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BRARY

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성경

미디어위원회
2021-03-03

파묻힌 비밀들은 밝혀낼 가치가 있다
(Buried Secrets Can Be Worth Uncovering)

by James J. S., Johnson, J. D. TH.D.

   
      때때로 파묻혔던 비밀이 밝혀져 숨겨졌던 진실이 드러난다. 하지만, 아무도 부지런히 땅을 파려고 하지 않는다면, 숨겨져 있는 것들은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작년에는 어떤 “비밀 무덤들”이 발견되었다.[1, 2] 그것은 스코틀랜드 오크니 제도(Orkney Islands)의 뉴어크 만(Newark Bay) 근처의 해안 절벽에 숨겨져 있던 바이킹(Viking) 묘지에서 인골들이 발견된 것이었다. 폭풍 외에 어떤 도굴꾼도 해안 묘지를 훼손시키지 않았다.

최근의 폭풍은... [섬 해안의] 묘지가 있는 부드러운 사암 절벽에 침식을 일으켰다. 그 결과 뼈들이 노출되어 튀어나오기 시작했고, 일부는 해변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바이킹 묘지의 크기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지만, 수백 구의 유해가 그곳에 안치된 것으로 추정된다.[1]

때때로 이와 같은 발견들은 의도하지 않았던 놀라운 사실들을 드러낸다.[3] 이러한 우연한 발견은 "더 깊이 파고들면" 확장될 수 있다.[1, 3]


성경적 역사의 더 깊은 연구

지구 역사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완전히 정확하고 신뢰할 수 있다. 만약 조각들이 우리가 알고 있던 역사와 맞지 않는다면, 더 깊이 파보라. 성경은 정밀 조사를 견뎌낸다.

오래 전에 성경 비판가들은 다니엘 5장에서 벨사살(Belshazzar) 왕이 벽에 쓰여진 글자를 읽고 해석을 하는 사람에게 바빌로니아 제국에서 "셋째 통치자"로 삼겠다는 제안을 기록한 것에 대해 비웃었다(다니엘 5:7,16). 요셉은 애굽(이집트)에서 2인자의 자리인 총리에 임명됐다.(창세기 41:37-45). 그렇다면 다니엘은 왜 3인자의 자리를 제안 받았느냐는 것이었다.

1924년에 새롭게 발견된 고대 기록에 따르면, 벨사살의 아버지 나보니두스(Nabonidus) 왕은 먼 곳에 가 있는 동안, 그의 아들에게 지배권의 위임(공동 왕)을 해주었다. 벨사살은 그래서 제국의 2인자였고, 그래서 ‘셋째 통치자’는 그가 줄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였던 것이다.[4]


창조론에 대한 더 깊은 연구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이 자신의 이론을 발표했을 때, 창조주를 대신하여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이 생물이 생존하도록 생각하고, 선택할 수 있는지를 실증적으로 입증하기 위해 그의 이론을 "세밀하게 조사" 해보려고 애썼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고맙게도, ICR의 랜디 굴리우자(Randy Guliuzza) 박사는 진화론 연구 논문들을 더 깊이 파헤치는 작업에 착수했고, 자연선택 모델은 벌거벗은 임금님의 새 옷과 같은, 미끼상품에 의한 사기라고 폭로했었다.[5]

굴리우자 박사는 끈기 있게 묻혀있는 비밀을 밝혀내고, 지속적으로 연구 결과들을 보고하고 있다. 그는 다양한 생물들이 존재하게 된 원인 제공자로서 자연선택을 반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창조주가 모든 생물들에 장착시킨 정교한 생체공학에 대한 반박할 수 없는 증거들을 수집하고 구축하고 있다.[5] 

진화론자들이 과학계, 교육계, 언론매체 등을 장악한 상태에서, 진실은 잘 보도되지 않고 파묻힌다. ICR(그리고 성경적 창조론 단체들)은 창조/진화 논쟁을 통해 진실을 밝혀내고, 성경을 변증하기 위한 많은 기사들을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전문적인 깊이 있는 연구와 논문들을 더 많이 보고하려고 한다.

이것은 베뢰아 사람들의 전통이었다.(사도행전 17:11). 왜냐하면 성경을 더 깊이 상고하고, 더 많은 진실을 찾아내는 것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켜 줄 것이기 때문이다.


References
1. “Newark is partly composed of soft boulder clay, meaning the island is prone to landslides.…The location was in use for around a thousand years (550 AD – 1450 AD) and has many secrets yet to reveal.” Palace, S. Ancient Viking Cemetery Exposed by Powerful Storm. The Vintage News. Posted on thevintagenews.com March 21, 2020, accessed December 10, 2020.
2. ICR reported on disinterred Viking skeletons that illustrate how evolutionists’ uniformitarian assumptions fail forensic science scrutiny. Johnson, J. J. S. 2018. Viking Bones Contradict Carbon-14 Assumptions. Acts & Facts. 47 (5): 21.
3. Criswell, D. 2004. The “Evolution” of Antibiotic Resistance. Acts & Facts. 33 (12), discussing Alexander Fleming’s fortuitous discovery of penicillin. See also Luke 8:17.
4. Whitcomb, J. C. 1985. Daniel. Chicago, IL: Moody Press, 77-79. Dr. Whitcomb notes, “Belshazzar the king…[was] subordinate king under his father, Nabonidus, during the final fourteen years of the Neo-Babylonian Empire (553-539 BC).” Belshazzar matches the Babylonian king BEL-SHAR-USUR mentioned on a cuneiform tablet found as early as AD 1861, as well as the Babylonian “crown prince” who “was regarded as king” in the Nabonidus Chronicle publicized in AD 1882. Belshazzar was “left in full control of the [Babylonian] army from at least 549 to 545 BC while [King] Nabonidus was establishing a new military and commercial fortress at Teima in northwest Arabia.”
5. Guliuzza, R. J. 2011. Darwin’s Sacred Imposter: Natural Selection’s Idolatrous Trap. Acts & Facts. 40 (11): 12-15; Guliuzza, R. J. 2010. Natural Selection Is Not “Nature’s Intelligence.” Acts & Facts. 39 (5): 10-11.

* Dr. Johnson is Associate Professor of Apologetics and Chief Academic Officer at the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Cite this article: James J. S. Johnson, J.D., Th.D. 2021. Buried Secrets Can Be Worth Uncovering. Acts & Facts. 50 (2).


*참조 : 바이킹 DNA는 바벨탑 이후의 유전적 다양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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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의 뼈는 방사성탄소 연대측정의 한 문제점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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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공룡이 함께 살았다는 증거들 8 : 유럽의 역사와 예술품에 등장하는 용은 공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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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선택이 진화의 증거가 될 수 없는 이유 : 자연선택은 제거할 수는 있지만, 만들어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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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선택은 진화가 아니다 : 선택은 기존에 있던 것에서 고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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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선택’의 의인화 오류 : 자연은 선택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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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선택 (Natural Selection)

http://creation.kr/NaturalSelection/?idx=1290255&bmode=view

다윈의 잘못된 진화 예측 1 : 돌연변이, 자연선택, 수렴진화의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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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고, 고통 중에 있는 순종견들과 그들을 만들었던 우생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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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추나방에서 밝혀진 새로운 사실 : 생물의 색깔 변화는 설계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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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자생존'인가, '운자생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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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은 다윈에 역행하여 가고 있다. : 속자교배, 완자생존, 약자생존, 부적자생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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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것들이 다윈이 생각했던 것인가? : 신중자생존, 속자생존, 순간적 진화, 진화적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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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생존과 폐기되는 성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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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우절의 농담과 같은 진화론자의 주장들. :보존된 유전자들, 약자생존, 실러캔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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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자 생존 또는 친절자 생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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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는 귀엽게 보이도록 진화했는가? : 귀자생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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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자생존은 진화가 아니다 :살충제와 추위 등에 살아남는 것이 진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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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자들의 유인 상술에 걸려들지 말라 : ‘진화’라는 단어의 이중적 의미와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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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의 하솔 - 성경이 옳았다! : 성경에 보존된 고대 도시의 흔치않은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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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압 석비가 입증하고 있는 성경 기록의 역사적 사실성 : 모압 왕 메사의 자랑은 창세기를 확인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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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 왕의 아들 ‘에스바알(이스보셋)’의 이름이 새겨진 3,000년 전 도자기가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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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의 아이 성에 대한 새로운 고고학적 발굴 : 또 다시 확인된 성경 기록의 정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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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로니아 점토판에 성경 속 인물이 언급되어 있었다. 느부갓네살 왕의 환관장 살스김의 이름이 새겨진 점토판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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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역사를 확증해주고 있는 고대 앗수르 유물. 대영박물관에 있는 성경의 고고학적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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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ICR, 2021. 1. 29.
주소 : https://www.icr.org/article/buried-secrets-can-be-worth-uncovering/

번역 : 미디어위원회



미디어위원회
2021-01-05

치아의 치석으로 확인된 청동기 시대의 국제무역 

(Bronze Age Global Trade Identified in Teeth)

David F. Coppedge


       이스라엘에 살았던 청동기 시대(Bronze Age) 사람들은 과학자들이 생각한 것보다 더 똑똑했다. 그들은 3,700년 전에 중국 음식을 먹고 있었다.

오늘날 독일인과 유대인이 함께 연구하는 모습은 반갑다. 1930년대의 막스플랑크 연구소(Max Planck Institute)의 과학자들은 나치 정권에 협력했고, 홀로코스트에 연루되었다. 그리고 이제 2020년에 막스플랑크 연구소와 루트비히-막시밀리안 뮌헨 대학(Ludwig Maximilian University of Munich)의 과학자들은 이스라엘 여러 대학의 과학자들과 협력하여 중요한 것을 발견했다. 그 발견은 무엇인가? 중동의 지중해 연안 지역인 레반트(Levant) 지방에 살았던, 청동기 후기와 초기 철기시대의 사람들이 아시아 지역의 별미를 먹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었을까? 그들은 치아의 치석(dental calculus, 경화된 플라크)을 검사했다.


지중해 사람들은 3700년 전에 아시아 음식을 먹고 있었다.(New Scientist. 2020. 12. 21). "지중해에 사는 사람들은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최대 수천 년 전에 남아시아 및 동아시아 요리를 먹고 있었을 수 있다." 기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독일 루트비히-막시밀리안 대학의 필립 스톡해머(Philipp Stockhammer)와 그의 동료들은 지중해의 동쪽 지역인 레반트에서 발굴된 16명의 치아에 남아있는 미세한 음식 찌꺼기를 조사했다. 이 사람들은 BC 17세기와 11세기에 므깃도(Megiddo)와 텔 에라니(Tel Erani)에서 살았다.

연구팀은 다양한 사회 계층의 사람들이 참깨, 콩, 강황, 바나나를 포함하여, 남아시아 또는 동아시아의 음식을 먹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발견은 이 지역에 등장하는 이러한 식품들의 등장 시기가 수세기, 또는 콩의 경우 수천 년을 더 거슬러 올라간다.

가치 있는 물품들의 무역은 알려져 있었지만, 이들은 식품이다. 요리의 세계화에 대한 발견은 고대 사람들의 능력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이 과학자들이 사용한 기술은 초기 미국인, 호주인, 아프리카인의 무역 습관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므깃도는 이스라엘 북부의 이스르엘(Jezreel) 또는 므깃도(아마겟돈) 계곡 근처에 있다. 텔 에라니는 블레셋 사람들의 땅 근처로 아마도 립나(Libnah)나 가드(Gath) 근처에 있었다. 가나안 사람들과 블레셋 사람들이 후기 청동기 시대에 아시아 음식을 먹고 있었다면, 아마도 다윗 왕과 솔로몬 왕의 초기 철기시대 왕국에서도 그러한 음식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들이 중국 음식을 먹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아마도 이 국제무역의 증거는 비옥한 초승달 지역 전체에서 발견될 것이다.

이 연구는 PNAS 지(Scott et al., 2020. 12. 21)에 “이국적 식품은 BC 2천 년 전에 남아시아와 근동 사이의 무역을 보여준다”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남부 레반트에서 청동기시대 및 초기 철기시대의 치아 치석에서 주식 및 이국적 식품의 식별을 보고한다. 식품 식물의 미세잔여물과 단백질에 대한 분석은 BC 2천년 동안 남아시아와 동아시아에서 와서 소비됐던 외래 식품에 대한 새로운 빛을 비춰준다. 우리는 지중해 사람들도 참깨(sesame), 콩(soybean, 대두), 바나나, 강황(turmeric)을 섭취하고 있었다는 가장 초기의 직접적인 증거를 제공한다. 화학물질 분석 및 현미경 기술을 사용하여, 다양한 식품물질들을 회수하고 식별함으로써, 고대 근동지역의 초기 무역 경로와 초기 국제화의 복잡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능하게 해준다. 그리고 이제 국제무역이 얼마나 오래 지속됐는지, 또는 어느 시기까지 이루어졌는지 등에 관한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연구자들은 치아의 치석에서 대추야자(date palms)와 밀(wheat)에 대한 증거를 찾을 것으로 예상했고, 실제로 그것들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들은 중국을 포함한 극동지역에서 수입된 곡물과 향신료를 발견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위의 작물과 달리 콩(Glycine), 바나나(Musa), 심황(Curcuma longa) 등은 예상치 못한 발견이었다. BC 20세기 이전 이 지역에서 콩 재배는 알려져 있지 않았고, 수수(millet)와 마찬가지로, 콩의 경작 중심지는 중국 중부의 황하 근처였다. 그 지역에서는 일찍이 BC 7000년에서 6500년에도 재배되고 있었다.(101) 그러나 콩은 참깨와 마찬가지로, 기름을 얻는 주요 식물이며, 그 기름은 장거리로 운송될 수 있다….

바나나는 BC 5천 년에 뉴기니에서 재배되었고(109), BC 1천 년에 서아프리카의 카메룬에 이르기까지 인간에 의해서 재배가 확산되었다.(110, 111). 그러나 고고학적 기록을 통해 바나나의 재배와 무역을 추적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이 입증되어왔다. 바나나는 부패하기 쉽고, 재배된 바나나는 씨가 없기 때문에(대신 절단에 의해서 번식), 바나나의 식물 잔해를 회수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텔 에라니에서 발견된 유골들의 치아에는 바나나 잔류물이 남아있었다. 바나나는 어떻게 거기에 도착했던 것일까? 다른 식물은 상인이 운송해온 식품들의 씨앗들을 재배하여 얻을 수 있겠지만, 이 식물은 아니다. 연구자들은 할 말을 잃었지만, 바나나임을 확신했다.

텔 에라니의 개체 ERA017의 치석에서 주요 바나나 과일 숙성 단백질이 확인됐다는 것은, BC 1천 년에 레반트에 바나나가 존재했거나, 남아시아 또는 동아시아에서 바나나를 먹었던 개인(예로 상인이나 선원)이 텔 에라니로 이동해와 묻혔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만약 먼 대륙에서 바나나를 먹었던 개인이 이동해왔다면, 이스라엘까지의 긴 여행 후에도 치아에 바나나의 잔해가 남아있을 것 같지는 않다. 요약하면, 이 연구는 "BC 2천 년 전에도 지중해와 남아시아를 연결하는 역동적이고 복잡한 국제무역이 존재했음"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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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은 국제무역을 너무 자랑스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수천 년 전의 사람들도 지적이었고, 기술력이 뛰어났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말해왔다. 후기 청동기시대의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이동수단을 고려해볼 때, 블레셋과 가나안 땅의 일반 사람들의 이빨에 바나나와 강황 찌꺼기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정말 놀랍다. 그 당시에 히브리 민족도 가나안 땅에 살았다. 솔로몬은 BC 950년경에 이국적인 향신료, 동물, 새를 수입했다. 이보다 수세기 전에도 국제무역이 있었다. 인류는 언제나 지적이고, 통찰력이 있었고, 기술력을 갖고 있었다. 인간은 독특하고, 예외적인 존재로서, 뇌뿐만 아니라, 정신과 영혼을 부여 받았다.



*관련기사 : 청동기시대에도 장거리 식자재 교역 이뤄졌다? (2020. 12. 24. Sciencetimes)

고단백질체학으로 지중해인 유해 치석 분석…수입 음식물 확인


*참조 : 고대 인류의 유물이 섬에서 발견되었다 : 초기 인류는 배를 타고 항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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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기시대에 외과수술이 이루어졌다는 증거가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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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reation.kr/Apes/?idx=1852220&bmode=view


출처 : CEH, 2020. 12. 29.

주소 : https://crev.info/2020/12/bronze-age-global-trade-identified-in-teeth/

번역 : 미디어위원회


미디어위원회
2020-11-16

괴베클리 테페는 기하학적으로 건축되었음이 밝혀졌다.

: 신석기인들이 만들었다는 진화 이야기는 의심스럽게 되었다. 

(Göbekli Tepe shows evidence of geometric planning)

by Phil Robinson and Robert Carter


      1995년 이후로 터키 남동부에서 발견된 괴베클리 테페(Göbekli Tepe) 유적지는 고고학적 발굴의 온상이었다.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 유적지 중 하나이며, 그 복잡성, 계획성, 통찰력에 대한 명백한 증거들은 인류 진화론에 직접적인 도전이 되고 있다.(참조 : How does Göbekli Tepe fit with biblical history?) 이 장소는 채석장에서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 거대한 T-자 모양의 기둥들이 원형으로 서있는 기념비적인 규모를 갖고 있다. (약 200개에 달하는 돌기둥들이 20여개의 원을 이루고 있는데, 각각의 기둥의 높이는 대략 6m이고, 무게는 20t이다. - 위키백과

.괴베클리 테페의 독수리가 새겨진 부조(relief).


진화론적 연대표에 따르면, 이 유적지는 11,000~12,000년 전인 신석기 시대에 함께 모여 수렵채집을 했던 원시인들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며, 아마도 “농업이나 동물 가축화의 증거가 지구에 나타나기 수백 년 전”에 지어졌다는 것이다.[1] 그러나 성경의 시간 틀에 의하면, 그것은 대홍수 이후에 지어졌다. 따라서 진화론자들은 군대나 노동자들을 갖고 있지 못했던, 간신히 먹을 것만을 스스로 수렵채집을 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을 지을 수 있었는지, 그것을 짓기에 필요한 잉여 시간과 식량을 어떻게 구했는지 의아해한다. 반면에 성경에 의하면, 사람들은 항상 현명했고, 부지런했고, 대홍수 이후 문명을 매우 빠르게 이루어 건축했을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것의 복잡성, 계획성, 통찰력에 대한 명백한 증거들은 인류 진화론에 직접적인 도전이 되고 있다.


성경과의 연결

이 장소의 또 다른 특이한 점은 성경 초기의 매우 중요한 도시였던 하란(Haran)과 매우 가깝다는 것이다. 하란은 데라가 죽은 곳이고(창 11:32), 아브라함, 사라, 롯이 약속의 땅으로 가기 위해 떠난 곳이다.(창 12:1-5). 또한 하란은 이삭이 아내를 얻고(창세기 24장), 야곱이 여러 해 동안 살았으며(창세기 28~31장), 이스라엘의 12대 족장 중 11명이 태어났던 지역(밧단아람, Paddan Aram)의 한 주요한 도시이다.(창세기 35:16–20). 괴베클리 테페는 하란 근처에 있을 뿐만 아니라, 불과 50km가 조금 넘게 떨어져 있고, 해발 고도가 760m로 하란보다 340m가 더 높아서, 멀리에서 직접 보여질 수도 있는 곳이다! 괴베클리 테페는 언덕 위에 지어졌다. 그것은 북쪽으로 아라라트까지 뻗어있는 산맥의 남쪽 가장자리에 있다. 또한 남쪽으로 뻗어나가는 산이 유프라테스 강의 지류 중 하나인 발릭강(Balikh River) 분지를 둘러싸고 있어서, 넓고 물이 풍부한 계곡을 내려다보고 있다. 하란은 괴베클리 테페와 매우 가깝기 때문에, 그리고 아브라함은 대홍수 이후 역사의 초기에 살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가족은 이 장소에 대해 확실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곳은 그의 생애 동안에 번성한 곳이었을 수 있다. 큰 녹색 직사각형을 보면, 하란은 가운데 정중앙에 있다. 괴베클리 테페는 녹색 직사각형의 맨 위에 있다. 왼쪽에 있는 우르파(Urfa)도 주목하라. 오늘날 샨르우르파(Şanlıurfa)라고 불리고 있으며, 로마시대에는 에데사(Edessa)라고 불렸다. 어떤 사람들은 이곳이 “갈대아인의 우르(Ur of the Chaldeans)”의 후보라고 제안하는 반면(창세기 11:28), 다른 사람들은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인의 우르(Sumerian Ur)를 선호한다. 

.괴베클리 테페와 하란의 위성 사진 (130 x 200km) (Google Earth).  

.하란에서 바라본 괴베클리 테페(Google Earth).

.괴베클리 테페에서 바라본 하란(Google Earth).


기하학적 건축 계획의 발견

괴베클리 테페(Göbekli Tepe)는 미스터리의 연속을 보여주고 있다. 부지의 규모 외에도, 일부 기둥들은 동물 모습들이 저부조(bas relief)로 새겨져 있으며, 일부 조각은 깊은 부조로 되어있어서, 이것은 장인이 그것을 조각하기 위해서 많은 돌을 깎아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기둥 측면에 입체적으로 악어가 새겨져 있다. 동물 조각에는 더 이상 그 지역에서 살지 않는 악어를 포함하여, 독수리, 전갈, 오리, 사자 등이 새겨져 있다. 현재까지 사원으로 여겨지는 3개의 원형 담(enclosures, 울타리)이 발굴되었지만, 그 장소의 대부분(90% 이상)은 아직 발굴되지 않고 있다. 최근 건축학적 조사는 알려진 세 개의 원형 돌담이 서로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설명하려고 했다.[2] 돌 울타리 내에는 두 개의 거대한 독립 기둥이 있으며, 커다란 직사각형 기초는 서로 마주보고 있고, 벽 옆에 위치하는 추가적 기둥들로 둘러싸여 있다. LiveScience.com 지의 최근 기사에 따르면, “가장 중앙에 있는 두 개의 기둥은 원형 구조의 중간 지점과 정확히 정렬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세 개의 구조물의 중심점을 연결하는 가상의 선을 그렸을 때, 거의 완벽한 정삼각형, 또는 길이가 같은 세 변의 삼각형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사진 참조).[1]

.디트리히(Dietrich et al) 등이 제시한 괴베클리 테페의 기하학적 모습. 중앙 기둥의 남쪽면 사이의 세 중간 지점(빨간색)은 정삼각형을 이루고 있다.(개략도 위에 겹쳐진 도면).

.3개 기념비적 원형 건축물이 있는 주요 발굴 지역. 독일 고고학연구소<photo E. Kücükactual-site>


이제 기하학적 계획을 발견했으므로, 세 개의 담은 “ 처음부터 복합적 건물로 계획되고 지어졌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제 기하학적 구조가 발견되었으므로, 세 개의 돌벽은 구별된 건축물로서 뒤섞여져서 마구 지어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복합적 건물로 계획적으로 지어졌다”는 것이 분명하다.[2] 이것은 물론 건축자가 건축 자재를 확보하여 현장으로 운송하기 전에, 수학적 지식을 갖고 있었고, 특별한 건축 계획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괴베클리 테페에 대한 이해

괴베클리 테페에 대한 세속적 연대는 스톤헨지(Stonehenge, 기하학적 패턴으로 지어졌고 최근 놀라운 발견의 주제이기도 함)보다 7,000년 이상 앞서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사이 연대 동안에 대규모로 구축된 다른 건축물에 대한 증거가 거의 없다. 고고학적으로는 그 사이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오히려 약 3,500-4,000년 전에, 홍수 이전의 조상으로부터 수학적 및 공학적 지식을 전수받았던, 홍수 이후 초기 종족 그룹 중 하나에 의해 건축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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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and notes

  1. Saplakoglu, Y., The world’s oldest temple was built along a grand geometric plan, livescience.com, 25 May 2020. 
  2. Haklay, G., & Gopher, A. Geometry and Architectural Planning at Göbekli Tepe, Turkey, Cambridge Archaeological Journal 30(2):343—357, May 2020. 


*참조 : 경이로운 스톤헨지! : 바벨 후에 건축된 석기시대의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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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CMI, 2020. 11. 5. (GMT+10)

주소 : https://creation.com/gobekli-tepe-geometric-planning

번역 : 미디어위원회


미디어위원회
2020-11-12

고대인의 신비 (The mystery of ancient man) 

: 거석 기념물, 고도의 토목기술, 사라진 문명...

Steve Cardno


거석 기념물, 고도의 토목기술, 사라진 문명...
결코 모험 영화의 줄거리들이 아니다.
우리의 고대유적들을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진실된 이야기들이 드러나고 있다.


우주에서 지구를 방문한 외계인들이 지구인들을 도와 이집트, 그리고 중앙아메리카에서 피라미드들을 건축하였다는 이야기는 사실인가?

고대인들이 어떻게 거대한 바위들을 운반하여 거석기념물들을 세우고, 정교한 공예품들을 만들었으며, 또 복잡한 문명을 건설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고도로 발달된 외계인의 기술이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 혹자는 그렇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고대인을 '원시적' 이었다고 믿는 진화론적 신념 때문인 것이다.

인류의 고대사를 살펴볼 때, 만약 진화론이 사실이라면, 과거로 갈수록 인류의 지능은 점점 낮아져서 원숭이의 지능으로 떨어지는 현상을 보아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만 성경적 창조론은 이와는 다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은 언제나 지성적인 존재였다. 사람은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고, 물건들을 발명한다. 그리고 이런 지식은 후대로 전수되고, 또 새로운 지식을 쌓아간다. 이렇게 해서 한 사회 집단 안에서 기술은 전수되고, 또 발달되어 나아갔다. 그것은 후대의 사람들이 옛날 사람보다 더 지능이 높아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진실된 역사

사람은 창조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벌써 악기나 금속세공품과 같은 물건들을 발명하고 있었다 (창세기 4:21-22). 대홍수 때 즈음에 이르러서, 인류는 고도로 발달된 기술능력을 축적하고 있었을 것이다. 비록 우리는 그 기술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하지만,1 그러나 그것을 엿볼 수 있는 단서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첫째, 노아와 그의 조수들은 대양을 항해할 수 있는 거대한 선박을 건조할 수 있었다. 그 방주의 규모가 대략, 길이 135m(450feet), 너비 23m(75feet), 높이 13m(45feet)였다. (창세기 6:15). 이 치수는 배의 안정성에 이상적이라고 알려진 비율이다.2 이 엄청난 작업에는 목공기술은 물론 고도로 발달된 공학적 지식이 필요했을 것이다. (see also Q&A: Noah's Ark).

둘째, 노아의 홍수 이후 급속하게 꽃이 핀 문명사회의 기술수준에 관한 흔적들을 지금도 살펴볼 수 있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홍수에서 살아남아 장차 도착할 신세계에서 문명생활을 다시 시작하기 위하여 가능한 한 모든 축적된 노하우를 가지고 가려고 최대의 노력을 다 했을 것이다.

성경에는 인류가 홍수 이후에 곧 거대한 도시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오늘날의 이라크 근방에 있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비옥한 골짜기 어디쯤으로 추정되고 있다. 심지어 진화론자들까지도 이러한 증거들을 무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이 지역을 '문명의 발상지' 라고 부른다. 실제 문명의 발상지라는 말은 옳다. 하지만 오직 홍수 이후에 해당하는 것이다.

바벨탑(창세기 11:1-9)은 아마 이 지역 (오늘날의 바빌론 근방)에 현재도 서있는 최초의 피라미드의 형식인 지구라트(계단식 피라미드 형 신전)였을 것이다. 유사한 형태의 많은 피라미드가 전 세계 도처의 고대 문명지역에서 발견된다. 진화론적 역사학자들은 각 문화는 같은 형식의 건축물을 독자적으로 개발했을 것으로 믿고 있다. 하지만, 그 건축물들이 유사한 이유는 발상지가 동일한 지역, 즉 바빌론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더 합리적인 것 같다.

오늘날의 인간사회도 각양 각색의 직업 집단들이 있는 것처럼, 고대의 바벨탑이 서있던 그 시절의 직업 집단들도 다양한 기술 수준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의 집단사회를 언어별로 나누었을 때, 광범위한 지식 인력도 뒤따라서 나뉘어졌을 것이다. 예컨대, 이집트와 마야의 문명을 만들어낸 본래 집단들은 분명히 토목공사와 건축, 그리고 연관된 공학적인 기술에 능숙하였을 것이다. 급속하게 발전한 그들의 문화유산을 보면 그 증거가 분명하다. 다른 집단들은 그런 지식에 결여되어 있었을 것이다.

갑자기 당신이 일단의 친족들을 데리고 사람이 살지 않은 황무지로의 이주를 강요받아 급히 이주했다고 상상해 보라. 비록 당신이 발달된 기술사회에서 살다가 이주해 왔다고 하지만, 필요한 모든 지식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가지고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예컨대, 광석을 찾아내어 제련하고 제철작업을 하는 기술 같은 것 말이다. 그래서 당신들은 석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동굴인들

홍수 이후 어떤 인간 집단들은 동굴을 주거로 택했다. 혹독한 기상조건 하에서는 동굴주거가 인위적 주거물보다 더 안전을 약속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동굴생활이 그들을 '원시적으로' 또는 비지성적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오늘날에도 도시생활을 버리고 가히 '원시적'인 환경 속에서 대체 주거물을 생활 터전으로 선택하여 살아가는 사람들도 가끔씩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지능이 떨어진 것은 아니다.

전형적인 '동굴인'은 멍청하고 짐승같은 털투성이로 그려진다. 하지만, 많은 동굴 암벽에 새겨진 그림들 속에는 현대의 유명화가들의 작품에 버금가는 재주들이 드러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최근에는 과학자들이 높은 수준의 음악적 이해력과 실력을 나타내는 '석기시대의' 악기들을 발견하고 경탄해 마지않았던 일도 있었다.3

만약에 사람들이 고립된 소집단들로 쪼개져 흩어진다면 얼마나 많은 기술들이 사라지고 말았을 것인지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가령, 어떤 소집단에는 농부와 건축가들은 있지만 기계공학자나 지질학자, 또는 대장장이는 없다는 가정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집단은 기계공학적인 '기술에 관해서는' 알고 있지만, 그 '응용방법'은 모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바벨탑 사건 이후, 다행히 광범위한 기술을 가지고 떠날 수 있었던 집단은 그들이 누리던 예전의 문화유산들을 신세계에 신속히 이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속도가 가히 '하룻밤 새에' 꽃이 핀 것 같았을 것이다.

피라미드의 건축기술이 어떻게 개발되었는지 그 증거가 알려지지 않고 있는 것과 같다. 다음의 두 인용문은 진화론적 과학들이 제시한 자료들이다.

”피라미드 건축에는 석수작업, 즉 돌을 떠내고 잘라내는 작업부터 착수해야 당연한데, 그 석수작업 방법에 대한 기술적 해명에 관한 그 어떤 증거도 찾지 못했다. 피라미드 건축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사용한 모든 연장과 기술은 그 시대보다 훨씬 이전 시대 때부터 있었을 것이다.” 4

문명의 발전은 정상적인 인간사회에서라면 완만하고 힘들게 진척되는 것이 보통인데, 고고학적 증거에 의하면, 고대 이집트의 문명은 올메크 족(Olmecs)의 문명처럼, 한꺼번에 그리고 완전히 성숙되어 (all at once and fully formed) 출현하였다. 원시사회에서 고도문명사회로 변천하는 기간이 너무도 짧아서 그 어떤 역사관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수백 년, 아니 심지어 수천 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을 기술 숙련도의 축적이 거의 하룻밤 사이에 실용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런 예는 역사상 전무후무하다.” 5

바벨에서 흩어져 새로운 지역으로 흘러간 집단들 가운데 어쩔 수 없이 석기를 사용하여야만 했던 집단들도 있었을 것이지만, 그들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다른 지식들을 쌓아갔을 것이다. 한편,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도 석기를 만족스럽게 사용하고 있는 문화민족들을 보게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도 그들은 완전무결한 인간이며, 또 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문화는 언제나 기술의 발전만을 기약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잃어버리기도 한다는 증거들도 있다. 고대 이집트의 예를 보면, 초기 피라미드의 기술 수준은 최고를 나타내고 있으며, 그 이후로는 질적 하향곡선을 그리다가, 마침내 더 이상의 건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떤 인문과학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피라미드 시대는 약 한 세기가 조금 넘는 기간동안 이어지다가 마침내 끝났다. 피라미드 건축물은 약 천 년 동안 건축되어져 왔었지만, 급속하게 그 규모가 왜소해지고 조잡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제 3기자(Giza- 역자 주: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로 유명한 이집트 Cairo 부근의 도시) 피라미드를 끝으로 피라미드 건축에 대한 열의가 영원히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6

 

거대한 건축물들과 독창적인 건축 기법들

남아메리카에 있는 티티카카(Titicaca)호수의 볼리비아 호숫가 근처에는 3,900m(13,000피트) 높은 곳에 고원지대가 넓게 펼쳐있다. 그 고원에는 티아후아나코 (Tiahuanaco)라는 고대 도시가 자리하고 있다. 고대 잉카족(Incas)이 그곳에 도착했을 당시에 이미 그 도시는 웅장한 폐허였었다. 16 세기 스페인 보물 사냥꾼들이 그곳에 들렀을 때, 대홍수가 지나간 후 미지의 거인들이 티아후아나코 도시를 매우 빠른 속도로 건설하였다는 토착 인디언의 전설을 믿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고원 일대에 흩어져있는 거대한 석상들과 바위들을 볼 수 있다. 어느 Reader's Digest 기고가는

”오늘날의 최고 수준의 엔지니어도 자신들이 과연 저 도시건설에 사용된 것과 같이 거대한 바위덩어리를 잘라내고 운반할 수 있을까 망설여질 것이다. 거대한 바위덩어리들은 마치 형틀이라도 사용했나 의심할 정도로 반듯하게 잘려져 있다. 그런데 그 작업에 어떤 형태로건 현대적인 기술이 응용되었다는 흔적은 전혀 없다.” 7 그리고 ”그 도시를 설계하고 건설한 사람들은 천재임에 틀림이 없었을 것이다.” 라고 적고 있다.8

그 고대도시의 수많은 구조물들이 수천 년 동안 비교적 손상되지 않고 남아있다. 과연 우리의 20세기 건축물들이 수천 년 이후에도 건재할까?

페루의 쿠즈코 (Cuzco)시 근처에 있는 고대도시 사크사후아만 (Sacsahuman)에는 잉카 족이 건축한 웅장한 석벽이 서있다. 이 벽에는 의도적으로 불규칙한 모양을 한 돌덩어리들이 사용되었다. 어떤 바위덩어리들은 무려 1백 톤의 무게를 하고 있지만, 지금도 바위 이음새에 종이를 끼어 넣을 수 없을 만큼 조밀하게 쌓여있다. 그것뿐이 아니다. 심지어 사크나후아만의 건축가들이 오늘날의 5층 건물만한 크기의, 무게는 약 2만 톤이 넘을 것으로 생각되는 거대한 덩어리 바위를 - 어떤 방법을 사용하여 움직였다는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 움직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경이로운 무게를 움직이는 솜씨를 오늘날의 기계로서는 흉내는 고사하고 엄두도 못 낼 것이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큰 크레인이라고 해도 최고로 들 수 있는 중량이 대략 3,000톤에 불과할 뿐이다.9

진화론을 신봉하는 신시대(New Age)의 저자들이 고대인들은 고도기술문명을 가진 미지의 인종으로부터 도움을 받았음이 틀림없다고 믿고 있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10

피라미드의 축조에 고대인이 보여주었던 독창적인 발명의 자질에 관한 두 가지 예를 살펴보자.

피라미드의 기초는 절대적 수평이 필수다. 그들은 수평기초를 독창적인 알코올 수준기를 사용하여 얻었다. 이집트인들은 우선 바닥 돌에 홈을 파고 그 홈에 물을 채웠다. 그 다음 그들은 그 홈에 막대기를 삽입하고 수준선을 표시하였다. 그렇게 하여 그들은 실질적인 수평을 확보하였다. 매장 석실 건조에 관해서 어느 저작가가 언급한 내용을 읽어보자.

”천정은 총계 400 톤에 이르는 아홉 덩어리의 석조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천정 위에서 아래로 짓누르는 석조물들의 엄청난 전체 무게의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다섯 개의 빈 칸을 석실 위에 만들어 놓아 하중을 분산시켰다. 이 구조는 가히 건축공학의 걸작품이 아닐 수 없다.” 11

수평?, 하중?, 긴장 완화를 위한 축조물?, 이런 것들에 대한 설명을 하다보면, 사전에 고도의 지식수준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이들이 응용하였던 고도로 발달된 기술을 습득하려면, 대학교의 건축학과와 토목학과에서 여러 해를 공부하여야 할 것이다. 이런 것말고도 세계 도처에서 고대인이 지녔던 독창적 발명자질을 나타내는 수많은 증거들을 볼 수 있다.

고대문명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를 하는 학자들은 아득한 과거부터 사람들이 사용하던 기술수준이 매우 높음에 '경탄' 하고 '경악했다' 는 보고를 심심찮게 하고 있다. 그들이 경악했던 실질적인 이유는 이럴 것이다. 그들이 믿었던 진화론은 먼 과거로 돌아가보면 당연히 '원시인', 다시 말해 비지성적인 사람들의 흔적들을 만나야 할 것인데, 그렇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경이로운 이야기 (amazing story)

고도의 지성은 물론 지식과 기능이 있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고대사회의 정말 놀라운 위업 이 건축과 토목공사에만 한정됐던 것은 아니다. 고대 마야 족은 치밀한 시간 관리자들이었다. 그들은 컴퓨터나 복잡한 측량기기 같은 기계의 도움 없이 태양력의 길이를 365.2420 일로 알고 있었다. 오늘날의 천문학자들이 일력의 길이를 365.2422로 계산해 낸 것이 극히 최근의 일이다.

마야 족은 11,960 일의 기간에 405번의 만월이 생기는 것으로 계산해 냈었다. 현대의 조사자들은 405번의 만월이 생기는 기간이 11,959.888 일의 기간으로 계산했다. 또한 마야 족은 화성의 삭망 기간(synodic period)을 584일 만에 생긴다고 계산했다. 그런데 현재의 과학은 그 기간을 583.92일 만으로 계산하고 있다. [화성의 삭망기간은 지구 위에서 관찰하는 화성 상(相)의 사이클을 말한다. 즉 화성의 어떤 상이, 예컨대 초승 화성의 상이 다음에 나타나는 시점, 즉 그 사이클을 말한다.]

마야 족은 물론 소위 항성기간 (siderial period) 이라 불려지는 화성공전 (224.7의 지구일) 궤도(별을 배경으로 하고 상대적인)에 의해 화성의 상이 설명될 수 있다는 갈릴레이의 설명을 알았을 리 없다. 오직 현대적 기술을 사용해야 확인될 수 있는 이 정도의 미세한 오차들은 고대 문화인들의 입지적 조건하에서는 놀라울 정도의 정확도를 나타내고 있다고 아니할 수 없다.

마야 족이 정확한 시간 관리에 집착이 강했던 것을 고려할 때, 그들이 창조된 최초의 날을 BC 3114년에 두고 일력을 시작하였다는 사실은 정말 흥미롭다. 마야 족은 수학에 빼어났었다. 그들은 오늘날의 위치결정 체계와 유사한 체계를 사용했다. 유럽의 로마인들이 사용하던 체계보다 오히려 더 나은 것이었다.

 

고대인의 독창성

극도로 난해한 업무(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아도)에 직면한 고대의 문명인들 즉, 이스터 (Easter)섬에서 거대한 석상들을 세웠고, 이집트에서는 람세스 파라오의 거대한 인물상들을 세웠던 문명인들은 건설 분야에서 사용하였던 인간적 독창성이 돋보인다. 불규칙적인 돌덩어리들을 꿰맞춰서 축조한 잉카 족의 석벽은 지진을 겪으며 수세기를 지나온 지금에도 돌의 이음새 속으로 종이조차 끼어 넣기가 어려울 정도로 조밀한 채 남아있다. 추산되는 돌덩어리의 무게가 무려 100톤이다!

*참조 : 페루 삭사이와만 요새의 미스터리가 밝혀졌다! 조금의 틈도 없는 돌벽은 부드러운 상태의 암석으로 축조되었다!

http://creation.kr/EvidenceofFlood/?idx=1288485&bmode=view


 

이런 것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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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안티키데라(Antikythera) 섬의 앞바다에서 희랍인 잠수부들이 BC 65년경에 침몰된 선박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침몰선에서 인양된 유물들 가운데서 정밀기계용 금속기어들과 구경측정용 비례자들이 발굴되었다. 항해에 필요한 모종의 계산용 기기들처럼 생각되는 그것들을 발명한 사람은 대단한 지능의 소유자였을 것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인류 최초의 문명들 중의 하나로 알려진 잉카(Inca) 계곡에 있는 고대도시 모헨조다로(Mohenjo-daro)는 수천 년 이후의 유럽의 여러 도시를 능가할만한 공중위생체계를 시설하고 있었다.

.레바논의 바알베크 (Baalbek)에 있는 로마신전의 유적들은 단 하나의 거석 기초 위에 서있다. (고대문명인들이 옮겨다 놓았던 거석). 그 거석 기초의 무게가 무려 2000 톤으로 추산된다.

.티아후아나코에 있는 '태양으로 가는 문'은 한 덩어리로 된 화산암을 쪼아내어 만들어졌다. 그 무게가 100톤 정도로 추산된다. 그 운반과 건립 방법은 하나의 신비로 남아있다.

 

결론

지금까지 알려진 인류역사는 인류가 원시적인 유인원에서 진화하여 현대인이 되었다는 가정을 부정하고 있다. 오히려 과거의 증거들은 사람이 언제나 지성적인 존재로서 그들이 처한 다양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그때마다 최선의 독창성을 발휘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References
1. 
Technological and scientific progress this millennium has been prominent where the Bible was honoured. the widespread rebelliousness of the pre-Flood world would have likely hindered such blessings.
2. S.W. Hong et al., Safety investigation of Noah's Ark in a Seaway, Cen Technical Journal 8(1):26-36, 1994. All the co-authors are on the staff of the Korea Research Institute of Ships and Ocean Engineering, Taijon.
3. New Scientist 151(2048):12, Sept. 21, 1996.
4. Kurt Mendelssohn, 'A scientist looks at the pyramids', American Scientist, p.210, March-April, 1971.
5. Graham Hancock, Fingerprints of the Gods, pp. 135-136, New York Crown Trade Paperbacks, 1995.
6. Ref. 4, p. 212.
7. Simone Waisbard, in The World's Last Mysteries, (2nd edition) p. 138, Reader's Digest, 1978.
8. Ref. 7, 135.
9. Rene Noorbergen, Secrets of the Lost Races: New Discoveries of Advanced Technlogy in Ancient Civilizations, Norcom Pub. Co, TN 1977, Cited n Donald Chittcik, The Puzzle of Ancient Man, Creation Compass, 1997.
10. An alien super-race is not only unnecessary, it is contradicted by evidence. A number of false starts and collapses in pyramid-building show fallible, though intelligent humans.
11. Christopher Anmgell, reference 7, p. 192.

 

*참조 : What about the ‘Stone Age’?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5799/

A Better Model for the Stone Age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227

A Better Model for the Stone Age Part 2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225

The Stone ‘Age’—a figment of the imagination?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689/

고대 피라미드에도 전기 사용됐다?  (2006. 3. 1. 한겨레) 

https://www.hani.co.kr/arti/science/science_general/105698.html

“기원전 그리스 천체 슈퍼컴퓨터 썼다” (2006. 11. 30. 경향신문) 

https://m.khan.co.kr/world/europe-russia/article/200611301820151#c2b

'약 2300년전 고대 바빌론人 미적분 개념 알았다…목성 궤도 계산' (2016. 1. 29. 뉴시스)

https://mobile.newsis.com/view.html?ar_id=NISX20160129_0013867248#_enliple

'고대 바빌론로니아인, 기원전에 기하학 활용해 목성 궤도 계산' (2016. 1. 29. 연합뉴스)

https://www.yna.co.kr/view/AKR20160129146600009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20/i2/ancient.asp 

출처 - Creation 20(2):10-14, March 1998.

미디어위원회
2020-08-07

이집트의 임호텝과 요셉은 동일 인물이었는가?

(Were Joseph and Imhotep of Egypt The Same Man?)

By Emmet Sweeny


들어가며

수 세기 동안 유럽 크리스천들이 갖고 있던 열망 중 하나는 성경에 대한 검증이었다.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 260~340)를 비롯하여 AD 4세기의 기독교 저술가들은 구약성경을 우화나 종교적 선전으로 보는 사람들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서, 메소포타미아의 역사와 이집트의 역사를 참고하려고 했다.

이러한 정신으로 유세비우스는 프톨레마이오스 학자 마네토(Manetho)의 이집트 역사를 이용하여, 성경의 시간 척도에 기초하여 이집트 연대기를 재구성했다. 예를 들어, 그는 이집트 역사의 시작과 히브리 역사의 시작을 함께 묶는 초기 유대인 주석가들의 길을 뒤따랐다.

그러한 노력으로 이스라엘의 출애굽(BC 14, 또는 15세기로 추정) 시기를 람세스(Ramesside) 때로 보았으며, 최초의 바로인 메네스(Menes)를 아담과 동시대의 인물로 보았다. 그것에 의해서 이집트 문명은 BC 4,000년이나 5,000년경에 시작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수 세기 동안 유세비우스(Eusebius)의 이집트 연대 체계는 나일강 왕국의 “전통적인” 연대기가 되었으며(현대의 이집트 학자들은 거의 알지 못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 당대의 역사를 이해하는 기초를 형성하고 있다.

1821년 이후 상형문자의 번역으로, 성경의 역사가 곧 극적으로 확인될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고고학이 성경에 언급된 위대한 인물과 사건들에 대한 이집트의 언급을 밝힐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고대 이집트 문서들이 가장 가까운 이웃인 이스라엘과 관련하여 철저하게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그러한 희망은 곧 사라졌다.

그 다음 세기에도 특정 바로를 구약 역사의 위대한 사건들과 연결시키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다. 그러나 사실상 그러한 모든 노력들은 헛수고가 되었고, 결국은 포기되었다.

성경에서 위대한 인물로 묘사된 사람들(아브라함, 야곱, 요셉, 모세 등)이 실제 역사에서는 평범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모든 확인 작업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실제로 그들이 존재했다 하더라도, 그들은 이집트인들이 언급할 가치가 없었던 작은 인물이었을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의견은 학자들 사이에서 점차 뿌리를 내리게 되었고, 곧 새로운 정통(new orthodoxy)이 되었다. 이후, 고고학에서 성경(특히 창세기)에 대한 “증거”를 찾으려는 모든 시도는 즉시 광신적인 것으로 치부되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그러한 작업은 이제는 더 이상 심각하게 고려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반대 의견들이 있었다. 1950년대에 임마누엘 벨리코프스키(Immanuel Velikovsky)의 연구는 학문적 광풍을 몰고 왔는데, 그는 구약성경에 기술된 “노아의 대홍수, 소돔과 고모라 사건, 출애굽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벨리코프스키는 이 사건들 중 마지막 사건인 출애굽 사건은 실제로 이집트 역사의 주요 이정표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 사건이 이집트인들에 의해 기록되어있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고, 현대 학자들은 출애굽기에 묘사된 사건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오해했기 때문에, 그 사건을 놓쳤음을 보여주었다.

벨리코프스키가 채택한 혁명적인 입장은 고대 연대기(chronology)가 엄청난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들여다보게 했다. 유세비우스의 마네토 작업에 근거한, 잘못되고 사실상 임의적인 이집트 연대기가 현대 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이러한 중요한 성경 속의 사건들은 역사책에서 효과적으로 사라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왜곡된 이집트 연대기는 원래 창세기를 입증하기 위해 시도됐었다!)

다른 고대 국가들의 역사도 왜곡된 이집트 연대기와 일치되도록 재구성되었음을, 벨리코프스키는 보여주었다. 이러한 고대 세계에 대한 ‘현대적’ 역사는 사실상 성경적 역사와 전통적 역사와 접촉할 지점이 없도록 만들었으며, 그것들과 반복적으로 충돌했다.

이 글을 쓰는 본인도 벨리코프스키의 격변적 분석을 견지(堅持)하고 있다. 그리고 나의 책은 우리가 격변적인 체제를 받아들일 때, 퍼즐(puzzle)의 모든 요소들이 제자리에 들어맞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시도이다. 히브리 역사의 가장 초기 부분은 이집트 역사의 초기 부분과 실제로 가장 멋있게 조화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내 작업의 중심 주제는 인접해 있었고 서로 연관되어 있었던 두 나라(이집트와 이스라엘)에 대한 평행한 기원(parallel origins)이다.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역사는 처음부터 얽혀 있었고, 그 밀접한 관련성은 그 후 수 세기 동안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따라서 나는 두 민족의 역사 사이에 연결고리를 구축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1장은 노아의 대홍수인 성경의 모든 사건 중 첫 번째이자 가장 큰 사건에 대한 검토이다. 세계 여러 지역에서 일하고 있는 고고학자들은 고대에 거대한 홍수에 의한 대격변적 파괴(cataclysmic destruction)를 가리키는 풍부한 증거들을 발견하고 있다.

그러나 각 학문 간의 상호협력은 불충분했으며, 심지어 우리 시대에도 그러한 문제는 일어나고 있는데, 이것은 근시안적인 학문의 과도한 전문화 때문이다.

그 결과 실제로 당시에 일어났던 실제 이야기들을 파괴하는 작업들이 여러 방법과 절차를 사용하여, 수 세기 동안 학자들에 의해 자행되었다.

그리하여 메소포타미아의 우르(Ur)에서 레너드 울리(Leonard Woolley)가 발견한 대홍수의 증거들은 국지적 홍수로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실제로 시리아 등에서 일어났던 홍수에 의한 파괴는, 울리의 작업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학자들에 의해서 1천 년 후 일어난 것으로 연대가 할당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우르 홍수의 본질과 규모가 변조되었고, 모든 고대 사람들이 보고하고 있었던 대홍수에 대한 고대 역사는 완전히 왜곡되었고, 서로 조각나게 되었다.

아브라함과 메네스(Menes, 최초의 바로)를 연결시켜 보면, 우리는 고대에 대한 예상치 못한 전혀 새로운 견해를 갖게 된다. 우리는 이제 고대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역사가 퍼즐 조각처럼 들어맞는 것을 보게 된다.

다음의 일치는 요셉(Joseph)과 임호텝(Imhotep)에 관한 이야기다. 이집트의 전통에 따르면, 메네스(Menes)가 집권한지 2세기가 지난 후 조세르(Djoser, ‘현자’)라는 위대한 바로가 살았는데, 그 시대에 재상이었던 임호텝은 이집트의 모든 현자 중 가장 으뜸인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조세르와 임호텝은 기근 당시 7년 동안 함께 살았으며, 임호텝에게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 것은 왕의 꿈이었다. 마찬가지로 히브리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성경에 따르면, 아브라함 이후 2세기가 지난 후에 위대한 선견자인 요셉이 바로의 재상(총리)이 되어, 왕의 꿈을 해석함으로써 7년 기근의 위기를 해결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알려준다.

물론 역사가들은 오랫동안 임호텝과 요셉 사이의 두드러지게 닮은 점을 알고 있었으며, 그 주제에 대해 많은 글들을 썼다. 그들은 틀림없이 오래 전에 두 사람의 정체성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천 년이나 넘게 잘못된 표준 이집트 연대기가 이 문제에 혼란을 초래했다.

현재 이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임마누엘 벨리코프스키 덕분이다. 고대 이집트 연대기에 내재된 모순에 대한 벨리코프스키의 탁월한 설명은 고대의 비밀을 푸는 열쇠이다. 그의 책 ‘혼돈의 시대(Ages in Chaos, 1952년)’에서, 그는 출애굽을 기점으로 이집트 후기 역사를 완전히 재구성할 것을 제안했다. 현재의 작업은 혼돈의 시대에서 영감을 받아 이집트 역사의 초기 부분을 재구성하고 있다. 벨리코프스키는 출애굽으로 시작했다. 우리도 같은 사건으로 끝난다...


조세르의 시대

바로 조세르는 누구인가?

이집트 문명의 시작을 성경의 아브라함과 동시대에 둔다면, 이집트와 이스라엘 역사의 출발은 같은 시기가 되고, 이제 새로운 연대기에 따라 두 역사의 재구성을 시도해야 한다. 우리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면,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동질성이 거의 없었던 두 이웃한 나라의 역사가 밀접하게 일치될 것이 기대될 수 있다.

히브리 역사에 따르면, 아브라함 이후 2세기가 지난 즈음에,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이 축복했던 그의 열두 아들들은 가나안에 정착했다. 이들 중 한 명으로 가장 젊고 현명했던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갔다. 이집트에서 그의 꿈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에게 알려지면서, 운명이 극적으로 변화되고 신분이 상승된다.

그는 곧 왕의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조언자가 되었으며, 그 유명한 대기근 동안에 아버지와 형제들이 힘들어할 때, 전체 가족들을 이집트로 데려왔다. 따라서 요셉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어떻게 한 인물을 비천한 상태에서 탁월하게 높은 지위로 올리실 수 있는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예가 되었다. 창세기의 4분의 1 이상이 그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제 우리 자신에게 묻는다. 이집트인들은 요셉을 기억했을까? 아니면 이집트 전승은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인물을 알고 있을까? 더 구체적으로, 초기 왕조시대의 이집트 전승은 요셉과 동일시되는 사람을 전하고 있을까? 대답은 ‘그렇다’이다.

메네스에 의해서 왕조가 설립된지 2세기 정도가 지나서,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현자가 나타났다. 이 사람은 조세르 왕의 치하에 신과 같은 존재였던 임호텝(Imhotep)이었다.

요셉과 임호텝의 진정으로 유사한 점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바로 조세르(Djoser)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집트 전승에서 임호텝의 위치처럼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마네토의 제3왕조의 두 번째 바로였던 조세르(Djoser, or Zoser)는 네체리케트(Netjerkhet)라는 제목의 기념비에서 발견된다. '현자(The Wise)'를 의미하는 조세르라는 이름은 그의 죽음 이후에도 오랫동안 그에게 수여되었다. 많은 학문적인 토론이 조세르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그는 피라미드를 세운 초기 왕조 최초의 바로인 것으로 일반적으로 믿어지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이 개념은 잘못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피라미드 또는 큰 석조 기념물을 세운 최초의 바로였다. 특히 사카라(Sakkara)에 있는 계단식 피라미드(Step Pyramid)과 인접한 사원의 디자인은 이에 대한 충분한 증거를 제공한다. 기둥들은 갈대 다발을 모방했고, 천장은 종려나무를 모방한 문양이다. 문들은 이를 모방한 경첩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집트 역사의 거의 모든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계단식 피라미드와 사카라의 사원은 전통적 이집트 연대기에 많은 어려움을 발생시킨다. 예를 들어 성전 건물은 매우 현대적인 모습으로 보이며, 오늘날까지 방문자들은 성전 홀(temple hall)의 '원-도리아 양식(proto-Doric)'의 기둥들을 보고 그 아름다운 모습에 감탄한다.

이후에 이집트인들은 조세르의 통치 기간을 황금시대로 간주하게 되었고, 바로는 거의 신과 같은 권력자로 인정받았다. 무엇보다도 그는(조세르라는 이름으로 알 수 있듯이) 지혜의 화신으로 여겨졌다. 그를 숭배하는 것은 점차로 강화되어, 이집트 말기왕조 시대(Saite period, 제26왕조)에 그는 이미 신격화되었다. 한 주석가의 말에 따르면, “두 사람 모두 문학의 수호신이자, 저명한 의사로서, 그리스 의술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Asklepios)와 동일시되었다.

… 시간이 지나 그는 초기의 바로들 중 가장 위대한 왕 중 한 명으로서 존경을 받았으며… 제22왕조의 아피스(Apis) 숭배자들의 봉헌 중에서 그의 이름은 존경받는 인물 중 하나로 나온다. 우리는 제26왕조에서 그의 정신을 계승한 손브프(Sonbf)라는 이름의 사제와 또 다른 사제인 아하모스(Ahmose)를 알게 된다.”

조세르는 그에게 부여된 제사장직을 갖고 있었고, 그의 죽음 이후 몇 세기 동안 신으로 여겨졌다. 그러한 극찬을 받게 만들었던 것은 무엇일까? 일반적인 설명은 거대한 석재 건물인 피라미드를 남긴 첫 바로로서, 후대에 자연스럽게 깊은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그의 기념물은 그의 불멸을 보장했다.

이 설명이 어느 정도 진실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 조세르의 명성은 그의 재상(vizier)이었던, 신과 같은 임호텝의 명성으로 더 높아졌다. 아래에서 보게 되겠지만, 이 사람은 이집트에서 가장 위대한 예언자이자, 꿈의 해석자로 여겨졌다.

임호텝은 또한 사카라(Sakkara)에서 훌륭한 건축물을 설계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공인되고 있다. 이 두 명의 뛰어난 인물은 함께 행동하여 이집트 문명을 독창적인 방식으로 형성했으며, 이집트를 잊을 수 없는 파괴적인 대기근에서 구해냈다고 기억되고 있다.


조세르와 7년의 흉년

이집트의 전통적 역사는 7년간 지속됐던 대기근을 기록해 놓고 있다. 이 대기근은 조세르 통치 기간에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바로였던 조세르가 왜 '현자(The Wise)'라고 불렸는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7년간의 대기근에서 이집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가 아스완(Aswan) 근처의 암벽에 새겨진 비문(rock-cut inscription)에 적혀있다. 이 비문은 BC 1세기에 살았던 프톨레마이오스 5세(Ptolemy V, 에피파네스) 시대의 것으로 연대가 평가되었다. 이 비문은 대기근을 역사적 사실로 기록하고 있으며, 조세르 왕 18년에 발생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비문은 조세르 시대의 것으로 주장되지만, 이러한 주장은 일반적으로 기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비문은 매우 오래된 기록의 사본(물론 철자는 업데이트된 것으로)일 수도 있다. 조세르의 통치 기간에 이집트에 큰 위기가 닥쳤다. 바로는 비탄에 잠겼다 :

“나의 시대 7년 동안 나일강이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나와 궁에 있는 사람들은 매우 큰 마음의 고통에 빠져있다. 곡식이 부족하고, 과일이 없고, 사람들이 먹는 모든 것이 결핍되었다.”

물론, 조세르의 기근은 고대 히브리인 요셉 시대의 기근과 매우 흡사하다. 이집트 연대기 기록의 모든 요소들은 요셉 이야기와 순서가 좀 다르지만 거의 비슷하다. 요셉의 이야기에서 바로의 꿈이 먼저 나오지만, 두 이야기는 꿈의 해석이 기근을 벗어날 수 있게 했던 열쇠를 제공했다는 것에 일치한다.

이집트 이야기에는 현명한 선견자인 임호텝은 바로를 도와서 대기근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임호텝의 역할은 창세기에서 요셉의 역할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 명백하다.

.1890년 찰스 윌보우(Charles Wilbour)는 나일에 있는 사할(Sahal)섬에서 임호텝(Imhotep)의 이야기가 적혀있는 거대한 비문을 발견했다.


또한 크눔 신(god Khnum, 나일강의 신이자 창조의 신)의 본질이 여기에서 중요하다. 숫양의 머리를 하고 있는 크눔은 초기 이집트에서 가장 중요한 신이었다. 그는 창조의 신으로 여겨졌으며, 도공의 물레(potter’s wheel) 위에서 인류를 만든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크눔은 실제로 구약의 하나님과 매우 유사해 보이는데, 일부 학자들은 크눔의 숭배는 히브리 종교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학자들은 7년 동안 지속됐던 조세르의 기근과 요셉의 기근을 연관시키는 데 열심이었으며, 의심할 여지없이 임호텝과 요셉, 조세르와 요셉의 바로는 연대기적 불일치가 아니라면,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보았다. 이집트 연대기에 의하면 조세르는 BC 2,600년경에 통치했고, 성경적 연대기에 따르면 요셉은 BC 1,700년경에 살았다. 여기에는 약 1000년의 격차가 있다.

 <Source: Betty Matteson Rhodes>


따라서 학자들은 두 전설 사이에 다소 모호한 “연결”로 만족해야 했다. 어떤 사람들은 요셉의 이야기가 이집트 이야기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창세기 기록이 이집트 이야기에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성경의 기록이 이집트 이야기에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으로 잘 알려진 지지자는 독일의 이집트 학자였던 하인리히 브뤼쉬(Heinrich Karl Brugsch)였다. 그러나 이러한 아이디어는 기존의 이집트 연대기가 올바른 경우에만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집트 연대기는 축소되어야만 한다고 많은 신진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다. 그 경우에 조세르의 통치 연대도 대폭적으로 당겨지면서 성경적 연대기에 가까워질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세르가 실제로 요셉의 바로였고, 7년 동안의 흉년에 대해 조세르에게 대비책을 조언한 위대한 선견자 임호텝은 요셉이었을까? 마지막 결론을 내리기 전에, 창세기 기록에 나타난 요셉의 삶과 성격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요셉 이야기

구약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사랑받는 요셉 이야기는 창세기의 거의 4분의 1을 차지한다. 그 사실만으로도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에서 요셉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그는 야곱과 형제 가족들을 이집트로 데려온 사람으로, 이들은 추후에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로 성장한다.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요셉의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역사뿐만 아니라, 이집트의 역사에서도 그의 중요성을 나타내며, 전체 에피소드에 대한 배경으로 이집트를 철저하게 보여준다.

이 모든 것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요셉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수수께끼지만, 현재에도 이집트에 엄청난 영향력이 있다고 인정되고 있다. 사용된 용어와 관용구들은 이집트인들이 사용해왔고, 사용하고 있는 이집트어이다. 실제로 오늘날 몇몇 학자들은 이집트 기록에 근거하여, 창세기에 기록된 이집트어 용어와 관습이 당시의 것과 유사함을 확인하고 있다.

그러한 주석가 중 한 사람은 이스라엘의 이집트학 전문가인 야후다(A. S. Yahuda)로서, 그는 창세기 후반부에 대한 상세한 연구를 수행했다. 야후다는 창세기 전체에 걸쳐 이집트 용어, 어구, 은유, 외래어가 풍부하게 존재한다는 점을 궁금하게 생각했다. 이러한 용어들은 구약성경의 후반부 책들에서는 상대적으로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야후다가 제공하는 일부 사례들은 다음과 같다 :

▶ 야후다에 따르면, 요셉의 총리 임명은 이 이야기의 핵심이었다. 이 직책에는 “두 번함, 반복함, 두 번으로”라는 의미를 어근으로 가진 히브리 단어가 사용된다. 야후다는 같은 방식으로 이집트어 sn. nw (“대리인”)가 “두(two)”라는 단어인 sn.에서 형성되었다고 설명했다. 같은 구절에서 바로는 요셉 앞에서 “엎드리라(bow the knee)”고 명령한다. “보우(bow)”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이집트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데에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 요셉은 “바로의 아버지(father to pharaoh)”라는 타이틀이 붙여져 있는데, 야후다가 말한 것처럼, 히브리어 표현은 이집트의 itf, ‘아버지’, 일반적인 제사장직, 총리로 태어난 사람 등과 일치한다. 바로는 요셉과 대화를 시작할 때 “내가 한 꿈을 꾸었으나...들은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 하더라(I have had a dream … I have heard that you understand a dream to interpret it)”(창 41:15)라고 말한다. 히브리어는 “이해하다”라는 단어를 “듣다”라는 동사를 사용한다. 이 단어는 주석가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것이었지만, 야후다에 따르면, 그것은 "듣다(to hear)" 또는 "이해하다(to understand)"를 의미하는 이집트의 sdm 사용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이다.

▶ 요셉 이야기에서 바로는 제 3자로 언급된다. 예를 들어 창 41:34절에서 “바로께서는 또 이같이 행하사...” 야후다에 따르면, 이것은 이집트의 궁중 예절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이다. 또한 창세기 여러 구절에서 반복되는 특징적인 용어는 ”in the face of Pharaoh“, or “from the face of Pharaoh”(바로 앞에서)라는 용어인데, 이것은 “before pharaoh”를 의미한다. 야후다는 이 용어는 이집트의 궁중 예법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말하며, 여기서 바로 앞에서는 말할 수 없고, 존엄이 허가했을 때에만”(m hr-hm-f)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요셉의 말에서 바로와 관련하여 “주(lord)”라는 단어가 복수로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이집트 단어 nb가 "주"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복수인 nb.wy를 사용하면 바로를 나타내는 이집트어 사용법과 일치한다.

이러한 사례들은 야후다가 수집한 증거들 중 일부에 불과하지만, 전체 이야기에 대한 이집트의 배경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준다. 앞에서 말했듯이, 실제로 일부 주석가들은 히브리인 기자가 이 이야기를 기록할 때, 어느 정도 이집트 원래 이야기를 수용했다는 증거는 매우 강력하다고 말한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은 요셉의 이야기를 기록했을 때, 이집트 사람들이 그에 대해 기록해놓은 것을 많이 인용했다는 것이다. 이들 중 어느 것도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는다. 창세기는 요셉이 주인공이었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알려준다. 그는 왕의 총리 대신이 되었다. 그는 팔레스타인 지방의 아시아인들(야곱과 형제 가족들)을 이집트로 데려왔다.

그는 사회적, 정치적 혁명을 지휘했다. 창세기 47:22절에 따르면, 이집트 땅은 여러 번 통치자가 바뀌었다. 바로는 왕국의 절대 통치자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요셉은 매우 특별하게 미래를 볼 수 있는 사람이었고, 선지자였으며, 비전의 사람이었다. 요셉은 이집트인들이 결코 잊을 수 없었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는 이제 아브라함이 이주한 이후 몇 세대 후에 요셉이 “현명한” 바로 조세르와 현명한 선견자 임호텝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명의 큰 현인 요셉과 임호텝은 동일 인물이며, 요셉의 현명한 바로는 “현자”였던 조세르였다는 것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는 것이다.

위의 평가에 추가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간단히 말하자면, 임호텝은 이집트의 모든 현자들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임호텝과 성경의 요셉 간의 밀접한 상관관계는 학자들의 눈에 늘 띄었다. 최근에 톰 쳇윈드(Tom Chetwynd)라는 영국의 역사가가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인가 하는 논란을 재조명하면서, 이 두 사람은 같은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쳇윈드는 임호텝이 BC 3000년 전의 “고왕국(Old Kingdom)”에 속해 있다는 기존의 견해를 견지하면서도, 이것에 내재된 시간적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둘 사이의 유사점은 연대기적 문제를 극복하기에 충분히 강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간단히 말해서, 이집트 연대기가 무엇을 말하든 관계없이, 두 사람은 동일인이어야 한다는 증거들은 너무도 강력하다는 것이다.


*참조 : Could Joseph and Imhotep have been the same person?

https://josephandisraelinegypt.wordpress.com/

Could Joseph and Imhotep have been the same person?

https://josephandisraelinegypt.wordpress.com/feature-article-imhotep-and-joseph-are-the-same-person/

Was Imhotep and Joseph the same Person?

https://the-red-thread.net/joseph-imhotep.html

Joseph’s Zaphenath Paaneah—a chronological key

https://creation.com/chronological-key-in-josephs-name-zaphenath-paaneah

Egyptian chronology and the Bible—framing the issues

https://creation.com/egypt-chronology

Resolving alleged conflicts between the Bible and other accounts of Egyptian history

https://creation.com/egyptian-chronologies


*참조 : 이집트 역사와 성경 기록 : 완벽한 조화?

http://creation.kr/archaeology/?idx=4326240&bmode=view

이집트에 히브리인들이 살았다는 증거 : 그리고 출애굽 연대에 대한 고찰

http://creation.kr/archaeology/?idx=4218772&bmode=view

이집트 연대기와 성경 : 현장 고고학자 데이비드와의 대화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29&bmode=view

출애굽의 역사성을 확증하고 있는 영화, “출애굽의 증거들”이 개봉되었다.

http://creation.kr/BiblenHistory/?idx=1289000&bmode=view

“증거의 패턴: 홍해의 기적” - 성경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영화

http://creation.kr/archaeology/?idx=3156850&bmode=view

시내산의 위치에 관해 논란이 되고 있는 고고학적 장소를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공개한다.

http://creation.kr/archaeology/?idx=2574870&bmode=view

모세를 찾아서 1, 2

http://creation.kr/BiblenHistory/?idx=1288911&bmode=view

http://creation.kr/BiblenHistory/?idx=1288912&bmode=view


출처 : http://s8int.com/joseph.html

번역 : 미디어위원회


미디어위원회
2020-07-27

이집트 역사와 성경 기록 : 완벽한 조화?

(Egyptian history and the biblical record: a perfect match?)

By Daniel Anderson


       오랫 동안 대중 매체들은 성경에 기록된 요셉, 모세, 유월절, 출애굽에 대한 이야기들을 조롱해왔다. 왜냐하면 표준 이집트 연대기(standard Egyptian chronology)와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 매년 우리는 창세기와 출애굽기에 기록된 사건들은 역사적 또는 고고학적 근거가 전혀 없는, 히브리인들의 전설에 불과하다는 많은 세속적 학자들의 주장들을 듣게 된다.

그러나 고고학계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상당히 다양한 배경을 가진 신진 학자들 집단이 공개적으로 표준 이집트 연대기의 과감한 단축(drastic reduction)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한 단축은 이집트의 역사적 고고학적 기록과 성경 기록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할 것이다. 놀랍게도, 이집트 역사를 상당 부분 단축시키는 것을 보증할 만한 많은 명확한 증거들이 있다. 그 경우에 창세기, 출애굽기, 그리고 구약성경 전체의 기록들은 역사적 진실이었으며, 그 신뢰성은 근원적으로 다시 평가될 수 있다.


이집트 연대기의 개정을 주장하는 사람들


표준 이집트 연대기의 개정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소수이지만, 그들의 학자로서의 자격은 높이 평가된다. ‘시간의 시험’(Test of Time, 세월의 풍상)의 저자인 데이비드 롤(David Rohl)은 “람세스 2세(Ramses II)는 표준 이집트 연대기에서 배정된 날짜보다 약 350년이 당겨져서 BC 10세기에 위치시켜야 한다고”고 주장한다. 피터 제임스와 다른 4명의 학자들은 ‘어둠의 세기(Centuries of Darkness)’라는 저서를 출판했다. 그들은 이집트 왕조의 연대를, 특히 제21~24왕조의 연대를 수백 년 줄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고고학 교수 콜린 렌프루(Colin Renfrew)는 이 책의 서문을 다음과 같이 썼다.

이 불온한 책은 세계사에서 결정적인 시기에 대한... 그리고 연대추정의 매우 불안정한 본질, 전체적인 연대기의 시간 체계, 우리의 현재 해석에 대한 이견을 제시한다... 인류 역사에서 중요한 단계의 기존(표준 이집트) 연대기가 수 세기나 잘못 설정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역사는 다시 써져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3]

이집트 역사의 권위자인 알란 가디너(Sir Alan Gardiner) 경은 표준 이집트 연대기를 둘러싼 내재된 문제를 인정하고 있다 :

이집트 역사의 필수적인 왕조 틀, 왕들의 명단, 그외 보조자료들을 충분히 사용하더라도, 이집트의 역사에서 꼭 필요한 왕조 틀은 통탄할 만한 간격(gaps)과 많은 의심스러운 특성들을 제공한다.[4] 

작년에 데이비드 다운(David Down, 관련 글인 “False History—out with David and Solomon”을 썼음)과 존 애쉬튼(John Ashton) 박사는 “바로의 비밀을 풀다: 이집트 고고학은 어떻게 성경적 연대기를 확증하는가? (Unwrapping the Pharaohs: How Egyptian Archaeology Confirms the Biblical Timeline)”라는 책을 출판했다. 다운은 거의 반세기 동안 이집트, 이스라엘 및 중동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를 수행했다. 그 책에서 그들은 이집트 연대기와 구약의 역사를 조화시키는 ‘개정된 연대기(revised chronology)’를 제안한다.


전통적인 표준 이집트 연대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유.


천문학적 가정들

다양한 배경을 지닌 일련의 신진 학자들 집단이 공개적으로 표준 이집트 연대기의 강력한 축소를 요구하고 있다.

월식과 일식은 이집트 연대기의 날짜와 완벽하게 일치되는 것으로 추정됐었으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천문학적 연대가 고정되어있다는 개념은 천식(celestial eclipses, 일식이나 월식)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천랑성 주기(Sothic Cycle)”에 기초한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 문서들에서 천랑성 주기는 언급되어있지 않다.[5] 밝게 빛나는 시리우스(Sirius) 별을 목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천랑성의 떠오름(the rising of Sothis)'에 대한 언급이 있을 뿐이다. 실제 문제는 많은 현대 학자들은 고대 이집트인들의 달력은 약간 빗나갔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현대 과학에 비추어 이를 수정하면, 날짜가 그에 따라 정렬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은 피라미드를 북쪽, 남쪽, 동쪽 및 서쪽의 1도 이내로 정렬시킬 수 있었다. 이집트인들은 꼼꼼한 시간 기록원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중세시대에 제임스와 그의 동료 학자들은 이렇게 썼다 : “초기 이집트 학자들이 적용했던 천랑성 연대 개념은 거부될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Journal of Creation에 게재된 “천랑성 주기 이론의 실패: 이집트 연대기의 재조명(Fall of the Sothic theory: Egyptian chronology revisited)”을 참조하라.)


마네토의 혼란

전통적인 표준 이집트 연대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또 다른 이유는 BC 3세기에 이집트의 역사를 썼던 이집트인 사제 마네토(Manetho)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마네토의 글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상형문자를 해독하는데 능숙했으며, 비문과 문서 및 기타 귀중한 유물을 연구했다. 그러나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 마네토는 많은 실제 사건들이 일어난 후 수백 년, 심지어 수천 년이 지난 후에 기술했다는 것이다. 둘째, 마네토의 저술 원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6] 마네토의 저술에 대한 유일한 출처는 요세프스(Josephus), 아프리카누스(Africanus), 유세비우스(Eusebius), 신셀러스(Syncellus) 등과 같이 훨씬 후대의 역사가들에서 그의 진술 중 일부가 인용된 것뿐이다.


이집트 연대기의 역사적 근원


이집트의 증거들은 수많은 비문, 문헌, 파피루스 문서, 유물 등으로 구성된다. 이것들은 매우 유용하지만, 이 증거는 이집트 역사에 대한 불완전한 그림을 제공한다.

헤로도토스, 마네토, 요세푸스, 아프리카누스, 유세비우스의 고대 저술들은 역사적 통찰력을 더해준다. 유명한 그리스 역사가인 헤로도토스는 BC 5세기에 이집트를 여행했으며, 사제와 지식층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마네토는 BC 3세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이집트 역사를 재구성했다. 유명한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AD 1세기에 그의 역사적인 선집(選集, 유대사)을 쓸 때 마네토를 인용했다. AD 3세기와 4세기에 저명한 역사가인 아프리카누스와 주교 유세비우스도 마네토를 인용하고 이집트의 역사에 대해 기술했다. 그러나 이들 존경받는 역사가들 모두가 이집트 연대기를 계산할 때 서로의 의견이 맞지 않았다.

이집트 연대기가 일치되지 않는 특성으로 인해, 정확한 날짜, 바로들, 왕조에 대하여 포괄적인 목록을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알란 가디너(Alan Gardiner) 경은 “일관된 그림을 재구성하기 위한 우리의 자료는 매우 부적절하다”라고 썼다. 따라서 우리는 이집트의 기록을 더 정확한 다른 역사적 기록과 서로 비교해야 한다. 성경 및 앗시리아 연대기(Assyrian chronology)는 이집트 역사의 많은 모호성을 수정하는데 사용될 수 있는 일관된 날짜를 제공해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구약성경과 앗시리아 연대기의 역사적 기록이 충분히 겹치면, 표준 이집트 연대기를 개정하는 것은 두 개의 독립적인 신뢰할 수 있는 출처와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도, 완벽하게 논리적일 것이다.


노아와 이집트의 연결


노아의 손자 중 한 명의 히브리 이름은 미스라임(Mizraim)이다.(창 10:6) 현대 이집트인들이 자신들을 미스라임에서 유래됨을 뜻하는 미즈르(Misr)라고 부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7] 창세기에 따르면, 노아의 손자 미스라임은 이집트인의 아버지이다. 개정된 연대기에서, 이집트는 BC 2,100년에 바벨(Babel)에서 분산된 직후부터 존재하게 된다. 유명한 AD 4세기의 역사가인 유세비우스(Eusebius)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집트는 히브리인들에 의해 메스트라임(Mestraim)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메스트라임은 홍수가 끝나고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살았다. 홍수 후에 노아의 아들 캄(또는 함)은 애굽토스(Aeguptos), 또는 메스트라임(Mestraim)을 낳았다. 그는 최초로 이집트를 세운 사람이다. 그 시기는 종족들이 분산되어 퍼져나가기 시작했던 시기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최초의 이집트 왕조가 시작되었다.[8]

전통적인 표준 이집트 연대기에 의하면, 최초의 이집트 왕조 앞에 약 2,000년의 왕조 이전 시대(pre-dynastic period, 선왕조 시대)가 있다. 그러나 창세기는 이보다 훨씬 짧은 기간 틀을 말한다. 또한 시카고의 동양사연구소(Oriental Institute of Chicago)는 1988~1989 연례 보고서에서, 브루스 윌리엄스(Bruce Williams)의 광범위한 고고학적 연구에 대한 요약 글을 발표했다. 윌리엄스는 이집트의 왕조 이전 시대(pre-dynastic period)와 관련된 발견들을 재조사를 실시했고,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두 기사는 모두 한때 '왕조 이전(pre-dynastic)'으로 알려진 시대를 피라미드 시대와 이후 시대의 증거들을 굳게 연결하고 있지만, 그 용어는 폐기되어야만 한다.[9] 

윌리엄스는 여러 고고학 저널에 글들을 발표했으며, 그의 최근 연구는 창세기 기록을 확증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브라함이 이집트를 방문하다

성경적 연대기에 의한 출애굽의 날짜는 대략 BC 1,445년이다. 출애굽기 6:4절과 갈라디아서 3:16~17절은 하나님께서 BC 1,875년경, 출애굽 430년 전에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다고 알려준다. 이 날짜가 지나자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심한 기근을 피하기 위해 이집트로 내려갔다.(창 12:10). 바로의 관리들이 왕에게 보고한 것처럼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매우 아름다웠고, 아브라함의 방문은 곧 눈에 띄고 말았다. 두려움 때문에 아브라함은 바로에게 사라가 그의 누이라고 말했다. 그 결과, 바로는 일시적으로 사라를 첩들이 거하는 규방(harem)에 데려가고, 아브라함에게 값비싼 선물을 많이 주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의 집에 전염병을 돌게 하셔서, 그녀가 실제로 아브라함의 아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즉시 그녀를 풀어 주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Ur of the Chaldees)에서 왔다.(창 11:31). 레너드 울리(Leonard Woolley) 경은 1922년부터 1934년까지의 연구를 통해서, 우르는 천문학(astronomy)과 산술(arithmetic)에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최초 문명임을 발견했다.[10] 덧붙여서, 수메르 문명(Sumerian civilization)은 글자를 발명하고, 사전을 편찬했으며, 제곱근과 세제곱근(입방근)을 계산했다. 울리의 발견은 아브라함의 이집트 방문에 관한 요세푸스의 기록을 확증해주고 있다.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산술과 천문학을 전했다. 아브라함이 이집트에 오기 전까지 그들은 이들 학문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 당시에 과학은 칼데아 사람들(Chaldeans)로부터 이집트로 전파되었다.[12]

개정된 연대기(revised chronology)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쿠푸(Khufu, 일명 aka Cheops)가 바로였을 때, 이집트를 방문했을 것이다. 쿠푸 이전의 초기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환상적인 건축 구조였지만, 나침반의 네 점 모두가 완벽하게 정사각형은 아니었으며, 정확히 방향이 맞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쿠푸가 자신의 훌륭한 피라미드를 만들었을 때, 천문학적 및 수학적 전문 지식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쿠푸 시대의 피라미드는 완벽하게 정사각형이었고, 수평이었으며, 나침반의 네 지점과 일치했다.

이집트가 왕조 시대에 이르렀을 때, 아브라함의 이집트 방문은 이집트 역사에서 건축학적 혁명을 일으킨 촉매제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요셉이 이집트에서 권력을 얻게 되다

제 12왕조는 이집트 역사상 가장 번성한 왕조 중 하나였다. 개정된 이집트 연대기에 의하면, 요셉은 이 왕조 동안 세소스트리스 1세(Sesostris I) 치하에서 권력을 얻게 되었다. [편집자 : 이 기사에서 이집트 역사와 성경 역사가 동시대에 있는 것은 아직 논란의 여지가 있다. 참조 :  Resolving alleged conflicts between the Bible and other accounts of Egyptian history.] 창세기에 따르면, 요셉은 야곱의 열두 아들 중 한 사람이었다. 요셉의 형들은 질투심에서 그를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았고, 이 상인은 요셉을 이집트 장교인 보디발(Potiphar)에게 팔았다. 결국, 시련과 고난의 기간을 통과한 후, 하나님은 요셉이 바로의 2인자로서 전 이집트를 통치할 수 있도록 하셨다.

세소스트리스 1세는 멘투호텝(Mentuhotep)이라는 총리를 보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사람은 특출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이집트 학자 에밀 브뤼쉬(Emile Brugsch)는 자신의 저서 ‘바로 치하의 이집트(Egypt Under the Pharaohs)’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한마디로, 우리의 멘투호텝은… 그가 도착했을 때, 위대한 인물들이 왕궁의 바깥문에서 절을 하며 엎드렸다.” 브뤼쉬의 설명은 창세기 41:43절에 기록된 요셉의 지위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인다. 바로는 그가 지닌 두 번째 마차에 그를 데리고 갔으며, “백성들은 무릎을 꿇고 그 앞에서 외치며, 그에게 전 애굽을 통치하게 했다.”

요셉이 명성을 얻게 된 궁극적인 이유는 꿈을 해석하는 그의 탁월한 능력이었다. 이집트인들은 꿈에 매우 큰 중요성을 부여했다. 요셉은 바로의 당황스러운 꿈을 해석하여 7년 동안 풍년 다음에 매우 심각한 흉년이 7년 동안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요셉의 해석에 확신을 얻은 바로는 7년 동안의 풍년 기간에 곡식 수집을 감독하도록 요셉을 임명했다.

이집트 비문의 두 가지 단서가 창세기 기록을 확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소위 ‘배고픈 바위(Hungry Rock)’에 쓰여 있는 큰 부조(浮彫, relief)에는 “… 기근의 이유는 강의 신인 하피(Hapy)가 7년 동안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양식이 부족하고, 곡식 낱알이 마르고, 모든 종류의 음식이 부족했다…”라고 적혀 있다.[14]

둘째, 세소스트리스 1세 치하 시에 지방 총재였던 아메니(Ameni)의 무덤에는 다음과 같이 글이 쓰여져 있다 :

나는 마하 놈(Nome of Mah, 고대 이집트의 주)의 모든 밭을 경작해 왔기 때문에, 내 시절에 심지어 기근에도 불행한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나는 생산한 식량을 보존함으로써 주민들의 생명을 연장하였다.[12]

*참조 : 이집트의 임호텝과 요셉은 동일 인물이었는가?

http://creation.kr/archaeology/?idx=4404153&bmode=view


이집트의 히브리 노예

전통적인 이집트 연대기에 의하면, 히브리 노예에 대한 이집트의 억압은 제 18왕조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시기에는 이집트에 히브리 노예들이 있었다는 역사적 증거가 거의 없거나, 전혀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개정된 연대기에 의하면, 이 시기는 제 12왕조 시대에 해당하며, 이 시기에는 놀랍게도 이집트의 이스라엘 노예들에 대한 실질적인 증거들이 있다.

맨체스터 박물관의 이집트 담당자인 로잘리 데이비드(Rosali David) 박사는 제 12왕조 후반 카훈(Kahun)에서의 셈족 노예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

도시에 아시아인(Asiatics)들이 일부 있었음이 분명하며, 이것은 이집트의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사람들은 시리아나 팔레스타인에 있던 사람으로, 정확한 국적을 알 수는 없지만, 이집트인들에 의해 '아시아인'으로 분류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이 이집트에 존재했던 이유는 여전히 불분명하다.[15]

성경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왜 이집트에 살았는지 분명히 알려준다 :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 그가 그 백성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 하고...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을 엄하게 시켜 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출애굽기 1:8-14).

로잘리 데이비드 박사는 이집트 구로브(Gurob)에 노예들이 존재했다는 것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기술했다 :

흩어져 있는 문서들은 아시아인이 어떻게, 또는 왜 중동에서 이집트에 내려왔는지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아 노예, 여성 및 어린이가 구로브에 있었다는 확실한 문헌적 증거들이 있다.[16]

성경 기록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상황 증거는 이 왕조 동안에 진흙 벽돌과 짚(mud bricks and straw)으로 만들어진 피라미드가 있다는 것이다. 심술궂고 잔인하게 보이는 바로인 아메넴헤트 3세(Amenemhet III) 조각상은 바로가 불평하는 히브리인 감독관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너희는 백성에게 다시는 벽돌 만드는 짚을 전과 같이 주지 말고 그들로 가서 스스로 줍게 하라“.(출애굽기 5:7)

또 다른 관심을 끄는 상황 증거는 카훈(Kahun)에서 발굴된 집 마룻바닥 아래에서, 유골 상자들이 발견된 것이었다. 플린더스 페트리(Sir Flinders Petrie) 경은 최대 3개월까지 자라난 아기의 뼈들이 들어 있는 상자들을 발굴했다.[17] 이 아기 유해들은 바로의 명령에 의해 살해된 히브리 아기들의 뼈이고, 아마도 히브리인의 인구를 제한하려는 시도였을 것이다.(출 1:16) 그러나 한 아기가 바로의 사형 선고를 피하여, 히브리인 역사의 행로를 바꾸어 버린다.


모세가 태어남


출애굽기에 따르면, 모세는 강가에서 목욕을 하던 바로의 딸에 의해 건져져서 입양되었다. 모세의 부모는 바로의 명령을 무시하고, 아기의 운명을 하나님의 손에 맡겨서, 바로의 딸이 발견할 수 있도록 바구니에 담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멋진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만, 이 스토리는 상당히 비현실적이다. 과연, 어떤 이집트 공주가 히브리 노예 자녀를 입양해서 바로의 후계자로 만들겠다고 할까?

그러나 개정된 연대기에 의해서 모세를 제 12왕조에 배치하면, 바로 궁정의 가족 역사가 확실하게 나타난다.[18] 아메넴헤트 3세에게는 딸이 두 명 있었지만, 아들들이 존재했다는 것은 확실치 않다. 아메넴헤트 4세는 아메넴헤트 3세의 아들로 알려졌지만, 아메넴헤트 3세의 딸 중 하나인 소벡네페루 (Sobekneferu)의 아들일 가능성도 있다. 아메넴헤트 4세는 이집트 역사상 매우 미스터리한 인물이며, 아메넴헤트 또는 소벡네페루와 공동 섭정을 했던 인물일 수 있다.

요세푸스는 바로의 딸에 대해 증언하기를, ”그녀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그녀는 그를 아버지의 후계자로 생각했다“라고 덧붙였다. 또한, 도노반 쿠르빌(Donovan Courville) 박사는 소벡네페루를 모세의 양어머니일 것으로 추측했다. 소벡네페루가 생물학적 아들을 가졌다는 역사적 기록이 없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매우 그럴듯하다. 소벡네페루가 모세의 양어머니였다면, 강변에서의 목욕에 대한 성경 기록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강의 신 하피(Hapy)는 이집트에서 다산의 신(fertility god of Egypt)이었고, 자녀가 없는 소벡네페루는 아마도 강에서 자식을 갖기 위한 종교적 의식을 행했을 것이다. 이때, 강에서 건져진 아기(모세)는 그녀가 자녀를 위해 기도한 후, 신이 직접 응답한 것으로 해석했을 것이다.


이집트로부터 출애굽

개정된 이집트 연대기에 의하면, 네페르호텝 1세(Neferhotep I)는 이집트 제 13왕조의 출애굽 당시의 바로였을 것이다. 출애굽기 7:10절은 모세와 아론이 바로와 대면하여, “... 아론이 바로와 그의 신하 앞에 지팡이를 던지니 뱀이 된지라” 그러나, 바로는 감동을 받지 않았다. “…애굽 요술사들도 그들의 요술로 그와 같이 행하되 각 사람이 지팡이를 던지매 뱀이 되었으나...”(출 7:11~12) 리버풀 박물관에는 이집트 역사에서 동일한 시기로 인정받는 때의 ‘마술사의 막대기(magician’s rod)’가 전시되어 있다.[19] 아마도 마술사들은 최면 상태의 긴 코브라 막대기를 깨어나게 했거나, 막대기를 실제 코브라로 대체하는 능란한 솜씨를 연습했고 사용했을 것이다.

출애굽기에서 열 가지 재앙은 아마도 가장 유명한 사건 중 하나일 것이다. 전염병이 모세에 의해 기록된 역사적인 사건이라면, 그 재앙의 결과를 묘사하고 있는 증거들이 남아있어야 한다. 실제로 네덜란드의 레이덴 박물관(Leiden Museum)에는 성경 기록을 연상시키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 파피루스가 있다. 고고학자들 사이에 이 자료가 처음 기록된 시점에 관한 일관된 합의는 없다.

… 전염병이 온 땅에 퍼지고, 피(blood)가 도처에 있다… 아니다, 그 강(나일강) 자체가 피이다. 사람이 어찌 그 물을 마실 수 있겠는가? 인간으로서 그것을 마실 수 없다. 사람들은 마실 물이 없어 갈증을 겪고 있다. … 오! 문, 기둥, 벽들은 불에 타버렸다. … 이제는 고관의 아들도 더 이상 알아볼 수 없다. 곡식도 더 이상 없다. 모든 사람이 말하기를 ‘이제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한다.[20]

(참조 : 이집트의 10가지 재앙: 기적인가, 아니면 '어머니 대자연'이 했는가?(The ten plagues of Egypt: miracles or ‘Mother Nature’?). 이 글은 인기 있는 '조류 재앙(algal bloom)' 이론을 철저히 반박한다.)

마지막 전염병은 바로의 마음에 큰 상처를 주었다. 하나님은 자정에 각 이집트인 가족의 장남들을 모두 치셨다. 히브리인들은 이 끔찍한 재앙에 대해 경고를 받았으며, 모세는 그들에게 어린 양을 죽여서,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라고 명령했다. 죽음의 사신은 어린 양의 피가 발라진 모든 이스라엘 집들을 피하여 지나갔다. 네페르호텝의 아들 와흐네페르호텝(Wahneferhotep)이 그의 아버지를 계승하여 왕좌에 오르지 못했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대신에, 네페르호텝 1세의 왕위는 그의 동생 소벡호텝(Sobekhotep IV) 4세에 의해 이양되었으며, 그는 '최근 형이 비워둔 왕좌를 차지했다.' 오늘날까지 역사가들은 네페르호텝 1세의 아들이 그에게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 이유를 정확히 밝혀낼 수 없었다. 그들은 성경 기록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매우 흥미로운 정황적인 증거의 또 다른 부분은 카훈(Kahun) 주민들이 갑자기 떠났다는 것이다. 로잘리 데이비드(Rosalie David) 박사는 다음과 같이 썼다.

왕의 피라미드가 완성된 것이 카훈 주민들이 마을과 집을 버리고, 도구와 다른 소유물들을 버린 이유가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주택에서 발견된 매일 쓰다 남은 물건의 양, 범위 및 유형을 볼 때, 그들의 출발은 계획적이지 않은, 갑자기 결정된 떠남이었음을 암시한다.[22]

그 증거는 출애굽기 12:33절을 확인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애굽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다 죽은 자가 되도다 하고 그 백성을 재촉하여 그 땅에서 속히 내보내려 하므로”

그러나 강력한 이집트 군대는 어떻게 되었을까? 성경에 의하면, 바로는 기적적으로 홍해를 건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쫓아갔다. 그러나 이집트 군대는 결국 홍해 바다에 수장되었다.(출14:28) 그 당시 바로였던 네페르호텝 1세의 미이라(시신)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이 사실과 깊은 연관이 있다.


힉소스 미스터리가 해결되다.


또한 고고학자와 다른 학자들은 힉소스(Hyksos, 이방에서 온 통치자라는 뜻) 족이 군사적 충돌 없이, 빠르게 이집트를 점령한 미스터리 한 사건에 대해 오랫동안 당황해왔다. 개정된 연대기를 옹호하는 학자들은 힉소스를 아말렉인(Amalekites)으로 보고 있다. 아말렉 족은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격했었다. 아말렉 인들이 큰 저항 없이 이집트를 점령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있다. 왜냐하면 이집트 군대는 홍해에서 괴멸됐기 때문이다.

… 이집트 연대기를 적절하게 개정할 때,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확증할만한 역사적 고고학적 증거들은 풍부하다.

힉소스 족을 아말렉으로 간주하는 것은 “또 아말렉을 바라보며 예언하여 이르기를 아말렉은 민족들의 으뜸이나 그의 종말은 멸망에 이르리로다”(민수기 24:20)라는 구절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누구에게 속하였으며 어디에서 왔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애굽 소년이요 아말렉 사람의 종이더니 사흘 전에 병이 들매 주인이 나를 버렸나이다”(사무엘상 30:13)라는 구절에서, 왜 이집트인이 아말렉 사람의 종일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설명할 수 있다. 개정된 연대기에 따르면, 당시에 아말렉인(Amalikites)들이었던 힉소스는 강력했던 이집트 제국을 지배했던 것이다.

아말렉인들이 현재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출애굽기 17:14)라고 모세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예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누구도 아말렉이 이전에 아무리 탁월했어도, 그들에 대해 들은 바가 거의 없다. 사울 시대에 처음으로 아말렉을 진멸할 기회가 있었으나(see also Was this a war crime?), 사울은 하나님께 불순종했다.(사무엘상 15장) 결국, 아말렉 사람들은 다윗 시대에도 여전히 큰 소동을 일으켰고, 실제로 다윗이 그들을 멸절시켰다.(사무엘상 30장).


결론


이스라엘의 게제르(Gezer)의 발굴 현장에 한 젊은 고고학자와 나이 많고 존경받는 고고학자가 있었다.[23] 젊은 고고학자가 성경의 역사성에 대하여 조롱했을 때, 나이든 고고학자가 “글쎄, 내가 자네라면 성경을 버리지 않겠네”라고 조용히 대답했다. 젊은 고고학자가 “왜요?”라고 묻자, 나이든 고고학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글쎄, 결국 성경은 자신이 옳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습관이 있다네”

매년 이 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언론 매체에서 요셉, 히브리 노예, 모세, 출애굽에 관한 성경 기록이 전설과 신화라는 각종 글들을 보게 된다. 하지만,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확증할 수 있는 풍부한 역사적, 고고학적 증거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개정된 이집트 연대기를 성경적 연대기와 맞추려면, 더 많은 연구와 시험, 노력 및 신중한 학문적 접근이 필요하다. 성경의 정확성을 전제로 하고 전문적인 연구를 수행한다면, 상당히 많은 학자들이 전도유망한 출발을 할 수 있다고, 전 호주 고고학회의 클리포드 윌슨(Clifford Wilson) 박사는 말했다.

나는 고고학에서 성경에 반대되는 것이 올바르게 확인되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성경은 세상에서 가장 정확한 역사 교과서이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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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1. Rohl, David A Test of Time: The Bible: from Myth to History, p. 128, Century Limited, London, UK, 1995; see also review by John Osgood, Journal of Creation 11(1):33–35, 1997.
  2. James, Peter Centuries of Darkness, pp. XV–XVI, Pimlico, London, UK, 1992.
  3. James, ref. 2, p. 39. 
  4. Gardiner, Allan Egypt of the Pharaohs, p. 53, Oxford University Press, London, UK, 1964. 
  5. Ashton, J. and Down, D., Unwrapping the Pharaohs: How Egyptian Archaeology Confirms The Biblical Timeline, p. 74, Master Books, Green Forest, AR, 2006. 
  6. Ashton and Down, ref. 5, p. 73.
  7. Hebrew מצרים (mitsrayim) John Gill’s commentary, available in the Online Bible, states, ‘The word is of the dual number, and serves to express Egypt by, which was divided into two parts, lower and upper Egypt.’ 
  8. Waddell, History of Egypt and Other Works by Manetho: The Aegyptiaca of Manetho, pp. 8–9.
  9. Sumner, William ‘Scholarship Individual Research,’ The Oriental Institute Annual Report 1988–1989, p. 62, University of Chicago, Chicago, IL, 1990. 
  10. Obviously, it was not the first civilization, but the first ‘re-civilization’—after the Flood.
  11. Ashton and Down, ref. 5, p. 201. 
  12. Whiston, W., Josephus’ Complete Works, Antiquities of the Jews, Book I, chapter VIII, para. 2.
  13. Breasted, James A History of Egypt, p. 162, Scribner and Sons, New York, NY, 1954.
  14. Ashton and Down, ref. 5, p. 84.
  15. David, R The Pyramid Builders of Ancient Egypt: A Modern Investigation of Pharaoh’s Workforce, p. 191, Guild Publishing, London, UK, 1986. 
  16. David, ref. 15, p. 192. 
  17. Ashton and Down, ref. 5, p. 100. 
  18. Ashton and Down, ref. 5, p. 93.
  19. Ashton and Down, ref. 5, p. 98. 
  20. Velikovsky, Immanuel, Ages in Chaos, Vol.1, ‘From the Exodus to King Akhnaton’, pp. 25–28, Abacus, London, UK, 1973. 
  21. Edward, C.J. et al., The Cambridge Ancient History, Vol. II, Part I, ‘History of the Middle East and the Aegean Region c. 1800–1380 B.C.’, p. 50, Cambridge University Press, Cambridge, UK, 1980. 
  22. David, ref. 15, p. 195 and 199. 
  23. Wieland, C., Archaeologist confirms creation and the Bible: Interview with archaeologist Clifford Wilson, Creation 14(4):46–50, 1992.
  24. Wilson, C, Archaeologist Speaks Out, Creation 21(1):15, 1998.


*참조 : 이집트에 히브리인들이 살았다는 증거 : 그리고 출애굽 연대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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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의 열 가지 재앙 : 기적인가, 자연현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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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의 아이 성에 대한 새로운 고고학적 발굴 : 또 다시 확인된 성경 기록의 정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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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역사를 확증해주고 있는 고대 앗수르 유물. 대영박물관에 있는 성경의 고고학적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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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로니아 점토판에 성경 속 인물이 언급되어 있었다. 느부갓네살 왕의 환관장 살스김의 이름이 새겨진 점토판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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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 이름의 인장이 예루살렘에서 발견되었다. : 느헤미야에 기록된 데마의 인장은 성경의 고고학적 정확성을 입증하였다.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40&bmode=view


출처 : CMI, 23 January, 2007 (GMT+10)

주소 : https://creation.com/egyptian-history-and-the-biblical-record-a-perfect-match

번역 : 미디어위원회






미디어위원회
2020-07-22

새로운 고고학적 발견은 구약성경의 역사성을 확증한다.

: 느부갓네살 왕의 관리 이름이 기록된 점토판은 예레미야서의 역사성을 지지한다.

(New archaeological find affirms Old Testament historicity.

A clay tablet with details of one of Nebuchadnezzar’s court officials 

supports the historicity of the book of Jeremiah)

by Don Batten


      최근 대영박물관에서 판독된 한 점토판(clay tablet)에는 바빌론의 왕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 네부카드네자르)의 고위 관리가 발행했던 영수증이 새겨져있었다.[1] 이것은 바빌론의 성전에 기부된 금에 대한 영수증이었다. 전체 번역은 다음과 같다.

1.5미나(minas, 0.75kg)의 금은 내시장(chief eunuch)인 나부-샤루수-우킨(Nabu-sharrussu-ukin)의 소유로, 그가 아라드-바니투(Arad-Banitu)를 통해 성전(Esangila)에 보낸 것이다. 이에 대해 알파야(Alpaya)의 아들이자, 왕실 경호원인 벨-우사트(Bel-usat)와 마르독-제르-이브니(Marduk-zer-ibni)의 아들 나딘(Nadin)이 확인하였다. 바빌론 느부갓네살 왕 재위 10년 11월 18일.

.설형문자가 새겨져있는, 이와 유사한 점토판은 예레미야 39:3절에서 언급된 느부갓네살 왕의 관리였던 느보-살스김(Nebo-Sarsekim)에 의해서 만들어진 영수증이다. 


이 발견은 비엔나 대학의 객원교수인 마이클 주르사(Michael Jursa)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점토판에 기록된 이름인 나부-샤루수-우킨(Nabu-sharrussu-ukin)은 낯익어 보이는데, 이는 예레미야 39:3절에서 예루살렘이 포위되고 정복됐을 때, 예루살렘에 왔던 느부갓네살의 내시장 느보-살스김(Nebo-Sarsekim)에 대한 언급이 생각나게 한다. 이 점토판은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2세 재위 10년(BC 595년), 또는 예루살렘이 포위되기 12년 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예레미야는 이 사람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시기가 시드기야 재위 11년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을 포위한지 16개월 후이다.(예레미야 39:1~3).

대부분의 영어 번역은 전통적인 킹제임스 성경(KJV)에 따라 느부갓네살의 관리들의 이름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 네르갈사레셀(Nergalsharezer), 삼갈느보(Samgarnebo), 살스김(Sarsechim), 랍사리스(Rabsaris), 랍마그(Rabmag). (관리의 직함 또는 직책을 번역했는데, 랍사리스는 내시장 또는 환관장으로, 랍마그는 고관으로). 성경의 히브리어는 단어 사이에 공백이 없기 때문에 고고학적 증거 없이 많은 번역이 '느보(Nebo)'와 '살스김(Sarsekim)'을 연결하지 못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한 영어 번역본(New International Version)은 ‘삼갈의 네르갈사레셀(Nergalsharezer of Samgar), 내시장 느보-살스김(Nebo-Sarsekim a chief officer), 궁중 장관 네르갈-사레셀(Nergal-Sharezer a high official)’과 같이 관리들의 직책과 이름을 연결하고 있다. 히브리어는 נבושרסכים인데, 여기서 vav(ו)와 yod(י)는 모음 발생을 나타내는 자음이다. 히브리어에는 영어와 같은 모음이 없으므로 독자는 모음을 삽입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히브리어를 잘 아는 사람이나  문맥을 아는 사람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점토판에서 이름의 자음인 NBShRSKN을 보면, 로마 알파벳으로 음역된 히브리어 NBShRSKM와 일치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히브리어 ש는 'sh' 또는 's' 소리를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문맥은 이 사실을 더욱 확실하게 한다.

대영박물관의 전문가인 어빙 핀켈(Irving Finkel)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세계적인 수준의 놀라운 발견이다. 만일 느보-살스김(Nebo-Sarsekim)이 실존했다면, 구약의 다른 소소한 인물들도 그렇지 않겠는가? 구약 성경의 지극히 세부적인 묘사는 정확하고 진실한 것으로 판명된 것이다. 나는 이것이 예레미야서 전체가 새로운 힘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구약(그리고 신약)의 역사를 확증하고 있는 다른 많은 고고학적 발견들이 있다. 2005년에 우리는 히스기야의 터널(Hezekiah’s tunnel)에 의해 끌어들인 물로 공급된 실로암 못(Pool of Siloam)의 발견을 보고했었다.(왕하 20:20; 요 9:7). 성경 회의론자들의 비판은 고고학적 발견들에 의해서 다시금 틀린 것으로 판명되었다. 또한 최근의 이 발견은 매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관리들은 역사적으로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록자는 어떤 일이 있고 상당한 기간 후에 주요 인물들은 비교적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겠지만,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기록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것은 성경의 기자가 이 일들의 목격자(eye-witness)이며, 그 사건을 정확하게 기록했음을 가리킨다.

잘못된 JEDP 문서가설(JEDP hypothesis)은 모세오경에 등장하는 사건들은 천 년 혹은 더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기록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반대되는 압도적인 고고학적 증거들이 발견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서가설은 많은 신학대학에서 가르쳐지고 있다.<see Debunking the Documentary Hypothesis. 아래 링크 글 참조>. 회의론자들은 모세의 책들을 직접 읽어보고도 그러한 주장을 한다고는 믿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 책들은 너무도 세부적 사항까지 목격자들의 목소리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민수기 7장). 이렇게 세부적인 사건들은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 어떤 사람이 이런 기록을 남길 수 있겠는가? 아니면 왜 그런 세부적 사실까지도 기록하여 어렵게 만들었을까? 이처럼 성경에 회의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들은 후에 기록된 선지서(다니엘, 예레미야 등)와 같은 것들도 비역사적 기록으로 취급하며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영박물관에서의 이 발견은 그러한 회의론자들이 틀렸다는 것과, 성경은 신뢰할 수 있다는 또 하나의 증거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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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God rescued King Hezekiah, part 1


Reference

1. Reynolds, Nigel, Tiny tablet provides proof for Old Testament, Telegraph.co.uk, 13 July 2007 


*참조 : 바빌로니아 점토판에 성경 속 인물이 언급되어 있었다. 느부갓네살 왕의 환관장 살스김의 이름이 새겨진 점토판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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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CMI, Creation, Volume 30, Issue 2, March 2008.

주소 : https://creation.com/new-archaeological-find-affirms-old-testament-historicity

번역 : 미디어위원회

미디어위원회
2020-07-13

이집트에 히브리인들이 살았다는 증거 

: 그리고 출애굽 연대에 대한 고찰

(Evidence of Hebrews in Egypt)

by Gary Bates


    매투린(Mathurin M.)이라는 독자가 게리 베이츠(Gary Bates, GB)의 글을 읽고, CMI에 다음과 같은 메일을 보내왔다 :

안녕하세요! 저는 고대 이집트를 몇 년 동안 공부해온 사람입니다. 나는 개신교 기독교인이며, 2017년에 귀하의 웹 사이트를 발견하게 되어 기뻤습니다. 저는 한 질문이 있는데, 게리 베이츠라는 분이 저에게 답을 해주실 수 있을 런지요?

이집트 연대기가 일부라도 성경 연대기와 일치하나요?


[GB] 감사하다. 나는 이 방면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최선을 다하여 답을 하겠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고대 이집트 연대기에 대해서 크게 의견이 나뉘어져 있다. 표준 이집트 연대기에서 인용된 날짜가 성경과 일치하는가를 묻는 것은 약간 어려운 문제이며, 아마도 부적절한 질문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표준 이집트 연대기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어서, 개정이 필요하다는 광범위한 합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작하기 전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제가 설명을 시작하기 전에, 특히 고대 이집트의 역사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표1을 참고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CMI)가 동의하지 않는 세속적 연대이지만, 적어도 이집트 역사가 나누어지는 기간과 순서를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된다.

표1 : 표준 이집트 연대기


한 '왕국(Kingdom)'는 이집트 전체가 중앙 군주제 아래 연합된 때를 말한다. 중간기(Intermediate Period)는 이집트가 다른 통치자들 밑에서 서로 분열된 시기였거나, 경제적으로 쇠퇴할 때였거나, 외국인들이 그 나라의 일부를 통치했던 시기였다. 예를 들어, 신왕국(New Kingdom, 제18~20 왕조)은 이집트의 부와 영향력이 전례 없는 높은 수준에 이르렀던 시기였다.

두 연대기가 어떤 종류의 일치를 하는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이집트 역사 자체와 우리가 알고 있는 실제 성경적 사건이나 인물의 관련성을 살펴보아야 하고, 그 후에 성경적 연대기와 일치시킬 수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장 알고 싶어하는 것들은 출애굽 당시의 바로나 요셉과 아브라함 시대의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은 자신의 왕과 신에게 바쳐진 기념비에 노예나 외국인 그룹의 세부 사항을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집트인들이 히브리인들의 거주에 대해 침묵했다고 해서, 그것을 불성실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집트는 결국 제18왕조 중반(BC 1450년경)부터 히브리인들과 심지어 노예인 이스라엘 백성(하비루/이스라엘, Habiru/Israel)을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그 시기에 그들이 이집트를 떠났을 가능성이 높고, 출애굽이 그 당시에 일어났음을 암시할 수 있다. 우리가 성경적 사건이 일어났던 연대를 결정할 수 있다면, 그리고 이집트 역사에서 성경에 언급되어 있는 동일한 사건이나 인물을 찾을 수 있다면, 연대기를 비교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출애굽 이후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에, 성경은 솔로몬 왕과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이집트의 시삭왕(King Shishak)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이 왕에 대한 성경적 기록은 다음과 같다 : (열왕기상 11:40; 14:25; 역대하 12:2~9).

우리가 먼저 해야할 일은 시삭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에는 시삭이라는 이름의 바로(pharaoh)는 없다.

그러나 프랑스의 위대한 고고학자였던 샹폴리옹(Champollion, 1790~1832년, 로제타석(Rosetta Stone) 비문을 해독한 사람)은 이집트 왕궁의 대문(大門, portal)에 조각된 글을 해독하여, 이집트 제3중간기(Third Intermediate Period) 제22 왕조의 첫 번째 바로가 셰숑크(Shoshenq, 쇼생크)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제22왕조는 제3중간기의 두 번째 이집트 왕조였다. 이 시기는 이집트 왕 람세스 11세(제20왕조)의 죽음으로 시작되어, 이집트가 대혼란에 빠졌던 시기이다. 셰숑크 1세 왕과 함께 모든 것이 정리되었고, 그는 다시 한 번 고대 근동에 대한 정벌을 시작했다. 테베스/룩소르의 카르나크(Karnak) 신전에 있는 '부바스티스 대문(大門)에 적힌 비문(Bubastite Portal)'의 '전리품 목록(booty list)'에는 요르단 지역에서 정복한 약 180개의 도시들 이름이 나와 있다. 이 중 43개는 분열왕국 시대의 유다와 이스라엘의 도시로 알려진 도시들과 왕들의 이름이 있다. 읽을 수 없는(훼손되어) 많은 이름들도 있었으므로, 전체 그림이 명확하지는 않다. 제3중간기의 왕들은 리비아 출신이었으며, 그들은 초기 이집트 통치하에서 원래 장군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부바스티스 자체도 리비아의 도시였다. 발굴된 상태가 좋지 않아, 셰숑크 왕의 대문에서는 읽을 수 없는 도시들에 대한 많은 부분들이 있어서, 전체 그림을 평가하기는 어렵다.

.이집트의 바로 셰숑크의 비문(Shoshenq inscription)


샹폴리옹은 셰숑크 왕궁 대문의 비문에서, 유대인 또는 유다왕국으로서, 이우다하말렉(Ioudahamalek) 또는 예후드말렉(yehudmalek)이라는 일련의 상형문자(y-w-d-h-m-r-k)를 해독했다. 그러므로 그는 이집트의 셰숑크 1세가 분열왕국시대에 도시들을 약탈했던 성경에 언급된 시삭(Shishak)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집트연대 수정주의자(기독교 신자는 아님)인 데이빗 롤(David Rohl)은 이 해석이 틀렸으며, 대문의 비문이 예루살렘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셰숑크는 시삭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배경 지식

솔로몬 왕의 통치 이후, 그의 아들 르호보암은 그를 계승하여 분열왕국에서 유다의 왕이 되었다. 솔로몬이 감독자로 임명했던, 그리고 해로운 영향을 미쳤던, 여로보암은 솔로몬 왕의 진노를 피하여 이집트의 시삭 왕에게 도망가서 이집트 공주와 결혼했다. 성경은 그가 이집트의 신성한 황소 신인 아피스(Apis)와 므네비스(Mnevis)를 숭배하는 일에 익숙해졌다고 지적한다.

“이러므로 솔로몬이 여로보암을 죽이려 하매 여로보암이 일어나 애굽으로 도망하여 애굽 왕 시삭에게 이르러 솔로몬이 죽기까지 애굽에 있으니라” (왕상 11:40).

데이빗 롤의 주장인 카르나크에 있는 셰숑크의 부조(浮彫, relief)에서 예루살렘이 언급되지 않은 것이 맞더라도, 이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성경 기록에 의하면, 이집트의 시삭이 그 도시를 정복하지는 않았지만, 르호보암이 약탈을 막기 위해 미리 전리품을 그에게 넘겨줬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시삭이 오고 있다는 일련의 보고들... 시삭은 유다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기 위하여 오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회개할 시간을 주었다.(대하 12:2~5). 그들은 함께 모여 회개하고 겸비해진다.(대하 12:6).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회개할 때, 늘 하시듯이 심판의 정도를 낮추셨으며, 진멸하지 않고 단지 정복당하고 약탈당하게만 하셨다.(대하 12:7-8).

“그 때에 유다 방백들이 시삭의 일로 예루살렘에 모였는지라 선지자 스마야가 르호보암과 방백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버렸으므로 나도 너희를 버려 시삭의 손에 넘겼노라 하셨다 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방백들과 왕이 스스로 겸비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의로우시다 하매 여호와께서 그들이 스스로 겸비함을 보신지라 여호와의 말씀이 스마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들이 스스로 겸비하였으니 내가 멸하지 아니하고 저희를 조금 구원하여 나의 노를 시삭의 손을 통하여 예루살렘에 쏟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들이 시삭의 종이 되어 나를 섬기는 것과 세상 나라들을 섬기는 것이 어떠한지 알게 되리라 하셨더라 애굽 왕 시삭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치고 여호와의 전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모두 빼앗고 솔로몬이 만든 금 방패도 빼앗은지라” (대하 12:5~9).

나는 시삭이 예루살렘과 유다의 도시들을 파괴하지 않는 댓가로, 솔로몬의 금 방패를 포함하여 많은 보물들을 가져갔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도시가 파괴되지 않았다면, 셰숑크의 대문에 쓰인 비문에 언급되지 않았던 이유가 될 수 있다. 사실이 그렇다면, 예후드말렉(yehudmalek)이라는 상형문자는 올바른 해석이 아니며, 그것은 유다의 도시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에 지나치게 의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y-w-d-h-m-r-k는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시삭이 예루살렘과 유다의 도시들을 파괴하지 않는 댓가로, 솔로몬의 금 방패를 포함하여 많은 보물들을 가져갔다고 생각한다.

나는 CMI의 개빈 콕스(Gavin Cox)의 도움을 받아, 문제의 상형문자를 조금 더 조사했다. 이집트 언어에는 모음이 없기 때문에, 대개 사람들은 표현되는 소리의 이미지를 '강요' 받게 된다. 그런 다음 그것들을 우리가 이해하는 알파벳 문자와 동일시한다.

우선, 우리는 샹폴리옹의 원본을 프랑스어로 찾아서 해석했다. 샹폴리옹은 실제로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왕’이나 ‘예루살렘’이라는 단어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내가 앞에서 말했던 '유대인이나 유다왕국'으로 인용하고 있었다.[1] 'y-w-d-h-m-r-k'의 음역은 흥미롭다. 현대에 우리는 m-r-k를 말렉malek), 또는 왕(king)으로 간주하고 있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개빈은 지적했다 :

“mrk로 발음되는 한 이집트 단어는 “제공하다, 주다”를 의미한다. 이것은 이집트어 월터부크(Wörterbuch, Wb 2, 113.3)와 디미트리 믹스(Dimitri Meeks) (Meeks, AL 78.1800)의 어휘사전에서 확인된다.”

따라서 아마도 상형문자 y-w-d-h-m-r-k의 더 나은 해석은 “유다가 제공한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르호보암이 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예루살렘 도시와 유다의 수도가 약탈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시삭에게 공물을 바쳤다. 여기에는 솔로몬의 부(富)가 포함되었다. 셰숑크(시삭)(Shoshenq/Shishak)가 그것을 언급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지만, 우리는 이 단계에서 샹폴리옹의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케네스 키친(K. Kitchen, see later)의 주장이 가장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반대 의견은 셰숑크가 여로보암의 북부 이스라엘 도시들도 역시 약탈했다는 것이다. 왜 그는 이전에 왕궁에서 보호해줬던 예전 친구의 도시들을 파괴했을까? 여기에는 고려해야 할 몇 가지 사항들이 있다. 여로보암은 솔로몬의 왕국이 분열되도록 했던 반란 후에 이집트로 망명을 했다. 그러나 그는 분열된 왕국의 왕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누구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셰숑크를 조롱했을 수도 있었다. 결국, 그는 권력을 가진 왕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성경적 맥락이 우리가 큰 그림을 보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르호보암의 유다는 회개로 인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것처럼 보이지만, 시삭은 여로보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도구가 될 것이었다. 여로보암의 북이스라엘은 약탈당했지만, 르호보암은 공물을 바침으로써 살아남았다.


성경의 시삭 연대기

이 연대들은 서로 매우 가까워서, 성경 연대기와 훌륭하게 들어맞는다.

그러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다음과 같다. 솔로몬은 그의 통치 제 4년인 BC 967년에 성전 건축을 시작했다. 우리는 출애굽이 BC 1446년(일부 창조론 그룹은 BC 1491년이라고 생각함)에 시작됐다고 믿으며(출 6:1), 이는 정확하다. 이는 솔로몬이 BC 971년에 왕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는 40년간을 통치했다. 이로 인해 그의 통치는 BC 931년경에 끝났다. 시삭은 BC 926년경 르호보암 통치 5년째에 유다를 침공했다. (전통적인 표준 이집트 연대기에 의해서도 제18왕조 이후의 일부 연대들은 수십 년의 오차 내로 정확하다고 생각된다). 셰숑크 침략의 전통적인 연대 BC 925년이다. 이 연대는 서로 매우 가까워서, 성경 연대기와 훌륭하게 조화를 이룰 수 있다.

매우 존경받는 기독교인이며 이집트학의 대가인 케네스 키친(Kenneth Kitchen)은 이집트의 제3중간기에 관한 중요한 작업들을 수행했으며, 샹폴리옹의 해석이 정확하다고 주장했다. 많은 세속적인 이집트 학자들이 시삭과 쇼생크가 같은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일 수 있다. 그러나 데이빗 롤(David Rohl, 표준 이집트 연대기에 수정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동의함)은 시삭과 셰숑크가 같은 인물이라는 것은, 표준 이집트 연대기와 맞지 않기 때문에 이를 거부했다. 그는 다른 사건들을 이용해 이집트 역사의 많은 부분의 연대를 새로 썼으며, 셰숑크(시삭)(Shoshenq/Shishak)의 동일 인물설은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BTW] 나는 베이츠의 글(Egyptian chronology and the Bible—framing the issues)을 읽었으며, 그것은 흥미로웠다. 또한, 나는 그가 상형문자를 읽을 수 있었는지, 이집트 원본을 읽을 수 있었는지를 물어보고자 한다. 나에게 있어 마지막으로 어려웠던 점은 베이츠 씨가 출애굽 시기에 대한 세 연대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그는 두 연대를 설명하고 있지만, BC 1491년 연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어떤 사람은…생각하기를”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누가 '어떤 사람'이며, 출애굽이 BC 1491년이 맞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도와줄 수 있는가? 감사드린다. 


[GB] 아니다. 나는 아직 상형문자를 읽을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전문가들조차도 한 상형문자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 것에 주목하기 바란다. 영국의 이집트학 전문가인 개빈 콕스(Gavin Cox)는 상형문자들을 읽는데 상당히 능숙하며, 앞에서 말했듯이 저를 많이 도와주었다. BTW 당신은 이집트 연대기가 성경적 연대와 일치하는지를 물었지만, 당신이 인용한 위의 나의 글은 그 이유를 정확히 설명하고 있다. 독자들도 시간을 내어 이 글을 읽어보기를 권유한다.

또한, 나는 (출애굽 시기에 대한) 세 연대를 모두 옹호하지 않는다. 나는 여러 주장되는 연대들을 말했던 것뿐이고, BC 1491년은 다른 사람들이 주장하는 연대라고 말했다. 내가 선호하는 출애굽 연대는 전기연대설(출애굽 시의 바로를 람세스 2세로 보는 후기연대설(1279~1213년)과 비교하여)로 알려진 BC 1446(±1)년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합리적으로 추론될 수 있다고 생각되며, 출애굽 연대에 대한 초기 견해로 잘 알려져 있다. 글을 쓰는 시점에 몇몇 CMI 직원들은 2020년 8월에 예정된 이집트 여행을 위한 가이드북을 작성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썼다 :


연대기에 있어서 우리의 기준점은 BC 586(587)년이다. 이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을 멸망시켰던 해이다. 이 날짜는 세속적 고고학에서 잘 입증되었으며, 성경의 역사에서도 확증되어 있다. 그러나 1년 정도의 오차가 있을 수 있다. 여기서 BC 586년이 정확하다고 가정해 보자. 거기서부터 분열왕국시대, 통일왕국시대, 사사시대, 출애굽 시기, 이집트 체류, 아브라함에서 노아로 거꾸로 올라가면서 생각해볼 수 있다. 하지만 성경에 기록된 숫자에는 약간의 오차가 있을 수 있으므로, 연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참조: The biblical minimum and maximum age of the earth.)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

학자들은 남유다의 왕들과 북이스라엘의 왕들이 통치한 기간에 대해 논란을 벌이고 있다. 모든 작은 세부 사항들을 계산하면, 모호할 수 있는 오차 범위는 약 50년 이내이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이 세부 사항을 합리적인 수준의 정확도로 해결해주었다. 그리하여, BC 970년경에 솔로몬이 왕이 되었다고 안전하게 말할 수 있다.[2]


솔로몬의 성전 건축

열왕기상 6:1절은 성전 건축이 솔로몬 즉위 4년째에 시작되었다고 알려준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 년 시브월 곧 둘째 달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 (왕상 6:1)

따라서, 그들은 신중하게 연대를 계수했던 것처럼 보인다. 솔로몬의 성전 건축은 BC 966년경에 시작되었다.


출애굽 연대

열왕기상 6:1절은 또한 솔로몬이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에 성전을 짓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출애굽을 BC 1,446년(BC 966 + 480 = BC 1446년)으로 위치시킨다. 어떤 학자들은 이 480년이라는 숫자는 12×40년으로, 40년을 한 세대로서, 상징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에 “한 세대”를 40년이라고 말하는 곳은 없다. 이런 방식으로 이 구절을 해석하려는 시도는 성경 기자와 초기 교인들 모두에게 생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 년 시브월 곧 둘째 달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라는 성경 본문 자체는 이 연대가 상징적 의미로 쓰여진 것이 아님을 가리킨다.

더욱이 다른 두 계산도 BC 15세기의 출애굽 연대로 수렴된다. 첫째 계산으로, 사사기 11:26절은 우리에게 대략적인 계산을 할 수 있게 한다. 입다(Jephthah)는 암몬 왕의 도발에 비웃으며, 이스라엘이 지난 300년간 요르단 동쪽의 가나안 땅을 점령해왔었다고 언급한다. "이스라엘이 헤스본과 그 마을들과 아로엘과 그 마을들과 아르논 강 가에 있는 모든 성읍에 거주한 지 삼백 년이거늘..."(삿 11:26) 입다는 약 BC 1,010년경에 왕이 된 다윗 보다 이전 시기인, 사사기 후반부에 살았다. 입다와 다윗 사이에 얼마의 시간이 있었다고 보면('100년'을 추정치로 사용하자), 가나안 정복과 입다의 진술 사이에 300년, 그리고 광야 생활 40년이 있었으므로, 출애굽 시기는 대략 BC 1,440년경으로 넓은 오차 범위를 가지면서 수렴된다. 불확실성이 있다 하더라도, 오차의 수치가 무한정 늘어날 수는 없다. 출애굽은 이 연대에 가까워야만 한다.

둘째 계산으로, 열왕기상 6:1절의 480년에서 40년의 광야생활 기간을 빼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땅에 정착하는 기간으로 1년을 허용한다면, 439년이 되는 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해로부터 정확히 9번째(9×49=441) 희년 주기(Jubilee cycles)가 되는 해이다. 성전 건축이 한 희년에서 시작됐던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희년과 관련해서, 에스겔 40:1절에는 매우 흥미로운 말씀이 있다.

“우리가 사로잡힌 지 스물다섯째 해, 성이 함락된 후 열넷째 해 첫째 달 열째 날에 곧 그 날에 여호와의 권능이 내게 임하여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시되”(겔 40:1)

“In the five and twentieth year of our captivity, in the beginning of the year, in the tenth day of the month, in the fourteenth year after that the city was smitten, in the selfsame day the hand of the LORD was upon me, and brought me thither.”(KJV) 

유대인의 새해인 '로쉬 하샤나(Rosh Hoshana)'(‘the beginning of the year’)가 유대력으로 1월인 티시리(Tishri) 10일에 시작하는 유일한 시기는, 희년 동안이다.(레위기 25:9) 성경 밖의 문헌에서, 탈무드(Talmud)와 세데르 올람(Seder Olam, 히브리어 역사서)은 이것이 17번째 희년이라고 말하고 있다.[3] 따라서 성전이 파괴되고 14년(BC 572년 또는 573년)은 희년이었다. 이 연도에 17번의 희년(17 × 49 = 833년)에 광야에서 40년을 합하면(573+833+40=1446), 계산되는 BC 1446년은 출애굽의 날짜이기도 하다.[4]

출애굽의 연대를 계산하는 세 가지 방법이 모두 동일한 결과를 나타내므로, 우리는 이 날짜를 1~2년의 오차 정도로 확실하게 취할 수 있다. 여기에는 학술적 토론의 여지가 있다. 다른 사람들은 다른 날짜 계산법을 옹호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모든 주장들을 다룰 공간이 없지만, BC 1446년에 출애굽을 했다는 사실은 복음주의자들에게 가장 널리 받아들여진 연대이며, 우리도 이에 동의한다.


[GB] 나의 설명이 도움이 되었기를 바란다. 나는 출애굽 당시의 바로가 누구였는지, 그리고 요셉이 어떤 바로 밑에서 총리를 했는지에 대해 더 많이 쓸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것들은 앞으로의 글들에서 더 자세하게 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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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and notes

1. Letters and Journals of Champollion the Younger, Paris (1909), pp. 160-163, gallica.bnf.fr/ark:/12148/bpt6k55516z/f195.image, accessed 4 February 2020. 

2. According to Thiel. See Thiele, E.R., The Mysterious Numbers of the Hebrew Kings, Zondervan, Grand Rapids, MI, 1951 and Jones, F., Chronology of the Old Testament, King’s Word Press, The Woodlands, TX, 1999. 

3. Young, R.C., Evidence for inerrancy from a second unexpected source: the Jubilee and Sabbatical cycles, Bible and Spade 21(4), 2008; biblearchaeology.org/research/exodus-from-egypt/2662-evidence-for-inerrancy-from-a-second-unexpected-source-the-jubilee-and-sabbatical-cycles. 

4. Petrovich, D., Amenhotep II and the historicity of the Exodus pharaoh, The Master’s Seminary Journal 17(1):81–110, 2006; tms.edu/m/msj17.1.pdf. See also biblearchaeology.org/research/exodus-from-egypt/3147-amenhotep-ii-and-the-historicity-of-the-exodus-phara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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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CMI, 2020. 4. 28. (GMT+10)

주소 : https://creation.com/hebrew-egypt-evidence

번역 : 미디어위원회

미디어위원회
2020-06-19

가나안의 하솔 - 성경이 옳았다!

: 성경에 보존된 고대 도시의 흔치않은 지식 

(Canaanite Hazor—the Bible got it right!

Uncommon knowledge of the ancient city preserved in Scripture)

by Keaton Halley


        하솔(Hazor, 또는 Chatsôr)은 이스라엘 북부에 위치했던 고대 도시였다. 하솔에 대한 언급은 구약 역사의 여러 시기에 나타나며, 여호수아서에 처음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도시를 점령하여 하솔 왕을 죽이고, 도시를 불로 태웠다.(수 11:10~11). 드보라와 바락 시대에 가나안 사람들은 이 도시에 대한 지배권을 다시 얻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시 한 번 하솔을 격파하고 왕을 죽였다.(삿 4:24, 4:2 참조). 불행하게도 많은 현대 학자들은 이 시기에 관해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내용을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평에도 불구하고, 하솔은 성경의 기자(記者)들이 어떻게 역사를 그렇게 놀랍도록 정확하게 기록했는지에 대한 훌륭한 사례를 제공한다.

.하솔 <사진 : Duny Tal/Albatross/Alamy Stock Photos>


정복 논쟁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의 기자들은 자신들이 기록한 내용을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서의 기자들은 그들이 기록한 사건들이 있은 직후에 작성했다는 내부적 증거들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여호수아 6:25절은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도왔던 여리고 출신의 여인 라합이 여호수아서가 저술되던 시기에 여전히 이스라엘에 살고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였으니...”(수 6:25). 성경 연대기에 따르면, 여리고 성의 전투는 BC 1400년경에 일어났다. 라합은 그 이후로 한 세기 이상은 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여호수아서는 BC 1300년 전의 어떤 시기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마찬가지로, 사사기는 그 시기가 끝나자마자 상당히 빠르게, 다윗 왕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기 이전에 기록되었다. 이것은 다윗이 나중에 정복한 여부스 사람(Jebusites)들이(삼하 5장) 그 시기에도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었기(삿 1:21) 때문이다.

그러나 세속학자들은 성경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세속학자들은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의 저자들은 몇 세기 후에 그러한 사건들을 기록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텔아비브 대학의 유대 역사학과 교수로 은퇴한 나다브 나아만(Nadav Na'aman)은 여호수아서의 정복 이야기를 “가상의 문학적 작품”으로 치부해버리고 있다. 그는 “가나안 정복 이야기는 확실히 BC 7세기 이전에 쓰여진 것은 아닐 것”이라고 주장한다.[4]


출중했던 하솔

그러한 주장과는 달리,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서의 기자들은 그들이 기록한 내용을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특히 성경의 기자들은 하솔이 가나안 시대에 출중한 도시(pre-eminent city)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호수아의 이스라엘 북부 정복전쟁 기간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은 많은 왕들이 거느리고 왔던 연합군의 모든 군대와 병거들을 물리쳤다. “그들이 그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나왔으니 백성이 많아 해변의 수많은 모래 같고 말과 병거도 심히 많았으며”(수 11:4). 성경은 하솔 왕 야빈은 연합군을 조직할 수 있었던, 그 지역에 있던 모든 왕들의 수장(首長)이었다고 말한다. “하솔은 본래 그 모든 나라의 머리였더니...”(수 11:10).

.하솔의 위치


사사기에 따르면, 후에 또 다른 야빈(Jabin, 아마도 '바로'와 같이 왕에 대한 칭호)이 하솔에서 통치했을 때, 그는 단지 하솔의 왕으로 묘사된 것이 아니라 “하솔에서 통치한 가나안 왕 야빈”(삿 4:2, 참조 4:23~24)으로 불렸다. 다시 한 번, 성경은 하솔은 가나안에서 권위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중심부에서 상부 도시와 우측으로 확장된 하부 도시를 갖고 있는 하솔의 유적지. 


성경 기자들에 의한 이러한 묘사는 고고학적 발견에 의해 강력하게 입증되었다. 일련의 여러 증거들은 가나안 하솔의 출중함을 확인해준다.


바로에게 보낸 서신

첫째, 고고학자들은 이집트의 도시 아마르나(Amarna)에서, 제18왕조의 바로들[아멘호텝 3세(Amenhotep III), 아케나텐(Akhenaten, 아크나톤), 투탕카멘(Tutankhamun)]과 당시 가나안 통치자들 간에 주고받았던 서신들을 복원했다. 많은 학자들이 고대 이집트의 역사와 표준 이집트 연대기가 단축(축소)되어야 한다는데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수정주의자들까지도 믿고 있는 것처럼[5, 6], 이집트의 신왕국(가장 최근)의 전통적인 연대기가 맞는다면, 이 '아마르나 문서(Amarna Letters, 점토판에 쓰여진 외교 문서로 아마르나의 유적지에서 발굴된 이집트 신왕국 시대의 유물)'은 성경의 사사시대의 초기에 해당하는 30년(또는 그 이하)에 해당된다. 이때는 이스라엘이 그 땅에 설립되었지만, 여전히 많은 영토를 놓고 전쟁을 하고 있을 때이다.(삿 1~2).[7] ‘아마르나 문서’에서 수많은 가나안 도시의 통치자들은 “시장(mayors)”으로 언급되어 있었지만, “왕(king)”이라고 불렸던 유일한 사람은 하솔의 통치자였다. ‘문서 227(Letter 227)’에서 그는 자신을 왕으로 언급하고 있었고, 라이벌이었던 두로(Tyre)의 통치자는 ‘문서 148(Letter 148)’에서 그를 왕이라고 기술하고 있었다.[8] 1955~1969년에 하솔에서 여러 발굴 시즌을 이끌었던, 이스라엘 군의 장군이자 고고학자였던 이가엘 야딘(Yigael Yadin)은“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하솔 왕의 통치가 도시 자체보다 더 많은 지역을 포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썼다.[9]

.아마르나(Amarna)의 위치


이를 지지하는 더 많은 증거가 아마르나 문서 364에서 나왔는데, 아스다롯(Ashtaroth)의 통치자가 보낸 이 서신에는, 하솔 왕이 자신의 도시 세 곳을 점령했다는 불만이 들어있었다. 이 기록과 다른 기록에 근거하여, 학자들은 후기 청동기시대로 그 연대를 할당하면서, “하솔은 북부 요르단 계곡, 갈릴리 북부, 갈릴리 남부의 동부, 골란고원 서쪽을 지배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10]

.아스다롯의 통치자가 보내온 아마르나 문서 364에는, 하솔의 왕이 자신의 도시 세 곳을 점령했다고 불평하고 있다. <사진 : Rama, Wikimedia commons, CC BY-SA 2.0 FRA marna- letter- 364>


대도시였던 하솔이 축소됨

둘째, 하솔의 유적지 발굴 결과에 의하면, 통치권이 가나안 사람에서 이스라엘 사람으로 바뀌면서, 하솔의 도시 크기가 크게 바뀌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가나안 사람들이 하솔을 점령했던 후기 청동기시대에는 이 도시는 가나안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고고학자들은 위대한 기념 궁전을 포함하여, 아크로폴리스 위쪽으로 거대한 공공건물들을 발견했다. 1990년부터 하솔의 발굴 책임자였던 암논 벤토르(Amnon Ben-Tor)는 이 궁전을 “매우 화려하고 웅장했으며, 발견된 부와 다양성 모두에서 인상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더욱이, 상부 도시만 해도 약 30에이커에 달했으며, 북쪽으로 확장된 도시의 하부는 추가로 170에이커에 이르도록 거대했다.

대조적으로, 철기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도시를 정복하고 파괴하고, 영구히 하솔에 정착한 후에는, 하부 도시를 재건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틀어, 상부 도시만 사용되었고, 하부 도시와 훨씬 많은 부분들은 버려졌다. 전략적 위치에서 여전히 중요했지만 이스라엘 점령기의 하솔은 크기와 상대적인 영향이 크게 줄었다. 벤토르(Ben-Tor)는 말했다. “하부 도시의 포기로 인해 거주지역이 줄어들었고, 인구는 이전 크기의 약 10분의 1로 줄어들었다. 이 도시는 더 이상 왕국의 수도가 아니었다…”. 이러한 발견들은 성경의 기록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성경의 저자들이 기록했던 것처럼, 가나안 사람들이 통치했을 당시에 하솔은 이 지역의 중심 도시였다.

.BC 13세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 불타버린, 후기 청동기 가나안 사람들의 기념궁전 유적. <사진 : Mboesch,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대외 무역

분명히 성경의 기자들이 가나안 시대에 하솔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은 옳았다. 

또한 발굴된 문서들과 다른 발견들로부터, 하솔은 BC 1700년부터 BC 13세기 중반까지 시리아(특히 마리 도시) 및 이집트와 같은 나라들과 무역을 활발하게 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마리(Mari)와 하솔 모두에서 발견되는 점토판은 두 도시 사이에서 교환된 물품, 심지어 대량의 고가 물품들도 기록되어 있었다. 실제로 마리에서 발견된 25,000개 정도의 문서에서, 하솔은 언급된 유일한 이스라엘의 도시였다.[14]

.마리(Mari)의 위치


또한, 18개의 이집트 조각상(royal Egyptian statues)들이 하솔에서 발견되었다. 벤토르(Ben-Tor)는 이것이 도시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또 다른 지표로서, 이집트 바로의 선물이라고 제안한다. 그것들은 도시를 불태우고 파괴했던 정복자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서 고의적으로 절단되었다는 징후들과 함께, 부러진 채로 발견되었다.[15] 가나안인의 우상들도 의도적으로 손상되어 있었다.

.하솔에서 발굴된 후기 청동기 II 시기의 가나안 인의 도자기.


결론

분명히 성경의 기자들이 가나안 시대에 하솔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은 옳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솔을 오랫동안 통치하면서 그 크기와 중요성이 줄어든 수 세기 후에, 성경의 기자들이 하솔에 대한 이야기들을 기록했다면, 하솔이 중요한 도시였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했을 것이다. 성경의 기자들은 이 사건들을 직접 목격했던 시간과 가까웠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처럼 역사적 사실들을 정확하게 기술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솔은 목격자의 증언에 뿌리를 둔 성경 기록이 역사적으로 정확하다는 또 다른 사례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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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and notes

1. Of course, this general claim allows for the possibility, consistent with inspiration, of later textual updating and the addition of later editorial comments. 

2. Wood, B.G., The rise and fall of the 13th century Exodus–conquest theory, JETS 48(3):475–489, 2005. 

3. For more details on the date of authorship, see Keil, C.F. and Delitzsch, F., Biblic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Joshua, Introduction, 1857–1878, sacred-texts.com. 

4. Na’aman, N., Canaan in the Second Millenium BCE, Collected Essays, vol. 2, p. 378, Eisenbrauns, Winona Lake, IN, 2005. 

5. Bates, G., Egyptian chronology and the Bible—framing the issues, creation.com/egypt-chronology, 2 Sep 2014. 

6. Wood, B.G., David Rohl’s revised Egyptian chronology: a view from Palestine, Bible and Spade, Summer 2001. 

7. For the synchronisms between the Amarna letters and the early Judges period, see Waterhouse, S.D., Who are the Habiru of the Amarna Letters? J. Adventist Theological Society 12(1):31–42, 2001. 

8. Ben-Tor, A., Hazor: Canaanite Metropolis, Israelite City, p. 189, Israel Exploration Society and Biblical Archaeology Society, Jerusalem, Israel, 2016. 

9. Yadin, Y., Hazor: The Head of all Those Kingdoms, Oxford University Press, London, p. 8, 1972, quoted in Petrovich, D., The dating of Hazor’s destruction in Joshua 11 via biblical, archaeological, and epigraphical evidence, JETS 51(3):489–512, 2008. 

10. Goren, Y., Finkelstein, I., and Na’aman, N., Inscribed in Clay—Provenance Study of the Amarna Tablets and Other Ancient Near Eastern Texts, p. 226, Tel Aviv: Sonia and Marco Nadler Institute of Archaeology, Tel Aviv University, 2004. 

11. Ben-Tor, A., Ref. 8, p. 104.

12. Ben-Tor, A., Ref. 8, p. 143. 

13. Ben-Tor, A., Ref. 8, pp. 65, 117. 

14. Ben-Tor, A., Ref. 8, p. 189. 

15. Many archaeologists attribute this 13th century destruction to Israel under Joshua’s leadership. However, the dating suggests this was instead during the time of the Judges, perhaps under Barak and Deborah (Judges 4). There was an earlier destruction that may be attributed to Joshua. See Petrovich, D., The dating of Hazor’s destruction in Joshua 11 via biblical, archaeological, and epigraphical evidence, JETS 51(3):489–512, 2008. 


*참조 : 여호수아서의 하솔에 관한 기록은 정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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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로니아 점토판에 성경 속 인물이 언급되어 있었다. 느부갓네살 왕의 환관장 살스김의 이름이 새겨진 점토판의 발견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36&bmode=view

왕비 이세벨의 고대 인장이 발견되었다.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37&bmode=view

성경 속 이름의 인장이 예루살렘에서 발견되었다. : 느헤미야에 기록된 데마의 인장은 성경의 고고학적 정확성을 입증하였다.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40&bmode=view

이집트 왕 시삭에 대한 어떤 증거가 발견된 적이 있는가?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50&bmode=view

예언자 발람의 존재를 증명할 어떤 고고학적 증거가 있는가?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52&bmode=view

스바 여왕 : 솔로몬은 이집트 파라오의 방문을 받았는가?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45&bmode=view

솔로몬 왕이 건설했을 가능성이 있는 성벽이 예루살렘에서 발견되었다.

http://creation.kr/archaeology/?idx=1288765&bmode=view

솔로몬 왕의 구리광산에 대한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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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를 찾아서 1, 2

http://creation.kr/BiblenHistory/?idx=1288911&bmod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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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삼성퇴의 청동나무 : 창세기를 묘사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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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알려지지 않은’ 신에 대한 기원 : 고대 상형문자인 한자 속에 나타나있는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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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성전 시대의 저수조가 예루살렘에서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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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역사를 확증해주고 있는 고대 앗수르 유물. 대영박물관에 있는 성경의 고고학적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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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벳 퀘야파에서 발견된 유대인의 제례 예식의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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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히브리 문자가 해독됐다 : 성경 기록의 역사적 사실성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

http://creation.kr/BiblenHistory/?idx=1288982&bmode=view


출처 : Creation 42(3):14–16, July 2020

주소 : https://creation.com/hazor

번역 : 미디어위원회

미디어위원회
2020-05-14

여호수아의 파괴 이후의 여리고 성 : 성경과 고고학의 일치.

(Jericho after Joshua’s destruction 

The match between the Bible and archaeology)

Keaton Halley


독자 B.R.은 “여리고 성”에 관한 질문을 보내왔다 :

안녕하세요? 여호수아 시대 이후에 다시 재건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는, 멸망한 도시인 여리고에 대해서 저에게 말해 줄 수 있을까요? 감사합니다.

----------------------------------------------------------------

CMI–US의 키톤 핼리(Keaton Halley)가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B.R.

성경과 고고학의 조화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내용을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 이 주제는 내 관심사이다.


당신의 질문은 분명히 이 구절과 관련되어 있다 :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그의 맏아들을 잃을 것이요 그 문을 세울 때에 그의 막내아들을 잃으리라 하였더라” (여호수아 6:26)

여호수아와 그의 군대가 여리고 성읍을 불태운 뒤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그 성읍을 재건하지 말 것을 강력하게 말하면서, 만약 그 일을 하는 사람은 그 과정에서 장남과 막내 아들을 잃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여호수아가 성 주위를 행진할 당시의 고대 여리고 성의 성벽. 고고학자들은 이 돌들의 기저부에 쌓여져있는 진흙 벽돌들을 발견했는데, 이 벽돌들은 성 위쪽에 세워져있던 내벽에서 떨어져 내린 것들이다. <Deror_avi, Wikimedia commons>


                  성경은 그 도시가 이후에 재건된 적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다루기 전에, 1999년 Creation 지에 실린 훌륭한 글인 ‘여리고의 성벽(The walls of Jericho)’을 읽어보기 바란다.(아래 번역 글 참조). 많은 세속적 고고학자들은 여호수아 시대에는 여리고 성에 사람이 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도시의 멸망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가 여호수아가 도착하기 1세기 전에, 이미 그 도시가 파괴되었음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대표자였던 윌리암 데버(William Dever)는 “여호수아는 그곳에 이미 없어진 도시를 파괴했다!”라고 놀림조로 말했다.[1] 그러나,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 글은 여리고의 멸망이 왜 여호수아 시대(도자기 형태의 증거)로 연대가 결정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고, 고고학적으로 유물의 연대가 올바르게 결정된다면, 고고학이 어떻게 성경의 기록을 강력하게 확증해주는지를 보여준다.

.고대 여리고 성이 있던 텔(Tel, 언덕)


다음은 성경과 일치하는 증거에 대한 요약이다 :

▶ 여리고 성은 강력한 요새였다.(수 6:1,5)

▶ 여리고 성은 이스라엘 군대가 하루에 7번 돌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 (약 9 에이커) (수 6:15).

▶ 여호수아 6:5절에서 알 수 있듯이, 여리고 성에 세워져 있던 내성벽 및 외성벽의 진흙벽돌들은 바깥쪽으로 무너져 내려서, 경사면 아래로 떨어졌으며, 텔(언덕)의 기저부에 쌓여졌다. 이것은 공격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 6:20절에 묘사된 대로, 똑바로 성 안으로 위로 올라가(went up into the city) 들어갈 수 있게 해주었다.

▶ 성벽이 무너진 후에, 도시는 불에 탔다.(수 6:24). 불에 탄 밀(wheat)로 가득한 항아리를 포함하여, 1m 두께의 재와 파편들이 도시의 여러 구역에서 발견되었다.

▶ 곡식이 가득 찬 채로 불에 탄 항아리들은 밀의 수확 직후에 공격이 일어났으며(수 3:15), 포위가 짧았으며(7일), “여호와의 집 곳간”에 두었던 은금과 동철 기구(수 6:24), 아간이 개인적으로 빼돌린 것(수 7:21)을 제외하고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도시를 점령한 후에 약탈하지 않고, 모든 것을(곡식도) 불로 태워버렸다는 성경의 기록을 뒷받침한다.

▶ 성 아래 지역(내성벽과 외성벽 사이)의 일부 주택은 성벽(외성벽) 위에 지어졌는데, 이는 라합(Rahab)의 집에 대해 성경이 묘사하고 있는 것과 정확히 같다(수 2:15). 적어도 한 군데 지역에서 진흙벽돌의 성벽은 붕괴되지 않았는데, 라합의 집은 성벽에 붙어 있었음에도 보존되었다는 성경의 기록과 일치한다.

우리는 방사성탄소 연대측정 결과에 의해서, 여리고 성의 파괴가 여호수아 시대보다 이전 연대에서 일어났음을 가리킨다는 주장에 대해 반박했었다. 방사성탄소 연대측정법은 보정(calibration)이 필요하고, 연대가 현저하게 줄어들 수 있는 많은 요인들이 있으므로, 여리고에서 발견된 이집트 쇠똥구리(scarabs)와 도자기(pottery)의 연대가 충돌할 때, 방사성탄소 연대를 결정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2] “탄소 연대의 보정(Calibrating carbon dating)”, "얼마나 오래 되었는가? 고고학이 성경과 충돌할 때(How old? When archaeology conflicts with the Bible), 탄소연대 측정은 무엇인가?(What about carbon dating?)를 읽어보라.

당신의 주된 질문으로 돌아가서, 성경은 여리고 성이 멸망된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려주고 있는가? 사실, 성경은 도시가 결코 다시 재건되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여호수아의 저주는 단지 여리고를 다시 건축하는 자는 아들들의 생명을 대가로 치를 것이라는 것이었다. 여리고는 여호수아의 예언이 성취됐던 시대를 포함하여, 성경적 역사에서 여러 차례 언급되고 있다.

여리고는 또한 ‘종려나무의 성읍(City of Palms)’으로 알려져 있다.(신 34:3, 대하 28:15). 그곳은 오늘날에도 오아시스가 있는 곳으로,  여전히 많은 종려나무들이 자라고 있다.(과거에 기후가 좋았다면 더욱 많은 종려나무들이 있었을 것이다).  사사(Judges) 시대에 모압(Moab) 왕 에글론(Eglon)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종려나무의 성으로 데려가는 연합을 조직했으며, 왼손잡이 에훗(Ehud)이 구원할 때까지, 모압인들은 18년 동안 그들을 억압했다.(삿 3:12~30). 에글론은 일종의 주거용 건물에서 살해되었으며, 여리고(종려나무 성읍)의 점령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삿 3:13) 에글론의 건물이 여리고에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에글론은 여리고를 건축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의 저주로 고통 받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도시를 제대로(기초와 문들) 건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 장소에 다소 고립된 종류의 궁을 세웠다.

이것은 우리가 고고학적 기록에서 얻은 증거들과 잘 어울린다.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멸망시킨 후에 그 도시는 얼마 동안 버려졌다. 부지가 비어있는 동안 침식의 증거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정상 근처에서 비교적 고립되어 있었지만, 실제적인 건물(약 14.5×12m)이 발견되었으며, 이것의 연대는 BC 14세기 후반 또는 BC 13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3년에 궁 같은 건축물을 발굴한 존 가스탕(John Garstang)는 이를 '중간 건물(middle building)'이라고 불렀다. 이 시기에 도시는 전체가 재건되지는 않았지만, 북쪽에는 벽, 바닥 및 화로와 같은 몇몇 다른 구조물들이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동일한 시기에 세워졌던 것으로 평가되었다. 중간 건물과 관련하여 비싼 수입된 도자기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그곳의 거주자가 매우 부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구조물은 단지 한 세대 정도 후에 버려졌고, 그 후에 텔(Tel)의 추가 침식이 일어났다. 그것은 에글론의 궁일 수 있다.[3]

.여리고의 “중간 건물”– 아마도 모압 왕 에글론의 궁(Eglon’s palace)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서연구협회(Associates for Biblical Research)>

.기원전 15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여리고의 2색 도자기(bichrome pottery) <APXAIOC>


도시 자체는 아합왕 시대(BC 9세기 경)까지 재건되지 않았다. 성경은 히엘(Hiel)이라는 사람이 이 시기에 여리고를 재건했으며 여호수아의 저주로 고통을 받았다고 알려준다. 열왕기상 16:34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그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성문을 세울 때에 막내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고고학적 기록에 의하면, 여리고가 BC 9~10세기에 재건되었다는 증거가 있다. 그러나 오늘날 동쪽 경사지에 있는 이스라엘 형식의 집을 제외하고, 철기시대 여리고의 유적은 거의 없다. 이곳 여리고는 신약시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예수님께서 두 명의 맹인을 고치시고(마 20:29~34), 삭개오(눅 19:1~10)를 만났을 시기에도, 사람들이 거주했다.

따라서 여리고는 영원히 폐허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고고학적 기록에 따르면, 도시가 재건되지 않았던 기간이 오래 있었으며, 여리고에 대한 모든 성경적 언급이 있을 때 나타나는 묘사와 일치한다. 나는 이러한 사실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신뢰하는 데에 격려가 되기를 바란다.


평안하시길

키톤 핼리(Keaton Hal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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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rther Reading

 Archaeology Questions and Answers


References and notes

1. Dever, W., Recent Archaeological Discoveries and Biblical Research, p. 47,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Seattle, 1990.

2. Wood, B.G., Did the Israelites conquer Jericho? A new look at the archaeological evidence, Biblical Archaeology Review 16(2), March/April 1990.

3. Wood, B.G., From Ramses to Shiloh: Archaeological discoveries bearing on the Exodus–Judges period, April 2008, biblearchaeology.org/research/conquest-of-canaan/2403.


*참조 : 여리고의 성벽 : 고고학적 확인에 의하면 여리고성의 벽은 정말로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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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CMI, 2020. 4. 4. (GMT+10)

주소 : https://creation.com/jericho-archaeology

번역 : 미디어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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