .”[27] 

그림 6. 아니(Ani)의 파피루스 EA10470. 누(Nu)가 호루스(뒷면, 왼쪽)와 의인화된 7명의 신들이 탄 태양의 배를 들고 있다. 아마도 오그도아드(Ogdoad)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from Budge[26], plate 8).

 

여기서 질문해야 할 의문점 하나는 태양의 배(solar bark)의 모양이다. 만약에 그것이 방주를 의미한다면, 노아의 방주와는 모습이 같지 않다. 신성한 배는 평평한 용골, 눈에 띄게 높고 구부러진 뱃머리, 선미 및 고정된 후방 노가 있다. 이 특별한 모양은 2부(특색 10)와 그것의 치수(특색 6)에서 설명할 것이다.

 

여덟 명의 신들과 호루스

'새벽의 정령(spirits of the dawn)'들은 일반적으로 첫 일출을 알리는 여덟 마리의 개코원숭이(baboons)었으며, 이는 오그도아드(Ogdoad)를 의미한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오아시스 바리아(Bahria Oasis)에 있던 제26왕조의 반넨티우(Ba-n-nentiu) 무덤 벽의 비문에서 입증되었다. 그림 7의 아랫 부분에서 원숭이 형태의 오그도아드를 보여주며, 윗 부분에서는 태양으로 숭배받는 호루스와, 다양한 신들을 태운 태양의 배가 하늘을 가로질러 항해하고 있다. 

그림 7.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수(Shu)를 돕는 개코원숭이(아랫 단)들로서 오그도아드. (from Fakhry28).

 

오그도아드(Ogdoad) 위에 쓰여진 카르투슈(Cartouche, 고대 이집트에서 사용하던 상형문자 기호 중 하나로 파라오의 이름을 둘러싸는 테두리)는 다음과 같다(오른쪽에서 왼쪽으로) : 누(Nu), 누네트(Nunet), 아문(Amun), 아무네트(Amunet), 헤헤트(Hehet), 헤흐(Heh), 케켓(Keket), 켁(Kek). 또한 오그도아드는 히비스(Hibis) 신전의 아문(Amun)에게 바치는 대찬가에서 결정적으로 볼 수 있듯이, 한 마리의 개코원숭이로 상징되기도 한다.[29] 이집트학자 데이비드 클로츠(David Klozt)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히비스 신전에서 개코원숭이는 갓 태어난 태양(newborn sun)으로 다뤄지는데, 메디넷 하부(Medinet Habu)의 태양 신전(Solar Chapel)에도 있다. 동시에 개코원숭이 위의 가로 텍스트는 실제로 ‘위대한 아문 찬가(Great Amun hymn)’에서 발췌한 것인데, 이는 이들 여덟 마리의 개코원숭이들이 동시에 오그도아드로 이해되고 있음을 가리킨다. 오그도아드는 메디넷 하부의 소신전(Small Temple of Medinet Habu)에서만 아문(Amun)과 연관되어 있으며, 히비스(Hibis)에서 그들의 눈에 띄는 존재는 메디넷 하부와 히비스의 신학 사이의 어떤 관계를 암시한다…

[각주 68] "그레이트 아문 찬가의 0열 … '오그도아드'를 개코원숭와 함께 적고 있다[결정적임]."[30]

사자의 서 후네퍼 그림(그림 5)에서 숭배하는 개코원숭이 모습에는 오그도아드()를 가리키는 상형문자 htt "Screamer"(Wb 2, 504.4-6)가 함께 동반되어 있다. 그러나 호루스 라-하라크티(Horus Ra-Harakhty)를 숭배하는 개코원숭이는 일곱 마리뿐이다. 그것은 오그도아드 멤버 중 한 명이 호루스가 된 것을 나타내는 것 같다. CT의 한 구절이 이 이론을 뒷받침해준다.

CT-50:223–225

“추종자들이 혼돈의 신들(Chaos-Gods)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아버지의 수호자인 호루스는 기뻐했다… 켐(Khem)에서 가장 뛰어난 호루스 … 당신은 두 혼돈의 신 중 하나에 속한다 …”[31]

나는 이전에 여덟 명의 혼돈의 신이 오그도아드와 연결된다는 것을 증명했다.[32] 혼돈의 신은 쌍으로 나타나는데, 여기에서 혼돈의 신 쌍들 중 하나가 "호루스에 속한다"고 묘사돼 있다. 이는 원시적인 어둠을 상징하는 kk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kk가 태양으로 올라가는 것은 황혼에서 새벽으로 가는 자연스러운 과정과도 같은 것이다.

 

특색 3 요약

함(Ham)이 노아의 여덟 가족에서 나왔듯이, 호루스(Horus)도 여덟 신의 무리에서 나온다.

  

특색 4. 함과 호루스는 삼형제

 

성경은 노아에게 세 아들이 있었다고 말한다 : “그의 막내” 함(창세기 9:24)과 “장자 야벳의 형제, 셈… 여기서 성경은 함을 묘사하기 위해 형용사 קָטָן(qāṭān) HALLOT-8338 '작고, 막내의(small, younges)'를 사용한다. 호루스의 가계에서 이와 유사한 관계가 발견될 수 있을까? 다음의 증거는 이것이 사실임을 시사해 준다.

호루스는 Pepis I PT-539§1320c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Hr.w nẖn(.w) ḫrd

호루스, 작은 아이야”

호루스에게는 세트(Seth)라는 주목할만한 형제가 있었는데, 그는 그와 격렬하게 싸웠다(특색 8 참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Merenre PT-615§1742a.

jmi.y jr(.t)-ḥr.w ḥr ḏnḥ n.j sn=f stš

호루스의 눈을 그의 형제(brother) 세트의 날개에 꽂으라.”

또한 Pepis I-667a§1948b

“[호루스는] [그의] 형제[세트]가 그에게 행한 일에서 깨끗해질 것이며, [세트는 그의 형제 호루스]가 그에게 행한 일에서 깨끗해질 것이다 … 호루스는 아버지 오시리스를 포옹함으로써 정화될 것이다 ”

토트(Thoth)라고 불리는 또 다른 신은 파피루스 텍스트(PTs)에서 호루스(Horus) 및 세트(Seth)와 지속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며, 체르막(Cermark)이 지적한 바와 같이, 세트와 토트 사이에는 중첩된 점이 분명히 있으며, 실제로 가족 관계가 종종 모순된다.[33] 세트는 호루스의 형제이다. 그러나 동시에 파피루스 텍스트에서는 오시리스의 형제이다. 그러나 세트와 토트는 다음처럼 함께 형제로 묘사된다.

Neith PT-218§163d (역주 : Neith(네이트)는 이집트 신화의 여신)

m=k jri.t.n stš ḥna ḏḥw.tj sn

“당신의 형제들(brothers), 세트(Seth)토트(Thoth)가 한 일을 보라”(Pharaoh Neith 참조).

Neith PT-370–375.

ḫai.t(j) m bj.t(j) ḥr.w ḏḥw.tj snsn.w jr=k m sn bj.t(j) {ḥr.w} {ḏḥw.tj}

“당신은 하(下)이집트의 왕으로 나타났다. 호루스(Horus)토트(Thoth)는 하이집트 왕의 두 형제로 당신과 합류했다”(Pharaoh Neith 참조).

다음 중왕국 관 텍스트(Middle Kingdom Coffin Text)는 호루스(Horus), 세트(Seth), 및 토트(Thoth)의 형제애를 분명히 보여준다: CT-681.

"오 토트, 창잡이(Harpooner)의 아들, 호루스와 세트의 형제, 그는 당신의 왕좌에 있다. 세트를 잠잠케 하소서." (Faulkner 2004: II, 246).34

체르막은 신화 속 두 형제 호루스와 세트의 싸움에서 "그는 두 싸움꾼 호루스와 세트를 진정시켜 세상의 불화의 원형을 종식시켰다"[35]는 점에서 토트의 역할을 인정하고 있다(특색 8 참조).

그리고 ‘사자의 서’에서 Pennesuttawy의 TIP 파피루스(Egyptian Museum JE95881)는 오시리스를 토트의 아버지로 기술하고 있다.

“말씀 신들의 주이신 토트에 의해서 말해진 말씀(Words), 영원의 주[wsir nb ḥḥ]이신 그의 아버지 오시리스 앞에서, 위대한 아홉 신들을 위해 옳은 것을 썼다.”[36]

 

특색 4 요약

호루스에게는 형제 세트(Seth, 두 형제 모두 오시리스의 아들)가 있었는데, 그와 정치적 지배권을 놓고 격렬하게 싸웠다(part 2의 특색 8 참조). 밀접하게 나란히 있는 토트(Thoth)라는 신은 피라미드 텍스트에서 세트(Seth), 또는 호루스(Horus)의 형제로 묘사되고 있으며, 관 텍스트(Coffin Texts)에서 호루스, 세트, 토트는 한 형제로 묘사되고 있다. 사자의 서에서 토트는 호루스 및 세트와 같은 아버지(Osiris)를 공유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을 고려할 때, 호루스는 다른 두 형제가 있었고, 자신이 '막내'로 묘사된다는 점에서 함과 비슷하다.

  

결론

 

이 글에서는 함의 삶에서 네 가지 특색을 살펴보았고, 이를 이집트의 팔콘 태양신 호루스와 비교하여 보았다.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 긍정적인 연관성을 발견했다 :

특색 1. 함(Ham)은 아담(Adam)의 11대 후손이었다. 위대한 엔네아드(Great Ennead) 관련 파피루스 텍스트(PT)의 증거들에 오시리스가 방관하던 아버지로 포함되면, 호루스(Horus)는 아툼(Atum)의 11번째 후손이 될 수 있다.

특색 2. 함의 이름의 어원에는 (물리적) "폭력", (흙빛의)"검음/어둠", (태양의) "뜨거움“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개념은 호루스의 신성한 별칭과 매우 유사하다.

특색 3. 함은 4명의 남자와 4명의 여자로 구성된, 8명의 가족 중 일원이었다. 호루스는 4명의 남성 신과 4명의 여성 신들로 구성된 오그도아드(Ogdoad)에서 권좌에 오른다. 특히 호루스는 오그도아드의 일원 중에서 kk(어둠)와 연결되어 있는데, 이 경우 kk는 어둠이 빛으로 자연스럽게 승격되어, 태양으로서의 호루스로 변모하는 과정을 따르고 있다.

특색 4. 야벳, 셈, 함의 세 형제 중에서 함은 막내였다. 호루스는 주목할 만한 형인 세트를 둔 '아이'이며, 또 다른 형제 신인 토트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연관성은 흥미롭기 때문에 더 연구할 가치가 있다. 2부에서는 특색 5~12를 분석할 것이다.

 

References and notes

1. See introduction in: Pinch, G.,Handbook of Egyptian Mythology, ABC-Clio, CA, pp. 143–147, 2002.

2. creation.com/timeline.

3. Cox, G., In search of Adam, Eve and creation in Ancient Egypt, J. Creation35(1):61–69, 2021.

4. Klotz, D., Adoration of the Ram: Five hymns to Amun-Re from Hibis Temple, Yale Egyptological Seminar, CT, p. 118, 2006.

5. Ryholt, K., The Turin King List, Ägypten und Levante 14:135–155, 2004; p. 139.

6. Waddell, W.G., Manetho, Harvard University Press, London, p. 3, 1964.

7. Waddell, ref. 6, p. 5.

8. Cox, G.,The search for Noah and the Flood in ancient Egypt—part 3. ,J. Creation34(2):67–74, 2020.

9. Garsiel, M., Biblical Names: A literary study of midrashic derivations and puns, Graph Press, Jerusalem, p. 86, 1991.

10. Cassuto, U., A commentary on the book of Genesis II, Verda Books, IL, p. 234, 2005.

11. Cox, ref. 8, p. 71.

12. Loprieno, A., Ancient Egyptian: A linguistic introduc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Cambridge, p. 35, 1995.

13. Loprieno, ref. 12, p. 42.

14. Hoch, J.E., Semitic Words in Egyptian Texts of the New Kingdom and Third Intermediate Period, Princeton University Press, NJ, pp. 230, 456 ̶ 520, 1994.

15. Allen, T.G., The Egyptian Book of the Dead, University of Chicago Press, IL, p. 35, 1960.

16. Blackman, A.M. and Fairman, H.W., The Myth of Horus at Edfu- II, J. Egyptian Archaeology,28:32–38, 1942; p. 32.

17. Allen, T.G., Horus in the Pyramid Texts, Ph.D. dissertation, University of Chicago, Chicago, p. 27, 1916.

18. Chassinat, E., Le Mystère D’osiris au Mois de Khoiak, Le Caire Imprimerie de L’institut Français D’archéologie Orientale, (translated from original French.), p. 182, 1966.

19. Chassinat, ref. 18, p. 175.

20. Chassinat, ref. 18, p. 183.

21. Allen, ref. 17, p. 13.

22. Edwards, S.,The symbolism of the eye of Horus in the Pyramid Texts, Ph.D. thesis, University College of Swansea, p. 137, 1995.

23. Faulkner, R.O.,The Ancient Egyptian Coffin Texts, vol. I, Spells 1–354, Aris & Phillips, Warminster, p. 234, 1973; also CT-205:145; 249:343; 316:98.

24. Shonkwiler, R.L.,The Behdetite: A study of Horus the Behdetite from the Old Kingdom to the conquest of Alexander, Ph.D. thesis, University of Chicago, IL, p. 413, 2014.

25. Cox, G., The search for Noah and the Flood in ancient Egypt: part 1and part 2, J. Creation33(3):94–108, 2019.

26. Budge, E.A.W., Facsimiles of the papyri of Hunefer, Ankhai, Kērasher and Netchemet, Longmans and Co., Oxford, p. 4, 1899.

27. Budge, ref. 26, p. v, plate 8.

28. Fakhry, A., The Egyptian deserts—Bahria Oasis, Cairo Gov. Press, Bulâq, p. 75, 1942.

29. Fakhry, ref. 28, p. 77; example from temple of Kharga.

30. Klozt, D., Adoration of the Ram: Five hymns to Amun-Re from Hibis Temple, Yale Egyptological Seminar, New Haven, CT, p. 10, 2006.

31. Faulkner, ref. 23, p. 47.

32. Cox, ref. 25, p. 99.

33. Čermák, M., Thoth in the Pyramid Texts, Ph.D. thesis, Univerzita Karlova v Praze, Filozofická fakulta, Ústav filosofie a religionistiky, pp. 22, 62, 2015.

34. Faulkner, R.O.,The Ancient Egyptian Coffin Texts, vol. II, Warminster, Aris and Phillips, 1977.

35. Čermák, ref 33, p. 75.

36. Quirk, S., Going out in Daylight—prt m hrw, Golden House Publications, Croydon, UK, p. 515, 2013.

 

Related Articles

Horus—the deified Ham : part 2

Finding Adam—in Ancient Egypt

The search for Noah and the Flood in ancient Egypt—part 4

The search for Noah and the Flood in ancient Egypt—part 3

The search for Noah and the Flood in ancient Egypt—part 2

The search for Noah and the Flood in ancient Egypt—part 1

The search for Adam, Eve, Noah and the Flood—in Ancient Egypt?

 

Further Reading

History Questions and Answers

Archaeology Questions and Answers

 

*참조 : 이집트의 태양신 호루스는 신격화된 함이다 : 2부

https://creation.kr/archaeology/?page=1#16067923

고대 이집트에서 아담 찾기

https://creation.kr/Genesis/?idx=14698183&bmode=view

노아의 16명의 손자 : 고대의 지명과 민족들의 이름 속에 남아있다.

https://creation.kr/EvidenceofFlood/?idx=1288381&bmode=view

이집트 연대기와 성경 : 현장 고고학자 데이비드와의 대화

https://creation.kr/archaeology/?idx=1288729&bmode=view

▶ 성경을 지지하는 고고학

https://creation.kr/Topic502/?q=YTox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9&bmode=view&idx=6824724&t=board

▶ 성경적 역사를 지지하는 발견들

https://creation.kr/Topic502/?q=YTox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9&bmode=view&idx=6791252&t=board

▶ 바벨탑

https://creation.kr/Topic502/?q=YTox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9&bmode=view&idx=6824661&t=board

▶ 창세기의 역사성

https://creation.kr/Topic502/?idx=6825522&bmode=view

 

 출처 : Journal of Creation 35(2):44–52, August 2021 (Posted on CMI homepage: 24 February 2023)

주소 : https://creation.com/horus-and-ham-1

번역 : 석원석

미디어위원회
2023-02-20

새로 발견된 이집트 석비는 

예레미야서에 기록된 왕이 실존했음을 증거한다.

(Newly discovered Egyptian relic witnesses to biblical king)

by Gavin Cox


     최근 이집트의 한 농부의 밭에서 훌륭하게 보존되어 있는, 상형문자들이 새겨져 있는 커다란 사암 석판(Slab of Sandstone)이 발굴되었다.[1] 이 석판은 길이 230cm, 너비 103cm, 두께 45cm의 것으로[2], 수에즈 운하의 서안(西岸)에 있는 이스마일리아(Ismailia) 마을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이스마일리아는 필자가 1999년 이집트의 내진(耐震) 산업체에 근무하던 중 우연히 방문한 곳이기도 함).

.약 2,6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비(stela)가 이집트 이스마일리아 시 근처의 한 농부의 밭에서 발견되었다. 거기에는 15줄의 상형문자 비문(hieroglyphic writtings)들이 새겨져 있었다. <BAR/ Egyptian Antiquities Ministry> 


석비(stela or stele)로 말해지는 이 석판은 와히브레 하아이브레(Wahibre Haaibre)라 불리는, 이집트 제26왕조의 파라오(pharaoh, 바로)에게 헌정된 것이다.(아래의 '파라오의 이름' 박스글 참조). 고고학자들은 이 파라오를 예레미야 44:30절에서 ‘호브라(Hophra, חָפְרַע)’로 언급된 이집트 왕으로 인정하고 있다.[3] 또한 그리스인들, 특히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us, 기원전 484~425년경)와 디오도로스(Diodorus 기원전 90~30년경)에 의해서, 와히브레는 아프리에스(Apries)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3세기 초의 이집트인 역사가였던 마네토(Manetho)는 이 왕을 그리스어는 Uaphris로, 이집트어로는 Waḥibprê로 표기했다.[4]

학자들은 이 다른 이름들이 같은 사람을 가리킨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이 이름들은 동일하게 보이지 않는데 말이다. 이집트 학자들은 성경의 기자(biblical writers)들이 파라오의 다양하고 긴 공식 명칭을 생략하고, 자주 축약형을 사용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것은 호브라(Hophra)에게도 행해졌는데, 이에 따라 그의 이집트식 이름이 히브리 문자로 음역되었고, 약간 변경되었다고 보는 것이다(아래 박스글 참조). 이것은 히브리어로 두 단어의 조합처럼 들리는 그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재치있게 표현한 것일 수 있다: 1) ‘hepha’는 비탄한 상태, 특별히 처형 전에 천으로 머리를 덮는 것(cover/veil one’s head)을 의미하고 2) ‘ra’는 악(evil)을 의미한다.[6] 결합된 단어는 '처형을 당하기 전에 악한 자의 머리를 가리다'와 같은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예레미야가 호브라에게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한 문맥과 잘 어울린다. 또 다른 언어적 유희는 호브라(Hophra)의 이름에 들어있는 ‘ra’가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히브리어로 '악마'를 뜻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이집트의 태양신을 나타낸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파라오 아프리에스(Pharaoh Apries)의 스핑크스, 카일루스 백작 소장품, 현재 루브르 박물관 소장. <Rama/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성경의 이야기와 역사.

BC 589년에서 570년 사이에 통치했을 가능성이 높은 호브라는 유다 왕 시드기야(Zedekiah)와 동시대의 왕이었다.[7] 호브라는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고 예루살렘이 약탈되기 전인, 이스라엘과 유다의 분열왕국이 끝나는 시대에 이집트를 통치했다.

호브라는 예레미야서에 그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보라 내가 유다의 시드기야 왕을 그의 원수 곧 그의 생명을 찾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손에 넘긴 것 같이 애굽의 바로 호브라 왕을 그의 원수들 곧 그의 생명을 찾는 자들의 손에 넘겨주리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 하셨느니라”(예레미야 44:30)

선지자 예레미야는 느부갓네살 2세(Nebuchadnezzar II)의 바빌로니아 군대가 예루살렘를 포위했다가, 호브라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방어하기 위해 왔을 때, 어떻게 철수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바로의 군대가 애굽에서 나오매. 예루살렘을 에워쌌던 갈대아인이 그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에서 떠났더라”(예레미야 37:5).

그러나 예레미야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느부갓네살 2세의 철수는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기 위해 돌아올 것이기 때문에, 일시적이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를 보내어 내게 구하게 한 유다 왕에게 아뢰라 너희를 도우려고 나왔던 바로의 군대는 자기 땅 애굽으로 돌아가겠고 갈대아인이 다시 와서 이 성을 쳐서 빼앗아 불사르리라”(예레미야 37:7~8).

하나님은 또한 유다 성읍들은 주민이 없어 처참한 황무지가 될 것이라고 말씀한다(예레미야  34:2-22). 바빌로니아 연대기(Babylonian chronicles)에 의하면, 예루살렘은 18개월에 걸친 오랜 포위 공격 후에, BC 587년 또는 586년에 바빌로니아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8] 그러나 느브갓네살 2세는 호브라를 죽이지 않았는데, 예레미야의 예언에 따르면 오히려 호브라의 내부 적들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집트와 그리스 자료의 증거에 따르면, 이집트에 내전이 있었고, 그 기간 동안 호브라와 그의 그리스 용병 군대는 해외로 도망갔다가, 나중에 이집트로 돌아와 아마시스(Amasis, Ahmose II)의 손에 살해당했다. 아마시스는 BC 570~526년 사이의 통치자이다.[9] 따라서 예레미야서의 기록은 성경 밖의 외부 자료들과 함께, 호브라의 불운했던 이스라엘 여정의 세부 사항들을 채워 준다(예레미야 37:7~8).

 .석비가 발견된 곳 근처의 도시 이스마일리아.


결론

이스마일리아에서 새로 발견된 이 석비는 성경에 나오는 파라오(바로) 호브라에게 헌정된 것으로, 그의 존재를 확증해 주는 성경 외적의 중요한 증거의 한 조각이다. 그리스와 이집트의 자료에 따르면, 호브라는 내부 적들의 손에 죽었으며, 바빌로니아 왕이 죽인 것은 아니다. 이러한 성경 밖의 자료들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이 사실임을 확증해 준다.

학자들은 여전히 석비의 번역 작업을 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이 호브라와 예루살렘 왕 시드기야와 느부갓네살 2세와의 상호관계나, 아마시스의 손에 의한 호브라의 죽음에 대한 정보를 추가한다면, ‘성서고고학’ 분야에서 하나의 빅 뉴스를 제공할 것이다.


----------------------------------------------------------

파라오의 이름(Pharaonic names)


이집트 파라오(바로)의 이름은 5개의 왕실 칭호로 구성되어있다. 첫 번째는 '호루스 이름(Horus name, 성씨와 같은)'으로, 파라오의 칭호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왕조 이전 시대(이집트의 시작, 아마도 노아의 아들 함(Ham), 및/또는 함의 아들 미스라임(Mizraim, 이집트를 나타내는 히브리어 이름)로 거슬러 올라간다. 호브라(Hophra)의 개인 이름은 ‘와히브레(Wahibre)’로, 'Re의 마음이 변하지 않는 자'를 의미한다.[10] 이집트 상형문자에서 개인 이름은 소위 카르투시(Cartouche)라 하는 난(卵)형의 심볼 안에 쓴다.

오리 기호는 '아들'을 의미하고, 점찍은 원은 태양신 ‘Ra’를 나타낸다. 붙여서 sa ra로 발음하며, 'Ra(태양신)의 아들'을 의미한다.

이집트학자인 케네스 키친(Kenneth Kitchen)은 이집트식 이름인 와히브레(Wahibre)는 성경의 히브리식 이름인 호브라(Hophra, חָפְרַע)와 동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는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에서 Wahibre의 처음 부분 ‘Wa’의 생략으로 Hophra와 Apries가 형성되었다고 언급한다.[11] ‘b’ 와 ‘ph’ 사이의 소리 차이는 이집트인들이 세월이 지나면서 어떤 자음에 대해서는 하나로 합치는 경향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래서 가끔 ‘p’와 ‘ph’로 발음하였다.[12]

-----------------------------------------------------------


References and notes

1. Steinmeyer, N., New Stele of Biblical Pharaoh Found, biblicalarchaeology.org, 1 Jul 2021

2. Jarus, O., Farmer discovers 2,600-year-old stone slab from Egyptian pharaoh, livescience.com, 18 Jun 2021

3. Kitchen, K.,On the Reliability of the Old Testament, William B. Eerdmans, Michigan, pp. 16, 24, 66, 2003

4. Waddell, W.G.,Manetho, Harvard University Press, London, pp. 170–171, 1964

5. This word also occurs inII Samuel 15:30;Jeremiah 14:3–4;Esther 7:8

6. Koehler, L.,et al.,The Hebrew and Aramaic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Vols. 1–5, Brill, Leiden, 2000, nos. 3079, 8868

7. Kitchen, ref. 3, pp. 24

8. Kitchen, ref. 3, p. 66

9. Leahy, A., The Earliest Dated Monument of Amasis and the End of the Reign of Apries,The Journal of Egyptian Archaeology,74:183-199, 1988. Greek historians Herodotus (II, 162–9) and Diodorus Siculus (I, 68, 2–5) give differing accounts of the location of Hophra’s death. A stela of Amasis from Elephantine (BM 952) indicates the Egyptians went over to Amasis en masse from Hophra. A fragment of a Babylonian royal text (BM 33041) gives corroborating dates for Nebuchadnezzar’s campaign into the Levant

10. Clayton, P.A.,Chronicle of the Pharaohs: The Reign-by-Reign Record of the Rulers and Dynasties of Ancient Egypt, Thames & Hudson, London, pp. 195–197, 2001

11. Kitchen, main text ref. 3, p. 16

12. Loprieno, A.,Ancient Egyptian: a linguistic introduc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Cambridge, p. 24, 1996.


*참조 : 자료실/성경을 지지하는 고고학

https://creation.kr/Topic502/?q=YTox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9&bmode=view&idx=6824724&t=board

자료실/고고학

https://creation.kr/archaeology


출처 : Creation 44(1):21–23, January 2022   

주소 : https://creation.com/egyptian-relic-witnesses-to-biblical-king

번역 : 석원석

미디어위원회
2022-11-15

성경의 연대를 확인해주는 지구자기장 데이터

: 고대 이스라엘의 파괴된 도시들에 대한 새로운 연대측정.

(Magnetism Confirms Biblical Dates)

David F. Coppedge


 지구자기장은 인류와 생물들이 살아가는 데에 여러 이유로 중요하다.

 이제 또 다른 이점이 밝혀졌다. 고고학적 유적지의 연대측정이다.

 

    고대의 제국들이 중동(Middle East)의 도시들을 파괴했을 때, 그들은 수천 년 후에 지구물리학자(geophysicists)라고 불리는 똑똑한 사람들이 나타나, 언제 도시들이 파괴됐는지를 기웃거리고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정복자들이 파괴한 불에 탄 벽돌들에 남겨져 있는, 보이지 않는 힘(지구자기장, earth’s magnetic field)을 읽음으로써, 그것을 할 수 있었다. 지구자기장은 태양과 먼 우주로부터 오는 치명적인 방사선으로부터 모든 생명체들을 보호한다.

역사학자들은 자기 나침반(magnetic compass)이 그리스도보다 몇 세기 전인, 중국 한나라(Han dynasty)에서 발명되었다고 말한다. 그 이전 수세기 동안, 왕들은 그들의 제국을 확장하려고 노력하면서, 도시들을 정복해갔다. 성경에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왕국을 침략해온 시리아, 블레셋, 이집트, 에돔, 아시리아, 바빌론의 군대들로부터 도시들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많은 전투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 도시들 중 일부는 불에 탔고, 파괴되었다. 불에 탄 물질에 있던 용융된 금속과 점토에는, 수천 년 후에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이 발명한 정밀한 기구로 측정될 수 있는, 지구자기장의 강도와 방향을 서명으로 남겨놓았다. 아리엘 데이비드(Ariel David)는 이스라엘 신문 하레츠(Haaretz, 2022. 10. 25) 지에 글을 썼다.

성경에 따르면, 성지(Holy Land)는 고대 이집트인부터 아람인까지, 아시리아인부터 바빌로니아인까지, 여러 제국들이 정복하려 했던 빈번한 목표였다. 물론 성경은 이러한 비극들을 종교적 관점에서, 대게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서 해석한다. 그러나 성경 본문에 언급되어 있는 많은 전쟁들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제 텔아비브 대학(Tel-Aviv University)의 과학자들은 과거 사건들의 연대 표시로, 그들의 자기적 서명(magnetic signatures)들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고고학적 장소들은 오랫동안 한 다른 힘의 장(약한 핵력, weak nuclear force)에 의존하는, 방사성 측정 기술인 방사성탄소(C-14) 연대측정법에 의해서 연대가 측정되어왔다. 방사성탄소 연대측정법(radiocarbon dating)은 또한 지구자기장에 의존하는데, 왜냐하면 대기에 들어있는 C-14의 비율은 우주선으로부터 질소 원자를 보호하기 위한 지구자기장의 강도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방사성탄소 연대측정법은 수천 년 정도의 범위 내에서는 정확하지만, C-14의 생성 속도에 대한 가정 때문에, 그 이전 시간에 대한 측정은 오류가 발생하기 쉽다. 그리고 다른 문제점들이 있다(2022. 7. 28. 참조).

사람들이 살던 도시들은 종종 불에 타버렸고, 어떤 경우에는 100년 정도 후에 다시 약탈당했다. 오늘날 고고학자들은 여러 파괴된 층들에 대해 곤혹스러워하며, 누가 무엇을 언제 파괴했는지 알아내려고 애쓰고 있다.

때때로 고고학자들은 잔해의 연대를 밝히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문서와 비문을 갖고 있다. 적은 경우이지만, 고대 관측자들에 의해서 개기일식과 같은 천체 현상이 기록되어 있을 수도 있다. 이 경우에 천문학자들은 천체역학을 사용하여 그 날짜를 정확하게 계산해낼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 텔스(tells)라 불리는 언덕에 있는 많은 파괴 층들의 연대는 문제를 갖고 있다. 아리엘 데이비드는 "레반트(Levant, 근동의 팔레스타인,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등이 있는 지역) 지역의 고대 유적지들에 대한 연대 관련 질문들은 순수하게 학문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썼다. "그 연대들은 성경이 사실인지 허구인지에 대한 오랜 논쟁의 중심에 놓여 있다.“

방사성탄소는 유기물 잔해를 필요로 하는데, 이것은 이 방법을 항상 사용할 수 없음을 뜻한다. 그리고 유기물 잔해가 있다 하더라도, 오류의 정도는 종종 너무 커서, 확실성을 입증할 수 없다. 연대를 독립적으로 확인하려는 작업은 성경의 역사성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도움이 될 것이다. 유명한 이스라엘 핀켈슈타인(Israel Finkelstein)을 비롯한 일부 자유주의 고고학자들은 철기시대 유적에 대해 "저연대(low chronology)" 설을 주장하면서, 다윗과 솔로몬은 성경의 열왕기와 역대기에 기록된 광범위한 제국을 건설할 수 없었던, 지역적 군주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성경 본문을 신뢰할 수 있는 역사적 서술로 받아들이는 보수주의자들은, 핀켈슈타인의 연대기가 제안된 이후, 줄곧 성경적 기록을 입증할 증거들을 찾기 위해 노력해 왔다. 새로운 고지자기 데이터는 그러한 논쟁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이 팀의 연구는 "인상적"이라고, 이번 토론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인 텔아비브 하이파 대학의 고고학자인 핀켈슈타인은 말한다. "특히 기원전 8세기 중반 이후 방사성탄소 연대가 신뢰할 수 없는 시기에, 고지자기 연대는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이다"라고 고지자기 연구에 참여하지 않은 핀켈슈타인은 말한다.

하레츠 지의 기사는 "성경의 역사성에 대한 논쟁에서 종종 반대편에 서 있는 12명 이상의 최고 고고학자"들이 연구에 참여했다고 말한다. 초기 결과는 PNAS 지(2022. 10. 24)에 “지구 자기장 데이터를 활용한 성경적 군사 활동의 재구성”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이 연구의 중요성은 논문의 맨 앞에 설명되어 있다.

히브리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을 연구하는 것은 원문 조사와 고고학적 조사를 수반하는 복잡한 작업이며, 종종 매우 논쟁적인 결과를 낳는다. 여기에서 우리는 화재로 파괴된 고대 도시의 잔해에 대해 고고학적 조사를 적용한 한 접근법을 소개한다. 새로운 자기 자료(magnetic data)는 고고학적 전후 사정을 특정한 군사 작전과 연결할 수 있는 시간적 통찰력을 제공했고, 성경의 이스라엘 역사와 유다 왕국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했다. 여러 분야가 협력한 이 연구는 또한 지구자기장(geomagnetic field)이 빠르게 변화(붕괴)하여, 오늘날의 자기장보다 두 배나 더 강렬했던 그 시기에, 지구자기장의 독특한 행동을 재구성하였다. 이것은 지구물리학(geophysics)에서 지구역학적 모델링을 포함하여, 다양한 연구 분야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역사적 확인

텔아비브 대학의 보도자료는 낙관적이다. '성경: 사실인가 허구인가(The Bible: Fact or Fiction?)'라는 제목하에, “연구자들은 지구자기장을 이용해,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이 침략당한 전쟁들을 확인하였다”라며, 구체적인 사례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텔아비브 대학과 히브리 대학의 공동 연구는 여러 국적의 다른 학문들을 하는 20명의 연구자들이 참여한 것으로, 불에 탄 잔해에 기록된 지구자기장의 방향 및/또는 강도를 재구축함으로써, 이스라엘에 있는 17개의 고고학적 유적지에서 21개의 파괴층들을 정확하게 측정했다. 이 새로운 자료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왕국에서 일어났던 이집트, 아람(시리아), 아시리아, 바빌로니아의 침략 전쟁들에 대한 성경적 기록을 확인할 수 있게 해주었다.

예를 들어, 아람-다마스쿠스(Aram-Damascus)의 왕 하사엘(Hazael)의 군대가 성경에 기록된 블레셋의 가드(Gath of the Philistines)를 포함하여, 텔 레호브(Tel Rehov), 텔 자이트(Tel Zayit), 호르밧 테벳(Horvat Tevet) 등 여러 도시들을 파괴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시에 이 연구는 하사엘이 텔 벧산(Tel Beth-Shean)을 파괴한 정복자였다는 지배적인 이론을 반박한다.

다른 지자기학적 발견은 바빌론 사람들에 의해서 예루살렘과 유다 왕국이 파괴된 틈을 타서, 에돔인(Edomites)들이 네게브(Negev)의 도시들을 파괴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보도 자료에서 수석 연구자인 요아브 바크닌(Yoav Vaknin)은 고지자기 기법(paleomagnetic technique)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방사성탄소와 성경 본문의 증거 모두 보정될 수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구자기장의 강도와 극성의 변화가 알려져있는 범위에서, 고지자기 기법은 독립적인 연대측정 방법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요아브 바크닌은 말했다. "자기장의 강도와 방향(intensity and direction of the magnetic field)의 유사성이나 차이를 근거로, 특정 장소가 동일한 군사작전 동안 불에 탔다는 가설을 입증하거나 반증할 수 있다. 게다가, 우리는 방사성탄소 연대측정 방법과 유사하게, 과학적 연대측정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 시간에 따른 자기장 강도의 변동 곡선(variation curve)을 구축했다.“

이 새로운 연대측정 기법은 지구에 생명체가 출현한 이래로, 생물권을 보호해 온 지구자기장의 또 다른 기능을 과학자들에게 제공하고 있었다.

이 연구의 지구물리학적 측면과 지자기 연대측정법(geomagnetic dating method)의 개발을 이끈 론 샤르(Ron Shaar) 교수는 "지구자기장은 우리가 존재하는 데에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지구자기장은 우주방사선과 태양풍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장 없이는 지구에 생명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또한 인간과 동물 모두 장거리 항해를 위해 자기장을 사용한다.“ 


그렇다면 성경은 정확했을까?

이 논문은 역사적으로 알려진 연대와 지자기 연대가 일치하고 있는 몇 가지 예를 제시하고 있다. 또한 이 기법은 벧산(Beth-Shan)의 파괴층에 관한 연대 논쟁을 해결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기술은 아직 시작 단계이다. PNAS 지의 논문은 더 많은 장소들에서 그 유용성을 입증해야 한다는 것으로 끝나고 있었다.

방사성탄소 연대측정(기원전 8세기 이전 기간)에 의존하는 연대학에서, 조밀한 고지자기 데이터들로부터 구성된 고지자기 강도 곡선과 확인된 역사적 연대가(기원전 8세기 이후) 어떻게 강력한 연대측정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것은 방사성탄소 연대측정이 제한적인 기간인, 할슈타트 고원(Hallstatt Plateau, 기원전 800~400년) 시기에서 특히 유용하다. 또한 이 연구는 고고학적 상황들이 동시대였는지와 같은 질문을 해결하는데, 특히 동시성을 부정하는 데에, 고지자기가 직접적으로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아람, 아시리아, 바빌로니아의 전투들은 지구자기장의 강도가 매우 높은 시기에 일어났으며, 뚜렷하게 최소값으로 분리되었다. 또한 이것은 레반트 역사의 다른 기간과 구별되는 주요 전투들의 연대를 구별하는 데에도 매우 유용할 것이다.

"동시성을 부정하는“ 것은 두 장소가 서로 다른 고지자기 특성을 갖고 있다면, 서로 다른 시간에 파괴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리엘 데이비드는 방사성탄소 연대측정과 고지자기 연대측정이 함께 사용될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하면서, 어떤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하레츠 기사를 끝마치고 있었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을 잘 알고 있는 그는, 분쟁이 계속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고지자기 연대측정이 성경의 역사성에 대한 끊임없는 논쟁을 해결해줄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을까? 글쎄, 그것은 확실히 강력한 새로운 도구이다. 하지만 현실을 직시해 보자. 고고학자들은 논쟁하기를 좋아하고, 현장에서 나온 데이터들에 대한 상반된 해석을 내놓기를 좋아한다. 따라서 이 새로운 방법은 대부분의 좋은 연구처럼, 많은 질문들에 대해 일부 해답을 제공하는 데에만 도움이 될 것이다.

PNAS 지의 논문은 성경의 어떤 본문이 사실로 확인되었다고 명시하지 않았지만, 어떤 본문이 오류로 밝혀졌다고 명시하지도 않았다. 앞으로 고고학에서 이 방법이 사용될 것인지 지켜보자.

 

----------------------------------------------------------

 모든 연대측정 방법들은 가정(assumptions)들에 의존한다. 이 측정방법도 그렇다. 세 가지 가정을 생각할 수 있다: (1) 시간에 따른 자기장의 일정한 쇠퇴(붕괴) 여부, (2) 시간에 따른 강도와 극성이 각인되는 과정의 변화 여부, (3) 작은 지자기 서명을 측정하는데 사용되는 장비의 신뢰성 등에 달려 있다. 우리는 이 방법이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에 대한 교차 점검의 방법으로 유용하게 사용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시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하나님의 시험 앞에 서야 하는 것이다(로마서 1:18~32). 우리는 우리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죄의 형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공하셨다.

 우리는 이 연구에서 몇 가지를 좋아한다. 우선, 이 연구는 지구자기장이 지속적으로 쇠퇴(붕괴)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해주고 있다. 젊은 지구를 가리키는 이 증거는 헨리 리히터(Henry Richter) 박사의 책 "우주선 지구: 승객들을 위한 안내서(Spacecraft Earth: A Guide for Passengers)" 7장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최근 업그레이드한 개정판이 나왔다). PNAS 지의 논문은 구약성경의 시대에 지구자기장은 "오늘날의 자기장보다 두 배 이상 강했다"고 말한다.

.리히터 박사의 책, "우주선 지구: 승객들을 위한 안내서(Spacecraft Earth: A Guide for Passengers)"은 우리의 몸, 행성, 우주의 많은 놀라운 지적설계의 사례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 작업의 또 다른 놀라운 측면은 지구의 거주 가능성(habitability)에 관한 것이다. 론 샤르 교수는 지구자기장이 "우리가 존재하는 데에 얼마나 중요하며", "인간과 동물 모두가 항해를 위해" 사용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었다.

동물들의 장거리 항해는 흥미로운 주제이다. 과학자들은 바다거북, 제왕나비, 철새 등과 같은 다양한 생물들이 자기장의 강도와 방향을 어떻게 감지하여, 어떻게 좌표를 설정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일러스트라 미디어(Illustra Media)의 영화 '리빙 워터스(Living Waters)‘는 지자기력을 이용한 바다거북의 항해를 다루고 있다.

창조주 하나님은 태양풍과 우주방사선으로부터 지구를 보호하시기 위해서, 자기장 방패를 설치해 놓으셨다. 이것은 그분의 지혜와 사랑에 대한 또 하나의 대표적 사례이다. 그분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신 사람과 각 종류의 생물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특별한 행성(Privileged Planet) 지구에는 자기장을 만들어놓으셨지만, 이웃 행성인 수성, 금성, 화성에는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다. 그것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완벽한 거주지를 준비하시고, 우리를 부르신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또 다른 이정표(signpost)인 것이다.

 창조주의 지혜를 가리키는 작은 서명이 성경에 기록된 3,000년 전 사건들의 불탄 도자기 조각들에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멋진 일이 될 것이다.

  


출처 : CEH, 2022. 10. 27.

주소 : https://crev.info/2022/10/magnetism-confirms-biblical-dates/

번역 : 미디어위원회

미디어위원회
2022-07-18

니므롯 : 노아 홍수 이후 최초의 폭군이자 제국의 건설자

(Nimrod : The first post-Flood tyrant and empire builder)

by James R. Hughes


지구상에 폭군이 나타나다

대홍수 후 몇 세대 안에 지구 역사상 최초의 폭군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은 니므롯(Nimrod)으로 함의 손자였다. 일부 주석가들은 '니므롯'이라는 이름이 '반역(revolt or rebellion)'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어근에서 유래했다고 제안한다.[1] 그렇지 않더라도 그의 이름은 반란을 의미한다.


니므롯—용사

창세기 10:8절은 니므롯이 '용사(mighty man)'가 된 최초의 사람이라고 알려준다(형용사 '용사(용감한 사람)'는 창세기 10:8~9절에 세 번 사용되었다. 추가로 역대상 1:10절 참조). '용감한(mighty)'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폭군(tyrant)'으로 번역될 수도 있다.[2] 그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은 홍수 이후에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공격적인 힘을 사용한 최초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노아와 셈과 같은 존귀한 사람들보다 자신을 높이고,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보다 높은 위치에 자신을 높이려고 시도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노아와 셈이 아직 살아 있어서, 당시의 폭군들을 포함하여 홍수 이전 사람들에게 임한 심판을 증언할 수 있는 시기임에도, 니므롯은 권력을 강화하고, 사람들에 대한 권위를 행사하며, 하나님께 도전하는 야심찬 행로를 추구했다. 니므롯 세대의 사람들은 약 400년을 살았을 것이다(창 11:17). 그의 긴 생애 동안(그가 암살되지 않았다는 가정하에), 그는 계속해서 권력을 확장하고, 그가 행한 악의 정도를 증가시켰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무자비함은 전설이 되었다.

<en.wikipedia.org>

니므롯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역사적 인물은 악카드(Akkad) 왕조를 창시한 ‘악카드의 사르곤(Sargon of Akkad)’ 또는 ‘사르곤 대왕(Sargon Great)’이다. 


니므롯 - 강력한 사냥꾼

성경은 또한 그를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으로 언급한다(창 10:9). 구약의 다른 모든 곳에서 이 단어는 동물을 사냥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많은 주석가들은 니므롯이 용(dragon)을 잡는 큰 경기에서 그것들을 추적하고 쓰러뜨리는 능력으로 유명해졌다고 결론을 내린다. 따라서 이것은 그가 최초로 인정된 '용' 사냥꾼이라는 언급일 가능성이 있다.[3]  당시에 방주에서 내린 용(공룡)의 후손들은 사람이 사는 세계 전역에 퍼졌을 것이다. 니므롯은 이 '용'을 쓰러뜨리고, 사납고도 약탈적인 동물로부터 인간의 정착지를 보호하는 것으로 유명해졌을 것이다. 그랬다면 하나님도 그의 행동을 기뻐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문맥은 우리가 이것을 다르게 이해해야 함을 시사한다. 니므롯은 ‘용감한 사냥꾼’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냥을 동물 사냥으로 제한하지 않고, 대신 그의 이웃을 사슴이나 가젤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했을 수 있다. 따라서 '여호와 앞에서'(창 10:9)라는 표현은 '여호와를 대적하여'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4]


니므롯—도시의 건설자

가인처럼(창 4:17) 니므롯은 바벨(Babel)이라는 도시를 건설했다(창 10:10). 바벨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평탄한 계곡에 있는 시날(Shinar, 이 지역의 남쪽 부분에 대한 초기 성경적 지명으로, 나중에는 바빌로니아(Babylonia, 바벨론)으로 불림)에 위치해 있었다. 오늘날 이 지역은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건조하고 황폐하다(사 13:19~22). 그러나 홍수 직후 수세기 동안 이 지역은 물이 풍부하고 생산성이 높았을 것이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에게 바벨이라는 이름은 '신의 문(gate of god)'을 의미했다.[5]  이는 바알(Baal)을 숭배하는 이교도들의 터전이었기 때문에 얻어진 이름으로 보여진다. 거기에서 탑은 이교도 신들(pantheon)을 기리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기 위해 세워졌다. 언약의 백성들은 그 도시 이름의 의미를 히브리어의 비슷한 소리 ‘바랄(balal)’을 사용하여 '하나님이 혼란스럽게 하셨다'라는 의미로 재해석했다(창 11:9).

바벨의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임시적이었을 바벨의 배후 지역은 그 인구를 지탱하기에는 너무 커져버렸을 것이다. 또한, 넓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단일 도시에서 인구를 통제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니므롯이 수메르에 다른 도시들을 세운 이유일 수 있다(창 10:10). 그는 이 도시들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했고, 홍수 이후의 첫 번째 왕국(kingdom)을 형성했을 것이다(창 10:10). 이것은 성경에서 언급된 최초의 나라이다.


니므롯 — 제국의 건설자

창세기는 니므롯이 앗수르(Assyria, 앗시리아)로 가서 그곳에 성읍들을 건설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창 10:11-12). 이 지역은 처음에 셈의 후손들이 정착한 곳이었다. 그래서 니므롯은 최초의 왕국을 형성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을 거듭 정복하여 왕국을 확장해서 제국을 건설한 것으로 보인다. 니므롯은 그의 제국 내의 영토를 통제할 수 있는 영구적인 정착지(고고학적 발굴의 발견에 기초하여 볼 때, 도시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을 가능성이 있음)를 설립했다. 앗시리아에서 그는 티그리스 강 유역(이라크 북부)에 처음으로 니느웨(Nineveh)를 세웠고, 이것이 앗시리아의 수도가 됐다. 우리는 요나(Jonah)가 방문했던 후대의 역사를 통해서, 니느웨가 상당히 넓은 지역을 차지했던 도시임을 알게 된다. 르호보딜(Rehoboth-Ir)과 레센(Resen)의 위치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갈라(Calah)는 19세기 중반에 발굴된 니므롯을 따서 명명된 님루드(Nimrud)라는 도시인 것으로 믿어진다. 헨리 레이어드(Henry Layard)는 그 도시 유적에서 2개의 커다란 날개 달린 사자상을 많은 운반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대영박물관으로 옮겼다. 유적지에서 발굴된 님루드의 보물들, 즉 황금보석류와 귀중한 석조물들은 2003년에 이라크의 약탈로 살아남았고, 바그다드에 보존되어 있다.  


니므롯—바벨에서 반란의 지도자

하나님은 인류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그분의 멋진 피조세계를 다스리라고 지시하셨다(창 9:1).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다른 방향으로 이주하는 대신에, 자신들을 하나의 중심 도시 주변에 함께 뭉치고 조직화하기로 결정했다(창 11:4). 이것이 당시 지구상의 모든 거주자가 하나의 도시 바벨에 살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창 10:10; 11:1). 바벨에서의 반란은 빠르면 홍수 후 아마도 130년 경에 일어났을 것이고, 늦으면 홍수 후 340년 경에 일어났을 것이다. 나중 시기인 340년 경으로 할지라도, 노아(창 9:28)와 적어도 노아의 아들들 중 셈(창 11:11)은 홍수 전 하나님에 대한 반역(창 6:5)과 그 결과를 목격한 증인으로 여전히 살아있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무지를 변명할 수 없다. 오히려 바벨론의 반역은 분명히 하나님의 법과 권위에 대한 노골적인 반역 행위였다. 창세기 11장에는 니므롯이 탑의 건축 책임자로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바벨의 창시자로서 그가 탑 건설을 감독했을 것으로 추측하는 것은 타당하다.[7] 요세푸스(Josephus), 탈무드(the Talmud) 그리고 후대의 구약성경 주석가들은 이 견해를 지지한다. 고대 중동의 이방 종교와 지구라트(ziggurats, 바벨탑과 유사한 것)의 본질에 대한 현재의 이해에 기초해 볼 때, 니므롯 지배하에 바벨론 사람들은 하늘의 성상들(태양, 달, 행성, 별)과 땅에 근거한 것들(바다, 강, 폭풍)과 연관된 신들의 종교를 창시했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점성술의 별자리와 징조의 사용을 위한 기초를 쌓았고, 그들이 만든 것이 나중에 아카드(Akkad)와 수메르(Sumer)의 주민들에 의해 전해졌고, 언어의 혼란(창 11:7~9) 후에 분산된 종족 그룹들과 함께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니므롯 — 역사적 인물

니므롯은 일부 세속적 역사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신화적 존재가 아니라, 한 명의 역사적 인물이었다.[8]  '니므롯(Nimrod)'이라는 이름은 창세기에서 이 부분을 기록한 저자가 사용한 폄훼어법(dysphemism, 비방어법)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 외의 역사에서 그가 누구로 언급되었는지를 물을 수 있는 것이다. 앗시리아 왕 투쿨티 니누르타 1세(Tukulti-Ninurta I), 이집트 왕 아메노피스 3세(Amenophis III), 또는 신화적 영웅인 마르두크(Marduk), 오리온(Orion), 길가메시(Gilgamesh) 등 다양한 가능성들이 제시되었다.[9] 그러나 가장 가능성이 있는 인물은 고고학자 머레이 아담스웨이트(Murray Adamthwaite)가 CMI의 ‘Journal of Creation’[10] 글과 ‘New Bible Dictionary’[11]에서 제시했던, ‘사르곤 대왕(Sargon Great)’, 또는 아카드(Akkad) 왕국의 창시자인 ‘아카드의 사르곤(Sargon of Akkad)’이다. (*사르곤(Šarru-kin: “왕은 정당하다”)라는 이름은 수세기 후에 ‘구 앗시리아 제국’의 왕 사르곤 1세(BC 1850)에 의해서, 그리고 천년 후 ‘신 앗시리아 제국’의 사르곤 2세(재위 BC 721~705)에 의해 사용된 왕조의 이름이다.) 

한때 역사가들은 사르곤의 통치 기간을 BC 2568년에서 2513년으로 추정했다.[12] 우리는 세속적 역사가들이 노아 홍수(약 BC 2345년경) 이전의 사건에 대한 연대측정 결과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1990년대에 그의 통치 기간은 BC 2334년에서 2279년으로 수정되었다.[13] 이러한 연대 범위도 아카드의 통치자 사르곤을 위치시키기에 노아 홍수의 시기와 너무 가깝다. 아담스웨이트가 언급한 바와 같이 최근 연구에 따르면, 사르곤의 통치 기간은 BC 2296년에서 2240년으로 연대가 변경되어야 한다.[14] 보다 최근에 사르곤의 재위 기간은 BC 2270~2215로 측정되기도 한다.[15] 이들 2개의 연대 범위는 사르곤 대왕의 통치 기간이 니므롯의 시대와 정확하게 맞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들은 바벨에서 바벨탑을 건축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연대(아마 BC 2245년에서 2215년 사이)와도 들어맞는다.

사르곤 제국의 영역은 본질적으로 창세기 10장 기록(시날과 악갓)에 언급된 것과 동일했지만, 소아시아로도 확장되었다(창세기 10장이 기록된 이후에 발생했을 수도 있음). 역사가들은 사르곤 대왕(아카드의 사르곤)을 제국을 만든 최초의 사람으로 간주하고 있는데, 이것은 니므롯에 대해 우리가 말하고 있는 내용과 잘 들어맞는다. 성경은 니므롯을 최초로 제국을 건설한 사람으로 분류한다. 따라서 그들은 같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니므롯 제국의 종말

역사가들은 사르곤 대왕의 왕조가 1세기 반 동안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했으며, 그가 BC 2215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제국의 신민들은 그의 죽음을 듣고 반란을 일으켰다고 믿고 있다. 사르곤의 두 아들이 그를 계승했지만, 짧은 기간 동안만 통치했다. 그 후, 그의 제국은 쇠퇴했고, 엘람(Elamites) 사람들은 그의 제국의 남은 것들을 파괴했다. 


니므롯은 하나님 도성의 건설을 추구하기보다, 사람 도성의 건설을 위해 일했다. 


역사가들은 사르곤 대왕이 죽고 그의 왕조가 멸망한 후, 혼돈의 시기가 있었음을 확인했는데, 그 기간 동안 메소포타미아에는 한 세기 이상 동안 중앙 권력이 없었다. 이러한 혼돈은 언어의 혼란으로 초래된 파괴로 설명될 수 있다(창 11:7-9). 사르곤이 통치했던 아카드 시대 이후에 남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왕조가 메소포타미아에서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것은 ‘우르 제3왕조(Third Ur Dynasty)’ 시대이다. 우르 왕조는 BC 약 2000년경까지 지속되었다고 한다. 아브라함은 이 시기에 태어났고,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갈대아 우르에서 살았다(창 11:28, 31). 메소포타미아의 이러한 혼란으로부터 아모리족 왕 함무라비(Hammurabi, BC 1792-1750년 경에 통치한 것으로 보임)가 바벨론에 기반을 둔 새로운 제국을 건설했다. 이것이 단명한 고대 바빌로니아 제국(Old Babylonian Empire)이었고, 느부갓네살의 신바빌로니아 제국(Neo-Babylonian Empire)과는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함무라비는 메소포타미아에서 권력을 통합하는데 성공했고, 어느 정도 중앙집권적 질서를 회복했다. 그는 법전으로 유명하며, 그중 일부는 비석과 점토판에 보존되어 있다.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했던 왕조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점유한 기간 내내 중요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과 중요한 상호작용을 했기 때문이다. 함무라비 이후 수 세기에 걸쳐 이 제국의 주인공들은 신앗시리아인(예로, 티글랏-필레세르 및 사르곤 2세), 신바빌로니아인(느부갓네살 시대에 절정에 달함), 페르시아인(예로, 키루스 대왕), 그리스인(예로, 알렉산더 대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 알렉산더의 장군 셀레우코스의 후손), 그리고 로마인들 이었다. 사르곤 대왕은 후대의 메소포타미아 제국 건설자들에게 전제적 통치의 모델로 여겨졌다. 예를 들어, 바빌론의 왕인 나보니두스(Nabonidus, BC 555~539)는 사르곤 왕조의 역사에 큰 관심을 보였고, 사르곤 궁전에서 발굴 작업을 수행했었다.

하나님은 바벨에서 언어를 나누셔서, 니므롯의 야망과 세계 역사상 최초의 제국을 종식시키셨다. 니므롯은 거짓된 이방신들을 섬겼고, 하늘에 대항하여 높이 솟은 탑을 세워 하나님을 폐위시키려는 시도를 했으며, 사람들을 압제적으로 통치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독했다. 그는 노아와 아브라함이 했던 것처럼 살아계신 하나님께 제단을 쌓기보다는, 악한 가인처럼 도시를 건설해서 사람을 기념하려고 했다(창 8:20, 12:7-8). 그는 하나님의 도성(히 11:10, cf. 어거스틴) 건설을 추구하기 보다, 사람 도성의 건설을 위해 일했던 것이다.


References and notes

1. Lange, J. P., Schaff, P., Lewis, T., & Gosman, A. A commentary on the Holy Scriptures: Genesis (Bellingham, WA: Logos Bible Software 2008), p. 367. 

2. Brown, F., Driver, S. R., & Briggs, C. A. Enhanced Brown-Driver-Briggs Hebrew and English Lexicon (Oxford: Clarendon Press 1977), p. 150. 

3. Sarfati, J., The Genesis account—a theological, historical, and scientific commentary on Genesis 1–11 (Powder Springs, GA: Creation Book Publishers 2015), p. 641.

4, Sarfati, J. ref. 3, p. 642. 

5. Brown, F., Driver, S. R., & Briggs, ref. 2, p. 93. 

6. aina.org/nimrud/nimrudtreasures.htm.

7. Sarfati, J., ref. 3, pp. 642, 659–660. 

8. britannica.com/biography/Nimrod

9. Wexler, Gertrude, “Nimrod”, Collier’s Encyclopedia (Vol 17), (New York: Macmillan Educational, 1981), p. 556. 

10. Adamthwaite, M.R., . Perspectives on ancient chronology and the Old Testament—part 1,  J. Creation 31(3):61–67,2017. 

11. Wiseman, D. J. “Nimrod”, in D. R. W. Wood, I. H. Marshall, A. R. Millard, &J. I. Packer (Eds.), New Bible dictionary (3rd ed.), (Leicester, England;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6), p. 825. 

12. Jones, Tom B. “Sargon I”, Collier’s Encyclopedia (Vol 20), (New York: Macmillan Educational, 1981), p. 433.

13. britannica.com/biography/Sargon

14. Adamthwaite, ref. 10.  

15. military.wikia.org/wiki/Sargon_of_Akkad


Related Articles

Perspectives on ancient chronology and the Old Testament—part 1

The Tower of Babel account affirmed by linguistics

Dating the Tower of Babel events with reference to Peleg and Joktan

The sixteen grandsons of Noah

The oldest example of applied geometry in the world


Further Reading

Archaeology Questions and Answers

History Questions and Answers


*참조 : 고고학은 성경을 지지하는가? 1, 2, 3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57&bmode=view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58&bmode=view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59&bmode=view

성경에 언급된 건축물들이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발굴된 적이 있는가?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48&bmode=view

고고학적 발견들은 성경의 신뢰성을 입증하고 있다.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46&bmode=view

고고학은 여러 종교 경전들 가운데서, 성경이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것임을 입증하였는가?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55&bmode=view

성경 밖의 기록에서 성경 사건들에 대한 어떤 확증이 있는가?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54&bmode=view

성경 역사를 확증해주고 있는 고대 앗수르 유물. 대영박물관에 있는 성경의 고고학적 증거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83&bmode=view

성경의 내용들이 신화인가? 

http://creation.kr/BiblenHistory/?idx=1288958&bmode=view

창세기 1장은 바벨론의 신화를 재편집했는가?

http://creation.kr/Genesis/?idx=3863816&bmode=view

모세는 창세기를 정말로 썼는가? : 성경을 훼손하고 있는 사기적인 문서가설

http://creation.kr/BiblenHistory/?idx=1288930&bmode=view

성경 창조 기록의 독특성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19&bmode=view

바벨탑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49&bmode=view

바벨탑 : 전설인가, 역사인가?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18&bmode=view

바벨탑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56&bmode=view

바벨탑 사건과 민족 이동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69&bmode=view

고대 인류에 대한 DNA 분석은 바벨탑의 인류 분산을 확증하고 있었다. 

http://creation.kr/Genesis/?idx=1289139&bmode=view

바이킹 DNA는 바벨탑 이후의 유전적 다양성을 보여준다.

http://creation.kr/BiblenHistory/?idx=5200676&bmode=view

노아의 16명의 손자 : 고대의 지명과 민족들의 이름 속에 남아있다. 

http://creation.kr/EvidenceofFlood/?idx=1288381&bmode=view

인류는 3 조상 가족으로부터 유래했음을 유전자 연구는 가리킨다.

http://creation.kr/EvidenceofFlood/?idx=1288408&bmode=view

가나안 인의 DNA 분석은 성경의 정확성을 입증했다. 

http://creation.kr/BiblenHistory#1289005

아프리카인의 유전체 분석은 성경적 역사와 일치한다. 

http://creation.kr/BiblenHistory/1288993

유태인들에 대한 유전자 분석은 창세기를 확증한다.

http://creation.kr/Genesis#1289103

창세기와 잃어버린 점토판들 

http://creation.kr/Genesis/?idx=1289071&bmode=view

바빌로니아 점토판에 성경 속 인물이 언급되어 있었다. 느부갓네살 왕의 환관장 살스김의 이름이 새겨진 점토판의 발견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36&bmode=view

모압 석비가 입증하고 있는 성경 기록의 역사적 사실성 : 모압 왕 메사의 자랑은 창세기를 확인해주고 있다.

http://creation.kr/archaeology/?idx=2759771&bmode=view

새로운 고고학적 발견은 구약성경의 역사성을 확증한다 : 느부갓네살 왕의 관리 이름이 기록된 점토판은 예레미야서의 역사성을 지지한다.

http://creation.kr/archaeology/?idx=4289862&bmode=view


출처 : CMI, 6 July 2021 (GMT+10)

주소 : https://creation.com/nimrod-post-flood-empire-builder

번역 : 석원석

미디어위원회
2021-09-27

요셉과 임호텝은 동일 인물이었을까? 2

(Could Joseph and Imhotep have been the same person?)

 by gospelclips


이스라엘 백성을 핍박한 바로는 누구였을까?

바로의 초청으로 야곱과 그의 가족이 요셉(임호텝)이 총리로 있던 이집트에 살기위해 내려왔을 때는 약 70명이었다. 그들은 그 땅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 고센(Goshen) 땅에서 살도록 허락받았다. 이집트의 2인자였던 요셉의 보호를 받으며 그들은 그곳에서 번성하였다. 요셉은 흉년이 오기 전에 곡식을 비축하여 7년의 기근에서 이집트를 구했다. 요셉은 애굽 온 땅을 사들여 바로를 매우 부요하고 강력하게 만들었다. 요셉은 110세까지 살면서 여러 바로들을 섬겼다. 그가 죽었을 때, 그는 방부 처리되어, 이집트 왕실 묘역에 매장되었다. 그가 이집트에 처음 들어간 지 약 80년이 지난 후였다.

야곱의 가족들은 네제리케트(Netjerikhet)가 바로였을 때인 이집트 제3왕조 때에 이집트에 내려왔다. 네체리케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요셉으로 인해서 바로 조세르(Pharaoh Djoser, pharaoh of Joseph)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요셉이 살아있는 동안인 제3왕조, 제4왕조 동안 번성했고, 요셉의 사후인 제5왕조, 제6왕조 동안에도 계속 번성했다. 하이집트(Lower Egypt)의 멤피스(Memphis)에 기반을 둔 제6왕조는 헤라클레오폴리스(Herakleopolis)에 기반을 둔 9왕조와 10왕조, 그리고 테베(Thebes)에 기반을 둔 제11왕조와 동시대에 존재했다.

요셉이 죽은 지 약 100년이 지나고 요셉을 알지 못하는 바로가 집권했다. 아메넴헤트 1세(Amenemhet I)는 테베에 기반을 둔 제11왕조(상이집트)의 멘투호테프 4세(Mentuhotep IV)의 총리(vizier)였다. 그는 제11왕조의 멘투호테프 4세를 암살하고,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를 모두 장악하여 제12왕조(또는 이집트의 중왕국)로 알려진 것을 시작했다. 중왕국의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싫어했고 위협으로 느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적군과 합류할 것을 두려워하여 그들을 노예로 내몰았다.

제12왕조의 바로는 석회암을 외벽부에만 사용한 진흙 벽돌로 된 피라미드를 건설했다. 제12왕조의 바로는 피라미드 건설에 필요한 진흙벽돌들을 만들기 위해서 많은 노예들이 필요했다. 이 일은 출애굽 당시에 200만 명이 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 임무가 되었다. 제12왕조는 약 200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7개의 피라미드와 미궁(Labyrinth)이 건설되었다. 미궁은 헤로도토스(Herodotus)에 의해 쓰여진 고대사에서 고대 세계의 불가사의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모세는 아메넴헤트 3세(Amenemhet III) 통치 4년 경인, 세누스레트 3세(Senusret III)와 아메넴헤트 3세의 공동 통치 기간에 태어났다. 아메넴헤트 3세는 두 개의 피라미드와 미궁을 지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매우 잔인했으며, 아마도 산파들에게 히브리 남자 아기들을 죽이라고 명령한 바로였을 것이다. 그의 딸 소벡네페루(Sobeknefru)는 자식이 없었고, 왕위를 계승할 남자가 없었다. 소벡네페루는 나일강 갈대 사이 바구니에서 발견한 히브리 아기 모세를 입양했고, 그를 그녀의 궁에서 자신의 아들로 키웠다. 그는 아메넴헤트 4세(Amenemhet IV)로 알려져 있다.

아메넴헤트 4세가 30세였을 때, 그는 아메넴헤트 3세와 공동 섭정을 시작했다. 이것은 9년 동안 지속되었고, 아메넴헤트 4세는 갑자기 사라졌다. 이로 인해 왕위를 계승할 남자 후계자가 없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소벡네페루가 왕위를 계승했고, 그녀는 8년 동안 살다가 죽었다. 그녀가 죽자 제12왕조가 끝났고, 이집트는 불안정해졌다. 제13왕조로 바로의 급속한 승계가 있었고, 가장 긴 통치는 11년 동안 통치한 네페르호텝 1세(Neferhotep I) 였다. 모세(아메넴헤트 4세)가 망명에서 돌아왔을 때, 이집트의 바로였던 사람은 네페르호텝 1세였다. 네페르호텝 1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뒤를 쫓아가다 홍해에서 그의 군대와 병거들이 몰살당한 출애굽 당시의 바로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으로 이집트는 치명상을 입었고, 침략에 취약해졌다. 출애굽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라비아의 유목민 왕인 힉소스(Hyksos)가 이집트를 침략하여 아바리스(Avaris)에 요새를 건설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하이집트를 점령했고, 다음 400년 동안 지배했다.


곡물저장고는 요셉의 보증서이다.

요셉은 이집트의 주요 도시들에 곡물을 저장하기 위한 저장고들을 지었다. 만약 누군가가 이집트에서 성경에 언급되어 있는 요셉의 유산을 찾으려한다면, 그것은 곡물저장고(grain silos)가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만약 누군가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았었다는 유산을 찾으려한다면, 그들이 만들었던 수많은 진흙벽돌(mudbricks)들이 될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오랜 세월을 견딜 수 있어서, 고대 이집트에서 요셉과 그의 가족들이 살았었다는 성경의 기록을 확인해줄 수 있는 독특한 것들이다. 요셉은 이집트에서 곡물저장고를 건설했을 최초의 사람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집트에서 건설된 가장 오래된 곡물저장고를 찾으려할 것이다.


요셉(임호텝)이 건설한 최초의 곡물저장고. 계단식 피라미드 아래에 숨겨져 있다!

곡물저장고에 네체리케트를 묻고, 그 위에 마스타바를 쌓아 올려, 바로를 위한 거대한 무덤과 기념비의 선례를 세운 사람은 요셉이었다.

요셉은 그의 바로(네제리케트, 조세르)를 곡물저장고에 묻었고, 마스타바(Mastabas, 고대 이집트에서 사용됐던 왕과 귀족의 직사각형 형태의 분묘)를 피라미드 크기로 확장했다. 그는 뒤를 이은 바로들에게 선례를 남겼다. 요셉(임호텝)이 세운 단단한 석회암 피라미드를 능가하는 피라미드를 세운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것은 미래의 왕조에서 바로의 매장을 위한 표본과 선례가 되었다.

.왼쪽 입구로 드나들기 위해서는 사다리나 밧줄이 필요했을 것이나, 반면에 오른쪽 입구에는 계단이 있었다.


주 입구(main entrance)는 조세르의 석관이 있던 중앙 수직통로로 곧장 연결된다. 오른쪽 터널(right tunnel)은 또 다른 터널로 이어지며, 이 터널은 점차 내려가 수직통로의 바닥에 연결된 갤러리로 연결된다. 왼쪽 입구 터널(left entrance tunnel)은 약간 미로와 같은 다른 세트의 갤러리에 연결되는 수직통로로 이어진다. 유일한 탈출구는 중앙 수직통로를 통해 계단과 연결된 갤러리로 이동하거나 수직통로로 올라가는 것이다. 수직통로가 곡물로 가득 차 있었다면, 이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왼편 입구 터널의 수직통로로 떨어진 사람들은 (사다리나 밧줄이 없는 한) 추락해서 살아남았다면 갇혔을 것이다. 이것은 무서운 일일 것이다! 조세르의 석관은 수직통로의 바닥에 연결된 갤러리와 터널의 높이보다 높은 플랫폼에 배치되었다. 따라서 수직통로가 무덤으로 사용되었을 때, 조세르의 석관 아래에 있는 중앙 수직통로를 통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건너가는 것이 가능했다.


네체리케트(바로 조세르)은 기근 5년째에 죽었고, 임호텝(요셉)에 의해서 묻혔다.

네체리케트는 원래 곡물을 저장하는 데 사용되었던 수직통로에 묻혔다. 터널은 환기가 잘 안 되어 작업자들은 질식했을 수 있다.

조세르는 29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했다. 세헬 섬(Island of Sehel)에 있는 '기근 비석(Famine Stele)'의 기록에 따르면, 임호텝은 조세르 즉위 18년에 왔다. 기근이 시작되기 전에 7년의 풍년이 있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조세르는 흉년 4년 또는 5년째에 죽었을 것으로 계산될 수 있다.

 

기근 비석은 또한 조세르(Djoser)와 네체리케트(Netjerikhet)가 동일 인물임을 나타낸다. 조세르라는 명칭은 네체리케트의 사망한 후에야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고고학자들은 기근 비석이 발견되기 전까지, 네체리케트와 조세르가 동일 인물임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때까지 네체리케트가 조세르일 수도 있음을 나타내는 네체리케트를 기념하는 제18왕조의 훼손된 유적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근 비석은 7년 풍년과 7년 흉년에 대한 네체리케트(조세르)의 꿈을 임호텝이 해석하여 어떻게 이집트를 구했는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기근 비석은 조세르가 그 땅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었고, 제사장들에게 땅을 주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임호텝이 요셉과 동일 인물이었다는 것을 더욱 뒷받침해준다.

성경은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이 풍년에 저장해둔 곡식을 흉년에 팔아 제사장들의 땅 외에 애굽의 온 땅을 사들여 바로에게 바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세르는 제사장들에게 곡식을 주어 그들의 땅을 팔지 않게 해주었다.


계단통로를 사용하여 곡물을 회수하는 것을 보여주는 이집트의 상형문자.

계단식 피라미드 아래에 있는 터널은 강도를 속이는 데 사용되었을까? 아니면 곡식을 꺼내오는 데 사용되었을까?

위의 그림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입구 터널은 조세르의 석관이 배치된 중앙 방으로 직접 연결되는 4개의 다른 터널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터널은 실제로 석관이 배치된 플랫폼 바로 아래에 있다.

.열린 계단통로를 사용하여 곡물을 회수하는 것을 보여주는 이집트의 상형문자(hieroglyph). 이것은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아 작업자가 질식할 수 있었던 첫 번째 곡물저장고의 통로를 크게 개선한 것이다.


이 터널에는 끝이 막힌 지로(branches)들이 있어서, 누군가가 길을 잃고 중앙 방을 찾지 못할 것 같지는 않다. 이 터널은 도굴꾼들에게 무덤으로 바로 인도했을 것이다. 이 일은 정확하게 일어났다. 실제로 네체리케트(조세르)의 미라는 도굴꾼들에 의해서 도난당했으며, 남은 것은 네체리케트의 발 하나뿐이었다.

중앙 수직통로는 원래 곡물저장고(grain silo)로 사용되었고, 곡물은 이 지하 터널로 어느 정도 유입되어, 저장고의 용량을 늘리고, 곡물에 파묻히지 않고 안전하게 회수할 수 있게 했을 것이다. 환기 문제가 있어서, 계단식 피라미드에 매우 가깝게 곡물을 저장하기 위한 또 다른 일련의 상호 연결된 수직통로를 건설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입구 터널을 통해서 계단식 피라미드 단지(Step Pyramid Complex)의 벽 내의 구덩이 바닥에 접근할 수 있었다. 

계단식 피라미드 단지는 원래 곡물저장고 및 배급 센터로 설계되었다. 입구는 옥수수 모양의 높은 기둥이 있는 건물을 통해 나있었다. 이 건물은 옥수수가 거래되는 곳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곡물저장고에 연결된 지하터널에서 곡물을 회수한 구덩이까지 도보로 짧은 거리에 있었다.

요셉(임호텝)은 조세르(네케체리케트)를 매장하게 되자, 첫 번째 곡물저장고 바닥에 플랫폼을 건축하고 수직통로에 화려한 석회암을 깔았다. 조세르의 석관은 위에서 수직통로를 통해 내려졌을 것이다. 그런 다음 수직통로의 상단을 거대한 화강암 석판으로 밀봉하고, 그 위에 마스타바를 건설했다. 조세르의 다른 가족 구성원이 죽었을 때, 매장을 위해 연속적으로 마스타바가 추가되었다. 결국 쌓여진 마스타바 더미는 계단식 피라미드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수세기에 걸쳐 계단식 피라미드는 조금씩 떨어져 내렸고, 결국 매끄러운 석회암들이 노출되었고, 현재 상태의 계단식 피라미드로 남겨지게 되었다.

따라서 사카라(Saqqara)의 계단식 피라미드 단지는 원래 곡물저장고 및 배급 센터(grain storage and distribution center)로 의도되었다. 요셉(임호텝)의 바로인 네체리케트(조세르)가 죽었을 때, 원래의 수직통로는 매장실로 사용되었고, 그 위에 마스타바가 세워졌다. 연속적으로 마스타바가 추가되었고, 계단식 피라미드를 형성하게 되었고, 인접해서 건축한 단지는 수세기 동안 곡물저장고 및 배급 센터로 사용되었다. 

이집트인들은 요셉(임호텝)의 업적을 그들의 신이었던 라(Ra)에게 돌렸지만, 사실 모든 것 뒤에는 여호와가 있었다!


이집트 역사에서 실존했던 요셉

요셉이 이집트의 2인자인 총리가 되었다면, 이집트 역사에 이에 대한 언급이 있어야 한다. 요셉이 7년의 기근에서 이집트와 주변 민족을 구해냈고, 애굽 온 땅을 바로에게 바쳤다면, 그는 이집트 역사에서 매우 유명한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요셉은 여러 이집트 도시들에 곡물을 저장하기 위해 거대한 곡물저장고들을 건설해야 했으며, 실제로 오늘날에도 역사적으로 중요한 많은 이집트 도시(예로 사카라)에서 대규모 곡물저장고를 찾을 수 있다.

요셉은 이집트의 대제사장 중 한 사람의 딸과 결혼했다. 그는 이집트를 7년의 흉년에서 구하고, 바로가 양식을 공급해준 제사장들의 땅을 제외하고 이집트의 온 땅을 사들였다. 백성들은 요셉이 한 일 때문에 바로의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되었다. 그러므로 요셉은 바로를 부요하고 강력하게 만들었던 일등 공신이었다.

요셉은 30살부터 바로를 섬겼고, 11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이집트 왕실 묘역에 매장되었다. 그의 가족인 야곱(이스라엘)의 후손들은 이집트에서 430년 동안 진흙벽돌을 생산하며 번성했다. 제12왕조의 피라미드들은 수백만 개의 진흙벽돌로 만들어졌는데, 200년에 걸쳐 그러한 피라미드 7개가 지어졌으며, 아메넴헤트 3세(Amenemhet III)의 피라미드가 끝이었다. 그는 미궁(Labyrinth)이라 불리는 거대한 진흙벽돌 구조물을 건축했다. 제12왕조의 피라미드들이 건설되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노동력과 노예들이 필요했다. 제12왕조 피라미드에 사용됐던 진흙벽돌들은 히브리 노예들이 생산했을 가능성이 크다. 제13왕조에 있었던 출애굽 사건 이후 거대한 피라미드는 더 이상 건설되지 않았다.

이집트에 커다란 재앙들이 닥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했을 때, 모세에 의해 인도된 사람들은 성인 남자만(여자와 어린이는 제외) 60만 명이 넘었다.

요셉(임호텝)은 이집트 왕실 묘역에 매장되었고, 이집트 문화에서 거의 신격화되었으며, 7년의 기근에서 이집트를 구했고, 바로를 위해 이집트 전역의 땅을 사들였으며, 기둥이 있는 건물을 최초로 건축했으며, 첫 번째 피라미드를 설계했으며, 곡물을 저장하기 위해 곡물저장고들을 건설했고, 미라를 만드는 기술을 개발했으며, 첫 번째 곡물 저장고에 네체리케트를 묻었고, 그 위에 피라미드를 건설하여, 바로의 매장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렸다. 


이집트 역사에서 요셉은 어디에 해당되는가?

연대 평가는 고고학자와 역사가들이 고대 역사의 조각들을 하나로 묶을 때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다. 다양한 고고학자 팀들이 특정 유물의 나이를 추정하기 위해 다양한 연대측정 방법들을 사용해왔다. 예를 들어, 한 층에서 우세한 도자기 유형을 사용하여, 해당 층의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창조론자들이 지적했듯이 연대측정 방법은 매우 비현실적이며, 권위 있는 것으로 신뢰받을 수 없으며, 성경과 모순되는 곳에서는 확실히 그렇다.

다양한 연대측정 방법의 기초에 있는 가정(assumptions)들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이들 가정으로 인해 유물의 연대가 1000년에서 2000년까지 부정확하게 평가될 수 있다. 특정 왕조의 추정된 연대만을 기준으로 조각들을 짜맞춘다면 결과는 상당히 틀려질 수 있다. 평가 연대가 서로 달랐기 때문에, 이집트 역사와 히브리 역사가 서로 맞지 않으며, 전통적 이집트 역사에서 요셉에 해당하는 인물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역사가들이 표준 이집트 연대기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특히 스위니(Sweeney)[15, 19, 21, 48], 벨리코프스키(Velikovski)[49, 50, 51], 프라이(Fry)[12, 16, 20, 52-59], 라일리(Reilly)[13, 17, 22, 60], 다운(Down)[18] 등이 그들이다. 그들은 전통적인 표준 이집트 연대기를 축소하고, 이집트 왕조들을 끌어내리는 수정된 이집트 연대기를 제안했다. 수정된 이집트 연대기를 성경적 연대기와 정렬시킬 때, 고고학적 발견에 의해 확인되는 성경적 인물에 대한 새로운 후보인물들이 등장하고 있다. 수정된 이집트 연대기를 사용하면,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역사적 기록은 서로 잘 들어맞고, 중요한 성경적 인물과 동시대 인물일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식별 가능하게 해준다.

이것은 하와라(Hawara)에 있는 아메넴헤트 3세(Amenemhet III, 이집트 제12왕조의 6번째 바로)의 피라미드이다. 수백만 개의 커다란 진흙벽돌들이 아메넴헤트 3세의 두 번째 피라미드를 건축하는 데에 들어갔다. 원래는 돌로 덮여 있었지만, 지금은 진흙벽돌 더미로 남아있다. 성경(출 5:6-21)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노예였을 때, 바로가 그들에게 짚으로 보강된 진흙벽돌을 만들도록 강요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집트에는 진흙벽돌로 된 다른 많은 건축물들이 존재한다.

이것은 하와라에 있는 아메넴헤트 3세의 피라미드를 이루고 있는 진흙벽돌들이다. 수세기에 걸친 침식, 지진, 인위적 훼손 등으로 바깥쪽 석회암은 떨어져 나갔고, 내부의 진흙벽돌이 노출되어 있다. 이 지역은 강수량이 매우 적어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진흙벽돌의 상태는 비교적 좋다. 이것은 건설된 마지막 거대한 피라미드였다. 이집트에는 많은 진흙벽돌 구조물들이 있지만, 제12왕조의 피라미드에는 수백만 개의 진흙벽돌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들의 생산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매우 많은 노예들과 노동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스도 시대의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Josephus)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피라미드를 만드는 임무가 주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부풀려진 표준 이집트 연대기를 믿어온 전통적 학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 살았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었고, 요셉의 가능한 후보 인물을 찾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표준 이집트 연대기에 기초하여, BC 1700년경으로 추정되는 힉소스 왕조에서 요셉에 대한 증거를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학자들은 이집트에 병거(chariots)가 처음 도입된 시기와 관련된 논쟁으로 인해, 출애굽의 시기를 제18왕조 때로 해석해 왔다. 이 한 가지에 중점을 두다보니, 많은 고고학자들은 제18왕조에서 노예들의 대대적 탈출의 증거를 찾기 위해 헛된 노력을 기울여왔다(물론 출애굽은 제13왕조 시기에 일어났기 때문에 그 증거들을 찾을 수 없었다).

4개, 6개, 8개 바퀴살을 가진 수백 개의 병거바퀴들이 홍해의 누웨이바(Nuweiba) 앞바다에서 여러 사람들에 의해서 발견되었지만, 이 병거바퀴들은 제15왕조 또는 그 이후 시기의 것으로 연대를 결정함으로써 제12왕조는 간과되었다. 제12왕조에서 병거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출애굽 당시 이집트의 모든 군대와 병거가 홍해에서 수장되었다고 성경은 알려주고 있기 때문에 놀라운 일이 아니다.

'병거 바퀴(Chariot Wheels)'를 찾기보다 '진흙벽돌'을 더 많이 찾아야 하고, 그것은 제12왕조에서 풍부하게 발견된다. 진흙벽돌은 제12왕조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는데, 미궁(Labyrinth)과 같은 건물뿐만 아니라, 제12왕조의 피라미드들에서도 많이 사용되었다.

수정된 이집트 연대기는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역사와 이집트 역사가 "고고학적" 기록을 통해 매우 잘 일치한다는 다른 그림을 낳고 있으며, 물론 이 점은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 경우에 아브라함은 메네스(Menes, 이집트 제1왕조를 창건한 이집트의 바로)와 동시대 사람으로 간주되고, 임호텝(Imhotep)은 성경의 요셉으로 간주되고, 조세르(Djoser)는 요셉이 섬기던 바로로 간주될 수 있다.[13, 15, 17, 21, 52, 54].

수정된 이집트 연대기에 의하면, 아메넴헤트 3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억압하여 진흙벽돌을 만들게 했던, 모세 시대의 바로였을 것이다[18]. 또한 아메넴헤트 3세의 피라미드는 짚이 들어 있는 진흙벽돌로 만들어졌다.[18] 아메넴헤트 3세는 제12왕조의 6대 바로로, 제3왕조의 조세르 이후 450~500년 후의 사람이다.[18] 그에게는 딸만 있었다. 그의 딸 중 하나인 소벡네페루(Sobekneferu)에게는 왕이 되기 전에 사라진 입양아(아메넴헤트 4세, Amenemhet IV)가 있었는데, 그는 모세(Moses)로 추정되고 있다.[18]

그렇다면 출애굽은 기원전 1445년경 제13왕조 네페르호텝 1세 통치 기간에 일어났다.[18] 이 사건 직후에 힉소스(Hyksos)는 거의 저항 없이(홍해에서 이집트의 군대가 수장되었음으로) 하이집트(Lower Egypt)를 점령했다. 힉소스는 약 400년 동안 하이집트를 통치했다. 이 시기는 약속의 땅에서 지낸 사사시대와 일치한다. 힉소스는 마침내 이집트 신왕국(New Kingdom of Egypt)의 시작인 제18왕조를 세운 아흐모세 1세(Ahmoses I)에게 패배한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와 사사들과 동시대에 있었던 힉소스(제15왕조, 제16왕조)는 제18왕조(이집트 신왕조)를 세운 아흐모세 1세에 의해서 이집트에서 쫓겨났고[61], 사울 왕이 아말렉(힉소스)을 멸망시켰을 때, 끝이 났을 것이다.[18] 이것은 제17왕조를 제16왕조와 동시대로 위치시키는 것이다.[18] 마찬가지로 제18왕조는 사울, 다윗, 솔로몬이 왕위에 있을 때인 통일 이스라엘 왕국과 동시대에 있었다. 이것은 또한 제18왕조의 아멘호텝 1세(Amenhotep I)와 투트모세 1세(Thutmosis I)가 다윗과 동시대 사람이었음을 의미한다.[18] 하트셉수트(Hatshepsut, 제18왕조의 5번째 바로)는 솔로몬을 방문했던 시바의 여왕(Queen of Sheba)이었다.[62, 63] 투트모세 3세는 여로보암의 통치 기간에 집권하여 이집트의 가장 위대한 바로가 되었다.[18]

출애굽 이전의 성경적 연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장기간 체류했는지 또는 단기간 체류했는지, 어떻게 가정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이것은 성경적 연대를 200년이나 잘라버리고, 결과적으로 출애굽 이전의 사건들을 잘못 정렬하는 우를 범할 수 있는 또 다른 혼란스러운 요소이다.


요셉이 이집트 제3왕조의 임호텝이고, 모세가 제12왕조의 아메넴헤트 4세라면, 다윗과 솔로몬은 어디에 위치하는가?

성경은 요셉이 바로의 총리(vicroy)였으며, 이집트 제3왕조의 총리였던 임호텝은 요셉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모세는 바로의 딸에게 입양되어, 그녀의 자식처럼 길러졌다. 40세에 시작한 40년 동안의 미디안 망명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모세는 바로가 되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를 위해 진흙벽돌을 만들면서 밭을 일구어야 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살았던 기간 중 적어도 1/2의 기간은 노예로 있었고, 인구수는 200만 명에 이르렀다. 한 사람이 하루에 단지 1개의 커다란 진흙벽돌을 만들었다고 해도, 엄청나게 많은 진흙벽돌들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제12왕조 피라미드의 중심부는 진흙벽돌들로 만들어졌다. 아메넴헤트 3세(Amenemhet III)는 피라미드를 건설했던 제12왕조의 마지막 바로였다. 사실, 그는 내부가 진흙벽돌들로 된 두 개의 피라미드를 건축했고, 미궁(Labyrinth)도 건축했다. 그는 46년 동안 통치했으며, 소벡네페루(Sobekneferu)라는 딸이 있었는데, 그녀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아메넴헤트 4세(Amenemhet IV)라는 또 다른 인물은 족보가 없는데, 아메넴헤트 3세와 9년간 공동 통치하다가, 갑자기 사라졌다. 모세는 아마도 아메넴헤트 4세였을 것이다. 이것은 의미가 있는데, 모세가 바로의 궁전에서 양육되었고, 다음 바로로 키워지고 있었기 때문에, 성경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세는 미디안으로 도피해야 했다. 소벡네페루는 아메넴헤트 3세가 사망한 후 왕위를 물려받았지만, 4~8년 동안 통치한 후 그녀가 사망하고, 제12왕조가 끝났다. 제13왕조와 제2중간기로 바로의 급속한 승계가 있었다. 80세 나이의 모세는 네페르호텝 1세(Neferhotep I) 통치기간 중에 이집트에 들어왔고, 이스라엘 백성을 430년 만에 이집트에서 인도해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했고, 여호수아에 의해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되었다. 사사시대가 약 400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런 다음 사울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 되었고, 다윗과 솔로몬으로 왕위가 승계되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날짜는 대략 BC 960년경으로 세속 고고학자들에게도 상당히 확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성경은 출애굽이 이보다 480년 전에 일어났다고 말한다.

.이집트 왕국들과 왕조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예생활과 광야생활, 사사시대, 통일왕국, 분열왕국의 관계를 보여주는 개략도. 이스라엘 민족은 솔로몬 이후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되었다. 1차 중간기는 없었다.


사울과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었다. 다윗과 솔로몬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을 때, 이집트에는 어떤 바로가 있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내가 아는 바에 따르면, 제2중간기의 마지막 바로인 아포피 2세(Apopi II, 힉소스)는 세케넨레(Sekenenre)의 아들이자 아흐모세 1세(Ahmose I)의 형제인 카모세(Kahmose)의 반란에 의해 이집트에서 쫓겨난 것으로 보인다. 아포피 2세(Apopi II)와 힉소스는 애굽을 떠나 북쪽으로 향하다가, 당시 사울이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와 마주쳤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그들을 모두 죽이라고 지시했다. 사울은 지시에 따라 힉소스를 거의 전멸시켰지만, 아각(아포피 2세)을 살려주어 사무엘에게 불순종했다. 사무엘은 그를 직접 죽였다. 사울이 이스라엘에서 계속 통치하는 동안, 아흐모스 1세는 이집트의 새로운 왕조의 첫 번째 바로가 되었다. 그 후 이스라엘의 왕위는 사울에게서 다윗과 솔로몬에게 승계되었고, 이집트는 아흐모세 1세의 뒤를 이어 아멘호텝 1세(Amenhotep I), 그 다음 투트모세 1세(Thutmoses I), 그 다음 투트모세 2세(Thutmoses II), 그 다음 하트셉수트(Hatshepsut, 솔로몬을 방문했던 시바의 여왕)가 그 뒤를 이었다. 하트셉수트의 뒤를 이어 바로가 된 투트모세 3세(Thutmoses III)는 분단된 이스라엘 왕국 기간 동안 이스라엘을 약탈한 이집트의 가장 강력한 바로가 되었다. 그는 성경의 시삭(Shishak)이었다. 다윗은 BC 1000년경, 사울은 BC 1040년경에 있었다. 전통적인 표준 이집트 연대기가 성경의 역사와 일치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표준 이집트 연대기는 수정되어야 한다. 


*참조 : 요셉과 임호텝은 동일 인물이었을까? 1

https://creation.kr/archaeology/?page=1#7535860

이집트의 임호텝과 요셉은 동일 인물이었는가?

http://creation.kr/archaeology/?idx=4404153&bmode=view

이집트 역사와 성경 기록 : 완벽한 조화?

http://creation.kr/archaeology/?idx=4326240&bmode=view

이집트에 히브리인들이 살았다는 증거 : 그리고 출애굽 연대에 대한 고찰

http://creation.kr/archaeology/?idx=4218772&bmode=view

이집트 연대기와 성경 : 현장 고고학자 데이비드와의 대화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29&bmode=view

모세를 찾아서 1, 2

http://creation.kr/BiblenHistory/?idx=1288911&bmode=view

http://creation.kr/BiblenHistory/?idx=1288912&bmode=view

이집트 왕 시삭에 대한 어떤 증거가 발견된 적이 있는가?

https://creation.kr/archaeology/?idx=1288750&bmode=view

스바 여왕 : 솔로몬은 이집트 파라오의 방문을 받았는가? 

https://creation.kr/archaeology/?idx=1288745&bmode=view


출처 : gospelclips, November 13, 2015.

주소 : https://josephandisraelinegypt.wordpress.com/

번역 : 장경태










































미디어위원회
2021-08-16

요셉과 임호텝은 동일 인물이었을까? 1

(Could Joseph and Imhotep have been the same person?)

 by gospelclips


곡물저장고는 요셉임을 확증하는 홀마크(Hall mark)이다.

요셉이 4000년 전에 이집트에 살았었다면, 예상되는 증거는 이집트의 주요 도시들에서 지하에 건설된 곡물저장고(grain silos)들일 것이다.

곡물저장고는 이집트 제3왕조로 거슬러 올라가, 임호텝이 설계했던 조세르 복합단지(Djoser Complex)에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었다. 사실 계단식 피라미드(Step Pyramid)는 원래 곡물을 저장하는데 사용되었던 통로 위쪽으로 만들어졌다. 이 단지는 곡물저장 및 유통센터인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의 바로 조세르(Djoser, Netjerikhet 네체리케트)가 죽었을 때, 그는 이 곡물저장고에 묻혔고, 일련의 마스타바(Mastabas)가 위쪽으로 세워져서 계단식 피라미드가 되었다. (*마스타바(Mastabas) : 고대 이집트에서 사용됐던 왕과 귀족의 직사각형 형태의 분묘)

‘기근 석비(Famine Stele)’는 조세르와 네체리케트가 동일인이라는 것을 확인해줄 뿐만 아니라, 조세르가 세습 군주였으며, 그 땅을 제사장들에게 맡겼음을 확인해준다. 기근 석비는 임호텝이 18세에 조세르 앞에 나와서 그의 꿈을 해석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임호텝이 7년 간의 기근에서 어떻게 이집트를 구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고고학적 발견과 역사적 기록은 요셉과 임호텝이 동일 인물이었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만약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에 430년 동안 있었고, 출애굽이 제13왕조 때에 일어났다면, 이집트 표준 연대기와의 불일치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계단식 피라미드는 무덤으로 개조된 원래의 곡물저장고 위에 지어졌다.

조세르의 계단식 피라미드 단지(Step Pyramid complex)에는 12개의 통로(shafts)가 있는데, 구덩이 바닥으로 연결된 터널들을 통해 접근할 수 있고, 중앙의 열린 계단 통로와 연결되어있는 곡물저장소(grain storage bins)인 것으로 보인다. 흥미롭게도 계단식 피라미드의 중심에는 아래에 내려가는 비슷한 치수의 수직 통로가 있다. 그 통로는 분명히 피라미드보다 앞서 있었다. 수직통로에 대한 접근은 바닥 주변의 터널로 연결된 폐쇄된 계단 통로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것은 원래 곡물저장고였던 것처럼 보인다. 환기가 문제가 되었을 것이고, 환기가 더 잘 되는 저장고가 가동되면서, 일반 저장고로 버려졌을 가능성이 크다. 버려진 저장고는 기근 5년 째에 사망했던 바로의 매장실로 사용되었다. 그 속에 바로의 석관이 놓여진 후, 화려한 석회암으로 둘러쌓았고, 화강암 석판으로 봉인되었다. 마스타바(Mastaba)는 단단한 석회암 블록들을 사용하여 그 위에 지어졌다. 바로의 3명의 아내와 11명의 딸을 묻기 위해 연속적으로 마스타바가 추가되었다. 그 결과 계단식 피라미드가 탄생했다.


이집트에서 가장 출중했던 총리(Visier)가 다름 아닌 성경의 요셉이라는 사실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요셉(야곱의 아들)은 구약성경의 핵심 인물로서, 이집트 바로의 총리(vizier, sage/viceroy, 현자/총독)가 되었으며, 이 시기 동안 7년 간의 기근으로부터 고대 이집트를 구하는 책임을 맡았다. 요셉은 기근의 기간 동안 저장해 놓았던 곡식을 팔아 이집트의 모든 땅(제사장들의 땅 제외)을 얻을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요셉은 바로를 엄청난 부자로 만들어주었다. 요셉이 총리가 되었을 때, 겨우 30세의 나이였고, 이집트를 구하고 모든 땅을 샀을 때는 44세였다. 그는 110세까지 살았고, 이집트 왕실 묘역에 매장되는 것을 허가받았다. 성경은 요셉이 기근으로부터 그의 형제 가족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요셉의 일가가 이집트에 입국한 지 430년 후에 일어난)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 2백만 명 이상으로 성장하도록 보호할 수 있었다고 말하지만, 그의 생애의 마지막 66년 동안의 일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요셉의 지위와 업적을 감안할 때, 성경 밖의 이집트 기록과 고고학적 발굴에서도 그의 존재에 대한 증거들이 발견될 것이 예상된다.(See Evidence for the Israelite Sojourn in Egypt). 이집트 역사에서 요셉의 정체성은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일부 학자들은 그를 이집트 제3왕조의 네체리케트(Netjerikhet, 조세르(Djoser)로도 불려짐) 때의 총리였던 임호텝과 동일시하고 있다.

임호텝은 아마도 이집트 역사상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총리로, 최초의 피라미드 즉, 조세르 피라미드 또는 계단식 피라미드(Step Pyramid)를 설계했던 사람이다. 이 피라미드는 아래로 내려가는 하나의 커다란 수직 통로가 있고, 그 단지(complex)에는 곡물을 저장하는 데 사용됐던 것으로 보이는 많은 유사한 구조들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이유로 요셉과 연관지을 수 있다. 또한 임호텝은 7년의 기근에서 이집트를 구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see  Famine Stele). 임호텝은 기둥들이 있는 최초의 건축물을 설계했고, 많은 문학 작품을 썼으며, 보존 기술을 개발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죽은 지 수백 년 후에, 그의 전설은 너무나 커져서, 특히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에는 신으로 숭배되었다. 순례자들은 치유되기를 바라며, 그의 무덤에 미라로 만들어진 동물들을 가져왔다.

이집트의 가장 뛰어났던 총리가 다름 아닌 성경의 요셉이라는 사실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요셉이 이집트 전체를 구하고, 이집트의 모든 땅을 사들였다면, 매우 뛰어난 총리로 기록되어있을 것이 예상된다. 임호텝은 곡물저장고를 건설하여 7년간의 기근으로부터 이집트를 구했고, 그의 바로인 조세르(네체리케트)는 세습되는 왕국의 군주로 등극했다.


이집트 제3왕조의 수레 수수께끼가 쉽게 설명된다.

성경은 요셉이 애굽 온 땅을 순찰하기 전에 수레(chariot, 전차)를 수여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요셉과 임호텝이 동일인이었다면, 이것은 이집트 제3왕조와 같은 초기부터 이집트에 수레가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제3왕조에서는 바로와 그의 총리(vizier)와 같은 고위관리만이 여행을 위한 수레를 제공받았다. 제3왕조의 수레는 말이 끌지 않았으며, 일단의 하인들에 의해서 운반되었다.

성경에 수레로 번역된 히브리어 '메르카바(merkabah)'는 '전차' 또는 '타는 자리(riding seat, 승석)'로 번역될 수 있다. 말이 끄는 전차와 사람이 운반하는 수레는 구분되지 않았다. 요셉의 시대인 제3왕조에는 바퀴가 달리고 말이 끄는 전차가 없었기 때문에, 이 단어는 '승석'으로 번역되는 것이 더 적절했을 것이다.

말이 끄는 바퀴가 달린 전차는 군사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제12왕조 후반 ~ 제13왕조까지 도입되지 않았다. 제12왕조와 제13왕조의 전차 대부분은 출애굽 당시 홍해에서 유실되었다. 물론 1978년 와이어트가 홍해 바닥에서 발견한 전차 바퀴가 제12왕조와 제13왕조 시대의 것이라는 것은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힉소스(제15 왕조) 이전에는 말이 끄는 전차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피라미드 시대는 요셉으로 시작되어 모세로 끝났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불가사의 중 하나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어떻게 거대한 단단한 석회암 블록을 잘라내고, 바퀴가 발명되기 전에 어떻게 그 돌들을 운반하고, 제자리로 들어 올릴 수 있었던가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건설된 첫 번째 피라미드는 곡물 저장 및 유통 센터로 보이는, 이집트 사카라(Saqqara) 단지의 일부인, 조세르(네체리케트)의 계단식 피라미드였다. 계단식 피라미드는 자체가 원래 곡물저장고(grain silo)로 사용되었던 통로 위에, 바로의 무덤으로 개조되어 건축된 것이다. 계단식 피라미드는 단단한 석회암 블록으로 만들어진, 겹겹이 쌓아 올려진 일련의 마스타바(Mastaba)이다. 계단식 피라미드는 네체르케트의 3명의 아내와 11명의 딸을 묻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네체르케트의 석관은 계단식 피라미드 수직통로 아래에 있는 연단에 놓여졌다.

계단식 피라미드는 성경의 요셉인 것으로 보이는 임호텝에 의해 설계되었다. 요셉과 입호텝은 많은 유사점을 갖고 있지만, 그들이 생존 시기에 대한 추정 연대 사이의 불일치로 인해서 동일 인물로 간주되지 않아왔다.


<여러 사진들은 여기를 클릭>

 

계단식 피라미드는 이후 왕조에서 바로를 매장하는 표준이 되었다. 요셉이 이집트 제3왕조의 임호텝이었다면, 의심할 여지없이 한 명 이상의 바로를 섬겼을 것이며, 제4왕조까지 살았을 것이다.

기자(Giza)의 거대한 피라미드들은 사카라의 첫 번째 피라미드의 크기를 훨씬 능가하며, 거기에는 그 당시의 기술로 어떻게 거대한 돌들을 제자리에 올릴 수 있었는지 전문가들이 여전히 궁금해하고 있다.

제12왕조는 테베(Thebes)에 기반을 둔 제11왕조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이는데, 제11왕조는 멤피스(Memphis)에 기반을 둔 제6왕조와 동시대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집트 고왕국(Old Kingdom)을 바로 뒤이어 중왕국(Middle Kingdom)이 이어졌다. 제1중간기(First Intermediate Period) 같은 것은 없었다.

제12왕조의 피라미드는 짚(straw)을 보강재로 포함하는 진흙벽돌(mudbricks)들로 만들어졌다. 각 피라미드에는 크기가 약 60cm×30cm×15cm인 수백만 개의 진흙 벽돌들이 있다. 따라서 제12왕조의 피라미드는 중심부는 진흙벽돌로 만들어졌고, 외벽부는 석회암으로 만들어졌는데, 제12왕조에 이르러 채석된 돌들의 공급 부족에 기인한 것이다. 오랜 세월 후에 외벽 석회암들이 떨어져나갔고, 내부의 진흙벽돌이 노출되었다.

역설적으로, 최초로 건설된 피라미드인 제3왕조와 제4왕조의 피라미드(고왕국 피라미드)는 제12왕조(중왕국 피라미드)의 피라미드보다 세월의 시험을 더 잘 견뎌냈다. 이것은 고왕국 피라미드는 단단한 석회암 블록으로 완전히 만들어졌고, 중왕국 피라미드는 외벽부만 석회암으로 만들어졌고, 내부는 주로 진흙벽돌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제12왕조의 바로는 자신들의 피라미드를 위한 진흙벽돌을 만들기 위해서 대규모 노예들의 노동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Exodus) 당시 약 200만 명에 이르렀다. 제12왕조의 7개 피라미드들은 200여년에 걸쳐 지어졌다. 플린더스 페트리(Flinders Petrie)는 제13왕조 시기에 카훈(Kahun) 마을에서 노예들이 갑작스럽게 대규모로 탈출했다는 증거를 발견했다. 카훈 마을은 제12왕조 때에 피라미드 건축 노동자들이 살았던 셈족 노동자의 마을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이 제13왕조에 일어났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제12대 왕조 때 노예로 있었을 것이고, 피라미드 건설을 위한 진흙벽돌을 만드는 임무도 맡았을 것이다. 제13왕조의 출애굽 이후에 더 이상 피라미드는 건설되지 않았다.

첫 번째 피라미드가 이스라엘인 요셉(임호텝)에 의해 설계되었고, 이스라엘 백성이 제12왕조의 마지막 피라미드가 지어질 때까지 이집트에서 노예로 있었다면, 피라미드 시대(Pyramid age)는 이스라엘인의 이집트 체류와 일치할 것이다! 따라서 피라미드 시대는 BC 1900년부터 BC 1500년까지 400년에 걸쳐 있었다.

이스라엘인이 이집트에 체류했다는 증거(Evidence for the Israelite Sojourn in Egypt)를 참조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체류 기간(430년)과 이집트 왕조와의 관계.

.이집트 왕조와 이스라엘 역사와의 관계.


요셉은 수종 드는 의원에게 지시를 했다. 그는 방부처리 기술을 개발했고, 그의 명칭 중 하나는 프타의 아들(Son of Ptah)이었다.

"그 수종 드는 의원에게 명하여 아버지의 몸을 향으로 처리하게 하매 의원이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창세기 50:2)

임호텝(요셉)은 많은 의학 저술을 남겼고, 현대 의학의 아버지로 여겨졌다. 그리스인들은 그를 치유의 신으로 여겼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Ptolemaic dynasty)의 순례자들은 그의 죽음 이후 1000년이 넘도록, 치유되기를 희망하면서 임호텝에게 제물(미라화 된 동물)을 가져오곤 했다. 임호텝의 무덤과 연결된 화랑(Ibis Galleries)의 항아리에서 수천 개의 미라화된 따오기(ibis)가 발견되었다. 무덤에는 북쪽을 향해 놓여있는 빈 석관(empty sarcophagus)이 놓여있었다. 이 석관은 북쪽을 향해 있었는데, 이것은 임호텝이 태양신 '라(Ra)'가 아니라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인 야훼를 숭배했음을 가리킨다. 출애굽 당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떠날 때, 그의 뼈를 가져갔기 때문에, 그의 석관은 비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오기 화랑(Ibis Galleries)에서 석관과 함께 발견된 조세르의 각인이 새겨져 있는 항아리들. 임호텝의 이름과 명칭이 새겨져있는 조세르의 것으로 추정되는 동상. 무덤에서 발견된 빈 석관. 


요셉은 이집트 역사에서 매우 유명한 사람이었다. 네체리케트는 제18왕조 때까지 그의 총리를 따라 바로 조세르(Pharaoh Djoser), 요셉의 바로(Pharaoh of Joseph, or Zozer in Greek)로 알려졌다.

요셉은 7년의 기근에서 이집트를 구하고, 바로를 위해 이집트의 온 땅을 사들였다. 그는 이집트 역사에서 매우 유명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성경은 요셉이 그의 생애 마지막 66년 동안의 일에 대해 침묵하고 있지만, 그가 110세의 나이로 죽었을 때, 애굽 왕실의 장례를 받았다고 말한다.

요셉은 이집트 제3왕조의 바로 네체리케트의 총리이자, 사카라에 있는 계단식 피라미드(곡물 저장 및 유통 센터)의 설계자였던 임호텝일 가능성이 크다. 그는 7년의 기근에서 이집트를 구한 후에도, 제3왕조와 제4왕조의 바로들을 계속 섬겼고, 따라서 라(Ra) 땅의 가장 좋은 지역(고센)에 정착하여 그 수가 급증하고 있었던 가족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다.

요셉(임호텝)은 네체리케트가 기근 5년차에 죽었을 때, 바로를 장례하는 책임자였다. 요셉(임호텝)은 자신이 만든 첫 번째 곡물저장고에 네체리케트를 묻기로 결정했다. (그 저장고는 환기 문제로 곡물저장고로 계속 사용하기가 어려웠다). 곡물저장고는 네체르케트의 석관을 놓을 훌륭한 무덤으로 만들어졌다. 요셉(임호텝)은 저장고 바닥에 연단(platform)을 만들고, 저장고를 화려한 석회암으로 장식하고, 석관을 내려놓아야 했다. 이미 많이 있던 연결 터널은 네체리케트의 장례 그릇과 보물들을 놓아두는 화랑으로 확장될 수 있었다. 요셉(임호텝)은 화강암 석판으로 무덤을 봉인한 다음, 그 위를 단단한 석회암으로 마스타바를 만들었다. 이전의 마스타바는 이보다 훨씬 작았고, 바로가 묻혀 있는 곳에 작은 통로들이 있는, 진흙벽돌로 만들어진 구조물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요셉은 네체르케트의 3명의 아내와 11명의 딸들을 묻기 위해 단단한 석회암으로 만들어진 마스타바를 네체르케트의 마스타바에 더 많이 추가했다. 마스타바는 처음에는 같은 높이에서 추가되었지만, 결국 서로 겹쳐 쌓으면서, 마침내 매끄러운 석회암으로 표면 처리된 계단식 피라미드 구조가 생겼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네체르케트는 그의 총리를 따라 바로 조세르(요셉의 파라오)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집트인과 그리스인들은 그(임호텝)를 신격화하려고 했다. 사원들은 임호텝의 이름으로 지어졌고, 요셉(임호텝)이 죽은 후 1,000년이 넘도록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의 순례자들은 치유되기를 바라면서, 그의 무덤에 미라화된 동물을 바치곤 했던 것이다. 



*참조 : 이집트의 임호텝과 요셉은 동일 인물이었는가?

http://creation.kr/archaeology/?idx=4404153&bmode=view

이집트 역사와 성경 기록 : 완벽한 조화?

http://creation.kr/archaeology/?idx=4326240&bmode=view

이집트에 히브리인들이 살았다는 증거 : 그리고 출애굽 연대에 대한 고찰

http://creation.kr/archaeology/?idx=4218772&bmode=view

이집트 연대기와 성경 : 현장 고고학자 데이비드와의 대화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29&bmode=view

출애굽의 역사성을 확증하고 있는 영화, “출애굽의 증거들”이 개봉되었다.

http://creation.kr/BiblenHistory/?idx=1289000&bmode=view

“증거의 패턴: 홍해의 기적” - 성경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영화

http://creation.kr/archaeology/?idx=3156850&bmode=view

애굽의 열 가지 재앙 : 기적인가, 자연현상인가?

http://creation.kr/BiblenScience/?idx=1288843&bmode=view

시내산의 위치에 관해 논란이 되고 있는 고고학적 장소를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공개한다.

http://creation.kr/archaeology/?idx=2574870&bmode=view

모세를 찾아서 1, 2

http://creation.kr/BiblenHistory/?idx=1288911&bmode=view

http://creation.kr/BiblenHistory/?idx=1288912&bmode=view


출처 : gospelclips , November 13, 2015.

주소 : https://josephandisraelinegypt.wordpress.com/

번역 : 장경태

미디어위원회
2021-03-03

파묻힌 비밀들은 밝혀낼 가치가 있다
(Buried Secrets Can Be Worth Uncovering)

by James J. S., Johnson, J. D. TH.D.

   
      때때로 파묻혔던 비밀이 밝혀져 숨겨졌던 진실이 드러난다. 하지만, 아무도 부지런히 땅을 파려고 하지 않는다면, 숨겨져 있는 것들은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작년에는 어떤 “비밀 무덤들”이 발견되었다.[1, 2] 그것은 스코틀랜드 오크니 제도(Orkney Islands)의 뉴어크 만(Newark Bay) 근처의 해안 절벽에 숨겨져 있던 바이킹(Viking) 묘지에서 인골들이 발견된 것이었다. 폭풍 외에 어떤 도굴꾼도 해안 묘지를 훼손시키지 않았다.

최근의 폭풍은... [섬 해안의] 묘지가 있는 부드러운 사암 절벽에 침식을 일으켰다. 그 결과 뼈들이 노출되어 튀어나오기 시작했고, 일부는 해변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바이킹 묘지의 크기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지만, 수백 구의 유해가 그곳에 안치된 것으로 추정된다.[1]

때때로 이와 같은 발견들은 의도하지 않았던 놀라운 사실들을 드러낸다.[3] 이러한 우연한 발견은 "더 깊이 파고들면" 확장될 수 있다.[1, 3]


성경적 역사의 더 깊은 연구

지구 역사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완전히 정확하고 신뢰할 수 있다. 만약 조각들이 우리가 알고 있던 역사와 맞지 않는다면, 더 깊이 파보라. 성경은 정밀 조사를 견뎌낸다.

오래 전에 성경 비판가들은 다니엘 5장에서 벨사살(Belshazzar) 왕이 벽에 쓰여진 글자를 읽고 해석을 하는 사람에게 바빌로니아 제국에서 "셋째 통치자"로 삼겠다는 제안을 기록한 것에 대해 비웃었다(다니엘 5:7,16). 요셉은 애굽(이집트)에서 2인자의 자리인 총리에 임명됐다.(창세기 41:37-45). 그렇다면 다니엘은 왜 3인자의 자리를 제안 받았느냐는 것이었다.

1924년에 새롭게 발견된 고대 기록에 따르면, 벨사살의 아버지 나보니두스(Nabonidus) 왕은 먼 곳에 가 있는 동안, 그의 아들에게 지배권의 위임(공동 왕)을 해주었다. 벨사살은 그래서 제국의 2인자였고, 그래서 ‘셋째 통치자’는 그가 줄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였던 것이다.[4]


창조론에 대한 더 깊은 연구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이 자신의 이론을 발표했을 때, 창조주를 대신하여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이 생물이 생존하도록 생각하고, 선택할 수 있는지를 실증적으로 입증하기 위해 그의 이론을 "세밀하게 조사" 해보려고 애썼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고맙게도, ICR의 랜디 굴리우자(Randy Guliuzza) 박사는 진화론 연구 논문들을 더 깊이 파헤치는 작업에 착수했고, 자연선택 모델은 벌거벗은 임금님의 새 옷과 같은, 미끼상품에 의한 사기라고 폭로했었다.[5]

굴리우자 박사는 끈기 있게 묻혀있는 비밀을 밝혀내고, 지속적으로 연구 결과들을 보고하고 있다. 그는 다양한 생물들이 존재하게 된 원인 제공자로서 자연선택을 반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창조주가 모든 생물들에 장착시킨 정교한 생체공학에 대한 반박할 수 없는 증거들을 수집하고 구축하고 있다.[5] 

진화론자들이 과학계, 교육계, 언론매체 등을 장악한 상태에서, 진실은 잘 보도되지 않고 파묻힌다. ICR(그리고 성경적 창조론 단체들)은 창조/진화 논쟁을 통해 진실을 밝혀내고, 성경을 변증하기 위한 많은 기사들을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전문적인 깊이 있는 연구와 논문들을 더 많이 보고하려고 한다.

이것은 베뢰아 사람들의 전통이었다.(사도행전 17:11). 왜냐하면 성경을 더 깊이 상고하고, 더 많은 진실을 찾아내는 것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켜 줄 것이기 때문이다.


References
1. “Newark is partly composed of soft boulder clay, meaning the island is prone to landslides.…The location was in use for around a thousand years (550 AD – 1450 AD) and has many secrets yet to reveal.” Palace, S. Ancient Viking Cemetery Exposed by Powerful Storm. The Vintage News. Posted on thevintagenews.com March 21, 2020, accessed December 10, 2020.
2. ICR reported on disinterred Viking skeletons that illustrate how evolutionists’ uniformitarian assumptions fail forensic science scrutiny. Johnson, J. J. S. 2018. Viking Bones Contradict Carbon-14 Assumptions. Acts & Facts. 47 (5): 21.
3. Criswell, D. 2004. The “Evolution” of Antibiotic Resistance. Acts & Facts. 33 (12), discussing Alexander Fleming’s fortuitous discovery of penicillin. See also Luke 8:17.
4. Whitcomb, J. C. 1985. Daniel. Chicago, IL: Moody Press, 77-79. Dr. Whitcomb notes, “Belshazzar the king…[was] subordinate king under his father, Nabonidus, during the final fourteen years of the Neo-Babylonian Empire (553-539 BC).” Belshazzar matches the Babylonian king BEL-SHAR-USUR mentioned on a cuneiform tablet found as early as AD 1861, as well as the Babylonian “crown prince” who “was regarded as king” in the Nabonidus Chronicle publicized in AD 1882. Belshazzar was “left in full control of the [Babylonian] army from at least 549 to 545 BC while [King] Nabonidus was establishing a new military and commercial fortress at Teima in northwest Arabia.”
5. Guliuzza, R. J. 2011. Darwin’s Sacred Imposter: Natural Selection’s Idolatrous Trap. Acts & Facts. 40 (11): 12-15; Guliuzza, R. J. 2010. Natural Selection Is Not “Nature’s Intelligence.” Acts & Facts. 39 (5): 10-11.

* Dr. Johnson is Associate Professor of Apologetics and Chief Academic Officer at the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Cite this article: James J. S. Johnson, J.D., Th.D. 2021. Buried Secrets Can Be Worth Uncovering. Acts & Facts. 50 (2).


*참조 : 바이킹 DNA는 바벨탑 이후의 유전적 다양성을 보여준다.

http://creation.kr/BiblenHistory/?idx=5200676&bmode=view

바이킹의 뼈는 방사성탄소 연대측정의 한 문제점을 드러냈다.

http://creation.kr/IsotopeClock/?idx=1289238&bmode=view

사람과 공룡이 함께 살았다는 증거들 8 : 유럽의 역사와 예술품에 등장하는 용은 공룡이었다!

http://creation.kr/Dinosaur/?idx=1294634&bmode=view


자연선택이 진화의 증거가 될 수 없는 이유 : 자연선택은 제거할 수는 있지만, 만들어낼 수는 없다.

http://creation.kr/NaturalSelection/?idx=1757447&bmode=view

자연선택은 진화가 아니다 : 선택은 기존에 있던 것에서 고르는 일이다.

http://creation.kr/NaturalSelection/?idx=1290315&bmode=view

‘자연선택’의 의인화 오류 : 자연은 선택할 수 없다.

http://creation.kr/NaturalSelection/?idx=3133575&bmode=view

자연선택 (Natural Selection)

http://creation.kr/NaturalSelection/?idx=1290255&bmode=view

다윈의 잘못된 진화 예측 1 : 돌연변이, 자연선택, 수렴진화의 문제점

http://creation.kr/Textbook/?idx=1289679&bmode=view

아프고, 고통 중에 있는 순종견들과 그들을 만들었던 우생학자

http://creation.kr/NaturalSelection/?idx=3856134&bmode=view

후추나방에서 밝혀진 새로운 사실 : 생물의 색깔 변화는 설계되어 있었다.

http://creation.kr/NaturalSelection/?idx=3424353&bmode=view

적자생존'인가, '운자생존'인가?

http://creation.kr/NaturalSelection/?idx=1290272&bmode=view

진화론은 다윈에 역행하여 가고 있다. : 속자교배, 완자생존, 약자생존, 부적자생존?

http://creation.kr/NaturalSelection/?idx=1290298&bmode=view

이러한 것들이 다윈이 생각했던 것인가? : 신중자생존, 속자생존, 순간적 진화, 진화적 관심?

http://creation.kr/NaturalSelection/?idx=1290299&bmode=view

약자생존과 폐기되는 성선택

http://creation.kr/NaturalSelection/?idx=1290308&bmode=view

만우절의 농담과 같은 진화론자의 주장들. :보존된 유전자들, 약자생존, 실러캔스 이야기

http://creation.kr/Variation/?idx=1290460&bmode=view

멋진자 생존 또는 친절자 생존?

http://creation.kr/NaturalSelection/?idx=1290304&bmode=view

개는 귀엽게 보이도록 진화했는가? : 귀자생존?

http://creation.kr/NaturalSelection/?idx=1290294&bmode=view

적자생존은 진화가 아니다 :살충제와 추위 등에 살아남는 것이 진화인가?

http://creation.kr/NaturalSelection/?idx=1290276&bmode=view

진화론자들의 유인 상술에 걸려들지 말라 : ‘진화’라는 단어의 이중적 의미와 사용

http://creation.kr/NaturalSelection/?idx=1290288&bmode=view


가나안의 하솔 - 성경이 옳았다! : 성경에 보존된 고대 도시의 흔치않은 지식

http://creation.kr/archaeology/?idx=4048467&bmode=view

모압 석비가 입증하고 있는 성경 기록의 역사적 사실성 : 모압 왕 메사의 자랑은 창세기를 확인해주고 있다.

http://creation.kr/archaeology/?idx=2759771&bmode=view

사울 왕의 아들 ‘에스바알(이스보셋)’의 이름이 새겨진 3,000년 전 도자기가 발견되었다.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84&bmode=view

여호수아의 아이 성에 대한 새로운 고고학적 발굴 : 또 다시 확인된 성경 기록의 정확성.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82&bmode=view

바빌로니아 점토판에 성경 속 인물이 언급되어 있었다. 느부갓네살 왕의 환관장 살스김의 이름이 새겨진 점토판의 발견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36&bmode=view

성경 속 이름의 인장이 예루살렘에서 발견되었다. : 느헤미야에 기록된 데마의 인장은 성경의 고고학적 정확성을 입증하였다.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40&bmode=view

고고학은 성경을 지지하는가? 1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57&bmode=view

출애굽의 역사성을 확증하고 있는 영화, “출애굽의 증거들”이 개봉되었다.

http://creation.kr/BiblenHistory/?idx=1289000&bmode=view

“증거의 패턴: 홍해의 기적” - 성경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영화

http://creation.kr/archaeology/?idx=3156850&bmode=view

시내산의 위치에 관해 논란이 되고 있는 고고학적 장소를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공개한다.

http://creation.kr/archaeology/?idx=2574870&bmode=view

성경이 진실이라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http://creation.kr/BiblenHistory/?idx=1288966&bmode=view

노아의 16명의 손자 : 고대의 지명과 민족들의 이름 속에 남아있다.

http://creation.kr/EvidenceofFlood/?idx=1288381&bmode=view

여리고의 성벽 : 고고학적 확인에 의하면 여리고성의 벽은 정말로 무너져 내렸다.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33&bmode=view

여호수아의 파괴 이후의 여리고 성 : 성경과 고고학의 일치.

http://creation.kr/archaeology/?idx=3837349&bmode=view

이집트 연대기와 성경 : 현장 고고학자 데이비드와의 대화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29&bmode=view

사울 왕의 아들 ‘에스바알(이스보셋)’의 이름이 새겨진 3,000년 전 도자기가 발견되었다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84&bmode=view

이사야 선지자의 인장이 발견되었다 : 히스기야 왕의 인장에 이은 놀라운 발견!

http://creation.kr/BiblenHistory/?idx=1289007&bmode=view

왕비 이세벨의 고대 인장이 발견되었다.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37&bmode=view

이집트 왕 시삭에 대한 어떤 증거가 발견된 적이 있는가?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50&bmode=view

예언자 발람의 존재를 증명할 어떤 고고학적 증거가 있는가?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52&bmode=view

스바 여왕 : 솔로몬은 이집트 파라오의 방문을 받았는가?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45&bmode=view

솔로몬 왕이 건설했을 가능성이 있는 성벽이 예루살렘에서 발견되었다.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65&bmode=view

솔로몬 왕의 구리광산에 대한 증거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70&bmode=view

모세를 찾아서 1, 2

http://creation.kr/BiblenHistory/?idx=1288911&bmode=view

http://creation.kr/BiblenHistory/?idx=1288912&bmode=view

중국 삼성퇴의 청동나무 : 창세기를 묘사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유물?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35&bmode=view

중국의 ‘알려지지 않은’ 신에 대한 기원 : 고대 상형문자인 한자 속에 나타나있는 성경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09&bmode=view

제1성전 시대의 저수조가 예루살렘에서 발견되었다.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76&bmode=view

성경 역사를 확증해주고 있는 고대 앗수르 유물. 대영박물관에 있는 성경의 고고학적 증거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83&bmode=view


출처 : ICR, 2021. 1. 29.
주소 : https://www.icr.org/article/buried-secrets-can-be-worth-uncovering/

번역 : 미디어위원회



미디어위원회
2021-01-05

치아의 치석으로 확인된 청동기 시대의 국제무역 

(Bronze Age Global Trade Identified in Teeth)

David F. Coppedge


       이스라엘에 살았던 청동기 시대(Bronze Age) 사람들은 과학자들이 생각한 것보다 더 똑똑했다. 그들은 3,700년 전에 중국 음식을 먹고 있었다.

오늘날 독일인과 유대인이 함께 연구하는 모습은 반갑다. 1930년대의 막스플랑크 연구소(Max Planck Institute)의 과학자들은 나치 정권에 협력했고, 홀로코스트에 연루되었다. 그리고 이제 2020년에 막스플랑크 연구소와 루트비히-막시밀리안 뮌헨 대학(Ludwig Maximilian University of Munich)의 과학자들은 이스라엘 여러 대학의 과학자들과 협력하여 중요한 것을 발견했다. 그 발견은 무엇인가? 중동의 지중해 연안 지역인 레반트(Levant) 지방에 살았던, 청동기 후기와 초기 철기시대의 사람들이 아시아 지역의 별미를 먹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었을까? 그들은 치아의 치석(dental calculus, 경화된 플라크)을 검사했다.


지중해 사람들은 3700년 전에 아시아 음식을 먹고 있었다.(New Scientist. 2020. 12. 21). "지중해에 사는 사람들은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최대 수천 년 전에 남아시아 및 동아시아 요리를 먹고 있었을 수 있다." 기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독일 루트비히-막시밀리안 대학의 필립 스톡해머(Philipp Stockhammer)와 그의 동료들은 지중해의 동쪽 지역인 레반트에서 발굴된 16명의 치아에 남아있는 미세한 음식 찌꺼기를 조사했다. 이 사람들은 BC 17세기와 11세기에 므깃도(Megiddo)와 텔 에라니(Tel Erani)에서 살았다.

연구팀은 다양한 사회 계층의 사람들이 참깨, 콩, 강황, 바나나를 포함하여, 남아시아 또는 동아시아의 음식을 먹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발견은 이 지역에 등장하는 이러한 식품들의 등장 시기가 수세기, 또는 콩의 경우 수천 년을 더 거슬러 올라간다.

가치 있는 물품들의 무역은 알려져 있었지만, 이들은 식품이다. 요리의 세계화에 대한 발견은 고대 사람들의 능력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이 과학자들이 사용한 기술은 초기 미국인, 호주인, 아프리카인의 무역 습관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므깃도는 이스라엘 북부의 이스르엘(Jezreel) 또는 므깃도(아마겟돈) 계곡 근처에 있다. 텔 에라니는 블레셋 사람들의 땅 근처로 아마도 립나(Libnah)나 가드(Gath) 근처에 있었다. 가나안 사람들과 블레셋 사람들이 후기 청동기 시대에 아시아 음식을 먹고 있었다면, 아마도 다윗 왕과 솔로몬 왕의 초기 철기시대 왕국에서도 그러한 음식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들이 중국 음식을 먹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아마도 이 국제무역의 증거는 비옥한 초승달 지역 전체에서 발견될 것이다.

이 연구는 PNAS 지(Scott et al., 2020. 12. 21)에 “이국적 식품은 BC 2천 년 전에 남아시아와 근동 사이의 무역을 보여준다”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남부 레반트에서 청동기시대 및 초기 철기시대의 치아 치석에서 주식 및 이국적 식품의 식별을 보고한다. 식품 식물의 미세잔여물과 단백질에 대한 분석은 BC 2천년 동안 남아시아와 동아시아에서 와서 소비됐던 외래 식품에 대한 새로운 빛을 비춰준다. 우리는 지중해 사람들도 참깨(sesame), 콩(soybean, 대두), 바나나, 강황(turmeric)을 섭취하고 있었다는 가장 초기의 직접적인 증거를 제공한다. 화학물질 분석 및 현미경 기술을 사용하여, 다양한 식품물질들을 회수하고 식별함으로써, 고대 근동지역의 초기 무역 경로와 초기 국제화의 복잡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능하게 해준다. 그리고 이제 국제무역이 얼마나 오래 지속됐는지, 또는 어느 시기까지 이루어졌는지 등에 관한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연구자들은 치아의 치석에서 대추야자(date palms)와 밀(wheat)에 대한 증거를 찾을 것으로 예상했고, 실제로 그것들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들은 중국을 포함한 극동지역에서 수입된 곡물과 향신료를 발견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위의 작물과 달리 콩(Glycine), 바나나(Musa), 심황(Curcuma longa) 등은 예상치 못한 발견이었다. BC 20세기 이전 이 지역에서 콩 재배는 알려져 있지 않았고, 수수(millet)와 마찬가지로, 콩의 경작 중심지는 중국 중부의 황하 근처였다. 그 지역에서는 일찍이 BC 7000년에서 6500년에도 재배되고 있었다.(101) 그러나 콩은 참깨와 마찬가지로, 기름을 얻는 주요 식물이며, 그 기름은 장거리로 운송될 수 있다….

바나나는 BC 5천 년에 뉴기니에서 재배되었고(109), BC 1천 년에 서아프리카의 카메룬에 이르기까지 인간에 의해서 재배가 확산되었다.(110, 111). 그러나 고고학적 기록을 통해 바나나의 재배와 무역을 추적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이 입증되어왔다. 바나나는 부패하기 쉽고, 재배된 바나나는 씨가 없기 때문에(대신 절단에 의해서 번식), 바나나의 식물 잔해를 회수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텔 에라니에서 발견된 유골들의 치아에는 바나나 잔류물이 남아있었다. 바나나는 어떻게 거기에 도착했던 것일까? 다른 식물은 상인이 운송해온 식품들의 씨앗들을 재배하여 얻을 수 있겠지만, 이 식물은 아니다. 연구자들은 할 말을 잃었지만, 바나나임을 확신했다.

텔 에라니의 개체 ERA017의 치석에서 주요 바나나 과일 숙성 단백질이 확인됐다는 것은, BC 1천 년에 레반트에 바나나가 존재했거나, 남아시아 또는 동아시아에서 바나나를 먹었던 개인(예로 상인이나 선원)이 텔 에라니로 이동해와 묻혔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만약 먼 대륙에서 바나나를 먹었던 개인이 이동해왔다면, 이스라엘까지의 긴 여행 후에도 치아에 바나나의 잔해가 남아있을 것 같지는 않다. 요약하면, 이 연구는 "BC 2천 년 전에도 지중해와 남아시아를 연결하는 역동적이고 복잡한 국제무역이 존재했음"을 가리킨다.

--------------------------------------------------


현대인은 국제무역을 너무 자랑스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수천 년 전의 사람들도 지적이었고, 기술력이 뛰어났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말해왔다. 후기 청동기시대의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이동수단을 고려해볼 때, 블레셋과 가나안 땅의 일반 사람들의 이빨에 바나나와 강황 찌꺼기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정말 놀랍다. 그 당시에 히브리 민족도 가나안 땅에 살았다. 솔로몬은 BC 950년경에 이국적인 향신료, 동물, 새를 수입했다. 이보다 수세기 전에도 국제무역이 있었다. 인류는 언제나 지적이고, 통찰력이 있었고, 기술력을 갖고 있었다. 인간은 독특하고, 예외적인 존재로서, 뇌뿐만 아니라, 정신과 영혼을 부여 받았다.



*관련기사 : 청동기시대에도 장거리 식자재 교역 이뤄졌다? (2020. 12. 24. Sciencetimes)

고단백질체학으로 지중해인 유해 치석 분석…수입 음식물 확인


*참조 : 고대 인류의 유물이 섬에서 발견되었다 : 초기 인류는 배를 타고 항해를 했다.

http://creation.kr/Apes/?idx=2613754&bmode=view

인류의 조상들은 배를 타고 항해를 할 수 있었다 : 지중해 크레타 섬에서 석기시대(13만 년 전)의 돌연장들이 발견되었다.

http://creation.kr/Apes/?idx=1852101&bmode=view

‘석기시대’ 사람들은 놀랍도록 현대적이었다. : 배를 만들고, 장신구와 화장을 하고, 곡물을 먹고, 구분된 공간을 가졌다.

http://creation.kr/Apes/?idx=1852106&bmode=view

사람 화석과 음식에 대한 의심스러운 오래된 연대 : 11만 년 전에도 호모 에렉투스가 살았다?

http://creation.kr/Apes/?idx=3001583&bmode=view

비옥한 초승달 지역이 사라지고 있다.

http://creation.kr/BiblenHistory/?idx=1288975&bmode=view

고대인의 신비 : 거석 기념물, 고도의 토목기술, 사라진 문명...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04&bmode=view

고대문명들과 현대인 : 고대인의 전지, 계산기, 점화전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23&bmode=view

괴베클리 테페는 기하학적으로 건축되었음이 밝혀졌다 : 신석기인들이 만들었다는 진화 이야기는 의심스럽게 되었다.

http://creation.kr/archaeology/?idx=5321913&bmode=view

팀나의 구리 광산은 솔로몬 왕국의 부강함을 보여준다.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86&bmode=view

인류의 문명은 왜 그렇게 늦게 시작되었는가? 

http://creation.kr/Apes/?idx=1852237&bmode=view

고고학에서는 석기시대→청동기 시대→철기시대?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01&bmode=view

영국에서 로마시대 이전의 도로가 발견됐다.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81&bmode=view

가나안의 하솔 - 성경이 옳았다! : 성경에 보존된 고대 도시의 흔치않은 지식

http://creation.kr/archaeology/?idx=4048467&bmode=view

경이로운 스톤헨지! : 바벨 후에 건축된 석기시대의 유물?

http://creation.kr/archaeology/?idx=3670517&bmode=view

놀라운 말타의 동굴인들 : 현대인도 최근까지 동굴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25&bmode=view

”야벳, 컴퓨터 끄는 것을 잊지 말거라!” : 2,000 여년 전의 고대 난파선에서 발견된 놀라운 기계 장치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63&bmode=view

석기시대에 삼각함수 전문가가 영국에 있었는가?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62&bmode=view

330만 년 전으로 주장되는 돌 도구(석기)의 발견으로, 교과서의 인간 진화론은 또 다시 수정되어야만 한다. 

http://creation.kr/Apes/?idx=1852243&bmode=view

50만 년 전(?) 인류는 돌칼을 만들고 장애아를 돌보았다.

http://creation.kr/Apes/?idx=1852074&bmode=view

독일의 30만 년(?) 전 인류의 거주 장소에서 창, 불의 사용, 난로, 말뼈, 신선한 나무...등이 발견되었다.

http://creation.kr/Apes/?idx=1852191&bmode=view

초기 인류는 원시적이지 않았다 : 인도에서 7만5천 년(?) 전의 돌연장과 남아프리카에서 7만 년(?) 전의 알껍질 장식의 발견

http://creation.kr/Apes/?idx=1852108&bmode=view

석기시대에 외과수술이 이루어졌다는 증거가 발견되었다.

http://creation.kr/Apes/?idx=1852099&bmode=view

원숭이도 무심코 돌 도구(석기)를 만들고 있었다 : 초기 인류가 만들었다는 타제석기는 의문스럽게 되었다.

http://creation.kr/Apes/?idx=1852220&bmode=view


출처 : CEH, 2020. 12. 29.

주소 : https://crev.info/2020/12/bronze-age-global-trade-identified-in-teeth/

번역 : 미디어위원회


미디어위원회
2020-11-16

괴베클리 테페는 기하학적으로 건축되었음이 밝혀졌다.

: 신석기인들이 만들었다는 진화 이야기는 의심스럽게 되었다. 

(Göbekli Tepe shows evidence of geometric planning)

by Phil Robinson and Robert Carter


      1995년 이후로 터키 남동부에서 발견된 괴베클리 테페(Göbekli Tepe) 유적지는 고고학적 발굴의 온상이었다.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 유적지 중 하나이며, 그 복잡성, 계획성, 통찰력에 대한 명백한 증거들은 인류 진화론에 직접적인 도전이 되고 있다.(참조 : How does Göbekli Tepe fit with biblical history?) 이 장소는 채석장에서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 거대한 T-자 모양의 기둥들이 원형으로 서있는 기념비적인 규모를 갖고 있다. (약 200개에 달하는 돌기둥들이 20여개의 원을 이루고 있는데, 각각의 기둥의 높이는 대략 6m이고, 무게는 20t이다. - 위키백과

.괴베클리 테페의 독수리가 새겨진 부조(relief).


진화론적 연대표에 따르면, 이 유적지는 11,000~12,000년 전인 신석기 시대에 함께 모여 수렵채집을 했던 원시인들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며, 아마도 “농업이나 동물 가축화의 증거가 지구에 나타나기 수백 년 전”에 지어졌다는 것이다.[1] 그러나 성경의 시간 틀에 의하면, 그것은 대홍수 이후에 지어졌다. 따라서 진화론자들은 군대나 노동자들을 갖고 있지 못했던, 간신히 먹을 것만을 스스로 수렵채집을 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을 지을 수 있었는지, 그것을 짓기에 필요한 잉여 시간과 식량을 어떻게 구했는지 의아해한다. 반면에 성경에 의하면, 사람들은 항상 현명했고, 부지런했고, 대홍수 이후 문명을 매우 빠르게 이루어 건축했을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것의 복잡성, 계획성, 통찰력에 대한 명백한 증거들은 인류 진화론에 직접적인 도전이 되고 있다.


성경과의 연결

이 장소의 또 다른 특이한 점은 성경 초기의 매우 중요한 도시였던 하란(Haran)과 매우 가깝다는 것이다. 하란은 데라가 죽은 곳이고(창 11:32), 아브라함, 사라, 롯이 약속의 땅으로 가기 위해 떠난 곳이다.(창 12:1-5). 또한 하란은 이삭이 아내를 얻고(창세기 24장), 야곱이 여러 해 동안 살았으며(창세기 28~31장), 이스라엘의 12대 족장 중 11명이 태어났던 지역(밧단아람, Paddan Aram)의 한 주요한 도시이다.(창세기 35:16–20). 괴베클리 테페는 하란 근처에 있을 뿐만 아니라, 불과 50km가 조금 넘게 떨어져 있고, 해발 고도가 760m로 하란보다 340m가 더 높아서, 멀리에서 직접 보여질 수도 있는 곳이다! 괴베클리 테페는 언덕 위에 지어졌다. 그것은 북쪽으로 아라라트까지 뻗어있는 산맥의 남쪽 가장자리에 있다. 또한 남쪽으로 뻗어나가는 산이 유프라테스 강의 지류 중 하나인 발릭강(Balikh River) 분지를 둘러싸고 있어서, 넓고 물이 풍부한 계곡을 내려다보고 있다. 하란은 괴베클리 테페와 매우 가깝기 때문에, 그리고 아브라함은 대홍수 이후 역사의 초기에 살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가족은 이 장소에 대해 확실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곳은 그의 생애 동안에 번성한 곳이었을 수 있다. 큰 녹색 직사각형을 보면, 하란은 가운데 정중앙에 있다. 괴베클리 테페는 녹색 직사각형의 맨 위에 있다. 왼쪽에 있는 우르파(Urfa)도 주목하라. 오늘날 샨르우르파(Şanlıurfa)라고 불리고 있으며, 로마시대에는 에데사(Edessa)라고 불렸다. 어떤 사람들은 이곳이 “갈대아인의 우르(Ur of the Chaldeans)”의 후보라고 제안하는 반면(창세기 11:28), 다른 사람들은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인의 우르(Sumerian Ur)를 선호한다. 

.괴베클리 테페와 하란의 위성 사진 (130 x 200km) (Google Earth).  

.하란에서 바라본 괴베클리 테페(Google Earth).

.괴베클리 테페에서 바라본 하란(Google Earth).


기하학적 건축 계획의 발견

괴베클리 테페(Göbekli Tepe)는 미스터리의 연속을 보여주고 있다. 부지의 규모 외에도, 일부 기둥들은 동물 모습들이 저부조(bas relief)로 새겨져 있으며, 일부 조각은 깊은 부조로 되어있어서, 이것은 장인이 그것을 조각하기 위해서 많은 돌을 깎아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기둥 측면에 입체적으로 악어가 새겨져 있다. 동물 조각에는 더 이상 그 지역에서 살지 않는 악어를 포함하여, 독수리, 전갈, 오리, 사자 등이 새겨져 있다. 현재까지 사원으로 여겨지는 3개의 원형 담(enclosures, 울타리)이 발굴되었지만, 그 장소의 대부분(90% 이상)은 아직 발굴되지 않고 있다. 최근 건축학적 조사는 알려진 세 개의 원형 돌담이 서로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설명하려고 했다.[2] 돌 울타리 내에는 두 개의 거대한 독립 기둥이 있으며, 커다란 직사각형 기초는 서로 마주보고 있고, 벽 옆에 위치하는 추가적 기둥들로 둘러싸여 있다. LiveScience.com 지의 최근 기사에 따르면, “가장 중앙에 있는 두 개의 기둥은 원형 구조의 중간 지점과 정확히 정렬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세 개의 구조물의 중심점을 연결하는 가상의 선을 그렸을 때, 거의 완벽한 정삼각형, 또는 길이가 같은 세 변의 삼각형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사진 참조).[1]

.디트리히(Dietrich et al) 등이 제시한 괴베클리 테페의 기하학적 모습. 중앙 기둥의 남쪽면 사이의 세 중간 지점(빨간색)은 정삼각형을 이루고 있다.(개략도 위에 겹쳐진 도면).

.3개 기념비적 원형 건축물이 있는 주요 발굴 지역. 독일 고고학연구소<photo E. Kücükactual-site>


이제 기하학적 계획을 발견했으므로, 세 개의 담은 “ 처음부터 복합적 건물로 계획되고 지어졌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제 기하학적 구조가 발견되었으므로, 세 개의 돌벽은 구별된 건축물로서 뒤섞여져서 마구 지어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복합적 건물로 계획적으로 지어졌다”는 것이 분명하다.[2] 이것은 물론 건축자가 건축 자재를 확보하여 현장으로 운송하기 전에, 수학적 지식을 갖고 있었고, 특별한 건축 계획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괴베클리 테페에 대한 이해

괴베클리 테페에 대한 세속적 연대는 스톤헨지(Stonehenge, 기하학적 패턴으로 지어졌고 최근 놀라운 발견의 주제이기도 함)보다 7,000년 이상 앞서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사이 연대 동안에 대규모로 구축된 다른 건축물에 대한 증거가 거의 없다. 고고학적으로는 그 사이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오히려 약 3,500-4,000년 전에, 홍수 이전의 조상으로부터 수학적 및 공학적 지식을 전수받았던, 홍수 이후 초기 종족 그룹 중 하나에 의해 건축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Related Articles

References and notes

  1. Saplakoglu, Y., The world’s oldest temple was built along a grand geometric plan, livescience.com, 25 May 2020. 
  2. Haklay, G., & Gopher, A. Geometry and Architectural Planning at Göbekli Tepe, Turkey, Cambridge Archaeological Journal 30(2):343—357, May 2020. 


*참조 : 경이로운 스톤헨지! : 바벨 후에 건축된 석기시대의 유물?

http://creation.kr/archaeology/?idx=3670517&bmode=view

석기시대에 삼각함수 전문가가 영국에 있었는가?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62&bmode=view

”야벳, 컴퓨터 끄는 것을 잊지 말거라!” : 2,000 여년 전의 고대 난파선에서 발견된 놀라운 기계 장치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63&bmode=view

고대문명들과 현대인 : 고대인의 전지, 계산기, 점화전

http://www.creation.webpot.kr/archaeology/?idx=1288723&bmode=view

고대인의 신비 : 거석 기념물, 고도의 토목기술, 사라진 문명...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04&bmode=view

놀라운 말타의 동굴인들 : 현대인도 최근까지 동굴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http://www.creation.webpot.kr/archaeology/?idx=1288725&bmode=view

고대 인류의 유물이 섬에서 발견되었다 : 초기 인류는 배를 타고 항해를 했다.

http://creation.kr/Apes/?idx=2613754&bmode=view

인류의 조상들은 배를 타고 항해를 할 수 있었다 : 지중해 크레타 섬에서 석기시대(13만 년 전)의 돌연장들이 발견되었다.

http://creation.kr/Apes/?idx=1852101&bmode=view

330만 년 전으로 주장되는 돌 도구(석기)의 발견으로, 교과서의 인간 진화론은 또 다시 수정되어야만 한다. 

http://creation.kr/Apes/?idx=1852243&bmode=view

그리스 트라칠로스에서 발견된 570만 년 전의 완전한 사람발자국으로 붕괴되고 있는 인류 진화론

http://creation.kr/Apes/?idx=1852249&bmode=view

라에톨리 발자국은 진화론과 조화되지 않는다 : 366만 년(?) 전의 발자국은 현대인의 것과 유사했다.

http://creation.kr/Apes/?idx=1852118&bmode=view

사람의 불 사용은 알려진 것보다 더 오래됐다. : 70만~100만 년 전에 인류는 불을 사용했다?

http://creation.kr/Apes/?idx=1852161&bmode=view

원숭이도 무심코 돌 도구(석기)를 만들고 있었다 : 초기 인류가 만들었다는 타제석기는 의문스럽게 되었다.

http://creation.kr/Apes/?idx=1852220&bmode=view

‘석기시대’ 사람들은 놀랍도록 현대적이었다. : 배를 만들고, 장신구와 화장을 하고, 곡물을 먹고, 구분된 공간을 가졌다.

http://creation.kr/Apes/?idx=1852106&bmode=view

석기시대에 외과수술이 이루어졌다는 증거가 발견되었다.

http://creation.kr/Apes/?idx=1852099&bmode=view


가나안의 하솔 - 성경이 옳았다! : 성경에 보존된 고대 도시의 흔치않은 지식

http://creation.kr/archaeology/?idx=4048467&bmode=view

모압 석비가 입증하고 있는 성경 기록의 역사적 사실성 : 모압 왕 메사의 자랑은 창세기를 확인해주고 있다.

http://creation.kr/archaeology/?idx=2759771&bmode=view

사울 왕의 아들 ‘에스바알(이스보셋)’의 이름이 새겨진 3,000년 전 도자기가 발견되었다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84&bmode=view

여호수아의 아이 성에 대한 새로운 고고학적 발굴 : 또 다시 확인된 성경 기록의 정확성.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82&bmode=view

바빌로니아 점토판에 성경 속 인물이 언급되어 있었다. 느부갓네살 왕의 환관장 살스김의 이름이 새겨진 점토판의 발견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36&bmode=view

성경 속 이름의 인장이 예루살렘에서 발견되었다. : 느헤미야에 기록된 데마의 인장은 성경의 고고학적 정확성을 입증하였다.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40&bmode=view

고고학은 성경을 지지하는가? 1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57&bmode=view

출애굽의 역사성을 확증하고 있는 영화, “출애굽의 증거들”이 개봉되었다.

http://creation.kr/BiblenHistory/?idx=1289000&bmode=view

“증거의 패턴: 홍해의 기적” - 성경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영화

http://creation.kr/archaeology/?idx=3156850&bmode=view

시내산의 위치에 관해 논란이 되고 있는 고고학적 장소를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공개한다.

http://creation.kr/archaeology/?idx=2574870&bmode=view

성경이 진실이라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http://creation.kr/BiblenHistory/?idx=1288966&bmode=view

노아의 16명의 손자 : 고대의 지명과 민족들의 이름 속에 남아있다.

http://creation.kr/EvidenceofFlood/?idx=1288381&bmode=view

여리고의 성벽 : 고고학적 확인에 의하면 여리고성의 벽은 정말로 무너져 내렸다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33&bmode=view

여호수아의 파괴 이후의 여리고 성 : 성경과 고고학의 일치.

http://creation.kr/archaeology/?idx=3837349&bmode=view

이집트 연대기와 성경 : 현장 고고학자 데이비드와의 대화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29&bmode=view

사울 왕의 아들 ‘에스바알(이스보셋)’의 이름이 새겨진 3,000년 전 도자기가 발견되었다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84&bmode=view

이사야 선지자의 인장이 발견되었다 : 히스기야 왕의 인장에 이은 놀라운 발견!

http://creation.kr/BiblenHistory/?idx=1289007&bmode=view

왕비 이세벨의 고대 인장이 발견되었다.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37&bmode=view

이집트 왕 시삭에 대한 어떤 증거가 발견된 적이 있는가?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50&bmode=view

예언자 발람의 존재를 증명할 어떤 고고학적 증거가 있는가?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52&bmode=view

스바 여왕 : 솔로몬은 이집트 파라오의 방문을 받았는가?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45&bmode=view

솔로몬 왕이 건설했을 가능성이 있는 성벽이 예루살렘에서 발견되었다.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65&bmode=view

솔로몬 왕의 구리광산에 대한 증거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70&bmode=view

모세를 찾아서 1, 2

http://creation.kr/BiblenHistory/?idx=1288911&bmode=view

http://creation.kr/BiblenHistory/?idx=1288912&bmode=view

중국 삼성퇴의 청동나무 : 창세기를 묘사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유물?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35&bmode=view

중국의 ‘알려지지 않은’ 신에 대한 기원 : 고대 상형문자인 한자 속에 나타나있는 성경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09&bmode=view

제1성전 시대의 저수조가 예루살렘에서 발견되었다.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76&bmode=view

성경 역사를 확증해주고 있는 고대 앗수르 유물. 대영박물관에 있는 성경의 고고학적 증거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83&bmode=view


출처 : CMI, 2020. 11. 5. (GMT+10)

주소 : https://creation.com/gobekli-tepe-geometric-planning

번역 : 미디어위원회


미디어위원회
2020-11-12

고대인의 신비 (The mystery of ancient man) 

: 거석 기념물, 고도의 토목기술, 사라진 문명...

Steve Cardno


거석 기념물, 고도의 토목기술, 사라진 문명...
결코 모험 영화의 줄거리들이 아니다.
우리의 고대유적들을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진실된 이야기들이 드러나고 있다.


우주에서 지구를 방문한 외계인들이 지구인들을 도와 이집트, 그리고 중앙아메리카에서 피라미드들을 건축하였다는 이야기는 사실인가?

고대인들이 어떻게 거대한 바위들을 운반하여 거석기념물들을 세우고, 정교한 공예품들을 만들었으며, 또 복잡한 문명을 건설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고도로 발달된 외계인의 기술이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 혹자는 그렇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고대인을 '원시적' 이었다고 믿는 진화론적 신념 때문인 것이다.

인류의 고대사를 살펴볼 때, 만약 진화론이 사실이라면, 과거로 갈수록 인류의 지능은 점점 낮아져서 원숭이의 지능으로 떨어지는 현상을 보아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만 성경적 창조론은 이와는 다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은 언제나 지성적인 존재였다. 사람은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고, 물건들을 발명한다. 그리고 이런 지식은 후대로 전수되고, 또 새로운 지식을 쌓아간다. 이렇게 해서 한 사회 집단 안에서 기술은 전수되고, 또 발달되어 나아갔다. 그것은 후대의 사람들이 옛날 사람보다 더 지능이 높아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진실된 역사

사람은 창조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벌써 악기나 금속세공품과 같은 물건들을 발명하고 있었다 (창세기 4:21-22). 대홍수 때 즈음에 이르러서, 인류는 고도로 발달된 기술능력을 축적하고 있었을 것이다. 비록 우리는 그 기술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하지만,1 그러나 그것을 엿볼 수 있는 단서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첫째, 노아와 그의 조수들은 대양을 항해할 수 있는 거대한 선박을 건조할 수 있었다. 그 방주의 규모가 대략, 길이 135m(450feet), 너비 23m(75feet), 높이 13m(45feet)였다. (창세기 6:15). 이 치수는 배의 안정성에 이상적이라고 알려진 비율이다.2 이 엄청난 작업에는 목공기술은 물론 고도로 발달된 공학적 지식이 필요했을 것이다. (see also Q&A: Noah's Ark).

둘째, 노아의 홍수 이후 급속하게 꽃이 핀 문명사회의 기술수준에 관한 흔적들을 지금도 살펴볼 수 있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홍수에서 살아남아 장차 도착할 신세계에서 문명생활을 다시 시작하기 위하여 가능한 한 모든 축적된 노하우를 가지고 가려고 최대의 노력을 다 했을 것이다.

성경에는 인류가 홍수 이후에 곧 거대한 도시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오늘날의 이라크 근방에 있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비옥한 골짜기 어디쯤으로 추정되고 있다. 심지어 진화론자들까지도 이러한 증거들을 무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이 지역을 '문명의 발상지' 라고 부른다. 실제 문명의 발상지라는 말은 옳다. 하지만 오직 홍수 이후에 해당하는 것이다.

바벨탑(창세기 11:1-9)은 아마 이 지역 (오늘날의 바빌론 근방)에 현재도 서있는 최초의 피라미드의 형식인 지구라트(계단식 피라미드 형 신전)였을 것이다. 유사한 형태의 많은 피라미드가 전 세계 도처의 고대 문명지역에서 발견된다. 진화론적 역사학자들은 각 문화는 같은 형식의 건축물을 독자적으로 개발했을 것으로 믿고 있다. 하지만, 그 건축물들이 유사한 이유는 발상지가 동일한 지역, 즉 바빌론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더 합리적인 것 같다.

오늘날의 인간사회도 각양 각색의 직업 집단들이 있는 것처럼, 고대의 바벨탑이 서있던 그 시절의 직업 집단들도 다양한 기술 수준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의 집단사회를 언어별로 나누었을 때, 광범위한 지식 인력도 뒤따라서 나뉘어졌을 것이다. 예컨대, 이집트와 마야의 문명을 만들어낸 본래 집단들은 분명히 토목공사와 건축, 그리고 연관된 공학적인 기술에 능숙하였을 것이다. 급속하게 발전한 그들의 문화유산을 보면 그 증거가 분명하다. 다른 집단들은 그런 지식에 결여되어 있었을 것이다.

갑자기 당신이 일단의 친족들을 데리고 사람이 살지 않은 황무지로의 이주를 강요받아 급히 이주했다고 상상해 보라. 비록 당신이 발달된 기술사회에서 살다가 이주해 왔다고 하지만, 필요한 모든 지식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가지고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예컨대, 광석을 찾아내어 제련하고 제철작업을 하는 기술 같은 것 말이다. 그래서 당신들은 석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동굴인들

홍수 이후 어떤 인간 집단들은 동굴을 주거로 택했다. 혹독한 기상조건 하에서는 동굴주거가 인위적 주거물보다 더 안전을 약속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동굴생활이 그들을 '원시적으로' 또는 비지성적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오늘날에도 도시생활을 버리고 가히 '원시적'인 환경 속에서 대체 주거물을 생활 터전으로 선택하여 살아가는 사람들도 가끔씩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지능이 떨어진 것은 아니다.

전형적인 '동굴인'은 멍청하고 짐승같은 털투성이로 그려진다. 하지만, 많은 동굴 암벽에 새겨진 그림들 속에는 현대의 유명화가들의 작품에 버금가는 재주들이 드러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최근에는 과학자들이 높은 수준의 음악적 이해력과 실력을 나타내는 '석기시대의' 악기들을 발견하고 경탄해 마지않았던 일도 있었다.3

만약에 사람들이 고립된 소집단들로 쪼개져 흩어진다면 얼마나 많은 기술들이 사라지고 말았을 것인지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가령, 어떤 소집단에는 농부와 건축가들은 있지만 기계공학자나 지질학자, 또는 대장장이는 없다는 가정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집단은 기계공학적인 '기술에 관해서는' 알고 있지만, 그 '응용방법'은 모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바벨탑 사건 이후, 다행히 광범위한 기술을 가지고 떠날 수 있었던 집단은 그들이 누리던 예전의 문화유산들을 신세계에 신속히 이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속도가 가히 '하룻밤 새에' 꽃이 핀 것 같았을 것이다.

피라미드의 건축기술이 어떻게 개발되었는지 그 증거가 알려지지 않고 있는 것과 같다. 다음의 두 인용문은 진화론적 과학들이 제시한 자료들이다.

”피라미드 건축에는 석수작업, 즉 돌을 떠내고 잘라내는 작업부터 착수해야 당연한데, 그 석수작업 방법에 대한 기술적 해명에 관한 그 어떤 증거도 찾지 못했다. 피라미드 건축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사용한 모든 연장과 기술은 그 시대보다 훨씬 이전 시대 때부터 있었을 것이다.” 4

문명의 발전은 정상적인 인간사회에서라면 완만하고 힘들게 진척되는 것이 보통인데, 고고학적 증거에 의하면, 고대 이집트의 문명은 올메크 족(Olmecs)의 문명처럼, 한꺼번에 그리고 완전히 성숙되어 (all at once and fully formed) 출현하였다. 원시사회에서 고도문명사회로 변천하는 기간이 너무도 짧아서 그 어떤 역사관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수백 년, 아니 심지어 수천 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을 기술 숙련도의 축적이 거의 하룻밤 사이에 실용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런 예는 역사상 전무후무하다.” 5

바벨에서 흩어져 새로운 지역으로 흘러간 집단들 가운데 어쩔 수 없이 석기를 사용하여야만 했던 집단들도 있었을 것이지만, 그들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다른 지식들을 쌓아갔을 것이다. 한편,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도 석기를 만족스럽게 사용하고 있는 문화민족들을 보게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도 그들은 완전무결한 인간이며, 또 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문화는 언제나 기술의 발전만을 기약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잃어버리기도 한다는 증거들도 있다. 고대 이집트의 예를 보면, 초기 피라미드의 기술 수준은 최고를 나타내고 있으며, 그 이후로는 질적 하향곡선을 그리다가, 마침내 더 이상의 건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떤 인문과학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피라미드 시대는 약 한 세기가 조금 넘는 기간동안 이어지다가 마침내 끝났다. 피라미드 건축물은 약 천 년 동안 건축되어져 왔었지만, 급속하게 그 규모가 왜소해지고 조잡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제 3기자(Giza- 역자 주: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로 유명한 이집트 Cairo 부근의 도시) 피라미드를 끝으로 피라미드 건축에 대한 열의가 영원히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6

 

거대한 건축물들과 독창적인 건축 기법들

남아메리카에 있는 티티카카(Titicaca)호수의 볼리비아 호숫가 근처에는 3,900m(13,000피트) 높은 곳에 고원지대가 넓게 펼쳐있다. 그 고원에는 티아후아나코 (Tiahuanaco)라는 고대 도시가 자리하고 있다. 고대 잉카족(Incas)이 그곳에 도착했을 당시에 이미 그 도시는 웅장한 폐허였었다. 16 세기 스페인 보물 사냥꾼들이 그곳에 들렀을 때, 대홍수가 지나간 후 미지의 거인들이 티아후아나코 도시를 매우 빠른 속도로 건설하였다는 토착 인디언의 전설을 믿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고원 일대에 흩어져있는 거대한 석상들과 바위들을 볼 수 있다. 어느 Reader's Digest 기고가는

”오늘날의 최고 수준의 엔지니어도 자신들이 과연 저 도시건설에 사용된 것과 같이 거대한 바위덩어리를 잘라내고 운반할 수 있을까 망설여질 것이다. 거대한 바위덩어리들은 마치 형틀이라도 사용했나 의심할 정도로 반듯하게 잘려져 있다. 그런데 그 작업에 어떤 형태로건 현대적인 기술이 응용되었다는 흔적은 전혀 없다.” 7 그리고 ”그 도시를 설계하고 건설한 사람들은 천재임에 틀림이 없었을 것이다.” 라고 적고 있다.8

그 고대도시의 수많은 구조물들이 수천 년 동안 비교적 손상되지 않고 남아있다. 과연 우리의 20세기 건축물들이 수천 년 이후에도 건재할까?

페루의 쿠즈코 (Cuzco)시 근처에 있는 고대도시 사크사후아만 (Sacsahuman)에는 잉카 족이 건축한 웅장한 석벽이 서있다. 이 벽에는 의도적으로 불규칙한 모양을 한 돌덩어리들이 사용되었다. 어떤 바위덩어리들은 무려 1백 톤의 무게를 하고 있지만, 지금도 바위 이음새에 종이를 끼어 넣을 수 없을 만큼 조밀하게 쌓여있다. 그것뿐이 아니다. 심지어 사크나후아만의 건축가들이 오늘날의 5층 건물만한 크기의, 무게는 약 2만 톤이 넘을 것으로 생각되는 거대한 덩어리 바위를 - 어떤 방법을 사용하여 움직였다는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 움직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경이로운 무게를 움직이는 솜씨를 오늘날의 기계로서는 흉내는 고사하고 엄두도 못 낼 것이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큰 크레인이라고 해도 최고로 들 수 있는 중량이 대략 3,000톤에 불과할 뿐이다.9

진화론을 신봉하는 신시대(New Age)의 저자들이 고대인들은 고도기술문명을 가진 미지의 인종으로부터 도움을 받았음이 틀림없다고 믿고 있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10

피라미드의 축조에 고대인이 보여주었던 독창적인 발명의 자질에 관한 두 가지 예를 살펴보자.

피라미드의 기초는 절대적 수평이 필수다. 그들은 수평기초를 독창적인 알코올 수준기를 사용하여 얻었다. 이집트인들은 우선 바닥 돌에 홈을 파고 그 홈에 물을 채웠다. 그 다음 그들은 그 홈에 막대기를 삽입하고 수준선을 표시하였다. 그렇게 하여 그들은 실질적인 수평을 확보하였다. 매장 석실 건조에 관해서 어느 저작가가 언급한 내용을 읽어보자.

”천정은 총계 400 톤에 이르는 아홉 덩어리의 석조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천정 위에서 아래로 짓누르는 석조물들의 엄청난 전체 무게의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다섯 개의 빈 칸을 석실 위에 만들어 놓아 하중을 분산시켰다. 이 구조는 가히 건축공학의 걸작품이 아닐 수 없다.” 11

수평?, 하중?, 긴장 완화를 위한 축조물?, 이런 것들에 대한 설명을 하다보면, 사전에 고도의 지식수준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이들이 응용하였던 고도로 발달된 기술을 습득하려면, 대학교의 건축학과와 토목학과에서 여러 해를 공부하여야 할 것이다. 이런 것말고도 세계 도처에서 고대인이 지녔던 독창적 발명자질을 나타내는 수많은 증거들을 볼 수 있다.

고대문명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를 하는 학자들은 아득한 과거부터 사람들이 사용하던 기술수준이 매우 높음에 '경탄' 하고 '경악했다' 는 보고를 심심찮게 하고 있다. 그들이 경악했던 실질적인 이유는 이럴 것이다. 그들이 믿었던 진화론은 먼 과거로 돌아가보면 당연히 '원시인', 다시 말해 비지성적인 사람들의 흔적들을 만나야 할 것인데, 그렇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경이로운 이야기 (amazing story)

고도의 지성은 물론 지식과 기능이 있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고대사회의 정말 놀라운 위업 이 건축과 토목공사에만 한정됐던 것은 아니다. 고대 마야 족은 치밀한 시간 관리자들이었다. 그들은 컴퓨터나 복잡한 측량기기 같은 기계의 도움 없이 태양력의 길이를 365.2420 일로 알고 있었다. 오늘날의 천문학자들이 일력의 길이를 365.2422로 계산해 낸 것이 극히 최근의 일이다.

마야 족은 11,960 일의 기간에 405번의 만월이 생기는 것으로 계산해 냈었다. 현대의 조사자들은 405번의 만월이 생기는 기간이 11,959.888 일의 기간으로 계산했다. 또한 마야 족은 화성의 삭망 기간(synodic period)을 584일 만에 생긴다고 계산했다. 그런데 현재의 과학은 그 기간을 583.92일 만으로 계산하고 있다. [화성의 삭망기간은 지구 위에서 관찰하는 화성 상(相)의 사이클을 말한다. 즉 화성의 어떤 상이, 예컨대 초승 화성의 상이 다음에 나타나는 시점, 즉 그 사이클을 말한다.]

마야 족은 물론 소위 항성기간 (siderial period) 이라 불려지는 화성공전 (224.7의 지구일) 궤도(별을 배경으로 하고 상대적인)에 의해 화성의 상이 설명될 수 있다는 갈릴레이의 설명을 알았을 리 없다. 오직 현대적 기술을 사용해야 확인될 수 있는 이 정도의 미세한 오차들은 고대 문화인들의 입지적 조건하에서는 놀라울 정도의 정확도를 나타내고 있다고 아니할 수 없다.

마야 족이 정확한 시간 관리에 집착이 강했던 것을 고려할 때, 그들이 창조된 최초의 날을 BC 3114년에 두고 일력을 시작하였다는 사실은 정말 흥미롭다. 마야 족은 수학에 빼어났었다. 그들은 오늘날의 위치결정 체계와 유사한 체계를 사용했다. 유럽의 로마인들이 사용하던 체계보다 오히려 더 나은 것이었다.

 

고대인의 독창성

극도로 난해한 업무(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아도)에 직면한 고대의 문명인들 즉, 이스터 (Easter)섬에서 거대한 석상들을 세웠고, 이집트에서는 람세스 파라오의 거대한 인물상들을 세웠던 문명인들은 건설 분야에서 사용하였던 인간적 독창성이 돋보인다. 불규칙적인 돌덩어리들을 꿰맞춰서 축조한 잉카 족의 석벽은 지진을 겪으며 수세기를 지나온 지금에도 돌의 이음새 속으로 종이조차 끼어 넣기가 어려울 정도로 조밀한 채 남아있다. 추산되는 돌덩어리의 무게가 무려 100톤이다!

*참조 : 페루 삭사이와만 요새의 미스터리가 밝혀졌다! 조금의 틈도 없는 돌벽은 부드러운 상태의 암석으로 축조되었다!

http://creation.kr/EvidenceofFlood/?idx=1288485&bmode=view


 

이런 것을 아십니까?

.
1900년 안티키데라(Antikythera) 섬의 앞바다에서 희랍인 잠수부들이 BC 65년경에 침몰된 선박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침몰선에서 인양된 유물들 가운데서 정밀기계용 금속기어들과 구경측정용 비례자들이 발굴되었다. 항해에 필요한 모종의 계산용 기기들처럼 생각되는 그것들을 발명한 사람은 대단한 지능의 소유자였을 것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인류 최초의 문명들 중의 하나로 알려진 잉카(Inca) 계곡에 있는 고대도시 모헨조다로(Mohenjo-daro)는 수천 년 이후의 유럽의 여러 도시를 능가할만한 공중위생체계를 시설하고 있었다.

.레바논의 바알베크 (Baalbek)에 있는 로마신전의 유적들은 단 하나의 거석 기초 위에 서있다. (고대문명인들이 옮겨다 놓았던 거석). 그 거석 기초의 무게가 무려 2000 톤으로 추산된다.

.티아후아나코에 있는 '태양으로 가는 문'은 한 덩어리로 된 화산암을 쪼아내어 만들어졌다. 그 무게가 100톤 정도로 추산된다. 그 운반과 건립 방법은 하나의 신비로 남아있다.

 

결론

지금까지 알려진 인류역사는 인류가 원시적인 유인원에서 진화하여 현대인이 되었다는 가정을 부정하고 있다. 오히려 과거의 증거들은 사람이 언제나 지성적인 존재로서 그들이 처한 다양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그때마다 최선의 독창성을 발휘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References
1. 
Technological and scientific progress this millennium has been prominent where the Bible was honoured. the widespread rebelliousness of the pre-Flood world would have likely hindered such blessings.
2. S.W. Hong et al., Safety investigation of Noah's Ark in a Seaway, Cen Technical Journal 8(1):26-36, 1994. All the co-authors are on the staff of the Korea Research Institute of Ships and Ocean Engineering, Taijon.
3. New Scientist 151(2048):12, Sept. 21, 1996.
4. Kurt Mendelssohn, 'A scientist looks at the pyramids', American Scientist, p.210, March-April, 1971.
5. Graham Hancock, Fingerprints of the Gods, pp. 135-136, New York Crown Trade Paperbacks, 1995.
6. Ref. 4, p. 212.
7. Simone Waisbard, in The World's Last Mysteries, (2nd edition) p. 138, Reader's Digest, 1978.
8. Ref. 7, 135.
9. Rene Noorbergen, Secrets of the Lost Races: New Discoveries of Advanced Technlogy in Ancient Civilizations, Norcom Pub. Co, TN 1977, Cited n Donald Chittcik, The Puzzle of Ancient Man, Creation Compass, 1997.
10. An alien super-race is not only unnecessary, it is contradicted by evidence. A number of false starts and collapses in pyramid-building show fallible, though intelligent humans.
11. Christopher Anmgell, reference 7, p. 192.

 

*참조 : What about the ‘Stone Age’?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5799/

A Better Model for the Stone Age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227

A Better Model for the Stone Age Part 2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225

The Stone ‘Age’—a figment of the imagination?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689/

고대 피라미드에도 전기 사용됐다?  (2006. 3. 1. 한겨레) 

https://www.hani.co.kr/arti/science/science_general/105698.html

“기원전 그리스 천체 슈퍼컴퓨터 썼다” (2006. 11. 30. 경향신문) 

https://m.khan.co.kr/world/europe-russia/article/200611301820151#c2b

'약 2300년전 고대 바빌론人 미적분 개념 알았다…목성 궤도 계산' (2016. 1. 29. 뉴시스)

https://mobile.newsis.com/view.html?ar_id=NISX20160129_0013867248#_enliple

'고대 바빌론로니아인, 기원전에 기하학 활용해 목성 궤도 계산' (2016. 1. 29. 연합뉴스)

https://www.yna.co.kr/view/AKR20160129146600009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20/i2/ancient.asp 

출처 - Creation 20(2):10-14, March 1998.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26길 28-3

대표전화 02-419-6465  /  팩스 02-451-0130  /  desk@creation.kr

고유번호 : 219-82-00916             Copyright ⓒ 한국창조과학회

상호명 : (주)창조과학미디어  /  대표자 : 박영민

사업자번호 : 120-87-70892

통신판매업신고 : 제 2021-서울종로-1605 호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26길 28-5

대표전화 : 02-419-6484

개인정보책임자 : 김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